연애의 목적은 무엇일까?라고 생각하면서 영화를 보진 않았다. 제목이라는 것은 영화의 전체 맥락을 설명해주기도 하지만 때로는 영화를 이해하는데 방해물로 작동되기도 한다. 그래서 나의 영화보기는 영화를 보기 전과 본 후에만 영화제목을 머릿속에 남겨둘뿐 영화를 보는 동안에는 기억 속에서 지워버린다.

이 영화는 홍보전략으로서도 연애의 목적은 무엇인가에 대한 다양한 사람들의 서로 다른 정의들을 내세웠다. 그러나 영화를 본 느낌은 연애의 목적은 무엇일까에 대한 궁금증이나 답을 구하려하기 보다는 도대체 왜 연애가 이렇게도 힘든 것일까? 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영화는 굉장히 노골적인 대화들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그런 노골적인 표현들 때문에 영화의 질이 떨어진다거나 고개를 돌려버리고 싶다고는 평가될 수 없다. 솔직한 감정의 표현과 연애의 진행과정이 잘 녹아들어가 있으면서 남녀가 서로 끌고 당기는 과정이 담겨 있어 오히려 맛깔스럽다. 더군다나 생각지도 못한 반전이 있으니 이건 덤이지 않겠는가? 좀 아쉽다면은 그런 반전을 끝까지 밀고 나가지 못하고 사랑과 연애에 대한 신화적 힘에 굴복해버린 결말이라고 할까? 

그럼, 영화를 보면서 느꼈던 비애감을 이야기해보자. 이렇다할 연애 한번 못해본 사람으로서 연애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이야기를 하려다보니 조금 낯간지럽다. (아~이런 현실이 오히려 나에겐 비극이다) 남녀가 만나 좋아하는 감정이 생기는 것은 당연한 사건(?)이다. 그런데 세상은 그렇게 감정대로 흘러가도록 놔두지 않는다는 점에서 문제는 발생한다. 즉 서로 좋아하면 다른 모든 것은 아무 상관이 없다면야 좋겠지만 사회라는 것 속에서 그 감정은 항상 주위와 어떤 관계를 형성할 수밖에 없다. (불륜이라는 것도 결혼제도라는 것이 없다면 성립되지 않을 사랑의 감정이지 않겠는가?) 둘만 존재한다면 무슨 상관이랴만 남녀는 각자의 사회적 위치에서 만나는 것이고, 그 위치가 바로 사랑의 장애물이 된다. 더군다나 사랑이라는 감정은 호르몬의 작용으로 길어야 2년반 정도라니...(영화 속에서는 3개월이냐 3년 이냐로 다툰다)

감정에 충실하다보면 실제로는 우리가 사랑이라는 말하는 것은 항시 한시적이 되고, 또 둘이 똑같이 생겼다 똑같이 없어지는 것도 아니니, 꽤 복잡해지겠다. (사랑의 감정이 한명이 아니라 이사람 저사람에게 시도 때도 없이 일어난다면 어떡하겠는가?) 즉, 둘만의 사랑이라는 것도 그리 간단치만은 않은 문제인 것이다. 아무튼 영화 속에서 보여지는 사랑 속에서는 둘만의 문제로 끝나지지 않는다. 조교와 학생의 사랑, 선생과 교생의 사랑은 더군다나 사회적 위치에서 어떤 서열감을 드러내고 있어 더욱 복잡해진다. 즉, 사랑과 함께 힘이 작용하는 균열의 틈이 보인다는 것이다. 둘만의 사랑에서 보이는 틈이 아니라 그들을 둘러싼 사람들이 만들어가는 틈으로 인해 결국 힘의 역학관계로 빠져들게 된다. 그래서 사랑은 끝내 힘에 굴복해 아름다운 종말을 고하지 못하고 처참해진다.

그래서 이 영화는 연애의 목적을 말하기 보다는 연애의 힘듬을 말하는 것이며, 바로 그 힘들다는 것으로 인하여 연애의 목적은 아무것도 아니거나 그 어느 것도 대체할 수 없는 무엇이 되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렇게 힘든 연애를 해야만 할 이유는 없을테니까 말이다. 따라서 아무 것도 아닌 것에 또는 세상의 모든 것에 모험을 할 수 없는 사람들은 연애가 아니라 결혼을 하는 것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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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6-06-06 2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귀여운 박해일.. 능글맞은 그 표정이 생각나요..

하루살이 2006-06-07 09: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기대되는 배우죠.
 

종말에 대한 두려움은 기독교 세계관을 지닌 서구인들에겐 요한 게시록을 통해서 종종 드러나곤 한다. 기독교에 대한 문외한임에도 워낙 자주 영화의 소재로 요한 게시록이 등장한터라, 그 내용을 따라잡는데 큰 어려움은 없는듯이 보였다.

뤽 베송이 각본을 맡은 이번 영화는 이야기가 전개되는 동안 상당히 잘 짜여진 얼개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했다. 7개의 봉인이 뜯겨지면 종말과 관련된 무엇인가가 나올 것이라 여겨졌고, 그것에 대한 궁금증도 증폭되어졌다. 그리고 왜 현재 그 보물을 꼭 찾아야지만 하는지에 대한 궁금증도 쌓여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오히려 이것은 종말과 관련되기 보다는 '주의 서책'이라는 보물로서 인식되어지고, 다시 그것은 새로운 유럽을 탄생시키겠다는 힘의 상징처럼 보여지기도 한다. 또한 그 7개의 봉인을 뜯어가는 과정과 예수의 12제자 죽음이 맞물려 있는듯 보여지면서도, 도대체 12제자와 봉인과는 어떤 관계인지가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음으로써 혼동을 가중시킨다. 즉 봉인과 12제자의 관계는 실제로 우연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기에-12제자로 이루어진 신자집단이 우연히 고대 성당을 구매함으로써, 그리고 그 중 미장이가 새로 건물을 단장하면서 우연히 보물이 놓여져 있는 곳을 발견함으로써 이야기가 시작된다는 점에서- 살인자와 피살자간의 관계가 필연적이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이 둘의 관계가 예정되어져 있는 모양 필연적인 모습을 갖추어져 나가고 있는 것처럼 그려지고 있다는 점에서 촘촘한듯 보여졌던 이야기의 구조가 느슨하게 풀어져버린다.

게다가 또 그 맥없는 결말이란 무엇이란 말인가? 인디아나 존스류의 보물을 찾는 탐험을 그리고 있는 것도 아니면서 마치 그 마지막 결말만 가져오는 듯한 모양을 지니고 있다. 즉, 보물을 지켜내기 위한 여러가지 함정들이 하나도 존재하지 않으면서 마지막 결정적인 함정의 모양새만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오히려 황당무계하기까지 하다.

액션장면은 또 어떤가? 총알세례를 퍼붓는 장면은 나름대로 묘미를 갖추고 있다. 하지만 물이 쏟아지는 것을 피하기 위해 도망치다 약물을 먹고, 헐크처럼 힘을 내는 장면은 관객이 미리 예상하도록 유도해놓고도 코미디처럼 느껴져버린다. 게다가 초반 쫓고 쫓기는 장면에서 마치 우롱하듯 주인공 형사를 가지고 노는 듯하는 살인기기 전사는 도대체 그 의도를 파악하지 못하겠다. 급박한듯 보여지다가도 갑자기 코미디처럼 느껴져버림으로써 액션의 긴장도는 떨어지게 마련이다. 물론 조였다 풀었다 하는 리듬을 타기 위한 것이라면 다행이겠지만 그렇게 이해하기에는 넓은 아량이 필요하다.

억지로 끼워맞춰진듯한 이야기의 틈새들을 쳐다보지 않고 그냥 전체 그림만 느긋하게 즐긴다면 그럭저럭 볼만한 영화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내 그 조각들의 거친 선들이 눈에 보이는 사람들에겐 조금은 맥없는 영화일듯하다. 영화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 무엇이었는지조차 가물가물해져버리는 아쉬움이 많이 남는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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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한 사람은 없지만 그 결말이 비극인 경우가 있다. 그래서 도덕을 얘기하는 것이 세상을 모르는 순진한 이야기로 비쳐지기도 한다.

캘리포니아의 한 바닷가. 캐시는 아버지가 물려준 집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 한다. 다소 무기력한듯 보이지만 그래도 출발할 둥지는 있다. 그러나 사소한 법적인 잘못으로 집은 경매에 넘겨지고, 설상가상으로 몇일 후 아무것도 모르는 어머니가 집을 찾아오겠다고 한다. 보아하니 마땅한 직업도 없어 수입이 있는 것도 아니고, 남편과도 이혼한 처지이니, 집을 되찾을수는 있을련지 모르겠다.

이란에서 정치적 소용돌이를 피해 미국으로 건너 온 베라니 대령. 하루 온 종일 일을 하며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진다. 낮에는 도로포장의 인부로, 저멱에는 가판대 판매상으로 쉴 틈이 없다. 가족들은 가장이 무슨 일로 자신들을 풍족하게 먹여살리는지 알지 못한다. 대령의 마음 속엔 과거 카스피해에서 머물렀던 별장만이 가득하다. 그래서 삶의 재기를 위해 경매에 나온 캐시의 집을 싸게 사게되고, 어느 정도 손을 본 후 비싸게 되팔 생각이다.

즉  이 영화는 집을 둘러싼 이야기다. 삶의 기쁨, 슬픔, 무력함, 우울함, 도전정신, 의지, 두려움, 공포 등이 모두 녹아 있다. 캐시는 어머니가 오기 전 집을 되찾으려 하지만 베라니 또한 투자의 결실을 거두지 못한다면 고단한 삶의 여정을 끝낼 수가 없다. 정말 누군가의 잘못도 아니지만 그들은 충돌할 수밖에 없다. 캐시는 점차 무력감에 빠져들고, 자살을 시도한다. 베라니는 그녀의 자살을 막고, 상처입은 새라 생각하며, 자신의 꿈을 포기하고, 집을 돌려줄거라 생각한다. 그러나 세상의 삭풍은 선한 의지만으로 막을 순 없는가보다. 캐시를 도우려했던 레스터라는 경찰(아이가 둘이나 있지만 친구같은 아내로 인해 권태감에 빠져있다. 아내를 버리고 캐시를 사랑하고자 도망을 선택한다)이 끼여들면서 사건을 뒤엉키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내 해결책을 찾아내고, 원래의 집값을 경매인에게 받아서 돈은 캐시가 받고, 집은 대령이 차지하기로 한다. 그리고 자신의 꿈인 아들과 함께 돈을 찾으러 나서는 길, 뜻하지 않은 사고가 발생한다.(사고의 내용을 밝히는 것은 스포일러가 될 듯. 영화 중 가장 안타까운 장면이다) 눈물만이 가득찬 집. 세상은 온통 고요하다. 대령의 가족은 아마도 카스피해안으로 찾아갔을련가?

삶에 대한 의지만으로도, 선에 대한 믿음으로도 세상의 비극을 바꾸어내지 못했다. 그들의 마음 속에 아름다운 석양과 바다를 내다볼 수 있었던 집은 모래와 안개로 가득차 희미하다. 세상은 맨 몸으로 부닥쳐 살아가기에는 턱없이 힘들고 벅찬 곳이라, 꿈을 꾸어야만 한 숨의 숨을 겨우 쉴 수 있다. 그 꿈이 거창하진 않더라도 지금의 현실을 벗어나게 할수만 있다면 더 이상 바랄게 없다. 그래서 그들의 집에 대한 집착은 쉽사리 포기하지 못할 그 무엇이었을게다. 포기할 수 없는 것, 하지만 포기해야만 해결될 수 있는 것들. 그러나 포기하는 순간 닥쳐올 역경에 대한 두려움. 비극은 바로 한치 앞도 볼 수 없는 미래에서 비롯됐다. 모래처럼 푹 빠뜨리고, 안개에 갖혀 한치 앞도 보여주지 않는 저 망막하고 두려운 인생의 길 앞에, 이제 캐시는 그곳이 자신의 집이 아님을 비로소 고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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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년마다 도봉산이나 북한산에선 추락사고가 일어난다. 얼핏 듣기론 일주일인가 한달에 두명 이상은 사망으로 이어진다고 한 것 같다. 이런 사고의 대부분은 위험지대라거나 접근금지라고 표시된 지역에서 최소한의 안전장비도 없이 오르는 경우다. 아마도 이렇게 오르는 사람들은 자신이 죽을 수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설마 하는 생각에 올랐을 것이다. 죽을 줄 알면서도 라는 것은 오를 때 느끼는 짜릿함의 강도를 극점에까지 끌어다준다. 하지만 이런 극도의 긴장은 아주 짧았을 때만이 그 효과가 극대화된다. 계속되는 긴장은 오히려 죽음에 대한 생각을 무디게 하고, 신경쇠약을 가져올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영화 속 주인공들은 아무도 가보지 못한 남극의 도달불능점을 향해 가고 있다. 그것이 죽음을 건 도박임을 알지만, 이들은 갈수밖에 없다. 극중 송강호가 이야기하듯 그네들은 바로 그런 곳에 갔을 때만이 삶의 희열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그들에게 왜 그런 곳만을 찾아 떠나가냐고 물어보았자, 멋진 대답을 기대하기는 힘들 것이다. 이것은 마치 마약과 같아, 도저히 멈출 수 없는 흥분을 주기 때문에 점점 더 그 자극의 강도를 높여가야만 한다.

영화는 점점 도달불능점을 향해가는 6명의 남자들을 보여준다. 이것은 죽음에의 항해다. 그래서 죽을지도 모른다는 짜릿함이 주는 기쁨과, 그런 역경을 함께 해쳐가고 있다는 동질감의 극치를 기대했을련지도 모른다. 하지만 죽음은 다가오지 않고, 죽음에의 두려움만 나날이 커져간다. 그래서 어느 순간 죽음이 가져다 줄 수 있는 쾌락의 칼날은 무뎌지고, 오히려 그것은 광기로 드러난다. 그러나 영화는 송강호의 광기를 그저 살풀이로 설명하려고 든다. 그런데 또 문제는 살풀이라고 설명하려 들면서 한쪽에다 다른 이유를 덧붙여놓고, 과연 이걸까 저걸까 혼돈시키려 한다는 데 있다. 85년전 영국 탐험대의 일기장, 그리고 아직까지 떠돌고 있는 그들의 영혼이 있음을 암시하면서, 점차 하나둘씩 죽어가는 탐험대들의 죽음에 대해 물음표를 남겨놓는다. 이들의 죽음이 무모한 인간의 도전때문인지, 죽은 자들의 원한인지 영화는 설명해주지 않는다. 그러면 마치, 관객들이 스스로 생각하며, 그 원인에 대해 각자 나름대로 해석해갈 것이라고 생각한 것일까?

불친절함은 불친절을 당하는 대상이 기대했던 친절에 배신당한 충격에 왜? 라는 의문을 품어야 효과를 볼 수 있다. 그러나 잘못된 불친절은 그 대상에게 오직 분노만을 낳게 만든다. 영화는 오직 분노만을 가져오게 만들었다. 그 분노는 해외 로케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세트를 보는 것마냥 관람시간 내내 눈구경만 해야 함으로써 찾아오는 눈의 피로감이며, 인간이 어떻게 광기를 드러낼 수 있도록 변해가는지 지켜보는 즐거움보다는 느닷없는 광기와 갈등상황의 무미건조함으로 말미암은 지루함으로 인해서이다. 남극일기 첫 장에 쓰여진 인간의 탐욕이 가져다주는 지옥이라는 글자는 인간의 어떤 탐욕을 말하는 것인지조차 알지 못하겠다. 이미 지옥임이 뻔한 도달불능점에서 그것이 지옥인 것은 인간의 탐욕이라고 말함으로써 또 한번 관객을 우롱하고 있다. 송강호의 목표에 대한 집착은 오히려 씻김굿인것처럼 그려놓고 그것이 탐욕이었기에 그곳이 지옥으로 변했다는 설명은 얼토당토않다.

이것저것 마구마구 뒤죽박죽으로 놓여진 그물코들은 벼리가 없기에 재미라는 월척을 잡아채지 못했다. 지루한 영화, 하마터면 잠들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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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워즈의 마지막 편. 물론 시간의 순서대로라면 3편이 정답이겠지만, 아무튼 이로써 스타워즈라는 영화의 마지막 문이 닫혔다. 스타워즈를 그렇게 재미있게 본 편은 아니지만, 항상 첨단을 달려가는 그래픽에 대한 동경과, 음향을 제대로 느끼기 위해 개봉관을 찾아가는 습관이 어느덧 들어있어 또다시 지켜보게 됐다. 이번에도 몇 천가지의 그래픽 기술이 동원되었다는데, 에피소드 2와 별반 다른 모습을 찾기는 힘들다. 어떻게 보면 그래픽이 보여줄 수 있는 어떤 한계점에 다다른 것은 아닌가 생각해본다. 물론 이런 한계점을 넘어서는 영화들이 꼭 나타나긴 하지만, 이번 에피소드3는 이렇다 할 비약이나 새로움을 보여주고 있는 것은 아닌 것같다. 다만 이야기가 완결됨으로써 갖게 되는 스타워즈 시리즈의 전체적인 완성도라는 측면에서 지켜볼만한 구석이 다소 있다.

뭐니뭐니해도 이번 3편이 갖는 매력은 다스베이더가 어떻게 탄생되는가 였을 것이다. 다른 할리우드 영화와는 달리 악한이 태생적 악을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니라, 지극한 선에서 악으로 변해가는 모습을 다룬다는 점에서 꽤 궁금증을 자아냈다. 전편의 내용을 다소 잊어먹고, 줄거리가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있지 않은 상태에서도 영화를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은 감독이 이미 관객이 무엇을 요구하고 있는지를 알고 그것에 충실한 덕분이라 여겨진다.

아나킨이 다스베이더로 변해가는 모습은 한 순간으로 표현된다. 갈등의 모습이 조금 비쳐지다가 일단 자신이 선택한 길로 접어든 이상 더 이상 갈등은 존재하지 않는다.(스포일러가 될 듯 하여 자세하게 언급할 순 없지만) 즉 악으로의 비등점을 넘어선 순간, 다시는 선에로의 갈등이 생겨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다소 실망감을 안겨주는 측면이 있다. 그러나 그가 그럴수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동정과 함께, 일단 선택한 순간 자기변명이 됐든 무엇이 됐든 자신의 행동을 올바르다 생각하고 앞으로 나아갈 수 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것도 다소 이해가 된다.

그런데 오히려 생뚱맞게도 영화의 초점인 다스베이더로의 변신보다는 공화국과 분리주의, 그리고 제다이라는 집단과 제국이라는 또 다른 이야기 얼개가 재미를 더했다. 영화를 보면서 자꾸 장이모우의 <영웅>이 생각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리라. 영웅에서는 전쟁을 끝내고 평화를 가져오기 위해서 진시황의 암살을 도모했던 자객들이 모두 그 앞에서 칼을 내려놓는다. 천하가 통일이 되면 평화가 찾아올 것이라는 제국주의적 발상과 힘에 대한 동경을 심어주었던 영웅은, 마치 스타워즈의 시스와 닮아 있었다. 그렇다면 제다이는 아무래도 이연걸과 양조위 등과 같은 자객으로 표현할 수도 있을련지 모르겠다. 물론 시스의 최종 목적이 과연 평화였는지, 권력이였는지는 모르겠으나, 아나킨을 유혹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제국적 힘이었던 것만큼은 확실해보인다. 이에 정면대응한 오비완이 자유와 민주주의에 대한 반역이라며 아나킨을 비난하는 장면은 <영웅>의 찝찝한 기분을 다소 덜어주는 부분이기도 하다.

포스가 애시당초 선의 측면만 가지고 있었다면 아무 문제도 없었을 것을, 힘은 항상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세상이 오직 선과 악으로만 구별된다면야 아무 문제가 없을테지만 선과 악이 섞여 있고, 때론 선이 악이 되고, 악이 선이 되기도 하며, 선과 악의 구분점이 이동하기도 한다. 따라서 포스라는 초자연적 힘 자체가 빛과 어둠이라는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고 보기는 오히려 힘들듯 하다.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사용하며, 그것을 어떻게 해석하는냐가 그 양면성을 드러내 보일뿐인 것이다. 따라서 진정한 포스의 힘을 깨우친다는 것은 악으로부터뿐만 아니라 선으로부터서도 한발짝 떨어져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보기도 한다. 다스베이더로 변신한 아나킨이 오히려 진정한 포스의 힘에 더 근접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다만 그는 사랑에 눈이 멀어, 복수심에 불타고, 탐욕에 대한 집착에 얽매여 있어 한단계 도약을 못이루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제다이들은 오히려 이런 측면에서, 즉 자신들이 어둡다고 생각하는 것들에 대한 완전한 이해에 도달하지 못하고, 그저 피하려고만 한다는 점에서 언제든지 무너질 수 있는 유혹의 선상에 놓여져 있는듯이 보인다. 아나킨 또한 바로 그 유혹의 선상에서 한발을 다른 곳으로 옮겼을 뿐일지도.

어찌됐든 운명조차도 거스르고자 하는 힘에 대한 유혹, 그것이 우리를 어디로 흘러가게 할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갑자기 슬퍼진다. 비극은 바로 운명의 장난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아무튼 스타워즈를 아주 좋아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번 영화는 최초의 3편 즉 루키 쌍둥이들이 어떻게 컸고, 또 아버지인 다스베이더와의 대면이 어떠했는지 다시 한번 보고싶도록 만든다. 아마도 이것은 추억의 힘일련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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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어 2005-05-27 09: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꼭 봐야겠다고 벼르고 있으면서도 아직 시간을 내지 못해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주말에 꼭 봐야쥐..^^ 제다이들과 영웅의 자객들에 대한 비교, 멋지네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