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코미디 영화는 조금도 웃기지 않았다. 정서적 차이인지 문화적 차이인지는 모르겠으나 도대체 무엇이 폭소를 자아내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모니카 벨루치가 주연한 영화 <사랑도 흥정이 되나요?>는 그야말로 폭소의 도가니다. 이제 그 차이의 간격이 좁혀졌기 때문인가? 아니면 혹시 나이를 먹어간 것이 도움이 된 것일까?

아무튼 영화가 시작하면 무언가 어색한 장면들 때문에 웃음이 난다. 영화를 너무 어설프게 찍은것 아냐?라는 의심이 들 정도로 거친 편집이 오히려 웃음을 유발하고 있다. 영화는 남자 주인공이 복권에 당첨돼 몸을 파는 모니카  벨루치에게 자신의 돈이 다 떨어질때까지 매달 (몇십만 유로인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꽤 많은 돈을 지불하는 조건으로 같이 살 것을 제안한다. 모니카 벨루치는 그와의 동거에 쾌히 승낙하지만 얼마지나지 않아 집을 나와버린다. 집안에 갇혀 사는 것은 자신의 천성과 맞지 않다고. 그러다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데 원래 애인이었던 건달 두목이 남자 주인공에게 거래를 제시한다. 영화는 여기서 약간의 반전을 주면서 흥미를 유발한다.

심장 조심하라는 친구 의사가 알고보니 더 심장이 약하고, 왕따 시켰던 회사 동료들이 주인공이 여자와 사귄다는 소식에 모든 관심의 대상이 되고, 창녀라며 손가락질하다가도 너무 예쁘다며 넋을 잃고, 모니카 벨루치의 괴성에 화를 내다가 자신이 더 성적 표현을 잘할수 있다며 유혹하는 옆방 여자며 ...

조금씩 마음 속에 감추고 있는 속내가 드러나는 장면들을 통해 웃음이 폭발한다. 뭐, 어찌보면 "예쁘면 모든게 용서가 된다" 라는 식의 이야기일수도 있겠으나, 까발려진 속내가 자아내는 웃음꽃은 화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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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여우 2006-07-25 2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니카 벨루치라는 아이콘으로 흥행성적을 높이려는 계산된 영화라고 봅니다.
그럼에도 저 미녀가 웃긴다니 남정네들의 고객 확보는 확고하겠군요.
아, 저도 저 미녀의 화보집에 홀딱 빠진 여인네 중 한 명입니다.^^

하루살이 2006-07-26 08: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데 나이 먹은 티가 나더군요. 너무나 안타깝게도...
여전히 매혹적이지만 어딘가 모를 흐트러짐이 누구도 세월을 비껴갈순 없다는 것을 보여준듯 합니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라빠르망의 그녀가 생각납니다. 그래서 청춘은 애타는 것...
 

홍대앞 비보이전용극장에서 <비보이를 사랑한 발레리나>라는 넌버벌퍼포먼스를 봤다.

발레리나가 비보이를 만난 후 스트리트 댄스에 빠지게 되고, 결국 비보이들과 함께 멋진 비보잉을 선보인다는 내용이다. 발레와 비보이라는 상반된 춤을 가지고서 펼쳐지는 이야기는 심장을 두들기는 강력한 비트에녹아들어 사람을 흥분시킨다. 더구나 이 공연은 휴대폰을 꺼 둘 필요도 없고, 몰래 카메라를 감추고 들어와 조마조마해 할 일도 없다. 마음껏 통화하고, 마음껏 사진을 찍을 수 있으니까 말이다.

춤이라는 것도 의사소통의 한 방법이다. 하지만 발레는 우아함으로만 느껴지고, 비보이는 묘기로만 보이는 것은 가장 원시적인 몸짓 언어를 이미 몸과 뇌리에서 잃어버린지 오래이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이번 공연은 비보이를 보며 감탄을 자아내는 것 이상의 그 무엇이다. 발레리나가 스트리트 댄스에 녹아들어 가면서 자신의 정체성에 혼란을 느끼는 장면은 악몽으로 표현되는데, 비보이들이 탈을 쓰고 나와, 음산한 음악 속에 녹아들어 긴장감을 자아낸다. 관중석의 관객들은 마치 귀신을 본듯 비명을 지르기도 한다. 비보이의 동작에 한국적 색채의 음악과 귀신의 이미지가 주는 섬뜩함은 단순한 묘기를 뛰어넘어, 고정관념을 깨뜨리기에 충분하다.



공연 내내 고개를 까딱이고, 박수를 치고, 함성을 지르느라 허기가 질 정도다. 오랜만에 마음껏 내지르는 함성 덕분에 목이 쉴 정도다. 길거리의 춤이 이렇게 훌륭한 무대공연으로 탄생되다니 놀랍다.

바로 코앞에서 벌어지는 비보이들의 몸짓은 사람을 흥분하게 만든다. 나도 한번 저렇게 신나게 몸을 비틀어봤으면 좋겠다는 소망과 함께 과연 저들의 몸은 무사할까 걱정도 깃든다. 하지만 그들의 열정앞에 이 걱정은 그야말로 쓸데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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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도 삶의 한  방식이다. 크게는 사회가 혼란스러울때 기존의 것을 고수하거나, 반대하거나 하지않고 침묵으로 살아가는 것. 실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택하고 있는 선택인지도 모른다. 비록 누구나 스스로는 그렇지않다고 주장하겠지만.

침묵을 비겁하다고 욕할 필요는 없다. 침묵도 자기 표현의 방법일뿐이니까, 흘러가는대로 살아가겠다는 수동적 삶의 표현일수도 있겠고, 아무리 외쳐도 세상은 변하지 않는다는 회의주의자임을 알리는 방식일 수도 있다.

사회가 아닌 개인적 삶으로 시선을 맞춰보자. 학교에서 회사에서 얼마나 많은 침묵으로 일관했던가? 침묵은 금이라고 배우지 않았는가? 하지만 진정 침묵해야 할 때와 침묵하지 말아야 할때를 생각하지 않고 그와는 오히려 정 반대의 선택을 하는 경우가 허다했을 것이다.

침묵은 어려운 것이다. 그러나 가장 손쉬운 방법 중의 하나일 수도 있다.

<데이지>에서는 거리의 화가 혜영과 인터폴 정우, 킬러 박의의 엇갈린 사랑과 운명을 그리고 있다. 킬러로서 사랑하는 사람 앞에 나서지 못하는 박의, 사랑조차도 거부해야 하건만 혜영을 사랑하는 마음을 지울 수는 없다. 그래서 매일 그녀 앞에 남모르게 데이지 꽃만을 놔두고 사라진다. 정우는 국제 마약조직망을 수사하기 위해 혜영을 이용한다. 하지만 혜영은 정우를 데이지의 남자라고 오해한다. 정우는 사실을 밝혀야 하지만, 끝내 침묵으로 일관한다. 오해는 사실로 굳어지고 비극은 바로 이 부분에서 시작한다. 혜영을 지키고자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고 마는 박의와 그에 맞설수 밖에 없는 정우.

비극의 출발은 바로 침묵에 있었다. 엇갈린 운명과 사랑에 대한 이야기는 나에게 마치 침묵의 우화처럼 보였다. 아름다운 영상과 읊조리는 대사들 사이에 계속되는 독백들은 침묵의 다른 이름들이다. 그리고 침묵의 다른 성격들이기도 하다.

미안해요, 당신을 알아보지 못해서.

결국 말할수 없는 , 침묵을 강요당할수밖에 없는 처지의 박의와 침묵함으로써 유리한 위치에 서게 된 정우 모두 비극적 결말로 치닫게 된다.

사랑은 말해야 하며, 침묵은 오해를 눈덩이처럼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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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은 인간의 이기심 때문에 발생하는 것일까? 영화를 보면서 힘의 균열이 바로 폭력의 씨앗인 것은 아닐까 생각해보게 된다. 물리적 폭력이든 성폭력이든, 심리적 폭력이든 그 힘의 우열이 확연하게 드러나는 순간 비로서 폭력은 기지개를 피는 것이다.

영화는 상황극이다. 영화적 표현보다는 오히려 연극적 요소가 강해 무대에 올려진다면 훨씬 나은 작품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성악과 교수와 제자가 뮤지컬 오디션을 보고 서울로 향하다 우연히 들어서게 된 낯선 곳. 군대시절 폭력에 의해 귀가 멀고 정신까지 이상해진 돼지 사육자와 고등학교를 퇴학당한 아이, 왕따 당하는 고등학생, 선량한 얼굴을 하고 있지만 겁을 상실하고 폭력을 휘두르는 청년이 이곳에 모임으로써 일이 꼬이기 시작한다.

교수라는 직분과 뮤지컬 오디션 채점자로서의 권위를 앞세워 제자를 성추행하려다 실패하는 모습 속에서는 뉴스 속에서 항상 접하는 것들이라 오히려 무감각하고 지레짐작 할 수 있는 부분이다. 하지만 동네 청년들의 모습을 보자마자 선입견에 꼼짝달싹않는 교수와 혹시 죽지 않았을까 과잉 친절을 베푸는 청년들 속에서 웃지못할 폭력의 전초가 시작된다. 목소리로 먼저 힘이 셈을 과시해보지만, 손에 들고 있는 돌멩이를 보고 떠는 바람에 본모습을 들켜버린 교수나, 왕따 당하던 고등학생이 무지막지하게 얻어맞다가 어느 순간 자신이 생각보다 강하다는 것을 알게 되고 나서 변하게 되는 상황, 경찰이라는 직분이 주는 힘을 이용해 사용하는 폭력 등등. 그들의 폭력은 철저하게 힘의 논리에 의해 유발되고 있다.

그리고 그 근간엔 질긴 인연을 숨기고 있는데, 이게 영화의 결말을 게운치않게 만든다. 순환되는 복수의 고리, 인과응보라는 결말. 차라리 현실이 그렇게 인과응보적이라면 폭력도 불사하고픈 심정이 꿈틀거린다. 반대로 모든걸 용서할 수 있는 아량을 평범한 사람이 지니고 산다는 것 또한 얼마나 어려운 일이란 말인가? 복수도 용서도 힘든 보통 사람들에게 영화는 어떤 의미로 다가설까? 애시당초 복수의 씨앗을 키우지 말자는게 정답인듯 보인다. 아니면 차라리 아주 강한 사람이 되거나 그것도 아니면 바보가 되는 수밖에.

잔혹과 코믹을 내세운 영화같지만 잔혹 쪽이 훨씬 강하게 인상을 풍긴다. 아무래도 그것은 연기자들의 제대로 된 연기 덕분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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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어둠의 대결, 천사와 악마의 대결은 선과 악으로 대변돼 그 내용 전개나 결말 또한 뻔한 경우가 태반이다. 빛과 어둠의 중간에 버티고 서서 어디로 갈지 모르는 주인공이 등장해 갈등을 보여주는 것도 흔해 왠만한 갈등구조를 드러내지 않는한 흥미를 끄는데 한계가 있을 테다. 빛과 어둠은 세상에 공존해야 한다는 결말을 이끌어내는 경우라도 그것이 이성적, 감성적으로 설득력을 지닌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러시아에서 만들어진 판타지 영화 <나이트워치>는 어둠이 세상을 지배할 수밖에 없는 것은 바로 인간의 사악한 생각 그 자체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매트릭스의 현란한 액션과  블레이드와 같은 혼종의 출현을 적절히 짜깁기 한 영화는 너무나 명확한 결말을 드러내 등을 돌리게 되고 만다. 세상을 지배하게 될 어둠의 자식은 바로 나쁜 생각이라니... 얼마나 숨 막힌가? 별의별 상상을 다하는 청소년기를 제외하더라도, 지금 우리 머리 속에는 얼마나 나쁜 생각들이 가득차 있는가? 그런데 그것마저 허용하지 않겠다하니, 숨통을 조여오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착한 생각에 착한 행동으로 일관해야지만 맞이할 수 있는 빛의 세계라는 것이 과연 행복을 가져다 줄 수 있을까? 선한 의지가 악한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  세상이다. 모두가 따뜻한 생각을 가진다면 물론 좋을 것이다. 하지만 그 따뜻함이 누군가에게는 너무나 뜨거워 화상을 입힐 수도 있다. 선한 생각이 선한 세상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상상으로라도 발칙한 세상을 꿈꾸는 것이 보다 나은 세상의 밑거름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발칙함 속에는 현재의 아픔을 이해하는, 또는 자신을 가로막는 실재를 파악하는 힘이 숨어있다. 때로는 현재를 반성하는 계기가 되어준다. 생각을 옥죄지  말자. 세상은 빛으로 구원되는 것이 아니라 어둠 속에서 빛이 존재하기에 구원되어지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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