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랜스포머의 화려한 영상이야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그야말로 최고다. 시시껄렁한 농담들도 웃어넘길만하다. 뚜렷한 선과 악의 대립과 명확한 스토리가 단점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숨막히는 로봇간의 대결장면과 변신 장면은 모든 것을 다 씻고도 남는다.

다만 한가지, 영화를 보면서 의심의 눈길을 보내는 것은 혹시 이 영화가 미국 무기상들의 홍보 전략이 개입된 것은 아닌가 하는 것이다. 실제로 영화 촬영 때 미국 국방부의 전폭적 도움을 받았다고 한다. 이런 생각을 한 것은 트랜스포머에 등장하는 로봇들이 절대적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즉 천하무적은 아니라는 것이다. 현재 갖추어진 무기 체제로도 로봇과의 대결은 가능하다. 그리고 그 무기는 미군이 가지고 있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무기는 공군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A-10 썬더볼트2, 에어포스원, F-117과 미군의 최신 전투기 F-22다. 또 블랙호크라는 헬기를 비롯해 정찰기와 다양한 총기류도 등장한다.

특히 F-22는 샘을 위협하는 가장 강력한 적으로 등장한다. 그런데 F-22는 록히드마틴에서 제작한 21세기 미 공군의 주력 제공기다. 최고속도 마하 2.42에 순항속도 마하 1.5, 탁월한 공대지 능력을 갖추고 있다. 외국에 수출하지 않겠다고 발표하는 등 아무래도 이것이 세계 최강임을 알리는 교묘한 홍보전략으로 보인다. 영화는 이 홍보에 한몫 톡톡히 하고 있는 셈이다.

뭐, 이렇게까지 색안경을 끼고 볼 필요야 없겠지만, 이상하게도 로봇보다 첨단 무기에 관심이 쏠리는 것을 어찌하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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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지니아대 총격사건으로 떠들썩하다. 특히 용의자가 한국계, 정확히 이민 1.5세대라는 점이 주목을 받고 있다. 유학생들이 귀국해야 되지 않는냐, 산업계에 충격이 있지 않겠는냐 등 사건의 본질과는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가 오가고 있다.

도대체 왜 이런 범행을 저질렀을까에 대한 초점도 흐릿하다. 치정에 얽힌 범행이다, 또는 우을증과 같은 개인의 병리석 성격탓이다는 등 이유도 많다.

2002년에 제작된 마이클 무어 감독의 <볼링 포 콜롬바인>을 떠올려야 할 필요가 있을 성싶다.

과연 미국이 아닌 다른 나라였다면 이런 무차별 살인사건이 일어났을까라는 질문도 필요하다. 즉, 치정이든 우울증이든, 한국계든  중국인이든, 아프리카계든 아시아계든 다른 조건을 똑같이 부여했을 때 이런 대규모의 살인사건이 발생할 가능성이 얼마나 있는냐는 것이다.

이 사건이 단순히 1,2명의 사망으로 끝났다면 이토록 큰 반향을 일으키진 않았을 것이다. 그렇고 그런 사건으로 치부됐을 터니 말이다. 사회면 가십거리로 가끔씩 등장하는, 하지만 절대 일어나서는 안될 그런 류의 살인사건 말이다. 즉 문제의 핵심은 대량살인에 있는 것이고, 그것의 원인을 다큐 <볼링 포 콜롬바인>이 어느 정도 설명을 해준다는 점에 있어 새삼 주목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볼링 포 콜롬바인에서도 이런 총격사건의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 끊임없이 질문한다.  TV를 보니 콜럼바인 참사건의 원인에 대해 전문가들은 이렇게 대답한다. "헤비 메탈이죠. 폭력 영화. 사우스 파크. 비디오 게임. 마약. 마릴린 맨슨, ..." 1999년 미국에서 벌어졌던 교내 총격사건 콜럼바인 참사를 일으킨 에릭과 딜란의 집에서 마릴린 맨슨의 CD가 발견됐다고 하던데, 정말 마릴린 맨슨 때문일까? 그 사건을 수사 중이였던 '스티브 데이비스' 보안관은 "걔들이 그 날 아침 볼링을 했대요. 그거 밖엔 몰라요!"라고 말한다.
얼마 후 감독인 무어의 고향 미시간주 플린트시에서 참혹한 총격사건이 또 하나 터졌다. 살던 집이 철거되는 바람에 엄마랑 삼촌 집에 얹혀살던 뷔엘 초등학교 1학년 아이가 삼촌의 총을 학교에 들고 와서는 같은 반 여자아이를 쏜 것이다!

연간 총기 피살자 수. 일본 39명, 호주 65명, 영국 68명, 캐나다 165명, 프랑스 255명, 독일 381명, ... 미국 11, 127명. 도대체 왜 미국만 이렇게 총기 사고가 많은가? 감독은 사건의 원인을 찾아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며 미국 전역과 캐나다를 누빈다. 행복을 추구하는 미국인의 욕구가 왜 이리 폭력으로 얼룩져 있는지에 대한 해답을 간절히 희망하면서.

이번 버지니아대 참사의 용의자 조승희도 권총을 굉장히 쉽게 구입했다고 한다. 영주권자에 특별한 전과기록도 없어 자연스럽게 총을 팔았다는 판매상 또한 이런 일이 벌어질지 몰랐다고 말한다. 하기야 누가 그걸 미리 알고 범행 예상자에게 총을 안팔수 있겠는가. 위험은 항상 도사리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의 신변안전을 위해 총 소지가 가능한 미국의 경우 오히려 밤에 길거리를 걸어다니는 것이 쉽지않다. 총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안전하다면 우리나라의 경우나 일본의 경우엔 굉장히 위험한 나라일 터이다. 하지만 치안 상태는 오히려 그 반대라 할 수 있지 않은가.

무기판매상과 정치권의 연루, 거짓 공포로 대중을 조정하는 정부 등 다시 한번 볼링 포 콜롬바인을 주목해야 할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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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aru 2007-04-18 16: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넵.. 엄마는 공장에 가고.. 아무도 돌봐 줄 사람이 없었던 어린 흑인 소년... 저도 볼링 포 콜롬바인이 생각나더만요.
아무리 끔찍한 죄악이라도... 그것이 일어나고말 수밖에 없었던 뿌리를 이해하고자 노력해야 할 것 같아요.

하루살이 2007-04-18 17: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중파에서 방송 한번 해주면 좋겠죠^^
 



사람의 눈으로 볼 수 없는 것들, 아니 보긴 봤지만 너무 빨리 지나쳐 인식되지 못하는 것들이 있다. 분명 시각의 대상이지만 대상으로 뇌에 입력되지 않은 것들을 '본다'는 것은 경이다.

KBS <스펀지>에서 등장하는 초고속카메라를 생각해보라. 과연 풍선터지는 모습이, 화살이 날아가는 모습이 저러했던지 놀라울따름이다.

영화 <300>은 철저히 이런 시각적효과를 노리고 있다. 스파르타와 그리스, 페르시아에 대한 역사적 고찰을 따지는 영화가 아니니, 이것에 대해 논하는 것은 재미없을듯 하다. 물론 잘못된 고정관념이나 편견, 선입견이 있다면 따져볼 일이다. 그건 역사에 관심많은 다른 이들에게 맡기자. 아니, 영화를 본 이 기회에 공부 한번 해보는 것도 괜찮을지 싶다.

본론으로 들어가 <300>은 눈이 즐거운 영화다. 잔인한 화면들이 가끔 눈에 비치지만, 만화를 원작으로 했던 <씬시티>에 비하면 오히려 덜하다. 이런 눈의 즐거움에 굳이 베드신을 덧붙일 필요가 있었는지 하는 부분이 아쉽다면 아쉬움으로 남는 부분이다.

근육질의 남자들, 절대 열세라 불리는 상황, 굴하지 않는 정신, 목표를 향한 냉철한 전진의 자세는 근육질 이상의 것을 보여준다. 슬로우 모션으로 진행되는 전투장면은 그림 한컷한컷이 된다. 전투는 힘과 스피드의 절묘한 결합임을 이 느린 화면 속에서 깨우친다. 특히 중간에 두명의 전사가 호흡을 맞춰 싸우는 모습은 무용을 보는듯 즐겁다. <매트릭스>의 빠른 손발놀림과 반대되는 이런 느린 장면들은 얼마나 많은 호흡을 맞추어, 또는 NG속에서 장면을 찍었을까 상상이 가지 않을 정도로 정교하다. 분명 블루스크린을 뒤에 두고, 혹시 쓰러지는 적군조차 디지털로 형상화됐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그렇다면 더욱 놀라울 일이다. 보이지 않는 적을 대상으로 공중에서 손짓 발짓을 했을터니, 정말 한편의 무용이지 않은가?

원작 만화의 컷을 그대로 옮겨온듯한 화면들. 만화의 장점 중 하나는 그 컷과 컷 사이의 빈 시간을 상상력으로 메꾸는 것도 있다. 영화는 이 상상력을 충분히 채워주고도 남는다. 정말 눈이 호강한 영화다. 아름다운 근육과 아름다운 육체의 몸짓, 더이상의 의미는 없다. 그걸로 족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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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aru 2007-04-09 1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상평도 눈부셔요!

하루살이 2007-04-09 16: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얘기 얼굴에 머금은 미소가 더 눈부셔요.
 

 

촉산이라는 영화를 본 것은 90년대 초반이다. 서극 감독이 스타워즈를 만들었던 할리우드의 특수효과팀을 불러 거대한 예산을 들여 만들었던 블록버스터다. 지금보면 스타워즈보다 더 엉성해 보이지만, 나름대로 무협이라는 소재를 영상으로 자유롭게 표현해낼 수 있다는 측면에서 가치가 있는 영화였다고 보인다. 이 영화는 1983년에 만들어졌다.

그후로 20년 가까이 시간이 흘렀다. 2001년 서극은 <촉산전>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영화를 리메이크했다. 보다 진보된 테크놀로지를 이용해 현란한 화면을 자랑한다. 물론 내용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이 변하면 영화도 변하기 마련이다. 2002년 개봉당시 영화를 보았을때만해도 당시 정이건이 주연했던 영화류의 CG만 눈에 들어왔다. 그런데 2007년 케이블 TV로 다시 본 <촉산전>은 새로운 감흥을 가져다 주었다.

<촉산전>은 무협이라는 겉모습 속에 사랑을 이야기하고 있다. 물론 대부분의 무협물 또한 사랑을 이야기한다. 마초에 가까운 영웅들이 등장하고 이 영웅을 둘러싼 여러 명의 여인들은 당연히 따라온다. 영웅호색. 무협의 바탕이라고 할 수도 있다. 한남자를 둘러싼 여러 명의 여자들이 서로 시기, 질투하기도 하지만, 그들은 타협을 하고 남자 곁에서 사랑을 나누어(?) 받는다. 또는 남들이 쫓아올 수 없는 경지에 오르기 위해 자신의 성정체성을 잃어버리기도 한다. 그래서 그 또는 그녀를 사랑해야 하는 사람은 슬픈 운명에 처하게 된다. 사랑과 슬픈 운명은 또다른 무협의 축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촉산전>은 어떤가? <촉산전>은 중국 오호시대를 배경으로 아미파의 장문 백미가 수제자 단진자(고천락)와 곤륜파의 현천종을 이끌고 마귀의 무리들과 일전을 벌인다는 내용의 무협 판타지물 중국의 고전 <촉산검협전>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
선과 악의 대결, 정의는 승리한다는 큰 줄거리 뒤에는 사랑과 운명이라는 이야기가 함께 숨쉬고 있다.

곤륜파의 장문 고월은 제자 현천종이 자신을 사랑하고 있으며 이로인해 수행에 지장을 받는다는 사실을 알고 괴로워한다. 그때 사파의 장문인 마황 유천이 곤륜산을 공격하러오자 고월은 곤륜의 최대병기인 월금륜을 현천종에게 주며 일부러 피신시킨다. 그리고 그녀는 유천의 공격으로 목숨을 잃는다.
2백년 후. 다시 마황 유천이 세력을 펼치자 각 문파가 하나로 뭉쳐 대척한다. 이때 현천종은 삼위일체의 깨달음을 얻어 마황과 대적할 힘을 얻어야 한다. 그를 도와주는 아미파의 제자 영기는 자신이 사랑했던 고월의 혼 한조각으로 형성된 인물이다. 그래서 자꾸 그녀를 보면 자신의 스승을 떠올리고 애틋한 감정을 느낀다. 그러나 깨달음을 위해선 과거를 모두 잊어야만 한다. 모든 것을 잊어도 끝내 잊을 수 없는 것은 그녀의 얼굴. 결국 깨달음을 얻지 못하고 화염에 쌓인다. 그러나 아미파 백미의 도움으로 다시 부활하고 깨달음을 얻는다. 마침내 마황을 격퇴하지만 그와 함께 영기도 산산히 부서진다. 200년 전처럼. 영기는 이로써 우리의 인연은 끝이 났다고 말한다. 그때 현천종의 얼굴은 무척 슬프다. 깨달음도 사랑과 운명의 아픔을 초월하진 못한다.

한편 마황의 동굴을 지키고 있던 단진자는 사부의 명을 어기고 동굴앞의 요정을 살려둔다. 사랑과 동정이라는 복잡한 감정때문이다. 하지만 이 요정은 마황과 쌍각을 이루고 있는 마귀. 그녀에게 자신의 영혼을 빼앗기고 만다. 사랑은 때론 영혼을, 그리고 생명을 요구한다. 정의라는 이름으로 친구인 현천종에게 자신과 함께 마귀를 죽여달라고 하는 모습 속에선 나만의 착각이겠지만 다소 행복한 표정도 엿보인다.

한편의 영화이지만 정말 영화는 다양한 표정을 지니고 있다. 우연히 다시 보게된 <촉산전>이 이렇게 다가올 줄은 미처 알지 못했다. 슬픈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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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전무죄, 무전유죄. 법보다 주먹이 가깝다.
보통사람들이야 법하고는 별로 친하지 않다. 살아가면서 법이라는 문제와 부딪힐 일도 별로 없다. 하지만 종종 매스컴을 통해, 또는 주변 사람들로부터, 정말 간혹 자신에게 법이라는 것의 도움을 또는 법이라는 것으로부터 서러움을 당하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법에 대해선 정말 가끔 생각하게 된다. 실제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사회는 법을 근간으로 하고 있음에도 말이다. 그래서 흔히들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사람들이라고 하질 않던가. 정작 법 없이 살았다가는 큰일 날 경우가 허다하지만 말이다.
데스노트는 이런 법에 대해 생각하게 만드는 영화다. 소크라테스의 악법도 법이다라는 명구를 끌어올 필요도 없다. 법은 인간이 살아오면서 나름대로 꾸준히 모든 사람들에게 이익을 줄 수 있는 방향으로 발전되어져 왔다는, 그래서 그 와중에 손해를 보는 사람들이 있다 하더라도 지켜져야 한다는 도덕적- 법적, 이성적 접근이 아니라- 당위성을 확보하게 됐다. 물

론 서두에 말한 것처럼 여전히 법에 대한 불신이 남아있긴 하지만 말이다.
하지만 영화 속 주인공은 이 법에 대해 무력감을 갖게된다. 법망을 교묘히 피해가거나 법의 테두리 밖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이때 자신에게 주어진 데스노트. 이름만 적으면 그 사람이 죽게 되는 살명부다. 전지전능한 힘을 얻게 된 주인공은 키라라고 불리게 되고, 거의 종교적 신에 가깝게 된다. 키라는 데스노트를 이용해 세상의 모든 범죄자를 없애고 이상향을 만들고 싶어한다. 그 반대쪽에 아버지와 L 이 있다.
키라의 등장으로 실제 세계의 범죄율을 70%이상 감소한다. 억울한 사람들이 법으로 호소하지만 해결할 수 없었을 때 노트에 끄적이는 것만으로 그 억울함을 해결한다면 얼마나 통쾌한 일인가.
하지만 영화를 보면서 그 한계선을 찾아볼 수 없다. 도대체 어디까지의 범죄가 죽어야 할 정도의 악질인가. 그리고 그것은 또 누가 판단하는 것인가. 뭐, 이런건 나중에 생각해보기로 하자. 키라는 자신의 이상향을 위해 희생도 감수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희생의 정도가 어느 정도인가가 영화에서 어느 쪽을 편들게 만드느냐를 결정하게 만든다.
문제는 라스트네임이라는 속편에서 희생대상이 정도를 넘어선다는 점에 있다. 과연 키라가 이길 것인가, L이 이길 것인가의 두뇌게임에 몰입하다보니, 그리고 반전만을 생각하다보니 중요한 한가지를 놓쳐버린 것이다. 영화를 보고 있는 관객들 모두가 키라의 패배를 바랄수밖에 없고, 또 패배를 예측하도록 만든다는 점이 영화의 가장 큰 아쉬움으로 남는다. 끝까지 키라를 지지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었다면, 그리고 키라의 고뇌를 바로 나 자신의 고뇌로 생각하도록 했다면 영화는 보다 흥미진진하지 않았을까 싶다.
왜 키라는 이상향을 향한 집착에 빠져 도를 넘어섰는지, 속편에서의 그의 캐릭터는 너무 과장되어져 상식을 벗어나버리지 않았나 하는 아쉬움을 남긴다. 키라가 끝까지 매력적 캐릭터로 남아 있을 순 없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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