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넷인 미혼모. 영화는 도쿄에서 실제 일어났던 일을 소재로 만들어진 픽션이다. 네명의 아이가 주인공이지만 <엄마는 행복해지면 안돼>하면서 떠나버리는 미혼모에게도 왠지 모를 동정이 간다. 물론 12살 아키라에게 모든걸 맡기고 사랑하는 남자와 함께 자식을 내팽개친다는 것이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지만, 이렇게 마음 한편에선 그녀를 이해하는 것은 또 무언가? 가끔 모성애라는 것도 본능이라기 보다는 사회가 주입시킨 하나의 이데올로기가 아닌가 의심해보기도 한다. 발칙하게도 말이다. 어머니의 사랑을 듬뿍 받으면서 자랐으면서도.

어쨋든 아키라, 교코, 시게라, 유키. 이렇게 네 명의 아이는 부모없이 남겨진다. 새로 이사온 집은 이웃들에게 아키라 혼자 있는 걸로 알려져 있기 때문에 나머지 아이들은 밖으로 나다닐수도 없다. 이사올 땐 트렁크와 가방 속에 숨어있다가 튀어나왔었다. 아, 그런데 그 때 비쳐지는 아이들의 천진난만한 미소라니... 그 상황에서 어떻게 웃을수 있을까? 마치 숨바꼭질이라도 한듯이 말이다. 카메라 밖에서 그 상황을 지켜보고 있는 나로서는 도저히 웃을 수 없을것 같았지만 어느새 내 입가에도 미소가 떠오른다.

여기에 영화 속 내용을 구구절절히 이야기하고 싶진 않다. 너무나 안타까우면서도, 순수한 그들의 모습을 마치 다큐멘터리처럼 그려낸 이 영화는 정말 모든 순간순간들이 다 보석이다. 기억 저 깊숙히 간직한 그 장면장면들을 모두 다 기록해보고 싶은 심정이다. 아키라의 눈물, 시게라의 웃음, 교코의 시무룩함, 유키의 어리광... 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몇가지만을 적어본다.

아빠없는 아이들이라 학교에 가봤자 왕따당할 것이라며 학교마저 가지 못하고, 이웃들에게 쫓겨날까봐 없는듯 살아야 하는 아이들에게 외출은 최대의 즐거움이다. 이웃들의 눈치를 살피며 밖으로 나가는 장면에서, 그들이 드나든건 거대한 벽이었다. 임대아파트 사람들과 함께 살기 싫다며 담을 만들어버린 우리네 현실이 얼핏 스쳐지나간다. 학교를 가기 위해 그 담을 넘어야 했던 아이들은 무슨 생각을 하게 됐을까?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그 담이 왜 생겼났는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편의점에서 물건을 사고 잠시 만화책을 보는 사이 아이들이 비닐속에 훔친 물건을 집어넣는다. 아키라는 편의점을 나오다 점장에게 잡혀 도둑으로 몰린다. 다행히 알바생이 아이들의 장난(?)을 목격하고 점장에게 이야기해준 덕에 무사히 나올수 있었다. 점장은 이것을 무마하기 위해 호빵을 몇개 얹어준다. 아~ 이 분노. 도둑으로 몰아놓고 그저 호빵 몇개로 빠져나가려는 어른들의 상술. 라면이나 술병 속에 이물질이 들어간 것을 인터넷어 올려놓으니, 해당 회사가 몇박스나 되는 물품을 보내더라는 뉴스가 생각난다. 상술에 아이들의 마음이 얼마나 다쳤는지는 안중에도 없고, 그저 자신들의 이미지가 나빠져 장사에 방해될까봐만 염려하는 어른들.

물세도 전기세도 내지 못하는 상황에서 아이들은 공원에서 물을 떠다가 먹고 빨래하고 씻으며 생활한다. 먹을 것은 편의점 알바생들의 도움으로 인스턴트 몇가지를 얻어 먹는다. 아이들의 어려움을 이해하고 도와주는 이들이 그렇게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 천만다행이다. 알게 모르게 그렇게 도와주는 손길이 세상에는 분명 존재하고 있기에 그나마 이 땅 위에 온기가 살아 숨쉬고있는 것은 아닐까

학교도 못가는 아키라. 밖에서 방황하다 오락실에서 또래 아이들을 만난다. 하지만 아이들은 그에게 도둑질을 시키고, 아키라는 친구를 잃을 것인지, 양심을 잃을 것인지 고민한다. 이런 도둑질의 갈등은 나중에 또 한번 나타난다. 그리고 또 한번 사귀게 되는 친구. 여중생인 이 친구는 아키라의 집세를 마련하기 위해 원조교제를 한다. 노래방에서 같이 노래 불러준 것 밖에 없다며 곱지 않은 눈으로 바라보는 아키라에게 변명해보지만, 아키라는 매몰차게 돈을 건네는 손을 걷어찬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이 닥쳐오면서 그 돈을 다시 원하게 된다.

그리고 가장 안타까운 모습. 자신이 그렇게 하고 싶었던 야구를 하고 있는 동안, 막내 유키는 그만 의자에서 떨어져 정신을 잃는다. 아키라는 아연실색한다. 하지만 아무 것도 해줄 수 없는 상황. 나는 속으로 계속 외친다. 제발, 제발 병원으로 데려가, 아키라. 제발 데려가 달라고. 부탁이야 아키라. 유키를 살려야지. 제발, 제발...

그러나 아키라는 유키가 싸늘해질 때까지 그저 지켜볼 뿐이다. 유키와 약속했던 비행기를 보여주기 위해 모노레일을 타고 공항으로 향하는 아키라. 유키는 이사 온 동안 커져서 맨 처음 안에 들어갔던 가방보다 더 큰 트렁크 속에 들어가 있다. 공항 빈터. 땅을 파고 유키를 묻는다. 아키라의 손은 심하게 떨린다. 유키를 병원에 데려가면 자신의 처지가 알려지고, 그러면 복지기간으로 불려가 뿔뿔히 흩어질 것을 염려한 아키라. 그가 진정 지키고 싶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영화 종반부 집으로 향하는 그들의 뒷모습이 밝다. 사실 이렇게 적어본 글만 읽어본다면 영화는 어두운 암흑이거나 우울한 블루톤으로 뒤덮혀있을 것 같지만 태양의 환한 빛과 나무 꽃의 밝은 원색들이 가득한 밝은 영화다. 아키라가 지키고자 했던 것은 무엇이었는가를 자막이 올라가는 동안 꾸준히 생각해본다. 모든 것을 다 잃어도 끝내 지키고자 했던 것, 아키라가 그렇게 소중하게 지키고자 했던 그 무엇을 나는 가지고 있는가? 그리고 그것을 소중히 여겨왔던가? 이리저리 핑계대며, 나이 먹어가면 당연한 것이라며, 내팽겨치진 않았는지, 글썽이는 눈물사이로 부끄러움이 스며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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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있어 느와르는 주윤발과 유덕화로 통한다. 유럽의 정통 느와르를 접할 기회가 별로 없었기도 했지만, 고등학교 시절 우상으로 떠오른 이들 덕분에 느와르라고 하는 것의 의미를 알았기 때문일수도 있다. 홍콩 느와르는 파란색의 조명과 어딘지 모를 우울함, 그리고 허무감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 특히 이쑤시개를 입에 꼬나문 주윤발의 입가에 담긴 미소 속에 어딘지 모를 슬픔을 느낀다. 느와르는 나에게 있어 허무함이었다.

영화 <달콤한 인생>도 느와르라는 장르를 표방한 영화다. 그리고 나의 이미지에 걸맞게 영화 속에서는 허무감이 잔뜩 배어져 있다. 영화 초반 선우(이병현)의 독백으로 시작하는 이 영화는 선우의 쉐도우 복싱 장면으로 끝을 맺는다. 초반부 독백은 불교의 선문답이다. 그것이 벽암록의 고승 이야기 였던것 같기도 하지만 정확한 출처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이 선문답은 마지막 부분의 고승의 달콤한 꿈이야기와 겹쳐지면서 허무감을 극도록 끌어낸다.

깔끔한 외모와 그 외모만큼 깔끔한 일처리를 자랑하는 김실장 선우는 강사장의 지극히 개인적인 부탁을 받는다. 자신의 젊은 애인이 혹시 남자가 있는지 감시하고, 만약 그렇다면 조용히 일처리를 해 줄것을 당부한다. 하지만 선우는 강사장의 젊은 애인을 보는 순간 마음의 작은 파장이 인다. 아주 조그만 파장.

스승님 버드나무 가지가 흔들리는 것은 나무가 움직이고 있는 것입니까? 바람이 움직이고 있는 것입니까? 제자야, 그것은 바로 네 마음이 흔들리고 있기 때문이다. 

선우의 흔들리는 마음은 결국 그녀와 애인 모두를 살려두게 되고, 이것을 강사장은 모욕감으로 받아들여 그를 죽이려 한다. 물론 죽이기 전 선우가 잘못을 솔직히 고백하면 살려두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지만 말이다. 그러나 선우는 자신의 그 작은 파장을 자신조차 아직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파장은 이내 커다란 파도로 밀어닥쳐와 끝내 강사장과의 전쟁을 선포한다.

한밤중 제자가 잠에서 깨어나 흐느낀다. 이것을 괴이하게 여긴 스승이 왜 우느냐고 묻는다. 제자는 달콤한 꿈을 꾸었다고 말한다. 그런데 왜 우는것이냐? 그 달콤한 꿈은 현실에서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끝내 현실이 되지 못할 달콤한 꿈. 그 꿈을 꾸는 동안의 달콤함은 잠시 일어난 마음의 파장과 같은 것. 버드나무도 아니요 바람도 아닌 너의 마음이 흔들릴 때 그 흔들림을 끊는 방법은 바로 자기자신의 소멸을 통해서다. 불교의 수행은 바람과 버드나무와 나와의 관계에서 발생되는 움직임의 소멸이 아니며, 움직임 그 자체의 소멸도 아니며, 바로 자기자신의 소멸을 통해서 모든 움직임 자체가 사라지는 것에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선우에게 있어서는 그 자신의 소멸은 절대 불가능하다. 그는 물 위를 바라보며 자신의 모습에 취한 나르시스이기 때문이다.

그가 나르시스임을 보여주는 장면은 마지막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쉐도우 복싱을 하는 장면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그것은 자신이 얼마나 자신을 사랑한지를 보여주며, 그 허공을 가르는 주먹이 자신을 향한 것인지, 창 밖의 불야성 욕망의 도시를 향하고 있는 것인지 모호한 모습 그 자체를 통해 나르시시즘과 허무주의를 모두 표현해내고 있는듯 싶다.

말해봐요. 저한테 왜 그랬어요? 아무리 생각해도 그 이유를 알지못하겠어요. 말해봐요.

아마 선우는 평생을 생각하더라도 알지 못할 것이다. 7년을 섬겨온 보스가 왜 자신을 내치는지 자신은 절대 알 수가 없다. 자기 자신을 사랑한 선우는, 창가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아름다움을 느끼는 선우는 끝내 그 이유를 알 수 없을 것이다. 호수위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빠져 숨진 나르시스처럼 선우 또한 우상화된 자신의 모습에 빠져 끝내 끝을 보아야만 했던 것이다. 허무주의로 향해 가는 그 길의 끝을 그는 결말을 알면서도 끝내 되돌아서지 못하고 앞으로 나아가야만 했다. 그래야지만 비로소 자신이, 자신이 생각하던 그 아름다운 선우였음을 확인할 수 있었을테니까...

크리스터퍼 래시가 70년대 미국사회를 나르시시트의 사회라고 보았듯이 그 사회는 현재 우리 서울의 모습과 닮아있다. 스포츠에 열광하기도 하고, 스타에 광분하며, 자신의 블로그에 영혼을 뺏기는 모습속에서, 나도 우리도 모두 일정 부분 나르시스트임을 인정한다면 선우의 자기애와 그 끝없는 허무에의 질주를 이해할법도 할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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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6-06-06 2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선우의 자기애와 허무에의 끝없는 질주.. 네 이 영화 참 슬펐었죠. 그렇게 소멸을 향해 가고 있는 우리도 나르시스트나 다름 없죠.. 정말 영화를 잘 보시고 잘 쓰시네요. 잘 읽고 갑니다..^^ 편안한 휴일 보내셨는지요?

하루살이 2006-06-07 09: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에게 휴일은 없답니다. 흑흑.
달력의 빨간 날자에 쉬지 않는다는 뜻이죠. 그래도 주일에 하루 쉴 때는 행복^^.
 

인생에 비유되는 건 많다. 연극이 그렇고 바둑도 그렇고 야구도 그렇고... 특히 스포츠라는 것은 그것이 승부가 극명하게 갈라진다는 점에서, 승리를 위해선 엄청난 피땀을 흘려야 한다는 점에서, 훈련의 과정에서 얻는 몸과 마음의 변화를 통해 교훈을 얻는다는 점에서 유사점을 쉽게 찾을 수 있을련지도 모른다. 그래서 스포츠를 다루는 영화들은 끊임없이 나오곤 한다. 특히 복싱은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나라에서도 배고픔과 연관되어져 있는 경우가 많아 인생의 굴곡을 잘 드러내는 소재로 자주 쓰여진다. 헝그리 복서의 헝그리 정신. 현재 우리나라에 챔프가 없다(1명 있나?)는 것은 바로 헝그리 정신이 사라졌기 때문이라는 우스개 비슷한 소리도 결코 쉽게 무시못할 이유중의 하나일련지 모른다.

아무튼 밀리언달러 베이비라는 이 영화도 맨 처음 이런 스포츠를 통한 인생이야기 처럼 보였다. 복싱은 모든게 거꾸로 라는 모건 프리먼의 해석에 잔뜩 어떤 격언들이 쏟아져 나올 것같은 분위기였다. 물론 건질건 있다. 공격을 위해선 한발짝 물러날줄 알아야 한다. 하지만 너무 멀리 물러서면 펀치가 다다르지 못한다.

여기에 한가지 덧붙여지면 그야말로 금상첨화다. 이스트우드가 직접 말하기도 하지만 그의 체육관에 쓰여져 있던 tough ain't  enough.  즉 이말과 위의 말이 합쳐졌을 때 비로소 인생에 대한 훌륭한 교훈을 하나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적당한 거리두기. 용감하게 나아갈때 나아가고 물러설 때 물러설줄 아는 지혜.

그러나 영화는 중반부 서서히 그의 진면목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트레이너 프랭키(클린트 이스트우드)의 훌륭한 가르침으로 매기(힐러리 스웽크)는 승승장구 하고 결국 챔프전까지 도달한다. 하지만 그의 행복을 시샘하는듯한 치명적 사고. 경추와 척추를 다침으로써 신경이 마비되고 식물인간이 되어버린 매기. 이 때부터 관조적 입장에서 바라보던 영화는 점차 감정이입의 격류속으로 흘러간다. 처음엔 매기의 입장에 처해 과연 저렇게 처참한 모습으로 계속 살아갈 수 있을것인가? 가족이라고 믿었던 사람들의 어처구니없는 이기심. 그것보다도 더 큰 복서로서의 꿈의 좌절. 복서가 손가락하나 까딱 할 수 없는 처지에 놓였다는 건 죽음 그 이상의 고통일 것이다. 그 고통이 전이되는 듯 하던 순간, 감정의 흐름은 이제 프랭키에게로 간다. 매기가 자신의 목숨을 끊어달라고 프랭키에게 부탁하면서 이내 프랭키의 고뇌에 같이 휩쓸리게 되는 것이다.

프랭키는 23년을 한결같이 매주 교회에 나간다. 교회에 가서 목사에게 엉뚱한 질문들을 던지는 늙은이. 매주 딸에게 보낸 편지는 반송되어져 문앞에 떨어져 있다.  언뜻 이 상황을 잘 이해못하다가 결국 프랭키가 매기의 생사를 결정해야 하는 순간 목사와 상담하는 과정에서 모든 것을 한꺼번에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치유할 수 없는 상처.

그는 그 상처를 끝끝내 자신으로부터 털어내지 못하고 살아왔다. 그리고 또 다시 그는 23년의 세월로도 치유하지 못했던 그 상처보다 더 큰 상처를 짊어질지도 모를 결단을 내려야한다. 그는 트레이너 이기 전에 유능한 치료사였다. 어떤 상처도 그의 손을 거치면 흐르던 피가 멎는다. 하지만  뼈까지 깊게 파고들어간 상처는 결코 피를 멎게 할 수 없다. 프랭키는 자신의 몸에 그런 깊은 상처를 새기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 또다시 그것보다 더욱 큰 상처를 지니고 살아갈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의 상처는 그녀를 치유해준 영광의 상처다. 오직 복서로서의 꿈을 위해 늦은 나이에도 상관하지 않고 그것만을 향했던 매기. 그녀는 짧은 순간이었지만 영광을 경험했고, 최고의 자리 바로 아래까지, 아니 정말 최고의 자리까지 올라갔으며, 꿈에 도달한 행복을 맛보았다. 그 행복감이 사라지기 전에, 관중의 함성이 잊혀지기전에, 고통스런 인생을 끝낼 수 있다면 그녀는 비록 짧은 영광이고, 짧은 인생이었지만 후회없으리라. 프랭키는 그것을 알기에 자신에게 깊은 상처를 남긴다. 그것은 비록 그들이 피를 나눈 혈육은 아니지만 그것보다 더욱 진한 그 무엇인가로 끈끈히 맺어진 사이였기 때문에 가능하리라. 오! 나의 <모쿠슈라>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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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어 2005-03-26 02: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좋은 글..추천합니다.

하루살이 2005-03-26 0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맙습니다. 프랭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스포일러 성격을 띤 글입니다.

 

반전 영화는 영화가 끝날 때 앞부분을 떠올리도록 만든다. 지금까지 전개됐던 이야기들이 반전을 통해 어떻게 일목요연하게 다른 모습으로 해석될 수 있는지, 무언가 말이 되지 않는 요소는 없는지 살펴보게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그 반전이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거나, 그 결말로 인해 앞의 모든 내용들이 하나로 꿰어 맞춰지면 이내 흡족해한다.

그런데 이 영화, 진 핵크만과 모건 프리먼, 모니카 벨루치가 주연한 <언더 서스피션>은 반전으로 인해 과거를 돌이켜보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의 내용을 생각하게끔 만든다. 영화가 끝나고 자막이 오름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이 영화 속 인물들은 어떻게 될까 하는 궁금증을 자아내게 만드는 묘한 매력을 자아내고 있는 것이다.

대륙으로부터 떨어진 섬. 세금 변호사인 진 핵크만은 13살 소녀의 시체를 발견하고 경찰에 신고한다. 이것은 2주전 12살 소녀의 살해에 이은 연쇄살인 사건이다. 핵크만은 56세때 20살 이었던 모니카 벨루치와 결혼한 사이다. 형사는 2주전 살인사건 현장에서 발견된 핵크만의 자동차와 또 다시 일어난 살인사건의 목격자로 우연히 겹치는 핵크만을 용의자로 생각한다. 더군다나 그에게 심문을 해갈수록, 또 조사를 해갈수록 그가 어린 여자를 좋아했다는 사실을 알게된다. 각방을 쓰고 있는 이들 부부의 불화 원인도 나이 어린 여자 조카에 대한 은근한 눈빛으로 인해 발생했다. 게다가 사진찍기가 취미였던 핵크만의 현상실에서 살해된 두 여자아이의 사진까지 발견된다. 심문은 집요하게 이어지고, 끝내 핵크만은 살인을 자백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조금은 예상가능한 반전. (너무나 쉽게 드러나는 핵크만의 범행동기와 증거들로 인해 오히려 불편한 의심을 자아내게 만든다)

보통 반전은 그저 하나의 충격일뿐인데, 이 영화 속 반전은 충격이라기 보다는 영화의 메시지를 전달한다. 사랑을 정의하는 것은 여러가지이나, 그 중 빼먹을 수 없는 것이 믿음이다. 믿음이 약해지는 자리에, 질투는 자리한다. 그리고 그 질투의 힘은 사랑을 좀먹고, 드디어 파괴시킨다. 영화는 그 파괴성을 드러낸다. 과연 반전으로 드러난 사실로 인해 부부는 행복해질 수 있을까? 금이 간 사랑을 불량품이 되어버린 믿음이라는 접착제로 부서지지 않게 붙여낼 수 있을까? 산산조각나 버린 사랑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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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랑할 땐 사랑한다고 말하라는 <동사서독>을 지나, 사랑도 통조림처럼 유통기한이 없기를 바라는 <중경삼림>을 넘어, 이제는 사랑은 타이밍이라 말하며 왕가위는 <2046>을 내놓았다. 개인적으론 전작보다 훨씬 이해하기 쉬운 영화였다. 그러나 그의 장점이자 단점인 너무나 귀에 쏙쏙 들어오는 음악으로 인해, 초반 넋을 잃고, 이야기를 쫓아가지 못하기도 했다. 영화 속에 나오는 인물들은 모두 이별이라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고 보여진다. 왜 헤어져야 하는지 이유도 알지 못한채 사랑하는 사람과 멀어지기도 하고, 또 다른 사람에 온 마음을 뺏기기도 하는 그들의 모습에서 사랑의 불가능성을 얼핏 본다. 이렇게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는 이유는 순전히 타이밍이 맞지 않기 때문이라는 왕가위의 설명은 일면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내가 너를 향해 있을 때, 너도 나를 향할 수 있는 확률이 과연 얼마나 될 것인가? 그러니 사랑을 완성했다는 것은 그야말로 운명이 도와줬다는 것으로 밖엔 설명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우린 왜 어긋나는 시간 속에서 타인을 향해 마음을 줄 수밖에 없을까? 그것 또한 운명이려니.... 그렇다면 이 운명의 가혹함에서 벗어날 방법은 없을까? 왕가위는 포기하지 않는 것이라고 해답을 내놓는다. 친절하게도. 내가 계속해서 상대를 향하고 있으면, 언젠가는 상대도 나에게 얼굴을 돌릴 떄가 있을 것이다. 그것이 1년 후가 될지, 10년 후가 될지 모르지만 포기하지만 않는다면 사랑은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한순간도 나에게도 얼굴을 돌리지 않는 상대라면...

2. 이번 영화 또한 화면만을 바라보는 것으로도 왕가위 작품이라는 것을 알아챌 수 있다. 화면의 중앙에 자리잡지 못하고 한쪽으로 치우쳐져 있는 주인공들. 도대체 이들은 왜 기울어져 있을까? 생각해보다 이내 그 답을 바로 그 화면들 속에서 찾아본다. 중앙에 자리잡고 있지 않다는 것은 혼자있지 않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나와 상대방이 함께 있을때 나와 상대는 화면의 맞은편에 서 있어야 한다. 따라서 비록 화면 속에서 주인공 혼자 서 있을때조차 그 맞은편엔 항상 상대방이 있는 것과 같다. 누군가 그 화면 속으로 들어왔다가 또 그 화면 밖으로 나간다는 것. 사랑이 오고 감이 그 한구석에 표현되어지고 있는 듯이 보여진다. 쓸쓸하고 허전한 듯한 느낌도 이내 꽉 채워질 것이라는 조그만 희망을 품고 있어 오히려 따뜻해보이기도 한다. 빈자리, 언젠가는 채워질 그 빈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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