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개의 시선>은 국가인권위원회가 후원한 인권에 관한 단편 영화 5개를 묶은 옴니버스 영화다. 인권에 관한 영화라고 하니 굉장히 따분하고, 재미없을것 같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다.

박경희 감독의 '언니가 이해하셔야 돼요'나 김동원 감독의 '종로, 겨울'은 다큐멘터리 형식을 띠고 있다. 그러니 다분히 따분할 수도 있겠다. 더군다나 다운증후군 학생의 일상을 찬찬히 바라보는 카메라와 외국인 노동자, 특히 조선족 노동자의 죽음에 대한 인터뷰를 듣다보면, 굉장히 힘이 든다.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모두 죄인마냥 느껴야 하는 중압감이 생각보다 크다. 우리와 다른 사람들에 대해 때론 익숙하게 대함으로써 차별을 없애야 하며, 때론 낯설게 생각함으로써 일상 속에 감추어진 폭력을 깨달아야 한다는 압박감. 하루하루를 힘들게 살아가는 한 개인을 넘어 사회적 편견까지 깨뜨려야 하는 삶이란 얼마나 고단할 것인가? 그러나 어쩌랴, 그게 바로 행복의 나라로 가는 길임을...

음, 이렇게 이야기하고 보니, 이 영화가 너무 딱딱해 보인다. 조금 화제를 돌려 장진 감독의 <고마운 사람>을 보면, 정말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다. 진지한 주제나 소재를 이토록 웃음이 폭발하도록 재기발랄하게 표현할 줄 아는 감독이 과연 누가 있을 것인지 생각하게 만든다. 정말 <다섯 개의 시선>중에 발군이라고 할 수 있겠다.

장진 감독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에 대한 차별을 공안시절의 고문기술자들을 통해 보여준다. 고문하는 자와 고문당하는 자가 서로 교류하고, 그 위치가 뒤바뀌는 상황을 통해서 풍자와 해학을 마음껏 펼쳐보인다. 지금, 이렇게 고문하고 있는 나는 비정규직이라 보너스도 없고 정시 출퇴근도 없으며, 근무 환경 또한 최악이다. 하지만 지금 고문받고 있는 너는 서울대를 나왔으니, 의료보험에 보너스에 성과금에 정시 출퇴근을 할 것이며, 퇴직금도 두둑할 것이다. 너는 우리같은 비정규직을 위해서도 데모를 할 것이냐? 네, 하죠. 둘의 관계는 비로소 소통이 가능해진다. 언론매체도 정부도 다들 양극화에 대해 두려워하며, 해결 방책을 이야기하려 하지만, 생색내기거나 탁상공론에 그칠뿐이다. 그 아픔이 얼마나 큰지조차 제대로 알고 있는 것 같지도 않다. 그 양극화의 당사자들의 설움을 이토록 유쾌하게 그려내는 장진 감독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다.

다음으로 또 주목할만한 것은 정지우 감독의<베낭 맨 소년>이다. 탈북 소년과 소녀의 남한 적응기를 보여주는 이 단편은 오토바이 질주 장면의 긴장감이 그들의 삶의 위험천만함을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또 마지막 소녀가 내뱉는 유일한 말이 주는 감동과 자막의 충격성이 영화적 재미를 그대로 보여준다. 천국으로 알고 찾아온 남한이 어떻게 지옥으로 변하는지를 진지하면서도 경쾌하게 그녀내고 있다.

류승완 감독의 <남자니까 아시잖아요?>는 조금 과장되어 있다. 확실하진 않지만 원신 원컷으로 이루어진 이 영화는 한 남자의 술주정이 전부라고 할 수 있다. 그 술 주정 속에 드러나는 대사들이 전부 차별적 발언이다. 성, 학력, 섹슈얼리티, 직위 등등 말 한마디 한마디가 모두 차별적 언사로 꾸며져 과장되어 보이지만 또 이만큼 효율적으로 사회에 만연되어 있는 차별을 이야기할수도 없다고 보여진다. 다만 말로만 가득 차 있다보니, 차분한 성찰을 살펴볼 수 없다는 것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다섯 개의 시선>은 정말 색깔 다른 감독들의, 색안경 낀 사회에 대한 때론 진진한, 때론 유쾌한 해부도다. 두시간 가까이 지켜보는 것이 조금은 지루할지도, 조금은 거북할지도 모르지만 지금 현재, 우리의 모습을 깨우치는 데는 큰 도움이 되리라 본다. 관심조차 갖지 않았던 사람들에 대해, 때론 웃으며, 때론 울며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를 가져다준다. 극장밖을 나선 순간, 우연히 차별받는 그들과 마주치게 됐을때, 낯선 이방인 취급을 그만두고, 똑같은 인간임을 한번만 더 생각하게 된다면 우리의 시선은 따뜻해질 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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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에 갔다 오기 전과 후에 내가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깨우쳐 준것이 <어퓨 굿 맨>이었다면, <용서받지 못한 자>는 군대 그 자체에 대한 적나라한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다시 한번 내 몸 속에 잠재해 있는 폭력을 일깨운다. <어 퓨 굿 맨>이 폭력에 대한 동의를 가져왔다면 <용서받지 못한 자>는 폭력에 대한 체념과 저항을 함께 일깨운다. 지금까지 나온 어떤 군대에 관한 영화보다도 <용서받지 못한 자>는 사실에 가깝다. 그리고 그 사실은 대한민국 예비군들 몸 속에 숨어있는 폭력의 씨앗을 보여준다.

 태정은 군기반장이다. 나름대로 군대 생활을 잘 해왔다고 생각한 그에게 부사수로 승영이 들어온다. 그런데 아들뻘(아버지와 아들은 군대에서 또 다른 의미로 쓰인다)도 안되는 그가 중학교 동창인 관계로 태정의 말년 군 생활이 조금 꼬인다. 그러나 태정은 승영을 최대한 감싸주려 하고- 하지만 또 그 뒤에선 승영의 고참들에게 얼차려를 가하며, 제대로 가르치라고 호통친다 - 승영은 태정의 보호아래 자신의 의지를 꺾이지 않고 군생활을 해나간다. 불합리한 명령에 따르지않고, 솔선수범하며, 자신의 위치가 가지고 있는 힘을 이용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군대에 들어간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하듯 내가 고참이 되면 다 바꾸겠다며 버텨낸다. 시간이 흘러, 태정은 제대를 하고, 승영 밑으로 지훈이라는 부사수가 들어온다. 지훈은 조금 어리버리하다. 승영은 지훈으로 인해 군생활이 힘들어지고, 태정 또한 이미 자신을 보호할 수 없게 되자, 점차 변해간다. 바로 군대 생활 잘 한다는 모범 군인의 모습으로 말이다. 고참들에게 장교들 물품을 선물하기도 하고, 마음에 꼭 들어맞는 이야기도 하면서. 고참들은 승영에게 지훈을 잘 가르치라고 훈계한다. 승영은 지훈때문에 힘든 자신의 처지와, 물리적 폭력에 서툰 개인적 특성 사이에서 점차 지훈에게 모질게 대하기 시작한다. 지훈은 승영에게 의지하고자 하나, 점차 변해가는 그로부터 아무것도 위안 받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게다가 여자친구와 헤어진 지라, 극도의 참담함을 느끼다 결국 군화끈으로 목을 맨다. 승영은 혼란에 싸이고, 휴가인지 탈영인지 모르겠지만, 밖에서 태정을 만나 위로를 받으려 한다. 하지만 태정은 승영이 아직도 자신에게 기대고 있는 모습에 짜증이 난다. 결말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으니, 더 이상 밝히진 않으려 한다.

영화는 그야말로 대한민국 남성이라면 누구나 겪었을법한 군대 생활을 가감없이 보여준다. 다만 주위에 자살한 부대원이 흔한 것은 아니니까 그 충격의 정도가 다르다고 하겠다. 군대 생활을 하면서 제일 괴로웠던 것은 불합리한 명령에 복종해야만 하는 것이다. 군의 특성이라는 것이 명령에 절대 복종하는 것이라지만, 불합리한 명령은 거부할 권리 또한 주어져 있다. 하지만 실제로 거부는 거의 불가능하다. 자신의 양심을 지켜내기 보다는 현실에 안주하기 위해 자신을 굽히는 것이 얼마나 편한 것인지를 깨우치게 된다. 그리고 난, 고참이 되면 다르겠다는 생각은, 본전 생각이 나서 (내가 당한 것이 있는데 라는 생각말이다) 쉽게 바꾸지 못한다. 즉, 고참이 되는 순간 그 불합리한 명령을 내리고 있는 자기자신을 바라보게 된다는 것이다. 군대니까 라는 말은 핑계에 불과하다는 승영의 말이 고참이 되는 순간 무너진 것과 똑같다. 군대는 개개인의 힘으로 쉽게 변하지 않는다. 물론 군대 참 좋아졌어 라고 다들 말하지만, 그리고 나 또한 고참이 되면서 많이 바꾸었다고 다들 생각하지만, 폭력은 어느 새 몸에 깊이 각인되어져 있다. 그리고 그 폭력은 군에서 나오는 순간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내 몸 어는 곳에 또아리를 틀고 있다 뛰쳐나온다. 그것을 견뎌내지 못하는 자는 결국 자신의 피를 모두 쏟아낼 수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피 속에 감추어진 폭력의 씨앗을 뱉어내고 싶다고... 아마 온 몸이 다 마르도록 피를 쏟아야만 할 것이다. 폭력의 구조는 그렇게 여전히 나의 영혼을 감싸고 있다. 이 영화는 그 영혼을 돌아보도록 만든다. 참혹하고도 슬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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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는 첫 사랑을 영원히 잊지 못하고, 여자는 현재의 사랑에 전념한다고 그러던데... 이 영화는 이런 속설과는 달리 여자에게도 첫 사랑은 영원히 잊을 수 없는 환희며 통증이라고 말하고 있다. 즉, 또 하나의 첫사랑에 대한 환상을 심어주는 영화라고 할 수 있겠다.

김정은이 첫 사랑에 대한 기억에서 자유롭지 못한 여자 역을 맡고 있는데, 그저 사랑 이야기라고 하기에는 조금 혼란스러운 미스터리적 요소가 있다.(나의 이해 능력이 떨어져서 일지도 모르겠으니, 미스터리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미스터리로 장르가 탈바꿈 되어 다가온 것일지도) 과거에 대한 회상이라고 생각한 순간, 그것이 현실 속에 끼어들어 현재의 인물들과 관계를 맺고, 그것이 현실의 또 다른 인물이라고 이해하는 순간, 영화는 그것이 과거일지도 모른다는 암시로 끝을 맺는다.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인가 어리둥절할지도 모르겠다. 그럼, 차분히 영화를 한번 더듬어 보도록 하겠다.

김정은은 친구와 함께 사설학원을 운영하는 강사다. 어느날 학생 중에 하나가 눈에 띤다. 자신이 고등학교 시절 사랑했던 아이와 이름도 똑같고 생김새도 똑같다. 그리고 갑자기 회상인지 현실인지 모를 장면이 나타난다. 김정은과 이름이 같은 여학생이 고등학교 시절 처음 사랑했던 아이가 바로 학원의 학생이다. 하지만 그 아이는 사고로 죽었다. 그런데 병원 장례식장에서 그와 똑같이 생긴 아이와 마주친다. 화를 내고 영정을 부수고 난리를 치는소녀, 알고 보니 쌍둥이 동생이다. 소녀는 그 남자를 사랑하게 된다. 하지만 그 여자 옆에서 그녀를 지켜주는 아이는 따로 있다. 그 아이는 현재 김은정과 동거하고 있는 남자와 이름이 같다. 동거라고 하지만 말 그대로 그냥 집을 함께 나눠 쓰고만 있다. 애인이 아닌 친구다. (누군가는 새로운 형태의 가족이라고도 보던데)

김정은은 고등학생과 사랑에 빠진다. 주위에선 불온한 눈초리로 바라본다. 어느날 외국에 나가 있던 그녀의 첫사랑이 돌아온다. 그를 만난다는 생각에 가슴이 설레지만 그 만남은 그다지 기쁘지않았다. 자신의 이름조차 제대로 기억하고 있지 못하는 남자. 다군다나 첫 사랑과 닮았다고 생각했던 지금의 학생과는 전혀 닮지 않았다. 첫 사랑보다는 지금의 사랑에 빠져있던 여자, 힘들지만 행복하다. 그러다 동거남과 고등학생, 첫사랑 남자가 모두 한자리에 모인다. 그녀를 잘 알고 배려할 줄 아는 동거남, 과거의 추억을 함께하는 남자, 자신의 감정을 빼앗아간 학생. 이들의 묘한 만남은 사랑니에 아파하는 김정은의 모습 속에서 아릇한 아픔과 함께 은은한 따뜻함으로 다가온다. 그리고 다시 나타나는 소녀와 동거남과 이름이 같은 학생의 병원신. 현재 김정은의 배에 남아있는 흉터와 똑같은 자리에 맹장 수술을 한 그녀의 상처를 동거남과 이름이 같은 아이가 바라보고 있다.  

음, 이렇게 설명하고 보니, 더 헷갈릴듯 싶다. 그냥 내 마음대로 해석해보면 현재에 개입하고 있는 학원생과 소녀, 그리고 그 소녀 옆의 학생은 모두 과거의 인물들이다. 지금 현재 동거남이며, 외국에서 돌아온 첫 사랑들의 과거가 현재에 편입되어 있는 것이다. 김정은은 여전히 과거 속에서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 과거는 실은 첫사랑이 돌아온다는 소식때문일지도 모른다.(영화 속에선 중간에 그 소식을 알게 되는 것으로 처리되지만) 그리고 돌아온 첫사랑과의 첫 만남의 섭섭함이 사라지고, 집에서 추억을 되씹는 과정에서 과거와의 화해가 이루어진다. 그것은 이름이 같은 두 남자의 접촉으로 가능해진다.

첫사랑은 언제든지 현재로 재생되는, 지워지지 않는 아련한 아픔이자, 성장통이라고 영화는 말하고 있는것 같다. 마치 사랑니처럼 말이다.

그런데 나는 사랑니가 아직까지 나지 않은 걸로 보아서, 첫 사랑에 대한 아련한 아픔은 모두 가짜라고 말하고 싶다. 그저 하나씩 들춰보고 싶은 추억의 장면일뿐이지만, 잃어버려서 안타까움이 더한 것일뿐, 뭔가 더 특별한 어떤 것은 아닌것 같다. 무엇이든 처음 경험하는 것이 오래 각인되는 것처럼, 처음으로 느끼는 감정에 대한 막연한 동경이 첫사랑에 대한 환상을 품게 만든것은 아닐까. 가슴까지 아파해본 첫사랑의 경험이 없으니, 현실 속에서 언제까지나 재등장하며, 지울 수 없는 첫사랑의 위력 또한 알지 못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 처음이 주는 강렬함과 그 깊이만큼 가득한 아픔을 영화를 통해 조금은 알게 되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추억이란 조금은 과장되기 마련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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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드 2006-01-01 19: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오늘 이 영화 봤어요. 뭐랄까, 환타지를 집어 넣은걸까. 하고 봤더랬지요. 게다가 마지막 장면은 뭘 말하는걸까요? 정우와의 추억이 마지막에 나온 이유가 뭘까 한참을 생각했더랬어요.

하루살이 2006-01-01 19: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환타지라고 생각했지요. 그런데 바로 그 마지막 장면때문에, 아! 모든게 다 과거였구나라고 생각하게 됐답니다. 과거는 항상 끊임없이 현재에 끼어들어오지 않나요? 특히 술 먹을때면^^ 과거는 그래서 그냥 과거로 남아있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현실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마늘빵 2006-01-01 19: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랑니는 났지만 아프지는 않았어요. 뽑을 필요도 없다고 그래요. 그런데 사랑은 너무 아픕니다.

하루살이 2006-01-01 2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랑이야기는 아무리 들어도 질리지가 않으니... 아프락사스 님의 사랑이야기도 듣고 싶군요^^;;;
 

자석을 보면 참 신기하다. 남극인지 북극인지 가르쳐주지 않아도, 스스로 끌어당긴다. 운명이란 바로 이런 맹목적 끌어당김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클레멘타인이라는 여자가 있다. 욱하는 성격이지만 쾌활하다. 조금 우울증도 있는 것 같고, 상당히 예측하기 힘든 캐릭터다. 조엘이라는 남자가 있다. 누군가에게 먼저 접근하는게 힘든 소심한 남자다. 이 둘은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지만 어느새 사랑에 빠진다.

어느날 조엘은 갑자기 일탈을 행한다. 출근 기차를 타지않고 무작정 바다로 간다. 전혀 그에게 어울리지 않는 행동이지만 이 뜻밖의 행동은 클레멘타인과의 만남을 제공한다. 하지만 이것이 첫번째 만남이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 사실은 그의 과거가 잊혀지는 과정에서 밝혀진다. 

뜻밖의 만남을 통해 키워간 사랑, 하지만 너무나 다른 두 사람은 자주 다툰다. 그리고 그 다툼에 욱해 클레멘타인은 사랑했던 연인의 기억만을 지워주는 치료를 받는다. 조엘은 자신을 모른채 하는 클레멘타인에 당황해하다 사건의 전말을 알게되고 혼자만 괴로워할 수 없게된 조엘 또한 이 치료를 받게 된다. 하지만 점점 자신의 기억이 지워져가는 순간, 아무리 이별의 상처가 크더라도 꼭 간직하고픈 따뜻했던 사랑의 기억이 있었음을 깨닫는다. 기억 속에서 지워지는 것을 막기 위해 도망가는 조엘. 그의 아픈 과거로 클레멘타인과 함께 망각의 전파를 피해 도망다닌다. 하지만 끝내 사랑의 기억을 모두 잊어버린다. 그것으로 모든 사랑은 끝이 난걸까?

사랑은 지운다고 잊혀지는 것이 아니다. 아니 잊혀진다고 정말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의 끌림은 마치 자석의 반대극마냥 운명처럼 다가온다. 인연의 끈은 가위로 잘라낸다고 끊어지는 것이 아니다. 결국 만나야 할 사람은 만나게 되어 있는 것이다.  뇌 속에 잊혀진 기억이 모든 것을 잊게 했다고 믿어서는 안된다. 사랑에 대한 기억은 온 몸으로 기억되기 때문일 것이다.

아무리 지워도 지워도 사랑에 대한 대상은 결코 변함이 없다. 그것은 실험을 담당한 교수와 직원 사이에서도 드러난다. 사랑 때문에 괴로운 현실도 그 사랑을 잊는 괴로움보다 더 클 수는 없는 것이다. 사람에 대한 사랑이라는 감정은 그 사람의 모든 것을 포함한다. 자기가 좋아하는 선물을 준다고 해서, 또 듣고싶은 말을 한다고 해서 마음을 뺏기지는 않는 것이다. 클레멘타인의 기억을 지우는 과정에서 그녀를 사랑하게된 직원이 조엘의 노트를 보고 그녀에게 조엘처럼 대하지만 끝내 사랑을 얻지 못하는 것은 행위 그 자체 이상의 것을 사랑은 필요로 하기 때문일 것이다.

조엘과 클레멘타인의 사랑이 잊혀지는 과정, 그리고 그 사이로 뛰어든 조수, 기억을 지우는 교수와 직원의 사랑 등등 여러갈래 얽혀진 사랑의 미로는 몽환적인 화면을 통해 잘 드러난다. 현재와 과거의 교차, 기억과 실제의 반복은 사랑의 전제조건인 인연을 설명해주는 큰 힘이 되어주고 있다.  시나리오가 훌륭한 것은 물론이려니와 그것을 화면으로 묘사해내는 감독의 탁월한 능력에 감탄할 수밖에 없는 뛰어난 작품이다. 끌림은 인력으로 어찌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님을, 처절한 사랑에 대한 기억 지키기를 통해 알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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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6-06-06 2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영화 다시 보고 싶어요..
 

영화 <킹콩>을 보면서 금발 미녀에 대한 환상, 마쵸에 대한 꿈, 또는 자연과 문명의 대립을 이야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건 피터 잭슨이 리메이크한 <킹콩>이다. 나는 피터 잭슨이 감독을 했다는 이유로 <킹콩>을 보았으니 오직, 그것에 대해서만 말해보고 싶다.

피터 잭슨에게 기대한건 환타지일 것이다. 머릿 속에서 그려진 이야기가 어떻게 화면에 펼쳐질지가 최대 관심사인 것이다. 과연 킹콩은 어떤 모습을 하고 어떤 모험이 화려한 영상 속에 담겨질지가 흥미로웠다. 그리고 그에 대한 답변은 찬사와 실망 양 쪽 다이다.

3시간짜리 대작, 그냥 느낀 인상대로 말하자면 1시간은 지루, 1시간은 흥미진진, 1시간은 평범하다고 할까? 누군가는 타이타닉, 쥬라기 공원 등등의 짬뽕이라고도 표현하는데 얼핏 그럴만도 하다고 생각된다. 먼저 흥미진진했던 중간 1시간에 대해 이야기하면, 정말 엄청나다라고 밖에 표현을 못하겠다. 공룡과 킹콩과의 대결은 물론이거니와 사방에서 쏟아지는 원시생물들과의 혈투는 숨을 턱 막히게 만들 정도로 화려하다. 긴장이라는 것은 놓였다 조였다 했을 때 그 극에 도달할 터인데, 이건 계속되는 초긴장 속에서도 극도의 흥분을 감추지 못하게 만들 정도다. 마치 내가 엄청안 액션 게임의 한 현장 속에 들어와 있는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다.

하지만 감독은 너무 많은 욕심을 부린게 아닌가 생각된다. 액션의 화려함뿐만 아니라 드라마적 감동도 놓치지 않으려 한 것이 오히려 독이 되지 않았나 싶다. 우린 매스컴을 통해 수많은 죽음을 접한다. 하지만 그 사건 사고 속의 죽음이 나라는 개인에게 슬픔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들과 시간을 함께 보내지도 않았고, 그들의 속사정 또한 아무 것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감독은 결말의 슬픔을 담보하기 위해 초반 너무 많은 설명을 하려한다. 킹콩과의 만남 이전의 영화 속 감독과 배우, 작가가 처한 상황을 그려보이기 위해 헛된 시간을 낭비한 듯이 보인다. 왜냐하면, 그것은 감독의 의도와는 달리 영화 종반 킹콩의 죽음 앞에서도 결코 눈물이 흐르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도입부의 기나긴 설명은 너무나 지리해져버리고, 뉴욕의 도심 속 난장판은 이미 해골섬의 결투에 놀란 사람들에게 더 이상 자극을 가져오지 못한다. 그리고 굳이 오리지널과 비교할 필요는 없으나, 킹콩의 맥박이 점차 약해지는 소리로 눈물샘을 자극했던 예전 영화에 비해 오락거리로 비쳐진, 거대한 인형이 되어버린 킹콩은 그다지 슬퍼보이지가 않는다. 다만 킹콩의 풍부한 표정만이 조금 위안을 줄 뿐이다.

물론 슬픔보다 그런 오락거리로 치부되어진 킹콩의 모습에서 어떤 아이러니를 느낄 수도 있으나, 너무나 시끌벅적했던 죽음 전의 상황으로 인해 그저 3시간 동안 자리에 처박혀 얼얼해진 엉덩이만 들썩여볼 뿐이다.  물론 영화가 게임과 같을 수는 없다는 점에서 조금 이해해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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