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년마다 도봉산이나 북한산에선 추락사고가 일어난다. 얼핏 듣기론 일주일인가 한달에 두명 이상은 사망으로 이어진다고 한 것 같다. 이런 사고의 대부분은 위험지대라거나 접근금지라고 표시된 지역에서 최소한의 안전장비도 없이 오르는 경우다. 아마도 이렇게 오르는 사람들은 자신이 죽을 수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설마 하는 생각에 올랐을 것이다. 죽을 줄 알면서도 라는 것은 오를 때 느끼는 짜릿함의 강도를 극점에까지 끌어다준다. 하지만 이런 극도의 긴장은 아주 짧았을 때만이 그 효과가 극대화된다. 계속되는 긴장은 오히려 죽음에 대한 생각을 무디게 하고, 신경쇠약을 가져올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영화 속 주인공들은 아무도 가보지 못한 남극의 도달불능점을 향해 가고 있다. 그것이 죽음을 건 도박임을 알지만, 이들은 갈수밖에 없다. 극중 송강호가 이야기하듯 그네들은 바로 그런 곳에 갔을 때만이 삶의 희열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그들에게 왜 그런 곳만을 찾아 떠나가냐고 물어보았자, 멋진 대답을 기대하기는 힘들 것이다. 이것은 마치 마약과 같아, 도저히 멈출 수 없는 흥분을 주기 때문에 점점 더 그 자극의 강도를 높여가야만 한다.

영화는 점점 도달불능점을 향해가는 6명의 남자들을 보여준다. 이것은 죽음에의 항해다. 그래서 죽을지도 모른다는 짜릿함이 주는 기쁨과, 그런 역경을 함께 해쳐가고 있다는 동질감의 극치를 기대했을련지도 모른다. 하지만 죽음은 다가오지 않고, 죽음에의 두려움만 나날이 커져간다. 그래서 어느 순간 죽음이 가져다 줄 수 있는 쾌락의 칼날은 무뎌지고, 오히려 그것은 광기로 드러난다. 그러나 영화는 송강호의 광기를 그저 살풀이로 설명하려고 든다. 그런데 또 문제는 살풀이라고 설명하려 들면서 한쪽에다 다른 이유를 덧붙여놓고, 과연 이걸까 저걸까 혼돈시키려 한다는 데 있다. 85년전 영국 탐험대의 일기장, 그리고 아직까지 떠돌고 있는 그들의 영혼이 있음을 암시하면서, 점차 하나둘씩 죽어가는 탐험대들의 죽음에 대해 물음표를 남겨놓는다. 이들의 죽음이 무모한 인간의 도전때문인지, 죽은 자들의 원한인지 영화는 설명해주지 않는다. 그러면 마치, 관객들이 스스로 생각하며, 그 원인에 대해 각자 나름대로 해석해갈 것이라고 생각한 것일까?

불친절함은 불친절을 당하는 대상이 기대했던 친절에 배신당한 충격에 왜? 라는 의문을 품어야 효과를 볼 수 있다. 그러나 잘못된 불친절은 그 대상에게 오직 분노만을 낳게 만든다. 영화는 오직 분노만을 가져오게 만들었다. 그 분노는 해외 로케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세트를 보는 것마냥 관람시간 내내 눈구경만 해야 함으로써 찾아오는 눈의 피로감이며, 인간이 어떻게 광기를 드러낼 수 있도록 변해가는지 지켜보는 즐거움보다는 느닷없는 광기와 갈등상황의 무미건조함으로 말미암은 지루함으로 인해서이다. 남극일기 첫 장에 쓰여진 인간의 탐욕이 가져다주는 지옥이라는 글자는 인간의 어떤 탐욕을 말하는 것인지조차 알지 못하겠다. 이미 지옥임이 뻔한 도달불능점에서 그것이 지옥인 것은 인간의 탐욕이라고 말함으로써 또 한번 관객을 우롱하고 있다. 송강호의 목표에 대한 집착은 오히려 씻김굿인것처럼 그려놓고 그것이 탐욕이었기에 그곳이 지옥으로 변했다는 설명은 얼토당토않다.

이것저것 마구마구 뒤죽박죽으로 놓여진 그물코들은 벼리가 없기에 재미라는 월척을 잡아채지 못했다. 지루한 영화, 하마터면 잠들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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