핸콕엔 반전이 숨어 있다. 이 시대의 수퍼영웅이라 불리우는 존재라는 것이 시대에 따라 다른 이름으로 불렸다고 말하는 영화는 기대하지 않았던 반전을 가져온다. 물론 핸콕이 표현하고 있는 영웅상이 기존의 영웅상과 다르다는 점에서 일단 눈길을 끌지만, 영화의 흐름이 캐릭터 중심에서 갑자기 테마 특히 사랑이라는 테마로 흐른다는 점이 어떤 점에서는 거슬리기도 하면서 반대로 감동을 주기도 한다. 사랑을 말하는 것은 언제나 먹히는 소재이니까.

아무튼 핸콕이 주는 첫번째 놀라움은 이 시대가 이미지의 시대임을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술 주정뱅이에 말썽만 일으키는 영웅, 차라리 이 도시에서 사라져버렸으면 좋을 것 같은 영웅이 어떻게 재탄생되는지 영화는 보여준다. 그것은 순전히 이미지 메이커에 의해서다.

핸콕과 함께 조연급으로 활약하는 남자배우의 극중 직업은 홍보대행이다. 일류기업이 되기 위해선 사랑의 이미지를 심어주어야 한다며 따듯한 심장을 뜻하는 하트로고를 들고서 CEO들을 설득하려 하는 이 남자는 결국 핸콕의 이미지를 바꾸는데 한몫 한다. 실제 그 사람의 마음이나 행동거지보다는 남들에게 어떻게 보여지느냐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영화는 일깨워준다. 착한 일을 하고자 하는 의도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착하게 보이는 것이 중요하다. 핸콕은 물론 심성이 나쁜 사람이 아니었기에 다행이긴 하지만 어쨋든 이미지에 의해 사람들의 미움을 받다가 환호를 받게 된다. 그리고 기업들은 어떻게든 이 이미지를 이용하고자 한다. 

두번째로 핸콕은 외로움을 말한다. 핸콕이 이렇게 삐뚤어진 것은 그에게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다는 사실 때문이다. 즉, 과거를 잊어버린 핸콕에게 자신의 과거와 인연을 맺었을 사람들 중 아무도 자신을 찾지 않았다는 사실이 그를 자포자기에 가까운 삶을 살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외로움은 사람을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가기도 한다.

세번째로 핸콕은 고슴도치 사랑을 말한다. 가까이 다가가면 서로에게 상처를 줄 수밖에 없는 연인관계라면 사랑을 위해 상처를 줄 것인지, 아니면 사랑을 위해 이별할 것인지 선택할 수밖에 없다. 그 선택 자체는 잔인하다. 그 잔인함은 운명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운다. 운명을 거부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영화 속에서 그럴 가능성은 좀처럼 없다. 그러면 둘 중 하나의 선택밖에는... 그것이 어떤 선택이 되었든 그리고 그 결과의 희비를 떠나서 과정은 괴로운 일임에 틀림없다. 그것을 극복하는 과정이 소위 어른이 되는 과정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때론 그 운명 자체를 거부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핸콕은 한마디로 정의하기 힘들다. 전형적인 영웅에서 벗어났다고는 하지만 어찌보면 전형적인 멜로라인을 그리고 있다. 전형성이란 무엇을 기준으로 바라보느냐에 따라 달라지기 마련인 것이다. 그럼에도 킬링타임용으론 아주 그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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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에선 당신이 죽는다고 선고한다. 후두암에 걸려 목소리를 잃고 한달 길면 두달 후엔 목숨을 잃는다는 말을 듣고 회사로 돌아온 주인공 멜로디. 그런데 회사에선 정리해고를 당한다. 당장 짐을 싸들고 나가야 하는 상황. 위로받고 싶은 마음에 남자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만나지만 남친은 이별을 통보한다.

아~, 이런 절망의 낭떠러지에서 멜로디는 남은 삶을 어떻게 살아갈까. 그리고 당신이라면 이 짧은 시간 무엇을 하며 살 것인가.

영화 <나의 인생 나의 기타>는 여주인공을 극한으로 몰아넣고 어떻게 살 것인지, 또는 죽을 것인지를 묻는다. 이 질문이 중요한 이유는 죽음 앞에서 택한 행동이라는 것이 평소 당신이 그렇게 갈망했던 삶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밝혀줄 수 있다는데 있다. 이것은 로또 1등 당첨과도 얼핏 닮아 있다. 돈으로 움직이는 세상에서 화수분같은 돈을 쥘 수 있을 때 당신이 가장 먼저 하고 싶은 일이란 결국 평소 그렇게도 갈망한 삶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명 둘 간의 차이는 있을 것이다. 하나는 절망 속에서, 하나는 희망 속에서 선택한 것이기에.

멜로디는 펜트하우스를 단기간으로 빌린다. 그리고 그 커다랗고 빈 공간에 갖고 있는 모든 카드로 호화찬란한 가구와 옷 등으로 채운다. 전화주문으로 끊임없이 배달되는 과정에서 배달원과의 스쳐지나가는 사랑도 한다. 또 평소 채식주의자였던 그녀지만 먹는 것에도 아무런 한계를 두지 않는다. 피자 배달을 해주던 여종업원과의 사랑으로 삼각관계도 형성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어린 시절 가난으로 매일 싸우던 부모님들로부터의 유일한 탈출구였던, 그래서 훔치다 들켜 꾸지람을 듣기도 했던 전자기타를 장만해 비디오를 통해 기타연주에 몰입한다.

그런데 어느날 카드 주문이 불가능해졌다. 그래서 날짜를 확인해보니 어느덧 3개월이 지난 상태. 병원에 들려 몸상태를 체크하니 암이 모두 사라졌다. 이런!! 멜로디는 다시 현실로 돌아와야 한다. 카드빚을 청산하기 위해 비싸게 구입했던 명품들을 헐값에 넘기고 펜트하우스를 나와 거리를 떠돈다. 그녀의 유일한 돈벌이는 길거리 기타연주. 그런데 그 연주 덕분에 우연히 그곳을 지나치던 밴드의 멤버로 영입된다. 멜로디의 새로운 삶이 시작된 것이다.

죽음 앞에서 이제까지 살아왔던 삶의 방식을 송두리째 바꾼 멜로디는 제2의 인생을 찾게됐다. 어린 시절 그녀의 유일한 희망구였던 기타는 죽음 앞에서 빛을 밝혀주었다.

그래, 당신이라면 죽음과 직면해 어떻게 삶을 살아갈 것인가. 너무나 행복했던 일상이었기에 죽을 때까지 그 삶의 방식을 그대로 유지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자포자기로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도 있다. 또는 새로운 삶이라고는 하지만 전혀 희망없는 무의미한 삶을 이어갈 수도 있다. 아니면 지금까지의 삶을 정리하며 마무리를 짓고자 하는 삶도 가능하다.

과연 당신이라면...

'먹고 살기 위해'라는 이유를 벗어난 삶이란 죽음에 직면해서야 가능할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기에 쳇바퀴 도는 다람쥐처럼 살아가는 수밖에. 그래도 생각해본다. 정말 한달 후 죽는다면 난 그 남은 일생을 무엇을 하며 지낼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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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고 : 스포일러가 다분합니다.





 

인디아나 존스4를 보고나서 갑자기 생각난 영화가 있었다. 20년도 더 된것 같은데 왕조현과 원표가 주연으로 나왔던 홍콩영화다. 당시 홍콩느와르 풍의 영화가 득세하던 시절, SF라는 장르에 대한 홍콩영화의 접근은 너무 새로웠다. 물론 CG적 측면에서 보면 조금 어설퍼보이지만 그래도 그 상상력은 강하게 뇌리를 때리고 지나갔다. 동양의 전설적인 동물인 용을 외계인의 우주선이라고 상상한 것이다. 전설을 전설 그대로 표현한 심형래의 이무기 영화 '디 워'와는 다소 차이를 보인다.

세계 7대 불가사의니 미스터리니 하며 사람들이 신기해하는 것들이 있다. 도저히 현재의 과학으로도 풀 수 없는 현상들을 어떻게든지 설명해보려 하지만 결국 갈팡질팡 하고만다. 현대에 들어와 생겨난 미스터리들은 외계생명체와의 연관성으로 해석하려 든다. 대표적인 것이 X파일 일 것이다. 하지만 과거의 미스터리들, 우리가 흔히 불가사의라고 부르는 것들은 신이라는 이름으로 그 해석의 여지를 남긴다. 그러나 과학의 급진적 발전은 급기야 우주를 넘보는 시대가 되었고(최근 또다시 화성탐사선의 착륙으로 생명체의 존재 여부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다), 이것은 외계생명체에 대한 열린 마음을 갖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드디어 신의 자리에 외계인이 들어앉게 됐다.

인디아나 존스4에 나오는 고대유물이 바로 우주선이며, 벽화의 그림 또한 신의 상징이 아니라 외계인을 그린 것이라는 발상은 이런 시대적 변화를 실감하게 만든다. 과학이라는 이름으로는 더이상 신이 설 자리는 사라진 것이다. 신은 도저히 알 수 없는 존재이기에 오히혀 신이라는 이름이 여전히 존재할 수 있지만, 사람들은 영원히 볼 수 없는 신보다는 언젠가는 마주칠 수 있는 외계인쪽에 무게를 두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니, 외계인은 신의 또다른 이름일지도 모른다.

노쇠한 인디아나 존스의 아날로그적 액션 신이 불러오는 향수와 그것을 만회하며 또한 해석에 대한 현대적 접근을 위해 등장한 외계생명체. 앞으로 인디아나 존스가 어떻게 흘러갈 것인지 궁금해지는 대목이다. 결국 인디아나 존스의 아들이 X파일의 멀더와 동료가 되는 날이 올지도... 혹 그래서 X파일의 시리즈와 인디아나 존스의 시리즈가 하나가 되는 날도 오지 않을까. 에일리언과 프레데터가 갑자기 만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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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인간 상태인 어머니에 대한 무의미한 치료를 중단해 달라는 가처분 신청을 낸 가족들이 12일 존엄사에 대한 법률을 제정하지 않은 것은 헌법에 어긋난다며 헌법 재판소에 헌법소원을 냈다.

생명에 대한 존엄성과 함께 죽음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에 대한 관심도 커지면서 이제는 깊게 생각해봐야 할 문제이다. 이 문제를 바라보는 데 있어서 도움이  될만한 영화가 한편 있다.



씨 인사이드

 

2007년 개봉한 알레한드로 아메나바르의 영화 <씨 인사이드>는 안락사에 대해 다루었다.

26년 전, 바다에서 다이빙을 하다 전신마비자가 된 라몬 삼페드로, 가족들의 헌신적인 뒷바라지 속에 침대에 누워서 오로지 입으로 펜을 잡고 글을 써왔던 그의 소망은 단 하나, 안락사로 세상을 떠나는 것이다.

라몬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두 명의 여자가 찾아온다. 통조림 공장에서 일하는 수다스럽지만 순수한 여인 로사. 그녀는 라몬을 사랑하게 되고, 급기야 자신을 위해 삶을 포기하지 말라고 설득한다. 또한 퇴행성 질환을 앓고 있는 변호사 줄리아. 라몬의 자유로운 삶을 위해 안락사 소송을 도와주는 동안 그녀는 그에게 점점 사랑을 느끼지만, 그 감정조차도 그들에겐 너무나 버겁다.

그리고 또한명 주목해야 할 사람은 생명의 존엄성을 설파하는 추기경(?), 자신도 장애를 겪으면서도 하나님의 은총으로 생명을 영위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안락사를 요구하는 것은 주위의 사람들이 그를 따듯하게 대해주지 않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하지만 이것은 라몬에게도 그의 가족들에게도 깊은 상처만을 남긴다.

변호사 줄리아와의 사랑이 점차 깊어져갈 때 이 사랑이 라몬의 죽음에 대한 열망을 막아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사랑마저도 안락사에 대한 그의 열망을 식혀주지는 못한다.

이 영화를 보면 인간으로서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를 자꾸 생각하게 만든다. 어쩃든 살아야 한다는 수많은 이야기들 속에서 과연 정말로 어쨋든 살아가는 것이 인간답게 죽는 것과 어떻게 다를지 고민하게 만든다. 이것에 대한 결정은 스스로에게 주어져야 할 문제일까. 아니면 사회적 약속으로 이루어져야 할 문제일까에 대한 고민도 함께 한다.

엉엉 눈물을 흘리는 영화가 아니라 어느새 자신도 모르게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깨닫게 만드는 영화다. 이 영화가 현재 노령화 사회로 치닫는 우리에게도,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생명을 연장시킬 수 있게된 우리에게도 잔잔하면서도 거부할 수 없는 너울을 일으킬 것이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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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할 수 없는 비밀

 

1948년 비토리오 데 시카 감독의 이탈리아 영화 '자전거 도둑'에서 나오는 자전거는 생계수단이다. 자전거를 도둑맞은 주인공 안토니오가 자전거를 훔칠지 말지 고민하는 모습 속에서 삶의 비애를 느끼게 만들었던 이 영화는 리얼리즘의 힘을 보여준다.

이 자전거가 할리우드로 넘어가면 상상의 세계로 뻗어나간다. 1982년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영화 ET에서는 자전거가 하늘을 난다. 정부로부터 도망칠 수 있는 운반수단으로서 작동한다.

동양 3국으로 넘어온 자전거는 어떨까.

최근 주걸륜, 계륜미 주연의 '말할 수 없는 비밀'(2007년)이라는 홍콩영화는 환타지와 멜로를 넘나든다. 주요 소재는 피아노이지만, 이 두 남녀의 사랑을 쌓아주는 것은 자전거다. 자신의 자전거 뒷자리에 누군가를 태운다는 행위 자체는 그냥 이동 수단의 의미를 넘어서 사랑이 깃들어감을 표현한다.

1995년 이와이 슌지 감독의 '러브레터'라는 일본영화 속에서도 자전거가 등장한다. 여기에서는 과거와 현재를 잇는 것이 피아노가 아니라 동명이인이 주고받는 편지다. 여자 주인공이 회상하는 장면에서 자전거가 등장하는데 이때는 장난의 도구로 나타난다. 하지만 이 장난은 그들이 서로 좋아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방증이다.

1996년 홍콩영화 첨밀밀에서도 자전거를 빼놓을 수 없다. 그리고 기억이 확실하진 않지만 2002년 곽재용 감독의 클래식에서도 자전거는 등장한 듯싶다.

지금이야 자전거가 MTB라든가 사이클이라는 레포츠 또는 스포츠의 의미도 많이 갖지만 수십년 전엔 하나의 로망이었다. 자전거를 갖는다는 것은 낭만을 싣고 달리는 것이었다. 그런 감성은 비단 우리나라만의 것은 아니었는가 보다. 문득 영화 '말할 수 없는 비밀'을 보면서 자전거가 사랑을 싣고 다녔음을 깨닫는다. 내 청춘의 시간도 자전거처럼 천천히 흘렀으면 좋으련만 어느덧 고속열차처럼 지나가 버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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