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는 조성진-김선욱이 아니라, 김선욱-조성진이다. 저 멀리서 김성욱 봤던게 벌써 8년 전이다. 조성진 표는 구하기 어렵다 해서 도전하기도 겁난다. 


퇴근하고 유튜브 보다가 이 영상을 보게 됐는데, 한참을 웃었다. 4번 봤는데 오늘밤에 3번은 더 볼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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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넬로페 2024-06-05 21:4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8년 전, 예술의 전당이었나요?
김선욱 콘서트 갔었어요.
조성진이나 임윤찬은 처음부터 포기했습니다.
아유, 클릭을 도저히 못하겠더라고요.
오히려 유럽에서 조성진 티켓을 구하기 훨씬 쉽다고 하네요
한국 돈으로 6만원 정도로 볼 수 있다고 하더라고요^^
근데 비행기가 비싸군요 ㅎㅎ

단발머리 2024-06-05 21:46   좋아요 2 | URL
우앗! 페넬로페님! 페넬로페님은 예술의 전당 공연 보셨군요. 전 롯데홀에서 봤어요. 3월이었습니다^^
그 즈음에 김선욱 공연 많아서 전 맞는 시간 골라서 갔던 기억이 나요. 제 친구들은 임윤찬 공연도 클릭 잘만 하던데요. 저는 수강신청 때부터 한결같이 클릭에 약합니다.
유럽에서 조성진 티켓 구하기 쉽다는 이야기는 들은 거 같아요. 겸사겸사 유럽 한 번 가고 싶지만, 그러나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서곡 2024-06-05 22: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앗 저도 이 영상 찜해뒀어요 내일 보려고요 ㅎ 굿나잇입니다!

단발머리 2024-06-06 09:28   좋아요 1 | URL
ㅎㅎㅎ 저 어제 아주 굿나잇이었습니다!

서곡 2024-06-06 09: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방금 봤습니다 네 말씀대로 즐겁네요 ㅎㅎ 짧은 리허설 영상도 있더라고요 안 보셨으면 그것까지 보시길요 그럼 오늘 공휴일 잘 보내시길 바랍니다~~

단발머리 2024-06-06 09:30   좋아요 1 | URL
그죠~~!! 피아노가 저 두 분 잘 감당해야 할텐데… 특히 조성진씨가 맡은 오른쪽 건반들 ㅋㅋㅋ 밤새 힘들었을거에요.
서곡님도 즐거운 연휴되세요! 참, 저도 데님셔츠 리허설 봤어요. 서곡님도 보셨군요. 으하하하!

서곡 2024-06-06 10: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데님셔츠 리허설 ㅋㅋㅋㅋ 운동화 신고 연주하는 모습이 순정만화 같았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단발머리 2024-06-06 10:22   좋아요 1 | URL
리허설은 리허설대로 너무 재미있더라고요. 운동화도 새롭고요. 연주복에 피아노 앞에 앉은 모습만 보니까 얼마나 어린지 깜빡ㅋㅋㅋㅋㅋ

moonnight 2024-06-06 10: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_@;;; 멋집니다. ♡

단발머리 2024-06-06 11:09   좋아요 1 | URL
계촌이라 하더라구요. 알아도 못 갔을거에요. 그나마 모르는 분이 올려주신 영상이 있어서 기쁩니다.

blanca 2024-06-06 11: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임윤찬, 조성진이요. 여기 계촌 저도 가고 싶었는데...김선욱의 브람스 좋아해요.

단발머리 2024-06-06 11:12   좋아요 0 | URL
임윤찬-조성진도 좋죠! 전 이 행사 있는줄도 몰랐거든요. 전 김선욱 베토벤 밖에 안 들어봤는데 김선욱 브람스도 찾아봐야겠어요. 블랑카님 선택이라면!! ㅎㅎ
 











『타자로서의 서구」를 읽는다. 부제가 '가야트리 스피박의 <포스트식민 이성 비판> 읽기와 쓰기'인데 중요한 점은 쓴 사람이 임옥희님이시라는 것.

탈식민주의를 이해하기 위해 스피박을 읽어야 한다. 아니, 읽으면 어쩔까 한다. 에드워드 사이드도 호미 바바도 안 읽었지만, 제가 꼭 순서를 따라가야 하는 건 아니잖아요. 어차피 아무도 안 시켰ㅋㅋㅋㅋㅋㅋㅋㅋ아무도 안 시켰고, 아무도 검사 안 합니다.










스피박에 대한 책으로는 김은주의 『생각하는 여자는 괴물과 함께 잠을 잔다』의 스피박 부분을 읽었는데 다른 인물에 대한 부분도 그렇지만 너무 정리가 잘 되어 있다. 자주 꺼내 보는 아주 좋은 책이다. 스피박과 버틀러의 대담 『누가 민족국가를 노래하는가』을 읽었고, 스피박의 저서로는 『읽기』를 읽었는데, 그냥 '읽었다'는 데 의미를 둬야 할 정도다.

어제 읽은 부분에서 눈에 들었던 문단은 바로 여기다.

그녀가 말하는 하위주체는 교육받지 못한 가난한 '3세계' 토착 기층민중(여성)이라고 할 수 있다. ... 그러므로 정작 하위주체 여성들이 스피박의 난해한 글을 직접 읽을 기회는 거의 없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그녀는 1세계 백인 페미니스트들을 비판할 때는 타자의 입장 혹은 '3'세계 하위주체의 입장을 보지 못한다고 끊임없이 비판하면서 페미니즘 내부의 이론적 편차에 주목한다. 하지만 그녀 또한 '3'세계 하위 여성 주체 혹은 토착 정보원들을 지식의 대상으로 만든다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을 것이다. 하위주체를 거론하지만 그녀의 난해한 글쓰기 전략은 결코 하위 여성 주체에게 '직접적으로' 호소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타자로서의 서구』, 20-1쪽)

하위주체를 거론하지만 스피박의 난해한 글쓰기 전략은 결코 하위 여성 주체에게 가닿을 수 없다는 것.

나는 묘한 승리감을 느꼈다. 그러니까 이건 지식인과 대중 사이의 간극과 소통에 대한 문제 그리고 그 소통의 도구에 관한 문제일텐데, 이 부분 역시 탈식민주의 이론에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오리엔탈리즘과 에드워드 사이드』를 읽고 나는 이렇게 썼다.











에드워드 사이드의 한계에 대한 저자의 비판적인 사유에는 일면 동의하지만 저자의 주장에도 억지스러운 부분이 있다는 걸 덧붙이고 싶다. 저자의 주장대로, 사이드는 스스로를 ‘백인 중산층 서구인’으로 위치시키고 있지만, ‘앵글로 아메리칸 학계라는 특권 사회에서 정회원으로 사는 것은 망명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사치스러운 자기 정체성의 자리매김(114쪽)’이라는 주장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자기 나라에서 쫓겨나 살 곳을 잃었는데 그러면 도대체 어느 나라에서 살라는 말인가. 에드워드 사이드가 앵글로 아메리칸 학계에 자리 잡지 않았다면, 도대체 누가 그의 주장에 귀 기울였겠는가. 평범한 젊은 학자였던 사이드가 전 세계적인 주목을 받게 된 건, 그가 앵글로 아메리칸 학계의 정회원이어서가 아니라, 『오리엔탈리즘』이라는 독창적이고 독보적인 성과를 만들어냈기 때문이 아닌가, 라고 저자에게 묻고 싶다. (『오리엔탈리즘과 에드워드 사이드』, 단발머리)

에드워드 사이드는 서구가 만들어낸 허구로서의 동양을 발견해 냈다. 젠더 문제에 관한 한, 그는 무지해 보인다. 그 역시 '백인 중산층 서구인' 더 정확히는 '백인 중산층 서구 남성'의 정체성의 한계 속에서 존재한다. 하지만, 그렇다면 그가 어디에 '자리 잡아야' 한단 말인가. 무슨 언어로 설명해야 한다는 말인가. 나는 그 언어가 미국의 언어, 영어여야 한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그 언어가 현재로서는, 미국의 언어인 영어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영어로 말해야 해석된다. 영어로 말해야 권위를 갖는다. 그 언어는, 영어다.

스피박은 하위 주체에 대해 쓴다. 그는 제1세계 백인 페미니스트들을 비판한다. 스피박의 주장은 옳다. 그의 말은 옳다. 그런데 그 말은, 그 언어는 누구의 것인가. 누구의 말인가.

그 언어는 누구의 것인가. 누구의 말인가. 라고 할 때 나는 자신감이 없다. 책을 읽는 건 저자와 맞짱을 뜨는 일이다. 아? 이건 좀 아닌 거 같은데, 라는 생각이 들 때, 그 생각은 이쪽 혹은 저쪽으로 뻗어나간다. 내가 맞는 거 같아요, 당신 틀렸어. 아, 맞네. 당신 말이 설득력이 있네. 나는 항상 확신이 없는 쪽에 속하고, 저자를 믿는 쪽에 속하고, 저자에게 홀랑 넘어가는 쪽에 속하지만. 그런 내게 가끔 '어?'라는 순간이 찾아왔을 때, 논리도 해석도 수사도 부족하지만 그걸 적어두면, 이렇게 긴요하게 기뻐질 타임이 있다.










내 생각이 맞구나. 아, 내가 제대로 읽은 거네. 이 기쁨을 누구랑 나누지?ㅋㅋㅋㅋ 임옥희 님과 나눠야지.

임옥희 님! 감사합니다. 2015년에 『여성혐오가 어쨌다구?』 읽었을 때부터 팬입니다! 제가 에드워드 사이드를 읽고, 스피박을 읽고 그렇게 생각한 게 맞았어요. 너무 신납니다. '임옥희표' 탈식민주의 해석을 야무지게 착착착 읽어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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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4-06-03 12: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검사 들어갑니다......

단발머리 2024-06-03 12:34   좋아요 0 | URL
1. 마감은 언제인가요?
2. 노트 검사도 받아야하나요?
3. 인증샷에 셀카 포함되나요?

다락방 2024-06-03 14:0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 짱멋있어. 그래서 제가 뭘 할거냐면, 이 페이퍼에 링크된 책중 [오리엔탈리즘과 에드워드 사이드]를 사려고 합니다. 제가 7월부터는 [오리엔탈리즘]을 읽을 참이거든요.

내가 가려는 길은 앞서 단발머리 님이 길을 다 닦아놓으셨다.....

수이 2024-06-03 15: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매일 체크해야지 ㅋㅋㅋ

공쟝쟝 2024-06-03 16: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누구의 말인가?
영어다. 영어란 말이다. 영어란 말이당…다아다다다다다ㅏ당…

수이 2024-06-03 20:47   좋아요 1 | URL
당이 땡기시면 안됩니다. 그에게 지금 필요한 건 꼬기! 꼬기! 풀떼기 그만 먹고 스스로를 위해서 꼬기를 쫌!
 
















이 책을 마치면서 실천을 다짐하게 하는 여러 항목이 있다. 에코 페미니즘. 육식 절제, 유제품 절제, 탈코르셋, 전기를 비롯한 모든 에너지 절약 그리고 옷 사지 않기 등등. 기록을 위해 몇몇 문장을 남겨둔다. 



이 책의 <그 문장>으로는 이 문장을 꼽는다. 상황의 복잡성, 각각의 처지가 극히 개별적임에도 불구하고 그 일을, 해 보고 싶다. 내 안의 일부가 비판받는 경우라 하더라도. 그런 경우라 해도, 해보고 싶다.  



중산층 여성이 여성해방과 모든 억압받고 착취받는 이들의 해방에 진심으로 헌신하고 싶다면 우선 여성성에 대한 중산층적인 이상화를 비판해야 한다. (427쪽) 






인도의 경우 여성 구타는 모든 계급에서, ‘경제적으로 독립적이든 그렇지 않든 상관없이 나타난다. 더 많은 결혼지참금을 요구받다 사망한 여성의 경우 많은 이들이 고등교육을 받고 좋은 직장을 갖고 있고, 가족을 위해 돈을 벌고 있었다. 바르단과 라자라만 등은 이렇게‘경제적으로 생산적인‘ 여성이 살해당한 것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나는 아버지가 가난하거나 딸이 너무 많은 집안이어서 직접 결혼지참금을 벌기 위해 취업 자리를 찾는 미혼의 인도 여성을 몇 명 알고 있다. 아마도 ‘돈 버는 여성‘은 점점 더 집안으로부터 결혼지참금을 직접 벌라는 요구를 받을 것 같다. - P340

결혼지참금은 독신여성에 대한 증오가 강한 사회에서 필수적인 것이다. 미트라 Manoshi Mitra의 연구에 따르면 남편은 아내가 소득유발활동을 통해 돈을 벌기 시작하자마자 하던 일들을 모두 그만둔다. 이런 현실들을 간단히 살펴보기만 해도, 여성이 사회적으로 생산적인 노동에 참여하는 것을 통해 가부장적 억압과 착취와 폭력에서 해방될 수 있을 것이라는 단순한 경제적 주장을 포기하기에 충분할 것이다. - P340

이런 이미지의 일부에는 낭만적 사랑이라는 발상도 자리하고 있다. 이는 다른 어떤것보다 서구 여성을 감정적으로 가부장적이고 성차별적인 남녀관계에 묶어 둔다. 이상적인 중산층 여성상은 부양자 남편에게 경제적으로 의존해 있다. 이런 사실을 비롯해 이 모든 것을 총체적으로 고려하면, 중산층 여성 혹은 가정주부가 된다는 것은 특권이 아니라 재앙이다. - P422

여성성에 대한 중산층의 이상화, 특히 특수한 민족적 문화적 표현을 통한 이상화에 대해 페미니스트가 근본적인 비판을 제기해야 한다. 그렇지 않는다면 중산층 여성은 이른바 ‘뒤처진‘ 계급과 공동체 속에서 여성과 관련해 찾아낼 수 있는 진정으로진보적이고 인간적인 요소는 결코 볼 수 없을 수 있다. 중산층 여성이 여성해방과 모든 억압받고 착취받는 이들의 해방에 진심으로 헌신하고 싶다면 우선 여성성에 대한 중산층적인 이상화를 비판해야 한다. - P427

페미니스트의 노동개념은 노동이 목적의식을 갖고 있어야 하고, 그 일을 하는 사람이나 주변 사람에게 유용하고 필요한 일을 한다는특성을 가져야 함을 주장해야 한다. 이는 이 노동의 생산물이 유용하고 필요함을 의미한다. 오늘날 제3세계 국가에서 ‘소득창출활동‘으로 여성이 만들고 있는 대다수의 수공예품처럼 사치품이나 넘쳐나는 쓰레기가 아니어야 한다. - P446

이런 물건을 살지 안 살지를 우리가 선택할 수는 없다는 말을 우리는 할 수가 없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마지막 남아있는 개인적인 자유 한 조각을 자본에게 건네주고, 소비의 꼭두각시가 되는 것에 동의하는 것이 될 것이다. 불필요한, 그리고 기본적으로 해로운 사치품들을 구매하는 것을 개인적으로 거부함으로써, 각각의 여성 개인은 좀 더 큰 자유를 누리게 될 것이다. - P459

립스틱과 화장품은 여성이 보이콧해야 할 물품을 선택할 때 또 다른 기준을 제공해 주는 좋은 예이다. 이 상품들을 생산하는 데 있어 살아있는 유기체가 얼마나 잔인한 폭력을 감수했고, 생산지와 생산국의 생태적 균형이 얼마나 무너졌는가 하는 점이 고려되어야 한다. 상품 생산에 내재해 있는 자연파괴 역시 특정 상품의 구매를 거부하는 기준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 P4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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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4-06-02 17:3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다 읽으셨군요. 고생하셨습니다. 저도 특히 탈코르셋에 대해 더 깊은 다짐을 하게 합니다. 그것은 낭만적 이성애 사랑과도 깊이 얽혀있고 물론 그것들이 가부장제와 자본주의와 다 연결되어 있으므로.. 저는 하여간 탈코르셋 집중이고 에코 페미니즘도 물론이며! 언급하신 거 전부입니다. 마리아 미즈 님은 틀린 말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단발머리 2024-06-02 17:47   좋아요 2 | URL
감사해요, 다락방님! 저번에 읽을 때하고는 좀 다른 부분이 보이더라구요. 인도 지참금 문제나 여성의 경제력에 대해서도 더 쓰고 싶었는데, 아... 5월이 저한테 말도 안 하고 다 가버리대요 ㅠㅠㅠㅠ 다음에 또 읽어도 좋을거 같아요.
전 육식 절제는 그나마 좀 가능할 거 같은데, 옷 안 사기가 제1과제입니다. 대중교통 많이 이용하기도 그렇구요.
마리아 미즈님은 진짜 그러시더라구요. 모두 옳은 말씀입니다!!
 
가부장제와 자본주의 - 여성, 자연, 식민지와 세계적 규모의 자본축적 아우또노미아총서 45
마리아 미즈 지음, 최재인 옮김 / 갈무리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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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독이라 쉽게 넘어갈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탁탁 걸리는 문장들을 자주 만났다.

 


여성은 가축이 되었다. (156)

결혼제도는 남성과 여성과 재산을 축적하는 메커니즘이었다.(157)

여성은 영원한 소수자가 되었다. (169)

사냥꾼-남성은 기본적으로 생산자가 아니라, 기생자이다. (172)

우리의 현재 가족 개념은 부르주아의 가족 개념이다. (234)

여성 노동력은 저렴했다. (235)  

 


인류가 사냥꾼에서 목축유목민이 되는 과정, 목축유목민에서 농경 생활을 바탕으로 정주하게 되는 과정, 자본주의가 등장해서 발달하는 과정에서 사회 변화의 동력은 경제적 이해(이득)’.

 


사냥꾼 사회에서 목축유목민으로 넘어가는 과정에 가장 먼저 가축화된 것은 여성이었는데, 이는 여성만의 고유한 능력, 재생산(출산) 능력 때문이었다. 이웃 부족과의 전쟁 이후 상대 부족 남성들을 모두 살해했던 이유는 위험 요소만 가중시킬 뿐 쓸모가 없었기 때문(159)이고,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여성과 어린이들은 전쟁에서 승리한 부족의 소유가 되었다. 정확히는 사유 재산이 되었다.(158)

 


반복하자면, 당시 사회 구조 속에서 납치와 탈취로 여성 또는 여성의 육체를 얻는 방식은 다른 어떤 방법보다도 빠르고 확실한 부의 축척 방식이었다. 인류 초기의 남성과의 주도권 싸움에서 패한 여성, 여성 집단은 오늘날까지도 그 패배의 영향 아래 살고 있다. 여성 혐오는 인류 문명의 근간이 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한 정치, 경제, 문화적 압박은 여성을 인간이 아닌 여성으로만 한정했다.

 


생산자이자 노동자인 여성을 외부에서 더 많이 데려오기 위해 습격과 노예제를 이용하는 대신, 승혼제도로 발전시켰다. 이를 통해 유력자는 자신의 공동체나 계급에 속한 많은 여성에게 접근할 뿐 아니라, 약한 남성의 여성에게도 접근했다. 여성은 불균형 혹은 불평등한 결혼시장에서 하나의 상품이 되었다. 좀 더 많은 여성을 통제하는 것이 곧 부의 축적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163)

 


봉건시대에도 여전히 여성은 교환 상품으로 취급되면서 하나의 상품으로 기능한다. 그런 상황에서, 여성의 신분은 중요하지 않다. 왕국의 공주이건, 가난한 농민의 딸이건, 상관없이 남성들의 정치적 이유 때문에 여성은 거래되고 교환된다. 이 경우에도 가장 중시되는 것은 경제적 이해관계다.

 


여성은 자신의 생산성, 자신의 섹슈얼리티, 자신의 생식 능력에 대한 통제권을 자발적으로 남편과 유력자(교회, 국가)에게 넘겨주지 않았다. 수세기 동안 성적 생산적 자율성에 대한 가장 잔혹한 공격을 당한 끝에 유럽 여성은 의존적이고 길들여진 가정주부가 되었다. 오늘날 우리는 이런 원리 아래 살고 있다. 아프리카에서의 노예 습격과 대응하는 것이 마녀사냥이다. (168)

 


대부분의 희생자가 여성이었다는 점, 이를 통해 산파들이 출산 과정에서의 주도권을 빼앗겼다는 점, 여성 집단에 대한 혐오가 극에 달았다는 것에 더해, 어쩌면 이보다 더 중요한 측면은 경제적인 부분일 것이다. 말 그대로, 마녀사냥은 돈이 되었다. 마녀재판에 관계했던 변호사나 집행관들에게는 재판에 들인 노고와 시간을 보상하기 위해 사례금이 지급되었고, 처형된 마녀의 재산은 모두 선제후에 의해 압수되었다. (197)

 


신대륙의 발견(?)과 제국주의 침략으로 인해 식민지 본국은 막대한 경제적 이익을 얻게 된다. 내부적으로는 식민지 본국의 여성들을 가정주부화하고, 식민지의 자연과 본토인들을 폭력적으로 착취하고 억압한 결과다. 그 일은 유럽의 백인 남성들에게 돈이 되었다’.

 


처음에는 부르주아 여성이 그다음으로는 노동계급의 여성이 핵가족 결혼제도안에 묶이게 되었다. 여성의 재산권은 극도로 제한되었고, 기혼 여성이 일하고자 할 때 남편의 허락이 필요했다. 기혼 여성의 임금은 남편의 재산으로 귀속되었고, 그마저도 일할 기회를 얻지 못한 여성들은 가정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날 길이 없었다. 경제적으로 고립되었기 때문이다.

 

 



피 묻은 여성 운동의 결실로 이제 여성에게 불가능한 일은 없는 것처럼 보인다. 여성은 이제 투표할 수 있다. 여성도 대통령이 될 수 있고, 총리가 될 수 있으며, 대법원장이 될 수 있다. 그룹의 총수가 될 수 있고, 과학자가, 의사가, 교수가 될 수 있다. 자유주의 페미니즘의 주장은 옳고, 옳은 측면이 있다. 하지만, 이제는 바야흐로(?) 신자유주의 시대다. 정희진은 신자유주의 체제를 개인을 보호하는 공동체나 사회 구조가 작동하지 않고, ‘각자 알아서살아야 하는 통치 방식이라고 말했다. (<다시 페미니즘의 도전>, 9) 우리는 그 시대에 도착했다. 이미 도착해 버렸다. 가부장제를 이겨버린 신자유주의의 위용에 압도되지 않을 사람이 없다.

 


여성의 납치로 재산을 축적했던 시대를 거쳐, 마녀사냥을 통해 돈을 벌었던 시대가 지나갔다. 여성에게 돈을 빼앗아 남자에게만 재산권/상속권을 주었던 시대가 저물었고, 여성의 교육을 적극적으로 방어하고 여성을 가정에만 묶어두어 남자만 경제적 이득을 얻었던 시대가 끝났다. 여성의 진입이 불가능했던 여러 직업군에 이제 여성도 진출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 여성도 돈을 벌 수 있다. 자신의 생활을 자신의 힘으로 꾸려갈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를 정희진은 <신자유주의 통치와 페미니즘/알라딘 아카데미> 강연에서 이렇게 표현했다. “신자유주의가 만들어낸 환경 속에서 각자도생의 진정한(?) 남녀평등이 이루어졌다.”  

 


이를 내 위치/자리/처지/환경에 적용해 보자. 나는 가사 노동을 주로 하고, 사회적 계약 관계에 들어가지 않은 전업주부로 19년을 살았다. 나는 그 누구에게서도 1원 한 푼 받지 않았다. 받지 못했다. 그건 내가 일을 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나는 태업 주부이고, 불량 엄마이지만, 아무튼 나도 가정을 꾸려나가기 위해 얼마간의 일을 했다’. 하지만, 내 일은 국가 경제 지표에 포함되지 않는, 추상적으로만 존재하는 것이기에, 나는 돈을 받지 못했고, 사회적으로 문화적으로 노는 사람으로 분류되었다. 남편이 벌어오는 수입의 일부가 나의 노동에 빚진 결과물이지만, 그 일부가 내 것이라고 말할 수 없었다. 그 돈과 나의 연관성을 밝힐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벌지 않았다는 이유에서였다.

 


작년부터 일을 시작한, 사회적 고용 관계에 들어선 나는, 비정규직이라고 부르지도 못할 일용직노동자다. 사람들이 부러워할 만한 일은 아니지만, 부끄럽거나 하찮은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인간 성장의 중요한 한 순간과 내 일이 맞닿아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내가 만나는 사람들, 아이들을 소중하게 여기고, 내 힘을 다해 그들을 진지하게 대하려 애쓴다. 하지만, 은 그렇게 취급받지 않는다. 내가 하는 일은 전통적으로 여성이 하는 일로 인정받는 것이기에, 나 역시 그렇게 인식된다. 내 노동은 그 중요성에 비해 철저하게저평가 당한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에 드디어 도달했다.

 


남성이 여성을 납치해 재산으로 삼은 것이 돈이 되었고, 마녀사냥이 돈이 되었고, 여성의 재산권을 탈취하는 것이 돈이 되었고, 여성의 정치적 자유를 구속하는 일이 돈이 되었던 시대를 지나왔다면. 힘겹게 그 시대를 일정 부분 탈출했다면.

 


이제는 왜 어떤 것은 돈이 되고, 어떤 것은 돈이 되지 않는지 물어야 한다는 것이다. 외국인 노동자의 노동력을 부당하게 이용해 돈을 버는 것, 부동산으로 돈을 버는 것, 버닝썬을 운영해서 돈을 버는 것이 옳지 않다는 생각을 넘어, 그런 것만이 돈이 되는 세상에 대해 물어야 한다는 것이다. 돌봄의 가치가 제대로 평가받아야 하는 이유와 근거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어떤 사람보다 백 배나 중요하다는 생각에 우리가 동의하지 않는 만큼, 왜 어떤 사람의 급여가 어떤 사람의 급여보다 320배나 많은지 물어야 한다. 원래 그런 것이 아니라, 그런 인식 자체가 사람들의 사고 속에서 만들어진 것임을 이제는 알고 있으니 말이다.

 



금요일 피곤한 저녁, 퇴근 후 교회 가기 전에 한쪽을 썼다. 토요일 아침, 수험생 아침을 차리고, 크린토피아에 교복 바지를 맡기고, 커피를 사 들고 와서 두 문단을 썼다. 설거지를 하고, 중간중간 세탁통 청소를 하면서 나머지를 썼다. 청소기를 돌리고 나서 지금 이 문단을 쓴다. 이제 다림질만 남았다.

 


보이지 않는 가사노동과 저평가된 돌봄노동에 대해 써야한다고 생각한다. 아무도 강제하지 않았지만, 이 일들의 의미파악, 의미부여, 의미생산, 결론도출의 책임이 나한테 있다고 느낀다. 아무도 시키지 않았지만. 나 혼자. 아무도 모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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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과함께 2024-06-01 21: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재독 축하드려요~ 수고하셨어요!!

단발머리 2024-06-02 15:36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햇살과함께님!
훌라춤을 추고 있습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

공쟝쟝 2024-06-02 17:1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요 글을 읽고 (긴박하게 뭐라도 써야한다) 버튼이 눌려서 일하다 말고 토닥토닥 썼습니다.
자유주의 페미니즘은 민희진. 신자유주의 (를 함께 사유하는) 페미니즘은 정희진 되시겠습니다 ㅋㅋㅋㅋㅋ
저는 돌봄에 관심이 많아요. 그래서 단발머리님의 글에 관심이 많습니다. 아무도 시키지 않았지만 쓰도록 하세요.ㅋㅋㅋㅋㅋㅋㅋ
요즘엔 보이지 않는 가사노동을 가시화(sns 전시) 시켜서 돈을 버는 현상들도 많아요. 영향력이 돈이 되는 시절. 모든 것이 수익화 구조로 연결되는 플랫폼 신자유주의 시대에서. 나를 돌보고 타인을 돌보는 수익없는 무익함에 대한 이야기가 어떤 힘을 가질 수 있을지. 선생님은 이상적이시구나. 라는 말을 하면서도. 저는 거기에 배팅하기로 했어요. 왜냐믄... 돈 버는 거 잼없고 힘들당. 헥헥. 돈 마니 줘도 안할 거 같당.

단발머리 2024-06-03 09:05   좋아요 1 | URL
자유주의 페미니즘은 민희진. 신자유주의는 정희진님 되시죠. 모두 희진으로 끝나야 가능해지는 세상 ㅋㅋㅋㅋ
최고로 돈 많이 벌어다 주는 능력 있는 여성이라도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살아남기 얼마나 힘든지를, 민희진님이 보여줬다고 생각합니다. ˝맞다이로 드루와!˝는 더욱 그러하고요.
나를 돌보고 타인을 돌보는게 수익이 될 수 없고, 없을 듯 하다면, 다른 해답을(해답이라고 하기에도 좀 뭣하지만요) 찾아야 한다고 생각하고요. 전 그래서 다시 ‘기본소득‘. 로봇은 일하고 인간은 노는 세상, 그런 세상을 꿈꿉니다.

쟝님 안의 눌림 버튼 내 안에 있다!라고 자랑하고 싶은데, 쟝님 글(https://blog.aladin.co.kr/jyang0202/15585176) 너무 좋네요.
내가 쓰고 싶은 글이에요. 부럽고 존경합니다!!

다락방 2024-06-02 17:4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번에 재독하면서 두 가지에 놀랐는데요,
하나는 이 책이 너무나 좋다는 사실이었어요. 현실 감각에 있어서도 그렇고 철저하고 날카로운 분석에 있어서도 그렇지만, 그 해결 방법에 있어서도 그랬습니다. 게다가 그 사이사이 좌절하려는 저를 호되게 질책하며 다시 일으켜세워주는 것 같았어요. 정신 바싹 차리라고 하는 것 같아서 좋았습니다. 역시 책이 있어야 된다고, 누군가 써준 글이 필요하단은 생각을 했어요. 무너지려다가도 누군가의 어떤 글이 힘이 되기도 하는 거니까요.
두번째는 그런데 단발머리 님이 평소에 하시는 말씀이나 쓰는 글이 이 안에 다 있다는 거였어요. ‘아 단발머리 님이 이 책이 좋다고 말씀하셨던 건 다 이유가 있구나‘ 부터 시작해서, ‘단발머리 님의 그 생각들은 여기에서 왔을까?‘하는 것까지, 정말 단발머리 님 생각이 많이 나는 책이었습니다. 그런 한편, 저도 고개 끄덕이고 동의하면서 제가 ‘늦되다‘는 생각을 역시나 했어요. 단발머리 님은 이 책을 읽고 바로 캐치하셨던 것을, 저는 재독에야 비로소 담아둘 수 있겠단은 생각을 했거든요. 저는 늦되기 때문에 남들보다 더 부지런해야겠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앞으로도 많은 지도편달 부탁드립니다.

단발머리 2024-06-02 19:48   좋아요 2 | URL
저는 ‘이 과정은 고통스러운 과정이다‘라는 그 문장에서부터 이 책을 읽는 일이 괴로울 것이라는 예감을 했어요. 이번에 다시 읽으면서도 여전히 그런 시간이 이어졌구요. 그럼에도 다락방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철저하고 날카로운 분석으로 끌어가는 책이다 보니, 마리아 미즈의 설명과 해석, 그리고 해결책에 대한 모색이 너무나 저에게, 그리고 현시대를 같이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걸 몰랐으면 어땠을까, 이 책을 읽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라는 생각을 해보기도 했구요. 신의 한수와 같은 다락방님의 책선정 감식안에 다시 한 번 박수를 보내고 싶어요!!

이 책을 읽으며 제 생각을 많이 하셨다니.... 정말 너무너무너무 좋네요. 제가 좋아하는 책도 작가도 많지만요, 이 책은 그 중에서도 정말 좋아하는 책이구요. (하지만 원서는 능력치 밖.... 원서 읽기 도전했다가 3쪽만에 아웃ㅋㅋㅋㅋㅋㅋㅋ).
여성주의를 읽어가는 여러 방식과 태도가 있겠지만, 저는 ‘이해‘ 보다 중요한게 ‘감응‘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사실 저는 아직도 그게 잘 안 되고요. 다락방님이 여성주의를 읽는 방식과 태도 덕분에 <여성주의 책 같이읽기> 모임이 이렇게 오래 갈 수 있는것 같아요. 감동과 이해, 분노와 해석이, 그 적절한 균형과 조화가 우리의 읽기를 더 깊이있게 해줄거라고 믿어요. 저야말로,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우리, 오래오래 같이 읽어요!! 😘😍🥰
 
끝나지 않은 일 비비언 고닉 선집 3
비비언 고닉 지음, 김선형 옮김 / 글항아리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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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럽기는 한데, 사실은 사실이다. 이 책을 읽을 때 이 책이 꼭 나를 위해 쓰인 것만 같다고 느꼈다. 신기하게도. 내가 꼽은 문단은 여기다.



하지만 소설들과 나란히 발맞춰 등장한 긴츠부르그의 에세이들이야말로 나에게 직접 말을 걸어온 글들이었다. 딱 때맞춰, 꼭 나를 위해 쓰인 것만 같은 글들. 거기 그 에세이들 속에서 우리는 서술하는 페르소나의 창생을 보았다. 이 페르소나는 소설에 표현된 것과 똑같은 내면성에서 출발하되 어조와 조망의 관점은 확연히 달라서 논픽션 산문으로 은유를 창출하는 고전적 기예를 쓰면서도 차별화된 모더니즘적 특징을 확보했다. (157쪽)



고닉은 긴츠부르그의 에세이가 자신에게 그런 글이라고 말했는데, 내게는 고닉이 그랬다. 작년, 나의 발견. 작년에 읽은 책을 정리한 페이퍼에서 『상황과 이야기』를 말하며 나는 이렇게 썼다.



... 이 책이 ‘특별히’ 좋은 책이기는 하지만, 무엇보다 내가 이 책을 만났어야 하는 때에 만난 것이 신기하고 놀랍다. 오래 고민하고 궁금해하던 답을 이 책에서 찾았다. ‘논픽션 페르소나’에 대한 글을 머릿속으로 반 정도 써두었는데, 첫 문장이 떠오르지 않아 내내 미루고 있다. ‘나는 이 책으로 나를 가르친다’는 이슬아 작가의 말을, 이제는 이해할 것도 같다. (단발머리 페이퍼)



고민의 일부가 해결되었을 때 느껴지는 해방감, 쾌감, 즐거움을 나는 고닉의 문장에서 찾았다. 픽션뿐 아니라, 논픽션을 쓰는 사람도 페르소나를 쓴다는 것. 그 페르소나를 실제의 나와 분리해도 된다는 친절한 설명. 페르소나 속의 나는 훨씬 더 객관적이고 근사한 사람이어도 된다는 허락. 나는 마음껏 기뻤다. 한편으로는, 또 다른 깨달음이 찾아왔는데, 나의 것이든 혹 다른 사람의 것이든 논픽션 페르소나에 심취할 필요는 없다는 거였다. 일종의 주의사항이라고 할 수 있는데, 아름다움에 대한 찬미와 부끄러움과 후회, 성찰과 회복이 진실이 아니라거나 잘못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페르소나를 쓰고 있는 한 그건 어디까지나 작위적일 수 있다는 것. 그러니까, 이 한 문단을 쓰면서도 내가 (←)를 얼마나 많이 눌렀는지를 생각해 보면 될 일인데, 만들어진 것은 그 무엇이든 창작자의 의도가 숨어 있다는 것을 잊지 말라는 거였다. 내가 나에게 주는 위로 그리고 내가 나에게 주는 경고.



이 책에서 제일 주요한 거라면 아무래도 '다시 읽기'가 아닐까 싶다. 다시 읽는다는 것. 처음 읽을 때 보지 못한 것을 발견하는 순간들은 찬란하고 고요하다. 두 번 읽을 책이 아니면 아예 읽지 않는다는 원칙 아닌 원칙을 세웠던 때가 있었다. 지금도 금방 책을 고르지는 못하는 편인데, 그때는 진짜 책 고르는 데 시간이 많이 들었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며 좋은 책을 읽고 시간이 흐른 후에 다시 그 책을 읽는 것이 얼마나 기쁜 일인지 확인하게 되니 다시 그 원칙이 생각나기는 한다. 좋은 책을 골라 정성 들여 읽고, 머지 않은 시간에 그 책을 찾아 '다시' 읽기.

고닉의 페미니즘 모먼트(20쪽)는 더 이상의 부연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이고, 엘리자베스 스태턴의 연설문에 대한 부분은 유수님의 페이퍼를 참고하셔도 좋을 듯하다. 읽어야할 페이퍼가 2개이니 그것도 참고하시길.

(https://blog.aladin.co.kr/727621184/15544300https://blog.aladin.co.kr/727621184/15538317)


엘리자베스 스탠턴의 이야기는 나 역시 읽다가 멈춘 부분이고, 이것이 가부장제의 근간이 되는 '강제적 이성애'와 어떻게 결합하여 작동하는지에 대해 고민했던 부분이다. 다만 '실존'이라는 측면에서, 모두가 혼자이고, 또 혼자일 수밖에 없지만, 죽을 때까지 연결을 원하는 심경, 합일에 대한 갈구가 인간 본성의 부인할 수 없는 측면이라고 생각한다. 육체 안에 갇혀있기를 거부하는 힘이 인간 내부에 존재한다고, 나는 믿고 있다.

이야기하고 싶은 부분이 많지만, 오늘은 어제 올린 페이퍼와 관련된 문단만 올려보기로 한다. 긴츠부르그와 그의 두 번째 남편 간의 삶을 문학적으로 활용한 에세이가 「그와 나He and I」이다. 역사의 총아이고 의례적 숭배의 대상이 되는 결혼이 결혼 생활을 거치면서 어떻게 불행하게 만들어져 가는가를 그려낸 작품인데, 그 작품에서 불행은 화자 한쪽에게만 닥친 것처럼 보인다. 온갖 피해를 초래하는 건 전적으로 그, 그 남자다! 하지만, 저자는 서서히 자신이 이 불행에 공모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아, 또 나오는 것인가. 그놈의 쌍방과실!

"남편이 한 번 실수를 저지르면, 나는 그가 못 참고 기어이 분통을 터뜨릴 때까지 그 얘기를 하고 하고 또 하곤 했다." 새로운 발견이다. 고함 지르기와 신경 긁기가 맞물려 소정의 역학이 생겨나고, 그 역학은 애매모호함에 빌미를 주고, 그 애매모호함이 관계를 규정하는 짜증스러움을 담보하게 된다니.(159쪽)

삶의 역학. 그 끝없는 복잡함. 완벽한 가해자는 없고 완벽한 피해자는 없다. 전적인 잘못이란 없으며, 피해자 역시 불행에 공모할 수 있다. 이 모든 것은 쌍방과실이며.... 나의 책, 나의 고뇌. 고닉의 페이퍼를 푸코의 문장으로 마무리 짓는다. 고난과 역경을 헤쳐 나가기가 쉽지 않을 것이나, 그것이 전혀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권력은 그들을 포위공격하고, 그들을 거쳐 가고, 그들을 가로질러 간다. (『감시와 처벌』, 6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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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수 2024-05-27 15:1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선좋아요 후 하원하려다 읽어버림 중..

다락방 2024-05-27 15:2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맞춤할 때에 내개로 온 책이 있다는 것은 정말 행운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행운을 맞이하시 것 축하드리고요! 사실 저의 경우에는 너무 재미있게 읽은 책들에 대해서 그런 생각을 종종 하곤 합니다.

저는 고닉의 책을 한 권 읽고 더는 읽지 않는데요, 최근에 이 책에 대한 상찬이 여기저기 올라와서 흐음 한 번 더 도전해볼까 했거든요? 그런데 단발머리 님이 이 페이퍼에 옮기신 인용문들을 보니 저는 역시 고닉과는 친해질 수 없을 것 같아요. 저에겐 문장이 너무 어렵습니다. 저는 고닉의 책을 읽고 감탄하는 단발머리 님의 페이퍼를 읽는 걸로 대신하겠어요!!

2024-05-27 16: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4-05-27 20: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그레이스 2024-05-27 22: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빨리 읽고 싶어요 ㅠ

독서괭 2024-06-01 12: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엄머.. 꼭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요즘 머리 아픈 게 싫어서 페미니즘 책에 손이 잘 안 갑니다만.. ㅜ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