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나지 않은 일 비비언 고닉 선집 3
비비언 고닉 지음, 김선형 옮김 / 글항아리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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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럽기는 한데, 사실은 사실이다. 이 책을 읽을 때 이 책이 꼭 나를 위해 쓰인 것만 같다고 느꼈다. 신기하게도. 내가 꼽은 문단은 여기다.



하지만 소설들과 나란히 발맞춰 등장한 긴츠부르그의 에세이들이야말로 나에게 직접 말을 걸어온 글들이었다. 딱 때맞춰, 꼭 나를 위해 쓰인 것만 같은 글들. 거기 그 에세이들 속에서 우리는 서술하는 페르소나의 창생을 보았다. 이 페르소나는 소설에 표현된 것과 똑같은 내면성에서 출발하되 어조와 조망의 관점은 확연히 달라서 논픽션 산문으로 은유를 창출하는 고전적 기예를 쓰면서도 차별화된 모더니즘적 특징을 확보했다. (157쪽)



고닉은 긴츠부르그의 에세이가 자신에게 그런 글이라고 말했는데, 내게는 고닉이 그랬다. 작년, 나의 발견. 작년에 읽은 책을 정리한 페이퍼에서 『상황과 이야기』를 말하며 나는 이렇게 썼다.



... 이 책이 ‘특별히’ 좋은 책이기는 하지만, 무엇보다 내가 이 책을 만났어야 하는 때에 만난 것이 신기하고 놀랍다. 오래 고민하고 궁금해하던 답을 이 책에서 찾았다. ‘논픽션 페르소나’에 대한 글을 머릿속으로 반 정도 써두었는데, 첫 문장이 떠오르지 않아 내내 미루고 있다. ‘나는 이 책으로 나를 가르친다’는 이슬아 작가의 말을, 이제는 이해할 것도 같다. (단발머리 페이퍼)



고민의 일부가 해결되었을 때 느껴지는 해방감, 쾌감, 즐거움을 나는 고닉의 문장에서 찾았다. 픽션뿐 아니라, 논픽션을 쓰는 사람도 페르소나를 쓴다는 것. 그 페르소나를 실제의 나와 분리해도 된다는 친절한 설명. 페르소나 속의 나는 훨씬 더 객관적이고 근사한 사람이어도 된다는 허락. 나는 마음껏 기뻤다. 한편으로는, 또 다른 깨달음이 찾아왔는데, 나의 것이든 혹 다른 사람의 것이든 논픽션 페르소나에 심취할 필요는 없다는 거였다. 일종의 주의사항이라고 할 수 있는데, 아름다움에 대한 찬미와 부끄러움과 후회, 성찰과 회복이 진실이 아니라거나 잘못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페르소나를 쓰고 있는 한 그건 어디까지나 작위적일 수 있다는 것. 그러니까, 이 한 문단을 쓰면서도 내가 (←)를 얼마나 많이 눌렀는지를 생각해 보면 될 일인데, 만들어진 것은 그 무엇이든 창작자의 의도가 숨어 있다는 것을 잊지 말라는 거였다. 내가 나에게 주는 위로 그리고 내가 나에게 주는 경고.



이 책에서 제일 주요한 거라면 아무래도 '다시 읽기'가 아닐까 싶다. 다시 읽는다는 것. 처음 읽을 때 보지 못한 것을 발견하는 순간들은 찬란하고 고요하다. 두 번 읽을 책이 아니면 아예 읽지 않는다는 원칙 아닌 원칙을 세웠던 때가 있었다. 지금도 금방 책을 고르지는 못하는 편인데, 그때는 진짜 책 고르는 데 시간이 많이 들었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며 좋은 책을 읽고 시간이 흐른 후에 다시 그 책을 읽는 것이 얼마나 기쁜 일인지 확인하게 되니 다시 그 원칙이 생각나기는 한다. 좋은 책을 골라 정성 들여 읽고, 머지 않은 시간에 그 책을 찾아 '다시' 읽기.

고닉의 페미니즘 모먼트(20쪽)는 더 이상의 부연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이고, 엘리자베스 스태턴의 연설문에 대한 부분은 유수님의 페이퍼를 참고하셔도 좋을 듯하다. 읽어야할 페이퍼가 2개이니 그것도 참고하시길.

(https://blog.aladin.co.kr/727621184/15544300https://blog.aladin.co.kr/727621184/15538317)


엘리자베스 스탠턴의 이야기는 나 역시 읽다가 멈춘 부분이고, 이것이 가부장제의 근간이 되는 '강제적 이성애'와 어떻게 결합하여 작동하는지에 대해 고민했던 부분이다. 다만 '실존'이라는 측면에서, 모두가 혼자이고, 또 혼자일 수밖에 없지만, 죽을 때까지 연결을 원하는 심경, 합일에 대한 갈구가 인간 본성의 부인할 수 없는 측면이라고 생각한다. 육체 안에 갇혀있기를 거부하는 힘이 인간 내부에 존재한다고, 나는 믿고 있다.

이야기하고 싶은 부분이 많지만, 오늘은 어제 올린 페이퍼와 관련된 문단만 올려보기로 한다. 긴츠부르그와 그의 두 번째 남편 간의 삶을 문학적으로 활용한 에세이가 「그와 나He and I」이다. 역사의 총아이고 의례적 숭배의 대상이 되는 결혼이 결혼 생활을 거치면서 어떻게 불행하게 만들어져 가는가를 그려낸 작품인데, 그 작품에서 불행은 화자 한쪽에게만 닥친 것처럼 보인다. 온갖 피해를 초래하는 건 전적으로 그, 그 남자다! 하지만, 저자는 서서히 자신이 이 불행에 공모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아, 또 나오는 것인가. 그놈의 쌍방과실!

"남편이 한 번 실수를 저지르면, 나는 그가 못 참고 기어이 분통을 터뜨릴 때까지 그 얘기를 하고 하고 또 하곤 했다." 새로운 발견이다. 고함 지르기와 신경 긁기가 맞물려 소정의 역학이 생겨나고, 그 역학은 애매모호함에 빌미를 주고, 그 애매모호함이 관계를 규정하는 짜증스러움을 담보하게 된다니.(159쪽)

삶의 역학. 그 끝없는 복잡함. 완벽한 가해자는 없고 완벽한 피해자는 없다. 전적인 잘못이란 없으며, 피해자 역시 불행에 공모할 수 있다. 이 모든 것은 쌍방과실이며.... 나의 책, 나의 고뇌. 고닉의 페이퍼를 푸코의 문장으로 마무리 짓는다. 고난과 역경을 헤쳐 나가기가 쉽지 않을 것이나, 그것이 전혀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권력은 그들을 포위공격하고, 그들을 거쳐 가고, 그들을 가로질러 간다. (『감시와 처벌』, 6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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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수 2024-05-27 15:1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선좋아요 후 하원하려다 읽어버림 중..

단발머리 2024-06-07 16:56   좋아요 1 | URL
고닉은 사랑입니다. 하트뿅뿅!
먼댓글 서비스가 잠정적으로 중단됐어요 ㅠㅠㅠ 유수님 페이퍼랑 딱 엮고 싶었는데 그게 안 돼서 좀 아쉬워요.
아쉬운대로 유수님 글 링크 똭! 걸었습니다. 무척 기쁘게 생각합니다!!

다락방 2024-05-27 15:2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맞춤할 때에 내개로 온 책이 있다는 것은 정말 행운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행운을 맞이하시 것 축하드리고요! 사실 저의 경우에는 너무 재미있게 읽은 책들에 대해서 그런 생각을 종종 하곤 합니다.

저는 고닉의 책을 한 권 읽고 더는 읽지 않는데요, 최근에 이 책에 대한 상찬이 여기저기 올라와서 흐음 한 번 더 도전해볼까 했거든요? 그런데 단발머리 님이 이 페이퍼에 옮기신 인용문들을 보니 저는 역시 고닉과는 친해질 수 없을 것 같아요. 저에겐 문장이 너무 어렵습니다. 저는 고닉의 책을 읽고 감탄하는 단발머리 님의 페이퍼를 읽는 걸로 대신하겠어요!!

단발머리 2024-06-07 17:01   좋아요 0 | URL
네, 맞아요. 저도 사람이 만날 때가 있는 것처럼 책도 만날 때가 있다고 생각해요. 꼭 저를 위해 쓰인 것 같은 글을, 딱 맞춤할 때 만났습니다. 너무 행복했고요, 축하말씀도 감사합니다 ㅋㅋㅋㅋㅋㅋㅋ

제가 읽어보니 (겨우 3권 읽음) 고닉의 스펙트럼이 넓은 거 같아요. 왜 <사나운 애착>이 제일 큰 센세이션을 일으켰는지 알겠고요. 그래도 전 아직은 <상황과 이야기>가 좋고요. 할 이야기가 많아요ㅎㅎㅎ 페미니즘에 대해서, 이성애에 대해서, 짝을 이루며 사는 것, 그리고 이별과 외로움에 대해서도요. 찬찬히 풀어보겠습니다^^

2024-05-27 16: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4-06-07 16: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4-05-27 20: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4-06-07 16: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그레이스 2024-05-27 22: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빨리 읽고 싶어요 ㅠ

단발머리 2024-06-07 16:15   좋아요 1 | URL
전 다 읽고 나서 얼마나 아깝던지요. 바로 <짝 없는 여자와 도시> 들어갔습니다.
그레이스님도 저처럼 좋은 시간 가지게 되시길 바래요^^

독서괭 2024-06-01 12: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엄머.. 꼭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요즘 머리 아픈 게 싫어서 페미니즘 책에 손이 잘 안 갑니다만.. ㅜㅜ

단발머리 2024-06-07 16:13   좋아요 0 | URL
페미니즘 글쓰기의 전사 고닉의 책이기는 한데, 페미니즘 말고 다른 부분에 대한 이야기도 많아요. 전 무척 좋았어요, 이 책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