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닉의 신간. 독후 에세이인데 어쩐지 회고록을 읽은 기분이 든다. 고닉 본인이 시간을 두고 여러 번 반복해 읽은 책들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읽는 행위, 특히 "다시" 읽는 것은 과거의 자신으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내면을 톺아 보는 작업으로 화한다는 걸 노작가가 직접 보여준다는 게 사뭇 감동적이었다. 동시에 자아와 인물, 특히 시대와 불화하는 인간 군상에 대한 이해로 이끌어 주는 책이기도 했다.
그래서 낭만적이다. 바깥에선 별 관심없겠지만 우리 각자가 책과 맺는 열렬하고 내밀한 관계. 일생을 거쳐 여든의 작가가 토로하는 아직도 끝나지 않는 일. 열렬히 매혹되었던 시절은 지났을지라도 우리를 들뜨게 했던 문학을 다시 소환한다. 어째서 이런 게 그동안 기억에 남아있지 않았는지 의아해하며 놓쳤던 장면을 살피고 인물의 행적을 되짚어 본다. 작가의 경험과 인식이 어떻게 소설을 직조했는지에 대한 고닉의 분석도 적절하게 곁들어 있다. 젊은 날 빠져 지냈던 콜레트의 작품을 다시 읽으며 한편으로는 아쉬워하는 작가의 탄식은 아이러니하게도 소설에 대한 마음을 새로이 달아오르게 한다.
콜레트가 아니면 누가 오로지 여자만을 위해 따로 마련된 지옥을 들여다보는 이 초상을 - 아연판에 산으로- 에칭해낼 수 있었을까. 그리고 콜레트가 아니면 누가 그 초상을 풀어내는 데 그토록 철저히 실패할 수 있었을까. 나는 어느새 그에게 따져 묻고 있었다. 어째서, 어째서 당신은 더 큰 의미를 보지 못한 걸까? 나는 당신한테서 낭만적 집착에 사로잡힌 지적인 여자가 되는 것의 유일무이한 느낌을 알게 되었고, 그건 강렬한 소재였다. 그러나 오늘날 성적인 열정은 그 자체만 가지곤 단지 하나의 상황일 뿐, 은유가 되지 못한다. 혼자 시작되고 끝나는 이야기일 뿐 아무 의미도 담을 수 없게 되었단 얘기다. 이렇게 생각해보자. 요즘 세상에 어떤 여자가 젊은 날의 나처럼 콜레트를 읽을 수 있을까? 이 질문 자체가 답이다. 71
고닉이 문학에서 얻은 카타르시스가 어떤 형태였든 삶과 상처를 들여다 보는 도구가 되기 시작하면서 이 재독의 연대기는 존재 가치를 획득한다. 책이 “혼자 시작되고 끝나는 이야기”로 남지 않고 살아남아 한 사람의 고유한 내면 세계를 조형하는 것을 목격할 수 있다는 것이 이 책이 주는 여러가지 즐거움 중의 백미였다. 기록하기에 게을러서 읽고 흘려 보내기만 하는 나 같은 사람도 감화될 정도라니 말 다했다. 서평이라기에는 열렬하고 끈질기잖아, 싶기도 했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그거야말로 읽기의 본질일까? 다시 읽을 책과 그 책에 새로 밑줄 그을 것을 여전히 기대한다는 고닉의 마지막 문장을 보면 그러한 것도 같다.
몇 달 전 어느 늦은 겨울 오후, 세월이 한참 지나 <<고양이에 대하여>>를 다시 꺼내들었고, 이번에는 그 책을 앉은 자리에서 단번에 독파했다. 읽다 보니 예전에 이 책을 손에 들고도 이만큼 몰입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신기하기만 했다. 이번에도 나는 책이 처음에 상정한 독자가 되기까지 성장해야 했고, 책은 그런 나를 내내 기다려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