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의 사람들 - 인간 악의 치료에 대한 희망 보고서, 개정판
M. 스콧 펙 지음, 윤종석 옮김 / 비전과리더십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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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위험한 책이다, 로 시작하는 위험한 책, <거짓의 사람들>을 읽었다. 저자는 <아직도 가야 할 길>이라는 책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거짓의 사람들>은 정신 치료 과정에서 저자가 만나고 치료했던 여러 환자의 임상과 그 현장에서 맞닥뜨린 악에 대한 생생한 경험을 바탕으로 한 책이다. 이 책의 중요한 논거는 악하다는 것을 인간 성격의 한 측면으로 파악한 것이 아니라, ‘질병의 하나로 보았다는 점이다. 정신 의학자이며 의사로서 가지고 있는 학문적 배경과 임상 경험을 통해 거짓말을 잘 하는정도를 넘어서 악의 모습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관찰과 대응이 비교적 소상하게 그려져 있다. 챕터 6에서는 <집단의 이름으로 악을 자행하는 사람들>에 대해 말하며, 그 실례로 미국의 베트남전 파병과 민간인 학살을 비롯해 그 곳에서의 악행을 다루었고, 당연히 한나 아렌트의 논의와 다른 철학적 접근도 이야기하고 있다.



챕터 5에서는 축사라는 부분이 다뤄지는데, 이 부분에 대해서는 사람마다 호불호가 갈릴 듯싶다. 일단 인간에게는 영혼이 있다라고 믿는 사람들과 영혼이란 없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 테고, ‘악한 영의 존재는 실재한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과 그런 건 오로지 사람들의 상상력의 산물이다라고 믿는 사람들도 있을 테다. 저자는 기독교인이면서 정신과 의사로서 오랫동안 이런 악한 영의 존재에 대해 불신해 왔는데, 부인할 수 없는 초자연적인경험을 한 이후에 생각의 변화가 있었던 것 같다. 나 같은 경우, 대한장로회 통합 측의 엄격하고 경직된 분위기의 장로 교회에 자랐지만, 고등학교와 대학교 시절, 여러 장소(기도원 등등)에서 여러 초자연적인 장면들의 일부가 되었던 터라, 그런 서술이 전혀 부담스럽지는 않았다. 나는, 인간에게 이 전부라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고, ‘육체라는 이 껍데기 너머에 (내부에, 이면에) 하나님의 거룩한 일부(하나님의 영)가 거하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나는 73쪽의 이 문장들을 이해할 뿐 아니라 믿고 있다는 뜻이다. 우리 안에는, 인간의 삶 속에는 성스러운 의미가 있다는 것을.

 

우리는 태초에 하나님이 우리를 그분의 형상대로 지으셨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우리는 그것을 과연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있는가? 우리는 신을 닮은 존재로서의 책임을 받아들이고 있는가? 인간의 삶에는 성스러운 의미가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있는가? (73)

 


기억에 남는 부분은 정신 상담을 위해 찾아온 십대 환자악한부모에 대한 이야기다. 전문가인 의사의 조언이나 설명을 듣지 않고 자기변명에 빠진 부모들. 자신들은 괜찮은 정도를 넘어 좋은부모라는 착각에 빠진 부모들을 세세히 관찰한 부분이다. 저자의 결론은 이렇다.

 


사실 그 문제에 제대로 파고 들어가 보면 문제의 진짜 원인은 자녀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부모, 가정, 학교, 사회에 있는 경우가 너무도 많다는 사실을 발견하곤 한다. 한마디로 말해서, 아픈 아이 뒤에는 아픈 부모가 있다는 것이다. 부모 생각에는 아이들을 고쳐야 한다고 판단할지 몰라도 대개 서둘러 고쳐야 할 사람들은 바로 그런 판단을 내리고 있는 부모 자신들이다. 진짜 환자는 부모들인 것이다. (105)

 


나는 경험에 의해 악은 후손에게 이어지는 것 같다는 결론을 얻었다. 4장에서 예로 들게 될 그 사람에겐 악한 부모가 있었다. 하지만 그런 대물림 현상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오랜 '유전이냐 환경이냐'는 논쟁의 해결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악이 후손에게 내려가는 것은 그것이 유전자를 통하여 전달되기 때문인가 아니면 아이가 부모를 보면서 배우고 따라하기 때문인가? 아니면 부모에 대해 자신을 방어하려다 그렇게 되는 것인가? 악한 부모를 둔 많은 자녀들이 상처는 받으면서도 악한 사람이 되지는 않는다는 사실은 또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우리는 모른다. 그리고 엄청난 고통이 따르는 과학적인 연구 작업이 지속되지 않는 한 우리는 여전히 모를 것이다. (145)

 

 

인간 성격 형성에 가장 결정적인 요소는 당연히 부모다. 유전적인 요인의 핵심이 바로 부모이고, 유아기에 특히 절대적일 수밖에 없는 환경적 요인 역시 부모가 결정한다. 정확히는 부모가 결정한다기보다는 부모 자체가 환경이다. 유전과 환경이 부모에게 달려있다. 악한 부모 밑에서 자란 사람은 악한사고의 흐름과 생활방식을 학습할 가능성이 매우 높을 것이다. 악한 부모에 대해 자신을 방어하려다 오히려 더 악한 사람이 되는 경우도 발생할 것이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악한 부모를 두었는데도, 끊임없는 노력으로 부모 같은 사람이 되지 않는 경우도 있다. 물론 흔한 경우는 아닐 것이다. 저자는 설명하기 어려운 이 상황에 대해 모르겠다라고 말한다. 인간 삶에 미치는 다양한 변인을 통제하거나 관찰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기에 나 역시 그럴 수밖에 없을 거라 생각한다. 알 수가 없다.

 

 


모든 책이 육아서로 읽히던 계절을 지나왔다고 생각하지만, 이 책은 내 자신의 부모됨에 대해 다시 생각하는 시간을 만들어 주었다. 이제 아이들이 제법 자랐으니, 이제 무언가를 주기보다는 아이들 스스로 자신의 삶을 구성하고 만들어 갈 수 있도록 놓아주는것이 부모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276쪽 저자의 문장을 그대로 옮기자면 자녀의 독립과 분가를 위해서는 부모가 자신들의 외로움을 견딜 수 있어야만 한다는데 동의한다. 나 역시 그러고 싶고, 또 현재로서는, 부모인 내가, 아이들에게 정서적으로 기대지 않으면서 나 자신의 외로움을 잘 견뎌낼 수 있을거로 생각한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남편과 부모님과는 다른, 그러니까 내게 전혀 다른 질감과 무게의 감정을 불러오는 아이들에 대한 내 사랑이, 아이들에게는 물론이고 내게도 각별하다는 생각이 들기는 한다. 완벽하게 구별된 존재이되 하나의 공간 속에 같이 살았던 공존의 시간 말고도 아이와 나만이 공유했던 경험과 느낌이 존재하니 말이다.

 

 


지난주, 출근하는 중에 라디오를 들었다. 10. 29 참사 희생자 어머니의 인터뷰를 듣고 있는데,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그날따라 렌즈를 끼고 있어서 눈앞이 금방 뿌옇게 변하는 것을 핸들을 꽉 움켜지고 눈물을 참고 또 참았다. 먼저 죽은 자식의 생일상을 준비하는 마음에 대해서, 나는 모른다. 여행 계획을 맡아했던 아이가 이제 이 세상에 없어 아무 데도 가지 못하는 마음을, 나는 모른다. 알 수 없는데. 알 수 없는 내 마음은 같이 울고 있었다. 오히려 그 어머니는 덤덤하신데도 말이다.

 

 

10. 29 참사에 대한 글을 머릿속으로 쓰고 지우고 쓰고 지우고를 반복한다. 내 생각과 내 느낌, 내 글의 뿌연 배경으로서가 아니라, 그 사건의 원인과 현재, 그리고 잃어버린 159명의 사람들에 대한 글을 쓰고 싶었는데 그게 잘 안됐다. 서울 한복판을 걸어가다가 갑자기 벌어진 이 참혹한 사고에 대해 아무도 책임지지 않고, 그 안타까운 죽음에 대한 애도를 시작조차 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떠오를 때마다 마음 한 켠이 너무 무겁다. 진상 규명을 요구하는 유가족들의 절절한 외침이 꼭 실현될 수 있기를 바란다. 책임자가 그에 합당한 처벌을 받기를 원한다. 크게 도울 수 없다면, 적어도 그들을 잊지 않고 기억하고 싶다. 계속 말하고 싶고, 그리고 또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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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돌아옵니다
    from 책이 있는 풍경 2023-11-02 11:21 
    댓글을 쓰다가 또 길어져서 페이퍼로 씁니다. 저는 이게 혹시 질병이 아닌가 싶습니다. 댓글 길게 쓰다 페이퍼 쓰면서 먼댓글로 연결하는 병 말입니다. 사회주의와 유물론, 무신론에 관한 부분을 같은 선상에서 연결해 설명하는 건 어려울 거 같고요. <신을 옹호하다>의 테리 이글턴의 주장을 중심으로 제가 이해한 범위 내에서 이야기해 볼게요. 건수하님의 물음에 대한 간편한 대답이라면, 그렇습니다. 사회주의는 무신론과
 
 
다락방 2023-11-01 13:1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 스캇펙의 다른 책-아직도 가야할 길-을 가지고 있지만 아직 읽지는 않았거든요. 그런데 이 책 너무 읽고 싶네요.

저는 보고 있기 힘들어서 금쪽이 상담소인가? 그 프로 안보는데요, 거기에서도 보면 오은영 박사님이 아이들 관찰하시면서 부모의 과거를 묻거나 하는 일일 종종 있는 것 같더라고요. 아픈 아이에게는 아픈 부모가 있다는 말씀, 고개 끄덕여집니다. 그런 한편,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 를 읽다 보면, 총기로 아이들을 무차별 학살한 가해자는 누가 보기에도 행복한 가정에서 자랐거든요. 그리고 부모를 사랑했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을 죽이고 자신까지 죽이는 일을 할 수 있기도 하다는 걸 보면 역시, 부모가 환경 그 자체일 수 있지만 그것만이 전부는 또 아닐테고요. 저는 ‘악‘에 관심이 많은데, 이 책 제가 꼭 읽어봐야 할 것 같아요.

아, 저 일전에 읽었던 책 중에 부모가 살해당하는 걸 목격한 형은 연쇄살인범이 되고 동생은 경찰이 되는 그런 책이 있었어요. 한 아이가 자라서 성인이 되고 그리고 그 성인이 ‘어떤 ‘성인이 되느냐는 알 수 없는 것 같기도 합니다. 작가의 말처럼 ‘모르겠다‘ 라고 밖에 답할 수 없을 듯요.

저도 이 책 읽어볼래요!!

단발머리 2023-11-01 17:53   좋아요 0 | URL
저도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 기억나요. 행복한 가정에서 자란 아이가 다른 사람을 죽이고 자신까지 죽이는 일이 어떻게 가능할걸까. 저는 그 엄마의 말을 믿거든요. 그 아이는 죽이러 간 게 아니라, 죽으러 간 거라는 말.... 그게 자기 아이가 그 끔찍한 범죄의 주동자가 아니라 소극적인 가담자라는 변명으로 들리기는 하지만.... 그 책을 읽고 나서, 전 그렇게 생각했던 거 같아요.

형은 연쇄살인범이 되고 동생은 경찰이 된다는 거, 똑같은 상황을 겪은 후에 완벽하게 반대의 그런 행동이 나온다는 거... 저도 항상 궁금하기는 합니다. 결국 알 수 없다,라고 말하게 되네요.

<아직도 가야할 길>을 저도 가지고 있습니다. 아직 읽지는 않았구요^^


공쟝쟝 2023-11-01 13:2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문단, 저는 기억할 것입니다.
단발님 아이를 낳지 않아도 경험하지 않아도 그런 상실을 절대적으로 모른다고 하여도 헤아려 볼 수는 있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걸 안하는 걸, 기능적 실용적으로만 보려하는 것, 그걸 말이라고 떳떳해 하는 건 악이죠.

저는 친구님 덕분에 ‘사랑’을(내가 폐기하고자 했던 것) 종교적인 맥락까지 포함해서 다시 생각해보고 있어요. 그 역시 제가 완전히 이해하긴 어렵겠으나. 믿는다는 건 이해의 영역이 아니고 사랑의 영역이라는.

“(49) 하지만 다른 관점에서 보면 그 말을 인정하기가 어려워 진다. 현실에서는 사랑이 역사의 중심이 아닌 게 명백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우리가 사랑마저 실질적으로 사유화된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기독교 신앙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고 많은 사람이 생각하는 이유의 하나가 여기 있다.
디치킨스가 빚지고 있는 자유주의적 인본주의(liberal humanism)의 유산에서 사랑은 개인적인 차원에서만 이해될 수 있다. 사랑은 디치킨스의 정치적 어휘에 포함되지 않으며, 그들이 혹시라도 사랑이라는 단어를 쓴다면 당혹스럽게만 느껴질 것이다. 많은 사람이 인간 실존의 중심에 놓여 있다고 여기고 개인의 삶에서 무척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자유주의 전통의 시각으로는 세상사에서 주변적 위치를 차지할 뿐이다. 예컨대 정치적 사랑이라는 개념은 디치킨스에게 별 의미가 없을 듯하다. 한데 사회주의에선 정치적 사랑이라 할 만한 것이 윤리의 근간이다. 문제는 사랑이 그저 성애와 로맨스, 개인과 가정의 일로 거의 완전히 축소되어 버린 사회에서 정치적 사랑이 어떤 의미를 지닐 수 있는지 알기 어렵다는 점이다. 결국 디치킨스가 지금과 같은 글들을 써내는 이유 중 하나는, 사랑의 문제에 대해 자유주의와 다른 답을 내놓을 수 있는 전통이 오늘날 흔적도 없이 가라앉을 위험에 처해 있기 때문이다.“ - 신을 옹호하다

(찡긋-)

단발머리 2023-11-01 17:57   좋아요 2 | URL
일단 이 댓글에서는.... 디치킨스가 누구인지 밝혀줘야 합니다.

* 무신론 과학자들의 대표자로 <신은 위대하지 않다>의 크리스토퍼 히킨스와 <만들어진 신>의 리차드 도킨스를 합쳐 부르는 말이 디치킨스입니다.

급, 양자역학이 떠오르네요.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익숙해지는 것이다.

(찡긋-)

건수하 2023-11-01 20:09   좋아요 3 | URL
디치킨스라는 단어를 처음 보았네요. 그러면… 사회주의 맥락에서는 무신론이 가능하겠군요?

(이 책이 의도하는 바는 아닐 것 같지만…?)

공쟝쟝 2023-11-01 22:12   좋아요 2 | URL
수하님 참 사회주의자는 참 종교인과 같다... 정도로 갈음하는 걸로! ㅋㅋㅋㅋ
저는 너무도 심오해서 점점 독서의 맥락을 잃어버렸고... 신앙이란 역시나 제 이해를 넘어서는 영역이지만...
바로 그 이해할 수 없는 영역에 *사랑*을.. 배치하고 일단... 신은 사랑이고요...... 사회주의는 (자본주의역시).. 그러니까 신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인간이 신을 넘어설 수는 없습...니다.. 사랑은 그런 원리를 포함하는 것... 사회주의가 무신론이라고 떠들어봐야 신(사랑)은 있음...ㅋㅋㅋㅋ 아직 덜 읽었지만... 신을 옹호하는 부분이아니라... 19세기 자유주의 합리주의 자장안에 있는 잘나가는 영미지식인들(디치킨스)까는 걸로 읽기엔 매우 재밌습니다.
˝(30)스스로를 만들어낸다는 생각은 부르주아적 환상의 전형이다˝ 신을 폐기한 자들이 만든 신(무신)은 정통 기독교만 못하다(이 부분은 확언)는 게 1/3 읽은 제 생각입니다. (참고로 제 종교는 거의 유교임을 밝히...ㅁ)

건수하 2023-11-02 10:02   좋아요 1 | URL
사회주의도 좋지만
자유주의 합리주의를 버리기가 참 어렵습니다... 몸에 새겨져있달까 ㅠㅠ

단발머리 2023-11-02 11:22   좋아요 1 | URL
댓글로 쓰다 길어져서 글 썼어요. 급하게 쓰느라 허접하지만 두 분은 읽으셔야 함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내 댓글의 창시자들 ㅋㅋㅋㅋㅋㅋㅋㅋㅋ

미미 2023-11-01 14: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영화 <실버라이닝 플레이북>이 떠오릅니다. 강압적이고 자기 중심적인 아버지(로버트 드니로)
아래에서 두 형제의 성격이 극명하게 엇갈리거든요. 국내 한 프로파일러가 범죄심리학 관점에서
영화를 해석하는 프로가 있었는데(제목이 생각안남ㅜ) 같은 폭력에도 다르게 반응하는 심리를
잘 설명해주어서 인상적이었어요. 10.29 참사는 무책임과 혐오 때문에 현재진행형인것 같습니다.
저도 뭔가 쓰고 싶었는데 못했어요. 피해자 유족들은 물론 세월호에 이어 전국민적 트라우마가 더해졌네요.

단발머리 2023-11-01 18:04   좋아요 1 | URL
아롱이 다롱이라는 말이 실감나네요. 똑같은 상황에서 각자 사람들이 다르게 반응한다는 게 말이에요.

저는 10.29 참사의 가족들은 세월호 가족들보다 훨씬 더 힘들지 않을까 싶어요. 세월호 때는 국가 경제 자체가 휘청했잖아요. 사람들이 놀러도 안 가고, 외식도 안 하고요. 전 국민이 같이 아파해준 시간이 있었다고, 전 그렇게 생각해요. 아직 진상조사 제대로 안 되었지만요. 근데 10.29 참사는 사진 위패도 없이 추모하고, 그냥 덮어버린 측면이 많아서 더 마음이 아픕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기 위한 노력을 하지 않고 있다는 것도 문제이고요 ㅠㅠ

책읽는나무 2023-11-01 14: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은 처음 보는데 말입니다.
요즘 저도 부모란 어떤 존재인가? 고민하고 있었거든요. 읽으면서 눈이 확 뜨이네요.^^
저도 지난주 지인과 대화 속에서 금쪽이 이야기가 나왔었는데 다들 아이를 관찰하기보다 부모를 관찰하고 부모가 바뀌어야 한다.고 입을 모았는데 어떤 분이 요즘 젊은 세대는 금쪽이를 보구선 부모를 전국적으로 망신을 주는 프로그램같아 보인다고 얘길 하더라는군요.
이게 무슨 뚱딴지 같은 말인가? 싶었는데 이렇게 세태가 바뀌어가는 것인가? 또 그런 생각도 드는 거에요.
부모가 바라봐도 부모의 잘못이 보이지 않는 것인지? 아니면 부모의 아픔이 먼저 보이는 것일까? 혼자서 아무리 생각해 봐도..결론은 참부모가 되어야 자식이 올바로 성장하는 것이다.라고 생각되어지는데 말입니다.
사람 마음이 다 제각각이어 어떤 기준점이 흔들린다는 게 무섭기도 했네요.

세월호 참사나 10.29참사등 내가 해당되지 않으니 아픔에 공감하지 못한다는 것! 자식 세대들이 보고 배울까봐 두렵네요.ㅜㅜ

단발머리 2023-11-01 18:08   좋아요 1 | URL
이 책에 ‘문제적인‘ 부모의 임상 경험을 읽다보면, 특히 그 대화를 읽다보면, 아... 사람들이 자신의 악행, 잘못에 대해 이렇게까지 무감각할 수 있겠구나, 싶어요. 좋은 사람인척 하지만, 실제로는 ‘정상적인‘ 범주를 넘어선 사람들인데... 사회에서는 정상처럼 보이구요. 그 피해는 오롯이 그 집 아이들 몫이더라구요.

저는 <페이드포>의 인용문이 눈에 들어와 도서관에서 빌려 읽었는데, 잡자마자 후르륵 읽었네요.
근데도 잘 모르겠어요. 좋은 부모란 어떤 부모일까요? @@

꼬마요정 2023-11-01 16: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말씀하신 그 어머니의 마음을 완전히 알 수 없겠지만, 소중한 사람을, 소중한 존재를 잃는 슬픔은 어느 정도 알고 있으니까요... 가슴이 아픕니다. 책임지는 일이 무엇보다 어려운 나라에 살고 있는 것 같아요. 어느 순간부터 사과하고 책임을 지는 일이 호구가 된 것처럼 느끼나봐요. 아마 부와 권력이 있는 사람들은 잘못을 저지르고도 다 빠져나가고, 어느 잘못은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해서 결국 해결되는 것 없이 사회에 화와 억울함이 쌓여가나 봅니다. 같은 부모 밑에서도 자녀들이 다르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처럼, 이런 사회에서도 사람들은 저마다 다르게 생각하고 행동하네요. 추모하는 사람들과 조롱하는 사람들로 나뉘는 걸 보면요. 그래도 생명에 대해서는 좀 진지하고 너그러워지면 좋겠는데... 오늘 마세라티 운전자가 차를 치고 도망치다가 가드레일을 부수고 추락해서 사망했다는 기사를 봤어요. 댓글이 너무 무섭더라구요. 셀프 정의 실현이라고... 음주 운전 여부도 아직 모르는데, 피해자가 심하게 다치거나 죽은 것도 아닌데 너무 무서웠어요.
자꾸 과하게 잘못에 대해 비난을 하니 또 다들 책임을 회피하는 건가 싶기도 하고... 이런 현상은 부모들이 중심을 잡고 바로잡아 줄 수 있다면 좋겠어요.

단발머리 2023-11-01 18:26   좋아요 1 | URL
책임지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한 거 같아요. 세월호로 처벌받은 사람이 딱 한 명이라고 하더라구요. 이번 10.29 참사에서도 행정안전부 장관이 사퇴도 안 하고 처벌도 안 받는 거 보면서..... 참, 뭐라 더 할 말이 없어지더라구요.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사건의 진실이 규명되기를 바랄 뿐이에요.

꼬마요정님 글 보고 그 사고 찾아봤는데 그러게요. 사람들 말이 다 독하네요. 그 사람이 잘못했다면 딱 그만큼의 처벌만 받으면 될 것을 말입니다. 삶과 죽음이 그렇게 가벼운 것이 아닌데... 혐오가 대세가 되어버린 이 세대... 어쩌면 좋을까요 ㅠㅠㅠ

2023-11-02 09: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11-02 10: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독서괭 2023-11-02 13: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휴... 이 글 읽고 무거운 마음에 댓글을 못 달고 있었습니다. 아직 모든 책을 육아서로 읽는 시기를 지나고 있는 저는 이 책도 육아서로 보여 솔깃하군요. 최근 김애란 작가의 ‘입동‘이라는 단편(<바깥은 여름>에 실림)을 다시 읽었는데 너무 슬퍼서 제대로 이입하기가 무섭더라고요. 세월호, 이태원.. 사고의 이름이 어떻든 아이를 잃은 부모의 마음은 오죽할까요..
부모의 역할, 악한 부모 밑에 선한 아이, 선한 부모 밑에 악한 아이.. 참 어려운 문제 같습니다. 저는 이런 주제 나오면 항상 떠오르는 드라마가 있는데, <너를 기억해>예요. 서인국이 자기가 괴물이 아닐까 걱정하며 자라는데, 어느날 그의 강의를 들은 학생이 ˝살인마 아버지를 둔 자신의 안에도 살인마가 있는 건 아닌지˝ 고민하며 상담하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아, <굿 걸 배드 걸>이라는 소설도 떠오르네요. 악한 어머니 밑에서 자란 소녀의 성장기, 극복기 같은 책인데..
이제 먼댓글 읽으러 갑니다 ㅋ

단발머리 2023-11-07 18:07   좋아요 0 | URL
아.... 김애란 작가가 그런 글을 썼군요. 너무 오랜만입니다, 김애란...

<너를 기억해>가 그런 내용이군요. 전 처음 들었구요. 이게 엄청 무겁고 답을 찾기 어려운 주제인데 드라마나 소설을 읽으면 좀 다를까 싶습니다. 전 어디서인지 기억 안 나는데, 정신과 의사이던가 정신분석학자가 ‘사이코패스‘ 연구하는데... 자기 뇌가 딱 사이코패스 뇌여서... 깜놀하면서 그런데 자기는 왜 사이코패스 범죄자가 안 되었나, 그걸 추적하는 책이 있더라구요.

육아가 쉽지 않지요ㅠㅠㅠ 24시간 부족하구요. 애쓰십니다, 독서괭님! (토닥토닥)
 
친밀한 적 - 식민주의하의 자아 상실과 회복, 개정번역판
아시스 난디 지음, 이옥순.이정진 옮김 / 창비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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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스 난디의 <친밀한 적>을 읽었다. 작고 얇은 책인데 생각보다 훨씬 더 오래 걸렸다. 읽기는 다 읽었지만 내용의 반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거 같아 나중에 시간이 되면(시간을 내서) 다시 읽어봐야겠다, 그런 기특한 결심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 방대함을 담기에 나는 너무나 작고 연약한 한 마리의... 독자일 뿐이며... (고라니, 라고 쓰고 싶었는데, 고라니님 허락을 받아야 해서 쓰지 않음)

 


책 뒤쪽에 출간 25년을 맞이해 작성된 기고문이 있는데, 본인의 책을 이렇게 요약해 두었다. 그대로 옮겨본다.


 

<친밀한 적>은 지배자가 치러야 했던 몇몇 중요한 댓가에 대한 회계 정리를 한다. 그 댓가로는 남성성을 훼손하는 여성성에 대한 극도의 두려움과 경직된 성별위계, 아동기의 상실과 오로지 성년의 준비 단계이자 교육대상으로 아동기를 재규정하는 것, 진보와 생산성을 절대화하는 세속적인 관념으로 인한 살아 있는 우주의 속화(desacralization), 급진적인 다양성과 미래에 대한 다원적 비전을 쉽사리 받아들일 수 없는 협소하고 경직된 자아를 꼽을 수 있다. (231)

 

 

식민주의란 식민지의 획득과 유지를 지향하는 대외 정책. 경제적ㆍ정치적인 세력을 국외의 영토로 확장하고, 정치적 종속 관계를 통해 그 지역을 자국의 영토로 삼는 제국주의적 침략 정책을 이른다. <네이버 국어사전> 타자화의 주된 형식인 오리엔탈리즘의 작동은 식민주의와 인종주의의 결합을 용이하게 만드는데, 상대방에 대한 규정을 통해 자기 정의를 실현하는 방식은 이분법의 자장 안에서만 가능하다. 아시스 난디는 이러한 쉬운 이분법에 반대한다.

 

 

나는 역사의 수레바퀴에 낀, 잘 속아 넘어가는 대책 없는 식민주의의 희생자라는 인도인상()을 거부한다. (26쪽)

 

 

저자는 피식민 상태와 아동 간의 상동 관계를 다루면서, 식민주의가 원시성과 아동 사이에 새로운 유비를 확립(56)했다고 주장한다. 식민주의는 성인 남성인 유럽인들이 순진무구하고 배우려는 의지가 있고 교정 가능한어린애다운(childlike) 인도인과 무지하나 배우려 하지 않고 야만적이며 교정 불가능한유치한(childish) 인도인을 진보의 이름으로 문명화시키겠다는 그들만의 약속이다.

 


성숙한 남성성이라는 이데올로기의 식민지 수출이 아프리카에서는 비교적 용이했던 반면, 그 나름의 문명을 갖추고 있는 것이 확실한 중국과 인도에서는 작동이 쉽지 않았다. , 강한 민속적, 구비적, 농촌적 특성을 소유한 아프리카 고유의 문화를 쉽게 야만이라고 폄훼할 수 있었던 것과는 달리, 중국과 인도의 4000년이 넘는 공적 삶의 전통, 잘 발달된 문필 전통, 종종 유럽 최고의 지성을 사로잡은 대안적인 철학 예술 및 과학 전통(59), 그리고 과거가 현재에도 유지된다는 인도의 시간관은 영국의 인도 지배를 더욱 곤경에 빠뜨렸던 것이다.

 

 


식민 지배 세력의 정치적 신화를 가장 창의적으로 구축한 이로 저자는 키플링을 꼽는다. 그와 정반대의 인물로는 조지 오웰을 다루는데, 키플링과 오웰, 두 사람의 삶의 여정이 이미 식민주의의 역사를 요약해 보여준다. 일본을 너무나 사랑하는 나머지 종종 자신이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리는 이 나라의 집권 세력 마음에 깊이 자리한 식민지 근대화론과의 비교가 필수이기는 하지만, 오늘은 아시스 난디의 논의만을 다루기로 한다. 나는 이 책 전체 중에서 이 문단이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웰은 피지배자의 예속화가 지배자의 예속화를 포함하며, 식민통치자들이 식민지 신민들을 통제하는 것만큼 확실하게 식민지 신민들 또한 식민통치자들을 통제한다는 것을 감지했다. 또한 그는 아마도 어느 정도는 무의식적으로 지배자에 대한 피지배자의 통제가 은밀하고 미묘하며 내면의 억압과 관련되어 있어 그만큼 더 저항하기 어렵다는 것을 의식했다. 그에 비하면 지배자의 통제는 그 억압적인 성격이 가시적인 데다 두 문화의 외면적인 관계를 통해 표출됐다. (94)

 

 

가해자 대 피해자의 논리는 명쾌하고 확실하다. 잔혹한 가해자와 무구한 피해자라는 인식은 평면적이고 일면적인 상황 인식을 보여주고, 그러한 설명에는 단 하나의 원인만 필요할 뿐이다. 오웰은 이를 거부한다. 식민통치자들이 식민지 신민들을 통제하는 것만큼 신민들 또한 식민통치자들을 통제한다는 것. 피지배자의 예속화가 지배자의 예속화를 포함한다는 것. 오웰은 이러한 상호 속박을 에세이 <코끼리 쏘기>에서 생생하게 묘사한다. 한편으로는 나는 최근에 읽은 푸코를 떠올릴 수 밖에 없었는데...


 



, 권력은 소유되기보다는 오히려 행사되는 것이며, 지배계급이 획득하거나 보존하는 '특권'이 아니라, 지배계급의 전략적 입장의 총체적 효과이며, 피지배자의 입장을 표명하고 때로는 연장시켜 주기도 하는 효과라는 것이다. 다른 한편, 권력은 '그것을 갖지 못한 자'들에게 다만 단순하게 의무나 금지로서 집행되는 것은 아니다. 권력은 그들을 포위공격하고, 그들을 거쳐 가고, 그들을 가로질러 간다. 권력은 그들을 거점으로 삼는데, 이것은 마치 권력에 맞서 싸우는 사람들이 권력에 대한 영향력을 거점으로 삼는 것과 같다. 바꿔 말하면, 이 권력의 이러한 관계들은 사회의 심층 속에 깊숙이 자리 잡은 것이지, 국가와 시민들 사이에 혹은 국가와 계급들의 경계 사이에 있는 관계들 속에 있는 것이 아니다. (<감시와 처벌>, 66)

 


이 문단을 읽으면서 나는 적절한 예시를 찾고 싶었다. 이 문단이 실현된 예시. , 권력이 소유되거나 지배계급에 의해 획득된 특권으로서가 아니라, 지배계급의 전략적 입장의 총체적 효과로서 작동하는 예, 권력이 그것을 갖지 못한 자들을 가로질러 가는 예, 권력관계가 사회의 심층 속에 자리 잡은 예. 나는 이 문단을 한국의 정치 상황, 암울하고 답 없는 우리나라의 권력 상태에 대입해 보려 했다. 그러나 나는 답을 찾을 수 없었고, 결국 찾지 못했다. 하지만, 이 상황을 인도의 식민주의 상태에 대입해 보았을 때, 오웰의 통찰과 푸코의 해석은 공명한다. 피지배자의 예속화는 지배자의 예속화를 포함하고 있으며, 권력은 권력 없는 자를 탄압할 뿐만 아니라, 그들을 거점으로 삼아 작동하는 것이다.

 

 



내가 사는 우주의 저번 주 베스트셀러는 <된장찌개>이다




찬 바람이 몹시 불던 날, 멸치 세 마리가 오들오들 떨며 숲길을 걷다가 하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온천을 발견한다. 멸치들은 곧장 온천으로 뛰어든다. 그 뒤를 따라 된장 판매에 나섰던 감자와 호박, 버섯, 대파두부가 차례로 온천에 입수한다. 추운 겨울날 따뜻한 온천 속에 몸을 푹 담근 야채 친구들, 절로 노래가 나온다. “따끈따끈 된장 온천, 사르르 사르르 내 몸이 녹네!” 이 아름다운 합창에 다른 목소리가 얹힌다. “따끈따끈 된장찌개, 스르르 스르르 내 몸이 녹네!”

 






추위에 온몸을 달달 떨던 멸치와 야채들에게 된장 온천은 하나의 완벽한 세상이었고, 그들은 그곳에서 완벽하게 만족했다. 하지만 동시에 그들은 누군가의 몸을 데워줄 그 무엇, 된장찌개가 되어 버리고 말았으니. 상호 속박의 진실은 어쩌면 여기, 된장찌개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주인공은 누구인가. 된장 온천의 행복한 야채들인가. 아니면 아이들에게 뜨뜻한 밥과 된장찌개 밥상을 차려주는 너구리 아빠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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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3-10-11 13:1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샌드위치 먹고 있는데...... 된장찌개 먹고 싶어지네요;

단발머리 2023-10-12 20:26   좋아요 0 | URL
된장찌개 먹었는데 샌드위치 먹고 싶어요....

독서괭 2023-10-11 13:2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앗, 이 너무나 귀여운 된장찌개 동화를 식민지배와 연결시키는 단발님의 솜씨??
커피가 맛있어 보입니다. 저는 당분간 아메만 먹기로 해서.. (가을이 되니 살이 찌네요) 라떼 먹고 싶네욤 ㅋㅋ

단발머리 2023-10-12 20:27   좋아요 0 | URL
저는 기본이 아이스라떼이고 끝까지 고수하다가 회오리 바람 불면 핫으로 마십니다.
아아는 비교적 최근에 달성했고요 ㅋㅋㅋㅋㅋㅋ 어린이 입맛이라 커피의 참맛을 모른다지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

건수하 2023-10-11 13:3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된장 온천... ㅠㅠ 저 그림책 동심파괴인데요...

피지배자의 입장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지배자들의 책을 주로 읽고 있는 사람으로서
(남근 선망보다 이쪽이 시급해 보입니다)
이제 정말 읽어봐야 할 것 같아요... 스피박, 흑인 페미니즘..

<감시와 처벌>에 저런 이야기가 나올 줄 몰랐네요. (안 읽었으니까 모르지...)
푸코도 읽어야겠..

단발머리 2023-10-14 14:57   좋아요 1 | URL
그죠, 된장 온천.... 전 이 부분이 육식을 강요하는 현대 사회와도 관련 있다고 생각해요. 그니까 동화책에서 동물들은 기본적으로 말하고 행동하잖아요. 근데 어느 순간, 그 친근한 친구가 스테이크, 수육, 치킨으로 변신한다는 거죠. 거기에 대해서는 <육식의 성정치>랑 연결해서 써 보고 싶었지만.....만만만.....

스피박, 흑인 페미니즘 읽게 되시면... 제가 화이팅!!!
푸코도 읽게 되시면 .... 제가 화! 이! 팅!!

다락방 2023-10-11 14:3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너무해 ㅜㅜ된장찌개 멸치 너무해 ㅜㅜ 토마토도 나중에 케첩된다고 노래하는 것도 너무한데 ㅜㅜㅜ
그렇지만 이것도 인간중심적 사고인지도 모르겠네요. 멸치로 태어나서 어쩌면 따뜻한 된장찌개 안에서 짭짤하게 생을 마감하는 것이 소원일 수도 있을텐데요. 어떤 생명이든 죽음은 찾아오는 것이니..

단발머리 2023-10-14 19:58   좋아요 0 | URL
된장찌개 멸치씨가 특히 온천을 오래 즐기시는 것 같더라구요 ㅠㅠㅠ 맞아요, 케첩 노래도 그래요.
그 책에 보면 멸치, 감자, 호박 등등 야채 친구들이 그렇게나 행복해해요. 따뜻하다고, 이런 좋은데가 있다고 그러면서요. 그 때만이라도 행복하다면 그게 더 나은 건지, 전 잘 모르겠는데.... 이게 참 어려운 문제더라구요.
<된장찌개> 이렇게 어려운 책이었나요? @@

공쟝쟝 2023-10-11 21:5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단발님의 예시 찾기… 저는 주로 제 안에 대입시킵니다. 아, 이게 다르네요.
푸코 전기 읽고 확신했고, 이번에 정희진의 공부 윤석열 정신분석 들으면서 더 심각하게 되는 부분. 최초의 규율장치로서의 가족제도, 가부장적 질서의 내면화가 개인의 인격 형성 및 정치권력, 식민지배까지도요. 긴밀히 연관되어 작동한다는 건데…
자.. 저항의 가능성을 찾아봅시다. 읽을게 많네요.. (터덜터덜..)

단발머리 2023-10-14 21:07   좋아요 1 | URL
네, 저는 예시를 찾습니다. 예시를 찾으면 훨씬 더 직관적으로 이해 가능하니까요. 저는 자신 안에서 예시 찾기가 읽기를 더 깊게 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해요. 저는 그렇게는 못하지만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
해체의 마지막은 가정이 될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되요. 하지만, 혈연이 주는 위안과 끈질김 보다 강한 무엇이 정말 가능할까.
다시 파이어 스톤을 읽어야 할 시간일까요^^

공쟝쟝 2023-10-14 21:02   좋아요 1 | URL
저는 이 해체(?)가 결국은 재조립하기 위함일거라는 걸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습니다. 이제 두렵지 않아요. 만약 재조립이 되지않는다 하더라도 이 해체된 블럭들을 매만지는 과정을 즐길 수 있게 되었습니다 🥹 아 이게 곰곰 뜯어보니 이런 모양이었구나! 하는 걸 일러주는 책들과 책친구들이 있기 때문인 것 같아요💜
Thinking is my fighting!!

바람돌이 2023-10-11 22:5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친밀한 적은 바로 보관함에 넣습니다. 지금은 머리 너무 아프니까 올 겨울에 꼭 읽어야지 하면서요. 사실 제국주의 국가의 애들이 어떤 댓가를 치르고 했는지에 대해서는 별 관심 없지만 식민지가 제국주의와 상호작용하며 식민지에서 벗어난 이후에도 갖게 되는 심적 정서적 유산에 대해서 관심이 많은데 이 책은 좀 더 독특하고 구체적인 관점을 제시해 줄거 같네요. ^^
역시 서재를 열심히 들락거려야 좋은 책을 자꾸 만납니다. ^^ 된장온천은 잔혹동화 아닌가요? 케첩되는 토마토처럼요. ㅎㅎ 이 책을 보며 된장찌개가 먹고 싶은게 아니라(왜냐하면 오늘도 먹었으므로) 온천에 가고 싶습니다. 물론 된장온천은 빼고요. ^^

단발머리 2023-10-14 20:05   좋아요 0 | URL
이 책에서는 식민주의 시민들이 그 식민주의 때문에 괴로워하고, 학대 당하고, 오히려 더 강한 식민주의의 주창자가 되는 과정이 자세히 나와있어서요. 저는 이런 책은 처음이라 정말 신선하게 다가왔어요. 바람돌이님이 읽으신다면 또 다른 관점의 다른 이야기가 나오겠네요. 기대됩니다!!
저는 얼마나 잔혹한지... 마침 그 즈음 찬바람이 불기 시작해서요. 그 다음날 진짜 된장찌개를 끓여 먹었습니다.
온천 너무 좋죠!! 뜨끈하니 온 몸이 스르르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신을 옹호하다 - 마르크스주의자의 무신론 비판
테리 이글턴 지음, 강주헌 옮김 / 모멘토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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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리 이글턴의 <비극>을 결국 다 읽어내지 못하고, <문학을 읽는다는 것은>처럼 포기한 후, <신을 옹호하다>를 읽었다.

 

 

<비극>에서는 자기 동일성에 대한 부분이 특히 인상 깊었다.

 

오이디푸스는 하나 이상의 존재이지만 이는 여느 사람과 다를 바 없다. 모든 개인은 주체와 객체로 동시에 존재한다는 한 가지 사실 때문에라도 필연적으로 자기동일성이 없기 때문이다. (<비극>, 56)

 


<오이디푸스 왕>은 생각보다 짧고 예상보다 훨씬 재미있는데, 뻔한 텔레비전 드라마도 아니고 이미 결론을 알고 있는데도, ‘이 도시에 저주를 몰고 온 바로 그 사람이 누구냐?’는 오이디푸스의 물음이 쌓여갈수록 긴장은 고조된다. 이글턴의 방점은 다른 곳에 있다. 근친상간이 아니라,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를 차지하는 것이 아니라, 정체성의 변동. 어머니이며 아내, 아들이며 형제, 딸이며 누이. 정체성, 자기동일성에 대한 탐구는 너무 흥미로운 주제니까 다음에 더 생각해 보기로 한다. 반납해서 책이 없다.

 

 



<신을 옹호하다>는 마르크스주의자이며 기독교 신앙을 가진 테리 이글턴의 예일대 특강을 다시 정리한 것이다. 유물론의 마르크스주의와 사회주의 국가에서 종교의 위치, 역할 등을 고려할 때 마르크스주의와 기독교 신앙은 동시에 다루기 어려운 주제다. 그런데 그 어려운 일을 여기, 테리 이글턴이 해낸다.

      


내게 공명되었던 이글턴의 기독교 신앙은 현재 한국 기독교가 도달하지 못한 혹은 일부러 회피하고 있는 부분과 정확히 일치한다. 예수를 어떻게 보는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일 뿐만 아니라, 죄인들의 친구요 병자들을 고치는 자, 나그네를 환대하는 사람으로서의 예수를, 그런 예수를 보고 있는가. 그의 그러함을 알아채고 있는가. 그가 말하는 하나님의 나라란 무엇인가. 그가 설파했던 구원이란 무엇인가.

 


진부하게도 구원이란 예배와 율법과 의식(儀式)의 문제가 아니며 어떤 도덕적 원칙을 준수하는 문제도, 짐승을 죽여 제물로 바치거나 남달리 고결하게 살아가는 문제도 아닌 것으로 드러난다. 구원은 굶주린 사람의 배를 채워주고, 이민자들을 환영하며, 아픈 이들을 찾아가 돌보고, 부자들의 횡포로부터 가난한 사람과 고아와 미망인을 보호하는 문제다. 놀랍게 들리겠지만 우리는 종교라는 특별한 기구를 통해 구원받는 게 아니라 서로 뒤섞여 살아가는 일상적 관계의 질을 통하여 구원받는다. 일상의 삶이라는 개념을 만들어낸 것은 기독교이지 프랑스 지식인이 아니다. (33)

 


나는 이글턴의 서술에 99.9% 동의한다. 한국 교회가, 그리고 현재의 기독교가 자신의 본분과 사명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는데 나의 잘못이 1%, 아니 0.0000000000003% 포함되어 있음을 인정한다. 나의 회개와 자책은 금요일 밤마다 이어진다. 현재의 기독교가, 특히 한국 교회가 예수의 친구의 친구가 되지 못할 뿐 아니라, 어쩌면 예수의 친구조차 거부하고 있는 현실을 안타까워하면서.

   

 

믿음과 과학에 대한 논증은 이미 알고 있는사실의 반복이다. 과학은 절대적일 수 없다.

 


과학이 특정한 사회사의 일부라는 사실을 추상적 사고에 빠진 합리주의자들이 너무나 쉽게 잊는 것처럼 말이다. 종교가 그랬듯이 과학도 많은 부분이 혁명적인 기원을 저버리고 초국적기업과 군산복합체의 말 잘 듣는 도구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렇다고 과학이 인간의 해방에 기여한 역사까지 잊어서는 안 된다.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그리고 종교와 마찬가지로 과학도 스스로의 훌륭한 전통에 비추어 심판받아야 한다. (177)

 


문제는 과학은 그러한 심판대에 서지 않아도 된다는 오만이다. 과학에 대한 절대신앙. 과학이 가진 특권에 대한 조금의 타협도 허락하지 않는 믿음’. 최근에 인문학을 읽고 쓰고 연구하는 일을 업으로 삼던 분이 과학 관련 책을 쓰셨다. 과학으로의 완벽한 귀의 또는 항복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우리 삶에는, 우리네 인생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으며, 우리의 삶이 그렇게 만들어졌듯 영원히 그리고 종국적으로 완벽하게 스러질 것이라 그는 말했다. 내가 생각하는 세계, 내가 이해하는 우주와는 큰 차이점이 있는 것이 확실하지만, 적어도 자신이 이해한 것에 솔직했다는 점에서 나는 그를 높이 평가한다. 애정이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지만.

 

 


테리 이글턴은 무신론 과학자들의 대표자로 <신은 위대하지 않다>의 크리스토퍼 히킨스와 <만들어진 신>의 리차드 도킨스를 호명한다. 이글턴은 이 두 사람을 통칭해 디치킨스라 부르며 이들의 주장을 조목조목 반박한다.

 


신학자들은 적어도 직업적으로는, 헨리 제임스처럼 절묘하게 복잡한 작가가 과연 진화라는 조잡하고 실수 많은 과정을 통해 탄생한 것인지 아닌지에 대해 조금의 관심도 없다. 내가 알기로 과학과 신학 간에 차이가 있다면 그것은 이 세상을 선물로 보느냐 아니냐 하는 데에 있다. 이는 세상을 엄밀하게 조사함으로써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도자기 꽃병을 아무리 자세히 뜯어보아도 그게 결혼 선물임을 알아낼 수는 없지 않은가. 디치킨스와 나 같은 급진주의자 간의 차이 역시 인간 조건의 궁극적인 시니피앙이 고문 받고 살해당한 정치범의 몸뚱이라는 말을 받아들이는지, 그것이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 던지는 의미는 무엇이라고 보는지에 따라 결정된다. (55)

 


이글턴은 과학과 신학을 비교 설명하면서 두 개의 학문이 같은 종류의 대상을 다루지 않는다고 설파한다. 치과 교정학과 문학 비평의 대상이 다르듯이 말이다. 이제 과학은 온 세계에 대한 프리패스권을 얻은 양, 주요한 사건의 최종결정권자가 되었다. 혹은 되어가고 있다. AI의 초고속 발전으로 인해 지구상에 살고 있는 인간들의 삶이 어떻게 변해갈지에 대한 어떠한 사회적 합의와 논의 없이 기술 개발이 이루어지고 있으니 말이다. 이 세상 모든 학문의 주인으로 군림해 버린 과학에 대한 비판은 가능한가. 그 비판의 중심에는 어떤 학문이 서야 하는가.

 



두 번째 챕터 <배신당한 혁명>에서는 제국주의와 미국의 대테러전에 대한 비판이 주를 이룬다. 서구 열강 vs 아랍 세계, 기독교 vs 이슬람의 이분법은 문명과 야만에 대한 편협한 사고를 더욱 확고하게 한다. 이글턴의 주장은 비교적 간단하다. 자유주의적 계몽주의자들은 급진적 이슬람의 만행에 대해서는 분노하면서 세계화된 자본주의의 해악에 대해서는 왜 침묵하는가.

 


미국 언론에서는 잘 기억하지 못하는 듯하지만, 쌍둥이 빌딩이 공격받기 28년 전 바로 911일에 미국 정부가 민주적으로 선출된 칠레 정부를 폭력으로 전복시키고 그 자리에 추악한 꼭두각시 독재자를 앉혔으며, 이후 그 독재자가 학살한 사람이 세계무역센터에서 죽은 사람보다 훨씬 많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미국은 인도네시아에서도 오랫동안 독재 정권을 지지했고, 그 독재자는 사담 후세인보다 더 많은 사람을 죽음의 구렁텅이에 몰아넣었다. 성조기를 몸에 두르고 이슬람주의자들의 잔혹 행위에 항의하는 사람들은 이런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134)

 


세계화된 자본주의의 가장 강력한 축이 미국임은 확실하며, 미국의 팔레스타인 정책, 대테러 정책에 대한 그의 비판에 동의하지만, 그러한 비판의 목소리가 누구의 것인가 하는 것도 주목할 만한 주제다. 제국주의의 선봉이었던 영국의 국민이며, 그 혜택을 가장 많이 받았던 백인 남자에게서 듣는 제국주의 비판. 당연하다. 그의 특별함은, 그가 아일랜드계 노동계급 출신이라는 점으로부터 나왔을 것이다.

 

 


기독교 신앙을 가진 사람으로서 각별하게 다가왔던 부분은 여기다. 창조주, 온 우주의 창조자인 하나님이 합리적인 설계에 따라 이 우주를 기획한 것이 아니라, 창조하는 일 자체를 좋아하고 즐거워하기 때문에 이 세상을 만들어 냈다는 주장(19).

 


이를 좀더 신학적으로 표현한다면 for the hell of it (별다른 이유 없이, 순전히 재미로, 혹은 어찌 되나 보려고)' "이라고나 할까. 따라서 창조된 세상은 선물이고 잉여물이며, 굳이 필요하지 않았던 행위의 산물이다. 불가피해서가 아니라 아무런 이유 없이 만든 것이다. 실제로 기독교 신학에서 세상은 전혀 필연적인 게 아니다. 어쩌면 하느님은 애초에 세상을 만들어야겠다는 감상적 충동을 이겨내지 못한 걸 처절하게 후회했을지도 모른다. 세상을 창조한 이유는 사랑이었지 필요가 아니었다. 하느님에게는 아무런 이득이 없었다. 천지창조는 최초의 '동기 없는 행위, 무상(無償)의 행위였다. (19)

 

 

 

이는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의미에의 몰두와도 관련이 깊다. 나는 목적 없는 삶, 의미 없는 인생에 대해 회의적인데, 이글턴의 글을 읽으며 예전에 들었던 설교가 다시 생각났다. 우주의 시작과 인간의 창조를 다룬 창세기에서 인간의 창조 목적을 설명할 때 이렇게 세 가지를 꼽는다. 하나님은 왜 인간을 만드셨는가. 1. 예배받기 위해 2. 교제하기 위해 3. 사랑하기 위해. 인간이 신에게 최고의 경의를 표시하는 것이 예배이고, 그것이 곧 인간과 하나님과의 소통, 교제이다. 그리고 그것은 곧 사랑의 행위이다. , 신이 인간을 만든 이유는 '사랑하기 위해서' 이다. 인간이 창조되기 이전에 하나님은 성부, 성자, 성령의 완벽한 조화 속에 존재하고 있었다. Holy Trinity, 성삼위일체. 완벽한 결합이 완성된 상태였으므로, 하나님에게는 또 다른 존재가 필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예술가이자 탐미주의자(19)인 하나님은 인간을 만들어냈다. 사랑하기 위해서. 사랑하고 사랑받기 위해서.

 

 


201010월에 나온 책인데 아직도 판매중이라니 기쁘고 감사하다. 더 사랑하고, 사랑받기 위해서,는 아니겠지만. 더 알고 싶어서, 더 많이 알게 되는 일이 즐겁고 뿌듯해서 얼른 구입해야겠다. 이런 똑똑한 친구는 가까이 두는 게 상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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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돌아옵니다
    from 책이 있는 풍경 2023-11-02 11:21 
    댓글을 쓰다가 또 길어져서 페이퍼로 씁니다. 저는 이게 혹시 질병이 아닌가 싶습니다. 댓글 길게 쓰다 페이퍼 쓰면서 먼댓글로 연결하는 병 말입니다. 사회주의와 유물론, 무신론에 관한 부분을 같은 선상에서 연결해 설명하는 건 어려울 거 같고요. <신을 옹호하다>의 테리 이글턴의 주장을 중심으로 제가 이해한 범위 내에서 이야기해 볼게요. 건수하님의 물음에 대한 간편한 대답이라면, 그렇습니다. 사회주의는 무신론과
 
 
독서괭 2023-09-29 11: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랑하기 위해서. 사랑에는 이유가 없… 나? 음.
그나저나 금요일밤마다 자책과 회개를..?? 금요일밤엔 애썼다 토닥토닥부터 해주셔야 하지 않나요?ㅜㅜ 아무튼 제가 잘 모르지만 흥미로운 주제입니다. 단발님의 공부를 응원합니다!!

2023-09-29 11: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단발머리 2023-09-29 12:15   좋아요 0 | URL
어맛!!! 달려갑니다!
 
어떻게 이런 식으로 통치당하지 않을 것인가? - 푸코로 읽는 권력, 신자유주의, 통치성, 메르스 대안연구공동체 작은 책 - 인문학, 삶을 말하다
심세광 지음, 대안연구공동체 기획 / 길밖의길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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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저자는 프랑스 파리 10대학에서 <미셸 푸코에 있어서 역사. 담론. 문학>이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심세광이다.


심세광은 푸코가 권력을 군주의 권력, 규율 권력, 생명관리권력으로 나누어 설명했다고 보았다. 군주의 권력은 금지와 허용의 이분법적 구분으로 실행되는데, 한센병의 관리가 대표적인 사례다. (12) 규율 권력은 증상이 나타나지 않는 사람의 삶에도 개입하는 권력(13)으로 권력 행사의 대상이 되는 쪽에 조명이 비침으로 개인들의 모습이 가시적으로 드러난다(15). 생명관리권력은 확률과 통계를 도입함으로써 인구라는 개념을 만들어 냈는데, 가축을 돌보는 목자의 기술에서 비롯된 생명관리권력은 선제적인 예방 조치들에 집중(백신 접종)하면서 통계를 중시하는 행정을 통해 구성되는 권력으로 보았다(18).



<감시와 처벌>, 문제의 그 문단을 다시 읽어보자.



즉, 권력은 소유되기보다는 오히려 행사되는 것이며, 지배계급이 획득하거나 보존하는 '특권'이 아니라, 지배계급의 전략적 입장의 총체적 효과이며, 피지배자의 입장을 표명하고 때로는 연장시켜 주기도 하는 효과라는 것이다. 다른 한편, 권력은 '그것을 갖지 못한 자'들에게 다만 단순하게 의무나 금지로서 집행되는 것은 아니다. 권력은 그들을 포위공격하고, 그들을 거쳐 가고, 그들을 가로질러 간다. 권력은 그들을 거점으로 삼는데, 이것은 마치 권력에 맞서 싸우는 사람들이 권력에 대한 영향력을 거점으로 삼는 것과 같다. 바꿔 말하면, 이 권력의 이러한 관계들은 사회의 심층 속에 깊숙이 자리 잡은 것이지, 국가와 시민들 사이에 혹은 국가와 계급들의 경계 사이에 있는 관계들 속에 있는 것이 아니다. (<감시와 처벌>, 66쪽)

 


권력을 힘의 총체로서 보지 말 것, 즉 그것을 관계망으로써 이해해 보라는 푸코의 외침을, 나는 이미 접수했다. 내 관심은 권력을 갖지 못한 자들의 행위가 권력의 작동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것인데, 심세광은 이렇게 정리했다.



통치 행위 자체는 좋은 것도 아니고 나쁜 것도 아니다. 문제는 어떻게 현명하게 통치할 것인가, 또 어떻게 '참을 수 없는 통치' '전면적으로 예속화하는 통치'를 거부하고 '다른 통치'를 요구할 것인가이다. 그런데 '참을 수 없는 통치'에 대한 거부와 '다른 통치'의 요구 역시 타자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고자 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바로 통치 행위에 다름 아니다. 그러므로 이 모든 과정을 선한 자' '악한 자'의 대결구도로 포착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어떻게 이런 식으로 통치당하지 않을 것인가?>, 45)



내가 알던 푸코는 <성의 역사>의 푸코였고, <말과 사물>의 푸코였다. 나는 최근에서야 세련되고 댄디하고 여유만만한 교수 푸코가 아니라, 거리의 투사 푸코를 알게 되었다. 이를테면 이런 사진 속의 푸코.







참을 수 없는 통치를 거부하고 다른 통치의 요구를, 푸코는 자신의 삶 속에서 실천했다. 이게 얼마나 어렵고 힘든 일인지. 대학을 나왔지만 이미 학력 인플레이션 대한민국 사회에서 가방끈이 짧은 나는, 감히 헤아릴 수조차 없다. 공부가 길어질수록, 사회적 지위가 높아질수록 핵심은 놓치고 말은 길어진다. 애매모호하게 말하고 그렇게 단순화할 수 없는 문제라고 말한다. 그래서요? 라고 나는 묻는다. 대답을 들을 수 없을 때가 많다. 답을 찾는 건 각자가 할 일이다. 답은 내가 찾아야만 한다. 이 일에 대한 답은.



용산 참사와 세월호 참사, 그리고 그 뒤 있었던 일련의 사태가 이를 잘 증거하고 있다. 앞서 이야기한 비판으로서의 통치, 통치로서의 비판을 위해, 그리고 통치자들을 우둔함 속에 빠뜨리지 않기위해 시민들은 정부로 인한 불의와 불행을 정부 측에 분명히 알릴 의무가 있다. 이제 시민들은 심정적인 차원의 분노와 슬픔은 시민의 몫이고, 대책을 세우고 실천하는 것은 정부의 몫이라는 진부한 역할분담 논리를 거부해야 한다. 정부와 통치자들이 독점하고 앉아 실정을 거듭하는 정치의 영역에 이젠 시민들이 비판하는 자의 자격으로, 타인을 배려하고 통치하고자 하는 자의 자격으로, 진실을 외치는 자의 자격으로 개입하고 참여해야 한다. (<어떻게 이런 식으로 통치당하지 않을 것인가?>, 62)




참을 수 없는 통치에 대한 거부, 다른 통치의 요구야말로, 피지배자인 내가 권력 중심에 들어서는방법이자 권력이 나를 거점으로 삼는 방식이다. 그런 실천이야말로 통치 행위에 다름 아니다’. 불의한 권력에 대한 거부와 다른 통치의 요구.



나는 오송 지하차도 사고, 정부의 부주의로 인한 이런 가슴 아픈 인재가 윤석열 정부 때문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1029일 이태원에서의 참사는 지금 정부가 윤석열 정부이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고 생각한다. 문제는 사건이 발생한 이후다. 10. 29 참사는 물론이요, 오송 지하차도 희생자의 유가족들은 제대로 된 사과를 듣지 못함은 물론이요, 사고 발생에 대한 설명도 그에 대한 적절한 조사 결과도 아직 받아보지 못했다. 애도의 시간마저 송두리째 빼앗긴 가족들의 한이 하늘에 사무친다.




어떻게 이런 식으로 통치당하지 않을 것인가?



권력과 맞설 수 있는, 그런 힘을 가진 지식을 직접 생산해 냈을 뿐만 아니라 몸소 거리에서 자신의 지식을 실천했던 푸코의 말이기에 믿어주고 싶지만, 세상일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합법적으로 정권을 획득한 대통령과 수권 정당의 기만에 대해 그 폭압에 대해 무도함에 대해 뻔뻔함에 대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이토록 많은 사람이 거리에서 외치고, 부끄러워하고, 안타까워하는 일들을 적법한절차에 따라 민의의 반영 없이 밀어붙이는권력에 대해 무슨 일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들은 소유하고 획득한 그 무엇으로서 권력을 향유하고 있건만, ‘같이 만들어 가겠다는 내 생각은 주제 넘는 일이 아닌가. 불가능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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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미 2023-09-05 16:2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어쩌면 이태원 참사 때 바로잡았어야 했는데 그걸 놓친 건 아닐까 생각했어요. 그 이후로 계속되는
무책임은 잘못 꿰어진 첫 단추를 외면한 결과가 아닐까 하고요.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켜야 하는
첫 번째 의무조차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방관하고 또 당당한 정부 어찌해야될지...

단발머리 2023-09-08 17:49   좋아요 1 | URL
저도 미미님 의견에 동의합니다. 이태원 참사 때 제대로된 진상 조사도 못 하고 애도도 못하고 지나갔던 일들이 이제 부매랑이 되어 돌아올 듯 합니다. 이 정부는 한계가 없어요........

독서괭 2023-09-05 19:0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오오 단발님의 푸코공부는 계속된다!! 저는 읽어도 어렵지만요.
참사는 언제든 일어날 수 있지만, 그 후의 과정에서는 사건을 바라보는 태도가 드러나는 법이지요. 이태원 참사를 기억이나 할런지 모르겠습니다...

단발머리 2023-09-08 17:50   좋아요 0 | URL
푸코 공부 얼른 끝내야 다른 책 읽을 수 있습니다! (불끈! 헉헉!)
행안부 장관 탄핵이 무효 되면서 더 당당해진거 같더라구요. 답이 있나요... 제가 보기엔 없습니다.

책읽는나무 2023-09-05 22:5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갑자기 생각납니다.
˝내가 지금 가봐야 달라지는 건 없다.˝
뭐든 손 놓고 관망만 하는...ㅜㅜ

단발머리 2023-09-08 17:51   좋아요 1 | URL
그럴려면 왜 대통령이 되었는지 도대체 알 수가 없습니다. 혹 그렇게 생각했다 하더라도 그렇게 대답할 수 없어야 되는 거 아닌가요? ㅠㅠㅠㅠ

공쟝쟝 2023-09-06 19:4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단발머리님의 파레시아....... ❤️❤️ (단순히 말하면 파레시아는 진실 말하기이다. 푸코의 파레시아(parrhesia)는 “마음의 솔직함과 개방, 말의 개방, 표현의 개방, 말의 자유”라고 정의된다.-검색복붙-) 용감한 말들이 많아져야하는 데, 말을 잃게 만드는 참담한 상황들만 계속되네요. 그래도 이런 글 자주 많이, 써주세요~!

단발머리 2023-09-08 17:52   좋아요 0 | URL
많이 자주 쓸려고 하지만 그것은 엄청 어려운 일이며...... 그래도 금요일 저녁 좋네요. 잠깐 숨 좀 돌리고요.
주말에 푸코 마저 읽으려고 책 가져 왔는데.... 아, 나도 하루키 읽고 싶네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가부장제의 정치경제학 1 : 주적 가부장제의 정치경제학
크리스틴 델피 지음, 김다봄.이민경 옮김 / 봄알람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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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연인즉슨 이랬다. 크리스틴 델피의 책을 2권 사고, 최근에 2권을 더 샀다. 며칠 전, 외출하면서 기다리는 시간이 생길 것 같아, 델피의 책 3권을 챙겼다. 읽기가 집중이 안 되면 밑줄긋기를 해야지. 2권을 펼쳐 한 쪽을 읽고 알았다. , 2권을 안 읽었구나.  4권 사 놓고 1권 읽는 센스. 비싼 건 사실이지만 내용이 알차서 괜찮다. 시리즈가 나오는 대로 다 읽어볼 생각이다. 4권 사 놓고 2권 읽은 사람의 결심.  









그저 민족학 문헌 전체가 여성이나 남성에 의한 생산의 경제적 중요성이 특정 성별의 사회적 우위와는 무관하다는 점을 보여준다고 말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오히려, 민족학과 사회학 분야에 만연한 증거는 정반대의 관계를 증명한다. 지배 계급이 생산적 노동이 자신의 지배 아래 있는 계급에 의해 이루어지도록 만든다는 것이다. - P17

미슐레는 농부가 하인을 둘 여력이 없을 때 아내를 얻는다고 말한 바 있다. 이는 여전히 진실이다. "미셸이 자기를 도와줄 사람을 찾아야 했는데 하녀를 못 구했어. 미셸이 결혼만 한다면…………." - P18

노동의 무보수성이 노동의 성격에 의해서 달라지는 게 아니라는 사실은 여성들이 가정 밖에서 이 노동을 제공하면 급여를 받는다는 데서 증명된다. - P32

바로 대부분의 ‘가정’이 음식을 원재료 형태로 구입하기를 선호하는 까닭은 가사노동이 무료이고, 이 노동이 전적으로 여성에 의해서 제공되기 때문이라는 사실이다. - P36

그러나 가정 바깥에서 일할 수 있는 자유를 얻어도 아내는 자유로워지지 않았다. 노동력의 다른 일부는 여전히 전유된 채였다. 아내가 ‘가족에 대한 의무를 다해야‘ 하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하면 아동 양육과 가정 내 노동을 무료로 제공해야 했기 때문이다. 외부의 노동은 가정 내 노동을 면제하기는커녕, 가정 내 노동에 해로운 영향을 미쳐서는 안 된다. 따라서 여성의 자유는 약간의 경제적 독립을 위해 이중 노동을 제공한다는 뜻에 다름 아니다. - P42

남성이 겪는 가정 내 착취의 기반이 되는 미성년 혹은 막내의 지위가 일시적인 반면 여성의 경우 같은 지위가 평생 지속된다. 이에 더해 가정부 남성은 남성으로서 착취당하는 것이 아니지만 여성은 여성으로서 즉 아내로서 착취당한다. 농업, 수공업, 상업에서는 가정내 구성원이라면 성별에 상관없이 무료 노동을 요구받는 반면, 무급 가사노동은 가장의 아내인 여성에게만 요구된다. - P47

따라서 여성의 삶의 수준은 프롤레타리아와 계급 생산과의 관계가 아닌 남편에 대한 예속 생산 관계에 달려 있다. 부르주아 여성의 결혼 관계가 끝나는 경우, 압도적인 수의 여성이 임금노동자로서 밥벌이를 하게 된다. 이로써 그들은-나이와 직업 교육의 부재라는 추가적인 불리를 경험하면서 - 마침내 원래 그들이 속한 계급이라 할 수 있는 프롤레타리아로 거듭나게 된다. - P52

이때 억압이 ‘공통적‘인 까닭은 이 억압이 모든 기혼 여성 시기에 상관없이 여성의 80퍼센트)에게 적용되기 때문이고, ‘특수한‘ 까닭은 가정 내 무급노동을 제공할 의무가 여성에게만 주어지기 때문이며, ‘핵심적‘인 까닭은 여성들이 ‘밖‘에서 일을 할 때조차, 이들이 속한 계급은 여성으로서 겪는 착취에 의해 조건화되기 때문이다. - P63

권력의 쟁취는 여성해방운동의 궁극적인 목적이며, 운동은 혁명을 위한 투쟁에 대비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 P68

그리고 다른 집단-혁명을 위한 또 다른 집단, 운동 혹은 정당-과 즉각 정치적, 전술적동맹을 맺어야 한다. 이 동맹은 해당 집단을 운동의 목표에 명료하게 포섭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이를 위해서 해당 집단은 가부장제 파괴에 대한 의지를 명확히 그리고 공식적으로 천명하고, 이 파괴를 끝까지 이뤄내고자 하는 혁명적 전투에 실질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 P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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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오 2023-08-21 07:0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단발님의 집게핀과 필통 보면서 설레는 저, 정상인가요?

단발머리 2023-08-22 20:21   좋아요 1 | URL
집게핀과 필통 주인에게 전해줄게요. 은오님은 정상입니다!

다락방 2023-08-21 08:5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1,2 권 사놨어요. 곧 따라갈게요!! 불끈!!

단발머리 2023-08-22 20:22   좋아요 0 | URL
가벼워서 너무 좋아요. 그러나 잘 펼쳐지지가 않습니다. 참고해주세요^^

그레이스 2023-08-21 18: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내용도 그렇지만 책 디자인이 넘 탐납니다.^^

단발머리 2023-08-22 20:22   좋아요 1 | URL
네, 저도 이 책 디자인 너무 맘에 듭니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