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친밀한 적 - 식민주의하의 자아 상실과 회복, 개정번역판
아시스 난디 지음, 이옥순.이정진 옮김 / 창비 / 2015년 7월
평점 :
아시스 난디의 <친밀한 적>을 읽었다. 작고 얇은 책인데 생각보다 훨씬 더 오래 걸렸다. 읽기는 다 읽었지만 내용의 반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거 같아 나중에 시간이 되면(시간을 내서) 다시 읽어봐야겠다, 그런 기특한 결심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 방대함을 담기에 나는 너무나 작고 연약한 한 마리의... 독자일 뿐이며... (고라니, 라고 쓰고 싶었는데, 고라니님 허락을 받아야 해서 쓰지 않음)
책 뒤쪽에 출간 25년을 맞이해 작성된 기고문이 있는데, 본인의 책을 이렇게 요약해 두었다. 그대로 옮겨본다.
<친밀한 적>은 지배자가 치러야 했던 몇몇 중요한 댓가에 대한 회계 정리를 한다. 그 댓가로는 남성성을 훼손하는 여성성에 대한 극도의 두려움과 경직된 성별위계, 아동기의 상실과 오로지 성년의 준비 단계이자 교육대상으로 아동기를 재규정하는 것, 진보와 생산성을 절대화하는 세속적인 관념으로 인한 살아 있는 우주의 속화(desacralization), 급진적인 다양성과 미래에 대한 다원적 비전을 쉽사리 받아들일 수 없는 협소하고 경직된 자아를 꼽을 수 있다. (231쪽)
식민주의란 식민지의 획득과 유지를 지향하는 대외 정책. 경제적ㆍ정치적인 세력을 국외의 영토로 확장하고, 정치적 종속 관계를 통해 그 지역을 자국의 영토로 삼는 제국주의적 침략 정책을 이른다. <네이버 국어사전> 타자화의 주된 형식인 오리엔탈리즘의 작동은 식민주의와 인종주의의 결합을 용이하게 만드는데, 상대방에 대한 규정을 통해 자기 정의를 실현하는 방식은 이분법의 자장 안에서만 가능하다. 아시스 난디는 이러한 쉬운 이분법에 반대한다.
나는 역사의 수레바퀴에 낀, 잘 속아 넘어가는 대책 없는 식민주의의 희생자라는 인도인상(像)을 거부한다. (26쪽)
저자는 피식민 상태와 아동 간의 상동 관계를 다루면서, 식민주의가 원시성과 아동 사이에 새로운 유비를 확립(56쪽)했다고 주장한다. 식민주의는 ‘성인 남성’인 유럽인들이 순진무구하고 배우려는 의지가 있고 ‘교정 가능한’ 어린애다운(childlike) 인도인과 무지하나 배우려 하지 않고 야만적이며 ‘교정 불가능한’ 유치한(childish) 인도인을 진보의 이름으로 문명화시키겠다는 그들만의 약속이다.
성숙한 남성성이라는 이데올로기의 식민지 수출이 아프리카에서는 비교적 용이했던 반면, 그 나름의 문명을 갖추고 있는 것이 확실한 중국과 인도에서는 작동이 쉽지 않았다. 즉, 강한 민속적, 구비적, 농촌적 특성을 소유한 아프리카 고유의 문화를 쉽게 야만이라고 폄훼할 수 있었던 것과는 달리, 중국과 인도의 4000년이 넘는 공적 삶의 전통, 잘 발달된 문필 전통, 종종 유럽 최고의 지성을 사로잡은 대안적인 철학 예술 및 과학 전통(59쪽), 그리고 과거가 현재에도 유지된다는 인도의 시간관은 영국의 인도 지배를 더욱 곤경에 빠뜨렸던 것이다.
식민 지배 세력의 정치적 신화를 가장 창의적으로 구축한 이로 저자는 키플링을 꼽는다. 그와 정반대의 인물로는 조지 오웰을 다루는데, 키플링과 오웰, 두 사람의 삶의 여정이 이미 식민주의의 역사를 요약해 보여준다. 일본을 너무나 사랑하는 나머지 종종 자신이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리는 이 나라의 집권 세력 마음에 깊이 자리한 ‘식민지 근대화론’과의 비교가 필수이기는 하지만, 오늘은 아시스 난디의 논의만을 다루기로 한다. 나는 이 책 전체 중에서 이 문단이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웰은 피지배자의 예속화가 지배자의 예속화를 포함하며, 식민통치자들이 식민지 신민들을 통제하는 것만큼 확실하게 식민지 신민들 또한 식민통치자들을 통제한다는 것을 감지했다. 또한 그는 아마도 어느 정도는 무의식적으로 지배자에 대한 피지배자의 통제가 은밀하고 미묘하며 내면의 억압과 관련되어 있어 그만큼 더 저항하기 어렵다는 것을 의식했다. 그에 비하면 지배자의 통제는 그 억압적인 성격이 가시적인 데다 두 문화의 외면적인 관계를 통해 표출됐다. (94쪽)
가해자 대 피해자의 논리는 명쾌하고 확실하다. 잔혹한 가해자와 무구한 피해자라는 인식은 평면적이고 일면적인 상황 인식을 보여주고, 그러한 설명에는 단 하나의 원인만 필요할 뿐이다. 오웰은 이를 거부한다. 식민통치자들이 식민지 신민들을 통제하는 것만큼 신민들 또한 식민통치자들을 통제한다는 것. 피지배자의 예속화가 지배자의 예속화를 포함한다는 것. 오웰은 이러한 상호 속박을 에세이 <코끼리 쏘기>에서 생생하게 묘사한다. 한편으로는 나는 최근에 읽은 푸코를 떠올릴 수 밖에 없었는데...
즉, 권력은 소유되기보다는 오히려 행사되는 것이며, 지배계급이 획득하거나 보존하는 '특권'이 아니라, 지배계급의 전략적 입장의 총체적 효과이며, 피지배자의 입장을 표명하고 때로는 연장시켜 주기도 하는 효과라는 것이다. 다른 한편, 권력은 '그것을 갖지 못한 자'들에게 다만 단순하게 의무나 금지로서 집행되는 것은 아니다. 권력은 그들을 포위공격하고, 그들을 거쳐 가고, 그들을 가로질러 간다. 권력은 그들을 거점으로 삼는데, 이것은 마치 권력에 맞서 싸우는 사람들이 권력에 대한 영향력을 거점으로 삼는 것과 같다. 바꿔 말하면, 이 권력의 이러한 관계들은 사회의 심층 속에 깊숙이 자리 잡은 것이지, 국가와 시민들 사이에 혹은 국가와 계급들의 경계 사이에 있는 관계들 속에 있는 것이 아니다. (<감시와 처벌>, 66쪽)
이 문단을 읽으면서 나는 적절한 예시를 찾고 싶었다. 이 문단이 실현된 예시. 즉, 권력이 소유되거나 지배계급에 의해 획득된 ‘특권’으로서가 아니라, 지배계급의 전략적 입장의 총체적 ‘효과’로서 작동하는 예, 권력이 그것을 갖지 못한 자들을 가로질러 가는 예, 권력관계가 사회의 심층 속에 자리 잡은 예. 나는 이 문단을 한국의 정치 상황, 암울하고 답 없는 우리나라의 권력 상태에 대입해 보려 했다. 그러나 나는 답을 찾을 수 없었고, 결국 찾지 못했다. 하지만, 이 상황을 인도의 식민주의 상태에 대입해 보았을 때, 오웰의 통찰과 푸코의 해석은 공명한다. 피지배자의 예속화는 지배자의 예속화를 포함하고 있으며, 권력은 ‘권력 없는 자’를 탄압할 뿐만 아니라, 그들을 거점으로 삼아 작동하는 것이다.
내가 사는 우주의 저번 주 베스트셀러는 <된장찌개>이다.
찬 바람이 몹시 불던 날, 멸치 세 마리가 오들오들 떨며 숲길을 걷다가 하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온천을 발견한다. 멸치들은 곧장 온천으로 뛰어든다. 그 뒤를 따라 된장 판매에 나섰던 감자와 호박, 버섯, 대파, 두부가 차례로 온천에 입수한다. 추운 겨울날 따뜻한 온천 속에 몸을 푹 담근 야채 친구들, 절로 노래가 나온다. “따끈따끈 된장 온천, 사르르 사르르 내 몸이 녹네!” 이 아름다운 합창에 다른 목소리가 얹힌다. “따끈따끈 된장찌개, 스르르 스르르 내 몸이 녹네!”
추위에 온몸을 달달 떨던 멸치와 야채들에게 된장 온천은 하나의 완벽한 세상이었고, 그들은 그곳에서 완벽하게 만족했다. 하지만 동시에 그들은 누군가의 몸을 데워줄 그 무엇, 된장찌개가 되어 버리고 말았으니. 상호 속박의 진실은 어쩌면 여기, 된장찌개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주인공은 누구인가. 된장 온천의 행복한 야채들인가. 아니면 아이들에게 뜨뜻한 밥과 된장찌개 밥상을 차려주는 너구리 아빠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