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리 이글턴을 읽다
인간 삶 속의 성스러운 의미
댓글을 쓰다가 또 길어져서 페이퍼로 씁니다. 저는 이게 혹시 질병이 아닌가 싶습니다. 댓글 길게 쓰다 페이퍼 쓰면서 먼댓글로 연결하는 병 말입니다.
사회주의와 유물론, 무신론에 관한 부분을 같은 선상에서 연결해 설명하는 건 어려울 거 같고요. <신을 옹호하다>의 테리 이글턴의 주장을 중심으로 제가 이해한 범위 내에서 이야기해 볼게요.
건수하님의 물음에 대한 간편한 대답이라면, 그렇습니다. 사회주의는 무신론과 닿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는 표현이 마르크스의 말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번 기회에 저도 검색을 해 보았습니다. <헤겔 법철학 비판>입니다.
종교적 고통은, 현실의 고통의 표현이자, 현실의 고통에 대한 저항이다. 종교는 억압된 피조물의 탄식이며, 심장 없는 세상의 심장이고, 영혼 없는 현실의 영혼이다. 이것은 인민(人民)의 아편(阿片)이다.
사회주의 사상의 창시자가 종교를 바라보는 관점을 이보다 더 명확히는 할 수 없을 거 같습니다. 한편으로, 유물론 또한 사회주의 사상에서 중요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겠죠. (빨간 무늬 친구들, 빨간 옷 친구들, 저의 허접한 설명에 웃고 있다는 거, 제가 압니다. 얼른 댓글 다시고요) 만물의 근원을 물질로 보고, 모든 정신 현상도 물질의 작용이나 그 산물이라고 주장하는 유물론에 의하면, 인간의 영혼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걸 유발 하라리가 아주 쉽게 설명했죠. 과학과 의학의 발달, 특히 해부학의 발달로 인간은 인간의 ‘몸’을 더 세세하게, 더 샅샅이 접근했습니다. 인간 장기, 그 어디에서도 ‘영혼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는 게 그들의 주장입니다. 하트 모양이라 생각되던 ‘마음’의 자리에는 ‘심장’이 있었고요. 그럼, 영혼은 어디? 머리 속? 거기에도 아무것도 없더라. 뇌란 1,200~1,400그램의 단백질 덩어리이고, 감각 기관을 통해 얻어진 정보의 처리, 전기 신호의 결과가 우리의 사고이며, 의식이다... 라고 주장합니다. 영혼의 자리는 어디에도 없죠. 진화 과정 중 어디에서도 영혼의 ‘출현’을 확인할 수 없다. 증거가 없다. 영혼은 없다.
서구-기독교-자본주의 세계는 민주주의를 정치체제로 선택했고 지난날 침략과 수탈의 결과로 현재는 경제적으로 매우 풍요롭습니다. 사회주의 국가들이 개혁, 개방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건 당연히 경제적인 이유에서였고요. 이제 이념의 선으로 세계를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국제 사회는 급변하고 있습니다. (거꾸로 가시는 분 있습니다, 우리나라에. 우리 모두 아는 바로 그 사람.)
<신을 옹호하다>에서 테리 이글턴은 이렇게 씁니다.
진부하게도 구원이란 예배와 율법과 의식(儀式)의 문제가 아니며 어떤 도덕적 원칙을 준수하는 문제도, 짐승을 죽여 제물로 바치거나 남달리 고결하게 살아가는 문제도 아닌 것으로 드러난다. 구원은 굶주린 사람의 배를 채워주고, 이민자들을 환영하며, 아픈 이들을 찾아가 돌보고, 부자들의 횡포로부터 가난한 사람과 고아와 미망인을 보호하는 문제다. 놀랍게 들리겠지만 우리는 종교라는 특별한 기구를 통해 구원받는 게 아니라 서로 뒤섞여 살아가는 일상적 관계의 질을 통하여 구원받는다. 일상의 삶이라는 개념을 만들어낸 것은 기독교이지 프랑스 지식인이 아니다. (33쪽)
사회적 약자(고아, 과부<성경 표현 그대로임>, 나그네<외국인>)에 대한 구약 시대의 정치적 장치와 제도는 성경에 여러 번 반복됩니다. 저는 그것이 예수님이 말씀하셨던 ‘하나님 나라’에 분명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신약성경에는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사도행전 2장 44-45절)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신자들이 같이 모여 기도하며 생활하는 공동체 안에서 이루어졌던 일입니다. 어딘지 모르게 말이죠. 아니, 정확히는 어디선가 본 듯한, 들어본 듯한 모습입니다. 능력껏 일하고 필요한 만큼 가져간다, 는 사회주의 이상에 매우 가까운 모습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쟝쟝님의 댓글, ‘참 사회주의자는 참 종교인과 같다.’에 동의하게 됩니다. 기존의 기독교‘적’ 해석의 틀로서는 말도 안 된다고 팔짝 뛸 일이기는 합니다만, 저는 약자에 대한 존중과 물적 재산의 통용과 관련해서는 기독교와 정확히는 초기 기독교와 사회주의가 공명한다고 생각합니다.
자유주의와 합리주의에 대해서는 테리 이글턴이 하도 촘촘하게 때려 패기 때문에 그 맛을 맛보기 위해서라도 직접 읽어보시기를 추천드립니다.
마지막으로ㅋㅋㅋㅋㅋㅋㅋㅋ
저는 이 시대에 이미 과학은 이전에 종교의 차지했던 위치를 점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천국과 지옥을 믿지 않은 사람이 없었던 중세 시대와 마찬가지로 지금은 모두 천국과 지옥을 믿지 않죠. 정치권력은 견제받습니다. 종교는 여러 차례 링 위에서 훅을 맞아 비틀거리며 휘청거렸고요. 과학, 명확한 의미로 하면 과학 추종자들은 과학이 그러한 판단과 견제 혹은 비판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모든 일에 대한 해답이 ‘과학적’이어야 한다고 하는 그 넌센스를 도대체 어느 때까지 들어야 하는 걸까요.
불현듯 아직도 <과학혁명의 구조>를 아직도 읽지 않았구나, 하는데 생각이 머무네요. 일단 읽고 돌아오겠습니다. 전, 반드시 돌아옵니다. 황금가면 아니지만, 돌아옵니다. 반드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