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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이런 식으로 통치당하지 않을 것인가? - 푸코로 읽는 권력, 신자유주의, 통치성, 메르스 ㅣ 대안연구공동체 작은 책 - 인문학, 삶을 말하다
심세광 지음, 대안연구공동체 기획 / 길밖의길 / 2015년 9월
평점 :
이 책의 저자는 프랑스 파리 10대학에서 <미셸
푸코에 있어서 역사. 담론. 문학>이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심세광이다.
심세광은 푸코가 권력을 군주의 권력, 규율 권력, 생명관리권력으로 나누어 설명했다고 보았다. 군주의 권력은 금지와
허용의 이분법적 구분으로 실행되는데, 한센병의 관리가 대표적인 사례다.
(12쪽) 규율 권력은 증상이 나타나지 않는 사람의 삶에도 개입하는 권력(13쪽)으로 권력 행사의 대상이 되는 쪽에 조명이 비침으로 개인들의
모습이 가시적으로 드러난다(15쪽). 생명관리권력은 확률과
통계를 도입함으로써 ‘인구’라는 개념을 만들어 냈는데, 가축을 돌보는 목자의 기술에서 비롯된 생명관리권력은 선제적인 예방 조치들에 집중(백신 접종)하면서 통계를 중시하는 행정을 통해 구성되는 권력으로 보았다(18쪽).
<감시와 처벌>, 문제의 그 문단을 다시 읽어보자.
즉, 권력은 소유되기보다는 오히려 행사되는 것이며, 지배계급이 획득하거나 보존하는 '특권'이 아니라, 지배계급의 전략적 입장의 총체적 효과이며, 피지배자의 입장을 표명하고 때로는 연장시켜 주기도 하는 효과라는 것이다. 다른 한편, 권력은 '그것을 갖지 못한 자'들에게 다만 단순하게 의무나 금지로서
집행되는 것은 아니다. 권력은 그들을 포위공격하고, 그들을
거쳐 가고, 그들을 가로질러 간다. 권력은
그들을 거점으로 삼는데, 이것은 마치 권력에 맞서 싸우는 사람들이 권력에 대한 영향력을 거점으로
삼는 것과 같다. 바꿔 말하면, 이 권력의
이러한 관계들은 사회의 심층 속에 깊숙이 자리 잡은 것이지, 국가와 시민들 사이에 혹은 국가와
계급들의 경계 사이에 있는 관계들 속에 있는 것이 아니다. (<감시와 처벌>, 66쪽)
권력을 힘의 총체로서 보지 말 것, 즉 그것을 관계망으로써 이해해 보라는 푸코의
외침을, 나는 이미 접수했다. 내 관심은 ‘권력을 갖지 못한 자들’의 행위가 ‘권력의
작동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것인데, 심세광은 이렇게 정리했다.
통치 행위 자체는 좋은 것도 아니고 나쁜 것도 아니다. 문제는
어떻게 현명하게 통치할 것인가, 또 어떻게 '참을 수 없는
통치'와 '전면적으로 예속화하는 통치'를 거부하고 '다른 통치'를
요구할 것인가이다. 그런데 '참을 수 없는 통치'에 대한 거부와 '다른 통치'의
요구 역시 타자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고자 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바로 통치 행위에 다름 아니다. 그러므로
이 모든 과정을 ‘선한 자'와 '악한 자'의 대결구도로 포착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어떻게 이런 식으로 통치당하지 않을 것인가?>, 45쪽)
내가 알던 푸코는 <성의 역사>의
푸코였고, <말과 사물>의 푸코였다. 나는 최근에서야 세련되고 댄디하고 여유만만한 교수 푸코가 아니라, 거리의
투사 푸코를 알게 되었다. 이를테면 이런 사진 속의 푸코.
참을 수 없는 통치를 거부하고 다른 통치의 요구를, 푸코는 자신의 삶 속에서
실천했다. 이게 얼마나 어렵고 힘든 일인지. 대학을 나왔지만
이미 학력 인플레이션 대한민국 사회에서 가방끈이 짧은 나는, 감히 헤아릴 수조차 없다. 공부가 길어질수록, 사회적 지위가 높아질수록 핵심은 놓치고 말은
길어진다. 애매모호하게 말하고 그렇게 단순화할 수 없는 문제라고 말한다. 그래서요? 라고 나는 묻는다. 대답을
들을 수 없을 때가 많다. 답을 찾는 건 각자가 할 일이다. 답은
내가 찾아야만 한다. 이 일에 대한 답은.
용산 참사와 세월호 참사, 그리고 그 뒤 있었던 일련의
사태가 이를 잘 증거하고 있다. 앞서 이야기한 비판으로서의 통치, 통치로서의
비판을 위해, 그리고 통치자들을 우둔함 속에 빠뜨리지 않기위해 시민들은 정부로 인한 불의와 불행을 정부
측에 분명히 알릴 의무가 있다. 이제 시민들은 심정적인 차원의 분노와 슬픔은 시민의 몫이고, 대책을 세우고 실천하는 것은 정부의 몫이라는 진부한 역할분담 논리를 거부해야 한다. 정부와 통치자들이 독점하고 앉아 실정을 거듭하는 정치의 영역에 이젠 시민들이 비판하는 자의 자격으로, 타인을 배려하고 통치하고자 하는 자의 자격으로, 진실을 외치는 자의
자격으로 개입하고 참여해야 한다. (<어떻게 이런 식으로 통치당하지 않을 것인가?>, 62쪽)
참을 수 없는 통치에 대한 거부, 다른 통치의 요구야말로, 피지배자인 내가 권력 중심에 들어서는방법이자 권력이 나를 거점으로 삼는 방식이다. 그런 실천이야말로 ‘통치 행위에 다름 아니다’. 불의한 권력에 대한 거부와 다른 통치의 요구.
나는 오송 지하차도 사고, 정부의 부주의로 인한 이런 가슴 아픈 인재가 윤석열
정부 때문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10월 29일 이태원에서의 참사는 지금 정부가 윤석열 정부이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고 생각한다. 문제는 사건이 발생한 이후다. 10. 29 참사는 물론이요, 오송 지하차도 희생자의 유가족들은 제대로 된 사과를 듣지 못함은 물론이요, 사고
발생에 대한 설명도 그에 대한 적절한 조사 결과도 아직 받아보지 못했다. 애도의 시간마저 송두리째 빼앗긴
가족들의 한이 하늘에 사무친다.
어떻게 이런 식으로 통치당하지 않을 것인가?
권력과 맞설 수 있는, 그런 힘을 가진 지식을 직접 생산해 냈을 뿐만 아니라
몸소 거리에서 자신의 지식을 실천했던 푸코의 말이기에 ‘믿어’ 주고
싶지만, 세상일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합법적으로 정권을 획득한 대통령과 수권 정당의 기만에 대해 그 폭압에 대해 무도함에 대해 뻔뻔함에 대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이토록 많은 사람이 거리에서 외치고, 부끄러워하고, 안타까워하는 일들을 ‘적법한’ 절차에
따라 민의의 반영 없이 ‘밀어붙이는’ 권력에 대해 무슨 일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들은 소유하고 획득한 그 무엇으로서 권력을 향유하고 있건만, ‘같이 만들어 가겠다’는 내 생각은 주제 넘는 일이 아닌가. 불가능하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