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랑꽃창포'

마을 입구 새롭게 조성된 체육공원에 연못이 있다. 연못 가운데 인공섬을 만들고 주변에 노랑꽃창포를 심었다. 그 노란빛으로 환하다.

 

노랑꽃창포는 노란 꽃이 피는 창포라는 뜻이다. 유럽에서 들어와 귀화된 식물로 잎이 아랫부분에서 서로 얼싸안는 형태가 창포와 닮아 있지만, 완전히 다른 과, 다른 속의 종이다. 단오날 창포를 넣어 삶은 물로 머리를 감고 목욕을 하는 풍습에서 사용하던 그 창포가 아니라는 말이다.

 

수질정화에도 도움이된다고 하여 새롭게 조성하는 연못에 주로 심는다. 물을 좋아하지만 마른땅에서도 잘 자란다.

장독대 옆 수련과 어리연꽃이 자라는 물웅덩이 주변에 심었는데 올해는 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꽃말은 우아한 심정, 당신을 믿는다, 그대는 정숙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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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행복하자 2015-05-12 20: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붓꽃으로 생각했는데 아니었군요. 고창보리밭에 가니까 연못가에 많이 심어져 있었어요~ 꽃잎이 좀 징그럽다는 생각이 들었었는데 고마운 꽃이군요~

무진無盡 2015-05-13 21:32   좋아요 0 | URL
햇볕을 가득담은 꽃이 이쁘게도 보여서 담아봤습니다.

[그장소] 2015-07-03 13:32   좋아요 0 | URL
붓꽃이기도 하지않나요? 같은 걸로 알고있었는데..^^ 창포와... 아닌가욤?@@;

무진無盡 2015-07-03 13: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붓꽃도 종류가 많고 창포와 꽃창포도 다르고ᆢ^^
 
담바고 문화사
안대회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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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불호를 넘어선 담배로 본 조선 문화사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 어쩌구저쩌구로 시작하는 이야기는 우리에게 친숙한 옛이야기의 시작임을 알려주는 대표적인 말이다. 이런 이야기기 통용될 수 있는 것은 담배라는 기호품이 널리 사랑받았다는 반증이 아닐까? 오늘날 담배를 혐오감으로 보는 시각이 널리 확산되어 애연가들이 위축되는 사회적 분위기를 생각할 때 격세지감을 느낀다.

 

수 천 년 우리 역사에서 담배가 등장한 것은 그렇게 오래된 일은 아니다. 한껏 올려 잡아 봐야 조선조 일본의 상인을 통해 동래왜관에서 거래되기 시작한 1610년대이니 지금으로부터 400여년이 지났을 뿐이다. 우리 역사에 등장하면서부터 급속도로 확산되는 과정에서 남녀노소, 신분에 고하를 불문하고 사랑받아왔던 기호품이 담배다. 차나 술과 같은 기호품과는 또다른 역사를 가진 담배가 담고 있는 이야기는 무엇이 있을까?

 

안대회의 담바고 문화사는 바로 그 담배에 주목하여 담배가 가지는 문화사적 의미를 탐구한 결과물이다. “잠시도 일상생활에서 떼놓을 수 없던 물건, 조선뿐 아니라 몽골과 일본까지 사로잡으며 교역의 중심에 있었던 물건, 문화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고 경제를 들었다 놨다 했던 물건임에도 우리는 담배를 본격적으로 다루지 못했다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담바고 문화사에서는 담배가 우리 역사에 등장하는 시기에 관한 이야기에서부터 담배의 명칭의 유래, 담배의 종류, 애연과 금연의 중심에 섰던 사람들, 담배와 경제, 문화예술 속 담배, 구한물 흡연문화에 이르기까지 조선의 역사에서 담배와 관련된 거의 모든 이야기를 찾고 그 배경을 탐구하고 있다.

 

장유, 신광수, 신광하, 허필, 정조, 정약용, 심노승, 조희룡, 황현 이들의 공통점은 조선시대 내노라하는 애연가들이었다는 점이다. "담배를 버린다면 살아 있다고 해도 무슨 재미가 있겠소?" 만백성이 담배 피울 날을 꿈꾼 조선 정조 임금의 말이다. 정조를 비롯하여 사대부, 할머니, 기생, 어린아이 등 담배르 매개로 펴려쳐지는 이야기가 무척 흥미롭게 전개된다.

 

특히, 김홍도, 신윤복 등이 남긴 풍속화 속에 담배가 등장하는 장면을 선별하여 삽입해 놓아 당시 사람들의 담배와 관련된 구체적인 생활상을 눈으로도 확인할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는 점이 돋보인다. 또한 일곱 가지의 깊이 읽기를 통해 담배와 관련된 본문의 내용을 부연설명하면서도 또 다른 시각을 전달해 주기도 한다.

 

오늘날 담배는 마치 건강을 해치는 주범인양 취급받고 있다. 물론 담배가 주는 폐해를 모르는 바는 아니기에 이러한 취급을 수긍하는 측면이 많고 또한 온갖 법적 장치를 동윈 해 흡연자들을 구석으로 내모는 것도 수용한다. 그러나 담배가 기호품을 넘어 혐오의 대상에다 세금을 징수하는 편리한 도구로 변하는 것에 대해 깊은 사고를 요구한다. 사회적 분위기를 조장하여 손쉽게 국민들의 호주머니를 털려는 의도는 더 큰 사회적 문제를 불러오게 될 것이다.

 

담바고 문화사를 통해 안대회는 담배는 “17세기 초기 이래 한반도의 절대다수가 즐긴 기호품의 제왕이자 경제의 블루오션이었고, 일상 삶에서 가장 중요한 물질이었다. 담배는 문화와 예술, 사회와 경제, 의식과 풍속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하였다. 이는 조선시대만의 이야기가 아님을 알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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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버지입니다 - <땡큐 대디> 원작 팀 호이트 부자의 아름다운 동행
딕 호이트.던 예거 지음, 김정한 옮김 / 라이스메이커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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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어버이날, 한 아버지가 스스로 세상을 등졌다. 아들을 불의의 사고로 먼저 보내고 억겁의 시간을 보내던 아버지의 선택이 목숨을 버리는 것이었다. 죽음으로 무엇을 말하고 싶었을까? 이런 현실에서 수도 서울에만 25만 명의 독거노인이 살아간다고 한다. 이 또한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선택한 삶이라는 것이다. 가족의 해체가 우리가 사는 현대사회의 현실임을 반증하는 단면이 아닐까 싶다.

 

이렇게 해체되는 가족임에도 불구하고 가족은 인간으로 태어나 귀속되는 가장 기초단위이며 한 인간이 성장하는 자양분이다. 그렇기에 가족은 기적과도 같은 일들을 만들어 온 힘의 근원이 된다. 이런 가족의 힘을 확인할 수 있는 단적인 사례가 여기에 있다. 팀 호이트 부자의 아름다운 동행을 담은 책나는 아버지입니다이다.

 

"아빠와 함께 달리고 싶어요!"라는 한마디에 시작된 팀 호이트 부자의 레이스는 가족 특히 아버지의 존재가 어떤 의미로 다가서는지 확인할 수 있다. 뇌성마비 아들을 휠체어에 태우고, 자신은 그 뒤에서 휠체어를 밀며 보스턴 마라톤대회 풀코스와 하와이 철인3종 경기를 완주한 철인 딕 호이트. 그와 그의 아들이 함께 일구어낸 이야기를 담았다. 영화 탱큐, 대디의 주인공들이다. 유튜브를 비롯한 다양한 매체를 통해 전 세계 1500만의 가슴을 울린 감동 실화의 주인공들의 이야기가 가족 드라마처럼 펼쳐진다.

 

마라톤 42.195킬로미터 64, 보스턴 마라톤 대회 26회에 24년 연속 완주, 세계 철인3종 경기 대회 6, 단축 철인3종 경기 206회 완주, 미국 대륙 6000킬로미터 횡단…….이들이 이런 엄청난 도전을 할 수 있었던 배경은 어디에 있을까? “아버지, 아버지가 없었다면 저는 할 수 없었어요”, “아들아, 네가 없었다면 나는 하지 않았다가족이라는 믿음과 배려를 바탕으로 용기가 그 힘이었을 것이다.

 

태어나는 과정에서 뇌성마비에 걸려 장애우로 살아야 하는 아들을 온갖 사회적 편견과 제약에도 불구하고 정상인으로 성장하도록 함께 길을 걸어간 가족과 그 길에서 주인공이었던 아들의 감동적인 이야기다. 몸은 불편하지만 세상 그 누구보다 강인한 정신력과 긍정적인 마음가짐으로 역경을 이겨낸 아들과 그런 아들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한 위대한 아버지의 이야기는 팀 호이트 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지구상 어디든 가족이 있고 아버지를 둔 자식이라면 모양만 다를 뿐 충분히 있는 사례다. 하지만, 어느 가족보다 딕 호이트는 더 큰 일을 해냈다.

 

할 수 있다라는 신념, 이 신념을 실현해가는 이들의 행보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전해준다. 그 바탕에 아버지가 있다. 아버지를 중심으로 온 가족이 만들어가는 감동의 드라마가 가족의 해체의 시대에 가족의 의미를 다시금 생각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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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종 2015-05-09 19: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불리는 것만으로도 많은 무게가 실리는 이름입니다, `어머니`와는 또 다른 느낌으로. . .
 
조선의 지식계보학
최연식 지음 / 옥당(북커스베르겐)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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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조선을 이해하는데 빠져서는 안 되는 것이 양반과 사대부의 나라였다는 점이다. 왕조국가인 조선을 양반과 사대부의 나라라고 칭할 수 있는 것은 무엇보다 조선이 세워지고 그 기틀을 만드는 과정에서 유교를 근간으로 한 왕권과 신권의 조화를 밑바탕으로 해서 일궈온 나라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기에 조선은 왕과 양반 사대부가 권력을 나눠가지며 왕권과 신권의 권력의 기울기에 의해 파란만장한 역사를 만들어왔다고도 볼 수 있다. 서로가 권력의 중심을 향하되 상대를 인정하고 공존을 모색했기에 500년 역사를 이어올 수 있었다고 본다.

 

그렇다면 이렇게 왕권과 균형을 이루며 국가를 이끌어 왔던 세력들 중 조선을 지탱했던 사상적 근거인 성리학의 대가들은 어떤 계보를 형성했을까? 조선을 이끌었던 대표적인 선비들을 통해 그 맥락을 찾아보는 것도 의미 있는 작업이 될 것이다. 조선 시대의 선비는 현대사회의 지식인과도 맥을 같이한다고 볼 수 있다. 현대 사회와는 달리 조선은 지식인의 상징적 역할을 했던 것이 확실하게 존재한다. ‘문묘종사가 그것이다.

 

문묘(文廟)는 문성왕묘(文宣王廟)의 약자로 공자묘(孔子廟)라고도 부른다. 공자(孔子)의 위패(位牌)를 모신 사당(祀堂)을 가리키는 말이며, 흔히 공자를 중심으로 그 핵심 제자들의 위패를 모시곤 한다.”조선이 개국하면서 종묘와 더불어 문묘는 커다란 의미를 가진 곳이다. 조선에서 문묘는 성균관에서 관장하며 이 문묘에 종사된 우리나라 사람으로는 총 18명이 있으며 최치원, 설총, 안향을 빼면 조선시대에 문묘 된 사람은 정몽주,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 이이, 성혼, 김장생, 송시열, 송준길, 박세채, 김인후, 조헌, 김집 등 15 명이다.

 

조선의 지식계보학은 바로 조선시대에 문묘종사 된 이 15명에 대한 이야기를 담았다. 개별 인물들의 학문과 정치적 영향력에 중심을 두고 살피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 역학관계 속에서 어떤 과정을 통해 이들이 문묘에 종사되었는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는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본다는 점에서는 긍정적인 면이 있으나 문묘 종사와 관련되어 각 개별 인사들의 면면을 살핀다는 점에서는 미약한 점이 있다.

 

15명의 문묘종사 과정을 따라가는 이 조선의 지식계보학은 크게 세 번의 쟁점화를 통해 살피고 있다. 먼저 중종반정이후 조광조에 의해 제기되어 정몽주의 문묘종사 과정에서는 정도전과 정몽주를 비교하며 어떻게 고려의 충신인 정몽주가 조선의 문묘에 첫 종사자가 되었는지를 알아간다. 두 번째로는 이황에 의해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에 대한 계보의 추정과 더불어 문묘종사에 대한 구체적 과정, 세 번째로는 이황, 이이 성혼 등으로 정치적 역학관계 속에 임금과 당파사이의 정치적 타협의 산물로 만들어졌던 과정을 추적한다.

 

조선의 문묘 종사에서 중요한 것은 대상자 선정 의 표면적 결과가 아니라 대상자 선정 과정에서 드러난 권력정치의 적나라한 속살이라 말하며 개별 인물 연구가 아닌 문묘 종사의 정치 동학에 초점을 맞추어 이야기를 풀어나고 있는 조선의 지식계보학에서 주목하는 것은 새로운 시각으로 문묘종사를 통해 지식계보를 따져봤다는 긍정적인 측면에도 불구하고 온전하게 지식계보학의 내용을 채워가진 못했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이는 문묘종사가 가지는 상징적 의미에서 부정적인 측면의 강조로 비춰지는 측면이 있어 문묘종사가 가지는 근본적 취지에 보다 주목한 연구와 결합 된다면 보다 풍부한 조선의 지식계보학이 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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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종 2015-05-09 23: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문묘종사`의 상징성이 그런 것이라면, 책의 제목이 `조선의 정.치.계보학`이었어도 괜찮을 뻔 했겠네요^^
 
행복만을 보았다
그레구아르 들라쿠르 지음, 이선민 옮김 / 문학테라피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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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회는 다양한 범죄의 양태를 보여주지만 무엇보다도 엽기적인 것은 가족 구성원을 대상으로 하는 범죄를 심심찮게 자주 본다는 것이다. 가장이나 부인이 가족 구성원의 일부를 살해하고 자신은 자살을 시도하거나 자살한 것과 같은 범죄가 그것이다.

 

이러한 범죄 형태는 영화나 범죄드라마, 범죄를 그리는 문학작품들 속에서 주목하여 관객이나 독자들의 이목을 사로잡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기도 한다. 하지만 같은 범죄라도 무엇에 집중하여 보는가에 따라 커다란 차이를 보인다. 범인을 잡는 것과 이미 범인이 누구인지 아는 상황에서 그 범인의 심리적 태도를 추적하는 것도 있다.

 

프랑스 작가 그레구아르 들라쿠르행복만을 보았다역시 한 사람의 성장과정과 충격적인 사건을 저지르고 난 후 이해 당사자의 이야기로 구성한 작품이다. 이 작품의 저자 그레구아르 들라쿠르는 프랑스의 카피라이터 출신 작가로 2011그 가문의 소설가이후 발표하는 작품마다 주목을 받으며 작품성과 대중성을 동시에 인정받은 작가라고 한다.

 

행복만을 보았다의 이야기의 흐름은 부모, 나 그리고 자식으로 이어지는 가정 속 환경의 변화가 나에게 미친 영향으로부터 자식에게로 이어진 일련의 과정을 따라간다. 냉철한 손해사정사인 한 남자가 있다. 그는 오랜 시간 동안 다른 사람 목숨의 가치를 매기는 일을 해왔다. 그러다 문득, 그렇다면 과연 자신의 인생의 가치는 얼마쯤 되는지 따져보는 데서 출발하는 소설이다.

 

우리의 인생의 가치는 얼마일까? 라는 1부는 아버지를 중심으로 한 부모와 자신 그리고 자식에게로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에서 각 사건마다 돈으로 환산된 이야기를 풀어간다. 평범한 일상이 어떻게 점점 광기에 휩싸여 가는지를 보여주며 그 결말은 주인공이 자신의 딸을 권총으로 쏘는 개 같은 일이 벌어진다. 왜 당신을 날 먼저 쏘았나요? 2부는 그 개 같은 일이 있고 난 후 주인공이 정신과 의사와의 상담 과정 그리고 멕시코로 추방된 이후의 새로운 삶을 그리고 있으며 3부 행복만을 보았다는 권총을 맞은 딸의 시각에서 개 같은 일로 인한 증오와 고통, 그것을 치유하고 희망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이 그려져 있다.

 

용서할 수 없었던 아버지를 찾아가서 옆자리에 앉는 장면을 끝으로 그러니까 인생이란 결국 힘겹더라도 살아갈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라는 문장과 함께 끝을 맺는다. 무엇이든 돈으로 환산되고 그 환산된 돈의 크기에 따라 인간의 가치마저 결정하는 현대사회에서 인간의 가치는 무엇으로 어떻게 평가되어야 할까? 아니 그 평가라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가질까?

 

사연 많은 한 사내의 특정한 경험이 아니라 동시대를 살아가는 누구나 겪을 수 있는 가치관의 혼란과 그로부터 느끼는 상실과 좌절은 평화로운 일상을 파격적인 사건으로 몰고 갈 수도 있고 애기치 못한 사건으로 그 대상이 되기도 한다. 이런 사회에서 인간의 궁극적 가치 기준을 어디에 두어야할까?

 

무엇을 어떻게 이야기하든 삶의 가치는 인간의 행복에 둔다. 이 행복을 찾아가는 길에서 자신을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 깊은 고민과 성찰로 이끄는 기회를 제공해 주는 작품으로 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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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행복하자 2015-05-01 00: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왜 저를 먼저 쏘았나요? 책을 덮으면서 맘이 많이 무거웠던 책입니다.
수치로 환산될수밖에 없는 우리의 삶에 환산불가능한 가치를 어떻게 수긍시켜야하는건지...

해피엔딩이었지만 해피엔딩처럼 느껴지지않았던 것 같아요

무진無盡 2015-05-01 00:23   좋아요 0 | URL
읽어가기 버거운 작품이긴했습니다.
삶의 가치는 그 삶에 부여하고 싶은 사람의 가치관에 의해 결정되어지는 것이라 우겨보고 싶은 마음입니다. 돈으로 환산되는 현실이지만 그게 전부는 이니기에ᆢ

나비종 2015-05-10 21: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한글자」라는 책에서 `낭비란 비싼 칼을 사는 게 아니라, 그 칼을 사서 칼집 안에 가둬두는 것`이라는 문구를 본 적이 있습니다. 삶의 가치. . 한참을 생각하게 하는 묵직하고 어려운 말인데요. 가치관이 `비싼 칼`을 사는 선택의 문제라면, 실제로 그 칼을 어떻게 활용하는가는 선택자의 몫으로 남기 때문에 어려워지는 게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삶은 동사이고, 모든 동사는 용기를 필요로 하니까요.
저마다 행복이라는 목적을 향해 달려간다해도 각기 다른 방향에서 향해 가기 때문에 기준도 제각각이라, 비교할 수 있는 가치를 매기는 것은 거의 불가능할 것 같기도 하구요. 결국 `행복만을 보았다`는 딸처럼 자신만이 스스로 살아온 삶의 가치를 판단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되는 걸까요?

무진無盡 2015-05-10 21:35   좋아요 1 | URL
나 자신 이외에도 누군가는 알아주는 사람이 있길 희망하는거지요. 그것이 결국 공감이며 삶을 바꿔간 수 있는 출발점이 아닌가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