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려터진 여름과는 달리 가을은 급하다. 오는 것도 그렇지만 가는 것은 더 빨라 오는가 싶으면 이미 저만큼 달아나 겨우 꽁무니나 보기 일쑤다. 실제 기온 차이 보다 마음이 느끼는 차이는 더 크다. 한층 가벼워진 공기가 가을로 이끄는 숲에는 이때다 하면서 고개를 내미는 것들이 있다. 버섯, 그중 하나를 만났다.

높은 곳에 올라 먼 곳을 바라보며 가슴 깊숙한 곳에 숨겨 놓았던 속내를 덜어내고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내려오는 길에 만났다. 오묘한 색과 간결한 무늬가 전하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까 싶어 허리를 숙이고 제법 긴 시간을 눈맞춤 한다.

내놓을 말이 없으니 들을 말도 없기에 붙잡지도 잡히지도 않은 시간을 함께 한다. 반쯤 내려 놓고 애써 주장하지 않고 살기를 잘했다고 스스로에게 위로를 전하는 일이 이제는 익숙하다.

가을을 품을 가슴이 한결 가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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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_읽는_하루

한 호흡

꽃이 피고 지는 그 사이를
한 호흡이라 부르자
제 몸을 울려 꽃을 피우고
피어난 꽃은 한 번 더 울려
꽃잎을 떨어뜨려 버리는 그 사이를
한 호흡이라 부르자
꽃나무에게도 뻘처럼 펼쳐진 허파가 있어
썰물이 왔다가 가버리는 한 호흡
바람에 차르르 키를 한 번 흔들어 보이는 한 호흡
예순 갑자를 돌아나온 아버지처럼
그 홍역 같은 삶을 한 호흡이라 부르자

*문태준의 시 '한 호흡'이다. 생명이 일어났다 지는 동안 무수한 일들이 벌어지지만 길게 생각하면 하나의 과정일 뿐이다. 사람의 한 호흡도 꽃이 피고 지는 것이나 이슬이 맺혔다 사라지는 것과 다르지 않은?. 한 호흡 동안 한 숨을 쉬는 것.

'시 읽는 하루'는 전남 곡성의 작은 마을 안에 있는 찻집 #또가원 에 놓인 칠판에 매주 수요일 올려집니다.

#곡성 #곡성카페 #수놓는_농가찻집 #곡성여행 #섬진강 #기차마을 #나무물고기 #우리통밀천연발효빵
전남 곡성군 오산면 연화길 5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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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양꽃'
조금 이른 때에 만났다. 붉지만 탁해보이지 않은 밝은빛이 눈길을 끈다. 드문드문 핀 꽃들이 한여름의 열기를 식혀주듯 반긴다.

다소 복잡한 상사화 집안에 속한다. 연한 붉은빛의 제주상사화 보다는 훨씬 붉다. 내장산을 경계로 그 남쪽에 자생하는 여러해살이풀이다. 백양사에서 처음 발견되었다고 백양꽃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이름이 주는 대표성 때문인지 내장사 애기단풍길에 많이도 심어 두고서 '내장상사화'라는 팻말을 붙여두었다. 산 너머 백양사와 경쟁하나 싶은 생각에 미소가 번진다.

송광사 불일암에서 처음 본 이후로 여기저기서 만났지만 첫만남의 반가움이 워낙 커서인지 법정스님의 흔적이 남아있는 나무 아래 정갈한 화단이 먼저 떠오르는 건 어쩔 수 없다. 올해는 내 뜰에도 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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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가 가을을 슬퍼하는 이유'
남자는 가을이 되면 슬퍼진다. 서리가 내리기 때문에 슬퍼하는 것일까? 초목이 아니므로 그것은 아닐 게다. 장차 다가올 추위 때문에 슬퍼하는 것일까? 기러기나 겨우살이 동물이 아니므로 그도 아닐 게다. 만약 그가 때를 잘못 만난 탓에 서울에서 쫓겨나 떠도는 자라면 어찌 가을이 되어서야만 슬퍼하겠는가? 그런데 이상하게도 가을이 되면 바람만 스쳐도 쓸쓸함을 가누지 못하고, 달만 보아도 절로 눈시울이 붉어진다. 남자가 그렇게 슬퍼하는 것은 도대체 무엇 때문인가? 슬퍼하는 이들에게 그 까닭을 물어보았더니 그들조차도 슬퍼할 줄만 알지 왜 슬퍼하는지는 모르더라.

아, 나는 알겠다!
하늘은 남자에 해당하고, 땅은 여자에 해당하는데, 여자는 음陰의 기운이요. 남자는 양陽의 기운이다. 양기는 자월(음력11월)에 생겨서 진사(음력3,4월)에서 왕성한 까닭에 사巳월(음력4월)은 순전한 양의 기운이 된다.

그러나 천도天道는 성하면 쇠하는 법이니 사巳월 이후부터는 음이 생겨나고 양은 점차 쇠한다. 쇠하면서 무릇 서너 달이 지나면 양의 기운이 소멸하여 다하는데, 옛사람이 그 때를 일러 '가을'이라고 한 것이다. 그런즉 가을이라 것은 음의 기운이 성하고 양의 기운은 없는 때이다.

동산銅山이 무너지며 낙수의 종이 울고 자석이 가르키는바 철침이 달려 오는 것이니, 만물이 또한 그러하다. 오직 사람으로 양의 기운을 타고 난 자가 어찌 가을을 슬퍼하지 않겠는가? "봄에는 여자가 그리움이 많고, 가을에는 남자(선비)가 슬픔이 많다"라고 한다. 이는 자연이 가져다 주는 느낌이다.

어떤 사람은 말하였다.
"진실로 자네의 말 그대로 선비가 슬퍼함이 그 양의 기운이 쇠함을 슬퍼하는 것이라면, 온 세상에 수염이 난 자들은 모두 가을을 슬퍼할 것이다. 어찌 오직 선비만 가을을 슬퍼한단 말인가?"

내가 답하였다.
"그렇다. 바야흐로 저 가을 기운이 성하면, 그 바람은 경동하고, 그 새들은 멀리 날아가고, 그 물은 차갑게 울고, 그 꽃은 노랗게 피어 곧게 서있고, 그 달은 유난히 밝은데 암암리에 양의 기운이 삭는 조짐이 소리와 기운에 넘친다면 그것을 접하고 만나는 자 누군들 슬퍼하지 않겠는가?

아! 선비보다 낮은 사람은 한창 노동을 하느라고 알지 못하고, 세속에 매몰된 자들은 또 취생몽사醉生夢死를 한다. 오직 선비는 그렇지 아니하여 그의 식견이 족히 애상을 분변하고, 그 마음 또한 사물에 대해 느끼기를 잘하여, 혹은 술을 마시고, 혹은 검을 다루고, 혹은 등불을 켜서 고서를 읽고, 혹은 새와 벌레들의 소리를 듣고, 혹은 국화를 따면서 능히 고요히 살피고 마음을 비운다.

그것을 받아들이는 까닭에 천지의 기운을 가슴속에서 느끼는 것이요, 천지의 변화를 체외에서 느끼는 것이다. 이 가을을 슬퍼하는 자가 선비를 두고 그 누구이겠는가? 비록 슬퍼하지 않으려 하더라도 될 수 있겠는가?

송옥은 말하기를 "슬프구나 가을 기운이여" 라고 하였고, 구양수는 말하기를 "이는 가을 소리로다" 라고 하면서 슬퍼하였다. 이와 같은 사람들은 가히 선비라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경금자는 말하였다."내가 저녁을 슬퍼하면서, 가을을 슬퍼하는 것이 없는데도 슬퍼지는 것을 알았다. 서쪽 산이 붉어지고 뜰의 나뭇잎이 잠잠해지고, 날개를 접은 새가 처마를 엿보고, 창연히 어두운 빛이 먼 마을로부터 이른다면 그 광경에 처한 자는 반드시 슬퍼하여 그 기쁨을 잃어버릴 것이니, 지는 해가 아껴서가 아니요, 그 기운을 슬퍼하는 것이다. 하루의 저녁도 오히려 슬퍼할 만한데, 일 년의 저녁을 어찌 슬퍼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또 일찍이 사람이 노쇠함을 슬퍼하는 것을 보니, 사십 오십에 머리털이 비로소 희어지고 기혈이 점차 말라간다면 그것을 슬퍼함이 반드시 칠십 팔십이 되어 이미 노쇠한 자의 갑절은 되는 것이다. 아마도 이미 노인된 자는 어찌 할 수 없다고 여겨서 다시 슬퍼하지 않는 것인데 사십 오십에 비로소 쇠약함을 느낀 자는 유독 슬픔을 느끼는 것이니라. 사람이 밤은 슬퍼하지 않으면서 저녁은 슬퍼하고, 겨울은 슬퍼하지 않으면서 유독 가을을 슬퍼 하는 것은, 어쩌면 또한 사십 오십된 자들이 노쇠해감을 슬퍼하는 것과 같으리라!

아! 천지는 사람과 한 몸이요, 십이회十二會는 일 년이다. 내가 천지의 회를 알지못하니, 이미 가을인가 아닌가? 어찌 지나 버렸는가? 내가 가만히 그것을 슬퍼하노라."

*조선시대를 살았던 이옥李鈺(1760~1815)의 글이다. 가을을 맞이하는 나름의 의식을 치루는 중이다. 기온 차가 만들어 내는 아침 안개를 찾아보고, 옷을 바꾸어 입으며, 예전보다 하늘을 더 자주 더 오랫동안 올려다 보며, 까실해 지는 볕을 확인하느라 소나무 수피를 살피고, 읽을 책을 골라 책상 가장자리에 쌓아두고, 마실 차를 마련하며, 붉어진 노을을 보기위해 서쪽을 주목한다. 그 모든 끝자리에 이옥의 이 글을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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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기앉은부채'
꽃 찾아 다니다 만나는 자연의 신비스러운 것들이 한둘이 아니라는 것을 알지만 이 또한 빼놓을 수 없다. 한동안 눈앞에 어른거리는 것은 당연하고 오랫동안 볼 수 있길 바라는 마음이 크다.

습기 많은 여름에 핀다. 작은 크기로 땅에 붙어 올라와 앉아있는듯 보이며 타원형으로 된 포에 싸여 있는 모습이 이채롭다. 앉은부채라는 가부좌를 틀고 앉은 부처님과 닮아서 ‘앉은부처’라고 부르던 것이 바뀐 것이라고 한다.

애기앉은부채는 앉은부채와 비슷하나 그보다 작아서 붙여진 이름이다. 앉은부채는 이른 봄, 눈 속에서도 꽃이 피는 반면 애기앉은부채는 고온다습한 여름이 되어야 꽃이 핀다.

자생지가 많지 않고 더러는 파괴된 곳도 있기에 앞으로 얼마동안 볼 수 있을지 미지수다. 귀함을 알기에 상처를 입기도 하지만 그 귀함을 모르기에 무참히 파괴되기도 한다. 이 자생지가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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