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연애 - 서가에서 꺼낸
문아름 지음 / 네시간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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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함께 멋진 연애를

책은 일상이다. 시간이 나서 읽는 것이 아니라 없는 시간을 쪼개고 시간과 시간 사이 짬을 이용해 늘 가까이 둔 책에 손이 가는 것이 자연스럽다. 꽤 많은 책을 본다고는 하지만 워낙 다양한 분야의 책이 날마다 쏟아지는 현실에서 그 많은 분야의 책을 골고루 보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하여, 관심 있는 분야에 집중하게 되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렇다보니 때론 심각할 정도로 한쪽에 치우친 책읽기가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더라도 당분간 이런 나의 책읽기 스타일을 바꿀 생각은 없다.

 

그렇다면 책은 왜 읽는 것일까? 이 뻔 한 질문에 명쾌한 답을 내놓을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삶의 지혜를 얻기 위해?, 복잡한 일상에서 잠시 쉴 틈을 마련하기 위해? 남는 시간동안 딱히 할 일이 없어서? 등 머릿속에 금방 떠오르는 말이야 많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런 말들이 책을 읽는 사람들의 본질적인 내면의 요구를 대변하지는 못하는 듯싶다. 그렇다고 무슨 거창한 이유가 있어야 책을 읽는 것은 아니지만 주변에서 책을 즐겨보는 사람들에게서 그러한 질문을 하는 것 자체가 없는 답을 억지라도 부려서 비꼬는 것은 아닌가 심히 의심해 본다.

 

여기 자신만의 책읽기에 빠진 사람이 있다. 저자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자신이 읽고 싶은 방향으로 책을 이해한다는 사람, 모든 책을 ‘연애’로 읽는다는 자신만의 독특한 오독을 서슴없이 밝히고 있는 ‘책과 연애’의 저자 문아름이 그 사람이다. 철학, 인문학, 소설 등 장르를 넘나들며 100여 종의 책에 대한 자신의 오독의 결과물을 책으로 엮었다. 저자의 오독의 키워드는 ‘연애’다. 소설 속 주인공과 문학인, 인문학의 저자와 그의 저서 등을 자신이 책을 보는 키워드 연애라는 감성으로 이해하고 때론 분석하며 그 결과를 솔직하게 피력하고 있다. 저자가 책을 보는 키워드 연애는 책 속에만 머물지 않고 자신의 일상에서 스스로 겪었던 연애나 주변 지인들의 모습에서 보이는 연애의 모습과 늘 비교 분석하여 자신만의 이야기를 내놓고 있다.

 

저자는 자주 본문에서 자신이 읽었던 책들의 저자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자신만의 오독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다. 오독(誤讀)이라고 하면 잘못 읽은 것이 되지만 모든 것이 개인의 가치관에 따라 만물을 대하는 것이기에 오히려 자연스러운 것이 아닐까? 이 오독 속에는 책마다 저자가 파놓은 구멍이 있는데 이 구멍 속으로 들어가 다른 구멍을 찾는 것과 같은 즐거움도 선사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한 즐거움은 완벽한 이해가 가능하지 않을 때 오해를 통해 새로운 해석을 시도한다는 것과 같다. 저자와 같은 오독은 그래서 꼭 필요한 과정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젊음의 상징과도 같은 연애만큼 저자의 이야기는 젊다. 그러기에 솔직하며 직설적이기도 하다.

 

저자는 연애와 책읽기의 공통점으로 흔적을 남긴다는 점을 지적한다. 연애에서 아픔이나 상처, 기쁨이 남는 것처럼 책도 눈물 콧물을 뽑거나 사람을 변화시키는 과정이 지극히 주관적이라는 점이다. 일상과 책읽기를 넘나들며 저자의 속내를 펼치고 있는 이야기 속에서는 왜 책을 읽는지에 대한 간접적인 해답을 전해주기도 한다. “연애는 감정이었다가, 겅험이었다가, 일상이었다가, 책이었다가”로 이야기를 전개하지만 그 연애라는 자리를 책으로 대체해도 부자연스럽지 않다. 그만큼 책과 연애는 일맥상통하는 것으로 본다. 책 속에서 위안 받기도 하고 책 속으로 도피하기도 하면서 책과 더불어 일상을 살아간다는 자연스러움이 있다. 책은 그렇게 사람이 성장하는 과정에서 멋진 상대를 만나 연애를 하는 것처럼 연애를 할 만큼 매력적인 책이 있기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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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영화의 개척자 나운규 살아 있는 역사 인물 5
조희문 지음 / 다섯수레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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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같은 삶을 산 나운규

차가운 겨울 따스한 온기를 전해주는‘변호사’라는 영화가 주목받고 있다고 한다. 이미 지난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는 그 시대를 정의롭게 살았던 변호사를 중심으로 시대정신을 이야기 하고 있는 모양이다. 주목 받고 있는‘변호인’과 같이 한국영화가 우리들 사이에서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언제쯤일까? 할리우드 직배영화에 밀려 국내 영화를 보호해야 한다는 쿼터제가 존재했던 나라에서 이제 영화는 문화의 한 측면에 우뚝 서서 많은 사람들과 공감하며 소통하는 수단이 된지 오래다.

 

한국영화는 언제부터 시작된 것일까? 100년도 안된 영화의 역사에서 한국영화의 시작과 함께한 한사람을 빼놓고 이야기하기 힘들 것이다. 그 사람이 바로 배우이자, 감독, 제작자로 적극적으로 활동한 한국영화의 역사로 불리는 아리랑의 ‘나운규’가 그 사람이다. 나운규는 1902년 함경북도 회령에서 태어나 활동적인 성격으로 친구들과 이웃들로부터 주목받았고 순회극단의 공연을 보면서 연극에 관심을 가졌고 북간도 명동학교로 진학 후 독립운동에도 관여하며 3.1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일본경찰에 쫓기는 몸이 된다. 이후 러시아를 전전하다 국내로 들어와 서울로 유학하여 영화와 만나게 된다. 이것이 나운규의 삶을 결정짓는 계기가 된다.

 

영화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이후 배우로 출발하여 영화판에서 자신의 삶을 꾸려간다. 일본인에 의해 시작된 영화보급은 한국인들에 의해 한국영화를 제작할 취약한 기반으로 영화를 제작하는 것 자체가 어려운 현실이었다. 일본인의 자본과 제작자에 의해 출발한 한국영화는 변사가 있는 무성영화였으며 이후 점차 기술의 발달에 힘입어 유성영화시대를 맞이한다. 이러한 영화역사를 온몸으로 고스란히 간직한 나운규의 삶을 추적하는 책이 발간되었다. 살아 있는 역사 인물 시리즈를 발간하고 있는 다섯수레 출판사의 ‘나운규’가 그 책이다.

 

이 책 ‘나운규’는 다섯수레 출판사의 “우리 역사에 큰 획을 그은 다양한 분야의 인물을 통해 그들이 남긴 의미를 새롭게 조명해 보는 역사 인물 평전”이라는 기획의도로 발간된 책이다. 인물평전이기에 그 사람의 삶을 조명하는 것으로 태어나서 성장과정과 주목받는 업적을 남긴 부분을 찾아 그려간다. 한 사람을 평가하는 기준은 다양할 수 있다. 삶이 그렇게 한가지만으로 이뤄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책에서 그려지는 나운규는 오로지 ‘영화’에 집중되고 있다. 하여. 가족관계나 기타 영화와는 상관없는 부분에 대해선 언급을 회피하고 있을 정도로 짧게 그려진다. 아리랑으로 대표되는 나운규 영화의 정신을 그래서 나운규가 어렸을 적 독립운동과 관련되어 일본경찰에 연행되었던 부분을 언급하는 정도로 그치고 있다. 무엇인가 빠져 있는 듯 헐렁한 느낌이 강하다.

 

그렇더라도 한국영화의 역사를 알려면 서른여섯 살의 나이에 세상을 떠난 나운규의 삶을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기에 자연스럽게 한국영화의 역사와 나운규의 삶은 닮아 있다. 그렇기에 한국영화의 현주소를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 나운규가 활발하게 활동했던 시대를 시작으로 그 역사를 이해해야 가능한 것이 아닐까 싶다. 외국영화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한국영화의 발전은 바로 그러한 사람들에 의해 시작된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변호인’으로 돌아간다. 문화를 이루는 여러 장르의 속에서도 영화만큼 대중에게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것을 찾기는 어렵다. 시청각으로 사람의 감정에 직접 호소할 수 있는 영화의 장점이 충분히 발휘되어 시대가 안고 있는 딜레마를 보여주고 이를 해결할 단초를 제시할 수도 있는 영화의 순기능에 주목하게 만든다. 여전히 영화제작 환경은 열악하다고 말할지라도 우수한 영화는 대중의 삶에 영향을 줄 수 있고 그런 영향을 대중은 수렴할 수도 있다. 이 책을 통해 나운규의 영화에 관한 삶 속에서 배울 수 있는 것도 그런 것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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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하는 여자 - 과학이 외면했던 섹스의 진실
대니얼 버그너 지음, 김학영 옮김 / 메디치미디어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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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낯으로 본 여자 욕망

도발적이다. 다분히 의도적인 접근이다. 애써 감춰두었거나 자신도 모르게 숨어있던 욕망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기가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것도 유교윤리가 여전히 살아 있는 사회에서 본능을 표현하기란 잠재우기에 혈안이 되어 있는 사회적 풍토를 뛰어넘기란 더 쉽지 않다. 욕망을 잠재우는 것을 넘어 죄악시하는 사회문화가 지배하는 속에서 자라온 사람들에게 자신의 속내를 꾸밈없이 드러내는 것이 가능할까?

 

“여자는 무엇을 원하는가?”에서 출발하는 ‘욕망하는 여자’는 모두가 금기시 여기는 문제에 대해 직접적인 질문을 시작한다. 남자의 그것과는 사뭇 다르리라고 예상되는 “여자의 성욕”에 대한 직접적인 질문을 한다. 하지만 조심스러운 것은 과학적 접근이라는 점을 부각시키고 있다. 학문적 접근이라고 하면 예외적으로 허용되는 사회문화적 틈새를 파고들지만 동양 사회보다는 개방적인 미국의 학계에서도 지극히 조심스러운 분야라고 한다. 그렇다면 무엇이 이런 “여자의 성욕”에 대한 탐구를 시작하게 만들었을까?

 

여자도 동물이다? 라는 전재로부터 시작하는 이야기는 여자의 몸의 변화를 과학적으로 탐구하여 그 반응을 데이터화시켜 이를 통해 일반화를 시도하고 있다. 이러한 시도는 학문적 풍토나 사회적 제약을 극복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특히, 일부일처제라는 사회적 제도가 갖는 여자에 대한 일방적인 억압은 자신의 욕망자체를 인지하지도 못하는 상황에 이르게 만들었다고 본다. 그렇기에 적극적인 욕망의 표현은 이룰 수 없는 꿈처럼 여겨진 것이다. 그렇더라도 이렇게 숨겨진 욕망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상상이라는 도구를 통해 발현된다고 여겨진다. 마지막으로 욕망을 현실화 시키는 도구로써 제약회사의 여자용 비아그라와 같은 노력에 이르기까지 살핀다.

 

행동과학자, 성과학자, 심리학자, 수많은 여성들과의 심층적인 인터뷰를 기반으로 이를 뒷받침하는 근거들을 통해 "여성은 남성만큼 또는 그 이상 성욕이 강하다"고 단언하고 있다. ‘욕망하는 여자’를 따라가다 보면 그 과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다. 인간의 감정을 지배하는 것이 그 사람이 태어나고 자란 사회적 환경이나 관습 등을 포함하여 개인적 성장과정에서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이러한 조건을 무시하고 인간의 본능적인 욕망에 접근할 수 있을까? 철저히 계획된 조건이라고 하지만 그것도 예외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연구자들이 모색하는 다양한 사례를 통해 객관적이고 과학적 방법을 통해 믿을만한 데이터를 얻으려고 애쓴다.

 

언제부턴가 정설처럼 이야기되는 "남자는 동물에 가까워서 쉽게 성욕이 일지만, 여자는 친한 감정이 생겨야 섹스를 하고 싶다"는 말은 사실일까? 과학자들의 연구의 수많은 사례들이 이를 부정하고 있지만 결론에 도달하기는 아직 어려워 보인다. 이 책에 다분히 의도적이며 목적의식적으로 질문한 “여자의 욕망”에 대한 이야기는 지금까지 욕망의 대상이 될 뿐, 자신의 몸과 욕망의 주체가 되지 못했던 여성들에게 자신의 성에 대해 직면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주고 있다.

 

사회가 변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보수적인 사고가 주류를 이룬 문화적 배경에서 개인이 자신의 욕망을 적극적으로 표현하기란 쉽지 않다. 어쩌면 애초에 그런 배려라고는 생각할 수도 없는 환경에서 태어나고 자란 여자들뿐 아니라 그 상대방이 되는 남자들 역시 성의 욕망에 대한 깊은 사고의 필요성을 적극적으로 개진한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출발이 아닌가 싶다. “여자는 무엇을 원하는가? 라는 질문에 답을 얻을 수 있다면 여자뿐 아니라 남자들에게도 유효한 답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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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 생각 - 퇴계와 호남 선비들의 만남과 교유 오래된 만남에서 배운다 2
이상하 지음, 한국국학진흥원 / 글항아리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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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나고 싶은 사람들

사회적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겐 곁에 늘 사람들이 있다. 가족, 동료, 연인, 친구를 비롯하여 스승과 제자 등 이러한 관계 속 사람들과의 일상적인 만남 속에서 살아간다. 하지만 이러한 만남이 특별히 기억되거나 소중한 만남으로 생각되어 지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이유야 많겠지만 사람에 대해 생각하는 일반적 가치의 기준이 변한 것은 아닌가도 싶다. 시대를 불문하고 소중하고 아름다운 만남이 있고 우리들은 그들의 만남의 과정을 통해 가치 있는 인간관계는 무엇인지를 알게 하는 기회를 제공해 주곤 한다.

 

그 중 한 예로 조선시대 유학자 퇴계 이황과 기대승의 만남은 현대사회에 이르러서도 소중하고 아름다운 만남으로 회자되고 있다. 우선, 퇴계 이황하면 거대한 학문적 성과를 남긴 유학자로 기억된다. 중국의 주자학이 조선에 유입된 이후 조선만의 독자적인 주자학을 일으켜 세운 대학자로 기억된다. 퇴계 이황은 그러한 학문적 업적 뿐 아니라 순수한 인품의 소유자로도 유명하다. 대학자로써 사람들과의 만남에서 보여주었던 모습을 짐작케 하는 그의 편지글이나 시문 등 글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 책 ‘퇴계 생각’은 그런 퇴계의 학문적 성과와 인간적 교류를 확인할 수 있는 책이다. 특히, 영남학파의 거두이면서도 지역적 차별 없이 호남 유학자들과의 교류에 집중해서 조명하고 있다. 퇴계 이황이 호남의 벗들과 만나 참된 우정을 나누고 진지한 학문적 담론을 펼친 얘기들을 담담하게 묶어놓고 있다.

 

'퇴계의 생각' 구성은 1장 ‘퇴계의 삶을 따라가며’에서는 퇴계의 삶과 학문적 성과를 바탕으로 그가 살아온 여정을 따라갈 뿐 아니라 호남 유학의 흐름에 대한 개략적인 설명을 하고 있으며 이 책의 중심이라고도 할 수 있는 2장 ‘퇴계와 호남 선비들’에서는 호남의 유학자인 하서 김인후, 금호당 임형수, 면앙정 송순, 석천 임억령, 칠계 김언거, 행당 윤복과 세 아들, 풍암 문위세와 죽천 박광전, 천산재 이함형, 사암 박순, 고봉 기대승과 퇴계 이황과의 만남을 중심으로 그려간다. 마지막으로 우리나라 유학사상 가장 큰 흔적을 남겼던 퇴계 이황과 고봉 기대승 간의 편지를 통해 ‘사칠논변’에 대한 학문적 토론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주목되는 것은 당연히 2장에서 담고 있는 퇴계 이황과 호남 유학자들 사이의 만남이다. 이 만남이 이뤄진 공간은 당시 정치의 중심이었던 한양에서 벼슬살이 하는 과정에서 만났다. 성균관에서 공부하거나 벼슬살이하는 조정에서 만나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돈독한 우정을 나누게 된다. 모든 만남이 아름답고 소중한 것이지만 특히 당시에나 오랜 시간이 지난 현대에도 주목받는 것이 퇴계 이황과 기대승과의 만남이 될 것이다. 이들의 만남은 당파나 정파에 의해 혼란스러운 정치상황에서도 흐름에 휩싸이지 않았으며 나이의 차이를 넘어서 마음을 나누는 벗으로 학문을 논하는 제자와 동료로 소통하게 된다. 정치적 이해관계나 당파적 이해에 따라 이합집산하는 오늘날 정치인들과는 사뭇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호남 유학자들과 퇴계 이황의 흔적이 남아 있는 인근 유작을 찾아 그들의 아름답고 소중한 만남을 찾아보고 싶다.

 

모든 만남은 소통을 전재로 이뤄진다. 소통의 부재는 동상이몽을 꿈꾸게 하며 그런 만남은 결코 아름다운 만남이 될 수 없다. 이는 일상적인 만남뿐 아니라 학문을 논하는 자리에서도 마찬가지다. 최근 한국사 검정 교과서 문제를 중심으로 하는 학자들의 논쟁을 보면서 저들이 어떻게 같은 자리에서 토론한다고 모여 있을 수 있는지 이해하지 못할 상황이었다. 소통은 상대방을 인정하는 가운데 자신의 주장을 합리적으로 펼치는 것을 통해 이뤄진다. 모두가 소통을 말하지만 누구도 그 소통의 마음가짐은 없어 보였다. 수백 년 전 퇴계와 학문적 토론을 펼쳤던 유학자들의 모습을 보면서 ‘공감과 소통’를 외치는 현대사회에서 진정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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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에서 - 삶의 의미를 찾아 떠난 300일의 마음수업
이창재 지음 / 북라이프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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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이 있다면 방법은 마련된다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가는 사람들은 어디에나 있다. 그 길이 세상과 소통하며 보다 나은 삶을 위한 길일 때, 이러한 길을 가는 사람들에 대한 격려와 찬사는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길을 가는 사람들을 이상한 눈으로 보는 사회는 자신 이외의 삶에 대해 열린 마음이 아니기에 닫힌 사회이며 건강한 사회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길은 어디에도 있지만 정작 그 길을 가는 사람은 누구나가 아니다.

 

현재를 살아가는 모두는 자의로 이 세상에 나온 사람은 없다. 그러기에 삶이라는 긴 과정은 늘 자신의 존재 이유에 대해 의문을 가진다. 세상에 태어난 이유가 분명 있을텐데... 하면서 그것이 무엇인지 찾고자 사유하며 공유하며 소통하고 때론 이웃이나 세상과 단절의 삶을 살아간다. 어떤 선택을 하든 그 선택이 의미 있고 가치 있으려면 나선 길의 목적지가 자신을 포함한 사람들의 삶으로 귀결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혼자든 여럿이든 길 위에서 찾고자 하는 바를 찾고 이를 통해 인간의 삶이 보다 나아지는 것으로 귀결 될 때 그것이 자신이 태어난 가치를 실현하는 것이 아닐까?

 

구도자의 길을 가는 사람들이 있다. 자신의 존재 이유를 찾아 쉼 없이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들을 구도자라고 부른다면 특정 종교인이든 아니든 상관하지 않고 모두를 구도자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일상의 조건이나 삶의 가치에 따라 목적지는 같으니 가는 방법이 다를 수 있으며 삶의 구체적 모습이 다르더라도 중도에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나아간다면 그들 모두는 한 곳에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그 길을 가겠노라고 아애 가족과 이웃 그리고 세상과 단절하고 오롯이 자신이 세운 가치를 구현하기 위해 길을 나선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가는 길이 무엇을 향하고 있으며 어떤 과정을 통해 목적지에 이르고자 하는가를 쫓아가는 또 다른 사람이 있다.

 

이 두부류의 사람이 만나 소통하고 공감하는 내용이 그려진 다큐멘터리가 이창재 감독의‘길 위에서’다. 기회가 닫지 않아 다큐멘터리가 ‘길 위에서’를 접하지 못했지만 그러한 아쉬움을 충분히 달래줄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있다. 바로 책으로 만나는 ‘길 위에서’가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영화 ‘길 위에서’를 감독한 이창재 감독이 영화에서는 다하지 못했던 스님들과의 만남에서 얻는 감동을 전해주고 있는 책이다. 세상과 단절한 스님들이 모여 수행하는 공간 ‘백흥암’이 주 무대가 된다. 백흥암은 일 년에 딱 두 번 신도와 일반인들에게 문을 여는 곳이라 한다. 그만큼 세상과 단절하며 오롯이 구도의 길을 가는 구도자들이 머물며 수행하는 곳이기에 그 문을 열기도 만만치 않았다는 것이다. 어렵게 허락받았지만 촬영 도중에도 쫓겨나기를 반복하며 함께 머물렀던 그곳에서의 300일의 여정을 담았다고 한다.

 

빗장을 걸어 세상과 단절하고 그 안에서 살아가는 그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그보다 먼저 도대체 무엇이 사람으로 하여금 가족과 이웃 그리고 세상과 단절하게 만들었을까? 그들이 가고자 하는 길은 평범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우리들의 세상과 어떤 차이점이 있을까? 수많은 질문을 떠올리지만 무엇 하나 뚜렷이 해결되는 것은 없다. 300일 동안 그들과 함께 머물며 그들의 삶을 엿보았던 이창재 감독 역시 같은 생각에서 출발한 것은 아닐까?

 

“절, 그곳에도 일상의 삶이 있었지만 조금은 다른 모습으로 삶을 사는 사람들, 그곳의 사람들은 조금 더 따뜻하고 행복해보였다.”감독의 눈에 비친 그들 역시 사소한 것에 웃고 눈물 흘리지만 그러한 일상을 넘어선 무엇이 있다고 한다. 언제 끝날지도 모를 길을 같이 가는 '도반과 스승' 사이에 흐르는 따뜻함이 속세에서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느끼지 못하는 그 무엇 말이다. 그들은 남다른 길을 가기에 그들만의 책임감이 있다. 자신이 그 길을 갈 수 있게 도와주고 있는 그들의 이웃과 세상의 관심에 자신의 길을 더 잘 가는 것으로 갚고자 한다.

 

그렇다면 그들이 가는 그 길은 그들과 같이 속세를 떠나서만 가능할 것일까? 세상에서 일상에 묶여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방법이 없는 것일까? 이창재 감독은 속세에 살아가는 사람들도 자신의 삶에서도 가능한 구도의 길을 발견한다. 바로 “참선 할 수 있는 도량이 깊은 산속 그 어딘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눈앞에 있다는 믿음, 내가 발을 딛고 서 있는 이곳이 바로 수행을 위한 최적의 공간이니 여기서 목적지를 향해 꾸준히 가면 된다”, “참선하고 수행하는 삶도 좋고, 가족들과 함께 사는 것도 좋지요. 다만 어떻게 했을 때 자신이 더 행복하고 의미 있는 삶을 살 수 있는지 생각해보고 그 결정에 따라 선택을 하는 것, 그게 바로 인생이죠.”라는 말에서 희망을 가져본다.

 

세상을 향해 빗장을 걸어두지 않더라도 자신의 삶에 대해 깊은 성찰을 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면 조금은 더 느리고 더디더라도 그들이 가고자 하는 그 길의 마지막에서 만날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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