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의 이치를

내 한 몸에 갖추기 위해"

 

작가 연대 미상(未詳) 일월오봉병(日月五峯屛)

조선 19세기, 종이에 채색,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조선 시대 왕이 등장하는 거의 모든 장면에 빠지지 않고 배치되는 것이 있다. 왕의 뒤에서 그림처럼 왕을 감싸고 있는 병풍이 그것이다. 일월오봉병 또는 오봉병이라 불리는 그림병풍이다. 일월오봉병은 무엇일까? 해와 달, 다섯 개의 산봉우리와 소나무, 물이 일정한 구도로 배치되어 있다. 무엇인가를 상징적으로 담아 놓은 것이리라.

 

오주석이 사랑한 우리그림에서 오주석은 해와 달은 음양(陰陽)으로 우주를 이루고 지속시키는 두 힘이다. 오봉은 오행이다. 그 좌우에 흰 폭포 두 줄기가 떨어진다. 물은 햇빛, 달빛과 함께 생명의 원천이다. 그 힘이 하늘과 땅 사이의 만물을 자라게 한다. 만물 가운데 가장 신령하고 도덕적인 존재가 사람이다. 그리고 그 많은 사람 가운데 덕이 가장 커서 드높아진 존재가 왕이다. 왕은 날마다 <일월오봉병> 앞에 앉아 경건하고 차분한 마음으로 하루의 정사(政事)에 임한다. 그러면 하늘() () 사람()의 삼재(三才:우주를 이루는 세 바탕)가 갖추어진다.”고 이야기한다.

 

왕이 정좌하면 우주의 조화를 완결 짓는 장엄한 참여 예술이 연출된다. 진정한 예술은 평범한 삶을 북돋는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나 자신을 완전히 비우고 겸허하게 자연을 배워 우주의 질서를 완성케 한다. 대지에 굳게 뿌리박고 하늘을 향해 우뚝 솟은 저 붉은 우주목(宇宙木)처럼.”

 

동양학의 기본이며 사유의 틀이 음양오행이다. “사람이 음양오행을 본받는다는 것은 굳셀 때 굳세고 부드러울 때 부드러우며 항상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의 미덕을 실천한다는 뜻이다. 왕은 오봉병앞에서 올곧은 마음을 지녀야 한다. 하늘과 땅과 사람을 꿰뚫는 이치를 내 한 몸에 갖추어야 한다.”왕 한 사람이 올바른 마음으로 큰 뜻을 세우는 순간 천지인의 우주질서가 바로잡힌다는 의미가 일월오봉병에 담겨 있는 것이다. 일월오봉병의 천지인 三才앞에 서는 임금은 항상 스스로를 쉬지 않고 굳세게 옳은 일을 끊임없이 행하며, 자신의 덕을 깊고 넓게 쌓아서 온 세상 모든 생명체를 하나같이 자애롭게 이끌어 나간다는 큰 뜻을 갖고 있는 것이다.

 

왕의 절대적인 권위의 칭송과 왕족의 무궁번창을 기원하는 궁궐 길상장식의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를 해석하기에 따라 달리 받아들일 수 있다. 해와 달에게 부끄럽지 않고, 하늘아래 떳떳한 임금이야말로 만 백성이 우러러 보는 임금이 아니겠는가. 하늘의 도를 따르고 민심을 살펴 백성들이 편하도록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임금된 도리다. 그 기본 된 도리를 망각한 임금은 임금이 아니다.

 

오주석이 사랑한 우리 그림’(월간미술, 2009) 속의 그림을 다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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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종 2015-02-22 09: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월.오봉이 음양오행을 뜻한다면, 저 네 그루의 소나무도 뭔가 심오한 의미를 담아놓았을텐데요. 혹시 `사주`? ㅎㅎ(네 개의 기둥이니^^;) 소나무 색깔이 왜 붉은 빛일까 한참을 생각합니다. 오른쪽의 해가 생명의 근원이니 나무를 비추는 모습일까요? 달은 차가움을 연상시키니 물과 같은 색깔로 표현했을까요?
그림에 쓰인 색이 5가지인 것도 오행과 관련된 걸까요? 빛의 3원색 RGB도 생각나구요, 나머지 색이 흑(약간 갈색이긴 하지만ㅎ)과 백인 것도 우연은 아니라는 생각도 듭니다.
그렇다면, 목화토금수도 담겨있을까요? 나무가 붉은 빛인 건 불을 의미하는 걸까요? 금속은 어디에 있을까요? 산봉우리와 바탕에 희끗희끗 깔린 누르끼리한 색일까요? 다시 보니 폭포가 떨어진 가운데 부분이 파도치는 바다같기도 합니다.
아님 그냥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로세~`일까요? 괜히 이것저것 의미를 갖다붙이는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답은 늘 단순한 법인데 말이죠^^;
 
내 아버지 김홍도 - 아버지와 아들이 길어 올린 결정적인 생의 순간들 낮은산 키큰나무 12
설흔 지음 / 낮은산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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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만의 그림을 그린다는 것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화가를 꼽으라면 주저 없이 선택되는 화가가 김홍도일 것이다. 그러한 김홍도의 명성이 가능한 이유는 그의 풍속도첩이라는 화첩에서부터 시작된다고 보인다. 단원 풍속도첩에는 기와이기, 주막, 새참, 무동, 씨름, 쟁기질, 서당, 대장간, 윷놀이, 타작, 편자 박기, 활쏘기, 담배 썰기, 자리 짜기, 신행, 행상, 나룻배, 우물가, 길쌈, 고기잡이, 장터길, 빨래터 등의 27작품이 실려 있으며 국가지정 보물 제527호다. 이 풍속도첩으로 인해 최고의 풍속화가로 기억되었다.

 

김홍도는 1745년에 태어나 영, 정조의 두 임금을 섬기며 화가로써 최고의 지위를 누렸을 뿐만 아니라 현감 벼슬까지 지냈다. 그러다가 그의 최고 후원자였던 정조가 사망한 후 갑자기 역사에서 사라져 죽은 날짜를 확인할 수 없을 정도로 마지막이 모호한 사람이었다.

 

풍속화가 김홍도, 이러한 표현이 화가 김홍도를 올바로 표현하는 것일까? 풍속화로 유명하기에 다른 작품들은 없단 말일까? 이 물음 앞에 소림명월도, 주상관매도, 송하맹호도, 마상청앵도등과 같은 몇몇 그림을 제시하면 놀랍도록 다른 화풍의 김홍도를 만나게 된다는 사실을 직면하며 놀라는 사람들이 많다. 그렇다면 이토록 다른 모습의 그림을 그렸던 화가 김홍도를 오로지 한 인간, 화가로써 이해하는 키워드는 무엇일까?

 

연암에게 글쓰기를 배우다’, ‘조희룡과 골목길 친구들’, ‘추사의 마지막 편지, 나를 닮고 싶은 너에게와 같은 작품으로 역사 속 실제 인물에 탁월한 상상력을 더하여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것에서 확실한 재능을 발휘하는 작가 설흔을 통해 김홍도의 내면읽기를 따라가 보자. 그 속에서 화가 김홍도의 이야기를 찾아낼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그림은 붓으로 그리는 게 아니다. 네 마음을 쪼개 그 조각으로 그리는 것이다. 너만이 듣고 볼 수 있는 것을 그리는 것이다. 그것이 쉽겠느냐? 그래서 사람이 일평생 그릴 수 있는 그림에는 한도가 있는 것이다. 네가 원한다면 내 그림을 얼마든 흉내 내 팔아도 좋다. 하지만 그런 그림을 그리는 너는 화가는 아니다. 내 말, 알겠느냐?”

 

여기에 이 책의 주된 관심사가 담겨 있다. 천재화가, 풍속화가, 도화서화원 등으로 불리는 김홍도에서 인간, 화가 김홍도로 시각 전환을 시도하고 있다는 점이 주목된다. 작가 설흔은 김홍도를 유명하게 만들었던 풍속화에 주목하지 않고 그의 추성부도를 통해 화가 김홍도의 내면을 추론해 간다. 그리하여 인간 김홍도의 인간성과 화가 김홍도가 화폭에 담고 싶었던 그림이 무엇인지에 주목하게 되는 것이다.

 

표면상으로 보면 아들의 눈으로 그려 낸 인간 김홍도에 관한 이야기로 보인다. 하지만 글을 따라가다 보면 김홍도의 이야기지만 그 중심엔 그의 아들 김양기가 있다. 그렇다고 아들 김양기에 모든 것이 맞춰지지도 않았다. 아버지와 아들을 이어주는 매개는 역시 그림과 그 그림을 그리는 화가이다. 당대를 뒤흔든 천재 화가 대신 생의 뒤안길에 선 인간 김홍도, 그리고 그런 아버지를 아프게 지켜보면서 차갑고 광폭하기 그지없는 가을 한복판에서 삶의 방향을 찾아 가는 아들 김양기의 만남이 가슴 아프도록 절절하게 그려졌다.

 

이 작품의 백미는 무엇보다도 아버지와 아들을 끈끈하게 이어 주는 그림들이다. 그림들은 아들이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하게 되는 중요한 장치로도, 김홍도의 인간적 면모와 품성을 드러내는 단서로도 작용한다. 하지만 그림은 글로만 묘사되고 있다. 김홍도의 작품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무슨 작품을 이야기하는지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

 

자신만의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화가의 그림에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살아가는 동안 내면에 담긴 무엇인가를 밖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 말이 가진 참뜻이 무엇인지를 일깨워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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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종 2015-02-22 12: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자신만의 그림, 자신만의 사진, 자신만의 음악, 자신만의 글, 자신만의 춤. 자신만의 그 무엇.
인간의 내면은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그것을 보여주기 위한 방법으로 다양한 표현 방법이 나온 게 아닐까요? 무언가 표현한다는 것은 그래서 표현의 형식이 무엇이든 ˝그 자신˝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나˝이든 나의 관점이든. 똑같은 표현 방법이 존재하지 않는 이유겠지요. 우린 모두 보편적인 듯 유일한 존재이므로.
 

"꾀꼬리에 앗긴

선비의 마음,

봄이,

영원한 봄이

그 안에 있다"

 

 

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 마상청앵도(馬上聽鶯圖)

조선 18세시 말~19세기 초, 종이에 수묵 담채, 간송미술관 소장

 

바야흐로 봄이 코앞이다. 때 맞춰 내리는 봄비가 대지를 흡족하게 적신다. 이제 자연은 말 그대로 물이 오를 것이다. 언 땅을 뚫고 새순이 나오는 것은 곧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 것이다. 그 순간을 맞이하는 사람 역시 새로운 세상의 새로운 마음으로 살아갈 꿈을 꿀 것이다. 어찌 설레지 않을 것인가?

 

마상청앵(馬上聽鶯), ‘말 위에서 꾀꼬리의 갖은 소리 굴림을 듣는다의 정취를 가장 적절하게 담아낼 수 있는 순간이 바로 봄의 어느 하루가 아닐런지. 그 흥에 겨워 시 한시를 읊는다면 꼭 이럴 것이다.

 

어여쁜 여인이 꽃 아래에서 천 가지 가락으로 생황을 부나

시 짓는 선비가 술상 위에다 귤 한 쌍을 올려놓았나

어지럽다 황금빛 베틀 북이 실버들 물가를 오고가더니

비안개 자욱하게 이끌어다가 봄 강에 고운 깁을 짜 놓았구나

(佳人花底簧千舌 韻士樽前柑一雙 歷亂金梭楊柳崖 惹烟和雨織春江)

 

김홍도가 지었을 것이 틀림없는 그림에 붙은 화제시다. 봄바람에 살랑거리는 것이 어찌 버들가지뿐이겠는가. 춘풍에 마음 동하는 모든 것들과 그 한가운데 놓여 있는 사람 마음까지 다 훈풍 따라 흔들리기 마련이다. 나그네의 그 마음이 꾀꼬리 울음에 머물렀나 보다.

 

시는 그림 그대로요, 그림은 한 편의 시다. 그랬구나! 저 텅 빈 여백은, 이 봄날의 아슴푸레한 안개와 보일 듯 말 듯한 실비는 모두 꾀꼬리 네가 짜서 드리운 고운 깁이었구나! 나그네는 봄비를 맞고 있다. 꾀꼬리 음성에 마냥 취한 탓에 속옷 젖는 줄도 모르고 있을 뿐…….”

 

유독 김홍도를 좋아했던 오주석의 마음은 이미 김홍도의 그 마음임을 짐작하게 만드는 해설이다. 봄을 붙잡아 두고 싶은 사람들의 마음을 너무도 잘 알기에 그림 속에 봄을 붙잡아 두었다. 그림 속에 봄은 살아 움직이며 그대로 머물 것이다.

 

나는 김홍도의 걸작을 꼽으라면 주저 없이 소림명월도(疏林明月圖), 주상관매도(舟上觀梅圖)와 더불어 마상청앵도(馬上聽鶯圖)를 선택할 것이다. 물론 풍속화가로서 김홍도가 가지는 의미나 가치를 모르는바가 아니지만 화가로서 김홍도를 평가하는 흐름이 한쪽으로 치우친 경향에 대한 안타까움에서 비롯된 것이다. 풍속화로만 인식된 김홍도의 다른 면모를 보여주는 확실한 모습이 아닐까 싶다.

 

오주석이 사랑한 우리 그림’(월간미술, 2009) 속의 그림을 다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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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종 2015-02-17 06: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제껏 보지 못했던 김홍도의 그림들을 접하면서, `아! 이 사람은 여백을 참 잘 그리는 화가로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여백조차 멋진 그림의 일부로 느껴지게 한다고 할까요. 보일듯 말듯 가늘게 채워져있는 실비가 봄비의 설렘처럼 다가옵니다.
한참 그림을 들여다 보면서 러시아 목각 인형(마트료시카? 였나요?^^; 그 까도 까도 양파처럼 계속 나오는. . ㅎ)을 연상했습니다. 가운데 말 위에 앉아 있는 선비와 그 옆의 몸종의 모습이, 버들 위에 앉아 있는 꾀꼬리와 어딘지 닮아 있어서요. 선비의 마음에 스며든 봄이 꾀꼬리로 복제되어 옮겨진 듯한. 왠지 꾀꼬리의 오른편에도 봄을 느끼는 더 작은 것이 있을 것만 같아 흘끔거리게 되네요^^
 

때마침 내린 비를 봄비라 불러도 좋은날 안개에 쌓인 송강정을 찾았다. 정철이 살았던 시절에도 봄은 오늘처럼 왔을 것이다.

 

국문학사에서야 정철의 의미가 남다르겠지만 정치사에서는 그보다 더 뚜렸한 발자취를 남겼다는 것을 아는이 몇이나 될까?

 

왕을 향해 끊임없이 외치는 구애, 정적을 무참히 죽였던 그 마음은 결국 권력욕 그것이었으리라. 이완구 총리 인준이 통과되는 것을 보며 옛사람 정철을 떠올려 본다. 인준을 원한 당사자나 그를 인준해준 그이들이나 한통속, 권력이 그리도 좋더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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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종 2015-02-22 19: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월의 흔적이 묻어있는 옛 정자나 돌계단, 나무를 보며 시간이란 참 냉정하고 무서운 것이구나 생각합니다.
100년도 움켜쥐지 못할 권력을 얻으려 치열했던 그 사람들은 오래된 종이 위에서나 붓 끝에 매달렸던 먹물로 남아있을 뿐인데 말이죠.
오늘같은 봄은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오고 감을 반복하는데. .

무진無盡 2015-02-22 19:20   좋아요 0 | URL
그렇더라구요
우연히 본 드라마 징비록에 정철이 등장하던데ᆢ무심히 넘길 수 없어 다시금 생각해보는 시간이었답니다
 

그곳에 가면 있는 널 보러 길을 나섰다.

마침 봄소식을 전해주는 비까지 내려 나선 길을 축복하는 날이다.

오랜 기억 한자락을 차지하는 너이지만 이제 막 보고 돌아선 아쉬움처럼 남아있었기에 조금은 무거운 발걸음이다.

 

그동안 너무 많은 애를 썼나보다.

차가운 겨울 바닷바람으로 키워온 수줍고도 진한 그리움을 찾아주는 사람들 가슴마다 나눠준다는게 쉬운일이 아니었던게지. 더군다나 하도많은 시간동안 같은일을 반복했을 널 이해 못하는건 아니다.

...

 

하여, 지금 네 모습이 마치 이제는 뒷방에서도 서러운 퇴기같아 보여도 너를 탓하지 못한다. 너의 향기와 색에 목숨까지 사랑한다고 외치던 그 많던 사람들의 욕심과 우둔함을 탓할밖에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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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종 2015-02-22 19: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때로는 존재 그 자체보다 환경에 의해 정체성의 일부가 정의되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똑같이 붉은 꽃이라도 동백에게서는 강인한 정열이 느껴지는 것을 보면. 매서운 겨울 바람에 맞선 생명력, 삭막한 무채색 사이에서 `그곳에 가면 있는` 따스함이 많은 의미를 부여하게 합니다. 향기가 없는 대신 빛깔로만 새를 유혹한다는 점도 왠지 어울려 보이구요. 향기조차 꽁꽁 얼어붙어 버릴 듯한 계절에 적절한 생존 방식으로 여겨집니다.
얼마 전에 읽은 카피라이터 정철 님의 「한글자」에 나왔던 글귀가 생각나네요. `꽃은 아름다움을 가르쳐 주는 게 아니라 아름다움은 오래 가지 않는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 라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