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십자가를 들고 가는 유럽

 

 

 

1. 천년의 제국, 비잔티움

 

비잔티움 제국은 동로마 제국의 다른 이름이다. 로마제국은 395년 동로마 제국과 서로마 제국으로 나뉘었다. 게르만족이 훈족을 피해 몰려오면서 위기를 맞은 로마제국이 제국 내의 사정까지 겹치면서 분열된 것이다. 한 세기에 걸친 게르만족의 이동이 가라앉았을 즈음인 476년 서로마제국은 멸망했고 동로마 제국만 살아남았다. 동로마제국의 수도 비잔티움은 현재 터키의 이스탄불로, 당시에는 황제의 이름을 따 콘스탄티노플로 불렸다.

  

 

  <서로마 제국과 동로마 제국, 그리고 게르만족의 이동>

 

근대의 틀 속에 살고 있는 우리는, 서유럽을 문화의 중심지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서유럽은 중세까지만 해도 거의 야만의 상태에 있었다. 고대 희랍·로마 문명 역시 서유럽이 아니라 동로마 제국이 이어받아 발전시키며, 이슬람 제국으로 전파했다.

크리스트교도 동로마제국에 의해 계승되었으나, 이후 서유럽의 게르만 국가들이 크리스트교를 받아들임에 따라, 두 가지 교회로 분열되었다. 서유럽의 로마교회와 동로마 제국의 콘스탄티노플교회는 각각 ‘보편적인 교회(로마 카톨릭 교회)’ 와 ‘바른 전통을 이은 교회(그리스 정교회)’를 자처하며 갈라졌다. 비잔티움 문화는 동유럽의 슬라브족에게 강한 영향을 끼쳤다.

 

 

2. 또 하나의 크리스트교 세계, 서유럽

 

서유럽으로 몰려온 게르만족들 중 프랑크족은 로마 카톨릭을 받아들였다. 원래 카톨릭 교를 믿던 주민들의 적극적인 지지로, 프랑크족은 순식간에 서유럽의 강자로 등장했다. 8세기 이후 프랑크 왕국의 영토는 현재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에 이를 만큼 광대했다.

 

서유럽의 교회는 게르만족들 사이에 빠르게 침투했고, 서유럽의 많은 교회가 로마 주교를 모든 교회의 지도자, ‘교황’으로 받아들였다. 현재 바티칸을 다스리는 ‘교황’제도의 역사는 여기에서 시작된 것이다.

  

 

 <9~10세기, 바이킹의 침입과 기사 세력의 강화>   

 

 9~10세기, 서유럽은 또 다시 이민족의 침입을 받게 된다. 유목민인 마자르족과 이슬람 세력, 그리고 스칸디나비아의 바이킹족이 세 갈래에서 각각 침입해 온 것이다. 이 중 바이킹족이 가장 큰 파괴력을 발휘하며 100여 년 간 서유럽의 지도를 크게 바꿔 놓았다.

 

 

또한 왕의 세력이 크게 약화되어, 나라는 영주(기사)들이 다스리는 수많은 영지로 나뉘어졌다. 왕은 이름만 가지고, 실질적 통치권은 지방의 영주들이 행사하는 ‘봉건제’가 시행된 것이다. 봉건제라는 지방분권사회에서 농민들은 영주(기사)들의 보호를 받는 대신, 부역과 세금을 내고 재판을 받는 등 영주들의 지배를 받아야 했다. 영주들은 아래에 하급 기사를 두고 전쟁을 하고 자신들의 농민 즉 농노를 보호하였다. 

 

 

 

3. 서유럽의 영혼을 지배한 카톨릭 교

 

중세 유럽을 대표하는 두 가지는 봉건제도와 카톨릭 교이다. 카톨릭 교는 농민들의 정신세계를 지배했을 뿐만 아니라 황권과 경쟁하며 막강한 정치권력을 행사했다. 11세기 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교황의 성문 앞에서 맨발로 엎드려 용서를 빈 ‘카노사의 굴욕’은 황권을 압도한 교황의 권력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으로 이후 200년 간 ‘교황은 해 황제는 달’ 의 이미지를 고착화시켰다.

‘기사도 정신’, ‘백마 탄 기사’ 등의 말은 중세 봉건제도의 ‘기사’에서 유래했다. 그러나 초기의 기사들은 거의 약탈자에 가까웠다. 사람들을 공격하고, 포로의 몸값을 요구하고, 농촌을 약탈하는 등 현재 우리가 생각하는 ‘기사’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었다. 이 나쁜 이미지를 결정적으로 뒤바꾸어 현재의 ‘기사’ 이미지를 탄생시킨 것은 교회이다. 교회는 기사들에게 여성을 존중하고 과부나 고아 같은 약자를 보호하며 교회에 헌신하라고 가르쳤다. 그리고 이교도를 상대로 성전에 나설 것을 적극 권장하였다.

  

 

  <7차례에 걸친 십자군 전쟁>

 

이슬람 세계를 차지한 셀주크 튀르크는 비잔티움으로 진격하여, 동로마 제국의 황제를 사로잡고 아나톨리아 지역을 차지하였다. 동로마제국의 황제는 서유럽의 카톨릭 국가들에 도움을 요청하였고, 1096년 이슬람 세계와 카톨릭 세계 사이에 전쟁이 시작되었다. 이것이 약 200년간 서유럽 국가들이 7차례에 걸쳐 일으킨 십자군 전쟁이다. 십자군 전쟁은 종교 전쟁이지만, 그 이면에는 부유한 동방 세계에 대한 서유럽 사람들의 부러움과 시기심이 작용했다.

십자군 전쟁은 서유럽의 패배로 끝났지만 이 전쟁을 통해 서유럽이라는 일체감이 형성되었다. 그리고 발전된 이슬람 세계와의 접촉을 통해 서유럽은 중세의 암흑기로부터 벗어날 자극을 받게 되었다. 또한 전쟁을 주도한 교황과 전쟁에 참여한 기사들의 힘이 크게 약해졌다. 그 결과 서유럽은 국왕을 중심으로 국가를 통합해 나갈 발판을 마련하게 되었다.

 

  

4. 도시와 함께 발전한 중앙집권 국가

 

부르주아가 역사에 등장한 것은 언제쯤일까? 부르주아는 11세기 이후 세력이 커지기 시작한, ‘부르그’ 안에 사는 상공업자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작은 도시들이 대부분이었지만, 피렌체와 같이 대도시로 성장한 곳도 있었다. 부유해진 부르주아들은 투쟁이나 돈을 통해 도시의 자치권을 획득하기도 하였다.

봉건제 시대에 새로이 등장한 부르주아는 왕권 강화에 큰 힘이 되었다. 부르주아는 직접 왕에게 세금을 내고, 왕은 그 돈으로 용병과 관리를 고용하여 영주들을 제압할 수 있게 되었다. 부르주아 또한 상업 활동의 독점권을 얻고, 정부의 관리가 될 수 있었다. 영주 세력에 대항하여 왕과 부르주아가 손을 잡은 것이다.

 

  <중앙집권 국가의 등장 : 프랑스, 영국,에스파냐>

 

십자군 전쟁의 패배로 영주가 몰락하고, 부르주아와 힘을 합친 왕의 권력이 강화되어 가는 와중에,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서 왕위 계승권을 둘러싸고 100년 전쟁이 일어났다. 이야기책에 나오는 프랑스의 영웅 잔 다르크가 등장하는 것이 바로 이 100년 전쟁이다. 잔 다르크 때문이든 어쨌든 이 전쟁은 프랑스의 승리로 끝나고, 이후 프랑스는 왕을 중심으로 하는 강력한 중앙집권제 국가가 되었다. 영국에서는 100년 전쟁 패배 후 곧 바로 두 귀족 가문 사이에 30년 전쟁이 벌어졌다. 전쟁이 끝나고 영국 역시 프랑스와 같은 중앙 집권 국가로 재편되었다. 1453년 프랑스, 1485년 영국을 뒤이어 1492년 에스파냐 왕국도 이슬람 세력을 물리치고 중앙 집권 국가 체제를 확립했다. 십자군 전쟁을 겪으며 서유럽은 이렇게 봉건제도에서 벗어나 강력한 중앙집권 국가를 형성하게 되었다. 1492년에 콜롬부스는 함대를 이끌고 서인도 제도에 도착했다. 이로서 중앙집권 체제를 갖춘 서유럽이 드디어 세계 역사의 패권을 획득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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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윤서 2014-05-27 19: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명작 돈키호테에 나온 영주 이야기가 나와서 재미있었지만
고달픈 농민들의 삶도 나와서 더 많은 것을 알게 되었던 것 같고,
종교와 잔 다르크도 나와서 재미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