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사 맥을 잡아주는 세계사 10
맥세계사편찬위원회 지음, 이정은 옮김, 송준서 감수, 강치원 추천 / 느낌이있는책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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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BSi 이다지의 세계사 개념다지기>

 

러시아 혁명은 ‘피의 일요일’ 사건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차르의 전제정치와 러·일 전쟁의 패배, 전 세계적 경제위기까지 겹친 러시아에서 일자리를 잃고 생계가 막막해진 노동자 15만 명과 그 가족들이 1905년 1월 9일 일요일 아침,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겨울 궁전으로 행진했다. 차르에게 청원서를 전달하기 위한 평화 시위대를 맞이한 것은 총칼로 무장한 차르의 군대였다. 차르를 ‘자애로운 아버지’로 생각했던 러시아 민중은 배신감에 분노했다. 대규모 파업이 줄을 이었다. 6월에는 흑해함대 포툠킨호에서 반란을 일으킨 선원들이 오데사의 노동자 파업에 동참했다. 각지의 농민반란도 이어졌다. 10월에 시작된 철도 노동자 파업이 총파업으로 번지면서 최초의 민주적 노동자 대표 의회인 ‘소비에트’가 결성되었다. 니콜라이 2세는 입법적 성격의 두마를 소집하겠다고 약속했다. 파업이 중단되자 차르 정부는 탄압에 나섰고, 2년간의 투쟁은 실패로 끝났다. 하지만 ‘피의 일요일’ 사건을 계기로 노동자 대표 소비에트가 모든 대도시에서 조직되었고, 1917년 러시아 혁명의 기반이 되었다.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 2>  

 

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한 러시아는 국가 경제에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참전국들 중 전선은 가장 길었고 산업은 허약했다. 노동자와 병사들의 불만이 높아졌고, 귀족과 농민 사이의 갈등도 깊어갔다. 니콜라이 2세와 황후 알렉산드라는 라스푸틴이라는 타락한 성직자에게 권력을 내어주고 미신에 빠졌다. 로마노프왕조의 몰락이 눈앞에 다가왔다. 러시아 혁명이 시작되었다. 1917년 러시아 구력 2월 (신력 3월) 27일, 페트로그라드의 농민 반란은 엄청난 기세로 번져 갔다. 진압명령을 받은 병사들이 농민 편에 가담했다. 페트로그라드의 반란이 성공하면서 대도시와 농촌 곳곳, 소수민족 지역까지 봉기가 일어났다. 3월 2일에 니콜라이 2세가 퇴위 조서에 서명하면서 마침내 혁명은 승리를 거두었다.

 

새로운 임시 정부가 구성되었으나 볼셰비키(구소련 공산당)는 초대받지 못했다. 나중에 사실을 알게 된 노동자 ·병사 대표는 급히 소비에트 1차 회의를 소집하여 군사력을 장악하였다. 자유주의적 자본가와 귀족들의 대표로 구성된 새로운 정권과 군사력을 장악한 노동자 ·병사의 대표인 소비에트 정권이 동시에 탄생했다.

 

  

<해법 에듀 스토리텔링> 

 

임시정부와 소비에트 정권의 대립은 예고된 것이었다. 임시정부는 기존의 경제 · 사회 질서를 변화시키려 하지 않았고 제국주의 전쟁도 지속했다. 임시정부가 노동자와 병사의 이익을 대변할 수 없음이 분명했다. 1917년 4월 스위스에 망명해 있던 레닌이 돌아와 볼셰비키 대표회의에서 ‘4월 테제’를 발표하였다. 러시아의 정치상황을 분석하고 적절한 혁명 전술을 정리한 10개 조항 이었다. 레닌은 민중들에게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 모으자고 외쳤다. 임시정부와 소비에트는 무력 충돌하였다. 러시아 구력 10월(신력 11월) 24일, 발틱함대 순양함 아브로라호가 겨울궁전을 향해 10월 혁명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10월 25일 소비에트 대표들은 임시정부가 무너지고 소비에트가 정권을 차지했음을 공식 선언했다. 1918년 3월까지 러시아 전역에 걸쳐 사회주의 정권이 수립되었다. 새로운 정부는 모스크바를 소비에트 러시아의 수도로 삼았다.

  

 

 <EBS중학 필독 중학 세계사> 

 

 

1918년부터 1920년 11월까지 내전이 지속되었다. 새 정권에 대항하는 귀족과 지주, 자본가들이 반혁명군을 만들어 내전을 일으켰다. 사회주의 혁명이 퍼져나갈 것을 두려워한 영국, 미국, 프랑스, 이탈리아 등 자본주의 열강들도 군대를 파견하였다. 온 나라가 전쟁터로 변했고 소비에트 정부는 심각한 위기를 맞았다. 정부는 전시공산주의 체제를 수립하여 방어에 나섰다. 식량을 징발하고 산업을 국유화 시키는 등 경제를 특별 관리하고 모든 인력을 전쟁에 투입하였다. 소비에트 정부는 온 나라를 큰 군대처럼 만든 결과 내전에서 승리하였다. 하지만 농업과 산업 생산이 무너지고 경제는 막대한 타격을 입었다. 이런 상황을 주의 깊게 지켜본 레닌은 1921년 신경제 정책 (NEP)을 수립하였다. 신경제정책은 한마디로 혼합경제이다. 공산주의 경제 체제를 바탕으로 자본주의 경제를 도입하여 시장의 자율적인 움직임을 인정하였다. 신경제 정책이 효과를 보아 소련의 경제가 빠르게 회복되고 있었다. 레닌은 신경제 정책을 지속적으로 시행하려 하였으나 1923년 건강악화로 일선에서 물러났고, 권력을 획득한 스탈린은 신경제 정책을 약화시켰다.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 2>    

 

소련,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은 글자그대로 해석하면 국가가 아니라 국가들의 연방이다. 1922년 12월 30일,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공화국과 우크라이나, 벨로루시, 자카프카지예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이 평등한 입장에서 연방을 형성한다는 문건에 서명하였다. 최고 소비에트 회의와 인민위원회를 각각 국가 최고의 권력 기관과 집행 기관으로 삼고 모든 가맹국은 자유로이 연방에서 탈퇴할 수 있게 한다는 내용의 연방 조약도 만들었다. 소비에트 연방에 가입하고자 하는 국가들을 위한 가입 방식도 규정했다. 4개 국가로 출발한 소련은 점차 가입 국가가 늘어나 1956년에 15개 국가가 가입했다. 위의 사진은 소련 해체 후 국가들인데, 소련을 구성했던 15개 국가들과 동일하다. 처음 가입한 자카프카지예가 1936년에 그루지야,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으로 분리되어 3국가 모두 소련 연방에 가입했다.  

 

1923년 레닌이 죽고 권력 투쟁 끝에 1929년 스탈린이 완전히 정권을 장악했다. 스탈린은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수립하여 공업화에 박차를 가했다. 급속한 산업화에 따라 식량 수요가 폭증하자 식량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농업 집단화 운동을 대규모로 실시하였다. 스탈린의 산업화, 집단화는 경제를 성공적으로 발전시켰으나 심각한 문제점을 노출하였다. 중공업 우선 정책으로 경공업과 농업이 침체되어 인민들의 생활수준은 기대에 못 미쳤고 경제가 불균등 발전했다,

 

  

  <EBSi 이다지의 세계사 개념다지기>

 

1939년 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독일은 폴란드를 침공하기 전 소련과 독·소 불가침 조약을 맺었다.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추축국, 독일과 일본 그리고 이탈리아는 1936년에서 1937년에 걸쳐 순차적으로 방공협정에 서명했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가 경쟁하는 와중에 추축국이 방공을 천명하고 나섰는데 어떻게 독일과 소련이 불가침 조약을 맺게 되었을까? 1933년 독일 총리가 된 히틀러는 독재 권력을 강화하고 전쟁준비에 나섰다. 소련은 위협을 느끼고 영국, 프랑스 등 서유럽 국가들에 가까이가려 했다. 그런데 이들 나라들은 ‘위기를 동쪽으로’ 넘기려 했다. 독일의 힘을 빌려 소련을 무너뜨릴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이 과정에 희생양이 된 것이 체코슬로바키아였다. 오스트리아를 합병한 독일이 독일계 주민이 많이 살고 있는 체코슬로바키아의 수데텐란트를 요구했다. 체코슬로바키아는 1차 세계대전 후 영국과 프랑스의 보호아래 주권을 회복하여 두 나라와 동맹을 맺었다. 독일과 체코슬로바키아가 전쟁을 하면 동맹에 따라 영국과 프랑스가 참전해야 할 상황이었다. 전쟁을 원하지 않던 영국 총리는 히틀러를 만나 독일에 수데텐란트를 넘겨주기로 하고 체코슬로바키아에 압력을 가했다. 결국 이탈리아, 독일, 영국, 프랑스가 뮌헨에 모여 수데텐란트를 넘겨줄 것을 결정했다. 체코슬로바키아는 회의에 참석하지도 못했다. 이 회담에서의 협정을 뮌헨협정이라고 부른다. 이 외에도 일련의 외교적 과정을 거쳐 소련은 서방 자본주의 국가들이 독일을 이용해서 자국을 제압하려 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소련은 한편으로는 꾸준히 유럽 국가들과 합동 안보 계획을 실현하려는 노력을 하고 또 한편으로는 독일과의 관계를 개선하려 했다. 1939년 일본과 소련 사이에 분쟁이 발생했다. 독일과 일본 양쪽에서 군사적 위기를 맞게 되자 소련은 ‘위기를 서쪽으로 넘기려는’ 전략을 세웠다. 독일과 협상을 맺어 시간을 벌기로 한 것이다. 독일 역시 동·서 양쪽에서 전쟁을 치르는 부담을 덜고자 소련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1939년 8월 23일 독일-소련 불가침 조약이 맺어졌다. 방공국가와 공산주의 국가의 기묘한 결합이었다.

 

  

  

 

1941년 6월 22일, 히틀러가 조약을 깨고 소련을 침략했다. 예상 밖의 공격으로 소련이 우왕좌왕하는 사이 독일 군대가 번개 같은 속도로 소련 영토에 들어왔다. 소련의 피해는 심각했다. 하지만 12월부터 소련은 반격에 나섰다. 혹한의 모스크바에서 겨우내 격렬한 전투 끝에 소련이 독일을 몰아냈다. 모스크바 공방전은 독일의 첫 패배로 기록되었다. 독일은 소련 침공당시 크게 세 갈래로 진격해 왔다. 남쪽의 우크라이나와 캅카스, 중앙의 모스크바, 북쪽의 레닌그라드이다. 레닌그라드 전투는 장장 900일 동안 계속되었다. 레닌그라드가 완전히 포위되어 300만 시민이 아사할 위기에 처했지만 꽁꽁 언 호수 위로 물자를 공수하며 끈질기게 버티었다. 1941년에 시작된 전투는 1944년 소련군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2차 세계대전의 흐름을 바꾸어 놓은 전투이자 가장 참혹했던 전투는 스탈린그라드 전투이다. 스탈린그라드는 독일이 우크라이나와 캅카스를 차지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길목이었다. 1942년 6월 28일(다른 책에는 8월 21일을 시작점으로 봄) 독일의 공격으로 시작된 전투는 1943년 2월 2일에 독일의 항복으로 끝났다. 스탈린그라드에 배치 받은 소련군의 평균수명은 24시간, 독일군은 7초마다 한명씩 죽어나갔다는 통계가 나돌 정도이니 그 참혹함은 인류역사에 유래가 없을 정도였다. 1943년에 탱크전이 치열했던 쿠르스크 전투도 또 한번의 결정적 전투였다 스탈린은 “스탈린그라드 전투가 나치 독일의 쇠퇴를 예고했다면 쿠르스크는 나치를 멸망으로 이끌었다.”고 평가했다.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 2>     

 

전체주의에 대항하기 위해 잠시 손을 잡았던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는 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곧바로 대립했다. 1947년 미국 대통령 트루먼이 그리스 내전을 계기로 냉전을 공식 선언했다. 마셜플랜을 수립하여 유럽에 대한 막대한 경제 원조를 함으로써 사회주의 세력의 확산을 막으려 하였다.

  

  <EBS중학 필독 중학 세계사>  

 

 

1949년 4월 4일, 북대서양조약기구 나토가 창설되었다. 영국, 미국, 프랑스 등 12개 국가가 미국 워싱턴에서 북대서양 조약에 서명했다. 나토는 점점 세력을 확장하였다. 급기야 1955년에는 서독이 나토 회원국이 되었다. 서독의 가입으로 완성된 서방 세계의 안보 시스템은 소련과 사회주의 국가들에 큰 위협이었다.1955년 동구권에서도 소련을 중심으로 8개국이 바르샤바에서 조약을 맺고 나토에 대항하는 군사동맹으로 바르샤바 조약 기구를 출범시켰다. 바르샤바 조약 기구는 소련이 붕괴된 1991년에 해체되었다.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 2>   

 

1953년 스탈린이 죽고 흐루쇼프의 시대가 열렸다. 흐루쇼프는 스탈린의 정책과 그에 대한 개인숭배를 비판하고 모든 분야에 변화를 추진하였다. ‘미국과 소련이 힘을 합쳐 세계를 이끌자’는 전략적 목표를 갖고 미국과 서방 국가를 여러 차례 방문했지만 냉전은 심화되었다. 1961년 베를린 장벽 설치,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로 세계는 또 한 번의 전쟁 위기를 겪었다. 소련 공산당과 정부에서도 흐루쇼프에 대한 불만이 커져서 1964년 대표회의는 흐루쇼프를 해임하였다.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 2>   

 

 

1985년 고르바초프가 당서기장으로 당선되면서 소련은 다시 한 번 개혁의 기회를 맞았다. 고르바초프는 페레스트로이카, 글라스노스트를 표방하며 공산당 일당독재를 완화하고 시장 경제를 도입하려 하였다. 그러나 개방은 공산당과 국가에 대한 불신을 더 깊게 만들었고, 개혁도 찬반 논란에 휩싸였다.

  

<해법 에듀 스토리텔링>   

 

 

1990년 6월 러시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다음백과 표현 or 연방 공화국?)의 인민대표회의는 러시아 법이 소비에트 법보다 우선함을 공포했다.(러시아 공화국은 소련에 직속된 형태의 공화국이었기 때문에, 러시아 공화국의 독자적인 당 서기장직은 1990년에야 성립되었다.) 1991년 4월에는 직접선거에 의해 선출되는 러시아연방의 행정부 수반인 대통령직을 신설했다.  6월 옐친은 국민 투표로 러시아 연방의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 변화에 반발하며  8월에 공산당의 보수파들이 쿠데타를 일으켰다. 민중들의 지지를 받지 못한 쿠데타는 실패하였고, 도리어 공산당이 해산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1991년 12월 21일에 소비에트 연방국이었던 러시아, 우크라이나 등 11개국이 모여 독립국가 연합을 창설하였다.

 

 <해법 에듀 스토리텔링> 

 

소비에트 연방의 붕괴를 막아보려던 고르바초프가 1991년 12월 25일 소련 대통령직(1990년 소련 대통령으로 추대)에서 물러나고 크렘린 궁의 소련 깃발도 내려졌다. 이로써 70년 동안 유지된 소련은 완전히 붕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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