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에서 배우는 본격적 역사는 4대문명에서 시작한다. 4대문명은 4대강 유역의 농경민의 것이고 이후 고대제국의 흥망도 대부분 이들 지역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자연히 역사는 농경민의 것으로 인식되기 쉽다. 하지만 책을 조금만 읽어보면 역사의 주인은 농경민이 아니라 유목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일 만년 농경의 역사에서 농경민과 유목민을 딱 부러지게 구분하기는 힘들다. 유목민이 남하해서 정착하면 수 백 년의 시간 속에 토착 농경민이 되어 버리고 농경민이 된 초기 유목민의 후손들은 또 다른 유목민의 침략을 받는다. 이런 과정들이 되풀이 되고, 농경민과 유목민은 거듭 융합되어 새로운 문명과 제국을 만든다. 사실 이렇게 보면 농경민과 유목민을 혹은 문명인과 야만인을 구분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다. 그럼에도 농경민은 농경민의 생활방식이, 유목민은 유목민의 생활방식이 있고 유라시아의 역사는 어떤 면에서는 이 두 세력이 끊임없이 부딪히며 발전해 온 것이라 할 수도 있다. 초기 유목민의 역사에 대해 조금이나마 알게 된 것은 윌리엄 맥닐의 『세계의 역사』 덕분이다. 본격적인 유목민 관련 서적을 읽지는 못했지만, 기본적인 수준에서나마 맥닐이 설명하는 유목민에 대해 조금 정리해 두려한다.

 

  <아틀라스 세계사>

  

<용선생 세계사 3>

 

“유목문화가 농경세계의 북과 남에서 독자적인 생활양식으로 출현한 시기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아마도 기원전 3000년 이전에는 유목민으로 생활하던 사람의 수가 그리 많지는 않았을 것이다. p78”

 

유목민들의 터전인 스텝지대는 유라시아 대륙 북위 45도에서 55도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이 지역은 수목이 거의 자라지 않아 초기 농경 방법인 화전농법을 하기 힘들었다. 반면 광활한 초원은 가축을 기르기에 적합했다.

 

“그래서 스텝의 수렵민은 초창기의 농경민이 발달시킨 각종 기술을 접했을 때, 가축사육을 수용하고 고되고 노동이 따르는 곡물 재배를 거부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지리적 환경에 효과적으로 적응해 나갔다. 이렇게 해서 농경을 이해하면서도 경멸하는 독특한 유목민의 생활양식이 출현했다. p78"

 

유목민은 농경민에 비해 수렵 시대의 습성을 훨씬 많이 간직하고 있다. 이동경로를 따라 침략자로부터(그것이 사람이든 동물이든) 가축을 보호해야 하는 공동체에는 수렵민 특유의 전투조직과 폭력적 습성이 여전히 중요했다. 이에 비해 초기의 농경민 공동체는 평화롭고 평등주의적이었다.

 

“이후 구세계에서 인류의 역사는 농경민의 생활에서 비롯된 우세한 인구수와 유목민의 문화적 필요에 부응하는 우월한 정치·군사적 조직 간의 상호작용을 축으로 해서 전개되었다. p79”

 

고대 제국이 형성되기까지 크게 두 번, 농경민에 대한 유목민의 광범위한 침략이 있었다. BC1500년을 전후하여 전차를 탄 청동기 유목민이 유라시아 대륙을 휩쓸었고, BC1000년을 전후로 해서 철제 무기를 가진 기마 유목민들이 대거 남하하였다.

 

“기원전 1700년 직후부터 약 300년 동안 문명세계는 야만족 정복자들에게 짓밟혔다. 메소포타미아의 북부와 동부에 살고 있던 산악민, 시리아·팔레스타인·아라비아 북부 등 사막 주변의 여러 부족, 북방의 스텝지대에서 발원한 각양각색의 전사집단이 다양한 방식으로 결합하여 기존 문명사회의 모든 중심부를 공격했다. 이후의 역사에서 야만족의 정복이 이토록 폭넓게 이루어진 적은 없었다. 전문가의 기술을 지탱하는 사회구조가 견고하지 않았던 문명사회의 주변부에서는 야만족의 침입에 의해 그동안 쌓아올린 문화적 성취가 송두리째 파괴되었다. 문명세계의 양단에 있던 크레타와 인도에서는 아카이아인과 아리아인의 공격을 받아 거의 모든 것이 불타버리고 폐허만 남았다. 그 두 민족의 침략은 기원적 1500년과 기원전 1400년 사이에 가장 격렬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p109”

 

아카이아인은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에 나오는 그리스인들이다. 트로이를 멸망시킨 아킬레우스, 오디세우스, 아가멤논 등등, 그리스의 영웅들이 아카이아인들, 말하자면 야만족이란 것이다. 인도의 아리아인은 남하하여 인더스 문명을 파괴하고 갠지스 강으로 이동하여 인도라는 고대국가의 주인이 되었다. 중국 최초의 국가로 인정되는 상나라 역시 전차를 이끌고 나타난 야만족의 나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가장 강력한 문명을 이루었던 서아시아에서는 야만족이 쉽게 농경민을 정복할 수 없었다. 야만족의 광범위한 침략이 있었지만 문명을 지탱하던 사회구조는 붕괴되지 않았고 다만 미미한 변화만 겪었을 뿐이다. 야만족들이 농경사회를 휩쓸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준마가 끄는 가벼운 전차’ 에 있었다.

 

“그들은 질주하는 전차에 안전하게 몸을 싣고 적의 대열을 향해 화살을 퍼부을 수 있었다. p110"

 

당시 전차의 이점은 보병부대와 맞선 탱크에 견줄 수 있다. 전차 몇 대만 있으면 쉽게 정복이 끝날 정도였다. 하지만 청동 전차와 무구를 만드는 데에는 막대한 비용이 들었기 때문에 전차의 수는 한정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전차의 시대는 귀족주의 시대였다.

 

철기와 기마혁명은 또 한 번의 대대적인 침략을 몰고 왔다. 철기가 의도적으로 생산되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1200년경이었지만 철제 도구와 무기가 광범위하게 보급된 것은 기원전 800년경부터라 할 수 있다. 이 무렵 유목민들은 말 등에 직접 올라타는 기마술을 터득하게 되었다. 철제 무기와 기마술의 결합은 전쟁을 대중화하였다.

 

“이 기술적 진보가 초래한 첫 번째 중대한 결과는 야만족이 또다시 고대 서아시아의 대제국들에 침입하여 기원전 1200년과 기원전 1000년 사이에 그들을 하나씩 무너뜨렸다는 것이다. 철기시대 야만족이 군사적으로 성공을 거둔 것은 미개하지만 평등한 공동체사회 특유의 심리적 통합력 덕분에 누구나 제몫을 다하는 병사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p118”

 

“서아시아에 새로 침입한 자들은 청동기시대의 선배들과 마찬가지로 북부와 동부의 스텝지대와 남부 사막의 외곽과 같은 변경지대 출신이었다. 이들 이주자 집단 중에는 훗날 유명해지는 민족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이란의 메디아인과 페르시아인, 시리아 및 팔레스타인의 필리스티아인, 히브리인, 아람인, 에게 해 지역의 프리기아인, 도리아인 등이 바로 그들이다. p118”

 

 

<용선생 세계사 3> 

 

인간은 기원전 2000년 이전에도 가끔씩 말을 탔다. 그러나 기마병이 되려면 말을 모는 동시에 활을 쏠 수 있어야 했다. 이 문제를 청동기 시대의 전차 전사들은 기수와 사수라는 2인 1조의 분업 체계로 해결했다. 기원전 800년을 전후로 인간은 혼자서 두 역할을 해내는 데 성공했다. 스스로를 말을 모는 하반신과 활을 쏘는 상반신으로 나누어 분업을 수행한 것이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반인반수의 괴물 켄타우로스와 역사시대의 기마인은 전혀 다른 생물학적 종 간의 경이로운 공생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기마가 전쟁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린 것은 그리 놀랄 일이 아니다. p121”

 

유라시아의 초원지대는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바닷길이나 비단길보다 초원길이 가장 먼저 유럽과 아시아를 연결하였다.

 

“유라시아 대륙 스텝지대의 유목민들은 뚜껑을 꽉 닫지 않은 병 안에서 떠다니는 무수한 미립자에 비유할 수 있다. 어느 한 부분에 가해진 압력은 순식간에 전체로 파급된다. 모든 유목민 집단은 자신들이 독점하던 목초지에서 추방되면 아예 사라지거나, 무력으로 인근 집단의 목초지를 재빨리 빼앗았다. 그래서 목초지 관할권에 어떤 중대한 혼란이 생기면, 그 여파가 몇 계절 만에 초원의 한 쪽 끝에서 다른 쪽 끝까지 파급되었다. 한 집단이 인근 집단을 밀어내는 반복적인 과정에서 최종적으로 쫓겨난 최약체 집단은 사멸하거나, 스텝지대의 북쪽과 서쪽에 위치한 살기 힘든 삼림지대로 도망치거나, 문명세계의 방위선을 뚫고 남하하여 농경민의 지배자가 되었다.p284~5”

 

유라시아 스텝지대의 동쪽은 서쪽보다 강수량이 적고 기온이 낮아 유목민들에게도 혹독한 지리적 조건에 속한다. 스텝지대에서 유목민들 간의 이동이 대부분 ‘서진’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런 지리적 사실로 인해, 스텝지대 전체가 유목민 집단으로 채워질 무렵 (기원전 400년경 이후)에는 동서의 기상변화도가 규칙적이고 매우 강력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몽골 고원은 환경이 대단히 가혹하여 사람이나 동물이 살아가기 힘든 곳이었다. 헝가리 평원까지 뻗어있는 스텝지대의 서쪽으로 갈수록 고도가 낮아지고 비를 머금은 대서양 바람이 지척에서 불기 때문에 온난하고 습윤해진다. 그러다 보니 스텝지대에서 정치적 격변이 일어난 뒤에는 피난민 그리고/또는 정복자가 질 좋은 초지와 온난한 기후가 유혹하는 서쪽으로 향하는 경향이 있었다. 따라서 서진이 수세기 동안 꾸준히 대세를 이루었다. p193”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

 

서진은 주로 중국의 역사와 관련이 깊다. 중앙아시아 스텝지대의 여러 유목국가들은 중국과의 대결 과정에서 주변 유목민을 서쪽으로 밀어냈고, 밀려난 유목민은 연쇄적으로 다른 유목민을 서쪽으로 밀었다. 서쪽 초원 끝의 유목민은 유럽 대륙 아래쪽으로 남하하여 문명세계를 침략했다.

 

진시황에 의해 쫓겨난 내몽골 유목민 부족들은 외몽골 스텝지대로 달아나며 오히려 강력한 야만족 연합체를 형성했는데 이들이 한나라를 위협했던 흉노 연합체이다. 이후 흉노는 스텝지대를 횡단하여 서쪽으로 지배력을 확장했다.

 

“이 과정에서 그들은 페르시아어를 사용하는 여러 민족을 그들의 거주지에서 추방했는데, 이 민족들은 남서쪽으로 이동하여 그리스의 영향권에 있던 박트리아 왕국을 무너뜨렸다. 흥미롭지만 별로 알려지지 않은 이 왕국은 쇠망해가던 셀레우코스 제국과 마우리아 제국의 중간지대에서 흥기했고,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다른 왕국들보다 훨씬 동쪽에 위치해 있었다. (....) 기원전 102년에는 중국 군대가 서진하여 멀리 시르다리야 강까지 천자의 종주권을 확립했다. 얼마 후 (정확한 연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쿠샨의 왕이 지배하는 제법 강력한 군주국이 이전에 박트리아 왕국이 있던 곳 -지금의 아프가니스탄에서 산악지대를 지나 파키스탄까지 걸쳐 있던 지역-에 세워졌다. 쿠샨인은 흉노가 중국의 서역에서 쫓아낸 페르시아 부족민의 후손이었다. p254~5”

 

정리하자면 인도의 쿠샨은 페르시아계 유목민이 세운 나라인데 이들은 흉노에 의해 쫓기다가 박트리아를 멸망시키고 그 자리에 나라를 세웠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이들을 한나라가 월지로 생각했던 것 같다. 한무제는 흉노를 협공하기 위해 월지와 동맹을 맺고 오도록 장건을 파견했다. 월지도 흉노에게 괴롭힘을 당했으니 가능한 계획이다. 장건은 도중에 흉노에게 잡혀 10여년을 살다가 우여곡절 끝에 탈출하여 월지를 찾아냈는데, 이들은 이미 정착하여 잘 살고 있었다. 여기서 월지가 쿠샨이라는 것을 유추할 수 있다. 여하튼 이들은 한나라의 제안을 거절했다. 장건은 임무를 완수하지 못하고 돌아왔지만 그 과정에서 흉노와 서역에 관한 많은 정보를 가져와 결국 흉노를 몰아내는데 성공했을 뿐 아니라 비단길이라는 동서교역로를 개척할 수 있었다.

 

 

<용선생 세계사 3>

 

 

비단길이 열리고 동서교역로가 안정적으로 유지될 수 있었던 것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중무장 기병의 등장이 그것이다. 스텝지대의 말은 조랑말이다. 그런데 기원전 100년 이전에 파르티아인이 말에게 특별히 재배한 알팔파를 사료로 먹이면서 훨씬 크고 강하고 아름다운 품종의 말을 얻을 수 있었다. 이 말은 기병과 말이 완전무장을 해도 그 무게를 감당할 수 있었다. 이렇게 중무장한 기병은 스텝지대의 경무장 기병이 쏘는 화살도 방어하기 쉬웠고 그들의 퇴각도 방해할 수 있었다.

 

“그 결과 문명세계의 중무장 기마병과 스텝지대 유목민의 경무장 기마병 사이에는 일종의 대치상태가 형성되었다. 어느 쪽도 상대방의 세력권 안에서는 승리할 수 없었다. 대형 말은 황량한 스텝지대의 빈약한 잡초만 먹어서는 충분한 영양을 섭취할 수 없었고, 농경지대에서는 비무장 유목민이 중무장한 신식 기마병에게 승리할 수 없었다. p255~6”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앙아시아에서 스텝지대의 유목민에 대한 방어선이 구축되자, 문명사회의 정부와 상인은 서로 협력하여 안정적인 교역로를 만들어냈다. 잘 정비되고 치안이 유지되며 무거운 통행세가 부과되는 대상로가 중국과 로마를 연결했던 것이다. 대상들은 ‘실크로드’를 따라 서방으로 가서 중국의 비단을 로마 제국의 시리아까지 운반했고, 돌아오는 길에는 금속, 유리, 상당량의 화폐와 같은 다양한 상품을 싣고 왔다. p256”

 

“거의 같은 시기에, 그리스어를 사용하면서 홍해를 근거지로 삼아 활약하던 선장들이 인도양의 규칙적인 계절풍을 이용하여 아덴 해협에서 대양을 횡단하여 남인도에 도달하는 방법을 찾아냈다. 벵골 만을 건너 인도의 동해안과 말레이를 연결하는 유사한 항해도 시도되었다. 크라 지협의 짧은 거리를 육로로 횡단하면 동남아시아 연안에서 활동하던 중국의 선박과 접촉할 수 있었다. 따라서 서력기원이 시작되기 직전에는 말레이 반도를 가로지르는 지협 구간만 제외하면, 해상교역로가 로마와 중국을 연결하게 되었다. p256~7”

 

훈족과 관련된 또 한 번의 대이동이 있었다. 중국이 위진남북조 시대의 혼란기에 휩싸이기 시작했을 때 북쪽의 유목민들이 만리장성 아래로 남하했다. 흉노와 선비, 저, 갈, 강 부족들이 번갈아 16개의 국가를 세웠다. 이들의 남하로 비게 된 초원을 차지한 후 급격하게 성장한 것이 유연이다. 유연이 서쪽으로 뻗어나가자 다른 부족들이 뿔뿔이 흩어져 도주했다.

 

“그런 집단 중 하나가 유럽의 역사에 등장하는 훈족이다. 이들은 서기 372년에 남부 러시아에 나타났고, 그 지역을 한 세기 이상 지배하던 동고트족을 몰아냈다. 인접한 서고트족은 훈족이 두려워서 로마 제국 영내로 피난했다. 그 떠돌이 전사집단은 로마 정부와 불화를 빚기도 하고 동맹을 맺기도 하면서 변경에서 살아갔다. 서기 410년 로마 시를 약탈한 뒤에, 서고트족은 서쪽으로 이동하여 스페인으로 들어갔다. 그들은 그 땅에 서고트 왕국을 세웠는데, 이 왕국은 711년까지 존속했다. 약탈을 일삼던 게르만인의 여러 부족이 서고트족의 전철을 밟았고, 다른 부족들은 무시무시한 훈족에게 항복했다. p285”

 

 

서로마제국을 멸망시킨 게르만의 대이동은 훈족 때문인데, 훈족은 북 흉노로 추정된다. 중국의 위진남북조 시대에 만리장성 아래로 내려간 흉노는 남 흉노, 유연에게 쫓겨난 흉노는 북 흉노이다 (논란이 있는 것 같지만). 북 흉노가 서진하면서 게르만을 밀어낸 것인데, 이들을 유럽에서는 훈족이라고 불렀다.  

 

이후에도 투르크와 몽골 등이 세력을 확장하면서 유라시아 대륙이 커다란 변화를 겪었다. 하지만 윌리엄 맥닐이 『세계의 역사1』에서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는 유목민에 관한 내용은 이 정도이므로, 부득이 이 글도 여기서 마무리 한다.

 

덧붙임 :  '코미타투스'라는 게르만 전사집단의 시원이 유라시아 유목민에서 시작된다는 KBS다큐 <초원의 제국> 2부 '황금의 맹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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