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의 역사를 간단하게나마 주~욱 연결하여 이해해보려고 스터디 회원 한분께 러시아 통사를 맡겼다. 두 시간을 차분히 열강하신 회원이 참고했다며 가지고 온 책을 내가 빌려왔다. ‘맥을 잡아주는 세계사’ 시리즈 10권 『러시아사』 이다. 지은이인 맥세계사편찬위원회는 중국의 연구소인 것 같다. 독특하게도 러시아 역사를 중국의 시각으로 보게 된 것이다. 관점에 대한 미심쩍음이 없진 않으나 별 오류가 없다면 기초 사실을 익힌다는 목적에는 어긋날 것 같지 않았다. 가장 큰 염려는 러시아 용어를 중국어로 옮긴 것을 다시 한국으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아주 기괴한 용어가 등장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으나 러시아 역사를 전공한 분이 감수했다고 하니 믿어도 되지 않을까 싶다.

 

 

 

러시아는 세계에서 가장 영토가 넓은 국가이다. 굳이 자료를 찾지 않아도 딱 보면 알 수 있다. 미국이나 중국의 두 배 정도다. 하지만 인구는 약 1억 4천 2백만 명에 불과하다. 중국의 1/10 정도 밖에 안 된다. 이 넓은 지역의 어디에서부터 러시아의 역사는 시작될까?

  

<해법 에듀 스토리텔링 러시아사>   

 

동유럽의 평원에 사르마트족이 살았다. 고트족이 나타나 평화롭게 살던 사르마트족을 잡아서 노예로 팔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사르마트족은 슬라브라고 불리게 되었다. 슬라브는 노예를 뜻하는 고대 라틴어에서 유래한 말이다. 영어 slave와 같은 뿌리를 가졌다. 슬라브족은 1세기부터 동슬라브와 서슬라브로 나뉘었고, 유럽에서 게르만이 대이동을 하던 시기에 남쪽으로 내려가 남슬라브족을 형성했다. 동슬라브족은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서슬라브족은 폴란드, 체코, 슬로바키아, 그리고 남슬라브족은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몬테네그로, 불가리아에 정착하여 살았다.

 

우리가 공부하는 러시아의 역사는 이 동슬라브에서 시작된다. 8세기 후반에서 9세기 초반, 동슬라브족은 점차 합쳐져 북쪽의 노브고로드와 남쪽의 키예프를 중심으로 두 개의 부락 연맹을 형성했다. 9세기 중엽부터 이들 부락 내에는 끊임없는 내분이 일어났다. 이틈을 타서 북쪽에서 내려온 바랴크인들이 영향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바랴크는 바이킹족이다. 9세기에서 11세기에 바이킹 즉 {북쪽의 게르만인) 노르만들이 유럽으로 대거 남하하던 시기에 동슬라브족에게도 노르만이 찾아왔다. 바랴크의 지도자 류리크가 862년 최초로 노브고로드를 점령하고 류리크 왕조를 세웠다. 노브고로드의 두 번째 대공이 된 올레크가 882년 키예프를 점령하고 정치적 중심지를 키예프로 옮겼다. 이로써 키예프 루시 공국이 탄생했다.

 

요약하자면 러시아 최초의 국가로 연표에 등장하는 키예프 공국은 바이킹족 (바랴크) 지배자와 동슬라브족 피지배자로 구성되었다. 우리 역사에서 고구려인 지배자와 말갈족 피지배자로 구성된 발해와 유사하다고 할까. 그런데 러시아라는 말의 어원인 ‘루시’는 슬라브족이 자기 땅에 찾아온 이방인인 바이킹을 가리켜 ‘항해술이 뛰어난 사람’ 이라는 의미로 쓴 것이다. 이후로 바이킹과 슬라브족은 서로 동화되어 새로운 슬라브족으로 탄생하였다. 민족적으로는 슬라브족, 국가 명칭으로는 루시(바이킹을 가리킴)를 사용하며 지금까지 하나의 역사를 만들어 오고 있다.

 

<해법 에듀 스토리텔링 러시아사>    

 

러시아 역사에는 딱 두 왕조만이 등장한다. 류리크왕조와 로마노프왕조이다. 류리크왕조는 바이킹 지도자 류리크가 세운 것으로 700년간이나 지속되었다. 노브고로드 공국과 키예프 공국을 통치하였고, 킵차크한국의 통치를 받던 시대에도 계속되어 모스크바 공국을 다스렸다. 류리크왕조는 이후 로마노프왕조로 이어졌다.

882년에서 1240년까지 존속한 키예프 루시 공국은 987년 블라디미르 1세 때 그리스정교를 수용하였다. 비잔티움제국의 안나 공주와 결혼한 블라디미르 1세는 그리스정교를 국교로 선포하였다. 이를 ‘루시의 세례’라고 부른다. 루시와 비잔티움 사이에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키예프 공국의 문화가 발전하였다. 비잔티움 황제가 보낸 키릴 형제가 만든 (그들이 만든 것이 아니라는 설도 있다) 키릴 문자가 사용되었고 루시 최초의 법전이 탄생했다.

 

 

<해법 에듀 스토리텔링 러시아사> 

   

1206년 테무친이 칭기즈칸에 즉위한 후 유라시아 세계는 빠르게 몽골의 지배 아래 놓였다. 칭기즈칸의 맏아들인 주치의 아들 바투가(칭기즈칸의 손자다) 유럽 원정에 나섰다. 1240년에 바투가 세운 킵차크한국은 200여 년 동안 이 지역을 통치하였다. 킵차크한국은 공물과 부역을 징수하였지만 루시의 대공들을 승인하고 종교적 자유를 허용하였다. 킵차크한국은 14세기 말에 티무르에 의해 큰 타격을 입은 후 작은 나라들로 쪼개져 싸우다가 모스크바 대공국에게 대패하여 1502년 멸망하였다.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 1>

   

모스크바라는 명칭은 핀란드어로 ‘습기가 많은 곳’이라는 뜻이며, 1147년에 처음으로 러시아 역사서에 기록되었다. 모스크바는 원래 수즈달 공국의 남쪽 끝에 세워진 변방 기지였다. 모스크바 공국은 14세기에 이반 칼리타 대공이 집권하면서 본격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킵차크한국의 통치 아래 있었던 칼리타 대공은 몽골 칸에게 뇌물을 주고 1382년 블라디미르 대공 및 루시 공국들의 수장에 봉해졌다. 몽골인을 대신해 루시 전 지역에서 공물을 거두어들이는 권한도 얻었다. 이로써 루시의 중심지가 모스크바로 이동했다.

 

1476년 이반 3세는 쇠약해 가던 킵차크한국에 대한 공납을 중단하기로 결정했다. 이후 킵차크한국의 군대가 진격해 오자 선봉에 서서 군대를 이끈 이반 3세는 마침내 모스크바 공국을 몽골의 지배로부터 독립시켰다. 또한 분열되었던 루시를 빠르게 통일시켜 루시의 군주로 불리며 차르의 칭호를 얻었다. 체제를 정비하고 봉건 귀족들로 구성된 의회인 두마에서 중요한 정책을 결정하였다.

 

러시아 최초의 공식적인 황제는 이반 4세이다. 차르 호칭을 처음 획득한 것은 이반 3세지만 차르 호칭을 공식 사용한 것은 이반 4세이다. 강력한 황권을 추구하여 러시아를 중앙집권화 하였으며, 영토를 확장하였다. 몽골족 (타타르)과의 전쟁을 통해 우랄산맥을 넘어 광활한 시베리아로 진출하였다. 그의 군사, 정치 개혁은 러시아를 강대국으로 거듭나게 하였다. 소련의 스탈린도 그의 신봉자가 될 정도였다. 하지만 이반 4세는 잔혹한 이반 즉 이반 뇌제(잔혹한 이반의 일본 번역어)라고도 불렸다. 노년에는 더욱 난폭해져 임신한 며느리를 때려 유산시키고 아들을 지팡이로 때려 숨지게 만들기도 했다. 1584년 갑작스런 뇌출혈로 사망했다.

 

< EBSi 이다지의 세계사 개념 다지기>

   

이반 4세 사후 왕위를 이은 표도르가 후손 없이 죽자 류리크왕조는 갑자기 종말을 맞았다. 차르 계승권을 둘러싼 극심한 다툼과 혼란이 이어지다 1613년 이반 4세의 친척인 미하일 로마노프가 차르에 선출되었다. 로마로프왕조가 시작되었다. 로마노프왕조는 1917년 러시아혁명에 의해 무너질 때까지 300년 간 러시아를 통치하였다.

 

로마노프왕조를 시작한 미하일은 귀족들과의 마찰을 해결하기 위해 많은 토지를 봉지로 나누어 주었다. 그런 한편 농노에 대한 압박과 착취는 갈수록 심해졌다. 서유럽에서는 이미 농노제가 해체되고 있던 상황에 러시아는 농노제가 강화되었던 것이다. 농노들의 불만은 극에 달했고 잇따라 농노 봉기가 일어나 러시아의 17세기는 ‘폭동의 시대’로 불린다.

 

17세기 말에 러시아의 근대화를 이끌 차르가 탄생하였다. 10세의 나이에 공동 황위에 오른 표트르 1세이다. 권력 투쟁에 의해 궁중 밖에서 성장한 표트르는 다양한 계층과 어울렸고, 외국인들에게서 새로운 사상과 풍습을 받아들였다. 조선술과 해군력 증강에 특히 관심을 기울였던 표트르는 익명으로 직접 시찰단에 끼여 네덜란드의 조선소에서 목공 기술을 배웠다. 영국의 해군력도 직접 배워 와서 러시아의 발틱 함대를 창설했다. 해군력 뿐 아니라 육군도 증강하여 스웨덴과 전쟁 끝에 발트해로 진출하였다. 서구화를 추진하여 네바강 하구에 상트페테르부르크를 건설하고 수도를 이전하였다. 유명한 수염세를 거두어들이며 까지 러시아를 서구화하려고 했던 그는 유럽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비잔티움제국의 계승자를 자처하던 러시아를 유럽의 일원으로 만들었다. 그의 개혁은 러시아 역사에 새로운 시작을 열었다. 하지만 상류계급과 연대한 차르 중심의 개혁은 전제 정권을 강화하여 한층 야만적인 착취방식이 생겨났고, 이는 훗날 민중 폭동의 씨앗이 되었다. 서구화 정책은 슬라브 문화와 전통을 사라지게 했고 러시아인의 뿌리를 흔들었다는 비판도 받고 있다.

 

계몽전제군주를 자처한 예카테리나 2세의 통치는 계몽보다는 전제에 방점이 있다. 계몽 또한 시민이 아니라 귀족 계급에 해당한 것이다. 예카테리나 2세 시절은 ‘귀족들의 황금기’로 불리며 실질적으로 발전했지만, 농노제는 강화되었다. 농사짓는 사람들의 5%만이 농민이었고 95%는 농노였다. 러시아 역사에서 가장 큰 규모의 농민군 전쟁이었던 푸가초프의 난도 이때 발생했다.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 2> 

 

나폴레옹의 몰락을 이끌어 유럽을 구해낸 인물이 알렉산드르 1세다. 러시아가 나폴레옹의 대륙 봉쇄령에 반하여 영국산 물건에 대한 수입 규제를 풀자 1812년 나폴레옹이 러시아로 진격해 들어왔다. 러시아군은 ‘러시아의 넓은 영토를 이용해 나폴레옹의 힘을 스펀지처럼 빨아들이는 작전’을 세워 모스크바를 비우고 프랑스군의 보급로를 차단했다. 나폴레옹이 모스크바의 크렘린궁에 들어간 날 저녁에 화재가 일어나 도시 전체가 6일 동안이나 불탔다. 개미 새끼 한 마리 없이 텅 빈 모스크바에서 나폴레옹은 식량과 무기마저 전달받지 못한데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전염병이 돌았고 무엇보다 무시무시한 러시아의 겨울이 다가오고 있었다. 모스크바에서 철수하기로 결정하고 퇴각하는 나폴레옹 군대를  공격하여 러시아는 대승을 거두었다. 믿기 힘든 나폴레옹의 패배를 지켜 본 유럽은 6차 대프랑스 동맹을 결성하였다. 1813년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나폴레옹은 결국 패하고 엘바 섬으로 귀양 갔다. 러시아에서는 나폴레옹 전쟁을 ‘1812년 조국 전쟁’ 이라고 부른다.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는 이 전쟁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 EBSi 이다지의 세계사 개념 다지기>

 

1825년 알렉산드르 1세가 자녀 없이 갑자기 죽자 다음 차르를 두고 혼란이 일어났다. 두 동생들이 서로 차르를 양보하는 사이에 얼마간의 공백이 발생했다. 이틈을 타 전제정치를 반대하고 공화정을 주장하는 청년 장교들이 쿠데타를 기획했다. 하지만 이 계획은 사전에 발각되었고 니콜라이 1세가 즉위한 날에 일으킨 데카브리스트의 난은 참혹하게 진압되었다. 차르로 즉위한 니콜라이 1세는 절대 전제 군주로 독재 정치를 강화하였으며 유럽의 헌병이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19세기 자유주의가 퍼져나가던 유럽의 상황과는 정반대의 길이었다.

 

 

<해법 에듀 스토리텔링 러시아사>    

 

1855년 니콜라이 1세가 크림전쟁 도중에 죽고 알렉산드르 2세가 즉위하였다. 크림 전쟁에서 패배한 러시아와 알렉산드르 2세는 충격을 받았다. 오스만과의 계속된 러·투 전쟁에서 손쉽게 승리해 왔던 러시아는 영국과 프랑스가 오스만을 지원하자 대패한 것이다. 크림 전쟁의 실패로 러시아 전제 군주제의 폐단이 드러났고, 러시아의 국제적 위상도 크게 흔들렸다. 러시아에는 개혁이 절실하였다.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 2>  

 

1861년 알렉산드르 2세는 농노제 폐지를 선언했다. 하지만 농노의 삶은 더 나빠졌다. 러시아 정부는 기존의 영지를 지주의 사유재산으로 인정했다. 농노가 땅과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토지 금액의 20%를 보상금으로 먼저 지급하고 나머지 80%는 정부에서 빌려야 했다. 빌린 금액은 49년에 걸쳐 원금과 이자까지 갚아야 했다. 농노들에게는 당장 토지 금액의 20%가 없을 뿐 아니라 빌린 돈을 상환할 능력도 없었다. 농노제도가 폐지된 이후 농노들이 소유한 땅은 오히려 줄어들었다. 농노제 폐지의 실패는 정부에 대한 반감과 투쟁을 불러 일으켜, 농노 반란이 1860년 126건에서 1176건으로 늘어났다. 알렉산드르 2세에 대한 암살 기도가 계속 되었다. 1881년 결국 알렉산드르 2세는 인민의 의지당에 의해 암살당하였다. 하지만 그가 시도한 여러 가지 개혁은 러시아 자본주의 발달의 기틀을 닦았다.

 

농노제 폐지 이후 러시아 농민들과 지주 사이에 갈등이 깊어지자 지식인들은 사회주의에 경도되었다. 이들이 나로드니키이다. 농촌공동체를 중심으로 사회주의를 실현하려 했던 나로드니키 운동은 실패했지만 이들에 의해 러시아 사회주의가 시작된 셈이다. 나로드니키들은 농민의 옷을 입고 농촌을 돌며 혁명을 호소하는 브나로드 운동을 대대적으로 펼쳤다. 하지만 농민들은 혁명을 부르짖는 이들 지식인들을 정신 나간 사람으로 취급하며 동참하지 않았다. 심지어 이들을 경찰에 밀고하는 일도 많았다. 차르 정부의 탄압으로 브나로드 운동은 완전한 실패로 끝났고 실의에 빠진 나로드니키들은 허무주의자, 무정부주의자, 테러리스트가 되어갔다.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 2>   

 

러시아는 근대화 개혁에 성공하지 못했지만 19세기 말부터 자본주의가 빠르게 성장했다. 서구 제국주의 열강의 일원으로 아시아에 식민지를 건설하려고 하였다. 동쪽으로 진출하던 러시아는 만주와 한반도를 두고 일본과 맞붙게 되었다. 러시아의 진출을 불안한 눈으로 바라보던 영국과 미국 등이 일본을 지원하는 가운데 1904년 러·일 전쟁이 발생하였다. 일본이 중국 뤼순 항에 정박한 러시아 태평양 함대를 공격하였다. 일본에 계속 패하던 러시아는 전세를 역전하기 위해 발틱 함대를 파견하였다. 수에즈 운하를 장악한 영국이 수에즈 운하를 봉쇄하는 바람에 아프리카를 돌아 7개월이나 걸려 쓰시마 섬에 도착한 발틱 함대는 일본군에 전멸했다. 패전 소식이 전해지자 러시아에서는 혁명(피의 일요일 사건)이 일어났다. 안팎으로 위기에 처한 러시아는 1905년 미국의 중재로 일본과 포츠머스 조약을 맺고 한반도에 대한 관리권을 일본에 넘겨주었다.

 

.... 러시아 혁명부터는 다음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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