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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레빌라 연애소동
미우라 시온 지음, 김주영 옮김 / 은행나무 / 2011년 11월
평점 :
절판


 

 

  미우라 시온의 이 소설은 꼭 붕어빵 같다.

 

  한 겨울에 한 입 배어먹는 붕어빵 만큼 또 따뜻한 것도 없지만 늘 먹어왔던 맛인데도 질리지않고 다시금 찾게 된다는 의미에서도 그렇다. 아마도 그의 소설이 손난로 처럼 따스한 온기와 일부러라도 듬뿍 젖고 싶을 정도로 달콤한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그리고 있어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그가 그리는 세계가 온기와 봄날의 조는 곰처럼 달콤한 평안을 머금고 있는 것은 무엇보다 미우라 시온이 사람들에 대해 가지는 굳건한 신뢰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세상엔 그리 나쁜 사람은 없다는, 알고보면 정말은 착한 사람들로 가득하다는 그런 믿음 말이다.

 

  그래서 그런지 '고구레 빌라 연애 소동'에 나오는 사람들은 다른 소설들 같으면 얼마든지 협박과 다툼으로 이어졌을 상황에서 조차 타인을 배려하고 그를 위해 기꺼이 자신의 희생을 감수하는 모습을 참으로 자주 보여준다. 첫 단편, 'SIMPLY HEAVEN'에서 한 여자를 사랑하는 두 남자가 아무런 갈등없이 한데 동거하는 모습도 그렇고 두번째 단편 '심신'에서 아내의 눈을 피해 성적 서비스를 받으려 집으로 불러온 여자가 그 때 아내가 나타나자 어려움에 처한 남편을 위해 자발적으로 기꺼이 그가 관리하는 아파트의 한 주민으로 연기를 하는 것도 그렇다. 그리고 세번째 단편, '기둥에 난 돌기'에선 지하철 플랫폼에서 우연히 만난 조폭 두목 조차 사람의 정을 소중히 하고 한번 정을 나눈 이를 위해서는 그가 아무리 하찮은 인연으로 엮어졌다 하더라도 잔정 가득한 배려를 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고구레 빌라 연애소동'은 각 단편들마다 주인공들의 어쩌면 상궤에서 벗어났다고도 할 수 있는욕망의 추구를 그리고 있는 작품이지만 이러한 사람들의 묘사를 통해 사실은 그 이면에서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음이 감지된다. 즉 주인공들이 그토록 자신의 욕망 추구에 충실할 수 있는 까닭은 바로 그를 둘러싼 타인들이 무엇보다 그를 참고 그를 배려하고 있기 때문이란 걸 느끼게 되는 것이다. 사실 어쩌면 이것이야 말로 정말 미우라 시몬이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생각하게 만드는 단편 조차 등장한다. 그것이 바로 '검은 음료수'이다. 이 단편은 다른 단편과 달리 만일 그러한 타인의 참음과 배려가 없다면 한 개인의 일방적 욕망 추구가 과연 어떠한 파국을 불러오는지 보여주는데 그렇게 함으로써 미우라 시온은 그 모든 개인의 욕망 추구가 가능함의 이면에 인내와 배려로 모종의 뒷바라지(?)를 하고 있는 타인들을 역설적으로 강조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고구레 빌라 연애소동'은 나를 둘러싼 타인에게로 먼저 눈을 돌리게 만드는 단편집이라 할 수 있다. 아마도 그래서 미우라 시온은 여러 다양한 세입자가 한데 모여 사는 '고구레 빌라'를 소설의 주된 배경으로 삼았는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고구레 빌라 처럼 우리 세계 역시도 나와 대등한 욕망을 가진 많은 이들이 한데 모여 살고 있으며 내가 지금 나의 욕망을 관철할 수 있는 것은 내가 잘나서가 아니라 타인들이 그런 나를 참고 배려해 주고 있기 때문임을 보여주기 위해서 말이다.   바로 이러한 미우라 시온의 시선, 나 이전에 나를 나답게 있게 해주는 타인을 먼저 염두에 두는 그 포용의 시선에 담겨진 따스함 때문에 '고구레 빌라 연애 소동'이 따끈한 붕어빵과도 같은 온기를  지니게 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맛있는 붕어빵은 봉지째 사더라도 바람이라도 훔쳐갔는지 먹다보면 어느새 쉬이 사라진다.

  그처럼 착한 사람들이 어우러져 발산하는 따스하고도 달콤한 온기에 취해 읽다보면 어느새 마지막 페이지를 앞두고 있는 것을 깨닫는 '착하디 착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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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 2012-01-25 23: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이번 리뷰는 간결하면서도 딱 떨어지는, 책의 내용을 너무나도 잘 요약한 리뷰군요. 설마 저의 징징스러운 댓글때문에 리뷰의 양을 줄이신것은 아니실테지요ㅎㅎ 하지만 드디어 제가 헤르메스님의 글의 내용을 다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붕어빵과같다는 비유에 자그마한 감동까지도 느꼈구요. 이리 별점 5개를 쏴주시니... 재밌겠습니다. 가뜩이나 요즘들어 추운데 가슴따뜻하게 해줄 소설도 필요했구요.

ICE-9 2012-01-25 23:39   좋아요 0 | URL
하하... 사실 소이진님의 댓글이 좀 영향을 미치긴 했죠. 이래뵈도 AS에 꽤 세심한 편이거든요^ ^ 이처럼 말의 양을 가급적 줄여보려고도 하고 있는데 잘될지는 모르겠어요. 그리고 제가 주는 별점에 너무 의미를 두지 마세요. 제가 쓴 글을 훑어보면 아시겠지만 거의가 다 별 다섯이거든요^ ^ 저는 사실 별점 자체를 영화의 20자평 만큼이나 거부하고 있어요. 그런 저항의 의미로 별점 자체를 무의미하게 만들도록 늘 별 다섯을 준답니다. 아무튼 소이진님 저의 별점에 낚이시면 안됩니다.^ ^

이진 2012-01-26 00:45   좋아요 0 | URL
후후, 저도 별점이라면 지긋지긋해요. 저는 게다가 제가 제일 최고다하는 작품들만 리뷰를 쓰기에 (신간평가단 도서는 제외하고)전부 별 다섯개인데 그러기에는 또 민망해서 네개로 주기도 한답니다. 이 얼마나 웃긴일인지 ㅋㅋ 양을 줄이니까 저같은 사람은 편한데 헤르메스님의 매력이 사라지는 것은 아닐지 심히 걱정됩니다!

헤르메스님 좋은 꿈 꾸셔요)
저는 이만 꿈나라로 갈게요, 굿밤 :)
 
[활자잔혹극]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활자 잔혹극
루스 렌들 지음, 이동윤 옮김 / 북스피어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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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1. 무정한 당신이 끝내 남기고 싶은 것은? ...

 

 

  다작으로 참 유명한 작가이지만 상대적으로 우리나라에는 소개된 작품이 별로 없는 영국의 여류 작가 루스 렌들은 무엇보다 심리적 묘사로 이름이 높다. 아마도 그녀의 대표작이자 추리 문학에 있어서는 최고의 영예라고 할만한 골든 대거상도 수상했던 '내 눈에도 악마가'란 작품을 읽어보셨다면 이런 내 말이 쉽게 수긍되지 않을까 한다. 이 작품이 그토록 높은 평가를 받게 된 것 역시 그 작품에서 보여준 타인들의 눈을 끔찍할 정도로 신경쓰는 한 소심한 범죄자의 내면에 대한 그 세부에 이르기까지 집요할 정도로 언어로 모조리 담아내는 탁월한 묘사에 있었으니까 말이다.

 

 

  공교롭게도 '내 눈에는 악마가'가 나온 76년 이듬해, 그러니까 77년에 나온 지금 얘기하려는 이 작품 '활자잔혹극'의 범죄자 '유니스' 역시 바로 전작의 범죄자 아서와 많이 닮아있다. 아서와 마찬가지로 끊임없이 주위에서 자신을 어떻게 볼까 신경쓰는 것이다. 나란히 나온 작품들이라 어쩐지 '소심증' 시리즈 연작으로도 보일 지경이다. 소설은 그 이유를 첫 머리에서 단적으로 밝힌다. 유니스, 그녀가 글을 모르기 때문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자신이 글을 모른다는 사실을 남에게 들키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니스는 아서와는 달리 주위의 시선을 신경쓰는 부분이 한정되어 있다. 그러니까 글자를 모른다는 부분에 있어서만 남들의 눈을 신경쓸 뿐 그 외 다른 모든 것에 있어서는 전혀 신경쓰지 않는다. 너무나 신경쓰지 않아서 어떤 이들은 섬뜩하다고까지 말한다. 이 책의 제목이 원래 제목과는 다르게 '활자잔혹극'인 이유도 유니스가 가지는 두려움이 오직 글자에만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작 소설은 유니스가 왜 글을 모른다는 사실을 남들이 알게되는 걸 그토록 두려워하는지 속시원히 밝히지 않는다. 그 때문에 일가족 네 명을 살해하게 되는데도 렌들은 그 이유에 대해 짐짓 모른체 한다. 하긴 '내 눈에도 악마가'에서도 그랬다. 아서가 그토록 소심증을 가지게 된 이유를 밝혀주지 않았다. 그래서 렌들은 내게는 '활자잔혹극'에서 그 어떤 미사여구나 감정이입 없이 마치 할 말만 하는 불친절한 가게의 아줌마처럼 아주 건조하고 무심하게 툭툭 내던지듯 써내려가는 그녀의 문장 만큼이나 무정한 작가로 보인다.

 

 

  내가 그녀에게 "왜 유니스가 이토록 자신이 문맹자라는 사실을 두려워하죠?"하고 묻는다면

렌들은 100% 이렇게 대답할 게 틀림없다. "꼭 이유를 알아야 하나? 그렇게 생겨먹은 걸 어떡하라고... 세상엔 설명되지 않는 것들이 너무나 많아. 유니스도 그런 존재라고 그냥 생각하면 안될까? 그냥 현실로 받아들이라구."

 

 

  건조하고 투박하고 자신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에 대해 아무런 애정마저 없어서 무정한 그녀의 문장 때문에 자꾸만 '킬러들'의 헤밍웨이가 떠오르기도 하는 '활자잔혹극'은 하지만 그 건조하디 건조한 외형에 비해 그 깃든 내용에 있어서는 참으로 이래저래 할 말이 많은, 그 다양한 해석의이채로움으로 풍성한 작품이다. 

 

 

 

 

  이미 이 책 말미에 달린 해설에서 장정일은 유니스의 '문맹'을 가지고 '문맹이 결과하는 사회기술적 곤란만 아니라, 문맹이 인격적 형성에 미치는피해' 를 얘기하고 1995년 이 소설을 가지고 '의식'이란 제목으로 영화를 만들었던 끌로드 샤브롤 역시 커버데일과 유니스의 관계를 부르조아 계급 대 노동계급의 갈등이란 관점에서 아주 흥미롭게 보여준 바 있다.(사실 처음엔 '활자잔혹극'을 이렇게 유니스의 점증하는 계급의식에 맞추어 쓰려 했으나 끌로드 샤브롤의 영화를 보고 포기했다. 장정일은 해설에서 이 영화가 소설이 가지는 세부적 장점들을 많이 놓치고 있다고 평했으나 그건 소설이 영화로 옮겨올 때 흔히 가지는 일반적 한계에서 오는 보편적 문제일 뿐이고 '계급'적 관점에만 천착해 본다면 영화적 묘사가 소설 보다 훨씬 뛰어나다.) 때문에 이 책에 대해 이미 한 얘기를 하기 보다는 나 자신이 찾아낸 것으로 쓰는 게 혹시나 이 글을 읽으실 분들의 시간 낭비를 막는 길이기도 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물론 이 글이 이 책에 대한 해설 같은 것은 아니지만) 해서 그렇게 나가보려 한다.

 

 

 

   2.  데리다의 그라마톨로지를 자기만의 방식으로 다시 써 보고자 함이었나? ...

 

      '말-중심주의' 에서 '활자-중심주의' 로

 

 

  이 책이 가지는 내용에 있어서의 다양함은 어쩌면 그 출발에 있어서는 단순하지 않을까 싶다. 즉 '유니스의 '문맹'을 어떻게 볼 것인가?' 그것이다. 그렇게 장정일 처럼 '문맹'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 해석할 수도 있고 끌로드 샤브롤 처럼 하나의 은유로 받아들여 부르조아 계급의 이데올로기에 지배받지 않은 노동계급만의 독자적 이데올로기로 바라볼 수도 있다. 그렇담, 나는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나 역시 끌로드 샤브롤 처럼 하나의 은유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그 내포된 의미는 다르다. 그러니까 나는 그것을 데리다가 전통적 서양 형이상학의 토대라고 말했던 '말-중심주의'의 은유로 받아들인다.

 

 

  흥미롭게도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유니스의 '문맹'과 커버데일 일가의 '활자'의 대립이 데리다의 '그라마톨로지'에 나왔던 '말 중심주의'와 '활자 중심주의'의 대립으로도 얼마든지 읽힐 수 있음을 발견했다. 무리일지도 모르지만 나 자신 발견했던 데리다의 '그라마톨로지'적 독법이 설득력을 가진다면 앞서 말했던 '활자잔혹극'에 깃들인 내적인 해석의 풍부함에 대한 충분한 방증이 되지않을까 하여 그것을 위해서라도 한 번 나만의 독법을 시전(始展)해 볼까 한다.

 

 

   짧은 리뷰로 데리다의 논의를 다 담기엔 무리가 있으므로 스케치하듯 간략하게 넘어가는 것에 조금 양해를 먼저 구해두고 싶다. 아무튼 데리다가 전통적 서양 형이상학의 토대에 왜 말 중심주의가 있다고 한 것일까? 그것은 무엇보다도 서양 형이상학이 내내 진리를 추구해왔기 때문이다. 진리란 무엇인가? 단순히 말하자면 '참-실재'이다. 진짜로 존재하는 것. 그렇게 '아르케'의 추구로 부터 기원되는 서양 형이상학은 내내 진리란 이름으로 진짜 존재를 찾아왔었다. 그런데 진짜 존재란 무엇인가? 가상이 아닌 것. 플라톤에 의하자면 우리의 감각이 만들어낸 허상이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허상이 아닌 것이 있을 수 있을까? 그리고 그것을 찾을 수 있을까? 고대인들은 생각했고 그래서 찾았다. 바로 소크라테스가 '다이모니온'이라 불렀던 것. 그렇게 '양심의 소리'였다. 즉 고대인들은 생각했다. 내 양심 혹은 내 내면에 직접 들려오는 소리야 말로 '참-실재'가 아니겠느냐고. 왜냐하면 그 순수 내면에서 이루어지는 '말하고-듣는' 과정에서는 그 어떤 감각적 왜곡이 끼어들 틈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고대인들은 그것을 정초로 '진리'를 그리고 그것을 인식할 수 있는 '이성'을 점차로 구축해 나간다. 그리고 그 결과 이성을 뜻하는 '로고스 중심주의'가 지배하는 전통적 서양 형이상학이 만들어지게 되었다고 데리다는 말하는 것이다. 그렇게 '말-중심주의'는 토대가 된 것이다. 하지만 그라마톨로지에서 데리다는 이 '말-중심주의'를 비판한다. 왜냐하면 자기가 말하고 자기가 듣는 그것으로만 구성된, 그렇게 철저하게 동일성의 바탕 위에만 구성된 형이상학이었기 때문에 그 어디에도 타자가 개입할 틈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전통적 서양 형이상학이 가지는 문제점들이 전방위적으로 검토된 이유는 무엇보다 2차대전이었고 그것을 일으킨 파시즘의 출현이었다. 많은 철학자들은 파시즘이란 전체주의의 출현이 어떤 특정한 역사적 현상이 아니라 애초부터 하나의 존재라는 동일성을 바탕으로 다른 것을 배제함으로써 스스로를 정립시켜왔던 서양 형이상학 자체에 그 씨앗이 배태되어 있음을 깨달았다. 더구나 그것은 중세를 지배했던 기독교의 유일신 신앙으로 더 오래 더 확고하게 자리잡은 것이기도 했다. 그렇게 이성과 신은 2인 3각 게임을 하듯 서로 보조를 맞추어 철저히 타자를 용납하지 않는 오로지 혼자가 전부인 형이상학을 구축한 것이다. 바로 그것을 하이데거는 '동일자의 철학'이라 비판했고 레비나스 역시도 비슷했다. 데리다 역시 거기에 가담한다. 하지만 그는 더 안으로 깊숙이 들어간다. 그러니까 그 '동일자의 철학'을 낳게한 원인을 찾는 것이다. 그리고 결국 훗설이 예비한 길을 따라가다 그 근저에 말-중심주의(혹은 소리-중심주의)가 있음을 찾아낸 것이다.

 

 

  유니스의 '문맹'은 바로 이 '말-중심주의'를 상징한다.

 

  데리다는 '말-중심주의'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나르시스적 자기애' '현재에의 집착' 그리고 '소유욕' 흥미롭게도 루스 렌델은 직접적으로 유니스가 이 모든 특징을 다 가지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나르시스적 자기애'는 오로지 그 자신만 절대이고 완전함을 추구하는 '동일자의 철학'에 있어 당연한 특성이 아닐 수 없다. 유니스 역시 그렇다. 그녀는 자신이 글을 모른다는 사실이 들킬까 염려하는 것 빼고는 전혀 타인에 대해 신경쓰지 않는다. 그녀는 오로지 자신의 문제 감정만이 전부이며 일가족 네명을 다 살해한 뒤에도 유니스는 자신이 받게 될 급료에 대해서만 신경쓴다. 이건 그녀가 아버지를 살해한 까닭에서도 나타난다. 유니스가 자신의 아버지를 살해했던 것은 무엇보다 그가 자꾸 그녀를 다른 이름으로 불렀기 때문이다. 더구나 유니스가 처음과 달리 점점 커버데일가를 경원시하게 되었던 것도 그들이 자꾸만 자신에게 간섭하고 자신의 세계를 바꾸려 들었기 때문이다. 즉 유니스는 그야말로 '천상천하 유아독존'인 것이다. 단 하나 글자에 대한 두려움만 빼고.

 

 

 

   현재에 대한 집착 역시 유니스는 가지고 있다. '말-중심주의'가 현재에 집착하는 까닭은 진리의 집착 때문이다. 단순하게 말해서 진리의 가장 순수한 형태가 바로 현재에 나타난 진리이기 때문이다. 이건 우리의 상식이기도 하다. 지금 눈에 보이는 것이야 말로 절대 진실이라고 종종 우리는 여기지 않는가? 그렇게 전통적 서양 형이상학의 토대를 이루는 '말-중심주의'는 현재성에 집착한다. 그런데 유니스 역시 그렇다. 루스 렌들은 단적으로 이렇게 드러낸다.  

 

  현재에만 발을 딛고 살아가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유니스는 대부분의 사람들과는 상당히 다른 존재였다. 그녀에게는 당장 저녁 식사 오 분 늦는 사태가 십 년 전에 겪은 크나큰 슬픔보다 중요했다. 미래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P.71)

 

 

  소유욕 역시 마찬가지다. 애초에 말은 내 의식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그렇게 이 '나' 즉 그 무엇으로도 대체될 수 없는 고유한 '개성'은 다른 말로 하면 나만이 가진 것, 즉 소유권인 것이다. 즉 사유재산의 바탕이 되는 개인의 소유권은 바로 그 의식을 '나만의 것'이라고 할 수 있는 소유권에서 비롯된 것이었으며 데리다 역시도 철학사에 있어서 언어에 보다 우위성을 두게 된 것은 '있음'에 대한 집착 때문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의 자본주의 또한 '말-중심주의'에 그 연원이 있으며 그 정도로 '말-중심주의'는 '소유욕'과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없는 관계인 것이다. 유니스도 이것을 대놓고 보여준다. 앞서 말한 급료의 집착이 그렇지만 아래 부분에서 보다 직접적으로 드러난다.

 

   유니스 파치먼이란 인간의 흥미로운 특성은 비록 살인이나 협박은 주저하지 않았어도, 물건을 훔치거나 주인의 허락 없이 무언가를 빌린 적이 평생 동안 한 번도 없었다는 사실이다. 사물이란 신생처럼 특정 사람에게 귀속되도록 정해져 있는 것이다. 조지도 사물의 질서가 흐트러지는 모습을 싫어했지만 유니스는 그 이상으로 그런 모습을 싫어했다.(P.79)

 

 

 

   이렇게 그녀는 데리다가 말했던 '말-중심주의'의 특징을 정확히 가지고 있다. 더구나 그녀의 유일한 친구이자 같이 일가족을 살해하는 동반자 조앤 스미스가 광신도라는 사실을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 앞서 ''말-중심주의'가 '유일신 신앙'과 보조를 맞춰왔다고 말했는데 유니스와 조앤의 관계는 바로 이것을 그대로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거기다 조앤이 다니는, 그리고 유니스도 나중에 합류하게 되는 '하느님의 강림을 믿는 사람들'이란 교회를 고려하면 이것은 더욱 확고해진다. 이 교회는 특이하게도 오로지 설교와 고백이라는 '말'로서만 이루어지며 아예 교리로 '기도서' 같은 책들을 읽지 못하도록 못박고 있다. 철저히 활자를 배제하는 교회인 것이다. 이렇게 렌들은 조앤과 교회의 존재로써 유니스의 문맹이 바로 '말-중심주의'의 상징임을 보다 분명하게 드러내는 것이다. 이쯤 이르면 왜 유니스가 그토록 뚜렷한 이유도 없이 그리도 활자에 대한 끝없는 두려움을 가지고 있는지도 이해가 되기 시작한다. 바로 데리다가 '그라마톨로지'에서 그러한 현실 역사에 폐해를 가져다 준 '말-중심주의'를 소거하기 위해서 '활자-중심주의'를 요청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유니스가 가지는 두려움은 바로 자신을 소거할 일종의 '적'에 대한 두려움이나 마찬가지였던 셈이다.

 

 

   의도했는지 모르겠지만 루스 렌들은 유니스를 곤경에 빠뜨리고 파국을 가져오는 모든 계기들을 '활자'로 구성한다. 그러니까 결정적으로 조지가 유니스를 비난하게 된 것이 바로 '서류'였다는 것, 유니스가 문맹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알게되는 멜린다가 그것을 알게 된 것이 잡지의 '심리테스트'라는 것. 또한 유니스가 결정적으로 경찰에 체포되게 만들었던 살해 현장이 생생하게 녹음된 '테이프레코더'(행여 여기에서 녹음된 것은 '소리'이지 않느냐고 반문할 것 같아 미리 알려두지만 활자가 소리와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똑같이 재현가능함이다. 그런 의미에서 녹음 역시 일종의 '활자'인 것이다.)라는 것 그리고 그 녹음테잎의 존재를 알리게 된 것 역시 재클린의 메모라는 것 등등에서 말이다. 렌들이 커버데일 일가를 유난한 책벌레들로 설정한 것도 어쩌면 이러한 '활자-중심주의'의 역습을 찍고 싶어서 그랬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렇게 되면 가장 활자에 집착하는 자일스의 존재가 정말 의미심장해 지는데 장정일은 자일스를 '문해'의 극단으로 보았지만 내 경우에는 '활자-중심주의'의 극단을 상징한다. 렌들은 의미심장하게도 유니스가 자일스를 처음 만날 때 유니스가 '그의 얼굴을 거의 보지 못했다.'라고 쓴다. 유니스에게 있어 그는 거의 부재하거나 침묵의 존재이다. 또한 살해할 때도 자일스의 목소리만 녹음에서 들리지 않는다. 이건 왜 이럴까? 대답은 역시 하나뿐이다. 자일스가 '활자-중심주의'의 가장 극단적 상징이기 때문이다. 즉 유니스에게서 가장 멀어진 존재이기에 그녀는 볼 수 없는 것이며 유니스를 끝내 파멸시킬 녹음 자체가 하나의 전체적인 '활자'이기에 자일스는 별도의 목소리를 낼 필요가 없는 것이다. 거기 녹음된 모든 정황이 바로 자일스의 글쓰기와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이는 유니스에게 활자의 두려움을 가장 처음 심어주었던 계기를 생각하면 더욱 확고해진다. 그건 바로 자일스가 달마다 종이에 써서 붙여두던 '이달의 격언'이었다. 또한 이 '이 달의 격언'은 유니스를 둘러싼 커버데일의 일가가 '활자-중심주의'의 세계임을 분명히 드러내는 상징이기도 하다. 그렇게 렌들은 유니스와 자일스의 정교한 대립을 통해 유니스로 상징되는 '말-중심주의'와 자일스로 상징되는 '활자-중심주의'의 대립을 가져온다. 데리다가 '그라마톨로지'에서 했던 그대로...

 

 

  그런데 데리다는 왜 그것의 교정으로써 '활자-중심주의'를 가져오는 것일까? 단순하게 말해 '활자-중심주의'는 자아의 동일성을 허물고 타자성에게로 개방시키기 때문이다. 활자 자체는 외부에 씌여진 기록이며 어떤 것의 흔적이다. 그것은 나 아닌 다른 존재를 늘 추정케 하며 또한 현재의 것이 아니라 과거의 것이다. 때문에 그것은 당당히 진리를 주장할 수 없고 언제나 비판가능한 하나의 담론으로만 존재한다. 그렇게 '씌여진 활자'는 나 아닌 타자를 대면하게 한다. 활자 세계의 커버데일 일가가 유니스와는 다르게 내내 유니스에게 말을 거는 것도 그 때문이다. 단적으로 렌들은 다음과 같은 말들로 이것을 강조한다.

 

  문맹은 일종의 시각장애이다.(P.38)

 

 

 그렇게 유니스 그녀는 타인을 전혀 보지 못한다.

 

  글에 의해 통제되거나 억압되지 않는 본능으로 (P.40)

 

 

  그녀는 전혀 타인에 대한 윤리적 태도를 고려하지 않는다.

 

  물론 렌들은 이러한 커버데일의 유니스에 대한 관심을 부르조아 계급의 위선적 태도에 불과하다고 비아냥거리고 있지만 내 관점은 어디까지나 '말 중심주의' 대 '활자 중심주의'의 대립에 기초함으로 한계가 분명하긴 하지만 이런 식으로 얘기함을 어느정도 양해해주길 부탁드리고 싶다. 이는 또한 유니스에게 가장 인간적으로 대하는 멜린다가 영문학 전공(문학은 타인의 삶을 가장 많이 다루는 활자의 장르가 아닌가)이라는 점에서도 드러난다. 이렇게 렌들은 데리다가 언어가 아니라 활자에 더 우위를 둠으로써 타자에 대해 우리의 눈을 돌리려 했던 것을 그대로 형상화한다. 어쩌면 렌들은 그래서 커버데일 일가는 하필 '돈 지오바니'의 음악을 텔레비젼으로 보고 있을 때 살해당하는 것으로 그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여기서 그 시점이 중요한데 멜린다를 포함하여 커버데일 일가 모두가 유니스와 완전 결별했을 때, 다시말하면 그 때까지 유니스가 안경을 통해 활자 세계에 속한 사람임을 스스로 위장했듯이 커버데일 일가 또한 위선적인 이타적 태도로 그들의 자기애를 위장했던 것이 최종적으로 끝장났을 때 그들 모두가 처형되는 것은 정말 의미심장하다. 렌들은 그 시점의 폭발을 은밀하게 차근차근 준비하는데 그 처음은 자일스의 변화이다. 즉 절대적인 부재와 침묵 속을 떠돌던 그가 점차 사람들과 어울리게 되고 이윽고 종교에 귀의까지 하도록 변하는 것이다. 이것은 커버데일 일가가 유니스로 인해 서서히 활자의 세계에서 빠져나와 언어의 세계로 들어서고 있다는 것의 단적인 상징이 된다. 그렇게 커버데일 일가의 언어 세계로의 점차적 나아감이 끝내 저택 공간 전체를 지배하는 '돈 지오바니'의 오페라로 완성되는 것이다.(또한 그들은 유니스의 상징이기도 한 텔레비젼을 통해 그것을 보고 있음도 상기하라.) 그리고 그렇게 유니스의 세계가 완성되었을 때 그 모든 소리를 제압하는 그래서 죽음의 소리이며 유니스가 이해하고 좋아하는 유일한 소리이기도 한 총소리로 대체되고 활자 세계의 인물들은 모조리 죽음을 당하는 것은 렌들에게선 당연한 수순인 것이다. 렌들은 커버데일 일가의 언어 세계로의 들어섬을 이기심의 확장과 경로를 같이하게 만들어 오히려 활자 세계로의 머무름이 타자에 대한 관심의 유지임을 강조해 보여주려는 것이니까 말이다.

 

 

 

   3.  보다 깊은 그녀의 속내는? ...

 

 

  이러한 렌들의 주제는 그러나 전작 '내 눈에는 악마가'와 비교하면 동전의 양면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전작에서는 오히려 타인에 대한 지나친 관심이 비극을 가져왔기 때문이다. 이러한 차이는 어찌된 연유일까? 뭐, 양 극단은 지양하고 자기애와 타인의 대한 관심을 적절히 조절하자 정도로 편하게 말할수도 있겠지만 렌들이 그런 뻔한 얘기를 하는 것 같지는 않다. 그래서 어쩌면 전작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작품을 써서 렌들 스스로 데리다적 결론에 이르려 했던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보게도 된다. 데리다가 활자에 우위를 두고 '차연(혹은 '차이'라고 부르자는 학자들도 있다.)'를 가져오는 것은 근원적으로는 오로지 하나의 해답만, 근거만, 결론만 가능하다는 전통적 서구 형이상학 대대로 내려온 '아르케'의 집착을 버리게 만들기 위해서이다. 그렇게 데리다는 그 어떤 것도 진리를 주장할 수 없는 하나의 잠정적 담론이 되길 원하며 결론을 내릴 수 없는 과정 자체가 되길 원한다. 그래야 수많은 독자적인 해석들이 왁자지껄 제 목소리로 떠들면서도 한편으론 남들의 얘기에 귀도 기울여가면서 서로 대화할 수 있으니까. 바로 이 '활자잔혹극'에서 장정일과 끌로드 샤브롤 그리고 내가 그랬듯이 말이다. 바로 그래서 렌들 역시 이렇게 전작과 완전히 상반된 주제에다 또한 내용상 다양한 해석의 가능함을 통하여 독자들에게 하나의 해답만을 가지려는 생각을 포기하게 만드려는 것은 아닐까 싶어진다. 그러니까 어딘가 있을 또다른 무언가를 향해 늘 열려진 태도를 유지하는 것. 어쩌면 이것이야 말로 렌들이 궁극적으로 우리들에게 주려고 했던 것이 아닐까? 그러고 보면 루스 렌들의 '내 눈에는 악마가'도 '활자잔혹극'도 그  모두 느닷없는 폭발의 순간을 간직하고 있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아서의 죽음도 유니스의 살해도 아무런 전조도 없이 갑작스레 찾아왔다. 마치 삶이 모조리 예측불가능성으로 가득차 있다고 암시하듯이... 렌들이 권유하는 부단한 재조정 재설정을 위한 열려진 태도는 정말 그 때문인지도 모른다. 데리다는 텍스트를 정의하기를 '차연이 직조해가는 시공간적 차이의 연쇄적 그물망'이라 했다. 이 말은 그대로 삶에게도 통용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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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 2012-01-25 16: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 제목에다 표지에, 리뷰까지 다 멋있군요.
하...하지만 여전히 저의 달리는 지식으로는 전부 이해하기가 어렵군요 ㅋㅋ
이거 안되겠습니다. 다음 기에는 직접 소설을 신청해서 읽어보는 수밖에요..후후

ICE-9 2012-01-25 20:30   좋아요 0 | URL
루스 렌들의 활자잔혹극은 정말 추천할만한 걸작인데 어쩐지 저의 리뷰가 거리를 좁히긴 커녕 오히려 넓힌 것만 같아서 심히 걱정스럽네요 ㅠ ㅠ 안 그래도 소통을 위한 글쓰기가 어째 점점 자기 만족을 추구하고 있지는 않은가 염려되고 있는 시점이었는데... 올해엔 보다 쉽고 보다 짧게를 모토로 해야겠어요. 성향상 얼마나 지켜질 지는 미지수지만 하하... 다음 소설 신간평가단에 소이진님도 꼭 함께 했으면 좋겠네요. 그런데 제가 또 연임할 수 있을지 그게 걱정이에요. 하하...

이진 2012-01-25 23:24   좋아요 0 | URL
아니어요. 안되요 ㅠㅠ 제겐 어려운 매력으로 읽는것이 헤르메스님의 리뷰인데 쉽게 쓰신다니 아니되어요. 겨우 이 미천한 저를위해 헤르메스님의 모토를 버리신다니 안됩니다. 헤르메스님의 이런 글을 좋아하시는 분이 얼마나 많으실텐데요! 아마 헤르메스님이라면 되실겁니다... 저라면 어떨지 모르지만 하하...
 
주홍색 연구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37
아리스가와 아리스 지음, 김선영 옮김 / 비채 / 2011년 12월
평점 :
품절


 

 

    - PRELUDE -

 

 

왜?

무엇 때문에? 무엇에 의해서? 어디로? 어느곳에? 어떻게?

아직 살려고 하는 것인가, 그건 어리석은 짓이 아닌가? !

아, 나의 친구여, 나에게 노을이 그리 묻고 있구나.

나의 슬픔을 용서하라!

노을이 되었다. 노을이 된 것을 용서하라!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 니체,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중에서 -

 

 

 

 

   1989년 데뷔해서 여전히 순수 미스터리만을 고집하고 있는 아리스가와 아리스. 이번에 나온 '주홍색 연구'는 작가 아리스 시리즈 중 여덟번째 소설이다. 아마도 당신이 미스터리의 팬이라면 이 제목이 참으로 낯익을 것이다. 바로 코난 도일의 셜록 홈즈가 데뷔했던 그 역사적 소설의 제목이니까 말이다. 그렇다고 이 소설을 그것에 대한 패러디이거나 혹은 오마쥬라고 섣불리 판단하거나 단정내려서는 안된다. 소설을 읽고나면 분명히 느끼게 된다. 왜 아리스가와 아리스가 하필 명탐정의 대명사인 홈즈의 데뷔작 제목을 가져왔는지. 그 이유는 작품을 넘어서있다. 그러니까 그건 미스터리 작가로서의 아리스가와 아리스 자체에까지 연결되는 문제라는 말이다. 그가 왜 미스터리를 썼고 꾸준하게 순수 미스터리 소설만을 집착하고 있으며 그리고 그것을 통해 나아가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관해 초심으로 돌아가 말하기. 그게 바로 '주홍색 연구'라는 제목을 붙인 진짜 이유다. 그러니까 이 소설은 미스터리 작가로서의 자신의 정체성을 그리고 그 지향을 다시금 생각해보는 자기반영적 작품이다. 

 

 

 

 

 

   - 학생 아리스 시리즈와 작가 아리스 시리즈 -

 

 

   아리스가와 아리스가 두 개의 시리즈를 번갈아가며 집필한다는 것은 이제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그에겐 에가미가 명탐정으로 나오는 학생 아리스 시리즈와 히무라가 탐정의 역할을 맡는 작가 아리스 시리즈가 있다. 그 모든 시리즈에서 작가의 분신인 아리스는 탐정의 조력자이자 수사의 관찰자 와트슨의 역할을 맡으며 학생 아리스가 히무라 시리즈를 집필하며 작가 아리스가 에가미 시리즈를 집필하는 것으로 되어있다. 그렇게 두 시리즈는 '뫼비우스의 띠' 처럼 연결되어 있다.

 

 

   '월광게임'으로 시작되는 학생 아리스 시리즈는 지금까지 네 작품이 나와있고 '46번째 밀실'로 부터 시작된 작가 아리스 시리즈는 현재까지 18편이 나와있다. 학생 아리스 시리즈가 저렇게 적게 나온 것은 애초부터 총 5부작으로 계획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학생 아리스는 이제 겨우 한 편만이 남은 셈이다. 학생 아리스 시리즈와 작가 아리스 시리즈는 같은 작가가 썼는데도 스타일이 참 다르다. 일단 학생 아리스 시리즈는 첫 작품 부터 이야기가 계속 이어진다. 등장인물 역시 에가미 아리스 콤비 뿐만 아니라 재등장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작가 아리스 시리즈는 그렇지 않다. 하나 하나가 단막극 처럼 그 자체로 완결된 에피소드로 이루어져 있다. 또한 학생 아리스 시리즈는 사람들이 많이 죽는다. 화산 분출로 인해 고립된 캠프라는 전형적인 '클로즈드 서클'이었던 '월광게임' 때 부터 사람들이 참 많이 죽어 나갔다. 하지만 작가 아리스 시리즈는 그렇게 많이 죽지 않는다. 기껏해야 한 두명 정도다. 그러니까 학생 아리스 시리즈가 주로 연쇄살인을 다룬다면 작가 아리스 시리즈는 '사건' 자체만 다룬다. 내 생각에 두 시리즈 간의 보다 본질적인 차이는 여기서 드러나는 것 같다. 그러니까 연쇄살인을 묘사하는 학생 아리스 시리즈는 그 때문에 트릭 풀이에 더하여 서스펜스까지 신경을 써야 한다. 하지만 순수하게 놓여진 사건 그 자체에만 집중하는 작가 아리스 시리즈는 그럴 필요가 없다. 그저 지금 사건을 수수께끼로 만들고 있는 트릭에만 집중하면 된다. 이 때문에 학생 아리스 시리즈는 분위기 주조에도 힘이 쏠리면서 논리 추구적인 면이 약해지는 반면 작가 아리스 시리즈는 트릭 하나에만 집중하기 때문에 논리 추구가 아주 정밀하다. 아마도 이 때문에 작가 아리스 시리즈를 학생 아리스가 학생 아리스 시리즈를 작가 아리스가 쓰는 것으로 설정된 게 아닌가 싶다. 아무래도 서스펜스를 계속 작동시키는 분위기 연출에 있어서는 문학적 공력이 필요할 테니까 말이다.(이건 현재 국내에 발간된 작품만 읽고 얘기하는 것이기 때문에 다른 일본 원작에 의해 얼마든지 사실과 다를 수 있음을 밝혀둔다.)

 

 

  아무튼 사족같은 이야기이지만 학생 아리스 시리즈와 작가 아리스 시리즈는 이런 차이들이 있다.

그런데 이 차이를 허무는 작품이 바로 지금 만난 '주홍색 연구'였다. 순수하게 논리로써 사건 해결에만 집착하던 작가 아리스 시리즈가 '주홍색 연구'에 와서 문득 '문학적 정조(혹은 분위기)'를 담아내고 있었던 것이다. 더구나 학생 아리스 시리즈에서도 잘 보지 못했던 그런 문학적 분위기를 말이다. 바로 이 것이 이 책을 접했을 때 나로 하여금 '어, 지금까지의 아리스 작품과는 느낌이 다른 걸.' 하고 느끼게 만들었다. 낯설음은 언제나 그 정체를 보다 더 집요하게 밝히려는 동기가 되게 마련이다. 늘 익숙했던 설정이라도 혹시 가려진 무언가가 여기에 있지 않을까 의심하게도 한다. 그렇게 읽었다. 해서 생각하게 되었다. 이 소설은 어쩌면 아리스 자신의 어떤 결의 같은 작품인지도 모른다고. 그가 내내 추구해온 미스터리에 대한 스스로의 입장 같은 것을 반영한 작품인지도 모른다고. 왜 이 소설엔 하필 중3 때 고아가 되어 오로지 책을 통해 그 외로움을 이겨나갔던 아케미라는 여학생이 나오는 것일까?  중 3이라는 시기는 아리스 자신에게 있어서도 중요한 시기가 아니었던가? 그 때 그는 자신이 정말 좋아하는 미스터리의 장편을 처음으로 탈고하지 않았던가?

 

 

  아케미의 등장을 나는 중 3 시절 아리스 자신의 반영이라 여겼다. 생애 최초의 장편을 쓰던 그 시절의 반영이라고. 그래서 이 소설의 제목이 '주홍색 연구'인 이유도 바로 그 시절의 자신을 나타내려 한 것이 아니겠느냐고. 더 나아가 오로지 미스터리만 추구하여 이제는 아야츠지 유키토와 더불어 본격 미스터리의 대표작가까지 된 그가 첫 장편을 쓰던 중 3 그 시절의 초심으로 돌아가 자신이 평생 천착해온 '미스터리'라는 것이 무엇인지 돌이켜본다는 의미에서가 아니겠느냐고.

 

 

 

    -  개와 늑대의 시간으로써의 노을  -

 

 

   '주홍색 연구'에서 주홍색이란 '노을'을 말한다. 그러니까 '노을'이 메인 테마인 셈이다.

하지만 사건과 관계된 것이 아니다. 노을은 이 소설에서 추구하는 주제의 상징이며 그 분위기를 집약하는 단어이다. 한 마디로 문학적 은유이며 이 때문에 앞서 '이 작품에서 처음으로 문학적 정조를 담고 있다'고 했던 것이다. 아예 처음부터 이 소설은 그러한 노을의 의미 혹은 역할을 분명히 한다. 프롤로그와도 같은 부분에서 작가 아리스의 목소리를 빌어 이런 대사를 날리는 것이다.

 

   "오늘 오사카의 노을, 마치 세상의 종말 같아요." (P. 10)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바로 뒤이어 아케미와 정체불명의 범인을 등장시켜 그들 각자에게 노을이 또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보여주기까지 한다. 화재에 대한 고통스런 기억이 있는 아케미에게 노을은 '공포' 자체다.(소설엔 그녀에게, 정말 특이하지만, '노을 공포증'이 있다고까지 말한다.)  반면 범인에게는 그동안 망설였던 범행을 결의하도록 만든다. 그렇게 소설의 가장 주요한 등장인물들(한쪽은 관찰자, 다른 한쪽은 모든 것의 원인, 그리고 또 다른 한쪽은 범죄자)이 '노을'의 삼각형을 이룬다(파멸을 보는 자, 파멸에의 예감 그리고 파멸을 가져오는 자). 한 마디로 이 프롤로그는 이 소설이 간직한 우주의 중심이 바로 '노을'에 있다는 걸 보여준다.

 

 

    그런데, 왜 '노을의 시간'인가?

 

여기에 대한 대답은 간단하다. '노을의 시간'이 그야말로 '미스터리적 시간'에 어울리기 때문이다.

노을의 시간이 가지고 있는 의미를 가장 잘 드러내는 말이 있다고 한다면 그건 '개와 늑대의 시간'이라는 말일 것이다. 해질녘 어슴푸레한 미명 아래에서는 사물의 분간이 어렵다. 모든 선명한 것들이 서서히 어두워지고 그렇게 나를 둘러싼 모든 세계가 익명과 비밀의 존재가 되어간다. 그렇게 멀리서 내게로 다가오는 존재가 나를 따르는 개인지 아니면 나를 물어뜯을 늑대인지 분간하기 지극히 어려운 시간. 그래서 모든 것을 그저 불안과 의혹의 시선으로 밖에는 볼 수 없는 시간. 그것이 바로 '노을의 시간'인 것이다. 또한 이 시간의 본질인 불안과 의혹은 그대로 미스터리의 본질이기도 하므로 '노을의 시간'은 미스터리적 시간이기도 한 것이다.

 

   따라서 아리스가와 아리스가 이 '노을의 시간'을 작품의 주된 테마로 삼은 것은 무엇보다 적절하다 하겠으며 그가 유독 이 시간을 고집하는 것은 앞서 말했던 대로 초심으로 돌아가 지금까지 자신이 천착해온 '미스터리' 자체를 되짚으려 한다는 것 역시 여기에서 드러난다고 하겠다.

 

   왜 이렇게 생각하냐고? 그것은 중요한 등장인물이기도 한 아케미 때문이다.

 

 

 

   -  아케미,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분신  -

 

 

   아케미는 이 소설의 중심이다. 그녀는 모든 것의 원인이 되는, 2년전 해변에서 일어난 오노 유우코 사건에서 중요한 인물이었고 또 탐정의 역할을 하는 히무라에게 사건을 의뢰하는 여성이기도 하다. 그리고 또한 히무라 - 아리스 콤비와 가장 많은 말을 나누는 사람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들의 대화는 어쩐지 아케미가 가지고 있는 아픔을 덜어주려는 일종의 상담과도 같다. 그래서 어쩐지 '주홍색 연구' 자체가 노을 공포증을 가지고 있는 아케미에게 그 공포증을 지워주는 과정으로도 느껴진다. 스포일러상 말하지 못하는 부분까지 감안해 본다면 아케미는 노을과 함께 단연 이 '주홍색 연구'라는 우주의 중심이다.

   그런데, 그 아케미가 내게는 그저 소설 속 인물이 아니라 실제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분신으로 여겨진다. 왜냐하면 아케미가 들려주는 그 자신 삶의 모습이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실제 삶의 모습과 많이 닮아있기 때문이다.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실제 삶을 들여다보면 그에게 있어 무엇보다 '중3' 시절이 중요함을 알 수 있다. 그는 열정적으로 미스터리 소설에 빠져들었으며 그 결과로 지금과 같은 작가로 있게 된 그 첫 발자국이라 할 수 있는 장편소설까지 썼었다. 그건 이 소설의 아케미 역시 마찬가지다. 무엇보다 '노을 공포증'이란 트라우마를 안기게 했던 화재 사건이 중3 때 일어난다. 그녀는 거기서 이모부가 화재에 의해 돌아가시는 것을 목격했고 그로 인해 노을 공포증을 가지고 말았다. 한 마디로 삶이 전혀 다른 것으로 변화되는 결정적 시간의 도래가 작가 아리스와 아케미 모두에게 찾아온 것이다. 그렇게 친숙했던 '개'의 세계가 이제는 전혀 낯설고 날 위협하는 '늑대'의 시간으로 변하는 '노을의 시간'이 둘 모두에게 도래한 것이다. 이 도래의 비슷한 시점이 아케미를 작가 아리스의 분신으로 여기게 된 첫번째 이유였다.

 

 

  뱀다리 (2). 아케미를 아리스의 여성화된 분신으로 보는 것은 그리 무리는 아니다. 이미 그 스스로 작품에서 이미 이름 때문에 종종 여자로 오해된다고 쓰기도 했고 또한 애니메이션 명탐정 코난에서도 아리스가와 아리스를 여성화시켜 묘사한 바가 있다.

                            명탐정 코난 6기 '절규의 수술실' 편에 깜짝 등장한 '아리스가와 아리스'

 

   이렇게 제작진은 작품 속에서 그의 이름이 늘 여자 이름으로 오인되곤 하는 것에 빗대어 아예 아리스가와 아리스를 미녀로 만들어버리는 재치를 발휘했다.(전공 역시도 영문과^ ^) 아닌게 아니라 '아리스'란 이름 자체도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의 그 '엘리스'를 따온 것이다.

 

 

 

  그런데 그 시기, 작가 아리스는 왜 그토록 미스터리 소설에 빠져들었던 것일까?  바로 이것이 아케미를 분신으로 여기게 하는 두번째 이유가 된다. 그리고 아케미가 가지는 노을의 공포증이 정말은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깨닫게 한다. 소설에서 아케미는 그 '노을의 시간' 중3을 어떻게 보냈는지에 대해 이렇게 고백한다.

 

 확고의 목적이 있어서 그런 건 아니라 말하기 어렵지만, 에리피 프롬의 책에 끌린 게 동기였어요. 중학교 3학년 겨울에 '자유로부터의 도피'나 '악에 대하여'라는 책을 집어삼킬 듯이 읽었지요. 고압적으로만 느껴졌던 사회에 저도 이런 식으로 반격해보고 싶다고 생각했어요.(P.206) (...) 고독과 불안에서 헤어나지 못할 때도 책만은 저와 차분히 대화를 나누어 준다는 사실을 알고 얼마나 구원받았는지 몰라요(P. 207)

 

 

   여기서 우리가 밑줄 그어야 하는 부분은 '사회에 대한 반격' 부분이다. 상상해 본다. 작가 아리스의 중3 시절을. 한창 사춘기 때의 그를. 그 시기는 누구나 그렇듯이 사회에서 행해지는 정형화된 삶의 길들임에 멀미를 느끼고 저항으로 충만해 있을 시기다. 흔히들 따라붙는 '질풍과 노도의 시기' 그대로 부모라는 울타리 아래서 그 때까지의 안락한 삶이 이제 세상을 스스로 책임져나가야 하는 그 시기에 이르러 전혀 낯설고 불안한 것으로 변해버린 가운데 오는 스스로 그것을 해소하고자 하는 몸부림이다. 작가 아리스도 그 시기 그렇게 몸부림을 쳤을 것이며 아마 그 몸부림 속에서 사회에 대해 반격하고 싶다는 생각 역시 들지 않았을까? 바로 그대로 아케미의 저 고백은 그 당시 아리스 자신의 고백이지 않을까? 아케미가 읽었던 저 인문서적들은 그 시기 한창 빠졌던 작가 아리스의 미스터리 소설들을 그냥 살짝 바꿔놓은 것에 불과하고 그는 그렇게 보란듯이 작가로 성공하여 사회에 반격할 것을 꿈꾸며 늘 귀감으로 삼는 엘러리 퀸과 반 다인이 혹은 딕슨 카의 소설들을 읽으면서 첫 장편소설을 써내려 간 것은 아닐까? 바로 이러한 유사점으로 인해 나는 아케미가 그야말로 아리스 자신의 분신이라 여기며 그 아케미가 하필이면 가장 처음 작가로서 첫 발을 내딛었다고 할 수 있는 '중3' 시절인 것을 감안해 그가 '초심'으로 돌아가 미스터리 자체를 다시금 음미하려 한다는 말을 했던 것이다.

 

 

 

   -  그래서 아리스, 미스터리라는 게 도대체 뭐야?  -

 

 

   아케미를 아리스의 '중3' 시절의 어린 아리스의 분신이라고 생각한다면 이 아케미가 '히무라 - 아리스 콤비'와 그토록 많은 말들을 나눈다는 게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더구나 그 상담과도 같은 대화에서 작가 아리스가 그 자신 생각하는 '추리소설의 본질' 이야기가 나오는 것은 더욱 진중하게 다가오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추리소설이 뭐냐는 아케미의 물음(그것은 또한 과거의 이제 첫발을 딛는 그 자신이 현재의 작가에게 묻는 것과도 같을 것이다.)에 작가 아리스는 이렇게 대답한다. 꽤 길지만 음미할만한 대목이 많으므로 모두 다 인용해 본다.

 

 추리소설이야말로 최대의 중죄이기 때문에 그것을 중심에 둠으로써 진상을 해명하고 싶다는 독자의 절실한 욕구를 환기할 수 있다고 소박하게 설명한 작가가 있지만 독자들이 소설 속에 나오는 살인의 진상이야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하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겠지요. 제 생각에... 살인사건이 테마라면 시체가 등장하잖아요. 시체란 '당신을 살해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하고 물어도 그 질문에 대답할 능력을 잃은 존재입니다.(...) 시체, 죽은 자는 우리가 아무리 질문을 던져도 절대로 대답하는 일이 없습니다. 그 불가능성이 열쇠같다는 생각도 들어요.(...) 추리소설의 불가능성이란 바꾸어 말하면 아무리 물어도 대답하지 않는 자에게 이야기를 끌어내는 게 아닐까 싶어요. 물어도 대답하지 않을거라 확신하는 상대에게, 대답해주지 않을 줄 확신하면서도 거듭 묻는다는 건 안타까운 행위라고 생각하지 않나요? (...) 이 보다 더 인간적인 행위가 있을까요?  예를 들면 신을 상대로 인간은 대답해주지 않을 줄 알면서도 필사적으로 질문을 계속합니다. (...) 잃어버린 시간을 향해 묻습니다. (...) 죽은자에게도 묻습니다. 나를 정말 사랑했나요? 나를 용서해주겠어요. 울며불며 매달려도 대답은 없습니다. 상대는 결코 대답하지 않습니다. 그래도 또다시 묻고 말아요. 추리소설은 그런 인간의 마음을 보여주는지도 모릅니다.(P.210 ~ 211)

 

   

    그는 말한다. '추리소설이란 대답을 들을 수 없는 존재에게 대답을 요구하는 것이라고. 듣지 못할 해답을 그렇게 계속 추구하는 과정일 뿐이라고...' 말이다. 이 말은 또한 다음과 같은 말로도 표현된다.

 

 사람은 어째서 그렇게까지 해가면서 기도를 바치는 것일까?

 기도, 그것은 탐정이 진상을 갈구하는 정열과 비슷하지 않은가? (P.245)

 

    

     이렇게 수십년간 미스터리 하나만을 천착해온 작가는 '노을의 시간'이 도래함과 더불어 거기에 대한 저항과 그 스스로 공포와 불안을 해소하려는 심정에서 미스터리에 빠져들고 작가로서 첫 발을 내딛게까지 되는 과거의 자신에게, '여기까지 이르고 보니 추리소설은 이런 것 같구나.'하고 넌지시 충고를 보내는 것이다.(이것은 또한 초심으로 돌아가 미스터리를 다시 한 번 되짚어 보는 스스로에게 보내는 충고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이런 것이다.

 

     도래한 '노을의 시간'. 모든 것이 의혹과 불안으로 가득찬 미지의 것으로 변해버린 그 시간 속에서 과거의 아리스 자신이 그토록 추리소설(미스터리)을 사랑했던 것은 혹시나 그 모든 것을 낱낱이 밝혀 줄 하나의 즉각적인 해답을 얻을 수 있으리란 기대에서 그랬던 것은 아닌지 어쩌면 지금까지도 여전히 추리소설이라는 것을 그처럼 '정오의 시간'을 가져다줄 수 있는 것으로 여기고 있는 것은 아닌지에 대해 추리소설이 그러한 '정오의 시간'을 가져다 줄 수 없음을 인정하는 담담한 고백인 것이다. 삶이라는 것 자체가 늘 '노을의 시간'이고 작가 역시 여전히 그 시간 속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존재이기에 그렇다. 이것은 아리스가 왜 각각의 시리즈 모두에서 '콤비'를 등장시키는가와도 관련이 있다. 이것은 단순히 탐정과 관찰자의 역할 관계가 아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작가 아리스 자신의 일종의 자아 분리이다. 감성과 지성의 분리. 사회적 관계를 맺는 사교와 홀로 내면에 침잠하여 사유하는 추리의 분리. 그렇게 아리스는 불완전한 그들을 하나로 묶어 활동하게 함으로써 작가 자신 역시 진실을 온전하게 체득할 수 없음을 암시한다. 또한 삶 자체가 '노을의 시간'의 연속이라는 것은 이번 소설에서의 살인 무대가 서로 반대되도록 설정되었다는데서 암시된다. 여기에는 두 개의 살인 무대가 존재하는데 하나는 요헤이가 살해당한 11월의 동터오는 새벽의 유령맨션이고 다른 하나는 오노 유우코가 살해당한 2년전 6월의 5시, 노을이 지기 직전의 해변인 것이다. 그렇게 이 무대가 밤과 낮, 폐쇄된 곳과 열려진 곳, 남자와 여자 모든 면에서 반대를 이루도록 설정되어 있다. 세계 자체가 서로가 다른 역할을 맡는 '아리스 - 히무라' 콤비 처럼 이루어져 있는 것이다. 이러한 설정과 콤비를 통해 아리스가 드려내려 하는 것은 역시나 단 하나다. 추리소설이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기도하는 심정으로 애타게 진실을 찾아 했던 질문을 되묻고 하는 것 밖에는 없다는 것.

 

   비록 정오의 시간이 영원히 도래하지 않을지라도 드러나지 않는 태양의 길을 찾는 무토베 처럼 진실에 대한 추구를 포기하지 않는 것. 바로 그 과정만이 추리소설의 의미이며 이로써 수십년 넘게 오로지 추리소설가로 지내온 작가 아리스 자신 역시 결의하는 것이다.

   이 진실에 대한 기도를 영원히 멈추지 않겠다고...

 

  왜?

  바로 거기에 한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노을의 시간 속에서 여전히 공포와 불안에 떨고 있는 존재가 있기 때문이다.

  돌아오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대답을 계속할 수 밖에 없는 것은 그 때문이다.

  비록 정오의 시간을 가져다 줄 환한 햇살은 되지 못하겠지만

  그저 작은 촛불이라도 되어서 그 미명 속에서 떨고 있는 작은 영혼에게 스스로 길을 찾을 수

  있게 도와줄 수만 있다면 추리소설을 통한 기도는 계속되어야 한다고...

  그렇게 그것은 사명과 같다고...

 

  때문에 아리스는 이 작품에서 이례적이라 할 만큼 아케미와 많은 대화를 나누는 것이다. 추리소설의 본질이 단순히 해결이라는 빛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아픔을 당한 사람의 곁에 서서 한 개의 촛불을 드는, 그 아픔을 생각하고 위로하는 기도이기에... 작가 아리스는 이것을 진심으로 믿고 있다. 그리고 여전히 자신이 믿는 추리소설의 사명을 끝까지 다하려고 한다. 아케미와 같은 그들 모두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기 위해서...  

 

  있지요, 아케미 양. 화성으로 가는 로켓을 탈 수 있게 되면 다 함께 떠나지 않겠어요? 그곳에서는 노을이 파랗다고 해요.(P.374)

 

 

 

  이래서 나는 작가 아리스를 사랑할 수 밖에 없다. 세상의 상식은 추리소설(미스터리)이 순수하게 쾌감 위에서만 움직이는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난 그것을 비웃는다. 그건 정말 모르고 하는 소리라고. 의심나면 '주홍색 연구'를 읽어보라. 추리소설도 문학의 어엿한 하나의 갈래이며 추리소설이든 문학이든 그 모든 것의 바탕에 있는 것이 바로 자신이든 타인이든 그것을 향한 '위로'라는 건 변하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될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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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 2012-01-16 17: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리스가와 아리스다 ㅠㅠㅠ
저는 항상 이작가의 책은 고민하다, 고민하다 안 산답니다.
정말 작가도 좋아보이고 책도 재밌어 보이는데!
헤르메스님의 리뷰를 계기로 한 번 시작해봐야겠어요!

ICE-9 2012-01-17 02:28   좋아요 0 | URL
소이진님 빌려서 보는 것도 한 방법이에요^ ^
폐쇠된 구역에서 한정된 용의자들 가운데 범인찾기를 좋아하신다면 '외딴섬 퍼즐'을 순수 논리적 추리면을 좋아하신다면 작가 아리스의 '46번째 밀실'을 추천드리고 싶네요. 아리스의 트릭들이 실망스러울 수 있지만 공정하게 정직하게 하나의 논리로 치밀하게 만들어 가는 걸 지켜보는 게 전 아리스의 진정한 매력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답니다. 언젠가 소이진님의 아리스 얘기 기다리고 있을게요^ ^

이진 2012-01-17 02:42   좋아요 0 | URL
어머, 헤르메스님! 이 시간까지 주무시지 않고 뭐하시는 거여요 ㅎㅎ
제가 말할 입장은 아니지만 말이지만요.
어서 우리 자도록 해요 ㅋㅋ
 
살인은 없었다 - 형사 외르겐센의 지식 수사 소설
리하르트 다비트 프레히트.게오르크 요나탄 프레히트 지음, 안성철 옮김 / 21세기북스 / 2011년 11월
평점 :
절판


 

 

  1985년 5월...

 

  덴마크의 수도 코펜하겐의 형사보 외르겐센은 수도 경찰의 지방 파견 프로그램(SASOWA)의 일환으로 외딴섬 릴레외로 5개월 동안 파견된다. 작고 평화로운 외딴섬에서 강력계 형사인 그가 무슨 할일이 있나 싶었지만 명령이니 어쩔 수 없다고 여기고는 생물학자인 여자친구의 부탁대로 그 섬에 사는 동식물들이나 조사하면서 조금은 여유를 가지고 편하게 보내자는 생각으로 그 섬에 오게된다.

  그런데 그 섬에 오자마자 예상과는 달리 심장마비로 죽었다는 라르센 노인의 장례식장 부터 인도된다.

 

  모든 것엔 동전의 양면이 존재한다. 목가적인 작은 섬에 와서 가장 먼저 겪는 일이 낡아 빠진 자동차로 공동묘지에 실려가는 것이라니. 그것도 아침도 먹기 전에...(P.19)

 

  아무리 평화로운 섬에 와서도 그동안 강력계 형사로서의 경험을 무시할 수 없었던 그는 '말테'라는 평생 그 섬에서 경찰로 살아온 이에게 부검을 했는지 물어보고 '릴레외에선 200년간 살인 사건이 한 번도 없었다.'라는 말과 함께 부검을 하지 않았다고 하자 독살일 수도 있는데 어떻게 부검도 없이 매장하냐며 반문한다. 여지껏 평화롭게 섬에서 잘 지내온 정착민인 그에게 일흔 세살 노인의 심장마비란 그 무엇보다 자연스런 죽음일 뿐인데 이제 갓 들어온 외지인이 이렇게 항의하니 그런 의문을 가진다는 것 자체가 그저 너무도 황망스러워서 그는 차마 뒷 말을 잊지 못한다.

 

  외르겐센 안스가르 형사는 온갖 성가신 것을 가져온다는 '북쪽의 사도'를 뜻하는 안스가르란 이름 그대로 200년 넘게 조용하고 평화롭기만한 섬 릴레외를 의혹과 조사를 가져오는 미스터리의 공간으로 만든다. 그리고 결국 외르겐센은 그 노인의 죽음에서 시작하여 릴레외 섬에 얽힌 나폴레옹 전쟁 당시 스웨덴, 노르웨이 그리고 덴마크의 통합 과정에 있어 알려지지 않았던 역사적 진실을 찾아낸다.

 

 

 

   리하르트 다비트 프레히트의 '살인은 없었다'는 무려 692페이지에 이른다. 미스터리 소설 치고는 정말 압도적인 분량이 아닐 수 없다. 보통 이런 경우라면 대부분 출판사들은 상, 하 양권으로 분권으로 내놓을 터인데 21세기북스는 고맙게도 단권으로 내놓았다. 덕분에 경제적 부담은 줄었지만 지하철에서나 혹은 가지고 다니며 읽을 때는 적잖이 불편했다. 이럴때는 좀 애매모호하다. 대부분의 독서 시간을 길바닥에서 할 수 밖에 없는 처지의 사람들을 위해서 편하게 휴대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하면 또 분권으로 인한 가중되는 경제적 부담이 신경쓰이고 고맙게도 단권을 해주면 이런 두께는 집에서 밖에는 읽을 수 없어 완독에 하염없이 시간이 걸리게 되고... 참 어느 것 하나 딱 이거다 하고 결정하기 어려운 사안이다. 외르겐센이 말했던 동전의 양면 그대로다.

 

  아무튼, '살인은 없었다'가 이렇게 많은 분량을 가지게 된 이유가 있다. 바로 프레히트가 외르겐센이 릴레외 섬에서 있어야 하는 5개월을 최대한 그대로 담아내려 하기 때문이다. 프레히트가 공을 들이는 건 이 소설을 미스터리로 알고 다가가려 했던 분들에겐 미안하지만 미스터리가 아니라 외르겐센이 섬에서 보내는 일상의 디테일한 복원이다. 그는 외르게센의 하루 일과중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필요한 것은 그 무엇이든 세세하게 담아내려 애쓴다. 그렇게 우리는 외르겐센의 수사과정에 관찰자로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일상에 동반자로 참여하게 된다. 따라서 미스터리만을 기대했던 분들이라면 이 동반의 여정은 여지없이 지루해질 수 있다. 하지만 미스터리에 대한 기대를 적당히 버리고 보면 어느새 외르겐센의 일상에 취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만큼 프레히트의 묘사가 좋다.

 

  그런데, 왜 그는 미스터리를 표방하면서도 이렇게 공들여 섬에서의 그의 일상을 복원하려는 것일까? 내 생각엔 이것이 이 책을 이해하기 위한 핵심 포인트 같다. 여기와 관련하여 무엇보다 눈길을 끄는 것은 이 책의 각 장마다 그가 붙인 소제목이다.  프레히트는 각 장의 소제목에 독특하게도 온갖 동물이나 곤충의 이름을 갖다 부텼다. 쇠돌고래, 장수하늘소, 고양이, 갈매기 등등...

 

 

   옆의 커버는 독일 원서의 것인데 보면 알겠지만 소제목에 나오는 것들을 하나의 도감 처럼 표현하고 있다. 표지란 것이 작품의 핵심적인 분위기나 주제 같은 것을 응축해 표현하는 것임을 상기해 본다면 소제목이 이렇게 도감을 보듯 동물과 곤충의 이름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은 뭔가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그럼, 이것과 외르겐센의 일상에 대한 충실한 복원은 어떻게 연결이 되는 것일까? 그건 마지막에 가서 밝혀지는 릴레외 섬에 간직된 스웨덴, 노르웨이 그리고 덴마트의 통합이라는 역사적 사실과 관련지어 생각해야 한다.(나는 여기서 소설의 마지막에 밝혀질 비밀을 말하고 말았는데 개인적으로 이것을 스포일러라고 여기진 않는다. 여기에 대해 뭐라 딱 떨어지게 설명할 수는 없으나 당신 역시 이 책을 읽게된다면 분명 나와 똑같은 생각을 할 것이라는 것은 확신한다.)

 

  프레히트가 나폴레옹 전쟁 당시에 있었던 세 나라의 통합 문제를 새삼 끌어들이는 이유는 분명하다. 그는 이 작품에서 유럽 통합의 문제를 끌어들이는 것이다. 외르겐센의 집념으로 밝혀지는 역사적 진실은 이른바 '베르나도테 작전'으로 당시 베르나도테는 노르웨이와 통합하여 나폴레옹에 맞서려 했던 스웨덴을 치기 위해 프랑스, 네델란드, 스페인 덴마크 연합군을 이끌고 덴마크에 주둔해 있었다. 그런데 이 베르나도테는 그 후에 바로 적국인 스웨덴의 국왕이 되는데 과연 어떻게 해서 나폴레옹의 명령을 듣던 프랑스 군의 사령관이었던 그가 대적하고 있는 스웨덴 국왕이 될 수 있었을까? 외르겐센은 바로 그 까닭을 릴레외에서 알게되는 것이다.

 

 굉장히 드라마틱해 보이는

이 사건은 역사적으로 실제

일어난 사건이다. 나폴레옹

처럼 일반 사병에서 시작했

던 베르나도트는  나폴레옹

처럼 스스로의 힘으로 사령

관의 자리에까지 오른 입지

전적인 인물이었다. 육군원

수가된 그는 출세과정이 여

러모로 나폴레옹와 유사하

여 자주 나폴레옹의 라이벌

로 여겨졌으나  덴마크에서

그를 배반하고 적국 스웨덴

의 황제가 됨으로써 공식적

으로 나폴레옹의 라이벌이

되고 말았다.

 

  그렇게 그는 배신자가 되

었지만 스웨덴으로서는 구

세주가 되었다.

그는 스웨덴의 국왕이 되자

마자 덴마크에서  나폴레옹

의   군대들을 몰아  내었고

노르웨이를 통합, 스웨덴연

방을 만들어 러시아와 프랑

스의 협공으로  부터   보다

안전해질 수 있도록 만들었

다.  베르나도트에  의해 해

방된 덴마크는   그 때도 여

전히 독립국이긴 했지만 바

로 코앞에 스칸디나비아 반

도의 대제국이 세워지고 있

는 마당에  그 독립을  문자

그대로 유지하기란  사실상

어려운 것이라는 건 불 보듯 뻔한 일. 결국 독립국이란 명목상일 뿐이고 연방의 사실상 지배를 받는 국가로 전락한다.

  외르겐센과 함께 그 진실을 찾아가는 은둔의 노학자 크리스텐센이 이렇게 안타까움을 슬회할 정도로...

 

   사실 우리 통합 국가의 마지막의 시작이었지. 현재는 북해지역에서 스웨덴이 대장 노릇을 하지. 그리고 우리는 거의 함께 뛰는 경기의 주자가 되지 못해. 그 때부터 우리 덴마크는 놀이의 대상이 되어 버렸어. 처음에는 베르나도테에 의해서 그랬고 그 다음은 비스마르크, 그리고 히틀러. 내가 짐작하기로 그 다음은 유럽연합일 것만 같아(P. 664)

 

  한 때는 스칸디나비아 반도 전체를 지배했던 대국이었으나 이제는 힘없는 작은 나라로 전락해 버린 덴마크... 크리스텐센의 저 안타까움의 술회는 사실 강대국 사이에 끼여든 모든 나라들이 겪는 아픔이기도 하다. 그래서 당당한 하나의 주체로서 협상이 아니라 거의 강요에 의해 그들과 한데 섞여야 하는 우리나라와의 닮은꼴 때문에 덴마크가 그리 멀리 있는 존재로 여겨지지 않는다.

 

  크리스텐센의 말에서 단적으로 드러나듯 프레히트는 유럽연합이라는 이름 아래 모든 나라들이 독자성을 잃고 하나로 통합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그 통합이라는 것이 덴마크의 어두웠던 과거 역사처럼 온전한 주체로서의 참여가 아니라 약하기에 마지못해 끌려들어간 억류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 강제된 통합에 대한 반감이자 오히려 그 때문에 온전한 주체가 서로 대등한 가운데 조화롭게 참여하는 것이야 말로 진정한 통합임을 말하기 위해 프레히트는 앞에서 말했던 692페이지에 걸쳐 5개월간의 외르겐센의 일상을 충실히 복원하는 것이며 소제목을 하나의 자연도감 처럼 동물과 곤충의 이름으로 단 것이다.

 

   이 소제목 때문에 나는 찰스 다윈의 '비글호의 항해기'가 생각났다. 이 책에서 다윈은 항해 도중 발견한 동물과 식물들을 상세한 스케치까지 더해 자세히 설명하고 있는데 특히 갈라파고스 섬에 대한 생태에 대한 그의 묘사는 유명하다. 독일 원서의 표지도 그렇고 프레히트가 이렇게 소제목을 일부러 도감처럼

달고 있는 것은 무엇보다 어떤 '유(類)적 존재'로 환원되지 않는 그 자체로 독립적이고 고유한 개체성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그러니까 도감에서 그 동물 하나 곤충 하나를 온전히 그 존재 자체에 바탕해서 설명을 하듯 그렇게 프레히트 역시 '살인은 없었다'를 통해 독립성과 고유성이 지워진 통합이 아니라 그 하나하나가 생생히 살아나는 개체성으로써 일곱빛깔의 무지개 처럼 조화로운 통합이 진정한 하나임을 읽는 이로 하여금 깨닫게 하기 위해 이러한 문학적 장치를 사용하는 것이다.

 

  때문에 외르겐센의 5개월간의 일상을 그렇게 세세한 것 하나까지 복원하는 것도 도감에 나오는 동물들의 생태에 대한 설명과 같은 것이다. 어떤 기준에 의해 다듬어지고 주조되는 개체성이 아니라 그 자체 하나로 온전하고 전체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 가급적 가감없이 외르겐센의 일상을 복원한 것이다. 이렇게 도감 방식의 소제목의 차용과 '딮 포커스'식의 일상의 세밀한 복원은 강요된 통합에 대한 저항과 진정한 통합에로의 지향 때문에 비롯되어진 것이었다.

 

   얼마전에 날치기로 통과된 FTA 때문에 우리나라도 강요된 통합의 대상이 되었다. 더구나 FTA는 오로지 미국식 기준만 살아남는 한 나라의 고유한 개체성을 지우는 조약이다. 크리스텐센의 말마따나 우리 나라를 그들더러 마음대로 놀라고 놀이터로 내어주는 꼴이다. 과연 그렇게 무리하게 우리가 가진 독자성을 없애고 아메바처럼 들러붙는 것이 좋은 일일까? 프레히트가 692페이지에 걸쳐 거거에 대해 어떤 대답을 하고 있는지는 더 이상 반복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예전에 아주 인기있었던 미국 드라마 '엑스 파일'의 한 에피소드가 생각난다.  거기서 한 유전적으로 돌연변이가 된 인간이 스컬리에게 다가와 멀더를 가리키며 이렇게 말하는 장면이 있다.

 

  "생각해 봐요. 지구의 모든 사람이 저 멀더와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을. 당신이랑 멀더가 아무리 근사하게 생겼다고 해도 그렇게 다 같은 얼굴이 되면 과히 보기가 좋지만은 않을 거요. 이제 왜 우리 같은 존재가 있는지 알겠오? 자연이 그런 것을 거부하기 때문이오. 자연은 정상성을 거부한다오!"

 

   저마다 가진 고유의 개체성이 말살된 획일화의 끔찍함이 비단 존재에만 그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나라와 나라 사이에도 그것은 똑같이 통용되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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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 2012-01-15 15: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이름도 거창한 지식 수사 소설이라,
너무나 멋져보이는데 제게는 벌써 리뷰부터 막히기 시작한다는 ㅋㅋㅋ

ICE-9 2012-01-15 23:57   좋아요 0 | URL
아, 이런 제가 너무 어렵게 써 버렸나요?
반성, 반성...
아무래도 생소한 덴마크의 역사인데다, 유럽통합의 문제를 건드리고 있으니...
그렇게 되었나 봐요. 앞으로는 좀 더 쉽게 쓰도록 고민해봐야 겠네요.^ ^;
 
한국음식문화박물지
황교익 지음 / 따비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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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리하기를 좋아한다. 재료를 섞어 양념으로 조율하여 하나의 음식으로 완성하는 재미에 빠진 지는 제법 되는데 아직도 음식이라는 것에 대한 어떤 명확한 생각 같은 것은 없었다. 그저 만드는 것이 즐거웠고 맛보는 것이 재밌었을 뿐. 그렇게 내게 음식이란 만들고 맛보는 것 이상의 의미는 없었다. 그래서 황교익의 '한국음식박물지'를 손에 든 것도 별다른 생각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그저 우리나라 음식에는 어떤 것들이 있나 알고 싶었을 뿐. 하지만 읽고나서 그동안 너무나 단편적으로 음식을 바라보던 것에 반성하게 되었다. 사실 요네하라 마리의 '팬티 인문학'을 읽었을 때 부터 우리의 일상에 속한 모든 것들이 보이는 것과는 다르게 저마다 다양한 역사와 풍부한 이야기들을 간직한 존재들임을 인식했었지만 어느새 잊고 있어나 보다. '한국음식박물관'의 느낌은 정확히 '팬티인문학'과 같았다. 아무렇게나 주문하고 편하게 먹곤 하는 음식에도 마리가 말했던 팬티 이야기 그대로 그토록 깊은 역사와 저마다의 정치적 계산들이 뒤얽힌 다양한 이야기가 깃들어 있었던 것이다.

 

   이 책의 제목에서 특히나 주목해야 할 것은 '박물지'라는 점이다. 그렇게 이 책에는 음식만 나오지 않으며 그에 딸린 도구와 짓는 공간 그리고 거기에 들어가는 재료와 양념까지 한 마디로 음식을 둘러싼 모든 것이 나온다. 우리가 편하게 드는 숟가락 그리고 젓가락에게 조차 두 페이지의 글이 할애될 만큼 그 깃들인 이야기가 단촐하지 않음을 일깨워준 책이 이 책 말고 또 있었는지 모르겠다. 밥그릇은 또한 어떠한가? '공기'란 말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에서 부터 시작해 지금 식당에서 흔히 쓰는 스테인레스 밥그릇이 어떻게 해서 생겨났고 쇳내가 나서 한국인들이 싫어했음에도 불구하고 어쩌다가 주류가 되어 이제는 밥그릇의 상징으로까지 되었는지 다 단번에 토해내고 있다. 이렇게 일상에서 아무렇지 않게 대하는 도구에서 조차 그 모든 것에 역사가 있고 삶의 애환이 담긴 이야기가 있으며 그것을 둘러싸고 벌어지고 있는 정치적 행위들이 있음을 생각한다면 다음 부터는 식탁 위에 무심히 놓여진 숟가락, 젓가락들이 완전히 달라져 보일 것 같다. 어쩌면 손에 그것을 쥐고 몇 번이나 그 감촉을 되새겨볼 지도 모르겠다. 이 책은 그렇다. '한국음식박물지'는 날 둘러싼 모든 익숙한 것들을 전혀 새롭게 바라보도록 한다. 내가 늘 먹는 음식 늘 사용하는 도구 좋아하는 재료들이 그저 반복된 일상 속에서 있는 그대로 변함없는 존재들이 아니라 그들도 나이를 먹고 세월 속에 변해가며 스스로의 역사와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존재임을 깨닫게 한다. 그들도 늘 있는 그 자리에서 나와 같이 함께 이 시대를 호흡하고 있는 존재임을 느끼게 한다.

 

 

   우리는 일상에서 늘 대하곤 하는 것들에게 하나의 착각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까 그것들이 하나의 얇은 단면만을 가지는 존재라는 착각말이다. 물론 그러한 우리의 생각은 틀렸다. 일상에서 마주치는 모든 것들은 평면이 아니라 켜켜이 역사가 쌓이고 이야기가 중첩된 비록 보이지는 않더라도 높다란 길이를 가진 '지층'인 것이다. '한국음식박물지'는 바로 그러한 이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그 지층을 바라보게 한다. 그 층층히 퇴적된 지층 어딘가에 깃들인 역사와 이야기들을 살펴보게 한다. 그래서 어느 순간 우리의 일상이 놀랍도록 풍성한 역사와 이야기를 간직한 것들로 둘러싸여 있음을 깨닫게 하는 것이다.

 

 

   '박물지'는 말하자면 그 깃들인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다. 하지만 그에 깃들인 이야기가 그저 편한 것만은 아니다. 거기엔 원하지 않았는데도 이편 저편으로 갈라질 수 밖에 없었던 음식들의 서글픔이 있다. 음식들이 그렇게 된 데에는 물론 사람들 탓이 크다. 음식을 두고 사람들이 정치적으로 행하기 때문이다. 황교익은 책에서 정치를 이렇게 정의한다. 정치는 먹는 것을 나누는 행위라고. 그래서 음식에 깃들인 이야기 역시 더더욱 정치적이 될 수 밖에 없나보다. 사람이 모여 이루는 사회 자체가 윗 편과 아래 편으로 나뉘어지는 이상은. 사람이 계층을 나눠 편을 가르니 음식 역시 편을 나뉘게 되었다. 황교익은 상층의 음식이 있고 서민의 음식이 있다고 말한다. 상층의 음식은 서민이 감히 음식으로 신분상승 하지 못하도록 더없이 고급화되고 사치스러워지고 서민의 음식은 음식으로나마 대리적으로 신분 상승하려는 서민의 욕망으로 인해 그 이름을 상층의 음식으로 부터 차용하고 모양만이라도 닮도록 꾸민다고. 모든 것이 정치적이다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도 있지만 음식마저 이렇게 우리들의 욕망을 위해 나위어져야 한다니 어째 좀 서글프기도 하다. 하지만 황교익은 그 많은 음식에 깃들인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오히려 '음식이 정치적이다'라는 사실을 직시하도록 한다. 일상의 풍성함에 경이로움을 느끼기 이전에 그것을 두고 벌어지는 계급 갈등을 먼저 보라는 것이다. 왜? 음식은 그저 먹기 위한 대상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만드는 사람의 노동 또한 들어가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음식을 만들어내는 일이 바로 사람의 일이기 때문이다. 음식의 가격을 억지로 낮추면 거기 들어가는 사람의 노동력의 대가 또한 턱없이 낮아진다. 수입산을 쓰면 된다고 2차 산업의 호황을 위해 1차 산업을 포기하는 식으로 무역 협정을 타결하면 먹거리의 수급이야 문제 없을지 몰라도 우리의 음식을 가꾸고 만드는 농부들, 어부들은 아예 살 길을 잃는다. 그렇게 하나의 음식에는 사람의 피와 땀 그리고 목숨줄 마저 달려있음을 그는 보라고 한다. 아예 음식이 그렇게 정치적이었다면 이제 이 모든 것이 매어달린 음식을 더더욱 정치적으로 다루어야 하지 않겠냐고.

 

 

   말하자면 황교익은 음식에 깃들인 이야기를 통해 종적으로 길어진 음식의 지층들을 그에 매달린 정치적인 이야기들을 밝혀 이제는 개인이 아닌 집단의 차원으로 나아가 횡적으로 늘리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그동안 음식을 너무 개인적으로만 대해왔다. '나만의 먹을 것' '우리 가족의 먹을 것'만을 위해 먹거리들을 대해왔다. 그리고 그랬기에 음식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노고가 애환이 그리고 삶 자체가 달려있는지 보지 못했다. 황교익의 너른 마당처럼 펼쳐보이는 횡적인 음식 이야기는 이제 우리의 시야가 넓어져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의 귀가 거기에 깃든 그들의 호흡과 한숨과 애끓는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솔직히 실로 깨달음이 컸다. 그리고 그동안 음식을 오로지 개인적인 식견으로만 바라보던 나 자신을 반성했다. 아담 스미스의 역설이 음식에도 통하는 지 당장 없으면 굶어죽게 될 소중한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동안 음식의 존재를 너무 무심히 대해온 것 같다. 그래서 이렇게 FTA가 통과되어 음식의 주권마저 위태롭게 될 상황에 처했는데도 위기 의식이 잘 일어나지 않는 것 같다. 황교익이 거듭 다짐두었던 대로 음식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의 산물이며 그 너머에 거기에 깃들고 매달린 사람들이 존재한다. 그렇게 우리는 그저 음식의 문제를 다룬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그것은 음식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의 문제였다. 이제 더이상은 음식 위에 드리워진 그들의 잔영을 보지 못하는 일은 없을 것 같다. 그 하나 하나를 기르고 베고 찧고 옮기고 삶거너 쪄낸 배여든 손길 하나 하나를 느끼지 못하는 일은 없을 것 같다. 그리고 이제 음식 앞에 서게 되면 먼저 귀 기울일 것이다. 그들이 내게 들려주려고 담아둔 그 오래된 이야기들에... 그렇게 사람을 기억하고 우리가 서로 이어져 있음을 기억할 것이다. 이 모든 것에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들의 입이 아니라 거기에 깃들인 사람들의 삶임을 떠올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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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1-12-21 1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헤르메스님은 제 지름신 맞네요... ^^

주위에서 항상 보는 물건에 대해서 `역사가 켜켜이 쌓였다`는 말씀이 와닿아요.
우리는 얼마나 쉽게 잊어버리는지 모르겠어요. 그리고
음식이 정치적이라는 말씀은 서글퍼요. 너무나 정녕 그렇구나 싶어서 더욱 그래요.
FTA 통과 이후, 제가 매주 받아먹는 농촌공동체 언니들이 더 생각난답니다.
선물이라도 보내드려야 하는데, 하면서 차일피일 미루는... ㅠㅠ

헤르메스님, 즐거운 연말되셔요.

ICE-9 2011-12-25 20:48   좋아요 0 | URL
마녀고양이님도 화이트 크리스마스 잘 보내셨나요?
저도 음식에 대해 정치적이라는 생각은 해 본 적이 없었는데 이 책을 읽고 거기에 눈을 뜨게 된 것 같아요. 앞으로는 어떤 것을 대하든 거기에 깃든 손들과 삶을 마음에 먼저 담아두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마녀고양이님도 얼마 남지 않은 연말 잘 정리하시고 행복하게 보내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