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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거리에서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억관 옮김 / 재인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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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히가시노 게이고는 분명 부러운 재능을 가졌다. 별로 특별한 기교도 그렇다고 뛰어난 문장도 아닌 것 같은데 일단 첫 페이지를 시작하면 끝까지 몰입해서 읽게 만든다. 도대체 그 흡인력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그래서 어쩔 수 없이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을 읽을 때 마다 내가 먼저 집착하는 건 작품에 드리워진 그의 테크닉이다. 

 

  이번에 나온 '새벽 거리에서'. 

  벌써 일본에서는 밀리언셀러를 기록했고 올해 키시타니 고로와 후카다 쿄쿄(이런 '부호형사'에 이어 또 만나는군요. 뭔가 인연이 있는 것일까나~^ ^;) 주연으로 영화까지 만들어졌다. 감독은 한국에서도 개봉된 '화이트 아웃'을 감독했던 와카마츠 세츠로... 

새벽거리에서 영화 포스터 

  그러니까 이번에도 게이고는 확실한 대중적 인기를 얻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사실 이것이 다소 의외일 수도 있는 것이 이 작품, '새벽거리에서'는 분명한 미스터리 소설도 아니고 더구나 소재 역시 그리 대중적 호감을 얻을 수 없는 한 중년 가장의 불륜 스토리이기 때문이다. 

  게이고의 주 무기인 미스터리도 강하지 않고 소재 역시 선뜻 동의하기 어려운 것임에도 불구하고 저런 인기를 얻을 수 있었던 요인은 무엇일까? 아마도그건 역시 게이고 특유의 너무도 자연스레 녹아들었기에 얼른 드러나지는 않는 '플롯짜기'의 기교가 잘 발휘되었기 때문에 그러지 않나 싶다. 

  소설은 주인공 와타나베의 독백으로 시작된다. 거기서 그는 불륜의 유혹에 빠져드는 것은 정말 어리석은 일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 불장난과도 같은 불륜으로 인해 공들여 쌓아왔던 모든 인생이 단 한 순간에 무너져 버리기 때문이다. 게이고는 첫 페이지에 불륜이 가져오는 파국적 결말을 독자에게 충분히 공감되도록 설명한 뒤, 마치 뒤통수를 치듯이 주인공이 그런 불륜에 빠져들었음을 알린다. 바로 여기서 서스펜스가 시작된다. 그러니까 불륜에 빠져버린 주인공이 과연 자신의 인생을 제대로 지켜낼 수 있을까 하는... 

 

   하지만 불륜에 빠져드는 주인공을 대부분의 독자들이 받아들일 리 없다. 그래서 게이고는 현명하게도 불륜에 빠져드는 이유가 다른 게 아니라 결혼을 하면서 가정을 지키느라 잃어버렸던 혹은 포기했었던 '젊은 수컷으로서의 야성' 혹은 '남성성'을 되찾아오는 것으로 그린다. 

   "모두 다 남자가 아니야. 마누라가 여자가 아니듯 우리도 남자가 아니라고. 남편, 아버지, 아저씨, 그런 걸로 변해 버린 거지. 그러니까 여자 이야기 같은 건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다."(P.16)

  옛날 대학 산악부원들과의 대화는 기혼인 중년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했을만한 회한이기 때문에 독자들은 불륜에 빠져드는 주인공을 비난하기 보다는 응원하게 되고 그래서 작동되는 서스펜스의 강도는 더욱 고조된다. 그렇게 만든 다음 게이고는 와타나베 불륜의 대상 아키하를 등장시킨다. 

 

                                                                          영화에서 아키하 역을 맡은 후카다 쿄쿄
 

    서스펜스 차원에서 작동되는 불륜의 유혹이기 때문에 따라서 게이고는 당연히 아키하도 평범한 여성이 아닌 뭔가 색다른 매력(죄송합니다. 미안합니다 라는 말을 한 번도 해보지 않았다는 그런 식으로)의 어떤 비밀스런 구석을 가진 존재로 만든다. 따라서 독자는 당연히 알콩달콩한 로맨스를 기대하기 보다는 여자가 가진 기묘한 모습으로 인해 도대체 저 여자가 어떤 존재인지 혹은 과연 그 감추고 있는 비밀은 무엇인지 알게 되기를 더 기대하게 된다. 그런 독자의 심리를 잘 알고 있는, 달리 말하면 자신이 장치한 서스펜스의 효과가 어떻게 나타날지 거의 확신하고 있는 게이고는 와타나베가 그 자신의 장담과 그 모든 희생을 무릎 쓰고라도 아키하를 선택하게 되는지 거기까지 이르는 와타나베 자신의 감정의 흐름은 생략해도 무방하다고 생각하고 실제 그렇게 한다. 그러한 게이고의 계산은 맞아 떨어져서 독자 역시 와타나베가 어떻게 그렇게까지 빠져들게 되는 것인지 묻지 않는다. 이미 거기서 독자는 완전히 와타나베 편에 서서 어떻게 들키지 않고 그 아슬아슬한 연애를 이어가는가에만 관심이 있다. 왜냐하면 게이고가 독자를 이 게임에 더 깊이 끌어 들이도록 또 하나의 서스펜스 장치를 작동시키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아키하가 1년 뒤 3월 30일까지 말할 수 없었던, 자신의 집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이다.  

 

  아키하로 인해 불륜의 서스펜스가 미스터리의 서스펜스로 절묘하게 전이된다. 

  '들킴'에의 불안이 '신뢰'의 불안으로 바뀌어지는 것이다. 이쯤에서 이미 와타나베의 결심은 확고해진다. 그는 더이상 아내에게 들킬까 염려하지 않으며 다만 어떻게 이혼의 말을 꺼낼 것인지 그 방법과 타이밍만을 고민한다. 우리 역시 아무런 문제가 없었던 게다가 귀여운 딸아이 까지 있는 가정이 거의 초단위의 파국적 위기 앞에 놓여졌는데도 그 무너짐의 부채를 느끼지 않는다. 또 달리 시작된 서스펜스가 그러한 감정이입을 막는 것이다. 그러니까 와타나베가 전 인생을 걸고 모험을 하려는 지금 그 대상인 아키하가 과연 도박을 걸어도 좋을만한 존재인지 그 불안으로 인한 서스펜스가 이미 작동되고 있기 때문이다. 초반의 서스펜스 장치로 인해 이미 와타나베에 충분히 감정이입이 되어버린 우리는 두번째 불안 역시 동일하게 느끼면서 그저 그 불안을 조금이라도 빨리 해소하려고 페이지를 넘기는 것 밖에는 없다. 

 

 

  이 가정이 파국의 코 앞까지 왔지만  우리는 냉정한 관찰자일 뿐 근심하지 않는다. 이미 우리의 불안이 아키하에 대한 와타나베의 불안과 동일한 자리에 서 버렸기 때문이다.

  

  게이고가 원래 작품에다 무엇을 중심으로 두려 했었는지는 알 수 없다. 와타나베의 불륜인지 아니면 아키하의 미스터리인지 아니면 그 둘 다 인지. 얼른 갈피를 잡기는 힘들다. 미스터리가 주가 된다고 하면 그것이 실로 강하지 않음이 실망스럽고 불륜이 주가 된다면  (스포일러가 될까봐 자세히 말은 못 하겠다.) 어느 것 하나로 시원스레 해결되지 않음이 씁쓸한 뒷맛을 남긴다. 정교하게 계산된 서스펜스를 작동시키는 게이고이니 만큼 이렇게 이도저도 아닌 결말을 준비했을 것 같지는 않은데 과연 지금은 알 수 없는 근저에 깔린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결정적인 스포일러를 회피하면서 한 가지를 말하자면, 그것은 무엇보다도 '연기'가 아닐까 한다. 

  

  굴뚝에서 피어오르는 연기가 아닌 배우의 '연기'를 말함이다. 왜 이렇게 생각하냐면 이 작품에서 주요하게 작동되는 두 개의 서스펜스인 불륜에서도 미스터리에서도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연기'이기 때문이다. 와타나베는 불륜을 저지르고 있지만 늘 한결같은 모습의 남편을 연기하고 미스터리에서의 아키하의 역할 역시 그렇다. 문제는 이 둘의 연기가 완전히 정반대의 목적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인데 와타나베의 연기는 일상을 유지하기 위해서이고 아키하의 연기는 일상을 파괴하기 위해서이다. 그렇게 상극의 힘이 정면으로 부딪히는 것이 또 이 '새벽거리에서'의 매력이기도 하다. 사실 어떤 면에선 아키하의 존재 자체가 일상 파괴의 상징이다. 무엇보다도 와타나베로 하여금 불륜으로 이끌어 그 가정을 붕괴시키려 하니까 말이다. 

 

   아무튼 게이고는 이 연기의 행위들을 섬세하게 새겨넣는데 어쩌면 여기에 그 진정한 의도가 있지는 않을까 싶다. 그러니까 이 작품을 전적으로 이끌어가고 있는 서스펜스 장치들이 야기시키고 있는 불안들은 그대로 우리가 세상에서 느끼게 되는 불안과도 흡사하다. 우리들의 근본적 불안은 언제나 타인의 내면을 내 내면 같이 들여다 볼 수 없는데서 온다. 믿을만한 존재인지 아닌지, 내 모든 것을 내어주어도 좋을 존재인지 아닌지, 사랑하는 사람에게 조차 그러한 우리의 염려와 불안은 계속된다. 오죽하면 하이데거 조차 세계 속에 던져진 우리들이 느끼는 가장 주된 감정이 바로 '불안'이라고 정의내렸을까. 그러니 항존하는 그 불안으로 부터 우리는 우리 자신을 지키기 위하여 '연기'를 할 수 밖에 없다. 그러니까 아키하의 미스터리 처럼 진실을 파악할 수 없는 그리고 와타나베 처럼 조금의 변화에도 파국적 결말을 각오해야 하는 그러한 불안을 안고 살아가야 하는 우리들에게 '연기'란 필요불가결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아마도 게이고가 정말 보여주려 했던 것은 이러한 한계로서의 현실이 아니었을까 싶다.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내면에 받아들여야 하는 벽 같은 것. 테우리에 갇혀야만 존재가 가능한 지금의 우리들 서글픈 현실에 대해... 

 

   결혼이란 무엇보다도 서로에게 방파제가 되어주는 것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좋게 말해서 지켜준다는 의미의 방파제이지 사실은 나아갈 수 있는 곳까지 금을 긋는 빗장과도 같은 것이다. 그러니 와타나베와 그 친구들이 기혼인 자신을 더 이상 남자가 아니라고 여기는 것도 당연하다. 여자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이미 생래적 자유를 지닌 존재가 더 이상 아니다. 아빠, 엄마, 아저씨, 아줌마 등등 온갖 사회로 부터 부여되는 외피를 거듭 거듭 뒤집어 쓰고서 오히려 껍데기의 정체성을 자신의 본질로 알고 살아가야 하는 존재가 된 것이다. 테우리 안에 오래도록 갇힌 짐승은 그 테우리 속 세계를 진실로 여기게 마련이고 그렇게 다른 이들의 칼질로 정형화된 세계 속에서 만족하고 살았던 불륜 전 와타나베 역시도 감히 그 세계를 벗어나는 것을 그대로 멍청한 짓이라 여겼듯이 말이다. 

 

   때문에 게이고가 여기서 연기를 강조하게 되는 것은, 그것도 불륜을 토대로 그것을 강조하게 되는 것은  부여되는 한계를 씁쓸해 하면서도 그것을 스스로 정당화 하기까지 하면서 자포자기식으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우리들의 인위적 제스추어를 강조하기 위함이다. 그러니까 넥타이 처럼 조여드는 껍질에 부과되는 현실에 갑갑해 하면서도 '어쩌겠어, 이것이 인생인 걸. 받아들여야지..' 하는 식의 타협적 태도와 '연기'가 동일하다고 보는 것이다. 아키하의 미스터리가 보여준 결말도 그렇지만 그래서 조금은 엉뚱하게도 보이는 그런 '산티니 이야기'가 에필로그 처럼 부러 붙었던 것은 아니었을가 싶다. 

 

   그렇다고 이 소설이 '그래도 지금 니가 머무는 자리가 좋은거야.' 식의 테우리 속 모든 존재들에게 보내는 게이고의 위로인 것은 아니다. 뒤돌아 보는 눈이 보내는 미련 어린 청승도 아니다. 사실 '산티니 이야기'는 보다 깊이 들어가면 그 이전까지 게이고가 해 온 이야기 모두를 파괴하고 있다. 그는 연기의 종국에 무엇이 있는가를 거기서 보여준다. 그건 공허다. 주고 받는 '~ 하는 척'하는 연기들이 빚어내는 온갖 '~ 그런 척'하는 작위적 감정들만이 있을 뿐 이미 진실한 감정들은 쓸모없는 물건들이 벽장 속에 갇히듯 보이지 않게 사라지고 없는 것이다. '산티니 이야기'의 게이고는 그러니까 차라리 '이게 뭐야!' 하고 말하는 것과도 같다. 한 팝송의 가사와도 같이 한밤에 문득 일어나 썬글래스를 끼고 아내의 얼굴을 바라보았더니 그동안 자신을 둘러싼 화려한 외양에 가려 보이지 않았던 진실, 더 이상 우리들의 관계엔 사랑이 없음을 알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연극이 언젠가는 끝나기 마련이듯 파국은 찾아올텐데 우리가 왜 허무의 몸짓을 계속해야 하느냐 이런 말이다. 그러니까 '산티니 이야기'는 일종의 반어법적 표현이다. 실상 이를 통해 게이고가 말하고 싶은 것은 아니라고 생각되면 연기를 그만두라는 것이다. 

 

   그러니 이 소설은 위안이나 미련 같은 게 아니라 사실은 경멸인 것이다. 

 

   제목인 '새벽'은 참으로 의미심장하다. 불륜을 하고 있는 자의 내면을 그대로 시간으로 형상화 한다면 새벽 같은 것이 아닐까? 완전한 밤도 아니고 밝은 아침도 아닌, 탈색된 어둠과 희미한 여명이 뒤섞인 그대로 경계 위의 시간. 그건 그대로 정해진 자리에서 한 발을 빼고 아무것도 없는 빈 자리로 뻗는 '불륜'의 상태와도 같다.(여기서 게이고가 '불륜'을 끌어들이는 이유를 말해야 할 것 같다. 왜냐하면 자칫 내가 불륜을 정당화하고 있는 것으로 비칠 수 있기 때문이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게이고가 불륜을 끌어들이는 이유는 한계지워진 우리의 존재 자체를 말하기 위함이다. 그러니까 이 소설에서 불륜은 그러한 한계를 초월하려는 우리의 모든 몸짓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여지며 이러한 불륜의 형상화는 사실 홍상수가 영화에서 그토록 자주 '불륜'을 반복하는 이유와도 같다.) 

 

   '새벽 거리에서' 제목 자체는 정확히 불륜을 선택함으로 인해 그 불안정한 시간에 불안정한 공간을 헤매일 수 밖에 없는 처지를 단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하지만 이 제목은 '산티니 이야기'가 반어법적이었듯 그렇게 게이고가 보내는 반어법적 질문이다. 그러니까 도대체 무엇이 그 새벽 거리를 헤메이도록 만드는가 이다. 물론 여기에 대해 게이고의 대답은 명확하다. 그것은 바로 '그 자신'이라고. 즉 게이고는 스스로 연기를 그만두지 않았기 때문에 새벽 거리를 헤메일 수 밖에 없는 모든 '우리들'에게 경멸을 보내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이 소설을 읽는 것은 일종의 자학과도 같다. 

 

    아무튼, 

    거리를 두고 '새벽 거리에서'를 바라보면 분명 그리 정교하지도 않고 뭔가 특출날 것이 없는 그저 평범한 남자의 불륜 미스터리라는 흔한 작품이 되는 것 같은데 게이고가 은연중 깔아놓은 서스펜스 장치에 집중하자마자 놀랍게도 그가 꽤 계산적으로 작품 곳곳에 서스펜스 장치들을 정교하게 깔아놓았음을 볼 수 있었다. 그렇게 내게 게이고의 이 소설은 무엇보다도 그가 어떤 식으로 독자들을 몰입하게 만드는지, 단 한 순간도 독자의 주의를 잃어버리지 않고 끝까지 집중하도록 만드는지 그 기교를 살필 수 있는 작품이었다. 거기다 단순히 서스펜스적 재미만을 주는 것에 그치지 않고 현재적 세계의 상태에 대한 본래적 태도 같은 것까지 다루고 있음이 또한 흥미롭게 다가왔다. 여전히 사회에 '실존'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렵다. 게이고가 주는 재미로 그것을 조금이라도 잊을 수 있는 것 만으로도 이 작품은 벗할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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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1-11-17 2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이 하두 많아서
제가 얼마나 읽어봤나 체크를 해본적이 있습니다. 농담 아니고 20권은 훌쩍 넘게 읽었는데 계속 나오는 그의 작품들을 도저히 따라갈 수가 없더군요.... ^^

그런데도 작품마다 새로우니 참 대단한 작가입니다..

ICE-9 2011-11-19 18:44   좋아요 0 | URL
와! 정말 많이 읽으셨네요.^ ^
확실히 게이고가 작품 내는 속도는 혀를 내두를 정도인 것 같아요.
그런데도 인기가 늘 평균이상인 것은 자신이 전하고 싶은 이야기를 잘 개념화해서 어떻게 전해야 할지 그 방법론 역시 잘 알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
 
로즈 가든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36
기리노 나쓰오 지음, 최고은 옮김 / 비채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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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표제작이자 첫 단편이기도 한 '로즈가든'의 화자 히로시는 무라노 미로 시리즈의 데뷔작인 '얼굴에 흩날리는 비'에서 자살했던 바로 그 미로의 남편이다.

  작품이 시작되면 그는 인도네시아의 마하캄 강을 배를 타고 거슬러 올라가면서 롤링스톤즈의 'SATISFACTION'이나 'STREET FIGHTING MAN' 같은 노래들을 떠 올린다.  이 노래들을 아시는 분들이라면 눈치채셨겠지만 히로시가 그 노래들을 떠올리는 이유는 어쩌면 간단하다. 그 노래들의 울림이 히로시가 딛고 있는 보트 바닥이 물결 따라 출렁일 때 마다 전해오는 '둥둥' 튀는 듯한 고동 소리를 닮아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울림이 여기서 그치지 않고 네 번째, 그러니까 가장 마지막 단편인 '사랑의 터널' 그 마지막에서 다시 한 번 반복된다는 게 흥미롭다. 그 마지막 장면에서 미로는  아래로 차들이 지나가는 다리 위에 서 있는데 거기서 미로는 차들이 지나갈 때 다리 위로 전해져 오는 울림을 듣는 것이다. 소설은 이렇게 끝맺는다.  

나는 이번에야 말로 땅속의 어두운 울림을 똑똑히 듣고 싶어서 귀를 기울였다.(P.218)

  어찌보면, 일종의 수미쌍관 구조랄까... 

  그렇게, 네 개의 단편이 모인 '로즈가든'은 하나의 울림으로 묶인다. 

  수미쌍관은 그야말로 작위적 구성이므로 여기에 기리노 나쓰오의 의도가 들어갔다면 그 이유는 의외로 간단해 보인다. 그러니까, 그녀는 바라고 있는 것이다. 이 단편집 자체가 독자들에게 하나의 울림이 되기를..., 미로가 들으려 귀 기울였던 바로 그 '어둠의 울림'이 되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나쓰오의 바람은 네 개의 작품이 어떻게 시작되고 있는지를 살펴보면 바로 드러난다. 그러니까 네 개의 작품 모두 들려오는 '소리'로 시작되는 것이다. '로즈가든'에서 히로시는 강물의 출렁거림과 함께 롤링스톤즈의 노래를 듣고 두 번째 '표류하는 영혼'에서 미로는 '퇴마사야.'라는 관리인의 목소리를 듣는다. 다음의 '혼자두지 말아요'에서는 '원숭이다'라는 말을 듣고 마지막 '사랑의 터널'에서는 '여자라서 다행이네요'라는 말을 듣는다. 그렇게 나쓰오가 이 단편들에서 '청각'이란 감각을 특권화하고 있다는 것은 명백해진다. 사실 이러한 '들음'에의 강조는 무라노 미로 시리즈가 여타 다른 사립탐정물들과 차별되는 특징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 단편집 '로즈가든'에서는 그 특징을 더욱 더 강조한다. 시작도 그렇지만 무라노 미로가 결정적으로 사건을 해결하는데 있어서도 '소리'가 많은 역할을 하는 것이다. 아니 어떤 단편에서는 오히려 무라노 미로가 가진 '시각'의 무용성을 강조하고 있기 까지 하다. 여기에서 보듯이 나쓰오가 이 '로즈가든' 자체를 들려주기 위한 하나의 울림으로 만들려고 했던 것은 명백해 보인다. 하지만 왜 여기서 유독 그것을 강조하는 것일까? 언제나 그랬듯이 내게 나쓰오에 대한 리뷰는 이렇게 의문으로 시작된다. 

 '듣는 것'은 '보는 것'과 다르다. '보는 것'은 능동적 행위이나 '듣는 것'은 지극히 수동적인 행위이다. 외부의 소리는 우리가 어쩔 수 없는 '엄습'이며 아무리 귀를 막아도 그 틈입을 막을 수 없는 '속절없음'이다. 소설의 시작을 여는 소리들은 늘 느닷없이 주인공들에게 달려든다. 그리고 그 소리들은 언제나 매의 밭톱이 먹이를 채 가듯 무라노 미로를 정해진 삶의 궤도에서 벗어나게 하고 그 소리들이 발현된 그 곳으로 블랙홀 처럼 미로를 빨아들인다. 소리에 의해 미로는 그 세계에 갇히며 그렇게 한 번 포획되면 더 이상 그 세계에서 달아날 수 없다.  그건 미로의 죽은 남편 히로시도 마찬가지다. 애초에 히로시를 무라노 미로의 세계에 가두었던 것은 무엇이었나? 그건 바로 미로의 '말'이었다. 그렇게 듣게되자 히로시는 무라노 미로의 '로즈가든'에서 더 이상 빠져나올 수 없게 되었고 오로지 죽음 만이 그 유일한 탈출구가 되었다. 그렇게 '로즈가든'의 소리들은 한 존재 전부를 바꾼다. 그런데 거기엔 그 어떤 주체의 의지도 개입되지 못한다. 지극히 수동적일 수 밖에 없는 '청각'의 특성상 당연하다. 그러니까 이것은 그야말로 사이렌의 노래소리이다. 이미 들은 이상 그에게 남은 것은 그저 끌려감 밖에는 없는 것이다. 

  나쓰오가 이 단편집을 하나의 울림으로 만드려고 했을 때 그녀가 바랬던 것도 이것이었을 것이다. '로즈가든' 자체가 독자들에게 사이렌의 노래소리가 되는 것. 그렇게 저항할 수 없게 무라노 미로라는 존재의 무저갱과도 같은 심연 속으로 끌어들이는 것. 왜?  그건 아마도 무라노 미로를 이해시키고 싶은 것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건, 

  나쓰오가 이 단편집에서 유독 '들음'을 강조하는 또 하나의 이유를 보면 드러나는데, 그건 바로 우리들이 무라노 미로에게 있어 가장 궁금하게 생각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 그러니까 미로는 왜 그렇게 자신과 대적하는 어둠에게 그토록 끌리는가 하는 것. 바로 그 어둠에로의 매혹이 온전히 수동적일 수 밖에 없는 '들음'과 너무 유사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 둘은 모두 주체의 역량을 가볍게 넘어서서 완전히 사로잡아 버리는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그 둘 앞에서 주체는 오로지 '속절없음'의 무기력한 포즈만을 취할 수 밖에 없다. 카메라 렌즈에 사로잡힌 모든 피사체가 그러듯이 그렇게 둘다 불가항력적이다. 

  이러한 매혹과 '들음'의 유사성에서 우리는 나쓰오가 이렇게 '울림'이 간직한 지극히 수동적인 경험을 통해서 말하고 싶은 것이 우리가 그토록 미로에 대해 궁금하게 여겼던 그 어둠의 '매혹'을 설명하려 함을 암시받게 되는데 바로 이것을 통해서 나쓰오가 '로즈가든'을 하나의 울림으로 만드는 것 자체가 바로 무라노 미로의 내면 속으로 인도하는 것임이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미로는 어쩌다 그렇게 불가항력적으로 어둠에 매혹될 수 밖에 없게 되었을까? 바로 거기에 대한 미로의 내면으로의 여행 혹은 그것을 통한 나쓰오의 대답 혹은 변호가 바로 이 '로즈가든'이라 할 수 있다. 

 

 

   

   '로즈가든'이 처음 말했던 대로 하나의 울림이라면 이 단편집 자체는 오히려 '진혼곡'에 가깝다고 해야 하리라. 왜냐하면 이번의 단편집을 끝으로 우리는 무라노 미로와 별 다른 이변이 없는 한 영영 이별을 해야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팬인 나로서는 '로즈가든'은 더없이 슬픈 작품이기도 하다. 때문에 난 그것을 아주 오래도록 음미할 수 밖에 없었다. 사랑하는 이와의 이별은 어떻게든 지연시키려고 드는 게 인간의 정리가 아니던가...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이렇게 무라노 미로 시리즈 중 가장 마지막으로 나왔지만 사실 여기에 실린 네 작품은 모두 미로의 데뷔작 '얼굴에 흩날리는 비'와 두번째 작품 '천사에게 버림받은 밤' 사이에 쓰여진 작품들이다. 그러니까 1993년과 1995년에 걸쳐서 발표된 작품들이다.  하지만 발표시기야 어쨌든, 그것이 무슨 상관이 있으랴. 우리는 지금 미로와 마지막 이별을 앞두고 있고 그래서 그 멀어져 가는 등을 바라보야 하는 우리들로서는 이 '로즈가든' 자체가 '가시는 걸음 걸음... 그 뒤편에 무성하게 뿌려주는 장미 꽃잎들과도 같이...' 수고한 그 넋을 위로하는 동시에 그 넋이 어떠한 존재였는지 우리들에게 알려주는... 진혼곡으로 여겨지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울림인데... 

 

   어리석은 고집이라고 해도 좋지만 난 정말로 나쓰오가 이 단편집을 그러한 '진혼곡'의 형태로 만들었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난 그것을 무엇보다도 단편들의 제목에서 확인한다. '로즈가든' '표류하는 영혼' '혼자두지 말아요' '사랑의 터널' 이 모두가 사실은 노래 제목들이기 때문이다. 물론 소설에서 직접 밝히지는 않으나 아마도 소설의 분위기를 이루는데 영감을 주었고 그렇게 하나의 바탕이 된 노래를 내 개인적으로 살펴본다면 바로 이 노래들이 아닐까 한다. 

 

 1. 로즈가든  

 

 2. 표류하는 영혼 

 

 3. 혼자 두지 말아요

 

                         

  4. 사랑의 터널
 

   

   말하자면 '로즈가든'은 무라노 미로를 보다 더 잘 이해하기 위한 하나의 컨셉트(concept) 앨범이라 할 수 있다. 컨셉트 앨범이란 하나의 주제를 위해 노래들이 유기적으로 짜여져 있는 앨범을 말한다. 그렇게 나쓰오가 선곡한 이 네 개의 단편들은 별개이지 않으며 왜 무라노 미로가 어둠에 매혹될 수 밖에 없었는가에 대해 차례로 조금씩 나아가면서 알려주고 있다. '로즈가든'은 히로시의 미로에 대한 매혹을 빌어 미로의 어둠의 매혹을 설명해주며 '표류하는 영혼'에서는 왜 미로가 어둠 - 보다 정확히는 경계 너머의 것 -에 매혹될 수 밖에 없는지 미로가 속해있는 세상의 속성 -  도처에 넘쳐나는 악의들-을 통해 말해준다. 그리고 '혼자 두지 말아요'에서는 그러한 악의로 가득찬 세상 그러면서도 피아를 식별하기 어려운 경계들의 혼란 속에서 그것을 헤쳐나가기 위해서 왜 괴물이 될 수 밖에 없는지 느끼게 만들고 마지막 '사랑의 터널'에서는 미로가 경계의 저 편, 어둠 혹은 괴물을 그 자신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것을 우리는 보게 된다. 이렇게 말했지만 '로즈가든'은 굳이 미로의 헤아리기 어려운 심연을  탐사하기 위한 지도 같은 것으로만 머무르지 않는다.  사실 미로의 어둠에 대한 매혹은 그녀의 또 다른 작품 '그로테스크'나 '아웃'으로도 연결된다. 그렇게 이 '로즈가든'은 나쓰오가 그녀의 작품세계에 있어 또 다른 중추라 할 만한 왜 '괴물성(아임 소리 마마 같은)'에 집착하게 되는지도 보여준다. 그러니까 그녀의 작품 세계를 떠 받치고 있는 두 개의 헤르메스 기둥 중 하나인 '여성의 괴물화(욕망을 어떠한 사회적 제약에도 굴하지 않고 발현시킨다는 의미에서 -  그것은 최근에 나온 '도쿄섬'에서까지 이어지는데 -)가 어떻게 해서 나오게 되었는지 그 근원적 이유가 드러나 있는 것이다. 

 

 '소녀'에서 '괴물'까지! 

  그렇게 '로즈가든'은 여성들이 보여줄 수 있는 다양한 모습을 이 하나에다 집약하고 있다. '로즈가든'은 남성에게 포획된 존재에서 끝내 남성적 그 사회 바깥에서 머무르면서 오히려 공포의 존재로 되어가는 과정의 함축이자 바로 그 사회의 제약에서 해방되어 마음껏 자아의 욕망을 발산하는 것이야 말로 여성의 진정한 구원이라는 나쓰오의 내면 깊숙한 곳에서 울려나오는 어둠의 선언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야말로 무라노 미로는 그 모든 것이 하나로 응축된 절대 영도의 존재이며 그래서 왜 미로가 나쓰오의 페르소나이고 그녀의 모든 작품 가운데 단연 중심이 될 수 밖에 없는지 다시금 깨닫게 만드는 작품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이 단편집은 나쓰오의 어둠에 매혹된 이들이라면 반드시 거쳐가야 할 작품이며 출간 사정이야 어쨌든 무라노 미로 시리즈중 가장 마지막에 읽어야 그 맛이 더욱 잘 살아나는 작품이기도 하다. 내내 말하지만 이 단편집은 그야말로 미로를 위해 바쳐진 네 개의 트랙으로 구성된 진혼곡 앨범이니까 말이다. 때문에 나 역시도 이미 유령이 되어버린 히로시가 롤링스톤즈 노래를 떠올렸듯이 이 단편집을 모두 읽고 났을 때 어쩔 수 없이 롤링스톤즈의 노래를 떠올렸다. 물론 같은 노래는 아니고 그들의 68년 앨범 '거지들의 만찬'에 첫번째 트랙으로 실렸던 'SYMPATHY FOR THE DEVIL'이었다. 어쩌면 이 단편집을 위한 사운드 트랙으로 가장 잘 어울리는 노래는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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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기리노 나쓰오의 '로즈가든' OST
    from 헤르메스님의 서재 2011-11-15 22:25 
    -원래는 일종의 '로즈가든' OST같은 것으로 만들어 보려고 음악도 같이 올리려고 했습니다만, 리뷰 로는 올라가지 않기에 부득불 페이퍼로 작성하여 올리게 되었습니다. 선곡은 로즈가든의 각 단편 제목을 중심으로 해서 작품의 분위기와 노래 가사가 비슷한 것으로 선정했습니다. 그 중 '로즈가든'과 '터널 오브 러브'는 공식적으로 확인된 것 없지만 분명 작품에 영감을 주었던 노래들로 보입니다.편한 시간에 더 편하게 감상해 보셨으면 합니다.(문제가 있다면 연락해
 
 
마녀고양이 2011-11-15 22: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흑,, 미로와의 이별이라니,, 갑자기 슬퍼지는데요.
하지만 말이죠, 어둠으로 빠져드는 과정에 놓인 단편이란 정말 매력적이네요.
미로가 워낙 매력이 있어야 말이죠. 특히, 잘못된 남자만 골라서 만나는 그그... ^^

ICE-9 2011-11-15 23:05   좋아요 0 | URL
바로 그 왜 그렇게 미로가 잘못된 남자만 골라서 빠져드는가에 대해 나쓰오가 제대로 보여주고 있는 게 이 '로즈가든' 단편집인 것 같아요. '도쿄섬'을 읽고나서 더욱 더 나쓰오가 '괴물로서의 여성성'을 긍정적으로 여기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 단초를 '로즈가든'에서 엿볼 수 있더군요. 어쩌면 직접적으로 이어지는 작품이 아닐까도 생각되요. 네번째 단편에 SM클럽 경영주 이름이 기요코인데 '도쿄섬'의 거의 '아임소리마마'와도 같은 욕망충실과 생존본능을 보여주는 여주인공 이름도 기요코 거든요. 아무튼 미로의 팬이라면 정말 추천드립니다.^ ^
 
삼총사 3D - The Three Musketeers
영화
평점 :
상영종료


 

 

  각색은 영화에 있어서 필수적인 과정이다. 아무래도 2차원적 활자를 3차원적 영상으로 옮겨야 하는 만큼 고유의 영상문법이 적용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영화는 시간을 다루는 예술이다. 대부분 사람들의 집중력은 90분 이상을 넘기지 못한다고 한다. 더구나 상영시간이 길어지면 영화사 수입에도 지장이 있다. 그래서 고전일 경우, 특히나 '삼총사' 처럼 다소 긴 장편일 경우 부득이하게 대체로 거대한 줄기만을 가져오거나 혹은 몇 인상적인 에피소드만 따오거나 그것도 아니면 거의 재창조 수준의 각색이 이루어지기가 일수다. 그렇다고 각색이 원작보다 뒤떨어진다고만은 할 수만은 없다. 여기에는 그런 경제적 효용 못지않게 그 고전에 대한 해석이 이루어지는 '바로 지금'이라는 동시대적 가치관 또한 작동하기 때문이다. 즉, 각색을 통해 오히려 고전은 지나간 시대의 유물이 아니라 동시대와 더불어 생생히 호흡하며 살아 뛰는 작품으로 거듭 날수도 있는 것이다. 이 경우 각색이 상업적 이윤을 위한 한낱 소재이냐 아니면 인상적인 새로운 재해석이냐를 결정하는 것은 대부분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의 영화예술적 자의식이다. 즉 그들이 영화를 무엇으로 생각하냐에 달린 것이다. 

  

 

   삼총사는 고전 중의 고전이다. 지금까지 이미 수많은 연극과 영화가 만들어졌고 애니메이션 까지 부지기수에 이른다. 많은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지고 익숙한 작품을 다시금 만든다는 것은 사실 모험에 가깝다. 다시금 만들려는 사람은 작품의 내용 뿐만이 아니라 그보다 더 강고한 적을 상대해야 하는데 그것은 바로 유명세다. 유명세는 양날의 검이다. 즉 유명해서 사람들의 관심을 쉽게 얻을 수 있는 잇점은 있으나 그들에게 깊이 각인된 인상은 독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인상은 그들에게 두 가지를 가져다 주는데 바로 그것 때문에 새로이 만들어지는 작품은 그 목숨이 위태로워지게 된다. 즉, 인상은 그들로 하여금 자기가 그 작품을 처음 맛보았을 때 느껴던 환희를 재차 환기시켜줄 것과 그와는 반대로 그 인상을 넘어선 또 새로운 느낌 역시 맛보게해달라고 새로운 작품에게 요구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새로운 작품은 이 둘을 모두 다 만족시켜야 하는데 물론 이것은 여간 어렵지 않다. 너무 독창적이면 예전의 그 기분 그대로라는 '환기'를 줄 수 없어 원성을 살 것이고 그렇다고 '환기'에만 집중하면 허름한 재탕에 불과하다고 비난을 들을테니 말이다.  그러니까 고전을 다시금 만들려는 작가는 이러한 위험을 무릎써야만 한다. 이러한 위험은 마치 '나는 가수다'에서 탈락으로 인도하는 죽음의 가수라고 불러지는 '김건모', '임재범'의 노래를 경연에서 부르게 되었을 때 그 가수가 직면해야 하는 위험과도 같은 것이다. 

 

 

  때문에 여기서 작가는 우리말로는  '객기' 일본말로는 '곤조'를 부리게 된다. 자신이 믿는 영화의 정의에 따라서 말이다. 관객에게 새로운 삶의 비젼을 준다는 예술가적 '똘끼'로 충만한 작가라면 다른 것 신경쓰지 않고 고전의 재창조에 목숨을 걸 것이다. 그게 아니라 어디까지나 쉽고 편하게 관객에게 다가가는 것을 영화의 임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고전을 쉽고 빠르게 이해할 수 있게 만드는데만 신경을 쓸 것이다. 즉, 우리는 고전을 다시 어떻게 만드는가를 통해 작가의 자의식마저 유추할 수 있게 되는데 그렇다면 2011년 다시금 찾아온 '삼총사'를 만든 폴 W.S 앤더슨은 어떨까?  

 

  그의 필모그래피를 훑어보면 그가 아주 개인적인 작가 영화에서 대중적인 상업영화로 진행해 왔다는 것을 알게된다. 물론 개인적인 작가영화라고 내가 평가하는 '이벤트 호라이즌' 마저 상업적인 영화라는 평가가 가능하겠지만 그래도 앤더슨 감독의 개인 필모그래피만 기준해서 본다면 그 영화는 그래도 개인적 자의식이 많이 들어간 영화라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러던 그가 대중적인 상업 영화로 넘어왔을때 무엇보다도 그를 그렇게 인도했던 것은 바로 '게임'이었다. 그의 대표적인 상업영화 '레지던트 이블'은 일본의 게임회사 캡콥의 히트 게임 '바이오 하자드'를 영화화한 것이었다. 즉, 앤더슨에게 있어 지금 지속되고 있는 상업 영화를 떠받치고 있는 중추는 감히 '게임'이라고 말 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이 영화 '삼총사 3D'도 마찬가지다. 삼총사가 소개되는 도입부분에서 우리는, 특히나 아라미스가 등장하는 부분에서 어쩔 수 없이 게임인 '어쎄신크리드'를 떠올리게 된다. 액션의 연출이 참으로 비슷하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렇게 된 데에는 이 영화가 '3D'로 만들어졌다는 것도  한 몫할 것 같다. '3D'는 아무래도 관객에게 3D체험을 많이 하게 해 주어야 한다. 그러니 진지한 연출 보다는 게임과도 같이 현란하면서도 과장된 연출을 할 수 밖에 없다. 즉 여기에는 이 영화가 3D로 만들어졌다는 사실 자체에서 애초에 원작의 맛을 그대로 느끼게 해 줄 '환기'의 쾌락은 포기해야 한다는 한계가 지워져 있다. '3D' 자체가 원래 관객에게 작품을 보다 직접적으로 경험하게 만들어줌으로써 보다 쉽게 다가가려는 것 아닌가! 그러므로 앤더슨은 영화에 대해 후자의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이며 '삼총사 3D' 역시 거기에 충실하여 원작과 많은 다른 점을 보여준다. 

 

  여기서 원작과 무엇이 달라졌는지 살짝 비교해보자. 

  가장 눈에 띄는 것은 '트레빌'의 부재다. 트레빌은 영화에서 다르타냥의 아버지가 자신이 가장 존경하는 총사가 있다고 하면서 그 이름은 차마 말하지 못한 그 사람이다.(영화에 직접적으로 나오지는 않으나 분명 그러할 것이다.) 원작에서 트레빌은 총사대를 이끌면서 다르타냥에게 일종의 중심을 잡아주는 인물이다. 원래 원작은 그 트레빌과 추기경을 대칭구도로 하면서 트레빌에 속한 총사대와 추기경에 속한 친위대의 집단적 대립 구도다. 하지만 트레빌이 사라지면서 총사대 자체도 사라졌다. 즉 양강구도가 영화에서는 일강구도가 되면서 리슐리외 추기경이 왕마저 능가할 정도로 프랑스 전체의 권력을 가지고 있음이 더욱 강조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강조로 왜 추기경이 왕을 폐위시키려 하는지 그 동기는 약화되고 말았다. 사실 이미 왕은 추기경의 꼭두각시나 다름없는 허수아비에 지나지 않는데 말이다. 

 

 

  그렇게 총사대가 사라짐으로 인해 원작에서 총사대에서 만나서 결투에 이르게 되는 다르타냥과 삼총사의 만남 역시 수정될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영화에서는 다르타냥이 파리에 올라오자마자 그 삼총사와 오해에서 비롯된 만남을 가지게 된다. 재밌는 것은 아라미스와의 만남이다. 원작에서 다르타냥은 아라미스가 감추고 싶었던 한 아녀자의 손수건을 주워 돌려줌으로써 아라미스를 난처하게 만들고 결국 결투를 하게 되는데 영화에서는 '주차 위반 딱지'로 바꼈다. 아마도 종이가 손수건과 비슷한 얇은 것이니 상관없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초반에서 모든 갈등을 일으키는 원인은 바로 다르타냥이 고향에서 타고온 '버터컵'이라는 말이다. 살찌고 못생긴 말은 시골에서 갓 상경한 다르타냥을 상징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따라서 영화에서 말로 인해 일어나는 모든 갈등은 그 말과도 같은 시골 청년 다르타냥에 대한 도시 파리인들의 무시에서 비롯된 것임을 암시하는 것이다. 이것은 나중에 다시 말하겠지만 원작에서 뒤마가 다르타냥으로 하여금 갈등을 일으키게 하는 원인과 차이가 난다. 그리고 바로 그 때문에 원작과 영화는 아주 다른 길을 걷게 되고 말았다. 

  달타냥이 그들과 악연을 맺게 한 것은 바로 로슈포르' 때문이었다. 그를 뒤쫓다 그만 일이 꼬이고 말았던 것이다. 

                                                                                

 로슈포르 얘기가 나왔으니 하는 말이지만 이 영화에서 앤더슨에게 가장 실망한 것은 로슈포르의 묘사다. 로슈포르는 악역이긴 하지만 삼총사를 읽어보신 분이라면 느끼겠지만 작품 내내 미지의 인물로 남아있으면서 다르타냥에게 끊임없이 자신의 죄의식과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악마적 존재이다. 사실 로슈포르는 다르타냥에게 로버트 스티븐슨의 '지킬과 하이드씨' 처럼 또 하나의 분신 즉 하이드 같은 존재인데 이 영화에서는 로슈포르가 원작에서 가졌던 그 풍부했던 의미를 모조리 제거하고 그저 비열하고 무자비함만 강조한 단순한 악역으로 만들고 말았다. 그것이 가장 실망스러웠다. 하지만 이러한 아쉬움은 비단 로슈포르 뿐만 아니라 삼총사의 악역 전부에 미친다. 원작의 버킹엄 공작은 비록 적국인 영국인이지만(프랑스와 영국이 견원지간이라는 것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꽤 합리적이고 귀족다운 풍모를 보인다. 더구나 악역도 아니다. 하지만 영화는 완전 정반대로 만들어버렸다. 올랜도 블룸이 연기한 영화 속 버킹엄은 그지없이 오만하고 비열하기 짝이 없는 모습만 보여줄 뿐이다. 때문에 이러한 버킹엄과 프랑스의 여왕이 사랑에 빠진다고 생각할 수 없고 그래서 원작에서는 버킹엄과 프랑스 여왕이 연정이 싹터 사랑의 증표로 보내준 보석이 영화에서는 단순히 리슐리외 추기경이 여왕을 몰아낼 심산으로 거짓으로 꾸며낸 증거가 되고 만다. 

 

   그렇게 영화는 사실은 인간적이고 선한 인물들을 오히려 역전시키면서도 유독 밀레디만은 예외로 남겨둔다.  

 

   즉 원작에서 사랑 따위는 발톱의 때보다 못한 것으로 생각하며 오로지 자신의 이익을 위해 남자를 이용할 뿐인 밀레디가 영화에서는 다르타냥을 구해주거나 아토스에게 여전히 애정이 있음을 내보이는 등 오히려 인간적 색채가 가미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이후 여성의 지위가 그 때보다 격상되었다거나 해서 그리 된 것은 아니다. 차라리 페미니즘적 입장에서 보자면 원작의 밀레디가 훨씬 더 급진적이다. 그녀는 남성중심의 프랑스 사회에서 가장 위협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밀레디는 다르타냥을 비롯 삼총사에게 전혀 이해불가하면서 속수무책인 존재이기에 더 그렇다. 다르타냥마저 밀레디에게 유혹된다. 더구나 그녀는 다르타냥의 사랑인 콩스탕스를 죽인 장본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러한 밀레디의 모습은 그리스 신화에 나왔던 대표적인 악녀 '메데이아'를 연상시킨다. 그 메데이아는 크리스타 볼프에 있어서 완전히 재해석된 바 있다. 밀레디 역시 여성주의적 관점에서 완전히 재해석될 필요가 있는 여지가 많은 인물이다. 앤더슨이 이번 영화에서 그러한 것을 좀 보여주었으면 좋았을 것인데 아쉽게 느껴진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이 모든 인물의 뒤틀린 변형에는 한 가지 일관된 시선이 느껴진다. 그 시선은 물론 감독 자신의 것으로 그것이 향하고 있는 것은 바로 '귀족적인 것'이다. 즉 앞에서도 말했듯 원작과 영화가 뚜렷이 차이를 나타내는 지점은 바로 '귀족적인 것'에 대한 판단이다. 원작의 뒤마는 '귀족적인 가치'를 지지한다. 그는 특히나 귀족이 가지는 '명예를 소중히 하는 것'을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바로 다르타냥에게 나타난다. 다르타냥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바로 그 자신이 '귀족'으로 인정받는 것이기 때문이다. 누구든 그의 '귀족적인 것'을 무시했을 때 다르타냥은 언제나 발끈한다. 적국인 영국의 귀족이지만 버킹엄의 중후한 인간미도 그 때문이다. 하지만 앤더슨에게 있어서 귀족은 이미 지난 시대의 유물일 뿐이다. 영화속 다르타냥에게 있는 것은 자존심 뿐이다. '귀족적인 것'은 오로지 배신과 술수 그리고 협잡으로만 연결될 뿐이다. 다르타냥의 자존심은 어차피 그러한 귀족들에게 무시당할 필요없다는 일종의 당당한 선언 같다. 때문에 앤더슨은 적이지만 귀족적인 풍모를 여전히 보여주었던 버킹엄은 비열한 모사꾼으로, 다르타냥의 또 하나의 분신이자 언제나 공정히 승부를 겨루었던 로슈포르는 비겁하고 무자비한 악한으로 전락시켜 버린다. 바로 거기에서 뒤마와 앤더슨은 절대적인 차이를 보였으며 때문에 삼총사의 이야기는 달라질 수 밖에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삼총사'는 기존의 대강적인 줄거리만을 따왔을 뿐이고 그 밖의 배경이나 사건이나 그리고 인물은 모두 변형을 가했다. '3D'라는 한계상 오로지 관객에게 쉽고 빠르게 다가가는 것만을 목적했기에 원작에서 풍부했던 인간적 모습은 단순히 선과 악이라는 이분법적 대립 구도만을 강조하는 것으로 평면적이 되어버렸고 로슈포르나 밀레디의 묘사에 이르러서는 거의 안타까울 정도의 수준마저 보여주었다. 원작을 모른다면 그럭저럭 액션 영화로 즐길 수 있겠으나 원작의 팬이라면 글쎄 선뜻 동의하기 힘든 부분들이 많지 않을까 생각한다. 하지만 이것은 어쩌면 이 영화가 일종의 프롤로그와도 같기 때문에 생겨난 한계인지도 모른다. 다르타냥의 아버지가 끝내 '트레빌'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은 것이나 스포일러상 말할 수 없으나 가장 마지막 장면은(이것은 분명 '라로셸 포위전'을 다룬 것이리라) 앞으로 이 영화가 속편으로 이어질 것임을 강하게 암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원작의 팬으로서, 이 영화에서 느꼈던 아쉬움과 실망감은 다음 뒷 편이 나올때 까지 잠시 유보해 두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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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호 측 증인
고이즈미 기미코 지음, 권영주 옮김 / 검은숲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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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셨습니까? 

 길은 찾기 쉬우셨나요? 풀벌레 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이 적막한 밤엔 그저 나를 완전히 잊을 정도로 몰입할 수 있는 미스터리 소설 만큼 또 어울리는 것도 없을 것 같아서 하나 소개나 해 드리려고 오십사 청을 드렸습니다. 네, 테이블에 얌전히 놓여있는 바로 그 책입니다. 들어서 한 번 봐 보시죠... 

 

 

 맞습니다. 고이즈미 기미코... 

 이름에서 바로 알 수 있겠죠? 여성 작가라는 걸. 제목 '변호 측 증인' 말인데요, 어쩐지 아가사 크리스티의 '검찰 측 증인'을 살짝 비튼 것도 같지 않나요? 이건 제 생각이지만 어쩌면 고이즈미 기미코는 그것을 통해 같은 여성 작가인 아가사 크리스티가 바로 자신의 롤-모델임을 나타내려 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아니나 다를까, 이 소설의 주된 트릭 역시도 작가 자신 소설에서 그 작품을 직접 언급하고 있기까지 합니다만, 아가사 크리스티의 '애크로이드 살인 사건'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니까요. 뭐, 제가 말 할 수 있는 것은 이 정도까지겠네요. 트릭의 종류를 말하는 것 까지도 스포일러가 될 수 있다고 얘기하시는 분들이 계셔서 말이죠. 조심하지 않을 수 없네요. 그런데 그 말을 그대로 따르다보니 제가 이 책에 대해서 할 수 있는 말이  '그냥 읽으세요! 읽으시면 압니다!' 꼭 이것밖에는 없겠더라구요. 제가 뭐 나이키 신발 광고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읽으세요!'라고만 말하자니 너무 무책임하게 느껴지네요. 

 네, 그렇죠. 언제나 고민하는 지점이긴 하죠. 리뷰로서 소개와 독자의 읽는 즐거움이 서로를 다치지 않는 가운데 성립할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균형은... 여전히 쉬이 해결되지 않고 있기도 하구요. 특히나 이 소설의 경우는 더 그렇군요. 이 소설의 정말 뛰어난 점은 사용한 그 트릭 자체에 있거든요. 그런데 여기에 대해 함구를 해버리니 어쩔 수 없이 궁여지책으로 미치오 슈스케를 끌어올 수 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네, 얼마 전 우리나라에도 '달과 게'로 소개되었던 작가이기도 하죠. 그가 이 소설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더군요. "그 누구와도 공유하고 싶지 않은 전설의 걸작'이라고 말이죠.  맞습니다. 대단한 격찬이죠. 사실 이 작가가 이 소설에 대한 애정이 정말 큰 가 봐요. 해설 부분도 스스로 썼다고 하더군요. 그러니 저 격찬의 말도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진심에서 우러나온 말이 아닌가 싶어요... 그런데 읽고 그 트릭을 알게되면 슈스케의 말에 나도 모르게 수긍을 하게 되더라구요. 

  요즘 작품이냐구요? 아뇨, 처음 나온 건 63년이에요. 그런데 곧 절판되고 그렇게 기억에서 잊혀졌다가 뒤늦게 이 작품의 진가를 발견한 소수의 사람들 사이에서 '전설의 걸작'으로 회자되기 시작했고 결국 2009년, 그 입소문을 타고 다시 복간되기에 이르렀죠. 아시겠지만 작품이 수십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되살아 나는 경우는 두가지 뿐이죠. 많은 사람들의 간절한 염원이 있어서이든가 아니면 작품 자체가 고전으로 평가받을 만큼 그 가치가 높다던가... 네, 개인적으로 이 소설은 그런 가치가 있다고 봅니다. 물론 미스터리로서가 아니라 작가가 장치해 놓은 트릭 때문이죠. 

  도대체 그 트릭이 어때서 그러냐구요? 거기에 대해서 자세히 말 못한다는 거 아시잖아요? 

  그래도 말하라면 이렇게 말해야겠네요. 아마 분명히 당신도 그 책을 두 번 읽게 되리라고... 그건 내일의 태양이 뜨는 것 만큼이나 틀림없다고. 그리고 두번째 읽게 될 땐 정말 놀라게 되리라고... 왜냐하면 작가가 정말 아무런 속임수도 쓰지 않았다는 걸 알게 될테니까... 속은 건 바로 읽고 있는 당신 자신 때문이라는 걸 깨닫게 될테니까... 이렇게 말이죠. 

  다소 두리뭉실하게 이렇게 말할게요. 놀랍게도 이 책은 말이죠,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만들어요. 특히나 독서의 습관과 관련해서 말이죠. 그러니까 도대체 우리는 무엇을 읽고 있는가 이런거에요. 그래요, 당신은 무엇을 읽고 있나요? 그건 확실히, 오로지, 절대적으로 객관적인 외부의 텍스트일까요? 우리는 그렇게 다만 그 텍스트에 담긴 작가의 2차원적으로 새겨진 육성을 듣고 있는 것일 뿐일까요? 혹시 당신은 만화를 읽는가요? 만화에는 말풍선이 있습니다. 그 말풍선엔 그림 속 인물의 대사가 담겨지지요. 그런데 우리는 만화를 읽으면서 그려진 인물의 목소리를 듣는다고 생각합니다. 실제 들려오는 것도 같지요. 남자의 경우엔 남자 목소리가 여자의 경우엔 여자 목소리가 웃을 땐 웃음소리가 울땐 울음소리가 말이지요. 그런데 거기에 있는 것은 다만 쓰여진 글자들 뿐입니다. 거기엔 감각적 자극을 일으킬만한게 하나도 없어요. 그런데도 우리는 듣는 것 같습니다. 이것은 비단 그림이 있는 만화만이 아니지요. 우리는 소설을 읽을 때도 그와 비슷한 경험을 합니다. 이건 어째서일까요? 그런데 이 경험은 그리 오래된 역사를 가지고 있지 않지요. 왜냐하면 이러한 경험은 우리가 이른바 눈으로 읽는 '묵독'이라는 걸 하게되면서 부터 생겨난 경험이고 그 묵독이라는 것은 바로 근대 이후에 생겨난 경험이니까요. 그러니까 그것은 근대 이후에 태어난 소설과 비슷한 역사를 가진다고 해야겠군요.묵독이라 함은 자기 의식 내부에 연극 상연을 위한 하나의 무대를 만들어두는 것과 같지요. 그렇게 그것은 전적으로 내 의식 안에서 이루어지는 공연입니다. 물론 그 공연을 진행시키는 것은 외부의 책입니다만 그것은 연출가와 배우에게 주어진 대본 이상의 의미는 없는 것이죠. 그것을 관객으로 하여금 희노애락을 느낄 수 있도록 만들려면 전적으로 연출가의 연출과 배우의 연기가 필요합니다. 즉 의식 속에서 그것을 우리가 생생히 느끼도록 만드는 것은 전적으로 바로 우리 자신이라는 것이죠. 네, 고이즈미 기미코의 '변호측 증인'은 바로 그 사실을 우리에게 일깨워 주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독서라는 것이 그저 저자에서 독자로 가는 일방적 과정이 아니라 독자와 저자 쌍방이 하나의 합을 이루어 같이 만들어 가는 과정임을 다시금 깨닫게 해 주는 것이지요. 소설이 이루어지는 바탕으로써의 세계 자체는 바로 우리 자신이 만드는 것이며 소설이 제대로 된 이야기로서 존재할 수 있도록 만드는 규칙 조차 바로 우리 자신이 정하는 것이라는 걸 말입니다. 단 한 마디로 말해, 이 '변호 측 증인'은 독서라는 것이 무엇보다 '참여'라는 걸 일러줍니다. 모든 인간을 이성을 가진 독립적 주체로 보았던 근대에 이르러 태어난 소설이 새로이 가져다 준 독서 경험인 '묵독' 자체에 본래적으로 존재하였던 시선, 즉 읽는 자 역시 저자만큼이나 하나의 독립된 주체로 여기는, 그렇게 대화의 참여자로 바라보았던 바로 그것을 다시금 느끼게 합니다. 

  네, 그러고 보니 그러네요... 이 소설이 그렇게 소설의 태초부터 있었던 독자에 대한 본래적인 시선을 다시금 일깨우는 존재라면 그야말로 고생대의 삼엽충이나 암모나이트 화석 같은 것으로 볼 수도 있겠네요. 당신이 제대로 된 고생물학자라면 그러한 아주 귀한 화석을 발견했을 경우 꼼꼼하게 훑으시겠죠. 어쩌면 우리는 모든 텍스트를 바로 그렇게 바라보아야 할지도 모릅니다. 돋보기로 들이대듯 세밀하게 말이죠. 아시다시피 좋은 공연은 늘 대본을 제대로 소화시킬 수 있었을 때 가능하지 않던가요? 푸코가 괜히 '지식의 고고학'이란 말을 한 게 아니죠. 그래, 어떤가요? 고이즈미 기미코의 '변호 측 증인'을 통해 당신의 고고학적 태도의 출발을 연마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은데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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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1-10-28 13: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헤르메스님, 저 사진 어떻게 찍으신거예요?
아니 어디에서 저렇게 절묘한 손가락 사진을 찾으셨대요? ^^

진짜요,, 두번 읽게되리라는 말씀이시죠. 접수합니다~

ICE-9 2011-10-28 22:20   좋아요 0 | URL
아, 저 사진의 손가락은 'BAD FINGER'라고 비틀즈가 자신의 레이블 '애플'을 설립하고 처음 발탁해서 키운 그룹의 데뷔앨범 커버에요. 그 위에 책을 놓고 찍은 것이죠^ ^ 우리에겐 잘 알려진 'WITHOUT YOU'의 오리지널 원곡이 이들의 작품이죠.

그리고 반드시 두 번 읽게 되실 겁니다. 제가 보증할게요^ ^

노다웃 2011-11-16 0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왠지 필이 오네요. 이건 부디 제 맘에 쏙 들었음 좋겠어요. 생각보다 마음에 쏙 드는 미스테리 소설 찾기가 쉽지 않더라고요.

ICE-9 2011-11-16 10:12   좋아요 0 | URL
제가 노다웃 님의 취향을 모르기에 확신하기는 어렵지만 확실히 수작인 것은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이 소설의 진정한 뒤통수는 그 맞는 순간에 오는 게 아니라 어떻게 맞게 되었는가 깨닫는 순간에 오는데요... 진정한 장인의 기교는 드러나지 않는데 있다더니 과연 그렇구나 하는 걸 느끼게 되었습니다. 부디 노다웃님의 마음에도 들었으면 좋겠네요^ ^

2011-11-20 04: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펭클에서 요 리뷰 보자마자 알라딘 들어와서 변호측증인 주문했다죠.
전 이렇게까진 해석 못하겠지만, 역시 엄청난 책이었습니다. :)
오랜만에 뒷통수 치는 맛도 좋았고.
그치만 두 번은 읽지 않았네요. 그저 앞으로 돌아가서 이상하게 생각했던 부분들 되짚어보면서 아하, 했던 정도. 내용 잊어버릴 쯤에야 다시 읽어볼 것 같은데, 그게 언제가 되려나요. 너무 강렬해서 잊혀지지가 않네요. 보통 읽고나서 범인이며, 트릭이며, 추리며 다 잊어버리는 편인데.'-'
오랜만에 신간 미스터리 읽어서 좋았어요. 추천 고맙습니다. 또 괜찮은 거 보이면 한번씩 찔러주세요. ㅎ

ICE-9 2011-11-22 23:08   좋아요 0 | URL
앗 교님! 들려주셨군요^ ^
마음에 드셨다니 정말 다행입니다.
저는 중반에서 내가 지금까지 뭐 읽은거야? 하는 생각에 정말 거기서 바로 앞으로 달려가 눈에 불을 키고 내가 어디서 속았는지 읽었어야 했어요. 흑흑 제 기억력이 짧아서 그런걸지도 모르겠어요. 아무튼 교님 정말 반갑습니다. 또 좋은 작품 찾게되면 바로 알려드릴게요^ ^

2011-11-23 18:07   좋아요 0 | URL
저야말로 반갑고 고맙습니다 :)
그나저나 헤르메스님이 기억력이 짧다면, 전 없는거나 마찬가지일듯 ㅋㅋㅋ
 
부호형사
쓰쓰이 야스타카 지음, 최고은 옮김 / 검은숲 / 2011년 10월
평점 :
절판


 

  하하하! 이거 정말 걸작이다. 간만에 아주 날 자지러지게 만드는 책을 만난 것 같다. 생각해보니 김미령 작가의 '완득이' 이후 처음이다.  마치 IQ178의 천재가 작정을 하고 글을 쓰면 얼마나 자유자재로 능수능란하게 문장을 다룰 수 있는가를 보여주기라도 하듯 장면 전환이 드리볼을 하는 '슬램덩크'의 서태웅 만큼 빠르고 미스터리이면서도 독자의 웃음을 위해 과감히 그 규칙을 파괴하는 모습이 강백호의 리바운드 만큼이나 파격적이고 게다가 정말 웃기려고 작정하여 심어놓은 개그 코드들이 윤대협이 쏘는 3점 슛 처럼 언제 어디에서 느닷없이 날아올지 몰라 무방비한 상태에서 자지러지게 만드니 지하철에서 혹시라도 미친놈이란 소리를 듣지 않도록 주위 상황을 살펴가며 접해야 하는 게 '나꼼수'만은 아님을 깨닫게 한다. 왠지 주성치 스타일의 셜록 홈즈를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그 책이 바로 '부호형사'다. 

 

 '시간을 달리는 소녀'나 '파프리카'처럼 SF작가로 혹은 '섬을 삼킨 돌고래'나 '최후의 끽연자' 처럼 풍자작가로 유명했던 쓰쓰이 야스타카가 무슨 생각이 들었던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전혀 예고도 없이 갑작스럽게 내어놓았던 네 개의 미스터리 소설 중 가장 처음 작품이 바로 이 '부호형사'다. 일본드라마를 즐기시는 분들이라면 이 제목이 그리 낯설지는 않을 것이다. 후카다 교코 주연의 드라마로 만들어져 우리나라에서도 케이블로 방영된 적이 있기 때문이다. 내게는 영화 '이겨라 승리호(일본 제목으론 '얏타맨')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캐릭터이기도 한 섹시봄버 하면서도 한 편으론 애잔한 도론죠 히메를 완벽하게 구현했던 그 후카다 교코의 주연작이라 보지 않을 수 없었던 드라마였기도 했다. 아무튼 바로 그 '부호형사'의 원작이 바로 이 소설이다. 드라마를 보면서도 설마 그 드라마에 원작이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다. 아니 행여 원작이 있더라도 그것이 미스터리 소설이었으리라고는 더욱 생각못했다. 설정과 캐릭터가 너무나 만화적이었기 때문이다. 드라마를 모르시는 분들을 위해 간단히 설명하자면 혹시 '개구리 중사 케로로'를 보셨다면 거기 나오는 나라그룹의 외동딸 '나라'가 그대로 형사가 되었다고 생각하면 된다. 그러니까 그 나라가 오매불망 짝사랑하는 우주와 어떻게든 데이트를 하기 위해 천문학적인 돈을 쓰듯이 미스터리 사건을 그렇게 어마어마한 돈으로써 해결하는 것이다. 뭐, 간단히 예를 들자면 밀실 트릭을 알기 위해 회사를 통채로 설립한다든지 서로 적대적인 갱들이 도시에서 회합을 가지는데 감시하기 곤란하니까 최고급 호텔을 통채로 하나 빌려서 거기 묵게 만든다든지 뭐 그렇게 사건을 해결한다. 이 어찌 실소를 금하지 않을 수 없는 만화적인 설정이 아니라고 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런데 이 소설을 일본의 3대 SF 작가로도 불리는 바로 그 쓰쓰이 야스타카가 썼으리라곤 더더욱 생각 못했다. 그러니 이 '부호형사'는 내 이마에 딱밤 세 대를 놓듯, 쓰리 콤보의 충격과 함께 찾아온 것이다. 

 

 한 마디로 이 책은 정말 재밌다. 오로지 IQ 178의 지능을 총동원하여 독자들로 하여금 배꼽을 잡고 웃으며 뒹굴거리게 할 목적으로 쓰여진 것만 같다. 바나나만 보면 개그 본능을 주체하지 못해 그것을 밟고 넘어지기 위해 달려가는 케로로 처럼 야스타카도 실소든 폭소든 어쨌든 웃기기 위하여 감행할 수 있는 것은 뭐든, 그것이 실험이든 파격이든 다 감행한다. 마치 MTV의 현란한 뮤직비디오 처럼 장면을 능수능란하게 전환한다든지 잘 나가다다 갑자기 독자를 향해 말을 툭 건넨다든지 얘기의 맥락과 전혀 상관없이 덩실덩실 춤을 추며 나오는 서장이라든지... 아무튼 야스타카는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독자들이 마음껏 즐길 수 있는 '개그 콘서트'를 보여준다. 하지만 그렇다고 미스터리적으로 약한 것도 아니다. '로트레크 저택 살인사건'에서 보여주었던 솜씨 답게 물론 여기서도 기가 막히는 트릭이 한가지는 있다. 그것이 바로 두번째 에피소드 '밀실의 부호형사'다. 아마도 그 트릭을 풀기란 정말 꽤 곤란할 것이다. 소설의 주인공 형사가(아참! 여기서 주인공 형사는 드라마처럼 여자가 아니고 남자다. 최고 재벌의 외동아들이자 헌신적으로 애정을 보내는 미모와 지성을 두루 완벽하게 소유한 약혼녀까지 있는 그야말로 전생에 은하계를 구한 남자다.) 그 트릭을 풀기 위해 회사 하나를 세워야 했던 것이 어쩐지 이해가 될 정도로 어렵다. 흥미가 있으면 한 번 도전해 보는 것도 이제 길어지는 무료한 밤을 위해 좋지 않을까 한다. '부호형사' 드라마 팬이라면 물론이고 간만에 한 번 웃어보고 싶은 분들 역시에게도 적극 추천드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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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1-10-28 1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기걸려 비실거리면서, 머리 멍한 제게 꼭 필요한 책이군요.
음...... 헤르메스님을 저의 지름신으로 명명해드려야 할 듯. ㅠ
제가 엄청 좋아하는 장르 소설 분야를 이렇게 매혹적으로 쓰는 분은 정말 드문데 말이죠. 클났네요~ ^^

ICE-9 2011-10-28 22:24   좋아요 0 | URL
이런, 감기걸리셨군요.
그런 상황이라면 더욱 더 이 책의 가벼움이 도움이 되실 듯 해요...
옆에 삶은 고구마 놓아두고 먹으면서 만화책 읽는 듯한 느낌도 갖게하거든요^ ^ 준비하시는 일은 잘 되고 계신지요? 늘 좋은 말씀을 해주셔서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어요. 얼른 쾌차하시길 바랄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