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참치여자 NFF (New Face of Fiction)
사비나 베르만 지음, 엄지영 옮김 / 시공사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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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멕시코는 FTA 때문에 특히나 우리 나라에서 아주 유명한 나라가 되었다. 오랜 미국과의 NAFTA로 인해 소득 불균등화는 심해져 전체 멕시코 국민 중 51.3%가 최저생계비에도 못 미치는 소득으로 겨우 연명해 나가고 있는 멕시코. 바로 이런 멕시코가 현재 FTA를 비준한 우리 나라에도 역시 닥쳐 올 미래가 될 우려가 높기에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이럴 때 마침 멕시코의 여류 작가의 소설 한 편이 우리 앞에 도착했다. 카를로스 푸옌테스 이후로 오랜만인데 바로 사비노 베르만의 '나, 참치 여자'라는 작품이다. 

 

 

 

     제목이 참 특이하다. 

     언뜻 영화 '타짜'에서 '나 이대나온 여자야'라는 김혜수의 대사가 떠 오른다. 원래 제목은 '세상의 중심으로 잠수해 들어간 여자'였다. 이 소설은 주인공 여성인 카렌의 자전적 기록의 형식을 하고 있는데 소설 말미에 가면 왜 카렌이 자신의 소설 제목을 그렇게 달았는지 이유가 나온다. (그녀는 자신의 기록에 어울릴 만한 제목을 모두 다섯가지 정도 생각했고 그 중 가장 마지막 것을 고른 것이다. 거기 나온 다섯 개의 후보 제목중 가장 첫번째 있는 것이 '나와 참치'인데 카렌은 그 옆에 '나와 참치'가 주인공이니까 가장 적절한 제목이다 라고 써 놓고 있다. 그러니까 한국판 제목은 바로 그것을 살짝 변형한 것이며 '참치 여자'가 된 것은 이 소설이 무엇보다 한 여성 개인의 정체성을 형상화한 작품이기 때문에 그에 걸맞게 변형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까 이건 잠수 얘기가 아니라 참치 얘기인 것이다. 그것도 참치 산업 자체의 얘기인 것이다. 

 

    멕시코의 참치 산업은 실제로 유명하다

    멕시코는 현재 세계 제12위의 참치 생산국이다. 바로 그 멕시코의 마사틀린의 참치 공장이 이 작품의 주요 배경이다. 소설은 카렌의 이모가 언니의 죽음으로 인해 유산으로 이 참치 공장을 상속받아 경영을 위해 멕시코로 오는 것으로 부터 시작된다. 거기서 이모는 거의 야생 소녀와 같은 꼴을 하고 말은 하나도 할 줄 모르는 주인공 카렌을 발견한다. 인도에서 발견되었다는 늑대 소녀와도 같은 카렌을. 더구나 그녀에게는 학대받은 흔적까지 있다. 이모는 언니가 밝힐 수 없었던 혈육이 아닐까 싶어 카렌을 거두고 자연의 세계에서 문명의 세계로 편입을 시킨다. 하지만 카렌은 남들과 달랐다. 그러니까 보통 사람들의 사고방식을 가진 아이가 아니었다. 그녀는 보통 사람이 하듯이 사교적 관계를 맺는 것이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아예 사고 자체가 달랐다. 무엇보다 카렌은 스스로의 생각을 전혀 꾸밀 줄 모르는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존재였다. 그러니까 태양과 바다가 그 존재를 드러내는 것 처럼 자연의 정직성을 간직한 존재였다.  말하자면 카렌은 인간에 있어서 하나의 타자인 '자연' 그 자체의 상징이었다. 이모는 이 카렌을 하나의 인간으로 '편입'시키는 한편 참치 공장도 경영해야 했는데 말썽이 생겼다. 바로 미국 때문이었다. 정확히는 미국의 생태주의자들이 참치를 잡을 때 돌고래까지 죽인다고 해서 멕시코에서 수입되는 참치 거부 운동을 일으켰기 때문이었다. 이모는 절대 그런 일이 없었고 또 그렇지 않다는 걸 알리기 위해 '돌고래 안전' 라벨까지 붙여 판매하지만 미국내 멕시코 참치 불매 운동은 사그러들지 않는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보니 이 모든게 다 미국 참치 회사와 생태주의자들이 협력한 음모였다. 그들은 자국의 참치 시장을 멕시코에게 빼앗기지 않으려고 그런 말도 안되는 이유를 붙여 불매를 했던 것이다. 덕분에 이모의 참치 공장은 심각한 타격을 입게되고 할 수 없이 구조조정에 들어가 대량 해고 사태가 일어난다. 그리고 참치 공장이 있던 마사틀란에는 그 해고로 인해 거지들이 속출한다. 그런데 이것은 소설 속 얘기가 아니라 정말로 있었던 현실 속 이야기이도 하다. 즉 사비나가 이 실제 이야기를 소설 속에다 담으려고 한 것은 미국과 멕시코 사이의 불평등 보다 정확히는 '일방적 착취'관계를 나타내기 위해서인 것이다.

 

   바로 이러한 관계가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 

   일부러 다소 상세하게 앞부분의 줄거리를 소개했다. 이 소설에는 정확히 세 가지 관계가 구조적으로 중첩되어 있다. 가장 큰 범주별로 순서대로 나열해 본다면 자연과 인간의 관계, 그리고 미국과 멕시코의 관계 마지막으로 나와 너의 관계. 이렇게 세 관계가 구조적으로 중첩되어 있는 것이다. '중첩'이란 단순히 포개어짐 뿐만아니라 하나의 이야기로 그 관계적 본질이 어떤지 모두 동일하게 드러난다는 의미로 쓴 말이기도 하다. 그렇게 '나, 참치 여자'란 카렌 자신의 육성으로 진행되는 '나 홀로' 이야기이지만 결국 그녀의 이야기를 통해 인간이 자연에게 어떠한지 미국이 멕시코에게 어떠한지 내가 너에게 어떠한지 그 본질을 한꺼번에 드러내는 것이다. 사비나는 바로 그 세 관계의 본질을 드러냄에 있어서 무엇보다  형식과 내용 두 가지 측면에서 접근한다. 형식면에서는 '말'로써 그리고 내용면에서는 '카렌과 참치'와의 관계를 통해 접근한다. 그리고 그 둘을 통해 관계의 본질을 깨달음으로써 카렌이 궁극적으로 찾아내는 정체성이 바로 '참치-여자'라 할 수 있다. 

 

    먼저, 형식면에서 '말'을 살펴보자. 

    앞서도 카렌은 언어능력이 떨어진다고 말했다. 그것은 무엇보다 자연적 정직성을 가진 그녀가 그냥 생각한 것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지 않고 꾸미거나 돌려서 말해야 하는 것에 어려움을 느끼기 때문이다. 즉 그녀는 '비유'라는 것을 싫어한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예 : 동물들을 죽여서 그걸로, 아니면 그걸 조각내어 팔아서 돈을 버는 방법을 배우는 강좌의 제목은 '축산경제학'이었다.  

   예 : 호모사피엔스들이 동물들을 죽일 수 있는 권한을 설명하는 수업은 '인간 지능'이었다. 

                                                                                       (P.117) 

   즉 카렌이 싫어하는 것이 비유로 말했을 경우 그 진실된 측면이 축소되거나 혹은 다른 것으로 되어 완전히 배제되기 때문이다. 결국 이러한 완곡어법이 가지고 있는 공통점은 모두 그것이 가지고 있는 폭력성을 은폐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것을 습득하는 자로 하여금 또는 그 자체를 운영하는 자로 하여금 스스로 자신을 정당화할 수 있도록 해주기 때문이다. 일례로 가장 잔인한 도축 방법을 만들었던 카렌의 도축과 교수 헌팅턴은 '인도적인 도축 촉진 위원회'가 수여한 '훈장' 을 받은 자였다. 바로 여기의 '인도적'엔 도축시 벌어지는 폭력성이 도덕적 정당성으로 위장되어 은폐되어 있는데 이런 까닭으로 카렌은 '비유'를 혐오하는 것이며 결국 이러한 비유가 그래도 통용되는 것은 오로지 하나의 일방적 관점에서 규정하기 때문이라는 것으로 소설은 나아간다. 

 

    바로 데카르트의 사유의 공격을 통해서 말이다. 

  

    안 그래도 데카르트는 포스트모더니즘에 와서 공격을 많이 받았던 철학자였는데 사비나 베르만은 아예 카렌의 입을 빌어 데카르트의 모든 책을 불질러 버리자라고 선동까지 하고 있다. 왜냐하면 사비나가 보기에 데카르트야 말로 나와 너의 관계를 철저하게 분리하여 오로지 나만 있고 너는 한낱 대상에 불과한 것으로 만듦으로써 그 무엇보다도 '서로' 사이에 착취적 관계를 낳게끔 근거를 제공한 철학자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이 소설은 인간과 동물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흘러가므로 사비나가 데카르트를 공격한 주 요인 역시 데카르트가 동물을 어떻게 바라보았느냐에 달려있는데 (또한 데카르트의 동물에 대한 사유는 물론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에서 그대로 이어져 온 것이기도 하다.) 그 데카르트가 동물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동물은 기계 혹은 AUTOMATA(자동장치)이며 즐거움이나 아픔 뿐 아니라 그 어떤 것도 경험하지 못하는 존재라고 했었다. 물론 칼로 베면 비명을 지르고 뜨거운 것을 가져다 대면 달아나려고 몸부림 치겠지만 그것은 시계가 태엽으로 돌아가는 것과 같은 원리의 반응일 뿐이다 

   라고...  

 

   바로 여기서 사비나는 데카르트적 사유의 위험성을 보는 것이며 결국 이러한 자기중심적 사유가 말에 있어서 비유를 가지고 온다고 보는 것이다. 왜 자기중심적 사유가 비유를 불러올 수 밖에 없는가에 대해서 사비나는 작중 인물 '야스코'의 목소리를 빌려 이렇게 말한다. 

   아마 스스로 뭔가에 의해 보호받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닐까? 그냥 내 생각일 뿐이야. 현실은 언제나 두려움을 주니까 (P.331) 

   비유는 두려움에서 비롯된다. 

  왜냐하면 자기중심적 사유는 자기를 제외한 모든 대상을 지배하느냐 지배당하느냐의 획일적 시각으로 바라볼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사비나가 보는 데카르트적 주체는 그 앞에 놓인 대상은 그냥 단순한 사물로 보는 주체이며 내가 규정해야 하지 나를 규정할 수는 없다고 여기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즉 상호 이해와 배려에 바탕한 포용의 주체가 아니라 가지느냐 못가지느냐만 존재하는 획득의 주체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기댈 곳이 오로지 자신 밖에 없으므로 그 주체는 당연히 불안에 빠질 수 밖에 없다. 바로 이러한 데카르트적 주체가 작품 속에 과도하게 넘쳐나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자국의 참치 시장을 방어하고자 말도 안되는 이유로 멕시코를 핍박하는 미국이요 도축당하는 동물들이 느끼는 감정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효율성만 추구하는 헌팅턴이요 역시나 이윤만 있다면 타인의 삶이든 윤리든 상관않는 카렌의 동업자 굴드 또한 마찬가지고 마사틀란의 경제적 어려움을 해결해준다는 공약으로 표를 얻어 요직에 올랐으나 오르자마자 나몰라라 하는 멕시코 장관들이 그렇고 또한 카렌 참치 공장의 페냐 역시 마찬가지다. 거기다 이 모든 데카르트적 주체들은 다 남성들이다. 즉 '참치-여자'에서 여자는 바로 이러한 남성으로 상징되는 데카르트적 주체들을 벗어난 존재라는 의미 역시 있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말'에서 구조적으로 중첩된 세가지 관계의 본질이 드러난다. 바로 그것은 '일방적 착취'이다. 하지만 본질은 때로 상황에 따라 그 드러나는 모습이 얼마든지 다를 수 있다. 거기엔 데카르트적 주체들의 마치 타자를 배려한다는 듯한 위선적이며 교묘한 위장과 그로인해 자발적 협력을 이끌어내려는 전략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나타날 수 있는 모습마저 살피는 것이 또한 필요한데 사비나는 그것을 바로 내용면에서 말하는 것이다. 

 

   리뷰라는 형식상 길이의 한계로 다 얘기할 수는 없고 중점적되는 것만 말하자면  바로 카렌과 참치와의 관계다. 카렌은 헌팅턴에게서 퇴학을 당한 뒤 이모를 도와 참치공장 경영에 뛰어드는데 거기서 자신이 도축학 수업을 받다가 느낀 문제점을 되도록 수정하기 위하여 참치를 인도적으로 포획하는 방법을 연구하게 된다. 그러다 교활하고 냉혹한 자본가 굴드와 동업하고 나서는 참치의 포획이 아닌 참치 양식으로  나아가게 된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카렌의 과정이 정확히 '카렌과 헌팅턴과의 관계'와 '카렌과 굴드와의 관계'에 대응한다는 것이다. 

 

    즉, 대학에서 도축학 수업을 받을 때 헌팅턴이 카렌에게 했던 일방적이며 폭력적인 관계는 그대로 포획으로 이어지는 카렌과 참치와의 관계와 대응되는데 그런 관계임에도 헌팅턴이 '인도적' 훈장을 받았듯이 카렌 역시 그런 칭호를 얻는다. 말하자면 모두 '위선적 관계'인 것이다. 두번째 굴드는 카렌에게 주도권도 주고 그녀가 원하는 대로 마음껏 참치 양식을 하도록 하지만 카렌이 자신이 그어놓은 선을 넘으려 하자  공격적으로 나온다. 즉 굴드가 카렌에게 인정했던 자유는 어디까지나 자신이 인정한 한계 내에서의 자유였던 것이다. 이것은 그대로 카렌의 '참치양식'과 대응한다. '참치양식'은 가장 참치를 배려하고 자유를 허용하는 것이긴 하지만 그것도 어디까지나 잡아먹기 가능한 지점까지의 한계 내에서의 자유인 것이다. 여기에서 보듯이 헌팅턴과 굴드에게 있어 카렌은 카렌에게 있어 참치와 마찬가지인 존재였던 것이다. 그렇게 결국 카렌과 참치는 동일한 존재였고 그렇게 '참치-여자'란 카렌의 정체성 자체를 의미하는 말이기도 한 것이다. 이처럼 카렌은 서로 다른 과정을 거쳤지만 그 모든 과정에 있어 본질은 변한 게 없었다. 카렌은 그토록 동물을 위하고 배려한다고 했지만 그녀 역시 여전히 헌팅턴과 굴드로 대표되는 데카르트적 주체의 본질을 벗어날 수 없었던 것이다. 사비니는 결국 이러한 내용적인 면을 통해서 점진적인 변화는 아무것도 가져다주지 못하며 결국 근본적인 변화 혹은 탈주 만이 그 벗어남을 가능하게 함을 보이고 있다. 

 

   이 근본적인 변화 혹은 탈주는 무엇인가

 

   바로 여기서 정체성의 문제가 나오게 된다.  즉 정체성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것, 새롭게 하는 것만이 데카르트적 주체로 부터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카렌의 정체성은 도대체 무엇인가? 그건 이모로 인해 '인간'으로 편입되고 헌팅턴과 굴드에 의해 만들어진 그렇게 '인간 사회' 자체로 부터 규정된 '참치여자'로서의 정체성이었다. 즉 카렌이 이모에 의해 인간의 언어를 배우고 예절이라는 것을 학습할 떼 그녀는 이미 종국에는 벗어나야 할 데카르트적 주체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러므로 그녀가 정체성의 근본적 변화를 이루기 위해선 그 모든 시초이자 '인간'에 편입시킴으로써 데카르트적 주체로 나아가게 했던 그렇게 인간 문명 자체의 상징이기도 한 '이모'의 죽음이 있어야만 했던 것이다. 바로 그 '이모의 죽음'으로 인한 단절을 통하여 카렌은 결국 사실 그 존재였으나 '인간'에 편입됨으로써 타자가 되어버린 '자연'으로 돌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바로 소설의 마지막 장면, 말 그대로 세상의 중심으로 잠수해 들어간 장면의 의미인 것이다. 

 

   근본적 변화 혹은 탈주가 소설에서 말하듯 이렇게 근본적 단절을 통해서만 이루어진다면 구조적으로 중첩된 세 관계 역시도 먼저 근본적 단절이 있어야만 새로운 변화가 가능하리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정치적으로 해석한다면 사비니는 멕시코가 새롭게 될 수 있으려면 무엇보다 미국과의 관계를 끊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으로 볼 수 도 있다. 이러한 단절은 무엇보다 이전까지의 내 정체성 자체를 파국적으로 지워 일종의 TABULA RASA, 즉 백지상태로 만드려는 것이니 훗설의 '에포크'와도 같다. 그렇게 지금까지 스스로 규정해 온 나를 버리고, 획일적 진리의 집착 마저 버리고 오로지 열려진, 그렇게 포용하려는 나가 되는 것. 아마도 이것이 새롭게 변화된 '참치여자'(지배의 대상이었던 참치와 역시나 같은 지배의 대상이었던 여자를 스스로의 정체성으로 삼는 것. 그렇게 타자를 자신에게로 받아들이는 것) 의 의미이지 않을까 싶다. 사비니가 주제로 나아가며 보여주는 논리의 전개는 써 온 바와 같이 꽤 정연한 편이다. 하지만 나는 작가가 멕시코인이라서 또한 그 나라가 우리의 미래가 될지도 모를 나라라서 다소 분석적으로만 접근했는데 내 글이 어쩌면 그런 인상을 주었을지 모르지만 그렇게 딱딱하거나 재미없거나 하지는 않다. 이야기가 참신하고 흥미롭게 때문에 그 자체로도 얼마든지 재미를 느낄 수 있는 소설이다. 하지만 행여 그 참신성이 너무 낯설어서 혹시 다가갈 수 없는 분들을 위해 또 그것으로 외면된다면 안타깝기도 해서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주제넘게 분석해서 도움삼아 두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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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니볼 - Moneyball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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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흔히 야구를 인생에 비유하곤 한다. 아마도 그걸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샘 레이미가 감독했고 케빈 코스트너가 주연했던 영화 '사랑을 위하여(1999)'가 아닐까 생각된다. 거기서 프로야구의 투수이자 야구만이 인생의 전부였던 주인공은 이제 마지막 게임을 치르고 있다. 영화는 노히트 노런의 퍼펙트 게임을 향해 완투하는 현재의 모습과 그의 과거의 모습을 번갈아 보여준다. 그의 과오 실패 상처 등등으로 점철된 그의 과거의 모습을. 거기서 그는 마치 그러한 과거의 상흔을 지우려는 듯이 하나 하나 힘차게 볼을 던진다. 그러니까 지금 그가 던지는 하나의 볼은 그 모두가 몰려드는 아픔과 죄의식을 지우려는 욕망의 몸짓이다. 그래서 그의 퍼펙트 게임은 그대로 인생 전체를 성공적으로 봉합하는 것이 될 것이다. 샘 레이미가 이토록 인생과 야구를 조화롭게 연결시켰으면서도 결국 이 영화가 실패하고 말았던 것은 케빈 코스트너가 연기를 못해서도 샘 레이미의 연출이 모자라서도 아니었다. 정작 더 큰 원인은 다른 데 있었다. 과거의 그 상처를 아픔을 포용하려 든다기 보다는 오히려 지우기에 급급했기 때문이다. 그러한 지극히 수비적인 인생에 대한 태도가 정작 주인공을 약하게 보이도록 만들었으며 때문에 관객의 공감을 얻는데 실패했기 때문이었다. 

   올해 다시 샘 레이미의 '사랑을 위하여'처럼 다시금 야구를 통하여 인생에 깊이 새겨진 과거의 상처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하는 영화가 나왔는데 그것이 바로 브래드 피트가 주연하고  아론 소킨이 각본을 쓰고 베넷 밀러가 감독한 '머니볼'이다.  

  

  이 영화는 머니볼 이론을 이용하여 약체이자 가난하기 그지없는 구단인 오클랜드 애슬레틱스가  미국 야구 역사상 140년만에 처음이라는 '20 연승'이라는 대기록을 이루게끔 만든 단장 빌리 빈의 실화를 다루고 있지만 영화가 정작 주목하는 것은 그것이 아니다. 영화가 더 주의 깊게 다가가는 것은 빌리 빈이 가지고 있는 과거의 실패에 대한 기억이며 그것이 현재의 그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그가 그 실패를 어떻게 대하고 있느냐이다. 그러니까 다시 말해 영화가 주목하는 것은 현재에도 여전히 홀로 타석에 들어서서 쳐낼 수 있을까 두려움에 떨며 날아올 공을 기다리고 있는 고독한 타자 빌리 빈의 모습인 것이다. 

   영화는 처음부터 이 태도를 강조한다. 그러니까 애슬래틱스가 플레이 오프전 우승 여부를 놓고 싸우는 그 순간,  단장인 빌리 빈은 그 시합장에 있지 않고 텅 빈 구단 운동장 관객석에 홀로 있는 것이다. 그리고 우승이 좌절되자 카메라는 분노에 차서 홀로 자동차를 타고 이리저리 누비는 그의 모습을 담더니 그나마 있는 스타급 플레이어들 마저 줄줄이 트레이드 되고 현재 가용한 비용으로서는 도저히 제대로 된 팀을 꾸릴 수 없음을 체감하는 그 순간에 영화는 기다렸다는 듯이 각광받는 기대주였으나 시합에 참가하자마자 형편없이 몰락해 버린, 이제 빈에게는 트라우마로 남아있는 그 기억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영화는 내내 애슬래틱스를 강한 팀으로 만드려는 그 모든 노력들이 모두 그 과거의 실패로 부터 달아나려는 노력에 다름아님을 관객에게 지속적으로 각인시킨다. 그리고 드디어 이 영화가 정말은 무엇을 말하려 하는지 보여주는 장면이  나오게 된다. 그 장면이 바로 빌리 빈의 딸이 기타를 구입하는 과정에서 불러주는 노래를 빌리 빈이 듣는 장면이다. 그렇게 LENKA의 'THE SHOW'를 들으며 빌리 빈은 자신의 삶이 그 노래의 가사와 똑같다는 것을 깨닫는다. 

 

 I'm just a little bit caught in the middle 

 Life is a maze and love is a riddle 

 I don't know where to go, can't do it alone 

 I've tried and I don't know why 

  
 I'm just a little girl lost in the moment 

 I'm so scared but I don't show it 

 I can't figure it out, it's bringing me down 

 I know I've got to let it go 

  and just enjoy the show 

 

  어쩌면 이 가사를 토대로 빌리 빈의 삶을 형상화한 것은 아닐까 싶을 정도로 노랫말은 정확히 현재 빌리 빈의 삶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그러니 그 노래를 듣는 가운데 뭔가 마음에 덜컥 와 닿아버린 듯한 표정을 빈이 짓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영화 '머니볼'은 빌리 빈의 노력과 성공이 아니라 과거의 상처를 가진 사람은 어떻게 그것을 극복해 나갈 것인가를 담아낸다. 빌리 빈이 자신의 과거를 통해 정말 두려워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예측불가능성'이다. 그것은 모든 스카우터로 부터 최고의 기대를 받았으나 정작 시합에 임해서는 형편없는 모습만 보여준 자신의 과거 경험 그 자체에서 절절히 느낀 것이기도 했다. 그래서 빌리 빈은 '머니볼' 이론에 매달려 오랜 시간의 경험과 감을 무시한다고 항변하는 자기 팀의 스카우터 앞에 예측 가능하다는 얘기는 하지말라고 당당히 말할 수까지 있는 것이다. 이 '예측불가능함'은 그의 두려움 근저에 자리잡고 있으며 그가 브랜든의 머니볼 이론에 매달리는 것도 사실은 그 때문이다. 다른 것은 보지 않고 오로지 '출루율'이라는 드러나는 기록에만 의지하는 머니볼 이론은 오로지 예측 불가능한 것으로 넘쳐나는 이 상황에 있어 그나마 '기록'이라는 예측 가능한 좌표를 제시해 주기 때문이다. 칠흙 같은 어둠 속에 문득 홀로 밝혀진 등대 불빛과도 같이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예측 가능한 자료들을 말이다. 바로 그랬기에, 그 자신 가장 두려워하는 예측불가능에 그나마 구원의 빛을 던져준 것이었기에 그는 그 누구의 반대와 저항에도 굴하지 않고 매달렸던 것이다. 이것은 거꾸로 빌리 빈이 얼마나 예측불가능성을 두려워하는지에 대한 반증이기도 하다. 

   하지만 영화는 그 예측불가능성을 벗어나려 머니볼 이론의 매달림이 과거 상처의 치유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완전히 과거의 상처를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그저 또 다른 것으로 도피하는 것일 뿐이다. 그것을 영화는 대표적으로 20연승이라는 140년만의 대기록이 막 이루어지려는 현장의 모습을 통해 보여준다. 시합에 지는 것에 대해 극도의 공포를 가지고 있는(당연히 그것이 과거의 상처를 환기시키기 때문이다.) 빌리 빈은 그 어떤 시합도 관전하지 않고 그 시간을 언제나 홀로 차 속에서 보낸다. 카메라는 운전하는 그를 화면에 꽉 차도록 담음으로써 그 '홀로'라는 고립감을 더욱 더 강조한다. 20연승이 이루어지는 그 시간에도 빈은 그러고 있었다. 그런데 가족들에게서 전화가 온다. 축하한다고. 라디오를 켜니 어마어마한 점수 차이로 자신의 팀이 이기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번에는 절대로 지지 않겠구나 생각하고 처음으로 직접 시합을 관람할 생각을 하고 경기장으로 향한다. 하지만 경기장에 들어서자 마자 갑자기 하늘을 흐려지고 자신의 팀이 내리 점수를 내주기 시작한다. 결국 패배의 두려움을 이기지 못한 빈은 경기장을 나오고 만다. 이러한 영화의 묘사는 빌리 빈의 성공기를 다루었다면 굉장히 이상한 묘사이다. 20연승이란 머니볼 이론의 최종적 승리나 마찬가지로 영화의 클라이막스라 할 만한데 영화는 그 어떤 흥분도 전해주지 않는 것이다. 오히려 빌리 빈이 대단히 불운한 남자로구나 하는 인상만 심어줄 뿐이다. 

  즉 영화는 이렇게 또 한번의 (빌리 빈 개인으로서는) 좌절의 순간을 마련함으로써 빌리 빈이 머니볼 이론에 매어달리는 것이 그저 환자가 순간의 통증을 잊기 위해 모르핀을 맞듯 일시적인 미봉책에 불과하다고 암시하는 것이다. 결국 영화 내내 빌리 빈에게 있어 그 과거의 상처를 영원히 극복할 그 순간은 도래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대로 내내 트라우마로 남아있다. 지울 수 없는 과거이자 때때로 환기되어 온 존재를 집어 삼키는 상처로서... 

 

   그렇다면 결국 이 모든 것을 통하여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상처를 상처로 인정하자는 것이다. 이것이 억지로 상처를 지우려 했었던 샘 레이미의 '사랑을 위하여'와 정확히 갈라지는 지점이다. '머니볼'이 새삼 빌리 빈의 이야기에 주목했던 이유가 있다. 그것은 바로 아직까지도 그들에게 깊이 남아있는 9.11의 기억이다. 그것은 커다란 비극이었고 여전히 환기되는 상처였다. 거기다 2008년에 서브 프라임이라는 막대한 경제적 위기로 인한 아픔 또한 있다. 그렇게 만연된 아픔 널려진 상흔... 영화는 새삼 그것을 바라볼 것을 재촉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묻고 있는 것이다. 우리에게 그 상처는 이제 절대로 지울 수 없는 것이 되었다. 그러니 이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바로 그 질문의 답을 찾기 위해서 영화는 '머니볼'이 아니라 과거의 상처를 하나의 본질로 간직한 빌리 빈의 신체를 가져온 것이다. 영화는 그가 단 한 순간도 과거의 그 때 섰었던 타석으로 부터 나아가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바로 차속에 홀로 고립되어 운전하고 있는 그의 모습을 반복함으로써 말이다. 영화가 정말 묻고자 하는 것은 왜 그가 조금도 나아가지 못했냐는 것이다. 거기에 영화는 바로 그가 그 과거의 기억을 그대로 지우려고만 애썼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샘 레이미의 케빈 코스트너가 그랬던 것 처럼... 지우면 치유가 될 줄 알았던 그의 착각이 문제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태도가 바로 지금 미국의 태도가 아닌가 묻는 것이다. 계속적으로 일어나는 미국식 신자유주의의 문제 앞에서 현재 미국은 그 고통들을 우리가 껴안으려 하지 않고 그저 다른 외부로 전가시킴으로써 애써 잊고 있지 않냐는 것이다. 그것을 영화는 말 한 마디로 단칼에 해고되고 마는 선수들을 통해 보여준다. 보다 좋은 팀을 만들기 위해서 스스로 내부의 역량을 키우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마이너스가 되는 존재를 외부에 떠넘김으로서만 유지되는 시스템이 바로 미국이 아니냐고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해석이 너무 멀리나아갔는지도 모르겠지만 영화가 상처에 대한 우리의 태도가 어떡해야 하는가 만큼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거기에 대해서 영화는 단적으로 LENKA의 노래를 끝에서 다시 들려줌으로써 정리한다. 삶은 하나의 과정일 뿐이다. 지금 어떤 결과가 있더라도 그건 그냥 잠정적 과정에 불과하다. 상처 또한 마찬가지다. 상처가 상처로 있는 것은 그것을 상처로만 기억하는 우리들 때문이지 그 상처가 장차 어떤 의미를 가지게 될 것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것이 바로 제레미 브라운 2003년 5월의 야구 경기 장면의 의미이다. 신체적 여건상 절대 도루를 해서는 안되는 그였지만 그날은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도루를 했다. 하지만 아니나다를까 수비진에게 걸려 자신의 한계를 똑똑히 깨달았지만 사실 그럴 필요도 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홈런을 쳤었으니까... 제레미 브라운이 스스로 인정했었던 한계가 바로 빌리 빈이 가지고 있던 상처에 대한 의미였다면 그가 자기도 모르게 쳐 버린 홈런은 장차 그 상처의 의미가 어떻게 나아갈지 모른다는 것의 비유인 것이다. 또한 브라운이 정작 누군가 알려줘서 그 사실을 알았듯이 우리로서도 현재에 있어서는 그 의미를 전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 모두를 볼 수 있는 관객의 자리에 앉아있지 않는 한은...

   그러므로 영화는 전혀 다르게 보기를 제안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예측불가능성은 보기에 따라 빌리 빈에게 두려움의 근원으로도 또한 희망의 근거로도 될 수 있다고... 그렇게 상처 또한 마찬가지라고... 우리는 관객의 자리에 앉지 않는 한 경기 전체의 흐름을 알 수 없는 선수일 뿐이라고... 이 모든 삶의 의미는 결국 관객의 자리에 서는 날, 그렇게 인생 전체를 한 번에 볼 수 있는 신의 자리에 서는 날 알게 될 것이라고... 그러니 예측불가능으로 인한 두려움이든 상처든 그대로 인정하고 그저 삶이란 쇼를 즐기라고... 

   영화의 크레딧이 올라가는 동안 내내 반복되는 'and just enjoy the show'는 그래서 영화가 들려주고 싶은 진심어린 전언이자 지금 아픔의 과정에 있는 모두에게 보내는 위로이기도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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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1-12-01 11: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헤르메스님. 아..리뷰가 정말 좋습니다. 이 영화에서 9.11을 읽어내셨군요. 저도 이 영화를 보았지만, 사실 그런것까지는 생각도 하지 못했어요. 말씀을 듣고나니 깊이 공감이 갑니다. 말씀하신대로 야구는 또 예측불가능하기에 희망적이겠지요.^^

ICE-9 2011-12-02 15:41   좋아요 0 | URL
반갑습니다. 맥거핀님. 좋은 말씀도 너무 감사드려요.^ ^
사실 9.11까지 생각한 건 아무래도 빌리 빈에게 그 과거의 상처가 일종의 트라우마로 남겨져 있으며 영화 역시 그 치유가 영원히 불가능할 것임을 암시하는 듯 해서 그렇게 여겨졌던 것 같아요. 거기다 빌리 빈이 머니볼 이론을 적용했지만 계속 실패하는 초반의 시합 장면 대부분이 TV화면으로 재현되는 것이 제겐 흥미로웠는데 생각해보니 9.11의 아픔이 많은 미국인들에게 다가갔던 방식도 그와 유사했던 것 같아서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예측불가능성에 대해선 특히나 브랜든이 빈의 스카우트 제의를 받아들이던 때 자기 방에 걸려있던 액자의 사진이 플라톤이라는 것에 착안하게 되었는데, 물론 머니볼 이론이 전형적인 플라톤적 국가 이론을 토대로 하고 있기 때문이겠습니다만 현실의 삶을 오로지 초극(혹은 부정을 통한 수정)해야할 가상의 것으로 바라보는 그의 관점 역시 거기에 담겨져 있을 것이라 생각되었습니다. 그렇게 이 영화는 허무주의마저도 긍정적으로 생각했던 니체(영화가 지향하는 철학적 입장)와 플라톤의 대립각이지 않을까도 생각했었는데 거기까지는 차마 리뷰로는 쓰지 못하겠더군요.^ ^

맥거핀 2011-12-02 17:33   좋아요 0 | URL
와우 플라톤과 니체까지. 이 영화에서 어떤 철학적인 관점도 읽어낼 수 있군요. 상세하게 덧글 달아주셔서 영화에 대한 이해가 한결 풍성해진 듯 합니다.

노다웃 2011-12-05 2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영화 보고 왔는데 리뷰 읽으니 영화가 더 와닿습니다.
예측할 수 없으니 인생인 거지.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ICE-9 2011-12-07 16:00   좋아요 0 | URL
노다웃님도 저와 비슷한 느낌을 가지셨군요^ ^
크레딧에 나왔던 노래 원래 가사는 I want my money back.'인데 그처럼 종국에 가서 신에게 '내 인생 물려 줘'라고 떼를 쓰게 되더라도 조금은 강가에 서 있는 아이와도 같이 여유를 가지고 흘러가는 것을 바라보자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늘 좋은 말씀 감사드립니다^ ^
 
별 내리는 산장의 살인
구라치 준 지음, 김은모 옮김 / 검은숲 / 2011년 11월
평점 :
절판


   

 

  요즘처럼 세상 일이 답답할 때가 없다. 행동으로 표현하는 것도 24시간 내내 할 수 없으니 어쩔 수 없이 마음을 추스릴 뭔가를 찾게 된다. 그래서인지 어떻게든 외부의 자극으로 틈틈이 비는 시간들을 메우려는 일이 잦아졌다. 뭔가 몰두할 수 있을 만한 일을 만들고 찾게 된다. 그럴 경우 나는 늘 두 가지의 탈출구를 찾게 된다. 하나는 영화이고 다른 하나는 정말 머리만 쓰는 미스터리를 읽는 것. 그렇게 지인들과 영화를 보기 시작했고 또 그렇게 몰두할 만한 미스터리를 찾았다. 그 때 내 눈에 들어왔던 것이 구라치 준의 '별 내리는 산장의 살인'이었다. 

 

 

 

  구라치 준은 벌써 데뷔한 지가 20년이 넘는 중견작가인데도 그렇게 작품이 많지 않은 과작 작가이다. 일본에서는 냉장고가 비어야 비로소 작품을 쓴다는 말까지 농담 삼아 떠돈다고 한다. 그런데 그렇게 그가 과작인 이유가 있다. 왜냐하면 그는 무엇보다도 치밀한 논리 전개만을 주 무기로 하는 작가이기 때문이다. 다른 것 하나 없이 오로지 치밀한 논리적 전개 만으로 하나의 미스터리 작품을 형상화하기란 참으로 힘든다. 더우기 그게 장편이라면 말이다. 그런데도 구라치 준은 해설과 옮긴이 글 빼고 총 464페이지에 이르는 작품을 오로지 하나의 논리적 매듭으로 묶어내고 있으니 그 하나의 매듭을 풀기 위해 어찌 아니 도전할 수 있을 것인가? 

 

 더구나 이 책 앞에 표기된 함랑표에 따르면 

  이렇게 다른 건 몰라도 논리정연이 만점을 상회하고 있다고 하니 더욱 더 도전의식이 불타오른다. 그래서 들었다. 사각의 링으로 들어가는 권투 선수 처럼 반드시 이겨주리라 결연한 의지를 다지며 구라치 준이 만들어 놓은 눈 덮인 겨울 산장으로 걸어 들어갔다. 

  전형적인 '클로즈드 서클' 작품이다. 

  새로이 구입한 산장을 색다른 레져 상품으로 개발하기 위해 한 부동산 업자가 광고 효과를 내기 위해 미디어들의 총아들을 불러 모은다. 늘 그렇듯이 저녁 만찬을 즐거운 가운데 만끽하고 수순에 의해 당연히 폭풍이 갑자기 몰아쳐 다음 날 산장은 고립된다. 그리고 그 고립된 날 아침. 타살된 시체 하나가 기다렸다는 듯이 발견된다. 

  너무도 전형적인 구성... 그래서 뭐라 별달리 붙일 말도 없다. 

  하지만 오히려 이런 뻔한 구성이라 왠지 더더욱 구라치 준의 자신만만한 호연지기가 느껴진다. 

  그는 마치 내게 이렇게 말하고 있는 듯 하다. 

   "봤어? 자, 별다를 거 없지? 너무도 뻔하지?  하지만, 난 이 정도로도 충분히 너와 승부할 수 있어. 이렇게 아주 뻔한 구성으로도 널 멋지게 넉다운 시킬 수 있단 말이다아~!" 그리고 후렴 처럼 달라붙는 그의 우렁찬 웃음소리...  

  이 상상이 그저 공연한 공상은 아닌 것이 구라치 준은 그것가지고는 성에 차지 않았는지 거기에 더해서 아예 새로이 시작되는 장마다 간단한 안내까지 붙여 놓았던 것이다. 이를테면 1장이 시작되는 7 페이지 맨 위에는 

일단 이 작품의 주인공이 등장한다. 주인공은 화자이자 이른바 왓슨 역이다. 즉 모든 정보를 독자와 공유하는 입장이며 사건의 범인이 아니다. 

  더하여 시체가 발견되는 장이 시작되는 163 페이지에는 

  하룻밤이 지나 시체가 발견된다. 살해 방법은 눈으로 확인한 그대로이고 부자연스러운 트릭 따위는 사용되지 않았다. 

 

  예컨대, 이렇게 모든 새로운 장이 시작될 때마다 안내문이 미리 나오는 것이다. (해설을 쓴 decca님 말에 따르면 이것은 '일흔 다섯마리의 까마귀'라는 작품으로 유명한 쓰츠키 미치오의 전매 특허 스타일이라고 한다. 구라치 준 자신도 작품의 말미에 그에 자극을 받아 썼다고 솔직히 밝히고 있다.) 이거 정말 패를 모조리 보여줘도 이길 수 있다는 작가의 호연지기가 아닐 수 없는데 요즘 우리나라 호연지기의 갑으로 불리는 그 분보다 더 한 호연지기가 아닌가! 그야말로 정말 한 아마존 독자의 서평 처럼 순수한 직구로만 승부하는 작품이다. 

   "젠장! 난 직구밖에 못 던져! 쳐 볼테면 쳐 보란 말이야!"  

   그러니까 나는 이렇게 말하는 투수를 앞에 두고 타석에 들어선 타자인 것이다. 

   방망이를 굳게 잡고 투수를 노려보며 난 이렇게 말한다. 

   "좋다. 싸워볼 만 하군. 이 승부 받아주마."  

   그러자 구라치 준이 씨익 웃으며 몸을 크게 뻗는 듯 하더니 순간적으로 공을 날린다. 

   과연 그 결과는...? 

   젠장, 졌다. 완패했다. 설정 같은 거 무시하고 오로지 논리로만 겨뤘는데 보기좋게 헛스윙을 하고 말았다. 일본 작가들은 정말 대단하다. 그 어느 나라보다 미스터리를 사랑하는 나라여서 그런지는 몰라도 어떻게 이렇게 독자들 뒤통수를 때리는 트릭들을 잘도 개발해 내는 것인지 놀랍다. 트릭이라 말했지만 진짜 논리의 직구다. 여기엔 아무 변칙이 없다. 하지만 그 직구를 읽어내야 하는 내 눈이 이미 무엇에 의해 잘못 보도록 씌여져 있었다면...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투수와의 본격 대결 전에 내가 우연히 투수와 포수가 타자를 속이기 위해 서로 약속한 신호가 적혀 있는 쪽지를 주웠다고 해보자. 나는 물론 기뻐할 것이며 이제 투수가 그 어떤 속임수를 쓴다고 해도 내가 다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니 시합에 임하는 마음 역시 느긋할 것이다. 아마 아이의 재롱을 보는 부모의 느긋함과 같을 것이다. 그런데 알고보니 그 쪽지는 투수가 일부러 내 앞에 떨어드린 것이었고 나는 이미 거기서부터 투수에게 속고 있었다면... 

  말하자면 이 소설은 이런 작품이다. 거짓없는 하나의 커다란 직구와 그 직구를 전혀 다르게 읽게 만드는 유발된 사소한 착각. 하지만 그 착각이 어디서 비롯될 지 가늠하기 힘들다는 것이 또 이 작품의 매력이다. 

   당신은 구라치 준의 그물을 벗어날 수 있을까? 

   그렇게 내 대신 멋진 홈런 한 방을 날려줄 수 있을까?... 

   미스터리 해결에 일가견이 있다고 자부하는 편이라면 당장 도전해 보기를 권해드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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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아홉
아데나 할펀 지음, 이진 옮김 / 비채 / 2011년 10월
평점 :
절판


  

   이야기에 대하여... 

   미국의 여류 작가 아데나 할펀의 경쾌함과 진지함이 알맞게 균형을 이룬 이 작품 '스물 아홉'은 일흔 다섯의 생일을 맞은 한 할머니가 생일 케익에 대고 빈 소원으로 인해 다시금 스물 아홉의 나이로 돌아간다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여기서 '돌아간다'는 우리에게 익숙한 일종의 '백투더 퓨쳐'식의 시간 여행이 아니라 신체의 나이가 스물 아홉으로 돌아간다는 의미다. 그러니까 모든 건 그대로고 몸만 젊어지는 것이다. 

 

   일흔 다섯살이 된 것을 축복으로 여겨야 옳거늘. 젠장, 나도 말은 그렇게 한다. 나이 듦의 가장 큰 기쁨은 세월을 통해 얻은 지혜라고. 그래야만 그나마 기분이 나아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다 헛소리다. 그러나 달리 무슨 말을 하겠는가?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모두들 절망할텐데. 그들이 내 나이가 되어 진실을 깨닫도록 내버려 두는 수밖에. 일흔다섯살로 사는 것이 얼마나 끔찍한지 누군가 말해주었더라면 나는 오래전에 이 상황에서 벗어났을 것이다. 자살을 했을 것이라는 뜻은 아니다. 그건 안될 노릇이다. 아마도 무인도 같은 곳에 가서 냉혹한 진실을 강요하는 거울 없이 살았을 것이다 .(P. 9 ~ 10) 

 

    일흔 다섯의 생일 케잌을 앞에 둔 할머니 엘리가 이토록 자신의 나이에 대해 진저리를 치는 것은 그녀 자신 그 나이가 되도록 단 한번도 자신의 뜻에 따라 제대로 인생을 살아오지 못했다는 자각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그녀의 인생이 지금 엉망인 것은 아니다. 그녀는 지금까지 순탄한 인생을 살아왔다. 무난하고 충직한 남편을 만나 속 한번 섞지 않고 비록 평범한 아내이긴 하나 남부러울 것 없는 가정을 잘 꾸리며 살아왔던 것이다. 그렇다면 단순히 나이먹음에 대해 속절없음의 한탄일까? 그건 또 아니다. 그녀가 저렇게 한탄을 하는 것은 그녀 자신 한번도 자신의 뜻에 따라 인생을 살아오지 못했기 때문이다. 어리거나 처녀시절엔 엄마의 뜻에 따라 움직였고 당시 사회적 통념에 따른 보통 여자의 삶만을 주려했던 엄마의 뜻대로 그녀는 원했던 공부 마저도 포기 하고 그저 평안한 생활을 보장해 줄 능력 하나만 보고 지금의 남편과 결혼했다. 그렇게 그녀는 연애는 커녕 사랑의 열정 조차 제대로 한 번 느껴보지 못한 ,채 그저 컨베이어 벨트 위에 놓인 상품 마냥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스위치를 켜는 누군가가 인도하는 대로 그대로 따라가는 삶만을 살아왔을 뿐, 그 인생 자락 어디에도 자신의 의지는 없었다. 이것은 마치 에머슨 레이크 앤 팔머의 노래 'C' est la Vie'의 첫 소절과도 같다.     

      Have your leaves all turned to brown
      Will you scatter them around you
      C'est la vie 


      Do you love
      And then how am I to know
      If you don't let your love show for me
      C'est la vie

  

  그랬던 그녀였기에 남편이 결국 죽었을 때, 마치 태양 주위를 도는 지구 처럼 애오라지 남편만을 중심으로 살아온 그녀로서는 자신의 삶을 유일하게 지탱해주던 근거를 상실한 느낌을 받게되고  중심의 인력이 없어진 물건이 오로지 원심력만의 작용을 받아 바깥으로 튕겨 나가버리는 것 처럼 그렇게 그제서야 그 인생의 바깥에서 제대로 자기 인생을 찬찬히 바라볼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깨닫는다. 그 모든 게 오로지 후회로 채색되어 있음을.      

      Oh,  c'est la vie
      Oh,  c'est la vie
      Who knows, who cares for me
      C'est la vie 

 

   그래서 엘리는 당연히 지금 한창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는 20대의 손녀 루시를 질투가 나리만치 부러워한다. 그리고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 '걸어보지 못한 길' 처럼 자신이 걸어보지 못했던 인생을 다시 한 번 새롭게 걸어보길 원한다.  '다시 한 번 루시 처럼 된다면 어떨까? 그렇게 되면 절대로 지금 같은 인생은 살지 않을거야.' 라고...      

      그러다가 또 하나의 길을 택했습니다. 먼저 길과 똑같이 아름답고,

      아마 더 나은 듯도 했지요.

      풀이 더 무성하고 사람을 부르는 듯했으니까요.

      사람이 밟은 흔적은

       먼저 길과 비슷하기는 했지만, 

                                                    - 로버트 프로스트, '걸어보지 못한 길' 중에서 -  

 

   바로 그 바람을 그녀는 일흔 다섯번째의 생일 케익 앞에서 소원으로 빈다. 그리고 행운의 여신이 이마에 입이라도 맞추어 주었는지 딸 바바라가 실수로 가져오는 바람에 케잌에 꽂혔던 스물 아홉 개의 양초 갯수 그대로 엘리는 다음 날 아침 스물 아홉의 몸으로 돌아간다. 그렇게 스물 아홉 엘리의 하루 동안의 '인생 되찾기 좌충우돌 여정'이 시작된다. 

 

 

 

   작가 아데나 할펀은 우연히 꽂은  양초 개수라는 것으로 스물 아홉의 나이로 돌아간 것에 특별한 의도는 없다는 듯한 뉘앙스를 드리웠지만 사실 그 나이를 선택한 게 전적으로 우연인 것만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 바로 한 해 뒤의 '서른'이란 나이는 종종 서양에서 인생에 있어서 하나의 중요한 분기점의 상징 같은 것으로 쓰이곤 했기 때문이다. 일례로  현대 부조리극의 선구자라 불리는 극작가 외젠느 이오네스코는 '남자는 서른 부터 자기 얼굴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이 말은 '서른'은 진짜 어른이 되는 나이로 자기 인생을 스스로 온전히 책임져야 하는 단계에 이르렀음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이건 비단 남자만의 경우는 아니다. 여성 역시도 서른을 중요한 하나의 전환점으로 여겼음을 우리는 바로 독일의 여류시인이자 역시나 극작가이기도 한 잉게보르크 바하만의 소설 '삼십세'에서 엿볼 수 있다. 거기서 바하만은 서른이 되어 비로소 진짜 인생에 눈뜨게 된 남자의 이야기를 빌어와 그녀 자신이 느끼는 서른이 주는 '무거움'을 간접적으로 얘기하는 것이다.  때문에 이 작품에서 다시금 리와인드 되는 '스물 아홉'은 진짜 삶으로 나아가기 위한 그 준비로서의 나이이자 제대로 된 진짜 삶을 선택하기 위한 열려진 가능성의 시간 자체를 의미함을 알 수 있다. 즉 이 제목과 돌아간 나이에서 우리가 보게 되는 것은 그 하루 동안의 엘리의 여정 자체가 진짜 자신의 삶으로 나아가기 위한 과정이라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여정은 오로지 보다 더 잘 돌아오기 위해 떠나는 것이다. 이 소설 역시 마찬가지다. 그렇게 이 소설 역시 '부머랭으로서의 여정'인 것이다.

  

  소설에 대하여... 

   이 소설을 음악 형식으로 비유하자면 세 개의 악장으로 구성된'소나티네'라고 할 수 있다. 

    세 부분으로 만들어진 에머슨 레이크 앤 팔머의 노래 'C' est la Vie'를 굳이 인용한 것도 그래서이다.  그렇게 엘리가 왜 그런 소원을 빌게 되었는지 스스로 고백하는 첫 시작을 제시부인 1악장으로, 스물 아홉으로 돌아간 엘리의 하루 동안의 여정이 본격적으로 진행되는 부분을 전개부인 2악장으로, 하루 동안의 여정을 통해 깨달음을 얻은 엘리의 모습을 보여주는 마지막 부분을 재현부인 3악장으로 볼 수 있을 듯 하다. 지휘자 다니엘 바렌보임이 말했듯이 소나타라는 음악 형식 자체가 인생 그 자체를 상징한다면 이렇게 소나티네 형식으로 보아도 별로 무리가 있을 것 같지는 않다. 또한 그렇게 하나의 음악이라고 생각해도 괜찮을 것 같다. 1악장인 엘리의 고백은 조금 느린 안단테 이지만 2악장인 전개부 뒤로는 알레그로 논 트로포(allegro non troppo)로 경쾌하게 진행되는...  한 할머니의 새로운 인생 찾기 프로젝트이긴 하지만 그렇게 부담없이 간간이 미소까지 머금어가면서 벗할 수 있는 소설이다. 

    

   작가가 여성이고 등장인물들도 모두 여성들이기 때문에 확실히 남성들 보다는 여성들에게 더욱 어필하는 바가 많을 것 같다. 하지만 더욱 어필할 수 있는 쪽은 아마도 지금 스스로 인생 황혼기에 있다고 여기는 모든 사람들, 특히 우리네 부모님들이 아닐까 싶다. 아데나 할펀 역시 책 앞머리에 자신의 어머니에게 이 작품을 헌정하고 있다. 정말로 소설을 읽다보면 할펀이 자신의 어머니 심정을 헤아려가며 써내려 갔구나 하는 게 느껴진다. 어느덧 숙제를 다 마쳐가는 아이와도 같이 등 뒤에 놓인 세월을 뒤돌아보게 되는 시기에 놓인 어머니에게 딸이 진심을 담아 보내는 당신의 인생은 그 자체로 넉넉했고 아름다웠으며 당신다웠다고 속삭이며 깊이 안아주는듯한 그런 위로와도 같은 느낌이... 그래서일까 읽자마자 가장 먼저 떠오른 사람이 내 어머니였다. 새삼 당신에게도 '걸어보지 못한 길'에 대한 미련이 있을까 궁금해졌다. 무심하게도 늘 잊고 지낸다. 어머니에게도 '여자'로서의 그녀의 바람이 욕망이 삶이 있었을 것임을... 이 책에 대하여 내가 감사하는 부분이 있다면 이것일 것이다. 새삼 어머니도 '여자'라는 사실을 일깨워주었다는 것. 공기가 주변에 늘 가까이 있기에 소중함을 모르는 것 처럼 어머니라는 존재 역시도 그런 것 같다. 아데나 할펀 처럼 소설은 못 써 드리지만 자주 연락드리고 할수 있는 한 많이 얘기를 들어드리자 다짐해 본다. 이걸 잊지 않기 위해 '다모클레스의 칼' 처럼 한동안 머리 맡에 두고 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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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비니아
어슐러 K. 르 귄 지음, 최준영 옮김 / 황금가지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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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마인들의 어머니라고도 불리는 '라비니아'. 

  그녀를 처음 만났던 곳은 아마도 단테의 신곡이 아니었나 싶다. 거기 흔히 '림보'라 부르는 제1지옥. 그러니까 선하게 살았지만 그리스도로 인해 죄사함 받기 전에 죽은 영혼들이라 천국에 가지 못하는 혼들의 거주지에서 단테가 베르길리우스의 인도로 만났던 인물 중의 하나가 로마 건국의 뿌리가 되는 아이네이스의 아내이기도 한 '라비니아'였다. 서사시 '아이네이스'를 통해 트로이 파멸과 로마 건국을 처음으로 연결 시켰던 그 베르길리우스도 아이네이스에 대한 얘기는 그토록 구구절절 읊어 놓으면서도 정작 그의 아내이자 로마의 근원이 되는 '라티움(이름에서 '라틴'의 기원이었음이 바로 드러난다.)의 왕비였던 라비이나에 대해서는 이름 한 번 언급하는 것으로 넘어가버리고 말았는데 그건 단테 역시도 마찬가지여서 마치 자신을 인도하고 있는 베르길리우스에  대한 예우 차원에서 언급했다는 걸 암시하기라도 하듯 그저 이름 한 번 나오는 것으로 그치고 만다. 

  서양 문명의 모태를 건설했다고 해도 지나치니 않을 로마. 바로 그 로마의 사실상의 가이아(대지의 모신(母神) - 굳이 이 같은 표현을 쓴 것은 아이네이스와 라비니아가 결혼할 때 라비이아를 '가이아'라고 부르기 때문이다.)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라바니아'의 존재 치고는 이같은 베르길리우스와 단테의 처사는 거의 무시에 가깝다고 할 수 밖에 없는데 행여 그렇게 된 연유가 혹시 당시를 지배했던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사고 때문은 아니었을까 의심해보게 된다. 바로 그 의심에서 출발하여 그렇게 역사에서 빼앗기고 지워졌던 '라비니아'의 잃어버린 목소리를 되찾아주려 한 작가가 라비이나, 그녀를 중심으로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를 다시 썼으니 그것이 바로 페미니즘 SF의 거장이기도 한 여류 작가 어슐러 르 귄의 '라비니아'이다.  

  

 

 

   말 그대로 지금 우리들에게 도착한 르 귄의 '라바니아'는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를 그 자신 무시하거나 지워버렸던 주체를 다시금 복원하여 오히려 그 주체의 시각으로 다시 써 내려간 작품이다. 슐라이허마허 이후로 역사 기술이 랑케가 말했던 식으로  역사가가 그 기술에 있어서 오로지 사실 그 자체에만 근거하여 온전히 가치중립적으로 쓰기란 불가능한 것이며 오히려 역사란 역사가가 가진 시각과 역사적 사실이 상호작용 하면서 일종의 인위적인 구성물이 되는 것임이 드러났는데 이로써 지금 역사를 쓰고 혹은 보고 있는자가 '누구'인가가 중요해지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바로 그 '누가' 바라보는가에 있어서 남성과 여성이라는 성(GENDER)  역시도 중요한 차이를 가져올 수 밖에 없는데 그것은 역사이래로 남성은 지배자의 위치를 여성은 거기에 종속적인 위치를 점유했기에 그렇게 서로의 계급적 위치가 현격하게 달랐기 때문이다.  때문에 여성의 시각으로서의 역사 새롭게 쓰기는 이렇게 여성으로서의 시각과 남성으로서의 시각을 대조해 보게 하며 역사 기술이 사실의 기술이 아닌 관점의 해석임을 깨달아 지금까지 남성에 편향된 역사를 바로 잡고 보다 균형된 시각으로 역사를 바라보게 만드는 장점이 있다. 

 미라벨로 카바로니의 '제단의 라비니아' 


   따라서 베르길리우스의 남성적 시각이 아닌 이러한 르귄의 여성적 시각으로 로마의 뿌리가 형성되는 이야기를 살펴보는 것은 그 자체로 충분히 의미있는 일이다. 사실 르귄의 이러한 여성의 시각에서 다시 쓰기는 르귄이 처음인 것도 아니요 그녀 자신의 비브리오 그래피에 있어서도 처음이 아니다. 그녀의 비브리오 그래피에선 이미 그녀의 대표작 판타지이기도 한 '어스시 이야기'에서 여성인 테나의 관점에서 마법사의 섬 '로크'를 새롭게 써내려 갔으며 르귄 이전에 독일의 여류작가 크리스타 볼프는 그동안 그리스 신화에서 희대의 악녀로만 묘사되던 '메데이아'를 여성 주체의 관점에서 새롭게 써내려간 적이 있다. 
  

                       

 

 

 

 

 

 

  

  크리스타 볼프와 르귄이 이렇게 하는 것은 그동안 남성적 시각에 의해서 왜곡되고 무시되었던 목소리들(크리스타 볼프의 원래 제목은 '메데이아, 목소리들'이다.)을 되찾아 여성성을 다시금 진실되고 온전하게 복원하기 위함이다. 그렇게 크리스타 볼프는 메데이아를 공포와 악행의 존재가 아니라 지배자 남성이 가진 권력을 적극적으로 되찾아 남성 중심의 질서를 전복하고 여성을 지배자로  위치시키는 주체로 새롭게 묘사하며 르귄은 베르길리우스에 의해서는 무시되었던 여성의 관점에서 멸망한 트로이의 유민으로 부터 로마의 기원이 되는 라티움의 통치자가 되고 그 치세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새롭게 기술한다. 하지만 르귄의 '라바니아'는 볼프의 '메데이아'와는 전혀 상반된 입장을 보여주는 데 그 독특성이 있다. 자신의 욕망 성취와 권력 획득에 있어서 적극적이었던 메데이아와는 달리 '라바니아'는 기묘하게도 단 한 번도 스스로의 욕망을 관철시키려 하거나 자신의 의지나 권리를 적극적으로 내세우지 않는다. 그녀는 기꺼이 신탁을 통해 조우하게 된 베르길리우스의 예언에 따라 자신을 적극적 주체로 내세울 수 있는 모든 욕망을 포기한다. 그녀는 그저 '남자에게 인도되기 위해 잘 여문' 여성으로서의 지위에 스스로 머무르며 베르길리우스가 예언한 상대를 자신의 운명으로 알고 순응하는 것이다. 이것은 다소 이상하다. 이왕에 무시되었던 여성으로서의 시각을 적극적으로 복원하려 했다면 남성성(베르길리우스로 대표되는)에 한계지워진 운명의 굴레로 부터 벗어나 스스로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보다 더 합당하지 않나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라비니아는 아이네이스의 충실한 내조자로서 그의 라티움 통치를 그 그늘에서 도와주는 것으로 만족한다. 이는 라비니아의 친어머니와 비교하면 그 수동성이 더 현격해진다. 라비니아의 어머니는 오히려 메데이아적 인물에 가깝다. 그녀는 라비니아를 자신이 원하는 남자와 결혼시키기 위해서(그리고 그것 자체로서 그녀는 베르길리우스의 반대편에 선다. 그리고 이 의미는 남성성의 규정을 오히려 거스르는 여성의 메데이아적 적극성을 상징한다.) 왕의 명령마저 무시하며 적극적으로 개입한다. 더구나 라비니아를 투르누스와 결혼시키기 위해 숲에서 보여주는 여왕이 중심이 된 여성들만의 축제는 크리스타 볼프가 메데이아를 야성의 여성성으로 규정한 것과도 통한다. 

  거기서 여왕은 라비니아를 밤의 숲으로 데리고 가면서 거기서 축제가 열릴텐데 그 축제는 오로지 여자들만을 위한 축제라고 말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파수꾼을 세울거다. 남자가 근처에 오면 멀리 쫓아내야 한다. 만일 그가 가지않겠다고 하거나 우리를 엿보려고 한다면, 그는 죽음을, 죽음보다 더한 일을 당할 것이다! 그는 거세당한 사내가 되어 산을 내려가게 될 것이다! 발레나가 네 자루의 날카로운 검을 가져왔고, 네 명의 강인한 여자들이 밤낮으로 길을 지킬 거다.(.P.176) 

 

  파수꾼, 죽음, 거세라는 말들로 인해 우리는 그 축제가 오로지 여성성만으로 충만된 것임을 알 수 있는데 그런데 그 모임에 참석하는 모든 여성들이 자신의 사회적 신분(물론 그 신분은 전적으로 남성중심의 사회에서 결정된 것이다.)과는 전혀 반대되는 의복을 입는다는 것이 또한 흥미롭다. 그러니까 노예는 여왕과 공주의 의복을 입고 여왕과 공주는 노예의 의복을 입는데 바로 이 의복의 전복은 실상 남성이 규정한 사회적 질서의 전복이며 그렇게 새로운 여성 중심의 질서를 다시금 정초시키는 상징이다. 바로 이처럼 라비니아의 어머니 여왕은 그야말로 볼프가 말했던 '메데이아적 주체'를 강하게 암시하는데 하지만 이 여성의 모든 노력은 수포로 돌아가고 결국 그녀는 자결하고 만다. 그러니까 여기서 르귄은 그러한 메데이아적 주체가 가지는 전복적, 투쟁적 여성성의 길로는 나아가지 않을 것임을 선언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그렇다면 왜 르귄은 아버지가 신탁으로 이끌었고 거기서 만난 베르길리우스의 예언에 순응하는, 그렇게 온전히 남성이 규정한 틀 안에서만 움직이는 라비니아 이야기를 왜 하는 것인가가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무시되고 잃어버렸던 목소리를 되찾아주려는 것과는 왠지 상반되는 결과가 아닌가? 

  문제는 이것이 '라비니아'가 처음이 아니라는 데 있다. 르귄은 이미 어스시 이야기에서도 여성 테나를 통해 이렇게 말하게 한 바가 있다. 

 

  남자들이란 어찌나 여자들을 겁내는지! 테나는 늦게 핀 장미꽃 사이를 걸으면서 생각했다. 여자들 한 명 한 명은 겁내지 않지만, 여자들이 함께 얘기하고 함께 일하고 서로를 위해 목소리를 내기만 하면... 그러면 남자들은 거기서 책략과 음모와 강제를 보고, 덫이 놓여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들이 옳다. 여자들은 여자로서 이 세대가 아니라 다음 세대를 편들려는 경향이 있다. 여자들은 남자들이 구속으로 보는 유대와 남자들이 속박으로 보는 결속을 짰다.

                                                                     ( 어스시 전집 6권, '또다른 바람' P. 271 )

 

  테나의 이 이야기 - 그러니까 여자는 이 세대가 아니라 다음 세대를 편들고 남자들은 구속으로 여기는 유대와 남자들은 속박으로만 생각할지 몰라도 그렇게 하나가 되는 것에 적극적이고 좋아한다는 사실-는 왜 르귄이 라비니아를 그렇게 형상화 했는지 그 이유를 짐작케 한다. 

  우리는 여기서 볼프의 '메데이아적 여성성'이 페미니즘의 한 입장에서는 오히려 남성성에 오염된 여성성으로 의심스럽게 바라보고 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러니까 획득적, 투쟁적은 그야말로 남성성의 특징인데 어떻게 그런 모습을 보이는 것을 여성성의 표현으로 볼 수 있느냐 하는 비판이다. 여성성은 남성성에 오염된 것이 아닌 고유의 여성성 자체로서 형성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고유의 여성성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하는 물음이 당연히 제기될 수 밖에 없고 오로지 반대 정립만으로 정의가 가능할 뿐인 우리들은 그렇게 남성성에 전적으로 반대되는 것으로 밖에는 고유의 여성성을 정립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게 형상화하게 된 고유의 여성성과 가장 유사한 모습을 보이는 것(고유의 여성성으로 다가갈 수 있게 해주는 일종의 매개자)이 바로 어머니의 사랑, '모성'이라고 한다. 

 

 

 

  모성 역시도 헤르더의 민족관념이 형성되면서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관념이라는 비판이 있지만 거기다 '어머니'라는 것도 일종의 '신화'로 남성 중심 사회의 지속을 위해서 여성을 더욱 종속적으로 만들기 위해 심어진 관념인 것도 사실이지만 그래도 모성으로서의 여성성이 남성성과 가장 차이가 나는 것 역시 사실이니 만큼 전적으로 폐기되어야만 할 것은 아니다. '라비니아'를 보면 르귄 역시도 여기에 '비판적 지지'의 관점에 서 있는 것 같다. 

   앞서도 말했지만 라비니아는 수많은 구혼자들이 지배자가 되기위해 획득해야 하는 '여문 열매'라는 위치에서 아이네이스와 혼인 할 때는 '가이아'의 칭호를 얻는다. 가이아는 그리스 신들 중 제우스의 아버지적 세대인 티탄족으로 하늘을 의미하는 우라노스와 함께 모든 신들의 근원이다. 가이아는 대지의 여신이고 모든 존재가 다 대지에서 비롯되므로 그렇게 라비니아는 '근원적 어머니'의 상징이 된다. 

  가이아는 그리스 어로 '삶'을 뜻한다. 단순하게 말하자면 바로 여기에 왜 르귄이 라비니아를 그렇게 순응적 존재로 그렸는지, 그렇게 그리면서도 '모성'마저 가져오는 것인지(라티움에서 라비니아는 여왕이 된다. 이것은 그대로 그녀의 어머니인 여왕의 자리를 대체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녀는 기존의 어머니를 지우고 새로운 어머니의 상징이 되는 것이다.) 드러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여기서 르귄은 모성이 궁극적으로 무엇을 뜻하는 것인가를 통해서 크리스타 볼프의 '메데이아적 주체'와는 전혀 다른 자신만의 '라비니아적 주체'를 정립하는 것인데 거기서 르귄이 생각하는 모성의 궁극적인 의미는 바로 '삶의 유지'이다. 

 

  즉, 르귄은 삶을 지켜내고 이어가게 하는 것이 모성의 본질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테나의 여성들은 다음 세대를 편들려는 경향이 있다는 것의 의미이여 왜 그녀가 라비니아로 하여금 베르길리우스의 예언을 그토록 충실히 따르게 했는가에 대한 이유이기도 하다. 즉 라비니아는 스스로 자신의 욕망까지 죽여가면서까지 자신을 비롯한 라티움 전체 삶이 유지되고 지속될 수 있도록 선택했던 것이다. 그렇게 그녀는 베르길리우스의 예언에 의해 규정된 것이 아니라 그녀 스스로 희생함으로서 미처 베르길리우스마저 끝맺지 못했던(베르길리우스는 내내 '아이네이스'가 미완성임을 말한다. 이는 그것이 온전히 남성의 시각으로서만 쓰여져서 불완전한 편협성에 머물고 말았음을 스스로 고백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삶 자체를 완성시켰던 것이다. 또한 바로 그 희생과 유지하고 지속으로의 헌신에서  르귄은 어머니야 말로 남성성에 오염되지 않은 고유의 여성성의 모습이란 것을 보는 것이다. 

 

  라비니아는 바로 이러한 르귄의 이상화된 여성성의 상징이다. 어쩌면 이 르귄의 이 모든 이야기가 그냥 자기 합리화가 아니냐고 할 수 있다.희생과 외부에 규정당한 삶일지라도 그 유지와 지속에 힘쓰는 것 자체가 남성성의 지배를 영속화시키는 자세가 아니겠냐고 말이다. 정당한 비판일 수도 있는데 여기에 우리는 헨리 제임스의 '여인의 초상'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지금도 여전히 '여인의 초상'의 결말은 논란중이다. 왜 여주인공 이사벨은자신의 결혼이 사랑이 아니라 오로지 남편의 자기 재산을 노린 지극히 타산적 욕망으로 이루어진 것임을 알면서도 그 혼인 생활을 스스로 계속 이어가려 하느냐 한느 것이다. 지금 우리들의 눈에 그러한 이사벨의 선택은 지극히 어리석은 것으로 보이고 작가 헨리 제임스 역시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사고로 점철된 인물이었구나 여겨진다. 하지만 정작 헨리 제임스의 의도는 달랐다. 그건 결코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사고에 의해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그는 보다 고귀한 인간다움을 생각했던 것이다. 그 모든 것이 협잡과 타산임을 알면서도 오히려 스스로 그 내부에 머무름을 선택하는 것을 보여줌으로서 인간이 그렇게 온전히 자기 자신만을 위하는 존재가 아님을, 자신에게 아무런 유익이 오지 않더라도 내내 스스로 희생할 수 있는 고귀한 존재임을 보여주려 한 것이다. 우리들 눈에 이 생각은 어쩌면 바보 같아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헨리 제임스는 그걸 또 다른 작품 '비둘기의 날개'에서 또 반복한다. 한 가난한 연인들이 그 돈을 노려 막대한 유산을 상속받은 미국인 여자를 유혹하려 한다. 결국 연인의 남자 애인은 계획했던 대로 상속녀와 결혼하는데 성공한다. 나중에 상속녀는 모든 진실을 알게되지만 오히려 그 연인들에게 자기 재산을 상속한다. 그럼으로써 사람이 자기 욕망대로 움직이는 것만은 아님을 보여 이해타산으로 밖에는 타인을 보지 못했던 연인들을 부끄럽게 만드는 것이다. 

 

 

 

 

 

    헨리 제임스의 이러한 여성성의 창조는 사실 칸트의 '의무윤리'와도 그 맥락이 상통한다. 칸트는 인간이 의무를 따를 때 진정 자유롭다고 말했다. 그러니까 공리주의가 바라보듯이 인간이 오로지 자기 욕망, 이해만을 따라 스스로 선택한다 해도 그것은 그 자신 내부의 동물적 본능에 결국은 지배받아 그런 것으로 노예의 행동이지 자유의 행동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자유는 그 어떤 본능적 호소에도 굴하지 않는 오로지 내 욕망이나 이익과 전적으로 무관한 의무만을 따를 때 가능한 것이라고. 헨리 제임스의 고귀하고 이상적 여성들도 모두 이러한 칸트의 진정한 자유를 상징화한 인물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인간상들은 모든 것으로 부터의 전적인 자유로움으로 인간을 기초지웠던 계몽주의의 이념상 당연한 것이기도 했다. 

 

  그러므로 우리들에게 헨리 제임스의 인물들이 혹은 르귄의 라비니아가 어리석어 보인다면 그것은 우리가 너무 자본주의적 관념에 찌들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칸트와 헨리 제임스가 있었던 자본주의의 위력이 충분히 발휘되지 못했던 시대에서는 그런 인간이 오히려 더 자유롭고 고귀한 존재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르귄의 '라비니아'는 전(pre)자본주의적 관점에서 새로이 여성성을 바라보도록 촉구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마도 그녀가 라비니아를 쓰면서 떠올렸던 것은 저 원시시대의 모성중심사회에서 통용되던 여성성이었을 것이다. 대지의 모든 것을 받들고 그것과 유기적으로 하나되어 살아가던 사람들이 여겼던 어머니의 모습 그것이었을 것이다. 

 

  르귄의 라비니아는 단순히 베르길리우스에게 무시되었던 존재에게 다시금 목소리를 찾아준다는 의미로만 국한되지 않는다. 이것은 일종의 인류학적 시선으로(지금의 시각이 아닌 그 전 시대의 시각으로 바라보려 한다는 점에서) 새로이 여성성을 형상화 해보려는 야심찬(베르길리우스와 대적한다는 의미에서) 시도이기도 하다. 메데이아적 주체가 아닌 라비니아적 주체로서의 여성성이 과연 다른 이들에게도 얼마나 설득력을 가질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여성성 혹은 여성적 주체에 대한 새로운 생각의 여지들을 마구 촉발시킨다는 점에서 한번쯤 벗해볼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지 않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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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1-11-22 00: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라비니아 라는 제목이 익은데,, 하고 보니 르귄의 소설이었군요.

흑흑, 헤르메스님, 여기서부터 제가 갑자기 감동이 밀려오는거예요.
사실 알라딘 서재 활동하면서 이렇게 왕래하는 분 중에, 저랑 취향이 동일하게
리뷰를 올리시는 분은 헤르메스님 밖에 못 봤거든요.
(아니다, 지금 안 오시는 히어나우님도 계시네요.) 여하간 이 무한 감동이라니!

저는 르귄 여사를 정말 좋아합니다. 사실 여자라고 기대하지도 않았어요.
어스시 시리즈를 읽으면 흐름이 좀 부드럽네 라고만 생각했는데, 기프트 시리즈를 읽으면서 다시 한번 저자에 대해서 찬찬히 찾아본거죠... (제가 저자 약력을 대충 보는 경향이..)
르귄 여사는 정말, 그분만의 분위기가 있어서 너무 좋아요.

ICE-9 2011-11-22 23:04   좋아요 0 | URL
와! 마고님도 르귄 여사님을 좋아하시는군요.
저는 르귄 여사를 오래전에 '어둠의 왼손' 부터 만났고 지금까지 국내에 나온 모든 작품을 소장할 만큼 무척 좋아하지만 주위에 비슷한 취향을 가진 이가 전혀 없어 거기에 대해 한 번도 얘기를 나눠보지 못했거든요.
그래서 늘 혼자 애정을 간직할 뿐이었는데 이렇게 같은 작가를 좋아하는 분을 만나니 정말 반갑고 기쁩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일찍 서재활동 을 할 걸 하는 후회도 마구 드네요. 마고님과 더불어 르귄 여사의 작품에 대해 얘기를 나누는 흥미진진한 시간들의 기대가 마구 몰려오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