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홍색 연구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37
아리스가와 아리스 지음, 김선영 옮김 / 비채 / 2011년 12월
평점 :
품절


 

 

    - PRELUDE -

 

 

왜?

무엇 때문에? 무엇에 의해서? 어디로? 어느곳에? 어떻게?

아직 살려고 하는 것인가, 그건 어리석은 짓이 아닌가? !

아, 나의 친구여, 나에게 노을이 그리 묻고 있구나.

나의 슬픔을 용서하라!

노을이 되었다. 노을이 된 것을 용서하라!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 니체,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중에서 -

 

 

 

 

   1989년 데뷔해서 여전히 순수 미스터리만을 고집하고 있는 아리스가와 아리스. 이번에 나온 '주홍색 연구'는 작가 아리스 시리즈 중 여덟번째 소설이다. 아마도 당신이 미스터리의 팬이라면 이 제목이 참으로 낯익을 것이다. 바로 코난 도일의 셜록 홈즈가 데뷔했던 그 역사적 소설의 제목이니까 말이다. 그렇다고 이 소설을 그것에 대한 패러디이거나 혹은 오마쥬라고 섣불리 판단하거나 단정내려서는 안된다. 소설을 읽고나면 분명히 느끼게 된다. 왜 아리스가와 아리스가 하필 명탐정의 대명사인 홈즈의 데뷔작 제목을 가져왔는지. 그 이유는 작품을 넘어서있다. 그러니까 그건 미스터리 작가로서의 아리스가와 아리스 자체에까지 연결되는 문제라는 말이다. 그가 왜 미스터리를 썼고 꾸준하게 순수 미스터리 소설만을 집착하고 있으며 그리고 그것을 통해 나아가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관해 초심으로 돌아가 말하기. 그게 바로 '주홍색 연구'라는 제목을 붙인 진짜 이유다. 그러니까 이 소설은 미스터리 작가로서의 자신의 정체성을 그리고 그 지향을 다시금 생각해보는 자기반영적 작품이다. 

 

 

 

 

 

   - 학생 아리스 시리즈와 작가 아리스 시리즈 -

 

 

   아리스가와 아리스가 두 개의 시리즈를 번갈아가며 집필한다는 것은 이제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그에겐 에가미가 명탐정으로 나오는 학생 아리스 시리즈와 히무라가 탐정의 역할을 맡는 작가 아리스 시리즈가 있다. 그 모든 시리즈에서 작가의 분신인 아리스는 탐정의 조력자이자 수사의 관찰자 와트슨의 역할을 맡으며 학생 아리스가 히무라 시리즈를 집필하며 작가 아리스가 에가미 시리즈를 집필하는 것으로 되어있다. 그렇게 두 시리즈는 '뫼비우스의 띠' 처럼 연결되어 있다.

 

 

   '월광게임'으로 시작되는 학생 아리스 시리즈는 지금까지 네 작품이 나와있고 '46번째 밀실'로 부터 시작된 작가 아리스 시리즈는 현재까지 18편이 나와있다. 학생 아리스 시리즈가 저렇게 적게 나온 것은 애초부터 총 5부작으로 계획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학생 아리스는 이제 겨우 한 편만이 남은 셈이다. 학생 아리스 시리즈와 작가 아리스 시리즈는 같은 작가가 썼는데도 스타일이 참 다르다. 일단 학생 아리스 시리즈는 첫 작품 부터 이야기가 계속 이어진다. 등장인물 역시 에가미 아리스 콤비 뿐만 아니라 재등장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작가 아리스 시리즈는 그렇지 않다. 하나 하나가 단막극 처럼 그 자체로 완결된 에피소드로 이루어져 있다. 또한 학생 아리스 시리즈는 사람들이 많이 죽는다. 화산 분출로 인해 고립된 캠프라는 전형적인 '클로즈드 서클'이었던 '월광게임' 때 부터 사람들이 참 많이 죽어 나갔다. 하지만 작가 아리스 시리즈는 그렇게 많이 죽지 않는다. 기껏해야 한 두명 정도다. 그러니까 학생 아리스 시리즈가 주로 연쇄살인을 다룬다면 작가 아리스 시리즈는 '사건' 자체만 다룬다. 내 생각에 두 시리즈 간의 보다 본질적인 차이는 여기서 드러나는 것 같다. 그러니까 연쇄살인을 묘사하는 학생 아리스 시리즈는 그 때문에 트릭 풀이에 더하여 서스펜스까지 신경을 써야 한다. 하지만 순수하게 놓여진 사건 그 자체에만 집중하는 작가 아리스 시리즈는 그럴 필요가 없다. 그저 지금 사건을 수수께끼로 만들고 있는 트릭에만 집중하면 된다. 이 때문에 학생 아리스 시리즈는 분위기 주조에도 힘이 쏠리면서 논리 추구적인 면이 약해지는 반면 작가 아리스 시리즈는 트릭 하나에만 집중하기 때문에 논리 추구가 아주 정밀하다. 아마도 이 때문에 작가 아리스 시리즈를 학생 아리스가 학생 아리스 시리즈를 작가 아리스가 쓰는 것으로 설정된 게 아닌가 싶다. 아무래도 서스펜스를 계속 작동시키는 분위기 연출에 있어서는 문학적 공력이 필요할 테니까 말이다.(이건 현재 국내에 발간된 작품만 읽고 얘기하는 것이기 때문에 다른 일본 원작에 의해 얼마든지 사실과 다를 수 있음을 밝혀둔다.)

 

 

  아무튼 사족같은 이야기이지만 학생 아리스 시리즈와 작가 아리스 시리즈는 이런 차이들이 있다.

그런데 이 차이를 허무는 작품이 바로 지금 만난 '주홍색 연구'였다. 순수하게 논리로써 사건 해결에만 집착하던 작가 아리스 시리즈가 '주홍색 연구'에 와서 문득 '문학적 정조(혹은 분위기)'를 담아내고 있었던 것이다. 더구나 학생 아리스 시리즈에서도 잘 보지 못했던 그런 문학적 분위기를 말이다. 바로 이 것이 이 책을 접했을 때 나로 하여금 '어, 지금까지의 아리스 작품과는 느낌이 다른 걸.' 하고 느끼게 만들었다. 낯설음은 언제나 그 정체를 보다 더 집요하게 밝히려는 동기가 되게 마련이다. 늘 익숙했던 설정이라도 혹시 가려진 무언가가 여기에 있지 않을까 의심하게도 한다. 그렇게 읽었다. 해서 생각하게 되었다. 이 소설은 어쩌면 아리스 자신의 어떤 결의 같은 작품인지도 모른다고. 그가 내내 추구해온 미스터리에 대한 스스로의 입장 같은 것을 반영한 작품인지도 모른다고. 왜 이 소설엔 하필 중3 때 고아가 되어 오로지 책을 통해 그 외로움을 이겨나갔던 아케미라는 여학생이 나오는 것일까?  중 3이라는 시기는 아리스 자신에게 있어서도 중요한 시기가 아니었던가? 그 때 그는 자신이 정말 좋아하는 미스터리의 장편을 처음으로 탈고하지 않았던가?

 

 

  아케미의 등장을 나는 중 3 시절 아리스 자신의 반영이라 여겼다. 생애 최초의 장편을 쓰던 그 시절의 반영이라고. 그래서 이 소설의 제목이 '주홍색 연구'인 이유도 바로 그 시절의 자신을 나타내려 한 것이 아니겠느냐고. 더 나아가 오로지 미스터리만 추구하여 이제는 아야츠지 유키토와 더불어 본격 미스터리의 대표작가까지 된 그가 첫 장편을 쓰던 중 3 그 시절의 초심으로 돌아가 자신이 평생 천착해온 '미스터리'라는 것이 무엇인지 돌이켜본다는 의미에서가 아니겠느냐고.

 

 

 

    -  개와 늑대의 시간으로써의 노을  -

 

 

   '주홍색 연구'에서 주홍색이란 '노을'을 말한다. 그러니까 '노을'이 메인 테마인 셈이다.

하지만 사건과 관계된 것이 아니다. 노을은 이 소설에서 추구하는 주제의 상징이며 그 분위기를 집약하는 단어이다. 한 마디로 문학적 은유이며 이 때문에 앞서 '이 작품에서 처음으로 문학적 정조를 담고 있다'고 했던 것이다. 아예 처음부터 이 소설은 그러한 노을의 의미 혹은 역할을 분명히 한다. 프롤로그와도 같은 부분에서 작가 아리스의 목소리를 빌어 이런 대사를 날리는 것이다.

 

   "오늘 오사카의 노을, 마치 세상의 종말 같아요." (P. 10)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바로 뒤이어 아케미와 정체불명의 범인을 등장시켜 그들 각자에게 노을이 또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보여주기까지 한다. 화재에 대한 고통스런 기억이 있는 아케미에게 노을은 '공포' 자체다.(소설엔 그녀에게, 정말 특이하지만, '노을 공포증'이 있다고까지 말한다.)  반면 범인에게는 그동안 망설였던 범행을 결의하도록 만든다. 그렇게 소설의 가장 주요한 등장인물들(한쪽은 관찰자, 다른 한쪽은 모든 것의 원인, 그리고 또 다른 한쪽은 범죄자)이 '노을'의 삼각형을 이룬다(파멸을 보는 자, 파멸에의 예감 그리고 파멸을 가져오는 자). 한 마디로 이 프롤로그는 이 소설이 간직한 우주의 중심이 바로 '노을'에 있다는 걸 보여준다.

 

 

    그런데, 왜 '노을의 시간'인가?

 

여기에 대한 대답은 간단하다. '노을의 시간'이 그야말로 '미스터리적 시간'에 어울리기 때문이다.

노을의 시간이 가지고 있는 의미를 가장 잘 드러내는 말이 있다고 한다면 그건 '개와 늑대의 시간'이라는 말일 것이다. 해질녘 어슴푸레한 미명 아래에서는 사물의 분간이 어렵다. 모든 선명한 것들이 서서히 어두워지고 그렇게 나를 둘러싼 모든 세계가 익명과 비밀의 존재가 되어간다. 그렇게 멀리서 내게로 다가오는 존재가 나를 따르는 개인지 아니면 나를 물어뜯을 늑대인지 분간하기 지극히 어려운 시간. 그래서 모든 것을 그저 불안과 의혹의 시선으로 밖에는 볼 수 없는 시간. 그것이 바로 '노을의 시간'인 것이다. 또한 이 시간의 본질인 불안과 의혹은 그대로 미스터리의 본질이기도 하므로 '노을의 시간'은 미스터리적 시간이기도 한 것이다.

 

   따라서 아리스가와 아리스가 이 '노을의 시간'을 작품의 주된 테마로 삼은 것은 무엇보다 적절하다 하겠으며 그가 유독 이 시간을 고집하는 것은 앞서 말했던 대로 초심으로 돌아가 지금까지 자신이 천착해온 '미스터리' 자체를 되짚으려 한다는 것 역시 여기에서 드러난다고 하겠다.

 

   왜 이렇게 생각하냐고? 그것은 중요한 등장인물이기도 한 아케미 때문이다.

 

 

 

   -  아케미,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분신  -

 

 

   아케미는 이 소설의 중심이다. 그녀는 모든 것의 원인이 되는, 2년전 해변에서 일어난 오노 유우코 사건에서 중요한 인물이었고 또 탐정의 역할을 하는 히무라에게 사건을 의뢰하는 여성이기도 하다. 그리고 또한 히무라 - 아리스 콤비와 가장 많은 말을 나누는 사람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들의 대화는 어쩐지 아케미가 가지고 있는 아픔을 덜어주려는 일종의 상담과도 같다. 그래서 어쩐지 '주홍색 연구' 자체가 노을 공포증을 가지고 있는 아케미에게 그 공포증을 지워주는 과정으로도 느껴진다. 스포일러상 말하지 못하는 부분까지 감안해 본다면 아케미는 노을과 함께 단연 이 '주홍색 연구'라는 우주의 중심이다.

   그런데, 그 아케미가 내게는 그저 소설 속 인물이 아니라 실제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분신으로 여겨진다. 왜냐하면 아케미가 들려주는 그 자신 삶의 모습이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실제 삶의 모습과 많이 닮아있기 때문이다.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실제 삶을 들여다보면 그에게 있어 무엇보다 '중3' 시절이 중요함을 알 수 있다. 그는 열정적으로 미스터리 소설에 빠져들었으며 그 결과로 지금과 같은 작가로 있게 된 그 첫 발자국이라 할 수 있는 장편소설까지 썼었다. 그건 이 소설의 아케미 역시 마찬가지다. 무엇보다 '노을 공포증'이란 트라우마를 안기게 했던 화재 사건이 중3 때 일어난다. 그녀는 거기서 이모부가 화재에 의해 돌아가시는 것을 목격했고 그로 인해 노을 공포증을 가지고 말았다. 한 마디로 삶이 전혀 다른 것으로 변화되는 결정적 시간의 도래가 작가 아리스와 아케미 모두에게 찾아온 것이다. 그렇게 친숙했던 '개'의 세계가 이제는 전혀 낯설고 날 위협하는 '늑대'의 시간으로 변하는 '노을의 시간'이 둘 모두에게 도래한 것이다. 이 도래의 비슷한 시점이 아케미를 작가 아리스의 분신으로 여기게 된 첫번째 이유였다.

 

 

  뱀다리 (2). 아케미를 아리스의 여성화된 분신으로 보는 것은 그리 무리는 아니다. 이미 그 스스로 작품에서 이미 이름 때문에 종종 여자로 오해된다고 쓰기도 했고 또한 애니메이션 명탐정 코난에서도 아리스가와 아리스를 여성화시켜 묘사한 바가 있다.

                            명탐정 코난 6기 '절규의 수술실' 편에 깜짝 등장한 '아리스가와 아리스'

 

   이렇게 제작진은 작품 속에서 그의 이름이 늘 여자 이름으로 오인되곤 하는 것에 빗대어 아예 아리스가와 아리스를 미녀로 만들어버리는 재치를 발휘했다.(전공 역시도 영문과^ ^) 아닌게 아니라 '아리스'란 이름 자체도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의 그 '엘리스'를 따온 것이다.

 

 

 

  그런데 그 시기, 작가 아리스는 왜 그토록 미스터리 소설에 빠져들었던 것일까?  바로 이것이 아케미를 분신으로 여기게 하는 두번째 이유가 된다. 그리고 아케미가 가지는 노을의 공포증이 정말은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깨닫게 한다. 소설에서 아케미는 그 '노을의 시간' 중3을 어떻게 보냈는지에 대해 이렇게 고백한다.

 

 확고의 목적이 있어서 그런 건 아니라 말하기 어렵지만, 에리피 프롬의 책에 끌린 게 동기였어요. 중학교 3학년 겨울에 '자유로부터의 도피'나 '악에 대하여'라는 책을 집어삼킬 듯이 읽었지요. 고압적으로만 느껴졌던 사회에 저도 이런 식으로 반격해보고 싶다고 생각했어요.(P.206) (...) 고독과 불안에서 헤어나지 못할 때도 책만은 저와 차분히 대화를 나누어 준다는 사실을 알고 얼마나 구원받았는지 몰라요(P. 207)

 

 

   여기서 우리가 밑줄 그어야 하는 부분은 '사회에 대한 반격' 부분이다. 상상해 본다. 작가 아리스의 중3 시절을. 한창 사춘기 때의 그를. 그 시기는 누구나 그렇듯이 사회에서 행해지는 정형화된 삶의 길들임에 멀미를 느끼고 저항으로 충만해 있을 시기다. 흔히들 따라붙는 '질풍과 노도의 시기' 그대로 부모라는 울타리 아래서 그 때까지의 안락한 삶이 이제 세상을 스스로 책임져나가야 하는 그 시기에 이르러 전혀 낯설고 불안한 것으로 변해버린 가운데 오는 스스로 그것을 해소하고자 하는 몸부림이다. 작가 아리스도 그 시기 그렇게 몸부림을 쳤을 것이며 아마 그 몸부림 속에서 사회에 대해 반격하고 싶다는 생각 역시 들지 않았을까? 바로 그대로 아케미의 저 고백은 그 당시 아리스 자신의 고백이지 않을까? 아케미가 읽었던 저 인문서적들은 그 시기 한창 빠졌던 작가 아리스의 미스터리 소설들을 그냥 살짝 바꿔놓은 것에 불과하고 그는 그렇게 보란듯이 작가로 성공하여 사회에 반격할 것을 꿈꾸며 늘 귀감으로 삼는 엘러리 퀸과 반 다인이 혹은 딕슨 카의 소설들을 읽으면서 첫 장편소설을 써내려 간 것은 아닐까? 바로 이러한 유사점으로 인해 나는 아케미가 그야말로 아리스 자신의 분신이라 여기며 그 아케미가 하필이면 가장 처음 작가로서 첫 발을 내딛었다고 할 수 있는 '중3' 시절인 것을 감안해 그가 '초심'으로 돌아가 미스터리 자체를 다시금 음미하려 한다는 말을 했던 것이다.

 

 

 

   -  그래서 아리스, 미스터리라는 게 도대체 뭐야?  -

 

 

   아케미를 아리스의 '중3' 시절의 어린 아리스의 분신이라고 생각한다면 이 아케미가 '히무라 - 아리스 콤비'와 그토록 많은 말들을 나눈다는 게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더구나 그 상담과도 같은 대화에서 작가 아리스가 그 자신 생각하는 '추리소설의 본질' 이야기가 나오는 것은 더욱 진중하게 다가오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추리소설이 뭐냐는 아케미의 물음(그것은 또한 과거의 이제 첫발을 딛는 그 자신이 현재의 작가에게 묻는 것과도 같을 것이다.)에 작가 아리스는 이렇게 대답한다. 꽤 길지만 음미할만한 대목이 많으므로 모두 다 인용해 본다.

 

 추리소설이야말로 최대의 중죄이기 때문에 그것을 중심에 둠으로써 진상을 해명하고 싶다는 독자의 절실한 욕구를 환기할 수 있다고 소박하게 설명한 작가가 있지만 독자들이 소설 속에 나오는 살인의 진상이야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하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겠지요. 제 생각에... 살인사건이 테마라면 시체가 등장하잖아요. 시체란 '당신을 살해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하고 물어도 그 질문에 대답할 능력을 잃은 존재입니다.(...) 시체, 죽은 자는 우리가 아무리 질문을 던져도 절대로 대답하는 일이 없습니다. 그 불가능성이 열쇠같다는 생각도 들어요.(...) 추리소설의 불가능성이란 바꾸어 말하면 아무리 물어도 대답하지 않는 자에게 이야기를 끌어내는 게 아닐까 싶어요. 물어도 대답하지 않을거라 확신하는 상대에게, 대답해주지 않을 줄 확신하면서도 거듭 묻는다는 건 안타까운 행위라고 생각하지 않나요? (...) 이 보다 더 인간적인 행위가 있을까요?  예를 들면 신을 상대로 인간은 대답해주지 않을 줄 알면서도 필사적으로 질문을 계속합니다. (...) 잃어버린 시간을 향해 묻습니다. (...) 죽은자에게도 묻습니다. 나를 정말 사랑했나요? 나를 용서해주겠어요. 울며불며 매달려도 대답은 없습니다. 상대는 결코 대답하지 않습니다. 그래도 또다시 묻고 말아요. 추리소설은 그런 인간의 마음을 보여주는지도 모릅니다.(P.210 ~ 211)

 

   

    그는 말한다. '추리소설이란 대답을 들을 수 없는 존재에게 대답을 요구하는 것이라고. 듣지 못할 해답을 그렇게 계속 추구하는 과정일 뿐이라고...' 말이다. 이 말은 또한 다음과 같은 말로도 표현된다.

 

 사람은 어째서 그렇게까지 해가면서 기도를 바치는 것일까?

 기도, 그것은 탐정이 진상을 갈구하는 정열과 비슷하지 않은가? (P.245)

 

    

     이렇게 수십년간 미스터리 하나만을 천착해온 작가는 '노을의 시간'이 도래함과 더불어 거기에 대한 저항과 그 스스로 공포와 불안을 해소하려는 심정에서 미스터리에 빠져들고 작가로서 첫 발을 내딛게까지 되는 과거의 자신에게, '여기까지 이르고 보니 추리소설은 이런 것 같구나.'하고 넌지시 충고를 보내는 것이다.(이것은 또한 초심으로 돌아가 미스터리를 다시 한 번 되짚어 보는 스스로에게 보내는 충고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이런 것이다.

 

     도래한 '노을의 시간'. 모든 것이 의혹과 불안으로 가득찬 미지의 것으로 변해버린 그 시간 속에서 과거의 아리스 자신이 그토록 추리소설(미스터리)을 사랑했던 것은 혹시나 그 모든 것을 낱낱이 밝혀 줄 하나의 즉각적인 해답을 얻을 수 있으리란 기대에서 그랬던 것은 아닌지 어쩌면 지금까지도 여전히 추리소설이라는 것을 그처럼 '정오의 시간'을 가져다줄 수 있는 것으로 여기고 있는 것은 아닌지에 대해 추리소설이 그러한 '정오의 시간'을 가져다 줄 수 없음을 인정하는 담담한 고백인 것이다. 삶이라는 것 자체가 늘 '노을의 시간'이고 작가 역시 여전히 그 시간 속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존재이기에 그렇다. 이것은 아리스가 왜 각각의 시리즈 모두에서 '콤비'를 등장시키는가와도 관련이 있다. 이것은 단순히 탐정과 관찰자의 역할 관계가 아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작가 아리스 자신의 일종의 자아 분리이다. 감성과 지성의 분리. 사회적 관계를 맺는 사교와 홀로 내면에 침잠하여 사유하는 추리의 분리. 그렇게 아리스는 불완전한 그들을 하나로 묶어 활동하게 함으로써 작가 자신 역시 진실을 온전하게 체득할 수 없음을 암시한다. 또한 삶 자체가 '노을의 시간'의 연속이라는 것은 이번 소설에서의 살인 무대가 서로 반대되도록 설정되었다는데서 암시된다. 여기에는 두 개의 살인 무대가 존재하는데 하나는 요헤이가 살해당한 11월의 동터오는 새벽의 유령맨션이고 다른 하나는 오노 유우코가 살해당한 2년전 6월의 5시, 노을이 지기 직전의 해변인 것이다. 그렇게 이 무대가 밤과 낮, 폐쇄된 곳과 열려진 곳, 남자와 여자 모든 면에서 반대를 이루도록 설정되어 있다. 세계 자체가 서로가 다른 역할을 맡는 '아리스 - 히무라' 콤비 처럼 이루어져 있는 것이다. 이러한 설정과 콤비를 통해 아리스가 드려내려 하는 것은 역시나 단 하나다. 추리소설이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기도하는 심정으로 애타게 진실을 찾아 했던 질문을 되묻고 하는 것 밖에는 없다는 것.

 

   비록 정오의 시간이 영원히 도래하지 않을지라도 드러나지 않는 태양의 길을 찾는 무토베 처럼 진실에 대한 추구를 포기하지 않는 것. 바로 그 과정만이 추리소설의 의미이며 이로써 수십년 넘게 오로지 추리소설가로 지내온 작가 아리스 자신 역시 결의하는 것이다.

   이 진실에 대한 기도를 영원히 멈추지 않겠다고...

 

  왜?

  바로 거기에 한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노을의 시간 속에서 여전히 공포와 불안에 떨고 있는 존재가 있기 때문이다.

  돌아오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대답을 계속할 수 밖에 없는 것은 그 때문이다.

  비록 정오의 시간을 가져다 줄 환한 햇살은 되지 못하겠지만

  그저 작은 촛불이라도 되어서 그 미명 속에서 떨고 있는 작은 영혼에게 스스로 길을 찾을 수

  있게 도와줄 수만 있다면 추리소설을 통한 기도는 계속되어야 한다고...

  그렇게 그것은 사명과 같다고...

 

  때문에 아리스는 이 작품에서 이례적이라 할 만큼 아케미와 많은 대화를 나누는 것이다. 추리소설의 본질이 단순히 해결이라는 빛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아픔을 당한 사람의 곁에 서서 한 개의 촛불을 드는, 그 아픔을 생각하고 위로하는 기도이기에... 작가 아리스는 이것을 진심으로 믿고 있다. 그리고 여전히 자신이 믿는 추리소설의 사명을 끝까지 다하려고 한다. 아케미와 같은 그들 모두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기 위해서...  

 

  있지요, 아케미 양. 화성으로 가는 로켓을 탈 수 있게 되면 다 함께 떠나지 않겠어요? 그곳에서는 노을이 파랗다고 해요.(P.374)

 

 

 

  이래서 나는 작가 아리스를 사랑할 수 밖에 없다. 세상의 상식은 추리소설(미스터리)이 순수하게 쾌감 위에서만 움직이는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난 그것을 비웃는다. 그건 정말 모르고 하는 소리라고. 의심나면 '주홍색 연구'를 읽어보라. 추리소설도 문학의 어엿한 하나의 갈래이며 추리소설이든 문학이든 그 모든 것의 바탕에 있는 것이 바로 자신이든 타인이든 그것을 향한 '위로'라는 건 변하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될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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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 2012-01-16 17: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리스가와 아리스다 ㅠㅠㅠ
저는 항상 이작가의 책은 고민하다, 고민하다 안 산답니다.
정말 작가도 좋아보이고 책도 재밌어 보이는데!
헤르메스님의 리뷰를 계기로 한 번 시작해봐야겠어요!

ICE-9 2012-01-17 02:28   좋아요 0 | URL
소이진님 빌려서 보는 것도 한 방법이에요^ ^
폐쇠된 구역에서 한정된 용의자들 가운데 범인찾기를 좋아하신다면 '외딴섬 퍼즐'을 순수 논리적 추리면을 좋아하신다면 작가 아리스의 '46번째 밀실'을 추천드리고 싶네요. 아리스의 트릭들이 실망스러울 수 있지만 공정하게 정직하게 하나의 논리로 치밀하게 만들어 가는 걸 지켜보는 게 전 아리스의 진정한 매력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답니다. 언젠가 소이진님의 아리스 얘기 기다리고 있을게요^ ^

이진 2012-01-17 02:42   좋아요 0 | URL
어머, 헤르메스님! 이 시간까지 주무시지 않고 뭐하시는 거여요 ㅎㅎ
제가 말할 입장은 아니지만 말이지만요.
어서 우리 자도록 해요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