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라인의 항아리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31
오카지마 후타리 지음, 김선영 옮김 / 비채 / 2011년 8월
평점 :
절판


 

 

  

 '클라인의 항아리'는 1989년에 나온 오카지마 후타리(도쿠야마 준이치와 이노우에 이즈미 콤비의 공동필명)의 작품이다. '클라인의 항아리'는 일반적으로 '클라인의 병(The Klein Bottle)'으로 알려져 있다. 왜 항아리가 되었는지는 모르겠는데 어쩌면 일본에서는 그렇게 불려진 게 아닐까 도 싶다. 혹시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읽었다면 이 '클라인의 병'을 보았을 것이다. 거기 그림까지도 나와 있으니까.  그 소설을 읽지 않았거나 그래도 혹시 클라인의 병이 무엇인지 궁금하실 분들을 위하여 그 모습을 올려보자면 이렇게 생겼다. 

 

 

 이것이 바로 '클라인의 병'이다. '클라인의 병'은 독일 수학자 펠릭스 클라인이 1882년 만든 토폴로지로 쉽게 말하자면 '뫼비우스의 띠'를 3차원 입체로 재구성한 것이다. 그러니까 '클라인의 병' 또한 '뫼비우스의 띠'와 마찬가지로 안이 바깥이 되고 바깥이 안이 되는 구조인 것이다. 그림에서 보면 중앙의 구멍으로 따라 들어가면 '안'이었다가 점차 바깥으로 나오게 됨을 볼 수 있을 것이다. '클라인의 병'이 '뫼비우스의 띠'를 3차원적으로 변형시켰다고 말했지만 사실 이 둘엔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그것은 뫼비우스의 띠는 어떻게든 윗면과 아랫면이라는 경계가 있지만 '클라인의 병'에서는 그러한 경계가 조금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바로 그렇게 조금의 경계도 가지지 않은 기하학적 공간을 만들기 위하여 펠릭스 클라인은 이 '클라인의 병'을 만든 것이다. 

 

  그러니까 제목 '클라인의 항아리'는 조금의 경계도 가지지 않는 공간을 의미한다. 여기서 눈치빠른 분들이라면 바로 이 소설이 가상현실을 다루고 있다고 알아차릴 것이다. 왜냐하면 장르에 있어서 경계의 상실은 대개의 경우 '가상과 실제의 경계의 상실'인 '가상현실'을 다루고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바로 그대로 '클라인의 항아리'는 가상현실을 다루고 있다. 이러면 어떤 분들은 "뭐야? 매트릭스도 이미 고전이 된 지 오래인데 너무 식상한 소재아냐?" 하실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맨 위에서 나는 이 책이 출간 연도를 일부로 밝혔다. 그렇다. 이 책은 1989년에 나왔다. 당시는 가상현실을 다룬 작품이 아마도 '사이버공간(혹은 '전뇌공간'으로 번역된)'이라는 말을 최초로 생성시킨 윌리엄 깁슨의 '뉴로맨서'(1984)와 루디 러커의 '소프트웨어(1982)'가 유일했다. 그러니까 이 소설이 나왔을 때만 해도 아직 '가상현실'과 소설을 어떻게 접속해야 하는지 그것이 그리 잘 알려지지는 않은 시기였던 것이다. 더구나 이 소설처럼 '미스터리'와는 어떻게 '싱크'시켜야 하는지는 더더욱 전인미답의 처녀지였다. 그런데 거기에 이 일본 작가들이 발을 내디딘 것이다. 역시나 가상현실을 다루었던, 지금은 사이버펑크 소설의 걸작으로 평가받는 닐 스티븐슨의 '스노우크래시'가 나오기 3년 전에(이 소설의 평가를 보려면 스티븐 킹의 '셀' 2권을 보면 된다.) 말이다. 하지만 정작 '가상현실'에 대한 최초의 아이디어는 유감스럽게도 문학이 아니었다. 지금과 같은(그러니까 두뇌에 컴퓨터가 연결되어 전기적 신호(아시다시피 우리의 감각이란 두뇌에 전달되는 일종의 전기적 신호에 불과하므로)를 보내어 마치 그 두뇌가 현실인양 느끼게 한다는) 가상현실의 아이디어 자체는 미국의 철학자 힐러리 퍼트남의 '이성, 진리, 역사'에 먼저 나왔다. 그러니까 1981년에 나온 그 저서의 서장에서 'A BRAIN IN A BRAT(통속의 두뇌)'라는 사고실험 케이스로 나왔던 것이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말보다 직접 그림으로 보면 '가상현실의 최초 아이디어'라는 이 말이 쉽게 수긍이 가리라 생각한다. 

   

 

    바로 이와 같다. 저기 통안에 담긴 두뇌에 컴퓨터의 전선을 연결하고 컴퓨터는 두뇌에게 투손의 햇살 아래 산책하고 있다는 전기적 신호를 만들어 보내는 것이다. 그러면 두뇌는 자신이 통안에 든 두뇌 밖에는 없는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다리와 온전한 신체가 있으며 햇살이 내리쬐는 투손의 거리를 산책하고 있다고 느끼는 것이다. 그 두뇌는 그것을 실제와 조금도 다름없다고 여기지만 그것은 컴퓨터가 만들어낸 가상현실에 불과한 것이다. 사실 이러한 구상이 그 이후로 가상현실을 다루는 작품의 일종의 프로토타입이 되었다. 두뇌가 온전한 신체가 되고 두뇌가 담긴 통은 신체가 들어가는 캡슐이 되었을 뿐, 워쇼스키의 '매트릭스'를 포함하여 저 기본적 구성은 조금도 변함없이 내려오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이 소설 '클라인의 항아리'도 마찬가지다. 인간이 자극을 받아들이는 온 몸의 신경부위에 컴퓨터와 전선으로 연결되어 투명한 캡슐 속으로 들어가 가득한 점액질의 액체 속에서 컴퓨터가 인공적으로 생성해내는 가상현실을 체험하는 것이다. 

 

  대학을 졸업하고도 이렇다 할 직업없이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며 프리터 생활을 하던 주인공, 우에스키 아키히코는 어느 날, 그가 쓴 어드벤쳐 게임북(심리 테스트 처럼 독자가 고른 YES 혹은 NO에 따라 시나리오가 전개되는 게임북) 시나리오를 계약하고 싶다는 전화를 받게 된다. 하지만 전화해 온 쪽은 원래 응모했던 게임북 회사가 아니라 진짜 비디오 게임을 만드는 회사였다. '입실론'이란 그 회사는 자신들이 게임의 역사를 바꿔버릴 아주 혁신적인 게임을 만들고 있는데 주인공의 시나리오가 거기에 적격이니 계약하고 싶다고 한다. 응모기준이 정했던 분량을 초과한 관계로 낙선했던 주인공은 당연히 흔쾌히 거기에 응한다.(소설의 맨 앞부분에 바로 그 계약서가 나와있다.) 그러던중 회사로 부터 시나리오 작가로서 게임 테스트에 응해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게임은 놀랍게도 당시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완전 현실과 똑같은 가상현실 게임이었다. 아키히코는 그 가상현실 속에서 자신이 썼던 '브레인 신드롬'이라는 정신개조용 약품에 얽힌 스파이 게임을 하게 된다. 그런데 테스트 참가자가 하나 더 있었다. 아키히코가 보자마자 반해버렸던 미소녀 리사. 돈도 벌고 혁신적 게임에 최초의 플레이어가 되고 거기다 미소녀와 연애까지. 대박이 넝쿨채 굴러왔다고 생각한 순간 일상의 궤도가 뭔가 점점 어긋나는 전조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처음엔 게임 도중 들렸던 목소리. '제어할 수 있을 때 게임을 그만두라'는 목소리. 하지만 게임 제작자들은 그 정체를 모른다. 그런 건 전혀 프로그래밍되어있지 않다는 거다. 일종의 버그인데 하지만 그것은 고쳐지지 않는다. 그러다 점점 게임이 주는 폭력에 중독되어가던 리사가 돌연 사라진다. 처음엔 단순히 테스트를 그만두었나보다 했는데 리사의 친구라는 마카베가 연락을 취해 와 사라졌음을 알린다. 리사의 실종과 더불어 '입실론' 회사 자체의 의혹도 불거지면서 이제 아키히코는 '클라인-2'라는 가상현실 기계를 둘러싼 거대한 음모가 그 뒤에 도사리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플롯이 너무 전형적인가? 하지만 전형적인 것 만큼 속도를 또한 부채질하는 것도 없다. 사실 직접 손에 들고 읽게 되면 전형적인지 아닌지 따질 여유도 없이 단숨에 독파하게 된다. 전성기의 마라도나가 골문을 공략하듯 재빠르고 거침없이 이야기가 전개되는 것이다. 가상현실을 소재로 하고 있으나 복잡한 시스템적 설명은 거의 나오지 않는다. 말하자면 저 위에 썼던 가상현실에 대한 얘기는 그냥 내 얘기지 소설의 얘기는 아닌 것이다. 사실 이 소설은 가상현실 자체에 대해선 흥미가 없다. 그것을 둘러싼 음모도 아니다. 진짜 흥미가 있는 건 가상현실이 줄 수 있는 것, 그러니까 '가상현실과 실제 현실을 도저히 구별할 수 없게 된다면?'하는 상황이다. 당신이 이 소설의 마지막에 가서 맞닥뜨릴 것도 그것이다. 이 소설의 어디서부터가 진짜 현실이고 가상현실인지 내내 자문하면서 당신은 재차 앞 페이지들을 다시금 훑어보게 될 것이다. 

 

 

 

   당신은 구별해낼 수 있을까? 주인공이 지금 처해 있는 현실이 가상현실인지 실제의 현실인지? 아니 당신은 지금 확실히 알 수 있을까? 지금 당신이 있는 현실이 진짜 현실인지 아니면 가상현실 머신 속에서 컴퓨터가 만들어내는 가상현실 속에 있는지? 장자의 '호접지몽'과도 같이 당신이 나비가 된 꿈을 꾸고 있는 것인지, 원래 나비인 당신이 지금 인간의 꿈을 꾸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있을까? 정확히 위에서 언급한 가상현실의 원초적 아이디어라고 제시한 '통 속의 두뇌'라는 사고 실험을 구상했던 힐러피 퍼트남도 그것을 묻고 있다. 퍼트남은 바로 그와 같은 질문을 위해서 '통속의 두뇌'라는 것을 착상한 것이다. 그러니까 저 '통속의 두되'는 지금 완전히 자신이 화창한 투손의 거리를 걷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그렇게 진짜 현실이라고 믿고 있는데 사실 그것은 컴퓨터가 만들어낸 가상현실인 것이다. 혹시 지금 우리들도 '통속의 두뇌' 꼴이 아닐까? 과연 아니라고 누가 증명해낼 수 있을 것인가? 워쇼스키의 '매트릭스'도 마찬가지다. 그 영화도 3부에 이르면 '클라인의 항아리' 처럼 도대체 어디서부터 가상현실이고 진짜 현실인지 구별해 낼 수가 없다. 1부에서 명확히 구분되던 두 현실들은 2부 어디선가 기묘하게 뒤틀리고 다시 조합되어 정말 '클라인의 병'처럼 경계 자체가 사라져버리는 것이다. 감각은 두뇌에 보내는 전기적 신호에 불과하다. 그러니까 파장만 복제하면 얼마든지 현실감각을 재현해 낼 수 있는 것이다. 감각과 경험으로 실제와 가짜를 구별할 수 없다는 생각은 비단 퍼트남의 생각만은 아니다. 그 이전에도 장자를 비롯 무수히 많은 철학자가 그것을 물어왔다. 그 대표적 철학자로 데카르트를 들 수 있을 것이다. 그 역시 감각이 주는 한계를 잘 알았다. 주체는 아무래도 현실과 가짜를 구별할 능력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이렇게 생각했다. 내가 지금 보고 있고 감각하고 있는 이 현실은 어쩌면 악마가 나에게 보이는 환영일 수 있다고. 퍼트남은 이런 걸 두고 '형이상학적 실재론'이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실제와 가짜를 인간은 도저히 구별할 수 없는데 어떻게 인간은 참된 실재를 가질 수 있을까에 대한 논의를 '형이상학적 실재론'이라고 하며 퍼트남은 이 실재론이 고대 그리스 때 부터 내내 서양 형이상학에 있어 중요한 자리를 차지해왔다고 하고 있다. 그렇다면 '형이상학적 실재론'에 따르면 감각과 경험만으로 도저히 진짜와 거짓을 구분해 낼 수 없는 인간이 어떡하면 참된 실재를 얻을 수 있는지에 대해 뭐라고 말을 할까? 퍼트남은 말한다. 그건 인간의 절대적 한계이므로, 그렇게 완전히 능력 밖의 일이므로 인간 보다 더 나은 존재 초월적 존재가 아니면 불가능하다고. 그러니까 인간에게 참된 실재를 가져다 줄 수 있는 건 '신' 같은 초월적 존재 밖에는 없다는 것이다. 데카르트도 그와 똑같은 말을 한다. 물론 내가 지금 감각하고 경험하는 것이 악마가 내게 보여주는 환영일 수 있지만 우리 세계는 하나님이 다스리시고 하나님의 인격을 생각한다면 그런 환영을 허락할리 없을테니 내가 지금 보고 느끼고 있는 모든 것은 참된 실재라고 말이다. 웃기게 생각되어도 진짜 데카르트의 생각이다. 퍼트남도 진지하게 동의한다. '신'이 없으면 인간은 '진짜'를 하나도 얻을 수 없다고. 그러니까 인간 자신만으로는 지금 당신의 현실이 진짜 현실인지 가짜 현실인지 도무지 알 수 없는 것이다. 어떻게 자신하겠는가? 당신이 만일 자살을 했는데 문득 눈을 떠보니 화면에 보이는 게 'GAME OVER'이고 유리창 밖에서 또다른 당신의 친구들이 손 흔들며 웃고 있는 장면을 보게되지 않을거라고. '클라인의 항아리'가 말하고자 하는 것도 정확히 이것이다. 안됐지만 당신에게는 지금 당신이 있는 현실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알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것. 

  

  그런데도 당신은 살고 있다. 아무리 힘들어도 버터내려 생각한다. 까뮈가 내내 의문스럽게 생각했던 것. 어째서 우리는 자살하지 않는 것일까? 어느 것이 진짜 현실인지 우리는 도저히 알 수 없는데 이러한 까뮈의 질문은 너무도 당연하지 않을까. 하지만 당신은 산다. 자살은 꿈도 꾸지 않는다. 그만큼 지금 이 삶을 '진짜 삶'으로 여긴다. 그러니까 해답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것은 당신에게 '주어진 현실'이 아닌 바로 당신 자신이 '선택한 현실'이기 때문인 것이다.  '우리는 어느 것이 진짜 삶인지 도저히 알 수 없다.' 이 말이 정말 함의 하고 있는 것은, 그리고 퍼트남이 궁극적으로 전하고 싶은 것도, 당신은 그 때 그 때의 선택(혹은 결단)에 따라 당신 자신의 삶을 스스로 형성해왔다는 그것이다. 

 

  까뮈는 당신의 삶을 '천상에서 유배된 삶'이라고 말한다. 하이데거는 '당신의 삶이 문득 지상으로 내던져진 삶'이라고 말한다. 그렇게 우리는 삶이 우리에게 족쇄를 씌워 끌고 가고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런 걸 '운명이라 부르며 체념한다. 그렇게 당신은 과연 당신의 삶에서 단순한 객체였을까? 그렇게 당신은 이미 만들어진 현실 속에서 그냥 지내왔던 것일까? 천만에! 그 현실 자체가 이미 당신이 선택한 것인 것이다. '클라인의 항아리'에서 원래 아키히코가 만들려고 했던 '어드벤쳐 게임북'이 그렇듯이 매일 주어지는 선택적 상황에서 YES 혹은 NO로써 당신은 현실을 그때 그때의 결단으로 만들어왔던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 당신의 현실은 당신이 지금까지 해 온 모든 결단의 총합에 다름아닌 것이다. '클라인의 항아리'가 은밀히 주장하는 것도 그것이다. '진짜 삶을 우리가 알 수 없는 게 뭔 상관이냐 그것이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얼마든지 우리의 선택에 따라 결정되는 것인데...' '클라인의 항아리'는 내내 그 말의 단서를 보여준다. 앞 서 말한 '어드벤쳐 게임북'도 그 단서이지만, 왜 시나리오 작가인 아키히코가 그 게임의 테스트에 참여해야 되는지에 관해 설명할 때 회사직원은 이런 말을 한다. "이쪽으로 가라 저쪽으로 가라 게임이 제시해도 플레이어는 혹시 그 이정표가 걸린 나무를 올라갈지도 모르거든요. 저희는 그런 상황까지 대비하고 싶은 겁니다."  이 말은 '삶이 아무리 주어졌대도 인간은 얼마든지 다른 선택을 할 수 있고 그러면 현실은 그에 맞게 또 수정되어 변해간다'는 말과 뭐가 다른가? '매트릭스'에서 네오가 직면하게 되는 것도 그와 같지 않나? '아키텍쳐'가 "자, 너는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라는 질문 앞에 섰을 때. 정말 현실이라는 숟가락이 구부러진 것인가 아니면 구부러진 건 우리 마음인가? 깃발(현실)이 흔들리는 건 바람 때문인가 아니면 우리 마음이 흔들려서 그러는 것인가? 선문답 같은 이런 질문이 궁극적으로 당신에게 하는 말은 단 하나다. '당신이 바로 삶의 주인이고 현실은 바로 당신의 손 끝에서 생성된다.'라는 이 단순하고도 어이없는 진실 말이다. 

 

  '클라인의 항아리'의 프로그래밍된 가상현실 처럼, 그렇게 삶엔 다른 자들에 의해서 프로그래밍된 무수한 이념들이 있고, 현혹을 위해 달려드는 프레임들이 있다. 누군가의 프로그래밍에 따라 떠도는 소문들이 있고 쏟아지는 기사들이 있으며 전방위적으로 작동되는 음모와 꼼수들도 있다. 그 모든 것들이 당신을 그저 하나의 객체, 단순히 가공된 자극을 받아들일 뿐인데도 그것을 진짜라 착각하는 '통 속의 두뇌'로 만들려고 하고 있다. '당신의 현실은 그 때 그 때의 결단에 따라 형성된 당신만의 현실이다.'라는 말은 그 모든 것을 받아들임에 있어서 당신 스스로 결단해야함을 의미한다. 물론 우리는 어느 것이 참인지 알 수는 없지만 다행히 최대한 그 참에 가깝도록 선택할 능력은 있다. 데카르트가 그랬듯이 모든 것을 의심하거나 아님 훗설이 그랬듯이 객관적 실체가 어느정도 드러날 때 까지 모든 것을 판단중지 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될 것이다. 그들 역시도 보다 참된 실재의 삶을 얻기 위해 노력했던 이들인 만큼 그들의 방법 또한 귀기울여 들을 필요는 있지 않을까 싶다. 

  '클라인의 항아리'는 당신의 삶이 이미 그들에게 경작된 것이 아니라 아직 미개척지로 오로지 당신에게만 열려있음을 말한다. 맞다. 그것을 경작해야 할 사람은 오로지 당신 자신이다. 왜 함부로 남에게 맡기나? 그들이라고 당신과 별다를바 없는데 말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1-09-14 21: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대학 숙제로 인해 주제를 잡기 너무 난감했는데 참고하고 주제로 정해버렸습니다.

책도 꼭 읽어 보겠습니다.

ICE-9 2011-09-15 19:43   좋아요 0 | URL
뭔가 도움이 되었다니 저도 기쁘네요. 좋은 결과 있으시길 바라겠습니다.

 
산마처럼 비웃는 것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35
미쓰다 신조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11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 요코미조 세이지와 에도가와 란포 

 

  미쓰다 신조는 요코미조 세이지의 계승자라 할 만하다. 그것도 최고의! 요코미조 세이지는 에도가와 란포와 더불어 근대화기의 일본 미스터리계에 있어 양대산맥이라 할만한 작가다. 그는 소년탐정 김전일이 사건 해결에 앞서 입버릇 처럼 말하는 '할아버지의 명예를 걸고'에 있어 그 할아버지인 '긴다이치 고스케'라는, 추리력은 뛰어나지만 범죄를 막기에는 한없이 무기력한 그러나 일본에서 제일 유명하고 인기있는 명탐정을 탄생시킨 장본인이기도 하다. 말이 나온김에 요코미조 세이지와 에도가와 란포를 한 번 비교해 보고자 한다. 그들은 같은 시기 활동했다. 그 시기는 메이지 유신으로 인해 단행되었던 근대화가 거의 완성에 이른, 레닌에 따르면 자본주의의 궁극적 완성이라는 제국주의적 시대이기도 했다. 즉 일본은 에도가와 막부까지 면면히 이어져 온 고유한 전통으로 부터 막부의 필요로 위로부터 적극 유입해온 외래의 서구 자본주의로 급속히 재편되고 있는 시기였다. 요코미조 세이지와 에도가와 란포는 바로 그 시기에 활동한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다루는 방식은 달랐다. 에도가와 란포는 서양의 추리 문학으로 부터 많은 영향을 받은 그답게 철저히 비일본적인 것을 추구한다. 그의 소설은 대부분 거의 일본적 특징을 드러내지 않으며 마치 별개로 떨어져 나온 것 처럼 지극히 서구 '모던'적이다. 반면 요코미조 세이지는 거의 대부분의 작품이 변화의 와중에 있는 일본을 드러낸다. 그는 범죄의 현장을 대부분 일본적 전통이 계승되는 장소로 잡는데 거기서 일어난 범죄는 대부분 위기에 처한 일본적 전통의 징후를 드러내는 역할로 존재를 드러낸다. 그러니까 요코미조 세이지는 바로 외부의 서구 자본주의로 인해 공격받고 단절되는 당시 현재의 일본 모습을 그대로 미스터리 형식으로 담아낸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란포는 거기서 더 나아가 아예 그 모든 것이 평정되어 버린 완성된 서구적 '모던'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바로 이렇게 란포와 대비되어 뚜렷이 떠오르는 요코미조 세이지의 특성이 바로 긴다이치 고스케로 하여금 더할 나위 없는 무기력을 선사하는 이유가 된다. 즉 요코미조 세이지는 란포처럼 서구의 자본주의가 과연 긍정할만한 것인지 자신이 없는 것이다. 거기다 한 편으론 일본의 고유한 전통 문화가 이렇게 마구 단절되어져도 좋은 것인지도 확신이 없는 것이다. 정확히 그러한 작가의 욕망을 대변하고 있는 페르소나 긴다이치 고스케는 그렇기 때문에 사건의 적극적 해결에 나서지 못하고 언제나 후일담 같은 추리를 덧붙이는 것이다. 여기서 받게되는 것은 어쩌면 세이지 자신에게 미스터리 해결 자체는 그리 추구하는 목적이 아닌 것 같다는 인상이다. 아마도 그가 정말 미스터리를 통해 드러내고 싶은 것은 외부의 가치로 인해 부서지고 단절되며 그래서 범죄를 통해서라도 지킬 수 밖에 없는 일본의 고유한 전통의 현장 자체가 아닐까 생각된다. 때문에 미스터리 해결 마저도 범인 찾기가 문제가 아니라 이 상황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어떻게 해야 지금 이 상황을 제대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일종의 진실한 해답 찾기라 할 만하다. 즉 요코미조 세이지의 미스터리는 바로 그가 딛고 있었던 사회와 같이 호흡하는 작품이었던 것이다. 

 

  2. 미쓰다 신조와 요코미조 세이지 

 

   

 

  이것이 중요하다. 요코미조 세이지의 소설이 언제나 그 사회와 더불어 호흡한다는 것. 이것은 그대로 미쓰다 신조에게로 이어진다. 요코미조 세이지에게 범죄란 일본 고유의 전통을 단절시키는 것이었다. 그건 미쓰다 신조도 마찬가지다. 이전작 ' 잘린머리처럼 불길한 것'도 그렇고 이번 작품 '산마처럼 비웃는 것'도 그렇고 공통적으로 딱 요코미조 세이지 처럼 일본이 한창 2차 대전을 벌일 무렵 일본 고유의 전통이 계승되는 현장에서 범죄가 벌어진다. '산마처럼 비웃는 것'은 전작 '잘린머리처럼 불길한 것'과 이어지는 작품으로 전작에서 우연히 산마에 대한 얘기를 듣고 갑작스럽게 기차에서 내려버린 도조 겐야가 찾아간 산마가 나온다는 마을이 이번 소설의 주 무대가 된다. 책은 전작처럼 노부요시의 수기가 앞에 붙어 있는데 그 수기란 한 지역을 책임지는 가문의 셋째 아들인 노부요시가 그 지방의 고유한 전통적인 '성인-되기' 참배에 참여했다가(그것은 산에 있는 사당을 돌며 참배를 하는 것인데.) 들어가서는 안되는 '부름산'에 잘못 들어간 나머지 거기서 겪었던 기이한 체험을 기록한 것이다. 이러한 노부요시의 성인-되기 참배는 전작 '잘린머리'에서의 '십삼야 참배'와 동일한 것이다. 미쓰다 신조가 이렇게 반복적으로 성인-되기 참배를 끌어들이는 것은 성인, 즉 어른이 가지는 상징 때문으로 일본 전통의 법칙에 따라 어른이 된다는 것이 바로 전통의 계승, 그렇게 수호된 일본 고유한 전통 가치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요코미조 세이지와 똑같이 미쓰다 신조도 바로 거기서 범죄가 일어나도록 만든다. 요코미조 세이지의 세계에서 범죄란 늘 전통을 단절시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미쓰다 신조에게 있어서도 그건 마찬가지다. 그것은 범죄자의 면모를 확인하면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난다.(하지만 여기서 범죄자를 밝히는 것은 그야말로 스포일러가 될테니 이정도로 넘어가자. '당신이 잘린머리처럼 불길한 것'의 범죄자와 이 '산마처럼 비웃는 것'의 범죄자를 알게 된다면 그들이 공통점으로 자연히 내가 얘기하려고 했던 바를 유추해낼 수 있을 것이다.) 

  미쓰다 신조는 요코미조 세이지에게선 완곡하게 표현되었던 것. 그러니까 전통을 단절시키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보다 더 확실하게 언급한다. 그러니까 그 단절을 낳는 것이 바로 전쟁 당시 일본 지역 사회를 가장 급속하게 변화시켜가던 서구적 가치관이라는 것을 보다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미쓰다 신조는 프로이드의 이론을 따른다. 일본 고유의 전통 사회에서 서구적 가치관은 받아들이기 힘든 존재이기 때문에(왜냐하면 그것은 곧 파괴를 가져오므로) 당연히 변형을 거친다. 배척의 타당성을 위하여 보다 혐오스럽고 공포스러운 존재로 말이다. 즉 프로이드가 말했던 '괴물'이 되는 것이다. 그걸 미쓰다 신조는 괴담속의 마물로 다시금 빚어내는 것이다. 즉 미쓰다 신조에게 있어 '잘리머리'에 있어서 '아오쿠비'나 '쿠비나시'라든가 '산마처럼 비웃는 것'에 있어서의 '산녀'나 '산마'의 존재는 바로 그와 같은 상징을 지니고서 태어난 존재라는 것이다. 이제 이들의 의미들이 명확해졌으니 왜 미쓰다 신조가 하나의 산 전체를 밀실로 만들어버리는 지 이해가 된다. 그는 특히 3중 4중의 밀실을 만드는 것을 즐겨하는데 그것은 일본 전통 사회의 폐쇄성을 강조하여 그것이 가지고 있는 고유성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대체로 사건이 한 지역을 책임지는 당주의 집안에서 일어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대대로 이어져 온 가문의 역사를 통해 그렇게 면면히 뿌리내린 일본 전통 가치를 의미하기 위함이다. 그런데 바로 그 곳을 괴담의 존재들이 활동한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그것들이 능력이 실로 막강하다는 것이다. '잘린 머리'에서 아오쿠비의 저주는 실로 굉장하다. 그것은 사람들을 완전히 지배하고 있는데 거기서 이루어지는 구라타 가네의 주술과 아오쿠비의 저주간의 대결은 그야말로 일본 전통적 가치관과 서구적 가치관의 대립을 그대로 은유한 것이라 하겠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 소설을 읽을 때 느끼는 등장인물들의 아오쿠비나 산마에 대한 공포들은 바로 그들로 인해 변해버릴 지도 모를 내가 가진 정체성의 위협으로 인한 공포인 것이다. 이러한 정체성의 변화 그러니까 단순하게 말하자면 변해가는 머리와 기왕의 몸이 따로 노니는 상황은 전작 '잘린머리처럼 불길한 것'에서 '신체' 자체로 형상화된다. 몸에서 머리가 분리되는 것이야 말로 정체성의 변화라는 테마에 딱 적당한 신체적 묘사가 아닌가. 그러니까 미쓰다 신조 작품들에 있어서 하나의 특징이자 굉장한 장점인 조밀하게 엮어가는 공포 분위기는 바로 위험에 노출되어진 정체성 그 자체를 독자들로 하여금 무의식적으로나마 온전히 체험하게 하기 위함인 것이다. 

  '잘린머리처럼 불길한 것'에서 '산마처럼 비웃는 것'이 일보 전진했다면 그것은 괴담의 존재들이 의미하는 것이 보다 명확해지고 실체를 가지게 되었다는 것에 있다. 전작에서 실체는 없이 오로지 심리적 측면으로만 사람들을 지배했던 아오쿠비와는 달리 '산마처럼'에서는 아예 한 지역이 산마의 존재로 인해 금단의 영역이 되어버린다. 또한 아오쿠비의 저주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전작에서는 그리 명확히 밝히지 못했는데 '산마처럼'에서는 금단의 영역인 '부름산'의 의미를 통해 보다 분명한 의미를 갖게 된다. '부름산'의 또다른 이름은 '금산'이다. 말 그대로 금이 나는 산인 것이다. 미쓰다 신조는 '산마처럼'에서 아가사 크리스티의 '열 개의 인디언 인형' 처럼 살인을 예고하는 동요를 등장시켜 이것을 더욱 강조하는데 바로 그 동요는 금을 채광하는 작업을 묘사한 동요였다. 즉 여기서 미쓰다 신조는 아오쿠비 저주의 실체를 명확하게 밝힌다. 그것은 금 즉 '자본'인 것이다. 그렇게 아오쿠비의 저주는 '산마 처럼'에 와서 '서구 자본주의적 가치관'으로 명확해지는 것이다. 이렇게 미쓰다 신조는 요코미조 세이지의 작품 세계를 계승하면서도 요코미조 세이지에겐 그저 '불길한 것'으로 남아있었던 것을 더욱 진전시켜 보다 명확한 것으로 주조해낸다. 세이지는 변화의 양상을 쫓지만 미쓰다 신조는 변화의 원인을 추적한다. 세이지는 느즈막히 변화되어 버렸다는 것을 깨닫지만(그래서 그에게 원인을 생각함은 시기상조다.) 신조는 '왜 우리가 이렇게 되어버렸지?'를 묻는다. 그래서 명탐정들의 반응도 달라진다. 언제나 사건이 대부분 진행되고 난 후에나 마치 후일담 처럼 개입하는 긴다이치 고스케와는 달리 미쓰다 신조의 도조 겐야는 '산마처럼'에서 보듯 먼저 찾아가 적극적으로 시작부터 개입하는 것이다. 

 

  3. 도조 겐야와 긴다이치 고스케 

 

  이 둘이 다른 것. 나는 이것에 미쓰다 신조가 이 작품들을 통해 말하고 싶은 것의 핵심이 있다고 믿는다. 둘은 하는 일도 다른다. 긴다이치 고스케는 뚜렷하게 하는 일이 없다.(있었는데 읽었는지가 오래되어 잊어버렸는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그는 룸펜이다. 반면 도조 겐야는 교고쿠 나쓰히코의 '항설백물어'에 나오는 모모스케 처럼 괴담 수집가이다. 그렇다. 겐야는 일본 전통 사회에 의해 괴물의 가면을 써 버린 존재들의 얘기를 모으는 사람이다. 이것은 지금까지 해온 논의에 따르자면 겐야 자신이 서구 가치관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말이된다. 그는 과연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인가? 그가 지금까지 목도해 온 그것이 가져다 준 폐해를 목격하고서도? 

  '잘린머리처럼'에서 아오쿠비의 저주로 상징되는 서구 자본주의는 분명 위험한 것이었다. 그것은 살인을 불러왔고 일본의 전통 가치는 그에 의해 완전히 사지절단 당하고 말았다. 그런데 명탐정 역할을 하는 도조 겐야는 그러한 가치관을 대변하는 괴담을 수집하는 자다. '잘린머리'에서 초반에서 명탐정 역할을 하는 다카야시키가 기차에서 겐야를 처음 보았을 때 경원시 하는 것도 그래서 이해가 된다. 괴담 수집가가 명탐정 역할을 하며 전면에 등장하게 된 것은 미쓰다 신조가 전편의 작업을 전면 부정한다는 의미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물론 그것은 아니다. 도조 겐야의 존재는 미쓰다 신조가 전작에서 대립적으로 구축해 온 일본 전통 가치관과 서구 자본주의적 가치관의 관계를 전혀 관점을 달리하여 볼 것을 요청한다. 즉 슬라보예 지젝식으로 말하자면 도조 겐야의 존재는 다른 '시차적 관점'으로 보자는 것이다. 

  미쓰다 신조는 이를 위해 하나의 뚝 떨어진 얼룩과도 같은 존재였던 긴다이치 고스케와는 달리 도조 겐야에게 꽤 상세하게 과거를 만들어준다. 물론 그 과거의 대부분엔 아버지가 차지한다. 그는 공작으로 추대된 화족 가문의 장자였지만 스스로 귀족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박차고 나와 경찰을 도와 명탐정 역할을 하고 있는 자였다. 그렇게 그는 기성의 질서에서 벗어난 자였다. 그런데 도조 겐야 역시도 아버지의 그늘에서 벗어나 아버지가 아버지만의 명탐정 영역을 구축하고 살았듯이 괴담 수집이라는 자기만의 영역을 구축하고 살아간다. 그러니까 여기에 '아버지'가 있다. '산마처럼'은 다양한 아버지들이 나타난다. 사실 소설을 읽을 때 우리는 여기에 유념해서 읽을 필요가 있다. 겐야가 가진 존재적 독특성에 집약된 신조의 주제 의식은 바로 소설에서 펼쳐지는 이 아버지의 스펙트럼과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처음 수기를 쓴 노부요시의 아버지를 보게 된다. 그 아버지는 전작 '잘린머리'에서 극단의 가부장적 질서를 보여준 '이치가미 가'를 그대로 이어진다. 그렇게 그 아버지는 일본 전통 사회 자체를 의미한다. 동경에 까지 유학하여 서구 자본주의적 가치에 노출된 노부요시였지만 일본 전통 사회 자체를 상징하는 아버지의 명령을 거역하지 못하고 그는 전통적 성인-되기 참배식에 참여한다. 다른 한 편에는 '가스미 가'의 당주 다쓰지가 있다. 그 역시 노부요시의 아버지 처럼 한 가문의 당주이지만 그와는 극단적으로 대비되게 아주 무기력한 모습을 보여준다. 말하자면 이 소설에서 펼쳐지는 아버지의 스펙트럼은 그처럼 강인한 아버지에서 시작하여 무기력한 아버지로 차례로 이어지는 스펙트럼이다. 재미있는 것은 아버지의 강인함이 그가 소유하고 있는 아들의 숫자에 비례한다는 것이다. '가지토리 가'의 당주 리키히라의 경우, 그는 딸만 가지고 있는데 그래서 그런지 그 어떤 아버지 보다 타인들에 대해 포용적이다. 그는 심지어 아무 인연이 없는 구도승에게 조차 매일 저녁을 갖다주거나 저녁 식사에 초대하는 등 인정을 베풀어준다. 그는 남의 일에도 기꺼이 나서며 누구나 꺼려하는 금단의 영역 '부름산'도 맡아서 관리한다. 이런식의 대비는 전작 '잘린머리처럼'에서 나왔던 철저한 '남존여비'를 생각하면 이해가 된다. 즉 여기서 '아들'은 전통 질서를 강화하는 상징이고 '딸'은 그 질서를 약화시키고 바깥 것을 받아들임의 상징인 것이다. 딸만 가진 리키히라의 성품은 미쓰다 신조가 부여했던 상징 그대로 일치한다고 볼 수 있다. 도조 겐야는 아들이다. 그렇게 아직 기성의 질서로 부터 완전히 달아난 자는 아니다. 하지만 그는 내내 변화에 열려있는 자다. 그것을 나타내듯 소설에서 유일하게 그는 자신을 맡고 있는 담당 편집자인 여성과 늘 연락을 한다.(신조는 장차 이 둘을 로맨스 관계로 발전시키려 하는 듯 하다.) 즉 그렇게 '변화를 받아들임'을 상징하는 존재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그의 정체성을 반영하듯 그는 괴담을 수집하는 것이다. 즉 여기서 신조는 관점을 살짝 비튼다. 그는 도조 겐야의 존재를 통하여 전통과 외래적 가치관의 대립적 관계를 변화를 거부하고 옛 것 그대로를 지키는 수구적 태도와 기꺼이 변화를 받아들이는 포용적 태도의 대립관계로 비트는 것이다. 그래서 요코미조 세이지가 천착했던 주제를 전혀 새로운 시각에서 접근하도록 하는 것이다. 때문에 어쩌면 '산마처럼 비웃는 것'은 미쓰다 신조가 요코미조 세이지로 부터 벗어나와 그 진정한 출발을 하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하지만 여전히 '잘린머리처럼 불길한 것'이 그의 최고 걸작임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이러한 사실은 또한 이 작품이야 말로 도조 겐야의 그 진정한 시작이라는 점에서 또한 뒷받침 된다. 나는 여기서 스포일러를 피하기 위하여 일부러 범죄자의 존재가 가지는 의미를 언급하지 않았는데 아마도 직접 읽어보고 범죄자의 정체를 알게 된다면 도조 겐야와는 완전히 반대되는 의미를 가진 그로 인해 아버지의 질서에 안주하려는 수구적 태도와 겐야 처럼 변화속에 자신을 내맡기는 포용적 태도의 대립이라는 것을 확인하게 될 것이라 생각한다. 

 

  4. 덧붙임... 

 

  개인적으로 미쓰다 신조는 일본 미스터리 계에서 최고의 실력을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된다. 미스터리를 형성하는 능력이나 분위기를 주조해내는 능력 그리고 미스터리와 분위기 모두를 자신이 말하고 싶은 주제에 맞도록 통제해가는 능력, 한 마디로 미스터리 작가로서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할 능력 중에서 가장 최고의 자질을 미쓰다 신조는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이 작가가 요코미조 세이지 처럼 일본 그것도 한창 변화의 와중에 있는 일본을 담아내고 있는 것에 천착하고 있음은 흥미롭다. 그는 연이어 하나는 걸작이고 다른 하나는 흥미로운 작품을 내어놓고 있는데 아직 그에게 구체적인 해답은 나와있지 않은 것 같다. 그는 여전히 그 자신의 페르소나라고 불러도 무방할 도조 겐야 처럼 해답을 찾아 떠돌아다니는 중이다. 다음 작품에서는 또 어떤 관점의 변화로써 그를 정말 좋아하고 관심있게 지켜보고 있는 나를 또 다른 사유의 시간으로 인도할지 정말 기대가 된다. 한 마디로 미쓰다 신조의 작품들은 모두 강추다. 일독할 것을 강력히 권해드리고 싶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soyo12 2011-09-06 06: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장바구니에 넣어야하는 거군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ICE-9 2011-09-07 01:04   좋아요 0 | URL
미쓰다 신조는 개인적으로 추천드리고 싶습니다.
보잘것 없는 리뷰 좋게 봐 주셔서 제가 오히려 감사합니다.^ ^
 
더욱 깊이 내려간 조세핀 테이의 '나사의 회전'...
프랜차이즈 저택 사건
조세핀 테이 지음, 권영주 옮김 / 검은숲 / 2011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먼저 개인적인 고백을 하나 하자면, 나는 조세핀 테이를 좋아한다.

 


  물론 미스터리 작가로서의 그녀도 좋아하지만 그보다는 '그녀 자체'를 좋아한다. 아니 차라리 나의 이상형이라고 해야겠다. 내가 이상형을 꼽는데 있어 가장 우선순위에 있는 것은 바로 그 누구에게도 기대려 하지 않는 '독립적인 여성'인데 조세핀 테이는 거기에 완벽하게 들어맞기 때문이다. 아마도 나와 비슷한 조건으로 이상형을 꼽는 사람은 조세핀 테이의 일생을 들여다보게 되면 분명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지리라 믿는다. 조세핀 테이는 그녀의 두 번째 필명이다. 그녀의 본명은 엘리자베스 매캔토시이다.  그녀는 '조세핀 테이'라는 필명을 1936년 그녀의 두 번째 미스터리 작품 'A Shilling for Candles'을 쓰면서 사용했고 이 소설은 다음 해인 1937년, 알프레드 히치콕에 의해 'Young and Innocent'라는 제목으로 영화화된다.(예전에 우리나라에서도 비디오로 나온 적이 있다.) 죠세핀 테이란 이름은 그녀의 어머니 이름과 할머니의 영국식 '성'을 혼합한 것이었다. 그녀는 세 딸들 중 장녀였고 버밍엄의 앤스티 체육 전문학교에 들어갔으며(후일 그러니까 1946년 조세핀 테이는 바로 이 학교를 무대로 한 스릴러 'Miss Pym Disposes'를 쓰게된다.) 체육교사로 지내다가 아버지가 몸져 눕게 되자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아버지를 간호하다가 작가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조세핀 테이는 '작은 아씨들'의 루이자 메이 올콧 처럼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다. 공식적으로 밝혀진 연애담도 하나도 없다. 그녀의 희곡만을 골라 편찬한 바 있었던 John Gielgud 경은 테이의 연인이 1차 대전중 사망했을 것이라 추정했지만 밝혀진 것은 없다. 평소 그녀의 결혼에 대한 지론이 그녀의 대표적 캐릭터 그랜트 형사의 말을 통해 나타난 바가 있다고 한다. 그랜트는 어딘가에서 이렇게 말한다. "성공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은 절대로 타인을 통해서 그 충족을 구하지 않는다네. 결혼도 포함해서 말이지. 오로지 그들 스스로 그 충족을 구한단 말일세." 오로지 홀로 스스로 자신의 인생을 충만케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죠세핀 테이의 모토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녀는 평생 그녀의 모토대로 살다가 삶을 마감했다. 그야말로 '독립적인 삶' 자체였다. 그녀의 전재산은 영국의 'National Trust'에 모두 기부되었는데 흥미로운 것은 그녀의 작품 'A Shilling for Candles'에서 희생자로 나온 유명한 여배우도 똑같이 전재산을 'National Trust'에 기부했다는 것이다. 어쩌면 그 작품을 썼을 때 부터 이미 자신의 삶에 대한 중요한 것들을 미리 결정해두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녀는 낚시와 승마를 좋아했다. 직업도 체육교사이고 보면 죠세핀 테이의 삶 전체에서 여성적인 특성이 두드러지는 면은 거의 없다. 이런 면에서 왠지 '고독의 우물'을 쓴 작가 '레드클리프 홀'이 떠오르기도 한다. 특히나 조세핀 테이는 승마를 좋아했는데 이러한 승마에 대한 사랑은 이 작품 '프랜차이즈 저택 사건'에서도 면면히 나타나고 있다. 단적으로 주인공 변호사인 로버트가 자신은 형사사건에 그리 밝지 못하여 유능한 형사 전문 변호사 케빈에게 도움을 요청하는데 하지만 로버트는 케빈이 과연 자신이 맡고 있는 의뢰인 샤프 모녀를 믿어줄지 확신할 수 없다. 로버트는 케빈과 샤프 모녀를 직접 만나게 하는데 케빈은 로버트의 우려와는 달리 샤프 모녀를 전적으로 신뢰하고 흔쾌히 사건을 맡는다. 그런데 그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이었다. 

  "자네 마녀들이 마음에 들었어. (...) 찰리 메러디스의 동생이라니 참 별일이 다 있지. 최고였다고, 그 영감. 인류 역사상 대략 단 하나뿐인 정직한 말 장수가 아닐까. 그 조랑말을 생각하면 내 정말 한시도 고마움을 잊어본 적이 없다네. 소년이 어떤 말을 처음 갖는지는 아주 중요하거든. 평생을 좌우한단 말이지. 말에 대한 태도뿐 아니라 다른 모든 것까지. 소년과 좋은 말 사이에 존재하는 신뢰와 우정엔..." (p.291)

 

   로버트도 그리 생각했지만 케빈은 그 좋은 말을 정직하게 자신에게 판매해 준 그 찰리 메러디스의 동생이라면 누구를 납치한다는 게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렇게 말에 대한 신뢰가 인간에 대한 신뢰로 이어지는 것은 오랫동안 승마를 하면서 말과의 관계를 다져온 조세핀 테이가 아니라면 할 수 없는 것이며 케빈의 고백은 사실 테이 자신의 말에 대한 사랑을 고백한 것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 같다. 이렇게 '프랜차이즈 저택 사건'은 사실 죠세핀 테이의 자전적인 모습이 많이 나타나 있다. 특히 여주인공 매리언 샤프는 그야말로 죠세핀 테이의 페르소나라고 할 만한데, 스포일러상 여기서 그걸 자세히 밝힐 수 없는 게 안타깝지만 아마도 조세핀 테이의 실제 모습을 떠올리며 이 책을 읽어보면, 왜 매리언 샤프를 죠세핀 테이의 페르소나라고 말하는지 저절로 이해가 갈 것이라 생각한다.

 



 '프랜차이즈 저택 사건'은 1951년 영화화되었다. 왼족이 로버트 가운데가 매리언 그리고 오른쪽이 샤프 부인이다. 영화는 유투브로 감상할 수 있다.

  '프랜차이즈 저택 사건'은 말 그대로 프랜차이즈 저택에서 일어난 사건을 중심으로 한다. 어느날 로버트에게 그 저택에 살고 있는 메리언 샤프가 전화로 의뢰를 해 온다. 평소 마을에서 은근히 기피되고 있던 모녀로 부터 뜻밗의 의뢰인지라 로버트는 사실 내켜하지 않는다. 더구나 의뢰하는 건 또한 자기들로서는 전혀 일면식이 없는 한 소녀가 자기들 모녀가 그녀를 납치하고 가혹행위를 했다고 고발한 사건이었다. 로버트는 형사전문이 아니라서 다른 변호사에게 넘기려고 하지만 매리언의 변호사로서가 아니라 한 마을에 사는 친구로서 진지하게 도움을 구하는 거라는 말에 그만 응낙하고 만다. 매리언의 저택에서 테이의 대표적 캐릭터이자 '시간의 딸'에서 안락탐정의 전형을 보여준 형사 '그랜트'를 만나 사건의 전모를 전해 듣는다.(사실 테이의 소설에 익숙한 사람은 그랜트의 등장과 더불어 그를 주인공으로 생각하겠지만 그는 어디까지나 조연에 그친다. 테이가 그랜트를 등장시켰으면서도 조연에 머무르게 하는 건 이 소설의 주제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어 중요하다. 하지만 그랜트의 의미를 말하려면 아무래도 스포일러를 언급해야 하므로 어쩔 수 없이 이 정도만 언급하고 넘어가려 한다. 이럴 때 마다 미스터리 리뷰로써의 한계를 절감하지만 어쩌겠는가 미스터리는 어디까지는 읽는 자의 즐거움이 그 첫째가 되어야 하니까 말이다.)

  열 여섯이 되는 베티 케인이라는 소녀가 샤프 모녀가 차로 자신을 납치하고 가정부로 삼는 것에 저항하는 그녀를 가혹하게 학대했다는 것이다. 그녀는 정확히 프랜차이즈 저택의 모습을 묘사했고 그 내부까지 묘사했기 때문에 경찰도 직접 수사에 나선 것이다. 샤프 모녀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한다. 베티 케인이라는 소녀를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소설의 주가 되는 미스터리는 바로 이것이다. 과연 누구의 말이 맞는 것일까? 소녀의 고발은 정말 고발일까 아니면 무고일까? 소설은 이것을 주된 줄기로 해서 하나하나 가지들을 새로 돋아나간다. 테이는 이 소설의 사건을 18세기에 영국에서 실제 있었던 엘리자베스 케닝 유괴 사건에서 가져왔는데 그 때 케닝은 한 집시무리가 자신을 납치했다고 고발하는 바람에 그 집시 무리는 아무런 증거가 없었는데도 안그래도 집시를 탐탁지 않게 생각했던 사람들로 부터 어마어마하게 박해를 받았다. 여기서 드러나듯, 엘리자베스 케닝 사건에서의 핵심은 바로 '마녀사냥'이다. 별다른 증거가 없는데도 평소 경원시 되던 존재에 대한 무분별한 비이성적 증오가 핵심인 것이다. 그렇다면 테이는 하필이면 왜 그 사건을 모델로 가져온 것일까? 그것은 '프랜차이즈 저택 사건'이 나온 시기를 알면 어느정도 이해가 된다. 이 소설은 1948년에 나왔다. 그러니까 2차대전이 끝나고 난지 얼마 안된 시점, 그러니까 파시즘이 가져온 그 엄청난 물질적 정신적 피해로 부터 자유롭지 못했던 그 시점에 나온 것이다. 2차대전이 가져온 가장 커다란 비극. 나치에 의해서 6백만명 넘게 유태인이 학살당한 것은 아도르노가 '아우슈비츠 이후에도 시를 쓴다는 것이 가능한가?'라고 말했을 만큼 전세계인의 마음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그 어마어마한 사람들은 모두 '유태인'이란 이유 하나만으로 처형을 당했다. 테이는 아마 거기서 집시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억울하게 당해야했던 엘리자베스 케닝 사건을 떠올렸던 것이 틀림없다. 테이는 확인했던 것이다. 나치가 초래한 비극은 어떤 특수한 시점에 일어난 유일한 사건이 아니라 역사에서 반복적으로 일어났던 사건임을. 그래서 그녀는 아마도 그것을 알리고 경고하기 위해 이 소설을 썼던 것은 아닐까 생각된다. 우리가 변하지 않는 한 파시즘은 언제 또다시 일어날지 모른다는. 만일 이렇다면 조세핀 테이는 정말 현명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로부터 정말 얼마되지 않아서 우리는 미국에서 '매카시즘'이라는 또 하나의 마녀사냥식 파시즘을 보게 되었으니까 말이다.

  조세핀 테이가 '프랜차이즈 저택'을 주 무대로 삼는 것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프랜차이즈' 자체가 마녀사냥과 관련하여 사람들 뇌리에 불러일으키는 그것이다. 그건 바로 프랑스의 드레퓌스 사건이다. 그 때 드레퓌스는 독일과 내통했다는 간첩 혐의에 대해 따로 진범이 밝혀졌음에도 불구하고 군부는 그것을 무시하고 끝까지 그에 대한 재판을 강행했는데 그 이유는 다른 이유는 없고 오로지 드레퓌스가 유태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사회에 만연된 유태인 혐오증 때문에 아무 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드레퓌스는 마구잡이로 박해를 당했던 것이다. 이러한 '마녀사냥'식 몰아대기. 다시 말 해 원래 혐오하고 있던 자에게 '마녀'의 가면을 씌워 전혀 아무런 거리낌 없이 배척하고 폭력까지 가하는 무분별한 증오, 파시즘이 보여주었던 그것과 완벽하게 똑같은 증오를 독자들에게 떠올리기 위하여 죠세핀 테이는 '프랜차이즈 저택'을 주 무대로 삼은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죠지 4세(영화 '죠지왕의 광기'의 그 죠지를 말한다.)의 섭정 시대 유행했으나 그 후 빅토리아 양식에 밀려 거의 찾아보기 힘들어진 '프랜차이즈' 양식으로 지은 저택을 내세워 그와 똑같이 샤프 모녀가  마치 집시나 유태인 처럼 사회에서 고립적이며 열악한 위치를 가지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기 위함이다. 이것은 로버트가 매리언의 전화를 받고 그 프랜차이즈 저택으로 가는 장면에서 놀랍도록 문학적으로 잘 형상화되어 나타난다. 테이는 로버트가 프랜차이즈 저택으로 가는 과정을 상세히 묘사하는데 거기서 흥미로운 것은 테이가 유독 대립관계를 강조한다는 것이다. 그녀는 먼저 '신'거리에서 마주보고 있는 말을 부리는 가게와 자동차 정비소를 통해 대립 관계를 은연중에 보여주더니 좀 더 나가서는 아예 로버트와 프랜차이즈가 있는 전원적인 밀퍼드와  맞닿은 도시적인 라버러와의 대조를 통해 그 대립적인 관계를 재차 확인한다. 문제는 말도 밀퍼드도 그 대립관계에서 열악한 위치에 있다는 것이다. 말은 시대에 뒤쳐짐을 의미하고 밀퍼드는 프랜차이즈가 현재 있는 곳을 의미한다. 그렇게 프랜차이즈 저택은 열악한 밀퍼드에서 더욱 열악한 자리에 있으며 그들이 그렇게 고립되고 열악한 이유는 '말'에서 드러나듯이 시대에 뒤쳐진 존재들이라는 사람들의 근거없는 인상 때문이다. 라버러 사람들에게 밀퍼드가 그렇게 인식되어 기피되는 것과 똑같이 말이다.

 

  프랑스의 아트락 그룹 '샤일록(세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의 그 '샤일록'이다.)의 데뷔 앨범 LP 커버와 같이 찍어 보았다. 커버에 소설 속 사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둥근 창문이 보인다. 여기에서 보듯이 둥근창문은 프랑스의 전통적인 양식인 것 같다.

 

 

 

 

 

 

 

 세핀 테이의 '프랜차이즈 저택 사건' 영문판 표지. 사건의 주무대가 되는 프랜차이즈 저택을 전면에 내세웠다. 그런데 시선 처리가 오묘하다. 분명 등장인물 누군가의 시선으로 바라본 저택의 모습을 그린 듯 하다. 소설을 읽으시면 누군가의 시선인지 아시게 될 것.

  

  조세핀 테이가 전반부에 이렇게 안정된 일상 같지만 그 이면엔 수많은 대립관계가 은밀하게 흐르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이것은 바로 이 소설의 화자이자 주인공이 되는 로버트와 관계가 있어 중요하다. 소설은 로버트로 부터 시작한다. 그는 변호사이다. 변호사는 그의 가문 대대로 이어내려온 직업이다. 그는 그 가문의 성원으로 당연하다는 듯이 변호사가 되었다. 그렇게 그의 일상은 수백년의 세월이 집적된 견고한 것이었으며 '월, 수, 금요일에는 버터 비스킷이고 화, 목, 토요일에는 다이제스티브'로 집약되듯이 항구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그가 그렇게 견고하고 항구적으로 생각하는 일상은 사실은 그 이면에 저토록 많은 대립관계가 드리워진 것이었다. 그만큼 불안해질 수 밖에 없는 것이었다. 로버트도 무의식적으로나마 이것을 알아차린다. 그는 '이것이 네가 이룬 모든 것이다'라는 생각으로 자신의 일상에 대해 순간 회의감이 든다. 이 정체모를 감정으로 상념에 빠져들 때쯤 매리언에게서 도움을 구하는 전화가 걸려온다. 매리언의 그 전화는 이렇게 묻는 것과 같다.

  "로버트, 당신의 일상은 당신이 믿는 것 만큼 견고한가요? 우리에겐 이리도 많은 대립관계가 불안하게 놓여있는데..."

   매리언 또한 분명 로버트 처럼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비록 은근히 따돌림을 당하고 있는 그녀들이지만 그래도 지킬 것을 지키고만 살면 괜찮다고 생각하던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그러한 그녀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알지도 못하는 소녀에 의해서 아무런 이유도 없이 자신들의 일상이 마구 파괴되는 경험을 하게 되는 것이다. 어느새 마녀 사냥을 당하는 '마녀들'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테이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우리들은 로버트나 매리언 처럼 우리들의 일상이 견고하고 항구적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사실 그것은 환상에 불과하다고. 아무 이유나 잘못 없이 우리의 일상은 오로지 타자의 전적인 악의만으로도 무참히 깨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역사는 이미 드레퓌스나 파시즘을 통하여 이것을 충분히 경험했다. 테이는 일상 속에 수없이 가로놓인 대립관계를 통하여 우리네 일상이 그 대립관계를 먹이로 해서 무럭무럭 자라나는 파시즘에게 얼마든지 먹음직스러운 토양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면서 바로 그 파시즘(여기서 파시즘은 아무 이유 없이 가해지는 개인이나 집단적 폭력 전체를 상징해서 쓰는 말임을 일러둔다. 즉 전적인 이기적인 악의로만 가해지는 폭력 자체를 말하는 것이다.)에 의해 일상 자체 마저 느닷없이 무참히 무너질 수 있다고 경고하는 것이다. 이런 비극을 막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조세핀 테이는 바로 그것을 '프랜차이즈 저택'의 샤프 모녀를 통해 보여준다. 케빈을 비롯 로버트 그리고 그의 조카 네빌 마저도 샤프 모녀 특히 매리언을 직접 만나고 나서는 끌리게 되는데 그 이유는 네빌이 직접 말하듯 '그녀들은 온전히 열려있고 모든 변화를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즉 테이의 대안은 명백하다. 우리의 일상을 언제든지 무참히 깨어버릴 수 있는 파시즘은 어디까지나 대립관계, 즉 나와 남을 결코 조화될 수 없는 '타자'로만 바라보는 그 시각에 있으므로 '샤프 모녀'처럼 스스로를 타자들에게 열려진 존재로 만들자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열려진 존재로 만들자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테이는 소설을 통해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타자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시각'을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그것이 바로 모든 등장인물들이 '프랜차이즈 저택'에 직접 와서 그들과 함께 집 내부를 보고 나서야 그들의 편이 되는 이유이며 왜 결정적인 사건의 전환점이 되는 것이 '둥근 창문'이 되는 것인지의 이유이다.(역시나 스포일러상 자세한 언급을 피한다. 하지만 안에서 바라보는 것과 바깥에서 바라보는 것의 결정적 차이는 무엇보다 죠세핀 테이가 대안으로 제시하는 '타자의 내부에서 바라보는 시각'을 강조하는 것이라 하겠다.)

  조세핀 테이의 '프랜차이즈 저택 사건'은 단순한 미스터리 소설이 아니다. 죽 얘기해 온 것 처럼 파시즘이 남기고 간 그 정신적 폐해와 공황 속에서 다시는 그러한 비극을 겪지 않기 위해 테이 스스로 생각하는 대안을 차근차근 문학적으로 형상화한 작품이다. 그렇다고 미스터리적 재미가 반감되는 것도 아니다. 개인적으로는 미스터리적 재미와 테이 스스로 천착하는 주제가 완벽하게 균형을 이루고 있다고 생각한다. 거기다 로버트가 매리언에 대한 짝사랑과 그의 잠재적 라이벌들에 대한 질투를 통하여 로맨스적 재미까지 덤으로 얻을 수 있다. 무엇보다 테이의 팬으로선 작가 자신을 그대로 녹여낸 듯한 매리언을 보는 재미가 꽤 쏠쏠하다. 하지만 그 어떤 것도 언제든 반복될 지 모르는 파시즘을 어떻게든 막아내기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과 가져야 할 것에 대해 교조적이지 않고 공감가능하게 문학적으로 형상화낸 솜씨에는 비견될 수 없다. 죠세핀 테이가 이 책을 통해 나타내고 있는 우려는 한시적이지 않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도 '프랜차이즈 저택 사건'과 똑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지 않은가! 책은 저마다의 운명이 있다고 하더니 정말 그런 것 같다. 이 책은 정말 딱 적당한 시기에 우리에게 도달한 것이다. 무분별한 판단과 성급한 비난을 하기 전에 한번쯤 지금의 나 자신은 어떠한 모습인가 되돌아보기 위해서라도 읽어둘만한 작품이 아닌가 싶다. 지금 이 순간 만큼은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해답을 해 주었다는 점에서 조세핀 테이에게 경배라도 바치고 싶은 심정이다. 


댓글(0) 먼댓글(1) 좋아요(1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 더욱 깊이 내려간 조세핀 테이의 '나사의 회전'...
    from 헤르메스님의 서재 2012-12-13 00:06 
    이럴수가! 제가 가장 사랑해마지 않는 여류 미스터리 작가인 조세핀 테이의 또 다른 스탠드 얼론 작품인 '브랫 패러'가 출간되었습니다. 작년에는 '프랜차이즈 사건'이 나와서 저를 들썩이게 만들더니 이번에는 '브랫 패러'로 또한 호들갑을 떨게 만드는군요. '브랫 패러'는 사실상 조세핀 테이의 스탠드 얼론의 마지막 작품입니다. 48년에 나온 '프랜차이즈 사건' 바로 다음 해. 그러니까 1949년에 이 작품이 세상에 나왔죠. 굳이 이 작품들을 스탠드 얼론으로
 
 
 
회색 쇼크 - 고령화, 쇼크인가 축복인가
테드 피시먼 지음, 안세민 옮김 / 반비 / 2011년 7월
평점 :
절판


 

 

  오래 살고 싶다는 것은 비단 진시황제만의 욕망은 아니다. 성경에 따르면 인류 최초의 인간 아담은 900년 넘게 살았다고 한다. 아서왕 이야기에 나오는 마법사 멀린은 사람의 수명은 600년이 적당하다고 말한다. 그래야 인간으로서 배워야 할 최소한의 것들을 다 배울 수 있다고. 그래서 그는 그만큼 생을 누렸다. 신화라는 것을 인간이 가장 욕망하는 걸 은유와 상징으로 버무린 이야기라고 정의한다면 이렇게 오래 산 사람들이 나오는 것은 수명의 연장이야 말로 우리의 가장 근원적 욕망임을 나타내는 것이 아닐까 한다. 같은 이야기를 스페인의 철학자 우나무노는 이렇게 말한다. 인간의 삶이 가진 가장 근본적인 비극적 의미는 언젠가는 죽는다는 것이며 종교를 비롯한 모든 인간이 만들어내는 문명적인 것들은 바로 그 비극을 조금이라도 지연해보고자 하는 욕망에서 나왔다고.

  다행히 현대에 들어와서 이러한 욕망은 서서히 충족되고 있는 중이다. 테드 C 피시먼의 ‘회색쇼크’에 따르면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사는 1시간 마다 평균 수명은 11~15분 정도 늘어나고 평균 수명은 날마다 5시간씩 늘어난다(P.447)’고 하니까. 하지만 사람은 혼자 사는 것이 아니고 많은 사람들이 모두 조금이라도 오래 살기를 원하는 만큼 그렇게 이러한 바람들이 집단적으로 실현이 될 때 개인은 전혀 예기치 못했던 각종 사회 문제와 그로 인한 변화들이 마구 생겨나게 된다. 그것이 바로 테드 C 피시먼의 책 제목 ‘회색 쇼크’의 의미이며 이 책이 독자에게 보여주려 하는 것의 전부이다. 

   ‘회색 쇼크’는 말 그대로 점점 수명이 늘어나는 그렇게 노인이 많아지는 ‘고령화 사회’를 다룬다. 하지만 이론적인 틀로 독자를 학생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저널리스트 출신답게 미시적인 측면과 거시적인 측면 모두를 아우르는 실제적인 사례들로써 독자를 그것의 목격자로 참여시킨다는데 독특성이 있다. 한 마디로 '고령화' 사회에서 야기되는 모든 문제와 변화들을 가장 가까이에서 한 번 체험해 보라는 것이다. 그렇게 초점이 실제적 사례들에 맞춰진 만큼 피시먼은 현재 고령화 현상이 가장 집약적으로 표출되고 있다고 보여 지는 일종의 ‘사례군’으로서의 몇 개의 지역(혹은 국가)들을 골라 그것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그에 의해 선별된 지역(혹은 국가)들은 이렇다. 

  먼저 ‘고령화’에 특화된 지역사업들을 개발하여 가장 적극적으로 ‘고령화’에 발맞춰 나가고 있는 미국의 ‘플로리다’로 부터 갑작스러운 '고령화'의 진전으로 부족해진 노동력으로 인한 이민족의 유입과 극심한 재정 압박으로 인해 이제 노인 문제를 가정 내부의 책임으로 전가시키고 있는 ‘스페인’을 비롯, 세계에서 가장 노인 인구가 많아서 ‘고령화의 최전선’으로 불리지만 오히려 그 ‘고령화’ 때문에 젊은 세대가 기성 가치관으로부터 탈피하고 전통적인 가족의 의미가 퇴색되는 등 가치관 자체가 혼란의 와중 속으로 들어가고 있는 일본을 경유하여 제조업의 발달로 부유한 도시로 손꼽히다가 ‘고령화’로 인한 노동력 부족으로 제조업이 몰락하고 그것을 보충하기 위한 이민자들의 대량 유입 그리고 그러한 상황 속에서 재정적 지원을 받을 수 없는 늘어난 노인 인구들이 저마다 새로운 삶의 방식을 시도하는 가운데 오히려 전통적 가족의 가치가 점점 높아지고 있는 미국의 록퍼드와 오랜 역사 때문에라도 동양의 전통적인 가족의 가치가 가장 높았던 국가가 ‘고령화’를 맞이하면서 어떻게 해체되고 새롭게 받아들여진 자본주의 때문에 어떤 식으로 다시 조합되는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중국까지, 피시먼은 마치 현미경을 들이대듯 한 개인의 삶이라는 미시적인 부분에서부터 나라 전체를 아우르는 거시적인 부분까지 가감 없이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건져내어 마치 탁본을 떠 보이듯 독자 스스로의 눈으로 그 세세한 부분까지 관찰할 수 있도록 안내한다. 그야말로 전 세계에 미치고 있는 ‘고령화’의 현재와 그것이 야기할 미래의 모습을 충실히 경험할 수 있도록 만드는 책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한 가지 아쉬운 것은 별로 친절하지는 않다는 것이다. 앞 서 말한 대로 우리는 이 책을 통해 ‘고령화’의 현상은 이해할 수 있지만 그것을 어떻게 내가 판단하고 받아들여야 할 것인지에 대한 도움이 될 만한 해석의 틀 같은 것은 이 책이 주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저자는 실제 상황을 이야기하기 전에 거기에 대해 일종의 원론 같은 것으로 ‘장수에 관한 짧은 역사’라든가 ‘과학이 노화를 막을 수 있을까?’ 등등의 약간 이론적 틀이라 볼 만한 것들을 부가하고 있긴 하나 정작 논의하고자 하는 것과는 또 맥락이 맞지 않아 오히려 혼란을 부추긴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한 마디로 전체를 일목요연하게 아우르기엔 곳곳에 다소 산만한 구석들이 눈에 띈다는 것이다. 너무 개별적 상황들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려 한 나머지 독자로 하여금 전체적인 맥락을 놓치게 하는 우를 범하지는 않았나 싶다. ‘회색 쇼크’ 즉 ‘고령화’는 가까운 미래에 전 세계에 걸쳐 가장 중요한 이슈로 분명 떠오를 문제다. 그것도 부정적 의미에서 말이다. 아마도 피어슨은 거기에 대해 독자 개인이 지금 진행되고 있는 ‘고령화’ 현상을 잘 이해하고 거기에 나름대로 대처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기 위해 이 책을 썼을 것이다. 하지만 상황은 언제나 그렇지만 인지 그 자체만으로는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한다. 그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제대로 된 시각을 만들어줄 수 있는 틀이 있어야 비로소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고령화’가 가져올 변화 그리고 문제들은 절절히 체감하는 바이지만 거기에 대해 평범한 한 개인으로서의 내가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혹은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이 책은 그리 제대로 짚어주고 있지 못한 것 같다. 다시 말 해 책에 기술된 실제 상황에서 각 나라들은 각자 저마다의 방식으로 '고령화'에 대처하고 있는데 독자는 그 중 어느 것이 자기에게 적합한지 그 적절한 선택의 기준을 얻기 위한 갈피를 잡기가 어려운 것이다. 물론 바람직한 대처 방안이란게 현실과 깊이 맞물릴수록 존재하기가 어렵지만 스스로 그 잠정적인 대안이나마 도출할 수 있도록 제대로 해석하기 위한 최소한의 이론적 틀마저 주지 않는 것은 다소 불친절한 게 아닌가 싶다. '고령화'가 지금 나에게도 닥쳐올 문제이기에 더욱 그렇다. 피어슨이 혹시라도 또 ‘고령화’에 대해 쓴다면 실제적 현실과 그것을 제대로 바라볼 수 있는 이론적 틀을 적절히 안배하여 하나의 맥락으로 이어지게끔 해서 독자들이 ‘고령화’에 대해 체계적으로 이해하고 그래서 나름대로 준비 할 수 있도록 좀 친절히 써 주었으면 좋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네덜란드 살인 사건 매그레 시리즈 7
조르주 심농 지음, 성귀수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7월
평점 :
품절


  

  네덜란드, 그 곳은.... 

 

  나는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8년 전에 아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는 모든 장소에서 멀리 벗어나 이곳(네덜란드)에 오기로 결심했다. (...) 여기서 나는 남의 일에 호기심을 가지기 보다는 자신의 일에 열중하는 아주 활동적인 위대한 국민들과 더불어 대도시의 편리함을 만끽하면서도 가장 먼 황야(사막)에 있는 것 처럼 유유자적하는 은둔 생활을 할 수 있었다. 

                                                                            - 데카르트, 방법서설 (p. 182 ~ 83) 

 

  데카르트는 암스테레담에서 오히려 '가장 먼 황야'를 느낀다. 왜냐하면 더없이 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곳이지만 거기에는 자신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그는 완벽한 은둔자요 프랑스인도 네덜란드인도 아닌,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자다. 거기서 그는 '코기토 에르고 섬'을 외치는데 가라타니 고진에 따르면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그렇게 그 모든 것으로 부터 이탈한 스스로의 존재가 되어버린 그가 정말 존재하고 있는 것인지 알아야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데카르트는 존재의 '무화(無化,Nullify)를 경험하는 가운데 존재의 확실성을 추구하려 했던 것이다. 

  네덜란드를 그러한 존재를 무화시키는 광막한 황야로 바라보았던 이가 비단 데카르트 뿐만은 아니다. 알베르 까뮈 역시도 비슷한 감흥을 느꼈다. 그는 운하들이 담쟁이 덩쿨 처럼 뒤얽힌 암스테레담을 바라보며 '지옥도'를 연상했고 거기서 '전락'이라는 소설을 통해 상상적 자살을 감행했었다. 하지만 그 리스트는 까뮈에서 그치지 않는다. 까뮈 자신 심농을 읽지 않았다면 이방인을 전혀 다르게 썼을 거라며 그 영향력을 인정한 바 있었던 심농 역시 그 리스트에 들어가야 한다. 바로 '네덜란드 살인사건'에서 우리는 데카르트가 했던 고백과 비슷한 것을 매그레 자신의 입을 통해서 듣게되는 것이다. 

  한데 지금 그는 네덜란드의 그림엽서와는 아무런 공통점도 없는,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북유럽 특징이 농후한 광경과 맞딱드리고 있는 것이다. (p. 9) 

  그 북유럽적 특징이란 끝간데 없이 드넓게 펼쳐져 있는 히스 들판을 말한다. 게다가 공간적 배경이 되는 델프제일은 파리에서 가장 북쪽에 있는 곳이다. 그야말로 데카르트의 가장 먼 황야와 비슷한 가장 멀리있는 광막한 초원인 것이다. 그는 이곳으로 '생폴리앵에 지다' 처럼 수동적으로 이끌려 온다. 아는 이 하나 없는 전혀 낯선 곳에 유일한 프랑스인으로(매그레가 온 것은 뒤클로라는 프랑스 교수 때문이었지만 그는 사실은 스위스 태생으로 프랑스에 귀화한 자였다. 그러니 정말 프랑스인은 매그레가 유일한 것이다.). 거기다 매그레는 네덜란드어를 전혀 모른다. 그러니 당연히 고립될 수 밖에 없다. 거기서 그는 외딴 섬과도 같은 존재다. 아니 '얼룩'이다. 언제든 사회에 균열을 일으키고 전복시켜 버릴 수 있는 '수상한 이방인'이다. 사람들은 경계하고 기피한다. 때로는 자존심 강한 유럽인들 답게 아예 무시한다. 그렇게 매그레는 자기 존재의 '무화'를 경험하는 것이다. 단적으로 오스팅을 따라 들어간 카페에서 그 '무화'가 나타난다. 

  이어서 전개된 활발한 대화는 네덜란드어 특유의 거칠고 요란한 발음들 때문에 흡사 말다툼을 방불케 했고, 그러다보니 매그레가 호주머니에서 잔돈을 꺼내 계산을 한 뒤 판 하설트 호텔로 자러 가는 것엔 아무도 신경쓰지 않았다. (p.87)

  그렇게 그는 유령이 된다. 심농이 이렇게 매그레에게 '존재의 무화'를 가져다 주는 것은 데카르트가 했던 것과 똑같은 것을 매그레에게 주고자 함이다. 즉 존재를 유령처럼 희미하게 만들어 오히려 매그레로 하여금 더욱 더 자기 존재에 숙고하도록 하기 위함인 것이다. 그런데 왜 심농은 하필 시즌2의 세번째 작품인 '네덜란드 살인사건'에 와서 그런 것을 매그레에게 주려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교차로의 밤'에서 매그레가 느낀 유혹 때문인 것이다. 매그레는 전면적으로 다가오는 '엘세(Else)'에게 유혹을 느낀다. 그것은 이름에 감추어진 상징 그대로 여성성 전체가 전해오는 유혹이기도 했다. 바로 거기서 느낀 '유혹' 때문에 심농은 매그레에게 '존재의 무화'를 경험토록 하는 것이다. 과연 그 유혹이 자신에게 어떤 의미인지 깊이 숙고하도록 만들기 위해. 

  때문에 매그레가 네덜란드에 와서 처음 만나는 이가 바로 포핑아를 유혹했던 존재인 '리번스'가 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이치인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이해가 잘 되지 않는다. 유혹이 어쨌길래 심농은 매그레에게 '무화'까지 경험하게 하면서 매달리게 하는 것일까? '생폴리앵에 지다'를 생각하면 심농이 왜 이러는지 이해가 된다. '생폴리앵에 지다'와 '네덜란드 살인사건'은 시즌의 세번째라는 것과 공간적 배경이 모두 프랑스가 아니라는 공통점 말고도 매그레가 지극히 수동적으로 거기로 인도된다는 공통점이 있다. 단적으로 매그레는 '네덜란드 살인사건'에서 이렇게 말한다. 

난 지금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사건에 휘말린 상태요! 프랑스인이 한 명 의심을 받고 있다기에 사건을 해결하라고 나를 보낸 거지....(p.216)

  매그레 시리즈에서 '수동성'은 주로 죄에 대한 인식과 관계가 있다. 즉 매그레가 수동적으로 한 공간으로 인도된다는 것은 일종의 고해성사와도 같은 것이라는 말이다. 이것은 카톨릭 세계관에 그 영혼이 깊이 침윤되어버린 자로서 어쩔 수 없는 불가항력인지도 모른다. '죄'에 대한 생각들이 뼛 속 깊이 새겨졌기에 스스로 그 '죄'를 인식만해도 마치 파블로프의 조건반사 처럼 참회에의 욕구로 이끌리게 되는 것은 아닌가 싶다. 그렇게 자신이 어찌해 볼 도리가 없는 지극히 수동적인 것인 것이다. 그러니 '네델란드 살인사건'에서 또 다시 매그레가 수동적으로 인도된다는 건 심농이 그 유혹을 '죄'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 된다. 때문에 심농이 매그레 자신을 온전히 숙고할 기회를 만들어주는 것은 바로 그 '죄'에 대해 숙고할 시간을 갖게 하는 것이고 이미 '죄'라고 인지된 이상 그 숙고는 바로 스스로를 '정화'하려는 노력이 된다. 모든 고해성사가 그렇듯이... 

  하지만 여기서 '죄'는 단순히 기독교적 의미의 그런 '죄'는 아니다. 좀 더 본질적으로 존재의 위협이 되는 것. 그러니까 꾸준히 유지해 온 존재에 하나의 얼룩을 만들어 교란시키는 것. 그렇게 궤도에서 벗어나게 만드는 것. 그것이 바로 '죄'인 것이다. 정확히 오디세우스를 홀려서 배에게서 뛰쳐나오게 만드려는 세이렌의 노래소리인 것이다. 즉, 심농은 '생폴리앵에 지다'에서도 그랬듯이 '죄'의 카톨릭적 의미를 교묘하게 비틀어 자신의 일상성에 위협이 되는 것을 '죄'라는 것으로 설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여기서 보인 이 '수동성'은 일종의 자기 기만적 정당화인 것이다. 그러니까 자신의 일상을 견고히 지키고 싶은 그가 위협이 되는 것에 그렇게 '죄'라는 레떼르를 붙임으로써 그 배척을 정당화하는 것이다. 그러니 '생폴리엥에 지다'에서 심농이 했던 참회의 목적이 사실은 일상의 복권에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네덜란드 살인사건'에서도 역시 그 유혹에 관한 숙고는 본디 일상의 재탈환이 목적인 것이다. 말하자면 그는 이미 정답을 가지고 있다. 문제되는 건 오로지 그 정답을 뒷받침 해 줄 근거와 증거 뿐인 것이다. 그래서 '포핑아' 살인 사건에 있어서 매그레가 진정 원하는 것은 누가 그를 죽였는가가 아니다. 그가 정말 알고자 하는 것은 그가 '왜' 죽었는가이다. 즉 여기서 '포핑아'는 매그레에게 일종의 반면교사로 작용하는 것이다. 그것은 일종의 모델이다. 매그레가 유혹에 굴복당했을 경우 어떤 운명을 걷게 될 것인지 알려주는 이정표인 것이다. 따라서 매그레의 수사의 진정한 목적은 세이렌의 유혹으로 부터 자신을 일상에다 단단히 결박시켜줄 그 '밧줄'을 찾아내는 것이다. 

 

  과연 매그레는 그 밧줄을 찾아낼 수 있을까? 

  - 오디세우스를 빌어 보여주는 '서로 상반된 모순으로 중첩된 삶'이라는 모습 

    

  매그레의 목적은 유혹을 제거하고 다시 안전하게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그의 바람은 정작 시도하자마자 난관에 봉착한다. 물론 그것은 그 근거를 찾기가 어려워서가 아니다. 본질적으로 그가 스스로 그 유혹에 노출되고 싶은 은밀한 욕망이 있기 때문이다. 심농은 왜 매그레에게 리번스를 가장 먼저 만나게 했던 것인가? 매그레의 진정한 목적에 따르자면 그는 곧바로 포핑아의 집으로 인도되었어야 한다. 그곳은 말하자면 페넬로페(포핑아의 부인은 뒤클로의 묘사에 따르면 페넬로페와 똑같다.)가 있는 오디세우스의 고향 '이타케'이다. 머무르는 곳. 굳건한 일상이다. 하지만 매그레는 거기로 인도되지 않는다. 리번스를 만나고 나서도 마찬가지다. 그는 뒤이어 뒤클로를 만나는 것이다. 왜 심농은 매그레를 곧장 거기로 인도하지 않는가? 왜 리번스와 뒤클로를 만나고 난 뒤에 인도시키는 것인가? 이것은 마치 오디세우스가 이타케로 돌아와서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는 과정과 비슷하다. 오디세우스 역시 곧장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바깥에서 저간의 사정을 듣는 것이다. 그렇게 매그레는 오디세우스의 역할을 이어받는데, 문제는 그가 거치는 인물들이 모두 한 곳에 머무르지 않는 사람들이라는 공통점이 있다는 것이다. 리번스는 끊임없이 그 곳을 벗어나려 애쓰는 여자이고 뒤클로는 자신의 범죄 이론을 강연하기 위하여 세계 곳곳을 떠도는 자이다(그는 하물며 스위스 태생이지만 프랑스로 귀화한 사람이기도 하다). 그렇게 그들은 일상을 떠나려하거나 머물 수 없는 자들이다. 그렇게 매그레에게 들려오는 세이렌의 유혹을 상징하는 존재들인 것이다. 매그레는 그들을 만나고나서야 포핑아의 집으로 인도된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그들이 상징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유념해서 볼 것은 심농이 그들을 묘사하는 방식이다. 바로 여기에 왜 매그레가 오디세우스 처럼 스스로 귀를 열고 세이렌의 노래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인가에 대한 본질적인 이유가 드러난다. 당신이 유념해서 읽었다면 매그레가 리번스를 처음 만났을 당시 암소가 송아지를 출산하고 있었음을 기억할 것이다. 리번스는 늘 떠나려 하는 여자다. 그런데 출산은 여성을 한 곳에 머무르게 하는 가장 중요한 동기가 되지 않는가? 즉 여기에는 상반된 모순이 하나로 접합되어 있는 것이다. 그것은 뒤이어 만나는 뒤클로 역시도 마찬가지다. 뒤클로는 세계 곳곳을 떠돌아 다니지만 사실은 포핑아 부인에 대한 묘사에서 드러나듯 내부적으로는 강하게 머무르고 싶어하는 자이다. 그 역시 모순된 삶을 살고 있으며 심농은 그것을 강조하듯 호텔(일시적으로 머무는 장소)에서 경찰(일상을 항구적으로 유지하는 대표적인 직업)의 감시를 받는 뒤클로를 보여주는 것이다. 여기서 왜 매그레가 스스로 유혹에 노출시키는지 그 이유가 드러난다. 심농이 리번스와 뒤클로를 통해 보여주는 것은 바로 우리네 삶이 그러한 상반된 모순이 중첩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에 어느 것이 옳은지 쉬이 결정을 내릴 수 없고 따라서 유혹에 늘 귀를 기울이게 된다는 것이다. 심농은 이러한 상반된 모순이 중첩된 삶의 모습을 작품 전반에 걸쳐 반복적으로 보여주는데 그건 '포핑아'가 살고 있는 집의 위치에서도 드러난다. '포핑아'의 집 위치를 한 번 그려보자면 이렇다. 

   

 

 

  여기서 포핑아의 집은 바로 운하에 접해 있다. 그런데 그 운하는 거대한 바다로 이어져 있다. 포핑아는 한 때 항해사였고 가장이 되어 일상에 머무른 지금도 늘 바다로 나가기를 꿈꾸고 있는 자였다. 즉 여기서 운하는 바로 그에게 '유혹'인 것이다. 출근하거나 퇴근하거나 그는 늘 운하와 나란히 놓인 길을 걸을 수 밖에 없는데 그렇게 그는 매일 그 유혹과 대면하고 살아가는 것이다.  게다가 바로 곁에 자신에게 늘 같이 도망가자고 조르는 리번스의 집 마저 있다. 그렇게 그 역시 늘 세이렌의 노래소리를 듣는 자였던 것이다. 심농은 그러니까 잘 알고 있다. 삶 이란게 세이렌들의 섬을 지나는 오디세우스의 배와 같다는 것을. 서로 상반된 모순으로 중첩된 이런 삶에서 우리는 늘 진정한 진실을 확인하게 되기를 염원할 수 밖에 없고 그러니 그 조금의 가능성이라도 보인다면 우리의 눈과 귀는 그것에로 끌릴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바로 그렇기 때문에 오디세우스도 부하들의 귀는 모두 밀납으로 막았지만 자신만은 위험을 무릎쓰고서라도 그 노래를 들으려 했던 것이 아니겠냐고 심농은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매그레는 자신의 진정한 목적이 무엇인지 뚜렷이 알고 있으면서도 정작 포핑아의 집으로 가는 것은 주저하는 것이다. 

 

  하지만 심농은 또 우려한다. 늘 그 유혹에 빠져있을 수 없다. 어차피 단단히 하나로 결부된 모순들은 영원히 해결되지 않을 것이고 그렇다고 내버려두면 늘 그 사이에서 방황만 할 뿐 인생은 조금도 진전하지 않는다. 심농은 그것을 알고 있다. 유혹에 굴복하든 극복하든 언젠가는 결단이 필요하다는 것을. 심농은 삶의 지속을 위하여 '결단'이 필요함을 역설한다. 이를 위해서 심농은 매그레 시리즈 중 그 어느 작품 보다 '네덜란드 살인사건'을 고전 미스터리 공식에 충실하도록 만든다. 그러니까 이 소설에서 심농은 두 가지 전략을 쓰는 것이다. 늘 상반된 모순을 안고 사는 삶이라는 것을 강조하게 위해 그는 세이렌과 이타케에 있어서의 오디세우스를 차용하고 모순의 서투른 봉합이라고 해도 '결단'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고전 미스터리 공식을 차용하는 것이다. 

 

  고전 미스터리 공식을 통해 강조되는 결단

 

  '네덜란드 살인사건'은 그 어떤 시리즈의 다른 작품 보다 고전 미스터리 공식에 충실하다. 도면의 등장, 알리바이 공작, 용의자 감추기 그리고 마지막 범인 찾기 연출(관련 용의자 모두를 모아놓고 탐정이 범인을 밝히는 공식)까지 당신이 셜록 홈스에게 기대했던 것을 여기서도 맛볼 수 있는 것이다. 

  

    이를테면 이런 도면이 가능한 것이다.  사실 이 집의 배치는 사건 정황과 용의자가 왜 범죄가 불가능했는지 이해하는데 있어 정말 필수적인데 정작 책에는 실리지 않아서 아쉬웠다. 그래서 그려본 것. 이러한 도면이 가능할 정도로 '네덜란드 살인사건'는 고전 미스터리 공식을 충실히 따르고 있는 것이다

 

  과연 심농이 강조하고자 하는 결단과 그것을 위해 차용하는 고전적 미스터리 공식은 어떻게 연결되는 것인가?  이미 글이 너무 길어졌으므로 세세하게 말하기 보다 가장 결정적인, 그러니까 관련 용의자 모두를 모아 놓고 범인을 밝히는 마지막 장면만을 들어 설명하려 한다. 이건 고전 미스터리에 있어서 하나의 전형적인 공식이라 할 만한데 애초에 왜 이러한 공식이 자리잡았는지를 설명하면 심농이 왜 결단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하여 고전 미스터리 공식을 차용했는가가 설명될 것으로 믿는다. 그렇다면 왜 고전 미스터리는 하필이면 그러한 마지막 장면 연출을 하나의 공식으로 정립했는가? 그것은 바로 부르조아지의 욕망과 관련이 있다. 애초에 미스터리 장르가 왜 자리잡았는가? 그것은 근대에 이르러 더욱 더 격변하는 정세와 통신과 교통의 발달로 한 개인이 인식하고 이해하기에는 그 범위를 넘어서버린 세상에 대해 불안해진 부르조아들이 상상적으로 그것을 제거하기 위해서였다. 말하자면 고전 미스터리는 애초에 부르조아들에게 진정제 역할을 하기 위해 태어났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건 해결도 경찰이 아니라 사립탐정이라는 독특한 존재가 맡게 된 것이다. 부르조아들에게 국가란 애증의 대상이어서 자신의 권리와 재산에 지나친 간섭을 싫어한다. 이른바 야경국가란 부르조아들의 꿈인데 때문에 그들의 불안을 상상적으로 해소시켜줄 존재로 경찰은 아무래도 미덥지 못한 존재였던 것이다. 뭣보다 프랑스의 '비독' 처럼 미천한 범죄자 출신들이 경찰의 전신이었기 때문에 신분적으로 열악한 그들에게 그들의 치부를 드러낼 사건의 해결을 맡긴다는 것은 자존심상 인정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반 다인의 파일로 반스 처럼 귀족이거나 최소한 신사 계급 출신이 탐정을 맡게 된 것이다. 즉 고전 미스터리의 공식들은 그러니까 철저하게 부르조아의 욕망을 실현하는 쪽으로 맞추어져 있다는 것이다. 그건 마지막 장면의 연출 역시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여기에 은밀히 끼어드는 부르조아의 욕망이 바로 심농이 강조하고자 하는 '결단'과 관련이 있는 것이다. 

  마지막 장면은 왜 그렇게 연출되는 것인가?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범죄가 일어난 그 시간을 복원한다는 것이다. 탐정은 마지막에 모든 관련자들을 모아놓고 일어난 사건의 전모를 하나하나 밝힌다. 그렇게 과거의 사건을 그대로 재현해 내는 것이다. 왜 이렇게 하는가? 이것은 단순하게 사건의 경위와 해결을 드러내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보다 본질적인 목적은 바로 그 시간을 다시 가져오는 것이다.  왜 그 시간을 다시 가져오는 것인가?  그것은 과거의 시간이 범죄가 발생한, 그래서 완벽해야할 부르조아의 질서에 흠집을 가져온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탐정이 마지막에 가서 그 사건을 하나하나 세밀히 복원하고 이윽고 범죄자릋 찾아내어 해결하는 것은 사건으로 인해 파탄나버린 부르조아적 질서를 다시 회복하고 궁극적으로는 아예 그 사건이 없었던 것 처럼 만들어 부르조아의 질서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을 만천하에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그러니까 마지막 장면 연출은 부르조아들의 욕망(자신들이 속한 질서는 아무런 문제가 없고 앞으로도 문제가 없을 것이라는 믿음)을 상상적으로 충족시키기 위한 것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거기엔 아무런 실체적 근거가 없다. 탐정의 해결이란 존 딕슨 카가 '화형법정'에서 잘 보여준 것 처럼 '수사'에 불과한 것이다. 

  '진리란 수사에 불과하다.'란 말이 미스터리 장르만큼 더 잘 어울리는 장르도 없다. 그 무엇보다도 피에르 바야르가 잘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애크로이드 살인사건'에 대한 그의 해석은 아가사 크리스티보다 더 설득적이다. '해결이 하나의 수사에 불과하다'의 궁극적인 뜻은 무엇인가? 그것은 탐정이 행한 해결이 그 순간에 내린 결단에 불과하다는 의미이다. 그러니까 그는 그 순간 가장 그럴듯해 보이는 것을 선택한 것이다. 바로 이것이 심농이 고전 미스터리 공식을 '네델란드 살인사건'에 차용한 궁극적 원인인 것이다. 이렇게 보면 매그레가 해결해 가는 마지막 장면의 연출이 흥미롭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매그레는 결정적인 해결이 순간까지 머뭇거리는 태도를 보인다. 그러니까 그는 갈등하는 것이다. 이런 진실을 밝혀도 좋을까? 때로는 등장인물에게 묻기도 한다. 사람들은 반대한다. 아무도 매그레의 해결을 환영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렇게 밝힌 것을 조용한 사회에 큰 돌덩이를 던졌다고 나무라는 것이다. 그는 왜 해결을 했던 것일까? 아무도 환영하지 않는 해결을 왜 감행해야 했던 것일까? 이것은 그동안 매그레가 보여준 모습과 너무 다르지 않는가? 그는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때로 필요하다면 법적인 정의를 가볍게 무시할수도 있는 사람이었다. 그랬던 매그레이기에 이번 처럼 모두가 기피한다면 그들의 삶을 위해 사실은 눈감아주어야 했다. 그런데 그는 과거의 그 자신을 깡그리 부정하듯 감행한 것이다. 그럼 그것은 누구를 위한 것이었을까? 그건 바로 매그레 자신을 위한 것이었다는 외에 다른 대답이 여기서 과연 가능할까? 그렇다. 매그레는 바로 자신을 위해 그 무모한 해결을 감행한 것이다. 포핑아는 그의 분신과도 같은 존재였다. 포핑아 처럼 매그레 역시도 유혹에 휘둘리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 포핑아는 결국 아무 선택도 하지 못한 채 유혹에 흔들리기만 하다가 비극적 최후를 맞고 말았다. 그러니까 매그레는 포핑아를 일종의 스스로에게 반면교사로 삼고자 해결을 감행한 것이다. 그렇게 유혹에 흔들렸던 포핑아를 비난의 대상으로 삼음으로써 스스로에게 경고하고자 모두가 반대하는 해결을 해버린 것이었다. 즉, 그는 결단한 것이다. 유혹을 끊어내고 일상으로 다시 돌아가기로. 물론 이것은 잠정적이고 순간적이다. 심농은 현명하게도 여기에 아무런 이성적 근거를 달지 않는다. 당연하다. 인생은 수많은 모순이 중첩된 것이라 정말 어느 것이 옳은지는 아무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이 할 수 있는 건 다만 그 때 그 때의 결단 밖에는 없기 때문이다. 이것을 강조하기라도 하듯 심농은 결정적으로 포핑아의 배신이 밝혀지는 과정을 우연히 찾아든 등대 불빛에 의해 노출되는 것으로 묘사한다. 이뿐만 아니라 대부분 결정적인 장면들은 우연히 보게 된 시각에 의해 잡혀진다. 등대 불빛, 이층집에서 바라보는 것 등등 이렇게 '우연성으로 포착되는 결정성'이야말로 바로 심농이 말하고 싶은 결단의 본질임을 그것들은 잘 보여주고 있다.

 

                개인적으로 '네덜란드 살인사건'에서 인상적이었던 장면을 간단하게 그려본 것. 

 

  '네덜란드 살인사건'은 보기 보다 단순하지 않다. 거기에는 심농이 생각하는 삶의 진실 그러한 가운데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에 대한 진지한 고찰이 은밀히 깃들어 있다. 시즌 2의 후반에서 이렇게 유혹이 강조되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거꾸로 우리 인생이 갇혀 있는 존재임을 드러내기 위해서가 아닐까 한다. 유혹은 늘 바깥으로 인도하는 존재이니까 말이다. '네덜란드 살인사건'은 그 '갇혀짐'이 바로 우리 자신의 결단임을 은밀히 말한다. 그런에 왜 우리는 스스로 갇혀지는 것을 선택한 것일까? 아마도 그 이유는 다음 작품 '선원의 약속'에서 고찰될 것이다. 

 

                                                 -  이타케게 갇힌 오디세우스를 떠올리며 연출해 본 것.


댓글(4)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크라이슬러 2011-08-24 06: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심농이, 아니 매그레가 살아있다면(살아있군요..), 악수라도 청하지 않았을까 싶은 서평입니다.

ICE-9 2011-08-24 23:20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

마녀고양이 2011-08-31 1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애지간히 추리나 스릴러에 속하는 장르 소설을 좋아하는데
이런 리뷰도 가능하군요....... 감탄하고 돌아갑니다.

헤르메스님 즐거운 날 되셔요.

ICE-9 2011-08-31 21:55   좋아요 0 | URL
앗! 저의 서재에 들려주셨군요.
아픈 것은 잘 나으셨나 모르겠네요.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