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사람은 거짓말쟁이]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모든 사람은 거짓말쟁이
알베르토 망구엘 지음, 조명애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11년 8월
평점 :
절판


 

  51년, 일본이 한국전쟁이라는 특수로 인해 패전의 폐허에서 다시금 부활을 위한 기회를 잡게 되었던 그 때. 구로자와 아키라는 '라생문'이란 영화로 베니스 영화제와 아카데미 외국어 영화상을 석권한다. 그 작품은 역시나 일본의 작가 아쿠다가와 류노스케의 '라생문'과 '덤불숲'을 합친 것으로 한 부부와 한 도적이 얽힌 아내의 강간과 남편의 살해사건을 다루는데 관련자들의 진술이 제각각이라 그 진실을 도저히 알아낼 수 없다는 것으로 영화는 끝이난다. 거기서 진실이 끝내 드러나지 않는 것은 관련자 모두가 객관적 입장이 아닌 저마다 주관적인 이해관계가 깊이 들어가 있는 바탕에서 그 사건들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인데 아키라는 분명 그 영화로 한국전쟁으로 인해 전면에 드러난 냉전체제의 본질이 무엇인지 나타내려 하고 있었다. 즉, 냉전체제라는 것 역시도 그렇게 각자의 이해관계가 깊이 침윤된 상태에서 상대방에게 각자가 원하는 진실을 절대적 진실이라고 강요하고 있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베니스와 아카데미가 최고의 상을 그에게 바친 것은 아마도 이러한 그의 성찰에 깊이 공감했기 때문이리라.

 

 

  그 영화를 통해 아키라가 묻는 것은 단적으로 이것이다. 과연 우리가 절대적 진실을 알 수 있겠느냐? 오로지 우리가 가질 수 있는 것은 부분적 진실밖에는 없지 않을까 라는 것이다. 그것도 각자의 이해관계만을 관철할 뿐인 그런 진실들인... 이와 비슷한 말을 미국의 과학철학자 토마스 쿤도 했었다. 그는 우리의 상식뿐만이 아니라 우리가 확실하다고 믿고 있는 과학적 진실마저도 그 시대 주류 세력들이 담합한 결과물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갈릴레이 갈릴레오가 종교의 압력에 못 이겨 스스로의 진실을 철회했던 ‘그래도 지구는 돈다.’는 지금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사태라는 것이다. 즉, 주류의 이해관계에 봉사할 수 없는 진실은 여전히 혹세무민의 낭설로 격하되거나 배제된다는 말이다. 여기서 우리는 뼈저리게 알게 된다. 진실엔 그림자처럼 내가 원하는 것 역시 결부되어 있음을. 즉 진실이란 오로지 내가 원하는 것만을 혹은 보고자 하는 것만을 비춰주는 또 하나의 욕망의 투사물에 지나지 않음을. 물론 우리는 불과 60년 밖에는 되지 않은 냉전체제의 경험으로 인해 이것들을 이미 잘 알고 있다. 하버마스조차 아예 이 상황을 그대로 인정하고 우리가 정말 힘을 기울여야 할 것은 서로의 욕망을 잘 통제하여 가급적 상대방의 욕망과 조화를 시킬 수 있는 게임의 규칙 즉 ‘담론 윤리’를 제대로 확립하는 것에 있다고까지 말하지 않는가?

 

  ‘그러니 진실은 없다. 적어도 너와 나 사이에 있어서는...’ 오로지 이것만이 진실인 것이다. 다만 있는 것은 서로가 ‘주장하는 진실들’뿐이다. ‘진실’이라는 담론 게임에 참여하는 수많은 참가자들의 이러저러한 욕망들이 깊숙이 투사된 그런 진실들 말이다. 따라서 진실을 주장함은 내 욕망이 무엇인지 드러내는 것과 같으며 여전히 프로이드나 라캉식의 정신분석학적 방법들이 담론 분석에 사용되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그러므로 당신이 지금 접속하고 있는 매체는 그 어떤 매체든 수많은 욕망들로 들끓는 용광로에 다름 아닌 것이다. 당신이 읽고 있는 것은 단순한 글이 아니라 어떻게든 당신과 접속되기를 바라며 꿈틀거리고 있는 욕망의 케이블들의 다발을 마주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내 글 역시도 그러할 것이다. 어떤 주체든 그리고 어떤 객체든 오로지 부분적 진실 밖에는 가지지 못한다는 것은 우리가 수많은 파편화된 욕망들에 둘러싸여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니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얇은 귀가 아니라 일종의 '감정가' 혹은 '정신분석가'가 되는 것이리라. 혹은 탐정. 그렇게 모든 글을 당신의 내부 깊숙이 들려오는 ‘말’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당신의 개입을 바라는, 판단도 평가도 오로지 읽는 당신에게 달려있는, 한낱 텍스트로 대하는 것. 그것이 데리다가 말했던 ‘말’ 중심주의에서 ‘문자’ 중심주의로 옮겨가야 한다거나 ‘텍스트 외부엔 그 어떤 것도 없다.’란 말의 의미이며 욕망의 태피스트리와도 같은 정보화 물결 속에 우리가 견지해야만 하는 태도일 것이다. 그리고 여기 그와 똑같은 것을 요청하는 하나의 작품이 우리 앞에 있다. 그것이 바로 알베르토 망구엘의 ‘모든 사람은 거짓말쟁이’이다.

 

  모든 작가들에겐 그 작가 자신을 나타내는 고유의 표지들이 있다. 대부분 그 표지들은 작가 스스로 천착하는 주제들로 나타날 것인데 그렇다면 알베르토 망구엘 - ‘독서의 역사’라든가 ‘밤의 도서관’ 같은 책에 환장한 이들에게는 더없이 즐거움을 선사했을 책의 저자인, 그래서 그들에게는 생소하기는커녕 오히려 그 이름이 높았을 아르헨티나 태생의 작가인 그- 에게 주제는 무엇이었을까? 우리는 그것을 바로 ‘밤의 도서관’의 머리말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하나의 의문에서 이 책은 시작되었다.

신학과 환상문학을 제외하면, 우리가 사는 세상엔 특별한 의미도 없고 뚜렷한 목표도 없 다는 걸 의심하는 사람은 거의 없는 듯하다. 그런데도 우리는 당혹스러울 정도로 낙관적 인 생각에 사로잡혀 이 세상을 의미와 질서로 포장하려는 처절한 목적을 가지고서 두루마 리와 책 과 컴퓨터에서, 그리고 도서관의 선반에서 이런저런 정보 조각들을 끊임없이 모 아댄다. 하지만 이런 노력이 실패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완벽하게 알고 있다. (...) 우리는 왜 그렇게 하는 걸까? (...) 이 책은 그 과정에 대한 이야기이다.

- 알베르토 망구엘, 밤의 도서관 p.11 -

 

  이렇게 그가 천착하는 주제는 ‘우리가 하나의 진실을 온전히 그대로 가질 수 있는가?’에 있다. 그는 그 시도가 운명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계속 시도하는 인간의 욕망 자체에 호기심을 갖는다. 왜 그런가? 왜 우리는 레밍이라는 동물처럼 절망의 낭떠러지 앞에 서 있음에도 불구하고 절대적 진실이라는 무모한 희망을 위해 그 아래로 기꺼이 뛰어내리는 것일까? ‘밤의 도서관’이 그 의문을 ‘도서관’이라는 것을 통하여 풀어내려 했다면, ‘모든 사람은 거짓말쟁이’는 그 의문을 바로 ‘사람’이라는 것을 통해 풀어내려 한 작품이다. 그리고 여기서 그가 내리는 결론은, 단순히 말하자면, 그러한 뛰어듦이 지속적으로 가능한 이유는 바로 진실을 찾고자 하는 염원 자체에 이미 그 자신이 원하는 개인적 욕망이 내밀하게 드리워져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즉 우리는 진실을 찾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욕망이 실현되길 바라는 것뿐이다. 그러니 ‘진실’이란 오로지 나만의 개인적 욕망을 이루기 위해서라는 지극히 이기주의적인 면모에서 드러나는, 이러한 비윤리적인 행위라는 자각 때문에 자신의 양심을 보호하기 위한 어떤 자구책, 스스로의 정당화. 바로 그것을 위해 사용하는 한낱 허울 좋은 구실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의도되었든 아니든 ‘거짓말쟁이’가 될 수밖에 없다고 망구엘은 말한다. 이러한 그의 말은 무엇보다 이 책이 가지고 있는 구성 자체에서 보여지고 있다. 

 

   이 책은 모두 다섯 개의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 다섯 부분은 모두 화자를 달리한다. 그들 모두는 아르헨티나에서 오래도록 고문을 받다가 풀려나 스페인의 수도 마드리드로 망명한 ‘알레한드로 베빌라쿠아’의 죽음에 대해서 각자가 자신의 입장에서 말하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특히나 그 순서의 배치가 눈에 뛴다. 처음 부분 ‘변호’는 실제 이 소설의 작가이기도 한 ‘알베르토 망구엘’의 육성으로 채워져 있다. 그리고 그 뒤부터는 죽은 베빌라쿠아와 개인적으로 관계가 있는 사람들이 육성(헛소동), 편지(푸른요정), 독백(두려움에 대한 참작)등 스타일을 달리해가며 말한다. 여기서 얼른 드는 의문은 왜 처음 부분 ‘변호’에서 작가인 알베르토 망구엘이 직접적으로 참여했느냐는 것일 터이다. 그것은 단순히 작품의 리얼리티를 위해서였을까? 물론 그것만은 아닌 것 같다. 왜냐하면 앞부분 ‘변호’의 이야기들과 뒷부분의 이야기들은 명백하게 차이가 나는 특성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변호’에서 알베르토 망구엘이 들려주는 베빌라쿠아에 대한 이야기들은 모두 일종의 공식적인 기록이라 할 수 있다. 즉 거기엔 오로지 알려진 사실들만이 있고 그것은 더 이상 가공의 여지가 없는 ‘공식화’된 사실들이라는 점에서 뒷부분들의 이야기와 절대적인 차이가 난다. 아마도 작가 자신이 직접 소설 속 인물이 되어 얘기를 했던 것도 그러한 ‘공식화’된 사실임을 더욱 더 강조하기 위해서 그랬던 것은 아닐까 싶다. 이것은 ‘책’ 자체에 대한 은유이기도 하다. 이 작품은 또한 ‘거짓말 예찬’이라는 베빌라쿠아의 유일한 작품인 책에 대한 미스터리(즉 이 책을 과연 누가 썼느냐 하는 것이다.)이기도 한데 그런 의미에서 ‘변호’는 우리가 직접 물리적으로 대하는 책에 기록된 ‘글’ 자체와 같으며 이로써 우리가 더욱 깨닫게 되는 건 이 소설에서 ‘변호’에서 망구엘이 말했던 부분과 그 뒷부분에서 밝혀지는 진실들이 얼마나 큰 차이가 존재하는 지에서 밝혀지는 것처럼 ‘책’ 자체가 담을 수 있는 진실이 얼마 되지 않으며 담겨진 진실 또한 액면 그대로 믿을 수 없는 저자가 바라는 욕망의 투사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즉 망구엘은 ‘책’ 자체를 얼마나 믿을 수 있는가에 대하여 직접적으로 독자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변호’를 그렇게 만든 것이며 그 자신 직접 참여하면서까지 그 사실을 강조해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강조가 궁극적으로 독자에게 바라는 것은 분명하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독자가 텍스터 자체에 무조건적으로 신뢰를 보낼 것이 아니라 관찰하고 분석하는 감정가나 정신분석가 또는 탐정이 되라는 것이다. 이것은 뒷부분들의 이야기들이 가진 형식이 점점 더 ‘사적(私的)인 형식’이 된다는 것에서 더욱 드러난다. 즉 대화에서 더욱 사적인 ‘편지’ 그리고 더더욱 사적인 ‘독백’으로 점증해나간다는 것이다. 이러한 형식의 나열은 마치 정신분석가 앞에 누워있는 환자를 분석하는 과정도 흡사하지 아니한가? 이렇게 망구엘은 이 책의 내용이나 구성 모든 것을 다하여 독자에게 주지시키려 한다. 그저 망연하게 책(뿐만 아니라 그 어떤 텍스트든지...)을 읽을 것이 아니라 보다 적극적으로 거기에 개입하고 그 글에 투여된 작가의 욕망의 그림자를 발견해내려 애를 써라. 진실은 글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작가의 욕망과 당신의 욕망이 어울려 만들어내는 게임 자체에 있다고. 그것이 모든 사람이 거짓말쟁이일 수밖에 없는 세상 속에서 제대로 버텨나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들의 방 모중석 스릴러 클럽 29
할런 코벤 지음, 하현길 옮김 / 비채 / 2011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비밀과 거짓말’

  

  이것은 마이크 리 감독의 영화 제목이기도 하지만 이 말 만큼 할런 코벤의 작품 세계를 정의 내려 주는 말도 또 없을 듯하다. 이번에 새로 나온 신작 ‘아들의 방(Hold Tight)'의 1장엔 바로 그러한 할런 코벤이 주조하는 작품 세계의 핵심이 담겨져 있다. 그 세계에서 영위되는 일상이란 겉으로 보면 참으로 안정된 것 같지만 실상은 소설에도 나오는 것처럼 정체를 알 수 없는 외부의 단 한 번의 공격으로도 언제 어느 때 허물어져 버릴지 모를 허약한 일상이며 그래서 더욱 더 불안하기 짝이 없는 일상이다. 하지만 이 불안은 단순히 그 일상이 외부의 공격에 훤하게 노출되어 있어서 야기되는 것만은 아니다. 비록 노출되어 있더라도 적의 접근을 알 수 있으면 그다지 불안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니 정말 불안하게 만드는 것은 다가오는 자가 나의 적인지 이웃인지 구별하기 어렵다는 것에 있지 않을까 싶다.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 라는 말도 있듯이, 내게 다가오는 자의 그 내면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우리가 알 수 없기에 불안한 것이다. 때문에 프로이드는 과연 예수의 말대로 이웃 사랑이라는 것이 가능한가에 대해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이웃은 칸트적 의미의 ’사물‘이다. 그 사물은 내 주체의 바깥에 존재하면서 그 자체로 내 존재를 한계 짓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절대로 내게 포섭될 수 없는 내 인지의 한계 너머에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프로이드는 그것을 ’트라우마‘로 여긴다. 즉 그 사물은 내게 일종의 상처인 것이다. 이웃이라는 타인은 그런 존재다. 칸트의 사물이고 프로이드의 트라우마다. 사르트르에게는 내 실존을 위협하는 방해꾼이었다. 코벤 역시 이 대열에 합류한다. 코벤에게 있어서 ’이웃‘ 또한 전적으로 포용할 수만은 없는 어떤 음험한 것으로 남는다.

 

   더구나 코벤에겐 그렇게 볼 수 밖에 없는 한 가지 이유가 더 있다. 그것이 바로 ’거짓말‘이다. 우리는 때로 우리가 다 안다고 자부했던 자들이 어느 순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존재로 돌변함을 볼 때가 있다. 그것은 충격으로 다가오지만 사실상 이러한 돌변 또한 그 내부에 불안이 깃들어 있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라 할 수 있다. 이건 간단한 이치다. 타인 내부에 무엇이 존재하는지 알 수 없는 우리들은 행여나 있을지도 모를 예측 불허의 공격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본능적으로 우리의 진심을 위장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건 생존을 위한 일종의 자구책이기도 하다. 우리 역시도 그런 전략을 쓰고 있지 않은가? 그러고 보면 타인의 비밀이 우리의 거짓말을 유도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비밀‘과 ’위장‘은 타인의 속마음을 내 속마음처럼 알 수 없는 우리들로서는 부득불 서로 긴밀하게 연결될 수밖에 없다. 그건 하물며 자신이 낳고 키워온 아들이라 하더라도 마찬가지다. 즉 코벤에게 있어 이웃이 더욱 음험한 존재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은 그들이 그 비밀을 안고 그냥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적극적으로 그 비밀을 더욱 알 수 없게 거짓말 전략을 구사하기 때문이다. 

 

   코벤은 소설에서 등장인물들이 거짓말 즉 ’위장‘이라는 전략을 자주 쓰는 것을 보여준다. 특히나 대표적인 것이 범죄자 내시가 살해한 시체를 유기하기 위해 취하는 방법이다. 경찰의 추적을 따돌리기 위해 시체를 전혀 다른 존재로 위장하거나 그가 하지 않았던 비행의 흔적을 거짓으로 꾸며놓는 것이다. 이 내시의 위장은 내시라는 존재 자체가 사회적 공간으로 확대되었다고 볼 수 있는 ’클럽 재규어‘(즉 내시가 절대적 외부적 존재로서의 이웃을 개인화한 상징이라면 클럽 재규어는 그것을 사회화한 상징이라 할 수 있다.) 역시도 똑같이 취하는 방법이다. 그렇게 코벤은 작품에다 적극적으로 거짓말 전략을 구사하는 등장인물들을 집어넣음으로서 우리가 가진 이웃을 음험한 존재로 볼 수밖에 없는 이유를 더욱 확실시 한다. 그런데 이러한 ’거짓말‘의 전략은 사실 또 어떻게 보면 의심의 증거만이 아니라 희망의 근거가 될 수도 있다. 왜냐하면 그들이 적극적으로 무언가를 행하고 있다는 것은 그들이 단순한 ’돌‘이 아니라 그들 역시도 인식을 하고 생각을 하는 나와 동등한 ’주체‘라는 자각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즉 우리는 그 타자들의 행위 때문에 나만의 일방적 공격이 아니라 둘이서 함께 하는 게임을 치르고 있다는 생각을 여실히 하게 된다. 비밀만이 아니라 여기에 거짓말이 더해짐으로 인해 이제 우리의 관계는 게임으로 전환된다. 놀랍게도 코벤 역시 정확히 이것을 염두에 두고 있음이 소설 자체에서 드러난다. 게임 이론의 가장 대표적 이론인 수인의 딜레마(prisoner s dilemma)를 만든 학자인 ’내쉬‘와 이 소설의 범죄자이자 가장 거짓말 전략을 적극적으로 구사하는 자인 ’내시‘가 그 이름에서 거의 똑같다는 것에서...
 

 

 

 

 

  그렇게 코벤은 제안한다.

 

  관계를 게임으로 바라보자고. 그것이 어쩌면 이 불안으로 점철된 세상을 헤쳐 나가는 주요한 통로가 될 수 있다고. 그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일단 게임으로 바라볼 경우 게임의 참가하는 모든 플레이어들은 다 동등하기 때문이다. 여기엔 권력 효과가 미치는 지배와 피지배 관계가 성립하지 않는다. 2장에서 티아와 마이크 부부는 아들의 컴퓨터에다 해킹 프로그램을 깐다. 아들의 사생활을 몰래 훔쳐보는 것은 양심에 찔리는 일이지만 그들은 아들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그냥 감행한다. 하지만 결국 그 행위가 불행을 불러온다. 이런 전개를 통하여 코벤은 간단히 말해서 아무리 부모라 하더라도 지켜야 할 것은 지켜야 한다는 걸 보여준다. 그들은 아들을 보호한다고 말했지만 사실 그것은 지나친 행위였고 그들이 그럴 수 있었던 것은 자신들이 ‘부모’라는 그렇게 ‘지배자’라는 생각이 은연중에 깔려 있었기 때문이었다(소설에서 마이크는 아들 애덤에게 자신이 이 집의 주인이니 자신의 규칙을 따라야 한다‘는 말까지 한다.). 즉 티아와 마이크는 아들을 오로지 그저 수동적이기만 한 ’사물‘로 대한 것에 불과했던 것이다. 때문에 코벤은 이러한 아들을 나와 동등한 그리고 대등한 참가자로 인식하기 위해서라도 관계를 게임으로 인식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한다. 그리고 그는 여기에 한 가지 이유를 더 든다. 앞서도 말했듯 티아와 마이크가 궁극적으로 불행을 초래하게 된 것은 지켜야 할 것이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부모라는 권위를 내세워 그 남용을 정당화했다. 해서 가져온 것은 가족 전체가 극심한 위험 속으로 빠져 들게 된 것 뿐이었다. 하마터면 자녀들의 목숨마저 잃어버릴 정도로. 이로써 코벤은 지켜져야 할 것은 반드시 지켜야 함을 극적으로 보여주는데 이는 또한 관계를 게임으로 바라볼 것에 대한 또 하나의 주요한 이유가 된다. 즉 게임에는 각 참가자는 모두 동등하다는 것 말고 또 하나 반드시 지켜져야 하는 중요한 원칙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게임의 규칙은 무조건 준수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게임의 승패가 진정한 의미에서 이루어지려면 공정해야 하고 그 공정은 오로지 게임의 규칙을 준수하는 것으로만 보장받는다. 게임의 승패가 진정하지 않으면 그 누구도 그 승리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을 것이니 화목과 합의를 목적으로 했던 게임은 다시금 혼란 속으로 와해되어 버릴 것이다. 그러니 그 어떤 참가자든 게임의 정해진 규칙을 지키는 것은 필수이며 그것은 자신이 승리할 경우 그 권위를 인정받기 위해서도 꼭 필요한 일이다. 바로 이 게임의 규칙을 우리는 ’관용‘이라는 말로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즉 타자도 나와 동등한 존재이며 똑같이 공정한 게임을 위해 규칙을 지킬 것을 전제하는 것, 이것이다. 그는 이 게임의 규칙으로써의 ’관용‘의 중요성을 작품 곳곳에서 보여준다. 특히나 마이크의 이웃인 ’로리안‘이나 내시를 추적하는 ’뮤즈‘의 에피소드가 그렇고 결국은 선을 넘어버렸기 때문에 죽음을 당하고 마는 ’매리언‘의 에피소드는 이를 더욱 강조한다. 즉, 할런 코벤의 이번 소설 ’아들의 방‘은 코벤이 독자에게 건네는 하나의 진지한 제안이다. 비밀과 거짓말로 영원히 타인을 이해할 수 없어 늘 불안할 수밖에 없는 우리가 그래도 이 세상을 제대로 헤쳐 나가기 위하여 필요한 제안 말이다. 관계를 게임으로 바라보자는!  앞에서 보듯 그것은 하물며 전적인 애정을 유대로 이루어져야 하는 가족 관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그렇게 원제인 ‘Hold Tight’도 주제(주제에는 오히려 ‘아들의 방’이라는 제목이 더 적합하다고 보여진다. 왜냐하면 그 ‘아들의 방’은 절대적으로 타자가 자리 잡은 공간 자체를 상징화 하고 있기 때문이다.)라기보다는 비밀과 거짓말로 가득한 이 세상을 헤쳐 나가기 위해 코벤이 제안하는 일종의 태도 같은 것으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물론 책을 읽고 나면 이 제목 자체가 어쩐지 비관적 전망 끝에 나온 자포자기식의 체념적 진술로도 느껴짐을 부정할 수 없다. 한 편으로 할런 코벤의 ’아들의 방‘은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족을 이루고 살아간다는 것 자체에 대해 비관적 시선을 던지는 소설이며 그러한 비관적 전망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이 궤도 위의 롤러코스터처럼 삶을 지속해 나가야 한다는 체념이 짙게 깔린 소설이기도 한 게 사실이다. 여기의 ‘Hold Tight’는 사실 가족을 단단히 ‘붙들어라!’는 것이라기보다는 ‘Show Must Go On’과 그리 다르지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 에필로그처럼 붙은 마지막 장면이 이것을 단적으로 증명하고 있다. 그런데 다른 측면에서 보면 이 ‘Hold Tight’는 꽤나 반어적으로도 읽힌다. 앞서도 들었지만 주인공 티아와 마이크 부부가 아들의 비밀을 캐기 위해 아들의 컴퓨터에 해킹 시스템을 깔아놓는 것이 특히 그렇다. 여기서 보여준 부모의 사랑으로 위장된 집착 역시 ‘Hold Tight’ 으로 읽힐 수 있지 않을까? 이러고 보면 참으로 많은 해석들이 가능한 ‘아들의 방’ 이라는 이 소설 자체가 독자들에게 하나의 게임을 권유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렇지 않아도 이 소설은 여러 등장인물들의 목소리가 번갈아가며 이어지는 ‘다성악적(Polyphonic)’ 구성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 목소리들 또한 소설의 후반까지 도대체 어떻게 서로 이어질 것인지 감을 잡을 수 없을 만큼 각기 별개의 궤도를 따라서 전개되고 있으니 말이다. 즉 코벤은 제목이든 문장이든 구성이든 자신이 이 소설에서 할 수 있는 것을 다하여 소설 전체를 하나의 게임으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어떤가? 한 번 코벤이 제안하는 이 진지한 게임에 한 번 참여해 보는 것은? 특히나 당신이 만일 솔로라면 이 게임을 끝냈을 때 지금 당신의 처지를 그지없이 다행하게 여길 것이다. 다시 말해 이 소설은 솔로들의 정신 무장을 위한 하나의 경전이 될 수도 있다. 코벤이 이 소설을 통해 강조하는 것의 다른 하나는 분명 이러한 사회에서 관계를 맺는다는 것이 얼마나 많은 리스크를 부담해야 하는 것인가이니까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맹독 귀족 탐정 피터 윔지 3
도로시 L. 세이어즈 지음, 박현주 옮김 / 시공사 / 2011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한 남자가 죽는다. 그에겐 미모에다 능력까지 겸비한 아내가 있다. 남자의 사인은 비소에 의한 중독사. 한 마디로 독살. 그는 그 날 자신의 사촌과 저녁을 먹었고 밤에는 지금은 별거중인 아내를 찾아가 커피를 마셨다. 그리고 그 다음날 그는 전날 먹은 비소로 인해 죽었다. 수사가 벌여졌지만 그가 그 날 어디서 어떻게 비소를 먹었는지 알아 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자살인지 타살인지 조차 분명하지 않게 되었다. 그러다 아내가 비소를 가지고 있었음이 밝혀진다. 그녀가 남편에게 비소를 먹었다는 직접적인 증거는 없지만 그녀가 남편과 불화를 겪고 있기에 그 살해 동기가 충분하다는 점과 용의선상에 오른 인물들 중 유일하게 비소를 지니고 있었다는 것으로 인해 검찰은 그녀를 남편 살인죄로 기소한다. 그렇게 열 두명의 배심원들 앞에서 그녀의 유죄 여부를 결정하는 법정이 열리게 되고 바로 그 법정에서 이 소설은 시작된다.

판사석 위에는 선홍색 장미가 놓여있었다. 마치 그 자리에 핏방울 튄 듯이 보였다.(p.7)

 이 소설의 주제마저 함축하고 있는 게 아닌가 생각될 정도로 의미심장하면서도 매혹적인 이 문장과 더불어... 

 이것이 1930년에 도로시 세이어스가 발표한 이 소설 '맹독(STRONG POISON)'을 이끌어가는 주가 되는 사건의 개요이다. 그러니까 세이어스의 대표적 캐릭터, 명탐정 피터 윔지 경이 풀어야 할 미스터리 인 것이다. 과연 피해자는 어디서 누구에게 어떻게 독을 먹게 되었나 말이다. 안 그래도 미스터리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그. 그토록 수사를 집중했지만 도저히 풀 수 없었던 난제인 만큼 그 사실 만으로도 윔지의 가슴은 벌렁거릴 판이지만 하지만 다른 쪽에서 그의 가슴을 더더욱 뛰게 만들고 있었으니 그게 바로 지금 살인 혐의를 받아 법정에 서 있는 여인, 헤리엇 베인이다. '사랑이란 그 찾아옴이 예측불가능하기에 더 아름다운 것이다' 라고 말한 이도 있다지만 정말 사랑은 그러한 것인지? 피터 윔지는 전혀 예기치 않게도 법정에 선 그녀를 보고 그만 한 눈에 반해 버린 것이다. 사랑이란 묘약은 장님으로 만드는 것에 있다는 말 처럼 그렇게 큐피드의 화살을 맞아버린 윔지는 덮어놓고 그녀의 결백을 믿어버리고 자신의 모든 명탐정적 재능을 발휘하여 오로지 그녀의 무죄를 입증하는 것으로 그녀를 향한 그의 사랑을 입증하려 한다. 호사가적 취미의 미스터리 풀이가 이제 사랑을 쟁취하기 위한 절박한 수단이 된 것이다.  

 소설 '맹독'은 마트에서 흔히 보는 '1+1'에 또 하나를 더 '+1'한 소설이다. 그렇게 이 소설은 하나를 가지고 세가지 측면에서 즐길 수 있다. 한 파인트에 세가지 종류의 각기 다른 맛을 가지는 아이스크림을 섞어 담아 떠먹는 맛이라고나 할까. 아무튼 소설 '맹독'을 즐기는 코스에는 크게 세가지가 있다. 

 

   A 코스... 

  그 첫째는 순수한 미스터리로 즐기는 코스이다. 소설은 초반부터 판사의 말을 통하여 사건의 전모를 세세하게 밝혀가며 정리해 준다. 하지만 그렇게 세세하게 밝혀진 피해자의 그 날 하루 경로를 아무리 따져보아도 도대체 어디서 그가 어떻게 독을 먹게 되었는지 알 수가 없다. 피터 윔지에게 이것은 '나인 테일러스' 못지 않는 난제인 것이다. 게다가 그는 이것을 다음 재판이 열리게 될 때까지 남겨진 시간인 '한 달'안에 풀어야 한다. 그러지 못하면 자존심의 상처가 문제가 아니라 일생동안 유일하게 느꼈던 운명적 사랑을 잃어버리게 된다. 전의도 결의도 그 어느 윔지의 시리즈 보다 불타오르고 굳세어질 수 밖에 없다.  그렇게 윔지를 몰아붙일 정도로 난제이지만 세이어스는 G.K 체스터튼이 주도한 추리 클럽의 창립 맴버 답게 아무리 난제라고 하여도 아무런 반칙 없이 추리 게임을 공정하게 이끌어 나간다. 단서는 빈틈없이 주어지며 그 모든 건 논리적으로 잘 따지기만 하면 하나로 연결되게 되어 있다. 그렇게 절박한 윔지를 도와 난제를 해결하는 순수 미스터리적 즐거움을 여기서 얻을 수 있다. 

 

 B 코스... 

  미스터리를 싫어하시는 분이라면 이 소설을 하나의 로맨스로 읽는 것도 가능하다. 앞서도 말했듯이 이 소설은 운명적 사랑을 느낀 한 남자의 절절한 애정 고백기로도 읽을 수 있으니까 말이다. 언제나 귀족(아시다시피 그는 공작 가문 출신이다.)적 매너를 유지하며 매사에 강한 자존심과 쿨한 면모를 보여주던 윔지가 이 소설에서 만큼은 쉽사리 마음 문을 열지 않는 해리엇 베인 때문에 전전긍긍해 하고 자존심이고 뭐고 다 팽개치고 오로지 애정만을 애걸복걸 하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그것이 참으로 귀엽지 않을 수 없다. 귀족과 평민이라는 신분 차이이든 이미 한 번 결혼한 몸에다 살인 누명까지 쓰고 있는 그래서 열악하고 편견 마저 얻기 쉬운 사회적 신분에 처해 있는 그녀의 처지든 전혀 상관하지 않고 오로지 투우장의 숫소 처럼 사랑만을 향하여 달려나가는 그의 모습은 윔지에게 이런 면도 있었나 싶을 정도로 새삼 놀라기도 한다. 그렇게 한 남자의 순정이 담긴 로맨스로 즐길 수도 있다. 

 

 C 코스... 

  사실은 이 코스가 내가 이 소설에 대해 말하려는 핵심이 될 것이다. 도로시 세이어스는 이런 면에서 이 작가를 그저 미스터리 작가로만 묶어두는 것에 강한 반발심을 느끼게 만든다. 때로 어떤 면에서는 순문학 보다 더 높은 경지를 보여주니까 말이다. 바로 이 '맹독'의 C 코스가 그런 경우이다. 이 소설은 20년대 본격적으로 사회문제로 대두되었던 '잉여 여성'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고 있다. 여기서 '잉여 여성'이란 영국 사회에서 1차 대전으로 인해 대부분의 남자가 전쟁에 참여하게 됨으로써 절대적으로 부족해진 남성의 수 때문에 결혼을 못하고 홀로 살아가는 여성을 지칭하던 말이었다. 소설에서도 이 '잉여 여성'이란 말이 직접적으로 나온다. 

 강철금고 안에 있는 개인 기록을 보았다면 이 여자들이 모두 세간에서는 냉혹하게도 '잉여'라고 표현하는 계층의 여성들임을 알았으리라 (P.81) 

  당시만 해도 영국사회에서 여성들이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길이란 오로지 결혼 밖에는 없었기 때문에 결혼하지 않고 홀로 지내는 여성들에게 사회는 이렇게 경멸적인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잉여 여성이란 그 뜻에 내재된 '쓸모없는 여성'이란 의미 그대로 경멸적 시선의 또 다른 표현이었던 것이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 안에서 도로시 세이어스의 '맹독'은 그렇게 경멸당하고 천대받았던 여성들을 위해 '그렇지 않다. 그들은 오히려 남성 보다 더 유용한 존재들이다.'라고 외치면서 떨치고 일어난 것과 마찬가지인 작품이다. 말하자면 '맹독'은 페미니즘이 짙게 배인 작품이다. C 코스는 바로 이러한 페미니즘적 독해이다. 이렇게 읽으면 무엇보다 판사의 기다란 독백으로만 채워지는 첫 부분이 아주 흥미롭게 된다. 

 

  왜 도로시 세이어스는 아무리 사건 정황을 정리해준다고 하지만 오로지 혼자 떠들기만 하는 기나긴 판사의 독백으로 시작한 것일까? 여기서 앞서 인용했던 소설의 첫 문장은 그 이유를 짐작하는데 정말 중요해진다. 판사석 위에 놓여진 선홍색 장미. 판사의 검은색 법복과 선명히 대비되는 붉은 핏방울. 바로 이 이미지 자체가 판사의 검은 법복으로 상징되는 가부장적 남성 사회로 부터 경멸당하고 상처를 입은 붉은 핏방울의 여성을 집약적으로 나타내고 있지 않은가. 그렇게 그 기나긴 판사의 독백은 사실 여성의 틈입을 전혀 허용하지 않는 그 자체로 단일하고도 굳건한 독재적 남성 사회 자체를 드러내는 것이며 따라서 그 남성의 법정 안에서 유일한 여성인 해리엇 베인은 살인죄라는 낙인을 받아 서 있는 것이다. 그렇게 세이어스는 소설의 초반 여성 앞에 압도적으로 군림하는 남성 사회의 모습을 보여준 뒤 그것을 차례로 허물어 감으로써 오히려 남성 보다 여성이 더 유용하며 그렇게 대등한 존재임을 결국 드러내려 한다. 때문에 사건 해결에 있어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도 언제나 윔지가 아니라 여성들인 것이다.(스포일러상 이름은 밝히지 않겠다.) 미스터리 작가가 아니라 순문학적 작가로서의 세이어스가 빛을 발하는 곳은 유령과 대화하는 '강신회' 장면이다. 세이어스는 그 강신회 장면을 초반의 혼자 떠드는 판사 장면과 일부러 극명하게 대비되도록 연출한다. 왜냐하면 강신회 장면이 결정적으로 판사가 단죄한 유죄를 정면으로 반박가능한 증거를 가지도록 하는 장면이기 때문이다. 그 강신회 장면은 오로지 여성으로 이루어지며 윔지가 시켜서가 아니라 전적으로 그 여성 스스로 찾아낸 방법이기도 하다. 거기다 말을 하는 사람의 수도 판사의 하나에서 강신회의 다수로 차이나게 하여 홀로 독재적인 남성성과 대화 가능한 다수성의 여성성을 대조시킨다. 세이어스가 이렇게 공을 들여가며 판사의 독백 장면과 강신회 장면을 연출하는 이유는 지극히 간단하다. 앞에서도 말했듯 여성들이 남성들 만큼 유용하며 대등한 존재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단적으로 말해 판사는 진실을 전혀 찾아내지 못했지만 강신회는 그 진실을 찾아내었기 때문이다. 사실 소설 전체적으로 보아도 진실을 찾고 드러내는 쪽은 언제나 여성들이다. 이렇게 '맹독'은 그야말로 페미니즘적 소설이며 이렇게 C 코스의 페미니즘적 입장으로 읽으면 더더욱 세이어스가 소설 자체에 공들인 세부와 그 깊이가 드러나게 된다. 

  한 작품으로 다양한 맛을 볼 수 있다면 독자로서는 금상첨화가 아닐 수 없다. 이렇게 도로시 세이어스가 독자를 위해 마련한 세가지 코스에서 당신은 어떤 코스를 더 사랑하게 될까 지금은 그것이 궁금하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녀고양이 2011-10-11 1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헤르메스님, 윔지 시리즈 앞권들도 읽어보셨나요? 좋은가요?
제가 '증인이 너무 많다'를 계속 살까 말까 망설이는 중이거든요.
오호라,,, 윔지 경이 헤리엇에게 애걸복걸한다는 부분만으로도 홀딱 넘어가겠는걸요.
흠, 저는 B 코스 도전하게 되겠군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잠시 다아시 경과 착각했어요. 시험 일정 끝나면, 읽어봐야겠어요. 아니다,
중간 중간 머리를 쉬어 주어야 공부도 되니까,, 변명을 중얼중얼중얼...... 헤헤.

ICE-9 2011-10-19 01:12   좋아요 0 | URL
앗! 마녀고양이님께서 댓글을! 일부러 이렇게 달아주셨는데 이제야 확인하게 되다니 흑 ㅠ ㅠ 앞으론 서재에 더더욱 자주 들어와야겠어요.
마녀고양이님께서 B코스를 좋아하신다면 '증인이 너무 많다'도 재미있게 즐기실 수 있으실 것 같아요. 윔지의 여동생 메리와 윔지의 절친 파커 경감의 알콩달콩한 애정행각을 보실 수 있거든요. 그리고 그 결말은 '맹독'에서 이루어지죠. 시험 준비중이시군요. 좋은 결과 있으시길 응원하겠습니다.^ ^
 
기쁜 우리 젊은날 - Our Joyful Young Days
영화
평점 :
상영종료


  

 

 1. 인연이라는 것은... 

  

 사람과의 인연만 그런 것이 아니라 때로는 한 작품과의 인연도 그렇게 전조도 없이 예고도 없이 불쑥 찾아오나보다.  그 날 내가 무슨 연유로 평소에는 거의 보지도 않는 TV를 보았는지는 기억에 없다. 아무튼 채널 서핑을 하다 그만 우연히 보게 된 장면에서 누군가 내게 '얼음!'이라고 외친 것 처럼 딱 내 시야가 거기에 고정되고 말았는데 그것은 한국영화였다. 

 바로 배창호 감독의 '기쁜 우리 젊은 날', 그것이었다. 

 

 

 주말마다 EBS에서 하는 '한국영화특선' 시간이었다. 영화는 이름만 들어봤지 본 적은 없었다. 아마도 내가 본 배창호의 영화는 '고래사냥'이 유일할 것이다. 영화는 언제 시작되었는지도 모르지만 진행중이었다. 어쨌든 상관없었다. 중요하지도 않았고. 내가 시야를 고정시키게 된 것은 이야기의 흐름이 아니라 카메라가 인물을 담는 방식 때문이었으니까. 나중에 알아보았는데 '기쁜 우리 젊은 날'은 1987년에 나온 영화라고 한다. 그러니까 6.29선언이 있었던 해다. 영화는 5월 2일 개봉되었다. 그러니까 불과 두 달 앞둔 시점에 개봉된 것이다. 그 시기를 알고 보니 왜 그렇게 주인공을 맡은 안성기가 영화 내내 하염없이 기다리기만 했는지 이해가 되는 것도 같았다. 그러니까 그 영화를 안성기는 민주화를 염원하는 우리네 모습으로 짝사랑의 대상인 황신혜는 도래할 민주화를 상징하는 존재로 해석할 수도 있겠구나 생각했다. 무엇보다 두 번의 사산 경험에다 임신중독으로 인해 딸아이만 낳고는 죽어버리는 황신혜로 인해, 그렇게 황신혜에서 새롭게 아이로 바뀌는 것은 다가올 6.29선언 자체를 예언하는 것 처럼도 보여졌다. '아, 배창호는 이렇게 시대적 열망을 영화에 담았던 것이로구나!'  이게 이 영화에 대한 내 처음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해 안가는 게 있었다. 단순히 민주화를 염원하는 시대적 열망을 담아냈다는 것만으로는 포함할 수 없는 부분들이 있었다. 영화학자 로빈 우드가 말했던 거기에 속하지 않는 '불균질적 층위'들이 이 영화에 분명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바로 내 시야를 사로잡았던 장면의 묘사였다. 그리고 그게 다시금 이 영화를 바라보게 된 처음의 단서이기도 했다. 

 

 2. 아버지라는 것은... 

 

 그건 아버지(최불암 분)과 아들(안성기 분)이 만나는 장면이었다.  화면의 톤과 둘러싼 배경 묘사는 이 영화의 연식이 제법 오래되었음을 충분히 드러내고 있었다. 두 배우가 나란히 출연하는 걸 보는 것도 신기하긴 했으나 보다 내 시야를 사로잡은 결정적인 원인은 두 인물을 담아내는 카메라의 시선이었다. 흔히 옛날 한국 영화라면 이런 경우 말하는 자와 듣는 자를 나눠 찍는 분절된 쇼트들이 들어가기 마련이다. 표정과 대사를 강조하고 줄거리를 인지시키기 위해서다. 하지만 배창호는 이것을 롱테이크로 담아내고 있었다. 대화 장면이 짧지도 않다. 게다가 그리 극적이지도 않다. 그저 어디에나 있을 평범한 부자간의 대화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런데 카메라는 아주 중요한 장면을 찍는다는 듯이 움직임 조차 사려깊게 하려는 듯 그 공간 전체만을 집요하게 잡아내고 있었다. 거기서 아들은 구석에 조용히 앉아 있고 아버지는 이리저리 공간 속을 활발하게 움직이며 말을 하고 있었다. "요즘엔 대학을 나와도 취직이 안되서 큰일이라더라." "요즘엔 종합상사가 가장 좋다더라. 너는 거기 들어가라." 의 말을. 아버지의 이 말은 영화에서 자주 반복된다. 안정된 삶을 바라는 아버지의 희구가 느껴진다. 하지만 시선을 마주치지 못한 채 흘려버리듯 내뱉는 말들은 그의 이말이 되도록 아들에게 부담으로 느껴지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 묻어있는 것 같다. 그렇게 아버지는 아들이 이왕이면 어려움 없이 살면 좋겠다는 생각과 그래도 왠만하면 자기가 뜻하는 대로 살면 좋겠다는 생각 사이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아들 역시도 그랬다. 그저 조용히 앉아서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면서 군말없이 '네'하고 대답하고 있지만 사실 그가 원하는 것은 극작가가 되는 것이었다. 아들 역시 자신을 위한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면서도 그래도 쉽게 포기하지 못하는 자신의 꿈 사이에서 머뭇거리고 있었다. 그것이 그저 단답식의 조용한 대답으로 나오고 있었다. 배창호의 롱테이크는 그것을 잡아내고 있었다. 화면 속에 가로놓인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간격과 똑같이 그들이 들어서길 꺼려하는 그 심리적 간격을. 배창호는 바로 그 간격을 그들의 표정과 말투로 서로를 헤아리고 배려하는 '사랑'의 영역으로 구현해 놓고 있었다. 그랬다. 이 영화에서는 짝사랑하는 존재인 황신혜 만큼이나 아버지의 비중이 높다. 그것이 이 영화를 애초 생각대로 '민주화 열망의 형상화'라는 주제를 고집하지 못하게 하는 이유가 된다. 자신을 드러내기를 가급적 삼가하고 그저 멀찍이서 조용히 지켜보며 필요할 때 아낌없이 사랑과 위로를 주는 아버지의 존재는 지금 짝사랑하는 여인에게 아들이 하는 것과 정확히 닮았다. 카메라는 자주 아들을 위로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담는다. 여인에게 처음 마음을 고백했으나 결국 거절당하고 술에 취해 돌아와 드러누운 아들을, 그가 잠든 뒤에도 이부자리를 챙기고 전등을 꺼주는 등 상심한 아들을 보살피는 아버지의 모습을 오래도록 담는다. 그녀가 결혼해서 미국으로 간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때 놀이터에서 혼자 있는 아들을 발견하는 것도 그 아들을 조용히 위로하는 것도 아버지다. 

 

 

   아들의 여인에 대한 사랑이 난항을 겪을 수록 배려와 존중으로 놓여져 있었던 그 간극을 아들은 자꾸만 잘라내지만 그 때도 아버지는 늘 그 자리에서 최대한 아들을 배려하면서 조용히 지켜본다. 언제든 기대어줄 어깨와 다독여줄 손을 가진 채. 이렇게 자주 변함없이 자리를 지키는 아버지를 보게 되면 정말 이 영화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무엇이었나 다시한 번 생각하게 된다. 배창호는 정말 한 여자에 대한 지고지순한 사랑을 그리면서 비록 결실은 맺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 그 자체로도 기뻤노라 라는 의미에서 '기쁜 우리 젊은 날'을 만들었을까 생각해 보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어째서 아들이 그토록 아버지의 행위를 반복하는 것인지 기묘해진다. 아들이 여인을 처음 만나는 장면은 사실은 아버지가 아들의 맞선을 주선하는 자리였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아들의 착각으로 인해 정작 아버지의 맞선 자리로 바껴져 버리는 장면으로 다시금 반복된다. 그런데 그 뒤 배창호는 홀로 남은 아들이 그 여인과 처음 만나는 순간을 혼자 반복하고 있는 장면을 보여준다. 

 

 

 

 그런데 사실 그 여인을 처음 만나게 된 것도 아버지가 했던 것과 똑같이 고백했기 때문이었다. 즉 그 자리로 여인을 인도한 것도 아버지의 모방이었고 그 자리에 앉아 있었던 것도,  다시금 배창호가 순서를 재배치 함으로써, 아버지를 모방한 것이 된 것이다. 또한 오래도록 멀리서 지켜보던 아버지의 시선 그대로 아들은 그 여인을 지켜본다. 그렇게 사실 그의 짝사랑이란 다름아닌 아버지의 아들에 대한 사랑의 반복된 형태이기도 하다. 더구나 마지막에 엄마 없이 자라게 된 딸과 아버지로서 대면하는 아들의 모습은 그야말로 엄마 없이 홀로 그를 키운 아버지의 자리를 그대로 이어받는 것과 마찬가지다.  

 

  

 3. 배창호의 '회상'적 시선... 

 

 이렇게 본다면 이 영화는 표면으론 한 남자의 한 여자에 대한 사랑을 그리고 있지만 정작 그 아래에 깔린 것은 그 사랑 자체를 가능하게 해 준, 언제나 변함없이 그 자리를 지킨 채,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며 댓가를 바라지도 않으며 필요한 모든 것을 아낌없이 내어주는 부모의 사랑인 것이다. 그래서 제목의 의미 또한 이제는 바뀌게 된다. 사랑함으로서 기뻤던 게 아니라 우리는 몰랐지만 그렇게 우리 등 뒤에서 지켜보는 부모로 부터 늘 아낌없는 사랑을 받았기에 기쁜 젊은 날이었노라고 말이다. 하지만 이것은 표면에서 진행되는 내용에서 보여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바탕이 되고 틀이 된 영화 형식 자체로 부터 드러나는 내용이다. 이러한 전혀 별개의 맥락 자체가 드러난다는 것이 배창호가 이 영화의 형식적인 측면에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 보여주는데 그가 이렇게 주제와는 별도로 형식에 공들인 이유가 무엇일까 단순히 영화의 질적 가치를 높이기 위해서였을까 우리는 그것을 물어보지 않을 수 없다. 여기서 유념해 볼 것이 배창호가 공간을 묘사하는 방식이다. 특히나 앞에서 말했던 내 시야를 사로잡았던 롱테이크 바로 뒤에 이어지는 아버지의 생신 축하 술자리 공간이 묘사되어지는 방식을 주목해서 볼 필요가 있다. 그 공간은 이렇게 드러난다. 

 

 카메라는 바로 그 곳으로 다가가지 않는다. 5촉짜리 전구의 자그마한 빛 아래 생신 축하를 위해 삼삼오오 모여있는 술자리를  카메라는 아주 멀리서 잡는다. 조명 역시 거기 밝힌 5촉짜리 전구가 전부다. 그러니 술자리의 배경과 관객 가까이의 전경은 어둠속에 잠겨있다. 그것은 마치 꿈결처럼 몽환적으로도 보인다. 거기서 생신을 축하하는 노래소리가 들려온다. 5촉짜리 전구의 빛은 작지만 다사롭게 그들을 둘러싸고 나즈막히 들려오는 그들의 노래소리로 그 장면은 더욱 더 아련하게 느껴진다. 그래서 왠지 그 장면은 마치 막 기억하려는 그 순간을 닮아보인다.  우리가 뭔가를 떠올리려 할 때 점점 머리 속 어둠이 밖으로 물러나면서 기억하는 그 장면이 처음엔 작게 시작해서 서서히 다가오듯이 그렇게 말이다. 바로 그와 똑같은 속도로 카메라는 노래 소리가 아련히 들려오는 그 곳으로 다가간다. 기억 속에 떠오른 장면이 머리 속에 가득찰 때와 같은 똑같은 속도로... 그래서 더욱 분명해진다. 영화의 이 장면이 바로 우리가 하는 기억의 과정을 그대로 흉내내고 있다는 것이... 

 

  배창호의 카메라가 아버지를 담을 경우 드러내는 방식은 이와 같다. 그는 언제나 전경 또는 배경에서 아버지가 서서히 드러나도록 한다. 마치 우리가 아버지란 존재를 기억할 때와 같이. 현재에서 과거의 한 때를 기억하는 것을 특히 회상이라 한다. 회상은 언제나 지금 자신의 입장에서 과거의 그 때를 재구성한다는 점에서 암기와도 같은 단순한 기억과는 다르다. 그래서 회상은 개인의 정체성 형성에 결정적 역할을 하고 때로는 그 신념에 바탕을 이루기도 한다. 그러니까 다시 말해, 아버지를 회상함은 영화속에서 경험되는 아버지의 모습을 자신의 정체성으로 삼겠다는 고백이나 마찬가지다. 배창호는 어쩌면 그 장면을 찍으면서 정말 아버지를 떠올렸을지 모른다. 영화속 형식은 그의 아버지를 추억하는 개인적 회상과 그대로 닮아있을 지 모른다. '기쁜 우리 젊은 날'은 표면에 전개되는 내용과는 다르게 형식에서 전혀 다른 맥락을 드러낸다. 그건 배창호의 카메라가 '회상'적 시선으로 담아내기 때문이다. 바로 그 '회상'으로서의 측면이 관객에게 잘 드러날 수 있도록 그는 화면 톤을 전체적으로 부드럽게 조율하며, 회상이라는 것이 언제나 그 시간의 지속에 대한 경험임을 비추어 볼 때 장면 마저 분할하지 않고 가급적 롱테이크로서 잡아내는 것이다. 하면 이제 우리는 그가 왜 '회상'적 방식을 영화 표현의 주요한 방법론으로 택했느냐를 물어야 할 것이다. 이건 왜 하필이면 그 '회상'적 시선에서 아버지를 떠올리는가 하는 질문과 닿아있다. 여기서 우리가 아무래도 고려해야 할 것은 그 시대적 상황이다. 예술가들 역시 국그릇 속의 건더기와도 같아서 아무리 예술적 자의식으로 홀로 독야청청하려 해도 자신을 둘러싼 국물에 젖기 마련이다. 그렇게 시대적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다. 시대가 엄혹할 수록 더욱 그렇다. 그렇다면 그 암울한 시대에 영화를 하는 예술가들은 어떻게 시대를 헤쳐 나아가는가? 아마도 배창호와 관련해 물어야 할 본질적인 질문은 바로 이것이 될 것이다. 그가 '회상적' 방법을 쓴 이유가 - 그토록 공을 들인 것을 보자면 - 하나의 신념에서 나온 것이라는 걸 추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신념은 바로 자신의 아버지를 떠올리면서 스스로 다졌을 그 신념일 것이다. 그렇다면 그러한 신념은 무엇인가? 같은 시기 나름의 소신을 갖고 역시나 형식적인 측면에서 저항적 신념을 나타내었던 이장호 감독과 비교하면 배창호의 시대를 헤쳐가는 자맥질의 원형이 좀 더 잘 드러나지 않을까 한다. 

 

 4. 이장호와 배창호... 

 

  이장호와 배창호 모두 형식적은 측면을 중시했고 그것을 통해 시대의 어둠을 헤쳐가려 했지만 그러나 형식으로 드러나는 둘의 입장은 서로 달랐다. 이장호는 영화 '바보선언'으로 대표되듯이 아방가르드 형식을 선호한다. 하지만 그 아방가르드는 과잉이고 파괴에 맞춰져 있다. 영화에서 감독 자신은 진짜 영화를 만들 수 없음에 자살하고 음악은 오로지 적을 파괴하는 것만이 목적인 슈팅 게임의 사운드를 카피해 쓰고 있다. 그는 아방가르드를 취하지만 궁극적 목적은 지금의 한국 자본주의적 현실 자체를 부수는 것이다. 그것은 또한 '바람 불어 좋은 날'에서 계속 이어진 주제의식이기도 하다. 그래서 아방가르드는 원래 모더니즘적이지만 그의 아방가르드는 리얼리즘이 된다. 

  반면 배창호는 기존의 영화 문법을 크게 비틀지 않는다. 장르적 관습도 여전히 따른다. 하지만 앞에서도 말했듯이 그는 내용과 형식을 분리시킨다. 내용은 기존의 사회가 원하는 것을 충실히 복제하지만 형식은 그러한 복제된 진실에 대해 여전히 의심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형식에 투영되어진 '회상'적 시선은 사회에 오염되지 않는 개인적 신념을 늘 자각하도록 만든다.  이렇게 보여지는 내용과 형식으로 드러나는 의미가 서로 다르다는 점에서 배창호의 영화들은 오히려 모더니즘적이 된다. 그러니까 이장호는 기존의 것을 파괴함으로써 자신의 예술적 신념을 고수하는 한 편, 배창호는 그 회상적 시선에 깔린 - 그의 아버지를 기억한다는 것은 그로 부터 나온 자신의 존재를 기억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므로 - 자신의 고유한 정체성을 기억함으로서  스스로 하나의 섬이 되어 자신이 생각하는 옳은 가치를 지키려 한다. 파괴를 지향하는 이장호에겐 내가 있는 이 자리가 중요하지 않으므로 기꺼이 연대를 위해 내미는 손이 되지만 배창호는 스스로 관찰자의 입장에 자신을 세움으로써 마치 최인호의 '술꾼'이 그렇듯이 사회가 요구하는 것을 따르는 척 하는 모습의 아래에서 그 모든 것을 데카르트적 회의의 시선으로 바라본다. 바로 이러한 배창호의 자세가 '기쁜 우리 젊은 날'에서 1인칭 시점이 반복적으로 나오는 이유이다. 그 장면은 두 번 나오는데 한 번은 처음 황신혜를 만날 때이고 나머지는 황신혜가 결국 다른 남자와 결혼할 것을 알았을 때이다. 그것은 곧 개인이 희망과 절망을 느끼는 순간과도 같은데 그 때 처음 부분에서 배창호는 안경알 속에 그녀를 담음으로써 선명해진 세상을 부각하지만 두번째 부분에서는 모든 세계가 전혀 분간이 안 될 정도로 흐릿해지는 것이다. 이러한 1차적 시점의 형상화에 있어서의 차이는 줄거리에 따른 외부적 상황에 대한 반응이 아니라 바로 배창호 작가 개인의 신념이 짙게 투영된 결과다. 이른바 '까이에 뒤 시네마'가 말했던 카메라 만년필 효과인 것이다. 배창호 개인은 자본에 휘둘리지 않는 순수한 영역이 사회 어딘가에 있을 것을 믿는다. 주인공 자신의 순정이 통했다고, 그렇게 역시 순수가 있었다고 생각할 때 세계는 또렷해진다. 하지만 여주인공이 최종적으로 자본을 선택할 때 그의 순수에 대한 믿음은 좌절되고 세상은 그 빛을 잃는 것이다. 그렇게 영상은 정확히 그 형식에서 배창호 개인이 믿는 가치를 반영한다. 이러한 이장호와 배창호의 차이는 공교롭게도 두 감독의 대표작 모두에 출연한 '최불암'을 어떻게 다루었는지를 살펴보면 더욱 뚜렷해진다. 즉, 이장호의 '바람 불어 좋은 날'에서 아버지의 기표로 존재했던 최불암은 마지막에 살해당하지만 배창호의 '기쁜 우리 젊은 날'에서는 나의 신념을 지키고 살아갈 수 있도록 지탱해주는 보호막이 되어 주는 것이다. 

 

 5. 덧붙여... 

 

  우연히 보게 되었지만 '기쁜 우리 젊은 날'을 통해 다시금 암울한 80년대를 헤쳐갔던 영화 감독들의 자의식을 생각해 보게 된 것은 오늘자 경향신문 때문이었다. 오늘 경향신문의 1면은 영화 '도가니'로 인해 새삼 깨닫게 된 영화의 저력에 대해 할애되고 있었다. 그것이 정말 어느 정도 현실적 변화를 일으킬지는 앞으로 두고 볼 문제이고 개인적으로는 한국 영화의 감독들에게 불만이 있었다. 지금 역시도 80년대와 다를 바 없는 어둠의 시절인데도, 내 일천한 한국 영화 경험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그 때 만큼이나 한국 감독들이 동시대에 대해 직접적 발언이 거의 없다는 것 때문이었다. 아무튼 다시금 상기된 영화의 저력과 그동안에 쌓여 왔던 내 불만이 같은 암울한 시기의 80년대를 한국의 영화 감독들은 어떻게 견뎌갔던가를 생각하게 되었고 거기에 얼마전에 본 '기쁜 우리 젊은 날'이 그 촉매제가 되어주었다. 저번주에는 곽지균의 91년작 '젊은 날의 초상'을 방영하던데 앞으로 계속 8,90년대의 영화를 방영할 모양이다. 한 번 차분히 영화를 통해 드러내는 감독들의 견딤의 자세를 살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왕녀를 위한 아르바이트 탐정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33
오사와 아리마사 지음, 손진성 옮김 / 비채 / 2011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비채의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는 올 해 나를 세번 놀래켰다. 처음은 물론 기리노 나쓰오의 '천사에게 버림받은 날'과 '물의 잠 재의 꿈'이 나란히 출간된 일. 두 작품은 연속으로 읽어야 그 주제가 완전히 살아날 수 있기에 더욱 그랬고 두 번째는 '은하영웅전설'로 유명한 작가 다나카 요시키의 지금까지 내내 그저 이름만 알려지고 있었던 걸작, '일곱도시 이야기'가 예고없이 불현듯 출간되었던 일 그리고 마지막 세번째가 바로 '신주쿠 상어' 시리즈로 유명한 오사와 아리마사의 '신주쿠 상어' 이전의 히트 시리즈인 '아르바이트 탐정' 시리즈가 역시나 예고도 없이 이렇게 소개된 일이다. 설마 아리마사의 가장 대표적 시리즈라 할 수 있는 '신주쿠 상어' 시리즈도 이제 겨우 한 편이 소개되었을 뿐인데 그 이전의 작품이 이렇게 국내에 발간될 수 있으리라곤 정말 꿈에도 생각 못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 아르바이트 탐정 시리즈가 수십년의 시차를 두고 국내에 출간되는 데 있어 그 격이 떨어진다고는 할 수 없다. 만일 '신주쿠 상어'가 90년대의 아리마사의 대표작이라고 한다면 '아르바이트 탐정'시리즈는 그야말로 80년대의 대표작이라고 할 만한 시리즈이니까 말이다. 

 

   '아르바이트 탐정 시리즈'는 이렇게 모두 6권까지 발간되었다. 이 중 마지막에 있는 '돌아온 아르바이트 탐정'은 2004년에, 그러니까 다섯번째 작품으로 부터 수십년이 흐른 뒤에 아리마사가 그 시리즈를 좋아하고 그리워하는 이들을 위해 마치 우리나라에서도 옛날의 팬들을 위해 로버트태권V를 다시 상영했던 것 처럼 다시금 오랜만에 그 시리즈로 돌아가 쓴 작품으로 그 간만의 귀환이 바로 2005년, 위성방송 WOW에 의해 바로 드라마로 제작 방영(감독이 무려 '달은 어디에 떠있는가?' '막스의 산'의 최양일이다. 거기다 아버지 '사에키' 역엔 시이나 깃페이가 맡았다.) 될 만큼 '아르바이트 탐정 시리즈'는 일본 내에서 인기를 구가했던 작품이었다. 

 

  이번에 소개되는 '왕녀의 아르바이트 탐정'은 그 시리즈 중 세번째 작품이다. 주인공의 이름은 사이키 료. 그는 고등학생으로 아버지와 단 둘이 사는데 이 아버지가 그런데 보통 아버지가 아니다. 현재 직업은 백수의 다른 이름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의 이름 없는 사립탐정인데 전력이 예사롭지 않다. 일단 료 자신이 소개하는 아버지의 전력은 이렇다. 

  무역상사 직원부터 시작해서, 오일 비즈니스 맨, 르포 라이터, 에이전트를 거쳐 결국에는 비밀 첩보원에 이르렀다.(p.11) 

  그렇다. 그는 예전에 007과도 같은 스파이였고 현재도 명색은 사립탐정이지만 국가가 비공식적으로 처리하고 싶은 일들을 맡아서 하고 있다. 류는 가끔 아르바이트 삼아 그런 아버지의 일을 도와서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류는 마치 배트맨을 돕는 '로빈'과도 같은 존재다. 

    그러니까 료도 그저 평범한 고등학생만은 아니다. 책에는 나오지 않지만 어릴 때 부터 스파이로서 주입식 영재교육이라도 받았는지 총기를 다루는 솜씨나 추적하고 잠입하며 적들과 대치 상황에서의 현장 운영 능력이나 그 밖의 모든 면에 있어서 전직이자 현직 스파이인 아버지와 어깨를 나란히 할 실력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 류도 이제는 고3. 아무리 평범하지 않는 고등학생이지만 대세를 거스를 수는 없는 법. 슬슬 대입 수험을 걱정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아아... 일상이란 얼마나 무자비한 것인지. 스파이라도 예외는 없다. 그래서 제임스 본드는 영영 결혼을 하지 않는 것인지도...하지만 그는 정작 한 번에 대학에 붙기를 바라는 '합격염원소원파'와 어차피 이번에는 안될 거 내년을 바라고 그냥 놀자는 '재수학원준비파' 그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다. 그렇게 그는 그냥 막연한 걱정만 안고 있는 주변인으로 지낸다. 이런 류의 모습이 당당한 경찰 엘리트 관료이지만 경찰과 범죄자 집단 그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채 혼자 '독고다이'로  움직였던 '신주쿠 상어'의 사에지마의 모습과 그대로 겹쳐보인다. 어쩌면 사에지마 캐릭터 자체가 바로 이 '아르바이트 탐정' 시리즈로 부터 형성되었을 지 모르겠다. 료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료의 아버지 사이키 료스케가 마치 사에지마가 훗날 아들을 가진 아버지가 된다면 바로 그런 모습이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닮은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렇게 '왕녀의 아르바이트 탐정'은 신주쿠 상어를 좋아하는 이들에겐 주인공 사에지마의 '프로토타입'을 볼 수 있다는 재미를 덤으로 얻을 수 있다. 아무튼 그러다 류는 한 가지 꼼수를 생각해 낸다. 그러니까 아르바이트 삼아 국가적 사무를 비밀리에 처리하고 있는 자신이니만큼 권력의 중심에 있다고 여겨지는 시마즈에게 그간의 정을 빌미로 그의 힘으로 뒷구멍으로 동경대에 입학할 생각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정말 시마즈라면 그게 전혀 불가능할 것 같지도 않다. 그는 기회를 엿보는데 마침 그 기회가 온다. 시마즈가 아버지에게 정치적으로 미묘한 관계 때문에 섣불리 국가가 나서서 경호할 수 없는 인도네시아 어디쯤에 있다는 가상의 국가 라일의 왕위 계승이 가장 유력시 되어 현재 암살 위험이 다분한 왕녀 '미오'의 비밀스러운 경호를 의뢰해 온 것이다. 류는 동경대 뒷구멍 입학을 위해 아버지를 부추겨 흔쾌히 수락한다. 물론 그 댓가는 시마즈에게 비밀로 하고... 

 

  드디어 왕녀 미오가 일본에 오고 류는 아이돌 저리가라는 미모에 첫사랑에 빠져든 소년 같은 심정을 느낀다. 하지만 현격한 신분 차이 그리고 동경대 입학을 위해 경호에 전념해야 하는 그로서는 그 마음을 내내 억누르지만 감정이란 늘 그렇듯이 이성의 지배를 받지 않는 법이어서 어느새 도도한 감정의 물결은 류를 사랑의 파라다이스로 데려가버린다. 그 와중에도 독침, 총격, 폭탄 등 방법도 다양하게 헐리우드 액션 영화 저리가라는 무지막지한 암살 시도는 계속되고 미오는 점점 위기에 몰리게 된다.  

  공주와의 사랑, 위기에 빠진 공주를 구하는 기사, 스파이 그리고 바이크... 이렇게 소설에서 주욱 드러나는 내용과 소재들은 가만히 보면 마치 소년의 로망을 그대로 리스트화한 것 같지 않은가? 아닌게 아니라 이 소설은 말 그대로 소년의 로망을 극한까지 담은 소설이다. 어쩌면 신주쿠 상어가 경찰 오타쿠로서의 아리마사를 그대로 드러냈듯이 이 작품은 소년 시절의 아리마사가 바라마지 않았던 꿈을 그대로 담아낸 것인지도 모른다. 아니 이게 꼭 아리마사만의 꿈일까? 소년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그려 보았던 꿈이 아닐까? 아마도 그 때문일 것이다. 이 소설을 한 번 잡게되면 끝까지 내리 읽게 되는 것이. 그것이 꼭 전개가 빨라서도, 스케일이 커서도 그리고 내내 쉴새 없이 액션 장면들이 쏟아져서 그런 것이 아니라 소년시절에 누구나 꿈꾸었을 그런 모습을 비록 대리만족이나마 실컷 충족시켜주기 때문이라고 말이다. 

  그런데 이 아르바이트 탐정의 세계는 신주쿠 상어의 세계와는 너무 대조적인지라 흥미를 끈다. 어쩌다 아리마사는 80년대의 아르바이트 탐정이 보여주는 소년의 낭만 가득한 세계에서 90년대의 신주쿠 상어가 보여주는 구원의 가능성이 조금도 없는 비정한 어른의 세계로 넘어가버린 것일까? 그의 작품을 관심있게 보아왔었다면 당연히 이러한 의문이 들 수 밖에 없는데 그것은 아마도 그 시대적 분위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닐까 싶다. 놀라운 속도로 경제적 성장과 팽창을 거듭하던 일본의 80년대는 그야말로 파라다이스였으나 그 거품이 서서히 꺼져들기 시작하던 90년대는 지옥의 입구로 들어가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였으니까. 그러한 시대에 감겨드는 대기의 변화가 작품 세계마저도 극단적인 변화를 낳게 된 것은 아닐까 싶다. 

   어쨌거나 저쨌거나 아리마사가 늘 그랬듯이 오락적인 면에선 그야말로 완벽에 가까운 작품이다. 과장된 설정을 싫어하는 사람에게는 호불호가 갈릴수도 있겠지만. 아무리 위험한 상황에서도 유머를 잃지 않는 류의 캐릭터도 매력적이고 사에지마를 강하게 연상시키는 아버지도 꽤 흥미롭다. 킬러들과의 대결도 흥미진진하고 역시나 총기 매니아 아리마사 답게 리얼한 총기들의 묘사 또한 빼놓을 수 없다. 더구나 소년 시절의 꿈을 그대로 형상화해 놓은 듯한 연속되는 위기 속에서 아슬아슬하게 피어가는 류와 미오의 사랑 얘기 역시 머리속으로는 뻔한 결말이 예상되지만 그래도 계속 읽게 만든다.(아마도 그것은 우리의 소망을 그대로 드러낸 드라마일 수록 우리의 관심사가 오로지 언제 소망이 충족되는 것인지, 그 시점의 도래에만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즉 설정이 아무리 진부하더라도 소망의 대리만족 욕망이 너무나 강렬해서 눈에 들어오지 않는 것이다. 오히려 그래서 진부하면 진부할수록 더 보게 되는 것은 아닐까? 너무나 익숙한 설정은 그에 대해 생각할 필요없이 오로지 소망 충족 과정에만 몰두할 수 있게 해 주니까. 어쩌면 드라마 뿐만 아니라 소설의 속도 역시 그것과 관계있을지 모른다.)  다시 한 번 분명코 말하지만, 한 번 손에 잡으면 그냥 끝까지 달려가게 된다. 그러니 가급적 시간적 여유가 좀 있으실 때 읽으시기를 권해드리고 싶다. 아무튼 아리마사다운 작품이다. 팬이시라면 필독!  

 뱀다리 - 그런데 료는 과연 소원대로 동경대의 뒷구멍으로 갈 수 있었을까? 이 소설에는 나오지 않지만 바로 다음 작품에서 우리는 그 결말을 알 수 있다. 동경대는 커녕 오히려 유급 당할지도 모르는 처지에 빠져있는 것이다. 역시나 일상은 만만치 않다. 그것이 아무리 한 나라의 비밀경찰마저 갖고 노는 뛰어난 스파이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