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홍 - 彩虹 : 무지개 김별아 조선 여인 3부작
김별아 지음 / 해냄 / 2011년 12월
평점 :
품절


 

 

 

 

  1. 달라도 너무 다른 그녀, 봉빈...

 

  솔직히 놀라웠습니다.

  인물의 재해석이야 문학이 늘 해오던 것입니다만 소설 '채홍'이 보여준 문학적 상상력으로 빚어낸 새로운 해석은 그동안의 굳어졌던 역사적 인식을 단번에 무너뜨릴 만큼 압도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문학이 이렇게도 현실을 능가할 수도 있구나 하고 감탄했습니다. 아마도 이 소설 이전에 이미 '봉빈'을 알고 계시던 분들이라면 저와 비슷한 감회를 가질 것으로 생각됩니다.

 

  네, 물론 저도 이 소설의 주인공 '봉빈'을 예전에 만난 적이 있습니다. 대학 다닐 때, 역사를 좋아했던 저는 전공도 아니면서 '조선왕조실록강해'를 수강한 적이 있었는데 거기서 조선 역사에 처음 공식적으로 기록된 레즈비언이라면서 교수님이 바로 이 '봉빈'을 소개해 주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봉빈에 대한 실록의 기록은 그야말로 참담하기 그지 없었습니다. 인물은 뛰어났지만 성격이 직선적이고 다혈질인지라 조용한 장차 문종이 되는 세자와는 살가운 관계가 될 수 없었고 그런 문종이 후실들을 더 찾고 그 중 하나가 결국 임신을 하게 되자 질투심에 거짓 임신을 꾸며대질 않나 틈날 때 마다 몰래 외간 남자를 엿보거나 대낮부터 술에 취해 주정을 일삼지 않나 정말 장차 조선의 국모가 될 세자빈이 어찌 저럴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한심한 모습이었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이런 생각마저 들더군요. 봉빈이 결국 폐출되어버린 계기가 된 동성애를 뜻하는 '대식(對食)'도 정말 그런 일어났던 것이 아니라 두 번이나 폐출시키려다 보니 마땅한 구실이 없어 혹시 조작한 것은 아닐까 하는... 소설 '채홍'에서도 직접 나오는 것이기도 합니다만 당시 궁내에서 궁녀들끼리의 '대식'은 공공연히 자행되었다고 하니까요. 저의 뇌리 속에 그렇게 박혀있던 봉빈이었기에 사실 이 소설을 처음 읽을 때 폐출되어 사가로 돌아온 이가 설마 그 '봉빈'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였습니다. 소설 '채홍'에 처음 등장하는 봉빈은 그야말로 그 때 그녀가 직접 만져보기도 했던 가을 국화 처럼 차분하고 단아해 보이기만 했으니까요. 그렇게 늘 저의 기억 속에 활활 타오르는 장작불 같은 인상으로만 남아있던 봉빈과는 달라도 너무 달랐습니다. 하지만 그것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실록에서 보여준 성군이라는 칭호가 아깝지 않는 세종과 조용하고 어질어서 준비된 임금이라는 칭송까지 받았던 세자에게 그야말로 가해자였던 그녀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다만 소설에서 보여지는 것은 자신을 단죄하려 드는 오라버니들 앞에서 절규처럼 쏟아내었던 그녀의 말 그대로 본심을 몰라주는 무정한 세상으로부터 온갖 멸시와 박해를 받은 피해자로서의 모습뿐이었으니까요.

 

  저는 마치 완전히 다른 사람을 보는 듯 했습니다. 그 다름이 참으로 인상 깊었고 그 다름의 연유가 정말로 궁금했기에 저는 얼른 뒷 페이지를 넘겨 봉빈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결국 깨달았습니다. 김별아 작가가 그렇게 해야 했던 이유를... 그리고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던 까닭을... 그 모든 게 사실 우리 내부에 간직된 우리의 선입관을 깨뜨리려는 그녀 자신의 호소라는 사실을 말이죠.

 

 

  2. '채홍'의 '봉빈'이 달라야 했던 이유...

 

  그렇습니다. 우리에겐 선입관이 있습니다.

  선입관은 여러 경로를 통해서 만들어질 수 있는데 때로는 역사적 사실로 인해 만들어지기도 합니다. 물론 이 말은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가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기록한 것이라는 믿음을 포기할 때에만 정당성을 갖습니다만 그것에 대해 그리 부담을 가질 필요는 없는듯 합니다. 근대 독일의 역사학자 딜타이 이후로 역사란 진짜 있는 사실 그대로를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얼마든지 입맛대로 거짓을 지어내거나 사실을 바꿔서 기록할 수도 있음이 드러났기 때문이죠. 네, 지금에서는 역사가 순수한 사실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믿음은 이미 깨어진 지 오래입니다. 시쳇말로 '역사란 승자의 기록'이라는 말도 있듯이 말이죠. 그렇게 승자의 입장에서 그가 원하는 대로 얼마든지 다시 고쳐 쓸 수 있는 게 바로 역사이고 오늘 날 그게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패자들은 때로는 삭제로 지워지는 것이고 때로는 왜곡으로 본모습을 잃어버리는 것이죠. 그렇게 그들은 자신의 모습을 제대로 알릴 목소리를 잃게 됩니다. 자고로 이것이 역사 속에서 여성이나 동성애자 등 모든 '약자'이며 '소수자'들이 겪어야 했던 운명이었습니다. 때문에 지금 역사학계에서는 지금까지 기술된 역사가 아닌 공식 문헌이나 문학, 혹은 민담 그 뿐만 아니라 세금 계산서나 가게 장부를 비롯한 온갖 잡다한 자료들을 통하여 공식적 역사가 지워버리거나 왜곡한 목소리들을 온전한 모습으로 다시금 발굴해 내는 데 오히려 더 치중하고 있는 형편입니다. 바로 이 소설, 김별아 작가의 '채홍'도 문학이지만 바로 그러한 흐름 가운데 있는 작품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김별아 작가가 실록과 전혀 다른 모습으로 봉빈을 빚은 이유기도 합니다.

 

 

  2 - 1.  도입부에서 드러나는 다름의 의도...

 

 그녀의 이러한 동기는 소설 도입부에서 잘 드러납니다.

 이 소설의 도입부는 특이한 구성을 하고 있기에 흥미를 자아냅니다. 보통 구성상의 특이함은 그대로 작가의 의도인 경우가 많지요. 때문에 '채홍' 소설의 도입부에는 그 자체로서 드러내고 싶은 작가의 말이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여기서 특이한 것이란 정작 주인공인 봉빈이 등장할 때 까지 우리는 총 세 단계를 지나가야 되게끔 설계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는 사가로 돌아왔을 때 봉빈을 바라보는 오라버니의 마음에서 봉빈의 주변 인물이라 할 만한 박나인과 결국 그녀를 왕에게 고발하는 임무를 맡는 김태감을 거쳐서야 비로소 봉빈에게 이르게 되는데요. 왜 작가는 이렇게 일부러 돌아가는 길을 만들었을까요? 바로 거기에 김별아 작가가 실록에 구애받지 않고 온전히 자신만의 시각으로 봉빈을 빚은 이유가 직접적으로 드러납니다. 바로 이 세 단계의 이야기를 유심히 살펴보면 여기에 공통점이 있음이 분명 보게 됩니다. 바로 그 공통점이 김별아 작가가 그리했던 이유를 거꾸로 밝혀줄 터인데 그 공통점이란 바로 이것입니다. 그러니까 가장 먼저 봉빈이 폐출되어 사가로 돌아왔을 때 오라버니들이 보인 한결같은 반응에서나 그 뒤 '숨어있는 꽃'에 나오는 '열녀' 혹은 '정절'이라는 남성중심의 가부장적 문화가 여성의 욕망을 자신의 뜻대로 길들이기 위해 만든 관념을 의식 깊숙이 내재화시키고 사는 박나인( 또한 이 박나인은 흉금을 타인의 눈치를 보지 않고 있는 그대로 털어놓는 봉빈과는 얼마나 정반대의 인물입니까? 이러한 극단적인 대조의 모습에서 우리는 왜 김별아 작가가 박나인을 두 번째로 등장하게 했는가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의 모습에서나 마지막으로 다음 '불의 멀미'에서 내시라서 몸으로는 아내를 만족시킬 수 없다는 생각에 아내가 행여 그 때문에 바람나지나 않을까 하는 의심 때문에 결국 지속적인 폭력으로 자기 아내의 욕망을 길들이려 드는(이것은 그대로 '몸'은 없고 오로지 '말'로써 여성들에게 강압과 폭력을 자행하고 있는 가부장적 유교적 관념을 그대로 은유한 것이기도 합니다.) 김태감의 모습에서 우리가 공히 볼 수 있는 것은 당시 역사의 지배자라 할 수 있는 남성들은 여성을 그대로 인정하고 이해하기 보단 먼저 지배부터 하려들고 자신의 입맛에 맞게끔 길들이려 하는데 그것은 모두 여성에 대해 가지는 두려움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공통점에서 김별아 작가가 왜 에둘러 갔는가에 대한 그 이유가 단적으로 드러나는데, 그것은 실록이 쓰여 진 당시에 남성과 여성의 관계가 어떠했는지 분명히 보여주기 위함이었습니다. 그 관계란 게 다름 아니라 바로 두려움에서 비롯된 일방적 강압과 폭력으로 점철된 관계였다는 것을 말이죠. 바로 이러한 관계 위에서 공식 기록이라며 등장한 '실록'이었기 때문에 김별아 작가는 실록의 봉빈을 그대로 인정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김태감에서 잘 보여지듯, 남성들은 여성들이 두려우면 두려울 수록 오히려 자기가 아니라 여성 탓을 하며 그렇게 더 '괴물적'인 것으로 만들어 자꾸만 더 가학적이 되는 폭력 행사를 스스로 정당화시키기 일쑤이니까요. 그러니 김별아 작가는 실록 역시도 똑같은 색안경을 쓰고 봉빈을 바라보고 있다고 여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해서 실록에서는 '준비된 임금'이라며 칭송해 마지않는 문종 또한 이제 전혀 다른 눈으로 바라보는 김별아 작가에게는 한낱 가부장적인 유교적 관념에 완전히 세뇌되어버려 여성과는 제대로 진솔한 관계조차 맺을 수 없는 '반편'이며 뼛속까지 '법도'에 물든 나머지 융통성이라든가 인간미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정해진 매뉴얼 대로만 움직이는 '법도 기계' 이상의 존재는 아니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저는 그동안 문종을 능력으로나 인품으로나 그만큼 준비된 임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단명 하는 바람에 자신의 아들 단종을 비극적으로 죽게 만든 애석한 임금으로만 여기고 있었는데요 소설'채홍'을 읽으면서는 '과연 이 소설이 그려내는 만큼의 강박증과 소심증으로 가득 찬 사람이었다면 어쩌면 단종의 비극은 필연적이었을지도 모르겠구나!' 라고 생각하게 되더군요. 그만큼 김별아 작가가 그려내는 문종 또한 아주 설득력이 있었습니다.

 

 

 3. 다르게 할 수 밖에 없었던 연유...

 

 그래서 할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두려움과 의심으로 점철된 일방적 강압과 폭력으로 지워지고 왜곡된 봉빈의 모습을 온전히 보여주려 한다면 실록에 기록된 것에 좌우되지 않고 단순한 사실만을 취하여 그것을 지금까지의 남성만의 관점이 아닌 온전히 여성만의 관점으로 밑바닥부터 다시 다져 새롭게 형상화해야 했을 터이니까요.

 

 결국 역사란 기억의 문제입니다.

 역사란 따지고 보면 훗날 전해주고 싶은 기억만 기록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 선별의 주체가 오로지 남성뿐이었다는 것이죠. 그것도 여성을 대등한 존재로 여기고 이해하려는 남성이 아니라 '열녀'나 '칠거지악' 같은 것으로 여성이란 무조건 남성들이 시키는 대로 살아가야 하는 존재로만 생각하는 남성들로 말이죠. 그래서 마땅히 이 김별아 작가가 소설 '채홍'에서 했던 대로 여성 자신의 목소리로 여성 자신의 역사를 이야기할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편협한 남성들의 손에 의해 지워지고 왜곡된 여성들에 대한 기억들을 다시금 되살리고 온전한 형태로 복원하기 위해서 는 말이죠. 때문에 '채홍' 후반부에 이루어지는 문종과 봉빈으로 대표되는 '법도'라는 이념과 '사랑'이라는 개인의 욕망간의 대립은 차라리 그 목소리들을 되찾기 위한 투쟁과도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법도가 그대로 체화된 인물인 세자 ' 문종'은 그대로 이념이 가진 특성을 보여줍니다. 그는 일단 봉빈의 마음을 헤아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의 무심함에서 오는 서운한 감정의 표출도 법도로 마땅히 교정해야 할 시기 많은 아낙네의 잔소리로 여길 뿐입니다. 그래서 들으려 하지 않고 오로지 강요만 합니다. 끝내 듣지 않으면 그냥 피하고 무시해 버립니다. 이건 그대로 법도로 대표되어지는 이념의 행태이기도 합니다. 이념도 들으려는 귀가 없습니다. 오로지 타인을 그 뜻대로 맞추는 말을 하는 '입'밖에 없습니다. 때문에 오로지 자기만 진리라고 생각하고 자신의 잘못을 책하면 정작 잘못을 범하고 모자라는 것은 당신인데 어찌 그런 말을 하느냐고 역정부터 냅니다. 그리고 이념은 자신이 아는 만큼이 세계의 전부이기 때문에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두려워하고 피하려듭니다. 문종 역시도 그러했습니다. 솔직하게 자신의 감정을 그대로 토로하는 봉빈은 문종이 지금까지 알고 있던 여성의 모습과는 너무도 달랐기에 봉빈 앞에 서면 왠지 스스로 왜소해짐을 느꼈고 그래서 두려워했습니다. 그렇게 이념은 자신의 통제를 거부하는 개인의 욕망 앞에 두려움을 느낍니다. 아마도 그 때문에 이념은 더욱 더 개인의 욕망을 통제하려 드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김태감이 아내에게 지속적으로 가했던 폭행처럼 말이죠. 그리고 그게 한계에 이르면 이제는 그냥 무시해 버리는 쪽으로 나아갑니다. 그렇게 문종은 봉빈에게로 가는 발길을 끊어버리죠. '자신들만이 선택받은 민족이다'라는 이념에 빠져 유태인의 생명을 깡그리 무시했던 나치와도 같이 말입니다. 문종의 모르쇠와 나치의 학살. 이것을 같이 보는 것은 그리 지나친 비유가 아닙니다. 근본적으로 이념의 본성엔 다른 것에 대한 포용이나 이해의 노력이 없습니다. 그렇게 다른 자란 얼마든지 쉽게 제거될 수 있는 대상으로 생각합니다. 문종이 봉빈이 폐출될 때 쉽게 인정하는 것에서도 드러나듯이 결국은 이런 면에서 문종이 봉빈을 바라보는 것이나 나치가 유태인을 바라보는 것은 닮아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역사'라는 이름으로 약자나 소수의 목소리들을 그리도 쉽게 지울 수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것을 거부하는 개인의 욕망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게 이념을 향해 나를 인정해 달라는 욕망인 것은 아닙니다. 그건 전체에로의 합일을 꿈꾸지 않습니다. 이념 자체가 전체성의 표상이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이념을 거부하는 개인의 욕망이란 전체성에 매몰되지 않는 그 개인의 고유성을 지켜내는 것입니다. 그렇게 그것은 그저 자신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 싶은 욕망입니다. 그냥 날 그 무엇도 아닌 고유한 나 자신으로 보아달라는 그런 욕망입니다. 봉빈이 문종에게 드러낸 것도 그러하지 않았던가요? 법도에서 움직이는 세자빈이 아닌 문종을 향한 애틋한 감정으로 괴로워하는 원래 이름인 '란'이라는 자기 자체를 보아달라는 것이 아니었던가요? 그래서 김별아 작가는 점점 '사랑'을 강조해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엔 조선의 유교의 가부장적 사고방식으로는 절대 받아들일 수 없는 여성과의 동성애 마저 가져온 것입니다. 그것이 비록 역사적 사실이었다 해도 분명 김별아 작가는 남성 중심의 당시의 가치관을 가장 전복적으로 공격하기 위해서라도 그 사랑을 가져와야만 했을 것입니다. 이념으로는 도저히 포획될 수 없는 개인 욕망의 고유성과 거기에 그대로 빗대어질 남성들 가치에 종속되지 않는 온전히 여성들만의 고유한 존재성을 드러내기 위해서 말이죠. 대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대표적인 여성들이란 어떤 존재들입니까? 흔히 우리들은 가장 여성다운 인물로 신사임당을 꼽곤 하지요. 하지만 그 신사임당은 알고 보면 남성 중심의 유교적 관념이 원하는 바를 그대로 그려낸 듯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온전한 여성성의 대표일지도 몰라도 여성의 입장에서 보자면 남성들이 뒤집어씌운 굴레 속에서 자신의 욕망을 스스로 포기해야만 했던 인물일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김별아 작가가 따지고 보면 실록에서 자신의 욕망에 가장 충실했던 '봉빈'을, 거기다 조선의 문화로서는 가장 받아들이기 힘든 여성들만의 동성애를 가져오는 것은 지금까지의 남성 중심의 시각이 아닌 이제 여성중심의 시각으로 다시금 새롭게 여성들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하나의 선언'인지도 모릅니다. 또한 이것은 지금 역사학자들이 거세게 하고 있는 '공식적'이란 미명 하에 지워지고 왜곡되어진 약자와 소수자의 목소리들을 되찾아주는 것과 보조를 맞추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드러나는 것입니다만 '채홍'이란 이 소설은 사랑을 강조하는 단순한 로맨스 소설은 아닙니다. 오히려 이 소설에서 그토록 강조되는 사랑이란 실은 전혀 다르게 해석되어져야 합니다. 그러니까 남성들에 의해 왜곡된 여성성이 아니라 여성 고유의 시선과 존재로서 충만한 여성성에 대한 상징과 같은 것으로 말이죠. 때문에 소설 '채홍'의 마지막에 유언처럼 남겨진 봉빈의 이 마지막 말,

 

'한 가지만은 분명해요. 행여 그 때도 사랑이 죄가 된다면 나는 기꺼이 사랑으로 죽으리라는 것을.(p.319)'

 이 또한 그 궁극적 의미에 있어서는 고유하고도 진정한 여성성을 간직하리라는 선언이라 할 것입니다.

 

 

  4. 이제 전혀 새롭게 쓰여지는 여성 중심의 역사를 향하여...

     기억의 여신 므네모시네로서의 봉빈

 

  김별아 작가의 소설 '채홍'이 정말 놀라운 것은(이 글이 '놀라웠습니다.'로 시작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여기까지 이르러 이제 다시 소설이 빚어낸 봉빈의 모습을 살펴보면 남성 중심의 시각에서는 폐출될 수밖에 없었던 봉빈의 모든 행위들이 이렇게 다시금 되찾으려 하는 여성 중심의 시각에서 보면 그 모든 게, 그 잃어버린 목소리들을 '문학만이 기억할 수 있다.'고 김별아 작가가 스스로 말했듯이, 온전히 기억하기 위한 행위로 해석된다는 점입니다. 원래 여성은 기억의 상징이었습니다. 기억을 뜻하는 영어 Memory의 연원이 되는 기억의 신인 '므네모시네(Mnemosyne)도 여신이었습니다. 세익스피어는 이것을 적극적으로 자신의 작품으로 끌어들인 대표적 작가이기도 합니다. '햄릿'에서의 햄릿 어머니처럼 세익스피의 연극 대부분에서 여성들은 세상에 알려지지 않는 숨겨진 진실들을 기억하는 존재들로 나오죠. 다시금 새롭게 소설 속에서 묘사되어진 봉빈의 행태들을 살펴보면 봉빈은 마치 이 므네모시네의 화신과도 같습니다. 대표적으로 봉빈이 술을 벗하게 되는 부분에서 단적으로 드러납니다. 김별아 작가는 주의 깊게도 봉빈이 남성 사회에 자신을 편입시키려는 모든 노력들이 좌절되었을 때 비로소 술을 마시게 합니다. 바로 거짓 임신이 그것이죠. 문종의 관심을 가지려면 오로지 임신 밖에는 없다고 생각하고 그와 같은 징후가 있자 무턱대고 믿어버린 것이 화근이었습니다만(그러니 절대 거짓말은 아니었습니다. 다만 과실에 의한 착오였을 뿐이죠.) 그건 그녀가 문종으로 대표되는 남성 사회에 진입할 수 있는 마지막 가능성이자 여성성의 입장에서 보자면 그나마 남아있던 미련이기도 했습니다. 결국 그것은 상상임신으로 판명 나고 봉빈은 교활한 사기꾼이라는 오명 속에 고립됩니다만 사실 그 고유의 여성성에서 보자면 이것으로 마지막 남은 미련마저 없앨 수 있는 계기가 된 셈이기도 합니다. 아무튼 봉빈은 그 때 가서야 술을 마셨습니다. '진실할수록 추하고 솔직할수록 퇴폐적인'이라는 참으로 묘한 뉘앙스를 풍기는 장의 첫머리에 봉빈이 술에 대한 느낌을 말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거기서 그녀는 이렇게 말합니다.

 

'분명 물로 만들어진 물건인데 요상키도 하다. (...) 너절하고 귀접스런 기억들이 씻긴 듯 지워지며 초라한 나는 내가 아닌 무엇으로 사라진다.(p.184)'

 

  여기서 너절하고 귀접스런 기억들이란 남성 사회에 억지로 스스로를 편입시키려던 기억들이며 '초라한 나'는 그러했던 봉빈 자신을 뜻한다는 걸 달리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겁니다. 그렇게 남성 중심의 가치관에 물들었던 기억과 자신이 이제 술로 인해 사라지고 다시금 되찾은 여성성의 자아로 그녀는 다시금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녀는 술이 목을 넘어갈 때 '홧홧한 자극만이 남았다'고 합니다. 그게 처음 술을 마실 때 그녀 기억의 전부였습니다. 여기서 감각이 등장했다는 게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감각이란 오로지 자기 혼자만이 느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죠. 그렇게 감각만이 남았다는 것은 이제 그녀 자신을 지배하던 모든 이념이 사라졌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이때부터 그녀가 조선의 모범적인 여성상으로서는 이루 말할 수 없는 파격을 보여주는 것은 당연한 행보입니다. 그렇게 남성 중심의 가치관에 있어서는 전복적으로만 보여 질 수밖에 없는 파격으로 고유한 여성성에로 탈주를 감행하는 것이며 그 기억을 다시금 써 가는 것입니다. 그녀의 술은 계속됩니다. 그런데 므네모시네 역시도 그렇습니다. 그 여신은 기억의 연못을 주관하고 있는데 그 물을 마시면 기억이 되살아난다고 하죠. 그렇게 봉빈의 술은 므네모시네의 물인 것입니다. 그렇게 술을 계속적으로 마신다는 것은 되찾은 고유의 여성성을 계속해서 되새긴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5. 당신을 향하여 부르짖는 초혼(招魂)

 

 소설의 제목인 '채홍(彩虹)'은 무지개를 뜻한다고 합니다. 김별아 작가는 왜 그걸 제목으로 택했는가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는 무지개가 태양의 반대편에 뜨는 이치에서 비롯되었다. 왕이라는 태양이 빛나는 반대편에는 권력과 욕망과 사랑과 질투 등의 인간적인 감정들로 채색된 여인들의 무지개가 떴다. (p.322)'

 

 이제는 아셨겠지만 지금 저의 리뷰는 이 말을 조금 상세하고 길게 써 나간 것에 불과합니다. 이러한 김별아 작가의 말에서도 바로 드러나듯이 이 소설은 그저 한 여인의 사랑 이야기가 아닙니다. 보다 근원적 의미에서 남성 중심의 역사에서 지워지거나 왜곡되어진 여성들의 잃어버린 목소리를 문학적으로 복원하려는 그런 의미에서 진정한 페미니즘 소설입니다. 저는 이렇게 공식적인 역사 기록에 좌우되지 않고 온전히 그만의 시각으로 그것도 보다 확고한 주제 의식에 기반 해서 과감히 써 내려간 이 소설을 참으로 높이 평가하고 싶습니다. 앞에서 저는 이 소설을 우리 내부에 던지는 하나의 호소라고 했습니다만 과거에 지워지고 왜곡되어진 존재들을 다시금 불러내 새롭고도 온전한 생명을 주려 한다는 점에서 이 소설은 사실 '초혼(招魂)'에 더 가깝습니다. 당신이 이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바로 그 '초혼'의 현장에 들어서게 되는 것입니다. 왠지 절박하면서도 애타는 듯한 김별아 작가의 이 초혼을 듣게 된다면 당신은 아마도 이 세 가지를 깨달을 것입니다. 모든 존재는 그 자체만으로도 소중하다는 것을. 그리고 그 때문에 우리는 모두를 편견 없이 대해야 하고 그 모든 목소리에 기꺼이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을. 마지막으로 그것을 위해서라는 세상 모두가 반대하는 편이라 해도 기꺼이 설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그렇습니다. 소설 '채홍'은 바로 이 세 가지를 위한 당신을 향한 부르짖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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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 2012-04-01 19: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아, 헤르메스님... 전에 제게 부끄러워서 리뷰를 못 올리겠노라 말씀하셨지요. 저는 그런 부끄러운 리뷰를 미친듯이 읽어내렸습니다. 그야말로 제가 부끄럽군요.
제가 <채홍>과 김별아 작가의 의도를 겉멋만 핥아낸것이라면 헤르메스님께서는 그녀의 깊은 곳까지 파고들어 소설을 이해하셨습니다. 저는 아무리 읽어내고자 해도 외면밖에는 읽어내리지 못하겠던데, 헤르메스님꼐서는 대단하신걸요.

이거이거... <채홍>으로 신간평가단 신청하려고 했더니 안되겠습니다. 쩝

ICE-9 2012-04-02 23:27   좋아요 0 | URL
사실 별 기대없이 읽었던 책이었는데 완전 '채홍'에게 반해버렸습니다. 저번에 라비니아 때도 그랬지만 이런 식의 여성성의 독창적 접근 저 완전 좋아하거든요. 그래서인지 제가 느낀 것을 그대로 다 쏟아내보고자 했던거죠. 그래서 글은 대책없이 길어지고 또 장황하게 되어버렸을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그동안 2기에 걸쳐 신간평가단을 했는데 그 짬밥으로 짐작하자면 소이진님은 소설 신간평가단 꼭 되실겁니다. 문제는 저죠 ㅠ ㅠ
 
판도라의 도서관 - 여성과 책의 문화사
크리스티아네 인만 지음, 엄미정 옮김 / 예경 / 2011년 12월
절판


예전에 종영된 드라마 '뿌리 깊은 나무'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장면은 세종과 밀본의 본원 정기준이 만나 백성과 글의 관계에 대해 논쟁을 벌이는 장면이었다.
거기서 세종이 글이 백성에게 사대부가 가진 능력을 나눠주고 스스로 생각할 수 있게 만들어 사대부들을 스스로 견제할 수 있게 될 것이라며 창제가 가진 긍정적인 효과를 얘기하자 정기준은 곧바로 오히려 이렇게 반문한다.
"글로 인해 백성들이 가지게 된 거대한 욕망은 어떻게 할 것이냐"고 말이다.

이 장면이 무엇보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내게 글이 단순히 글이 아님을 깊이 깨닫게 했기 때문이다.
세종과 정기준은 모두 글이 어떤 무형의 힘을 지니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어쩌면 당연했는지도 모르겠다. 무릇 당시 조선의 권력이란 애오라지 글을 아는 것에 있었으니 말이다. 글을 앎이 곧 힘을 얻는 원천이었다. 하지만 글이 주는 힘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단순한 힘 뿐만 아니라 스스로 자신의 생각을 언어로 표현할 수 있게 되므로 더이상 남의 말에 휘둘리지 않는 고유의 자신을 가지게 만드는 힘도 있었다. 그것이 세종이 정말 백성에게 주려했었던 '주체화'의 힘이었다. 글은 그런 힘이 있었다. 자신의 생각과 바람을 자신의 말로 표현하게 됨으로써 더이상 사대부의 농간에 농락당하지 않도록 만드는 힘이 말이다. 하지만 정작 정기준이 우려했던 것은 바로 그 지점이었다. 자신을 알게 되는 것은 곧 자신의 욕망을 알게 되는 것과도 같았기 때문이다. 글을 모를 땐 자신도 모르고 욕망 역시도 그 언어를 얻지 못해 내면 어딘가에서 그저 잠들 수밖에 없었지만 이제 글을 알게되어 자신을 알게 되면 욕망 또한 그 언어를 얻어 잃어버린 얼굴을 되찾아 밖으로 나올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정기준은 그렇게 드러날 욕망으로 벌개진 무수한 얼굴들을 두려워했다. 그것은 자아를 찾게 되면 반드시 그림자처럼 따라올 것이기에 그의 등골은 더 서늘해질 수 밖에 없었다. 지금은 타계한 폴란드의 영화감독 크쥐시토프 키에슬롭스키의 말 그대로였다. 그는 폴란드가 자유화되자 덩달아 범죄마저 급속도로 증가하는 것을 보며 이렇게 술회했다고 한다. "자유와 동시에 죄악까지 들어왔다."고. 정기준은 바로 이와 같은 사태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글을 통해 사슬에서 놓여남의 이면엔 그대로 유혹에 노출됨이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정기준의 이 말이 사실은 그토록 오랜 세월 여성들에게 책 읽기를 금지시켜온 본래 까닭은 아니었을까를 크리스티아네 인만의 '판도라의 도서관'을 읽으면서 하게 되었다.

'판도라의 도서관'은 고대에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여성의 책 읽기에 대한 역사를 다루고 있는 책이다. 그런데 이 책에서 그려내는 역사는 그리 순탄하지 않다. 근대에 들어와서까지도 여성들은 제 마음껏 책 읽기가 어려웠을 정도로 내내 남성중심의 사회로부터 책 읽기에 대해 철저하게 억압 받아왔기 때문이다. 그동안 여성들이 종속적인 위치에 있다는 걸 알았지만 지극히 개인적인 책읽기마저 그토록 속박 받아왔었음은 이 책을 통해 처음 알게 되었다. 그런데 남성들은 왜 그토록 여성들의 책 읽기에 대해 억압했던 것일까? 그것이 바로 세종과 정기준이 바라봤던 글의 힘 때문이었다. 즉 정기준이 말했던 욕망의 부추김이요 세종이 자립적 주체로 만드는 힘 그 때문이었다. 남성들은 여성들이 책을 읽고 스스로 사고하게 되는 것을 두려워했다. 작가 플로베르가 소설 '보봐리 부인'에서 그렸던 대로, 보봐리 부인이 책을 통해 자신이 원하는 사랑을 실현시키려 하였듯이 그렇게 여성들이 책을 통해 남성이 원하는 것이 아니라 여성 자신이 원하는 것을 찾으려 할까봐 두려웠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은 비단 서양에만 국한되는 일은 아니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여성들에게 글이란 철저히 금기시되는 것이었다. 드라마 '해를 품은 달'에서의 여주인공 연우는 당시 조선에서 아주 이례적인 일이었고 그렇게 글을 안다고 해도 오히려 그 때문에 모진 박해를 받아야 했다. 그것의 대표적인 예가 바로 허난설헌이다. 그녀는 지금도 중국과 일본에서 그녀의 시를 흠모하고 연구하는 모임까지 있을 정도로 뛰어난 문재였지만 27년이란 그리 길지 않은 생애를 고통과 고독 속에서 보내다 끝내야 했는데 그렇게 만들었던 주된 이유가 바로 그녀가 글을 읽고 시를 썼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조선 당대의 가장 진보적 지식인이라 할 수 있을 연암 박지원마저도 아녀자에게 시를 허락해서는 안된다고 했을 정도이니 우리나라도 서양만큼이나 여성들에게 책과 글을 허락하지 않은 나라였던 것이다.
크리스티아네 인만은 그런 슬픈 역사를 담는다. 여성들이 그 억압과 속박 속에서 어떻게 지금처럼 자유롭게 되었는지를 책 읽기를 통해 드러내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단순한 서술이 아니라 그림을 통해서 보여준다. 그러니까 고대에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책을 읽는 여성을 그린 그림들의 역사를 통해서 말이다. 때문에 우리는 크리스티아네 인만의 책을 읽으며 새삼 글이 단순히 글이 아님을 깨닫기도 하지만 그림 역시도 단순히 그림만은 아님 또한 깨닫게 된다. 사실 그 전에 우리는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어떻게 역사적 과정을 그림을 통해 보여준다는 것일까? 말해지는 모든 그림이 그런 의도로 그려졌을 리도 없을텐데...'하고 말이다. 그래서 크리스티아네 인만은 말해준다. 그림은 사실 단순한 평면이 아니라 사회의 모든 가치관, 삶의 방식이 하나로 집약된 공간이라고 말이다. 즉 그림은 단순히 하나의 현상 혹은 대상만을 도려낸 존재가 아니라 개인과 사회가 서로 조응하는 가운데 그 시대의 분위기 또는 그 시대의 핵심이 조밀하게 들어간 하나의 응축이라고 말이다. 그래서 오히려 글 보다 그 그림들을 통해 훨씬 더 생생하게 역사적 변화를 느낄 수 있다고 한다. 이 책 '판도라의 도서관'은 그러한 크리스티아네 인만의 생각이 과연 옳다는 것을 똑똑히 보여주는 책이기도 하다.



잠깐 여기서 책이 보여주는 '책 읽는 여성의 그림'에 반영된 여성 자아의 확장의 역사를 간단하게 소개해보자면 먼저 첫걸음이라고 소개된 고대 문명과 중세에 이르기까지는 책 읽는 여성의 그림속에 실제 여성들은 등장하지 않는다. 여기서 주로 나타나는 책을 읽는 여성들은 하나의 모범이 될만한 신화나 성경상의 중요한 인물들 뿐이다. 물론 그 여성들이 보는 책들도 대부분 종교서적이다. 그러니까 이 당시의 책 읽는 여자의 그림들은 실제 생활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여성들에게 어떤 특화된 규범을 전파하기 위해 그려졌다. 여성들에게 신앙과 도덕심을 고취시키는 그런 규범들 말이다. 또한 그 규범들은 그대로 남성에게 여성을 더욱 종속시키는 규범들이기도 했다. 때문에 포즈들 역시 바라보는 시선을 피하듯 살짝 옆으로 돌려져 있다. 그렇게 여기서의 책이란 여성들 스스로 더욱 더 남성 중심의 가치관을 수용하는 하나의 매개였고 순종의 상징이었다. 사실 이것은 그대로 당시의 여성 상황을 정확히 반영하는 것이기도 했다. 중세에 있어 여성들의 책 읽기는 더욱 더 가혹해져 여성들은 수녀원이 아니고서는 책을 읽을 기회조차 없었다고 하니까 말이다.


이야기 속의 여성들이 아니라 실제 여성들이 책 읽는 그림이 전면적으로 나타나는 시기는 16세기였다. 이 책은 16세기와 18세기까지 별도의 한 장을 할애하여 경건과 사치로 그림들을 살펴준다. 이 장의 제목이 경건과 사치인 것은 단적으로 시대에 따라 그 주가 되는 분위기가 확연히 달랐기 때문이다. 그렇게 16세기에 지배적이었던 경건적 분위기는 18세기에 이르러 사치스럽고 화려한 분위기로 변했다.
대표적으로 여기 프랑수아 부세가 그린 마담 드 퐁파두르의 초상화 처럼 말이다.

그 중간에 르네상스가 있었음을 상기해 본다면 이것은 그대로 종교적 굴레에서 벗어나 인간이 좀 더 자유로워진 것과 관련이 있다. 그만큼 여성의 자아 역시도 보다 자유로워지고 개방되어졌다. 16세기의 그림들을 주로 지배했던 성경과 기도서들을 대신하여 18세기에는 미켈란젤로의 글이나 소설 같은 문학작품이나 뉴턴의 이론 같은 학문적인 글까지 나타나게 된다. 당시는 살롱 문화가 지배적이었고 거기서 여성들은 새로나온 책이나 사상들을 자유럽게 얘기할 수 있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이야기도 책도 다양해졌으나 그래도 아직 여성들에게 책 읽기란 자신의 자아를 정립하거나 개인적 욕망을 드러내는 것과 관계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그저 그녀들의 신분을 드러내는 장치일 뿐이었다. 18세기에 이르러 신흥 부르조아지들이 서서히 주류가 됨으로써 교양을 자신의 신분을 드러내는 주된 증표로 삼았기 때문에 그 신분의 여성들을 그리는 데 있어 책이 들어간 것일 뿐이었다. 16세기의 개인의 도덕성, 신앙을 드러내는 책은 이제 그렇게 단순히 신분을 드러내는 도구로 바뀌었다. 따라서 18세기의 그림들에서 책을 읽는 모습은 그리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그저 놓여져 있거나 위의 그림 처럼 들려져 있을 뿐이다.



이러한 책 읽기가 근본적으로 변화를 겪은 것은 19세기에 이르러서였다. 책은 '여성 책을 접하다'라는 제목으로 19세기의 책 읽는 여성의 그림들을 통하여 어떻게 변모했는지를 말해준다. 대표적으로 존 래버리의 오러스 양과 빨간 책이라는 그림이다.



위의 부세의 그림과 비교해보면 19세기의 그림들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확연히 드러난다. 무엇보다 그녀들이 책을 보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도 아주 몰입해서 말이다. 이렇게 19세기의 책 읽는 여성들의 그림은 책에 푹 빠져 있는 여성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녀들의 몰입은 너무도 상당해서 바깥의 세상이 도저히 비집고 들어갈 수 없을 정도이다.
특히나 윈슬로 호머의 '새 소설'은 그것을 잘 보여준다.


그렇게 그녀들은 남성 중심 세상의 굴레에서 벗어나 책 속에서 자신만의 세계를 발견한다. 여기에 이르러 그녀들의 책 읽기는 혼자만의 세계, 즉 자아의 발견이 되었던 것이다. 이제 그녀들은 다른 누구를 위해서가 아닌 자신을 위해서 책을 읽는다. 게다가 18세기엔 그저 신분을 나타내는 하나의 도구에 불과했던 책은 이제 그것을 너머 계급을 초월하여 자아를 발견하는 매개체마저 된다.
윌리엄 맥그리거 팩스턴의 '하녀'라는 그림은 그것을 너무나도 잘 보여주고 있다.

여성들은 이제 그 어디에 있든 책만 읽을 수 있다면 스스로의 세계로 걸어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세종이 말했던 그리고 남성중심의 사회가 두려워했었던 그녀 자신만의 주체를 형성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 더 이상 그녀들은 남성의 시선에 응답하지 않고 조용히 자신이 원하는 곳을 바라볼 뿐이다. 책 읽기는 더이상 자신을 드러내는 특이한 경험이 아니라 어디서나 아무렇게 접할 수 있는 일상이 되었다. 이것은 그대로 여성들이 남성 중심의 가치관에서 해방되어 그만큼 자유로워졌다는 것의 반증이었다.


그렇게 20세기가 오고 이제 여성들은 남성들만큼이나 주체적이고 자유로운 존재가 되었다. 20세기의 책 읽는 여성들의 그림은 그 변화를 너무도 잘 보여주고 있다.
발튀스의 '세 자매'가 대표적이다. 일상의 한 단면을 자연스럽게 담아낸 듯한 이 그림에서 세 여성들은 그 누구의 시선도 의식하지 않으며 자유분방하다. 마치 그녀들을 얽매일 더 이상의 굴레가 전혀 존재하지 않는 듯 하다. 그렇게 20세기의 책 읽는 여성들의 그림은 포즈도 옷 차림도 더 이상 아무런 경계가 없다. 아무데서나 특별한 이유 없이 읽을 수 있게 된 책 만큼이나 그녀들 역시도 자유로워졌기 때문이다.

이렇게 조금은 숨이 가빴을지도 모르겠지만 크리스티아네 인만이 '판도라의 도서관'을 통해 보여주고 싶었던 것을 내 개인의 느낌을 바탕삼아 간략하게 말해 보았다. 너무도 간략해서 얼마나 설득력을 가지게 될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앞에서 말했던 그림을 통해 살펴보는 것이 글을 통해서 보는 것 이상으로 역사적 변화를 잘 목도할 수 있게 해준다는 사실은 어느정도 입증되었으리라 믿는다.(제발 혼자만의 착각은 아니었으면 좋겠다.)


역사학자 E.H 카는 역사란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말했다. 아마도 과거의 사건이 그 과거에서의 어떤 의미를 가졌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현재에 있어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가 더 중요하다는 말일 것이다. 그렇게 크리스티아네 인만이 현재 우리에게 '판도라의 도서관'을 통하여 새삼 여성들의 책 읽기 역사를 펼쳐 보이는 것도 단순히 그 과거의 행적만을 밝혀두려는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크리스티아네 인만을 따라다니며 이 글 서두에 말했던 대로 책이 주는 힘, 보다 근본적으로는 글이 주는 힘이 무엇인지를 똑똑히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20세기에 여성들이 저 해방된 모습을 되찾아 오는 것이 가능했던 건 무엇보다 내내 여성들이 책을 통해 스스로를 발견하고 자신만의 생각과 욕망으로 스스로 세계를 구현해 나갈 수 있었기 때문이란 걸 통해서 말이다. 그런데 크리스티아네 인만은 왜 그런 걸 느끼게 해 주는 것일까? 아마도 그것은 지금도 여전히 우리들이 책 읽기를 계속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독서란 것이 단순히 책만 읽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우리들 자신에게 어떠한 힘 또한 주는지 똑똑히 깨닫게 하기 위해서 말이다. 마치 그 옛날의 여성들 처럼 스스로 세상으로 부터 어떤 속박과 억압을 느낀다면 스스로 자유롭기 위해서라도 책의 도움을 받아보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말하듯이.
그러고보니 생각나는 그림이 있다.
바로 필리프 반 브르라는 여성 화가의 '여성 화가들의 화실'이란 그림이다. 이 책에서 내게 가장 인상 깊었던 그림 중 하나이기도 하다. 반 브르는 이 그림의 중앙에 서 있는 여자에게 헤라클레스의 형상을 취하게 함으로써 완벽한 남성성에 대비와 그 대안처럼 완벽한 여성성을 가져온다. 이것은 한 마디로 남성 질서의 전복이며 그래서 여성 화가들만이 있는 화실은 그녀들만의 온전한 유토피아가 된다. 그 헤라클레스의 형상을 한 여성 아래 한 가운데서 한 여성이 글을 읽고 있다. 아마도 반 브르는 그 중앙에 또한 글 읽는 여성을 배치함으로써 이러한 유토피아를 완성하는데 무엇보다 글이야 말로 필요하다는 것을 역설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아마도 이것이 바로 책이 가진 힘의 궁극적 효과이지 않을까?

크리스티아네 인만의 책을 읽으며 여성들의 책 읽기에 대한 역사 뿐만 아니라 이렇게 다시금 책 읽기의 힘과 그 중요성을 깨닫게 되었다는 것이 내겐 또 하나의 커다란 수확이었다. 글이 주는 자유의 힘과 해방의 힘을 깊이 들이마시면서 마지막 페이지를 덮을 때 느껴졌던 하나의 문장을 마치 방점을 찍듯 다시 확인해본다. '책이 바로 유토피아'라고... 크리스티아네 인만을 통해 들려온 이 말의 울림은 아마도 책을 읽는 앞으로도 내내 메아리처럼 들려올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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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전주곡
나이오 마시 지음, 원은주 옮김 / 검은숲 / 2012년 3월
평점 :
절판


 

   영화 포레스트 검프에서 가장 인상적인 대사를 고르라면 아마도 인생을 초콜릿 상자에 비유한 것일게다.

  '삶은 초콜릿이 들어 있는 상자와 같아서 처음에 맛있는 것만 골라먹으면 맛 없는 것만 남고 말아...' 이것 말이다.

하지만 예외 없는 법칙은 없다더니 그 검프의 현명한 말이 통용되지 않는 곳도 있는 것 같다. 그게 바로 미스터리 분야다. 나는 이른바 1940년대 이전의 클래식 미스터리의 황금기적 대가들은 우리나라에 거의 다 소개된 줄 알았다. 그렇게 그 시기엔 맛없는 초콜릿만 남아있다고 생각했는데 왠걸 아직도 여전히 맛있는 초콜릿이 남아있었을 줄이야!  그것도 상당히 맛있는 초콜릿이!!

 

  그 초콜릿이 바로 나이오 마시다.

  얼른 일본 사람 같은 느낌이 나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뉴질랜드 태생의 어엿한 영국인 여성 작가다. 놀라운 것은 도로시 세이어즈, 애거서 크리스티, 마저리 앨링엄과 더불어 미스터리 황금기를 대표하는 4대 여왕중 한 명이라고 한다. 그 정도 위치에까지 오른 작가인데 왜 이리 생소하기만 한 것일까? 다시 한 번 국내 미스터리의 폭이 좁음을 느끼게 된다. 같은 여왕중 하나인 마저리 앨링엄도 생소하기는 마찬가지라서 더더욱. 그러니까 아직도 맛있는 초콜릿이 남아있다는 사실은 사실 전혀 신기한 것이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애초에 우리에게 주어진 초콜릿 상자 자체가 작았을 뿐이었으니까 말이다. 이런 현실이 좀 서글프지만 그래도 지금 나이오 마시가 소개된 것 처럼 언젠가는 우리가 가진 초콜릿 상자도 일본 못지않게 더없이 커질 수 있기를 미스터리를 사랑하는 팬으로서 소망해 본다.

 

 아무튼 갑자기 그녀의 이름을 거론하게 된 것은 그녀의 1939년도 작품 '죽음의 전주곡'이 국내에 발간되었기 때문이다.

 

 

 

 사진이 조금 흔들려서 알아보기 힘들 수도 있는데 보라색 띠지에 '애거서 크리스티 보다 더 뛰어나다'는 뉴욕타임즈의 평가가 쓰여 있다. 사실 이 말이야 말로 내게 있어서는 무엇보다 죽음의 전주곡을 들춰보게 된 동기가 되었는데 1939년엔 아시다시피 현재까지도 세계 최고의 미스터리로 손꼽히는 애거서 크리스티의 대표작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가 나왔기 때문이다. 물론 뉴욕타임즈가 단순히 그 둘을 비교해서 쓴 말은 아닐테지만  두 작품이 나란히 출간된 것이 1939년이라는 걸 깨달은 나는 어쩐지 이 문구가 아주 의미심장하게 다가오지 않을 수 없었다. 거기다 알고 보니 나이오 마시와 애거서 크리스티는 같이 콜린스 출판사에서 책을 내어 콜린스 크라임 클럽의 간판스타들이었다고 한다. 어쩌면 둘은 라이벌 관계였을지도 모른다. 아마도 띠지의 타임즈 글도 그 관계를 익히 대중들이 알고 있기에 그렇게 써 놓았을 것이다. 그러고보면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가 가진 특유의 연극적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데 그건 나이오 마시에게서 영향을 받은 결과일까? 더구나 같은 해에 나온 '죽음의 전주곡'과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가 공교롭게도 결말 묘사에 있어 유사성을 가지고 있어 묘하게 더욱 의혹을 가지게 한다.

 

 아무튼 곁가지의 이야기들은 이쯤하고 작품으로 들어가려 한다.

 

 공간적 배경은 펜쿠쿠라는 조용한 작은 시골이다. 애거스 크리스티의 미스 마플 시리즈에 흔히 나왔던 배경과 유사하다. 개인적으로 1939년에 이 배경이 사람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졌을까가 궁금해진다. 왜냐하면 1939년 유럽엔 더 이상 이런 조용하고 한적한 시골 마을 같은 것은 존재할 수 없었을테니까 말이다. 1939년은 유럽이 거대한 불길로 곧장 뛰어들고 있는 해였다. 다름 아니라 그 해 9월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역사적으로 유래가 없는 커다란 비극을 낳았던 세계 제 2차 대전이 발발했기 때문이었다. 애거서 크리스티의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는 사실 그 역사적 사건을 기억하고 읽어야만 왜 애거서가 그런 플롯으로 만들었는지 더 잘 이해가 되는 작품이다. 누구보다 시대의 공기에 예민했던 그녀였기에 그녀는 그녀 나름대로 전쟁의 기운을 그리고 그것이 가져올 비극을 작품 속에 투영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나이오 마시는 어떨까? 그녀는 작은 시골마을을 배경으로 삼지만 한정된 공간이란 점에서 애거서 크리스티의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가 배경으로 했던 섬과 닮았다고 할 수 있다. 애거서에게 있어서 그 섬은 그대로 유럽의 은유였다. 거기에 알 수 없는 누군가의 초대에 의해 법망을 교묘히 빠져 달아났던 죄인들이 모이게 된다. 그들은 그대로 저마다 속내를 감추고 있던 유럽 국가들의 의인화된 모습이었고 그들 하나 하나는 인디언 인형의 노래에 따라 말그대로 처형되게 된다. 여기서 인디형 인형은 유럽 자체가 오랜 제국주의로 식민지 수탈에 의해 성립된 유죄의 유산이라는 의미를 드러내는 것이었으며 때문에 사실 처형자의 존재란 그가 가진 직업까지 더해 장차 비밀과 유전된 죄를 가지고 있는 유럽 자체에 처벌을 내릴 신적 존재 그것이었다. 말하자면 벤야민이 클레의 '새로운 천사'에서 보고 있었던 것을 애거서는 미스터리로 형상화해 내었던 것이다.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에 대한 내 해석이 지극히 개인적이고 그래서 또 믿지 못하겠다고 해도 상관없다. 그 작품이 등장한 시대적 배경 때문에 설사 애거서에게 그런 의도가 없었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해석될 수 밖에 없는 것도 또한 사실이니까. 그리고 우리가 바르트에 의해 저자의 죽음이 선언된 이후로 뭐 데리다까지는 끌어들일 필요도 없이 저자가 그 책에서 무엇을 말하려 했는가 하는 것을 더 이상 신경쓰지 않게 된 것도 이미 오래이지 않은가? 그러니 작품은 미스터리에 있어서 탐정의 해결과도 똑같아서 그 해석이 나름 합리적이고 설득력이 있다면  그렇게 의미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거기다 율리시즈를 썼을 때 제임스 조이스가 했던 말 그대로 작품이란 오히려 기존의 의미가 아니라 새로운 의미가 부여될 때 더 생명을 얻는 존재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아무튼 그 해석에 대한 내 개인적 변명은 여기까지 하고 그렇다면 같은 해에 나온 나이오 마시는 어떨까? 그녀가 배경으로 삼은 그 작은 마을도 역시 애거서의 섬과 같은 존재일까? 그리고 거기에 등장하는 여섯 명도?

 

  개인적으로는 확답을 할 수가 없다.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만큼 알레고리가 명확하지 않기 때문이다. 더구나 분위기도 다르다. 애거서의 그 작품이 공포가 기반이 된 음침한 연극에 가깝다면 나이오 마시의 '죽음의 전주곡'은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 스타일의 개성 강한 캐릭터들이 한바탕 벌이는 통속극에 가깝기 때문이다. 나는 여기서 띠지의 뉴욕타임즈 말대로 나이오 마시가 애거서 보다 더 뛰어난 점이 정말 있음을 말해야겠다. 그것은 바로 캐릭터를 빚어내는 솜씨이다. 이것은 정말, 한 작품만 보고 얘기하기에는 정말 무모하긴 하지만, 애거서 이상이다. 그녀의 붓 끝이 그려내는 캐릭터가 어찌나 생생한지 소설을 읽고 있지만 마치 눈 앞에서 연극을 보고 있는 듯한 기분까지 든다. 하지만 정말로 나이오가 뛰어난 것은 상황마다 미묘하게 전개되는 등장 인물들이 가지는 감정의 흐름을 단번에 잡아내어 시각적으로 묘사하는 부분이다. 이것은 마치 내게 그대로 그 장면 안에 들어간 듯 현장감을 주었는데 그래서 노처녀 둘이 서로 전주곡을 연주하겠다고 은밀하게 불꽃티는 공방전을 벌일 때는 박장대소까지 하게 만들었다. 앞서 한 편의 연극이란 말을 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나이오 마시는 추리소설 만큼이나 연극에도 열정을 바친 사람이다. 그 공을 인정받아 애거서 크리스티가 받았던 데임이란 작위까지 영국 여왕으로 부터 수여받았을 만큼 말이다. 그래서인지 장면의 연출 또한 연극을 상연하는 것처럼 시각적으로 세밀하다. 일례로 내가 정말 감탄했던 부분을 한 번 소개해 본다. 이 장면은 이 소설이 해결해야 할 살인이 벌어지기 바로 직전의 장면으로 살인으로 확 폭발되기까지 그 긴장을 응축시켜 나가는 솜씨가 그야말로 절묘하게 수놓아진 장면이다.

 

  캠페뉼러 양(그녀가 희생자다.)이 가슴 부분을 한껏 끌어올리는 바람에 등이 훤이 드러났다. 그녀는 악보에 닿을 정도로 코를 바싹 들이대고 저음부터 왼손을 들렸다. 그리고 건반을 눌렀다.

  빰, 빰, 빰.

 

  길게 인용하고 싶은데 길이상 짧게 인용할 수 밖에 없었다. 아무튼 나이오 마시는 결정적 사건이 일어나는 화음부가 울리기 전에 일단 캠페뉼러 양의 몸을 부풀어 오르게 만든다. 자신을 과시하고 싶은 기대가 이제 촉발되는 순간이니 당연하다. 하지만 나이오 마시는 단순히 캠페뉼러 양의 심리를 전하려는게 아니라 긴장으로 응출될 소실점을 최대한 줄이기 위해서이다. 그래서 동작을 일부러 한껏 늘리는 것이다. 무엇보다 등이 훤히 드러나는 묘사가 인상적이다. 카메라로 찍으면 클로즈 업되어 내면과 바깥의 공기가 여지없이 팽팽해지는 분위기로 연출될 것이다. 마치 풍선이 터지도록 바람이 들어가듯이 말이다. 그리고 마이오는 바로 그녀를 악보쪽으로 기울이게 한다. 코를 바싹 들이대게 함으로써 몸을 한껏 축소시키는 것이다. 일시에 공기가 좁은 틈새로 빠져나가도록 하는 것 처럼 말이다. 그렇게 되면 대기의 속도는 빠르게 되고 고양된 분위기가 삽시간에 작게 응축되면서 주위의 긴장도는 더 높아진다. 그리고 운명의 전주곡이 울린다. 마치 폭발을 위해 시한폭탄의 초침이 돌아가듯... 제대로 전달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이오는 이렇게 최고조의 긴장을 위해 정확히 시각적인 묘사를 독자에게 줄 수 있는 작가다. 그것도 군더더기 없이 딱 필요한 장면만을 몽타쥬하듯이 말이다. 이런 면에서 그의 문학적 연출력과 연극적 연출력이 비등점에 있음을 느끼게 된다. 무엇보다 그녀 작품의 이러한 뛰어남은 그것들의 상호작용으로 이루어졌을 것이다.

 

 이 모든 생생한 묘사에다 질투와 원망 같은 생생한 인간의 감정이 더해져 '죽음의 전주곡'의 미스터리는 속도를 얻게된다. 전개의 빠름이 아니라 인간들의 맞부딪히는 가운데 일어나는 긴장감들이 속도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애거서가 비밀로서 현 유럽을 드러냈다면 어쩌면 나이오는 질투와 원망으로서 현 유럽을 드러내는 것이 아닐까? 바로 그 감정이 애거서가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를 통하여 내린 유럽의 논평 처럼 나이오 마시가 내린 논평 같은 것은 아니었을까 생각해보게 된다. 왜냐하면 헨리와 그 아버지 사이에서 드러나듯이, 또는 결정적으로 범죄를 결심하게 된 장면에서 드러나듯이 대부분 그 질시와 원망이 소통 불가능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등장인물들 모두는 서로가 보고 싶은 방향으로만 바라보고 남들은 어떻게 볼지를 관심두지 않는다. 더구나 그러한 편견의 시야들이 소문으로까지 확장되어 마을 전체에다 상처의 비수들을 던진다. 각자의 이해관계에 골몰하느라 타인은 어떤 상처를 안고 있는지 어떤 고통을 껴안고 있는지 보려하지 않는 이 펜쿠쿠의 모습이 바로 나이오 마시가 내렸던 당시 유럽에 대한 논평은 아니었을까? 때문에 탐정 역할을 하는, 그리고 나이오 마시가 평생에 걸쳐 써 온 시리즈의 주인공이기도 한 수사관 앨린 경감이 자신의 단 하나 뿐인 연인인 트로이에게와의 연서(앨린이 트로이와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는 바로 이 전작에 나온다고 한다.)에 담긴 내용이 의미심장해지는 것 같다. 거기서 앨린이 보여주는 태도는 한결같다. 타인의 입장에서 바라보려 하는 것. 아니, 사실 수사 자체가 그런 것이기도 하다. 앨린이 늘 하듯이 타인의 입장이 되어, 사물의 입장이 되어 헤아려 보는 것. 결국 사랑으로 수사로 유일하게 소통의 노력을 보여주는 앨린은 사건을 해결하고 저마다의 이해관계로 혼란스러웠던 펜쿠쿠에 다시금 질서를 가져다 준다. 아마 바로 이것이 나이오 마시가 현재 유럽에게 보내는 메세지이기도 할 것이다.

 

 전혀 미지의 작가였지만 이 작품은 정말 의외의 만족을 가져다 주었다. 말했던 바와도 같이 애거서의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만큼 선명하지는 않았지만 당시 유럽의 불안한 현재에 대해 나이오 마시만의 전언 또한 느껴졌기 때문에 더욱 마음에 들었다. 나이오 마시의 대표작은 1935년에 나온 두 번째 작품 부터라고 하는데 '죽음의 전주곡' 때문에 한껏 고양된 그녀에 대한 기대로 인해 그 작품들 역시 모조리 읽어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다. 차후에 꼭 다시 만나게 되길 빈다. 그 때까지 오래도록 뇌리에 단단히 새겨두어야겠다. 나이오 마시라는 이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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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 2012-03-30 2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헤르메스님 오랜만이에요! 저도 오랜만에 들어와서 딱히 할믈은 없다 말이지만요. 감기 몸살은 어때요? 좀 괜찮아지셨으려나. 저는 순오기님께서 배즙도 보내주시고 하셨는데 날이 가면 갈수록 심해져서 오늘은 잠깐 학교에서 나와서 링거주사를 한시간동안 맞았어요. 이번달만 두번 맞는건데 제 생애 링거 맞는 날이 올줄은 상상도 못하고 살았답니다. 감기로 나오던 목소리까지도 잘 안나오고 요새 죽을맛이에요. 그래서 글도 뜸해지고... 마지막글이 이주전이었으려나 ㅠ 헤르메스님, 그러고보니 <채홍> 리뷰도 쓰셨다면서 왜 안올리시는 거에요! ㅠㅠㅠ

ICE-9 2012-03-31 00:12   좋아요 0 | URL
와! 소이진님 정말 반가워요!! 저도 아팠지만 소이진님도 정말 많이 아팠군요. 감기 몸살은 이미 예전에 지나갔지만 그런데 이런 소이진님은 이번 달만 링거가 두 번이라니... 안 그래도 요즘 환절기 감기가 참 지독하더라구요. 아무 생각 마시고 편히 쉬면서 빨리 건강을 되찾길 바라요. 제가 소이진님을 위문하는 차원에서 채홍 리뷰도(부끄러운 글이지만) 바로 올려놓겠습니다.^ ^
 
폴 존슨의 예수 평전
폴 존슨 지음, 이종인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2년 3월
평점 :
절판


 

 

 

  성경은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베스트셀러이지만 또한 가장 읽히지 않은 책이라고 한다. 이 같은 상황은 아마 예수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다. 예수는 세계 4대 성인중 가장 첫 손가락에 꼽히는 존재이지만 막상 그 존재가 걸어온 삶에 대해 아는 자는 그리 많지 않을 테니까 말이다. 그것은 그의 생애를 담은 기록이 고작 네 개의 짧은 복음서 밖에는 없어서이기도 하고 또한 그 복음서가 많은 부분 비유와 암시로 이루어져 있어서이기도 하다. 게다가 공식적인 전기라 할 수 있는 4복음서마저 서로 일치하지 않는 부분들이 있고 또한 모두 생애를 상세히 기록하기 보다는 중요한 사건들만 나열한 것일 뿐이어서 얼른 읽는 이로선 전체적인 줄기를 잡기가 대단히 어렵다. 그래서 대부분 우리가 아는 것은 유명한 단편적인 사실들 뿐인 경우가 많고 예수의 말 또한 맥락과 상관없는 파편적인 것일 뿐일데가 많다. 게다가 예수가 자신의 사상을 설파하는데 있어서 주요한 방법들이었던 비유와 암시 때문에 그 말의 알쏭달쏭함으로 총천연색으로 인상이 잡히기도 전에 벌써 흐릿해지고 만다.

 

  아마도 그래서 예수에 대한 전기가 역사에 걸쳐서 그토록 많이 나오고 있는지 모른다. 또한 그토록 다양한 시각으로 예수의 인생이 말해지고 있는 지도 모른다. 사실 예수의 일생이란 공식적인 주요한 사건들로만 층층히 쌓아올린 탑과도 같은데 사실 그 탑의 이음새가 그리 탄탄하지는 않다. 그나마 4복음서만이라도 일치를 보이면 괜찮을텐데 복음서의 저자들 자체가 자기 시각으로 편중된 서술들을 하고 있어 차이가 보이는 더 헐거워 보인다. 말하자면 지금 우리에게 있어 예수의 생애란 장님 코끼리 만지기와 같다는 것이다. 장님들도 코끼리를 만지면 대략적인 다리나 몸통 코 상아등은 알 수 있다. 바로 그것이 우리가 4복음서를 통해 알 수 있는 단편적인 사건들이다. 하지만 코끼리 전체를 알기 위해선 그 사건들만으로는 부족한다. 예수는 무엇보다 메시아이고 그가 메시아답기 위해서는 그 모든 사건들이 그의 온전한 뜻 안에 자리잡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사건 자체가 아니라 왜 그 사건이 하필 거기서 일어나야 했느냐 하는 그 의미가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신앙이란 이적이나 행위를 믿음이 아니라 그 모든 것의 바탕이 된 '뜻' 혹은 '신념'을 믿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할 때 단순히 그 존재만이 아닌 '인격적' 존재를 강조하는 것도, 그 인격에서 발현된 '사랑'을 강조하는 것도 그 까닭이다.

 

 때문에 의미가 중요하다. 하지만 의미란 해석의 문제라서(특히나 주된 방법이 비유와 암시라면 더욱 그렇다.) 결국 저마다 자신이 무슨 색안경을 쓰고 있느냐에 따라 달리 보일 수 밖에 없다. 해서 우리는 아주 많은 다양한 시각의 예수의 생애에 대한 판본을 가지고 있다. 비근한 예로 진보주의적 입장에서 바라본 김규향의 '예수전'이 있는가 하면 성인의 색채를 모조리 탈색해 버리고 온전히 인간적으로만 해석한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도 있다. 예수가 십자가를 질 때 느꼈던 고통을 가감없이 전해주는데 주력한 멜 깁슨의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가 있는가 하면 중요한 건 예수의 말과 행위를 통해 자신의 신념과 태도로 본받을 것인가 말 것인가라는 결단이 중요하다며 오로지 그 결단을 촉구하는 역사적 사실만으로 써내려간 독일의 신학자 불트만의 '예수'도 있다.

 

 그렇게 우리는 지나온 역사만큼이나 다양한 예수의 모습들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각각은 예수가 남긴 파편된 진실들이며 우리가 온전한 예수상을 만드는데 있어 필요한 조각들이다. 그러니 예수에 대한 이야기들은 많으면 많을 수록 더 좋다.(물론 그것들이 타당하고 상식선에서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경우에 한해서 말이다.) 더 다양한 시각들로 이루어진 더 많은 블럭들로 더 풍요로운 예수의 상을 만들 수 있을 테니까...

 

 의미란 언제나 고정되어질 때 문제가 발생했다. 왜냐하면 특히나 종교에 있어 그 고정이란 게 원래 성경의 뜻이 아니라 그 고정을 통해 떡고물을 챙기고 싶은 자들에 의해 행해질 때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재물이든 권력이든 말이다. 그래서 말씀의 해석에 대한 주권 또한 중세의 교부들에서 부터 지금의 목사들에게 이르기까지 소수의 전유물이 되었다. 그들이 진리를 알 수 있어서가 아니라 재물이든 권력이 거기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진실을 말하자면 우리는 진짜 예수를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해석한 그래서 그들이 원하는 예수를 보고 있는 것 뿐이다. 마치 우리는 그들이 의도대로 편집한 예수 전기 영화를 보고 있는 것이나 같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늘 성경 자체에로 돌아가자고 말한다. 그들이 권위로서 내세우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말씀을 묵상하고 먼저 자신이 그 의미들을 깨우치기 위해서. 일종의 의미의 민주화를 가져오는 것이다. 어차피 예수의 생애와 말씀은 모두 비유와 암시이다. 이 말은 그 어떤 해석도 권위를 가지기가 어렵다는 말도 된다. 모든 건 설득의 대상이 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니까 예수가 한 행동이나 말씀에 대해 저마다 각자가 찾은 의미가 있다는 전제를 깔고서 말이다. 우리는 그러한 가운데 타인의 예수상을 포용하고 더 타당해 보이는 것을 찾아 증축해나가는 것이다. 그렇게 신앙의 대상에 대한 해석은 사실 증축이며 대화인 것이다.

 

 

 

 오랜만에 예수의 삶에 대한 책을 읽었다. 개인적으로 차상엽 신부의 '잊혀진 질문'을 읽고서 새삼 다시 내 신앙의 대상이었던 예수를 더 잘 알고자 하는 바람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마침 폴 존슨의 '예수 평전'이 발간되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폴 존슨의 예수 평전은 부제가 신자가 쓴 전기다. 폴 존슨은 로마 카톨릭 신자이고 마거릿 대처의 고문으로도 일한 적이 있는 그러니까 보수다. 나는 이 책을 좌파 철학자로도 유명한 알랭 바디우의 책 '사도 바울'의 반대편 입장의 책이라 생각하고 읽었다. 아시다시피 바디우는 바울만이 실존 인물이고 예수는 그가 창조해낸 인물이라 본다. 그러니까 예수의 일대기는 바울이 지향하는 이상적 사회를 현실적으로 구현하기 위한 하나의 이데올로기였다는 것이다. 물론 나는 그것을 읽으며 그것 또한 타당하다고 생각했다. 바디우의 논리에 설득당하지 않기란 심히 불가능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 반대의 입장은 어떨까 싶어 온전히 실존으로서 믿는 폴 존슨의 책을 선택했다. 말하자면 나는 그렇게 대척점에 놓인 그 둘의 대화를 통해 나만의 예수의 상을 만들어보려 한 것이다. 다행히 바디우의 책이나 존슨의 책이나 분량이 많지 않았다. 사실 예수의 생애에 대한 책은 그리 분량이 많지 않아서 다행스런 사실이기도 하다. 그래서 다양한 시각으로 보다 더 풍성해지는 예수의 상을 홀로 손쉽게 만들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나 개인적으로는 이런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개인적이라는 말에 방점을 찍어두고 싶다.) 존슨도 말하고 있지만 예수는 군중을 상대해도 말씀은 꼭 개개인에게 했다고 한다. 그만큼 사실 신앙이란 지극히 개인적인 행위이다. 하나님과 나와의 다이렉트한 일대일 관계가 전부인 것이다. 불트만은 그래서 더욱 결단을 강조한다. 나는 그 누구도 아닌 하나님 앞에 있고 그러니 그 누구의 눈치도 아닌 오로지 하나님 앞에 내보일 순전한 결단만이 요구될 뿐이라고 말이다. 날 전도한 이가 내 신앙을 대신해 주는 것도 아니고 목사가 내 신앙을 대신해주는 것도 아니다. 신앙은 오로지 나만의 몫이며 그래서 내가 찾아내는 예수의 모습, 의미가 중요한 것이다. 그 외의 것들이란 다 참조가능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도 참조가능한 것이 많으면 많을수록 우리는 좀 더 타당하고 합리적인 예수의 의미에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거기로 다가가는데 있어 폴 존슨의 '예수 평전'도 좋은 징검다리가 되어 주었음을 밝혀두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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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일드 파이어 -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5-4 존 코리 시리즈 4
넬슨 드밀 지음, 김홍래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2년 2월
평점 :
절판


 

 

 

 

 

  때로 선입관이란 얼마나 무참하게 깨어지는 것인가?

 

넬슨 드밀의 '와일드 파이어'를 읽고나면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을 막을 수 없다.

이 책은 여러가지로 내가 읽기전에 가졌던 생각들을 뒤집었다. 도심 한 가운데 핵폭팔로 인한 버섯구름이 그려진 표지로만 보자면 이 소설은 분명 빈스 플린의 '임기 종료' 아니면 인기 미국드라마인 '24시' 인 것만 같다. 그만큼 정부를 전복하거나 인류를 위협하는 압도적 사건들이 잇달아 터지고 그것을 막기위한 주인공들과 그 주인공들을 막기 위한 악인들의 악전고투가 쉴 새없이 종횡무진 이어지는 그런 스타일의 작품 말이다.

 

그의 전작 '플럼 아일랜드'와 '라이언스 게임'을 읽어보지 못했기에 확언할 수는 없지만 나는 넬슨 드밀이 90년대 한창 유행했던 아놀드 슈왈츠제네가나 브루스 윌리스가 나왔던 그런 액션 무비의 소설판 같은 것으로 생각했다. 무엇보다 주인공 존 코리 형사가 마초 스타일로 종종 소개되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런데 정작 읽었더니 이런 왠 걸 그 모든 나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가고 말았다.

 

넬슨 드밀의 '와일드 파이어'는 사실 아주 기묘한 구성을 가지고 있다. 아마도 당신도 이 소설을 읽게 되면 그리고 끝까지 읽어보면 뭔가 다른 것들과는 다르다는 위화감을 분명 가지게 될 것이다. 이 소설과 가장 닮은 작품이 있다면 그건 무엇일까? 그건 이 소설에서도 직접 언급되지만 스탠리 큐브릭의 '닥터 스트레인지 러브'다.

 

 

   미국과 소련간 전면 핵전쟁이 일어나기까지의 과정을 그리고 있는 이 블랙코미디는 정작 핵전쟁  을 둘러싼 정황을 그리지만 그 어떤 액션신도 서스펜스도 보여주지 않는다. 스탠리 큐브릭이 이 영화에서 담아내는 것은 다만 그것을 둘러싼 지리한 논쟁 뿐이다. 큐브릭이 그것을 통해 보여주는 것은 지구의 종말마저 가져오는 이 중대한 사건이 알고보면 뚜렷한 계기나 합리적 사고도 없이 아주 우연적인 계기로 그것도 아주 이기적이거나 어리석음 가운데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한심하게 찾아온다는 것이다.

 

  넬슨 드밀의 '와일드 파이어'도 그와 비슷하다. '와일드 파이어'란(정말 이런 프로그램이 있는가 싶어 찾아봤는데 정보습득능력의 한계 탓인지 사실인지 아닌지는 확인할 수 없었다.) 중동으로 부터 핵공격이 있을 경우 자동적으로 그 중동에다 핵공격을 퍼붓도록 하는 프로그램이다.(때문에 중동의 테러리스트들은 미국에 핵공격을 감행할 수 없다고 한다. 이것은 냉전시대 미국과 소련 모두에게 핵억지를 가져왔던 'MAD(상호확증파괴) 프로그램'과 비슷하다. 여기서 MAD란 쉽게 말하자면 너희가 핵을 쏘면 우리도 무조건 가지고 있는 핵을 다 쏜다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상대방은 핵을 쏘기 전에 반격으로 날아올 무수한 핵폭탄을 두려워할 수 밖에 없고 따라서 핵공격을 주저하게 만든다.  이 MAD가 어떻게 유효한 핵억지 결과를 가져올 수 있었느냐에 대해서는 존 내쉬의 '수인의 딜레마'가 잘 보여준 바 있다.)

 

 

넬슨 드밀은 이러한 핵공격 프로그램을 전면에 내세우면서도 그 소재로 인해 우리가 가지게 될 전개에 있어서의 기대를 그 어느 하나도 이루어주지 않는다. 핵폭팔을 앞두고 전개되는 서스펜스도 총탄들이 마구 쏟아지는 총격전이나 추격전 조차도 나오지 않는다. 더구나 배경 조차 도심이 아니라 어디 먼 한적한 시골 숲이다. 핵이라고는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 공간에서 핵을 소재로 한 소설이라고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전개로 드밀은 독자들을 마치 이상한 나라에 빠져버린 앨리스로 만든다.

 

그러면서 그가 정작 보여주는 데 주력하는 것은 이상한 나라에 빠져버린 앨리스가 만난 티 테이블에서의 모자장수와 그 친구들이 벌이는 알 수 없었던 대화 처럼 미국이 과연 핵보복을 해야 하느냐?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함무라비 법전부터 이어져 온 '렉스 탈리오'를 관철시키는 게 과연 옳으냐를 둘러싼 논쟁들 뿐이다. 아마도 우리는 여기서 '이건 뭥 미?'와 같은 반응을 할텐데 그러기 전에 먼저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이를테면 무협이란 장르에서 두 협객이 서로 합을 이루는 두 개의 검술은 그 자체가 몸으로 실어보내는 서로에게 건네는 대화라는 사실이다. 즉 우리가 말로써 하는 대화를 협객은 검으로 나눈다. 그래서 무협의 대가 김용은 화산에서의 무예 겨룸을 '논검(論劒)'이라 고 표현한 것이다. 그러니까 드밀도 이와 마찬가지라는 사실이다. 그가 핵을 소재를 다루면서도 우리가 예상했던 모든 전개를 뒤엎는 것은 사실 그걸 보여줄 필요가 없어서이다. 왜냐하면 이 소설에서 벌어지는 논쟁 자체가 그들이 언어로서 주고받는 총격에 다름아니기 때문이다. 드밀의 '와일드 파이어' 에서는 언어들이 총알의 역할을 대신한다. 그들의 말이 신체에 가하는 고문을 또한 대신한다. 그만큼 이 소설에서는 물리적 공격이 중요한 게 아니라 신념이, 그리고 그것이 바탕이 된 태도가 중요하다. 이 소설은 두 협객이 검에다 신념을 실어 합을 펼치듯 그렇게 신념과 신념이 맞부딪히는 소설이다.

 

드밀은 왜 이렇게 표현했는가? 물론 여기에는 이유가 있다. 바로 이 소설이 그 무엇보다 9.11을 겪은(그것도 바로 얼마전에 가까운 지인들을 피해자로 둔!) 미국을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드밀이 이 소설에서 하고자 하는 것은 최종적으로 9.11이 미국에게 어떤 의미인가 하는 것을 묻는 것이다. 그것은 억울한 피해인가 아니면 그동안의 죄의 대가인가 또한 그는 묻는다. 이 치유될 수 없는 상처를 안은 미국은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  렉스 탈리오의 법칙을 따를 것인가? 아니면 먼저 스스로를 성찰하고 이런 비극을 되풀이되지 않도록 대승적으로 타자를 껴안을 것인가?

 

언뜻 봐서 마초스럽고 소설 자체에 어쩌면 과잉으로까지 여겨지는 성적 농담으로 가득차 그지없이 가볍게 보여졌던 이 소설은 그렇게 사실은 아주 깊숙한 곳에서 뜻밗의 거울을 스스로에게 비춰보이고 있었다. 논쟁 자체가 하나의 거울이었다. 그 어느 것으로도 결론나지 않아서 당신이 스스로 판단할 수 밖에 없기에 스스로의 모습만이 비춰질 뿐인 그런 거울이었다. 바로 그 거울에 비쳐질 당신의 모습, 당신의 진실은 어떤 것인가? 드밀은 바로 그것을 마지막의 마침표 처럼 묻고 있었다.

 

해서 이 소설은 본질적으로 하드보일드 스타일의 사립탐정의 외양을 취한다. 전작을 읽어보지 못했기에 존 코리가 전작에서도 그랬는지 아니면 과연 이 소설에만 그런지 확언할 수 없지만 차량이 뒤집히고 무차별 총격을 가하리라 보였던 존 코리가 보여주는 건 그래서 탐문과 고찰 뿐이다. 그는 끊임없이 묻고 돌아다닌다. 하나의 죽음이 초래된 그 진실을 찾아서... 9.11에 희생된 사람들의 숫자에 비해 한 사람의 죽음은 미미하지만 드밀에 있어서는 그 하나의 죽음과 9.11에 희생된 사람의 죽음은 똑같아 보인다. 결국 목숨의 크기를 비교하는 것 자체가 바로 9.11의 비극을 가져오는 근본적 원인임을 아는 까닭이다. 탈무드의 말 그대로다. '한 사람을 죽이는 것은 전 우주를 죽이는 것이고 한 사람을 살리는 것은 전 우주를 살리는 것이다.' 바로 그 이유로 드밀은 존 코리가 사립탐정의 역할을 맡아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더구나 다른 이유로도 이 탐정의 외양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사립탐정은 무엇보다도 변화의 관찰자이기 때문이다. 레이먼드 챈들러 이래로 사립탐정들은 '세상이 왜 이렇게 되어버렸지?'에 대한 의문을 풀기 위해 탐문하고 추적을 해 왔다. 바로 그 이유로 '와일드 파이어'에서 9.11 이라는 커다란 상처가 가져온 미국의 변화를 그리는 드밀에겐 사립탐정은 그야말로 적역이었을 것이다.

 

당신이 가지게 될 진실에 대하여 배려하는 의미로 이 이상 소설에 대한 얘기는 하지 않으려 한다. 그냥 개인적인 느낌만 에필로그 처럼 붙여놓도록 하자. 꽤나 화끈한 스타일이 아닐까 예상했었던 넬슨 드밀의 '와일드 파이어'는 의외의 곳에서 문득 마음의 수면 밑을 헤아려 보게 만드는, 그렇게 겉보기와는 다른 진지한 작품이었다. 이 소설의 반 이상이 존 코리의 빈정거리는 농담으로 채워져있다고 해도 말이다. 니체는 사람은 그 무엇보다 슬픈 동물이기에 웃음을 발명할 수 밖에 없었다 라고 했는데 내겐 존 코리의 빈정거림이 그렇게 보였다. 사실 9.11 이란 그 거대한 비극을 앞에 둔 자들이 할 수 있는게 무얼까? 우리는 또한 종종 보지 않았는가? 너무 맞딱드린 비극이 압도적이면 스스로도 감당이 안되어서 자신도 모르게 실실 웃을 수 밖에 없는 것을... 때문에 내게 그의 빈정거림은 상처의 반어법적 표현으로 보였고 그래서 소설 자체엔 마치 그 빈정거림 그대로 무수한 생채기가 나 있는 듯도 했다. 지금까지 9.11의 상처를 다루고 있는 작품을 참 많이도 보아왔다. 대표적으론 폴 오스터의 '보이지 않는'이 있었고 최근의 영화 '머니볼'에서 조차 그 상처의 흔적은 묻어나 있었다. 그런데 스릴러로서는 처음이었다. 어쩌면 스릴러야 말로 그 소재 때문에도라도 가장 먼저 나왔어야 할 장르인지도 모르는데... 이 소설은 2006년에 나왔다. 시기로 보자면 좀 늦은 편인데 그만큼 아픔을 객관화하기 위하여 숙성할 필요가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그런 소설이다. 당신을 홀연히 그 그라운드 제로의 자리로 데려가는...

 

들으려는 귀가 있는 자만이 제대로 들을 수 있는 소설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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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2-03-20 1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를 읽어보는데요,
이 책은 읽어야만 하는 책이나, 그다지 읽고 싶어지지 않는 소설이겠는걸 하는
생각이 떠오르는걸요... 맘이 엄청 불편할거 같아요. 그런거 있잖아요, 진실에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점점 더 몸둘바를 모르겠는 그런거, 글에서도 쓰셨지만, 감당이 안 되면 실실 웃게 되는거... 이 책이 그런 느낌일거 같아요.... 음, 망설이는 중입니다...

하지만 좋은 페이퍼라서, 역시, 헤르메스님의 페이퍼니까 이런 느낌을 생생하게 전달해주시는구나 싶습니다............ 아, 저는 도저히 지금 이런 페이퍼는 쓸 수 없어요, 생각해보니 원래도 못 썼군요.... ^^

ICE-9 2012-03-20 23:03   좋아요 0 | URL
마녀고양이님 느낌이 아마도 정확하실듯 싶어요^ ^ 사실 이 책엔 많은 성적 농담이나 빈정거림이 있는데 저는 그걸 상처의 반어법으로 해석했지만 읽기에 따라선 굉장히 불편할 수도 있거든요. 여성분들에겐 특히 좀 더 그럴 것 같아요. 저도 물론 이 작품으로 처음 만났습니다만 넬슨 드밀 자체가 호불호가 선명히 갈리는 그런 작가인 것 같더군요. 하지만 9.11 자체를 직시하려는 태도는 좋았습니다. 그런데 그게 아주 교묘하게 위장되어 있어서(이를테면 미국의 대 이라크 보복전에 프랑스가 취했던 태도를 프랑스 출신 요리사로 은근히 묘사한다던지...) 9.11 이후 미국과 국제 정세에 대한 이해를 조금 필요로 하는 면도 있더라구요. 아무튼 저는 추천에 있어 참 조심스럽네요^ ^; 그리고 아유~ 마고님 그런 말씀마세요. 제가 얼마나 마고님 페이퍼에서 스스로 생각할 계기를 많이 가지는데요. 저도 그런 글을 쓰고 싶은데 저는 정말 안되더라구요 ㅠ 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