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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자 잔혹극
루스 렌들 지음, 이동윤 옮김 / 북스피어 / 2011년 11월
평점 :
절판


 

 

   1. 무정한 당신이 끝내 남기고 싶은 것은? ...

 

 

  다작으로 참 유명한 작가이지만 상대적으로 우리나라에는 소개된 작품이 별로 없는 영국의 여류 작가 루스 렌들은 무엇보다 심리적 묘사로 이름이 높다. 아마도 그녀의 대표작이자 추리 문학에 있어서는 최고의 영예라고 할만한 골든 대거상도 수상했던 '내 눈에도 악마가'란 작품을 읽어보셨다면 이런 내 말이 쉽게 수긍되지 않을까 한다. 이 작품이 그토록 높은 평가를 받게 된 것 역시 그 작품에서 보여준 타인들의 눈을 끔찍할 정도로 신경쓰는 한 소심한 범죄자의 내면에 대한 그 세부에 이르기까지 집요할 정도로 언어로 모조리 담아내는 탁월한 묘사에 있었으니까 말이다.

 

 

  공교롭게도 '내 눈에는 악마가'가 나온 76년 이듬해, 그러니까 77년에 나온 지금 얘기하려는 이 작품 '활자잔혹극'의 범죄자 '유니스' 역시 바로 전작의 범죄자 아서와 많이 닮아있다. 아서와 마찬가지로 끊임없이 주위에서 자신을 어떻게 볼까 신경쓰는 것이다. 나란히 나온 작품들이라 어쩐지 '소심증' 시리즈 연작으로도 보일 지경이다. 소설은 그 이유를 첫 머리에서 단적으로 밝힌다. 유니스, 그녀가 글을 모르기 때문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자신이 글을 모른다는 사실을 남에게 들키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니스는 아서와는 달리 주위의 시선을 신경쓰는 부분이 한정되어 있다. 그러니까 글자를 모른다는 부분에 있어서만 남들의 눈을 신경쓸 뿐 그 외 다른 모든 것에 있어서는 전혀 신경쓰지 않는다. 너무나 신경쓰지 않아서 어떤 이들은 섬뜩하다고까지 말한다. 이 책의 제목이 원래 제목과는 다르게 '활자잔혹극'인 이유도 유니스가 가지는 두려움이 오직 글자에만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작 소설은 유니스가 왜 글을 모른다는 사실을 남들이 알게되는 걸 그토록 두려워하는지 속시원히 밝히지 않는다. 그 때문에 일가족 네 명을 살해하게 되는데도 렌들은 그 이유에 대해 짐짓 모른체 한다. 하긴 '내 눈에도 악마가'에서도 그랬다. 아서가 그토록 소심증을 가지게 된 이유를 밝혀주지 않았다. 그래서 렌들은 내게는 '활자잔혹극'에서 그 어떤 미사여구나 감정이입 없이 마치 할 말만 하는 불친절한 가게의 아줌마처럼 아주 건조하고 무심하게 툭툭 내던지듯 써내려가는 그녀의 문장 만큼이나 무정한 작가로 보인다.

 

 

  내가 그녀에게 "왜 유니스가 이토록 자신이 문맹자라는 사실을 두려워하죠?"하고 묻는다면

렌들은 100% 이렇게 대답할 게 틀림없다. "꼭 이유를 알아야 하나? 그렇게 생겨먹은 걸 어떡하라고... 세상엔 설명되지 않는 것들이 너무나 많아. 유니스도 그런 존재라고 그냥 생각하면 안될까? 그냥 현실로 받아들이라구."

 

 

  건조하고 투박하고 자신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에 대해 아무런 애정마저 없어서 무정한 그녀의 문장 때문에 자꾸만 '킬러들'의 헤밍웨이가 떠오르기도 하는 '활자잔혹극'은 하지만 그 건조하디 건조한 외형에 비해 그 깃든 내용에 있어서는 참으로 이래저래 할 말이 많은, 그 다양한 해석의이채로움으로 풍성한 작품이다. 

 

 

 

 

  이미 이 책 말미에 달린 해설에서 장정일은 유니스의 '문맹'을 가지고 '문맹이 결과하는 사회기술적 곤란만 아니라, 문맹이 인격적 형성에 미치는피해' 를 얘기하고 1995년 이 소설을 가지고 '의식'이란 제목으로 영화를 만들었던 끌로드 샤브롤 역시 커버데일과 유니스의 관계를 부르조아 계급 대 노동계급의 갈등이란 관점에서 아주 흥미롭게 보여준 바 있다.(사실 처음엔 '활자잔혹극'을 이렇게 유니스의 점증하는 계급의식에 맞추어 쓰려 했으나 끌로드 샤브롤의 영화를 보고 포기했다. 장정일은 해설에서 이 영화가 소설이 가지는 세부적 장점들을 많이 놓치고 있다고 평했으나 그건 소설이 영화로 옮겨올 때 흔히 가지는 일반적 한계에서 오는 보편적 문제일 뿐이고 '계급'적 관점에만 천착해 본다면 영화적 묘사가 소설 보다 훨씬 뛰어나다.) 때문에 이 책에 대해 이미 한 얘기를 하기 보다는 나 자신이 찾아낸 것으로 쓰는 게 혹시나 이 글을 읽으실 분들의 시간 낭비를 막는 길이기도 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물론 이 글이 이 책에 대한 해설 같은 것은 아니지만) 해서 그렇게 나가보려 한다.

 

 

 

   2.  데리다의 그라마톨로지를 자기만의 방식으로 다시 써 보고자 함이었나? ...

 

      '말-중심주의' 에서 '활자-중심주의' 로

 

 

  이 책이 가지는 내용에 있어서의 다양함은 어쩌면 그 출발에 있어서는 단순하지 않을까 싶다. 즉 '유니스의 '문맹'을 어떻게 볼 것인가?' 그것이다. 그렇게 장정일 처럼 '문맹'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 해석할 수도 있고 끌로드 샤브롤 처럼 하나의 은유로 받아들여 부르조아 계급의 이데올로기에 지배받지 않은 노동계급만의 독자적 이데올로기로 바라볼 수도 있다. 그렇담, 나는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나 역시 끌로드 샤브롤 처럼 하나의 은유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그 내포된 의미는 다르다. 그러니까 나는 그것을 데리다가 전통적 서양 형이상학의 토대라고 말했던 '말-중심주의'의 은유로 받아들인다.

 

 

  흥미롭게도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유니스의 '문맹'과 커버데일 일가의 '활자'의 대립이 데리다의 '그라마톨로지'에 나왔던 '말 중심주의'와 '활자 중심주의'의 대립으로도 얼마든지 읽힐 수 있음을 발견했다. 무리일지도 모르지만 나 자신 발견했던 데리다의 '그라마톨로지'적 독법이 설득력을 가진다면 앞서 말했던 '활자잔혹극'에 깃들인 내적인 해석의 풍부함에 대한 충분한 방증이 되지않을까 하여 그것을 위해서라도 한 번 나만의 독법을 시전(始展)해 볼까 한다.

 

 

   짧은 리뷰로 데리다의 논의를 다 담기엔 무리가 있으므로 스케치하듯 간략하게 넘어가는 것에 조금 양해를 먼저 구해두고 싶다. 아무튼 데리다가 전통적 서양 형이상학의 토대에 왜 말 중심주의가 있다고 한 것일까? 그것은 무엇보다도 서양 형이상학이 내내 진리를 추구해왔기 때문이다. 진리란 무엇인가? 단순히 말하자면 '참-실재'이다. 진짜로 존재하는 것. 그렇게 '아르케'의 추구로 부터 기원되는 서양 형이상학은 내내 진리란 이름으로 진짜 존재를 찾아왔었다. 그런데 진짜 존재란 무엇인가? 가상이 아닌 것. 플라톤에 의하자면 우리의 감각이 만들어낸 허상이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허상이 아닌 것이 있을 수 있을까? 그리고 그것을 찾을 수 있을까? 고대인들은 생각했고 그래서 찾았다. 바로 소크라테스가 '다이모니온'이라 불렀던 것. 그렇게 '양심의 소리'였다. 즉 고대인들은 생각했다. 내 양심 혹은 내 내면에 직접 들려오는 소리야 말로 '참-실재'가 아니겠느냐고. 왜냐하면 그 순수 내면에서 이루어지는 '말하고-듣는' 과정에서는 그 어떤 감각적 왜곡이 끼어들 틈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고대인들은 그것을 정초로 '진리'를 그리고 그것을 인식할 수 있는 '이성'을 점차로 구축해 나간다. 그리고 그 결과 이성을 뜻하는 '로고스 중심주의'가 지배하는 전통적 서양 형이상학이 만들어지게 되었다고 데리다는 말하는 것이다. 그렇게 '말-중심주의'는 토대가 된 것이다. 하지만 그라마톨로지에서 데리다는 이 '말-중심주의'를 비판한다. 왜냐하면 자기가 말하고 자기가 듣는 그것으로만 구성된, 그렇게 철저하게 동일성의 바탕 위에만 구성된 형이상학이었기 때문에 그 어디에도 타자가 개입할 틈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전통적 서양 형이상학이 가지는 문제점들이 전방위적으로 검토된 이유는 무엇보다 2차대전이었고 그것을 일으킨 파시즘의 출현이었다. 많은 철학자들은 파시즘이란 전체주의의 출현이 어떤 특정한 역사적 현상이 아니라 애초부터 하나의 존재라는 동일성을 바탕으로 다른 것을 배제함으로써 스스로를 정립시켜왔던 서양 형이상학 자체에 그 씨앗이 배태되어 있음을 깨달았다. 더구나 그것은 중세를 지배했던 기독교의 유일신 신앙으로 더 오래 더 확고하게 자리잡은 것이기도 했다. 그렇게 이성과 신은 2인 3각 게임을 하듯 서로 보조를 맞추어 철저히 타자를 용납하지 않는 오로지 혼자가 전부인 형이상학을 구축한 것이다. 바로 그것을 하이데거는 '동일자의 철학'이라 비판했고 레비나스 역시도 비슷했다. 데리다 역시 거기에 가담한다. 하지만 그는 더 안으로 깊숙이 들어간다. 그러니까 그 '동일자의 철학'을 낳게한 원인을 찾는 것이다. 그리고 결국 훗설이 예비한 길을 따라가다 그 근저에 말-중심주의(혹은 소리-중심주의)가 있음을 찾아낸 것이다.

 

 

  유니스의 '문맹'은 바로 이 '말-중심주의'를 상징한다.

 

  데리다는 '말-중심주의'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나르시스적 자기애' '현재에의 집착' 그리고 '소유욕' 흥미롭게도 루스 렌델은 직접적으로 유니스가 이 모든 특징을 다 가지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나르시스적 자기애'는 오로지 그 자신만 절대이고 완전함을 추구하는 '동일자의 철학'에 있어 당연한 특성이 아닐 수 없다. 유니스 역시 그렇다. 그녀는 자신이 글을 모른다는 사실이 들킬까 염려하는 것 빼고는 전혀 타인에 대해 신경쓰지 않는다. 그녀는 오로지 자신의 문제 감정만이 전부이며 일가족 네명을 다 살해한 뒤에도 유니스는 자신이 받게 될 급료에 대해서만 신경쓴다. 이건 그녀가 아버지를 살해한 까닭에서도 나타난다. 유니스가 자신의 아버지를 살해했던 것은 무엇보다 그가 자꾸 그녀를 다른 이름으로 불렀기 때문이다. 더구나 유니스가 처음과 달리 점점 커버데일가를 경원시하게 되었던 것도 그들이 자꾸만 자신에게 간섭하고 자신의 세계를 바꾸려 들었기 때문이다. 즉 유니스는 그야말로 '천상천하 유아독존'인 것이다. 단 하나 글자에 대한 두려움만 빼고.

 

 

 

   현재에 대한 집착 역시 유니스는 가지고 있다. '말-중심주의'가 현재에 집착하는 까닭은 진리의 집착 때문이다. 단순하게 말해서 진리의 가장 순수한 형태가 바로 현재에 나타난 진리이기 때문이다. 이건 우리의 상식이기도 하다. 지금 눈에 보이는 것이야 말로 절대 진실이라고 종종 우리는 여기지 않는가? 그렇게 전통적 서양 형이상학의 토대를 이루는 '말-중심주의'는 현재성에 집착한다. 그런데 유니스 역시 그렇다. 루스 렌들은 단적으로 이렇게 드러낸다.  

 

  현재에만 발을 딛고 살아가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유니스는 대부분의 사람들과는 상당히 다른 존재였다. 그녀에게는 당장 저녁 식사 오 분 늦는 사태가 십 년 전에 겪은 크나큰 슬픔보다 중요했다. 미래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P.71)

 

 

  소유욕 역시 마찬가지다. 애초에 말은 내 의식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그렇게 이 '나' 즉 그 무엇으로도 대체될 수 없는 고유한 '개성'은 다른 말로 하면 나만이 가진 것, 즉 소유권인 것이다. 즉 사유재산의 바탕이 되는 개인의 소유권은 바로 그 의식을 '나만의 것'이라고 할 수 있는 소유권에서 비롯된 것이었으며 데리다 역시도 철학사에 있어서 언어에 보다 우위성을 두게 된 것은 '있음'에 대한 집착 때문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의 자본주의 또한 '말-중심주의'에 그 연원이 있으며 그 정도로 '말-중심주의'는 '소유욕'과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없는 관계인 것이다. 유니스도 이것을 대놓고 보여준다. 앞서 말한 급료의 집착이 그렇지만 아래 부분에서 보다 직접적으로 드러난다.

 

   유니스 파치먼이란 인간의 흥미로운 특성은 비록 살인이나 협박은 주저하지 않았어도, 물건을 훔치거나 주인의 허락 없이 무언가를 빌린 적이 평생 동안 한 번도 없었다는 사실이다. 사물이란 신생처럼 특정 사람에게 귀속되도록 정해져 있는 것이다. 조지도 사물의 질서가 흐트러지는 모습을 싫어했지만 유니스는 그 이상으로 그런 모습을 싫어했다.(P.79)

 

 

 

   이렇게 그녀는 데리다가 말했던 '말-중심주의'의 특징을 정확히 가지고 있다. 더구나 그녀의 유일한 친구이자 같이 일가족을 살해하는 동반자 조앤 스미스가 광신도라는 사실을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 앞서 ''말-중심주의'가 '유일신 신앙'과 보조를 맞춰왔다고 말했는데 유니스와 조앤의 관계는 바로 이것을 그대로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거기다 조앤이 다니는, 그리고 유니스도 나중에 합류하게 되는 '하느님의 강림을 믿는 사람들'이란 교회를 고려하면 이것은 더욱 확고해진다. 이 교회는 특이하게도 오로지 설교와 고백이라는 '말'로서만 이루어지며 아예 교리로 '기도서' 같은 책들을 읽지 못하도록 못박고 있다. 철저히 활자를 배제하는 교회인 것이다. 이렇게 렌들은 조앤과 교회의 존재로써 유니스의 문맹이 바로 '말-중심주의'의 상징임을 보다 분명하게 드러내는 것이다. 이쯤 이르면 왜 유니스가 그토록 뚜렷한 이유도 없이 그리도 활자에 대한 끝없는 두려움을 가지고 있는지도 이해가 되기 시작한다. 바로 데리다가 '그라마톨로지'에서 그러한 현실 역사에 폐해를 가져다 준 '말-중심주의'를 소거하기 위해서 '활자-중심주의'를 요청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유니스가 가지는 두려움은 바로 자신을 소거할 일종의 '적'에 대한 두려움이나 마찬가지였던 셈이다.

 

 

   의도했는지 모르겠지만 루스 렌들은 유니스를 곤경에 빠뜨리고 파국을 가져오는 모든 계기들을 '활자'로 구성한다. 그러니까 결정적으로 조지가 유니스를 비난하게 된 것이 바로 '서류'였다는 것, 유니스가 문맹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알게되는 멜린다가 그것을 알게 된 것이 잡지의 '심리테스트'라는 것. 또한 유니스가 결정적으로 경찰에 체포되게 만들었던 살해 현장이 생생하게 녹음된 '테이프레코더'(행여 여기에서 녹음된 것은 '소리'이지 않느냐고 반문할 것 같아 미리 알려두지만 활자가 소리와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똑같이 재현가능함이다. 그런 의미에서 녹음 역시 일종의 '활자'인 것이다.)라는 것 그리고 그 녹음테잎의 존재를 알리게 된 것 역시 재클린의 메모라는 것 등등에서 말이다. 렌들이 커버데일 일가를 유난한 책벌레들로 설정한 것도 어쩌면 이러한 '활자-중심주의'의 역습을 찍고 싶어서 그랬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렇게 되면 가장 활자에 집착하는 자일스의 존재가 정말 의미심장해 지는데 장정일은 자일스를 '문해'의 극단으로 보았지만 내 경우에는 '활자-중심주의'의 극단을 상징한다. 렌들은 의미심장하게도 유니스가 자일스를 처음 만날 때 유니스가 '그의 얼굴을 거의 보지 못했다.'라고 쓴다. 유니스에게 있어 그는 거의 부재하거나 침묵의 존재이다. 또한 살해할 때도 자일스의 목소리만 녹음에서 들리지 않는다. 이건 왜 이럴까? 대답은 역시 하나뿐이다. 자일스가 '활자-중심주의'의 가장 극단적 상징이기 때문이다. 즉 유니스에게서 가장 멀어진 존재이기에 그녀는 볼 수 없는 것이며 유니스를 끝내 파멸시킬 녹음 자체가 하나의 전체적인 '활자'이기에 자일스는 별도의 목소리를 낼 필요가 없는 것이다. 거기 녹음된 모든 정황이 바로 자일스의 글쓰기와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이는 유니스에게 활자의 두려움을 가장 처음 심어주었던 계기를 생각하면 더욱 확고해진다. 그건 바로 자일스가 달마다 종이에 써서 붙여두던 '이달의 격언'이었다. 또한 이 '이 달의 격언'은 유니스를 둘러싼 커버데일의 일가가 '활자-중심주의'의 세계임을 분명히 드러내는 상징이기도 하다. 그렇게 렌들은 유니스와 자일스의 정교한 대립을 통해 유니스로 상징되는 '말-중심주의'와 자일스로 상징되는 '활자-중심주의'의 대립을 가져온다. 데리다가 '그라마톨로지'에서 했던 그대로...

 

 

  그런데 데리다는 왜 그것의 교정으로써 '활자-중심주의'를 가져오는 것일까? 단순하게 말해 '활자-중심주의'는 자아의 동일성을 허물고 타자성에게로 개방시키기 때문이다. 활자 자체는 외부에 씌여진 기록이며 어떤 것의 흔적이다. 그것은 나 아닌 다른 존재를 늘 추정케 하며 또한 현재의 것이 아니라 과거의 것이다. 때문에 그것은 당당히 진리를 주장할 수 없고 언제나 비판가능한 하나의 담론으로만 존재한다. 그렇게 '씌여진 활자'는 나 아닌 타자를 대면하게 한다. 활자 세계의 커버데일 일가가 유니스와는 다르게 내내 유니스에게 말을 거는 것도 그 때문이다. 단적으로 렌들은 다음과 같은 말들로 이것을 강조한다.

 

  문맹은 일종의 시각장애이다.(P.38)

 

 

 그렇게 유니스 그녀는 타인을 전혀 보지 못한다.

 

  글에 의해 통제되거나 억압되지 않는 본능으로 (P.40)

 

 

  그녀는 전혀 타인에 대한 윤리적 태도를 고려하지 않는다.

 

  물론 렌들은 이러한 커버데일의 유니스에 대한 관심을 부르조아 계급의 위선적 태도에 불과하다고 비아냥거리고 있지만 내 관점은 어디까지나 '말 중심주의' 대 '활자 중심주의'의 대립에 기초함으로 한계가 분명하긴 하지만 이런 식으로 얘기함을 어느정도 양해해주길 부탁드리고 싶다. 이는 또한 유니스에게 가장 인간적으로 대하는 멜린다가 영문학 전공(문학은 타인의 삶을 가장 많이 다루는 활자의 장르가 아닌가)이라는 점에서도 드러난다. 이렇게 렌들은 데리다가 언어가 아니라 활자에 더 우위를 둠으로써 타자에 대해 우리의 눈을 돌리려 했던 것을 그대로 형상화한다. 어쩌면 렌들은 그래서 커버데일 일가는 하필 '돈 지오바니'의 음악을 텔레비젼으로 보고 있을 때 살해당하는 것으로 그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여기서 그 시점이 중요한데 멜린다를 포함하여 커버데일 일가 모두가 유니스와 완전 결별했을 때, 다시말하면 그 때까지 유니스가 안경을 통해 활자 세계에 속한 사람임을 스스로 위장했듯이 커버데일 일가 또한 위선적인 이타적 태도로 그들의 자기애를 위장했던 것이 최종적으로 끝장났을 때 그들 모두가 처형되는 것은 정말 의미심장하다. 렌들은 그 시점의 폭발을 은밀하게 차근차근 준비하는데 그 처음은 자일스의 변화이다. 즉 절대적인 부재와 침묵 속을 떠돌던 그가 점차 사람들과 어울리게 되고 이윽고 종교에 귀의까지 하도록 변하는 것이다. 이것은 커버데일 일가가 유니스로 인해 서서히 활자의 세계에서 빠져나와 언어의 세계로 들어서고 있다는 것의 단적인 상징이 된다. 그렇게 커버데일 일가의 언어 세계로의 점차적 나아감이 끝내 저택 공간 전체를 지배하는 '돈 지오바니'의 오페라로 완성되는 것이다.(또한 그들은 유니스의 상징이기도 한 텔레비젼을 통해 그것을 보고 있음도 상기하라.) 그리고 그렇게 유니스의 세계가 완성되었을 때 그 모든 소리를 제압하는 그래서 죽음의 소리이며 유니스가 이해하고 좋아하는 유일한 소리이기도 한 총소리로 대체되고 활자 세계의 인물들은 모조리 죽음을 당하는 것은 렌들에게선 당연한 수순인 것이다. 렌들은 커버데일 일가의 언어 세계로의 들어섬을 이기심의 확장과 경로를 같이하게 만들어 오히려 활자 세계로의 머무름이 타자에 대한 관심의 유지임을 강조해 보여주려는 것이니까 말이다.

 

 

 

   3.  보다 깊은 그녀의 속내는? ...

 

 

  이러한 렌들의 주제는 그러나 전작 '내 눈에는 악마가'와 비교하면 동전의 양면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전작에서는 오히려 타인에 대한 지나친 관심이 비극을 가져왔기 때문이다. 이러한 차이는 어찌된 연유일까? 뭐, 양 극단은 지양하고 자기애와 타인의 대한 관심을 적절히 조절하자 정도로 편하게 말할수도 있겠지만 렌들이 그런 뻔한 얘기를 하는 것 같지는 않다. 그래서 어쩌면 전작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작품을 써서 렌들 스스로 데리다적 결론에 이르려 했던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보게도 된다. 데리다가 활자에 우위를 두고 '차연(혹은 '차이'라고 부르자는 학자들도 있다.)'를 가져오는 것은 근원적으로는 오로지 하나의 해답만, 근거만, 결론만 가능하다는 전통적 서구 형이상학 대대로 내려온 '아르케'의 집착을 버리게 만들기 위해서이다. 그렇게 데리다는 그 어떤 것도 진리를 주장할 수 없는 하나의 잠정적 담론이 되길 원하며 결론을 내릴 수 없는 과정 자체가 되길 원한다. 그래야 수많은 독자적인 해석들이 왁자지껄 제 목소리로 떠들면서도 한편으론 남들의 얘기에 귀도 기울여가면서 서로 대화할 수 있으니까. 바로 이 '활자잔혹극'에서 장정일과 끌로드 샤브롤 그리고 내가 그랬듯이 말이다. 바로 그래서 렌들 역시 이렇게 전작과 완전히 상반된 주제에다 또한 내용상 다양한 해석의 가능함을 통하여 독자들에게 하나의 해답만을 가지려는 생각을 포기하게 만드려는 것은 아닐까 싶어진다. 그러니까 어딘가 있을 또다른 무언가를 향해 늘 열려진 태도를 유지하는 것. 어쩌면 이것이야 말로 렌들이 궁극적으로 우리들에게 주려고 했던 것이 아닐까? 그러고 보면 루스 렌들의 '내 눈에는 악마가'도 '활자잔혹극'도 그  모두 느닷없는 폭발의 순간을 간직하고 있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아서의 죽음도 유니스의 살해도 아무런 전조도 없이 갑작스레 찾아왔다. 마치 삶이 모조리 예측불가능성으로 가득차 있다고 암시하듯이... 렌들이 권유하는 부단한 재조정 재설정을 위한 열려진 태도는 정말 그 때문인지도 모른다. 데리다는 텍스트를 정의하기를 '차연이 직조해가는 시공간적 차이의 연쇄적 그물망'이라 했다. 이 말은 그대로 삶에게도 통용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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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 2012-01-25 16: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 제목에다 표지에, 리뷰까지 다 멋있군요.
하...하지만 여전히 저의 달리는 지식으로는 전부 이해하기가 어렵군요 ㅋㅋ
이거 안되겠습니다. 다음 기에는 직접 소설을 신청해서 읽어보는 수밖에요..후후

ICE-9 2012-01-25 20:30   좋아요 0 | URL
루스 렌들의 활자잔혹극은 정말 추천할만한 걸작인데 어쩐지 저의 리뷰가 거리를 좁히긴 커녕 오히려 넓힌 것만 같아서 심히 걱정스럽네요 ㅠ ㅠ 안 그래도 소통을 위한 글쓰기가 어째 점점 자기 만족을 추구하고 있지는 않은가 염려되고 있는 시점이었는데... 올해엔 보다 쉽고 보다 짧게를 모토로 해야겠어요. 성향상 얼마나 지켜질 지는 미지수지만 하하... 다음 소설 신간평가단에 소이진님도 꼭 함께 했으면 좋겠네요. 그런데 제가 또 연임할 수 있을지 그게 걱정이에요. 하하...

이진 2012-01-25 23:24   좋아요 0 | URL
아니어요. 안되요 ㅠㅠ 제겐 어려운 매력으로 읽는것이 헤르메스님의 리뷰인데 쉽게 쓰신다니 아니되어요. 겨우 이 미천한 저를위해 헤르메스님의 모토를 버리신다니 안됩니다. 헤르메스님의 이런 글을 좋아하시는 분이 얼마나 많으실텐데요! 아마 헤르메스님이라면 되실겁니다... 저라면 어떨지 모르지만 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