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상상력 사전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이세욱.임호경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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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상상력사전'을 읽으면 김승옥 작가의 '서울 1964년 겨울'이라는 소설이 생각난다. 1964년 서슬퍼런 군부독재 시절 그렇게 암울한 시대적 분위기에 짓눌려 자신의 존재 가치를 잃고 그저 익명화된 존재로 살던 주인공들이 남들은 모르는 오로지 자기만이 알고 있는 사실과 지식들을 들먹이며 애써 그 자신의 존재가치를 증명하려 애달아하던 그 모습이 왠지 떠오른다. 그런데 왜 그들은 오로지 자기가 알고 있는 것으로 스스로를 증명하려 했던 것일까?

  베르나르 베르베르와  무척 닮아보이는 '미셀 푸코'는 지식마저도 근대에 이르러서는 체계적으로 관리되고 양산된다고 했던가? 그래서 그 지식을 선택하고 배제하는 지식-권력이야말로 근대의 핵심적 권력이라고. 그렇게 그 권력은 사회 성원들이 알고 싶은 것이 아니라 체제 유지를 위해서 알아야 할 것만을 주입시켰고 근대에 이르러 자리잡게된 교육 체제는 성원들이 필요한 지식 보다는 체제가 필요한 지식을, 거기에 감겨든 진정한 의도는 슬쩍 가려둔 채, 상식이라는 시멘트까지 발라 더욱 견고한 것으로 만들고 말았다 . 그렇게 의도 자체에 이미 체제 유지를 위해 유용한지의 여부가 중요했던 것 처럼 그렇게 양산되고 관리된 지식들 역시도 당연히 오로지 '쓸모' 여부에 의해 그 가치와 생존여부를 심판받게 되었다. 그것이 소위 '잡다한 지식'이라는 말이 태어나게 된 배경이었다. 우리는 자주 '잡다한 지식'이라는 말을 한다. 그리고 그 말을 할 때 우리는 분명 지식들의 위계질서를 스스로 세우고 있다. 그런데 누가 그렇게 지식들의 위계질서를 세우고 당당하게 '잡다한 지식'들이라 규정할 수 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그 반대편에 있는 쓸모있는 지식이란 뭘까? 그것은 최소한 자본으로 교환가능한 지식을 말한다. 그렇게 개인에게 현실적으로 도움이 되고 나아가서는 자본의 교환으로 그 체제를 지속해야만 하는 자본주의 자체에 도움이 되는 그런 지식들 말이다. 따라서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지식들의 위계질서란 오로지 현실적으로 쓸모있느냐 없느냐에 따라서 나누어졌을 뿐 거기엔 어떠한 진리치도 없는 것이다. 이렇게 근대에 이르러 헤게모니를 쥐게 된 자본주의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렇게 협소한 시야로만 지식을 바라보게 했고 우리는 근대에 이르러 편재된 기성교육 덕택에 그러한 관점을 스스로 내면화시키고 말았던 것이다. 

  체제는 본질적으로 지식의 확산을 싫어한다. 그래야 안정을 구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중세가 천년이나 지속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신부나 수사들만이 글을 알았기 때문이다. 왕을 비롯하여 그 어떤 귀족도 스스로 성경을 읽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프랑스 혁명 또한 마찬가지다. 인쇄술의 발달이 활발히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그 혁명은 도래하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그 어떤 체제든 스스로의 안정을 위해서는 지식을 관리하고 통제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가급적이면 자기들 입맛에 맞는 지식만 존치시키기 위하여 많은 지식들이 유통되는 것을 막는다. 그리고 그 유통의 억제를 위해서 아예 그 구성원들 마저도 체제가 싫어하는 지식들을 쓸모없는 것으로 치부하도록 내면화시키는 것이다. 그렇게 구성원들을 아주 협소한 시야로만 지식을 바라보도록 만드는 것이다. 때문에 지속적인 검열은 그 어떤 체제든, 특히나 뒤가 구린 체제일 수록 필수적이다. 굳이 사회가 원하는 지식만 유통시키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사회내의 구성원들이 항상적으로 편협한 지식에 대한 시각을 가지도록하기 위해서도 필요한 것이다. 피에르 부르디외에 따르면 지식을 넘어 개인 스스로 온전히 자신만의 것이라 여기기 쉬운 취향마저도 그렇게 사회적으로 재생산되는 것이라고 한다. 그렇게 우리의 의식과 신체를 횡단하고 있는 지식이나 취향들은 모두 사회가 암암리에 새겨놓은 코드들에 불과하다. 따지고 보자면 그 코드로 부터 벗어난 정말 나만의 것이란 그리 많지 않은 것이다. 영화 '매트릭스' 속의 네오는 사실 그리 먼 인물이 아닌 것이다. 이미 우리 자신이 네오인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시각이 비단 지식을 바라보는 것에 그치지 않고 타인을 바라보는 시각 자체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미셀 푸코의 '광기의 역사'나 '감시와 처벌'은 그렇게 지식들의 체계적인 분류와 통제가 결국 윤리학적인 문제로 연결되는 것임을 보여준다. 지식에 대한 체제의 유용성 기준이 그대로 사람에게까지 통용되는 것이다. 정상인과 비정상인을 나누는 기준 역시도 지식과 똑같이 체제에 얼마나 쓸모있느냐 하는 것으로 결정되고 그렇게 정해진 기준은 지식과 마찬가지로 또 그렇게 성원 개인들에게 내면화되어 그들 역시 다른 사람들을 오로지 '쓸모' 여부에 따라 바라보게 만드는 것이다. 사실 지금 우리들의 모습도 이와 같지 아니한가. 이렇게 지식을 바라보는 시각은 결국은 타인을 바라보는 시각으로까지 연결된다. 때문에 내가 지식들을 대하는 태도는 어쩌면 정말 중요한지 모른다. 유용성의 기준 따위는 던져버리고 그 모든 지식들을 다 나름대로 의미와 가치가 있다고 받아들이면 그렇게 타인들마저도 받아들이게 될 지 모른다.  

 그래서 나는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상상력 사전' 처럼 이렇게 '잡다한 지식'들이 가득차 있는 책이 정말 소중하다고 믿는다. 어디가서 '사람의 입맞춤이 개미들이 얼굴을 맞대고 영양교환행위를 모방한 것'이며 '빈대들의 성(性)'이라든지, '쥐의 똥구멍을 꿰맨 여공'의 얘기를 들을 수 있겠는가? 그렇게 사회가 쓸모없다며 한 켠으로 치워버린 지식, 혹은 묘지 속에다 봉인해버린 지식들이 이렇게 다시금 생명을 얻고 스스로를 내보일 기회를 만들어주는, 그래서 모든 지식들이 동등한 위치에서 서로의 얼굴을 들이미는(이 책의 지식들이 최소한의 항목으로도 나눠지지 않는 것은 얼마나 다행인가! 사실 그 항목으로 나누고 체계화시키는 것이야 말로 근대 지식-권력의 소행이라고 푸코는 말하지 않았던가! 항목의 부재와 무질서한 지식의 나열은 그 자체로 모든 지식이 동등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은 아닐런지.), 이런 책들이 난 정말 소중하다고 믿는다. 김승옥의 소설 '서울 1964년 겨울'의 주인공들이 그 누구의 것도 아닌 오로지 자신만이 아는 사실과 지식으로 스스로의 존재 가치를 증명하려고 했던 것 처럼 누군가가 내게 원했던 지식이 아니라 바로 내가 스스로 원하는 지식들을 향유할 수 있도록 해 주는 이런 책들이 그동안 사회로 부터 오염되고 세뇌된 내 의식과 영혼을 조금은 정화화고 껍질을 벗겨서 보다 더 '본래적' 나로 다가갈 수 있게 만들어줄 것이라 믿는다. 

  세상에 그냥 몰라도 좋은 지식, 잡다한 지식 같은 건 없다. 그런 지식들의 위계질서를 만들고 분류하고 통제했던 근대 자체를 낳게 했던 지식들만 봐도 그렇다. 그 지식들은 당시 어떠한 지식들이었나? 흔히들 근대는 르네상스로 부터 탄생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 르네상스를 낳게 한 그리스 로마 고전에 대한 연구는 당시 가장 쓸모없는 짓거리 중의 하나였다. 쾌쾌묵은 옛날 얘기들을 연구하는 건 정말 할 일없고 바보들이나 하는 짓으로 여겨졌었다. 그런데 그렇게 쓸모없는 지식, 잡다한 지식이 결국은 근대를 낳고 말았다. 여기서 보듯이 그 어떤 지식이든 쓸모없는 것은 없으며 그대로 다 소중하다. 다만 아직 때를 만나지 못해 그 빛을 발휘하고 있지 못할 뿐. 그러니 '상상력 사전'에 나오는 그 어떤 지식들이라도 한 반 꼼꼼하게 읽으실 것을 권하고 싶다. 혹 누가 아는가? 그 중 어떤 것이 근대를 가져왔던 그 지식 처럼 또 시대를 들어올릴만한 지렛대가 되어줄 지... 

 ps.  더 하여 이러한 '쓸모없음'으로 치부되어 버려진 모든 지식들의 진정한 가치 회복을 위하여 헤르만 헤세의 '유리알 유희'도 꼭 읽어보실 것을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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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폴리앵에 지다 매그레 시리즈 3
조르주 심농 지음, 최애리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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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초엔 그저 한 우연이 있었을 뿐이다. 

 벨기에 경찰의 의뢰로 매그레는 브뤼셀로 가게 된다. 휴가삼아 떠났던 가벼운 여행. 회의도 예상 보다 일찍 끝나 한 잔이나 하려구 들른 작은 카페. 거기 구석진 자리에서 매그레는 우연히 한 남자를 보게된다. 여지없이 '전문적 백수' 로 보이는 남자. 무심코 그를 바라보게 된 순간 그 남자가 행색과는 어울리지 않게 주머니에서 수북한 지폐 다발을 꺼낸다. 그리고 그것을 종이로 포장을 하더니 그 위에 주소를 적는다. 초라하고 남루한 사내로서는 도저히 가질 법하지 않은 그 거액에 매그레의 예민한 감각은 사건의 냄새를 맡는다. 그렇게 그의 추적이 시작되고 소설이 진행된다. 

 그렇지만 보시다시피 여기엔 얼마나 많은 우연이 있는 것인지... 첫 문장 부터 마지막 문장까지 그가 결국 사건에 착수하게 될 때까지 저 많은 우연이 단 하나라도 빠져서는 안되는 게 여기서 드러난다. 벨기에 경찰이 의뢰하지 않았다면, 회의가 예정보다 일찍 끝나지 않았다면, 한 잔하려고 무심코 작은 카페에 들르지 않았다면, 거기 한 남자가 하필 매그레가 보았을 때 그 지폐 다발을 꺼내지 않았다면, 매그레는 결국 죄책감(이 원인에 대해서는 소설을 아직 읽지 않은 분들을 위해 언급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다.)을 가지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고 결국 오래도록 묻혀 있었던 한 사건이 수면으로 떠오르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어쩌면 당신은 이걸 읽는 순간 너무나 많은 우연의 남발에 이 소설은 치명적인 구성적 결함을 가지고 있구나 생각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먼저 언급해두고 싶은 것은 결코 그런 것은 아니다라는 것이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이러한 연쇄된 우연엔 분명 심농의 명확한 의도가 있으며 그것은 정확히 심농이 '생폴리앵에 지다'  작품 전체를 통해서 말하고 싶은 것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여기에 관해 생각해보고 싶은 것으로 이 소설이 다른 시리즈에 비해(지금 출간한 네권에 한정해서이다.) 가지고 있는 독특성이다. 그 독특성은 다른 소설과 달리 '생폴리앵에 지다'에서만은 매그레가 사건을 발견하고 수사하고 해결하게 되기까지 내내 사건에 수동적으로 관계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잘 설명이 되는지는 모르겠는데, 아무튼 매그레는 단서를 발견하는데서도 앞에서 말했듯이 우연히 그 단서가 주어져서 그랬던 것이고 수사를 진행하는 와중에서도 그가 직접 발견하기 보다 사건 관계자들이 알아서 그 앞에 나타나주는 식이다. 그렇게 이 소설에서 매그레는 내내 이 사건의 핵심을 향하여 누군가에게 인도되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다 . 마치 사건이 드러나기 위해서 그를 초대한 것만 같이 말이다. 그렇게 매그레는 유독 이 소설에서 너무도 수동적이다. 

  그런데 이 소설에서 매그레가 가지는 태도의 독특성은 앞서 말했던 우연의 남발과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일까? 이 둘을 나란히 놓고 보면 그 관계가 보다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것에 관해 앞에서 언뜻 힌트 처럼 남겨놓기도 했다. 바로 '섭리'라는 말로 말이다. 이것은 이 다음 작품 '라 프로비당스호의 마부'에서 그 '라 프로비당스'가 가진 뜻이기도 하다. 아무튼 굳이 이 말을 쓴 것은 이 소설에서 나타난 우연의 남발과 매그레의 현격한 수동성은 심농이 이를 통해 결국 그 사건이 드러나게 된 것은 일종의 '신의 섭리' 로 보여주려 했다는 것을 나타내고 싶었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 앞에서 모든 죄는 언젠가 다 밝혀지게된다'라는 오랜 카톨릭적 믿음 그대로 말이다. 

  이는 작가 심농 자신을 생각해 보면 더 명확해 보인다. 이 소설은 심농 자신의 자전적 경험이 바탕이 되었다. 그 역시 이 소설에 나오는 '묵시록의 동지들'처럼, 그렇게 영화 '죽은 시인들의 사회'에 나오는 그 모임 처럼, 젊었을 적 그런 모임을 했었던 것이다 . '묵시록의 동지들'이 보여주었던 낭만과 열정은 사실 당시 심농이 참여했었던 그 모임의 분위기를 그대로 옮겨온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어느날 그 모임중의 한 사람이 목을 매달고 죽는다. 사건은 자살로 처리되었지만 타살의 의혹도 없지는 않았다. 그 때 목을 맸던 사람의 이름이 바로 '조제프 장 클라인'이었다. 책의 맨 뒤에 언급되는 이 이름은 '클랭'이라는 이름을 영어식으로 읽은 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프랑스식으로 말하면 정확히는 '조제프 장 클랭'이 될 것이다. 바로 '생폴리앵의 성당'에서 '묵시록의 동지들'중 목을 매달고 죽은 '클랭'과 똑같은 이름이다.(목매달아 죽은 곳도 바로 생폴리앵 성당, 그 곳이다) 희생자의 이름도 죽은 장소의 이름도 동일하다는 것은 혹시나 심농은 이 소설을 통하여 그 사건 자체를 재현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생각하게 만든다. 그렇게 그저 자전적 경험을 따왔다기 보다는 오히려 심농 자신이 매그레에게 접신되어서 아직까지 그 스스로에게도 미궁으로 남아있는 사건 자체에로 뛰어들려고 했던 것은 아닐까 의문을 가지게 만든다. 나는 이 질문이 중요하다고 믿는다. 그러니까 이 소설은 단순한 문학적 재현에 불과한 것일까 아니면 그 사건에 제대로 아무런 대처도 못했던 스스로에 대한 일종의 참회록일까? 이건 비단 이 소설에만 국한된 문제만은 아니다.  개인적으로 이 질문에 대한 적절한 대답은 바로 뒤이은 '라 프로비당스호의 마부'의 성격마저도 규정하는 질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내 생각에 이 두 작품은 아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아무튼 그 연결관계는 후에 '라 프로비당스호의 마부'의 리뷰를 쓸 때 말하기로 하고 여기서는 계속 '현재의 심농이 과거의 사건에 뛰어듦'에 대해서만 살펴보도록 하자. 

  왜 이렇게 생각하게 되었는가에 대한 근거는 또 하나가 있다. 그 역시 목매달고 죽은 자의 이름 때문이다. 그 이름은 앞서도 말했듯 '조제프 장 클랭'이었다. 여기서 클랭이란 이름은 소설에서도 똑같이 희생자 이름으로 쓰였다. 그런데 씌여진 이름이 클랭만은 아니다 . 여기엔 또 하나의 이름이 쓰였는데 그 이름을 가진자가 이 소설에서 하는 역할 때문에 하필이면 그 이름을 가졌다는 것이 예사롭지 않아 보인다. 그 이름은 바로 '조제프'이다. (마지막 하나 남은 '장'이라는 이름은 바로 '라 프로비당스호의 마부'에서 또 쓰인다. 이것도내가 두 작품이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고 믿는 근거중의 하나다.) 그런데 이 소설에서 조제프란 인물은 어떤 인물인가? 그는 본격적으로 매그레를 사건에 착수하게 만드는 자일 뿐만아니라 아예 사건의 핵심마저 다가가도록 인도하는 자이다. 매그레가 테세우스라면 조제프는 아리아드네의 실 같은 자인 것이다. 그런데 심농은 그 아리아드네의 실 같은 자에게 죽은 자의 이름을 주었다. 클랭이라는 성이 아니라, 그 시절 늘 부르곤 했을 바로 그 이름을. 나는 이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매그레를 인도했던 바로 그 자에게 그 시절에 늘 부르곤 했을 죽은 자의 이름을 주었다는 것이. 그건 심농이 늘 의혹으로 남아있는 그 비극을 생각할 때 마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름이었을 것이다. 아니 그는 오히려 그 이름 때문에 늘 그 사건에로 돌아갔을 것이다. 그건 다른 어어떤 조제프가 아니라 그가 어느 인터뷰에서 말했던 대로 그만의 조제프였을 테니까. 따라서 관계는 명확해 보인다. 소설속 매그레와 조제프의 관계는 현실속 심농과 조제프의 관계로 반복되고 정확히 조제프에게 매그레가 인도되었듯이 심농 역시 이 소설을 통하여 마지막 한 걸음으로서 다시금 그 사건에게로 뛰어드는 것이다.(여기서 굳이 '마지막'이라고 한 까닭은 '라 프로비당스호의 마부'가 사실상 그러한 트라우마처럼 남아있던 그 사건에 대한 심농 개인의 작별인사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때문에 유독 이 소설에서 만큼은 매그레가 수동적일 수 밖에 없었으며 어쩌면 사실 그가 직접 언급은 하지 않았지만 수사관으로서의 매그레란 캐릭터 자체를 태어나게 한 것도 근본적으로는 바로 이 사건이 동기가 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만일 이것이 정말 내 생각대로 진짜 매그레를 통해서 근원적으로 하고 싶었던 것을 하는 거라면 그렇게 유독 이 작품에서 카톨릭적 색채가 짙게 나타나는 것도 이해가 된다. 왜냐하면 바로 이 근원적 회귀와 같은 시도를 통해서 묻는 질문은 인간에게 있어 '죄'란 무엇이고 또 그 '죄'를 용서한다는 것은 무엇인가를 묻는 것인데 그것은 그야말로 그가 가장 처음으로 영향을 받았고 또 지속적으로 성장시켜온 카톨릭적 세계관 위에서라야 대답이 가능한 질문이기 때문이다. 

   

                                                                                              생폴리앵 성당의 모습 

 

  심농의 어느 전기 작가(Lucille Frackman Becker)는 "매그레의 전체적 분위기는 일요일날 들리는 성당의 종소리와 더불어 만들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그렇게 심농의 작품에 있어서 카톨릭적 세계관은 아주 중요한 밑받침이 되었음을 강조했다. 특히나 그는 어렸을 때 부터 성당에서 미사를 집전할 때 거드는 아이로 일했고 종교 생활에 아주 열심이었다고 한다. 그 전기작가는 그 어린 시절 카톨릭 성당에서의 경험이 심농에게 '죄'라는 것, '심판'이라는 것 그리고 '죄를 짓는 인간'에 대한 원초적인 감정들과 시각들을 주었을 것이며 그것이 그대로 매그레에게 가장 근본적인 태도 'Comprendre sans juger' 즉 '심판하지 않고 이해한다'를 이루게 만들었을 것이라 한다. 아마도 매그레를 읽어보신 분들이라면 매그레가 꼭 범죄자에게 법의 심판을 받도록 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 것이다. 비록 그는 수사관이지만 말이다. 그가 마지막 범죄자 앞에서 보여주는 모습은 국가의 질서집행자라기 보다는 어쩐지 고해를 듣는 신부와도 같은 모습이다. 물론 그 고해를 남이 아니라 자신이 직접 헤아려서 거꾸로 들려준다는 점에 차이는 있지만. 아무튼 그는 법의 눈이 아니라 같은 인간의 눈으로서 범죄자의 범죄가 과연 심판 받을 만한 것인가를 가늠한다. 법의 눈이 가진 '지은 죄'라는 좁은 시야를 넘어 매그레는 왜 그러한 죄를 범했는지 맥락을 헤아리고 때로는 죄가 설령 심판받아야 하는 것임에도 그 심판이 불러올 또 다른 비극까지 감안하여 기꺼이 그 죄를 용서하는 포용을 보여준다. 이것은 고해성사를 받은 신부가 전하는, 그렇게 신의 눈으로 본 용서라고 할 수는 없을까? 아무튼 이 마지막 물음에 부정적인 대답을 하더라도 이렇게 카톨릭적 세계관이 매그레의 작품세계에 크나큰 영향을 미쳤다는 점만은 인정하게 되리라 믿는다. 

  그러니까 그 많은 우연의 남발은 심농의 죄에 대한 카톨릭적 세계관을 드러내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어떤 죄이든 신 앞에서는 감추어질 수 없으며 그것은 어떤 형태로든 결국에 드러나게 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하지만 그가 카톨릭적 색채를 이렇게 부여하는 것은 비단 이러한 죄의 성격만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아니다. 보다 본질적으로는 그 죄 앞의 '인간' 자체를 생각하기 위해서이다. 바로 이를 통해 그가 강조하는 인간은 모습은 그 무엇보다 '경계에 서 있는 자들'이라는 것이다. 경계는 소설의 도입부 노이샨츠 역에서 부터 단적으로 드러난다. 그 노이샨츠 역은 바로 네델란드와 독일의 국경에 있는 역이었다. 그렇게 그 역은 '경계' 위에 서 있는 역이다. 거기는 양쪽의 많은 노동자들이 통근 혹은 퇴근 열차를 타고 스쳐간다. 아니, 잠시 머무르기도 한다. 국경을 건너기 위한 필요한 절차를 거치는 잠시 동안만. 그 때 그들은 우르르 요깃 거리를 찾아 식당으로 뛰어든다. 그렇지만 단 두 사람만은 갈 곳을 잃은듯 대합실에 우두커니 못박혀 있다. 그 중 한 사람이 매그레이고 다른 한 사람은 그가 지금 추적하고 있는 자이다. 

  소설의 도입부 노이샨츠 역의 모습과 또 그렇게 홀로 내버려진 두 사람의 존재는 무엇보다 앞으로 이 소설에서 하게 될 얘기를 압축해서 보여주고 있다. 그렇게 노이샨츠 역이 경계에 서 있듯이 그 대합실의 두 사람도, 다른 사람들은 일상을 유지하기 위해 고픈 배를 채우는 그렇게 '삶'이라고 부를 수 있는 무리에서 떨어져 나와 일종의 경계를 이루고 있다. 그런데 정말 후반에 매그레가 쫓는 그 존재는 그렇게 삶이라는 경계 다른쪽에 있었던 인물이라는 것이 밝혀진다. 

  운명과도 같은 '죄의 밝힘'이 잘라낼래야 잘라낼 수 없는 죄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것이라면 이렇게 경계 위에 서 있는 인간 존재는 그 죄로 인해 심판이 아니라 바로 이해를 받아야 하는 변호의 이유가 된다. 그것은 그들이 그만큼 강한 존재가 아니었기에 저지를 수 밖에 없던 것이기도 했고 또 이미 선택한 경계의 한 쪽 즉 특히나 '삶'을 택했던 자들은 이제는 혼자만이 아닌 자신에게 딸린 가족들까지 책임지느라 어쩔 수 없이 저지를 수 밖에 없던 것이기도 했다. 아니, 달리 보면 어쩌면 현상하는 '죄' 자체가 그렇게도 안정적이고 항구적일 것만 같았던 인간의 삶이 사실은 아슬아슬한 경계 위에 서 있는 것임을 드러내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것은 살아 있는 '묵시록의 동지들'의 묘사에서 전면적으로 드러나는데 그 중 가장 상위의 계층을 차지하고 있는 모리스와 조제프의 변화는 정확히 이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만큼 쓰고 보니 심농이 매그레를 비롯하여 묵시록의 동지들을 모두 과거의 사건으로 소환하는 그 존재가 단순히 '죄'만을 보여주려 했던 것일까 의심스러워 진다. 혹시 그 존재는 중세의 '메멘토 모리'와도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보면 소설에서의 죄의 묘사는 '죽음'으로 바꿔놓고 보아도 그대로 다 들어맞는 것 같다. 아니 초반에 처음 조제프가 등장하는 장면을 생각해 보자면 그것은 그야말로 그가 죽음으로 인해 과거의 사건으로 소환되는 것이 아닌가! 그림자처럼 삶에 결부되어 있지만 모두가 회피하려 드는, 그래서 거꾸로 삶에 더욱 더 집착하게 만드는 죽음. 하지만 그것은 지울래야 지울 수 없는 영원한 얼룩이다. 그 얼룩은 안정적이라 이대로 늘 같은 모습이리라 여겼던 삶에 계속 균열을 만들고 사실은 그 삶의 기반이 그리 단단하지 못함을 보여준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 얼룩이 커다란 입을 벌릴 때 사람들은 소설에서 매그레의 처분을 다만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던 것 처럼 그렇게 그 입이 닥쳐옴을 속절없이 기다리고 있을 수 밖에 없다. 죄로 보았을 땐 '용서'의 관계가 '죽음'으로 치환시키자 그대로 '간구'의 몸짓이 된다. 뒤이은 '라 프로비당스호'도 그것이 배에 쓰이면 흔히 '구원자'를 의미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만일 참회록이라면 심농은 이 경계 어디에 서 있을 것인가? 아마도 당연히 경계의 안쪽, '삶'이라는 곳에 서 있을 것이다. 그렇게 그는 매그레에 접신되어 과거의 사건으로 다가가서는 이제 매그레 앞에 서서 지난날의 자신을 혹은 그 상처를 안고 살아온 오늘날의 자신을 용서를 비는 것과 동시에 지금 삶을 그래도 이대로 계속 영위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간구하고 있는지 모른다. 마치 어린시절 신부에게 하곤 했던 고해성사 처럼... 

   솔직히 고백하자면 리뷰를 쓸 때 가장 어려운 부분은 늘 이렇게 마지막이다. 지금도 이 글을 어떻게 끝맺어야 할지 난감하다. 이 쯤이면 '생폴리앵에 지다' 전체에 대해서 지금까지 해 왔던 말들을 종합해 정리해 놓아야 하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여기에 딱 들어맞는 문장들을 생각해내기가 힘들다. "'생폴리앵에 지다'는 이후 매그레 시리즈의 모든 주제와 특징들이 발현되는 그 진정한 시작이라 할만하다'"고 썼다가 지우고 "'생폴리앵에 지다'는 죄에 대해 민감했던 심농을 여실히 드러내며 그가 왜 매그레 같은 추리소설을 쓰게 되었는지 보다 확실하게 우리에게 알려준다"라고 썼다가 또 지운다. 그 어느 문장도 지금까지 해 온 말들을 부분적으로 밖에는 담고 있지 못하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휴우~ 하지만 어떻게든 끝은 맺어야 하는 글. 그냥 무작정 덤벼들고 보자. 따라서 이 뒤에 쓰일 말들은 그저 이 순간 아주 우연히 결정된 것임에 다름아니다라는 것을 미리 알려둔다. '생폴리앵에 지다' 자체가 모든 우연이듯이. 사실 따지고 보면 우연과 필연은 또 종이 한 장 차이 아닌가? 짝사랑을 하던 여자를 내내 기약없이 기다리고 있던 남자에게 마침 나타난 그 여자는 필연이지만 그 여자에게 있어 기다리고 있던 남자는 또 그렇게 우연이듯이... 

  아무튼 이 소설은 심농이 그 어떤 작가보다 인간이 처한 존재론적 조건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작가라는 걸 보여준다. 그가 하필이면 추리소설이라는 형식을 택했던 것은 미켈란젤로가 시스티나 성당 천장에 천지창조를 그리기 위해 붓을 택했던 것 처럼 그것이 그가 추구했던 주제에 그저 가장 적합했기 때문이다. 그 무엇보다도 그는 해명되지 않은 죽음을 가슴에 안고 살아가는 자였으니까 말이다. 문제는 거기에 있었다. 그 죽음을 안고 거기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고 살아가는 자는 나날의 일상을 어떻게 느끼고 있을까? 그것으로 부터 완전히 달아나기 위해 더 삶에 집착할수도 거기에 빠져 소용돌이에 갇힌 듯이 늘 맴돌수도 있을 것이다. 거기다 그는 어릴때 부터 카톨릭적 세계관에 깊이 빠져있었다. 그렇게 그의 모든 행위를 신 앞에서 헤아려볼 수 밖에 없는 자였다. 거기서 일상이 가지는 위태로움, 죄가 드리운 어두운 그늘은 더욱 더 크게 자리잡았을지 모른다. 그는 그렇게 낮동안은 웃고 떠들다가도 밤엔 괴로워했을지도 모른다. 나는 아주 활기차고 정력적인 삶을 살았던 심농이 왜 매그레는 이렇게 한없이 우울한 분위기를 띠게 되었을까 궁금하게 여겼었는데 어쩌면 바로 이와 같은 심농의 삶 자체 때문에 이렇게 이분법적으로 나뉘게 된 것은 아닌가 싶다. 현실적 삶은 그 죽음이 주는 여운으로 부터 달아나기 위해 더욱 더 집착하느라 그랬던 것이고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카톨릭적 세계관과 죄책감으로 환기되는 억누를 수 없는 우울은 이렇게 매그레를 통해 토로되었던 것은 아니었을지? 그렇게 매그레를 통해 보여주는 인간의 삶에 대한 깊이 있는 시선 역시도 혹시 그러한 자신을 신에게 이해받고 싶은 욕망에서 발현되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생각해보면 죽음은 정말 '노이샨츠역'과 같다. 죽음이 삶과 단단히 결부되어 있듯이 삶은 늘 그곳을 스쳐간다. 하지만 삶이라는 기차는 그곳으로 부터 오직 멀어지기 위해 속도를 더해갈 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노이샨츠역'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언젠가는 그 경계를 넘어가기 위해 한 번은 내려야 할 곳이다. 한없이 이어지는 결말에 종지부를 찍기위해서라도 그냥 이렇게 말하자. "이 소설은 언제가 당신이 내려야 할 그 노이샨츠 역으로 불현듯 데려가는 소설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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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arover 2011-06-09 19: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수상한 라트비아인'을 재미있게 읽었는데..... 둘 다 매그레 시리즈죠^^

ICE-9 2011-06-10 00:10   좋아요 0 | URL
이프리트님 오랜만이네요^ ^
네. 수상한 라트비아인이 데뷔작이고 이 소설은 세번째로 나온 작품이에요.
제 생각엔 앞으로 나올 매그레 시리즈의 어떤 원형과도 같은 작품이 아닌가 싶어요.
 
알바니아의 사랑 일루저니스트 illusionist 세계의 작가 21
수사나 포르테스 지음, 조구호 옮김 / 들녘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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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바니아'하면 역시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작가 이스마일 카다레이다. 

그의 소설 '부서진 4월'을 통해 들여다보았던 알바니아는 소설이 1980년대라는 비교적 최근의 시간을 다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현대적이지 않은, 마치 여전히 중세인 것만 같은, 신화와 야만이 굳건히 버티고 있는, 그래서 어쩐지 비현실적으로만 보이는 그런 나라였다. 나중에 그 알바니아라는 나라가 유럽에 있다는 걸 알고는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카다레가 보여주었던 풍경으론 알바니아가 꼭 중동 어디쯤에 있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알바니아는 그렇게 이상한 나라였다. 유럽에서 유일한 이슬람 국가. 그리고 마치 유럽을 관통했던 역사적 흐름들이 어쩐지 알바니아만은 비켜나가버린 것 처럼 전혀 근대적으로 보이지 않는, 마치 고인 물 마냥 아주 오래도록 전해내려온 고유의 모습 그대로 존재하는 나라. 그 특이성과 항구적인 불변성은 유럽의 화약고라고도 불렀던 발칸반도에 자리잡은 알바니아의 지정학적 위치로 인하여 더욱 더 기묘하게 보였다. 그들은 어떻게 20세기를 휩쓴 전쟁의 불길 속에서도 자신의 전통을 지켜가며 생존할 수 있었을까?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알바니아의 궁금증을 키우고 있던 차에 또 하나의 소설이 불현듯 우리 앞에 도착했다. 그것이 바로 수사나 포르테스의 '알바니아의 사랑'이었다.

 수사나 포르테스가 그려내는 알바니아도 카다레와 그렇게 다르지는 않았다. 하지만 카다레의 '부서진 4월'이 주로 아직도 꿋꿋이 고래로 부터 내려온 전통을 고수하고 있는 북쪽 산악지대를 배경으로 쓰여졌다면 프로테스의 '알바니아의 사랑'은 알바니아의 수도 '티라나'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렇게 카다레가 역사의 중심에서 비껴나 그 역사적 시간성으로 환원되지 않는, 항구적인 대지와도 같이 변함없이 이어져 내려 온  알바니아의 본질을 보여주려했다면 포르테스의 '알바니아의 사랑'은 그 역사적 중심에서 시간에 따라 변화되어가는 알바니아의 모습 자체를 보여주려 한다. 아마도 그것은 카다레가 바로 알바니아 사람이고 포르테스는 알바니아 사람이 아니라 스페인 사람이라서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그녀는 그렇게 외부인이고 아무래도 참여자가 아닌 관찰자의 시선으로 밖에는 알바니아를 바라볼 수 밖에 없기에 그런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러한 관찰자의 시선은 마치 인류학자의 시선과도 같아서 참여자로서는 그를 둘러싼 상황이라는 테우리로 인하여 시선의 제약 때문에 볼 수 없는 그 바깥을, 관찰자는 내부와 외부 아울러 바라볼 수 있기 때문에 결국 알바니아에 대해서 보다 완전하고도 객관적인 지평을 열어보일지도 모른다. 

  불현듯 다가왔던 알바니아를 다룬 소설을 읽게 된 것은 바로 이러한 생각 때문이었다.  

  이 소설을 읽다보면 강하게 연상되는 영화가 하나있다. 

  바로 '붉은 수수밭'으로도 유명한 중국 감독 장이모우의 '국두'다.  영화 '국두'는 중국의 한 염색을 전문 으로 하는 집안을 배경으로 삼촌이 돈을 주고 데려온 신부와 조카가 금기를 어긴 사랑에 빠지는 것을 다룬 영화이다. 이것은 ‘알바니아의 사랑’에서 형의 아내와 금기의 사랑에 빠지는 동생의 관계와도 비슷하다. 결국 영화 ‘국두’에서 이 금기를 어긴 두 남녀는 아들을 하나 낳는데 조카는 아이의 앞에서 아버지 역할을 할 수 없어 번민한다. 이것 역시 ‘알바니아의 사랑’에서 주인공에 얽힌 출생의 비밀에서 드러나는 진짜 아버지의 존재와 유사하다. 나중에 삼촌은 중풍으로 쓰러지는데 이제 삼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어진 조카와 아내는 결국 그에게 태어난 아이가 그의 아이가 아니라는 것을 털어놓고 분노한 삼촌은 아이를 죽이려고 하지만 아이가 자신을 아버지라고 부르자 친자식처럼 여기고 살려한다. 하지만 결국 삼촌은 염색통에 빠져 죽고 아이는 사실은 자신의 부모인 그들이 그를 죽음으로 몰아갔다고 생각하고 복수를 하려한다. 영화는 이렇게 복잡하게 뒤얽힌 치정관계를 보여주는데 하지만 거기엔 단순히 금기를 위반한 사랑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보다 더 깊은 은밀한 의도가 숨어있다. 

  아마도 내 생각엔 여기에 깃든 보다 깊은 은밀한 의미는 그대로 이와 유사하게 얼혀진 치정 관계를 보여주고 있는 ‘알바니아의 사랑’에도 그래도 통용될 것 같다. 그럼 본래 영화 '국두'가 그 치정관계를 통해서 보여주려고 했던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중국이 거쳐 온 역사적 변화 과정이다. 그러니까 이 영화에서 금기에 빠져든 남녀 간의 사랑 얘기는 일종의 알레고리인 것이다. 여기에 비추어 보자면 영화속 등장인물들이 진정으로 의미한 바가 무엇인지 보다 명확하게 드러난다. 그러니까 삼촌은 공산 혁명이 일어나기 전의 중국(청나라)을 상징한다. 금기에 빠져든 조카와 아내는 그렇게 전통적인 중국을 무너뜨렸던 공산주의 혁명을 가리킨다. 그런데 그 세대는 또 그 보다 더 젊은 그렇게 그들의 아이에 의해서 부정되는데 그 아이가 의미하는 것이 바로 ‘문화혁명’이다. 그러니까 이들 사이에 벌어지는 모든 치정 관계는 그대로 중국이 거쳐온 역사적 과정을 온전히 드러내고 있는 것으로 장 이모우는 결정적으로 삼촌의 죽음을 보고 비로소 웃음을 터뜨리는 아이의 모습을 통하여 문화혁명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중국의 재건이 가능했음을 주장하고 또 부모에게 복수하려는 아이의 모습을 통하여 그렇게 재건된 중국이 사실은 삼촌이 상징했던 전통적이며 가부장적인 중국을 그대로 닮으려 했던 것은 아니냐고 은근히 비아냥거리는 것이다. 즉 작가가 영화 ‘국두’를 통하여 말하고 싶었던 진정한 의미는 그렇게 알레고리적으로 읽어야 비로소 드러나는데, 나는 수사나 포르테스의 ‘알바니아의 사랑’ 역시도 영화 ‘국두’처럼 단순히 금기를 위반한 남녀의 사랑 이야기가 아니라 알바니아의 역사적 변화 자체를 다루는 알레고리로 읽어야 하며 그 때서야 포르테스가 이 작품을 통해 말하고 싶었던 진정한 의미가 드러날 것이라 믿는다. 

  그렇다면 '알바니아의 사랑'을 알레고리적으로 읽을 때, 주인공이 상징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이렇게 보자면 일종의 프롤로그와도 같은 도입부를 지나 어린 시절의 주인공이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장면의 묘사가 눈에 띈다. 거기 자신의 집에서 주인공 이스마일이 가장 많이 머무르는 공간은 탑 꼭대기 방이다.(p.15) 그 방은 비좁은 나선형 계단 때문에 접근이 쉽지 않은 방이다.(p.14) 이것은 유럽에서 오래도록 유일하게 이슬람을 유지시켜온 그렇게 타자의 침입을 쉬이 허락하지 않았던 알바니아 하고도 어쩐지 유사해 보인다. 더구나 이스마엘은 신체적으로도 살집이 없고 뼈만 앙상하고 "특히 아치처럼 생긴 쇄골, 손목, 무릎이 그랬는데, 이들 부위는 몸이라고 하는 지도에 산맥처럼 두드러져 있었다."(p.33)로 묘사된다. 포르테스는 여기에 '몸이라는 지도에 산맥처럼 두드러져'라는 비유를 쓰는데 이것은 나중에 또 한 번 반복되는데 작가가 유독 이스마엘에게만 쓰는 표현이다. 즉 작가는 이스마엘의 신체를 하나의 대지로 바라보게 유도하는데 여기서 이스마엘의 신체는 대대로 군인으로 유명한 자신의 가문에 맞지 않게 아주 허약한 신체이다. 더구나 그것은 그의 형 빅토르의 신체와 대조되면 더욱 더 그 허약함이 두드러진다. 이것은 이스마엘이 신체적으로 어떤 별종임을 암시하고 그것은 그렇게 그에게 깃들어진 출생의 비밀을 함축함과 동시에 신체를 하나의 대지로 바라보게끔 하는 작가의 의도를 고려하면 그대로 유럽에서 북쪽 알프스 산맥으로 고립된 알바니아 자체를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드러난 바와 같이 주인공이 이 소설에서 진정 의미하고 있는 바는 '알바니아' 자체인 것이다. (따라서 제목 '알바니아의 사랑'은 그야말로 정확한 제목임을 알 수 있다. 이 소설은 정말로 '나라 알바니아'가 사랑하는 내용을 담은 소설이니까 말이다.) 

  이렇게 주인공을 알바니아로 여긴다면 그가 속한, 그렇게 이스마일을 지배하고 있다고도 볼 수있는 라드지크 가문 자체는 독재자 엠베르 호자를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이스마일과 라드지크 가문 사이의 관계의 변화로 증명될 수 있다. 처음에 이스마일은 아버지와 형 빅토르에게 모두 호의를 가진다. 그의 엄마가 이스마일이 뭐가 되고 싶냐고 묻자 그는 서슴없이 아버지처럼 대장이 되고 싶다고 말한다. 그렇게 그는 아버지와 형 빅토르 처럼 군인이 되고 싶었지만 결국 허약한 신체 때문에 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초반의 이스마일이 가지는 호의는 알레고리적으로 볼 때 이탈리아의 파시즘에 맞서 알바니아를 구해냈던 엠베르 호자에게 서슴없이 정권을 이양했던 알바니아의 모습과 그대로 겹친다. 하지만 그렇게 파시즘에 맞서 알바니아를 구해내었던 엠베르 호자는 스탈린과 비슷하게 나라를 고립시키고 오래도록 독재로 다스린다. 후반에 이스마일은 형의 아내가 된 헬레나와 함께 금기의 사랑에 빠지게 됨으로서 서서히 라드지크 가문으로 부터 멀어지는데 그것은 그대로 호자의 오랜 독재에 지쳐 서서히 저항의 움직임을 보이던 알바니아와 또 그렇게 겹친다.

  이렇게 이스마일을 알바니아로 라드지크 가문을 엠베라 호자로 보는 게 가능하다면 결국 금기의 사랑이라는 이스마일과 헬레나의 사랑은 단순히 사랑이 아니라 거기에 보다 은밀한 의미가 배여있음을 생각지 않을 수가 없다. 그렇다면 그들의 사랑은 무슨 의미일까? 여기서 우리는 헬레나의 의미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 소설에 대하여 한 리뷰는 '고대 그리스 비극의 맥을 잇는다'라고 했는데 그것은 무엇보다도 헬레나가 가지고 있는 의미 때문이다. 이 헬레나는 누구인가? 우리는 이 이름을 어디선가 또 본적이 있다. 바로 그리스 신화, 트로이 전쟁에서이다. 파리스의 심판에서 아프로디테의 손을 들어준 파리스에게 여신은 약속대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을 선물한다. 그녀가 바로 헬레나이다. 하지만 그녀는 스파르타의 왕비로 이미 한 남자의 아내가 되어있던 몸이었다. 그런 그녀를 파리스가 데리고 트로이로 달아난다. 그리고 그로인해 결국은 트로이를 멸망시킬 트로이 전쟁이 일어난다. 바로 여기서 우리는 헬레나를 이미 만났다. 트로이 전쟁의 헬레나는 이미 한 남자에게 매인 몸이면서 불륜에 빠졌다는 점에서 '알바니아의 사랑'에서의 헬레나와 겹친다. 이러한 존재적 겹침은 사실 보다 본질적인 의미를 담고자 하는 작가가 의도한 결과이다. 따라서 여기서 헬레나가 진정 상징하는 것은 그렇게 트로이 전쟁을 일으키는 존재, 그리고 결국은 트로이를 멸망시키는 존재로서의 헬레나이다. 이런 의미에서 고대 그리스의 비극은 '알바니아의 사랑'에서 다시금 재현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헬레나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인가? 그것은 헬레나로 인해 그녀를 유혹한 파리스의 모국인 트로이가 그렇게 무너졌듯이, 그와 똑같이 헬레나를 유혹한 이스마일이 속했던 라드지크 가문을 무너뜨리는 것, 그렇게 그것이 상징하는 독재체제에 균열을 일으키고 결국은 그 체제를 무너뜨리는 '여성성'인 것이다. 

  결국 이스마일이 그러한 여성성과 금기의 사랑에 빠진다는 것은, 금기란 것이 프로이트의 말대로 사회를 유지시키기 위해 최소한의 안전장치란 것에서 볼 때, 이 소설에서의 금기란 그렇게 엠베르 호자의 독재체제를 유지시키기 위한 최소한의 질서란 것을 상징하며 그것을 위반하여 개인의 욕망에 충실하는 것은 그렇게 체제유지를 위해서는 개인의 욕망을 가급적 억제해야만 하는 독재체제 자체에 대한 저항임을 드러낸다. 따라서 이스마일이 결국 헬레나와 사랑을 나누는 것의 보다 진정한 의미는 바로 이렇게 자신을 규정하고(이는 이스마일이 가진 출생의 비밀이 궁극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그는 출생의 비밀을 통해 자신이 알고 있는 현실이 의도적으로 조작된 것임을 깨닫는다) 그렇게 자신의 진정한 본질을 은폐시키는(이스마일의 아버지는 절대로 엄마를 엄마로 부르지 못하게 한다. 그래서 이스마일은 내내 엄마를 '그녀'라고 부른다. 그는 그렇게 진정한 엄마로 부터 떨어져나온 존재가 된다. (다른 하나는 스포일러가 될 것 같아 말하지 않겠다.)) 독재 체제 자체의 저항 행위인 것이다. 그리고 이 저항은 그렇게 독재에 의해서 규정되고 거짓으로 만들어진 정체성에서 벗어나 보다 가깝게 알바니아의 본질로 다가가려는 몸짓이 된다. 여기서 우리는 이스마일의 엄마나 헬레나가 다 같이 알바니아의 변방 태생이라는 것에 주목한다. 그렇게 그들은 엠베라 호자에 의해서 규정된 알바니아로 부터 벗어나 있는 존재들이었다.  더구나 이 알바니아의 변방이란 어떤 곳인가 이스마일 카다레에 의하면 그야말로 변함없이 지속되어 내려져 온 알바니아의 본질을 품고 있는 곳이다. 더구나 작가는 헬레나가 처음 드러나는 장면에서 그녀로 하여금 이스마일의 엄마 초상화를 마주하게 하여 거기서 그녀에게 "낯선 여자의 생각 속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P.17) 드는 것을 보여주어 사실은 이스마일의 엄마와 헬레나가 하나의 존재임을 은연중에 드러낸다. 그런데, 그 헬레나는 소설의 어느 부분에서 이스마일에게 이스마일 카다레의 '부서진 사월'을 읽고 있었음을 들킨다. 그 소설을 본 날 이스마일은 이렇게 속내를 드러낸다. 

  시를 쓰면서 욕망을 억눌렀다. 자신이 살고 있는 집을 미워하고, 숨이 막힐 정도로 폐쇄된 나라, 알바니아라고 하는 거대한 벙커에 생길 수 있는 가장 무의미하고 작은 틈새마저도 꽉꽉 막아버리기 위한 작업에 대대적으로 몰두하고 있는 나라을 미워하면서 욕망을 억눌렀다.(P.138) 

  여기서 이스마엘은 두 가지를 고백한다. 자신의 가문과 현 알바니아 독재체제에 대한 증오와 헬레나를 향한 욕망. 이 두가지가 모두 하나의 고백으로 담겨져 나오는 것은 그대로 그 증오와 욕망이 결국 연쇄적인 것임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즉 여기서 더없이 분명해지는 것이다. 이스마일이 헬레나와 사랑을 나누는 행위는 자신이 증오해 마지 않는 독재체제로 부터 벗어나 카다레가 그렸던 본질적인 알바니아의 모습으로 다가가려는 욕망의 발현이라는 것이. 더구나 작가는 또 하나의 장치를 통해 더욱 이것을 강조한다. 그것은 바로 이스마일과 헬레나가 처음으로 접촉을 했던 날 내렸던 '비'를 통해서이다. 작가는 내리는 비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한다. 

  지붕 처마에서 힘차게 떨어지는 빗물이 정원의 흙을 파헤쳐 마침내 흙 표면에 작은 구멍들을 팠다.(P.168) 

  그들이 처음으로 신체적 접촉을 했던 날, 내리는 비는 그대로 대지에 구멍을 낸다. 그렇게 비는 균열을 일으키는 존재이고 이것은 헬레나가 가지고 있는 의미와 동일하다. 더구나 이 비는 이스마일의 아버지가 시체가 되어 발견되고 그가 체포되는 순간 다시금 예감으로서 나타난다. 또 한 번에 내려올 거센 비는 아마도 독재체제의 종말을 고하는 그런 비일 것이라는 암시를 잔뜩 머금은 채 말이다. 여기서 보다 분명하게 되듯이, 결국 이 날 내리고 있는 비는 바로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폭압에 의해 조작되고 거짓으로 위장된 체제의 장막이 그들의 사랑으로 이제 찢겨갈 것임을 암시하는 것인 셈이다.  작가는 이렇게 내리는 비를 통하여 그들의 사랑이 가지는 의미를 더 한층 견고하게 다듬는다. 

  그런데 왜 이렇게 작가는 이러한 저항으로서의 사랑의 의미를 견고하게 만들면서까지 보여주려하는 것일까? 그 까닭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는데 그것은 알레고리적으로 이들이 보여주는 사랑의 과정에 그대로 국가 알바니아가 거쳐온 역사적 과정을 담아내기 위해서다. 그러니까 이스마일이 헬레나를 만나 사랑에 눈 떠가는 과정은 서서히 독재체제에 대한 저항에 눈 떠가는 알바니아를 보여주는 것이고 결국 헬레나를 만나 사랑을 이루는 과정은 이제 알바니아가 더이상 독재체제를 용납하지 않을 것임을 선언하는 장면과도 같다. 그렇게 결국 소설에서도 현실적으로도 알바니아는 독재를 벗어났다. 하지만 이스마일 자신은 아버지를 살해했다는 오명을 뒤집어쓰고 망명자의 신세가 된다. 여기에는 감독 장이모우가 영화 '국두'에 현재 중국에 대한 평가를 은밀히 감추어두었던 것 처럼 그렇게 현재의 알바니아에 대한 수사나 포르테스의 평가가 은밀히 감추어져 있다. 결국 알바니아 자체를 뜻하는 이스마일이 망명자가 된다는 것은 그렇게 현재의 알바니아가 그토록 추구했던 본래적 알바니아와는 완전히 거리가 먼 존재임을 에둘러 말해주는 것이다. 

   이제 알레고리고 읽었을 경우 말할 수 있는 것들은 거의 다 말한 것 같다. 나중에 읽을 이의 즐거움을 위하여 보다 자세하게 내용을 언급하지 않기 위해서는 이쯤에서 독해를 저지하는 것이 적정할 것 같다. 하지만 수사나 포르테스가 '알바니아의 사랑'을 통해 정말 전하고 싶었던 것을 드러냄에 있어서는 결코 모자람이 있다고 할 수는 없다. 말하지 못한 것은 지금까지 말했던 것을 더욱 확고하게 만드는 세부일 뿐이고 거대한 몸통은 드러낼 수 있는 한 다 드러냈다고 스스로 생각한다. 아무튼 수사나 포르테스는 소설에서 보여지는 것의 이면에 이렇게 알레고리적 의미를 가미함으로서 감독 장이모우가 영화 '국두'를 통해서 그랬던 것 처럼 자신이 '알바니아의 사랑'을 통해서 말하고 싶었던 바를 보다 충실하게 전달하고 있다. 거기서 우리는 개인이 나누는 금기마저 위반한 사랑이 단순한 사랑의 형태가 아니며 그것은 차라리 독재에 대한 저항이며 보다 본질적으로는 이스마일 카다레의 소설에서 나타난 것과 같은 보다 순수한 알바니아의 본래적 모습으로 다가가려는 노력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것은 그대로 독재체제에서 벗어나기까지의 알바니아가 거쳐갔던 역사적 과정의 재현이기도 하다. 본질로서 변하지 않는 알바니아의 모습에 천착했던 이스마일 카다레와는 달리 수사나 포르테스는 변화하는 알바니아를 담는다. 하지만 단순한 역사적 사실의 재현이 아니라 남녀간의 금기마저 위반하는 사랑의 형태로 보여줌으로서 그렇게 간절히 서로를 원했던 만큼 독재에서 벗어나려는 열망 또한 간절했음을 더욱 더 생생하게 느끼도록 해준다. 우리는 여기서 문학이 가지는 또 하나의 긍정적인 가능성 마저 엿보게 되는데 그것은 문학적 상상력이 단순한 사실의 기술 보다 더욱 더 재현에 있어서 풍요롭고 전달에 있어서 생생할 수 있다는 사실의 확인이다. 지극히 감성적으로 느껴지는 수사나 포르테스의 문체가 오히려 이렇게 보다 더 풍요롭게 역사적 변화마저 재현하고 있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포르테스가 이러한 문학이 가진 또 하나의 긍정적인 가능성을 아주 성공적으로 이루어내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끝으로 하나 더. 주인공 이스마일은 헬레나와 직접 접촉하게 될 때까지 시를 씀으로서 욕망을 억누른다. 그렇게 시를 쓰는 것은 그에게 일종의 저항행위였다. 그러니까 헬레나와 만나 그녀와 의 사랑을 통하여 저항하게 될 때까지는 말이다. 그런데 이것은 그대로 작가 이스마일 카다레가 문학을 통하여 알바니아의 독재체제에 저항했던 것과 유사하다. 그러고 보면 주인공 이스마일은 이름마저 이스마일 카다레의 이름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혹시 수사나 포르테스는 처음부터 이스마엘 카다레를 주인공으로 염두에 두고 이 소설을 썼던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의심이 퍼뜩 든다. 더구나 소설의 결말에서 보여지는 주인공의 모습을 생각하면 그 의심은 더욱 더 커진다. 소설의 결말에서 주인공 이스마일은 이탈리아로 망명하게 되는데 현실의 작가 이스마일 카다레도 결국은 독재 체제의 탄압을 이기지 못하고 알바니아를 떠나 프랑스로 망명했던 것이다. 이토록 현저히 드러나는 둘의 유사성은 어쩐지 그저 우연으로만 보기가 어렵게 만든다. 확인할 길은 없지만 어쩌면 정말로 포르테스는 카다레를 주인공으로 삼아 이 소설을 썼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상정하고 읽으면 또 다른 색다른 맛을 이 소설을 통해 음미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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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한 라트비아인 매그레 시리즈 1
조르주 심농 지음, 성귀수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5월
평점 :
품절


 

  뭐든 시리즈의 데뷔작이라면 관심의 대상이 될 것이다. 그것도 문학사에 있어 아주 뚜렷하고 거대한 족적을 남긴 시리즈의 데뷔작이라면 더욱 더! 그리고 만일 그 시리즈의 팬이라고 한다면 더!더! 더욱 그럴 것이다. 셜록 홈즈의 팬에겐 데뷔작인 '주홍색 연구'가 그럴테고, 엘큘 포와로의 팬에겐 데뷔작인 '스타일즈저택의 죽음'도 역시 기필코 보아야 할 작품이 될 것이다. 그건 아마도 팬으로서 전설의 시작을 확인하고픈 마음일수도 있겠고 처음의 시작이 어땠는지를 살펴 사랑하는 캐릭터가 시간에 걸쳐서 어떻게 변화해 갔는지 그 역사를 확인하고픈 마음이기도 할 것이다. 

  그와 똑같이 매그레의 팬임을 자처하는 나에게도 데뷔작 '수상한 라트비아인'은 당연히 기필코 보아야할 작품이다. 전설의 목격이자 역사의 확인으로서... 

   1929년 9월 네델란드 항구의 델프제일에서 '괴짜'를 뜻하는 그의 배 '오스트로고토호'가 수리되고 있는 동안 그 옆의 궤짝에 앉아있던 심농에게 불현듯 떠오른 어떤 환상에 의해 이 매그레 데뷔작은 시작되었다고 한다. 전 세계 50개 이상의 언어로 번역되고 5억권 이상이나 팔려나갔다는 시리즈의 시작으로서는 도저히 믿기 힘들 정도로 즉흥적인 창조이다. 그래서 혹 이 작품 역시도 즉흥적으로 창조된 작품들이 흔히 가지고 있을 것이라 여겨지는 약점들 그러니까 개연성 없는 플롯, 평면적인 캐릭터, 우연의 남발, 억지스러운 해결등이 있으리라 생각할 수 있겠지만 안심하시길, 그런 약점은 전혀 가지고 있지 않으니까. 오히려 그렇게 쓰여졌기 때문인지 몰라도 문장은 마치 흔들리는 배에서 급하게 쓰여진 것 처럼 군더더기 없이 핵심만 딱딱 던져줄 정도로 단순 명료하고 거기다 내처 신들린듯 써내려갔는지 전개도 먹이를 덮치기 직전 웅크렸더 덤벼드는 표범처럼 재빠르다. 그렇다고 구성이 빈약한 것도 아니다. 사실 매그레 시리즈를 과연 추리소설로 보아야 하는가에 대해서 나 자신은 반감이 매우 크지만 아무튼 추리소설이라는 통념을 받아들여 그 입장에 서서 판단해 보아도 소설의 동력이 되는 수수께끼는 빈틈없이 공정하게 잘 해결되고 있다. 결론적으로 이 소설은 추리소설로 보아도 꽤 성공적이라고 보여지며 지금으로 부터 70여년 전에 씌여졌다고는 그것도 그렇게 즉흥적으로 씌여졌다고는 도저히 믿지 못할 만큼 현대적이고 탄탄한 재미를 느끼게 해준다. 

   하지만 이러한 추리소설의 평가만으론 이 작품이 가진 진정한 매력을 말하기엔 턱없이 모자른다. 어차피 당신 역시 이 책을 읽게되면 나중에 남는 것은 추리소설로서의 재미가 아닐 것이다. 분명 추리소설로서의 지적 쾌감 같은 것은 결말에 가서 범인의 고백을 듣게 되면 그로부터 받는 묵직한 울림 때문에 더이상 신경쓰지도 않을테니까. 그래서 앞서도 말했듯이 나는 이 소설이 추리소설이라 불리는데 저항감이 있고 사실 추리소설로서의 잣대는 이 소설에 있어 별로 중요한 것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뭣보다 이 소설에 있어 가장 압도적인 면모는 매그레를 매개로 심농이 그려내는 한 인간의 서글픈 초상이기 때문이다. 매그레를 통해 우리가 정말 보게되는 것은 사건이 아니라 언제나 사람이다. 그건 심농 자신이 고백한 바 있다. 언젠가의 인터뷰에서 그는 매그레를 통해 사건을 중심에 놓기 보다는 어디까지나 한 인간을 그 중심에 놓는다고 말했다. 그래서 추적이라는 것도 사건의 해결을 위해서가 아니라 정말은 그 인간이 왜 그런 짓을 했나? 이해하기 위해서라고. 그렇게 심농에게 중요한 것은 흔히 추리소설에서 묻는 '누가(WHO)'가 아니라 '왜(WHY)이며 여기에서 보자면 이 데뷔작은 그야말로 충실하게 거기에 대해 답변을 하고 있는 셈이라 할 수 있다. 

    언제나 그렇듯이 작품이 자신이 대답해야 할 질문을 '왜(WHY)'로 삼게 되면 액션은 줄어들고 관조적이 되기 쉬운데 그래도 이 작품은 데뷔작이라서 그런지 나중의 매그레 시리즈들 보다 훨씬 더 많이 액션이 넘쳐난다. 그래서 어쩌면 심농이 본격적으로 매그레적 세계를 완성하기 전의 그 과도기적 작품으로도 볼 수 있을 듯 하다. 거기다 이 작품의 테마라고나 할까? 아무튼 천착하고 있는 주제는 일종의 '정체성 바꾸기' 같은 것인데 사실 이것은 뒤이은 매그레 시리즈(바로 뒤이은 '갈레 홀로 죽다'도 여기의 변주라 할 만하다)나 별개의 작품에서도 자주 반복되는(독자적 작품으로는 33년에 나온 '런던에서 온 사나이'에서 아주 유사하게 반복되고 있다. 그리고 이 작품은 2007년 벨라 타르에 의해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것으로 바로 이 소설 '수상한 라트비아인'에는 심농이 평생 꾸준히 천착해온 주제의 원형 같은 것이 담겨져 있다고 볼 수 있다. 

   데뷔작에서 드러나는 심농 소설의 특징은 두 가지다. 하나는 '타인의 삶'에 대한 관심이고 다른 하나는 '개인이 겪는 정체성의 변화'이다. 이 작품이 태어난 연대를 생각해보면 그야말로 추리소설의 황금기라고 할 만하다. 하지만 그 어떤 추리소설에서도 매그레가 보여주고 있는 것들을 보여주지 않았다 그래서 매그레가 드러내는 특징적 세계는 오로지 매그레 혼자만의 독보적인 것이었다. 그렇다면 왜 추리소설의 대세를 거스르면서까지 심농은 그러한 특징들 - 타인의 삶에 대한 관심, 개인이 겪는 정체성의 변화 - 을 천착했던 것일까? 그것은 또다시 이 소설이 태어난 연대의 유럽의 정치상황을 살펴보면 어느정도 대답이 될 것 같다. 

   1920년대와 1930년대는 그야말로 유럽은 정치상황적으로 혼란스러운 시기였다. 1차대전의 휴유증이 아직 가시지 않은 가운데 많은 이들이 어려운 경제적 형편으로 곤란을 겪었고 따라서 범죄가 급증했다. 그러한 힘든 경제사정 가운데  이데올로기적으로도 혼란한 상황이었다. 당시의 유럽은 크게 세 개의 거대한 이데올로기가 충돌하고 있었다. 자유민주주의, 파시즘 그리고 사회주의 이렇게. 이러한 이데올로기적으로 혼란스러운 상황은 그대로 그 안에 살고 있는 개인들에게도 영향을 미쳐 그들 역시도 스스로 갈피를 종잡을 수 없는 형국이었다. 거기다 독일을 중심으로 성장하여 점차 세력을 확장해가는 파시즘과 소련의 사회주의 독재화 과정속에서 동유럽과 러시아의 많은 유대인들과 사회주의에 내몰린 사람들이 중부와 남부 유렵으로 흘러들어왔다. 이러한 대량 이주민의 유입은 당연하게도 원래 거주하고 있던 이들에게는 커다란 두려움을 야기시켰다. 말하자면 이 시대의 유럽인들은 내부적으론 이데올로기적 혼돈을 외부적으로 전혀 다른 이민족들에 대한 두려움을 겪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바로 심농의 매그레가 보여주는 특징들은 이러한 상황이 그대로 투영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그러니까 많은 이민자들의 유입, 그렇게 전혀 다른 곳 다른 시간을 살았던 낯선 자들의 대량 유입은 심농에게 타인의 삶에 대한 관심을 촉발시켰고 거센 이데올로기적 혼란들은 심농에게 한 개인이 겪는 정체성의 변화에 주시하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반응은 비단 심농만은 아니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아가사 크리스티 또한 여기에 민감하게 반응한 작가였다. 세심하게 읽어본 이들은 아가사 크리스티의 소설들이 끊임없이 자신이 알지 못하는 타자에 대한 공포를 그리고 있음을 알 것이다. 특히나 미스 마플이 등장하는 작은 시골마을을 무대로 벌어지는 추리소설의 경우엔 더 명확하게 이러한 불안감이 드러나고 있다. 아가사 크리스티는 그 모든 작품들에서 끊임없이 러시아나 동유럽으로 부터 넘어온 이민자들을 그린다. 그들은 하나같이 그 의중을 알 수 없는 존재들로 그려진다. 하지만 이러한 묘사는 특별히 아가사 크리스티가 보수적이거나 국수적이어서가 아니라 상황의 변화에 민감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 전까지는 누구네 집에 누구의 숟가락이 몇 개가 있는지 그렇게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훤히 다 알았었는데(미스 마플의 작은 전원마을을 배경으로 이루어지는 추리 소설들은 늘 이것을 강조하는 걸 볼 수 있다.) 그런데 본격적으로 이민자들이 흘러들어온 뒤 부터는 남들이 어떻게 사는지 전혀 알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타인들은 저마다 의혹을 지닌 존재로 때로는 깜짝놀랄만한 비밀을 가진 존재로 아가사 크리스티 앞에 나타난다. 그녀는 거기에 대한 혼란을 겪었고 두려움을 느꼈다. 바로 그런 반응이 그녀의 작품 속에 그대로 투영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타자에 대한 관심은 두려움의 또다른 표현이었다. 하지만 심농의 경우는 아가사 크리스티와 달랐다. 바로 그 다른 점이 같은 것을 느꼈으면서도 아가사 크리스티의 경우엔 퍼즐러 식의 심리 추리소설로 심농의 경우엔 오히려 인간의 삶에 더욱 더 천착하는 추리소설로  다르게 나아가도록 했는지 모른다. 아가사 크리스티와는 다르게 심농은 그러한 낯선 타인의 삶을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이해의 대상으로 바라본다. 심농은 매그레를 통해 그들의 삶은 우리가 보고 들어야할 삶이며 결국엔 껴안고 가야 하는 삶임을 보여준다. 매그레의 깊은 연민의 시선들은 너와 나의 삶이 그리 다르지 않다는 통찰이며 아무리 서로가 다른 곳에 다른 시간을 살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결국엔 이해받지 못할 삶은 없다라는 선언이다. 이렇게 아가사 크리스티와 심농의 소설들이 완전히 다르게 걷게 된 이유는 뭘까? 그것은 아마도 아가사 크리스티는 미스 마플 처럼 오래도록 한 곳에 머물렀고 심농은 반대로 아주 많이 정처없이 유랑을 했기 때문은 아닌지 속 편하게 생각해 본다. 낯선 곳과 낯선 사람들과의 만남은 언제나 자신의 세계를 조금씩은 허물어뜨리는 경험을 가져다 주니까 말이다. 

   아마도 매그레가 나온 즉시 얻게된 커다란 성공 또한 이렇게 동시대의 유럽 사람들이 겪고 있던 타인에 대한 불안한 심리와 이데올로기적 충돌에 따른 정체성의 변화 같은 것을 잘 드러내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은 매그레가 펼쳐보이는 작품 속 등장인물들에게서 자신과 조금 아니면 아주 많이 닮은 모습들을 보았을 것이며 그렇게 심농의 동정적인 시선 속에 오롯이 그려지는 범죄자의 삶을 보며 그들을 동정하였듯이 자신을 동정하고 또한 매그레가 범죄자에게 보여주는 연민을 통해 스스로 위로받았을지 모른다. 아마도 그래서 그들은 기꺼이 매그레를 자신의 옆자리로 초대했던 것이리라. 아무튼 이렇게 앞서 나온 버즈북의 제목 그대로 매그레는 삶을 수사하고 삶 자체를 담는다. 때문에 범인 찾기에만 초점을 맞춘다면 버리는 것이 훨씬 많고 또한 별 재미도 느끼지 못하리란 걸 미리 알려두어야겠다.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나는 가수다'에서 임재범이 '여러분'을 부를 때 했던 그것. 그러니까 하나의 영혼을 온전히 바라보기 위해 우리가 하는 것. 모든 선입관과 판단의 무장해제 그것이다. 매그레의 소설들은 깊은 밤과 불면의 새벽을 위한 소설이다. 그렇게 오로지 고독한 자기 대면의 시간 가운데서 읽어야 하는 소설이다. 루이스 세풀베다든 헤밍웨이든 한결같이 고독한 시간에 벗 삼기에 최고다라고 말하는 것에 정말 유념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정말 그렇게 읽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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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와로 2011-05-29 2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헤르메스님이 오픈키드님이셨군요..! 물만두 추리소설 대회 1등이셨던..ㄷㄷㄷ
남다른 안목이 돋보이는 서평인 듯 합니다 ㅋ

ICE-9 2011-06-04 02:42   좋아요 0 | URL
포와로님 반갑습니다.
부끄럽습니다. 그저 운이 좋았을 뿐이라서^ ^;
어느새 제 서재까지 찾아오셔서 글까지 남겨주시고
칭찬까지 해 주시니 정말 감사합니다.
 
검은 계단
루이스 베이어드 지음, 이성은 옮김 / 비채 / 2011년 4월
평점 :
절판


 

 '검은 계단'은 루이스 베이어드의 '미스터 티모시', '더 페일 블루 아이'에 이은 세번째 팩션이다. 세 소설 모두 19세기를 시대적 배경으로 하면서도 공간적 배경이 되는 나라는 다 다르다는 특색이 있다. '미스터 티모시'는 19세기의 영국을, '더 페일 블루 아이'는 19세기의 미국을 그리고 본 작품 '검은 계단'은 19세기의 프랑스를 각각 그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렇게 다른 나라들은,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또 그렇게 그 시대 그 나라의 대표적 작가의 분위기를 강하게 띠고 있는데, '미스터 티모시'가 '디킨스'의 분위기를(이 소설의 주인공 티모시는 이제는 자라서 성인이 된, 바로 디킨스의 '크리스마스 캐롤'에 나오는 꼬마 팀이다.)  '더 페일 블루 아이'가 '에드가 알란 포'의 분위기를(에드가 알란 포가 아예 직접 등장한다. 이 소설은 포의 짧았던 미 육군생도시절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띠고 있다고 한다면 이 소설 '검은 계단'은 '알렉상드르 뒤마'의 분위기를 강하게 띠고 있다고 하겠다.(이 소설의 설정은 뒤마의 '철가면'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  세 작품의 미국판 표지들 -  

 

   때문에 이런 생각도 든다. 혹 이 세 작품들은 어떤 개인적인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나온 일련의 작품들이지 않을까 하는. 비슷한 시대를 배경으로 하면서도 나라를 달리하여 각 나라마다 가장 대표적이라 할 만한 작가들의 분위기로 직조되는 이 소설들엔 분명 아무래도 어떤 작가의 의도가 개입되어 있는 것 같다. 더구나 최근 발간된 후속작 '더 스쿨 오브 나이트'를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왜냐하면 그 소설은 현재의 미국에서 엘리자베스 시대의 영국을 보는, 그렇게 두 세기의 서로 다른 얘기들이 겹쳐진 그런 소설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이렇게 보는 것도 무방할 것 같다. 그러니까 '미스터 티모시'에서 '검은 계단'까지 루이스 베이어드는 19세기를 19세기적 시선으로 바라보는 일종의 '퍼스펙티브 프로젝트'를 끝내었고 '더 스쿨 오브 나이트'에선 이제 하나의 새로운 전환점을 만들려한다고. 

  만일 이 가정이 맞다면 왜 루이스 베이어드가 하필 19세기적 퍼스펙티브에 따라서 일련의 세 작품을 완성했는지 이유가 보다 분명해진다. 그것은 소설이 배경으로 하고 있는 시대와 공간적 배경을 고려하면 보다 명확하다. 이 세 작품들은 모두 이른바 '근대'라는 것을 태동시켰던 가장 대표적인 움직임들의 휴유증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미스터 티모시'는 영국의 산업혁명 '더 페일 블루 아이'는 남북전쟁 마지막으로 '검은계단'은 프랑스 대혁명의 휴유증을 다루는 것이다. 결국 베이어드는 인류 역사상 가장 거대한 이념들이 인간의 영혼들을 마구 유린하던 시절, 그렇게 커다란 정신적 격변기라 할 수 있는 것을 소설에 담아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소설 속 시간들은 언제나 그 격변기로 부터 수십년이 지난 다음이다. 그러니까 베이어드의 관심은 현재 진행중인 격변기가 아니라 그 격변기가 지나간 후 어떠한 것들이 남았는가에 있는 것이다. 그렇게 베이어드가 소설을 통해 집중하는 것은 그 격변기가 인간의 영혼에 남긴 흔적 혹은 상처 같은 것들이다. 때문에 베이어드는 이 흔적 혹은 상처를 제대로 파헤치기 위하여 그것들을 모두 한 인간에다 집약시킨다. 바로 소설 초반에 나타나는 시체들은 그러한 집약된 형태가 드러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게 그것은 누군가의 눈에 밝혀져야 할 대상이 되어 상태와 상처가 관찰가능한 하나의 객체가 되고 나아가 추적을 발동시키는 단서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시대적 격변이 인간의 영혼에 남긴 생채기를 쫓고자 하는 베이어드의 의도는 결국 그의 소설들을 미스터리로 만들고 그의 눈은 검시관의 그것이 된다.

  시체를 꼼꼼하게 검시하는 검시관... 이것은 베이어드가 그 시대를 바라보는 시선이기도 하지만 자신의 작품을 형상화하는데 있어서 하나의 예술가적 자의식이기도 하다. 때문에 베이어드의 팩션에는 늘 하나의 찬사가 따라 붙는다. 그것은 그 어떤 팩션들 보다도 아주 세밀한 부분에 이르기까지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정확히 복원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찬사는 그야말로 베이어드가 검시관이 조그만 증거도 놓치지 않으려 꼼꼼하게 시체를 검시하듯 그렇게 자신의 작품 세계를 형상화했기에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시대적 격변이 남긴 흔적과 상처를 쫓는 검시관의 시선과 검시를 하듯 세부까지 꼼꼼한 인물과 시대상황의 복원을 가지고 궁극적으로 베이어드가 하고자 하는 것은 무얼까? 우리는 그걸 묻지 않을 수 없다. 그저 미스터리가 해결되는 쾌락 때문인가? 아니면 처음으로 경찰 기구가 만들어지는(일례로 '검은 계단'의 비독은 아시다시피 프랑스 경시청을 만들게 한 장본인이다.) 특정 시점에 집중하여 경찰력으로 상징되는 국가 권력이 형성되는 것을 보여주려 함인가? 이것도 저것도 물론 답이 아니다. 베이어드가 결국 보여주려 하는 것은 그 시대적 격변기에 처한 한 인간의 윤리적 갈등과 선택이다. 시대적 격변기는 거세한 노도와 같아서 인간을 마구 휘몰아쳐간다. 다른 많은 이념들을 가지고 사람들은 저마다 그 격변기에 뛰어들지만 언제나 꿈은 배신으로 희롱되기 마련이고 신념은 현실과 타협하기 마련이다. 그렇게 저마가 그 격변기의 흐름 앞에서 사람들은 윤리적 결단을 내려야 하는 순간들을 맞는 것이다. 과연 인간은 그 거대한 파도 처럼 몰려오는 시대적 요구 앞에서 자신의 개인적 신념에 따른 행동을 할 수 있을 것인가? 베이어드가 작품들을 통해 궁극적으로 묻고자 하는 것은 바로 그것이다. 바로 이 소설 '검은 계단'에서 루이 샤를의 존재 자체가 그러한 질문인 것이다. 

  '검은 계단'은 그렇게 미스터리를 넘어 궁극적으로는 독자에게 윤리적 질문을 던지는 작품이다. 베이어드의 현실적이면서 풍부한 인물 묘사는 그 질문 앞에 선 개인의 고뇌를 생생하게 느끼게 해준다. 더하여 세밀하게 복원한 당시의 시대 상황은 현장성을 넘치게 해 슬그머니 독자 자신을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해야 하는 자리로 인도한다. 그 자리에 섰을 때, 과연 당신은 어떤 대답을 할까?  지금 나는 그 무엇보다도 그것이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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