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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1 - 송지나 장편소설 ㅣ 신의 1
송지나 지음 / 비채 / 2012년 12월
평점 :
요즘 '힐링'이 대세다. 세계 성인 자살률 1위의 나라답게 얼마나 많이들 아프고 힘든 것인지 세대를 막론하고 성별에 관계없이 여기서는 위로, 저기서는 치유. 그렇게 모두들 '힐링'을 찾는다. 이렇게 모두가 아프고 힘들다는 것. 그렇게 오늘날 고독과 좌절, 무기력과 우울증이 흑사병처럼 만연되어 있다는 사실은 한 가지 진실을 거꾸로 드러내는 듯 하다. 그건 그 힘듦과 아픔의 원인이 개인에게서 비롯되고 있지 않다는 것. 그 개인을 넘어선, 뭔가 보다 구조적인 것. 정확히 말하자면 우리가 거하고 있는 전체 시스템 자체가 문제 있다는 것을 말이다. 물론 우리는 그걸 어렴풋이 느끼고 있다. 그 징후는 이미 몇 년 전에 선풍적 인기를 끌었던 마이클 센델의 '정의란 무엇인가' 열풍에서 드러났다. 그건 우리가 익히 배워왔고 지켜야 한다고 믿었던 가치들과 현실적인 세상이 보여주는 괴리감 속에서 태어난 것이었다. 내가 믿었던 가치들이 세상의 폭력과 탐욕 앞에서 여지없이 허물어지는 것을 보면서 '과연 내가 믿어왔던 것은 무엇인가?' 혹은 '도대체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망연자실함 가운데 떠올랐던 질문들의 해답을 스스로 찾아보려는 노력이기도 했다. 우리는 모두 그 때서야 세상이 가면을 벗고 그 진정한 얼굴을 드러낸다고 생각했고 그동안 우리가 믿고 생각했던 것은 한낱 달콤한 꿈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뒤이어 나타난 멘토에 대한 열풍도 사실은 '정의란 무엇인가'에 대한 열풍의 이유와 그리 다르지 않았다. 세상은 우리가 생각했던 방향으로 움직이지 않고 있었고 점점 멀어지는 내가 꿈꾸는 세상과의 간극은 매일 우리를 절망하게 만들었지만 그래도 지켜온 믿음을 버리고 싶지 않다는 열망이 내가 모르는 것을 일러주는 사람으로서의 멘토가 아니라 나와 같은 것을 생각하고 나와 같은 것을 꿈꾸는 사람으로서의 멘토를 찾게 만들었다. 그렇게 '이기적 탐욕'이라는 한가지 색깔로 채색하려는 세상에 맞서 자신의 색깔을 끝까지 지키려 스스로 영토를 만들어 나갔던 흐름이 일종의 '멘토' 찾기의 열풍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런 자들은 안다. 진정으로 제도적 힐링을 하지 않고서는 결코 개인의 힐링 또한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그것은 마치 환부는 손대지 않고 내버려 둔 채 진통제만 먹는다는 것과 같다는 것을. 환부를 도려 낼 진정한 '한 방'의 힐링이 필요했다. 때문에 그들은 기다렸고 새끼 손가락을 수줍게 구부리듯 서로의 동지됨을 확인하며 서로 위로하고 지탱해주며 같이 거세게 내리는 세상의 비를 맞으려 했었다. 그렇게 세월을 견뎠고 이제 그 긴 겨울의 끝이 비로소 보이는 듯 했다. 대선이 다가온 것이다.
대선이 끝나고 싱크홀이 생겨버린 마음에 술을 들이부으며 크리스마스 이브를 보낸 다음 날.
세상의 모든 소음과 격리된 채 송지나의 '신의'를 읽었다. 허망한 마음에 숙취까지 가세하다보니 그 날 오전의 내 시야는 온전하지 못했었는데, 새삼 그 책의 제목이 눈에 들어 온 것이다. '신의'란 드라마가 있었다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보지는 못했다. 송지나씨가 쓴 드라마라서 관심은 있었지만 그 때는 정말 일이 많아서 어쩔 수가 없었다. 그런데 소설로 나왔다. 드라마가 방영되고 난 뒤에 소설로 나오는 것은 또 처음인 것 같아 적당히 신기했고 그래서 한 번 읽어 볼 마음이 생긴 것인데 그 때까지 난 제목의 '신의'가 이 '神醫'인 줄 알았다. 소개에서 여주인공이 고려 사람들에게 '하늘에서 내려온 의사'로 불린다고 읽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날 새삼스럽게 들여다 본 제목의 한자는 그게 아니었다. 믿음을 뜻하는, 정확히는 약속을 지키는 것을 의미하는 '信義'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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왠지 글자가 뭉클했다. 그것만큼 또 무가치하게 버려진 말은 또 없다고도 생각되었다. 사실 알고보면 1500만에 가까운 사람들은 퇴색되어버린 그 말이 지닌 본래의 빛을 되찾아주고 싶다는 오로지 한가지 바람으로 기꺼이 한 표를 던졌다고 할 수 있었다. 선거 때의 공약이 표를 끌어모기 위한 홍보용에 불과하다며 당당하게 말을 바꾸는 세상이 아닌. '국민의 뜻대로' '국민을 위하여' '국민의 이름으로' 등등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아이가 엄마를 찾듯 '국민', '국민' 하지만 하는 걸 가만히 보면 막상 그 '국민'이 대체 누구를 말하는 것인지 궁금해지는 세상이 아닌. 말이 제 뜻 그대로 쓰이며 그 말로 이루어진 '법'을 비롯한 약속들이 엄중히 지켜지는, 그렇게 '신의'가 온전히 제 무게를 갖는 세상을 바라면서 던진 표였다. 가느다란 하나의 지류지만 그대로 꿋꿋하게 세상의 한파를 견뎌오던 사람들이 모처럼 서로 만나 하나의 커다란 강줄기가 되어 바라는 세상을 향한 새로운 물줄기를 열어보려 했던 것이었다. 하지만 강의 자연스러운 흐름을 인위적으로 가로막는 저 4대강에 수도 없이 널린 '보'들 처럼 현실의 장벽은 강했고 우리들은 신의가 사라져 버린 시대가 사람들의 마음 속에 어떤 폐허를 남겼는지 쓸쓸히 지켜보아야 했다. 물론 그건 익숙한 풍경이었다. 뭔가 되겠구나 하는 희망이 잠시 잊게 만들었을 뿐.
소설 '신의'의 배경은 고려말이다. 원나라를 등에 업고 기철이 왕보다 더 큰 권세를 부리며 지식인들은 앞다투어 그에게 아부 떨기 바빴던 시기. 권력 앞에 이념은 빛을 잃고 오로지 껍데기로만 남아 오히려 그들의 홍보를 위해 쓰이던 시기. 지식이라는 것이 지켜야 할 것을 지키며 신념을 굳건히 하고 낮은 자들을 위해 쓰이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출세와 탐욕을 위한 아부와 타산 그리고 협잡을 위해 쓰이던 시기. '신의'라는 것이 패배한 군대의 깃발만큼이나 갈가리 찢겨진 시기. 그건 바로 지금의 우리 모습 그대로였다. 송지나는 이렇게 표현했다.
소름이 끼친다. 이런 인간들은. 기철의 뒤를 따르며 최영은 연회장을 채운 인물들을 둘러본다. 하나 더 먹고, 하나 더 가지는 것이 생의 전부인 이것들. 타인의 아픔 따위에는 무감하고, 자존심 따위는 없는 후안무치한 것들. 세상을 파먹는 좀벌레 같은 것들.
문제는 이러한 것 몇 명 때문에 수천, 수만 명의 가엾은 것들이 사람답지 못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답지 못하게 살다 보니 그 가엾은 것들 또한 후안무치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염치도 예도 사람으로서의 자긍심도 없어진 존재들이 눅눅한 곰팡이처럼 번식하며 세상을 점점 뒤덮고 있었다. (P. 274~ 275)
아아... 이건 고려를 말하는 게 아니었다. 송지나는 지금 우리가 발을 디디고 선 이 곳을 말하고 있었다. 더구나 마지막 문장은 내가 이번 대선을 통하여 똑똑히 보게 된 모습이기도 했다. 가라앉았던 숙취가 다시 올라오고 진정되었던 마음이 다시 울렁이면서 기어이 억눌렀던 눈물이 터져나오고야 말았다. 희망은 과연 어디에 있을까? 우리는 어떻게 견뎌야 하나? 하늘 문을 통해 강림할 신의(神醫)를 기다려야 하나? 아니면 주인공 최영처럼 냉소적이 될 것인가? 갈피는 잡기 힘들고 마음은 그저 보물을 잃어버린 상자처럼 허망하며 그 빈자리 가득 상실로 인한 아픔만 들어 찰 뿐이다. 소설을 읽고 나는 알았다. 이 소설은 송지나 개인이 견디기 위해서 쓴 것임을. 스스로 힐링하기 위해 쓴 것임을...
공민왕에게 '그런 우리와는 다른 왕이기에' 더욱 약속을 지켜야 하지 않겠느냐는 최영의 말에선 공약 따위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말을 바꿀 수 있다고 말하는 현재 지도자에 대한 냉소를 보았고 끝까지 원래 있던 세상으로 돌려보내 준다는 약속을 지키려 애쓰는 최영의 모습에선 송지나가 그러한 것을 얼마나 바라고 있는지 그 열망을 보았다. 나도 최영에게 빙의된 송지나와 같은 냉소와 열망으로 견뎌왔다. 그래서 더욱 아프다. 여주인공 은수에게 칼을 맞고 죽어가는 최영만큼이나 아프다. 생각해보면 이 장면은 꽤나 예언적이다. 하늘 문을 통해 데려온 은수처럼 우리도 구원이 도래하기를 열망했다. 그리고 지금은 그 은수에게 칼을 맞은 최영과 똑같이 품었던 희망만큼 아프고 꿈에 대한 믿음의 크기만큼 쓰리다.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견뎌가야 한다. 이것이 끝이 아니기에. 그 뒤에 더 많은 날들이 앞으로 남아 있기에. 비록 많은 사람들이 더욱 더 칠흙 같은 어둠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라고 말을 하지만. 내가 아는 건 그리고 믿는 건. 미래의 전망 따위는 무가치 하다는 사실이다. 미래의 전망이 어둡다고 해서 마냥 내버려두고만 있으면 정말 그런 미래가 오고야 만다. 하지만 현재 그것을 막기 위해 무엇이라도 하면 그 미래를 바꾸거나 최소한 지연시킬 수 있다. 미래의 형상은 어디까지나 오늘 행하는 '조형'에 달려있다는 게 바로 내가 아는 바고 믿는 바다. 그러니 버티련다. 좀 더 손아귀에 힘을 주고 단단히 지탱하련다. 은수와의 약속을 자신이 바라는 세상의 구현과 똑같이 여겼던 최영처럼 내가 바라는 세상의 모습을 나 스스로 배반하지 않도록 노력하련다. 물론 길은 멀다. 최영에겐 기철과의 길고도 지난한 싸움이 기다리고 있다. 그래서 어쩌라구? 오히려 이런저런 감정낭비로 소모할 시간이 없음을 더욱 느낄 뿐이다.
" 내 이름을 무시하는 자, 누구야 막아 봐."(P. 1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