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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르트르와 카뮈 - 우정과 투쟁
로널드 애런슨 지음, 변광배.김용석 옮김 / 연암서가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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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난 사람들

   이 책은 재미난 책은 아니지만 의외로 재미나게 읽었다. 이 책을 만나기 전에 내가 그들의 작품을 읽은 것이라곤 사르트르의 <지식인을 위한 변명>과 까뮈의 <이방인>정도에 불과했다. 이 단편적인 지식과 어디나 천편일률적인 인물 소개를 통해 내 머릿속에 저장된 그들은 그냥 위대한 프랑스 지성인중 두 사람 정도였달까.(한명이 철학자고 한명은 예술가라는 구분없이) 두 사람이 친구였고 서로의 사상 때문에 절교를 했는지 그들 사이에 보부아르라는 증인이 있었는지 그런 사실은 내게 중요하지 않았다. 그들이 프랑스 어느 시기 아니 세계사의 어떤 흐름속에서 어떤 개인적 의도로 작품을 집필했는지 해당 작품이 상대에게 어떠한 의미였는지 알지도 못한 채(알려고도 않은 채) 그동안 나는 그래도 그들의 작품을 읽어는 봤다는 알량한 독서의식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이 책을 덮고 나서 새삼 사르트르는 왜 그러한 변명을 하면서 지식인을 ‘정의’ 내리려 했는지 까뮈의 뫼르소는 왜 그러한 ‘살인’을 해야 했는지 다시 질문하며 여러 가능성을 떠올리게 되었다.

   이 책에 의하면 서로는 서로를 만난이후 평생 동안 아니 죽고 나서도 서로의 작품을 벗어나 본적은 없는 듯하다. 이것은 서로가 한 말과 글로부터 절대 자유롭지 못한 운명인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서로의 개별적인 작품들은 상대의 전체 중 부분에 해당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두 사람은 독자적으로 완성된 작가들이 아니었다고 본다. 이런 운명적인 관계가 또 있는지 모르겠지만 이 책은 두 사람의 치열했던 인생을 때론 현미경으로 관찰하고 때론 망원경으로 조망하며 독자들 앞에 흥미진진하게 펼쳐보였다. 번역도 자연스럽게 다가왔고 우리와 같은 시대를 살고 있는 저자의 사유가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기 위해 치열하고 정직하게 배치되는 느낌을 받았다. 또 미처 읽어보지 못한 두 사람의 작품도 골고루 소개하며 때론 집중적으로 반복, 인용하면서 독자와 눈높이를 맞추는 정성도 대단했다. 결국 숨은 에피소드, 두 사람의 지인, 당시 잡지와 기사, 언론과 대중의 반응, 정치 및 국제 변화등이 다양하게 증언의 역할을 하며 두 사람을 주인공으로 하는 영화한편을 기꺼이 만들어냈다.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은 바로 그 영화 한편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엿보는 듯한 추적과 추리, 추론의 재미가 아닐까. 사색과 사유를 좋아하는 분들에게 추천하고 싶다는 말이 절로 나오는 바이다.



1. ‘관찰자’로서 ‘개입자’ 되기

   이 책을 읽는 내내 가장 거슬렸던 건 사르트르도 까뮈도 아닌 보부아르였다. 보부아르는 두 사람 사이에서 가장 밀접하게 그들을 겪은 지인으로 등장한다. 때론 인터뷰로 혹은 자신의 문학으로 그녀는 그들을 회상하는데 누구보다 열정적이었다. 나는 보부아르가 여성이었고 사르트르와 연인관계였던 것이 궁극에 객관적이지 않을 수밖에 없는 조건임을 부연하고 싶지는 않다. 내가 그려본 상황은 같은 여성으로서 본능적으로 감지되는 세 사람간의 역학관계를 바탕으로 한다. 가장 측근에 오래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그녀도 유명한 작가였기 때문에 그녀의 견해는 긍정이든 부정이든 의미성을 지닐 수밖에 없다. 저자 역시 그때 같은 장소에 있었던 보부아르는, 하고 자주 증언의 기회를 부여, 삽입하곤 했다. 그런데 나는 이상하게도 그 부분에 이르러서는 모종의 불쾌감이 자주 들었고 보부아르는 단순한 관찰자가 아니라 저자의 말처럼 ‘제 3의 극’으로서 관계에 연루된 자로서 적어도 이번 영화에선 주조연이 확실했다.

   아주 오래전에 나는 몇 년 동안 두 명의 남성과 공동 작업을 한 적이 있다. 두 사람은 둘 다 각각 그 분야의 최고였다. 한명은 기획자로서 지적인 외모를 가졌고 한명은 디자이너로서 터프한 외모를 지녔다. 그리고 그 두 명은 나와 작업을 하기 이전에 이미 동료이기도 했다. 동창이거나 사는 동네, 전공때문이 아니라 업무상의 필요에 의해 친구가 된 경우였다. 나는 디자인을 공부한 기획자였다. 내 역할은 기획의 언어를 시각적으로 풀고 디자인의 의미를 다시 언어로 치환하는 것이었다. 두 사람은 내가 없어도 결과물을 낼 수 있었지만 프로젝트가 커지자 더 큰 성공을 위해 나는 계획적으로 투입된 사람이었다. 기획자는 중산층의 가정에서 한국의 일류대를 졸업했고 디자이너는 어렵게 유학을 다녀온 해외파였다. 둘 다 기혼자였기 때문에 나는 이성적(異性的)으로도 자유로왔고 한참 선배들이라 그들 양쪽으로부터 배우고자하는 의지가 충만한 시절이었다. 우리 팀은 바깥에서 보기에 완벽해보였다.

   궁극에 추구하는 작품 성향은 같았지만 세분화하여 나눠보면 어떨 땐 기획이 더 좋은 평판을 얻기도 하고 어떨 땐 디자인이 뛰어나 당선된 적도 있었다. 말하자면 두 사람간 자존심 문제였는데 세간의 평판에 따라 그들은 점점 어색한 사이가 되어갔다. 원래 사내에서 브리핑을 도맡아하던 냉철한 기획자는 처음엔 새로운 감성이 돋보이는 디자이너를 앞장서서 소개하고 각종 모임에 참여시켰다. 그리고 사람들은 남성적인 매력과 섹시한 외모를 지닌 새로운 디자이너에 열광하기 시작했다. 디자이너는 가끔 돌발적인 행동을 하거나 충동적인 감성으로 주위를 놀래켰지만 그러한 기질적 성향마저도 창의적인 태도의 일환으로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기획자는 좀처럼 일인자의 자리를 디자이너에게 내주는 법이 없었고 일의 성과를 자신의 공으로 돌리고자 무던히도 노력했다. 결국 인맥이 풍부했고 사회성이 뛰어났던 기획자는 업계에서 디자이너를 소외시키는데 성공했고 두 사람은 공모에서 적으로 자주 만나는 경쟁자가 되어버렸다. 기획자, 디자이너 모두 개인회사를 오픈하여 실력있는 업체로 인정받았지만 두 사람은 화해하지 못했고 특히 디자이너는 (업계와 타협하지 않는)독자적인 행보로 많은 비난을 받았다. 그는 한국의 주류 디자인 인맥에 들지 못했기 때문에 그의 실수나 오류를 감싸안는 디자이너들도 많지 않았다. 나는 솔직히 인간적으로는 낭만적으로 보인 디자이너에게 더 끌렸지만 업무이해 관계상 디자이너의 편을 들어주진 못했다. 나도 결국은 기획자였고 내가 디자인으로 밥벌어 먹고 살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그리고 디자이너의 곁에선 영원한 보조나 이인자가 될 것이라는 계산적인 생각이 많았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나도 그를 외면하는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개인적인 친분은 유지했기로 그 디자이너의 생각과 상황을 가장 많이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곤경에 처했을 때 가장 많이 도와줄 수 있는 위치였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비겁하게 침묵한 적이 많았다. 내 쪽의 판단을 정당화하기 위해 알게 모르게 은근히 그의 작품을 비난의 도구로 활용한 적도 있었다. 마찬가지로 당선이나 이해관계가 없는 사안에 대해서는 극찬을 아끼지 않았던 기억도 난다. 마음 한 켠에 이렇듯 오래된 부채감은 오래도록 나를 분열스럽게 만들었다. 우리들 기획자의 마음속에 그는 차별화된 능력과 타고난 재능으로 보기 드문 독창적인 작품세계를 만들어가던 최고의 디자이너였지만 이미 그가 화려하게 재기하기 힘들 시점에서야 그의 전설을 가십거리처럼 회자하곤 했다. 학벌과 지연중심의 한국사회에서 그는 일인자가 되기 힘들었고 그를 견제하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그의 비타협적인 독선, 다혈질적인 성격, 예술적 고집을 이유로 들며 그를 고립시켰다.

   내가 이 책을 재미나게 읽었던 이유는 아마도 이러한 내 개인적인 경험때문이 아닐까 싶다. 시대도 다르고 분야와 레벨도 다르지만 그리고 무엇보다 감히 회사시절 내 위치를 사르트르와 까뮈의 우정과 투쟁을 지켜본 보부아르의 위치와 견줄 순 없겠지만 나는 우리네 인간관계에서의 역학적 흐름을 바탕으로 몇몇 그녀의 인터뷰에서 위선을 감지할 수 있었다. 그녀는 필히 까뮈에게서 더 남성적인 매력을 강하게 느꼈다고 판단된다.(그 때문에 자존심이 상했으리라고 본다) 까뮈는 사르트르보다 보부아르에게 마음을 자주 털어 놓았고 보부아르 역시 (사르트르 부재시)그런 카뮈를 받아주었을 터이다. 사르트르는 작은 키, 사팔뜨기라는 핸디캡으로 외모상으로 카뮈보다는 경쟁력이 떨어지는 쪽이었다.(나는 이 사실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보부아르는 각종 모임에서 카뮈와 사르트르가 여자를 사이에 둔 감정적이고 성적인 긴장이 종종 있었다고도 언급했다. 사르트르와 카뮈가 위대한 사상가임에는 틀림없지만 그들도 결국은 그 이전에 여성에 어필하는 남성이었다. 그들은 사상과 작품, 정치뿐 아니라 남성성으로서도 내외적으로 경쟁하는 위치는 아니었을까. 경쟁구도 속에서 보부아르는 머리로는 사르트르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사르트르와 카뮈를 알고 있고 친하다는 것이 자신의 경쟁력이 되는 순간도 있었을 터이다. 때론 카뮈에 대한 죄책감으로 때론 사르트르에 대한 미안함으로 대외적 칭찬과 비난을 적절히 구사하기도 했을 것이다. 그녀는 사르트르의 대리인이 되어 글을 쓴 적도 있었고 카뮈의 상담자가 되어 위로를 한 적도 있었다. 저자가 언급했듯이 보부아르는 그들 사이의 단순관찰자가 아니라 ‘제 3의 극’으로서 그들 관계에 자발적, 타의적으로 개입했다. 나는 그래서 그녀의 모든 공표된 객관이 결코 그녀 개인의 모든 주관을 넘어설 수 없다는 생각을 하고 백프로 솔직하지 못했다고(할 수 없었다고) 여긴다. 내가 시나리오 작가라면 필히 보부아르를 그들 사이 중재가 아닌 긴장을 유발하는 주역으로 배치할 것이다. 그리고 항상 만약, 이 상황에서 보부아르가 없었다면 둘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의 경우의 수를 만들어 보았을 것이다. 남자들은 대부분 자신들의 우정에 이미 오래전부터 개입되있었던 여성의 존재와 역할을 인정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그녀는 사건 관찰자가 아닌 확실한 개입자 혹은 공모자, 방관자, 조정자로서 이 영화속 주조연이 확실하다고 본다. 이 책을 읽은 덕에 이렇듯 독자의 위치에서 그들 사이 인간관계를 추론해보고 또 내 맘대로 배치시켜보는 건 행운이었다.

   그녀의 많은 증언가운데 기억나는 한마디를 옮겨본다.


“ 나는 그(카뮈)에게서 그가 자신의 생과 쾌락에 몰두하는 열광적이고도 굶주린 태도를 좋아했다. ”     -114p


   나는 그녀마저 사르트르의 우월감의 테두리에 포함되려고 했던 심리가 거울을 보듯 당황스러워 슬픈 기분마저 들었다. 보부아르는 여튼 카뮈에 대해 호불호를 자주 언급했는데 나는 그녀가 말하는 방식이 기분좋지는 않았다. ‘열광적이고도 굶주린 태도’는 나로선 상당히 모멸감을 느끼는 표현이다. 보부아르는 왜 그 좋다는 태도로 인해 카뮈가 돌발행동을 하는 것은 이해하지 못하였을까. 그것은 자신들은 열광적이지도 그래서 굶주리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그들은 혹 카뮈에게서 인간적인 매력을 느끼기 충분했지만 진정으로 카뮈를 이해하려고는 하지 않았던 것이 아닐까.


2. ‘다른’ 방식으로 ‘함께’ 살아가기

   책을 덮고 두 사람으로부터 반사적으로 떠오른 감정은 확연했다. 사르트르의 우월감과 카뮈의 순수함. 적어도 사르트르는 카뮈가 자신에게 대응하는 것보다 몇 배 더 치밀했던 것으로 보인다. 사르트르는 카뮈를 처음만난 날부터 (자신이 가지지 못한)그의 재능에 이끌렸지만 항상 자신이 더 우월한 위치에서 그를 평가하고 재단했다. 이는 사르트르가 이미 유명인사로서 연장자였고 출신성분도 중산층 이상의 파리 고등사범학교 출신이었기에 알제리 출신 청소부의 아들이었던 카뮈를 자연스럽게 위에서 내려다보는 위치가 될 수 있었을 터이다. 카뮈역시 자존심 때문에 그의 위성으로서 무리에 속하길 원하지 않았고 사르트르 다음의 이인자가 되길 바라지 않았다. 외려 정치활동은 카뮈가 더 선배격이었고 레지스탕스 대원, 비중있는 일간지 편집장으로서 카뮈는 얼마든지 자신을 차별화시킬 자신이 있었던 것이다. 두 사람이 서로를 공격하는 양상을 들여다보면 사르트르가 카뮈에 더 적의를 품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되고 카뮈는 배신과 상처에 어쩔 줄 몰라하는 것으로 보였다. 나는 이것이 사르트르가 카뮈와 경쟁하는 위치에 서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까뮈는 자신이 서른 살이고 사르트르가 서른 여덟살 때 첫 만남에서 이미 비평적 명료함에선 한수 위인 사르트르가 자신보다 훨씬 지적이라 판단했지만 사르트르는 자신이 부족했던 본능적인 창조성, 독립심, 용기를 지닌 카뮈를 자신보다 뛰어난 능력자로 여기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서로가 상대를 평가하는 그 지점이 애초부터 영원한 친구로 이어지기 어려웠던 불씨라는 생각이다. (만약, 존경하는 선후배 사이로 남게 된다면 모를까) 우정은 사랑과 존경과 달라 아무리 분야가 다르고 나이차이가 나도 서로 동격임을 인정하는 배경이 튼실해야 한다. 그러나 사르트르는 지겹게도 자신이 평가한 지점으로만 카뮈를 위치시키고 싶어 했고 카뮈는 끈질기게 그 위치를 거부, 외면했다. 서로를 비난할 때도 카뮈는 사르트르를 포함한 실존주의자들의 성향을 지적하는 것에서 시작한 반면 사르트르는 카뮈 개인의 역량에 집중적인 공격을 한다. 카뮈가 언급했듯이 사르트르는 자신들의 유죄성을 무마하려 상대의 유죄를 발본하여 비난하는 위선적 기질이 다분했다.(그런데 이건 경지에 오른 지식인의 보편적 특성아닐까) 담론을 창출하고 자신의 견해를 표명하고 논쟁으로 승리를 이끄는 것은 전후 프랑스 사회에서 여론을 주도하는 지식층으로서 커다란 능력이었다. 나는 두 사람이 보여준 정치적 저널리즘의 양상들로부터 카뮈는 애초부터 사르트르 개인을 공격할 마음은 없었다고 보았다. 그러나 사르트르는 자신의 견해에 저항하는 카뮈 개인을 공격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두 사람은 당시 역사적 상황 때문에 묻지도 않은 질문에 상대가 답했기 때문에 할 수 없이 다시 한쪽에서 화답을 해야 했던 상호적 관계였다. 이 관계에서 카뮈는 다소 방어적으로 보였고 사르트르는 무릇 공격적으로 보였던 것 역시 두 사람이 서로를 평가하는 위치가 달랐던 것에서 기인했다고 본다. 이것은 대부분 아주 냉철한 문장 속에서도 ‘반공산주의자는 개다’같은 한마디로 급진적인 색깔을 감추지 않는 사르트르의 타고난 신분적 우월감때문이 아닐까.(누가 감히 사르트르에게 인간이 아닌 신분으로서의 '개'를 빗댈 수 있겠는가) 서로의 이름을 거명하지 않으면서도 서로의 작품에 화답하면서 상대 저서를 통해 논쟁하는 방식은 직접적으로 상처주지 않는 고품격의 매너가 아니라 같은 위치에 이름을 올려놓기 싫은 지식인 기득권층의 세련된 위선은 아니었을지.

   
 
불화,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서로가 다시 만나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함께’ 살아가는 방식이었습니다.                                                                                                        -사르트르 추도사 中에서
 
   

   카뮈는 불행하게도 교통사고로 생을 마감한다. 카뮈 사후 20여년 동안 사르트르는 카뮈에 대해 발언할 자의적, 타의적 기회가 부여된다. 만약 사르트르가 먼저 죽고 카뮈가 그의 추도사를 작성했다면 저렇게 말했을까? 내가 생각하기에 ‘함께’ 살아가는 ‘다른’ 방식은 서로가 동의하에 마련한 방식은 아닌 것 같다. 물론 어느 한쪽이 주도한 방식이라 하기도 난감하지만 분명한 건 두 사람이 주체가 되어 삶의 방식을 각자 인식하면서 서로와 같이 나간 것은 아닌 것 같다. 그저 결과적으로 그 방식은 받아들여진 상태에서 지금까지 이어져 왔다고 해야 할 듯하다. 사르트르의 추도사는 틀린 말은 아니나 사르트르가 해야 할 말로는 적당해보이지 않았고 그건 세상이 그들에게 해야 할 말로 보였다. 나는 그 위치가 곧 사르트르가 카뮈에게 상정한 관계상의 우월적 관점이라 생각한다.

   가끔 이곳 서재에서도 어떤 블로거가 글을 올리면 마치 그에 화답하듯 반대나 찬성의 글이 올라오고 어떤 블로거의 글에서 영감을 받아 자신의 사유를 확장, 정리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마찬가지로 어떤 책의 리뷰가 올라오면 마치 그 리뷰에 답하듯 전혀 다른 평의 리뷰가 올라오기도 한다. 때론 논쟁으로 발전하기도 하고 반대로 공감의 시너지가 확산되기도 한다. 그러니까 서재활동이라는 것이 혼자서 사고하고 오롯한 자기 생각만으로 글을 쓰고 있는 것 같지만 우리들 모두는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 또 영향을 받고 있는 관계에 속해 있는 것이다. 나는 이곳에서 ‘함께’ 살아가는 방식에도 분명 사르트르적, 카뮈적, 보부아르적인 ‘다른’ 태도가 공존한다고 느낀다. 위선에 강인한 사람, 위선에 상처받는 사람, 위선에 중립적인 사람... 이 책을 덮으며 나는 어느 지성인에 가까울까를 생각했다. 저자는 카뮈와 사르트르의 한계를 뛰어넘고 두 사람의 세계관을 복합시킨 새로운 유형의 인물을 기다린다 했지만 나는 어쩐지 사르트르적인 카뮈보다는 카뮈적인 사르트르에 더 끌린다. 그래서 우울하다. 하지만 사르트르는 진정한 지식인은 도덕주의자도 이상주의자도 아니라 말했다.(이말도 결국 카뮈를 겨냥한 듯 보였지만) 지식인의 임무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신의 모순속에 사는 것이며 자신을 만들어온 근원적 상황과 그 형성과정에 의해 부단히 형성되는 이데올로기와의 투쟁을 게을리 하면 안된다고 충고한다. 까뮈는 그런 지식인들이 결국 사람들을 비난하기 위해 자기비판을 하고 자기 위선을 감추기 위해 상대에게 죄를 덧씌우는 것이 모순이라 지적했다. 결국 두 사람의 충고를 종합하면 자기 발전을 위한 순수한 의도의 자기비판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인데 이 모습이 그래도 카뮈적인 사르트르에 가까운게 아닐까 생각해본다.


3. ‘반항’이냐 ‘혁명’이냐

   또 하나 보부아르와 함께 이 책의 조연으로 인상깊었던 인물은 메를로 퐁티였다. 메를로 퐁티는 사르트르와 함께 혁명을 위한 폭력의 사용에 우호적인 반면 카뮈는 공산주의를 무조건적인 살인자 집단으로 보고 폭력에 엄중한 반대 입장을 취했다. 메를로 퐁티는 ‘공산주의가 자행하는 폭력을 자본주의가 행사하는 폭력을 종결시킬 수 있는 하나의 유일한 수단’이라고 한 바 있다. 이에 동의한 사르트르는 폭력적, 억압적이지 않고서는 이미 폭력과 억압이 난무하는 사회를 변화시키기 불가능하다고 본 것이다. 메를로 퐁띠는 이미 우리가 육화된 존재인 한 ‘폭력은 우리의 운명’이라 설파한 철학자였다.(나는 리뷰에 이 문구를 몇 번이나 인용했던가) 우리가 생명체로서 살아간다는 것은 누군가에게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폭력을 행사하는 일임을 주장한 것이다. 사르트르는 왜 이 폭력 메카니즘에 적극적으로 동의하면서 실력행사를 한 것일까. 사르트르가 노동자계급에게 방향을 급선회한 것은 문학의 운명이 노동자계급과 연결되어 있다는 자기 철학의 근본적 주제와 맥을 같이한다. (사르트르는 자신이 부르주아 출신이면서 평생 그 계급에 저항하는 모순에 괴로워했다) 그는 자기철학인 실존주의를 마르크스주의에 통합하고자 폭력과 혁명을 결합시키면서 서구에 대항하고자 했다. 하여 부르주아의 폭력에 대응하는 노동자의 폭력은 정당하고 자연스러운 행위로 간주한 것이다. 이것이 새삼 대단해 보인 것은 태생적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 그리고 자기철학을 정치행동과 일치시키기 위해 나아가 자기이론을 역사에 실행시키기 위해 치열하게 자기 삶을 불살랐다는 것이다. 이는 단순히 사르트르 개인의 사상적 변화를 넘어 자유와 사회주의를 연결시키는 개념으로서 바로 미국과 소련의 냉전에 대응하는 당시 프랑스의 답변이기도 했다.

   하지만 카뮈는 마르크스주의를 살인과 동일시하여 살인의 정당화를 주장하는 사르트르를 이해하지 못했고 급기야 공산주의를 ‘문명의 질병’, ‘현대의 광기’로 규정짓게 된다. 카뮈는 미,소 두 진영사이의 제 3의 길을 제시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우파와 가까워지게 된 것이다. 솔직히 당시 프랑스에서 카뮈가 더 혁명적 인사가 될 줄 알았던 독자로선 의아한 행보이긴 했다. 여기서 나는 정치활동 이전의 카뮈의 예술적 기질을 떠올려 본다. 사르트르가 현실적, 실리적이었다면 카뮈는 이상적, 도덕적이었다. 프랑스 부르주아 출신의 사르트르와 알제리 프롤레타리아 출신의 카뮈는 각자 태생적인 자기모순을 극복하기 위해 한사람은 현실과의 타협을 한사람은 보다 근원적인 가치를 지향하게 된 것은 아니었을까. 카뮈는 사르트르가 있는 한 자신을 철학자가 아닌 예술가로 칭해지길 바랐는데 나는 이 차이가 곧 자신이 자신을 바라는 궁극의 모습이라 생각한다. 이는 곧 내게 있어 ‘혁명’과 ‘반항’의 차이를 이해하는 밑거름이 된 듯하다.

   사실 이 책에서 가장 궁금하던 책은 카뮈의 <반항적 인간>이었다. 그런데 또 다행히도 저자는 <반항적 인간>에 대해 많이도 친절했다. 카뮈가 말하는 ‘반항’은 원초적이고 존중과 연대성을 전제로 하면서 승리를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하지만 ‘혁명’은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살인같은 극단적인 방법도 주저하지 않는 건강하지 못한 태도라 말한다. 즉, ‘반항’에는 그 어떠한 폭력적 함의도 소거한 채로 인간적인 소박한 기원을 담고 있을 뿐 인 것이다. ‘반항’은 카뮈가 공산주의에 대한 하나의 대안으로 활용한 개념이며 사르트르가 ‘혁명가’라면 카뮈는 ‘반항인’이라 볼 수 있는 중요한 태도 변수이다. 카뮈가 말하는 ‘혁명가’는 추상적, 권위적, 종말론적이고 교양이 풍부한 서구적 인간을 상징하며 사르트르가 말하는 ‘반항인’은 자기기만과 부조리를 인정하지 않는 나약한 지식인이다. 프랑스와 친공산 좌파지식인은 <반항적 인간>에 반항했고 우파인 미, 영 언론은 대체로 옹호했다. 카뮈가 용감했던 것은 바로 우파로부터 응원을 좌파로부터 조롱을 받을 것을 알고 있었다는 것인데 저자는 사르트르가 천재성을 지녔음에도 정작 혼자서 정치폭풍을 감당해내는 이러한 배짱과 용기가 없었다고 꼬집는다. 내 생각에 카뮈의 반항은 ‘예술’이고 사르트르의 혁명은 ‘정치’였다고 본다.

   <반항적 인간>은 철학, 사상, 문학, 미학, 정치에 대해 사르트르에 화답한 저서이기 때문에 사르트르는 이 도전에 절대로 침묵하지 않았다. 사르트르는 자신보다 급 떨어지는 동료에게 <반항적 인간>의 서평을 쓰게 하여 카뮈를 언급하지 않으면서 <반항적 인간>을 통해 자신을 무시한 카뮈를 교묘하게 공격하기 시작했고 서로간 서평을 통한 논쟁은 일 년 이상 이어지게 된다. 이 과정에서 서슴없이 전개되는 사르트르의 카뮈를 향한 신랄한 비판들은 독자입장에서도 충분히 모욕적이었다. 사르트르는 지배계급의 사주를 받아 이데올로기를 옹호하는 사람들(우파적인)을 사이비 지식인이라 말했는데 그는 1930년대 프랑스 소설가 니장(Nizan) 의 ‘집 지키는 개’를 인용하며 그들을 한껏 비하한 적이 있다. 자기 모순을 벗어나지 못하는 지식인층을 ‘개’에 비유한 사르트르가 카뮈가 포함된 반공산주의자를 ‘개’의 집단으로 격하시킨 발언은 카뮈가 말하는 반항을 패배적인 노예기질로 판정하며 현실 부적격자로 위치시킨 것은 아닐까. 이 ‘개’같은 발언은 프랑스 출신이 아닌 식민지 알제리 출신인 카뮈에겐 씻을 수 없는 상처가 되지 않았을까. 사르트르의 공개모욕은 누가보아도 절교선언이 되었을 터이다. 이는 ‘당신은 역사의 방향으로 의자를 놓았군요’ 혹은 ‘자신들의 의자를 역사의 방향으로만 놓았던 비판자들’이라는 카뮈의 문학적 표현에 비하면 너무나 충격적이고 살인적이기까지 하다. 역사적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까뮈를 깎아 내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아예 그런 식으로 정치할거면 앞으로 영영 이 사회에 적응하지 말라는(예술이나 하라는) 사형선고에 다름없다는 생각이다.



...완벽한 사람들

   저자는 사르트르 연구자였지만 이 책은 다분 카뮈입장에서 충격, 불신, 배신감, 상처들에 더 공감하도록 유도한다. 나 역시 두 사람 중 카뮈에게 더 마음이 기울었다.(이 사실이 내게 알려준건, 그러므로 나는 사르트르에 가까운 인간이구나, 였다 ㅠ) 지방출신으로 출세한 카뮈가 특권지식인층에 비웃음을 사고 축출, 배반, 고립화, 은둔, 예술적 고갈로 이어지는 과정을 섬세하게 밝혀내었기에. 카뮈주변엔 무조건 충실한 친구들이 있었지만 사르트르 주변엔 카뮈 외에 친구가 없었다는 식으로 카뮈는 인간적으로 인간에 충실했고 사르트르는 비인간적으로 인간을 무시했다는 뉘앙스를 제공한다. 결과적으로 사르트르가 카뮈의 출세에 공헌은 했지만 역으로 그의 고립에 누구보다 기여했다며 가해자로서의 역할을 재확인 한다. 저자는 카뮈는 사르트르를 증오했고 사르트르는 자기 정당화에 일생을 바친 것이라 말한다. 카뮈는 작품의 성공과 인생의 완성이라는 의미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지만 사르트르는 자기 정치적 목소리를 높이기 위해 상을 거부했다고 평한다. (카뮈가 받았기 때문에 거절한 것은 아닐까, 그래야 카뮈와 다른 격으로 존재하니까)

   하지만 저자는 결국 그들 모두의 행동과 태도를 ‘반은 옳고 반은 그른 ’것으로 자기기만의 체계를 이룬 것이라 평가했다. 오늘날 승리자는 카뮈라고 손들어 준 채로. 비록 카뮈 살아생전엔 서평간 논쟁을 통해 사르트르가 판정승을 거두고 그 후에도 정치적 우세속에서 카뮈를 공격해왔지만 카뮈 사후 사르트르는 자신들이 비웃었던 카뮈의 ‘적십자적 도덕’에 굴복하였다고 지적한다. 이들은 상대를 비난함으로써 서로 자기들의 논리를 정당화하는데 전력을 소모했고 그럼으로써 각자 발전했다. 각자 문학과 철학적 관점을 자신들의 정치적 관점과 동일하게 전개하는 삶을 살았고 그래서 그들은 역사적 사실이자 역사인 채로 기록되었다.


“카뮈와 사르트르 각자는 상호적 토론속에서 자신들을 형성해 나갔으며, 바로 그렇기 때문에 세상이 그들에게서 인정하게 될 완벽한 정치적 지식인들로 탄생했던 것이다.”     -485p


   저자는 두 사람을 갈라놓은 것을 역사의 탓으로 돌리며 오늘날 이분법적인 해석을 통한 왜곡보다는 폭력과 전쟁이 여전한 세계적 상황에서 새로운 정치적 지식인을 기다린다며 펜을 놓았다. 두 사람의 능력과 세계관을 통합시키는 완벽한 사람을 기다린다고.

   
 
우리가 서로 알게 된 것은 우리가 서로 다르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1945.11.15
 
   

   이것은 카뮈가 사르트르를 만난 지 약 일년 후에 이루어진 인터뷰이다. 카뮈는 자신이 사르트르와 아무런 공통점이 없으며 내 저서는 실존주의에 반대하는 입장이라 처음부터 밝힌 것이다. 즉, 사르트르와 카뮈는 서로 달랐기 때문에 서로에 끌린 것이고 그것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결국은 헤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계속 우정을 이어가기 위해서 그 우정이 영원하길 바래서 만남을 지속한 것이 아니고 어쩌면 이미 예감된 이별을 확인하고 싶어 관계를 이어온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 어짜피 이별할 것을 알았지만 그것이 언제인지만이 중요했던 것이고 그 시점의 조율과 기획은 아마도 사르트르 쪽이 더 치밀하고 현실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두 사람을 보면서 그리고 이 두 사람을 조합한 완벽한 사람을 기다린다는 저자를 보면서 그 완벽함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에 어떤 희망을 얻게 된다. 이들은 각자 서로보다 완벽히 부족했기 때문에 서로를 자신보다 완벽하게 만들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가지지 못한 재능을 가진 상대, 그런데 그 재능으로 자신을 이기고 세상에 자신보다 월등히 빛나는 타자를 볼 때 부러움과 함께 패배감, 시기, 열등감을 내재화하게 된다. 그런데 상대의 재능이 내가 진출하고자 하는 분야와 상관이 없다면 모를까 내 희망과 정면에서 상충된다면 어떻게 해야할까. 아마도 그처럼 되려고 그를 한번이라도 이겨보려고 아니 그 근처에라도 가보려고 부단히도 노력하지 않을까. 때론 아무리 해도 안되는 자신에 실망하며 터무니 없는 성과에 절망도 하겠지만 이기고 지고와 상관없이 그동안의 시간들이 결국 자신을 발전시키는 건 아닐까. 만약 내가 완벽하다면 나는 아무런 노력도 희망도 필요치 않을 것이다. 내가 부족해야만 발전할 수 있다는 사실이 오늘 나를 미소짓게 한다. 다만, 과다한 자기비판이 또 다른 복종을 향한 퇴보가 되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시스템의 지배와 억압을 용인하면서 밖으론 자유를 떠벌리는 위선도 주의해야 할 것이다. 주변 인간관계를 잃으면서까지 내 자신의 명성만을 지키는 독선자도 되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나는 사르트르가 카뮈에게, 카뮈가 사르트르에게 자신은 있었지만 상대가 가지지 못한 약점을 비난하던 순간을 떠올린다. 우리 모두는 사르트르의 단점도 카뮈의 약점도 무수히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건 역으로 상대의 장점이 사무치게 부러워서 터져 나온 반응이기도 한 것이다. 그들이 서로를 만나지 않았다면 아마 자신들이 가장 위대하다 생각했을지도 모르는 일. 내 부족함이 상대의 능력에 반하고 상대의 부족함이 내 능력에 끌리는 것이 각자가 완벽한 세상보다는 더 뜨겁게 느껴진다. 그들은 서로 완벽하게 부족함으로써 각자 부족한 완벽자로 서로를 돋보이게 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완벽한 사람은 자신만이 완벽한 것이 아니라 상대를 완벽하게 만들어줄 수 있는 사람인 것이다. 그래서 그들의 투쟁은 지금 우리의 우정보다 영원하고, 그리하여 아름다운 건지 모르겠다. 그런 면에서 나는 누군가의 사르트르가 아니 내 미래 경쟁자의 카뮈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살면서 나의 카뮈가 당신의 사르트르가 이 세상에 같이 존재한다는 건 쉽지 않은 행운이다. 그 행운을 위해 가끔 등장하는 보부아르쯤은 참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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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1-09-16 12: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질투'라는 단어가 문득 떠오릅니다.
내게 가지고 있지 않은 재능(권력, 금전, 능력..)에 대한 질투, 저는 항상 이것에서 벗어나지 못 하거든요.
그리고 그것을 감추려고 필연적으로 '위선'을 하게 되어버려요.

저는 위선이 사회를 살아가는데 필요악이라 생각한답니다. 하지만 균형은 중요한거죠.
위선이 너무 없는 사람, 위선이 너무 많은 사람... 결국 제가 추구하는 것은 위선에 중립적인 사람인가요?

실존철학에 관심이 있어서, 사르트르 평전부터 몇권이나 사놓고는, 아직도 서재 그 자리에.. ㅠㅠ

좋은 페이퍼 잘 읽었습니다. 많은 생각이 듭니다. 한사람님, 즐거운 주말되세요. 중년의 늘어진 주말 말구요~ 헤헤.
(동갑내기가 맨날 중년의 주말을 쓰니까, 저두 함께 쳐진단 말예요! 항의 중~~~~~~~ ㅋㅋㅋㅋ)

보물선 2011-09-20 13:02   좋아요 0 | URL
저도 중년이라는 표현에 항의를 더합니다^^

아이리시스 2011-09-16 16: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니까 이건 제가 괜찮아요? 라고 물었던 그 책이네요.ㅎㅎ 반갑다..^^

카뮈와 사르트르도 미칠 것 같이 좋은데 보부아르가 중심에 있다니 이건 정말 호기심 동하는 어려운 책이에요. <카뮈 전집>을 손이 가장 잘 닿는 곳에 꽂아두고 생각날 때마다 펴보는 것. 그건 제 꿈이거든요. 좋아하는 작가들은 많지만 카뮈는 어쩐지 살아가는 데에도 답을 알려줄 것 같아서요. 하지만 그 반대이기도 해서 좋은가 봐요. 궁금하고.

중년의 주말 쓰지 말래요, 마고님이.ㅋㅋㅋㅋㅋㅋㅋㅋ

참!

2011-09-16 16: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9-16 18: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노이에자이트 2011-09-16 16: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카뮈와 사르트르의 대립은 나치부역자에게 관용을 베풀 것인가의 여부와 한국전쟁 당시 북한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를 둘러싼 논쟁에 초점을 두지요.저 역시 그런 분야를 자세히 파헤친 책을 읽었고요.하지만 한사람 님 처럼 두 남자 사이에 보부아르를 넣고 바라보니 또달리 선명해지는 느낌이네요.

이 책에선 나치부역자 처벌문제로 카뮈와 사르트르가 맞선 이야기엔 비중을 어느 정도 할애하고 있던가요?

cyrus 2011-09-16 19: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 책을 읽기 전에는 카뮈와 사르트르의 소설부터 먼저 읽어봐야 할거 같아요.
생각해보니 사르트르와 보부아르와의 관계에 대한 책은 예전에 꽤 나왔던데
사르트르와 카뮈의 관계에 대해서 상세하게 다루고 있는 책은 이 책이 처음인거 같습니다.

노이에자이트 2011-09-17 15: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치부역자 문제를 둘러싼 논쟁은 다른 책들에서 많이 다루었죠.

알제리 문제에서 카뮈가 좀 어정쩡한 태도를 취했기 때문에 지금도 욕을 많이 먹고 있죠.역시 제국주의 국가가 식민지를 지배한 달콤한 맛은 버리기가 힘든가 봐요.프랑스가 전후 동남아나 아프리카에서 독립운동을 탄압한 잔인함은 상상이상이죠.우리나라 사람들은 프랑스가 왠지 멋있는 나라라고만 생각하는 경향이 심해놔서...

사르코지 집권 이후 프랑스가 식민지 지배했던 시절을 못사는 나라에 근대문물을 전해주었다 운운 하며 합리화하는 내용을 교과서에 실었죠.이런 견강부회도 굉장히 뿌리가 깊더라고요.

한사람 님의 다정한 인사가 기분 좋습니다.

가연 2011-09-18 1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고민하다가 처음에 생각했던 것이 '거슬리는' 보부아르를 축으로 쓰려고 했던 거에요. 그런데 한사람님께서 먼저 이렇게 리뷰를 쓰셔서ㅎㅎ 괜스레 저도 그런 방식으로 했으면 완전 비교될 뻔 했네요, 풋.

2011-09-20 13: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7년의 밤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11년 3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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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보다 욕망

   이 소설을 비가 많았던 지난 여름에 읽었다. 서울이 침수되고 산이 무너지는 광경을 목격하면서 생명이 물에 잠긴다는 것의 의미를 한참 생각할 때였다. 그래서인지 책을 덮고 나서도 어떤 심연의 바다에 침수된 채 좀처럼 빠져 나오지 못했던 것 같다. 천천히 그리고 서늘하게 내 가슴속 물컹한 덩어리들이 그 바다와 하나가 되는 느낌이었다. 마치 침몰하는 배에 함께 탄 승객이라도 되는 듯 나는 비극에 동참할 수 밖에 없었다. 누군가 나를 시험하려 수문을 열어 엄청난 양의 물을 방류시킨 것이라면 그날 밤 나는 분명 고립된 채로였다. 호수 한가운데 나무에 묶여 목까지 물에 잠긴 채 몇 시간을 버텨낸 소년처럼 많이도 고독했다. 내가 내 자신을 구원하기 어려울 것 같은 두려움, 하지만 누구도 나를 도와줄 수 없다는 절망감,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살아 나가고픈 간절함, 그 모든 생생한 욕망이 나를 휘감았다. 이런 기분은 태어나 처음이었는데 누군가에게 설명할 수도 없고 한다 해도 이 책을 읽지 않은 사람이라면 조금이라도 공감하기는 어려울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소설은 읽는 내내 나를 끌어내리려 집요하게도 잡아당겼고 끝내 항복하라는 요구에 설득당했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이런 복잡한 감정,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슬픔, 오랜만에 책 한권으로 바닥까지 무너지는 내 자신을 발견하는 시간이었다. 내가 발견한 것은 괴물같은 소설속에서 건져 올린 내 안의 괴물은 아니었을까. 그 괴물들이 나를 고통이라는 우물 속에서 울게 했다. 막다른 순간 숨을 토하듯 터져 나오던 것, 나는 눈물이 자유와 해방을 의미한다는 걸 처음 알았다.

   책을 덮고 나서 시간이 흐른 후에야 나는 과연 내 인생에서 ‘무엇’을 지키려 하는 걸까, 내가 목숨을 걸고 지켜내야 할 것은 ‘무엇’일까를 생각했다. 그것은 분명해 보이는 질문처럼 쉽게 답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우선 그렇다면 나는 내가 지키려 한 것이 있기는 했을까, 에서 시작해 혹 내가 지킨다고 생각해 온 건 결국 나를 지켜주던 욕망에 불과한 것들은 아니었을까, 하는 결론에 이르렀다. 나는 의심없이 내 자신을 의지대로 살아간다고 여기지만 실은 내 자신의 욕망에 기대어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내가 욕망하는 것들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나는 내가 이룬 것들을 지키려 살아온 것이 아니고 이루지 못한 것들을 좇으며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결국 내가 지켜온 것은 나를 말해주는 것들이 아니고 내가 닮고 싶은 나 아닌 것들은 아닐까. 그렇다면 내가 욕망하는 것은 나의 것인가. 인생은 내가 ‘무엇’을 지키는 것이 아니고 그 ‘무엇’이 나를 지켜주는 것이 아닐까. 목숨을 건다는 건 그 ‘무엇’과 내 삶을 바꾼다는 뜻인데 우리는 왜 내 자신의 목숨도 내 자신과 바꿀 수가 없는 것일까. 우리는 혹시 그 ‘무엇’이 온전한 나로부터 비롯된 내 것, 내가 바라는 나만의 가치라는 착각을 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 그렇기 때문에 목숨을 걸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욕망보다 죽음

   작품속의 인물들은 하나같이 자기 생의 소중한 가치들을 생의 전사들처럼 굳건히 수호하고 있었다. 하지만 자기가 목숨 걸고 지켜야 할 가치가 마침 남이 목숨 걸고 빼앗으려 하는 가치라면 우린 어떻게 살아야 할까. 기꺼이 내 가치를 위해 타자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희생을 강요하지 않을까. 내 목숨을 건다는 것. 나는 그 신성함에 폭력을 연상한다. 우리가 육화된 존재인 한 ‘폭력은 우리의 운명’이라고 한 철학자 메를로 퐁띠의 주장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생명체로서 살아간다는 것은 누군가에게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폭력을 행사하는 일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래서 이 작품에 표출된 모든 폭력은 곧 그 사람의 운명으로 보이는 건지도 모르겠다. 작가는 특히 인물의 운명을 심층적으로 투시하는 시력이 탁월했다. 나는 이 소설을 한국사의 가부장적 남성들이 자기 운명을 의지대로 실현치 못하는 비극의 알레고리로 보았다. 자기 존재의 징표를 다시 자기복제의 욕망으로 환원하여 끝내 자기를 파멸하고 마는 불행의 서사로 보았다. 어떤 면에서 작가는 비극의 운명들을 날카롭게 선발해 폭발적으로 휘몰아 연주하는 지휘자로 느껴질 정도였다.

   작품에서 대립하는 최현수와 오영제는 모두 아버지로부터 해방되지 못한 아들로 등장한다. 대지주 아버지와 교사 어머니 사이에서 세령 마을의 도련님으로 태어난 오영제는 부유한 환경에서도 폭력으로 권위를 행사하는 아버지, 매맞고 순종하는 어머니의 기억을 내재화하며 성인이 된다. 자신이 생각한 가치가 자신이 원하는 위치에 놓여있지 않은 삶과 존재의 불일치는 오영제라는 인간의 정체성이 된다. 통제력만이 그가 바라는 능력인 것이다. 이는 훗날 전자제품 수리공의 딸을 부인으로 맞이한 후 치과의사가 되어 주변 인물들을 하나씩 교정하는 삶을 지향하는 배경으로 보였다. 3대독자로서 오영제는 딸이 아닌 아들을 강렬히 욕망하는 부성이었는데 이는 내 아버지처럼 살지 않겠다는 그래서 내 아들에게 내 아버지처럼 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한 최현수의 욕망과 동일했다. 아버지로서의 욕망은 같았으나 한 명은 딸을, 한 명은 아들을 본 것이었다. 최현수 역시 월남 상이군인 출신으로 주정뱅이가 된 아버지와 함바집을 하는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스스로를 못견뎌 가정에 폭력을 휘두르던 아버지를 가장 증오하면서도 두려워하는 존재였다. 현수의 아들 서원이 자신의 어머니를 닮아 다행이라는 것은 소설속에서 마지막 생존자가 되기 위한 복선으로 느껴졌다. 각자 딸과 아들의 아버지가 된 오영제와 최현수는 자신들의 아버지를 치열하게 부정하며 자기안의 부성을 지독하게 극복하려한다. 하지만 아버지를 극복하는 것이 자신을 극복하는 일이 된 아들은 자기 아들에게 다른 아버지가 될 수 있을까? ‘아버지, 아버지...씹새끼, 너는 입이 열이라도 말 못해’하며 투항하던 이들도 결국 ‘새벽에 나가 꿈속에 돌아오던 아버지’와 정면에서 조우하며 스스로 아버지의 무덤속을 동행하게 된다. 자식을 아버지에 대한 복수기제로 기대한 이들에게 아버지를 이기는 것은 곧 자신들을 죽게 하는 것에 다름 아니었다.

   이들 두 사람의 중간에서 목격자, 관찰자로 존재하던 승환도 직업잠수부의 아들로 태어나 열두 살 때부터 잠수를 배우게 된 인물이었다.(열두 살은 이 작품에서 부모의 영향으로 제 2의 인생을 시작(마감)하게 되는 중요한 시점이다) 하지만 한강에서 시체를 찾거나 목숨을 구해주던 아버지는 오영제, 최현수의 아버지와 달리 아들에게 비폭력성, 구원성을 전수하였기에 승환은 막다른 길, 벼랑 끝에 내몰린 서원을 조력하는 최고의 은인이 된다. 표면상으로 드러나지 않았던 오영제의 아내 문하영에 비해 자주 서사의 긴장을 유발하던 현수의 아내 강은주도 봉천동 달동네 출신으로 왕대폿집을 하는 싱글맘의 장녀였다. 이들 남녀는 빈부와 상관없이 모두 한 집안의 기대주였고 그러기 위해선 그들 부모를 극복해야하는 공통의 운명을 지니고 있었다. 나와 같은 세대로 등장하던 오영제, 최현수 내외는 지금 꼭 우리 사회 허리층이다. 부모보다 더 잘될 수 있었던 마지막 세대라는 말도 들려온다. 우리 부모님 세대는 일제시대, 한국전쟁, 군사독재의 파란만장한 한국 근현대사를 몸 뚱아리 하나로 헤쳐 나오면서 만신창이가 된 분들이다. 나 역시 부모님처럼 살지는 않을 거라고 내 자식한테 내 부모님처럼 하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을 밥먹듯이 하고 살아왔다. 그런데 서글프게도 나이들어 가면서 점점 어머니의 판박이가 되어간다는 생각에 놀랄 때가 많다. 내 부모님은 모두 돌아가셨지만 내 안에서 더욱 생생히 나를 조력하고 통제하는 역할을 하고 계신지도 모르겠다. 내가 어머니가 업그레이드된 인간형이었는지는 모르지만 우리는 분명 내 아이가 나보다 진보된 새로운 모델이길 기대한다. 별스럽지 않게 순리처럼 받아 들여온 이 사실이 이 책을 읽고 나서 얼마나 무섭게 느껴졌는지 모르겠다. 가족의 죽음을 껴안고 그 죽음에 기대어 내가 살아가는 것이라면 우리는 ‘죽음’을 지키기 위해 삶을 이어가는 존재는 아니었을까. 작가는 부모의 죽음도 내 삶의 완성을 이루는 한 요소임을 그리하여 나의 죽음도 내 아이의 삶을 결정지을 것이라는 예언을 해주는 사람같았다. 우린 어쩌면 삶이 아닌 죽음으로 더욱 서로에게 연결되어 살아가는 존재가 아닐까.


죽음보다 본성

   이렇듯 이 작품은 무엇보다 인물의 캐릭터가 영화를 보듯 생생하고 장단점이 분명하다는 서사적 미덕을 지녔다. 인상깊었던 건 오영제, 최현수, 승환의 직업이 곧 자신들의 정체성을 또렷이 구분짓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남이 던지는 공을 받아내고 댐을 지켜야 하는 차단, 방어형의 현수와 남이 가진 무기(치아)를 갈고 뽑아내는 약탈, 공격형의 영제, 남의 이야기로 내 존재를 말하는 중재, 위로, 타협형의 승환이 자기직업에서 성공하는 것은 곧 자신의 열등감을 극복하는 것이고 그것은 상처받은 부성을 회복하는 과정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은 왜 그토록 증오하던 아버지보다 더 잘되지 않았을까. 아니 왜 아버지보다 못한 자식이 되어야 했을까.

   이들은 아버지에 대한 원망만큼이나 아버지가 가졌던 한계도 고스란히 물려받은 자식이었다. 외부에 보여지는 선망의 대상으로서만 존재했던 오영제의 아버지는 가식적, 인공적인 가정의 가장이었다. 이는 따스한 가정을 운영하지 못하고 나뭇개비로 동화속 성채를 정교하게 축조하던 오영제의 무의식을 조종하던 한 마리의 나비와도 같았다. 수목원 나무에 폭력을 가해 그 결과로 축소화된 인공세계에서 평화와 행복을 느끼던 오영제는 자신이 만든 행복의 신세계에 (교정되지 않은)아내와 딸을 들여 놓을 수 없었다. 핏빛 수수벌판 속 오래된 우물에 빠진 현수의 아버지는 한쪽 팔을 잃은 불구였고 아버지의 장애는 현수에게 용팔이라는 증상으로 유전된다. 이들은 다시 나뭇가지 성채와 마비 및 제어불능에 갇히면서 자기 삶을 자기 존재와 일치시킬 수 없다는 두려움에 빠지게 된다. 그런데 가만 보면 우리들 모두는 좋든 싫든 우리가 그토록 혐오했던 부모의 장애를 필연적으로 타고나는 존재들이 아니던가. 하지만 부모의 장애가 늘 불운으로만 성장한다면 누구도 부모이상의 존재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그건 우리들 자식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되는 누구에게나 공평한 인생의 짐인 것이다. 나는 여기서 현수가 덩치 큰 타고난 ‘미숙아’라고 했던 작가의 평가가 의미심장하다는 생각이다.

   현수는 거구의 운동선수로서 마스크에 공을 맞아도 눈을 깜박이면 안되는 포수였다. 어떤 공이라도 피해서는 안되며 전체 경기의 판세를 읽고 자기편 홈을 목숨걸고 사수해야 하는 수비수였다. 변화구 한방에 수비가 무너지지 않도록 공격을 오로지 손으로 붙잡아야(捕) 하는 운명인 것이다. 그러므로 신체부위중 손을 통제하지 못한다는 것은 이미 포수가 될 자격을 잃었음을 의미한다. 손의 신경증은 무능한 아버지와 아버지와의 갈등을 황급히 우물에 묻어버린 비겁함에서 비롯된 건 아니었을까. 결정적 순간에 나오는 수비실수는 아버지와 결정적인 순간을 대치한 적이 없었기 때문은 아닐까. 그렇다면 용팔이는 우물속에서 현수를 부르던 아버지의 부활은 아니었을까. 죽이려던 것이 아니고 단지 아이의 입을 막으려했던 현수의 왼손은 결정적인 순간에 마비가 풀리는 마법으로 세령의 ‘아빠’를 단숨에 덮어 버린다. 보통 자기 가정에 세령과 같은 또래의 자식을 둔 아버지라면 ‘아빠’라는 목소리를 듣고 자기자식이 생각나서라도 그냥 지나칠 수 없다고 보는 것이 상식이다. 현수는 왜 세령이 ‘아빠’라고 한 순간을 못 견딘 것일까. 무엇이 현수를 ‘아빠’로부터 멀어지게 한 것인가.

   세령이 죽기직전 불러본 ‘아빠’는 이 작품에서 모든 아버지와 아들을 상징한다고 받아들였다. 세령의 한마디 유언은 아빠라는 딜레마를 상징한다. 세령은 열두 살이었고 현수는 열두 살에 아버지를 잃었고 서원은 열두 살에 생존자가 되었다. 우선 아버지가 된 현수에게 열두 살 현수의 목소리는 영원히 지우고 싶었던 기억이 아닐까. 그건 곧 우물속에 빠진 아버지가 자신을 부르던 ‘현수야’와 대치하는 목소리였다. 아버지의 구두와 랜턴을 쥐고 수수밭으로 걸어 들어가면서 애타게 외치던 ‘아빠’였다. 서로를 불렀지만 서로 대답을 하지 못한 불통의 시간. 그러나 현수는 세령의 검은 눈동자에서 (아버지를 찾았던)자신처럼 자신을 찾고 있는 서원의 간절함을 본다. 세령의 텅빈 눈은 아버지와 자신의 아들을 동시에 볼 수 있는 매개체로서의 거울이었다. 죽음을 이어 삶을 자각하는 무정한 현실이었다. 현수는 결정적일 때 매번 지고 마는 용팔이를 이기고 싶어(서원에게 보여주고 싶어) 피투성이가 된 세령이 ‘아빠’라고 부르던 목소리를 마비가 된 왼손으로 덮고 비틀어야 했다. 현수는 서원이 자신처럼 아버지를 원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자기안의 아버지는 물론 그 아버지가 부르던 자신마저 제거하고 싶었던 건 아닐까. 아버지를 이김으로써 아들에게 떳떳하고자 했던 현수는 결국 아버지로서의 자신을 잃게 되어 아버지로서 살아갈 수가 없었던 것이리라. 안타깝고도 슬픈, 너무나 이해하지만 이해하고 싶지 않은 운명의 장난이 아니던가. 현수가 그 순간 자기 가정의 조력자인 아내의 전화를 받지 않고 자기 본성의 조력자의 목소리만 들었던 건 인간은 절대 자기 내적인간과 동일하지 않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사람은 자신만이 자신을 통제할 수 있지만 인간은 자기 안의 본성을 매번 이길 수 없다는 점에서 우리 삶은 우리 존재와 절대 동일할 수 없다는 걸 깨닫게 한다.

   내가 내 안의 자아와 같지 않고 나라는 존재도 내가 꾸려가는 삶과 반대일 수 있다는 사실은 교훈이라기 보다는 슬퍼하기엔 억울한 슬픔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안에 동물같이 포악한 본능이 존재하며 자신을 파멸시킬만한 위험도 보유하고 있다. 인간 안에 살고 있는 모든 요소가 인간적인 것은 아니며 삶이라고 모두 삶을 지향하진 않는다. 이 작품은 인간이 지닌 본성의 원심력이 막강했기 때문에 사실 본성으로 드러난 폭력이나 죽음의 현상보다는 그것을 작동케 하는 인간의 능력이 더 공포스러웠다고 할 수 있다. 에피소드가 많은 편이었고 화면모두 디테일했지만 더 치밀하게 보인 건 언제나 사람의 마음, 욕심의 방향, 행위의 의도에 있었다. 모두 사람이 투시할 수 있는 밑바닥까지 파고 들어가는 작가의 집요함이 놀랍고 소름끼쳤다. 작가가 소설을 전개하는 과정이 꼭 수심 몇 백 미터를 잠수하는 모습과도 비슷해 어쩌면 잠수부이면서 작가였던 승환이 작가의 대리인이라는 생각도 하게 만들었음이다.


본성보다 희망

   그런가하면 이 작품의 배경이 되는 세령호와 세령마을은 어쩐지 영화속 배경처럼 실존하는 구체성을 가졌으면서도 안개 낀 신비의 공간, 무의식과 영적인 장소로 이해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오영제의 딸 세령의 이름이 곧 마을의 이름이요 세령의 의미가 영혼을 씻겨준다는 무당의 춤 세령(洗靈)무를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세령은 아버지가 영제(靈際)를 지내주는 사람이므로 (어짜피 죽음이 예견된 아이로서)더욱 이 세상의 존재로 느껴지지 않았달까. 수몰된 옛 세령마을에서 태어나 열두 살 되던 해 생일날에 죽은 세령은 혹 세령마을 이라는 사회공통의 희생양은 아니었을까. 꼭 마을이 수몰되고 십이 년 정도가 흘러야지만 상처는 회복될 수 있다는 말로도 들렸다. 아니 십이 년이 되면 수몰된 사람들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누군가를 영제의 제물로 바쳐야 했던 건 아닐까. 인간이 영악한 건 진정 수몰된 마을 사람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안온과 평화를 위한 이기심에서 희생양을 찾는다는데 있다. 희생양은 고대 때부터 실제 비난 받아야 할 잘못 때문이 아니라 희생물로서의 징후, 즉 집단의 위기와 관련된 혐의가 발견되어 선택된 약자일 뿐이다. 희생양은 대개 저항할 수 없는 존재들에 속해있다. 행여나 복수를 하면 안되기 때문이다. 세령이 현수의 차에 치였을 당시 엄마의 흰 블라우스를 입고 화장을 한 채로 긴 머리칼의 흰 얼굴과 가느다란 종아리, 맨발이었다는 것이 흥미로운데 이는 성스러워야 할 영혼에 더러운 욕망의 가면을 덫 씌워 죽음을 관람하는 사람들의 죄책감을 덜어주기 위함은 아니었을까. 평소 오영제에게 늘 억압받고 폭력에 희생되던 세령이었지만 그날만은 오영제의 알리바이를 보존키 위해 세령의 성인분장은 꼭 필요한 장치였을 것이다. 세령은 야밤에 성인분장을 하고 뛰쳐나가 고양이와 밀어를 나누었으며 이미 학교에서 왕따를 당하고 있었기에 희생양으로 충분한 조건을 지녔다. 한 집단은 위기의 책임을 그 희생양에 씌워 희생양을 처형함으로써 자신들을 정화하고 평화를 정당화한다. 세령은 사회공동의 금지된 욕망을 상징하므로 이를 수몰시킴으로써 결과적으로 자신들의 도덕성까지 회복할 수 있는 희생양이 된다.

   작품 전반에서 세령의 죽음을 (성인으로서) 진심으로 슬퍼하는 사람은 없어보였다. 폭력의 진실을 알고 있었던 승환과 또래로서 연민을 느낀 서원 정도만 안타까와 했을뿐 세령은 가장 확실하고도 잔인한 피해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존재감이 없는 캐릭터로 보였다. 중요한 건 세령의 죽음이 아니고 세령의 죽음 이후, 세령의 죽음을 통해 달라진 마을의 풍경, 사람의 모습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건 세령은 희생양이었는데 왜 마을은 평화를 지키지 못하고 몰락의 길을 향했을까. 작가는 작품 전반부에 ‘물속 마을에 외지인이 침범하면 잠든 용신이 깨어나 재앙이 일어난’다는 힌트를 예언처럼 흘려놓았다. 세령이 희생양으로서 완벽한 조건을 갖춘 대상인 건 맞았으나 세령을 죽게 한 건 마을 사람이 아닌 외지인이면서 살해동기도 지극히 개인적, 우발적이었다는 사실이 마을신을 분노케 한 것은 아닐까. 현수는 댐을 지키는 보안팀장으로 은주는 사택 경비로 형식적으로는 댐과 마을을 지키는 역할이었지만 그들은 모두 마을을 위해 댐과 사택을 지키는 건 아니었다. 그들이 지킨 건 철저하게 자신들의 욕망이었고 욕망을 이루기 위해 욕망을 견디는 사람들이었다.

   우리는 금지된 것을 더 많이 욕망하는 존재이고 금지의 대부분은 부모와 사회로부터 박탈당한 쾌락에 속한다. 그렇다면 현재 작동하는 인간의 욕망은 과거 금지의 흔적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오영제와 최현수의 욕망이 아버지로부터 금지된 흔적이라 본다면 그들이 세령을 견디지 못한 심정이 십분 이해가 된다. 세령을 통해 자신의 과거와 미래를 동시에 본 현수는 금지된 욕망과 충돌하였기 때문에 끝내 분열된 주체가 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세령은 마을에 존재하지만 실재하지는 않은 무의식의 거울, 자기 반영의 호수였던 것이다. 우리는 자신을 자세히 보고 싶어 거울을 바라보지만 막상 그 거울과 조우했을 때 감당하기 힘든 진실을 확인하고 싶지 않아 거울을 깨버리는 존재인 것이다. 희생양을 원했으면서 희생양과 정면 대결하지는 못하는 거울 반대편의 주인공들인 것이다.

   이제야 인간은 자기 삶을 지키기 위해 자기 욕망을 사수하는 존재라는 것을 알겠다. 그런데 그 욕망이라는 것도 실은 내 삶에 개입된 아니 죽음으로 이어진 내 부모, 내 자식, 내 친구, 내 연인의 욕망일 수 있다는 것에 동의할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지킨 것이 실은 타자의 욕망이었고 그럼으로써 나를 지키지 못하는 삶이 된다면 우리 삶은 얼마나 비현실적인 것인가. 희생양으로부터 희생이 되는 어이없는 순간인 것이다. 애초부터 나는 나를 범하는 나와 운명적인 공범자임을 인정하자. 무엇이 악성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악성은 원래부터 존재하던 것이었다. 우리는 누구나 마음 깊숙한 곳에 자신만이 숨겨둔 우물이 있다. 그 우물을 박차고 나와 넓고 자유로운 바다를 온몸으로 만끽하고 싶은 욕망도 있다. 그러나 깊고 넓은 해저에 나 혼자 서 있다는 공포 때문에 더 이상 바다를 돌파하지 못하고 다시 익숙했던 우물 속에 갇힌 적도 있다.

   다시, ‘7년의 밤’을 생각한다. ‘7년의 밤’은 현수가 사건 당일부터 수없이 그날을 생각하는 시간이었다. 오영제가 숨어서 유령인간으로 지낸 시간이었다. 문하영이 세령을 그리며 서원에 조력하는 시간이었다. 승환이 어렵게 이야기를 완성해가는 시간이었다. 서원이 아버지의 진실을 알게 되는 시간이었다. 이렇듯 ‘7년의 밤’은 모두 사건으로 헤어진 후 각자 자신을 성찰하는 시간에 해당하므로 소설적 진실성을 확보하는 기간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그 시간은 누구나 상처받은 후 각자의 입장에서 과거를 회상하며 다시 미래의 승부수를 계획하는 시간인 것이다. 그 시간은 세령호에 수몰된 마을처럼 묻어둔 진실이 진실을 기다리는 시간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에겐 기꺼이 ‘7년의 밤‘을 보낸 후라면 새로운 기회가 주어질 수 있다는 희망의 시간이기도 한 것이다.

   한 편의 소설로 희망을 건져내기 힘겨운 세상을 살고 있다. 나는 이 책 한 권으로 인간 본성을 밑바닥까지 확인하였기에 처절한 패배감을 얻게 되었다. 하지만 그 서글픔 속에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왜 계속 살아가야 하는지, 아니 왜 벼랑 끝에서도 죽음이 아닌 삶을 택해야 하는지 조금은 알 것 같다. 운명은 희망을 놓지 않는 사람에게는 언제나 마지막 남은 공을 던져주기 때문이다. 공을 쳐내든지 잡아 내든지는 모두 공평한 우리 자신의 몫인 것이다. 내 인생의 마지막 공은 무엇일까. 내가 인생에서 지켜야 할 ‘무엇’을 생각한다. 그 ‘무엇’을 위해 죽어도 좋을 것 같은 나를 떠올려 본다. 내 속에 여전한 두려움, 시기심, 분노, 원망, 자만심, 패배감, 이 모든 것들이 ‘7년의 밤’ 동안 다시 조율되어 마지막 승부수를 띠울 그날을 기다린다. 마지막에 웃는 자는 그 직전까지 울었던 자임을 잊지 않으련다. 중요한 건 ‘7년의 밤’, 그 이전도 그 동안도 아닌 그 이후이다. 그 후로도 오랫동안 나를 살게 할 나만의 희망의 밤을 위해 나는 오늘도 7년 중인 밤을 기쁘게 맞이한다. 깊고 아득해도 벅찬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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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 좌파 - 민주화 이후의 엘리트주의 강남 좌파 1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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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좌파는 보수다

   솔직히 나는 이런 책에 별 흥미가 없다. 온라인 서점에서의 리뷰는 리뷰를 쓰는 사람들에게나 관심이 있듯 이 책 역시 대선주자에 관심있는 자들이나 집어들 책이라는 생각에서였다. 책을 덮고 나서도 할 말이 별로 없을 것 같았고 읽는 동안에도 종종 지루한 편에 속했다. 하지만 이 책은 늘 알고 있다고 생각해온 기존 한국의 정치판을 사회학적 시선으로 통찰하게 하는 기특한 미덕을 가졌다. 정리가 잘 되었고 문장이 예리하다. 서론을 끌지 않고 바로 본론, 결론으로 진입하는 방식은 객관적, 합리적으로 느껴지게까지 한다. 논점도 분명하고 결론도 설득력 있다. 다소 공격적인 문체를 예상했는데 튀거나 불편한 점도 없었다. 문제 제기의 범위가 넓지 않아 반복되는 단어가 많았고 지난시절 언론 기사를 복사, 편집해 상당분량을 채운 것 정도가 이 책의 품격을 떨어뜨리는 점은 있었지만 바로 그런 면이 일반대중의 눈높이와 흥미를 유발하기엔 무리없어 보였다. 한마디로 지금 시점에 잘 읽혀질 책이라는 것에 동의하고 발빠른 출판기획력에 박수를 보내드린다.

   하지만 ‘나’같은 사람에게 이런 식의 정치비평 책이 읽을 만하다 느껴지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나는 정치에 관심이 없는 쪽은 아니지만 일상에서 의견을 표명하는 쪽은 아니(었)다. 사람들과 대화가 오갈 땐 논쟁이 되는 사안에 대해선 침묵하는 편에 가까웠다. 지지하는 정당과 인물도 있지만 누가 물어봐서 꼭 답해야 할 경우가 아니라면 건너뛰고 보는, 은폐형 유권자에 해당한다. 이 책에 제시된 유형으로 보자면 좌파적 언어를 구사하는 강남우파에 가깝다.(그렇다고 오세훈을 지지한다는 건 아니다 ㅋ) 그렇다면 이 책은 더없이 보수적인 것이 아닐까. 책이라는 것이 그 어떠한 진보적 의제를 모아놓았다고 해도 원래 보수적으로 인식될 수 있는 장르이긴 하나 나는 요즘 거의 모든 비평장르는 결국 보수적인 결론을 지향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이 책의 보편성은 냉철하고 합리적인 비평을 기대하는 사람들이 원하는 특수성을 만족시키기는 어려워 보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자칫 책 덮고 난후 모아진 결론으로 최초 논점과 다른 결과를 양산할 위험이 있다. 예를 들어 이 책에서 가장 예리한 칼날을 들이댄 인물은 조국과 유시민, 문재인이고 평소의 칼날은 오세훈, 그보다 무딘 칼날을 사용한 인물은 손학규, 박근혜로 보이는데 나같이 정치에 둔감한 독자가 이를 느낄 정도라면 이 책은 결국 특수로 시작된 보수로 인식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책에서 말하는 강남좌파가 ‘배부른 진보’를 말한다면 결국 이 책의 제목이 바로 이 책의 정체성을 말해준다 할 것이다. 문체는 좌파적인데 문장은 강남적인 책이다. 한국에서 학벌에 대해 가장 시끄럽게 떠드는 동네가 강남이 아니었던가. 아니 어쩌면 강남은 침묵해왔지만 비강남이 강남을 향해 떠들어대는 소음인지 모르겠지만.

   그러니까 내 생각에 (이 책대로라면)강남좌파는 결국 보수다. 보수가 모두 강남좌파인 것은 아니나 좌파가 강남적이면 그건 보수일 수밖에 없다. 중요한건 좌파가 아니고 강남이기에. 이 책에서 말하는 강남성은 학벌성이고 학벌은 기득권의 세습을 상징한다. 한국사회에서 강남 출현이후 교육은 계급과 지위를 전복하는 기회가 아니라 그 격차를 확대 재생산하는 핵심통로가 되었고 강남은 그 지름길을 의미한다. 강남은 잘못한 게 없지만 강남사람들은 상대적인 죄의식을 가지고 있는데 이를 위로해주는 것이 좌파적 사고방식이다. 마음껏 누리되 약자를 배려하고 소수의 편을 들어주기. 환경을 보호하기 위해 삼십프로 더 비싼 유기농 식품을 구매하고 고급단가의 환경친화적인 인테리어로 자기 집을 꾸미는 사람들. 하와이 특급리조트로 여름휴가를 가서 진보 논객의 책을 펼쳐드는 것. 트윗을 하다보면 의사, 변호사, 교수의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주로 유시민적, 진중권적, 김진숙적 발언을 주도하는 것을 발견하곤 한다. 지난 몇 개월 트윗에서 투표하자는 사람은 거의 보지 못했다. 그건 알라딘도 비슷한데 알라딘 서재에는 주로 진보, 좌파성향의 글들이 자주 노출되고 토론을 활성화하는 경향이 짙다. 예를 들어 트윗에서 김진숙과 희망버스건의 RT율이 높아지면 알라딘은 그와 관련된 책을 이벤트 실시하고 재빠르게 그 책에 관한 페이퍼가 서재 메인 리스트에 등장한다. (프레시안의 뉴스가 네이버에 뜨는 것과 거의 동시적이다) 그러나 알라딘 서재를 운영하지 않거나 이용하지 않는 (구매위주의)일반 이용자들이 보게 되는 홈페이지 메인화면에는 정치와는 상관없는 단순 책에 관한 페이퍼들(신간위주의)이 노출된다.(이건 엄밀히 말하면 '알라디너의 선택'은 아니고 특정 책을 선택한 알라디너를 선정한 '알라딘의 선택'이다) 사고는 좌파적이지만 외모는 상업적, 라이프스타일은 문화적, 인문적인 정체성을 갖고 있다. 알라디너를 책 좀 읽고 글 좀 쓰는 지식인이라고 보았을 때 알라디너 역시 강남좌파의 영역에 속하지 않을까. 이 책대로라면 모든 정치인, 지식인은 강남좌파에 속한다 볼 수 있는데 물론, 내 생각은 좀 다르다.


강남우파는 강남좌파의 경력이다

   내 부모님은 경남출신의 YS 지지자였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오랜 세월 조선일보를 읽어 왔으며 70년대 후반부터 강남 아파트에서 거주했고 90년대 이후 분당으로 이주했지만 회사생활 십여 년을 강남에서 해왔다. 학벌 역시 8학군 출신에 SKY는 아니지만 서울에 있는 대학에서 대학원 공부를 마쳤다. 동창 역시 의사, 변호사 마누라, 중견기업 며느리, 아나운서, 기자, 방송인등 나빼고(?) 거의 잘된 편에 속한다. 외가와 친가에 대기업 임원, 고위 공무원, 기업 CEO의 친척들까지 두었으니 스펙상으로 나는 수구보수, 기득권층, 강남우파의 이력을 이미 오래전에 보유한 셈이다. 우리 집은 70년대 후반 남쪽에서 서울로 이주해 자수성가한 전형적인 중산층으로서 아버지는 사업을 하셨고 나는 그 사업가의 외동딸이었다. 이런 내가 지난 시절 김대중, 노무현이 대통령이 되는 것에 동의할 리는 없었다고 본다. 그리고 굳이 살면서 김영삼, 이회창, 이명박에 투표를 했노라 말할 필요도 없었다고 여긴다. 그래서인지 ‘강남’이라는 제목이 들어간 책들은 그다지 리뷰를 쓰고 싶은 마음이 생기질 않는다.(책의 반이 내 위선을 꼬집는 내용일텐데 뭐 좋을 일 있다고 그러고 싶을까) 미안하지만 강남성을 조금이라도 자신의 경쟁력으로 인식해온 사람들이라면 이런 책은 집어 들지 않는다고 이해하면 된다.(심지어는 문재인도 모른다)

   (편의상 이 책의 좌표대로) 나같은 강남우파들은 만나서 정치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는다. 만약 모임에서 정치관련 문제를 이야기하는 인물이 있다면 요즘말로 은따(왕따는 아니면서 은근히 따돌림당하는)가 될 확률이 많을 것이다. 그들 사이에선 정치를 화제로 하고 싶어하는 그 속성이야 말로 강남성을 저버리는 행위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 씨, 정치에 관심있는지 몰랐네요, 정도가 그들의 답일 것이다. 물론, 그들이 정치에 관심이 없어서 지지자가 없어서 정치 이야기를 외면하는 것은 아니다. 이들은 지난 주민투표에서도 보았듯이 선거에서 좀처럼 기권하지 않는다. 투표율로 대변되는 숫자 25.7은 굳건한 보수층, 홍수가 터지거나 폭설이 와도 생각이 잘 안변하는 골수 우파라고 보면 된다. 대략 삼십으로 여기지만 이번 투표에선 투표장에 가는 것이 자신의 성향을 드러내는 일이었기 때문에 삼십에서 좀 빠지는 수치가 (나같은)은폐된 유권자로 보면 될 듯하다. 서초구가 강남구보다 숫자가 높은 것은 강남구엔 교육 때문에 외부에서 유입한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서초구 부모님들은 강남구 부모님보다 강남을 지킨 횟수가 많으신 편인데 그들은 내 자식의 미래를 생각하며 그들이 빚지게 될 것이 마음아픈 충분한 여력을 가졌다. 하지만 서초구에 속하지 않은 타워팰리스가 자기네 아파트내에 독립적인 투표소를 설치해 압도적인 투표율을 보여준 것은 강남성에 대한 오리지널리티 경쟁을 의미한다. 아주 오래전부터 강남에선 자기네가 진짜 강남이라는 (외부에서 보기엔 민망한) 자존심싸움이 팽배했다. 고등학교 대학 진학률, 교수및 국회의원 분포도, 백화점 규모, 아파트 브랜드, 자가용 댓수등등. 나는 학교다닐 때부터 서울대, 연대, 고대식의 학교 순위처럼 강남전체 아파트 순위를 보고 듣고 자랐다. 그 순위는 곧 건설업체 도급순위와도 비슷했고 우리는 그런 식으로 일류와 이류, 삼류를 구분지어 사람을 계층화하는 일상에 아무런 거리낌이 없이 자라난 세대였다.

   (강남거주자로서)내 부모님 세대는 대부분 지방에서 올라와 자식의 교육에 목숨을 건 분들이었고 이들의 교육열은 (고향을 버리고 올라온)자신들의 성공을 향한 야망과 열정과 비례했기에 사실 다른 구에 비해 유별날 수 밖에 없었다. 지방에서 상경한 외지인에게 영동, 반포, 잠실은 주거장소로서 서울에서 가장 싼 지역이었다. 그땐 강남이 변두리였기 때문에 그들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들은 이미 새마을 정신으로 무장된 부지런함과 반공정신이 몸에 밴 우파인 채로 상경해 전두환, 노태우 정권에 큰 반감을 가지지 않았다. 서울의 성장은 강남의 성장이요, 그것은 자신들의 발전이었다. 이들의 자식들이 대학에 입학할 무렵 목동과 분당이 신도시로 등장하게 되는데 노후준비를 위해 이들은 대거 강남의 주택을 팔아 신도시로 이주하게 된다. 부동산 시세차익은 물론 그들의 자식이 수혜를 입게 되고 대학졸업과 동시에 김영삼 정권에서 비교적 쉽게 취직을 하게 된다. 그들의 자식세대가 결혼을 하고 완전독립을 이루지 못한 채 분당으로 따라가는 현상이 발생하는데 90년대 말에서 2천 년대 초에 분당에서 둥지를 튼 사람들이 나같은 강남학군, 분당엄마 세대이다. 분당에서 새살림을 시작한 초기 정착자들은 지금 사십대 이상이 되었다. 이들은 현재 강남에 살지는 않지만 강남에서 공부하고 자라난 이력 때문에 분당에서 출신성분에 대한 우월감을 가지고 살아간다. 이들이 인맥관계에서 가장 먼저 확인하는 절차는 대학이 아니라 출신 고등학교이다. 이들의 남편이 근무하는 곳은 주로 분당에 둥지를 튼 IT기업이고 실패한 마르크스 주의자를 선배로 둔 비운동권 출신이다.(80년대 말에서 90년대 초 학번) 이들이 지난 선거때 손학규를 찍은 것은 민주당이 좋아서가 아니라 한나라당에 대한 응징일 뿐이었다. 지금 이들의 최대 관심은 과연 문재인이 어디까지 치고 올라갈 것인가로 요약된다. 웃긴 건 모두 박근혜에 대해선 박근혜처럼 침묵하고 있다는 것이다. 박근혜는 아무 말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도 아무말 할 것이 없다는 것이다. 분당이 사실상 강남우파출신이면서 좌파적 언어로 여당을 헤깔리게 하는 것은 바로 자신들이 살아온 나날들과 앞으로 살아가야 할 날들 간의 괴리에서 비롯되는 현상이다. 이들은 박근혜와 문재인 사이에서 언제나 방황한다. 적어도 대선직전까지는.

   내가 이렇게 (내 위주지만) 강남성의 역사와 이동경로를 언급하는 것은 이 책이 강남성을 학벌성으로 결론내리면서 마치 그것이 지금 현재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가장 문제적 정체성으로 귀결하는 것에 대한 불쾌감 때문이다. 이 책은 좌파성이 아니라 강남성에 대한 접근에서 시작한 책이다. 내가 보다 잘 아는 것은 좌파성에 대한 정의가 아니고 강남성에 대한 시각인지라 이 책의 논제에서 보면 부수적인 것일 수 있으나 나로선 그냥 넘어가기가 힘들다. 나는 강남이 부자동네가 되기 전부터 살아왔기 때문에 강남성의 오리지널리티가 서울성이고 그것이 대한민국의 욕망의 정체성이 되는 것에 심한 모멸감을 느낀다. 강남성은 애초부터 지방성, 변두리성에 대한 열등감에서 시작되었다. 강남에 강북의 명문학교가 이주하면서 시작되었다. 그 시기는 박정희 정권이 막을 내릴 때였고 개발독재, 군사문화의 프레임에 익숙한 지방출신 촌사람들이 엘리트 열망을 극적으로 꽃피운 결과였다. 어찌 보면 강남성이야말로 박정희 시대의 가장 큰 유산이다. 작년이 경부고속도로 개통 사십 주년인데 그건 꼭 강남이 무럭무럭 성장해 대한민국의 학벌성을 상징하게 되는 시간들이었고 그건 꼭 내 나이와 같다. 다시 말해 강남이 성장한 만큼이 곧 우리(같은 강남우파의) 나이인 것이다. 그리고 세월은 흘러 우리는 완전한 우파도 아닌 그렇다고 분명한 좌파도 아닌 중간적인 상태의 그야말로 중간세대가 되었다. 그러니까 강남좌파는 강남우파의 성장, 노화, 세대교체의 다른 말인 것이다. 엄밀하게 말해 강남우파의 경력이 없으면 강남좌파가 아니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를 하면 무슨 고해성사하듯 내 이력을 커밍아웃하는 심정이 된다. 강남에 살아왔고 우파였지만 좌파가 된 것이 마치 대한민국의 정치를 방해하는 집단이 된 느낌이 든다는 것이다.


강남에 살지 않으면 강남좌파가 아니다

   저자는 강남좌파를 1)‘강남’의 성격, 2)주체의 위상, 3)좌파의 실천에 따라 각각 세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며 그 지형도를 제시했다. 먼저 강남의 성격에 따라 ‘경제적’ 강남좌파, ‘문화적’ 강남좌파, ‘연고적’ 강남좌파로 나누었다. 단순히 강남에 부동산을 보유하고 실제 거주하지 않더라도 돈이 많거나 라이프스타일이 강남적이거나 최상급의 학벌로 인해 인맥의 혜택을 누리는 경우를 모두 강남좌파의 영역에 위치시켰다. 주체의 위상에 따라 지도자, 정치인, 고위공직자등의 ‘공적’ 강남좌파와 언론인, 대학교수 등의 ‘중간적’ 강남좌파, 일반시민으로서의 ‘사적’ 강남좌파를 나누는 (직업군으로서)사회계층적 구분에 비하면 상당히 모호한 잣대라 할 수 있다. 좌파의 실천적 관점에서 이타적, 합리적, 기회주의적 강남좌파로 나누는 태도구분과 비교해서도 세밀하지 않다. 다른 건 모르겠는데(도식적, 논문적, 작위적이긴 하지만) 9가지로 세분화된 지형도에서 1)‘강남’의 성격은 동의할 수가 없다.

   이것은 보편화된 강남성에 대한 상징범위와 단순 해석 차이의 문제일 수도 있지만 무엇보다 지리적으로 장소성이 분명한 ‘강남’을 타이틀화 한다는 점에서 경제와 문화를 강남과 별개로 보아도 강남성에 포함시킨다는 광범위성이 나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 논리적으로도 맞지 않는다 생각한다. 왜냐하면 내가 아는 강남사람들은 아무리 적은 평수의 아파트에 살아도, 아무리 월세를 살아도 자신이 강남에 산다는 것을 가장 극명하게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아무리 주상복합 펜트 하우스에 살아도 아무리 집이 몇 채이어도 강남에 살지 않는 사람은 자신이 강남인이 아니라 생각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행정구역상 강남을 주소로 두지 않아도 ‘라이프 스타일이 강남사람과 같다면’ 강남좌파에 속한다고 하는 저자의 잣대는 섬마을에 살아도 도시적 외모와 세련된 매너를 갖추었다면 도시인이라 칭하는 논리와 같다. 저자는 강남사람을 단순히 경제적 부와 문화 및 취미생활을 마음껏 향유하는 자본주의 수혜자로 규정지었는데 내가 생각하기에 강남은 스타일로 규정지어질 외양적 문제가 아니라 자존심을 배경으로한 심리적 문제라 생각한다. 강남사람은 나머지를 버리고 강남을 선택한 이유가 있는 사람들이다. 아니 나머지를 택하지 않고 강남을 못 버리는 이유가 있는 사람들이다. 이는 강남사람들이 경제적으로 윤택하고 문화생활을 더 많이 즐기기 때문에 강남적이라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이다. 강남사람들은 전화번호가 지역을 말하는 시절에 ‘5’자로 시작하는 국번을 자랑스럽게 여기거나 서울 ‘55’로 시작하는 자동차 번호판에 자부심을 느끼곤 했다. 개인 사무실을 오픈할 때도 강남에 사무실을 낸 사업자는 명함에 ‘강남구’라고 적는 것에 우월감을 느낀다. 그들은 빌딩 임대료를 못 낼지언정 대부분 리스로라도 외제 승용차를 끌고 다니고 바세론 콘스탄틴의 시계를 차고 거래처를 방문하며 접대할 때 꼭 강남의 일식집을 고집한다. 다른 곳이 아닌 강남에 사무실이 있는 오너라는 인식은 갑과 을 모두에게 중요하다. 나는 이십대 때 영화와 CF, 삼십대에 인테리어와 디자인, 건축쪽에 종사했다. 모두 강남에 사무실이 집중되는 업종이었고 라이프 스타일이 철저하게 강남적이었지만 사는 곳이 강남이 아니면 절대로 강남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한국에서 고향이 어디 출신인지 중요한 것과 마찬가지로 현재 사는 주거지가 서울 어디인지는 같은 비중으로 중요하다. 장소의 구속성이 심리적 보상감을 제공하기 때문에 강남성을 말하는데 강남이라는 장소는 배제되어선 안 될 요인인 것이다. 이렇듯 강남성은 강남이라는 지역을 벗어나 본질을 설명하기 적절치 않은 특질을 가졌는데 저자는 처음부터 지나치게 강남을 일반화하는데 거리낌이 없다. 이는 강남에 사는 사람에게도 불쾌하고 강남에 살지 않는 사람에게도 못마땅한 구분이다. 강남의 일반화는 현상의 일반화, 결론의 보편화를 위해 필요한 과정으로 보여 심층적이지 않았다고 본다. 강남좌파를 강남성의 본질과 별개로 생활패턴에 따른 정치트렌드적 용어로만 제시하기엔 깊이가 없어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바로 그 강남성의 본질적 연구없이 이미 결론을 도출해 놓고서 하위영역을 세분화하는 것은 전형적인 탁상공론식, 연구성과식 비평은 아니었을까.


지식인은 지식을 남용하는 사람이다

   그렇기에 이 책은 강남(지역)이나 좌파(정치)에 대한 논의가 아니고 미래 엘리트(교육) 방향성 논의를 위한 인물비평인 것이다. 이 책은 새롭게 대두된 강남좌파라는 프레임을 통해 오늘날의 정치현상을 진단한 책이라기보다는 대선을 앞둔 시점에 이슈가 되고 있는 인물분석을 통한 한국사회의 강준만식 미래적 패러다임을 강남좌파라는 타이틀롤로 묶었을 뿐이다. 궁극에 강남성으로 치환되는 엘리트 생성구조에 대한 질문을 함의한다. 대통령 후보는 정치인이요, 정치인은 엘리트요 엘리트는 강남성을 지닐 수밖에 없는 한국사회 구조적 특수성과 대안으로서 세계적 보편성을 잘 버무려 편집한 책인 것이다. 이는 기존 학벌사회를 뒤집을 의지나 용기가 없다면 굳이 좌파 프레임을 제시하지 말라는 뜻도 된다. 자식에게 일류대 가야한다고 하면서 조직에서 비정규직 철폐하라는 말 닥치라는 뜻이다. 하지만 저자가 한국사회의 학벌을 타파하자는 목적으로 이 책을 출간하였을까, 하는 부분에선 고개를 갸우뚱거리게 된다.

   결국 그도 사람 이야기 하고 싶어서 대선주자들의 특성과 장단점을 분석, 비교한 것은 아닐까. 인물중심주의를 탈피하고 목적 중심주의로 가기 바란다는 결론이 마음에 들었을 리가 없는 이유이다. 나는 강준만도 잘 모르고 이 책에 소개된 대선주자 6인도 잘 모르지만 이 책을 읽고 나서는 어떤 사람이 대통령이 되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은 할 수 있었다. 이 책을 받아서 읽어 내는 동안은 ‘사실상’ 세간의 관심사에 대한 독자로서의 ‘선의’에 가까웠다고 할 수 있는데 우리가 겪었듯이 사실과 선의는 시작을 말할 뿐 절대 결과를 보장하진 않는다.

   저자가 말하길 지난 시절 문국현 현상은 ‘새것 신드롬’이었고 좌파 아이콘으로 부상한 조국은 철저한 폴리페서라 진단했다. 하지만 제 2의 김대중이 될 가능성이 있다는 말을 흘리기도 했다. 박근혜는 강남좌파의 거울현상이며 애국심, 품격, 강단, 책임감, 신뢰를 갖춘 언행일치 정치인으로서 (그 누구도 가지기 힘든)지도자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고 칭찬했다. 만약 박근혜가 대통령이 된다면 무엇보다 차후 용인술이 중요하다고 조심스레 충고했다. 좌우 진영을 옮겨 다니다 유력한 대선후보가 된 손학규도 경기고, 서울대, 옥스퍼드 박사라는 학력이 결국 그의 가장 큰 경쟁력이 아니냐 반문했다. 정치인과 지식인의 경계를 수시로 넘나들며 자신의 이득에 따라 자세를 취하는 편의주의 유시민은 노무현 유산계승 및 정신 구현이라는 ‘집착’과 ‘집중’이 그의 장점이자 치명적 단점이라 말하며 대세추종형의 철새정치인이라 비난했다. 유시민을 우리 현대사의 업보로 보고 지속적이고도 자기성찰 없는 행보를 강도높게 지적했다. 솔솔 불어오는 문재인 대망론에 대해선 막연한 책임의식, 불투명한 비전등을 지적하며 그 평가를 유보하는 듯 보였다. 오세훈은 이타적 강남좌파를 가장한 기회주의적 우파로 보고 자신의 브랜드 가치를 위해 정치를 기획하는 인물로 진단했다. 타협이 가능한 의제를 두고도 벼랑끝 전술을 지향하는 투쟁적 호전성을 박근혜와 차별화하기 위한 치밀한 전략으로 보았다. 그러면서 뜬금없이 핵심은 한국사회에서 엘리트의 정치적 행보와 그로 인한 승자독식주의라 보편화했다.

   노무현 정권 상층부의 위선을 말하기 위해 사용했다는 강남좌파는 한국에서 가장 치열한 계급투쟁으로서의 대학입시 전쟁을 상징하며 좌우를 능가하는 초강력 이데올로기로서의 학벌주의를 의미한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저자의 요구처럼 학벌에 유연해지기는 퍽이나 어려워 보인다. 차라리 학벌을 타파하라는 것보다는 진부하지만 학벌 가진 배운 자가 가져야 할 윤리나 대중이 현명해지는 길을 알려주는 것이 더 현실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예전엔 우리나라가 강대국이 되면 이 모든 문제가 사라질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약소국 시민으로서 열등감, 패배감, 피해의식이 많았던 탓이다. 그런데 이제 나라의 위상이 달라졌고 세계속에서 동등하게 경쟁하는 우리나라를 보면서 학벌에 유연해지라고 하는 것은 비현실적으로까지 느껴진다. 그렇다고 계속 학벌 중심 사회에 적응하자고 대놓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 그동안 학벌을 좇아온 우리들의 비애일 것이다. 학벌 이야기 하자고 하면 사회 전체적으로 거의 체념분위기에 가깝고 모순된 구조를 꼬집느니 잘 가르치는 학원을 알아보는 것이 더 현명할지 모른다. 조국 교수도 딸을 외국어 고교에 보내고 일류대를 보내기 위해 고민했다고 하는 판국에 아무것도 되지 못한 우리가 어찌 다른 고민을 할 수 있겠는가. 이 책을 쓴 저자 강준만도 성균관대, 조지아 대학, 위스콘신 대학을 나와 전북대 교수가 되었으니 이런 책도 쓰는 것이고 독자들도 관심을 가지는 것 아닌가.

   한마디로 이 책은 지식인이 저지르는 가장 지식적인 작업으로서의 최상층의 모순의 영역에 속하지 않을까.

   저자는 미국의 촘스키, 영국의 러셀, 프랑스의 사르트르도 상층 출신의 진보적 지식인이라고 언급했다. 이 책을 읽고 나니 퍼뜩 사르트르가 말했던(정확히는 변명했던) 지식인이 떠오른다. 사르트르는 60년대 말 <지식인을 위한 변명>에서 부르주아 출신의 지식인에 대해 그 모순성을 분명하게 피력한 바 있다. 사르트르 시절 프랑스에선 기존체제에 대한 비판자라는 의미로 지식인은 대게 좌파지식인을 뜻했다. 하지만 이들의 모순은 (강준만도 지적했듯이) 중간이상의 생활수준에서 태어나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를 학습해온 실용적 전문가로서 다시 중간이상의 계층에 놓이게 된다는 것에 있었다. 이들은 부르주아적 휴머니스트이지만 지식을 독점하고 계급을 재생산하므로 결과적으로는 휴머니스트의 평등주의를 위배하게 되어있다. 지식인은 필연적으로 사회에 노출된 모순들에 의하여 스스로의 모순을 자각하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식인의 직업적 활동은 사회구조의 모순을 드러내는 작업이 되고 그것은 곧 자신을 부정하는 일이 된다. 처음부터 자신의 정체성을 부정하려고 지식을 운용하는게 아니지만 자기가 가진 지식의 정점에선 그 모순속에 가장 분명하게 자신이 위치해 있음을 증명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분열된 사회속에서 만들어진 지식인은 그 사회의 분열을 내면화한 까닭에 바로 그 분열된 사회의 증인이며 따라서 그는 역사의 산물이다. 그러므로 어떠한 사회도 자체의 불이익을 감수하지 않고는 지식인을 비난할 수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지식인이란 결국 그 사회가 만들어낸 존재이기 때문이다.        

-장 폴 사르트르, <지식인을 위한 변명>


사르트르는 지식인이 피해야 할 위험으로 ‘지나치게 조급히 보편화하려는 태도’를 꼽았다. 결국 보편적 전문가를 자청해 대중을 위해 봉사하는 행위, 근본적인 목적(평화, 인권, 평등등)을 수호하는 행위를 하게 된다는 점에서 지식인은 근본적으로 영원히 좌파가 될 수 없는 운명일지 모른다. 하지만 지식인이라면 자신의 지적영역에서 오랫동안 쌓아 온 명성을 ‘남용’하여(서라도) 기존의 사회와 정치권력을 비판하는 것이 맞다고 보았다. 지식인의 본질은 보편성의 추구가 아니라 특수한 남용이라는 것. 남용의 정도와 수준, 남용의 목적과 결과, 남용의 과정과 오류, 이 모든 범위는 지식인의 몫이고 지식인의 능력에 따른다. 남용을 비난하고 지적하는 것은 독자와 대중의 몫이지만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지식인은 인간 각자의 모순과 사회전체의 모순을 내재할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책에 바라는게 있다면 학문적 모순의 영역속에서도 저자 나름의 남용이 추후 지혜를 발휘하는 긍정의 효과를 낳았으면 하는 것이다.

   앞으로 서울시장 보선과 총선 그리고 대선으로 이어지는 정치의 계절이 다가온다. 정치의 계절과 조우하는 국민은 좌파와 우파, 진보와 보수를 떠나 정치적이 될 수 밖에 없다. 그런데 신기한건 오프건 온라인이건 사람들과 대화를 해보면 처음엔 다들 정치엔 관심이 없다는 식의 중립적 의사를 내비친다는 것. 실제로 가치 중립적이어서가 아니라 자신의 성향을 드러내기 싫거나 아니면 잘 모르기 때문일 경우가 많아서라 생각한다. 정치에 대해 자신의 성향을 드러내놓고 활발하게 의사를 표현하는 쪽이 대개 진보, 좌파쪽이며 그렇기에 정치에 대해 잘 아는 쪽도 진보, 좌파라 보았을 때 바꿔 말하면 중립이라는 말, 무관심하다는 말은 보수라는 뜻에 다름 아닌 것이다.

   안타까운건 2011년 현재 좌파는 트렌드이고 스타일이고 생활패턴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진짜 강남 사람들은 조직에서 왕따 당하기 싫어 좌파인척 하지 말 것이며 비강남 사람들은 괜히 강남을 의식해 시기심, 적대감의 표현으로 좌파적 언어를 구사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좌파든 우파든 배운 사람들이라면 지식인으로서 스스로의 모순을 인정한 채로 자기 안에서 먼저 치열한 내재적 투쟁의 과정을 거친다면 어떨까. 이제 대중은 모두 지식인이고 독자는 모두 똑똑하다. 무엇이든 순응하지 않는 사람들이 그립다. 희망이라는 것이 전복의 가치를 일깨우는 것이라면 나는 지식인으로서 희망을 버리고 싶지 않다. <강남좌파>를 모두 뒤집어 생각해 본 것, 그것이 이번 독서의 유일한 희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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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1-09-01 12: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제 강준만도 한풀 꺾였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이런 책도 내는구나 싶기도 하고.
저도 제목이 좀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강남이 잘 사는 사람이 많은 건 사실이지만
서민으로 사는 사람도 많아요.
소위 나가요 사람들과 점쟁이들이 그렇게 많다는데
그렇다고 그들처럼 강남의 서민들이 살 사는 사람한테 기생하며 사는 것도 아니잖아요.
비강남이 다 착한 사람만 사는 것도 아니고.
전 강남에서만도 35년 넘게 살았지만 아직도 강남 사람의 수준을 못 따라 가고 있어요.
따라 가야한다는 생각도 못해보고.
그냥 어찌 어찌 하다보니 강남권에서 살고 있다는 것뿐.
동네 바뀌는 거나 지켜보고 사는 것뿐. 다른 거 있나요?ㅋ

cyrus 2011-09-01 12: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이 책이 많은 화제를 불러일으켜서 읽어보려고 해요. 강남 좌파는 정말로 많이 들어봤는데
정확히 이들을 분류하고 있는 의미는 잘 모르거든요. 한사람님이 소개하신 사르트르의 책은
지난 달에 헌책방에서 구입하고 난 뒤에는 읽어보지는 못했는데 그 책도 읽어봐야겠어요 ^^

oren 2011-09-01 17: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라딘에서는 좀처럼 접하기 어려운 '신선한' 글이네요.

저 역시 한사람님처럼 '정치에는 관심이 없다기 보다는 흥미가 없다'는 쪽이어서 그런지 몰라도 공감이 느껴지는 부분을 어느 정도 발견할 수 있었던 데다가, 한사람님의 정치적 감각 또한 남다른 것 같아 '고백'이 예사롭게 읽히지 않는 부분도 많은 것 같네요.

제 개인적으로는 '보수'니 '진보'니, '좌파'니 '우파'니 하는 '편가르기'를 통해 곧바로 '네 편과 내 편'으로 편입시키고 마는 '성급한 구분'을 특히 싫어하는 편인데, 그런 구분은 늘상 '정치적인 의도'에 끌려 들어가는 듯한 불쾌감부터 느껴 지고, 정치인들이나 정당이 표방하는 '이데올로기' 자체가 선거에서 표를 얻기 위한(궁극적으로는 권력과 지위를 얻기 위한) 허울좋은 '장식물'에 불과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경험들은 '민주화 운동을 통해 획득한 빛나는 훈장'들은 고작 '국회의원 뱃지'와 맞바꾸기 위한 수단이나 도구일 뿐이라는 사실을 '그들'이 우리에게 너무나 적나라하게 가르쳐준 덕분에 저절로 쉽게 터득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좌파 정권 10년 동안 겪었던 '무능과 위선'에 이르러 정치에 혐오감을 불러 일으킬 만큼 우리를 낙담시킨 덕분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80년대 초반 학번으로서 겪을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환경'때문에라도 잠시나마 '좌파' 이데올로기를 피해 가기는 어려웠던 것 같고('서울의 봄'이 도래했던 1980년 고3 시절조차 대학생 형들과 '동조'한답시고 '교련수업'을 집단으로 거부하고 '교련복'을 입은 채 학교 운동장을 돌며 '전두환 군사독재 타도' 데모를 하기도 했으니까요), 대학 1학년부터 시작된 숱한 교내외 데모는 마침내 군복무 후 복학 첫해인 1986년에 와서 '시민혁명'으로 완성되는 '감격'도 경험하게 되었지만, 학교 졸업후 '오랜 사회생활'을 하게 되면서 정치에 대한 관심 '따위'는 점차 식어 가거나 제 스스로 식혀갈 수 밖에 없더군요. (제 개인적으로는 '87년 대선부터 지난번 대선까지 5회 연속 '대통령 뽑기'에 실패할 정도로 '정치적 감각'이 한심한 수준이었던 것도 한 이유가 되었을지 모르겠습니다. '87년 대선 때는 YS를 지지했다가 노태우가 당선되었고, '92년 대선에서는 DJ를 지지했다가 YS가 당선되었고, 가장 최근인 2007년에는 '문국현'을 적극 지지했다가 MB가 당선되는 걸 봤고, 철저한 실패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지금에 이르러서는 '강남좌파'니 하는 주장과 책들 '따위'에는 도무지 관심이 없고, 강준만이니 조국이니 하는 인물들에도 그다지 관심이 별로 가지 않는데, 가만히 내 주위를 둘러 보면 나 스스로도 '참 많은 모순들'에 둘러싸여 살고 있구나 싶은 생각도 듭니다. 어떤 모임, 가령 '*** 민주 산악회'로 뭉친 친구들은 아직도 '희망버스'에 열심히 올라탈 것을 권유하고 있고, *** 민주열사 00주기 추도식에도 참석할 것을 권유하는 반면, 무슨 친목모임에 가면 '무상급식 투표장에 갔더니 사람들이 그렇게 적게 나올 줄 몰랐다'는 얘기를 너나 없이 이구동성으로 '자랑삼아' 내뱉는 이야기를 듣는 식입니다.

어찌 되었건 간에, '강남'에 살든 어디에 살든, '좌파'든 아니든, 2011년 현재 좌파가 트렌드이든 아니든, 제가 나름대로 생각해 낸 결론은 결국 '강남좌파'라는 구분 또한 각자 제 나름대로 '먹고 살기 위한' 독특한 표현 형식을 지닌 '무리들'을 달리 표현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정치인'이라는 직업에서는 생활수단의 유일한 원천이 '선거에서의 승리'에 달려있기 때문에, 정치인의 '입'은 늘 특별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 요즘입니다.

* * *

노력은 항상 그 필요성에 비례한다

어떤 직업에서도 그 직업을 수행하는 사람들 대부분의 노력은 그 노력을 해야 할 필요성에 항상 비례한다. 이 필요성이 가장 큰 것은 자기 직업에서 받는 보수가 그들이 획득하기를 기대하는 재산 또는 일반수입이나 생활수단의 유일한 원천인 사람들의 경우이다. (중략) 어떤 특정 직업에서의 성공으로 달성할 수 있는 위대한 목표는 물론 특별한 의지(spirit)와 야심(ambition)을 가진 소수 사람들로 하여금 열심히 노력하도록 분발시킬 수도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최대의 노력을 끌어내는 데 반드시 위대한 목표가 있어야 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비천한 직업에서도 경쟁과 대항의식이 남보다 성적이 뛰어나는 것을 야심의 목표로 하여 최대의 노력을 경주하도록 하는 경우가 흔히 있다. 이에 반해, 목적이 위대하긴 하나 노력해야 할 필요성이 별로 절실하지 않은 경우에는 크게 노력을 하지 않는 것이 보통이다.

- 아담 스미스, 『국부론』中에서

교고쿠도 2011-09-02 02: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음, 사실 저도 '강남좌파'라는 단어와 같은 일종의 내부적 분열을 겪은 적이 있습니다. 가난한 이들보다 더 좋은 것을 누려서는 안 된다고, 가장 작은 자들과 연대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실제의 생활은 너무나도 동떨어져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물론 제가 상대적으로 부유한 동네에 거주하거나, 가방끈이 길거나, 가진 것이 특별히 많은 것은 아니지만요...아직도 저는 너무 많은 것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직 제 스스로를 좌파라고 칭하기에는 너무 부족한 점이 많은 것 같습니다. 정말이지 저에게는 처절한 자기반성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교고쿠도 2011-09-02 23:23   좋아요 0 | URL
아직도 몸 상태는 그닥인듯 합니다. ㅜ.ㅜ그래도 아주 약간은 나아진 것 같기도 하고...

시몬느 베이유...가 저의 주보성인(?)이 된 듯 합니다. 시몬느 베이유가 간 길을 따라 걷고자 하는...생각을 합니다. ^^

가연 2011-09-03 1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글 좋네요ㅎㅎ 뭐라고 더 덧붙일 이야기가 없네요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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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렌트 읽기 - 전체주의의 탐험가, 삶의 정치학을 말하다 산책자 에쎄 시리즈 8
엘리자베스 영-브루엘 지음, 서유경 옮김 / 산책자 / 2011년 6월
평점 :
품절





독서의 순간

   이 책의 원제는 『Why Arendt matters』, ‘왜 아렌트는 중요한가’ 이다. 즉, 그녀가 떠난 지 30여 년이 지난 지금의 시기에 아렌트를 다시 읽는 것이 왜 중요한지를 말하는 책이다. 바꿔 말하면 지금 아렌트를 읽어야 하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라는 뜻도 된다. 저자에게 아렌트는 지도교수였고 어찌 보면 아렌트 학파의 마지막 제자로서 스승의 업적을 계승, 완성할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저자는 아렌트 탄생 백주년(2005)을 기념해 이 책을 출간했는데 이 책은 스승인 아렌트를 말하는 책이기도 하지만 아렌트를 말함으로써 제자였던 자신의 의견과 판단을 사회적으로 전달하는 임무도 훌륭히 완수했다. 저자가 아렌트를 가이드하는 여행길은 곧 우리가 오늘을 반추하는 길이었던 것. 그러므로 (아렌트는 내가 잘 아는 바)아렌트를 이렇게 읽어야 한다고 주입하는 책으로서 무엇보다 ‘이렇게’의 논리를 세심하게 펼친 작품이라는 것이다. 저자의 성과는 바로 ‘이렇게’가 아렌트의 사상적 발전인 것으로 자가 안착시켰다는 것이다.

   나로선 아렌트의 책을 한 권도 안 읽고서 이 책 한권으로 아렌트는 물론이고 아렌트의 스승과 또 그녀를 스승으로 둔 현역 학자의 통찰까지 학습할 수 있었으므로 여간 반가운 게 아니었다. 특이했던 건, 사실 다분히 (정치를 말하는 것이므로)정치적인 논조를 예상하고 책을 펼쳤는데 저자가 철학, 정신분석학의 저서를 많이 출간했기 때문인지 이 책은 고스란히 철학과 정신분석학의 밀도높은 문체를 드러낸다는 것이었다. 외국의 어떤 철학자를 말하는 사람이 또 다른 철학자일 경우 독자는 필연적으로 이중철학의 고(苦)에 부딪힐 때가 있다. 몇 부분 이해가 안가는 문장들의 향연이 발견되기도 했는데 지난번 『데리다 평전』때도 겪은 일이지만 이것이 아렌트의 뜻인지 저자의 해석이 가미된 의견인지(아니면 한국의 번역자의 의역인지) 독자로선 주어진 문장만으로는 전혀 판단할 길이 없다는 것이다. 맥락에 묻어갈 수 밖에 없는 순간들이 사유의 기쁨을 선사할 수 있겠으나 공교롭게도 문장 내에서 빈번히 접하게 된 이중, 삼중의 부정형 그리고 수동태의 번역문은 이 원망이 누구를 향해야 할지 모를 일로 남겨져 ‘어렵고 짜증난다’는 식의 평가를 부를 확률이 있다. 하지만 이 책은 그러한 일괄적 평가로만은 부족하다. 이 책은 내용상 어려운 컨텐츠를 담고 있는 것은 아니고 번역상으로 저자, 그리고 옮긴이 만의 독특한 문체가 매우 강렬해 중독성이 있다.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그들 사유를 좇아가지 못하는 특성도 있다.(혹자들은 그런 게임식의 재미 때문에 철학을 좋아하는 것 아닐까) 페이지가 넘어갈수록 이 경향은 두드러져 결국 저자의 특기(?)인 듯 해 보이는 개념의 사유와 표현방식의 인문학적 체계에 항복당하는 순간이 오게 되는데 막상 책을 덮고 나니 그러한 저자의 내재적 에너지에 압도당한 느낌이 싫지 않았달까. 결론적으로 뻐근한 사유의 재미에 흠뻑 빠져들던 시간이었다. 한마디로 정치와 철학이라는 재료가 정신분석학의 레시피로 요리된 듯한 흔치않은 느낌으로 충만한 순간. 저자는 자주 ‘아렌트적 순간’이라는 역사적, 상징적 순간을 언급했는데 내게 이 책은 한 여름 치열하게 기억할만한 ‘독서적 순간’으로 남을 듯하다.


운명의 순간

   저자는 아렌트의 주요 저서 『전체주의의 기원』(1951), 『인간의 조건』(1958), 『정신의 삶』(1978)을 큰 축으로 구분해 놓고 그녀와 자신의 사유를 정리한다. 흡사 아렌트 대리인으로서 정당 대표의 대변인처럼 느껴지던 목소리는 깊고 심층적이면서도 생생하다. 마치 아렌트가 아직 살아있는 사람처럼 느껴지기도 하는데 저자는 아렌트를 75년 이후 계속 생존하도록 생명성을 유지시키는데 공헌을 한 것 같다. 저자는 아렌트 삼부작을 언급하면서 아렌트가 바란 것, 바라지 않은 것, 이룬 것, 이루지 못한 것을 피하지 않고 나열한다. 예를 들어 오늘날의 정치상황을 말할 땐 만약 ‘그녀가 아직 살아있다면 뭐라고 말했을까?’와 같은 자문으로 그녀와 나누는 대화를 연상토록 한다. 그리고 이미 죽은 아렌트의 대답을 당당하게 호출하여 우리 앞에 정렬하는 자신감은 곧 그만큼 아렌트를 많이 아는 증인으로 인식되게 한다. 아렌트를 (제대로)읽으려면 나를(나부터) 읽어라, 그것이 저자의 할 말로 보였다.

   아렌트 삼부작을 지나쳐온 뒤 떠오르는 질문은 ‘개인과 국가와의 관계’였다. (생각 ‘없는’)개인의 악이 국가의 악으로 발전할 수 있듯이 (생각 ‘깊은’)개인의 선 역시 국가의 선으로 확대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것이 희망적으로 느껴지지 않고 암울하게 와 닿았던 건 그렇기에 개인의 행복은 절대 개인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깨우침 때문이었다. 소개된 아렌트의 책을 연작으로 이어보면 결국 ‘인간으로서 인간적인 삶을 인간답게 살아가기’에 대한 평생의 고찰이라고 할 수 있다.

   아렌트는 공영역을 (사적 영역, 사회적 영역과 달리)정치영역으로 보았고 공영역의 역할과 비중이 현대인의 삶속에서 몹시 위축되어 있는 것을 지독히도 관찰했다. 사람들이 정치에 대해 만연적인 피로감을 호소하고 애정을 못느끼는 정치적 상황을 정치하지 않는 일반인과 뫼비우스의 띠처럼 하나인 몸으로 이해했다. 이에 아렌트는 무엇보다 정치적 기능을 회복하는 것이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기 위한 필수조건으로 보았다. 문장으로만은 당연해 보이는 이 결론이 철학으로 정치를 하는 정치철학자, 그렇기 때문에 정치 사상가로 알려진 학자의 주장으로 인식, 수용될 때 정치를 외면해온 나같은 독자에겐 상당히 충격적인 결론이라 할수 있다. 정치적이지 않으면 행복해질 수 없다, 로 들리기 때문이다. (물론 아렌트가 말하는 정치는 우리가 당하는 통치개념의 정치는 아니라 말하는 듯 하지만 나는 같은 개념이라고 본다) 그동안 더 행복해지기 위해 정치적이지 않으려 한 것이 아렌트가 비판했던 하이데거의 모범적이지 못한 위선으로 간주되는 것 같기 때문이다.

   아렌트는 칸트의 고장, 유복한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나 독일 철학의 심장부 하이데거, 후설, 야스퍼스에게서 교육받았다. 그러한 독일철학의 전통을 계승한 저자가 “해체할 것이 없을 때까지 해체하라”던 데리다의 주장 뒤에 남은 것이 무엇인지 정곡을 찌르듯 질문하던 것은 철학이 공허한 결론이 되지 않기 위한 자세로서 충분히 의미심장하다. 지난달 내가 『데리다 평전』을 읽었을 때 철학은 정치적이지 않을 때 인간을 설득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내가 리뷰를 정리하는 오늘의 시점에도 북한은 연평도에 포격을 하였고 일본의 잇따른 독도도발로 양국관계는 다시 냉기가 흐르고 있다. 내년 대선을 앞두고 입으로는 정치에 관심없다는 냉소를 지어보지만 사실 우리 모두는 정치에 관심이 없어서는 안 될 시점이고 또 외면하기도 힘든 상황에 국면해있다. 내 생각에 한반도에 아렌트가 소환된 이 시점은 어느때 보다도 중요한 시기인 듯하다. 우리는 식민지국가였고 전쟁국가였으며 지금은 분단국가이기도 하다. 그것은 아무리 김연아 선수가 금메달을 따고 G20 정상회의를 개최하고 유럽에 K-pop이 유행이라고 해도 변하지 않는 진실이다. 아렌트의 대표작 세권은 모두 유대인-나치-아이히만이라는 뼛속 공통분모를 함의한다. 전체주의로서의 반유대주의, 나치의 대리 수행인으로서의 만행, 악의 본질을 탐구케 한 인간의 본성, 이 세가지 연쇄사건은 결국 민족, 체제, 인간에 대한 탐구결과를 이룩했다. 다시 말해 한 인간이 어떠한 민족으로 태어나 어떠한 체제속에서 살아갔는지에 대한 시대적 회고성을 내재한다. 이 회고록을 그대로 한반도 남쪽에 살고 있는 남한의 독자인 내게로 비추어보면 결과적으로 아주 행복하지 못한 인간생활을 영위하고 있다는 판단을 할 수가 있다. 이것은 단순히 폭우로 물가가 오르고 잘못된 부동산 정책 때문에 전세가 동나고 비싼 등록금을 내고서 아무리 학위를 따도 취직할 곳이 없다는 실질적인 행복지수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한반도는 지리적 특수성과 국제관계의 역학적 구조상 긴장상태를 벗어날 확률이 거의 없는 나라에 속한다. 즉, 정치적으로 평안할 수 없는 운명을 타고났다. 아렌트의 결론은 우리에겐 피할 수 없는 운명으로 들린다. 어짜피 지구상에서 가장 정치적인 긴장을 안고 살아가는 구성원들이기에 우리에게 있어 행복은 곧 정치와 동일하다는 뜻에 다름 아닌 것이다. 가장 정치적인 인간이 가장 행복할 수 있다고 한다면 우리는 지금 상태론 절대 행복해질 수 없다는 말인 것이다. 그렇담 이제라도 행복해지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어떻게 살아야 할까. 이 책을 읽고 머리 맞대어 묘안을 짜내어야 할 질문이 바로 그것이 아닐까.


사유의 순간

   아렌트는 전체주의를 정치를 파괴하는 통치형태로 보았다. 전체주의 속에서 인륜에 반하는 범죄는 인간 공동체에 속할 권리를 공격하는 것으로 여겼다. 아렌트는 『전체주의의 기원』을 통해 1920년대 무솔리니가 처음 만든 신조어 '전체주의totalitarianism' 를 새롭게 규정했는데 인상깊었던 건 9.11 이후의 미국과 미국이 전쟁상대로 삼은 테러주의는 모두 전체주의를 기반으로 한다는 시각이었다. 전체주의가 ‘이데올로기와 테러에 기초한 신종 정치 형태’라는 아렌트의 분석에 따라 결국 미국과 오사마 빈 라덴은 전체주의식 싸움을 이어온 것이다. 역자는 미국이 80년대 소련에 저항하는 아프간 세력, 빈 라덴 네트워크에 조력한 것이 결국 9.11 테러로 되돌아왔다고 말한다. “전체주의를 물리치기 위해 전체주의적 방법”인 테러를 사용한 것에 대한 인과응보라는 것이다. 특히, 빈 라덴의 국가 행정부를 상정하지 않는 테러주의는 반정치적인 초국가 목적으로 한데 뭉친 네트워크이므로 그가 죽었다고 해서 전쟁이 종결되었다거나 테러가 사라진 것은 아니라는 확신은 아렌트의 목소리를 빌린 저자의 유럽식 경고로 느껴졌다.

 『인간의 조건』은 최근 일어난 노르웨이 테러를 떠올리게 했다. 아렌트가 말하는 인간의 조건은 정치행위를 공적으로 수행하는 시민으로서의 기본 조건을 뜻하는 것 같다. 정치를 개인 권력에의 투쟁으로 보지 않고 다수 행복을 향유하기 위한 소통의 과정으로 본 것이 그 핵심이다. 의견을 한데 묶어 약속하고 결합하는 비폭력적 언어로 권력을 유지하는 것이 공적인 행복을 도출한다고 보는 것이다. 여기서 새로운 개념으로 인식된 건 ‘용서’라는 조건이었다. 이것은 어떤 일을 저지른 자의 행위를 용서할 것인가, 그 행위를 저지른 사람을 용서할 것인가의 문제와도 같았다. 이는 필히 ‘용서할 만한 자’와 ‘용서할 수 없는 자’를 구분케 하고 법적인 처벌이 가능한지의 여부와 결부된다. 그리고 후차적으로 행위를 한 사람이 반성하였는가, 후회하고 있는가, 아무런 생각이 없는가를 검증하는 단계로부터 이어질 수 밖에 없다. 용서와 처벌, 반성이 만족할만한 성과를 도출했을 때 저자는 평화와 화해를 지향할 수 있다고 말한다. 아렌트의 논리에 배경이 된 아리스토텔레스의 시민적 우정이나 종교적 관용은 썩 신선한 재료는 아니었지만 용서의 일반화에 기여했다는 점에서 수긍할만 했고 악의 평범성, 인간의 무사유성이 인류의 질서를 파괴할 수 있다는 점에서 대칭적 수사를 이루는 논리라 생각되었다. 무엇보다 용서를 정치의 ‘필수조건’으로 보고 하나의 근본적인 ‘정치적 경험’으로 성찰하는 체계는 인상깊었다. 용서가 화해를 전제로 하며 가해자나 희생자 역할보다는 공동체를 건강하게 하는 패러다임으로 규정한 것이 노르웨이를 연상시켰다. 76명의 무고한 시민을 살해한 테러범을 대하는 노르웨이는 적어도 우리와는 달라 보였다. 주한 노르웨이 대사는 “브레이빅이 이번 테러보다 더 끔찍한 짓을 저지른다 해도 노르웨이는 지금까지 지켜온 가치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 말한 바 있다. 노르웨이가 주장하는 가치는 ‘관용과 사랑’이다. 테러범에 대한 극형이나 경찰의 늑장 대응을 질타하는 대신 극단주의자 한 명으로 무너지지는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방식으로 똘레랑스를 내세웠다. 이는 ‘범죄자의 처형이 그 범죄자나 희생자 모두에게 용서로부터 나오는 방면의 혜택을 볼 수 없게’ 한다는 저자의 논리와도 일치한다. 안타까운건 아직 ‘용서함과 약속함의 힘’이 불행히도 우리사회를 말해주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한국에서 정치는 정치인의 것이지 시민의 것은 아닌 것이다.

  『정신의 삶』은 제목 그대로 가장 철학적, 정신분석학적으로 다가왔다. 저자는 아렌트의 사유함과 의지함에 이어지는 판단함의 개념을 완성하기 위해 열정을 쏟는 것으로 보였다. 구성상 책의 마지막 단락인 이 부분은 아렌트가 하이데거, 야스퍼스와 대화하는 방식과 유사하게 스승과 대화를 진행하는 것으로도 보여 저자에겐 하이라이트라 할수 있었다. 아렌트가 강조하는 '판단'은 반성적 판단을 기초로 한 칸트의 (사적인 영역이 아닌)'공통감각'과 유사하다. 저자는 타인들과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판단이라는 능력은 ‘자신의 상상력을 사용해 타인의 관점에서 사물을 보는 것’이라 해석한다. 판단의 반대가 바로 무사유라는 점에서 칸트가 언급한 “어리석음에는 치료약도 없는 법”이라는 비유는 한 사람의 어리석은 판단이 실은 가장 무서운 흉기가 될 수 있음을 상징하는 유머였다. 아렌트는 아이히만처럼 생각이 없고 판단하지 않는 관료들, 사유하지 않고 계산만 하는 조직원, 이론에만 의존하고 거짓을 만들어 내는 전문가들의 무사유성은 자기 내부의 대화가 부재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대형사고가 터질 때마다 공무원의 안이한 대처가 늘 도마에 오르지만 그런 무사유의 습관은 관행처럼 반복된다. 이러한 무사유적인 공무원은 자신에 대한 폭군이자, 세계 내에서의 폭군이 된다고 말한다. 이는 판단함이 일종의 공적 행복의 형태라면 판단하지 못함이 공적 불행의 지름길이라는 뜻과 같다.  이 사유가 중요한 것은 대통령, 시장같은 지도자가 아닌 평범한 사람도 생각없는 판단을 하면 모두가 불행해질 수 있다는 논리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자기기만을 거부하는 정직한 인간’이 ‘좋은 판단자’라는 몽테뉴의 정의는 자기기만을 일삼는 위선적 인간이 곧 나쁜 정치인이라는 뜻이면서 그 정치인은 곧 한명의 시민일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행복의 순간

   저자에 의하면 『정신의 삶』은 우리 시대 정신적 딜레마와 마주치게 한다는 주장이다. 저자가 현대에 가능한 질문으로 치환한 것은 다음과 같다.


- 다양한 도덕 전통을 가진 사람들이 동의할 정도로 설득력을 지닌 어떤 도덕철학이 존재 하는가?
- 의지를 조화시키는 사랑은 어떻게 정치적으로 이해될 수 있는가?
- 우리가 어떻게 코즈모폴리탄 적 비판가와 관찰자로 이루어진 공영역을 상상할 수 있는가?          -268p


   저자가 해석해준 도덕철학은 예를 들어 내가 연쇄 강간살인범이라고 할 때 나는 연쇄살인을 한 나 자신과 앞으로도 함께 살아갈 수 있을까, 하는 질문과 연결된다. 악행을 예방하는 길은 이 질문에 자신을 제대로 판단하는 일인 것이다. 이 올바른 판단의 과정이 곧 무사유를 차단하는 순간인 것이다. 나는 아렌트의 자기검열에 해당하는 이 질문이 이 책에서 가장 내 자신을 멈칫하게 만들었다. 도덕이란 남들이 말하는 기준이 아니라 나와 같이 살아갈 나를 위해 가장 절실하다는 걸 새삼 깨우쳤기 때문에.


   
 
“나는 내가 그것들을 한다면 더 이상 나 자신과 함께 살 수 없다고 생각하는 특정의 것들을 할 수가 없다.” 도덕은 자신에게 그리고 자신을 위해서 진실했던 것에-잊지말고-충실하는 것이다.       - 270p
 
   


    노르웨이 테러범은 노르웨이로부터 얻을 것은 모두 취하면서 많은 독서를 해온 인물이었다. 특히 경영, 역사등의 인문학적 독서를 즐겨온 그가 다문화주의, 세계시민으로서 공통되기를 거부한 것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아이히만은 상명하복에 충실한 사람이었지만 누구보다 근면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들은 비정치적 사유로 가장 정치적인 인물로 남았다. 나는 이들을 보면서 인간은 원래 정치적 동물이었다는 오래된 명제를 떠올렸다. 서평가 故 최성일은 한나 아렌트를 두고 인간이 정치적 동물이었다는 점을 새삼 일깨운 정치철학자라 말했다. 아렌트 자신도 나치정권의 등장과 그에 조력한 하이데거로 인해 정통철학에서 정치철학에 눈을 뜨게 된 것처럼 인간은 정치를 분리시켜 그 본성을 관찰, 설명할 수는 없을 듯하다. 이제는 망각해버렸다고 생각되는 인간이라는 정치적 동물을 증명하는 시간, 아렌트의 시간은 우리에게 어떤 교훈적 순간을 제공하고 있는가. 이미 정치적 인간인 우리가 새삼 정치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 정치를 위한 길의 모두인 걸까.

    사실 아렌트가 말하는 ‘악의 평범성’과 ‘무사유‘, 그리고 그 대응기제로서 ’용서‘와 ’판단‘은 굉장히 먼 미래로 느껴진다. 아니 너무 오래된 과거로 느껴진다. 사유를 멈추는 것이 악으로 가는 지름길임을 아무리 각성한다고 해도 사유한다고 해결될 문제로는 보이지 않는 구석이 있다. 악을 저지르는 건 평범해 보이고 용서를 행하는 것은 특별해 보이는 단순 이분법의 느낌도 든다. ‘용서함’이 ‘상호방면’하는 행위로서 지속적인 인간연계망을 수립하고 ‘판단력’은 세계시민이 되도록 준비시키는 능력이라는 최후통첩과 같은 메시지는 도처에 약속을 어기고 진실을 은폐하는 정치인이 난무하는 작금의 시대에 무기력한 결론으로 박제될 진부함을 인정하자. 이 책은 전체주의 비극을 조장, 관망하는 사회구조 및 체제의 변혁을 간과하고 모든 것을 행위 주체의 본성으로 돌림으로써 전체주의를 막는 유일한 방법이 주체의 변화인 것으로 오인될 소지도 있다. 그러나 아렌트는 말한다. "조직되지 않고 구조화되지 않은 대중, 절망적이고 증오로 가득 찬 대중은 지도자들에게서 구원을 기대한다."고. 그녀는 전체주의 기원을 대중에서 찾았다. 이명박 반대는 더 강력한 이명박에 대한 열망이라는 분석을 접한 적 있다. 더 완벽해보이는 미래를 제시해달라는 간절한 요청은 어쩌면 집단 무의식, 집단 기만의 무사유에서 비롯되었는지 모를 일이다. 지구촌 시대와 다문화주의의 맥락에서 아렌트가 제시한 조건들은 정치가 자신이 속한 공동체 안에서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방식 이라고 보았을 때 가장 우선적인 가치로 자리하기 충분하지 않을까. 이 책은 인간의 본성에 대한 반성과 회고를 통해 우리 스스로 판단의 상황에 처하면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 사유하게 한다. 앞으로 우린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한 판단을 해야 할 순간과 집단적으로 조우하게 된다. 우리가 무엇을 용서하고 약속할 것이며 그로인해 어떤 판단을 하는 것이 사유하는 한 명의 인간으로서 정치적 행동을 실천하는 일인지 생각한다. 우린 적어도 우리 자신의 행복을 추구할 기회를 놓치지는 말아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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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사르 2011-08-11 2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오옷! 리뷰 쓰셨군요! 한사람님 리뷰 기다리고 있었어요~ 한사람님 리뷰는 일목요연하게 정리가 되어 있어서 좀 어려운 책 읽는데도 많은 도움이 되어요. ^^ 그러니까 리뷰 보고 퍼뜩 질렀다는 이야기 ^^

가연 2011-08-16 2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부족한건지 자꾸 턱턱 막혀서... 번역문제인가?? 한참 고심했더랬죠... 역자분께는 죄송하지만 별 네 개!ㅠ

비로그인 2011-09-06 15: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렌트는 늘 무심한 언어 속에 절대관념을 넣는 사람 같아요. 가장 평범한 언어로 가장 쉽게, 가장 날카로운 뜻을 전달한달까요. 나무에서 물방울이 똑, 하고 떨어져서 화들짝 놀라듯이, 6년 전에 읽었던 진주조개잡이 생각이 났더랬습니다.
 
전을 범하다 - 서늘하고 매혹적인 우리 고전 다시 읽기
이정원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0년 11월
평점 :
품절


 


고전을 범하다 (짓밟다)

    ‘범하다’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가 기억난다. 어렴풋하게 드라마를 보고 전개가 이해되지 않던 장면이었는데 어른들은 남자가 여자를 범했기 때문이라고 대화를 주고받았다. 남자가 여자를 범한다는 의미를 몰랐던 나는 막연히 여자 주인공이 피해자로 보여 남자측에서 속임수나 배신을 저질렀다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한참 뒤 성인이 되고나서야 정확한 뜻을 알게 된 나는 범한다는 단어에 늘 그 시절 영상이 겹쳐져 무의식중에 폭력을 행사하는 의미로 저장된 듯하다. 이 책의 제목을 접하고 처음 감지되던 기운도 전(傳)을 범하는 주체쪽이 아닌 누군가로부터 범해지는 전(傳)의 편에서 방어적인 자세였던 걸 보면. 사람은 어떤 단어를 어떠한 상황에서 처음 배우게 되었는지에 따라 그 단어와의 개인적 인연을 시작하게 된다. 내게 ‘범하다’는 분명 한쪽에 피해가 발생하는 공격적 의미였다. 그것은 한쪽이 이기고 다른 쪽이 질 수 밖에 없는 정복의 가치였다. 그래서인지 이 책은 제목에서부터 발산하는 에너지가 남달랐다고 할까.

    이 책이 흥미로왔던 건 낡아만 보이던 옛것에서 새로운 진실을 찾아내는 저자의 의지였다. 시종일관 매의 눈으로 탐구자의 태도를 유지하던 그 긴장감이었다. 이 책은 고전의 법칙에 당당히 침범해 고전의 질서를 발본, 사유하여 당시 사회구조를 밝혀내는 기특한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고전이라는 문학이 당시 지배담론을 반영한 문화였으며 오랜 세월 현대인의 필요에 따라 계획적으로 호출된 유용한 이데올로기였음을 알려준다. 무엇이든 기존의 질서를 전복하는 과정은 혁명의 기록이다. 역사적으로 텍스트를 해석하는 일은 정치적인 과업이었다. 이 책의 미덕은 바로 그 혁명성을 향해 멀리서 불구경하듯 재미만 제공하는 것이 아니고 같이 고민하고 문제가 있다면 더우기 같이 해결하고자 하는 참여의지를 드높이는 선동성이 아닐까. 정치인에게 나라를 잘 다스리는 행위가 정치라면 독서하는 입장에서의 정치는 드러난 진실로 마음을 수행하고 진리를 실천하는 일이 아닐까 싶다. 하여 고전 다시 읽기를 통해 지금의 우리 사회, 그곳에 위치한 나를 다시 되돌아보게 하는 거울효과를 누릴 수 있었다. 고전에 은폐된 진실을 캐내는 것은 곧 우리 뇌에 저장된 지식을 교정하는 일에 다름아니다. 그건 결코 쉽거나 작은 일이 아니다. 모르긴 해도 참다운 인문정신이란 이렇듯 예리하고도 불편한 목소리를 귀담아 듣고 가슴으로 수용하는 일일 것이고 그것은 기존의 부조리, 불합리를 범하는 사회기능을 담당해 왔을 터이다. 그러므로 이 책은 최근에 읽은 책 중에 가장 의미있는 정치성을 가장 지적으로 함의, 표현한 책이었다. 이 책을 덮은 지금 우리가 범하고 싶은 것이 과연 누가 지은, 무엇을 위한, 어떠한 이야기의 傳이었는지, 그것만이 우리 몫이 되었다.

    한때 고전 붐이 일어난 적이 있다. 알려졌듯이 노무현 정부에서 부각된 논술강화정책에 따라 고전을 읽는 것이 논술을 훈련하는 방법론으로 인식된 시절이 있었다. 이는 곧 고전부흥, 고전출판, 고전강의의 붐으로 이어지면서 일반대중의 고전 읽기 현상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논술학원이 증가하면서 입시학원의 주력사업으로 떠오르기도 했고 홈쇼핑에선 학부모들의 수요를 의식해 고전 시리즈를 새로운 트렌드로 주입하곤 했다. 물론 우리가 충동구매하듯 서둘러 서재에 꽂아둔 고전들은 시대가 지나도 변하지 않을 진리의 정수처럼 여전히 그 자리에 버티고 있다. 고전이 엘리트 국가주의를 심어준다는 회의적 시선도 있지만 그들은 문학의 법전처럼 우리 사회 불변하는 도덕교육의 판타지로 기능해 온 것이 사실이다. 일반대중이면서 학부모에 속하는 나는 여기서 고전을 누가 해석하고 어떤 방식으로 유통시키는지 궁금해오지 않은 쪽에 속한다. 아니 고전을 해석한다는 문제를 크게 신경쓰지 않으며 살아왔다. 고전은 전승되거나 보존, 습득하는 것이지 누군가의 통역이 필요한 분야라는 생각에 미치지 못했다. 해석이 필요하다면 그건 지금은 사장된 고어의 직역과 의역정도라 여겨왔다. 저자는 고전은 전승되는 것이 아니라 발견되고 발명되는 것이라 주장한다. 고전을 다시 읽고 거꾸로 읽는 것이 다른 역사관과 세계관을 깨우치는 기회라 말한다. 그리하여 우리가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미래전망까지 이끌어내야 하지 않느냐 반문한다. 생각해보면 우리 사회 진보주의자들은 인문고전을 대부분 관념론의 전통적 산물로 규정하며 과거 부르조아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적 표현물이라 간주하는 경향이 많았다. 서구에서도 고전작가들은 지배계급의 위치에 속하거나 그 후원을 받는 지식인, 예술인이 많았다고 하지 않는가. 다중지성가로 불리는 정치철학자 조정환은 최근 저서 <인지자본주의>를 통해 고전세계의 재발견, 새로운 고전상의 재발명이야 말로 ‘역사적 투쟁’이요 ‘새로운 인류의 발명’이라 정의한 바 있다.

   
 
20세기 사회주의가 고전에 대해 취했던 거부와 전복의 태도를 넘어서면서, 그리고 신보수주의적 방식의 고전 전유 작업을 무력화하면서 공통적 유산으로서의 고전을 새로운 세계, 새로운 인류를 구축할 새로운 공통되기의 잠재력으로 전환시키는 것, 이것이 오늘날 다중의 지적 인문적 실천이 달성해야 할 중요한 과제들의 하나임은 분명하다.    -411p

- 조정환 <인지자본주의>
 
   


    자본주의는 대중의 인지능력을 집중시켜서 사용하기 때문에 고전을 전복하는 것을 새로운 인류가 탄생할 가능성으로 보는 것이 그의 견해이다. 저자도 고전을 ‘저지른’ 잘못이 아니라 ‘발견된’ 잘못이라 말한다. 고전의 문제는 선천적이 아닌 후천적 본성을 지녔다는 뜻으로 이해했다. 혹시라도 고전상의 과거 발견이 작위적이고 허술했다면 그 허위의 과학적 발본을 통해 지금이라도 새로운 발견을 하자는 것이므로 과거의 잘못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과정은 필수불가결하다. 이 책에서 발본된 고전은 약 열 스무 편이다. 본문에 집중적으로 파헤쳐진 것은 열 세편. 그중에 내가 들었거나 알고 있는 이야기는 반에 불과했다. 그것도 누가 죽었고 그 결과 무엇을 얻어내었고 누가 나쁜 사람이고 누가 귀감이 되었는지 그야말로 영구 박제된 지식의 퍼즐 몇 조각에 다름없었다. 저자는 이렇듯 고전속에서  우리가 선명하게 기억하는 죽어간 사람, 살아남은 사람, 그들이 원하여 얻었던 것, 그럼에도 얻지 못한 것, 사람들이 지켜내고 버려온 것들을 관통하며 심층을 파고든다. 우리가 기억하는 심청이, 춘향이를 다시 똑바로 관찰하자 부추긴다. 우리에게 익숙하던 우리가 만들어온 심청이, 춘향이를 짓밟고 원래 그들과 가장 가까운 정체성을 찾아주자 설득한다.


죽음을 범하다 (침범하다)

    저자가 제일먼저 변론한 인물들은 죽음을 만들거나 죽음을 실행함으로써 자신의 정체를 규정지은 비극의 주인공들이었다. <장화홍련전>의 계모와 <심청전>의 효녀, <적벽가>의 병사들, 이들은 죽음의 시나리오에 적극적으로 동원된 침묵의 증언자였다. 누가 누구를 어떻게 죽였고 오늘날 우리는 그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에 대한 고찰이었다. 저자는 주로 추녀와 악녀로 개성강한 조연을 맡아왔던 고전 속 계모들에 주목한다. 공인된 씨받이와 평생 가족봉양이라는 짐을 메고 재취로 들어가 자신을 제대로 변호할 수 없는 약자로 위치한 계모를 사회적 편견의 대상으로 객체화한다. 자식의 불행을 방관하는 은폐된 공범자로서 아버지는 자신의 도덕적 면죄부를 위해 전처 자식 편을 들고 사건이 종결된 후 다시 재혼하면 되었던 시대적 배경을 고발한다. 귀신으로 부활한 장화, 홍련은 자신들의 사연을 공론화 할수 없었던 억압된 주체시민들의 대항담론이 형상화된 것이며 배후에서 음모를 꾸미는 계모는 당시 아녀자들에게 각인된 결핍과 불안에 저항하는 부정적 아바타라는 말씀이다. 계모를 희생양으로 삼아 드라마틱한 시나리오에 재미를 부여하던 것은 이미 현대식 미니시리즈에서도 진부한 공식에 해당된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오늘날의 계모는 추녀가 아니라 육감적인 미녀로 등장해 물질욕의 화신으로 상징한다. 이 오래된 공식은 스테레오 타입의 고전적 가치를 창출했고 이혼과 재혼이 만연화 된 오늘날에도 계모는 의붓아버지보다 사악하고 부도덕한 캐릭터로 자리매김하였다. 의붓아버지도 성폭력등의 가정폭력을 행사하는 경우가 많지만 외려 계모는 가정의 외피적인 평화를 위해 이마저 은폐하는 공범자가 되거나 살해자로 추락한다. 그리고 이 모든 계모와 의붓아버지의 고정화된 캐릭터에 우리는 전혀 싫증을 느끼지 않은 채로 뉴스를 청취하고 사연을 관람한다. 다시 말해 우리는 그들이 나쁜 사람인 것이 아주 편한 이웃들로 살아가고 있는 실정이다. 우리 사회 어디에서도 계모의 논리적 변론이 드러난 적은 없었고 설사 억울함을 호소하였다 해도 그 사실은 이슈화되지 못한다. 혹시 이 증상은 본질적으로 계모의 문제가 아니라 계모를 붙박이처럼 고정된 자리에 묶어 놓은 우리들의 문제는 아닐까.

    필히 훌륭하고 모범이 되는 계모의 본보기도 있을테지만 이들은 단지 예외의 인물일뿐 그 진정성을 주목받지는 못하는 경우에 속한다. 아니 오히려 드러나는 것이 타자에 의해 가식이나 위선으로 비쳐질 위험마저 있다. 어쩌면 본인 의지와 상관없이 박제된 캐릭터 때문에 새로운 역할을 하지 못하는 배우처럼 이 시대 계모들은 장화, 홍련이후 한번도 그 오해를 풀어본 적이 없다는 생각을 한다. 계모에 대한 오해가 풀리는 것을 가장 두려워 하는 사람은 누구일까. 혹시 그것은 계모에 올가미를 씌운 사람들은 아닐까. 나는 계모가 악녀이고 추녀이어야 아버지와 자식들은 가정의 평화를 위해 노력했다 변명할 수 있으며 자신들이야 말로 상처받은 피해자라 주장할 수 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새롭게 재편되는 가정의 질서를 위해 계모 하나 나쁜 사람이면 모든 것이 일사천리다. 이것은 요즘 시대 아내가, 엄마가 행복해야 가정이 행복하다는 논리와 맥을 같이 하는 역설이다. 계모는 가정에서 가장 불안한 지위에 놓여있지만 신구 가족 구성원간 가장 정신적 피로도가 높은 역할이므로 계모가 시기하고 욕심이 많다면 모두는 불행할 수 밖에 없다는 논리가 아닐까. 바꿔 말하면 아무리 남편이 야속하고 전처 소생이 밉고 이웃의 시선이 서운해도 계모하나 꾹꾹 참으면 만사가 문제없다는 것과 같다. 가정을 지킨다는 명목하에 이루어지는 완벽한 지배계급의 착취 이데올로기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우리는 그동안 얼마나 장화와 홍련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계모만을 모든 파탄의 원흉으로 미워했던가. 사뭇 그 에너지가 민망하다.

    아비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해 바다로 뛰어든 심청이는 공동체의 계략적, 필연적 공모에 의해 희생된 제의장치였다 말한다. 오늘 날 심청처럼 희생하는 여식은 찾아보기 힘들다. 자기 목숨을 바치면서까지 아버지의 광명을 찾아주겠다는 끔찍한 효심은 불효하지 않은 자식에게도 오래된 부채감으로 남아있다. 저자는 냉소한다. 심청이의 타의적 자살이 의미하는 것은 효를 앞세운 공동체의 연대보호였다고. 누구도 아버지를 위해 심청이가 죽어야 한다고 한 사람은 없지만 누군가 죽어야 한다면 그건 심청이어도 괜찮다는 말과 같다. 아니 무엇으로보나 심청인 게 모양새가 낫다는 공동체의 표현의지였다. 심청이의 살인사건에 무언으로 동조한 죄책감은 효라는 가치로 개인의식에 자동 내면화된다. 그렇다면 공동체가 믿은 것은 무엇일까. 이들 공동체가 특별히 잔인하거나 폭력적인 성향을 가져서인 걸까.

    예나 지금이나 심청의 인당수 투신과 같은 희생적 뉴스는 심청이나 아버지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런 미담을 듣고 그것이 우리사회를 아름답게 하는 진정한 가치라 믿는 나 자신을 위로하기 위한 소식이 아닐까. 심청이나 아버지는 극장에서 상영되는 극적인 드라마의 주인공일뿐 우리는 그들로부터 발생한 ‘선’이나 ‘효’, ‘충’ 같은 도덕적 가치들을 나누어 공유하면 되는 것이다. 영상이 스펙타클하고 자극적, 폭력적일수록 흥행의 가능성은 높아진다. 우리가 유영철이나 강호순같은 연쇄살인범을 맹렬히 비난하고 그 잔인성을 적극적으로 회자하는 심리와 유사하다고 여겨진다. 이는 천인공노할 희대의 살인마를 처단해야 한다는 사회적 공분이라기 보다는 이미 갖고 있던 살인의 추억에 부합하는 새로운 인물을 발견하여 이번기회에 한껏 오래된 사연을 확인하는 것이라는 문화비평과 비슷한 맥락이 아닐까.(이택광, <이것이 문화비평이다>, 자음과 모음) 그렇게 본다면 심청이가 인당수에 투신하는 장면은 피할수 없는 슬픔이 아니라 예정된 위로였다. 
 

                        공동체라는 확장된 자아의 생존을 위해 우리는 거듭 살해를 저질러왔다.  - 203p   

 

    심청의 죽음이 사회공동체가 공모한 살인사건이었다면 <적벽가>에서 죽어간 병사들은 한명의 거대 영웅을 위한 준비된 알레고리라 말한다. 출장입상이라는 유교적 가치를 구호삼아 우화스럽게 쓰러져간 군인들은 자기 몸을 냉소, 조롱하며 희극배우로 출연함으로써 당시 봉건가치에 저항했다는 것이 저자의 분석이다. 저자는 인간의 사물화에 기반을 둔 이러한 서사가 영웅의 등극을 정당화하는 장치라며 ‘람보’식의 영웅주의 영화를 같은 계보로 위치시켰다. 희생양으로 택해진 전처 소생, 봉사의 외동딸, 졸병의 집단들은 권력과 제도권에서 멀어 보인다. 이들의 죽음은 기득권층, 문화 향유층에게는 자신들의 권위체계를 유지하는 문학적 소재이자 합리적 장치였다. 오늘날의 문화비평적 시각에서 본다면 일반 서민들에겐 은폐된 진실을 시시때때로 공유하면서 죄책감과 책임의식을 적절히 배분하면서 현실에 순응하고자 하는 도덕적 판타지는 아니었을까.


욕망을 범하다 (위반하다)

    그런가하면 인정하기 싫지만 인간본성으로서의 욕망을 다양하게 분석한 고전들에선 엿보는 재미보다는 지적당하는 불쾌감이 더 많았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무능한 가장을 등장시킨 <장끼전>의 해석은 그러한 가장을 빈번하게 배출하던 당시 사회의 탓으로 돌리는 것 같아 마음이 좋지는 않았다. 어머니의 은밀한 욕망을 놓치지 않은 시선 역시 사생활의 주체로서 어머니를 이해한다는 평가가 기분 좋지는 않았다. (다분히 남성적인 시각이라고 느꼈기 때문에) 한번쯤 스쳐간 여인의 농담조는 개인의 욕망이 되버리고 빈번히 제기 되는 가장의 한탄은 사회적 책임으로 돌려지는 것 같았달까. ‘사회적 약자에 대한 강자의 희생요구를 ‘충’으로 포장하는‘ 복잡한 작품으로 규정한 <토끼전>은 어느덧 타인의 고통을 대의 명분으로 덮어 버리는 정치적 행위에 익숙해져 버린 나 자신에게 흠칫하던 기분이었다. 비천한 지귀가 선덕여왕을 사모하다 불귀신이 된 이야기 <지귀설화>는 우리 사회 이루어 질 수 없는 사랑을 다시 공동의 침묵으로 매장하는 대중적 습관을 깨달을 수 있었다. 우린 이루어 질 수 없는 것, 다가갈 수 없는 곳, 만날 수 없는 것들에 미학적 의미를 부여하며 예술로 승화시키려는 패배적 시간들을 부인하지 못한다. 하나같이 불편한 목소리는 ‘진실이 우리의 감성을 재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사회구조를 재생산’하기 때문에 중요한 것이라 주장했다. 나의 성공을 위해 목숨을 거래하고 내가 살기 위해 사랑을 버리고 나의 품위를 위해 위선과 타협하는 모든 인간사는 마치 고전을 충실하게 전승시켜온 학습결과로 느껴질 정도였다. 

    저자는 외려 춘향과 이도령의 사랑을 ‘욕정에 못이긴 사내와 물주를 만난 기생의 거래’로 보는 방자의 솔직한 시선에 한 표를 던지는 듯 보였다. 열녀 만들기에 대한 독자들의 열망이 반영된 결과 <춘향전>은 고전이 선사하는 진정한 사랑의 판타지로 인식되어왔다. 변학도에 항거하며 이도령에 대한 절개를 지키는 춘향으로부터 불순한 의도같은 건 상상할 수조차 없었다. 암행어사가 되어 변학도를 응징하던 이도령은 오랜 세월 백마타고 온 왕자로 군림하던 문학적 남성상이었다. 저자는 시대와 민중이 다같이 공들여 스스로의 염원과 연민을 춘향과 이도령에게 투사했다고 말한다. 춘향전의 로맨스를 통해 우리가 얻은 것은 지고지순한 사랑에 대한 가치가 아니라 우리 자신들의 위선에 대한 연민의 연대였다고. 그들의 비현실적이고 의심없는 사랑으로 채울 수 없는 자기 위로를 일삼은 것이라고. <전우치전> 역시 대단한 민중 영웅소설이 아니라 봉건적 지배에 대한 저항을 도술로서 조롱한 나르시시즘의 도착적 서사였다고. 전우치의 발랄함과 유치함은 바로 우리들 자신의 이기적인 페르소나와 다름없었다고. 은밀한 욕망을 위반하는 방법으로서 그들 모두는 욕망의 대리자, 가면쓴 주인공이었다고.


    아름답고 대단한 반전이었다. 이 책을 덮고 나니 글을 어떻게 쓸 것인가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읽을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알릴 것인가의 중요성도 새삼 깨닫게 된다. 그동안 우리가 고민한 것이 ‘고전이 할 수 있는 게 무엇일까’ 였다면 이 책은 ‘고전을 해석하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였다고 본다. 저자는 해석의 기만은 곧 정신적 폭력이라 말한다. 저자가 행한 전복적 기획이 인문학이 위기라는 작금의 시기에 신선한 활력제가 되었음 좋겠다. 이 책에는 비판을 위한 비판, 뒤집는 재미를 위한 반론이 아니라 실제 고전의 중요 부분을 감상할 수 있는 기회와 대중문화 같은 현실과 연계된 저자의 통찰, 그리고 미래의 문제제기까지 함께 구성되어있다. 고전의 영역을 해치고 침범하는 일은 고전이라는 문학을 통해 당시 사회구조를 밝혀내는 작업이었다. 전을 범하여 얻어진 결과를 통해 우리가 사유해야 할 것은 참다운 인문정신일 것이다. 국가나 기업, 혹은 특정 개인 어디에도 종속되지 않은 채로 존재하는 인문학의 독립일 것이다. 어쩌면 지금까지 배워왔고 편안하게 알고 있던 지식들을 누군가 틀렸다고 지적하며 이렇게 바꾸라고 설득하는 일이 인문학의 기본 자세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다. 바로 오래 저장된 내 생각을 바꾸어야 하는 순간, 새로와져야 겠다고 마음먹은 그 시간들이 어느 때보다 고독하다는 것을.

    이 책에서 해석된 <춘향전>, <홍길동전>, <양반전>, <전우치전>등은 청소년들의 인문고전 필독서이기도 하다. 저자의 해석에 따르면 우리는 그동안 고전을 통해 자기발전을 이룬 것이 아니라 자기최면이나 위로를 자행해온 것과 같다. 이 책은 뼈아픈 지적으로 솔직한 고통을 선사한다. 돌이켜보면 지난 시절 고전을 찾고 그것에 의지했던 이유는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기 위한 순간이었던 것 같다. 선인들의 고민과 해결과정을 엿봄으로써 비로소 세상사 범속한 내 고민이 별다르지 않았음을 깨우치는 성찰의 시간을 가졌던 것 같다. 고전을 그렇게 읽었다고 당장 내 고민이 해결되고 눈앞에 변화가 생기는 것은 아니지만 내 근심의 출처를 바로보고 같은 우를 범하지 않도록 자세를 다지게 하는 오래된 반가움으로 기능했다. 우리가 이 책으로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고전은 더이상 쓸모가 없으니 읽을 가치가 없다는 주장이다. 고전이 필요치 않다는 것이 아니고 고전을 일방적, 정치적, 획일적으로 해석당해온 세월을 잊지말자는 것이다. 그리곤 앞으로 올바른 해석을 통해 오늘을 반성하자는 것이다.  이 책은 기존 보수적 세계관과 치열하게 전戰하며 법전같던 진리를 과감하게 전복하는 과업을 달성했다. 전(傳)을 범하여 우리가 얻은 것이 전(典)같은 현실을 견디는 에너지(電)로서 전승되길 기원한다. 미래는 이렇듯 체제를 범하는 사람들이 곧 절망을 범하는 희망이 되기를 소원한다. 그것이 새로운 인류의 진실이 되는 날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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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1-08-09 0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읽었는데.. 그런데 <춘향전>이랑 <지귀설화><홍길동전>을 소개한 부분만 봤어요,
나머지 고전들은 아직 안 읽어본 것도 있고 처음 들어본 생소한 내용도 있어서
저자의 해석을 무조건 옳다고 할 수도 없었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