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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과 쓸개
김숨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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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숨. 그동안 나는 이 작가의 단편들을 다른 문학상 수상집이나 특별기획된 소설집에서만 만나왔다. 기억나는 것은 이름만큼이나 고요하고 숨막힐듯한 막막함이었달까. 굳이 육체적인 느낌을 떠올려보면 기온은 그다지 낮지 않지만 습도가 많고 기압이 낮아 뼛속까지 파고드는 축축한 서늘함이라 말하고 싶다. 굳이 또 분류하라 말한다면 이 느낌은 불쾌한 감각의 기억편에 속할 것이다. 느리고 더디지만 분명 두려워지는 심리적 공포를 유발하는 계획된 이야기들. 이 느낌이 내겐 어떤 편견으로 자리잡았던 모양이다. 분명 여러 작가들의 작품들 속에서 만난 그녀는 굳이 ‘죽음’을 천천히 읊조리는 작가였고 절대 이 설정된 규칙에서 벗어난 작품은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도 그럴 것이 표제작이 된 ‘간과 쓸개’는 작년에 만난 <2010 작가가 선정한 올해의 소설>에서 그들 중 제일 기억나는 작품이기도 했다. 그때 그녀는 어느 봄날 홍대 책거리 행사에서 만난 어떤 노인을 보고 이 소설을 쓰게된 것 같다고 말했다. 노인은 책들이 쌓여있는 전시대로 힘없이 걸어와 한마디 말도 없이 90도로 허리가 꺽여진 채 매대로 고꾸라졌고 놀란 그녀에게 '힘이 없어서 이렇게 쓰러질 때가 종종있다'고 죄송하다고 맥없이 말하며 천천히 돌아갔다고 한다. 갑자기 쓰러진 노인과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작가는 바짝 다가온 누구에게나 드리울 수 있는 죽음의 그림자를 또렷이 목격하기라도 한 것일까. 이번 소설집에 모아놓은 단편들 역시 하나같이 서서히 정해진 그곳을 향해 모두들 죽어가고 있기로 책을 덮고 나서 길고 큰 숨이라도 쉬어야 일어 설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성란 작가는 이 분위기를 김숨이 발견한 깊고 어두운 ‘저수지’라 말했다. 어떤 평론가는 죽음을 연습하는 ‘예행연습’의 과정이 김숨의 소설작업이라 빗대어 말하기도 했다.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나도 죽음이 두렵다. 나이 들면서 더욱 실감하는 것이지만 언제 죽을지 몰라서 두렵고 언제 죽을지 안다 해도 두렵다. 그것은 죽음에 이르게 하는 온갖 종류의 고통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그러한 고통을 겪고 나서도 결코 살아나지 못한다는, 다시 돌아오지 못한다는 마지막에 대한 서글픔도 포함한다. 그 슬픔엔 그 길을 철저하게 혼자서 걸을 수 밖에 없다는 외로움이 가장 클 것이다. 천둥 번개가 몰아쳐 당장 사람이라도 잡아갈듯 무서운 밤에도 의심없이 잠들 수 있는 건 다음날 다시 일어날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다. 내일아침 급작스레 심장마비라도 걸려 운명을 달리 할지 몰라도 어제까지는 별일 없이 일어났기에 내일도 그러할 것이라 믿는 관성같은 습관인 것이다. 그런데 죽음은 내가 미처 거짓말이라는 인식조차 하지 못한 사이 나를 거짓말처럼 데려간다. 그리곤 나는 사라진다. 아니 내가 사라졌는지조차 알 수도 없다. 사람들은 누구나 이 거짓말처럼 진실인 사실 하나 때문에 결국 고개를 숙이게 되는 존재들이 아닐까. 죽음을 예견하고 죽음을 알아간다는 건 고개를 들기보다 숙여야 할 일일지 모른다. 그렇게 한참을 숙이고 보면 그전엔 몰랐던 것들이 보이고, 다른 것들이 들리고, 알 수 없는 맛을 느낄지도 모른다. 오감은 예민해지고 인식은 빨라진다. 신체기관의 성장이나 발달과는 상관없이 퇴화하면서 더 촉발되는 이 감각의 효과는 가장 현실적인 비현실을 생성한다. 그것은 무릇 혐오나 구토의 현장을 고발하듯 스스로를 있는 힘껏 자극함으로써 生을 유지하려는 전략처럼 보이기도 한다. 김숨은 죽어가는 사람을 다시 살려내는 방법으로 자신의 죽어감을 충분히 설명하도록 하였다. 말한다고 다 알아듣지 못할지언정 그들은 분명 죽어감을 끝까지 설명하고 싶었던 것으로 보인다. 김숨의 입을 통해 터져 나온 부고직전의 유서와도 같은 이들의 중얼거림은 그래도 아직은 나 살아있다는 투정이었을까. 자세히, 천천히 귀담아 듣지 않으면 쉽게도 놓쳐버리는 나지막한 음률, 숨쉬고 내쉬는 호흡과도 같은 죽음으로의 발걸음, 그것에 동참하는 길은 추적추적 빗물에 잠긴 운동화를 질질 끌고 따라가는 힘겨운 길이었다.

일상을 필사(必死)하라

우연의 일치인지 김숨의 소설에는 간이나 폐, 위, 쓸개등의 장기가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손상된 말기병 환자들이 자주 등장한다. 무엇 때문에 이들이 병에 걸렸는지는 정확치 않지만 분명한 건 병자로서의 현재 삶은 누추하고 빈곤하며 내일의 희망이라곤 눈꼽만치도 찾아볼 수 없는 고독한 인물들이라는 것. 인간의 주요장기가 파손된 결과로 그들이 피로와 호흡과 소화, 분해등의 신체적 결손을 자기일상으로 받아들이는 과정은 상당히 고통스럽게 느껴졌다. 가난한 처지에 병까지 걸린 가족 구성원의 불행을 나머지 가족들마저 외면하고 일상으로 편입시킬 때 환자의 외로움은 보다 죽음에 가까워 보였다. 주로 상처한 노인이나 사별한 미망인, 독신자등으로 대변되는 그들이 자신의 일상에서 시간과 공간을 견디는 방법은 ‘필사(必死)’의 관찰로 생각된다. 작가는 이것만이 이들이 내세울 수 있는 차별화전략이라 주장하는 듯했다. 인간은 누구나 반드시 죽는 ‘필사(必死)의 존재’지만 죽기 전까지는 죽을 힘을 다해 ‘필사(必死)적으로 살 수 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 그런데 이 전략은 하성란 작가가 언급했듯이 작가의 쉽지 않았던 관찰 결과로 느껴져 소름이 돋았던 순간이 많았다. 이렇게까지 필사적이기에 그녀는 사실 젊지 않은가.

<간과 쓸개>에는 예순 일곱의 간암환자가 하루하루 저물어가는 자신의 일상을 서늘하게 고백하는 글이었다. 그는 30년 동안 소유해온 땅이 있었지만 자식들의 무언의 성화에 못이겨 땅을 처분하고 그들에게 지분을 골고루 나누어준다. 그런데 땅을 팔고 돌아와 누은 노인은 자신이 30년 동안 허울만 좋은 소유주였지 그 땅에 정작 고추하나 심어보지 않았다는 헛헛함에 잠못이룬다. 그 땅이 처음부터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는 생각은 서울의 병원에 정기검진을 오가며 자식들에게 느낀 서운함과 중첩되고 이제 땅마저 없어진 자신의 육신마저 자신의 것인지를 생각게 하지 않았을까. 노인은 몇십년 된 단층 양옥 자신의 집에 있는 수도 계량기 통에서 죽지 않은 귀뚜라미를 발견하며 ‘살아 있다는 것이 더할 수 없이 구차스럽고 징글징글’하다고 느끼고 식당에서 ‘노르스름한 튀김반죽을 뒤집어쓰고 안간힘으로 뒤채던 미꾸라지’를 보고 필사의 생명을 관찰한다. 누님이 가져오신 ‘기세가 조금도 꺾이지 않는 풍천장어’나 친구들이 키워보라고 하던 ‘뿌리가 잘리고 가지마저 잘려진 나무에 악착같이 매달려 살아있는 표고버섯’ 모두 ‘죽은 것도, 그렇다고 살아있는 것도 아닌 골목’ 신세인 자신과 다를 바가 없었던 것. 노인은 우연히 들른 식당 거울속 늙은 남자가 죽은 사람이라도 바라보듯 아무런 감흥없이, 그저 빤히 응시한 사람이 자신인 것을 깨닫고 죽음으로 가는 여행에 자신이 승선했음을 감지한다. 이 핑계 저 핑계로 찾아뵙지 못하던 병석의 누님은 간에서 만들어진 쓸개즙을 인체의 활동에 사용치 못하고 죽음의 액체처럼 흘려보내고 있다. 노인의 어린 시절 공포로 저장해놓은 검은 저수지의 두려운 기억은 누님의 쓸개즙과 정확히 같은 감각으로 부활되며 노인은 끝내 울음을 터뜨리고 만다. 노인은 어린 시절 저수지와 누님의 쓸개즙에서 무엇을 보았을까. 죽음이 다가와 그것을 알면서도 부패해 가는 육신과 그로인해 악취가 난무해진 현장에 대처할 수 없는, 반드시 한번은 죽어야만 하는 필사(必死)의 체액이라도 발견한 것일까. 살면서 한번도 불만을 드러내 본적도 그것을 들킨 적도 없는 노인이 고개를 끄덕이는 방법은 입을 틀어 막고 숨죽여 울음을 삼키는 것 외엔 없었을까. 거울을 보며 그동안 눈에 띄지 않던 점이나 주름을 발견할 때가 있다. 가끔 앞으로 아무리 많은 날을 살아도 오늘이, 오늘의 내가 앞으로 보다는 가장 젊어서 빛나는 날이겠구나 싶을 때가 있다. 내일은 오늘보다 더 못할 것임을 당연히 알고서 그것을 인식하는 일은 노인이 발견한 거울속의 자신과 다르지 않을 듯하다. 늙어간다는 것이 무작정 서러워지는 작품이었다. 그것은 아무리 벚꽃이 아름답게 피어도 곧 흐드러지고 말 추적한 봄날이 미리 서러운 애석한 심정일 것이다. 작가는 어느 봄날 90도로 허리가 꺽이면서 쓰러지던 노인에게서 그 애석한 서글픔을 발견하지 않았을지.

소리없이 조용히 죽어가는 사람은 <북쪽 방房>에서도 살아났다. 32년 8개월을 중학교 지구과학 선생님인 평교사로 정년퇴직한 곽노는 간이 아니라 폐의 기능이 무너져 기침을 달고 사는 칠십 줄의 노인이었다. 곽노는 눈에 안보이는 ‘지구와 우주의 이치’ 보다는 눈에 보이는 ‘광물과 광석의 실재’에 더 관심을 가졌다. 물욕과 노욕에 물들어 있다고 보는 아내는 천주교 신자이지만 자신은 그러한 이중성이 싫어 필사로 육신의 부동을 지향하는 사람이었다. 곽노는 점점 허물어져 가는 자신의 육신때문인지 건넛집 창문으로 들어가는 장롱도 관으로 보이고 북쪽 방 아래 가발공장에서 들려오는 미싱소리와 담벼락에 던져지는 쇠공 소리도 마치 자신의 죽음을 서둘러 종용하는 외부공격으로 인식하는 듯했다. 곽노는 자신이 유배된 북쪽 방은 철광석을 닮았고 자신의 육신은 철광석에 함유된 철 성분이라 생각한다. 무엇보다 황홀했던 건 ‘시간의 흔적인 선線들이 구현해 내고 있는 질서’라 기억하며 광물의 집합체인 한 덩이의 퇴적함처럼 살다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곽노가 퇴적암의 횡적인 표층을 질서의 극치로 여겼기에 급작스런 마그마로 생성된 암석은 혐오의 대상인 것이다. 혐오는 곧 무질서를 의미한다. 일상의 무질서, 그 혐오의 절정에 곽노는 담벼락을 향한 쇠공 던지는 소리를 우족사러간 아내의 해체로 앙갚음하며 일상에 부동하려했던 자신의 환상을 쇠공던지는 사람, 혹은 쇠공의 탓을 한다. 곽노가 시간과 공간을 견디는 방식은 억지로 형성된 우발적인 성공이 아니라 자연스레 굳어지는 시간의 퇴적이었다. 그것이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종교였고 죽음을 준비하는 예행이었던 것. 숨쉬기 지독히도 힘들면 그저 숨을 덜 쉬면 되지 하는 곽노의 경지가 쓸쓸하게도 느껴지던 작품이었다. 서늘함을 유발하던 가발과 우족, 쇠공 등의 장치가 곽노의 일상을 지배하던 소품이라고 하기엔 참 비일상적으로 낯설었다. ‘곽노’를 발음하면 ‘광노’가 된다. ‘곽노’가 미치거나(狂) 빛나는(光)노인이 아니고 식물도 동물도 아닌 광물을 사랑하는 노인(鑛老)이라는 것에 혹시 사람은 자신이 살아온 대로 죽는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살아온 대로 죽어가는 것, 그것이야말로 살아가는 방식은 아닐까.

‘곽노’가 유배된 북쪽 방에서 생을 마감하는 목표를 가졌다면 <사막여우 우리 앞으로>에서 엄마는 버스 정류장 간이 매표소에서 죽기를 바랐다.(아니 끝까지 살기를 바랐다) 쉰 아홉이 될 때까지 엄마에게 매표소는 요람이자 침대이자 관구였다. 흡사 동물원의 우리라도 되는 듯 엄마의 다리는 홍학의 모가지처럼 말라갔고 엄마는 ‘나’와 동생들을 매표소에서 길러 길바닥으로 내보내었다. 엄마는 도시전체가 홍수에 잠겨도 상가주민들의 철거 시위에도 사흘밤낮을 견디며 매표소를 떠나지 않았다. 언급되진 않았지만 이 작품에서도 중병에 걸린(듯한) 엄마는 매표소에서 마지막 안간힘을 다해 버티는 것만이 자신의 죽음을 맞이하는 방식이라 여겨온 듯하다. 하지만 엄마의 필사적 매표소 사수에도 불구하고 엄마는 매표소만을 딸에게 남기며 죽어버린다. 사막여우처럼 지독해 눈물을 보이지 않던 ‘나’는 성악의 꿈을 접고 동생들에게 떠밀려 매표소 안으로 들어간다. 이 작품에서 매표소는 세상과 철저하게 분리된 감옥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어느날 동물원 사막여우 우리 앞에서 동생들과 만나기로 한 ‘나’는 동생들을 찾아 헤매다가 진짜 동물의 우리 속으로 들어가 사람들의 구경거리를 자청한다. 아프리카 코끼리를 기르고 싶어 했지만 매표소 안에서 번식력이 왕성하던 햄스터와 수명이 긴 자라로 만족해야 했던 엄마를 떠올리며 ‘나’는 매표소로 돌아가 걸음만이라도 코끼리처럼 걸어야겠다고 다짐한다. 이 작품이 처량하고 서글펐던 가장 큰 이유는 한 평 남짓한 매표소라는 공간에서는 아무리 生과 死를 다해도 꿈은 가질 수 없어 포기하고 접어야 한다는 잔인한 현실에 있었다. 그래서일까. 목에 칼이 들어와도 매표소를 지키려던 모성의 괴력에도 불구하고 너무 허망하게 죽어버린 한 인간의 마지막은 목메이는 빈곤의 현실을 상기하도록 침묵으로 시위하는 듯했다. 이제 삶이 동물원 우리 속에 머무는 동물들과 다를 바가 없다고 느끼는 ‘나’는 지금 울 시간이 되었기 때문에 우는 것이라 말한다. 왜 울어야 하는지의 이유보다 어짜피 울 것이기에 언제인지가 더 중요한 ‘나’의 독백은 역으로 ‘울지 않았던 시간’을 돌아보게 한다. 엄마가 마지막으로 남겨주신 매표소, 나의 꿈을 접게 한 매표소, 동생들의 목구멍이 달려있는 매표소에서의 시간만이 내가 울고 싶어도 울지 않도록 해주는 시간이라 실은 울지 않으려 울음을 참았던 시간만이 내가 살아있는 시간이라 외치는 나. 그건 엄마가 죽어나간 매표소이기에 똑같이 죽어야 하는 곳이 아닌 엄마의 죽음을 갚기 위해서라도 두 눈 똑바로 뜨고 햄스터처럼 자라처럼 살아내어야 하는 절박함이 아니었을까. ‘사막여우 우리 앞에서’ ‘나’는 사막여우를 보며 지금은 울 시간이지만 돌아가선 사막여우처럼 울지 않겠다는 약속을 한 것은 아니었을까. 매표소에서 신문이나 껌이라도 사들고 집으로 오고 싶은 이야기, 휘영청 밝은 달을 친구삼아 오늘도 잘 견뎌내었다 자위하며 발걸음을 내딛고픈 이야기였다.

일상을 지켜내라

<모일, 저녁>
은 2009 현대문학상 수상집에서 만난 작품이다. 그때 현대문학상 수상자는 하성란이었지만 ‘알파의 시간’이 꽤 어려워 나는 김숨의 작품이 더 가깝게 느껴졌다.

“다 읽고는 식욕이 현저하게 떨어지는 작품이다. 아마 독자들도 시점이 점심이건 저녁이건 같았으리라 위로해본다. 주인공은 부모님이 삼십년 째 거주하고 있는 신탄진 빌라에 모일, 저녁에 들렀고 아버지는 전어를, 엄마는 기타 반찬을 준비하는 동안(겨우 두어 시간 정도)에 그 지겹도록 변하지 않는 일상을 바라보며 남일 이야기 하듯 부모님과 현재 처한 상황을 피비린내 나도록 냉정하게 묘사한다. 끝에 남는 잔상은 살기위해 뱀장어를 매일밤 백마리나 잡아대는 아버지의 몸부림, 그 얼굴위로 피어오른 연탄연기..참 매캐하고 그로테스크한 90년대 컬트 영화였다고나 할까. 이 작품이 <알파의 시간>을 넘지 못한 건 피비린내의 수위조절이 아니었을까 하는 뒤늦은 우려. 하지만 언젠가는 뛰어넘을 것으로 보이는 범상치 않는 서사의 흐름.”

꼭 일년 전에 나는 <모일, 저녁>을 이렇게 말했다. 그런데 소설집 속의 이 작품은 아홉편들 중 가장 얌전해보였다고 할까. 다시 읽어본 이야기속에는 뱀장어 잡는 일을 하는 예순 세 살의 아버지, 연탄불에 전어를 굽는 아버지의 뒷모습이 많이도 서럽다고 느껴졌다. 화자인 ‘나’는 삼십년 째 한 곳에 뿌리박힌 듯 살고 있는 아버지, 평생 죽을 때까지 은행 빚을 갚는 것에 전전긍긍하며 살아가야 하는 아버지가 모월 모일의 저녁에 담배와 소주를 사러나갔다가 돌아오지 않는 것에 오늘밤 뱀장어라도 한 마리 더 잡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야기를 종결한다. 아버지는 뱀장어 잡는 일이 끔찍하다기 보다 사람들이 그것을 어찌나 먹어대든지 사람이 그렇게 무서울 수가 없었다고 중얼거린다. 아버지가 느낀 무서움은 지하에 오래전부터 늙은 채로 거기 살았던 할머니가 전어 굽는 냄새를 맡고는 올라와 밥상에 앉는 모습을 바라보는 딸의 두려움과 일치했다. 전어 대가리만 빼놓고 새까맣게 타버린 전어지만 어찌나 먹고 싶어 하든지 ‘나’는 그 살고자하는 인간들의 욕심과 마주하기 싫었던 것이다. 매일밤 백마리의 뱀장어를 죽여야 하루 일당이라도 떨어지는 아버지의 노동은 물리적으로 감각적인 자극을 제공하는 작가의 계산된 행위였을까. 아버지는 뱀장어 잡는 일을 사법고시만 십오년 째 준비하며 폐인이 되가고 있는 삼촌에게 전수하려는 의지를 가족에게 내비친다. 아무리 고시 준비생이지만 먹고 사는 문제 앞에서는 뱀장어 잡는 법도 문제가 되지는 않는 법. 특별할 것 없는 빈곤층의 어느 저녁을 스페셜하게 데워낸 작가의 글쓰는 체온이 구워지는 전어만큼이나 뜨겁게 느껴졌다. 무덤덤하게 늘 일상화된, 일상에 전어 굽는 냄새처럼 피할 수 없도록 스며든 슬픔일랑 어떻게 견뎌야 하는 걸까. 혹시 때가 되면 말없이 사라져야 했던 아버지의 칼같은 일상의 법칙, 지긋지긋하고 끔찍해도 변함없이 일상을 처리하며 살아온 관성의 이력이 그들의 오늘을 버티게 하는 것은 아닐까.

피할 수 없이 반복되는 각박한 일상에 스며든 슬픔은 <럭키슈퍼>에서도 기세등등했다. <모일, 저녁>의 아버지가 가족의 생계를 위해 매일 뱀장어를 잡는 행위는 <럭키슈퍼>에서 엄마가 매일 두부나 콩나물을 팔고 받아낸 동전을 세는 행위와 같았다. 엄마는 새벽 여섯 시부터 밤 열한시까지 슈퍼를 열어 유통기한이 넘은 각종 식품들을 팔고 있다. 말이 슈퍼이지 실상은 두평 남짓한 구멍가게이고 길 건너 ‘서울슈퍼’가 생긴 이후에는 노가다나 파출부, 건달들만 간간히 들러 물건을 사가는 실정이다. <모일, 저녁>에서 오랜만에 들른 딸에게 전어를 구웠다면 <럭키슈퍼>에선 서울슈퍼에 손님을 뺏기지 않기 위해 떼어 놓은 생태가 있었다. 그런데 생태는 날이 저물어 아가미에 거품처럼 벌레가 꼬여들고 생태를 사간 이웃들은 양심도 없다며 반품, 환불을 요구한다. 엄마는 생태들에 들러붙어 악다구니를 써대는 기생충을 박박 씻어 찌개를 만들고 온 가족은 할 수 없이 엄마의 눈치를 보며 찌개를 먹게 된다. 이 모든 일상이 가게에 딸린 방에서 혼자 잠이 드는 예비 고등학생 ‘나’에게는 큰일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작은 일도 아닌 매일의 평범한 일상에 지나지 않아 보인다. 가게가 몰락의 기로에서 추락이 확실해지자 엄마는 기한 지난 식품처럼 아빠의 유통기한을 새로 써서 어떻게든 아빠를 팔아보겠다고 도움을 요청한다. 실직으로 유통기한이 한참 지난 아빠의 이마위에 날짜를 새로 적겠다는 엄마의 바늘이 머리를 콕콕 찌르듯 예리한 자상을 남기며 작품은 한치의 여운조차 남기지 않았던 것이다. 팍팍한 일상을 견디는 방법은 일상을 바늘처럼 정확하게 지켜내는 것이었을까. 하루 종일 손님이 없어도 하루 종일 정해진 시간에 문을 열고 지켜야 하는 가게의 진리를 ‘나’는 알게 된 것이다. 이 작품은 88년 서울올림픽이 개최된 해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럭키 금성’이나 ‘럭키 서울’에 익숙한 내 세대에게 ‘럭키슈퍼’는 지금의 이마트보다 더 다정하고 알싸한 이름이다. 한창 가게이름들에 외래어가 접목되던 그 시기에 대형상가과 대규모 상인에 눌려 (올림픽 유치를 이유로)잘 지내고 있던 노점상들이 강제 철거된 그 시절 이야기가 생각나던 작품이었다. 서울엔 알고 보면 그렇게 럭키하지 않은 사람들이 많았었다.

일상을 뒤틀어라

<흑문조>
에서 화자는 부모님에게 돈을 빌려 허름한 집을 마련한다. 부모님의 간이나 폐, 심장이라도 내다 판 심정으로 마련한 집이지만 집은 화목하고 따스한 기운과는 거리가 멀었다. 화자가 말하는 집은 한마디로 ‘흑문조를 기르기에 좋은 집’으로 요약할 수 있으며 ‘시멘트의 독성’과 ‘찌든 곰팡내’, ‘칠흑같은 어둠’을 그 골자로 하고 있다. 지하실엔 귀뚜라미가 뛰어다니고 계단을 사이에 둔 옆집 남자는 끊임없이 계단을 허물자고 요청한다. 이야기의 핵심은 보일러 기계가 말썽나 기술자들을 불렀고 그들은 터진 보일러 배관을 찾느라 집안 구석구석에 구멍을 파 놓게 되었다는 것. 구멍천지가 된 집안에는 지하에 있던 귀뚜라미가 뛰어다니고 어렵게 수리를 마치고 나서 화자는 흑문조의 꿈을 꾸게 된다. 흑문조의 범상치 않은 불길한 예견때문인지 화자는 흑문조를 알아보러 외출을 하지만 돌아와 보니 계단이 감쪽같이 사라져 있어 그제서야 부모님에게 진 빚을 떠올리며 흑문조를 잊게 된다. 화자는 누추하고 더러운 집안 환경에서 발생하는 일상을 다리를 잃고 허공을 맴도는 흑문조의 흉조로 감지하고 새가 예견했을지 모를 일상에 죽음같은 공포를 느낀다. 지하실에 벌레가 있고 보일러가 고장나고 옆집과의 트러블 같은 해프닝은 별스러울 것 없는 우리네 일상이지만 김숨은 삶이 어떻게 물질적 환경에 지배당하며 뒤틀린 일상을 잉태해내는지 그리고 그것은 얼마나 생명을 위협하는지 필사의 감각으로 화자를 해명하는듯 해보였다. 그럼 우린 흑문조 같은 헛된 불길에 휩쓸려 계단을 지켜내지 못하는 우를 범하지 않기 위해 어떠한 길조를 떠올려야 할까. 흑문조가 사라지면서 남겨진 건 여실히 존재하는 부모님에게 빌린 돈이었다. 흑문조를 맨 처음 누설한 건 손님의 한마디였다. 자격지심에서 비롯된 불길은 결국 자기예언의 다른 버전에 불과했다. 흑문조는 실은 스스로 길러오던 화자의 마음속 새였던 것은 아닐까. 다리가 부러져 날지 못하는 흑문조를 집으로 데리고와 기를 것이 아니라 흑문조의 상처가 아물 때까지 기다려주는 배려가 있었다면 어땠을까. 새를 본래 좋아하지 않아서 인지 새를 통해 흉조와 길조를 예견하는 풍습을 존중하지 않는 편이다. 하지만 흑문조와 화자의 불안을 미세하게 중첩시킨 문장의 날개짓은 미학적으로도 완성도 높은 이야기였다는 생각이다. 하얗게 안보이는 불안을 까맣게 보이는 현상으로 그려낸 흑문조는 흡사 김숨의 소설속 불사조는 아니었을지.

<흑문조>처럼 불길한 불청객은 <육肉의 시간>에선 미이라로 등장했다. 아이가 없던 마흔줄의 부부에게 낯선 여자의 방문은 일상의 질서를 망가뜨리는 원흉이었지만 여자는 또 다른 여자로부터 동요하지 않으려 자신을 정렬시켜 나간다. 유난히도 질서와 평온을 가정의 제일 소중한 가치로 여기는 화자에게 여자가 내뿜는 기운은 흡사 <흑문조>가 제공하던 불길한 예감과 동일해 보였다. 마침 고대 이집트 유물전시로 바쁜 박물관 연구원 남편은 ‘발굴’이나 ‘전시’에만 가치를 둘뿐 화자와는 소통이 되지 않는 고대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으로 여겨질 정도였다. 여자는 ‘그자들이 심장과 간과 폐를 가져갔다’ 말하고 온종일 찰흙을 치대어 그림자 같은 형상을 주조하는데 골몰한다. 여자가 형상의 구멍에 숨을 불어넣던 것이 흥미로왔는데 쓸모는 없었지만 그 숨을 통해 입체적으로 부풀려지는 동적 활력이 무섭게 느껴졌다. 쓸모없는 것에 숨을 불어넣는 행위가 내겐 작가가 하잘것 없는 일상에 문장의 힘을 실어넣는 행위를 떠올리게 했다. 그래서인지 창틀에 세워진 형상들은 흡사 진시황릉에서 출토된 흙을 구워 만든 수많은 병마용을 연상케했다. 그들은 모두 죽어있지만 그 어떤 살아있는 사람보다 더 생생한 외양으로 여자를 엄호하는 수호신처럼 느껴졌다. 여자는 소금을 국자로 퍼먹고 미라처럼 부패하지 않는 채로 그들 부부와 동거했다. (믿었던)남편은 급기야 미이라처럼 누워있는 여자와 (기다렸다는 듯이)육체적 관계를 시도하고 관계 후 (예정되어 있던 것처럼) 사라진다. 지난 30여년 동안 종교처럼 매달려 왔다는 발굴관계자들도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다. 화자는 여자를 통해 무엇을 보았고 무엇을 느낀 것일까. 중요한건 남편과 그들의 욕망이 사라졌다고 여자마저 사라진 건 아니었다. 부패하지 않은 채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던 여자의 육체만은 더 분명한 진실인듯 화자의 눈앞에 변함이 없었던 것. 작가가 말한 <육肉의 시간>이란 지금까지였던 걸까. 지금부터인 걸까.

어느날 갑자기 <흑문조>가 날아든 일상과 마찬가지로 부패하지 않는 육체로 방문한 여자는 일상에서의 잠재된 불안과 소통되지 않는 현재시간에 대한 불만을 그 기저로 탄생한 환영은 아니었을까. 불임으로 예상되는 아내, 미이라같은 유물에 몰두하는 남편, 이들에게 있어 육체는 욕망을 실현할 수 있는 매개체가 되지는 못했을 것 같다. 마흔줄에 들어선 이들에게 아이라는 내세의 희망은 실현가능성 없는 미이라 같은 현상이지만 만약 육체가 부패하지 않고 미이라처럼 보존되는 것이라면 얼마든 시도해볼 만한 이벤트는 아니었을까. 가정의 질서를 위해 아내는 이 모든 환영을 참아내며 남편의 씨받이로서 미이라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아닐까. 그렇게 본다면 <육肉의 시간>은 (미이라같은)육체를 인식하고 (미이라와의)육체적 행위를 받아들이는 시간은 아니었을지. 심장과 폐와 간이라는 육체의 주요장기는  없었지만 절대 썩지 않아 영구보존할 수 있는 욕망의 창고처럼. 그것은 혹 뼈와 살이, 피와 핏줄이 마구 뒤틀려 해체된 정신을 무의식적으로 지배하던 우리 육체적 욕망의 미이라는 아니었을까.

일상을 반복하라

반복되는 질문과 대답, 그러나 그곳이 어디인지 보이는 것이 무엇인지 실체를 가늠할 수 없는 의문의 대상, 환상의 객체로서 보이지 않는 두려움이 일상을 조여드는 작품도 있었다. <룸미러>에서 ‘아이들이 깨면 어쩌려고 그래’는 <내 비밀스런 이웃들>에서 ‘그들은 오늘밤에도 그곳으로 갈 거 라더군‘의 한마디와 조우하며 작가는 계속되는 일상의 불안에 타당성을 부여했다. 실제로 작품 초반부엔 그저 큰 뜻없이 지나간 한마디였지만 페이지를 넘길수록 그 한마디는 훗날을 예언하는 어떤 정령처럼 다가왔다. 마치 헤어지자 헤어지자 반복하면 정말 이별하듯 그들은 오늘 만들어진 말로써 내일을 견디는 존재들이었다.

<룸미러>에서 1998년형 베르나 자동차를 타고 가는 일가족의 목적지는 친척의 장례식장이다. 이들 부부는 뒷좌석에 곤히 잠든 아이들이 절대 깨어나길 바라지 않는다. 운전중 어떠한 상황이 닥쳐도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아이들이 깨어나면 어쩌려고‘ 이다. 잠든 아이를 태우고 운전을 수없이 해본 내 경험상 아이가 깨어나는 것이 이토록 조심해야 하는 일인가 싶어 짜증이 날 정도로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이 작품에서 아이가 깨어난다는 것은 일상의 평화가 깨어지는 것쯤으로 이해되었다. 그것은 아이가 잠든 시간이 가장 평화롭다는 뜻이기도 한데 결국 이들은 아이를 위해 아이가 놀라지 않았으면 하는 안전추구의 심리가 아니라 자신들이 아이가 잠에서 깨어나 평화를 방해받는 것이 죽도록 싫다는 뜻에 다름 아닌 것이다. 이들에겐 왜 아이한테 신경을 써야하는 상태가 필요이상으로 부담스러울 만큼 과민한 사건일까. 사실 아이가 깨지 않는 시간동안은 아이가 깨어 있을때보다 더 불안한 상황이 많았는데 이들은 아이가 깨면 마치 불안이 더 확장되어 자신이 감당할수 없다는 식의 논리를 가진 것으로 보였다. 소설을 이야기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나는 이 작품을 외아들이면서 소심한 성격의 한 가장이 운전이라는 반복된 일상을 최대한 자기 방식으로 방어하는 이야기로 받아들였다. 이들은 장례식장으로 향하던 도중 도로에서 돼지나 새의 심리적, 우발적인 공격을 당하고 곧바로 <룸미러>에 비친 아이들을 확인하는 과정을 반복한다. 룸미러는 특정한 공간안에서 내재된 온갖 종류의 불안을, 그 불안의 뒷모습을 나타내는 실은 그다지 보고 싶지 않은 부분적인 거울인 것이다. 룸미러는 반드시 사각지대가 있다. 이들의 불안이 절정에 이를 때 차는 기름이 떨어지고 때마침 늘어선 행렬은 멈추게 된다. 잠든 아이를 놓아두고 이들은 벌어진 광경을 확인하러 각자 길을 떠난다. 그곳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이들은 끝내 말해주지 않으며 끝까지 아이들이 깰 뻔한 걱정을 고집스럽게 주장한다. 무슨 광경인지는 중요하지 않고 혹시 그 광경으로 인해 아니면 자신들을 기다리다 지쳐 아이들이 깨어났을지의 여부만이 여전히 의미있다는 이야기인 것이다. 무서웠다. 우리가 두렵다고 생각하는 현상이나 실체는 사실 두려웠다는 기억의 발현일 것이다. 그런데 ’아이들이 깨어나면 안된다‘는 두려움은 ’경제를 살려야 한다‘나 ’건강을 위해 운동을 하자‘는 당연하고도 기계적인 메시지 같아 마치 그 메시지를 살리기 위해 그렇게 실천하는 듯이 느껴지는 강박적인 구석이 있었다. 아이들이 자신처럼 자랄까봐 두렵다는 남편의 고백은 어느정도 답이 되어줄 수 있을까. 그는 아이들이 깨어나는 것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그냥 아이들이 두려운 것이었다. 벌레가 두렵기 때문에 벌레가 기어다니는 것이 두렵듯이. 본능적인 두려움이 어떻게 일상을 지배하는지 이 작품은 굉장히 현실적으로 서사를 이끌었다.

<내 비밀스런 이웃들>에서도 불안해 보이는 부부는 여전했다. 마흔 넘어 일자리를 구하려는 아내와 통조림 회사에 다니는 남편에게 이웃은 소통불가한 존재들로 위치했다. 집주인은 아들의 뇌수술을 빌미로 전세금을 올려 달라 요구하고 302호 여자는 치킨을 가로챈 데다가 202호 남자는 암에 걸려 곧 죽을 거라고 한다. 전세금을 친정에 부탁할까 전화를 하면 아버지는 늘 주무시고 계신다. 아내는 어느날 옥상에 자라를 버린 사람으로 오해를 받고 내친김에 욕실에 자라를 키우기 시작한다. 이 모든 아내의 일상에 남편은 오로지 ‘그들은 오늘밤에도 그곳으로 갈거라’는 선문답으로 대화를 마무리 한다. 남편은 촛불집회로 인산인해를 이룬 시내 광경을 매일밤 뉴스로 확인하며 맥주를 마시고 아내는 같은 뉴스에서 꼭꼭 닫혀있는 빌딩, 불이 꺼진 창문, 봉쇄된 입구만을 재차 확인할 뿐이었다. 시커멓게 서있는 빌딩처럼 영 소통불가한 이웃이었지만 남편이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는 그녀에게 이웃남자는 ‘오늘밤 그곳으로 갔’을 거라는 답을 한다. 그곳은 대체 어디이며 남편은 정말 그곳에 간 것일까. 부부의 서로 다른 관심사가 조형해낸 일상의 불안은 비밀스런 이웃에 의해 그 비밀이 와해되는 과정을 겪게 된다. 애초부터 비밀은 존재하지 않았고 몰랐기 때문에 비밀이 된 것이기 때문이다. 비밀은 욕실의 자라처럼 하나가 둘이 되고 둘이 다시 하나가 되는 비밀스런 경향이 있었을 뿐인 것이다. 이 작품 역시 전세사는 고단한 맞벌이 부부의 건강치 못한 일상의 풍경을 살짜기 시국의 뉴스로 탓을 하며 비밀아닌 비밀을 은밀히 전달하는 수사를 선보였다. 남편이 간 곳이 그곳인지의 여부보다는 이웃마저 그곳으로 갔다고 말하는 불안의 공감대, 공감의 노출, 그 사실이 더 중요해보였다. 혹시 현대인에게 이웃이란 각자의 불안을 소통하면서 끊임없이 비밀을 생성하는 공동작업의 동반자는 아닐까. 이 작품에선 비밀도 이웃간 일종의 균형장치로 이해되었다. <룸미러>와 함께 경제적으로 여유롭지 못한 가정이 현실의 불안을 극복하는 방식은 역으로 불안을 규격화, 정형화하여 정해진 불안으로 얼마간의 안정을 느끼는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김숨이 조제한 말들은 마치 불안하라, 불안하라 주문하듯 들렸고 역으로 그 주문 때문에 다소나마 불안을 잊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김숨은 별스럽지 않은 인생 다반사의 풍경을 점점 긴장스럽게 절정의 파국으로 치닫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꼭 저러다가 무슨 일이 일어날것만 같은 예감과 불안을 선사하는 탁월한 긴장유발자.



- 문장 웹진 <흑문조> -


   여자가 숨을 불어 넣던 구멍들을 따라 균열이 부챗살처럼 번져 나갔다. 249p


아홉편의 작품들은 질병의 축제이자 축제로 생겨난 일상의 환부로 가득했다. 쉽지 않았다.  아플 것은 알았지만 확인하는 것은 괴로운 일이다. 어쩌다보니 서평이 줄거리 중심이 되었다. 그만큼 모든 이야기의 구성이 탄탄하고 놓칠수 없는 이야기였다. 가난과 질병, 죽음, 생계의 고통은 우리가 죽는 날까지 벗어날 수 없는 가장 큰 현실이기도 하니까. 그러나 이 현실에 짓눌려 현실을 현실에서 현실처럼 살아내지 못한다면 어쩐지 현실적으로 억울하다는 생각이 든다. 아는 만큼 보이는 것이 현실인걸까. 김숨의 소설은 희망을 쉽게 발견하기는 어렵다. 외려 발견하려 할수록 저수지 밑으로 침잠하는 성격을 가졌다. 작가가 그러했듯 그냥 소설을 가만히 관찰하고 느끼는 것이 최선으로 보인다. 결론보다는 인식자체가 더 중요해보인다. 그런데 가만히 그 저수지를 향해 미약하나마 가녀린 숨을 불어 넣다보면 어느새 미세한 균열의 파동이 감지된다. 고요하게 떠오르는 낯설은 존재, 살아있는 것인지 죽어진 것인지 구분할 수 없는 미지의 기대, 예민한 촉수로만 느껴지는 감각의 실체, 그것은 분명 내가 살아있기에 반응하는 삶의 자각은 아닐까. 어떤 자각을 하였을지는 김숨의 숨을 통해 부풀려진 우리 감각의 정도에 있을 듯하다. 그것은 어느날 갑자기 날아든 한마리의 새처럼 뜬금없이 거실에 뛰어든 한마리의 귀뚜라미처럼 누군가 옥상에 두고간 한마리의 자라처럼 파다닥 꿈틀거리는 긴장의 호흡일지 모른다. 숨막히는 현실과 숨쉴틈 없는 일상에도 여전히 숨쉬고 있다는 조금은 적나라한 우리 생명의 실상일지 모른다. 모든 죽어가는 생명에도 꿈틀거리는 마지막 의지는 살아있듯 현실의 맥박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끈질기고 더 위대한 것이 아닐까. 문득 살아 숨쉬는 이 시간에 감사하고 싶다. 그녀가 소설에 숨을 불어 넣으면 우리는 이곳에서 살아 숨쉴 수 있다. 아마도 그것이 그녀가 이토록 힘겹게 숨쉬는 이유가 되지 않을까. 더불어 우리 역시 그녀처럼 우리 삶에 마지막 안간힘을 다해 살아있는 숨을 불어 넣어야 하지 않을까. 살아 숨쉬는 그 마지막 순간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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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오 2011-04-08 13: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 잘읽었습니다~ 지금 읽고 있는 책인데 궁금증에 대한 질문의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네오 2011-04-09 08:04   좋아요 0 | URL
거기 네오 맞아요^^
 
이별전후사의 재인식
김도연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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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그런 걸까. 같은 구간을 오랜 기간 왕복하는 경우, 운전하다 보면 꼭 어느 지점에서 눈에 띄는 표식을 발견할 때가 있다. 터널지나고 나면 왼편에 큰 공장이 있다든지 대형광고판이 나타나면 오른쪽에 무덤이 있다든지 반복되는 풍경속에 어디만큼 왔다하는 무의식의 내비게이션. 흡사 나만의 약속된 이정표라고 할까.

내 경우 출퇴근하는 고속화도로가 끝나는 지점에 놓인 휴지통이 그랬다. 휴지통이 나타나면 집에 다왔다는 신호인데 그건 곧 도로가 끝나고 횡단보도와 신호등이 그 장소에 위치하므로 잠시 멈추라는 뜻이었다. 그런데 그 은색 휴지통이 언뜻 꼭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람으로 보일 때가 있었다. 야근을 하고 열두시가 넘어 반졸음 상태로 운전하다 휴지통 지점에 이르면 깜짝 놀라 잠이 깨곤 했는데 어느날 우두커니 서있는 그 휴지통이 아버지로 보이는 것이다. 아버지는 내가 첫 아르바이트 월급으로 사드린 초록색 겨울 점퍼를 입고 모자를 쓰신 채 지팡이를 짚고 계셨다. 소스라치게 놀라 눈을 부릅떠보면 아버진 아주 느린 걸음으로 유유히 횡단보도를 건너고 계셨다. 아버진 십오 년 동안 신장병으로 투병생활을 하셨고 나는 아버지를 태우고 병원을 갔다가 투석이 끝나면 다시 태우러 가는 기사역할을 십여 년 했다. 병원에 내려드릴 땐 문제가 없었는데 끝나고 나오는 아버지를 태울 땐 병원측의 차량통제로 정차가 수월하지 않았다. 아버지와 정확하게 시간이 맞지 않거나 많이 바쁜 날엔 유턴할 시간이 없어 기운없는 아버지에게 횡단보도를 건너 서계시라 짜증섞인 부탁을 하곤 했다. 고속화도로가 끝나는 지점에서 마치 나를 기다리는 것 마냥 서계시던 아버지는 바로 투석을 마치고 내 차를 기다리던 아버지의 옷차림 그대로였고 횡단보도를 힘없이 건너가던 그 모습은 바쁜 내 시간을 줄여주려 지팡이를 짚고 길을 건너던 모습이었던 것이다. 그 시절 나는 퇴근할 때 조금만 피곤해도 아버지를 만날 수 있었고 그 순간이 너무나 섬뜻해 다른 길로 우회하고 싶었지만 또 막상 퇴근할 시점이 되면 그 사실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늘 같은 길을 택하곤 했다. 처음 아버지를 보았을 땐 두려웠고 잠도 오지 않았다. 그런데 그것도 익숙해지니 슬슬 아버지를 잠깐 스칠 수 있는 그 찰나도 기다려지기 시작했다. 희안한 건 정신을 차리고 아버지를 기다리면 휴지통은 그냥 휴지통으로 보일뿐이었다는 것. 내가 전혀 의식하지 못하는 순간, 한창 졸려서 운전이 버거워 죽겠는 그 순간에 아버진 얄궂게도 내 정신을 일깨우시며 만남을 걸어오셨다. 나는 이 이야기를 살면서 아무에게도 해본 적이 없다. 혹시 누구에게라도 말하고 나면 아버진 그냥 휴지통이 되버릴 것 같았기 때문에. 내가 너무나도 바빴던 그 시기의 내 비현실은 사실 같은 시기 가장 분명한 내 현실이기도 했는데 돌이켜보니 아버지 돌아가시고 칠 팔년을 나는 휴지통 아버지와 매일 극적인 조우를 하며 집에 들어간 것이었다.

사람에게 어떤 환상은 터무니없거나 허깨비같은 비현실이 아니고 자신에게 가장 생생한 상처로서의 아련한 증거가 아닐까. 그때 내가 보았던 아버지의 환영(幻影)은 엄연한 내 현실의 반영(反影)은 아니었을까.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휴지통 아버지에게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했던 야근 시절을 떠올렸다. 소설은 휴지통이 아버지가 되고 아버지가 휴지통이 되는 사연들로 가득했다. 그래서 사연들은 하나같이 각자의 상처와 후회, 그리움과 연민을 자아내는 애틋한 색조가 많았다. 떠난 사람, 죽은 사람은 언제나 그렇듯 비현실적으로 사라졌지만 그렇다고 내 현실속에서 사라지는 건 아닌 것이다. 나 역시 살면서 헤어져버린 모든 인연을 생각해보면 그들은 사라졌기로 더욱 내 영혼과 가까워졌다는 생각마저 든다. 가만 보면 우리는 그들을 언제나 내키는 대로 불러내고 돌려보냈다가 또 어떨 땐 그들의 내키지 않는 방문에 가슴을 쓸어내리고 돌아가지 않는 그들 때문에 번민의 시간을 가지곤 한다. 그것이 그들과 헤어진 내가 헤어짐을 견디는 방법은 아니었나, 그런 생각이 든다. 이 소설, 내게는 사람이 이별하고 난 후 헤어짐을 견디는 여정을 기록한 기행문이었다. 꼭 가야 할 도착지를 알고 있으면서 몇 번이나 그 주변을 맴돌다가 포기하다가 또 찾아가기를 반복하는 되돌이표 운행을 멈추지 못하는 어떤 운전자를 떠올리게 했다. 눈이 무섭도록 내리는 강원도의 어느 산골짜기 하염없는 폭설을 뚫고서라도 꼭 만나야 할 사람이 있는 사람처럼 그는 비장해 보이기까지 했다. 대관령 아흔 아홉 고개쯤은 애초부터 문제가 될 것으로 보이지 않았고 겹겹이 쌓여가는 흰눈 쯤은 되려 그를 포근히 감싸안는 모성이나 고향의 시원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그렇게 며칠 헤메이다 설령 만나야 할 사람을 만나지 못하더라도 돌아가는 길은 사방도처가 그이의 소식을 전하는 전령사들로 가득했기에 결코 쓸쓸하게 느껴지지 않았다고 할까. 그는 어쩌면 누군가를 찾으려 떠난 것이 아니고 그렇게 헤매이고 싶어, 헤매이다 발을 헛디디고 싶어, 마침내 쓰러져서라도 잠시 꿈속에서 만날 수 있을 거라 믿었기 때문은 아닐까. 몇 날 며칠을 헤매이다 돌아갈 지언정 눈처럼 쌓여버린 그리움의 회한이야 녹여지지 않겠지만 다시 돌아온 현실의 눈바닥은 거뜬히 즈려 밟을 수 있었을 것이기에.

1. 착시의 터널을 지나

여덟 편의 단편이 강원도를 가는 여행길이었다면 나는 꼭 지금은 폐쇄된 옛 영동고속도로를 힘겹게 타오르는 초보운전자가 된 느낌이었다. 지금은 내비게이션 덕분에 앞으로 펼쳐질 도로상황을 미리 예측할 수도 있고 운전하는 것이 지루하지 않지만 장시간 무작정 도로나 앞 차만 보고 운전하다 보면 순간적으로 착시현상이 일어날 때가 많다. 특히나 한밤중에 운전자는 원근감과 속도감에 둔해져 반절만의 정신으로 페달을 밟고 있을 경우가 허다하다. 이 책의 반 이상은 바로 장시간 고속도로 주행시 불현듯 찾아오는 착시현상을 연상시킨다. 유난히도 작가는 산길을 타고 넘는 주인공이나 고개를 넘어가는 운전자의 시야를 세밀히 묘사하는 방식으로 인물의 심리상태를 대변하는 것에 능숙한 듯 했다. 강원도 출신 작가가 오랜 기간 같은 길을 오가며 상념에 빠진 시간들과 비례하는 것이었을까. 산도 타버릇한 사람에겐 정상까지의 시간이 단축되는 법이니까.「꾸꾸루꾸꾸 빨로마」,「메밀꽃 질 무렵」,「사람 살려!」의 이야기는 수백 번 고향길을 오가며 운전상의 도로에서 환상으로만 만나고 헤어졌던 모든 추억의 인물들을 부러 찾아가는 이야기로 느껴졌다.

첫 번째 이야기였던 「꾸꾸루꾸꾸 빨로마」 는 까마귀 울음소리와 함께 깜짝 출연하는 추억속의 사람들로 이해되었다. 죽을 병에 걸린 중년의 남자가 허름하기 짝이 없는 약수터 민박에서 한겨울을 나고 있던 중 까마귀와 함께 나타나기 시작하는 오래전 기억들. 무슨 병이 걸렸는지는 모르지만 ‘쉬지 않음 죽을 수도’ 있다는 의사의 말대로 쉬고 있던 와중에 나타난 그들은 옷장수, 체장수, 개장수등의 모습으로 산신당에 하나둘 찾아든다. 그들은 오래전 죽은 애인이거나 부모님이거나 적어도 한 동네 고향 사람들인 듯 한데 어쩐지 반란이나 살인사건을 예고하는 까마귀 울음소리와 늘상 함께인 것이었다. 길인지 흉인지 아리송한 가운데 이들을 한자리에 불러 들인 것은 까마귀일지 몰라도 산신당에서 한바탕 굿판을 벌인 후에 연기처럼 사라지는 그들은 필시 죽음을 앞둔 남자를 위로하러 온 것이 틀림없어 보였다. 어찌보면 오락가락한 환자의 정신으로 귀신을 보았다는 이야기로 귀결되는 구성이었지만 조심조심 돌다리를 건너가듯 작가가 산신당을 찾아가는 여정은 짐짓 처량하고도 숙연했다. 지금은 가족하나 없는 고향집이지만 내 삶의 근원지를 찾아 홀로 발걸음을 시작한 우리네 그리움이 새소리, 물소리, 눈소리에 잘 스며들어 뜻깊은 재회라도 하고 돌아온듯, 이 작품은 누구에게나 고향과 부모님을 생각게 하는 미덕을 가졌다. 정말로 강원도의 까마귀는 ‘꾸꾸루꾸꾸 빨로마’ 라고 우는 것인지 산골짜기에서 들려오는 새소리는 어떤 기분일지 우는 것도 추억과 함께라면 위로가 되는 것인지 궁금해지는 소설이었다.

「메밀꽃 질 무렵」에서도 아버지는 건재했다. 이효석의 단편 ‘메밀꽃 필 무렵’의 속편과도 같았던 이 소설은 동이가 허생원의 아들임을 암시하는 ‘메밀꽃 필 무렵’의 마지막을 다시 소설로 계승했다. 봉평 장거리에서 싸구려 신발을 팔고 있는 허동이라는 신발장수가 장돌뱅이 아버지 허생원을 추억하는 방식은 봄날 흐드러지게 피었다가 지고 마는 꽃들마냥 처연해보였다. 「꾸꾸루꾸꾸 빨로마」에서 까마귀 울음소리가 추억의 전령사였다면 이 작품에선 등짐을 지고 나선 나귀의 방울소리가 그였다. 방울소리는 ‘달밤에 어울리는 얘기를 주절주절 나누며 고개를 넘고 개울을 건너는 운치는 장돌뱅이들의 세계에서 사라진지 이미 오래’였지만 그 고되고 흐뭇한 밤길을 걸어가던 장돌뱅이 허생원의 모습은 같은 방식으로 인생을 배워왔던 동이를 통해 더욱 생생해진다. 인생을 휘감고 있던 안개를 걷어내듯 아버지의 목소리는 방울소리만큼 선명하고 눈가루처럼 눈부시다. ‘장보러 왔다가 장보고 가는’ 것이 인생이라는 아버지의 한마디는 이 세상에서의 삶을 ‘아름다운 소풍’으로 여긴 천상병 시인의 ‘귀천’의 한 구절을 떠올리게 한다. 한 평생 장에서 장으로 가는 길이 꽃이 피고 지는 자연의 운명과 같다하니 장돌뱅이 삶의 애환을 노래한 신경림의 ‘목계장터’의 마지막 구절, ‘하늘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고 산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 하네’ 하는 향토적 서정시도 절로 떠오른다. 같은 시대를 살고 있는 작가가 아닌 1930년대 작가가 노래하는 고향시처럼 이 작품은 전통적 서사와 서정적 향수를 한껏 발산하는 글이었다. 꼭 고향길을 가던 중 멈춰선 휴게소에서 흘러나오는 전통가요의 한자락처럼 낯설지 않은 친근함, 그것 역시 작가가 평생 길러온 오래된 그리움의 이야기는 아니었을까.

「사람 살려!」는 한 술 더 떠 우리네 구수한 옛날 이야기속에 단골로 출연하던 호랑이사연을 맛깔나게 각색한 고품격의 귀신 이야기였다. 어느 강원도 마을의 땅부잣집 한량 도련님이 멀고 먼 한양을 가던 길에 벌어진 어드벤쳐 로드무비였달까. 하필 도련님의 이름이 ‘강릉 김씨 송림파의 후손 김성기’라는 점이 에로틱한 상상을 불러올 수 있겠으나 이야기는 性적이기 보다 오히려 聖스러운 농담쪽에 가까웠다. 도련님은 개똥이와 함께 가는 길에 미녀 구미호와 갓을 빼앗는 호랑이, 인육먹는 산적, 외다리 도깨비에 이어 끝내 물귀신까지 만나게 된다. 물귀신은 여지껏 우여곡절로 만나게 된 환영을 파노라마로 비추어 보는 거울과도 같았는데 그동안 양반의 폼만 잡다가 할 수 없이 ‘사람살려’라 입을 트이게 해준 장본인이기도 했다. 한양 가는 그 먼 길에 귀신들을 벗삼아 대장부의 포부를 꿈꾸었는데 그만 ‘사람살려’라 말하는 순간부터 도련님은 사람으로서 사람이 보는 것만 보고 들으며 발걸음을 뗄 수밖에 없는 것이라면 이제부터 시청률은 내리막길이 아닐까. 저들 모두는 내가 사람이라고 알리는 동시에 사라지고 마는 다른 세상의 사람아닌 존재들이었다. 그러므로 ‘사람살려’는 고독한 반전의 외침이었다. 그것은 사람으로 살아가야 하는 슬픈 현실이었다. 우리는 어쩌면 사람아닌 모든 것과 얼마나 친분을 과시하며 사람아닌 그들에게 얼마나 과분한 의지를 하고 살아가는지 모른다. 설사 그 친분과 의지가 ‘귀신과 농담따먹기’의 한 나절일지라도 우리는 그들을 향해 살려달라 말할 수 없는 존재들이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사람으로 살고 보는 건 결국 자신이 아는 모든 귀신을 떨쳐버리는 염치 없는 일이지만 그렇기에 生은 쓸쓸해질 수밖에 없는 일이라는 걸 깨닫게 해준 소설이었다. 우리들은 귀신이 아니고 사람이기 때문에 별 수 없는 거라는 아이러니, 그 씁쓸함이 문득 슬퍼지는 옛날 이야기였다.

2. 부처님의 휴게소에 들러

첩첩산중 강원도 시골에서도 한스런 여인, 비극의 여주인공은 여지없이 존재했다. 「떡-병점댁의 긴 하루」는 이 책에서 가장 가슴아픈 사연으로 새겨졌다. 하고 많은 나라 중 하필 우리나라에 그것도 강원도 촌구석에 시집온 ‘병점댁’은 아버지 같은 남편 사후 공사판에서 떡과 거피를 팔아가며 하루하루 살아간다. 가난했던 베트남 처녀가 이역만리 타국 한국땅에서 술주정뱅이 남편의 구타를 견디며 버텨온 힘은 다름 아닌 우리 ‘떡’에 있었다. 인절미의 구수함과 백설기의 포근함에 기대어 시집살이를 견뎌온 병점댁은 울음을 삼키듯 떡을 삼키고 상처를 달래듯 떡을 오물거리며 자신을 위로했다. 남편과 시어머니가 죽고 나니 더더욱 사람들은 자신을 물건취급하며 반말을 일삼고 사람취급을 하지 않았다. 병점댁은 사내들이 떡과 커피를 원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몸을 원했음을 알고 기꺼이 몸도 메뉴에 얹어 팔기 시작한다. 그런데 모처럼 운이 좋아 다섯명의 사내를 상대하며 열심히 돈계산을 하고 있을 즈음 죽은 남편이 그녀 곁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었던 것. 남편은 왜 살아서 그녀를 위해 울어주지 못하고 죽고 나서야 부질없는 눈물을 보이는 것일까. 이 작품의 최대슬픔은 다섯 명의 사내에게 몸을 내주고 받은 돈을 꼭 남편과 눈이 닮은 청년이 모조리 빼앗아 가고 난 후, 그때마저도 인절미를 꼭꼭 씹어 삼키던 그녀의 울분이었다. 떡을 삼키며 설움을 견뎌낸 그녀는 남겨진 떡을 오래 오래 씹는 것으로 生의 비루함을 처절하게 씹어 버린다. 이 소설을 덮으면서 사람은 눈물대신 떡을 삼킬 줄 아는 기특한 존재이지만 제 살같은 육질을 베어 물어야 눈물을 견뎌내는 잔인한 존재임을 다시금 깨우쳤다. 병점댁의 떡과 함께 그녀의 살마저도 씹어 삼켜버린 사내들이 구역질나는 이야기였다. 그들이 병점댁을 범하는 모습은 꼭 떡이 아닌 육고기를 갈기 갈기 찢어 먹는 탐욕스런 인간의 본성을 목격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병점댁의 긴 하루만큼이나 다른 소설보다 몇 배나 더 길게 느껴지는 시간이었다.

「떡-병점댁의 긴 하루」가 휴게소에서 만난 슬픈 처자의 사연같았다면 「북대」 그 휴게서 근처 다방에서 일하는 아가씨들의 사연을 듣고 나온 기분이었다. 쉬면서 하기 딱 좋은 이야기는 행여나 길가다가도 만날 일 없는 젊은 처자의 불행이 아니던가. 그렇게 흘려들은 이야기는 언젠가 내 무의식에 잘 자리하고 있다가 불쑥 불쑥 다시 그 지방을 찾을 때 즈음 귀신처럼 생각날 이야기 일지도 몰랐다. 「북대」는 택시 기사청년과 다방 아가씨의 참을 수 없는 연애소설이다. 그러나 신분상 하층계급의 비천한 사랑의 단면을 통속이상의 종교적 질문과 대치시키며 무상한 인생에 사랑의 의미를 돌아보게 한다. 이 소설에서 ‘북대’는 ‘오대산에 가장 깊고 높은 곳에 자리한 암자’라는 장소적 상징성을 가지지만 그들은 한번도 ‘북대’에 가보지는 못한다. 그곳을 가고 싶어 했고 그곳을 가던 중이었고 그곳을 가보자 약속했지만 끝내 다다르지 못한 곳. 소설속 ‘북대’는 속세 사람들의 ‘알프스’쯤으로 생각되었다. 모텔과 절을 오가는 아가씨는 당구장과 절을 오가는 청년과 ‘밀당(밀고 당김)’을 주고받고 금강경 독송을 응원삼아 ‘절 같은 집이나 한 채 지어 놓고 살아’ 보고 싶은 소박한 시골 젊은이들이었다. 그런데 이들이 아무리 백팔번의 절을 하고 자신들이 ‘갠지즈강의 모래알 수 만큼이나 많은 사람들’중의 한 사람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해도 그들의 인생은 눈덮인 기나긴 겨울밤의 모양새를 벗어나지 못한다. 사랑을 이루지 못할 것이라는 예감은 곧 영원히 ‘북대’에 이르지 못할 것이라는 암시와 중첩되며 이들은 인생에서 ‘가 보지 못한 길‘에 대한 서운함을 금강경의 불교식 교리로 달래기로 한다. 하지만 알면서도 달려야 하는 것이 인생이듯 우리네 여행은 다음이라는 정거장으로 몸을 이동할 수밖에 없는 것일까. 이 소설은 점점 멀어져 가는 불경소리와 같이 멀어지는 꿈을 아스라하게 만들며 아득해지는 울림을 주는 작품이다. 그것은 한 때 사랑했지만 지금은 헤어져야 함으로 귓전에서 울려오는 뱃고동소리에 질끈 눈을 감고 마는 야속한 애상(哀相)곡과도 같았다. 세상의 이루지 못한 모든 사랑은 이 소설의 ’가보지 못한 길‘일 것이고, 그렇지만 언제라도 가볼 수는 있을 것 같은 ’북대‘를 향한 두 마음의 약속이 아닐까.

휴게소에서 만난 병점댁과 밀크세이크, 그리고 택시기사는 모두들 각자 ‘부처’라는 슬픈 이야기 보따리를 싸들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의 사연이야말로 ‘아니기에 비로소 맞다’는 그 유명한 부처님의 가르침은 아니었을지. 휴게소를 나와 이동할 장소가 없었다면 그대로 부처님을 뵈러 가고 싶었던 소설이었다.

3. 안전운행의 동반자와 함께

계속되는 운전와중에 지금 가장 당면한 문제가 도로위에 펼쳐지는 경험은 익숙한 풍경이었다. 「바람자루 속에서」「저 언덕으로 건너가네」 드라이브 소설로서 주인공의 내면갈등이 마치 조수석의 동반자처럼 느껴지는 소설이었다. 「바람자루 속에서」는 심야의 영동고속도로를 운행함에 있어 내비게이션의 목소리가 서사의 진행을 암시하는 형식이었다. 전방에 급커브, 전방에 추락주의, 전방에 낙석주의, 전방에 안개지역, 기타 강풍주의, 미끄럼주의, 과속주의, 야생동물 주의....이 소설을 읽다보면 세상에서 운전만큼 위험한 일은 없어 보여 사방천지가 위험투성인 것으로 느껴진다. 시간강사로서 다음 학기 강의를 따내기 위해 교수에게 접대를 하고 돌아가는 그의 운명은 다리난간에 매달린 바람자루와도 같았다. 아내 몰래 외도해온 정부 Y는 그동안 성실하게 살아온 자신에게 허용된 최소한의 배려였을까. 그런데 지난 삼십 여 년 간 하루가 멀다하고 오르내리던 그 도로에 자존심을 버리게 한 K교수와 그것을 보상해주는 Y와 그로인해 죄책감을 갖게 한 아내가 약속이나 한 듯 번갈아가며 다채롭게 출현한다. 재수 없으면 차에 치여 죽기 일쑤인 고라니와 멧돼지로 분한 그들의 영혼은 차마 내비게이션이 예상치 못한 존재들이었다. 그는 자신의 차가 마침내 바람자루 속에 들어가고 고라니와 멧돼지가 보이지 않게 되자 비로소 ‘다음 신호시까지 직진’이라는 음성을 들으며 어렴풋이 아가위 나무의 흰 꽃 그늘을 감지한다. 그에게 내비게이션은 과연 안전운행의 동반자였을까.

내비게이션이 안전에 도움을 주지 못한다는 말을 하려 하는 것이 아니다. 첨단의 시스템인 내비게이션을 주인공의 내재된 불안을 자극하는 장치로 활용하며 서사를 극적으로 전개시킨 작가의 운행능력이 탁월했다는 말을 하고 싶어서이다. 인생은 금방 깨어질 것같은 ‘빙판’위를 달리는 위험천만한 여행이기에 난간위에 매달린 ‘바람자루’처럼 늘 변덕스럽고 불안한 운전을 숙명으로 한다. 그렇기에 안개와 강풍이 가득한 위험지역은 어쩌면 더 이상 위험아닌 일상지역일지도 모른다. 일상은 바로 내비게이션에서 한발 앞서 알려주는 지극히 친근한 우리 현실이기도 할 것이다. 즉, 야생동물인 고라니와 멧돼지는 늘 우리와 같이 살고 있는 우리 생의 동반자였던 것이다. 중요한 건 안전이나 위험의 선택적 조건이 아니고 안전속에 존재하는 위험, 위험이 내포된 안전이야말로 바람같은 목숨주머니를 달고 살아가는 우리네 삶의 가장 분명한 증거라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음 신호시까지 직진하여 가는 것이 ‘바람속에서’ 바람을 견디는 일이라는 것, 그것이 아닐까.

「저 언덕으로 건너가네」에서도 택시기사는 갈등한다. 도박과 술로 전전긍긍해온 택시기사양봉주는 우연히 운전 불자회 신도들과 함께 관광버스 성지순례를 따라 나선다. 약장사 같은 스님의 말씀을 들으며 양봉주는 비임균성 요도염, 임질이라는 성병에 걸려 그녀와 집사람 영희 모두로부터 의심받고 있는 자신의 처지를 떠올린다. 누가 뭐래도 최초 감염자를 찾고 싶은 그에게 진실은 생각할수록 오리무중에 빠지고 때맞춰 운전기사는 고의적인 난폭운전을 감행한다. 불안한 기사대신 운전대를 잡은 그 앞에 닥친 것은 눈보라가 가득한 고속도로였고 그에게 관광버스는 길고 넓은 택시로 여겨진다. 그가 눈보라를 헤치며 자신의 새로운 택시에 태운 것은 누구일까. 그는 왜 저 언덕으로 건너가지 못할 정도로 자신을 짓누르는 모든 갈등들을 다 같이 태워버린 것일까. 아슬아슬 줄타기 하듯 위태로운 양봉주의 운전모습이야말로 어쩐지 성지순례의 본코스 같기도 했다. 자신이 가진 모든 마음의 짐을 다 이고서 언덕을 건너가려는 택시기사 양봉주, 그가 짐을 모두 내려놓고 성지순례를 마치고 무사히 귀환할 수 있을까. 혹시 누구라도 다 내려놓고 돌아오는 경우라면 그들에겐 돌아오는 순간 같은 양의 짐이 나타나거나 돌아간 순간 그들만의 짐이 다시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언덕을 넘어보려는 그 누구에게도 그건 늘상 힘겹고 무거워 건널 수 있겠다는 생각은 전혀 할 수 없는 두려움은 아닐까. 그렇지만 그 두려움 때문에 우리는 늘 저 언덕을 건너가기 위해 오늘도 나만의 택시를 몰고 있는 건 아닐까.

그렇다면 우리 안전 운행의 동반자는 친절한 내비게이션이나 관광기사가 아니라 빈번한 안개, 낙석과 강풍, 불투명한 진실, 알 수 없는 불안, 그리고 그들이 눈처럼 담겨진 백색의 상상자루는 아닐까. 위험이라는 동력 때문에 더욱 안전을 꿈꾸는 우리 인생이 더 강하고 질겨지는 비결이야 말로 그들 눈보라 때문은 아닐까.

4. 톨게이트를 빠져 나오다

마지막으로 이 책의 표제작인 「이별전후사의 재인식-그녀와 그의 연평해전, 그리고 즐거운 트위스트를 말 할 차례이다. 이 소설은 1997년과 2007년에 행해진 이별이라는 스펙트럼을 패러랠하게 비교하고 있다. 시선은 시종일관 냉소적이었지만 목소리는 재즈가수의 그것처럼 끈적하다. 시간적 배경은 십년차를 두고 만남과 재회의 심경을 서술하지만 감지되는 분위기는 팔십 년대의 주점식 정서였달까. 팝십 년대 끝무렵에 대학교에 입학한 내게 있어 이 작품이 말하는 이별의 방식은 너무나 익숙해서 청승맞은 구석이 다분했다. 대체로 그 시절 가난했기에 헤어졌다고 믿고 있는 우리들이 다시 만난 연인과 어느 정도 돈이 있어도 다시 헤어질 수밖에 없는 현실을 확인할 때 새삼 알게 된 인생이란 아마도 ‘인식’이 아닌 ‘재인식’의 문제일 것이다. ‘만남’이 아닌 ‘재만남’의 법칙이야 말로 ‘재인식’이 합당해보였고 그래서 ‘재이별’은 두 번 살았기로 두 번 죽어지는 비극의 필요충분조건이었다. 작가는 1997년 IMF 사태를 맞아 중단된 일자리와 삭감된 임금 때문에 위기를 넘기지 못하고 헤어진 연인들을 2007년 각자의 가정을 가진 채로 불륜커플이 되어 만나도록 심술을 부리셨다. 이들을 다시 재회하게 한건 순전 다시 헤어지도록 하기 위해서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은 작가의 의도와는 상관없다는 듯 다시 예전처럼 사랑을 나누고 이 나라의 대통령을 걱정하고 스포츠 스타에 정을 주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이 나라엔 대통령도 필요했고 스포츠 영웅도 필요했다. 그건 꼭 우리에게 사랑은 언제나 필요하지만 그 대상은 바뀔 수 있다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누가 되었건 대통령에 당선될 것이고 어떤 경기든 영웅은 탄생할 것이었다. 이변이 없다는 생각에서였을까. 다시 만난 연인이 나누는 대화는 전혀 소설적이거나 영화같지 않아 외려 얼굴이 후끈 달아오를 정도로 민망했다. 이들이 ‘세상에 낙오되지 않았다는 위안으로 손을 잡고 TV를 시청하던 소중한 시간’은 ‘밤나무 골짜기의 밀실같은 방갈로’를 지나와 옷벗기기 게임을 하던 ‘모텔’ 을 통과해 이제 각자가 가야할 곳을 정해야 할 시점에 이르렀던 것. 그들의 드라마는 아름답지 않았고 나는 절대 재방송을 보고 싶지 않았다.

인간은 왜 한 번 헤어진 사랑과는 그 헤어짐이 아무리 고통스러웠다 해도 다시 만나 그전처럼 같은 불길을 태울 순 없는 걸까. 닭을 먹고 술을 마시고 화투를 치고 옷을 벗어 봐도 심지어는 ‘행복’하다고 말을 해봐도 왜 행복할 수 없는 것일까. 어쩌면 다시 만나는 순간에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한번 확인해보고 싶은 스스로의 고집은 아니었을까. 직접 당사자의 입으로 ‘좋은 사람 만나길 바랄게’ 같은 인사를 들어야지만 더 이상 꿈꾸지 않게 되는 것일까. 같은 사람과 두 번 헤어지는 것은 두 번 만나지 못한 것의 몇 백배로 가슴아프다. 하지만 이 소설은 이상하게도 도착지의 톨게이트를 막 빠져나오듯 후련한 구석이 있었다. 시원섭섭이란 말은 이럴 때 하는 것일까. 어찌되었건 나는 강원도에 도착했다는 안도감 같은게 느껴지는 소설이었다. 중간에 다시 돌아갈 수도 있었고 사고같은 위험상황도 있었지만 이제 요금마저 지불했으니 다른 생각은 나지 않을 터였다. 아주 긴 이별의 터널을 빠져나와 지금껏 달려온 거리만큼이나 스스로가 대견해지는 순간, 그건 모든 이별후에 다시 일어서야 하는 새로움의 서막이었을까. 혹시 세간에서 말하는 강원도의 힘이란 이런 느낌은 아닐까. 폭설로 오도가도 못하는 고립을 견디고 살아온 그네들의 밑천이란 이렇게 모든 이별후에 쌓여지는 하얀 눈의 결정은 아니었을지.


예전엔 강원도를 가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서울에서 얼추 대여섯 시간은 걸린 듯 하다. 특히 지금은 폐쇄된 옛 영동고속도로를 떠올리면 생각만으로도 멀미가 나는 것 같다. 그땐 대관령이나 한계령, 미시령 어떤 길이든 난코스였는데 그중에서도 기억나는 건 속초로 이어지는 악명높은 미시령 고갯길이었다. 경치좋은 드라이브 코스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길이지만 주변 경치에 취해 운전하다보면 도로사정과 운전감각이 어긋날 때가 있다. 생명은 한순간에 자연에 흡수될 수 있는 것. 또 하나, 보통 서울에서 강원도를 향하는 운전이란 대도시에서의 탈출이라는 일탈을 의미하는 경우가 많아 강원도를 다녀오는 것은 다른 여행길보다 무리수를 두게 두는 경우가 많다. 여러 가지로 보아 내 청춘의 강원도는 반 이상이 위험을 내재한 파격의 드라이브를 상징했다. 돌아와 일상으로 복귀한 내 모습은 물론 기억나지 않는다. 이 책은 다시 가보는 강원도 길이 그 옛날 위험한 환상의 코스였음을 일깨워 줄 것이다. 무엇보다 입체적인 여행길을 이끌어준 작가의 다채로운 이야기들은 훌륭한 문학의 내비게이션이었다. 고개를 넘는 건 역시 환타스틱했고 커브는 물론 스릴만점이었다.

이별을 견디는 건 이별한 사람들과의 근사한 재회가 아니라 내가 이별한 사람이라는 서글픈 인식에 있었다. 내가, 그토록 사랑한 사람들과 이별도 겪어낸 사람임을 알아보는 마음에 있었다. 그만큼 사랑하며 살아온 사람이란걸 인정하는 일이었다. 언제나 그것은 이별한 사람들에게만 주어지는 고통이자 生의 선물이었다. 혹시 나보다 더 많은 이별을 하였을지 모를 작가에게도 박수와 위로를 건네본다. 당신도 나처럼 이별한 적 있을까. 나처럼 이별하고 이별한지도 모르고 살아왔을까. 그래, 그렇다면 나처럼 강원도로 떠나길 바란다. 가는 길이 위험하야 가끔 두려울지 모른다. 가는 동안 누군가 생각나 자꾸 눈물이 날지도 모른다. 눈물이 앞을 가려 내리는 흰 눈이 앞을 막아 길을 잃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좋을 것이다.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당신 역시 이별하였기로 다시 볼 수 없는 그리움의 눈발이야 누구보다 하얄 것이기에. 그 하얀 눈발 위로 다시 떠오르는 더 하얀 그들, 그들과 함께였던 우리 생의 반짝이는 시간, 눈의 결정만큼이나 깨끗해진 우리의 눈물, 돌아오는 가슴에 간직하고픈 하얀 보석, 그 영원한 이별을 찾기 위해, 강원도로 가자. 그대 여기, 이 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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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들의 고군분투 생활기
제스 월터 지음, 오세원 옮김 / 바다출판사 / 2011년 1월
평점 :
절판



죽음을 말하는 숫자

웃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웃기지 않았다. 그러나 울 수도 없었다. 세상엔 웃을 일도 울 일도 많지만 이번 일은 남들이 아닌 꼭 내 일 같았기 때문이다. 바다건너 중년 미국남자의 일이라고 하기엔 많은 상황이 지금의 나와 기분나쁘게도 일치했다. 그래서 처음엔 ‘가장 웃긴 올해의 책’이라는 타임지의 메인카피에 낚였다는 생각을 했지만 곧 ‘현재 우리네 삶을 보여주는’이라는 앞의 수식 때문에 멈칫거렸다. 지금 내가 사는 모습이니 웃긴 게 맞다는 생각이 들었고 웃긴 이야기라고 꼭 웃으라는 법은 없으니 틀린 말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웃기지만 인간은 복잡한 동물이므로 슬플 수 있으니 이런 이야기에 연민을 느낄 수 있겠으나 그건 어디까지나 내 이야기가 아닐 경우에 해당되었고 누군가 콕 집어 나들으라고 한 이야기 같다면 겉으론 태연한 척해도 속으론 피를 흘리는 것이 또 우리들 속내인 것이다. 이번 소설의 가장 큰 악덕은 바로 속으로 멍들도록 적나라하게 현실적이었다는 것, 그래서 이야기는 고래심줄만큼 질기고 이불속 진드기만큼 끈덕지다는 것이 역으로 미덕이 되는 소설이었다. 산다는 건 이렇게도 낱낱이 적어놓고 보면 영화보다 더 기가막힌 것일까. 이 소설의 99%는 그 기가 막힌 生의 딱 일주일간의 이야기다. 기자출신의 독설적, 독단적, 독보적, 마침내 독창적인 글빨에 시종일관 기가 짓눌려 독서를 했다. 나는 정말 이 책을, 이 작가를 견뎌내느라 고군분투했음이다. 흡사 이 작품의 주인공이 견뎌내던 악몽의 일주일과도 같이.

주인공은 사십대 중반의 전직 신문사 경제기자이다. 기자 경력만 (하필, 젠장)18년이라 들었다. 그런데 어찌어찌하다 해고를 당했단다. 그래서 더는 할부금을 낼 수가 없게 되었단다. 알다시피 한정된 월급으로 도시를 살다보면 나는 ‘각종 대금을 지불해 내려 이 곳에 왔던가’하는 생각이 월급날, 그날 하루 떨어지는 낙엽마냥 도처에 정처없이 굴러다닌다. 신용카드 대금, 아파트 관리비, 보험료, 각종 세금, 휴대폰을 비롯한 각종 공과금, 아이들 학원및 병원비, 기타 책값등의 문화생활비, 의류및 잡화 지출비 등등 그것들을 빠짐없이 내면서도 그 나머지로 식비까지 충당해야 하는 우리 인생이 어김없이 날아드는 월말 고지서만큼이나 지긋지긋해 보인다. 그런데 이런 다람쥐 쳇바퀴도는 생활에서 딱 한 달만 월급이 끊겨버리면 우린 마트에서 카트밀며 일주일치 먹거리를 살 수가 없고 그때 그때 한 개씩 우유를 사먹으러 세븐 일레븐에 갈 수 밖에 없으며 월급이 세 달이상 밀리면 세븐 일레븐이나 나인 일레븐이나 숫자상으로 큰 차이를 못 느끼게 되는 것이다, 라고 이 소설은 말한다. 그건 전직이 신문기자였건 신문팔이였건 신문배달이었건 월급으로 할부금을 조달하는 신세라면 다 똑같다고 말이다. 경제도 싫고 기자는 더 싫지만 그 둘을 합쳐놓으니 손해보는 일은 절대 안하고 살 것만 같은 사람이었다. 또 (계산적인 시장분석에 의해)아내는 얼마나 예쁘고 글래머러스 했던가. 이들의 토끼같은 두 아들은 얼마나 귀여울 것인가.(우리 소설같았으면 아들 하나, 딸 하나로 완벽성을 강조했겠지만) 절대 저임금 노동자의 자녀들이 다니는 집 앞의 공립학교에는 애가타서 보낼 수가 없는 아이들인 것이다. 하루종일 TV로 사시는 노망기가 있는 아버지만 제외하면(아버지가 노망인 이유는 소설의 결말에 반전제시용이었다) 우리가 흔히 보는 잡지에서 등장할 것같은 빅토리아 풍의 미국 이층집에서 닛산 알티마가(짜증나게 이 책은 줄곧 올티마라고 번역했다. 설마, 기아 옵티마의 오타인줄 알았다. 그래서 닛산이 싸구려라고 조롱하는 것에 자주 마음이 상했다. 닛산은 그들의 리스트에라도 등장하지...닛산이하는 그럼 쓰레기란 말인가) 아닌 BMW 5 시리즈쯤은 거뜬히 구경할 수 있을 것 같은 모양새인 것이다.(자가용과 옷차림을 제 2의 신분과시용으로 생각하는 우리네 정서에서 보아도 닛산은 쫌 그랬다. 우리도 맥시마 사느니 차라리 SM 7도 아닌 SM 5 사겠다. 몇 십 킬로 떨어진 사립학교에 아이들을 등교시키는 차량이라면 렉서스 이상은 되줘야 하는 거 아닌지.) 암튼, 이 마흔 여섯의 펜대 굴려 먹고 살아오신 아저씨가 알티마가 아닌 맥시마를 끌고 두 아들이 아침에 시리얼에 부어먹을 우유를 사러 세븐 일레븐에 가는 장면이 소설의 시작이었다. 기실 세븐 일레븐(7/11)으로 가는 길은 주인공 맷에게 있어 뉴욕의 테러 나인 일레븐(9/11)에 버금가는 인생의 테러, 테러의 일상, 그것의 시작이었다.

미국을 보고하는 방법

작가는 소설구성상 처음과 마지막을 ‘세븐 일레븐’으로 배치했다. ‘또 다른 7/11’이 그 시작이라면 ‘세븐 일레븐 이후’가 그 마지막이었다. 미국에서 9/11은 어떤 의미일까. 우리에게도 9/11은 엊그제 터진 일본의 쓰나미만큼이나 충격과 공포의 상처이다. 작가는 미국사회에서 9/11 테러로 인한 ‘죽음에 대한 공포’를 24시간 편의점인 7/11에서의 ‘개인적인 추락’과 중첩시키며 누구에게다 다가오는 삶의 두려움을 극적으로 밀어 부쳤다. 그때 상상할 수 없었던 뉴욕의 빌딩이 무너졌다면 오늘 예기치 않았던 맷의 슬리퍼도 미끄러졌다고. 맷의 어머니는 임종하기 전에 ‘네 생각엔 7/11이 또 일어날 것 같니’라며 9/11을 우리 일상속에 체화된 세븐 일레븐으로 치환해놓고 돌아가셨다. 말도 안되는 걱정거리를 염려하며 삶을 마감한 어머니에게 9/11은 살아생전 어떤 의미였을까. 맷은 지구온난화, 지진과 같은 천재지변, 총기사고나 묻지마 범죄같이 하루를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피할 수 없는 극적인 죽음은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라 여기며 살아왔다. 그런데 어머닌 임종의 순간까지도 7/11으로 변신한 9/11 테러를 언급하며 앞으로는 그런 일은 없을 거라는 아들의 목소리를 끝내 확인하고자 했다. 즉, 자신의 후대에게는 절대 9/11 테러에 준하는 끔찍한 사고는 더 이상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사라지면서 남겨지길 바라는 눈 감기전 최종 마지막 희망이 세븐 일레븐이라는 착각으로 튀어 나와버린 것이다. 그런데 과연 하루 종일 오픈중인 세븐 일레븐이 도시 삶의 공포 아이콘이라는 착각은 정말 착각에 불과했을까. 이 작품을 덮고 나니 편리하라고 24시간 내내 열려있는 세븐 일레븐이 꼭 24시간 노출되어 있는 원자력 발전소와 같이 느껴졌다. 그건 꼭 웃기지만 웃을 수 없는 이 작품의 묘한 매력과도 같은 어머니의 농담같은 유언이었다. 그건 어쩌면 어머니의 아들인 맷이 자신의 아들에게 아버지로서 소설의 마지막에 하고 싶었던 말은 아닐까. 그건 대략 십 오년전 쯤 ‘요새는 7을 일레븐으로 읽느냐’고 물어보신 내 어머니가 내게 하고 싶었던 말씀은 아닐까. 엊그제 일본의 지진과 쓰나미만 보아도 눈으로 보면서도 믿기지 않는 우리네 현실을 생각한다면 그건 오늘날 지구라는 같은 공간에 삶이라는 같은 시간을 살아가고 있는 그 누구라도 마지막에 하고 싶은 말일 수 있지 않을까. 앞으로는 그러한 일이 절대 일어나지 말기를 바라는,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 만큼은 마주치고 싶지 않은, 만약 꼭 한번 마주쳐야 한다면 그건 나와 내 가족이고 싶지는 않은 보통 사람들의 이기, 암묵적인 희망, 그래서 말 안해도 알만한 소심한 비겁인 것이다.

맷은 아내 리사를 보았을 때 ‘우리는 서로에게서 우리를 파멸시킬 가능성을 보았고 우리 각자의 7/11에 이끌렸는지 모른다’는 기억을 통해 7/11이 자본주의를 살아가는 물질적 ‘욕망의 습관’이라는 꽤 효율적, 경제적 암시를 한다.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위험성을 내포한 무의식적인 두려움이었는지 깨닫는다. 숫자로 표식화된 7/11의 다층적 의미는 주로 도표와 그래프, 통계수치라는 데이터를 가지고 기사를 써온 맷에게 가장 분명한 생활의 단서이자 인생의 증표를 다양하게 프리젠테이션한다고 생각되었다. 맷이 보여주는 프리젠테이션은 정상적인 사람들은 내일을 위해 잠자리에 들었을 시간, 될 대로 되란 심정의 사람들이 슬리퍼를 질질 끌고 자신이 가진 절망의 패에 불을 붙이고자 찾게 되는 심야의 장소 세븐 일레븐이 내포한 ‘위험경고장’이거나 ‘안전독촉장’의 사회적 의미를 함의하고 있었다. 그건 무심코 들르는 편의점에서의 총기살인 사건만큼이나 내 피부에 와 닿는 공포는 아니지만 문제는 우린 바로 그렇게 무의식적으로 편의점에 들른다는 ‘습관성’과 ‘불규칙성’에 있다. 이 철저한 자본주의 도시에서 바쁘게 살다보면 꼭 한번은 세븐 일레븐에 들어갈 일이 있듯이 만의 하나 운 없게도 총기살인의 희생양이 될 수 있다는 365일 영업중인 광고문구인 것이다. 작가는 9/11이 주는 기호적 상징과 도처에 퍼져있는 세븐 일레븐이 제공하는 일상적 의미의 공통점을 무의식적인 공포, 무방비 상태에서의 죽음, 무자비한 파산과 연결지으며 미국에서 미국을 견디는 방법을 차분히 보고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맷은 이 ‘7/11’이라는 공포의 기억을 어떻게 빠져나왔을까. 과연 빠져 나오긴 했을까. 이 작품의 제목이 ‘고군분투 생활기’임을 감안하면 잘 헤쳐 나왔다는 생각도 들지만 정작 맷의 고군분투하는 생활은 바야흐로 이제부터 시작일 듯 한데 그렇담 아직 공포의 터널은 진행중이라는 말일까. 그런데 우리네 인생은 무엇이든 처음 시작이 두려워 그렇지 막상 시작하고 나면 또 그렇게 두려울 것도 없이 적응되고 마는 것이 인생의 오래된 관성법칙 아니던가. 가만 보면 두려움을 극복하는 방법은 두려움을 알고 처절하게 느껴보았기 때문에 다음을 시작할 수 있는 무던함에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소설 초미에 ‘우리는 두려워하는 것만을 두려워할 뿐이라는 말을 어디선가 읽은 적이 있다’는 맷의 의미심장한 회상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한다. 우리는 두렵다고 생각되는 것, 내게 두려움을 주었던 그 기억이 두려운 것이지 두려움의 실체가 두려운 존재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두려움의 실체는 바로 겪어내는 순간부터 두려움이 사라지는 것, 그래서 사실 두려움 속에 던져진다는 것은 그다지 두려운 일이 아니라는 것, 그것이 두려움의 본질임을 작가는 말하고 싶었던 듯하다. 맷의 이야기는 사실 두려움의 실체를 겪어내기 이전의 불안과 공포에 초점을 둔 이야기였기에 책을 덮어 낸 지금 맷이나 우리나 그다지 두렵지 않다는 것, 그것 또한 이 소설이 이룩한 성취가 아닐까.

이 작품이 나름의 희망을 암시하는 건 바로 그 두려움이라는 소설적 서사가 겨냥하는 정확한 좌표지점에 있었다. 실은 망하고 나면 어떻게 될 것인지에 대한 두려움이 99이고 막상 망하고 난 후 겪어내는 그것은 두려움 그 후의 평화였다는 점에서 우리는 두려움의 본질과 맞장 뜰 기회를 마련한 것이다. 작가는 맷이 파산에의 두려움에 떨고 있는 일주일간의 상황과 심리상태를 지겹도록 시시각각 중계하면서 같은 고통에 동참한 독자들로 하여금 진한 인삼엑기스와도 같은 동질감과 함께 사후 평화를 유도한다. 불행도 (누구나에게 공평하게)내 일이니 당연 평화 역시 남의 것일 수 있을까, 하고 말이다. 그건 ‘망해도 견뎌볼 만하다’, ‘망하고 나니 더 자유롭다’, ‘망했기 때문에 행복하다’는 미국 언론인 출신 작가의 자기 실태보고서였기에 더더욱 리얼하고 애틋한 구석이 있었다. 그렇다고 행복해지기 위해 굳이 망하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냥 망해도 행복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사회적 지위의 추락, 경제적 파산등 표준적인 표현도 있으련만 나는 굳이 ‘망했다’고 짧게 말하고 굵게 적고 싶다. 처절하게 망해본 적 있는 사람들은 대체로 각설하고 ‘망했다’고 말한다. 수식하고 설명하는 건 기회의 문제인데 그건 그 다음의 일이기 때문에.

미국을 견디는 방법

결국, 이 소설은 해고당한 전직 신문기자가 맥시마의 밀린 할부금 3만 달러를 갚기 위해(주택 담보 대출로 차를 샀으므로 집을 잃지 않기 위해) 일주일 동안 동분서주하게 세븐 일레븐을 맴돌다 지치는 이야기였다. 어이없지만 미치도록 슬픈 사실이었다.(차종이 BMW만 되었어도...) 꼭 무리한 대출로 집을 구입해 꿈에 그리던 아파트의 소유주가 되었으나 이자에 못이겨 그 대출금을 갚기 위해 집을 팔아야 했던 내가 아는 이웃들의 이야기와도 같았다. 어떻게 마련한 생애 첫 집인가. 맷에게 그 집은 지난 몇 년 동안 부와 안정의 척도이자 상징이었던 집이었다. 집을 잃는다는 것은 허울좋은 중산층의 위세뿐인 그 허울을 벗어던지는 일이었고 그것은 곧 사회적 지위의 추락이자 개인적 자존심의 박탈이다. 불행은 꼭 한꺼번에 팩키지로 청구된다고 그와중에 아내는 왕년의 남자친구 척과 외도중이시다. 대출회사는 늘 그렇듯 이쪽에선 죽어도 연락이 되지 않고 사립학교는 더 이상 보낼 처지가 되지 않고 아내는 이층에서 컴퓨터만 끼고 살아간다. 이럴 때 등장하는 하필 대학시절 맛본 적 있는 마리화나의 유혹은 어쩐지 통속적이고 진부하단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투자정보를 시 형태로 제공하는 웹사이트, 남들이 시도한 적 없는 금융문학에 대한 열망으로 사업을 말아먹은 맷의 낭만성을 고려해보면 마리화나야 말로 막다른 절벽에서 마주친 일생 일대의 행운이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누구에게나 공감줄 수 있는 시구절로 주식시장의 등락을 말하고 투자소식을 전한다면 세상이 좀 따스해지는 거 아닐까 싶어서이다. 물론, 세상 따스하자고 내놓은 발상이 아님을 잘 알지만 도표와 그래프에 지친 그 옛날 문학청년이 시인의 감성으로 경제기사를 쓰겠다는 야무진 계획은 자신이 진단한 것처럼 실없는 오만으로 보이진 않았다. 맷은 나름의 비즈니스 모델로 ‘시인’의 ‘시적 감수성’을 차별화전략으로 내세웠지만 세상은 그러한 감수성을 인정하지 않고 ‘시인’의 경제적 전망만을 평가했을 뿐이었다. 자기 자신이 늘 분석해오던 많고 많았던 그 뻔한 경제기사처럼.

이에 반해 맷은 시를 통해 세계금융에 대한 분석과 그 체제하에 놓여있는 인간들에게 멋진 시를 쓰는 것으로 아쉬운 낭만을 대신했다. ‘세계금융의 위기는 우리 금융자체로부터 기인한 것이며 자본을 창출하고 투자하는데 별다른 규제가 없었던 우리 시스템 전체에 결함이 있는 것이니 그런 면에서 보자면 바로 우리들 인간성 자체까지 흠이 있다는 것’이라는 뼈아픈 깨달음을 시적자아를 빌어 토로한다. 어느 신문사, 어느 은행의 사장에게 말하고 싶었는지 모르지만 작가는 이 말이 하고 싶어 시인이 되기로 한 것은 아니었을까. 이런 세상에선 아무것도 우리가 소유하는 것은 없으며 우린 단지 그것들을 잠깐 빌려 쓰는 것(아버지와 아내마저도) 존재일 뿐이라는 맷의 고백은 그것이 경제기사가 아니라 비경제적 시였기로 흠칫했던 대목이었다. 이 책에선 시말고도 동화같은 순수성을 행복의 모티브로 삼아온 맷의 애틋한 유년기도 있었다. 의외로 나는 맷의 동화가 시작되고 완성되는 이야기에 눈물이 날만큼 뭉클했다. 맷은 하층 노동계급 신분으로서 목재소의 작업복을 자랑스럽게 여기던 아버지로부터 어린 시절 작은 레고 조각으로 만든 오두막집의 꿈을 키워온 아들이었다. 맷이 꿈꾼 통나무집은 결코 화려하지 않지만 가족들과 살면서 행복을 키우는 장소였을 터이다. 이 꿈은 자신의 아들에게도 이어져 닌넨도 위가 아닌 집 앞 뜰에 지어진 나무놀이집으로 자리매김한다. 그러나 인생은 아이러니하게도 아내와 바람난 럼버랜드의 왕자, 바로 아버지와 같은 직업을 가진 목재소 주인 척을 통해 그들의 꿈이 형상화된다. 척에게 아내와의 외도를 비난하고 싶었던 맷은 척이 싣고 온 나무들로 노망든 아버지와 두 아들, 그리고 자신마저 합세해 ‘2번 국경요새’를 완성하게 된다. 시작부터 전혀 그럴 의도가 없었지만 무언가를 완성하고 나면 그 과정은 정말 소설같지 않은가. 작가는 묻는다. 맷은 왜 실직을 당하기 전까지 마음만 있었지 아이들에게 나무놀이집을 지어주지 못했던 것일까. 왜 하필 다 망해서 경찰서로 끌려가기 직전에 나무놀이집을 완성할 수 밖에 없었을까. 맷의 아버진 치매가 걸려도 자신이 행복을 위해 묵묵히 해온 그 작업의 과정만큼은 잊지 않고 있었다. 아들을 잊고 손자를 잊고 자신마저 잊었지만 나무집을 만드는 법을 잊지 않은 아버지의 망치질은 이 작품이 울려주는 깊은 종소리는 아니었을까.

내가 이 작품에서 희미하게 엿본 미국의 희망이라는 건 바로 그들이 한나절 땀흘려 가꾼 나무놀이집이 아닐까 싶었다. 맷은 우연히(어쩌면 필연적으로) 다시 경험한 마리화나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몇 달간만 장사를 해서 밀린 대출금을 갚고 아이들을 사립학교에 보낼수 있을 정도만 되면 그만두리란 야무진 계획을 세운다. 세븐 일레븐에서 우연히 조우한 제이미와 마약파는 변호사 데이브의 꾀임에 넘어갔다고는 하지만 중요한 건 맷이 이미 마리화나의 위력을 알고 있다는 데 있었다. 하필 머리좋은 협잡꾼 데이브와 차종이 닛산 맥시마로 같다는 건 그들의 사회적 지위와 그에 따르는 도덕성, 경제적 능력이 결국 거기서 거기라는 암시로 느껴졌다. 맷은 위드랜드 마리화나 공화국, 시체들을 보관해 놓은 영화세트장 같은 수경재배실에 넋을 잃고 마리화나를 경제적으로 환산하기 시작한다. 이는 꼭 아내가 쇼핑강박증에 걸려 물건을 사재기하는 심리와 다를 게 없는 어리석은 탈출방안이었다. 맷은 기자시절 취재차 마약에 중독된 청소년들을 위한 봉사 프로그램을 발표하는 기자회견장에서 (병원관계자)리사를 처음 만나 지금까지 불법과 대치하는 중산층으로(그래야 불법을 비난할 수 있으니까) 살아왔다. 맷이 마약을 인정하는 일은 결국 자기 자신과 아내, 자신들로 태어난 아들까지 전 가족 모두를 부정하는 결과였다는 점에서 맷의 선택은 예정된 파국을 불러오는 비극의 단서라 생각할 만했다. 그런데 작가는 파국을 목전에 두고 그 마지막 시점에 나무집을 지었다. 오늘 지구가 멸망해도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심정으로. 소설 속 아버지와 아들, 손자, 그리고 적수인 아내의 남자, 거기다 자신을 잡으러 온 경찰까지 합세해 비록 내일이면 팔리고 말, 게임이나 할 아이들이 절대 놀아보지 않을 집 앞에다가 말이다. 지어놓고 보니 누가 뭐래도 아버지와 아들과 손자의 집인 것은 분명해보였다. 그래서 마리화나와 맞바꾼 통나무집은 다행히도 계속해서 미국의 영원한 동화같은 꿈으로 남을 수 있었다. 울어야 할까. 어쩔 수 없이 웃어드려야 할 그러다보면 서로 마주하고 웃을 수도 있지 싶은, 이 책은 시인이 쓴 금융문학이 맞기는 했던 것 아닐지.

행복을 말하는 숫자

아버지를 그리는 아들의, 아들을 위한 소설이었다. 소설에서 자동차 세일즈를 하던 아내 리사의 아버지, 두 번째 가정으로서 그녀가 열두살 때 심장마비로 죽은 부성의 부재를 노망든 자신의 아버지가 멋지게 부활시키며 반전의 홈런을 선사했다. 맷은 망하고 나서야 중산층 시절 원망과 분노와 가식적인 평화로 행복한 척 해왔던 자신의 부부관계를 반성하고 다시 아내를 바라본다. 이때 추락과 동시에 동반상승되던 행복주의 가치는 이미 미국의 것만은 아니었다. 차 없이 버스로 출근했지만 버스를 타지 않았다면 버스 안에서 한 쪽 장갑을 잃어버린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아버지의 미소는 절대 만날 수 없었을 것이다. 맷은 위선적인 중산층 쓰레기의 손에 남들을 자기기준으로만 평가하고 비웃던 같잖은 얼굴을 묻고 소리죽여 울었다. 턱없이 낮은 연봉의 회사에 재취직해 차근차근 재기의 기회를 준비한다. 비록 나무놀이집은 내 집 앞의 뜰이 아니라 삼층 아파트 베란다에서 내다 보이는 건너편 잔디위에 놓여 있지만 맷은 미국인이므로 한 번 더 해볼 자격이 있지 않은가. 파산하면서 부채에서 벗어나자 행복의 가능성을 엿보게 된 맷의 마지막은 많이도 쓸쓸했다. 자신을 위한 위로처럼 보이는 독백은 마음을 무겁게 한다. 맷이 다시 재기하는데 얼마나 걸릴까. 1년? 3년? 아니면, 5년...?

돈이 있어 보았다. 집도 있어 보았다. 그때 행복했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지금 생각해보면 꽤 여유로운 편에 속했던 그 시절엔 왜 그렇게 남의 집, 남의 차, 남의 옷들만 보였는지 모르겠다. 정원이 많은 유치원은 위생상 문제가 있을 것 같아 좀 더 멀어도 소수정예의 값비싼 유치원에 아이를 보내었다. 우리 생활 패턴상 중형차가 필요없었지만 아파트 주차장에 세워진 이웃들의 차에 빠지지 않으려 무슨 경쟁하듯 차종을 바꾸었다. 같은 라인에 사는 아줌마들은 이사를 오면 약속이나 한듯 제일먼저 전세이냐 자가이냐를 스스럼없이 물어보았다. 간절히 여행을 원한 것도 아니면서 아이 친구가 제주도를 다녀왔다고 하니 우린 그럼 일본에 다녀오자며 명절연휴를 꼬박 일본에서 지내고 돌아왔다. 입학하고 아이 첫 생일이라 이벤트 회사에 맡기자는 학부모들 틈에 끼어 연회장을 빌려 무슨 칠순잔치 하듯 생일축하 쇼를 연출했다. 별 고민없이 매사가 그런 식이었고 그것에 특별히 문제를 느끼지 못하고 살아왔다. 돌이켜보면 시사매거진에나 나올 법한 일을 눈하나 깜짝 않고 태연하게 치루어 내었다. 이 책의 맷처럼 모든 것이 그렇게 문제없이 잘나가고 있을 때(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생각할 때) 망상적인 자기유혹에 어이없게도 빠지게 되는 것이 아닐까. 그건 시로 경제기사를 쓰겠다는 자기 성공에 대한 고집같은, 여지껏 살면서 운빨은 괜찮은 것 같은 자기 우월, 예를 들면 어떤 막연한 장소에 근사한 술집을 차려놓고 갑자기 자기인생의 낭만을 찾아보겠다는 그것이야 말로 자신의 삶을 바꾸어줄 묘안으로 여겨지는. 나 역시 그 유혹에 빠져들어 맷처럼 호되게 실패를 맛보았고 파산직전에 또 그 이상의 유혹에 빠져들 뻔 했지만 운좋게도 아직 마리화나같이 치명적인 한방은 만나지 못한 실정이다. 매일 저녁 한강변 아파트 탑층에서 한강다리 너머 타오르던 노을을 만끽하다 갑자기 줄어든 모든 환경은 꼭 한강에서 투신하는 느낌의 인생의 추락이었달까. 돈이 없고 나니 비로소 나는 돈이 있던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나. 다시 재기할 수 있을까.

나처럼 경제적으로 큰 실패를 맛본 사람이라면 이 소설은 어느 정도 답이 되줄 수 있을 것 같다. 혹 답은 못되어도 하루 이틀 유익한 벗은 되 줄 것 같다. 장갑을 잃어버린 아이에게도 호주머니가 있듯 찾아보면 불행속에도 행복은 있는 거라고. 이 인분의 아이스크림으로 각자 배를 채울 순 없겠지만 한 개의 아이스크림이라도 나누어 먹을 수 있는 그 행복이야말로 더 달콤하지 않겠느냐고. 행복은 그렇게 모두 갖추어지고 모두 완성되어야 느껴지는 것이 아니고 부족해도 서로가 갖추어 가며 완성되는 그 모습을 보는 것이 더 큰 기쁨이라고. 혹시 당신도 더 큰 집 더 큰 가구를 좇아 오늘도 더 큰 거짓으로 행복을 연출하고 돌아왔다면 빨리 그 거짓을 내려놓으라고. 지금부터라도 영혼이 깃들 수 있는 집을 찾아 첫걸음을 내 딛으라고.

그래, 할 수 없이 7/11이 9/11의 다른 버전이 아니고 행복을 편리하게 구입하는 행복편의점이 되도록 마음을 바꾸어야겠다. 일곱 시에 일어나 열한시가 될 때까지 하루 종일 행복하라는 숫자로 내 맘대로 변환해야겠다. 원칙도 기준도 없지만 이 책을 읽었기에 떠오른 생각, 혹시 당신도 나와 같은 생각이라면 좋겠다. 일본에 쓰나미가 밀려오고 미국에 테러가 닥쳐와도 우리 행복의 숫자만큼은 이견이 없었음 좋겠다. 아쉽지만 그것만이 내가 이 책을 읽었다 하며 당신에게 건낼 수 있는 최선인듯 하다. 그리고 내 자신에게도 다짐할 수 있는 기회인 듯 하다. 세븐 일레븐, 시인이든 기자이든 한번 망해본 동병상련의 마음이야 잠시 제쳐두고서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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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톱이 자라날 때 문학동네 청소년 4
방미진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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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이 성장을

나는 새끼손가락이 유난히 짧다. 남들은 네 번째 손가락 둘째 마디까지의 길이지만 내 경우 꼭 반 마디가 모자란다. 살면서 새끼손가락이 짧아서 불편을 겪었던 기억은 없다. 피아노를 전공한 것도 아니고 손을 사용하는 직업을 가진 적도 없으니 기껏해야 약속이나 귀지를 팔 때 등의 용도로 밖에 새끼손가락을 애용해 본 적도 없는 듯 하다. 하지만 성인이 된 후엔 손톱을 기르게 되면서 길이를 극복해볼 요량으로 다른 손톱보다 더 길게 꾸미고 다녔다. 손가락이 짧고 작으니 손톱의 크기 또한 세로로 얇아 제 손톱의 길이만큼 일대일 비율로 손톱을 길러놓고 보면 새끼손가락은 영낙없는 무기로도 보였다. 그런데 어느 날 한손으로 아이를 안고 남은 손으로 마트 쇼핑비닐을 들다가 그만 새끼손가락의 그 길었던 손톱이 반 이상 뜨고 말았다. 생살이 아니고 단단한 손톱이라 아픔의 고통도 단단하리라 생각한건 큰 오산이었다. 그 후 왼쪽 새끼손가락 손톱은 한 번도 제 모양으로 자라난 적이 없었고 손톱의 색깔도 건강함을 잃었다. 애초부터 미성숙했던 취약부위가 내 신체의 위험지구가 되고나니 그 후로도 새끼손톱은 지금까지 여러 번 툭하면 같은 방법으로 손톱이 뜨게 되는 불상사를 겪고 있다. 손톱은 한번 다치면 다친 방향과 다친 흉터 그대로 회복되지 않은 채로 자라난다. 영구부패된 나무의 뿌리처럼 성장을 삐딱하게 유도한다. 그렇다고 시원하게 뽑아 버리고 다시 새 출발을 할 수도 없고 죽을 때까지 내 새끼손톱은 변형된 형태로 자라나고 깍이고 길러질 걸 생각하니 새삼 그 고집이 대단하다는 생각마저 든다. 아픔이 무디어져 끝내 무감각하게 될 뿐이지 손톱의 상흔은 계속하여 자라나는 것이었다. 이 책을 덮고 제일먼저 완치가 불가능해 영구 불안해진 내 손톱이 떠올랐다. 그리고 손톱역시 얼마나 아픔이 컸을까 내가 느끼지 못하는 지금은 다 잊어버린 상처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을까 생각하니 손톱도 엄연한 생명체였다는 깨우침이 절로 든다. 손톱은 지금 이순간도 상처위에서 자라고 있을 터인데 나는 그를 한 번도 대견하다 생각해 본적이 없다. 사람에게 있어 어떤 ‘상처’는 중단되거나 망각되지 않고 계속하여 성장하는 것은 아닐까.


            ‘상처’도 성장하면 성숙이 되는 걸까. 만약, ‘불안’이 상처라면 불안도 ‘성장’할 수 있을까?


이 책은 자의식이 형성되는 청소년기, 이들이 마주한 ‘불안’이라는 장애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 질문하는 소설이다. 자의식은 자기 내면을 향한 냉철한 자기인식이며 이는 청소년기의 발달과업이기도 하다. 그런데 알다시피, 청소년기는 生을 통털어 그 어느 시기보다 이성적, 감성적으로 자기중심적이다. 이러한 청소년의 자아중심성(Egocentrism)을 연구했던 발달심리학자 엘킨트(Elkind, 1978)는 청소년기의 자의식을 ‘나는 특별한 존재이며 누구보다 독특하고 우주의 중심’이라는 생각이라 말한 바 있다. 자신만큼 남들도 자신에게 관심을 쏟고 있다 생각하며 상대의 관점과 자신의 관점이 상이한 것을 인지하지 못한다. 우리도 그 시기를 거쳐 왔지만 이러한 자기중심적 사고는 잘못이나 실수가 아니라 자의식이 형성되는 과정의 하나일 뿐이었다. 대부분 자아중심성에서 비롯된 인지적 결함이나 과잉된 자의식을 통과의례처럼 겪은 후에야 자아중심성을 벗어나게 된다. 물론 성인이 되어서도 자기과신을 지속시키거나 지나친 타인의식이 삶의 방식이 되는 경우도 있다. 상처를 겪었다고 시간이 흘렀다고 나이가 들었다고 무조건 성숙한 자의식을 가지게 되는 것은 아닌 것이다. 학창시절 배운 지식을 떠올려보면 그것은 청소년기의 필연적 당면문제라 할 수 있는 ‘불안’을 어떻게 극복하였는가의 차이가 아닐까.

실제로 청소년의 뇌는 급작스런 발달로 인해 그 크기가 성인이상으로 커졌다가 다시 자체 공간부족으로 주름이 잡히는 과정을 겪게 되는데 전문가들은 이 과정이 곧 청소년기의 ‘불안‘을 상징한다고 주장한다. 뇌가 각자의 두개골의 크기에 맞게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기까지 청소년은 정서적으로 불안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상상으로도 점점 부풀어진 뇌가 일시에 줄어들어 자기 자리를 찾아가는 그림을 떠올리니 그 과정은 우리 일생에서 얼마나 중요했을까, 싶어진다. 애초부터 자리를 잘 잡아야 일생 편안한 운행이 되는 것 아닌가. 뇌 가운데서도 특히 충동적 행동을 억제한다고 알려진 ’전두엽‘의 부위는 가장 미성숙하다고 하니 청소년이 ‘불안’하지 않기를 바라는 우리야말로 얼마나 비과학적인 사람들인가 싶다. 우리는 우리 아이들에게 전두엽이 되어준 적이 있었을까. 그렇게 본다면 청소년은 ‘불안’을 극복해야 하는 것이 아니고 ‘불안’이 더욱 성장해야 하는 존재들은 아닐까. ‘불안의 성장’이야말로 자의식의 성숙, 청소년기의 탈출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이 소설은 바로 미성숙한 청소년의 ‘불안’이 성장하는 과정을 놀랍게도 침착하게 그리고 있다. 다섯 편에 등장하는 주인공은 모두 가정과 학교에서 생명을 위협할 정도의 ‘불안’을 키우고 있었다. 무엇보다 작가가 이 ‘불안’을 구체적으로 형상화하는 세밀한 전개도는 청소년 문학으로서 이 작품이 가지는 최대치의 경쟁력이라 할 것이다. 작가는 이미 전작에서 호러를 적극 수용한 심리 스릴러로 청소년 소설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했다는 평가를 받았기에 이번 소설집은 새롭다기 보다는 한층 편안하게 느껴졌다. 소름이 오싹 끼치는 불안을 펼쳤지만 이야기의 보따리는 더없이 안정감있어 보였다. 그야말로 한결같이 탄탄한 ‘불안’이었다. 그들은 집과 학교, 화장실 혹은 벽이라는 차단된 공간에서 ‘불안’해 했으며, 친구나 형제와의 불편한 관계에 ‘불안’을 느끼는 존재였다. 갑작스레 당한 사고와 달라진 가정환경에 극심한 ‘불안’을 느끼고 무엇보다 자신 스스로 알지 못했던 자신을 발견하는 것에 두려운 ‘불안’을 감추지 못했다. 이러한 불안의 종류와 나타나는 양상을 더욱 극대화하는 장치로 작가는 과감하게 불안한 대상의 변형(transform)을 연출하였고 이 판타지 기법은 본래 서사의 장르를 이탈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고급스럽게 스며들었다. 영화로 치자면 시나리오가 탄탄해 구성상 흠잡을 데가 없었고 연출은 심리(mental)와 육체(phisical)를 오가는 호러테크닉에 강약조절이 능숙했다고나 할까. 아마 어떤 기자는 멘탈과 피지컬이 잘 조화되어 보기 드문 문제작이 탄생했다고 호평을 할지도 모르겠다. 나 역시 책을 덮고 심상치 않은 끄덕임에 청소년 소설의 독자는 청소년층에 국한되었다 생각한 편견에 슬몃 고개가 숙여졌다. 청소년관람가 영화라고 성인이 감동받지 말라는 법이 없듯 소설도 청소년 문학이라는 구분은 그저 관람등급에 불과하다는 생각, 그것은 공감과 감동의 층이 더 넓고 깊은 장르라는 뜻에 다름 아님을 새삼 깨우쳤다.

...하얀 벽에 더 하얀 거울을 - <하얀 벽>

첫 번째 이야기는 사라져도 남아있는 하얀 ‘불안’ 이었다. ‘나’는 수시로 거울을 보는 공주병환자에 가까웠다. 외모가 우월하므로 자신만이 주목을 받아야 하고 동경과 부러움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나’는 누군가 ‘나’ 이외에 성적이나 특기, 재력, 남자친구등의 이유로 관심을 받는 것이 가장 두려워 마음으로 친구를 경계하며 늘 불안해하는 주인공이었다. 이러한 삐뚤어진 독점력은 엘킨트 연구의 청소년기 자아중심성을 대변하는 ‘개인적 우화(personal fable)’의 일환이라 볼 수 있다. 민희(나)는 친구들과는 달리 자신은 특별한 존재이며 자신이 느끼는 감정과 경험은 친구들이 느끼는 그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믿어 ‘개인적 우화’에 빠져드는 주인공이었다. 자신감이나 위로의 수준이 아닌 ‘개인적 우화’가 절정에 달해 급기야 자신을 중심으로 친구들은 자신을 돋보이게 해주면서 배경처럼 존재하는 병풍이길 바라게 된다. 이 작품의 제목인 ‘하얀 벽’은 어쩌면 병풍역할을 해주었으면 하는 친구들을 감금한 민희의 내부 옹벽은 아니었을까.

불안의 토양위에 자라난 ‘하얀 벽’은 민희의 이유있는 환상의 실체가 된다. 벽속에 안 보이는 누군가가 자신을 훑어보고 소리를 내며 끝내 밀가루 반죽처럼 물컹대며 흘러내린다. 배경처럼 존재하지 않고 주인공이 되어 자신을 공격하는 것이다. 이목구비가 예쁘진 않지만 볼수록 끌리는 기주, 자신보다 월등히 못났지만 주근깨가 매력적인 희진, 서서히 장난같은 시비를 걸어오는 영주, 모두가 자신에게 집중되어야 할 관심을 빼앗아 가는 경쟁자였기에 그들은 감금된 벽에서도 민희를 친구로 삼는다. 현실에선 그들을 무시하며 우쭐해진 기분을 즐길 수 있었지만 비현실에선 하얀 그들에게 지배당하며 끝내 불안이라는 벽을 뚫지 못하는 민희. 이렇듯 불안한 민희에게 작가는 공포를 선물로 선사하는 아량을 베풀었다. 바로 담임이 그 하얀 벽에 거울을 달다 손을 크게 다치게 된 것. 담임은 민희의 벽에 상처를 주었기로 벌을 받은 것일까. 아니면 민희가 자신을 올바로 볼 수 있는 거울을 걸어주는데 실패 한 것일까. 거울사건은 이 작품이 환상의 파국으로 가는 도화선으로 느껴졌다. 못자국에 묻은 빨간 피를 하얀 벽이 빨아들이는 장면은 사라짐이 곧 존재의 극명한 이유가 되는 공포의 미장센이었다.

거울사고 이후 민희가 외면했던 친구 기주는 사라지고 자신을 비방하는 의문의 편지가 날아들면서 민희의 공포는 극에 달한다. 거울의 추락과 기주의 실종과 편지의 등장은 동시에 이루어졌기에 더욱 의미심장했고 작가는 호러장르의 입체적 구성이 주특기인 것으로 보였다.  거울을 현재 상태의 자의식이라 보았을 때 제대로 자리잡지 못한 자의식은 친구의 실종이라는 무의식적 결과(비현실)와 친구의 비난이라는 의식적 결과(현실)로 입체적인 혼란을 야기했다는 점이 흥미로왔다. 마음으로 질투하고 시기한 친구는 사라져서 지켜보고 드러내놓고 무시한 친구는 사라지지 않고 어딘가에서 지켜보았다. 둘 다 민희의 불안을 키워준 점에서 공평했고 민희의 관점을 확장시켰다는 점에서 정당했다. ‘벽에 대고 말하는 것 같다’고 상처를 준 친구는 정말로 ‘벽’이 되어 자신을 증명했고 민희는 그토록 불안한 하얀 ‘벽’에 자신을 비춘 후에 비로소 ‘벽’이 말하는 ‘벽’의 이야기를 들어보고자 마음을 열게 된다. 벽이 말하는 이야기는 벽이 느끼는 감정이자 벽이 경험한 위험일 것이다. 그것은 불안이 성장해 마주하게 된 상대적 관점의 시작, 하얀 벽에 그려질 나와 다르지 않게 독특한 벽만의 벽화가 아닐까. 민희의 우화가 부디 불안을 통해 하얗게 성장한 후 자신만의 당당한 벽화로 탄생되었기를. 그리하여 그 하얀 벽위에 다시 더 하얀 자신만의 거울을 걸 수 있기를. 그 거울속에 피어나는 화사한 꽃송이와 마주하기를.

...내 영혼의 부활절 - <난 네가 되고>

이 작품은 자신이 존재하기 이전부터 늘 함께 존재했던 쌍둥이 자매의 치명적인 상호불안을 말하는 소설이다. 이들 쌍둥이를 만나게 한 것은 이들의 탄생이었지만 불행히도 이들을 갈라 놓은 것은 죽음이었다. 작가는 다양한 형제구성의 배열중 쌍둥이라는 조건이 한 청소년의 자의식에 미치는 영향을 사정없이 파고든다. 주인공은 불의의 사고로 먼저 죽은 언니로 인해 남겨진 나머지 동생이었고 시종일관 동생의 입장에서 언니는 가해자로 자신은 피해자로 서술되었다. 이 작품을 읽으면서 내내 대학시절 쌍둥이 동생이었던 내 단짝친구 한명을 떠올리기도 했다. 그녀는 쌍둥이 언니 컴플렉스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하던 친구였다. 맞벌이 부모님 때문에 태어나자 마자 지방에 계신 할머니손에서 자란 그녀는 모든 면에서 우월한 언니를 우상으로 여기며 일상에서도 언니의 의견을 기준삼아 행동하는 친구였다. 대화의 시작은 늘상 ‘우리 언니가’로 시작했고 의사 결정도 ‘우리 언니에게’로 귀결되던 그녀에게 있어 언니는 어떤 존재였을까. 실제로 우리들이 그녀의 집을 방문했을 때 확인한 그녀의 언니는 사실 그녀보다 미모면에선 못하다는 생각을 했다. 분명 같은 이목구비였지만 여성적인 매력은 내 친구가 더 많아 보였고 학벌로 보아도 그녀의 언니는 그녀보다 한 단계 낮은 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답은 부모님에 있었다. 그녀의 어머니는 언니를 장남삼아 아버지 대신의 역할을 부여했고 아무래도 자신의 손으로 기른 정때문인지 자기방식으로 교육하는데 수월했던 것이다. 외모적으로도 중성적인 캐릭터의 언니는 외향적 성격에 늘 자신감넘치는 학교, 사회생활을 했고 의사와 결혼해 안정적인 가정환경을 꾸리게 되었다. 하지만 언니없이는 독립적인 생활이 불가능했던 친구는 결혼 후에도 만성우울증에 시달리며 지금은 그 불똥이 어머니에게로 튀어 어머니와 거의 단절된 상태이다. 쌍둥이는 흔히들 우애가 더 깊어 갈등이 덜할 것 같지만 곁에서 지켜본 바로는 어느 형제보다 경쟁하고 상처가 많아 불안한 자의식을 지니게 될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이다. 이들 쌍둥이의 청소년기는 바로 자신이 쌍둥이의 반쪽이 아니라 독립적인 인격체라는 것을 인식해야하는 고통스런 시기가 아닐까. 작가는 남겨진 동생을 통해 언니라는 쌍둥이로부터 분리되는 과정을 섬뜩하게 그려내고 있었다. ‘육체의 쌍둥이’는 사라져도 ‘영혼의 샴쌍둥이’는 더욱 살아나던 자의식의 혼란상태를 적나라하게 투시하고 있었다.

머리가 좋았던 완벽주의자 주영언니, 늘 내 약점만 들추고 이용하던 주영언니, 언니가 죽고 내가 살아 지영이가 아닌 주영이로 살고 싶다는 욕망이 실현된 그날, 지영이는 주영이가 되는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건 환상이 꿈이 되고 꿈이 이루어지는 새로운 인생의 서막이었다. 하지만 주영이처럼 행세하고 주영이로 산다해서 지영이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건 자신이 주영이가 아닌 지영이임을 더 분명하게 자각하는 깨우침의 연극일 뿐이었다. 언니 주영이로 사는 기회는 곧 자신인 지영이가 죽어지는 기회였다는 걸 그녀는 왜 몰랐을까. 그건 주영이도 아니고 지영이도 아닌 아무것도 아닌 자기인정의 부채이자 자기부정의 실체였다. 자신이 자신으로 살아간다는 것에 자신감을 갖기란 이토록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서 자신이 비로소 자기자신이 된다는 것은 그만큼 고통스런 감동의 순간인 것이다. 관속으로 사라지는 지영이의 영혼을 보면서 혹 누구처럼 되고 싶었던 내 어린 자의식도 함께 날려보낼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훅, 하고 불면 누구처럼이고 싶은 욕심은 사라지고 원래 나이어도 나인채로 반가운 내 영혼의 실체와 마주할 수 있다면. 지영이도 먼 훗날 영혼의 샴쌍둥이와 헤어진 그때 그날이 자신이라는 영혼을 되찾은 날이었음을 꼭 깨달아 주기를.

...곰팡이가 꽃이 되는 방법 - <붉은 곰팡이> 

이 작품을 덮으면서 나는 기성작가의 소설 하성란의 <곰팡이 꽃, 1999>과 김애란의 <벌레들, 2010>을 반사적으로 떠올렸다. 서사전반에 걸친 분위기가 이 두 작품을 완벽히도 믹스한 느낌이 들었달까. 작가는 갑자기 닥친 가난이 구체적 공포로 다가오는 끔찍한 현장을 곰팡이가 피어오르는 지하방으로 촘촘하게 렌더링했다. 청소년기의 가난은 시작의 절망이자 미래의 상실이다. 처음엔 그다지 인식하지 못했던 곰팡이는 지하방에서 가난을 견뎌낼수록 정비례의 증가를 보이며 스멀스멀 벽면에 피어난다. 곰팡이가 번식하는 지하방의 화장실은 ‘공중에 뚫린 굴처럼 시커먼 입을 벌리고 먹이를 삼킬듯한 동물의 입모양’ 같기도 하고 동시에 악취나는 ‘찌꺼기를 죄다 뱉어내는 항문’같기도 하다. 이때 지하방에 그려지던 곰팡이 벽화는 죽어가는 것들 속에서도 잘도 살아나 급기야 동생과 엄마를 뒤덮어 육체적, 정신적 바이러스를 유포하고 그것에 감염된 가족을 바라보는 나는 불안을 억누르고 애써 객관성을 찾으려 한다. 가족을 감싸안는 화자의 어른스러운 시선과 곰팡이 속에서도 살아가는 자신을 뚜렷하게 자각하던 의식적 사유들이 무척 인상깊었다. 특히, 곰팡이는 ‘누군가의 피를 빨아들여 피어나는 죽음의 꽃’이므로 ‘내 몸에 핀 커다랗고 붉은 곰팡이’로부터 역설적인 삶의 강렬한 의지를 발견하는 소설의 마지막은 서서히 차오르던 묵직한 감동이었다. 곰팡이라는 불안을 통해 꽃이라는 성장을 이루어낸 주인공, 공포를 만들어 낸 건 곰팡이를 바라보는 우리일뿐 곰팡이가 아니라는 작가의 격려는 청소년이 아닌 내게도 큰 위로가 되었고 이 책에서 얻은 가장 큰 교훈이기도 했다.

개인적으로 내가 좋아하는 두 명의 작가(하성란, 김애란)의 서사에서 자주 느끼던 정밀묘사의 기법, 생명을 위협하는 우리 일상, 절망이나 죽음에서 피어나는 삶의 은유들을 소름끼치게 재확인한 것은 독자로서 큰 수확이기도 했다. 이 작품에서 번져가던 곰팡이는 김애란의 <벌레들>에서 꼭 서울의 한 재개발지대에 이사 온 신혼부부가 그토록 몸서리치던 각종 벌레들과 같았다. 아이를 낳아야 하는 여자는 외부로부터 밀려들어오는 벌레들 속에서 지속적인 불안을 감지하고 고작 벌레라는 생명체에 짓눌린 채 평화를 위협당한다.

“내가 서 있는 자리, 바로 그 근처에서였다. 벌레의 이동은 나무에서 시작되고 있었다. 나무는 자궁이 적출된 여자처럼 헤프게 다리를 벌리고 있었다. 쿵쾅거리는 가슴을 안고, 허리를 숙인 채 구멍 속에 손전등을 비춰봤다. 밑둥이 뻥 뚫려 있었고, 이상하게 속이 텅 비어 있었다. 깊숙한 어둠 속에서 끊임없이 벌레가 기어 나오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것도 여러 종류의, 수천 마리도 더 돼 보이는 벌레들이. 믿기지 않는 광경이었다. 나는 전등을 손에 쥔 채 벌벌 떨었다.” <벌레들 中>

“녹차의 티백 찌꺼기와 두터운 오렌지 껍질, 다이어트 코카콜라. 모두 다 저열량의 음식들뿐이다. 돌돌 말린 비닐 팩을 들어낸다. 미모사 향의 섬유 유연제다. 미끌미끌하게 썩은 밥풀들이 달라붙어 있지만 시큼한 악취 가운데서도 비닐 팩에서는 상큼한 향기가 난다. 남자가 복도에서 맡았던 그 냄새다. 쓰레기 봉투 맨 밑바닥에 손도 대지 않은 생크림 케이크가 문드러져 있다. 하얀 우윳빛 생크림이 군데군데 벗겨진 사이로 포도 시럽이 잔뜩 발린 삼단 케이크가 드러나 있다. 그 위에 하늘하늘하게 곰팡이꽃이 피어 있다.” <곰팡이꽃 中>

주인공의 몸에서 피어난 붉은 곰팡이는 쓰레기 봉투를 뒤지면서 살아가는 한 남자의 일상을 통해 ‘진실‘이란 생크림 케잌에 피어난 ’곰팡이꽃‘처럼 버려지고 냄새나는 곳에서 더 명확히 발견되는 것이라 말하는 하성란의 <곰팡이꽃>을 연상시킨다. 방미진 작가가 붉은 곰팡이에서 삶의 질긴 희망을 찾고자 했다면 하성란 작가는 푸른 곰팡이에서 삶의 낯선 진실을 발견하지 않았을까. 긴장된 표현과 내밀한 주제면에서 미스테리 수사의 놀라운 완성도를 보여준 작가의 성장배경이 미스테리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환영과 악몽을 자유자재로 컨트롤하는 작가처럼 이 작품의 청소년도 훗날 불안처럼 자라나던 곰팡이를 끝내 꽃으로 역전시키는 반전의 주인공이 되어주길. 그리하여 소설속 곰팡이 신화를 현실에서 완성시켜 주시길.

...퇴화도 성장의 증거 - <손톱이 자라날 때>

표제작이 된 이 작품은 엘킨트의 청소년기 자아중심성의 또 다른 특징, ‘상상속의 청중(imaginary audience)’에 지배되는 심리적 불안을 그려낸 소설이다. ‘상상의 청중’이란 자신이 남들보다 유별나게 관심을 받고 있다는 긍정적인 자의식과 실수를 해도 유독 자신에게만 집중된다고 느끼는 부정적인 자의식에 의해 탄생된 타자들이다. 청소년은 이 상상의 청중 앞에서 자신이 주인공이 되어 노래하고 연기하고 자신을 자랑하는 성향이 있다고 한다. 이 작품의 주인공 역시 친구가 자신을 두려워 한다는 사실에 우쭐함을 느끼고 상상속의 청중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학교생활을 하고 있다. 자신만의 특기로 남들보다 눈에 띄고 싶어하는 욕망을 가진 이 시기에 아이들은 채워지지 않는 욕망을 자신보다 약하고 못난 아이를 괴롭히고 무시하는 것으로 대체시킨다. 주인공은 외모적으로도 자신이 없고 집안이 좋지도 않으며 부모님이 학교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쪽도 아니기에 자신을 드러낼만한 무기가 없었다. 이때 우연히 발견한 자신의 손톱이 주인공의 유일한 무기가 되며 손톱을 기르는 것이 곧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전략이 되버린 것이다.

‘상상속의 청중’에 대한 방어기제로 손톱이 부각된 것이 이 작품의 차별화된 매력이었다. ‘상상속의 청중’에 이미 압도된 주인공은 곧 자아도취에 빠져들며 자신의 매력인 손톱을 맹신한다. 길러 나온 손톱으로 친구를 위협하고 계속하여 손톱에 상처받을 희생양을 물색한다. 멋진 손톱이라는 차별화된 능력은 폭력도 불사하며 급기야 파멸을 유도하는 근사한 마법의 판타지가 된다. 이제 제살과 같아진 손톱이 불편하고 아파와도 제 살을 도려낼순 없듯 누구라도 할퀴지 않고서는 손톱을 견딜 수 없게 된 것이다. 작가가 파고들던 이 손톱의 파멸여행은 예민한 손톱의 신경만큼이나 끈질기게 우리 신경을 자극하며 주인공의 고통에 동참하도록 하였다. 어쩌면 ‘모두에게 막처럼 들러붙어 있는 답답한 공기를 시원하게 긁어줄 강한 자극’을 나도 모르게 더 원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가려움이라는 고통을 면피하게 위해 결국 피부를 긁어 피가 나는 고통을 택하게 되는 피부병 환자의 환부처럼 그 마지막은 쳐다보기 힘들 정도로 처참했다.

파리를 잡는 개구리처럼 혀가 쭉 뻗어 나온 친구, 눈이 다섯 개나 달린 친구, 목에 붙은 혹이 아이의 머리처럼 고개든 친구처럼 신체의 특정부위가 지나치게 발달하는 대신 다른 부분이 퇴화라도 된 듯 비정상적인 발달은 잘못 뻗어나가는 자의식의 진화를 상징하는 듯했다. 하지만 괴기스럽게 일그러진 교실에서 신체가 변형된 아이들이 하나같이 우스꽝스럽다기 보다는 가엾고 서늘하게 다가왔다. 우리 모두는 그토록 일그러진 교실과 무너진 친구들을 수없이 그려내고 지워가며 어른이 되었다는 동병상련의 안스러움이었을까. 남보다 예뻐야 하고 친구보다 강해야 살아남는다는 생각이 끝내 퇴화된 손톱을 활성화시켰다는 것이 나는 어쩐지 슬펐다. 손톱은 알다시피 피부 표피가 각질화되어 생긴 퇴화된 세포이다. 즉, 손톱자체는 생명력이 없어 재생능력이 없다. 그러므로 손톱이 ‘자라난다’ 말하지만 실은 퇴화된 오래된 손톱을 방금 전 새롭게 퇴화된 새 손톱이 밀어내는 것이라 본다면 손톱은 ‘죽어간다’는 말이 맞지 않을까. 아이러니 한 것은 이 퇴화된 세포는 인간의 생명이 다하는 날까지 존재하며 죽음으로써 퇴화를 중단한다는 것이다. 마치 사람이 살아가고 있지만 기실 하루하루 죽어가는 것과 같은 이치로. 죽어가는 손톱을 더욱 활성화 시키는 일, 손톱의 성장은 곧 퇴화로의 진화, 그것은 결국 죽음을 부르는 일이었다. 우리몸에서 유일하게 죽어야 성장하는 손톱의 생체비밀, 그건 꼭 불안이 사라져야 성숙이 잉태되는 우리 청소년의 법칙, 아니 우리네 인생의 진리는 아니었을까.

우리 모두에게도 손톱이 자라나는 시간동안 퇴화되어야 할 자의식이 새롭게 성장하는 시간이면 좋겠다. 퇴화된 그것들을 깨끗하게 다듬어 불안을 정리하는 시간이면 좋겠다. 손톱이 평생 퇴화한다는 생물학적 의미가 꼭 평생동안 자의식이 성장한다는 말과도 같이 느껴져 새삼 딱딱하기만 한 내 손톱을 꾹꾹 눌러보게 된다. 가끔 찢어진 손톱에 머리칼이라도 걸려들어 전기가 통하는 아픔에 관류된 순간을 떠올려본다. 비록 죽어간 세포지만 얼마나 살아있는 아픔이었던가. 설사 손톱은 몰라주었다 해도 내가 살아있어 느끼었던 아픔만큼은 너무나 분명히 생생하다. 그것은 한편 내가 건강하게 살아가는 분명한 증거라는 생각, 그것만은 잊지 못할 듯하다. 손톱은 변함없이 퇴화되어도 아이들의 성장만은 멈추지 않기를. 우리 아이들의 진화는 아파도 자라나는 끈질긴 손톱처럼 일평생동안 진취적 이기를. 퇴화될 것은 과감하게 사라지고 그 죽음이 곧 새로운 탄생이 되어주기를.

...진짜 겨누어야 할 상대는 - <고누다>

‘고누다’란 말은 목표물을 향해 무언가를 ‘겨누다’의 방언이라 한다. 이 작품의 주인공 이름이 ‘고누다’ 인 것을 보면 아마도 손가락으로 총쏘는 시늉을 하는 행위가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을 상징하기에 명명되어진 ‘겨누다’의 인칭명사인 듯하다. 내게 이 작품은 다섯 편의 이야기중 가장 어렵고도 불편했으며 그런 만큼 주제의 심도는 어른을 겨누고 있다고 생각될 정도로 깊이 공감할 수 밖에 없었다.

첫 번째 이야기, <하얀 벽>이 ‘개인적 우화’에 의한 여학생의 공주병심리를 들추었다면 이번 이야기는 같은 ‘개인적 우화’로 비롯되었지만 자신에게 특출난 능력이 있다고 믿는 과잉된 자의식으로서의 우상화를 언급하고 있었다. 고누다는 두 번째 손가락으로 누군가를 겨누어 ‘둘’이라고 말하기만 하면 그 누군가는 둘이 되는, 즉 ‘뭔가를 복제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믿는다. 아이들이 자신을 싫어하는 건 복제할 수 있는 월등한 능력때문이라 믿으며 그 때문에 혼자가 된 것을 합리화한다. 다섯 살 때부터 옆집 아주머니의 흰눈이를 둘로 만들어 버린 이후 고누다는 바퀴벌레와 고양이, 친구들 할 거 없이 생명이 있어 움직이고 입이 있는 것들을 둘로 나누기 시작한다. 특히, 겉과 속이 다르게 행동하는 가식적인 친구들을 둘로 나눌 때 가장 쾌감을 느끼는 고누다를 확인하는 일은 어쩐지 편치 않아 고누다만큼 기분좋은 일은 아니었다. 모든 인간은 진짜인 자신과 가짜인 자신을 합체한 존재라는 것을 자꾸만 강조하는 작가의 경고인 것만 같아 흠칫했다. 사람을 진짜인 모습과 가짜인 모습으로 나눌 수 있다면 상상이긴 하지만 멋진 능력임에 틀림없었다. 이 작품은 그렇게 둘로 분리된 인간이라면 진짜와 가짜중 누가 자신으로 승리할 것인지 묻는 이야기기도 했다.

진짜와 가짜게임을 흡입력있게 전개시켜 나가는 작가의 혼란스런 유도심문은 여러 가지를 생각케 했다. 그 중에서도 친구가 없어 자신에게 말을 걸어오는 보라와 사귀기 위해 가짜 ‘보라2’를 만든 고누다가 가짜 ‘보라2’와 벌이는 논쟁은 이 작품의 핵심이자 백미였다. 진보라라는 이름의 친구를 가짜 ‘보라2’로 복제하고 난 후 ‘보라2’에게선 보라색 피와 같은 포도주스의 냄새가 감지된다. 이는 고누다가 진짜와 가짜사이에서 진정한 정체성을 찾기 위해 꼭 넘어야 할 보라색 불안의 파도로 이해되었다. 하지만 가짜친구를 통해 얻은 것은 진짜 ‘친구연습'이 아니라 진짜 ’자기연습‘이었다는 것을 역으로 깨닫는다. 주변의 모든 것을 진짜와 가짜로 분리하였더니 분노를 가지고 태어난 가짜, 좀비같이 가짜 자신을 먹어버리는 진짜를 구분할 수 없어 자신마저 진짜인지 가짜인지 확인해야 하는 상황에 이른 것이다. 이미 진짜인 자신을 진짜인지 가짜인지 확인하는 방법은 역시 자신을 가짜로 만드는 방법 외엔 없었던 것. 가짜가 되고나서야 진짜인 자신을 뒤늦게 인지하는 고누다의 완벽한 실수는 마치 우리네 어른들의 오래된 위선과 어리석음을 상기시킨다. 고누다가 겨누어야 할 대상은 결국 가짜인 자신으로 진짜인듯 살아가거나 진짜인 자신을 잃고 가짜인 자신을 자신으로 믿으며 살아가는 남들이 아니라, 진짜와 가짜로 나누지 않고도 합체된 자신으로 살아가야 할 바로 자신다운 자신이아니었을까.

이 소설이 어렵게 다가왔던 건 바로 인간은 자신의 가짜 가면(페르소나)을 벗고 진짜 맨 얼굴로 살아가야 하는가 하는 질문에 그야말로 질문만 하였지 답을 제시한 것 같지는 않다는 생각에서였다. 고누다는 자신의 페르소나를 애써 벗어봤자 맨얼굴이 드러나는 대신에 또 다른 새로운 페르소나를 발견할 수도 있다고 말한다. ‘보라2’가 ‘진보라’의 강제로 벗겨진 페르소나였지만 ‘보라2’마저도 새로운 페르소나를 만들어 진짜를 숨기지 않았는가. 내가 내린 결론은 인간에겐 페르소나도 맨얼굴도 모두 중요하며 이 둘을 분리한다고 해서 진실한 인간으로 살 수 있는 것과는 다른 문제라는 것이다. 맨얼굴이 없다면 페르소나가 필요치 않고 페르소나 역시 맨얼굴이기에 필요한 장치인 것이다. 다만 때에 따라 페르소나를 벗을 수 있는 용기는 맨얼굴의 건강과 지속적인 관리에 있지 않을까. 맨얼굴이 형편없다면 절대 페르소나를 벗으려 하지 않을 것이니까. 그러므로 고누다를 통해 작가가 말하려 했던 진실은 진짜와 가짜의 구분을 통한 진짜찾기가 아니라 진짜에 대한 끊임없는 자기 성찰만이 가짜인 자신을 극복할 수 있다는 교훈이 아닐까 싶다. ‘고누다’가 온전한 자기 자신으로 성장하는 길은 이름 그대로 가짜인 자신을 고누고(디디다) 그 위에서 진짜인 자신을 고누며(받치다) 진짜와 가짜사이에서 늘 불안할 수 있는 자신을 고누는(겨누다)일인 듯하다. 그것은 이미 가짜와 진짜의 구분조차 의미없어진 이미 굳어버린 자의식을 좀처럼 교정할 길 없는 우리 성인들에게도 해당되는 충고는 아닐까. 한번 들으면 잊어버릴 것 같지 않은 ‘고누다’, 그 이름 석자의 비밀을 가슴에 새겨본다.

불안으로 평화를

이번 소설집, 다섯 편의 이야기는 다섯 가지의 거대한 불안 성장통만 같았다. 신기하게도 이야기를 읽는 내내 몸의 여기저기는 썩 편치를 않았다. 마치 지난 시절 내가 거쳐 왔을지 모를 잠재적인 불안이 열꽃처럼 돋아나듯 마음마저 울퉁불퉁 해지던 시간이었다. 겨울처럼 차디찬 하얀 벽이 꽃피는 봄날의 담벼락이 되고 푸른 곰팡이도 붉은 꽃이 되는 시간들은 죽은 세포가 떨어져 나가 다음의 조직이 자라나듯 자연스럽게 느껴지지 않았다. 세상의 어느 누구가 손톱이 자라나는 순간을 자각한단 말인가. 그런데 자라고 난 후는 얼마든지 확인이 가능한 일이었다. 문학이 주는 환상이 현실의 고통을 자극한다는 것이 놀라워지는 소설이었다. 이제 얼마간 나도 성장한 것일까. 손톱이 자라나듯 내 안의 무언가 퇴화된 조직들이 떨어져 나간 것일까. 불안도 성장하고 나니 평화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깨우치는 내밀한 시간, 이 감사의 시간에 인사는 해야겠다. 불안을 헤쳐 나가기 위해 불안을 거대화 하고 불안을 견디기 위해 불안을 세밀화한 이토록 강렬한 최대의 자극, 이 근사한 불안을 선사한 작가에게 슬몃 미소를 지어본다. 불안이야 말로 최대 안정의 주범이었다는 것에. 어떤 유명한 우주비행사가 그랬다. ‘우주체험을 한 뒤에는 전과 똑같은 인간일 수는 없다’고. 한 권의 책을 우주로 여기는 내게 있어 이 책은 새로운 우주 체험이었다. 분명 ‘이 책을 체험한 뒤에는 전과 똑같은 인간일 수는 없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다. 불안보다 더 불안한 이 책을 통과한 뒤 달라진 나를 확인하는 일은 이 책이 제공한 가장 큰 평화가 아닐까. 세상의 모든 고통은 성장을 통해 치유됨을 조용히 깨우치며 세상의 모든 불안은 불안하기에 안정될 수 있음을 깨달으며 이 책을 덮어본다.

한줌의 평화, 그것은 죽음으로 생명을 증명하는 손톱처럼 자라나기도 한다는 것. 손톱이 자라나는 것은 불안과 절망의 세포가 사라져가는 과정이기도 한 것을. 그렇기에 손톱이 자라나는 아픔은 生을 이겨내는 단단한 동력이 되는 것이었음을. 그것은 한 평생 진짜 우리 자신으로 살아가야 할 용기를 얻어가는 일이었음을. 누구든 자기 자신을 이루는 일은 그 어떤 성장보다도 벅차고 무엇보다 가장 행복한 일이었음을. 나는 오늘 비로소 성숙해진 마음으로 내 상처난 손톱을 어루만져 본다. 그리고 차분히 다듬어본다. 자라나고 자라남이 지난날의 내 불안이었기에 깍여지고 깍여짐이 내 상처였기에 나는 지금 이렇듯 평화로운 것일까. 이제 앞으로 불안해지면 불안해 질 때마다 안그래도 불안했던 손톱을 쳐다보게 될 지 모르겠다. 그런 의미에서 이 작품은 원래 불안했기로 지금 평화가 더 소중한 내 손톱에 바치는 불안의 선물, 선물의 불안이었던 것이다. 문득 궁금하다, 이 작품을 통과한 당신도 나와 같은 손톱으로 生의 성장을 거듭할지. 우린 언젠가 그렇게 자란 손으로 성숙하게 조우하게 될 지. 작고 여린 손톱이 자라날 때, 나는 오늘처럼 기특한 내 안의 작은 평화를 떠올리겠다. 당신도 그랬음 좋겠다. 아니 이미 당신도 그럴 것이다. 이 책의 불안이 당신을 조금이나 불안하게 한 적이 있다 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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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사르 2011-05-31 20: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헤. 한사람님 리뷰 중 제가 읽어본 책 리뷰 먼저 읽어볼랍니다. ^^ 근데 우와~ 리뷰 엄청 길어요. 와..대단대단. 리뷰길이나 몰입도로 봐서 한사람님은 장편소설작가 필입니닷. ^^ 단편소설작가와 장편소설작가는 호흡이 다르다고 들었는데요, 한사람님의 리뷰는 딱 장편소설 느낌의 긴 호흡이시네요.

성장하는 상처라..저는 상처는 치유되고 재생되는 게 좋다, 라는 의미만 생각해봐서인지 성장하는 상처라는 거는 생각 못해봤어요. 그런데 내면의 불안, 상처는 그렇게 성장의 의미가 들어가도 좋겠네요. 음..괜찮은데요.

다섯편의 단편이 불안성장통같다는 말에 공감입니다.

달사르 2011-05-31 20:24   좋아요 0 | URL
리뷰 앞에 별을 체크해놓고, 시간을 두고 좀더 읽어봐야겠어요. 공감지점이 많은 듯 합니다.
(한사람님, 리뷰 앞에 별을 체크하면 노란 색이 되는데요. 그러면 제 블럭에서 이 리뷰로 곧장 올 수 있답니다. 참 신기하지요? ㅎ 혹시 이미 아시는 거 아닌가요?^^ )

한사람 2011-05-31 21:26   좋아요 0 | URL

그래요? 몰랐어요 !!!
그런 기능이 있었군요 ~

장편소설 필이 난다구요?
제 리뷰가 대부분 장황하고 ㅋ 만연체죠
단문으로 끊어쓰고 싶은데 잘 안되더라구요

다 지난걸 이렇게 읽어주셔서 뭐라 감사를..해야 할지..
 
<보이지 않는>을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보이지 않는
폴 오스터 지음, 이종인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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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단할 수 없는

놀라웠다. 온종일 나는 이 책을 손에서 놓을 수가 없었다. 소설을 많이 읽어온 나이지만 근래 이렇게 재미난 소설을 접한 기억이 없다. 그러면서도 이렇게 집요하도록 통속적이지 않을 수 있다니. 최근 우연히도 극찬을 받은 미국작가들의 작품을 연속적으로 읽으면서 오래된 편견에 부끄러움을 느낀다. 정확히도 이 책은 그러한 자기반성의 정점에 서있는 작품이다. 때로는 출판사나 언론의 홍보기사가 맞을 때도 있다는 사실, 아마도 나는 이번 리뷰에서 내가 느낀 것들을 표현하는데 그들보다 더 적절하지는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하며 내 한계에 부딪힐지 모르겠다. 이 책의 뒷면엔 ‘마지막 책장을 넘기는 순간 당신은 이 책을 다시 읽고 싶어 질 것’이라는 뉴욕타임스의 상투적인 카피가 새겨져 있다. 한 술 더 떠 소설과 사랑에 빠지는 크나큰 즐거움을 누리기 위해 독서를 한다면 이 책을 읽으라고 선동한다. 이 책은 풀 오스터의 작품들 중 가장 뛰어나다고 말이다. 처음으로 책표지의 카피에 소름을 첨가해 끄덕여보았다. 그 유명한 <뉴욕 3부작>도 읽어 보지 않았으니 내겐 비교할만한 데이터도 없었다. 그저 이번으로 완벽했다. 책을 읽는 내내 내가 소설을 읽고 있다는 것이 행복하다는 생각까지 했다. 사람으로 치면 머리부터 발끝까지 매력이 넘쳐 흘러 도저히 눈을 뗄 수 없는 시간이겠다. 이 모든 생각들이 진부하고 틀에 박힌 차별성 없는 표현이지만 나는 이렇게 밖에는 말할 수 없겠다. 이 소설은 소설과 사랑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작품, 그동안 소설을 사랑해온 자신에게 비로소 보답하는 선물, 그래서 앞으로도 소설을 사랑하겠다는 야무진 다짐에 커다란 격려가 되는 작품이라 말하고 싶다.

서평을 쓰면서 자주 느끼는 것이지만 ‘글’은 아무래도 배치하고 정제시켜놓고 나면 들었던 ‘말’이나 실제 느꼈던 ‘감정’보다 더 과장되어 보일 때가 많다. 또 반대로 그 감정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할 때도 많다. 글로 적는 순간 이미 새로운 감정상태로 돌입하게 되기 때문이다. 서평이라는 것은 독서한 후에 이루어지는 작업이라는 태생적 한계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독서하고 있는 순간의 느낌을 다시 되돌려 기억하고 정리하는 가공의 상태를 수반하게 된다. 그러다보면 독서할 때 느낀 것이 아닐지라도 글을 쓰면서 느끼게 되는 감정도 발생하고 그때 느꼈던 것을 놓치게 되는 반대의 경우도 발생한다. 이 추가와 누락의 운명을 지닐 수밖에 없는 한 작품 당 한 개의 서평은 결국 한 편의 ‘책 이야기’라기 보다는 책을 읽은 한 명의 ‘자신의 이야기’가 될 확률이 많다. 모든 서평은 책과 자신을 넘나들며 관통된 것들을 찾아 헤매는 작업의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문 평론가가 아닌 우리들 동네 서평자들은 책과 자신의 경계에서 중심점을 잃지 않고 객관적인 비평을 해내긴 어렵다. 이른바 내 마음에 들었다면 좋은 작품이고 맘에 안 들었으면 꽝인 작품이라 말하고 싶은 사람들이고 또 그렇게 자유롭게 말하였다 해도 아무런 책임이 없는 것이다. 단지 마음에 차고 안차고의 이유를 논리적으로 부연할 수 있느냐의 정도차이일뿐 그것은 어쩌면 동네서평자의 권한이기도 할 것이다. 이렇게 서평에 대한 장광설로 이번 서평을 시작하는 것은 적어도 이번 작품에서만큼은 객관성을 잃어버렸다는 말을 하고 싶어서이다. 이미 사랑에 빠진 사람은 상대의 단점마저 매력이 된다. 그래서 두렵다. 이러한 극찬의 나열 역시 핵심에 다가가기 두려운 사랑에 빠진 상태의 초조함은 아닐까.

나는 이야기가 끝이 날까봐 초조했고 한편으론 빨리 끝이 나길 바랐다. 이 책은 긴장이 해소되는 국면이 없어 끝까지 팽팽함을 유지하게 하는 힘을 가졌다. 서사에 대한 몰입이나 집중력, 흡입력이라 붙여질 이름의 파워일 것이다. 도저히 한 순간도 방심할 틈을 주지 않으며 자꾸 넘어가는 페이지를 중단해야 할 지점을 찾을 수 없었다. 표면상 나누어진 4부의 단락마저도 휴게소 역할을 하기는 커녕 빨리 다음이 궁금한 지점에서 흐름을 끊게 하는 얄미운 드라마를 생각게 할 정도였다. 슬쩍 작품소개를 보니 ‘스토리텔러’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서술되어있는 점으로 보아 내가 느낀 이야기의 재미, 서사에 대한 몰입은 바로 이야기꾼의 천부적 재능에서 비롯된 것이었구나 싶었다.

이야기의 시작은 평이했다. 갓 스물을 넘긴 미국의 대학생이 어느 봄날 뉴욕의 파티에서 ‘어울려 보이지 않는’ 커플을 만나는 장면이었다. 파티에 왜 가게 되었는지 장소가 어디였는지 어떻게 빠져 나왔는지 모두 정확하지는 않지만 주인공은 그 순간을 기억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인생에 있어 대수롭지 않게 시작된 한 번의 만남, 그 우연성에 대한 절대성을 말하려 했을까. 그것은 40년 전의 일이고 글을 쓰는 시점은 수상한 커플과 만난 후 40년이 지난 시점이니 대학생은 일종의 회고록 형식의 글을 노년기에 쓰게 되었다는 것이다. 책을 덮기 전까지 나는 노년을 맞이한 주인공이 1967년 자신에게 일어났던 일이 그 후 인생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돌아보는 내용인 줄 알았다. 그리고 그것은 아주 틀린 생각은 아니었다. 그런데 서사가 진행되는 40년 전의 시점과 지금 글이 쓰여지는 40년 후 시점사이에서 정작 40년 동안 일어난 일을 말하는 것은 아니었으므로 이 작품은 1967년, 그때 그 사건만을 돌아보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40년 후라는 의미는 이 작품의 마지막, 1967년엔 알지 못했던 진실이 비로소 40년 후에 밝혀진다는 그러니까 40년 동안 비밀은 묻혀져 왔다는 것으로 이해되었다.(그것도 책을 덮기까지 느끼지 못한) 이야기가 막을 내리고 나서야 비로소 1967년 후 흘러버린 40년의 세월을 감지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40년 전의 일이지만 어제 일처럼 소상히 기록한 주인공은 그 후로도 절대 1967년으로부터 벗어나지는 못했던 것이다. 그것은 물론 한 인간의 불행이고 비극이었다. 그런데 나는 소설속에서 주인공의 비극에 공감하기 보다는 1967년의 당시 결말에만 매달려 이야기에 빠져들었고 비극은 1967년에 끝이 난 것으로 착각을 했다. 하지만 40년 후에도 비극은 계속되고 있었고 새로운 형태의 비극도 출현한다는 사실, 아니 40년 후가 더 큰 비극이라는 이야기의 결론은 이야기에만 빠져있던 내게 이 작품의 반전으로 다가왔다. 그것은 소설 속 소설이라는 액자소설이 가지는 진부함을 자신만의 상상력으로 독특하게 직조해낸 이야기의 완벽함이었다. 처음부터 물흐르듯이 나는 우연성에 매료되었고 그런 만큼 충분히 속아들었다.(세상만사가 다 이렇게 시작되는 것 아닌가) 악수로 시작된 우연의 촉발은 도대체 어디서 끝이 나는 것인지 도무지 예상할 수 없을 즈음 이 소설은 끝이 났다.(세상만사의 끝 역시 이러하지 않은가) 심지어 나는 아직 이야기가 끝난 것 같지 않다는 생각도 한다. 끝은 독자가 생각하는 마지막이 아니고 작가가 연출하는 결말도 아니고 그저 물리적인 페이지의 중단, 편집자의 무례한 마감이라는 생각이 든 것은 역으로 소설이 진행중인 시간들이 얼마나 매력적이었는지를 상기하는 증거였다. 어떻게 그렇게 쉽게 끝날 수 있단 말인가.

우연으로 존재하는

소설은 우연한 마주침이 생성한 효과를 필연적인 결과물로 제시하며 막을 내렸다. 한 번의 우연이 한사람의 인생을 바꾸어버린 이야기를 덮고 나서 나는 우발성이 필연성의 논리에 우선한다고 주장한 들뢰즈를 떠올렸다. 들뢰즈에 의하면 사람은 ‘우연적인 마주침들이 계속 이루어지면서 현재의 자신의 모습으로 존재하게 된다’고 한다. 즉, ‘우리’는 여지껏 살아오면서 발생하는 예기치 않았던 만남, 의도되지 않은 마주침의 총합으로 이루어졌으므로 ‘나’라는 존재는 결국 무한한 우발적인 마주침의 결과 이자 우연한 만남들의 효과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책은 바로 이 우발성에 따른 결과를 미국의 한 대학생을 모델로 실험한 데이터가 아닐까. 그동안 나는 들뢰즈식의 우발적 운명론에 반론을 제기하고 싶은 억울함이 전무했던 것은 아니나 이번 소설을 읽고는 모든 숙명적인 사건은 결국 우연에서 출발한다는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 그것은 가끔가다 산발적으로 일어나는 불규칙성이 아닌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공평한 공통분모였다. 작가는 마치 우연성의 법칙을 증명이라도 하듯 낱낱이 자료를 모아 실례를 제시하고 검증을 거쳐 연구를 마무리하는 것으로 보였다. 단지, 문학하는 방식이 소설이었을뿐 그것은 자연법칙을 증명하는 연구서이자 그것을 정리한 철학서였다는 생각이다.

우선 이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주조연을 가리지 않고 그 역할이 미미한 사람들은 없었다. 분량과 상관없이 그들의 존재감은 각자가 오롯했다. 주인공 애덤 워커는 40년 전에 컬럼비아 대학생으로서 시를 좋아하고 문학이라는 예술로 사람들과 대화하는 것에 행복을 느끼는 모범적인 청년이었다. 대개 우리는 어떤 사건이 있기 전까지 모범적이다. 그의 가정환경은 30년 동안 유대인 푸주한을 지낸 할아버지와 수퍼마켓을 하는 아버지, 일곱 살에 호수에 빠져죽은 남동생, 그리고 쌍둥이처럼 친했던 누나로 요약되었고, 인물이 수려한 학생으로서 건전한 생각을 가진 장래가 촉망되는 1960년대 보통의 건강한 미국 청년이었다. 막연한 짐작인데 아마도 이러한 반듯하고도 유리알같은 미국계 유대인 대학생이 주인공으로 간택된 데에는(미국작가들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이들이 성공을 향한 열망만큼이나 실패할 수 있는 사회적, 개인적 조건을 타고난 인물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작품에 서술되진 않았지만 주로 이들의 부모들은 미국사회에 적응하기 위해 혹독한 시련을 겪으며 경제적 고통속에서도 자식만큼은 끝까지 공부시킨다. 이들의 자녀들은 대개 뛰어난 두뇌와 몸에 밴 엄숙주의, 준법정신을 무기삼아 모범적인 학교생활을 하고 50년대의 한국전쟁, 60년대의 베트남전쟁에 투입되지 않는 한, 적어도 큰 일탈없이 중산층에 진입하는데 성공한다. 만약 이들이 불행해져야 한다면 그 비극의 씨앗은 주로 가족의 사연에서 비롯된 내부적 동기인 경우가 많다.(이들은 외부환경을 훌륭하게 절제하는 훈련을 받아왔기에) 그리고 개인의 상처에 해당하는 내부적 요인은 전쟁이나 경제적 문제같은 외부환경요인보다 훨씬 우발성의 법칙에 지배당할 확률이 높다. 무의식은 바로 인간의식의 억압된 사연을 쌓아놓은 ‘보이지 않는’ 창고이기 때문이다. 작가는 바로 애덤 워커의 ‘보이지 않는’ 내재된 욕망이 우연이라는 유혹에 어떻게 대처하는지 그리고 어떤 식으로 그 유혹에 무너질 수 있는지 짚고 넘어가고 싶었던 듯 하다. 특별할 것 없는 보통의 인간이 겪게 되는 특별한 우연의 파도. 그것은 곧 우리네 ‘보이지 않는’ 인생과도 다르지 않다고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작가는 이 평범한 대학생의 평범하지 않은 인생을 ‘보이는’ 소설로 말하면서 우리 역시 소설적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에 자기방식의 위로를 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기실, 모든 소설은 보이지 않는 삶을 보이는 이야기로 부활시키지 않는가. 그렇다면 우연이야말로 보이지 않는 삶을 보이도록 하는 필연적 장치가 아닐까.

그 유혹의 첫 번째 손짓으로 나타난 보른이라는 국제정치학 교수는 하필 단테의 신곡 ‘지옥’편에 죽은 자로 등장하는 베르트랑 드 보른이라는 프로방스 시인과 같은 이름으로 설정되었다. 지옥같은 벌을 받고 머리를 잃어버린 시인(베르트랑 드 보른)은 훌륭한 시인으로 이름을 떨쳐 보겠다는 워커의 망상같은 야망에 숨겨진 욕망과 두려움을 표상하는 것으로 느껴졌다. 드 보른은 바로 당시 전쟁과 폭력에 희열을 느끼는 시인이었고 그러한 파괴적 열정은 독자를 매료시키는 원동력이었다. 그런데 약속이나 한 듯이 교수 보른 역시 ‘전쟁은 인간의 영혼을 가장 순수하고 생생하게 표현해 놓은 것’이라 미화한다. (드 보른의 부활이었다) 여기서 워커는 직관적으로 보른이 위험한 사람임을 감지했지만 보른이 가진 욕망과 열정의 불씨에 본능적으로 끌리게 되고 만다. 욕망은 바로 금기에서 출발하는 것이기에. 워커는 저도 모르게 당시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느니 차라리 감옥에 가겠다며 자신의 두려움을 밝히게 되고 보른은 군대도 감옥도 안 간다면 무엇을 할 거냐며 워커를 시험한다. 눈앞에 닥친 전쟁에 참여할 용기도 없고 감옥에 갈 정의도 없어 보이는 젊은 친구가 돈 안되는 ‘글쓰는 예술’을 계속하며 나름의 결실을 맺겠다는 포부를 펼쳐 보인다. 그 순간 비밀정보원으로서 국가적 온갖 음모에 조력해온 보른은 어떠한 심정이었을까. 아니 보른에게 워커는 어떤 의미였을까. 자신이 절대 가져보지 못한 보기드문 순수한 영혼이라 부러워했을까. 아니면 자신은 이미 지나온 청춘이니 비현실적 계획에 조언이라도 해주고 싶었을까. 이 작품은 철저하게 워커의 시점으로 서술된 글이기에 보른의 페르소나 이면의 정확한 심중을 파악하긴 어려워 보였다. 그런데 혹 악마적 본성을 숨기고 철저히 계획된 페르소나로 자신의 삶을 살아온 보른에게 풋내기 워커는 보기 좋고 먹기 좋은 행운의 먹이감은 아니었을까. 자기가 아는 세상의 위험을 조금이라도 건네주고 싶고 위협을 느끼게 하는 방식으로 인생을 가르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보른은 표면적으로 국제정치학 교수라는 사회역할을 수행하고 있었지만 그가 터득한 국제사회의 논리는 전쟁을 방지하는 것이 아닌 분쟁을 야기하는 방식이었다. 이는 평화를 목적으로 전쟁을 일으키는 분쟁을 조정하며 위치를 공고히 하는 패권주의를 상징하는 것으로 느껴져 서늘했다. 혹시 운이 좋아 국제사회의 전쟁에 징병되지 않아도 교수를 앞세운 이러한 전쟁수호, 유발자를 만나고 그의 음모에 노출된다는 것은 어쩐지 우연이 아니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사회적 우연을 피했다 해도 개인적 우연을 피할 수 없다면 인간은 비극이라는 필연을 끝내 피할 수 없다. 모든 우연이 다 비껴간 행운의 주인공들만이 살아남아 그들의 우연을 애도한다는 것이 서글퍼지는 인물, 보른은 우연의 예외자였기에.

우연으로 완성되는

문학잡지 발간을 미끼로 워커의 미래를 유혹한 보른은 자신의 동거녀 마고를 앞세워 애덤을 정신적, 육체적으로 무너뜨리려 했다. 보른은 정의를 상실하고 권력을 신봉하는 인물이었기에 사소한 대화에서부터 의미있는 제안까지 워커의 절제력, 판단력, 도덕성을 시험하는 인물이었다. 놀라웠던 건 상징적으로 이 작품의 악마역할을 맡은 보른이 그다지 사악하거나 폭력적으로 느껴지지는 않았다는 것인데 그건 다른 인물에서도 감지되던 치우치지 않는 중립적 세련됨이었다. 예를 들어 상대를 기만하거나 배신을 하거나 고백을 하는 등의 극적인 서사의 순간에도 작가는 인물을 보편화하려고 노력했다. 각자가 보편적인 인물이어서가 아니라 누구에게 더 선하거나 악한 감정을 투사하지 않았다. 동일한 비중으로 영리하고 비슷한 밀도로 심각했다. 달리 말하면 매순간이 클라이막스고 매순간이 긴장스러웠다는 뜻과도 같은데 나는 작가의 고집스러운 일방통행의 연출이 의도된 장치인지 작가 특유의 작법인지 정확히 파악하진 못했다. 인물에게 공평한 위치를 조율하는 서사의 효과는 단연 주인공의 변화하는 심리묘사에 더 치중하도록 했다는 생각이다. 소설속 이야기의 시시콜콜한 사건전개보다는 그러한 스토리를 끝내 엮어서 포장해내는 워커의 내면, 즉 심리전개가 더 인상깊었다고도 생각된다. 매순간 자신이 느끼던 세세한 감정을 치밀하게 기록해낸 워커의 회고록은 결국 작가가 드라마틱하게 구성한 소설이었다는 점에서 워커의 심리전개야 말로 작가의 탁월한 서사연출력이었던 것이다. 워커의 1967년도 회상에서 출연한 배우들은 철저하게 워커의 마음의 동선을 따라 등장하고 사라졌다. 이 동선의 추적을 통해 워커는 그들이 존재했던 인물인지 가상의 인물인지 자신조차도 의문을 가지게 되는 것으로 독자를 능숙하게 교란시켰다. 소설읽는 재미란 이런 것이다, 과시하는 듯 했다. 이 의문은 훗날 워커의 회고록을 마주하게 된 그의 누이의 결백증언과 회고록을 최종적으로 출간할지 고민하는 친구 짐을 통해 다시 한번 우리에게 되묻는다. 워커와 그의 누나는 죽은 동생을 향한 죄책감을 근친상간의 육체적 교감으로 극복하려 했다. 워커의 회고록이 대부분 사실인 것으로 판명되지만 유독 누나와의 육체행위만 상상이었을까 하는 질문과 그 판단을 독자에게 넘겨버린 것이다. 나는 이 미치도록 완벽한 작가의 작위적 센스에 독자된 기쁨을 오랜만에 느껴보았다. 작가는 영리하게도 이 질문을 친구 짐의 입을 통해 이 모든 것은 이야기(일뿐이)라고 대변하는 것으로 느껴졌다. 작가는 애덤의 대변인에서 작가의 대변인이 된 짐을 이용했다. 하지만 작가는 우리를 기만하기 보다 다음의 카드를 내밀었다. 잠시 작가를 잊고 있었던 내게 작가는 의문을 상쇄시키기 위한 새로운 증거, 워커를 사랑했던 세실의 일기장을 종결부의 휘날레로 제시했다. 세실의 일기장은 워커의 이야기의 진실여부를 결정짓는 실마리가 아니라 오로지 워커가 몰랐던 새로운 비밀이 밝혀지는 소설의 완결장치였다. 작가는 워커의 이야기가 거짓인가 진실인가보다는 자신의 이야기가 얼마나 더 매력적이고 완벽한 것인가가 더 중요하다고 그것이야말로 자신의 소설을 읽어야 할 이유라 말하는 듯했다. 이야기를 만드는 것은 나이니 당신들은 즐기기만 하면 된다는 일종의 전문화된 자신감이었다. 처음으로 작가의 완벽함에 패배감을 느끼지 않고 동시에 짜릿함을 느꼈다. 명품옷을 입었다고 명품인간이 되는 것이 아니듯 명작을 읽었다고 근사한 글을 써낼 순 없다. 하지만 이러한 완벽한 매끈함은 고난도의 복잡한 공정을 거쳐 탄생한 심플한 디자인의 절제미를 연상케 한다. 그것은 보는 것만으로도 시각적 만족을 제공하며 심미적 안정감을 부여한다. 소설이 주는 쾌락이라함은 혹 이런 것은 아닐까. 작가는 독자가 느끼도록 얼마든지 매력적이어야 했다.

또 하나 특이했던 것은 회고록이라는 형식으로 드러난 워커의 글이 주제마다 시점을 달리한다는 것이다. 봄, 여름, 가을의 3부로 이루어진 원고는 각각 1인칭, 2인칭, 3인칭의 시점으로 서술되었다. 봄에서 ‘나’인 워커는 여름에서 ‘너’로 가을엔 ‘그’로 등장한다. 모두 1967년 일년 동안의 일이고 각각의 계절엔 그 계절의 특징을(봄-만남, 여름-격정, 가을-이별) 상징하는 주요사건이 벌어지는 형식이다. 1부인 ‘봄’에서는 워커가 이상한 커플을 만나 보른의 엄청난 제안을 받고 마고와 육체적 관계를 맺으며 보른이 정당방위 이상으로 흑인소년을 살해하는 장면을 목격하는 것으로 소설의 발단을 이끌었다. 보른과 마고를 통해 워커는 자신이 생각하던 모습의 인간이 아닌 것에 심한 충격을 받으며 자신이 몰랐던 자신을 발견한다. 그런데 1부의 원고를 친구 짐에게 보낸 후 워커가 자신의 심경을 편지로 고백하는 장면에선 2부에서 막혀버린 글쓰기의 어려움을 호소하자 짐은 소설의 인칭변화를 권하며 자기 자신으로부터 한걸음 물러서라는 충고를 한다. 자신을 1인칭으로 서술함으로써 자신을 질식시키고 ‘보이지 않는’ 존재로 만들기 보다 글쓰는 나와 글속의 나에 공간을 두는 것이 더 자신을 발견하는데 수월하다는 것이다. 놀라웠다. 워커의 심리를 짐을 통해 다양하게 변주하고 원고의 시점변화를 자연스레 유도한 후 친절하게 설명까지 한 것은 마치 워커의 소설을 해석한 것처럼 보이기도 해 입체적으로 느껴졌다. 1부의 글이 워커가 짐에게 보낸 원고였다는 것도, 어짜피 완성될 소설이지만 그 시점에서 원고는 미완성인 채로 워커가 짐과 상의를 한다는 것도. 나는 어쩌면 워커가 백혈병 때문에 원고를 다 완성하지 못하고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고 그러한 염려는 소설에 더 매달리게 되는 일등공신이 된 것이다. 형식으로부터 시작된 소설의 인칭변화는 이 작품을 이해하는 색다른 재미이기도 했다. 친구의 충고대로 ‘여름’의 주인공은 2인칭인 ‘너’로 변신하며 독자로 하여금 1부에서보다 조금은 더 객관적인 시각을 가지도록 만들었고 ‘가을’에선 ‘그’나 이니셜로 변신하며 마치 이별을 예고하는 듯 차차 멀어져갔다. 특히 ‘여름’의 내용상 한 살 차이 누나와 여름을 나누는 방법은 이 작품에서 가장 수위높고 충격적인 사건이 될 수 있었다. 그런데 ‘너’로 변신한 워커 덕분에 사실에 대한 충격은 완화되고 상상에 대한 의심은 더 커지게 되었다. 마찬가지로 누나와의 개인적 사건보다는 ‘너’로서의 타자화된 워커의 심리가 더 부각되 보이기도 했다. 파리로 떠나기 전 불안과 우울의 나날속에서 워커는 ‘너’로 변신해 동생의 상실을 인정하고 둘만의 금기된 의식으로 부활하고자 한다. 이 때 공유한 비밀의 성역은 훗날 워커가 여성을 욕망할 때 본능을 조절하는 바로미터가 된다. 워커는 파리에서 재회한 마고와 보른의 약혼녀의 딸 세실을 여성으로서 대할 때 누나로부터 누나와 비교함으로써 그 결과를 도출해낸다. 보른이 워커의 숨겨진 폭력과 분노를 향한 욕망이었다면 누나 그윈은 워커에게 금기시된 여성을 향한 본능이었다. 이로써 워커가 보른과 그윈을 받아들인 것은 욕망의 수용, 즉 유혹에의 굴복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을지.

그런데 봄과 여름이 지나 워커가 프랑스 파리에서의 ‘그’로 더 멀어졌을 때 ‘가을’의 원고는 마치 예정된 비극의 수순처럼 몹시 촉박하게 느껴졌다. 죽음을 앞둔 자의 서두른 심리가 글에 쫒긴듯 이니셜로 표기된 인물과 폭로와 추방으로 이어지는 숨막히는 상황설명은 또하나의 볼거리였다. 그리고 ‘가을’이 사실상 이 작품의 소설속 소설, 즉 워커 원고의 종결부라는 점을 고려했을 때 가을이 가버린 소설속 시점은 너무나 허탈했다. 왜 ‘겨울’이 없단 말인가. 워커의 인생은 1967년까지가 봄, 여름, 가을이었고 그 이후 40년간은 온통 겨울이었단 말인가. 그는 결국 40년간의 겨울을 말하려고 1967년 한 해의 나머지 세 계절을 회고했단 말인가. 그는 혹시 기나긴 겨울을 이미 예상하며 그 해 가을을 파리로 정한 것은 아닐까. 워커가 이상한 커플을 만난 것은 우연의 시작이었지만 그들 때문에 그들과의 기억을 피해 뉴욕에서 도피한 곳은 정작 그들이 주거하는 파리였다는 것이 잘 치루어질 비극의 조건인양 인식되었다. 혹시 워커는 의식적으로 그들을 피한다면서 무의식적으로 그들을 만나기 위해 파리로 날아간 것은 아닐까. 한 번의 우연을 겪은 워커가 또다시 우연을 무시한다는 건 어쩐지 앞뒤가 맞지 않는다고 생각되었다. 그건 우연으로 촉발된 다음 순서의 예정된 필연은 아니었을까. 워커는 거짓말처럼 파리에서 마고와 보른과 재회하며 갈등을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정면에서 돌파하고자 몸을 던지게 된다. 하지만 워커가 시도한 복수는 예상대로 또 다른 갈등을 야기하고 작가가 주장하는 우연의 법칙은 절정으로 치닫게 된다. 보른이 결혼하고 싶어하는 여인의 딸 세실이 우연찮게도 워커를 사랑하게 된 것. 워커는 뉴욕에서의 끔찍한 살인범이 보른이라는 사실을 그들 모녀에게 폭로함으로써 아무것도 얻지 못하는 신세가 되고 끝내 프랑스에서 추방되어 마고와 세실과는 강제적 이별을 겪게 된다. 워커로서는 ‘가을’을 잘 마무리하고 싶었으나 혹독한 ‘가을’의 실패는 영원한 ‘겨울’을 불러왔던 것이다. 

우연을 기다리는

생각해본다. 워커가 원한 것은 진정 보른의 진실을 폭로하는 것이었을까. 시를 버리고 정의를 찾고자 한 워커는 혹시 자신의 정의를 찾고자 한 것은 아닐까. 보이지 않는 자신, 점점 멀어져가는 시점과 인칭만큼이나 자신을 찾기 어려웠던 워커는 유언을 하듯 40년 후 그들은 유령만큼 실체가 없다고 자신 역시 그들 사이에서 거닐게 될 것이라 예언하며 회고록을 마무리 한다. 보이지 않는 자신을 미리 예감한 워커의 마지막은 혹시 영원히 보이지 않게 될 자신이 두려워 준비하게 된 방어책은 아닐까. 보이지 않게 될 자신이지만 지금도 자세히 보이지 않는 자신이지만 ‘보이지 않는’ 자신을 이겨보려고 이토록 보이는 소설로 가시화한 그가 우리에게 당부하고 싶었던 말은 자신이 보지 못한 자신을 우리만은 영원히 잊지 말고 기억해 달라는 뜻으로 읽혀졌다. 사람은 자기 자신이라고 다 자신을 정확하게 볼 수 없으며 보았다고 해서 자신을 이해하거나 받아들일 수는 없다고. 때로는 자신조차 이해할 수 없는 나 자신조차 존재하지 않았던 순간의 나를 보이도록 하는 방법은 ‘보이지 않는’ 나 이었던 그 시절을 다시 그려내 복원하는 일뿐이었다고. 보이지 않는 자신을 자신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집필한 워커의 집념은 이야기의 재생이 곧 한 인간의 부활임을 증명하는 작가의 고집으로도 생각되었다. 그것은 모든 작가의 숙명이기도 할 것이다. ‘보이지 않는’ 나는 자신을 보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보려고 했기 때문에 발생한 일이었기에. 하지만 우린 살아있는 한 이 작품의 워커처럼 자신의 모습을 보지 못하는 존재일 수 있다. 우린 우리 앞에 거울이 없으면 절대 스스로 자신을 볼 수 없는 존재이다. 그런면에서 특별한 노력없이도 나를 보고 있는 타자들은 그래서 보이지 않는 나를 볼 수 있도록 해주는 거울인 것이다. 워커는 소설속 인물들을 통해 그들에게 ‘보이지 않는’ 자신을 비춤으로써 ‘보이는’ 자신을 발견하는데 성공한 것이었다. 보이지 않는 자신을 우연히 발견했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보이는 자신을 확인할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 작품을 들뢰즈라는 거울을 통해 비추어본다면 우연은 보이지 않는 자신을 보게 하는 존재의 필연이었던 것이다.

마지막 보너스로 생각된 세실의 일기장은 꼭 이 작품의 특별부록 같았다. 이 작품에서 갈등이 해결되는 방식은 결국 문학이었다. 소련의 이중첩자생활을 해온 보른도 오지에서 재회한 세실에게 제안한 것은 자신의 회고록이었다. 다만 보른의 회고록은 ‘보이는’ 자신을 ‘보이지 않는’ 자신으로 은폐함으로써 자기인생의 우연을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 오지에서 밝혀지는 비밀도 우연이 아닌 이미 정해진 숙명적 음모였음을 암시함으로써 이러한 보른의 고집을 정당화하는 것으로 느껴졌다. 세실은 진실을 알게 된 보답으로 보른의 고집과 심리적 폭력에서 탈출한다. 하지만 진실을 알게 되었다고 달라지는 것은 무엇인가. 진실을 모른 채 엄마와 첫사랑은 죽었고 회고록은 누구를 위한 것인지 새로운 의미부여의 시점과 마주친다. 세실에게 주어진 최종발언권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이 작품에서 가장 완벽한 환상의 심미성을 연출한 장면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목숨을 위협하는 불모의 땅을 탈출해 눈앞에 펼쳐지는 신비한 광경. 태양이 내리쬐는 불모의 땅위에서 5,60명의 남녀 흑인이 땀흘리며 돌을 두들기는 순간. 먹고 살기 위한 일념으로 망치의 속도를 유지하며 일정한 음률의 음악을 생성해내는 그들의 살아있는 리듬. 세실의 귓전에, 머릿속에, 가슴속에 울려퍼지는 돌들의 음악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야 하는 오늘의 교향곡이었을까. 그것은 지금까지 우연적인 마주침이 있어 왔기에 앞으로도 새로운 마주침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는 거대한 종소리는 아니었을까. 지독한 슬픔을 주는 사람을 만났듯이 환희에 찬 기쁨을 선사하는 사람도 만날 수 있다는 우연의 희망, 희망의 우연은 아닐까. 이 작품은 이렇듯 세실의 마음속에 영원히 울리게 될 ‘돌들의 음악’을 마지막으로 우리에게 희망의 여운을 배려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세실이 떠나게 될 새로운 여행이란 다시 그 우연성에 의지하는 나머지 生의 기다림, 그 희망의 기대일 것이다. 세실은 다시 워커와 같은 사랑을 만날 수도 보른과 같은 원수를 만날 수도 있다. 그때까진 뜨거운 태양아래 온몸으로 돌을 깨며 땀을 흘리듯 주어진 역할에 기뻐하며 자신을 견뎌내는 수 밖에는 없다. 그것만이 수많은 우연이 모여 이루어진 인간이라는 존재가 우연을 극복하는 방법일 것이다. 문득 이런 내 글을 우연히 읽게 될 누군가를 생각하게 한다. 인생은 단 한 번의 우연이 여러 번 모여 필연적 삶이 되는 것이고 인간은 그 우연의 주체라 한다면 나는 오늘 발생할 우연에 잠시 설레여보고 싶다. 이 우연이 혹시 이 책을 선택하게 하는 뜻밖의 행운이 될 수 있다면 그리하여 그 우연이 그 사람에게 어떤 개인적 필연으로 발전한다면 나는 아무런 책임이 없기는 커녕 그 책임이 퍽이나  막중했던 것이다. 부디 나와 같이 소설의 재미, 문학의 쾌락을 동감하는 당신이었길 바라본다. 그것은 아마 아주 오래전부터 이어져 온 우리사이 필연이었을지도 모른다. 문학의 우연은 우리가 나눈 유일한 소망이었기에. 행운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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