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자나무 숲
권여선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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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팔이나 다리가 절단된 후 없어진 부위가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 그 부위에 통증이 동반되는 경우를 환지통(幻肢痛)이라 한다. 그런데 환지통은 대뇌발달이 완성되지 않은 소아에게서는 발병치 않으며 15세 이상인 경우부터 출현한다고 한다. 환지통이 심할 경우는 교감신경을 파괴하는 수술 등으로 통증을 치료한다고 하는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팔, 다리가 없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있다고 여기는 환자의 뇌가 아닐까 싶다. 즉, 우리의 뇌가, 분명히 사라졌음에도 거기 그것이 있다고 여기기 때문에 아프다고 느끼는 것이 아닌가 말이다. 이 현상을 우리가 살고 있는 현상세계와 연결시켜보면 우리가 고통스럽다 여기는 대부분의 것들이 실은 실재하기 때문이 아니라 실재한다고 여기기 때문이 아닌가 되돌아보게 된다. 얼마 전 정목 스님이 환지통을 비유하면서 인간은 기억에 대한 집착 때문에 고통을 느끼는 것이라 환기시켜준 적이 있다. 모든 고통은 경험한 실제 상황 때문이 아니고 그것을 해석하는 개인의 관점, 시각에서 기인한다는 것이다. 이 얼마나 허무하면서 그럼에도 끄덕이게 되는 일인가.

 

  없는데 있다고 믿는 것. 거기 사라졌는데 아직 남아있다 여기는 것. 지금은 잊혀졌지만 그때 그것이 아픔이었다고 믿어온 것. 돌아보면 그때 내가 누군가 때문에 혹은 어떤 사실 때문에 아파했는지조차 까마득하게 잊고 살아왔으면서 어느 시절, 어느 장소, 어느 상황을 떠올리곤 아직도 기억의 상처가 유효하다 자신을 위로하면서 스스로를 대견해하는 것은 아닐까. 그러니까 아파했던 걸 애써 기억하고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어 하는 것은 아닌가 말이다. 예를 들어 지금은 명백히 사라졌지만 그때 그 기차역에서의 이별을 말하려면 기차역은 절대 사라지면 안되듯이……. 소설이 바쁘고 고단한 일상 속에서 잊고 있었던 것들에 강렬한 화두를 던지기가 힘든 시절인데 권여선의 소설을 통해 나는 잠시 인간의 기억과 고통에 대한 사유를 즐겨보았다. 재미나고 흥미로운 소설도 많겠지만 덮고 나면 아무도 모르게 아무도 몰랐던 숲길을 혼자서 걸어 나온 기분이랄까. 실제로 나는 열흘 전 혼자 여행을 떠나며 이 책을 슬며시 가방에 넣어놓고 무슨 비밀이라도 되는 것처럼 흐뭇해 한 적도 있다. 한번쯤 스스로 걸어 나온 망각의 숲을 되돌아 가보고 싶을 때, 소설이 뜻밖의 동반자가 되어줄지 모르겠다.  

 

  <팔도기획>은 소설가가 대체 무엇 하는 사람인지에 대한 질문과 답에 관한 글이다. 궁극에 소설가는 무슨 이야기를 하던 인간의 이야기로 인생을 집필하는 사람인데 그저 그렇고 그런 인간도 소설 속에선 특별해보이고 매일 보던 인간도 낯설어 보이는 게 다 글에 향기를 불어 넣기 때문이라 말한다. 다시 말해 소설가라면 글에 향기를 불어 넣을 줄 알아야 한다는 뜻이다. 소설가는 거짓말 같은 이야기로 진심을 다해 세상의 진실을 전달하려 하는 사람이다. 진짜 날 것 그대로의 사실이 아니라 꾸며낸 이야기로 전달해야 하는 이유는 바로 글에 향기가 스며들어야 공감하고 감동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가 아무리 충격적인 신문기사나 도무지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사건을 목도하고도 하나도 감동받지 않는 이유는 여백이 가능한 이야기가 아니라 틈 하나 없는 그대로의 사실이기 때문이다.

 

  <은반지>에서 사람들은 한 시절을 공유하여 내가 생각하고 그토록 그리워한 그 사람이 나와 똑같은 감정으로 그 시절을 떠올리진 않는다는 것이다. 외려 정반대로 그 사람에겐 악몽의 한 시절이었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확인하지 않고 전혀 의심하지도 않은 채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 서로 증표로 반지까지 나누어 끼었지만 그 시절이 악몽이었던 상대는 은반지가 일생의 더러운 반지로 기억되고 만다. 인간관계라는 게 시간이 지나다보면 관계를 지속시키고 이어가는 주 패턴이 있어 주종관계가 되기도 하고 일방적인 관계가 되기도 한다. 특히 오랜 세월 친구로 지내다 보면 한번 맺어진 관계의 패턴이 도무지 바뀌어 질 기회가 오기 쉽지가 않고 왔다고 하더라도 뜻대로 바꾸기가 참 어렵다. 만약 한쪽에서 패턴을 바꾸려 무언가 시도를 한다면 유지되어온 관계에 금이 가게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좋은 관계를 계속 유지하기 위해 내가 감수해온 것들을 불행히도 상대는 알지 못할 때가 많다. 아이러니하게도 알았다면 좋은 관계는 유지되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작가는 그다지 충격적인 언사없이 둔중한 깨우침을 산사의 종소리처럼 깊게 울려준다. 혹시 돌아보니 그때가 누군가와 더없이 좋은 시절, 부러웠을 관계로 기억된다면 그 상대는 분명 나를 위해 참고 견딘 무언가가 있을지도 모르며 상대는 나와 반대로 그때를 기억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끝내 가보지 못한 비자나무 숲>은 묘한 여운을 가장 깊게 남겨주는 글이다. 작가는 처음부터 우리를 그 숲에 데리고 갈 생각일랑 추호도 없었을 것이다. ‘가을저녁처럼 어둑하고 신선한 그 숲’은 가보지 못한 후라야 비로소 비밀의 원형을 복원해 낸다. 사실 이런 기분은 나도 산소를 가면서 많이 접하는 기분이긴 한데 막상 산소에 도착해선 머무르는 시간도 짧고 나누는 대화도 성의없기 짝이 없다. 그러나 산소에 가기로 마음을 먹고 출발하여 도착하기까지의 여정이 거기 가야할 연유의 모든 것이었다는 사실을 돌아오고 나서야 매번 깨닫고 하니 말이다. 작가는 ‘환각의 종료를 알리는 뾰족한 별 모양의 현기증’을 끝으로 숲의 여정을 마무리한다. 하지만 가보지 않고서도 눈에 선한 숲길을 아주 오래도록 걸어 나온듯한 이 충만함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아마도 내가 아는, 내가 가본 그 길이라는 예감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길모퉁이>는 이 책에서 가장 슬펐던 글이다. 한 시절 동고동락했던 친구가 변변치 않은 나를 찾아와 역시 변변치 않은 수사를 늘어놓고 저 길모퉁이를 돌아나갈 때 그 뒷모습을 지켜보아야만 하는 비루한 청춘의 눈물에 관한 기록이다. 이십대 초반 가진 건 탱탱한 육체덩어리와 영글지 못한 꿈 하나가 전부일 때 같은 꿈을 향하여 밤낮을 시간단위로 공유하던 친구. 비슷한 이야기로 <진짜 진짜 좋아해> 역시 친구의 자취방에 얹혀 살던 그 시절의 이야기이다. 돈이 없고 남자도 없고 일이 없어도 수술실 같은 화장실을 같이 쓰며 하루를 기대어온 내 살 같던 친구. 그 친구의 존재를 돌아보니 까마득하게 잊고 살아왔다는 믿을 수 없는 진실이 오늘만 동동거리던 여기 우리들에게 길가다 한 대 얻어맞은 뒷통수처럼 강렬하게 다가온다. 누가 너를 내게 보내주었나 하는 노래 가사처럼 잠시 내게 왔다가 사라진 너를 위해, 아니 그러한 너를 이제야 기억하고 그리워하는 나를 위해 소설은 말없는 위로를 건넨다. 얄궂은 비를 맞아 뒹굴고 흩어지고 가라앉아도 겨울이 아닌 다음 가을을 기다리는 심정으로, 또 한번 저 낙엽들을 가슴에 묻게 된다.

 

  <소녀의 기도>는 이 책에서 가장 치열하고 속도감 있어 같은 작가가 쓴 글이 맞나 싶을 정도로 의외인 글이었다. 명백한 내 잘못을 누군가에게 전가하고 남겨진 책임을 덮어 씌우고 다시 내 잘못을 정당화하는 것이 어찌 범죄를 저지른 사람에게만 해당될 것인가. 인간은 원인과 결과만 있으면 얼마든지 자기 유리한 쪽으로 사실을 해석하고 왜곡하고 판단한다. 그런 면에서 <꽃잎 속 응달>은 지금 내 인생이 이렇게 된 이유를 반대로 모든 걸 선택했던 내 잘못으로 돌리고 그것을 오랜 세월 연민하는 보통 여자의 이야기였다. 그래도 돌아보면 마냥 슬프기만 했던 것은 아니고 ‘그렇게 대책 없이 불안한 젊은 날’에도 ‘문득 어디선가 벼락같은 따스함이 찾아오기도’했었다는 회상이 작가가 그려내는 문장의 아름다움이기도 했다. 

 

 

‘벚꽃이 딱딱한 가지위에서 꽃망울을 터뜨리고 순간처럼 몸속에서 끌어올려진 물기가 아름답고 하늘하늘한 촉감의 기적을 만들고 어느 순간 그것은 감격적으로 톡 터지는 것이다. 그러고 나면 영겁처럼 기나긴 인내와 응달의 시간을 견뎌야 하리라.’   -p228 

 

 

  이것이 작가가 말하는 ‘꽃잎 속 응달’의 실체이다. 이제 우리는 몇 십 번의 꽃잎을 틔우고 또 그만큼의 낙엽을 떨구었기에 그 시절이 영영 가버렸으며 결코 돌아오지 않는다는 사실도 안다. 단지 지금 말할 수 있는 건 그때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몰랐다는 사실 뿐일 것이다. 한순간의 감격과도 같은 청춘의 희열과 지나고 나면 영겁과도 같은 응달의 시간을 이제는 알 수 있어 마침내 알게 되었음을 말할 수 있다는 것. 나이가 들수록 유독 떨어지는 낙엽이 슬픈 이유는 아마도 자기 생의 남은 낙엽들의 숫자가 점점 선명하게 그려지기 때문은 아닐까. 낙엽의 다음 운명이 궁금한 이유는 아마 다음 번 낙엽을 보고도 계속 궁금해 하는 나를 내 자신이 가장 기다리기 때문은 아닐까. 나의 다음이 있어야 낙엽의 다음도 있는 것이니까.

 

  다시 환지통을 떠올린다. 그러니까 아직도 그 시절이, 그 상처가 있다고 혹은 있었다고 생각하면 우린 오늘까지 살아오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우리가 오늘을 살아갈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어제 일어난 고통을 잊을 수 있기 때문인지 모른다. 중요한 건 얼마나 아팠는지가 아니라 언제라도 반드시 잊혀 진다는 것이다. 잊어야 한다는 그 생각조차 없어져 내가 그 사실을 잊었는지 조차도 까마득하게 잊어버릴 날, 기어이 오고 만다는 것이다. 이 소설은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잊고 싶어 했으나 아직은 잊혀지지 않은 상처들에 대한 염려이자 걱정에 관한 기록일 것이다.

 

  내게 소설은 아무리 내가 죽고 난 머나먼 미래를 말한다 해도 언제나 나만의 과거를 돌아보게 만드는 회상의 동력인 듯하다. 잊혀진 기억, 떠나버린 사람, 추억의 계절, 잊을 수 없는 장소, 잊어서는 안 될 실수, 이 모든 과거의 조각들이 망각의 합작으로 완성될 날을 기다린다. 아쉽고도 애처롭지만 조용히 기다릴 것이다. 작가는 앞으로 일어날 다음의 망각도 너그러이 용서를 해줄 듯 그렇게 소설로써 회한의 세월을 감싸주었다. 이제 남김없이 떨어진 낙엽들이 어디로 가는지 처음 겨울을 맞는 아이처럼 다시 계절을 준비하는 시간이다. 소설이 소설다운 기능을 하여 소설보다 힘든 현실을 지탱할 조그만 계기가 필요한 시점이라면 부끄럼없이 이 소설을 권한다. 한파가 기다리고 있다는 저 겨울이 두렵지만은 않을 것이라 확신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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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투 2013-12-21 18: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감이 가는 글입니다. 나만의 과거와 머나면 미래를 그려보는 상상은 나만의 기쁨이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