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위로하는 글쓰기 - 몸과 마음을 치유하고 자기를 발견하는 글쓰기의 힘
셰퍼드 코미나스 지음, 임옥희 옮김 / 홍익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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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인생수정의 시작은 글쓰기로부터>

 

예나 지금이나 글을 쓴다고 하면 글을 쓰는 사람에게 던져지는 편견의 시선이 있다. 쓸데없는 생각이 많고, 뜬구름 잡는 소리나 하고, 매사 슬프거나 비판적이고, 그리고 결정적으로 실행력은 제로라는 편견이다. 글을 쓴다는 행위자체를 폄하하는 것은 물론이고, 어떤 행동을 가로막는 일로까지 치부하는 경향이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그래도 글쓰기. 돌아보면 내게 글쓰기는 무엇보다 내 자신을 정확하게 정리하는 친숙한 도구였던 듯하다. 마루바닥을 청소할 때 빗자루와 걸레가 필요하듯 복잡한 마음을 쓸어 담거나 어지러운 계획들을 정리할 때 어김없이 글을 써왔던 것 같다. 힘들 때 글을 써버리고 나면 마음의 무게를 덜 수 있었다. 친구와 다툼이 있었거나 직장에서 불쾌한 일을 겪었을 때, 누군가로부터 비판을 받았거나 사귀던 사람과 이별을 결심했을 때도 내 앞엔 늘 내가 적어온 글이 함께였다. 누가 가르쳐주지 않았지만 오랫동안 그렇게 해왔던 이유는 무엇일까. 이 책을 읽고 새삼 나의 글쓰기는 언제부터 시작되었고 나는 어떻게 글쓰기를 일상화하며 살게 되었는지 그 과정도 기억해 볼 수 있었다.

 

학교 숙제로 일기를 써온 것을 제외하고 성장기에 글을 집중으로 썼던 경험은 바로 친구들과 편지 주고 받기였다. 중학교 1학년 시절, 청소함 앞의 6명이 똘똘 뭉쳐 매일 어울려 다녔는데 그 친구들은 모두 글쓰기를 선호하는 성격이었다. 매일 편지 5통을 써서 친구들에게 주면 편지를 받은 5명은 그 다음날 내게 어김없이 답장을 주었다. 예쁜 편지지로 한번에 5통의 편지를 받는 기분은 아직도 생생히 기억난다. 매일 얼굴 보는 친구들인데도 어떻게 그렇게 매일 할 말이 생기는지 신기했다. 주제는 같을지라도 5명에게 똑같이 쓸 수 는 없었기에 조금은 다르게 각색을 하던 것이 아마 다양한 문장력으로 발전을 한 계기가 된 것은 아닐까. 이러한 매일 편지주고받기 의식은 특별한 우정을 지켜나가는 일종의 우리만의 의식이었던 것 같다. 이 행위는 중학교 졸업할 때까지 서로 다른 반이 되어도 지속되었다. 매일은 아니더라도 편지를 주고받기 위해 그 순간은 반드시 얼굴을 보아야 했다. 완전한 아나로그 시절이니 편지의 특장점을 완벽히 누린 청소년기었다. 주고받았던 편지에는 조용필의 노래가사, 유안진의 시, 유명한 속담들이 자유롭게 삽입되어 각자의 감정을 더 돋보이게 만들기도 했다. 그래서일까. 지금도 나는 내가 상대에게 느낀 감정을 충분하게 표현한 편지로 전달하는 방식을 선호한다.

 

<나를 위로하는 글쓰기>에서 가장 공감한 부분은 ‘나 자신과의 화해’이다. 나를 위로하기 위해서는 우선 몸과 마음, 영혼이 편안한 방법을 택해야 하는데 저자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 글쓰기라 주장한다. 즉, 마음깊이 흐르는 내 감정을 느끼고 그것들을 누가 본다는 염려 없이 가감하지 않고, 상상하려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적어나가는 것이다. 사실 우리가 인생에서 2,30대 중반까지 완벽한 성숙이 이루어지지 않은 채 하필 그 시기에 남은 인생을 결정짓는 사항들을 너무나 어이없게 선택해 버리는 경우가 많다. 전공은 둘째 치고 결혼, 취업 만해도 당시 선택했던 나의 기준을 돌아보면 너무나 짧은 견해였었고 그 후 그 결정과 선택 때문에 원치 않는 시간과 고통에 직면하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고 젊은 시절 순간의 결정이 향후 남은 몇 십 년의 향방을 결정해버리는 것에 얼마나들 후회하고 한탄을 하는 시기를 겪게 되는가. 심리상담가들은 결정을 바꾸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지금부터 조금씩 수정하는 것으로 남은 인생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말이 쉽지, 그 수정은 또 어떤 방법으로 얼마나 하는 것인지, 대체 누가 사람마다 일일이 솔루션을 처방해 줄 수 있을 것인가.

 

돌이킬 수 있는 결정은 아니지만 조금씩 지금부터라도 나의 인생을 수정할 수 있다면, 그런 일이 가능하다면 나는 적극적으로 글쓰기야 말로 인생수정의 시작이 아닌가 싶다.

 

“이 일은 과거의 그 일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가?”
이런 질문은 당신의 진정한 자아와 접촉하는데 큰 도움을 준다. 자신도 납득하지 못하는 과거의 아픈 경험은, 글쓰기를 통해 다른 관점에서 생각해보면 의외로 쉽게 실마리를 찾게 되는 경우도 있다. 이런 관점에서 지금 당신이 알고 있는 것을 과거 시점과 연결시키면, 이전에는 불가능했던 일도 쉽게 느껴질 것이다. -124p

 

만약 최근에 힘든 일이 있었고 그것을 계기로 글을 써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고 하자. 일어난 일과 당시 느꼈던 감정을 솔직하게 쓰다보면 언젠가 이와 비슷한 감정을 경험한 기억이 떠오를 것이다. 그리고 그때 나는 어떻게 대처하였고 상대방은 어떤 반응을 하였으며, 그 결과는 어떻게 발전했는지, 훗날 어떤 영향을 주게 되었는지 새삼스럽게 떠오를 것이다. 과거를 돌아보려 글을 쓴 것은 아니지만 쓰다보니 자연스레 나의 과거와 조우하게 되는 일. 그리하여 나의 그림자를 발견하고 내안의 어두움, 나의 본심을 깨우치게 되는 일. 이러한 과정은 가만히 앉아서 생각만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본다. 글을 쓰면서, 뻗어나가는 나의 문장을 느끼면서, 나 역시도 한걸음 성장하게 되는 순간, 그것은 글쓰기가 가진 치유의 힘이고 글쓰기로만 느낄 수 있는 진정한 매력인 것이다.

 

지난 겨울 <북테라피; 독서치유>라는 타이틀의 독서모임을 시작했다. 수많은 독서모임에 참석해봤지만 특히 내가 불편했던 점이 있다. 누군가는 꼭 지나치게 지식을 자랑하려 들거나, 유난히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이 생기게 되어 우리가 책을 읽는 목적이 과연 무엇인지 회의가 들때가 있었다. 그리고 누구나 다 동의하는 내용만 결론으로 마무리하고자 하는 경향들이 정작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막고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남 이야기, 다른 나라, 우리나라 이야기, 다른 세대 이야기, 다른 직업, 다른 성별, 결국 나 아닌 모든 것을 이야기 하면서 나는 별도의 심판자나 모든 것을 다 아는 절대자처럼 책 위에서 거리를 두는 모습. 그것은 책 뒤에 자신을 숨기는 일이라 여겨졌고 그런 모임이 반복되면서 사람들은 너나할 거 없이 부담이나 피곤함을 은밀하게 호소하곤 했다. 물론 다 모였을 땐 다시 책 위에서 책을 내려 보는 누군가가 되어 듣기 적당하고 반론할 수 없는 교과서식 결론으로 똑같이 합창하는 일이 반복되었다. 이런 시간이 왜 필요한가에 대한 질문은 시간의 차이지 결국 모두 직면하게 되며 모임은 흐지부지되는 것이 기존 독서모임의 한계였다.

 

사람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한다. 그리고 솔직한 남의 이야기도 듣고 싶어 한다. 나만의 스토리, 내가 가진 서사의 구조로는 이해되지 않는 남들의 사연, 언젠가 비슷하게 겪었을지 모르는 동세대의 에피소드, 같은 성별로서의 공감대, 비슷한 역할지기로서의 고충, 답을 알고 있지만 내 의견에 동조해주길 바라는 마음. 인간이기에 다른 인간이 가장 괴로운데 그래서 타인과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늘 책을 읽고 비슷한 답을 찾은 것 같아도 또 잊어 버리고 또 다른 책을 집어 드는 것이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책을 통해 얻고자 하는 위로를 모여서도 나누면 좋겠다는 취지로 시작한 것이 북테라피이다. 이 모임에서 진행자인 나는 무엇보다 글쓰기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글을 많이 읽다 보면 그처럼 그런 글을 쓰고 싶다는 욕망과 마주할 때가 있다. 나도 이런 소설을 쓰고 싶다, 나도 이런 에세이를, 나도 이런 시를, 나도 이런 평론을...... 책읽기는 글쓰기를 부르는 촉매제이기 때문이다.

 

북테라피 과정 중에는 나를 위한 치유의 글쓰기 과정이 포함되어 있다. 바로 자신의 생애를 돌아보며 상처를 받았다고 기억하는 시기의 그 상처를 정면으로 기록하는 것이다. 물론 지나간 기억은 모두에게 자기애 편향적이다. 중요한 건 사실이나 사건 자체 보다 내가 당시 느꼈던 감정을 소환하는 일이다. 어떤 이에게는 하찮은 일이지만 나에게는 상처가 된 이유가 있다. 상처란 절대적인 고정물이 아니고 상대적인 유기체 이다. 모두 기록을 하다 보면 과거에 마무리 하지 못한 일, 별거 아닌 일, 잘 극복한 일등이 한눈에 정리되는 신기한 경험을 하게 된다. 어쩌면 상처를 기록하면서 이미 그 동안의 상처는 치유가 되어 버렸는지도 모를 일이다. 왜냐하면 상처를 기록하면서 내가 겪었던 고통뿐만이 아니라 내 삶을 구축하기 위해 절실히 노력했던 것들을 다시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고통은 무디어 졌지만 내가 쏟은 열정은 다시 꿈틀거리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나를 위로하는 글쓰기>는 글쓰기의 구체적인 방법을 알려주며 친절하게 실천을 도와준다. 언젠가 글쓰기 관련 책만 사다 모아놓고, 정작 글을 쓰는 행위는 책 때문에 미루게 된다는 독자를 만난 적 있다. 그 책을 읽고 제대로 시작하고 싶다는 부질없는 욕망, 그것이 바로 글쓰기에 앞서 경계해야 할 요소이다. 사실 글쓰기 책이 없어도 그냥 글을 쓰면 된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과도한 욕심을 부리지 않고 어렵지 않게 어느 페이지를 펼쳐도 오늘부터 실천할 수 있는 아이디어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부담이 없다.

 

수많은 첨단 매체들이 자고나면 새로운 버전으로 출시되는 요즘이다. 그러나 전통적인 독서와 글쓰기는 그러한 수많은 매체를 접하면서 얻은 과도한 피로감을 단번에 줄여주는 기특한 처방이기도 하다. 마음이 혼란스러울 때 책을 집어 들고 20분만 앉아 있어도, 십 여분만 글을 써나가도 마음은 금새 안정되고 머리는 개운해지고 있음을 확실하게 깨달을 수 있다. 지친 하루를 정리하며, 힘든 하루를 시작하며 어떤 방법으로든 간단한 자기 명상의 글을 오늘이라도 시작해보면 어떨까. 나를 위로하는 일은 오늘부터 시작해야 하는 일이 맞을 것이다. 그래야 조금씩 수정해 나가는 수많은 오늘, 그것들이 모여 합쳐진 내일의 삶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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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적 마음 - 김응교 인문여행에세이, 2018 세종도서 교앙부분 타산지석S 시리즈
김응교 지음 / 책읽는고양이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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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적 마음, 그 안의 한국적 마음은>


2018년도 보름이 지났다. 이맘때가 되면 모두들 신년의 마케팅 트렌드들을 이미 꾀고 있어 올해 유행할 아이템들에 관한 기사가 쏟아진다. 그중에 많이 노출된 단어는 단연 ‘워라벨’이다. ‘워라벨(Work-life Balance)’이란 일에만 치중하지 않고, 일과 생활에서 균형을 잡는 것을 뜻한다. 요즘 젊은 세대들은 워라벨을 원한다고 한다. 아니 어느 세대나 워라벨을 원하지 않는 사람들은 없을 듯하다. 그런데 솔직히 이미 허구헌날 밤새고 야근을 밥먹다시피 한 청춘을 지나와서 그런지 이런 단어를 접하면 어쩐지 일안하겠다는 소리로 들리는 것도 사실이다.


인문책이야기 하면서 비즈니스 트렌드를 언급하는 이유는 이 책에서 가장 공감했던 부분이 바로 하루끼에 대한 저자의 평가, 그리고 일본 문학에 대한 견해였기 때문이다. 하루끼는 올해 빈번하게 트렌드로 회자되고 있는 ‘소확행’이라는 단어를 처음 쓴 인물이다. 작은 행복이 목표로 착각될 만큼 평범을 향한 열망, 보통으로서의 존재의식, 작은 만족에 대한 단상들이 유행처럼 쏟아지고 있다. ‘소확행’은 하루키의 수필 『랑겔한스섬의 오후』에서 처음 쓴 신조어로, 갓 구워낸 빵을 손으로 찢어 먹거나, 고양이와 함께 침대에 누워 빈둥거리는 것처럼 일상의 사소한 행복이 인생을 값지게 만든다는 의미다. 사실 부자나라 선진국 일본에서 지하철을 오가는 소시민과 참 어울리는 모습이다. 일본은 작지만 확실하고 일본인은 작아도 확실하다.


그동안 하루끼 소설은 내게 회피나 유행, 힐링이라기 보다는 하나의 책 읽는 재미였다. 저자는 하루끼 문학이 일본인들에게 치유와 힐링의 기능을 하고 있기 때문에 가장 일본적 문학이라 말한다. 저자는 일본문학에서의 자살적 자아, 벚꽃과 사무라이 정신, 공동체를 위한 개인의 희생 등을 언급하며 우리에게 호감을 주기 충분한 하루끼라는 문화예술인을 이들 정서의 정가운데 관통시키고 있다. 책을 덮고 나면 이상하게도 모든 면에서 크게 와닿지 않는 일본적 마음이 하루끼로 인해 이해가 갈 것도 같은 느낌이 든다.


그중 일본인에게 벚꽃은 ‘죽음’의 의미이지만 한국인에게는 ‘꿈’이라는 표현이 기억난다. 벚꽃은 어쩐지 핀다기 보다 지는 꽃이며 흐드러지게 만개한 순간에도 곧 물안개처럼 부서지고 말 신기루처럼 느껴진다. 일본은 죽음이고 한국은 꿈이니 반대의 의미일까? 죽음이나 꿈이나 사라지고 말 지금 이 순간에 대한 아쉬움이 내포되어 있긴 마찬가지 아닐까. 결국 인간이나 인간과의 사랑이나 언젠가는 사라지고 마는 유한한 것들이다. 특히, 하루끼의 <상실의 시대>는 과거와 자신과 주변인에 대한 상실, 그리고 나아가 그들과 나눈 꿈, 그리고 희망에 대한 상실을 의미한다 할 수 있다. 요즘 상영되고 있는 영화 <1987>을 보면서 새삼 우리가 왜 그토록 <상실의 시대>에 공감했는지 이해가 가기도 한다. 세월이 지나온 동안 우리가 잃어버린 모든 것들은 얻어온 것들만큼이나 많다. 신기한건 잃어버린 것들을 잊고 살면서 우리는 잃어버렸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살아간다는 것이다. 하지만 일본과 일본인은 그렇지 않은 듯하다. 그들은 쉽게 잊지 않는다.


이 책은 예술과 독서 사무라이와 야스쿠니를 소주제로 일본인의 정서를 정리하고 있지만 이들의 정서를 확인하면서 느끼는 건 일본은 우리처럼 쉽게 잊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할 것을 쉽게 잊고 잊어야 할 것들은 쓸데없이 잊지 못하는 건 아닐까. 매년 10월이 되면 노벨문학상 후보로 하루끼는 자연스럽게 거론이 되곤한다. 신간을 내면 이미 확보된 독자들로 인해 예약만 몇 십만인 작가이다. 이런 하루끼라는 문학현상은 일본인에 대한 반감이나 우리가 가져야 할 역사의식을 상쇄시키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문학을 통한 공감대 형성, 인간이라는 보편성을 주제로 한 그의 치유메세지가 잘못되었다거나 그것을 받아들이는 독자를 비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이미 우리는 그렇게 되었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일본을 향한 양가적 감정은 일본의 문화예술적 요소를 좋아하고 즐기고 지향하고 숭상하거나 모방하고 우대시 하는 문화지향성이 뒷면이라면 위안부나 독도, 야스쿠니 신사참배등과 같은 역사적인 무례함에 분노를 느끼는 민족적 거부감은 마치 동전의 앞면처럼 한 몸이 되어 버린 현상이라 할 수 있다. 이 책을 통해 일본을 알려하고 이해하고 살펴볼수록 돌아오는 자기이해는 한국인의 모순된 심리인 듯하다.


허나 <일본적 마음>은 저자 자신의 일본을 향한 감정의 연결없이, 보고 들은 대로 기록하려는 강한 의지를 엿볼 수 있었다. 호불호를 표하고 시비심을 표현하는 것이 꼭 나쁜 것인가. 좀 더 저자의 솔직한 평가, 견해, 개인적인 심정들이 더 드러나도 좋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왜 우리는 일본에 대해서는 호불호를 이야기하면 안되는 것인가. 왜 사실만 이야기 하고 편견을 남기면 안되는 것인가. 왜, 일본적 마음을 한국적으로 표현하면 안 되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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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1-18 18: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1-18 18: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만약은 없다 - 응급의학과 의사가 쓴 죽음과 삶, 그 경계의 기록
남궁인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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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살면서 응급실을 몇 번이나 가게 될까. 아니 그동안 나는 몇 번이나 응급실을 갔었던가. 떠올려 보니 내가 환자였던 경우와 가족이나 친지가 환자였던 경우로 나뉘어진다. 두 경우의 경험은 관점과 목적이 완전히 달라 같은 곳을 방문한 것인가 싶기도 하다. 분명한건 둘 다 정신이 없었다는 것과 의사는 단 한명도 기억나지 않는다는 것인데, 문제가 해결되었건 더 심각해졌건 절대 의사는 기억나지 않았다. 물론 내가 진료 받은 모든 병원의 의사가 기억나는 것은 아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상황이 심각할수록 담당하는 의사는 기억 속에서 사라지는 대상임이 분명하다. 이 책을 읽고는 더욱 확신을 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응급의사는 환자를 치료하는 사람이 아니고 최대한 그 상황을, 일어난 문제를 처리하는 해결사에 가까웠다. 설령 그 해결방법이 환자의 죽음일지라도 그것은 응급의사의 몫이었다.

 

사람이 병원에 갔을 때 가장 응급한 상황은 목숨이 끊어질 것이냐 붙어 있을 수 있느냐의 생사의 갈림길, 만약은 다시 없는 그 순간일 것이다. 작가는 바로 자신이 경험한 생사의 순간들을 자신이 만든 현미경으로 최대한 밀착하여 조심스레 전달하고 있다. 그곳에 신기하게도 지난날 내가 기억하지 못했던 의사가 서 있었다. 그는 사람을 살렸다고 웃을 수도, 못 살렸다고 울을 수도 없는 기계인형처럼 몸과 마음을 다바치고 있었다. 내가 의사가 된 것처럼 이토록 생생한 시점과 표현이라니.

 

우연히 페이스 북에서 한 챕터를 읽고는 바로 주문했다. SNS상에서 끝까지 읽기엔 꽤 긴 내용이었는데 단숨에 읽을 수 있었다

 

나는 지금도 가끔, 그 못이 빨려 들어가던 찰나와, 미련 없이 못을 안고 걸어오던 그의 고독과,

최후의 시선으로 못을 받아들이던 그의 안구 따위가 생각날 때가 있다.

내가 보고 있다는 사실이 당연하나 믿기 어려울 때, 어떤 광경을 보고 있으나 그 존재가 가늠되지 않을 때

무엇을 얼마나 더 잃어야 불행해질 것인지 생각할 때, 고독은 어떤 것일까를 고민할 때,

그리고 내 삶이 돌이킬 수 없이 망가졌다고 느낄 때, 이 일련의 광경을 한번 씩 떠올려 옆자리에 앉혀본다.”

 

숨을 멈추고 연속적으로 이끌려 들어간 몇 개의 문장들은 무엇을 얼마나 더 잃어야 불행해질 것인지에서 고독은 어떤 것일까’,를 지나 내 삶이 돌이킬 수 없이 망가졌다는 결론에 도달하고 있었다. 절망의 3단계를 참 정확하게도 정리했다는 느낌. 그러나 사람은 결국 타인의 불행을 통해 자신의 불행도 가늠해본다. 고로, 이 세문장이 내게 준 결과는 나도 불행 했었지에서 시작해 그러나 지금은 불행하지 않다는 자각이었고 그러므로 고독하지 않다는 깨달음 이었달까. 세상에, 저 문장의 대상은 눈에 못이 찔려 그 후로 평생 한 쪽 안구를 잃어버렸을 사람이었는데 말이다. 그런 일은 살면서 잘 일어나지 않는다. 그런데도 누군가, 혹은 내게도 일어날 수는 있는 일이다. 꼭 못에 눈이 찔리지 않더라도 그보다 더 끔찍한 일을 당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 그것은 아마도 누군가 눈 정도는 잃어버렸을 때라야 비로소 확실하게 드러나는 감정은 아니었을까.

 

죽고자 했던 사람들은 예정된 택배물처럼 도착했다.”

 

하지만 막상 책을 사들고 집에 와서 부터는 생각만큼 진도가 척척 나진 않았다. 누군가의 고통과 죽어가는 장면을 시시각각 확인하는 일은 꽤 많은 에너지가 필요했다. 그럼에도 멈출수는 없었다. 작가는 의사로서의 사실적인 표현은 물론 객관적인 사실을 자신만의 주관적인 의미부여로 마무리하는 일도 멈추지 않았다. 대부분 환자에겐 단 한번뿐인 죽음을 연속적으로 목격, 처리하고 돌아와 새삼 떠오르는 삶과 죽음의 의미,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시작되어야하는 일상들을 그리고 있었다.

 

이 책은 왜 쓰여졌을까.

이 글은 누구를 위한 글이었을까.

 

페이지를 넘기면서 나는 이러한 글을 쓸 수밖에 없었던 작가의 의사된 심정을 떠올려 보았다. 자살자가 쏟아지는 밤이 끝나고 나면 어김없이 수많은 죽음을 단정 짓던 자신의 혓바닥을 증오하던 그였다. 용기 있게 찢어진 열상을 모두 맡기고 견디어준 환자에겐 수고하셨다는 말을 잊지 않던 그였다. 지하철 투신 환자를 처리하고 돌아가는 퇴근길엔 무사히 덜컹거리며 집으로 향하던 지하철을 기적이라 부르던 그였다. 유가족들의 압도적인 오열이 귀를 관통한 다음엔 돌아와 숨죽이며 혼자 울 수밖에 없던 그였다. 성탄절에도 아픔을 멈출 순 없어 뜬눈으로 죽음을 맞이한 사람들과 함께 아침을 맞이하던 그였다. 우리와 다른 세계에 사는 괴물이거나 천벌을 받아야 할 악마가 아니라 바로 우리와 같이 살았기에 똑같이 하얀 눈을 보고 싶어 했던 사람들을 눈이 내렸다고 소복히 덮을 수는 없는 그였다.

 

책을 덮었을 때 비로소 잊을 수는 없었기에 차라리 기억하는 방식을 택한 그를 조금은 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죽음에 무감해지지 않기 위해 글을 썼던 것이다. 죽음에 무감해진다는 건 곧 삶에 무감해진다는 의미와 같기 때문이다. 문득 살고자 하는 일과 죽고자 하는 일의 무게는 얼마나 차이가 나는 걸까를 생각한다. 살고자 하는 일은 살아있는 동안 계속되므로 더 힘든 일로 보이긴 한다. 그러나 살고자 하는 정도와 노력의 차이로 인해 우린 그렇게 힘겨운 날들 속에서도 그럭저럭 견딜만한 날이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죽고자 하는 일에는 더 쉽고 덜 어려운 노력은 없다. 죽고자 하는 일은 성공과 동시에 종료되며 그 성공마저도 내가 누릴 수는 없다. 죽고자 하는 일도 결국엔 살아내야만, 사는 동안이라야 가능한 일이다.

 

그러므로 살고자 하는 일은 죽고자 하는 일과 모양만 다를 뿐 기실 속 내용은 같다는 점에서 우린 잘 죽기 위해 잘 살아야 하는, 아니 잘살아야 잘 죽을 수 있는 얄궂은 운명을 피할 길은 없다. 응급의학과 의사가 쓴 이 기록은 죽음을 잊지 않아야 삶도 더 생생하다는 역설을 묵직하게 제시한다. 어쩌면 우리는 응급하지 않기 때문에 매일매일 살아있다는 사실조차도 잊고 살아가는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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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 짐승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9
모니카 마론 지음, 김미선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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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알게 된지는 꽤 되었습니다. 언젠가 아는 분이 카톡 프로필에 이 책의 표지 사진을 올려 놓았더라구요. 그때를 아직도 기억합니다. 첼로 뒤에 숨어버린 알 수 없는 여자의 두 다리가 묘하게도 안쓰러웠거든요. 제목을 떠올리지 않았는데도 단박에 슬픈 감정이 밀려왔습니다. 막연하게 언제 한번 읽어봐야겠다 생각했죠. 작가와 소설에 대한 아무런 정보도 없었습니다. 그러고 보면 사람은 참 단순하고 기억은 의도하지 않아도 충분히 무책임하지 않은가요? 여자의 슬픈 각선미를 기억에 저장시켜 놓고 거기서 일 년이 더 흐른 후 엊그제 비로소 책을 덮었습니다. 그러니까 저는, 작년 여름엔 이 책을 스치기만 하고 잡아보지는 않은 사람이었습니다. 작가가 만약 작년 여름에 당신은 누구였느냐 묻는다면 그땐 당신을 모르던 사람이었습니다, 이렇게 대답했을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책 한권 읽었다고 작가를 알 수 있다고 답할 순 없겠지만 알고 모름의 답이란 대체로 주관적 판단이니까요. 이 책은 이렇게 작년 여름의 나를 떠올리게 하며 슬그머니 그러나 끈질기게 다가왔습니다. 책과의 인연을 믿으며 읽는 시기에 따라 의미를 부여하는 저로서는 작은 일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책을 읽을 수는 없었던) 작년 여름의 나와 (이 책을 읽을 수가 있었던) 올 여름의 나는 많은 것이 달라졌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책 속의 주인공은 자신을 지배하던 일상에서 한 사람이 사라진 후 더 이상 삶은 한 발자욱도 진보하지 못한 채 사는 것도 죽는 것도 아닌 삶을 이어갑니다. 삶이 제자리 걸음을 반복한다 하여 생의 의미가 없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어떤 스님이 그랬죠. 인생에 너무 깊은 의미를 두지 말라고요. 토끼나 풀 한 포기처럼 그냥 자신도 모르게 생겨나서 주어진 삶이니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 뿐이라 생각하라고요. 사실 누가 시키지 않았지만 그렇게 살고 있던 터였습니다. 정체도 익숙해지면 남부럽지 않은 안도감을 주긴 하니까요. 하지만 어쩐지 특정기간 삶의 정체는 전체 생의 퇴보와도 같은 무게로 느껴지는 것이 더 사실에 가깝죠. 말하고 글 쓰고 무언가 읽는 생활에 익숙하다보면 더 그렇습니다. 그래서 책 안보고 글 안 쓰고 살면 의미 찾기에 연연해하지 않아도 되니까 편한 건 있습니다. 굳이 찾고 밝히려 들지 않아도 삶은 또 다른 의미를 향해 자전하는 것이니까요.

이 책은 당분간 무엇에도 의미를 찾지 말자고 그러기 싫을 때까지 그렇게 살아보자고 남모르게 다짐한 제게 다시 의미를 찾아보라고 자꾸 귀찮게 하는 아이였습니다. 아마도 각자 우리의 생에 있어 어제까지 같이 호흡한 누군가 사라진다는 것. 그런 일은 왜 일어나는 것이며 그 후의 변화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느냐 질문하는 것 같았습니다. 작가는 일생 일대에 다시 오지 않을 사랑을 잃어버린 여성의 입장에서 남은 생을 이야기 합니다. 아니, 결국 하지 못합니다. 죽음으로 가는 것 외엔 별다른 의미가 없음을 강조할 뿐이니까요. 그 남아 있다는 것 자체가 재앙으로 느껴지도록 작가는 삶의 의미를 끈질기게도 고통스럽게 보여줍니다. 그렇기에 남아 있기 전 지나버린 시간이 얼마나 소중했는지 되묻습니다. 작가는 그때가 사십년 전이었는지 오십년 전이었는지 확실치 않다고 늘 반복합니다. 중요한 건 그 후로 사십 년 아니 오십년이 지나도 여전히 그때를 그리워하며 다른 건 하지 않겠다는 거예요. 앞으로 몇 년이 될지 모르지만 사는 날까진 그렇게 살 수밖에 없을 거라는 거예요. 그 지점에 동의하기까지 소설을 다 읽어야 했어요. 예감은 틀리지 않았어요. 작가는 결국 주인공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오래오래 설득하고 영원히 공감시키고 말아요. 대체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의 인생을 이해시킬 수 있을까요. 자신의 인생도 이해하기 어려운 이 시절에 말입니다.

 

작품 초반부에 주인공은 떠나간 남자를 회상하며 자기 인생 전체를 걸어버립니다. ‘태어나는 날부터 시작하여 내 인생 전체를 프란츠에 대한 오랜 기다림이라고 이해할 때만 내 인생이 의미를 갖는 것 같다’고 말이죠. 사실 얼마나 진부하고 상투적인 어법인가요. 그런데도 순간, 잠시 신선했다고 느꼈습니다. 살면서 그런 대상이 있었다는 것에 대한 동경일까요. 그렇게 단정지을 수 있는 확신에 대한 존중일까요. 인생 전체가 어떤 한 사람에 대한 기다림이라 할 때만 의미를 가진다는 해석. 그건 아마도 계속해서 기다리겠다는 결의로 들리기도 하는데 이것이 혹시 그렇게 살아온 자신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이자 최대의 평가는 아니었을까 싶어서요. 그렇게 평가하지 않고서는 더 이상 숨을 쉬며 살아갈 이유가 없다고 즉, 의미부여는 실제 무슨 의미가 있어서라기 보다는 대상의 의미를 스스로 부여할 때만 그만큼의 가치가 있다는 뜻으로도 들립니다. 자신 이외에 세상 그 누구가 의미를 부여해주겠어요. 한다한들 자신만큼은 아닐 겁니다. 어차피 사랑이란 지극히 주관적이고 그래서 더 절대적이니까요. 그래야지만 기다림의 세월이 누구 앞에서든 강력한 떳떳함이 될 테니까요.

 

그런데 말입니다. 자신의 인생이 한 사람에 대한 기다림이라고 의미를 부여하는 일이 누구나의 인생에서 일어나는 일 같지는 않습니다. 물론 사랑이 꼭 전부는 아니라 하더라도 사랑을 잃은 후 그 나머지인생이 의미 없을 수 있다는 데는 충분히 동의합니다. 사실 사랑에 대한 의미부여야 말로 얼마나 개인적이며 창의적일 수 있단 말인가요. 그런데, 그래서 인지 한 사람의 고백은 지극히 공감할 수 있거나 반대로 절대로 이해할 수 없을 수도 있는 것 같아요. 전부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것. 작가는 주인공의 프란츠에 대한 사랑의 근원을 원시시대의 공룡성으로 상징하더군요. 그런 원시성을 유전자로 지닌 주인공은 사랑이란 ‘그대를 차지하거나 아니면 죽는 것’이라 말합니다. 바꿔 말하면 너를 차지할 때만 사는 것이라는 뜻도 되지요. 나의 삶은 그러니까 나로부터가 아닌 철저히 너로부터만 생과 사의 여부가 결정나는 것. 사람들은 너 때문에 살기도 너 때문에 죽기도 하는데 그건 바로 사랑을 전제할 때 더욱 분명해지는 이야기인 것이죠. 이런 일은 누구와 얼굴 보며 말로 한다고 이해할 수 있는 일은 아닙니다. 사실 남의 사랑이야기야 말로 얼마나 유치하기 짝이 없고 말이 안되기 일쑤인가요. 그건 내가 남한테 남 이야기가 되었을 때도 마찬가지죠. 그런 남의 사랑 이야기를 내 것 보다 더 이해시키는 작업이 소설은 아닐까 이 작품을 덮으면서 떠오른 생각입니다. 소설의 재미와는 별개로 저는 사실 주인공을 이해하기는 어려웠거든요.

 

그래서 일까요. 이 작품은 읽을수록 작가를 감탄하게 만드는 소설인가 봐요. 첫 번째는 사랑을 매개로 한 기억과 사랑이 사라진 노년에 대한 사유가 깊고 달콤한 꿀맛 같아요. 결국 인간은 사랑을 하지만 사랑했던 사람을 잃고 사랑에 대한 기억을 잊어버리기 때문에 슬픈 짐승이라고 말하는 것 같아요. 기억자체는 ‘진주의 내부에 들어있는 이물질’처럼 조개를 성가시게 한 침입자일 뿐인데 조개 안에서 광택을 얻기에 소중한 가치를 부여받는다고 합니다. 조개처럼 이물질을 매끄럽고 아름답게 만드는 건 바로 인간의 영역이겠죠. 그것이 능력인지 노력인지는 잘 모르겠어요. 사랑에 대한 단 하나의 기억. 그리고 그 기억에 대한 의미부여. 작가는 그들을 이렇게 말합니다.

 

 

아마 사랑하는 사람들은 모두 자신들을 기적이라고 여길 것이다.   -p90

 

 

두 번째는 공룡이 살았던 시대부터 주인공이 살아내는 시간까지의 물리적 거리와 동독과 서독, 그리고 미국 등 여행지를 배경으로 하는 공간성의 놀라울만한 압축입니다. 시공간의 축약은 마치 이 소설의 배경이 한 장소인 것 같은 착각을 불러 일으킵니다. 박물관 학예사인 주인공의 성찰은 평소에 생각지도 않았던 공룡 브라키오 사우루스를 지구상에 존재했던 동물 가운데 가장 아름답고 슬픈 뼈대를 가지고 살았을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합니다. 그리고 그와 같이 인간도 다를 것 없는 뼈대를 이루고 한걸음 한걸음 지금까지 발자국을 새기며 인생이라는 시공간을 걸어왔음을 깨닫게 합니다. 어느 누가 살면서 사랑하게 될 사람을 거대 공룡의 모형 아래에서 운명적으로 만날 것이라고 상상할 수 있을까요. 이 구체적이고도 창조적인 환경은 아주 인상적입니다. 이 소설이 그저 그런 불륜과 통속이 아님을 증명이라도 하듯 주인공은 공룡의 뼈대와 발자국 아래에서 늘 생과 사를 고민하니까요.

 

마지막으로 과정으로서의 인간의 늙음과 결과로서의 죽음에 대한 그저 가만히 지켜보기입니다. 작가는 등장인물을 통해 여러 번 ‘사람이 인생에서 놓쳐서 아쉬운 것은 오직 사랑 뿐’이라고 강조합니다. 여자는 프란츠가 떠나간 후 그와 함께했던 시간을 ‘시간을 초월한, 어떤 숫자 도구에 의해서도 정렬되지 않는 시간’이었다 회상합니다. 그 이후로 계속 ‘바람이 통하는 어떤 공의 내부에서 살듯 그 시간 속에 살고 있’다고 그러나 ‘사랑으로 번민하는 인물의 상투적인 모습을 내가 가소로울 정도로 되풀이하고 있다는 것은 알만큼’ 나이가 들었다고 고백합니다. 사랑의 끝은 비극적이거나 진부하게 끝나거나 둘 중 하나라 결론짓습니다. 비극적이면서도 진부하게 끝나버린 사랑의 주인공은 결국 예정대로 노년을 맞이합니다. 노년은 죽음에 대한 준비로서의 쓸모밖에 없다며 작가는 주인공에게 다르게 살 수 있는 방법을 전혀 부여하지 않습니다. 살면서 어떤 상태에 온전히 빠져드는 것 말고는 달리 어찌할 바가 없을 때가 있습니다. 지나간 시간과 공간 속에서 산다는 것. 미래란 존재하지 않고 오직 과거만이 내일을 예견해주는 어제와 같은 오늘. 그곳의 시간과 공간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문제는 당사자가 별로 벗어나길 원하지 않는다는 것에 있지 싶습니다. 벗어나는 순간 삶은 끝나는 것일 테니까요.

 

이 책을 덮으면서 저는 시간의 속도에 대해 다시금 고민하고 싶어졌습니다. 어떤 일, 혹은 그 일과 관련된 어떤 사람은 한 사람의 인생에서 그가 늘 느끼고 숨 쉬던 시간의 흐름과는 아주 터무니없이 다르게 각인될 때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조직에 몸담고 있던 일 년은 그렇지 않았던 일 년과는 완전히 시계침의 속도가 다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과의 만난 기간은 그렇지 않았던 시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길거나 짧을 수도 있습니다. 누구나 삶의 일정한 어느 시기에 사로잡혀 꼼짝 못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지금의 우리, 나는 지나간 과거 어느 시점에 머물러 있으면서 한 발짝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닐까요. 사실은 거기 그대로 머물러 있고 싶으면서 발자국을 떼는 시늉만 하고 살아가는 건 아닐까. 지금 나와 당신의 발목을 잡고 있는 무언가는 과연 무엇일까, 갑자기 오늘을 되돌아 봅니다.

 

후회 없는 인생을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누구나 알다시피 어떤 선택을 했으면 그 결과에 대해 후회하지 않아야 합니다. 하지만 우린 늘 나중에 안 좋은 결과가 뻔히 보이는데도 지금을 택하고 순간을 늦춥니다. 대표적으로 사랑이라는 현재는 더더욱 나쁜 결과를 상상치 못하도록 힘이 세어지기 때문에 결과를 생각하기 싫어집니다. 아마 사랑을 잃게 되는 두려움이 눈앞의 많은 것을 놓치도록 하는 게 아닐까요. 주인공은 프란츠가 돌아오지 않자 방안에서 혼자 그를 오랫동안 사랑합니다. 기다려도 오지 않을 것을 알지만 그렇게 합니다. 어쩌면 오지 않을 것을 알기에 그렇게 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주인공은 인생의 결과를 예측할 수 있는데도 그 결과를 바꾸기보다 미리 알게 된 것에 만족하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쪽을 택합니다. 제가 슬픈 부분은 바로 여깁니다. 모든 것을 받아들였는데도 왜 주인공은 행복해지지 않았는지요. 어쩌면 우리 모둔 행복할 기회가 왔을 때 그것을 알면서도 눈감아버리는 존재들은 아닐까요.

 

불행하기 위해서 사랑을 시작하는 사람은 없지만 더 불행해지기 싫어 이별하는 사람은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사랑한다고 행복해지지는 않는 다는 거. 어쩌면 다시 행복해지기 위해 이별하기도 한다는 거. 원래 사랑은 행복과 불행과 상관없이 왔다가 가는 것인데 인간만이 지난한 의미놀이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다는 거. 왜냐하면 사랑이란 그렇지 않고서는 시작하거나 끝내야 할 필요성이 없는 것 일테니까. 역설적으로도 이 책에서 행복을 찾는 사람들은 마지막에 모두 사랑을 버리지 않나요.

 

어떨 땐, 지나온 모든 사랑을 추억하지 않고 더 이상 기억할 수도 없어 새롭게, 전혀 새로운 사람으로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합니다. 이건 제 생각인데 작가는 지독한 사랑을 이로써 잊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싶습니다. 질기게도 만나게 되는 악몽이 있는데 아마도 연기처럼 사라지길 소원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주인공은 통일이 되기 전 파괴된 도시를 보고 그때가 절호의 기회라 생각한 것인지 모릅니다. 집 전체가 불에 탈 경우 ‘가구와 그림 책, 그리고 우리 삶이 구체화 되었던 다른 모든 것들이 어떤 순서로 재가 되는지 중요하지 않’다고 했습니다. 사라지는 것은 순서가 중요하지 않고 오로지 사라짐 전체, 결과로서 사라졌다는 것만이 중요합니다. 이렇게 사랑하는 사람과 했던 모든 것이 사라진 후에 비로소 삶은 재건되어야 하는 게 아닐까요.

 

여름이 내 불타고 있는 가슴보다 미지근하다 생각된다면 슬픈 이 소설을 읽어보세요. 다 잊고 더 이상 잊어야 할 것이 없을 때까지 또 잊고 마음이 공허하다 못해 마음자체도 사라진듯하여 깃털보다 가볍다 느껴지는 순간, 아니 내 존재 자체의 무조차도 실감나지 않을 때 아마도 고개 들어 새로운 누군가를 향하게 될 수 있지 않을까, 감히 예견해봅니다. 인간은 슬프지만 그런 인간만이 슬픔을 겪을 수도 견딜 수도 지나올 수도 있는 거니까요. 그러면서도 인간은 아름다울 수 있는 거니까요. 최소한 브라키오 사우루스보다는 괜찮지 않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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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부학자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67
페데리코 안다아시 지음, 조구호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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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연말에 이어지던 술자리로부터 시작된 위와 장의 반란이 진정되고 몸의 컨디션이 제대로 돌아온 지가 얼마 되지 않는다. 신체 어느 기관의 균형이 깨지면 다시 원상태로 돌아가는데 예전과 같은 시간이 걸리지 않음을 뼈저리게 느꼈달까. 겨우 책상 앞에 돌아와 새해 처음 읽은 명작이 <해부학자>이다. 육체는 생로병사의 출발지이자 도착지라는 깨달음을 인식하고 있던 차에 이 책을 만나서 인지 책 덮으면서 가장 많이 떠오른 단어는 ‘육체’였다. 죽고 나면 썩거나 태워져 한 줌 재로 사그라드는 이 몸 뚱아리 하나를 보존하고 지속시키기 위해 살아있는 동안 우리는 얼마나 발버둥치고 안타까워하는지 그 모든 육체에 대한 정성이 새삼 서글퍼지는 시간이었다.

 

  소설의 구성은 크게 세부분이다. 해부학자가 어떻게 해서 종교재판을 받게 되었는지의 과정과 재판과정에서의 고소와 변론, 그리고 재판 후 해부학자에게 일어난 일, 즉 재판 전, 재판 시, 재판 후 이렇게 볼 수 있다. 이 모든 일은 해부학자가 달콤한 신대륙, 아메리카를 발견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작가는 해부학자 마테오 레알도 콜롬보의 이름이 탐험가 크리스토포로 콜롬보와 뿌리와 같다는 점에 착안하여 해부학자의 발견을 신대륙 아메리카의 발견에 빗대었다. 작가는 실존인물인 마테오 콜롬보에 대한 기록 - 여성의 클리토리스를 발견했고 교황의 주치의였다는 - 두어 줄을 가지고 소설이나 영화보다 더 극적인 스토리를 만들어냈다. 당시로선 신성모독이자 마법행위 아니 악마숭배로 평가될 이 발견의 업적 당사자가 어떻게 교황의 주치의가 될 수 있었는지,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인지 아무 기록이 없음이 바로 상상력의 시발점이 된 듯하다. 실제로는 ‘여자의 의지와 사랑과 쾌락을 지배하는 기관’을 발견했다는 사실과 누구나 우러러보는 교황의 주치의로 역임했다는 사실이 전혀 상관관계가 없는 별개 사안일수 있겠지만 작가는 사형수가 중죄를 뛰어넘는 권력자가 되기까지를 미스터리로 보고 그 중간 사연을 완성해냈다. 이 소설에 대한 많은 평가가 있겠지만 내겐 그 두어 줄이 불리고 불려져 이토록 흥미로운 소설이 되었다는 점이 가장 인상 깊었다.

 

  클리토리스와 주치의 사이에 극적인 사연이 탄생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해부학자가 여성을 대상으로 연구와 실험을 하고 여성을 도구화하여 사람을 치료했기 때문이었다. 해부학자는 창녀의 육체와 성녀의 영혼을 동시에 사랑한 남성이며 유모의 젖과 어린 여자아이의 피를 동시에 약으로 이용한 의사였다. 사랑으로 생명을 살리기도 했지만 생명으로 사랑을 저버리기도 했다. 그러니까 두 줄의 기록이 이백 장이 넘는 사연으로 꽃피운 그 중심에 꽃보다 아름다운 ‘여성’이 있었다. 그래서인지 소설은 육체를 죄악시하고 여자를 도구로 본 중세시대에 여성 해방에의 가능성을 탄압한 역사로 읽히기도 한다. 창녀학교가 종교교육은 물론, 고대 신화, 모국어, 그리스어, 라틴어를 가르치고 일종의 문예부흥학교로서 시청에서 보조금을 받았다는 서술은 당시 창녀의 신분을 말해준다. 고위인사로부터 공무원 임명장을 수여받는 졸업식은 어느 학교의 졸업보다 영예로와 보였다. 즉, 나라에서 공식적으로 여성의 성기는 자기 자신의 쾌락이 아닌 남성의 쾌락을 위해 사용되어야 함을 제도화 한 것이다. 그런 여성이 육체의 열망으로 자기 존재를 주체화하는 일은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일 것이다. 왜냐하면 여성은 영혼이 있어서 스스로 성욕을 조절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남성에 구속되는 소유물이지 자유가 허용되는 독립적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거의 현재까지도 남편이 아내의 개별적 쾌락은 인정하지 않는 성적 집단 분위기로 이어진 면이 있다. 작가는 해부학자의 길고 긴 변론을 통해 남성들의 여성에 대한 이중, 삼중적인 잣대와 시선을 꼬집는 듯 보였다.

 

  하지만 작가는 이미 시대가 죽여 버린 여성을 두 번 죽이면서 공평하게 그들을 죽음으로 몰았다고 볼 수 있는 남성들을 대표하여 한 사람의 희생양을 가공했다고 볼 수 있다. 해부학자가 여성안의 더 극적인 여성을 발견했지만 왜 소설 속 두 여인은 모두 참혹한 죽음을 맞이한 걸까. 해부학자의 첫사랑이었지만 창녀였던 소피아는 성병에 걸려 괴물처럼 죽는다. 자신의 여성성을 발견하게 해준 해부학자를 사랑한 이네스는 화형을 당한다. 한 여인은 클리토리스의 존재를 몰랐고 한 여인은 클리토리스를 제거했다. 클리토리스를 발견한 의미가 없어져버린 해부학자가 택한 인생의 결말은 이미 정해져 있었던 것은 아닐까. 많은 독자들이 이 소설의 백미를 해부학자가 펼쳐낸 자기 변론의 페이지들이라 언급하곤 한다. 그런데 멈출 수 없는 가속력으로 넘어가던 그들 페이지 끝에 에필로그처럼 무심하게 덧대어진 까마귀의 행복하고 평화로운 하루를 잊기가 힘들다. 사실상 해부학자보다 더 인간을 해부하면서 일상을 날아가는 까마귀의 날갯짓은 다시 우리네 덧없는 ‘육체’를 회상하게 만드는 일등공신이었다.

 

  탐험가나 해부학자가 아니더라도 무엇을 발견하고 그 발견의 기쁨을 상징하는 깃대를 어딘가에 꽂을 상상……을 해보지 않은 이가 있을까. 역사 속 해부학자가 무엇을 발견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그 진실을 허구화하여 자기 인생의 아메리카로 만들어버린 작가가 어쩌면 지금 우리가 마주한 현실에 기분 좋은 모델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각자 자신마다의 아메리카를 발견하기 위해 사는 것일지도 모르니까. 탐험가는 새로운 땅을 발견했고 해부학자는 새로운 여성을 발견했다. 한 사람은 우리가 사는 지구라는 세상을 확대했고 한 사람은 우리가 아는 여성의 영역을 확장했다. 이로써 우리가 아는 소설의 무게는 분명 늘어난 것이다. 이것은 우연일까 필연일까.

 

 

  우연은 마테오 콜롬보에게 서양을 향해 항해를 계속하면 동양에 도착할 수 있다는 사실을 계시해줄 것이다. 향신료를 찾는 사람이 우연히 근사한 금광과 맞닥뜨리는 것처럼, 자신과 동일한 성을 가진 제노바 출신의 그 남자처럼, 마테오 콜롬보도 자신의 ‘아메리카’를 우연히 발견하게 될 것이다. 운명은 그가 베네치아로 금의환향하기 위해서는 먼저 피렌체에 들어야 한다는 사실을 그에게 가르쳐줄 예정이었다. 한 여자의 마음을 지배하기 위해서는 먼저 다른 여자의 마음을 정복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되었다.       -109p

 

 

  이 소설에서 가장 좋았던 부분이다. 당시 해부학자는 예술가이자 과학자, 기술자였고 사상가이자 법률가였고 스승이자 전사였다. 레오나르도 다빈치형의 인간이었던 그가 소설의 주인공이 된 것은 우연이 아니라고 본다. 소설 속에서 그는 유려하고 감동적인 문장으로 성녀에게 연서를 보내는 문필가였다. 해부대상이 된 신체를 혼을 담아 그려낸 화가이기도 했다. 스스로를 변론하기 위해 그가 펼쳐낸 논리는 과학, 윤리, 종교, 도덕, 심리를 총 망라한 자기인생의 감독관이자 연출자의 관점이었다. 그리고, 그래서, 그런데, 이 모든 역할을 한 공간과 시간 안에서 펼쳐낼 수 있는 사람은 대체 누구일까.

 

  며칠 전 소설을 읽으면 뇌 부위가 활성화되어 읽는 사람이 마치 소설의 주인공이 된 것 처럼 느낀다는 연구결과를 본 적 있다. 뇌신경세포에 변화를 일으켜 소설을 읽고 나서도 최소 5일 지나도 그 효과가 지속된다고 했다. 소설가가 하는 일이 인간의 뇌를 변화시키는 영역에 있다하면 한 편의 좋은 소설은 한 명의 인간에 기여하고 남을 일이다.

 

  이 소설을 읽고 내 이름과 같은 유명인을 떠올려본다. 만약 유명한 미스코리아와 같다거나 대통령, 혹은 유명한 작가, 아니면 올림픽 메달리스트와 같았다면 오늘의 우연이 과연 어떤 의미였을까 생각하게 된다. 분명한건 그 우연이 행운의 범주에 있다 하면 반드시 그 이전에 어떤 갈망에의 발걸음과 실망스런 넘어짐이 무수히 반복된 후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소설 <해부학자>는 미래에 다가올 알 수 없는 반가운 우연을 준비하는 꽤 신선한 발자국쯤 되지 않을까.

 

  새해가 시작되면 어쩐지 꿈의 크기와 무게가 더 강력해지는 느낌이다. 우리 모두 각자 정복의 깃발을 꽂는 그날을 위하여, 그리하여 내 마음의 진정한 주인이 되는 그날을 위하여, 나의 아메리카여, 부디 끝까지 기다려 주시길.

  그것이 기나긴 발견의 기쁨이라면 당신도 그러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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