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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지자본주의 - 현대 세계의 거대한 전환과 사회적 삶의 재구성 아우또노미아총서 27
조정환 지음 / 갈무리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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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미있는 시간이었다. 우선 이 책을 처음 받아들고선 한숨짓던 날이 생각난다. 과연 내가 리뷰를 잘 쓸 수 있을까, 아니 끝까지 완벽하게 이해해 낼 수는 있을까 하는 걱정이 많았다. 분량도 만만치 않았고 평소 내가 선호하던 분야도 아니었고 마치 학교 때 교수가 지정해준 참고서적을 서점에 가서 울며 겨자먹기로 사들고 나오는 기분이었달까. 거기다가 그냥 자본도 반갑지 않은 터에 ‘인지’가 덤으로 붙어 있는 ‘인지자본’인지라 나는 더 머리가 아팠다. 학부 때 인지과학을 중심으로 한 연구방법도 생각나고 인지주의 학습이론도 떠오르고 그 시절 이후 인지는 더 이상 내가 인지하고 싶은 분야는 아니었다. 주제넘지만 제목부터 무슨 이야기인지 알 것 같았고 그 결론이 쉽지 않을 것임을 간파했다고나 할까. 대체로 (이렇게 많은 연구에도 불구하고)인지과학의 결론은 앞으로 더 연구해야 할 문제이다, 가 정답이다.

  거기다가 나는 이 책을 반쯤 읽었을 무렵 익명의 평가단으로부터 이런 책을 읽을 정도의 수준이 되지 않으면 괜한 불평말고 탈퇴나 하라는 뼈아픈 소리까지 들어야 했다. 이 책을 어렵다 말하면 수준이 낮은 것이라는 오만하고도 어이없는 작태에 며칠 젠 체 하는 먹물들에 환멸을 느끼면서 어디가 어려운지 확인이라도 하려는 듯 페이지를 넘겨갔다.(물론 어렵다는 걸 확인해야만 했다) 하지만 이 책이 쉽다는 사람은 마르크스가 쉽다는 것과 똑같은데 마르크스 연구하는 사람치고 그런 소리 하는 사람은 보지도 듣지도 못했다. 그 익명자가 이 책을 완벽히 이해하며 읽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솔직히 이 책은 어렵다기 보다는 지루하다고 해야 맞을 책이다. 그건 분량상의 문제가 아니라 이 책을 이루는 본문의 본질적 문제이다. 물론, 어려우니까 지루할 수 있으나 이 책은 결론을 위한 본론, 본론을 위한 서론, 서론을 위한 참고, 참고를 위한 선 연구가 꽤 긴 편이다. 책의 구성상 인지자본주의를 말하기 위한 마르크스의 ‘자본론’이 분량상 절반을 차지한다. 어떤 의미에서 마르크스 자본론의 재해석과 리메이크, 확장이라 할 수 있다. 나는 인지자본주의 자체가 설명되어 문제가 되기되고 대안을 제시해 내는 과정이 어려울 것으로 생각했는데 뚜껑을 열어보니 외려 인지자본은 마치 우리 생활에 체화된 이론처럼 잘 수용되었고 그 이전의 경제이론들은 마르크스 원론과 비교, 분석이 밀도높게 이어지다 보니 부담스러웠던 것이 사실이다.(인지자본주의는 쉽다) 마르크스 자본론 공부하려고 이 책을 펼쳤던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허나 연구자인 저자에게는 그 사실이 무엇보다 중요했을 것이고 마르크스에 비춘 인지자본의 결과를 논리적으로 이론화하는 것이 연구의 성과였을 것이므로 이 책은 인문학적 교양을 위한 서적이라기 보다는 사회과학적 연구실적이라고 해야 맞다. 학계에서 이미 인정을 받고 계신 분의 책을 내가 무어라고 평가할 수 있단 말인가. 일반독자인 나는 최대한 겸허한 자세로 이론의 주장을 이해하려고 노력할 뿐이었다. 마르크스 비전공자이면서 현재 저자가 말하는 인지자본주의 시대를 살고 있는 인지노동자중 한 사람으로서 인지자본주의를 인식하는 것이 왜 중요하며 인식 후에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를 생각하는데 초점을 맞추었다. 중요한건 작금의 시대가 인지자본주의가 맞느냐 아니냐가 아니고 인지자본주의 시각에서 바라본 우리의 오늘과 내일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나는, 이곳은, 하는 질문일 것이다. 그것은 꽤 단계성을 요구하는 인지적 사고, 의식적 과업의 과정이다. 아마도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은 어느 책보다도 인지적 사고 과정을 거칠 것임이 틀림없다. 연구엔 의미있었을지 몰라도 일반 독자에겐 너무 과한 마르크스 분석만 제외하면 이 책은 독서과정 자체가 다른 서적과도 차별화되는 인문학적 매력을 지녔다. 자본에 대한 역사적 흐름과 인지라는 과학적 개념을 합체하여 간만에 학구적인 시간을 가졌다. 오랜기간 연구한 성과이니 만큼 소장용으로서도 충분하다. 

  다만 아쉬운 점이 있었다면 서론과 본론에 비하면 인지자본주의를 아젠다로 확정 한 후 그 대안에 대한 내용은 다소 추상적, 상징적이고 힘이 없어 보였다. 사실 문제만 잔뜩 독자들에게 안겨준 느낌이 들었다. 공통으로서 공통되기는 최선의 결론으로서 비약적이다 싶었다. 그것이 비록 현재까지 가장 대안인 답안일지라도 구체적으로 여겨지지 않았고 이상은 너무 멀어 보였음이다. 다행히 사회 혁명적 대안문제에 관해서는 추후『혁명의 세계사』(가제)라는 책을 통해 역사서술적 방식으로 또 상세하게 다룬다고 하니 이 책은 현재 자본주의에 대한 현상분석과 결과 및 문제확인, 그리고 새로운 개념정리 정도로 이해해야 할 듯하다.


   
 
이제 자본주의는 세계의 운명인 것처럼 보인다. 어떻게 벗어나야 할지 서로 다 알면서도, 마치 옛날 민담에 나오는 호랑이 꼬리를 잡고 달리는 소금장수 신세같이 놓을 수도 멈출 수도 없다. 파국의 여러 징조가 보이는데도 꼭 잡고 계속해서 달려야만 한다. 내가 도시 외곽의 쓰레기장에 주목한 것은 지상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현재의 삶이 끝없이 만들어서 쓰고 버리는 욕망에 의하여 지탱되고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보다 더 많은 생산과 소비는 삶의 목적이 되었고 온 세계가 그것을 위하여 역량과 꿈까지도 탕진한다. 그러므로 이 작품에 드러나 있는 풍경은 세계의 어느 도시 외곽에서도 만날 수 있는 매우 낯익은 세상이다. 지옥 또는 천국처럼 낯선 것이 아니라 너무도 일상적으로 낯익게 되어버린 것이다. 그것은 우리 모두가 여기까지 달려오면서 만들어낸 세계이기 때문이다. 체르노빌처럼 후쿠시마처럼 ‘매트릭스’로서의 그 세계는 바로 우리 지척에 있다.

- <낯익은 세상, 황석영- 작가의 말 中에서>
 
   


  거대한 자본주의라는 현실에 계란으로 바위치듯 물질문명을 비판해온 작가들은 하나같이 문명은 운명이라 외친다. 황석영은 자본주의에 지배당해 그 결과로 드러나는 다양한 세상이 아무리 낯설은 것 같아도 결국 우리가 원하고 만들어 온 세상이기 때문에 어딜가나 낯익은 세상이라 말한다. 알면서도 벗어날 수 없는 것이 오늘을 만들어온 자본주의 세상이라 말한다. 그런데 정말 아무리 발버둥쳐도 그렇게 악마같은 자본주의는 벗어날 수 없는 것일까. 

  이 질문에 답하려면 우선 벗어나야 하는 이유와 벗어나고픈 욕망이 어디에서 기인하는지부터 체계적인 분석과 탐구를 요한다. 세계적 운명이니만큼 비슷한 고민을 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럴려면 자본주의가 그동안 우리와 주고 받은 것들을 면밀히 따져 물어야 한다. 물론 자본은 아무런 답이 없다. 지난 주에 이 책을 덮고 작가가 제시한 소설적 질문이 너무나 현실적이어서 거의 질문을 답으로 생각하며 그 답없음에 한숨을 지었다. 우리 사는 현실은 얼마나 비현실적인가. 세상엔 비현실이라는 답을 하지 않아도 되는 현실적 질문이 많다. 예를 들어, 왜 사는가?, 사람은 왜 사랑하는가?, 왜 밥을 먹는가? 등과 같은 질문은 굳이 답없어도 질문 자체가 성찰의 시간을 제공하고 결과를 말하지 않아도 그것으로 마음이 공유되는 성격을 가졌다. ‘자본주의’도 거대한 역사 프레임이 아니라 일상의 독서프레임에 놓고 보면 그 연장선상에 있는 질문이 아닐까. 우리는 아파트에 잘 살고 있으면서 아파트가 가져오는 인지적 착취와 그로인한 사회적 변화를 그다지 고민하지 않는다. 자본주의는 적어도 변혁이나 개혁, 혁명의 대상이 아니라 오랜 세월 불변하는 국가관이자 운명적 진리였다. 반공이나 민주주의, 세계평화와 같은 수준의, 그 문제가 아무리 심각해도 내 부모이니 어쩔 수 없는 종류의 기분좋지 않은 가치적 명제였다.

  저자는 우선, 동시다발적으로 조로하고 있는 21세기 자본주의를 인지자본주의라 명명한다. 인지란 무엇인가.

나는 이 책에서 인지를, 지각하고 느끼고 이해하고 판단하고 의지하는 등의 활동에 포함되는 정신적 과정을 총칭하는 용어로서, 감각, 지각, 추리, 정서, 지식, 기억, 결정, 소통 등의 개체적 및 간개체적 수준의 정신작용 모두를 포괄하는 의미로 사용할 것이다.  - 43p

  쉽게 말해서 이 책에서 말하는 인지는 정신작용으로 시작해 육체적으로 체화된 인간의 생체적 반응을 말한다. 내가 썼지만 뭔가 유식해 보이는 인지적 문법이다. 더 쉽게 말해 인간은 습관의 동물이라 할 수 있는데 (교육을 전공한 내 주변머리에 의하면) 인지도 습관화되는 보편성을 지녔다고 할까. 프랑스의 철학자 라베송은 이런 말을 했다. “습관은 그것을 낳은 변화를 넘어서 존속하는 것”이라고. 예를 들면 아침에 신문을 보면서 하루를 시작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이 오지에 여행을 갔다고 치자. 환경이 변화했지만 신문이라는 습관은 이미 내면화되어 있어 그 사람은 신문을 찾게 된다. 습관이 무섭다는 것은 단순반복성의 이유때문 만은 아니다. 라베송의 사유는 오늘날 많은 뇌 과학적 연구에 의해 인간은 습관을 인지화하는 능력을 지녔음이 밝혀짐으로 해서 철학의 과학화에 해당한다 할 것이다. 과학을 예견한 철학이었다.  바로 인간은 처음에 합리적인 생각도 시간이 지나게 되면 정서나 행동으로 변한다는 연구결과이다. 이것은 의식적 노력이 본능적 운동으로 변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달리 말하면 자꾸 생각하면 그것이 몸으로 체화된다는 말과 같다. 그리고 그 과정자체도 다양한 종류로 확대되며 습관을 반복할 수 있다는 뜻과 같다. 결국 인간은 부모, 환경, 교육, 경험 등 여러 가지 습관이 자기식으로 체화되어 이루어진 습관의 인지적 체화의 총체인 것이다. 저자가 말하는 인지자본주의는 이렇게 ‘사회공통의 동시 다발적인 생각’이 개인의 신체에 체화되어 우리는 오늘날 인지화된 노동을 반복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뜻이고 ‘사회공통의 동시 다발적인 생각’은 다름 아닌 벗어날 수 없는 자본주의의 운명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 습관이 생명을 위협하는 위기에 봉착한 것이라는 말씀이다.

  가장 가까운 시점부터 역순으로 따져 들어보면, 요즘 이슈가 되고 있는 반값 등록금, 무상급식에서부터 북 아프리카 및 중동의 혁명, 올 봄 일본의 쓰나미와 원전 사고, 2008년 금융위기, 촛불시위, IMF 사태 등의 일련의 역사적 현상들은 모두 자본주의의 위기를 방증하는 지구적 현상들이며, 3기 자본주의의 추락을 상징하는 연쇄적 형태라 말한다. 제 3기의 자본주의는 상업자본주의, 산업자본주의에 이어 나타는 것이며 인지노동의 착취를 주요특징으로 하는데 저자가 강조하는 것은 자본이 아니라 노동의 변화과정이다. 노동형태의 변화는 인지적 재구성을 가져왔고 그것은 자본과 금융, 시공간, 계급, 정치, 지성의 재구성을 가져왔다는 것이다. 그 결과 사람들은 우울, 불안, 공황, 두려움의 만연된 심리상태에 노출되었으며 사람들은 알면서도 뾰족한 대안 없이 하루를 살아간다는 것이다.

  저자는 노동의 인지화를 ‘영혼이 노동한다’ 혹은 ‘노동하는 영혼’이라는 말로 표현한다. ‘비물질노동’, ‘삶정치적 노동’이라고 말한다. 예를 들어 컴퓨터 프로그래머, 산업 연구원, 의사와 간호사, 교사와 교수, 예술가, 승무원들은 육체가 아닌 지식노동, 감정노동, 정보노동을 하는 사람들이고 이들은 자신도 모르게 점점 ‘인지화 되는 착취와 지배’속에서 영혼의 피로도를 축적한다는 것이다. 가장 설득력 있게 들린 것은 구글이나 사회연결망 서비스(SNS)가 다중들의 자유로운 인지활동을 기반으로 지적소유권을 독점, 유지함으로써 개인의 인지 및 사회적 소통활동을 결국 착취하게 된다는 말씀이었다. 자유로운 의사소통의 장(인지적 토지)을 만들어 놓고 그곳에서 이루어진 활동을 자신들에게 집중시키는 알고리즘을 설계하여 노동자체가 유발한 상품이 아니라 노동으로 발생한 가치를 소유하게 된다는 것. 특정 계급 집단이 사적으로 독점하는 것은 이미 금융, 공간, 교육, 환경 등의 분야에 걸쳐 일반화되었지만 나는 지적재산권이라는 문화자본에 더 절실함을 느낀다. 공유와 소유의 경계가 혼란스러운 작금의 시점에 나는 평소 누구를 위한 무엇을 위한 지적소유인지 그것이 궁금했기 때문이다. 다 가지고 있는 것 같으면서도 교묘하게 내 손안에 든, 내가 잡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느낌이 들 때가 많지 않은가. 물론 가진다는 것이 목적이고 그것 만이 중요한 사안은 아닐 테다. 그런데 분명, 누군가는 무엇을 위해 지적소유권을 가지게 되는 자가 반드시 발생하고 가진 자는 그것을 자신의 목적에 맞게 행사할 것이기 때문이다.

  평소 은둔적인 성향인 성격의 나이지만 이제 전자적 집단사회에서 개인은 진정한 은둔이 가능한가 묻고싶다. 은둔의 시대는 더 이상 가치를 상실하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SNS의 세상에서 나는 내가 아는 사람인지, 알고 싶은 사람인지의 여부와 상관없이 알았던 사람, 알아야 했던 사람, 알 뻔 했던 사람, 알고 싶지 않은 사람, 혹은 내가 아는 사람이 아는 사람, 그 아는 사람이 알고 싶은 사람들과 끊임없이 연결되며 인간관계가 양적으로 확대된다. 자발적이든 그렇지 않든 일단 그 세계에 발을 들여놓음과 동시에 나는 벌거숭이처럼 노출된다. 어떤 의미에서 SNS 세상의 모든 가입자는 자발적, 타의적 노출에 동의한 사람인 것이다. 세계는 파워 스위치를 터치함과 동시에 접속되어 매순간 업데이트 되는 인간, 물자, 지식, 정보들로 채곡히 충전된다. 나는 핸드폰을 끄지 못하고 잠드는 내가 과연 진정한 휴면에 들어가는 인간인지 궁금할 때가 있다. 이제는 어떤 사람이 죽으면 노자돈을 관속에 넣어주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 계정의 스마트폰을 넣어 주어야 할지 모르고 그를 위해 영구 밧데리를 개발하고 있지 않을까 싶어진다. 오늘날의 개인의 정체성이란 절대 혼자 스스로 정립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닌 것이다. 사회성은 곧 접속성과 동일시 되었고 실시간은 관계의 조건을 너머 대화의 의미와 가치를 지니게 된 것이다. 이것은 대단하고도 놀라운 네트워크의 인지화 과정들의 한 국면인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 잠들기 까지 아니 잠들어 있는 순간까지도 체화된 모든 인지적 작업들이 과연 내 의지에 의해 단 한 명의 자본주의 시민으로서 순전한 주체성을 행사하는 인간행위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이미 시스템과 운영체제는 인간의 신체와 정신 역량을 지배한지 오래되었고 문제는 그 지배의 주체가 누구이며 주체행위는 우리 인간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 인 것이다.

  저자는 9.11을 기점으로 금융자본에 의해 사회 모든 부위에 전이되던 조울증이 더욱 심각해졌고 이것은 개인의 건강 문제가 아니라 자본에 의한 인지적이고 문화적인 지배의 주요방식이라 말한다. 그러면서 자본은 노동자에게 계속하여 유연함, 사회성, 순발력, 융통성, 인내심등의 초능력을 요구하고 그것이 마치 현대사회를 능숙하고 세련되게 살아가는 주체적 양식인 것처럼 홍보한다고 전한다. 이 개인의 양식이 실현되고 인지노동이 펼쳐지는 곳은 바로 현대사회의 초대형 공장이라 할 수 있는 메트로폴리스이다. 메트로 폴리스를 상업적이지 않도록 가치화 하는 것은 예술공간이다. 예를 들어 해외의 유명한 건축가 자하 하디드나 안도 다다오 등을 불러놓고 공공시설을 도시의 랜드마크처럼 구축하는 것이다. 첨단의 화려한 파사드는 새로운 상징공간을 창출하고 사람들은 이를 통해 새로운 욕망에 자극 받는다. 이는 곧 예정된 부동산과 연계되어 새로운 자본을 지속적으로 축적하는 메트로폴리스적 불문율이 된다. 그러므로 가장 예술적인 것은 가장 상업적인 것이 된다. 오세훈 시장은 언젠가부터 공공디자인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내가 2008년까지 디자인 업계에 종사할 때 적어도 우리의 공공디자인을 망치는 사람들은 고위관직에 있는 공무원들이었지 한국의 디자이너들이 아니었다. 어디서 본 것은 많고 참여에의 생색은 내야겠으니 멀쩡한 디자인이 위로 갈수록 지져분하고 보편타당한 종합상품이 되는 것이다. 우리의 버스 컬러와 우체통 컬러가 왜 영국의 색깔과 틀린지 우리네 신호등과 가로등 디자인이 왜 뉴욕의 그것과 다른지 그것은 우리가 그 색깔을 몰라서 그 디자인을 그려낼 수가 없어서가 아니라는 말씀이다. 메트로폴리스가 삶권력공간, 인지착취의 산실이 되는 것은 우리가 메트로폴리스를 가꾸고 가공할수록 더 확실히 진행된다. 메트로폴리스는 계획된 도시이고 우리는 그 속에서 (잘 설계된) 자율적 삶을 살아가는 것으로 인식할 뿐인 것이다. 교통체계, 정보환경, 풍부한 인프라, 재산가치, 공공예술, 이 모든 것은 중산층 이상의 삶에 적합하도록 진행되며 오토매틱, 디지털화된 중산층이 욕망화 될수록 중산층은 줄어든다. 거인의 도시를 떠받치는 희생자는 늘어만 가기 때문에. 어쩌다 실업자가 된 사람의 다음 행보는 재취업과 노동이 아니라 노숙이나 범죄, 죽음이라는 추락인 것. 이것이 인지자본주의의 약속된 미래인 것이다.

  그런가 하면, 이 책에서 가장 인상깊었던 장은 인지자본주의에서 '지성의 산업화'를 말하는 11장이었다. 이것은 반값등록금의 문제와도 연결된 부분이고 자본주의 시대에 인문학의 의미를 되돌아 볼수 있는 중요한 주장이었다. 오늘날 대학은 상아탑의 기능을 상실한지 오래이고 대학에서 추방된 인문학은 다중지성들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그런데 저자는 대학에서 말하는 위기가 인문학과의 위기인 것이지 인문학의 위기는 아니라 말한다. 대학이 아니어서 그렇지 기업이나 국가가 다방면에서 인문학을 종용하고 있다는 것이 그 이유이다. 이는 곧 기업을 위한, 국가를 위한 인문학으로 가치가 목적에 지배당하면서 대학은 기존의 정치권력을 인문적 방식으로 재생산하는 하위군단이 되는 악순환 구조를 창출했다는 것이다. 기업문화는 군대문화 이후에 가장 내면화된 보편적 우위감정으로서 대중은 그것에 자발적 종속화를 실천했다는 것이다. 노무현 정부에서 고전붐이 일어난 것과 그것을 이명박 정부가 영어교육으로 대체한 것은 결국 인지적 구조위에 그 컨텐츠만 이동시킨 것이라는 내용이다. 고전은 어짜피 엘리트적인 국가주의를 심어 주는 것이고 영어는 경쟁을 강화하는 장치라는 것. 여기에 기존 진보, 좌파이던 인문학자들마저 이들과 영합하며 인문학 신보수주의가 되가고 있는 실정을 저자는 개탄했다. 나는 참다운 인문정신이란 개인과 사회가 가진 상처를 치유하고 더 나은 미래를 꿈꾸기 위해, 지금의 고통을 솔직하게 겪은 다음 희망의 불씨를 다시 지피우기 위해 존재한다고 믿는다. 많은 인문학자들이 인문학의 필요성을 이야기 할 때 이렇게 말하기 때문이다. 고전이나 영어나 인문서적이나 모두 우리 생을 풍부하게 하는 자양분일 것이다. 그래서인지 책 읽는 입장에서 지성의 인지적 재구성은 자본주의가 가져온 악덕이라 하기에 상당히 충격적이었다. 이 책은 저자가 말하는 인지적 착취의 양상들(공황, 우울, 불안)을 거시적으로 바라보게 하는 힘을 가졌다.

  그렇다면 인지적 치유는 불가능한 것일까. 세기말 자본주의는 돌이킬 수 없는 악의 구렁텅이요, 지옥의 산실인 것일까. 저자는 그 답을 자신의 연구실적인 '인지자본주의'에서 말하는 '인지'에서 찾는 듯 보였다. 저자는 한국의 촛불봉기와 아랍의 혁명에서 나타난 투쟁이 주체성에서 변화를 맞고 있다고 말한다. 투쟁이 인지적으로 유통되면서 국지적이 아닌 범세계사적인 사건으로 발전하게 되었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이것을 지도력의 부재가 아니라 새로운 지도력의 탄생으로 보고 있다. 특정 주체가 지도자가 아니라 누구나 지도자가 될 수 있는 개방 및 참여성의 문제라는 것이다. 이를 저자는' 다중의 공통되기'라는 용어로 시사화하였다. 인지적 지배를 탈피 하는 일은 인지적 창조라는 뜻으로 들렸다. 인지자본주의에는  인지혁명이 필요하다는 뜻이기도 했다. 인지착취의 대상이 많아졌다는 것은 역으로 인지작업량과 작업주체 즉, 참여의 인원이 많아진다는 뜻과도 상통한다. 비정규직 근로자, 노약자, 여성, 이주민등 기존에 비참여적, 소극적이었던 소외집단이 대거 자발적인 참여의 기회가 생긴 것이다. 적이 개발한 무기를 적에게 사용하는 경우가 아닐 수 없다. 저자가 주장한 것이 인지자본이었기에 나는 이 책의 말미에 제시된 프랑스 철학자 모리스 메를로-뽕띠(Maurice Merleau-Ponty, 1908-1961)의 말을 다시 새기고 싶다.

   
  모든 것을 바라볼 수 있고, 스스로를 바라볼 수도 있으며, 따라서 자기가 보는 것 속에서 자기의 보는 능력의 이면을 인식할 수 있는 몸, 다시 말해 보는 자기를 보고, 만지는 자기를 느끼고, 자기 눈에 보이고, 자기 손에 느껴지는 몸은 그 자체로 공통된 세계를 구성하는 인지적 존재로 나타난다.

- 『눈과 마음』, 마음산책, 2008
 
   


  이 책의 시작은 정치, 사회, 경제학이었지만 결론은 철학이었다. 새로운 다중, 새로운 군주로서 스스로 혁신적인 존재가 되는 길은 무엇보다 인간 자신이 인지적 존재임을 깨닫고 창의적인 인지적 과정을 수행해나가는 것이었다. 철학이라는게 늘 부족하고 허탈한 것 같아도 마음에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것은 우리 스스로 인지적 사고과정을 유도하는 미덕을 가졌기 때문일 터이다. 이 결론은 작년에 코이케 류노스케 스님이 <생각버리기 연습>에서 제시한 수행과정과도 같은 맥락에 위치한다. 스님은 생각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생각외에 다른 것을 할때 그 생각을 버리고 그 다른 것에 더 집중하라고 주장했다. 완벽을 포기하라는 것이 아니고 내가 가진 모든 감각을 가동해 각자의 감각에 충실하게 집중하라는 말씀은 결코 생각이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생각의 폭이 더 확장되는 효과를 가져올 터이다. 그것은 메를로-뽕띠가 말하는 인지적 존재와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다.

  저자의 말처럼 ‘구경꾼이 아니라 자신을 지배하는 정보수단을 변혁수단으로 이용해 다른 미래를 창출하려는 혁명적 참여자이자 창조적 예술가’로 살아가기란 말처럼 어려워 보이는 결론이었다. 하지만 애초부터 거창하게 혁명이나 예술같은 위대한 존재를 바라지 않고 무엇보다 스스로 인지적 존재임을 깨닫는 과정이 선행된다면 불가능한 일도 아니라는 생각이다. 이 책을 덮으며 스스로 내 자신의 사고 과정을 시뮬레이션 해보게 된 것은 내가 이 책을 통해 얻은 적지 않은 기쁨이었다. 자본에 상처입은 우리들의 인지적 치유는 자본없이도 실행가능한 일이 아닐까. 그것은 바로 오늘이라는 자본주의를 살아가는 진지한 성찰일 것이고 내일의 위기를 준비하는 가장 쉬운 방법의 인지적 행동은 아닐까. 인지자본주의는 노동자를 인지적으로 착취할 순 있어도 계속되는 노동자의 인지적 사고는 막을 수 없는 것이다. 착취냐 치유냐, 그것은 인지적 존재인 우리 자신의 인지적 사유에 답이 있을 터이다. 그것만을 인지하자.


<덧붙임>

  

 mess-up mess-age issue, 2008, primaverasurotoñonorte 에 실린 제프 사피의 그림들


  이 책에는 각장의 말미에 편집상 의미있는 사진과 일러스트들을 첨부해 눈길을 끌었다. 책의 표지가 가장 인상적이었는데 <기억을 먹어치우는 약탈자>라는 그림을 그린 제프 사피(Jef Safi)가 그린 또 다른 일러스트이다. 이 작가가 그리는 대중은 자신을 스스로 갉아먹는 대중으로서 보통 신체의 일부분이 왜곡, 훼손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주로 대중매체에 희생된 개인의 이미지를 가해자인지 피해자인지 구분짓지 않고 제시한다. 3D 안경을 낀 대중들, 타자의 아우성을 그대로 먹고있는 개인의 정체성은 그대로 자본주의의 위기를 말해준다.

그러므로 인간의 인지는 결국 정신으로 지배되어 나타나는 극명한 신체적 결과인 것이다.

우리가 사는 자본주의는 실은 물질문명의 실재를 보고 만지는 것이 아니라 정신문명의 환상을 자각하고 감내하는 과정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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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P 2011-06-27 2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진 리뷰이면서 너무나 가슴에 확 와닿는 리뷰인데요. 댓글을 쓰며 고개를 절래 절래 흔들며 대단하다고 감탄을 하며 댓글을 쓰고 있습니다. 헉! 너무 대단하심! 그리고 전 요즘 데이비드 하비의 맑스 자본 강의를 보며 자본론을 읽고 있어요. 노동에 관련된 일을 하고 싶어 공부를 하고 있는데 경제학원론을 공부하다가 그리로 빠지게 된 셈이죠. 이 책 전 반드시 읽어야 겠어요! 한사람님의 리뷰가 얼마나 굉장한지를 새삼 다시 한 번 느껴요. 저도 사실 경제학으로는 젬병이라서 잘 모르는데 리뷰가 너무 많은 도움이 됐네요. 으..정말 어떻게 이렇게 쓰시는지..감탄하고 가요. ㅋ

esmeral 2011-08-31 17: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저는 웹진 <자율평론>에서 활동하고 있는 김정연이라고 합니다.

다름이 아니라, 한사람 님이 작성하신 <인지자본주의>에 대한 서평글을 오는 9월 초 발행 예정인 <자율평론> 36호 게재할 수 있을지 문의를 드립니다.

<자율평론>은 2002년부터 지금까지 총 35호의 웹진을 발행한 계간 정치철학 웹진이며, 누구나 인터넷을 통해 자유로이 접근할 수 있는 copyleft 웹진입니다. 그간 <자율평론>에 게재되었던 모든 원고들은 아래 링크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http://waam.net/xe/autonomous_review

<자율평론>은 인문학 강좌 공간인 다중지성의 정원, 독립 출판 활동을 하는 갈무리 출판사, 세미나 공간 다중지성 연구정원의 마디 단위로, 위 공간들에서 이루어지는 다양한 지적 활동들의 성과들을 모아내고, 우리들의 생각을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한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저희가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매체가 아니기 때문에 원고료를 드리기는 어렵지만, 게재를 허락해 주신다면 웹진이 발행되는 대로 PDF 파일을 보내드리겠습니다.

모쪼록 긍정적인 검토를 부탁드리며, 더 궁금하신 사항이 있으시다면 아래 연락처로 언제든지 연락을 주시기 바랍니다.
그럼 연락 기다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자율평론> 편집위원회 김정연 드림
daziwon@waam.net / 02-325-2102
 
헬프 1
캐서린 스토켓 지음, 정연희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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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만 손, 하얀 질문



내 두 팔을 벌리고
태양을 마주하여
춤추고! 돌고! 돌고!
짧은 하루가 끝날 때까지,
어스레한 저녁에 쉬는......
키가 크고 늘씬한 나무......
부드럽게 다가온 밤은
나처럼
 까만색.

 -『랭스턴 휴스 시선집』 中에서 


   미국 흑인 문학을 대표하는 랭스턴 휴스(1902∼1967)는 흑인들을 향해 피부색에 자부심을 가지라고 응원하는 시인이었다. 바닥은 분홍색이고 등은 암흑같은 손이지만 조상들에게 물려받은 소중한 보물이므로 엄숙하게 여기자는 것이다. 옳고도 아름다운 말씀이다. 하지만 시인이 전하는 자부심은 그들 삶의 긍지에서 기인한 당당함이라기 보다는 삶의 애환을 극복하려는 애잔함으로 다가온다. 어쩐지 백인을 향한, 백인을 견디고 극복하려는 상대적인 선언으로 느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 자신을 사랑하겠다는 의미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는 이런 시를 읽고는 묘하게도 같은 유색인종으로서 얼마간 공감하는 마음보다는 다행히도 우린 흑인은 아니라는 안도감이 앞선다. 백인은 아니지만 그래도 흑인은 아니라는 비겁한 심리를 숨길 수가 없다. 이런 내가 마음에 들지 않지만 그 안도감은 낯선 것도 아니었다. 그동안 나는 흑인이 등장하는 영화나 그들이 억압받는 종류의 이야기를 만날 때면 그들을 향한 연민과 울분에 실컷 공감하다가 뒤돌아선 꼭 흑인여성으로 태어나지 않아 얼마나 다행인가, 하는 어린아이같은 생각을 해왔다. 내게 있어 흑인은 오바마 대통령, 오프라 윈프리 같은 성공한 인물보다는 아직도 할렘가를 어슬렁거리는 불량배, 기아와 에이즈에 시달리는 아프리카 난민, 유흥가에서 호객행위를 일삼는 마약 매춘부들이 먼저 떠올려지는 까닭이다.

  시인이면서 소설가이고 인권운동가로서 현재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흑인여성 중 한명이라는 마야 엔젤루(1928~ )는 작년에 한국에서 출간된 <딸에게 보내는 편지, 2010, 문학동네>를 통해 어린 시절 오빠와 함께 흑백분리 영화관을 다닌 적 있다고 그 생생한 설움을 전하였다. 매표소부터 백인의 손가락질을 받으며 쓰레기가 밟히는 2층의 흑인 전용 상영관, 그 닭장같은 곳이 기억난 건 당대의 유명한 백인 배우들(오드리 헵번, 그레고리 팩, 헨리 폰다, 찰턴 헤스턴)과 함께 나란히 초청되어 유명한 영화감독을 기념하는 자리였다. 그때 그 영화 속의 하얗고 눈부신 주인공들 앞에서 추모사를 낭독하려던 마야 엔젤루는 그만 '유명하고 돈 많고 인정받는 하얀 당신들을 증오해'라고 말하고 싶은 충동으로 한참이나 아무 말을 못했다는 고백을 한다. 마야 엔젤루는 내가 이 책을 읽고 제일 먼저 떠오른 흑인 여성이었다. 그녀가 흑인여성으로서 뼛속부터 각인된 분노를 견디고 이겨내는 방법은 문학이었고 그녀의 시와 소설은 이 땅에 사는 딸들에게도 큰 울림을 선사한 바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평소 미국의 젊은이들에게 졸업을 축하하며 의미심장하게도 ‘너희들은 이 나라를, 우리나라를 지금 보다 나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 일할 준비가 되어 있느냐’고 똑바로 물었다. 나는 오랜만에 그녀의 책을 뒤적이면서 밑줄이 그어진 이 문장을 보고 흠칫 머뭇거렸다. 그 질문은 공교롭게도 이 책에서 작가로 데뷔하는 스키터가 작가가 되고파 하는 아이빌린을 만난 날, “현실을 바꾸고 싶다는…… 생각, 해본 적 있어요?”하며 아이빌린을 혼란스럽게 만든 질문과 겹쳐졌다. 나는 그들의 심장같은 연타의 질문에 그만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동안 현실에 적응하려고 발버둥친 적은 많았으나 그 현실을 바꾸어 보려고 생각한 적도, 노력한 적도 없지 않았나, 싶어서다. 그것은 더 이상 흑인이 아니어서 다행인 나에게도 피해갈 수 없는 꽤 둔중하면서도 동시에 예리한, 그러면서도 현실적인 질문이었다. 그들의 검은 손가락이 똑바로 나를 가리키며 그래, 당신은 흑인이 아니어서 행복한지 묻는 것 같기도 했다. 그 질문은 거의 이 작품이 최종적으로 던지는 한마디는 아니었을까. 그래서 나는 이 작품을 1960년대 인종차별이 극심했던 미국 남부 흑인 여성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나처럼 현실이 까맣게 불타버려 실은 피부색같은 건 하나도 의미없는 자들을 위한 소설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렇게 누구보다 현실을 바꾸고 싶다는 마음으로 페이지를 넘겨갔고 내가 처한 현실과 자주 비교하며 조용히 울고 실없이 웃었다. 책을 덮었다고 내 까만 현실이 달라진 것은 아니었으나 나는 분명 조금은 하얗게 변한 마음이 들었다. ‘어젯밤만 해도 나는 내 인생에 새로운 것은 전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는 이 책의 마지막 문장을 그러잡으며 두 손에 힘을 주어본다. 나는 그들에게 한 번도 손을 내민 적이 없었으나 그들은 그 까만 손으로 나를 보기 좋게 ‘HELP’ 해 준 것이었다.


虛스토리가 herstory로

  소설은 특이하게도 세 명의 여성이 시점을 번갈아가며 자기가 처한 입장을 최선을 다해 설명하고 자기 고민을 우리와 깊게 나누는 형식이었다. 드라마나 영화 대본으로 인식될 정도로 매 장면마다 섬세한 연출력을 선사했고 인물마다 에피소드가 분명하고 풍부해 이야기로서 현실감이 구체화, 극대화 되었다는 것은 이 소설이 지니는 개성이자 장점이었다. 서사의 디테일, 이야기의 밀도, 긴 호흡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흡입력을 잃지 않게 하는 작가의 고집스런 의지가 글의 행간에서 느껴질 정도로 소설은 긴장감을 유지했다. 이 소설이 올 여름 영화개봉을 앞두고 있다는 것도 반가운 소식이었는데 보통 영화가 원작의 감동을 따라가지 못하는 경우가 많지만 모르긴 해도 책만으로도 영화의 감동을 미리 예상해보기에 충분했음이다.

  우선 소설의 배경은 1960년대 미국 남부 미시시피주의 잭슨이라는 마을인데 글만으로는 오십 년 전의 미국에서 우리의 80년대가 상상되는 느낌이었다. 표면적으로는 고용주로서 백인 여성들과 가정부로서 흑인 여성들이 소설적 관계를 맺고 흑인의 인권문제를 앞세우는 구조였지만 그 이면에는 이들 주종 관계의 징검다리 역할을 하는 백인 작가 지망생 여성이 소설 속에서 소설을 통해 흑인여성들의 자아를 해방시키고서 동시에 자신의 자아를 성취한다는 복선적 주제를 함의하는 소설이다. 인물의 뼈대는 스물셋의 백인 작가지망생인 스키터와 아들을 잃고 상처를 지닌 50대 흑인 가정부 아이빌린, 그리고 그녀의 절친인 30대 가정부 미니를 주축으로 스키터의 동창생과 그녀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백인 여성 셀리어, 그녀들의 가족, 같은 동네에서 그들의 가정부로 사는 흑인 여성들이 뭉클하고도 통쾌한 이야기를 만들어 갔다. 남자로서 여성의 갈등에 기여하는 인물은 스키터의 동창생인 힐리의 옛 연인이자 셀리아의 남편 미스터 조니 정도였고 나머지는 그야말로 에피소드와 함께 스쳐 지나가는 인물들로 보여졌다. 그러니까 이 작품은 여성이 만든 여성의 이야기를 여성이 말하는 꽤 상징적인 미국식 herstory의 자아실현물로 볼 수도 있었다.

  흑인과 백인의 갈등은 자칫 단순하고 진부해 보일 수 있는 소재였지만 작가는 미국 남부 잭슨 마을을 보편적인 인간군상의 무대로 활용하며 세대간, 계층간, 동성간의 정교한 일상과 심리묘사로 절망과 희망을 밀도높게 조율했다. 작가의 대리인으로 보인 스키터는 ‘가정부 위생 발의안’을 구상한 힐리와 육아와 살림엔 도통 관심이 없는 엘리자베스와 동네 오랜 친구였지만 유일하게 결혼하지 않은 싱글이기도 했다. 내 경우를 보아도 미혼인 친구들은 기혼인 친구들과 공통된 관심사가 거의 없다. 미스 리폴트(엘리자베스) 집의 가정부인 아이빌린에 따르면 이들은 사교적인 모임에서 자식, 옷, 친구, 딱 세 가지만 말한다고 한다. 이를 한국식으로 정리해보면 ‘자식’은 반드시 남편과 시집식구들을 포함한 자기가족을 의미하며, ‘옷’은 자신을 돋보이게 하는 상품으로서 아파트나 자가용, 가방등으로 표출되는 허영심을 상징하며, ‘친구’는 자신이 알고 있는 사람들, 이른바 주변인 혹은 남들의 이야기인 것이다. 한마디로 어딜 보아도 절대 자신에 대한 내면의 성찰과는 상관이 없다. 혹시라도 기혼녀의 모임에 미혼인 친구가 속하게 되면 이미 신산한 인생사를 겪었다고 자랑하는 그들이 스키터와 같은 친구에게 충고하는 건 딱 한가지이다. ‘좋은 남자를 만나라’, 예나 지금이나 미국이나 한국이나 중산층 이상의 가정에서 향후 보다 안전한 生의 기득권을 빠르고 쉽게 쟁취하는 일은 조건 좋은 남자와의 결혼이 가장 모범답안인 것이다. 세상이 변하여 ‘자아실현’이라는 답도 무효인 것은 아니나 ‘좋은 남자’는 아직도 효력면에서 우세하다. (자기는 그렇지 않았지만)딸을 좋은 남자와 결혼시키는 것이 자기 남은 생의 최대 목표가 된 속물적 엄마의 전형성을 보여준 사람은 예상대로 스키터의 엄마였다. 이것은 작가하겠다는 딸에게 안정적인 행복을 주입하려는 오늘을 사는 여기, 우리 여성들에게도 익숙한 모습이었다.

  캐릭터 상으로 전형성이 더 부각된 인물들은 하나같이 백인 여성이었다. 그것은 그들이 주로 가해자였고 가정부가 피해자였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내 생각에 바로 작가가 백인여성이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었다. 아이빌린, 미니, 콘스탄틴, 율 메이 등 가정부들 중에서는 미니가 제일 활력적으로 느껴졌지만 그녀도 어쩐지 바라보는 시각에서 타자화된 대상이라 생각되었다. 자신과 같이 성장했고 같은 교육을 받았고, 비슷한 환경에서 비슷한 생각을 하며 살았고 같은 일을 하고 있는 친구들의 생각과 행동, 심리묘사는 리얼하다 못해 안스러울 정도였다. 백인의 위선은 내가 가장 잘안다 식의 고발적 문장들은 사실 고백으로 들리기도 했는데 그 과정이 작가에게는 뼈아프고 고통스러운 시간일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자신을 되돌아보고 성찰을 통해 성장할 수 있었던 건 아닐까. 그녀가 말하는 백인 여성은 하얀 얼굴과는 달리 모두 속은 시커먼 유형의 인물이었다. 힐리는 마을의 유능한 여성일꾼이었다. 겉으로는 지역과 주민의 발전을 위해 빈번한 자선행사를 개최하고 공통의 복지를 위해 법안을 개진하여 긍정적인 여론을 형성하는 진취적 인물인 것 같지만 뒤로는 자기 집단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하층계급을 억압하고 일방적인 권력행사를 통해 주종관계를 영속화 하려는 위선적인 지역인사의 대표적 모델이라 할 수 있다. 머나먼 아프리카 아이들을 위해서는 돈을 보내도 내 가정부가 자식들 등록금이 모자라 손을 내밀 땐 원칙을 내세우는 식이다. 실제로 아프리카 난민에 울음짓고 이름도 잘 기억나지 않는 각종 단체에 기부는 해도 내가 알고 나를 아는 이웃의 불행엔 외면하는 것이 우리 모습이 아닐까. 좋은 환경에서 고등교육을 받아 사교적인 성격에 능숙한 언변까지 갖춘 사람들은 힐리의 위선을 욕하기 보다 힐리와 자신의 싱크로율을 점검해 보아야 할 터이다. 미스 리폴트는 뚜렷한 개인 주장은 없으면서 영향력있는 친구를 추종하며 그의 행보와 지시를 무조건 따라하는 기회주의의 인물이다. 이런 유형은 우리가 잘 알다시피 명품이나 동안, 패션에만 관심있고 텅빈 내면을 화려한 외양으로만 메워보려는 사람들이다. 셀리아는 어린 시절 가난한 빈농출신으로서의 열등감 때문에 현재의 자신이 늘 불안한 인물이다. 운좋게 남자를 통한 신분상승에 성공했지만 남편이 지역의 유명인사인 힐리의 옛 연인이었기에 이웃으로부터 따돌림을 당하는 경우였다. 돈과 시간이 많아 과도하게 외양을 치장하는 것에만 만족을 느끼고 감정의 기복이 심해 우울증을 겪고 있는 외로운 인물이었다. 작가는 이들이 언뜻 보기엔 세련되어 보이고 타인에게 예의바른 공동의 선을 추구하는 교양있는 백인 여성인 것 같아도 가정에선 흑인 가정부에게 살림과 육아를 전적으로 맡기는 것은 물론 자신들의 고민이나 가족간 갈등, 살아가는 지혜 등 정신적인 부분까지도 의지하는 나약한 면모를 자주 일러주었다. 바로 작가 자신이 그러한 가정에서 자랐고 누구보다도 흑인 가정부로부터 많은 위로를 받았기 때문이다. 백인 여성들은 결국 각자 다른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같은 여성인 흑인을 적극 이용한 것이었다. 힐리는 자신의 영향력이 어디까지 미치는지 확인하는데 가정부를 앞세웠고 미스 리폴트는 아이를 사랑하는 시간을 가정부에게 일임하므로써 자신을 더 사랑하는데 시간을 투자했고 셀리아는 남편과의 형식적인 관계를 원활하게 유지할 목적으로 가정부의 도움을 적극 활용했다.

  이렇듯 백인 여성의 herstory는 흑인 여성의 성실함과 부지런함, 그 고생과 사랑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반대로 흑인 여성의 herstory는 그들로부터의 눈물과 상처위에 씨앗이 싹트고 울분이 자라나는 것이었다. 타자의 노력과 고통으로 성립된 이야기는 자신의 이야기가 아닐 터이다. 비록 남들이 보기엔 초라한 사연일지라도 자신의 눈물로 영글어진 이야기가 진실하고 감동적인 이야기 일 것이다. 이 작품에서 백인 여성의 虛스토리가 진짜 이야기로 탄생하는 것은 작가의 대리인인 스키터의 역할이자 책임이었다. 그녀는 흑인 여성의 herstory로 자신의 herstory를 완성했다. 백인의 虛스토리가 비로소 색깔있는 유색의 이야기로 탄생한 것이다. 그것은 까맣게 타들어간 와중에도 마지막 남겨진 백인의 자존심은 아니었을까.


자기절망이 자아실현으로 

  스키터와 친구들의 공통점은 모두 가정에 흑인 가정부를 두고 있다는 것이었고 그녀들의 손에서 자랐다는 것이었다. 작가 캐스린 스토킷은 어린 시절 자신을 키워준 가정부 디메트리를 떠올리며 한번이라도 그녀의 입장이 되어 본 적이 있었는지를 자문하며 그 미안함을 이 소설로 화답하였다 고백한 바 있다. 또 출판사로부터 수십 번 외면당한 작가의 경험은 이 작품에서 스키터가 그녀들의 이야기를 소설로 완성시키고 기어이 출간이라는 성공을 이루어 내는 소설 속 소설구성 및 출간이라는 형식을 완성시켰다. 그런데 그 소설 속 소설은 허구가 아닌 엄연한 사실을 바탕으로 했기에 외려 물리적인 진실성을 확보하는 장치가 되었고 스키터가 소설을 완성하는 것 자체가 독자에게 비슷한 성취감을 제공하는 효과를 제공했다. 즉, 이 소설에서 스키터가 다름 아닌 자기경험을 쓰게 되었고 그것을 힘겹게 완성하여 마침내 출판까지 이르러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주었다는 스토리는 이미 작가의 소설로 현실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소설이상의 극적이고도 비현실적인 소재였던 것이다. 이 소설은 일반적인 루트를 통해 세상에 등장한 것이 아니라 바로 스키터처럼 아니 어쩌면 그보다 몇백 배 더 세상으로부터 거절, 외면당하고 난 뒤에 빛을 보게 되었고 그런만큼 그 성취와 영광도 남달랐기 때문이다. 소설에선 이미 성장기에 작가적 시선을 키워온 스키터가 작가의 대리인으로서 친구들의 위선과 부모의 허영심을 뒤로하고 소설적 주제를 발굴해 그것을 완성시키는 과정을 자기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으로 볼 수 있었다. 뉴욕의 출판사 편집자는 스키터에게 여러 번 우습고 하찮아도 자신만이 할 수 있는 독창적인 이야기를 찾아내라 주문하였다. 마찬가지로 작가는 그동안 인생에서 돌아보지 않았던 과거의 인물, 그 타자에 대한 재발견을 통해 자기 자신을 찾은 것으로 볼 수 있다. 무심했던 타자의 고통을 다시 복원해 그것을 섬세한 시선으로 투시하고 그의 고통을 자기 것 마냥 절실하게 끌어안고 체감한 후 독자와 진심으로 그것을 소통하고자한 노력이 바로 더 강렬한 진정성을 발휘하게 하였다는 점에서 나는 작가의 영리함을 실감했다. 소설의 주인공이 성취한 것은 곧 작가가 성취한 것과 동일했다는 것이 이 작품이 다른 작품과 가장 차별화되는 장점이자 매력은 아닐까.

  또 가만 보면 이 소설엔 자신의 고통을 글로 쓰는 사람들이 결국 글을 완성함으로써 글이 자기 생을 치유하는 역할을 하였다는 것을 확인시켜 준다. 그것은 내가 이 책을 통해 가장 현실적으로 체험한 사실이기도 했고 또 지금의 내 현실과도 가장 밀접한 단서였다. 아이빌린은 중학교 때부터 기도문을 쓰기 시작해 평소 일기처럼 자신의 감정을 글로 정리하는 사람이었고 그녀가 사고로 잃은 아들은 미시시피에서 유색인 남자로 살면서 일하는 것에 관한 내용을 <투명인간>이라는 책으로 쓴 사람이었다. 아들의 책을 읽은 아이빌린은 반드시 자신의 이야기에 아들이 살아 숨쉬도록 할 터이다. 사람은 죽었어도 글은 죽지 않는다. 사람과는 헤어져도 글로는 이어지고 다시 만나게 된다. 글로 부활해 아직 살아있는 많은 흑인들을 나는 이 책을 통해 다시 만난 것이다. 누군가는 눈을 잃고, 누군가는 혀를 잃고, 또 누군가는 일자리를 잃고, 누군가는 총에 맞아 숨졌지만 그들의 모든 까만 사연은 이렇듯 하얀 그리움으로 새겨진다. 그것이 이야기의 힘이고 소설의 능력인 것이다.

  결국 이 소설은 흑인도 승리했지만 백인도 승리한 소설이었다. 흑인은 이야기로 승리했고 백인은 소설로 승리했다. 누가 상처를 받고 또 누가 언제 복수를 하였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결과적으로 흑인은 흑인대로 백인은 백인대로 서로 자존심을 지키며 자신을 성취했다는 것이 나는 좋았다. 각자의 절망이 서로에게 상처를 주지 않고도 자신의 희망으로 전복되는 결론이 설득력 있었다. (현실은 그렇지 않지만)참 기특하고도 공평한 결론이 아닌가.


눈에는 눈, 입에는 입

  그런가하면 이 소설은 화장실 용변으로 시작해 화장실 용변으로 마무리 되는 대 화장실 수사학의 기발한 수미쌍관적 면모를 과시했다. 앞선 화장실 문제는 분명 백인들이 주장하는 질병 및 위생관리 차원의 흑인과의 분리정책을 의미하지만 후자의 화장실 담론은 그것에 대응하는 흑인의 짜릿한 보복을 의미한다. 이 책은 흑인에게 가장 예민하고 가슴 아픈 사연인 화장실 문제를 재치있게도 유머러스한 풍자로 희화화 하면서 이 소설이 다큐나 논문, 기사가 아닌 소설이라는 문학의 위치에 자리하고 있음을 환기시켜준다. 화장실문제는 어찌보면 철학적이기까지 하다. 이 작품에서 화장실이 직접적으로 거론되는 에피소드는 빈번하게 등장하는데 나는 책을 덮고 같이 밥을 먹고 같은 곳에서 용변을 보는 것이야 말로 같은 인간이라는 확실한 증거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끝까지 자신들이 저들과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주장하고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백인의 집에 일하러온 흑인 일꾼은 화장실을 가기위해 인근 도처의 덤불을 헤매어야 했다. 아이빌린은 키우던 아기의 소변가리기를 훈련시키기 위해 차고 바깥 화장실에 아이를 데려가 그곳에서 시범을 보여준다. 백인 전용 화장실을 사용했다는 이유로 백인에게 몰매맞아 눈을 잃은 청년의 소식은 절로 한숨이 나오는 대목이었다. 같은 식품점에서 음식을 사지 못하고 같은 식탁에서 식사를 하지 못하고 같은 냉장고에 음식을 보관하지 못하고, 같은 화장실에서 용변을 보지 못하게 하는 반인권적인 이들에게 작가가 내린 벌은 가장 정직하고도 합리적인 처사였다. 거사를 시행한 것은 요리를 잘하고 케이크를 가장 잘 만드는 미니였지만 그 과정을 찬찬히 따져보면 그것은 치밀하고도 계획적인 작가의 계략이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그리고 입에는 입, 전략은 정직했다. 

  가정부들은 유색인 식품점에서 구입한 싹이 자란 감자나 맛이 간 우유를 먹고 집에 욕실이 두 개나 있어도 한 겨울 멀리 떨어진 차고 뒤편 으슥한 화장실에서 그 결과물을 배출해야했다. 이런 아이빌린에게 지역의 위선자 힐리는 자신만의 공간이 생기니 어떠냐고 비아냥 거린다. 힐리는 주로 연단에 서서 마이크에 대고 지역민에게 자선금을 호소하는 인물이었다. 그런데 미니는 그 입으로 들어갈 초코케잌에 흑인으로서 최종 결과물을 식품첨가제로 활용한 것이다. 한마디로 이것 먹고 그 입 닥치라는 무혈 항변의 행위이다. 당신들이 하라는 대로 당신들이 원하는 대로 일을 수행했기 때문에 미니는 일말의 죄책감을 가지지 않았으며 우리는 그보다 더한 수치스런 맛을 겪으며 산다는 그래, 당신들과 다른 인간들의 맛은 어떤지 확인해보라는 의미심장한 행위인 것이다. 평소 흑인으로부터 질병이 옮는 것을 두려워한 힐리가 케잌이 더 맛있다고 칭찬한 일화는 이 작품의 모든 눈물을 통쾌한 웃음으로 전복시키는 짜릿한 반전이었다. 자존심 강한 힐리는 그 사실이 평생 지키고 싶은 최대의 비밀이 되었고 그것은 가정부들을 자유롭게 하는 불문율이 된다. 미니에게 별도의 화장실 사용이라는 법안(현실)은 바꿀 수 없었지만 자기식의 용변처리(용기)는 얼마든지 가능한 문제였고 그것으로 힐리에게 안 보이는 법(성과)을 만들어 준 것은 소설적 재미에 그치지 않고 뭉클한 교훈을 준다. 

  이 책에서 가정부들은 대부분 남편의 음주와 폭력에 시달리거나 혼자서 아이를 키우는 싱글맘으로서 흑인이면서도 여성적인 성차별의 이중고를 안고 살고 있다. 하지만 누구보다도 상대의 아픔에 공감하며 타인을 배려하고 이해심많은 이웃으로 등장한다. 가족의 먹거리를 책임지며 가정의 안녕을 위해 가사를 책임져온 주부들은 미니의 복수에 야릇하고도 통렬한 기쁨을 맛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돌아서면 사회 최약자층의 목소리에 귀기울이지 않으면 이런 반인간적인 아니 가장 인간적인 최고의 항거를 온몸으로 당할 수 있다는 경고를 먹은 것과 무엇이 다른가. 화장실 에피소드는 우리가 같은 인간으로서 같은 공간에서 같이 산다는 것에 대해 그 의미를 묻고 있다. 그래봤자 밥을 먹고 화장실을 가는 것은 모두 변함없이 똑같다는 우리 生의 이치를 알려준다.


착한 사람, 나쁜 운명

  스키터는 말한다. 이십 구년 동안 가족을 위해 일해 온 가정부 콘스탄틴은 유일하게 자신을 유지니아라는 본명으로 불러주었으며 성인이 되고서도 기숙사에서 편지를 주고받던 인생의 비밀 동맹자였다고. 콘스탄틴을 떠올리게 하는 아이빌린은 말한다. 자신은 ‘아기들이 스스로를 자랑스러워 할 줄 알게 키우는 재주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고. 그런데 자기 자식에서 허울좋은 규율과 남에게 보이기 위한 예절이 아니라 진심어린 친절과 자존감을 가르쳐준 이들에게 고용주인 백인은 없는 사건을 만들어 인격을 모함하고 억울하게 누명을 씌워 일자리를 잃게 한다. 가정부의 딸이 백인 것을 인정하지 못해 단칼에 해고하고 별 쓸모없는 보석을 훔친 죄로 모진 실형을 선고하도록 종용한다. ‘잭슨에 있는 모든 땅의 주인은 백인이고, 모두 백인을 아내로 맞았으며, 그 아내들은 누군가의 친구’이기 때문에 속된 말로 백인에게 한번 찍히면 가족의 생계는 물론 생명까지 위협을 당하게 된다. 그들은 왜 그토록 소름끼치게 그들과의 분리를 열망하며 같은 인간이 되는 것을 두려워 했을까. 실질적인 도움은 제일 많이 받고 있으면서 왜 그들은 그 도움을 인정하지 않는가.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내 생각에 그들은 자신의 결점과 일상의 비밀을 가장 가깝게 많이 알고 있는 가정부들이었기에 될수록 그들과 삶의 구분을 확실히 짓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어린 시절 서울로 이사와 여러 해 동안 나는 부모님과 함께 큰 이모님 댁에 얹혀 살았다. 2층 짜리 주택이었는데 그 큰 집에 시골에서 올라온 ‘행자’언니라는 가정부가 있었다. 그 당시 소위 있는 집에는 ‘식모’라는 개념의 스무살 남짓한 처녀가 대 식구의 살림살이와 치다꺼리를 해주는 경우가 많았다.'행자'언니는 성격도 좋고 덩치는 물론 식성도 좋아 사촌오빠들의 놀림을 많이 받았다. 얹혀 사는 신세인 내 어머니와 가장 친했고 혼자인 나에게도 잘해주었지만 나는 어린 나이임에도 내가 그 언니와 (신분이)같지 않다는 사실을 꼭 언니에게 주입하고 싶었던 기억이 난다. 이른바 주인행세를 하고 싶었던 것이다. 행자언니는 어린 나를 귀엽게만 여겨 목욕을 하면 머리도 감겨주고 거친 때수건으로 내 등짝을 빡빡 밀어주던 살갑던 언니였다. 나는 이모집에 있는 동안 '행자'언니 덕에 그야말로 호강하며 공주아닌 공주대접을 받았고 나중에 우리 식구가 이모집을 나와 이사를 가고 난 후엔 물한잔도 마다않고 떠다주던 그 언니가 제일로 그리웠다. 한참 세월이 흘러 남의 집 식모로 살아야 했던 <봉순이 언니>라는 소설을 읽고 다시 그 언니가 생각났던 게 벌써 십년 전이다. 고향으로 내려가 방앗간집 큰 며느리가 되었다는 소식을 어머니로부터 들었다. 그런데 잊고 있었던 행자언니를 근 삼십 년만에 만난 것은 뜻밖에도 어머니 장례식장에서였다. 한눈에 보아도 시골에서 상경한듯 보이는 퉁퉁한 아주머니 한분이 어머니 영정앞으로 종종 걸어오더니 그만 목을 놓고 서럽게 우는 것이었다. 나는 그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고 그냥 어머니를 잘 아는 분이겠지 생각했다. 그런데 그 울음소리가 예사롭지 않았는지 그녀를 알아보던 큰 이모님이 그녀에게 달려가 서로 안고서 얼굴을 어루만지며 울음을 떠뜨리는 것이었다. 그때 나는 이모님의 입에서 '행자'라는 호칭을 들었고 그제서야 왜 그녀가 그토록 서럽게 울었는지 알 수 있었다. 장례식에서 상주가 되면 조문온 사람들이 갖고 있는 슬픔의 양을 가늠할 수가 있게 된다. '행자'언니는 내 어머니의 죽음이 슬퍼서 울었다기 보다는 자신과 맺은 그 시절 많았던 기억 때문에 눈물을 쏟은 것이었다. 기억의 양이 곧 눈물의 양인 것이다. 울음을 정리하고 마주 앉은 '행자'언니는 그때 내 손을 꼭 잡고 어머니는 스무살에 유일하게 자신을 견디게 해준 사람이라고 말했다. 자신은 고등학교도 졸업못한 남의 집 가정부였지만 그런 자신을 늘 똑똑하고 친절하고 성격좋은 사람이라고 앞으로 제일 잘 살거라고 매일같이 용기를 주셨다고 말이다. 나는 이 책에서 아이빌린이 자신이 마지막으로 키운 아이와 헤어지면서 너는 ‘똑똑하고 친절한 아이’라고 재차 일러주고 스스로 다짐하게 할 때 가슴에 태풍같은 바람이 휙 지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스키터는 가정부의 기억을 통해 ‘비참하다고 생각되는 자기 인생에 구원을 받는 듯한 느낌’을 얻는다고 말했다. 아무리 현실이 고통스럽고 내 처지가 보잘 것 없어도 내가 중요한 사람이고 내가 좋은 사람이라고 말해주는 사람은 그 사람을 현실에서 구원해주는 그 누구보다 아름다운 사람인 것이다. 

  아이빌린에게 로버트의 실명소식을 전하던 이웃은 말한다. ‘나쁜 일은 왜 가장 착은 사람들에게 생기는 지 모르겠’다고. 우리가 주변을 둘러 보아도 불의의 사고는 꼭 누구보다 착했던 사람에게 일어난다. 남들에게 아무런 피해도 주지 않고 묵묵히 자기 생을 살아온 사람들, 자신도 변변치 않으면서 남들에게 자기 가진 것을 더 많이  나누어 주던 사람이 꼭 변을 당한다. 나 역시도 어머니의 사고를 겪은 사람이라 왜 착한 사람들에게만 불행이 닥쳐오는 것인지 그 이유를 알고 싶다. 그런데 얼마 전 십년 전 <봉순이 언니>로 나를 울린 작가, 공지영의 소설 <맨발로 글목을 돌다, 2011 이상문학상 작품집, 문학사상>를 읽었는데 그 작품에 수긍할 만한 답이 있었다. 다른 사람이 아니고 <봉순이 언니>를 통해 나와 비슷한 질문을 스스로 제기한 작가였기에 세월이 흐른 후 그녀의 답은 내게 큰 의미가 있었다. 그녀는 비슷한 질문을 하는 기자에게 ‘착한 사람들에게만 그런 일들이 일어나는 이유는 그들만이, 선의를 가진 그들만이 자신에 대한 진정한 긍지로 운명을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대답한다. 그들만이 착하기 때문에 스스로의 운명을 좋은 의도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뜻으로 들렸다. 나쁘게 해석하는 것은 운명에 닥친 당사자가 아니라 그들이 불행하다고 바라보는 나머지 사람들의 문제라는 뜻으로도 이해되었다. 이 말은 착한 사람이야 말로 운명을 개척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라는 말이 아닐까. 꼭 이 책에서 언급한 보이지 않고 존재하지 않는 線을 뛰어 넘는 것은 오로지 善뿐이라 답하는 것만 같다. 그것을 이 작품 식으로 바꾸어 말하면 착한 사람이야 말로 현실을 바꿀 수 있는 사람이다, 나는 그렇게 믿고 싶었다. 아니 그렇게 믿을 수 밖에 없었다.

  세 명의 이야기가 교차되다가 이 책에서 유일하게 그 세 명의 시선이 아닌 작가의 시점으로 서술된 부분이 있다. 2권 초반부에 제시된 '자선행사장에서 생긴 일'. 흑인이고 백인이고 모두 한 자리에 모이는 작품속의 소설적 축제에 다름아니었다. 그런데 나는 카메라를 줌 아웃하여 조감으로 전체를 내려다 보는 그 장면에서 작가적인 깨달음을 느낄 수 있었다. 여러 인간 군상들이 살아가는 방식은 정답이 없다. 저마다 행복하려고 더 좋은 남자를 만나려 하고 더 좋은 집에서 살기를 원한다. 그렇지만 행사장 바깥에선 베트남 파병으로 군인들은 전사했고 마틴 루터 팅 목사는 가두시위를 벌렸고 케네디 대통령은 암살 당했다고 전해진다. 이것은 어쩐지 오늘을 사는 우리네 세상과 흡사한 세상풍경이 아닐까 싶었다. 누가 누구를 욕하고 비난하기엔 행사장은 새삼 별 문제가 없어 보였고 저 바깥 세상은 나와는 너무 멀어 보였다. 이 책의 마지막은 아이러니 하게도 예상대로 가정부들이 일자리를 잃고 새로운 걸음을 내딛는 그 첫 발자국을 따라간다. 이정표는 자선 행사장도 아니고 백인의 또 다른 가정집도 아니었다. 그야말로 웃음과 울음이 동시에 터지는 장면이다. 두렵지만 벅차고 슬프지만 희열이 느껴진다. 어디로 갈 것인지 묻는 것만 해도 심장이 빨라지는 것은 무슨 이유인가.

   현실을 바꾼다는 것은 무엇인가. 내 조그만 손으로 내 보잘 것 없는 능력으로 어떻게 현실을 바꿀 수 있다는 말인가. 현실을 바꾸는 것은 결국 내 생각이 바뀌어 지는 그리하여 내가 새로워 지는 그 첫 걸음의 시작, 그 바닥을 느껴보는 것이 아닌가. 여전히 차갑고 단단한 그 바닥위에 그래도 눈을 질끈 감고 발걸음을 한번 떼어 보는 것이 아닌가. 튼튼한 벽에서 손을 떼고 오로지 내 두 다리로만 직립하여 얼굴을 들고 하늘을 향해 고개를 숙이지 않는 일이 아닌가. 누군가의 돌에 맞고 누군가의 웃음에 잠시 멈출 지언정 그것을 알고서도 계속 걸어가는 그 서러운 마음이 아닌가. 그러다 보면 내게만은 돌아설 줄 알았던 그 운명이라는 것도 언젠가는 반드시 나와 마주해 결국 내 두 손을 이끌어 주지 않겠는가. 그렇게 살다보면 HELP, 하고 외치지 않아도 어느새 나는 누군가의 HELP가 되어 있지 않겠는가. 진정한 HELP는 내게 손 내민 상대의 손을 먼저 잡아 주는 마음이 아니겠나.

  HELP, 그녀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녀가 그랬던 것처럼, 내 어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누군가의 HELP가 됨으로써 나는 내 운명을 HELP하고 싶다. 그것이 내 운명이고 싶다. 현실이여, '시작'하라. 운명이여,'HELP'하라.

어쩌면 무언가를 새로 시작하기에 내 나이는 그리 많은 나이가 아닐지도 모른다. 이 생각에 울음과 웃음이 동시에 터진다. 어젯밤만 해도 나는 내 인생에 새로운 것은 전혀 없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 THE HELP 2, 343p



나는
흑인여자다
사이프러스처럼 키가 크고
튼튼하며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묵묵하고
장소와
시간과
환경을 무시하며
공격을 당해도
상처받지 않고
무너지지 않는
그대
나를 보고
새로워지라

- 『나는 흑인 여자다』, 메리 에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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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P 2011-06-23 0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흑인 문학은 저도 좋아하는 편이라, 랠프 앨리슨도 그렇고 저 위에 인용해주신 랭스턴 휴스도 흑인대푬 문학선에서 읽어 본 기억이 나네요. ^^ 개인적으로 말콤X를 제일 좋아해요. 문학가는 아니지만 말이죠. ^^
이 소설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읽은 것 같은데 한사람님이 쓰신 리뷰에는 성실함이랄까, 그런 것을 느껴요. 전 문학에서 성실함을 느낀 작가는 하루키거든요. 작품의 이해는 떠나서요. 내일 다시 와서 이 리뷰를 읽을려구요. 좀 곰곰히 읽어야 할 듯 해요. ^^ 항상 감사해요. 좋은 리뷰 올려주셔서 ㅋ

루쉰P 2011-06-24 23:17   좋아요 0 | URL
아! 그저께는 대략적 대목만 보고 너무 피곤해 잠들었는데 역시나 제가 본 데로 바늘로 꼼꼼하게 하나 하나 엮은 듯한 리뷰에요. 성실에서 더 높은 단어가 있다면 그것이지 않나 생각을 합니다. 이거 리뷰를 읽다가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 그것이 진정한 리뷰다 생각했는데 이 리뷰!! 그런 마음이 나왔어요. 전 원래 사람들이 많이 보는 소설은 잘 읽는 괴벽이 있는데 이거 정말 한사람님 글을 보니 읽고 싶다는 생각이 팍 드네요.
'나처럼 현실이 까맣게 불타버려 실은 피부색같은 건 하나도 의미없는 자들을 위한 소설이 아닐까 생각했다' 이 문장은 날카로운 화살처럼 확하고 제 마음에 꽂히네요. 전 문장이 아름다울 때 정말 즐거움을 느껴요. 도처에 그런 문장들이 보여요. 후와!! 어떻게 이렇게 쓰시는지..-.- 부럽습니다!

이 리뷰가 공을 안 들인 리뷰라니 또 한 번 놀랐어요. 근데 아무리 봐도 리뷰 안에 있는 한사람님의 문장이 참으로 좋아 소설은 충분히 쓰실 수 있을거라 여겨지는데요. ^^

반응이 없는 것 보는 눈이 없는거죠. 염려마세요.

서재에 글들을 보면서 신중하게 보기는 하지만 한사람님의 리뷰는 읽고 또 읽게 돼요. ^^ 소처럼 되새김질하며 천천히 차근 차근 읽을려구요. 아..리뷰 감동 먹고 갑니다!
 
분노하라
스테판 에셀 지음, 임희근 옮김 / 돌베개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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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유월이다. 내가 기억하는 대한민국의 유월은 언제나 항쟁의 계절이었다. 우리 민족은 3월엔 독립을 4월엔 혁명을 5월엔 운동을 6월엔 항쟁을 이끌었다. 87년 6.10 민주항쟁이 내가 고등학교 때 일어난 역사적 그 날이었다면 그로부터 꼭 24년 후, 그러니까 강산이 두 번하고도 반 정도 바뀐 시간이 흘러 다시 또, 유월인 것이다. 세월로 치자면 꼭 나 같은 군대 안간 여학생이 재수(再修)없이 4년제 대학을 졸업하고 일자리를 한창 알아보고 있을 만큼의 시간인 것이다. 우리는 성장했을까?, 하는 비약적인 질문이 눈앞을 가린다. 공교롭게도 2011년의 유월은 대선을 일 년 반 남긴 시점에 때 아닌 ‘반값 등록금’ 투쟁으로 팽팽하게 긴장된 시국을 맞고 있다. 이러한 시기에 마치 알고나 있었다는 듯이 이 책은 젊은이여 일어나라, 분노하여 항거하라, 며 독자들의 엉덩이를 들썩이게 만든다. 절묘하고도 기가막힌 타이밍이다. 광화문에서 열린 촛불집회에 시민들은 통닭과 피자 등의 간식거리를 현장 지원한다고 하는데 이 책은 그 곁에서 몇몇 진보인사로 보이는 누군가가 열정적으로 나누어 주기에 딱 안성맞춤인 책인 듯하다. 무엇보다 이 책은 앉은 자리에서 마음이 동하게 되는 선동의 성격을 가졌고 드물게 짧은 관계로 그 자리에서 바로 덮을 수 있다. 오래 가르치지 않으면서 진부하지도 않다는 장점을 지녔다. 유럽에선 4500원(커피 한잔 값)에 이 책을 마치 집회 팜플랫처럼 구입하고들 있다한다. 저자의 나라 프랑스 역시 2012년 대선을 앞두고 이 책이 사르코지 보수파 정권에 저항해 사회당을 지지하자는 코드로 읽히고 있다 한다. 우리 역시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이 책은 어딜가도 거리로 뛰어들게 하는 매력을 지녔으니 말이다.

  먼저 이 짧은 책의 구성은 저자인 스테판 에셀의 원고 분량 삼십여 페이지와 저자와의 인터뷰, 조국 교수의 추천사, 그리고 옮긴이의 말로 이루어져 있다. 모두 더해 90 페이지도 되지 않는다. 2009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헤르타 뮐러를 소개하는 샘플북, ‘헤르타 뮐러에게 다가가기’의 분량이 111 페이지이다. 공짜인 샘플북보다 짧은 이 책은 물론 커피 한잔하면서 가볍게 넘겨볼 수 있는 최상의 미덕을 가졌다. 그런데 이 책을 제 무게만큼 가볍게 후식처럼 곁들이고 말기엔 어쩐지 내키지가 않는다. 책 덮은 다음이 문제인 책인 것이다. 저자는 지금 일어나 어디로 향할 것인지, 물어 보는 것만 같다. 책을 덮고 내가 제일 먼저 한 일은 이 책을 읽었다는 ‘인증식’이었다.(나는 다른 책에선 그런 일을 해본 적이 없다) 조국 교수는 이 책을 저자의 공개유언(저자는 현재 93세 이므로)이라 칭했는데 내가 느끼기에 이 책은 독자의 서명을 요구하는 공개선언서쯤으로 느껴졌다. 그러니까 아파트 부녀회장이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지하철 역 개통이나 고층건물 반대등의)서명을 요구하는 장면을 떠올리기도 했다. 실제로도 유엔 세계 인권 선언문(1948)을 작성하신 분이니 훌륭한 대 국민 유인물로도 손색이 없었다. 나도 당신의 선언서에 동참하겠다는 사인이라도 해야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다음엔 기회가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인증을 하고 나는 자리를 (박차고)일어섰고 집에 돌아와 뒤늦게 정치, 사회면의 기사를 찾아보기 시작했다. 정치에 관심이 없는 나로선 이례적인 일이었지만 무어라도 하지 않으면 스스로 비겁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 책의 저자는 독일 출신 프랑스인으로서 반나치 레지스탕스 운동가 출신이다. 영화에서나 등장할 것 같은 인물이 아직까지 생존해 목소리를 드높인다는 소식자체가 놀라웠다. 그런데 내가 감명받은 사실은 그의 역사적인 生의 이력이나 극적인 정치 활동, 혹은 이 책에 소개된 분노의 논리는 아니었다. 자신이 이토록 오래 (그것도 열정적으로)살아온 비결은 다름 아닌 ‘분노할 일에 분노하는 것’ 때문이었다는 명쾌한 대답이었다. 참고 사는 인생이 미덕이며 나이 들면 화 낼 일도 없어진다는 논리에 익숙한 나로서는 뜻밖의 대답이었기 때문이다. 원래 작가들은 얼마 전 어디서 조사한 통계치에 따르면 연예인의 자살이 증가하기 전까진 단연 수명이 짧은 직업으로 1위를 고수한 대표적 단명 직업이다. 스테판 에셀을 보고 아흔 넘어 생존한, 그것도 마지막 순간까지 원고를 교정한 영국의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을 떠올렸다. 평화주의자 러셀도 작가치고는 자주 분노하는 인물이 아니었나 해서다. (분노하는 작가가 오래산다는 통계치를 기다린다) 이 책의 논리대로라면 우리 문단의 대표적 분노작가 조정래작가는 백수를 꼭 하셔야 한다. 격변의 21세기를 모조리 겪어온 93세 정치가의 입에서 마땅히 분노할 일에 분노해야 자신의 존엄을 지킬 수 있고 나아가 행복해질 수 있다는 말씀은 분명 가슴을 두드리는 효과가 있었다. 이것은 사십대의 어느 진보측 교수가 ‘젊은이여, 분노하라’고 목소리 높여 선동하는 것과는 다른 일이었다. 모진 고문도 받고 수용소에서 몇 번 죽을 뻔도 하고 기적인지 운명인지 여기까지 살아왔지만 나는 한 평생 분노한 일에 정당한 참여를 하였으므로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이라는 대답은 절로 고개가 숙여지는 말씀이었다.  

  이 분의 논리는 간단하다. 1940년대 레지스탕스로 활동했던 그 시기 레지스탕스 운동의 기본 정신은 다름아닌 ‘분노’였다고 말한다. 레지스탕스(résistance)는 ‘저항하다’ (résister)라는 동사의 명사형이다. 즉 정의롭지 못한 것에 저항하는 것이 새로운 미래를 창조한다는 것이다. 이에 ‘인권을 침해하는 주체는 누구를 막론하고 우리의 분노를 촉발’해 마땅한 것이며 ‘인간의 권리에 대해서만은 타협의 여지가 없는 것’이므로 분노하여 참여하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시민의 의무라 말한다. 팔짱끼고 나몰라라 돌아서는 것이 아니고 분노에 참여할 때 우리는 진정한 투사가 되는 것이며 그것은 역사의 흐름을 더 큰 정의, 더 큰 자유의 방향으로 인도한다는 논리이다. 저자는 스승인 사르트르로부터 이러한 ‘참여’를 배웠고 수용소에서 기적적으로 살아 돌아와 자신의 회고록에 “이렇게 삶을 되찾았느니, 이젠 그 삶을 걸고 참여해야 했다.”고 적었다. 이 사람의 참여는 절대 모든 일 다 하고 남는 시간에 우아하게 행하는 선택적 활동이 아니라 어떤 불의의 순간에도 공평하게 목숨을 담보로 의지를 각인하겠다는 필사의 말씀이다. 비슷한 형태로 살아 내온 시절을 목숨걸고 증언하는 작가가 있듯이 그는 다시 찾은 삶을 목숨같이 걸고서 앞으로 한평생 분노할 일에는 가만있지 않겠다는 맹세를 하였던 것은 아닐까.  

  조국 교수도 언급했지만 스테판 에셀이 말하는 분노는 개인적인 억울함에 감정적으로 격분하는 성질의 분노가 아니다. 우리 사회에선 목소리 큰 사람이 상대를 이기는 경우가 많다. 이때 개인 분노의 표출은 간혹 폭력을 야기하기도 한다. 또 어떤 오래된 분노는 묻지마 범죄로 발전하기도 한다. 저자가 주장하는 분노는 불의를 보고 참는 것이 아닌 비분강개의 마음, 즉 공공의 불의를 보고 일으키는 분노로서 공분(公憤)이나 의분(義憤)을 뜻한다. 공적인 일로 느끼는 분노에 창조적인 저항의식을 기르라는 말씀이다. 그리고 정당한 분노 표출의 행위로서 비폭력적인 ‘평화적 봉기’를 일으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저자가 말하는 비폭력이란 ‘우선 자기 자신을 정복하는 일, 그다음에 타인들의 폭력성향을 정복하는 일’을 뜻한다. 내 마음부터 폭력의 의지를 없애고 상대집단의 폭력을 뛰어넘는 원칙을 가져야 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상대집단이 갑자기 무차별 물대포라도 쏘아대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폭력을 옹호하는 건 아니지만 저자는 어느 집단이건 우월한 무력으로 점령당한 입장에서는 비폭력 적인 대응만 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자고 말한다. 그렇다고 같이 무력으로 대응하자는 것이 아니라(대응할 수도 없고 대응은 결과가 뻔하기에) 무엇보다 희망으로 대결해야 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공공에 대한 비폭력 호소가 바로 비폭력적인 희망을 암시한다 말하는 듯했다. 억울하게 맞아 죽어가면서도 희망을 잃지 말라는 말은 다소 철학적으로 들리기도 했고 허탈한 결론이라 느껴지기도 했다. 그런데 이 사람의 결론은 희망만이 답이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한평생 살아온 시간을 돌이켜보니 그래도 분노하였을 때 결과는 달라져 있었다 주장하는 듯했다. 조금씩 천천히 이루어진 것이지만 그래도 세상은 분노했기 때문에 발전하지 않았느냐 반문하는 듯 했다. 자칫 폭력 때문에 긍정적인 결과를 비껴가면 그만큼 역사는 정의로와 지는데 시간이 더디게 흘러간다는 뜻이 아닐까.


“ 분노가 끓어 넘치는 상태를 ‘격분’이라고 한다면, 폭력이란 도저히 용납 못할 상황에 처한 사람들의 입장에서 내린 유감스러운 결론이라고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를 이해한다면, 테러리즘이 격분을 표출하는 한 방식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이 격분은 부정적 표현이다. ‘도에 넘치게 분노’해서는 안되며, 어쨌든 희망을 가져야 한다. 격분이란 희망을 부정하는 행위다. 격분은 이해할 수 있는 일이고, 당연한 일이라고까지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용납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희망이 긍정적 결과를 낳을 수 있는 경우에, 격분 탓으로 그것을 놓칠 수 있기 때문이다. ”   -31P



  저자가 말하는 ‘사회정의와 공공선의 실현을 위한 정당한 분개’는 ‘진정 행복하려면 제때에 분노할 줄 알아야 한다’는 메시지와 함께 논리적인 시너지를 일으키며 우리의 오늘을 돌아보게 만든다. 저자는 특히 젊은이들에게 사회단체나 국제 기구, 조합의 일원으로서 분노에 참여하라 독려한다. ‘투표하지 않는 자는 암묵적인 찬동자’이며 비난보다 못한 최악의 태도, 무관심이라는 묵인 열차에 편승하는 일이라 일갈한다. 이 책을 덮고 나는 우리의 등록금 이슈에 얼마나 다양한 사람이 연대를 이루어 분노를 행하고 있는지 확인해 보았다. 그러면서 나는 아직 분노가 어떤 형태로 가시화되지만 않았지 우리들 모두는 분노를 쌓고 쌓아 그것을 암덩어리 키우듯 세포화하고 있었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그러면서 자연 개혁야권이나 시민단체, 청년연합과는 거리가 한참 멀었던 나의 가슴에 슬몃 손을 대 보았다. 억누르고 참는 것은 이미 생활속 습관이 되어 버린지 오래였다. 분노한다고 달라질 것도 없으며 나만 손해라는 생각이 팽배해진 결과였다. 범국민적인 풍경으로서 24년 전 유월의 거리에서도 나는 분노하기에 여물지 않은 가슴이었고 그 후로도 오랫동안 분노라는 열매가 한번도 맺어진 적 없이 시들어버린 꼴이었다. 지금의 분노는 냉소적 가슴으로 자체진화한 것이었다.  마치 익지도 않고 시어버린 김치처럼. 결국 나는 (가장 안좋은 케이스로)내 자신에 분노했다.

  문득, 내가 대학생이었을 때(1991년) (하필이면) 지금처럼 등록금 인상에 반대하는 집회에 참여했다가 백골단의 집단구타로 맞아 죽은 명지대 신입생 강경대 학생이 오버랩되기 시작했다. 어떻게 무엇에 맞았는지 강가에 버려진 그의 시신은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었던 우리 시대 독재의 영원한 상처로 남았다. 그런데 나와 같은 나이의 젊은이가 미래를 펼치지 못하고 정권의 방망이에 목숨을 잃었지만 나는 그때도 분노하지 않았던 것 같다. 변명을 하자면 분노는 올바르지 않다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세뇌 당해온 학습의 효과였다. 그는 하늘에서 아직도 분노의 눈동자를 감지 못한 것은 아닐까.

  등록금이 일 년에 천 만원인 시대에 살고 있다. 우리 땐 그래도 방학 때 놀지 않고 아르바이트를 바짝 하면 다음 학기 등록금은 간신히 벌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등록금 때문에 자살하는 학생도 생겨났다. 등록금을 내지 못하는 학생은 등록금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학생이 열심히 스펙을 쌓고 취업 및 유학준비를 하고 있을 때 (등록금을 마련하느라)세 내 개의 알바에 치여 공부할 시간이 없을 것이므로 장학금을 놓치게 된다. 어학연수나 답사여행, 인맥 쌓기는 제쳐두고서라도 그나마 학교라도 계속 다닌다면 그 학생은 운이 좋은 것. 생계형 휴학은 우리 시절 배낭여행만큼이나 흔한 레파토리가 되었다. 이는 곧 기회의 분배에 따른 불평등을 초래하고 기득권층은 더욱 견고한 기반을 쌓게 되는 연쇄적인 원인이 된다. 이 고통은 대학생만의 문제는 아니다. IMF 사태와 금융위기, 조기은퇴에 내몰린 베이비 붐 세대는 자녀들의 등록금을 해결하느라 전혀 노후를 준비하지 못하는 실정이다. 노후에 생활기반을 마련하지 못한 채로 평균수명만 늘어가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래도 대학이라도 나와야 사람구실을 할 것 아니냐는 어느 상인의 넋두리는 대학이라도 못나오면 사람구실을 할 기회마저 박탈당한다는 우리사회의 서글픈 자화상에 다름 아니다. 한국사회에서 교육은 계급과 지위를 전복하는 기회가 아니라 그 격차를 확대 재생산하는 핵심통로가 되었다.

  나는 ‘반값등록금’ 논란의 이면엔 대학생을 중심으로 이처럼 물려있는 한국사회의 양극화, 기회균등의 부조리, 고령화 사회에 대한 불안 등의 복합적인 쟁점들이 함께 투사된 분노라는 생각이다. 이제와 깨달은 것이지만 분노를 쌓으면 결국 암밖에 더 걸리나. 늘어만 가는 중장년층의 암 발생율은 어쩌면 평생 불의를 보고 쌓아온 분노의 객관적 결과일지 모른다. 이 책을 읽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생각한다. 비록 분노의 거리에 동참할 순 없다 할 지라도 저자가 말한 창의적인 저항은 꾸준히 실천해 볼 생각이다. 이 책에서 저항이 바로 창조라는 말씀은 가장 문학적이었고 인상깊었다. 그 두 번째 시도로 나는 리뷰를 작성했고 이 리뷰를 내가 아는 사람들과 나를 아는 사람들과 공유하는데 앞장서고 싶다. (첫 번째는 이 책을 읽었다는 것일 터이니)

  이제는 웃으면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라 분노해야 행복해진다는 말씀을 오래 기억하고 싶다. 그것이 곧 젊음을 유지하는 비결이라 새겨둘 터이다. 당신도 나와 함께 오래도록 젊음을 유지할 생각은 없으신지.  

   

 

<덧붙임>




 

 

 

 

 

 

 

 

 

 

 

 

 

   <파울 클레, 새로운 천사 Angelnus Novus, 1920 >

  스테판 에셀은 파울 클레의 <새로운 천사>라는 그림을 언급하며 이 그림을 좋아했던 벤야민이 남긴 비평(역사철학 테제, 1940)을 소개했다. 벤야민은 이 그림의 천사를 ‘역사의 천사’로 보고 폐허에 무너져 내리는 파국에 경악하며 그 잔해들을 다시 결합하려고 하지만 천국으로부터 ‘진보’라는 강풍이 불어오기 때문에 날개를 접을 수도 없는 상황인지라 ‘역사의 천사’는 미래쪽으로 떠밀려 가는 형국이라 말했다. 벤야민은 ‘우리가 진보라고 부르는 폭풍'을 밀어내고 있는 천사를 보았다고 말이다. 오늘날 (내 수준에서)이 그림을 보고 벤야민의 깊은 사유에 공감할 수 있는 사람은 진심으로 부럽다는 생각이 든다. 어떤 천사가 새로운 천사인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벤야민을 언급한 스테판 에셀이야말로 이 그림처럼 천진난만해 보이는 진보의 천사가 아닐까 싶다. 평생 희망이라는 날개를 접을 수 없었던 오래된 의지를 느끼게 된다. 우리 역시 강풍에 굴하는 날개가 아닌 강풍에 의지해 미래를 기약할 희망의 날개가 절실한 시점이다. 분노로 진보의 시동을 걸어 희망의 날개를 멈추지 않는 천사. 떠밀리고 짓밟혀도 오직 미래를 위해서만 날아가는 천사, 이 책의 천사는 그렇게 우리에게 날개 하나를 살며시 달아준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그 날개를 접지 않는 일이 아닐까. 이 그림을 보라, 이미 날개는 펴져 있지 않은가.


“나는 언제나 아닌 것을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들 편에 서왔다.”

-2009년 팔레스타인 가자지구를 방문하고 돌아와 그곳 주민의 삶을 증언하면서, 스테반 에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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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P 2011-06-09 12: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분노하라는 책을 사놓고 누가 리뷰를 썼는 궁금해서 검색했더니 이렇게 좋은 리뷰를 읽게 됐네요. 안녕하세요? 이렇게 신뢰를 무릅쓰고 놀러와 글을 남깁니다. 리뷰 한 줄 한 줄이 진지하게 내뱉는 한마디 한마디의 말과 같아 경청하며 읽었습니다. 너무 좋은 리뷰를 보며 많은 생각을 합니다. 앞으로도 자주 놀러올 께요 ^^ 비와서 좀 깜깜하지만 즐거운 오후 되세요. ^^

風流男兒 2011-06-09 14: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 감사합니다. 저도 잘 읽었습니다.
불만을 불필요하게만 느껴오던 저에게도 참 많은 의미를 던져주네요.
특히나 오늘 불만과 저항, 그리고 에 대한 글들을 읽게 되니,
일하는 중간중간에도 여러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정말, 지금의 상황을 보면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건 제대로 된 불평과 불만이 맞는 것 같아요.
진실한 서평 덕분에 소중한 떨림 받아갑니다.
씐나는 오후 보내세요.

멋진빤스 2011-06-09 14: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2011-06-09 15: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차분한세상 2011-06-09 16: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테판 에셀의 '분노하라'가 화제가 되자 계훈제 선생님이 떠오르더군요.
안녕하세요? 훌륭한 리뷰 잘 읽었습니다. 의로운 분노가 만연한 세상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똘레랑SUE 2011-06-09 19: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정말 잘 읽었습니다. 아직 <분노하라>를 구입하진 않았지만 빨리 읽고 공감하고 싶네요- 시사적인 시선까지 다 공감하며 갑니다 :)

달사르 2011-06-10 18: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유월이 되면 가슴이 뛰었던 적이 있었는데..언제였나..가물거리는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텔레비젼에서 반값등록금투쟁을 보면서, 성공했으면 좋겠다..생각하는 그 정도네요. 이제.
'분노하라'는 말과 내용에 시들어가는 피가 좀 덥혀지는 듯? ^^

posbaedar 2011-07-24 01: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고에서 읽었는데 나라를 잘 다스리지 못하면 분노해야 하는 이유. 분노보다는 가만히 구경만하는 저 같은 사람은 뭔가가 해야 한다는 공감을 업더라고요...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
최인호 지음 / 여백(여백미디어) / 2011년 5월
평점 :
절판




최인호를 찾아서

 
내가 아는 작가 최인호는 가장 많은 작품이 영화화된 작가이다. 바로 대답할 수 있는 작품만 해도『별들의 고향』(이장호 감독, 1974),『적도의 꽃』(배창호 감독, 1983),『고래사냥』(배창호 감독, 1984),『깊고 푸른 밤』(배창호 감독, 1984), 『겨울 나그네』(곽지균 감독, 1986)등 대부분 흥행에 성공한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이중에서 ‘고래사냥’과 ‘겨울 나그네’는 정확하게 내 청소년 시절의 스크린을 관통한 작품이다. 주로 이장호, 배창호등 스타감독이 연출하고 안성기, 장미희, 이미숙등 당대 톱스타가 열연해 각종 영화제에서 단골로 상을 가져간 작품이기도하다. 내 기억으론 당시 배창호와 안성기, 그리고 최인호의 조합은 곧 대 흥행공식을 의미했었다. 그러니까 원작이 영화로 만들어 질 경우 상업성은 보장된다는 뜻이기도 했다. 대부분 청소년 관람불가 영화가 많았고 주로 비극으로 끝나는 결말인데다가 배경은 도시였기에 그들은 예술적, 퇴폐적으로 보여지기도 했다. 하지만 최인호라는 이름 석자는 분명 영화와 소설 모두 주류의 시스템을 벗어나 본적이 없는 대중소설가였고 작가로서 그 이름은 성인의 영역에 있다고 판단한 내가 그의 작품을 문학으로 만나볼 기회는 없었다. 그냥 그 이름만으로 잘 알고 있는, 어영 부영 읽었다고 생각되는 유명한 작가들 중 한사람일 뿐이었다. 동시기를 살아 내온 작가들 중에 한수산, 박범신의 작품은 읽어본 적이 있었지만 최인호는 심지어 문학인이 아니라 영화인이라고까지 생각했던 것 같다. 책을 읽다 보면 분명 작가와도 모종의 독서 인연이 생기기 마련인데 그는 내가 성인이 되고 나서도 주로 역사소설을 집필했기에 내 관심분야에서 점점 멀어지기만 한 작가였다. 그런 그가 암투병 중에 전작소설을 완성했다는 소식은 처음부터 굉장히 설레는 뉴스였다. 은연중에 소식을 보고는 이제는 소설을 못 쓰시겠구나, 그런 섣부른 생각을 했기 때문에.(놀라웠다) 나도 몰래 그를 병들은 늙은이 취급을 한 것이 아닌가 싶어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그래서 출간소식은 감동이었고 그동안 그의 소설을 만날 기회가 없었던 나로선 세월의 오래된 부채를 갚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기도 했다.


 

 

 

 

 

 

 

 

 

   최인호라는 작가에 대한 미안함과 최인호 문학의 낯설음을 해결하기 위해 나는 지난주 그의 초기 작품 <타인의 방, 1971>, <깊고 푸른 밤, 1982>이 실려 있는 소설집을 빌려와 뒤늦게 읽어 내려갔다. 아니 <타인의 방>을 읽지 않고서는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를 읽을 수 없을 것 같았다. <타인의 방>은 40년 전 ‘70년대를 상징하는 공간적 은유’라 불리던 그 시대 문제작이었다. ‘타인의 방’의 공간배경은 도시를 대변하는 아파트이며 (부재중인)아내를 포함해 안방과 거실에 놓여진 낯선 사물들의 전시관이다. 소설 속 자아가 40년 후 그 방을 잘 나온 것인지는 모르지만 어쩐지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는 지금에서야 그 방을 나올 수 있었다는 작가의 증언같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 기간이 우연히도 지금의 내 나이만큼 이었다는 것도 나로서는 그냥 넘기고 싶지 않은 우연에 속했다. 또 <깊고 푸른 밤>은 제 6회 이상 문학상 수상작(1982)이면서 얼마 전 쎄시봉 콘서트로 세간에 많이 회자된 가수 이장희를 소설 속 주인공으로 삼은 작품이기도 하다. 아련한 내 기억속의 ‘깊고 푸른 밤’은 단연 장미희와 안성기의 자동차 본네트(보닛)위 로맨틱한 정사신이었다. (다른 건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 물론 영화는 내가 성인이 되고난 후 보았지만 내가 기억하는 ‘깊고 푸른 밤’은 소설속의 밤과는 사뭇 달랐던 것이다. 소설 속의 밤은 절대 육화된 로맨스의 밤이 아니었다.(얼마나 창피하던지) 그런데 (소설을 읽지 않은 독자들 중에는)30년 동안 나처럼 ‘깊고 푸른 밤’을 한국 영화의 80년대 에로틱한 밤의 대명사로 여겨온 독자들이 많을 듯하다. 깊고 푸른 밤은 소설 속 ‘그’가 마리화나를 피운 후 걸어 내려간 해변에서 밀려오던 검은 파도와 그 파도로 자신의 분노가 누그러지던 그날 밤의 암울한 미래를 상징하는 내면의 밤이다. 두 작품 다 급속한 현대사회에서 잃어버리고 잊어버린 자신의 정체성에 관한 질문자체가 답이 되는 소설이기에 과거 최인호의 문학 연장선상에서 그들은 이번 소설과 무관하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속한 곳이 어디이며 그곳에서의 나는 누구인지 묻는 것은 최인호의 오래되고도 끈질긴 질문방식이 아니었을까. 두 작품은 충분히 오늘의 소설을 낯설게 하지 않는 일등공신이었고 모르고 넘어갔으면 리뷰를 쓰는 것 조차 어려웠을지도 모를 정도로 읽기를 잘했다는 생각이다. 
 



 

 

 

 

 

 

 

 
< 깊고 푸른 밤 -  1984, 배창호 감독, 안성기 장미희 주연 >

 
  <타인의 방>에서 주인공은 자신의 이야기를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공간에서 누군가와 친구가 되기로 한다.


지난 여름은 행복하다고 그는 생각하였다. 그러자 그는 그것을 입으로 중얼거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래서 그는 소리를 내었다.

그럼 행복했었지. 행복했었구 말구. 그는 여전히 자신의 소리에 놀라면서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그의 곁엔 아무도 없었다. 그는 좀 무안해졌고 부끄러워졌으므로 과장해서 웃어 젖혔다.

방안 어두운 구석구석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어둠과 어둠이 결탁하고 역적모의를 논의한다. 친구여, 우리 같이 얘기합시다. 방 모퉁이 직각의 앵글 속에서 한 놈이 용감하게 말을 걸어온다. 벽면을 기는 다족류 벌레의 발소리가 들려온다. 옷장의 거울과 화장대의 거울이 투명한 교미를 하는 소리도 들려온다. 그는 어둠속에서 눈을 부릅뜬다. 벽이 출렁거린다. 그는 천천히 몸을 움직인다. 방 벽면 전기다리미 꽂는 소켓의 두 구멍 사이에서 소리가 들려온다. 친구여, 귀를 좀 대봐요. 내 비밀을 들려줄게. 그는 그의 오른쪽 귀를 소켓에 밀착한다. 그의 귀가 전기 금속부품처럼 소켓의 좁은 구멍에 접촉된다. 그러자 그의 온몸이 고급 전기난로처럼 달아오르기 시작한다. 그의 몸에 스파크가 일고, 그는 온몸에 충만한 빛을 느낀다.  
- 타인의 방 / 1971


  이렇듯 도시에 떠밀려 자신이 속한 공간과 대화를 트게 된 소설 속 자아가 <타인의 방>을 뛰쳐나와 <깊고 푸른 밤>의 해변에서 발견한 자신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그는 거센 파도에 의해서 바다를 건너 밀려온 죽은 시체처럼 바위위에 쓰러져 누웠다. 그를 낯선 땅으로 유배시켜온 파도들은 서둘러 물러가고 갓 도착한 빈손의 파도들만 그를 사로잡기 위해서 그물을 던지고 있었다. 그제야 줄곧 그의 마음속에 끓어오르던 분노의 불길이 서서히 꺼져가는 것을 보았다. 파도에 의해서 밀려온 낯선 뭍으로의 망명이 그의 분노를 잠재운 것은 아니었다. 그는 그가 살아온 모든 인생, 그가 보고 듣고 느꼈던 모든 삶들, 그가 소유하고 잃어버리고 허비했던 명예와 허영, 그가 옳다고 믿었던 정의와 법, 때로는 성공하고 때로는 배반당했던 그의 욕망, 끊임없이 추구하던 쾌락과 성욕, 그가 한때 가졌고 버렸던 숱한 여인들, 그 모든 것들로부터 무참하게 얻어맞고 마침내 처절하게 패배당한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처절하게 패배당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그의 분노는 참따랗게 재를 보이면 소멸되었다.  
- 깊고 푸른 밤 / 1982

 
  살면서 자신의 실패와 추락을 물리적으로 인정하는 것은 사실 심리적인 또 다른 패배를 불러온다. 심리적인 상처는 보이지 않는 분노를 쌓게 하고 사람은 결국 그 분노를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데 온 인생을 허비하게 된다. 동시대를 살았던 작가 한수산은 막살지 않고 열심히 살아온 어느 완벽주의자 교수의 분노를 <타인의 얼굴>이라 호칭, 환유했다. 자신의 은사가 췌장암에 걸려 시한부 인생에 놓이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그를 찾아가 확인한 것은 죽음을 기다리는 그의 두려움과 혼란, 무력에 빠진 노란 얼굴이었던 것이다.

 
“끊임없이 싸워. 정상적인 자아와 병든 자아가 이십사 시간을 싸워. 이게 나야. 내가, 두 개의 내가 살아있어. 내가 나를, 정상적인 자아가 병든 자아를 두 시간만 재워놓자. 그러면서 잠이 들어. 여덟시에 깨우자. 그러면서 살아. 병든 자아를 달래서 약을 먹이고, 병든 자아에게 사정해가며 물도 몇 모금 먹고......”

- 타인의 얼굴 / 1991

  나는 췌장암에 걸린 교수가 하루는 ‘그 사람이 뭔데 나보다 이십 년을 더 살아. 말이나 되는 소리야’ 하다가도 ‘뛰어내릴까. 그래서라도 죽는 게 낫지 않나. 딱 죽는 약이 있으면 먹을까도 싶고.’ 하는 혼란이 어쩐지 침샘암에 걸려 투병중이었다는 작가의 고통과 겹쳐졌다. <타인의 얼굴>에서 교수의 마지막 얼굴을 확인한 그는 그의 죽음이 슬프기도 하지만 자신은 아직 살아있다는 기쁨을 느끼는 자신과 건강을 조심해야지 하는 자신도 자신 속에 살아 있었음을 확인한다. 결국 수많은 자아와 싸우는 자신만 존재할 뿐 어떤 자아도 실체로서 실재하지 않는다는 주인공의 사막같은 깨달음은 우리에게 슬픔을 안겨준다. 내가 믿고 있었던 내가, 내가 알고 있고 상대가 알고 있는 나라는 자아는 어쩌면 원래의 나가 아닐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아니 자아에는 원래 원형이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해서이다. 최인호의 얼굴은 소설 속 타인과 더불어 그 어디에도 있으면서 그 어느 곳에서도 만날 수는 없었다. 최인호를 따라가는 것은 낯익은 줄 알았던 작가, 낯익어만 보였던 소설과 조우해 낯선 타인과도 같은 내 자신을 만나는 귀한 시간은 아니었을지.


스위치를 찾아서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를 덮고 나서 나는 만 하루 동안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굳이 분류하자면 슬프고 쓸쓸한 감정에 속했지만 그대로 모두 받아들이긴 힘들었던 것 같다. 타자화된 소설은 많이 힘겨웠고 아프게 느껴졌다. 작가가 손톱과 발톱이 빠져가며 원고지를 작성했다는 소식때문 이었는지 기나긴 투병의 현장에 같이 동참한 느낌이 들었다. 마치 날을 받아놓은 말기암 환자의 병문안이라도 간 채로 그곳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온 기분. 밤새도록 그의 고통을 확인한 후 숨죽이며 맞이하는 다음날 아침. 그런데 막상 시간에 떠밀려 내가 사는 곳으로 돌아가자니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 안타까움. 그렇지만 어서 빨리 현실로 복귀해 남은 생을 허비하지는 말아야지 하는 야릇한 다짐. 아픈 사람 위로하러 갔다가 미안하게도 내 아픔만 위로받고 돌아가는 염치없는 심정...객관적으로 나는 멀리 떨어진 한명의 살아있는 독자에 불과했다. 그것은 어쩌면 발이 짓무르고 피가 배어 나와도 어떻게든 마지막을 향해 걷고 뛰어가는 마라토너의 엄숙한 주행을 기다리며 지켜보는 시간이었달까. 그러니 그의 완주는 소설의 결말과 상관없이 눈물이 나고도 남을 지경이었다.

  니체는 ‘자신이 가진 힘의 4분의 3 정도의 힘으로 작품이나 일을 완성시키는 것이 가장 적당하다’고 충고한 바 있다. 너무 완벽하게 온 힘을 다해 온 마음을 기울여 완성한 것은 보는 이로 하여금 그것을 만들어낸 사람의 긴장과 고통을 고스란히 전달해준다는 것이다. 그것은 일종의 흥분일 수도 쾌감일 수도 불쾌감일 수도 있지만 절대 느긋한 여유를 전해주지는 않는다고 하였다. 최인호는 모두를 쏟았다. (남은 것이 없기 때문에) 아마도 가진 것의 이상을 쏟지 않으면 처음부터 완주가 불가능해 보여서 였을지도 모른다. 좀 더 가지고 여유롭게 마친 자의 여유라고는 털끝만치도 확인할 수 없었던 이 소설은 분명 지금까지 마주한 소설에서 느끼지 못한 고통의 낯설음, 불쾌한 이질감을 제공했다. 그것을 차마 감동이라 하기엔 내 스스로가 주제넘어 보였다.(감동이라 말하면 안된다) 후배 소설가 김연수는 발문에 최인호의 계속하여 쓰고자 하는 힘이 소설가인 자신을 구원한다고 그리하여 이제 우리는 또 다른 소설을 기다릴 수밖에 없다고 고개를 숙였다. 작가로서 소설을 쓸 수 밖에 없는 운명이야 어느 작가도 피할 수 없는 것이겠지만 이번 운명이 유독 잔인하게 느껴졌던 건 왜일까. 생사의 기로에서, 죽음의 절벽에서 자신인 자신과 타인인 자신을 합체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죽는 날까지 분열되지 않겠다는 자기 맹세는 아니었을까. 다시 출발하고 싶다는 의지와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는 것이 곧 죽음을 이기는 일이라 생각한 냉철함은 독자로서 속편한 구경거리는 아닌 것이었다. 작가는 소설을 통해 구원을 받았을지 모르지만 그 바통을 이어받은 독자는 이제부터 균열이 시작되는 것이다.

  이 작품은 토요일 7시에 시작해 월요일 8시 14분에 막을 내린다. 특이하게도 첫 문장은 <POWER ON> 이고 마지막은 <POWER OFF>이다. 어떤 장치에 전원이 들어와서 그것이 꺼지는 사이, 즉 기계가 작동되고 있는 운영시간은 꼭 2박 3일간의 주말에 놓여있다. 주인공 K가 금융회사의 차장인 것으로 보아 이 시간은 샐러리맨의 달콤한 휴식시간에 해당한다. 누가 파워 스위치를 켜고 누가 껐는지는 알 수 없지만 중요한건 이 소설이 그 꿀맛같은 주말동안 시간단위로 시간이 흐른다는 것이다. 매 순간 숫자로 표시된 시각과 K, H, MS, JS등으로 기재된 출연진, 빈번하게 등장하는 사회, 인문학적 용어들은 이 작품을 절대 친근하게 바라볼 수 없도록 객관화 하고 있었다. 全 소제목은 8시 15분, 9시 53분과 같은 식이기 때문에 이 소설에서 공간은 아무리 바뀌어도 큰 변별력이 없어 보였다. 거대한 지하창고나 광활한 사막이 배경인 듯 거실과 안방, 부엌, 카페, 극장, 병원, 지하철, 버스등은 현장감을 가지지 못한 채로 관념상의 의식적 공간에 머물렀다. 설계용어로 표현하자면 3D 이미지를 평면적인 도면으로 찍어 눌렀다고 할 수 있다. 사실 <POWER ON>의 의미도 처음엔 인식하지 못했다. 사람인지 기계인지 아니면 이야기인지 그것이 그동안 작동되어 왔다는 것을 소설의 마지막에 알려주므로(깨닫게 되므로) <POWER OFF>가 된 후라야 그전에 파워가 들어왔다가 꺼졌다는 것을 알 수 있을 뿐이었다. 반전까지는 아니지만 분명 깨우침을 알려주는 강력한 신호가 아닐 수 없었다. 소설의 주인공은 바로 그 전까지 아침이면 기계처럼 일어나 출근을 하고 로봇처럼 업무를 수행하고 밧데리가 방전된 채 퇴근을 하던 반복의 화신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알 수 없는 무언가의)파워가 켜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 소설 속 파워신호는 자아의 분출과도 같은 자발적 내면의 신호인 것이다. 그 내면의 신호가 켜지자 아이러니 하게도 외부의 모든 신호는 정전이 된다. 아니 결국 방전이 된 것인지도 모른다. 작가는 2박 3일간의 파워여행을 진짜 자신을 찾기 위한 내면여행으로 테마를 설정하신 듯했다. 가이드도 없고 목적지도 없고 물론 동반자도 없이 처절하게 외로와 보이는. 내가 보기에 이 여행의 목적은 처음부터 정해진 것 같진 않았다. 누구라도 일단 파워스위치가 켜진 이상 그 여행은 떠날 수 밖에 없는 여행이었다. 그러니까 그는 왜 여행을 떠났는가가 아니라 왜 여행을 떠날 수 밖에 없었나, 가 맞는 질문이 아닐까. 떠나는 건 절대 자발적 의지가 아니었다는 점에서 소설 속 <POWER ON>은 자동사의 위치가 아닌 것이다. 피할 수 없는 상황에 내몰려 떠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바로 내가 아닌 타인, 타인으로서의 또 다른 자아가 스위치를 실행했기 때문인 것이다. 그런데 결국 그 자아는 원래의 나일 터이니 알고 보면 범인은 나이기도 한 것이다. 파워 스위치를 누가 켰는지, 이것은 이 소설에서 숨겨진 복선이자 작가의 은밀한 힌트이기도 했다.


육체를 찾아서


그 사람이 다름 아닌 K의 모습이 투영된 자신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데 K는 필요이상의 시간을 소비하였다. 거울 속 사람이 자신이 아니라 타인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 21p


  누구나 한번쯤 거울속의 자신이 전에 없이 낯설게 느껴진 적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보면 이 낯설다는 느낌은 기존에 자신이 생각하는 원형이 있어야 가능하다. 즉 기준점이 있어야 그와 다르다는 것도 발견할 수 있다는 말씀이다. 거울을 보기 전엔 누구나 그 전까지 뇌에 입력된 자신의 이미지가 존재한다. 그런데 또 가만 생각해보면 매일 거울을 본다고 가정했을 때 원형의 이미지는 사실 매일 갱신되고 있지 않은가. 그러니까 사람은 거울을 볼 때마다 조금은 달라진 타인으로서의 자신을 매번 확인할 수밖에 없는 존재인 것이다. 다만 점진적인 (타인으로서)자신의 변화를 자각할 수 없을 뿐인 것이다. 내가 모르고 있다고 내가 달라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는 것. 작가는 물론 이처럼 서서히 노화된 외양으로서의 변화를 스스로 감지한 주인공을 말하진 않았다. 문학은 일차적이고 시각적이지 않다. 주인공 K가 자신을 타인으로 인식하는 순간은 누구보다 정확한 자신의 모습일 때였다. 통시적이라기 보다 공시적인 시각이다. 금융회사의 모범적인 직장인으로서 매주 한번 교회를 다니고 있으며 정신과 의사 친구를 두었고 지식인으로서 거짓말을 할 줄 모르고 자기원칙이 분명한 주인공이 자신을 타인으로 인식한 최초계기는 거울 속 나신이었다. 기계작동의 시작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벌거벗은 사내였던 것. 그날 아침 ‘그 누구도 작동하지 않는 자명종이 스스로 울린 것’처럼 K는 누군가 자신의 옷을 벗겨낸 것이 아닐까 생각하는 것이다. (물론, 위의 파워논리에 비추어 볼 때 옷도 타인인 자신이 벗겼을 확률이 백 프로다)

  리뷰를 시작하면서 느낀 것인데 거울 속 나신으로서 자신의 모습은 거짓없는 진실, 순수를 추구했던 육신, 새롭게 시작하고픈 욕구를 불러 일으킬 수도 있지만 반대로 모든 것을 포기하고픈 의지, 절망의 늪으로 빠져버리고 싶은 충동, 허물어진 육체를 가학하고 싶은 욕망과도 연결되는 것 같다. 주제넘지만 나는 이 장면을 병든 작가가 자신의 현재 육신의 상태를 확인하는 고통스런 시점으로 이해하였기 때문이다. 욕실에서 시작된 알 수 없는 불안은 대체로 낯익은 존재들에 대한 낯설은 느낌이었다. 낯익은 아내, 낯익은 딸, 낯익은 강아지, 낯익은 친구에서부터 낯익은 공간, 낯익은 풍경까지. 기존에 자신과 관계하며 자신을 알던 모든 사람은 가면을 쓴 존재로 인식되고 강아지마저 자신을 낯선 침입자로 취급한다. 심지어는 죽었다는 장인이 버젓이 살아나 처제의 결혼식에 나타나고 사람들은 누가 누군지 모르는 가면무도회에 참석한 1인 다역 배우로 인식되기까지 한다. 달라진 것이 있었다면 전날 밤 아내와의 (결혼 후 처음으로)섹스에서 발기가 되지 않은 것과 친구와 술자리 후 잃어버린 휴대폰이었다. 거울 속 나신, 발기하지 않은 성기, 잃어버린 휴대폰, 이 세 가지 단서는 남성으로서 내가 누구이며 어떤 사람과 관계되어 있는지를 말하는 중요한 실마리가 된다. 그러므로 간밤에 잃어버린 휴대폰의 행방을 찾아 나서는 길은 곧 주인공이 잃어버린 타인과의 관계를 찾아 나서는 길이었으며 그 길에서 만난 모든 여인은 바로 발기되지 않은 주인공의 성적 욕망을 상징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그가 우연히 마주치는 여인들은 하나같이 심리적, 물리적으로 그를 유혹하는 육질의 존재로 출연했다. (아내와의 습관적인 섹스에서 발기가 되지 않았던) K는 자신이 카페와 주차장, 극장 등의 공공장소에서 뜻밖에 관음증적인 쾌락이나 일시적인 성욕에 사로잡힐 수 있는 인물임을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

  내용상 상당부분 K가 남성으로서 여성을 바라보는 시각은 (순수소설의 수위보다는 좀 높게)관능적으로 묘사되는 경향이 있었다. K는 누구보다 고상하게 아닌 척 하면서 자신의 남성을 육체로만 확인하고 싶었던 사람인 것이다.(이 의문이 해소되는 것은 소설의 말미이지만) K의 은폐된 욕망은 기존 소설에서 낯익은 서사였지만 그 추구 형태는 무엇보다 낯설었다. 술집에서 만난 나비 문신의 여인은 카페에서 노출증의 여자로 변신하고 그 여자는 TV속의 아나운서로 순간 이동한다. 15년간 살을 맞대온 자신의 아내는 친구 H의 아내와 동일 인물이었다. 아내는 잃어버린 휴대폰 동영상에 저장된 정사신의 주인공이기도 했다. 하나밖에 없는 누이 JS는 예전에 탤런트였을 정도로 미모가 뛰어났지만 폭식증에 걸려 거구가 되버렸고 K는 그 육체의 낯설음 속에서도 낯익은 정욕을 느끼고 만다. 이 작품속의 여성은 자신의 아내로, 혹은 누이로, 혹은 친구의 부인, 혹은 길거리 스치는 익명의 여인으로 신분과 역할을 바꾸었지만 K가 확인한 건 (누가 되었건)그 순간 자신이 항상 살아있는 남성이었다는 자각이었다. K는 육체적 욕망을 가진 여성에게서는 숨막히는 악취를 느끼는 다시 말해 자신은 굉장히 도덕적인 남성으로 생각하는 성정체성을 가진 사람이었다. 균열은 이러한 인지부조화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닐까. 자신이 생각하는 자신과 자신이 모르고 있던 자신을 비교하는 수사로 작가는 대상인 여성의 육체를 적극적으로 사용했다. 나는 이것이 투병으로 스러져가는 한 남자의 보잘 것 없는 육신에 대한 生의 악착같은 가학이라는 생각을 했다. 작가는 소설을 쓰고 마치기 위해 퇴화된 육체인 손톱이 뽑히는 고통을 감내해야했지만 그 고통은 오히려 소설을 마치게 하는 심리적 보상체제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이는 암에 걸려 집필을 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암 때문에 새로운 육체와 새로운 마음으로 새로운 소설, 즉 자기안의 타인과도 같은 자신이 쓴 소설을 당당하게 끝마칠 수 있었다는 것과 같은 이야기 일 것이다. 이 과정은 평생 소설쓰는 낯익은 행위일지라도 이번만은 유독 낯선 작업 시간을 제공했을지 모를 일이다. 그 과정은 본인은 이제 남성으로서 성기능이 끝나버려 더 이상 남성의 의미가 쇠퇴한 육신일지라도 (자기안의 타인으로서)육화된 감각만은 더욱 생생히 살아남아 자기안의 (죽어가는)남성을 괴롭히고 자극하던 고통의 시간일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최인호 작가가 소설속 여인의 육체를 찾아가는 일은 결국 자신의 육체, 새로운 생명을 찾아가는 일은 아니었을까. 자신의 육체를 신대륙처럼 발견하는 일은 절망이 아니라 희망으로 부활하는 일은 아니었을까.


영혼을 찾아서

 
작가는 K에게 일어난 증상을 설명하기 위해 ‘어제 새벽 2시쯤 서해 앞바다에서 진도 5.6 의 지진이 발생’했다고 뉴스로 부연했다. 지진의 원인은 ‘지하의 단층 밑에 축적되었던 고압상태의 마그마가 저항이 약한 해구를 공격함으로써 일어난 것’이라 분석했다. 이 책에서 지진이 일어난 시점과 K의 세상이 낯설어진 시점은 동일했고 소설은 일정한 속도로 각자의 붕괴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K는 무언가를 찾아 나설수록 계속하여 낯익은 존재가 낯설게 등장하는 현실에 놓이게 되는데 K의 현실과 서해 앞바다에 발생한 지진은 무슨 인과관계가 있었던 것일까. 소설의 시공간이 깊어질수록 지진은 그 강도를 더해갔다. 가장무도회에 출연하는 배우들도 더욱 바빠 보였다. 처제와 결혼해 신혼여행을 떠났다는 새신랑은 낯선 카페에 어느 불량 커플로 등장하고 유일한 혈육인 누이 JS가 재혼한 현재의 남편은 다름 아닌 장인이기도 했다. 다양한 역할의 복제인간은 끊임없이 K의 기존 인맥관계를 비집고 불청객처럼 불쑥 등장하곤 했다. 결국 지층밑에 축적된 K의 마그마는 이러한 외부의 공격을 이기지 못하고 ‘성인방에서 7만원을 주고 달의 요정 세일러문과 가벼운 키스와 스킨쉽’을 나누는 지경까지 이르게 된다.

  이 현상을 작가는 제 3의 입체공간으로서 ‘섀도박스’이거나 ‘같은 부품들을 종횡으로 배열하고 이들을 그물 모양의 도선으로 연결한 회로’, 즉 매트릭스라 명명한다. 혹은 ‘안쪽과 바깥 쪽의 구별이 없으며 좌우의 방향을 정할 수 없는 단일 경계를 갖추고 있고 시작도 끝도 없는 연속성을 지닌’ 뫼비우스의 띠와도 같다고 말한다. K는 그런 뫼비우스의 띠를 기어 다니는 개미이며 ‘같은 곳을 되풀이해서 돌고 있는’ 환상방향의 주체로서 ‘링반데룽’의 인물이라는 것이다. 이 작품엔 이렇듯 사회적으로는 낯익지만 소설에선 낯설어 보이는 여러 용어들이 제 3의 언어처럼 자주 등장한다. K는 ‘이 모순된 가상현실의 이중성은 누군가에 의해서 180도로 뒤틀린 왜곡된 현상’이라 믿었다. 예를 들면, 아내는 ‘어딘 가로부터 하달되는 초월자의 명령을 철저하게 순종하게 되어 있는, 그렇게 설계된 로봇이며, 세뇌된 인간이며, 사람의 아들이 아닌 사람의 딸’이라는 주장이다. 말하자면 자신은 그대로인 채로 변하지 않았지만 외부 세계, 타자들만 약속이나 한 듯이 변했다는 논리이다. 개인적 견해지만 소설에 차용된 사회학적 용어들은 너무 빈번해 혼란을 야기했다는 생각이다. ‘섀도박스’나 ‘매트릭스’, ‘뫼비우스의 띠’들 중 어느 하나만 밀고 나가셨으면 K가 처한 현실이 더 입체적으로 (두렵게)느껴졌을 것 같다. 사고의 배경을 옮겨 다니는 것이 나로선 피곤했고 관념상에 머무르게 했다.

  작품 후반부에 K는 이 모든 현실이 누구의 잘못에서 기인한 것이지를 따져 묻고는 사고의 방향을 타인에게서 자신으로 선회한다. K의 이러한 사유는 우리 사회에 성형으로 모두 얼굴이 같아졌기 때문에 자신이 그 사람의 고유한 정체성을 알아보지 못한다는 자기 변호와 그래도 자신 주변의 복제인간은 ‘입으로는 정의를 부르짖으며 행동으로는 부패와 뇌물과 타락과 위선과 구제불능의 권위와 야합하는 지식인들의 이중성보다는 훨씬 양심적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무조건 내 탓이오, 하는 자기 반성과는 달라보였다. 그는 진짜가 아닌 복제인간들을 통해 사람의 정신을 치료하며 가장 가깝다는 친구 H가 실은 보통사람보다 더 정신병 환자이며 섹스 중독자이며 위선적인 인물임을 깨닫게 되고 사람은 한 가지 얼굴로도 얼마든지 두 가지 이상의 인격으로 세상을 살아나갈 수 있을 확인한 것이다.


         ‘모든 의혹의 출발점에는 K 스스로가 K 가 아닐 수도 있다는 대전제가 먼저 선행되어야만 했던 것이다.’


  이 모든 가상현실에서 바뀐 사람은 타자가 아니라 자신임을 깨달은 K를 설명하는 작가의 언어는 ‘분열된 또 다른 자기 자신의 생령을 보는 심령현상’, 즉 이위 일체로서 도플갱어였다. 작가는 의도적으로 K를 모범적인 금융인 K2와 집창촌 포주의 기둥서방 K1으로 분열시키셨던 것이다. 작가는 말한다. K1이 ‘불운한 인생을 살아온 전과 5범의 범죄자’라 할지라도 악의 상징이라 칭할 수 없으며 K2가 ‘단 한 번의 경범죄도 저지르지 않은 무죄한 사람’일지라도 선의 상징이라 단정할 수 없다고. K1과 K2가 동일한 사람이듯이 우리 안의 선과 악은 동시에 공생하는 타인들이라고. 결국 K가 그토록 헤매 다녔던 방황의 여정에서 자신의 합체를 이룬 곳은 ‘선’과 ‘악’이 만나는 지점, 그 영혼의 절반이 서로를 인식하는 순간이었다. 나라는 사람의 영혼은 누구보다도 고귀하거나 순결한 것이 아니고 누구라도 선하고 악할 수 있는 공평한 만남의 결실이었다. 그 자명한 진실을 깨닫기 위해 K는 타인이기도 한 또 다른 K를 찾아 나설 수 밖에 없었고 진정하고 온전한 K가 되기 위해선 타인인 K를 확인하고 그를 인정해야만 하는 것이었다. 나라는 존재는 하나로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여러 가지가 들어있는 실재였다. 삶은 그렇게 내 속에 들어있는 무수한 타인을 만나러 찾아가는 그래서 그를 만나고 다시 자신으로 돌아오는 끝없는 여정인 것이었다.

  우리는 보통 (나를 포함해)자신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의심없이 인격수준이 어느 이상은 될 것이라 믿는 경향이 있다. 가족은 물론이고 친구, 친인척, 학교 선후배, 같은 직장 동료 등등, 내가 아는 범위 내의 사람들은 내가 기대하는 수준의 인간성을 지니고 있으리라는 착각을 한다. 이 착각이 무너졌을 때 우리는 상대에 (허락없이)실망을 하고 놀라움에 호들갑을 떨고는 한다. 나는 내가 그다지 인격이 높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 실은 얼마 되지 않는다. 이는 나 혼자 잘나서 내부에서 일어난 깨달음이 아니고 상대인 타자에 의해 촉발된 내 반응에 따르는 결과였다. 어떤 상대는 지금껏 모르고 있던 나를 알게 해주는 (자아)발견의 슬픔이 된다. 즉 내가 그동안 쌓아온 내 인격의 보유량은 절대 내 스스로 측정, 평가할 수가 없는 것이다. 나는 이번 소설을 덮으면서 더더욱 사람은 특별히 선한 사람도 없고 특별히 악한 사람도 없다는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 언제든 선해질 수 있고 또 언제든 악해질 수 있는 존재라는 믿음이 더해진 것이다. 될 수 있으면 내가 생각했던 나보다 선한 타인이 내 안에 존재했으면 좋겠다. 그런 타인이라면 아마도 서늘하거나 슬프지만은 않을 것 같다. 하지만 만약 내 안에 악한 타인을 언젠가 만난다 하더라도 너무 많이 놀라지는 않으련다. 인정하기 싫지만 그 악한 타인도 나라는 사실을 수용하고 비로소 온전히 합체된 그 순간에 더욱 의미를 찾아 볼 작정이다. 이번 독서는 근래 만난 소설중에는 많이도 힘들었다. 힘든 만큼, 내가 발견한 소중한 에너지가 있다. 그것은 내 안의 못난 나, 내 안의 비겁한 나보다 더 진실되게 악하고 못된 나를 인정하는 용기였다. 인정하고도 원래의 나라고 생각하는 선한 나와 동일시 하였다. 말로만 인식하다 그 실체를 온몸으로 확인하는 것은 슬픈 일이다. 그 실체는 타고난 악이기 때문에 반드시 선과 대치되는 갈등의 순간을 초래할 것이다. 알면서도 어찌할 수 없는 그들인 것이다. 이 소설은 그런 나를 십분 이해해준다. 이 작가는 이런 나를 살포시 안아준다. 부디 당신도 언젠가 당신 속의 타인에 무릎꿇고 그를 아프게 인정하길 바란다. 쉽지 않지만 당신과 나 우리 모두에게 꼭 필요한 일이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그리 어려운 것만은 아니지 않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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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1-06-08 11: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크~ 이 분의 책을 아직도 못 읽고 있다는 거 아닙니까?
책이 그렇게 많은데...ㅠ
영화화 된 것도 그렇게 많은데, 이 분은 통속소설을 쓴다는 이미지가 있어
선뜻 마음이 안 갔던 것도 사실입니다. 박범신도 그랬거든요.
하긴, 내가 읽은 한국 소설가가 얼마나 된다고...
책 표지가 마음에 들어요. 난 이런 게 좋드라.^^

한사람 2011-06-08 12:44   좋아요 0 | URL

이번 작품은 완전 관념적이더군요
통속을 그렇게 객관적으로 풀다니 ㅋ

저는 참 좋았습니다.
소설이 지극히도 우울한 것만 제외하면요..

달사르 2011-06-08 23: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낯익음과 낯설음이 섞이는 느낌입니다. 최인호. 낯익은 이름이지만 한 편의 소설도 읽지 않은 소설가. 낯익음을 가장한 낯설음일까요. 낯설음을 눈치채지 못한 낯익음일까요.
리뷰 잘 읽었습니다. 이번 신간은 최인호의 또 다른 새로운 소설, 로 받아들이는게 낫겠군요. 마지막이 아니었으면 하는..

한사람 2011-06-09 00:51   좋아요 0 | URL

저도 그 생각이 퍼뜩 들었어요..
망측한 생각이지만, 작년에 <못 가본 길이 아름답다>가 출간되었을때 그 책이
마지막이 아니길 저도 모르게 바래었거든요(투병중도 아니신데...)

아직 한창이신 나이니..더 오래 활동하셔서
이처럼 낯설어도 뻐근한 소설을 마니마니 출간하셨으면 합니다..

달사르 2011-06-10 18:02   좋아요 0 | URL
이 동네는..땡스투라는게 있네요? 뭐지? 하면서 눌러봤다가 그 기능을 알았어요. ^^ 앞으로는 책 살때 저거를 누르면 되는거로군요. ^^

음..저는 리뷰에 언급하신 전작소설..이 뭔지 몰라서 출판사에 아시는 분께 여쭤봤더랬어요. 히. 그 뜻을 알고나니 작가님이 새로이 보이더군요. 요새는 전작소설이 드물다지요?

한사람 2011-06-10 21:45   좋아요 0 | URL

저는 거의 모든 작가들이 연작이 아닌 전작의 형태로 소설을 쓰시는 줄 알았어요
요즘은 매체가 다양해 연작이 대세이니 그게 중요한 사건인가봐요

저는 땡스투 한번도 안해봤는데....
달사르님 많이 아세요 !
 
[국가란 무엇인가]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국가란 무엇인가
유시민 지음 / 돌베개 / 2011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기본이란 무엇인가

  이 책은 우선 기본기가 탄탄하다. 첫 페이지에서부터 마지막까지 한 치의 틈을 허용치 않는 저자의 변함없는 의지와 힘을 실어주는 텍스트 밀도는 나같이 국가나 시민, 진보와 보수의 개념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 정치 문외한에게는 아주 유용할 듯하다. 꼭 정치적인 시각이 아니더라도 아주 오래전 윤리 교과서와 대학 교양과목에서 스쳐 지나간 분들을 민망하지 않게 조우하도록 자리를 마련했으며 만남을 통해 새로운 끄덕임의 시간을 주었다는 것도 내겐 의미있었다. 국가론 듣다보면 철학과 윤리 및 경제, 사회학을 엿듣게 되기 마련이니까. 개념을 말하는 인문서적으로서 손색이 없다.

  그러니까, 요즘 세간엔 ‘**는 무엇인가’ 식의 막연하고도 직설적인 질문에 ‘나는 **이다’식의 분명하고 정직한 답변이 하나의 사회현상으로 자리 잡은 듯하다. 무엇이든 그 본질을 따져 묻고 해당하는 것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것이 마치 지금 우리가 당면한 공통의 과제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즉, 질문에 거론될 주제와 답변으로 언급될 역할은 곧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중요한 바로미터가 된다. 누구든 자주 질문하고 답으로 거론되는 것이 지금 우리의 화두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무엇을 물을 것인가는 어떻게 답할 것인 가만큼 중요한 일인 것이다. 이 책은 바로 그 총명한 질문이 곧 훌륭한 답으로 가는 길임을 말하는 책이다. 무릇 교육은 정답을 일방적으로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질문하는 법을 가르치는 것이 아닐까. 획일적인 주입식 교육에 길들여진 내 세대는 ‘질문 하시오’라는 교사의 상투적인 인사에 ‘그런 건 없습니다’하며 정중히 고개숙여 화답하였다. 국가가 무엇인지, 어떤 국가가 좋은 국가인지, 좋은 국가의 시민은 어떤 사람인지, 감히 질문할 수 없었다. 아니 질문하기 이전에 궁금하지도 않았고 궁금할 수도 없었다. 이미 묻기 전에 친절히 정해진 정답을 알려주어 우리는 그것을 외우며 그런 줄 알면 되는 것이었다. 사람은 무엇인가. 행복은 무엇인가. 교육은 무엇인가. 철학은, 과학은, 종교는, 경제는....무엇인가에 질문한다는 것은 그들이 열심히 적고 가르쳐준 모든 것들을 제대로 알고 있지 않다는 뜻과 같았다. 국가처럼 절대적이고 최상위에 위치한 개념은 더더욱 당연한 (답으로 무장된)질문에 속했다. 국가를 모르고 어떻게 시민으로 살아간단 말인가. 아니 어떻게 국가에 속한단 말인가. 그러니 우리는 국가가 무엇인지 이미 아는 사람이어야 했고, 그랬기 때문에 결국 국가가 무엇인지는 알지 못하는 사람이 되었다. 이 책이 던지는 질문에 자신있게 답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도 학창시절 오답노트를 열심히 외운 사람일 것이다. 결론은 질문할 수 없다는 것은 질문할 내용을 모른다는 것이고 심지어는 이미 답을 아는 줄로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 책은 역으로 내가 국가를 얼마나 모르고 있었는지 깨우쳐 주었고 그동안 몰랐던 나를 알려고 하지 않았던 나를 질책하기보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는 위로까지 더해주는 미덕을 가졌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알지 못하니 관심이 생길 리 없는 (나같은)정치 문외한이 이 책을 집어들 이유는 희박하다는 것이다.(국가가 무엇인지 알아야할 이유가 없기 때문에) 국가는 그들 다수가 그다지 부러 시간내어 알고 싶은 장르에 속하지 않는다.(내가 아는 정치에 무관심하다는 그들은 대부분 보수이기 때문에) 확신하건대, 이 책의 저자를 잠시 잊어버린다면(?) 나 같은 꼴통 보수는 지금부터 국가를 다시 시작해도 늦지 않을 듯하다. (이 책은 절대 보수를 뭐라 하지 않는다)

  먼저 이 책의 저자 유시민은 친노 대표주자로서 진보, 개혁진영의 국민 참여당 대표이다. 얼마 전 김해 재보궐 선거(4.27)에서 야권 단일화후보를 내세웠으나 (보기 좋게)패배했다. 대선을 일 년 반 남긴 이 시점에 야권 대통령 후보 선호도에서도 민주당 손학규에 밀려 차기주자로서 그 행보가 영 불안한 상황이다. 최근 들리는 소식에 의하면 향후 진보진영의 통합구상을 위해 칩거에 들어갔다고 한다.(혹시 칩거 중에 독자 리뷰를 보지 않을까 싶지만) 그동안 내가 가져온 유시민에 대한 선입견은 한마디로 ‘말빨’ 좋은 (철 안든)정치인이었다. (물론 그의 책은 단 한권도 읽지 않은 채로) 유시민은 이 책의 후기에 글을 쓰면서 되도록 정치인의 시각을 가지려 노력했고 정치인으로서 글쓰기를 대 국민과의 소통으로 인식하므로 이번 국가론을 탐구하는 자신의 책에 스스로 긍정적인 의미성을 부여했다.(대견한 일을 했다고 느끼는 듯) 알려졌듯이 이 책을 집필하게 된 가장 직접적인 계기는 ‘2009년 용산참사’였다고 밝힌 바 있다. 스스로 학자나 지식인으로서가 아니라 ‘악마성이 내재한 국가폭력’과 관계를 맺고 ‘그 폭력이 가져오는 특수한 결과’에 책임을 져야하는 현역 정치인으로서 국가의 의미와 역할, 그리고 정치인인 자신의 역할을 기초부터 체계적으로 정리하지 않고서는 정치인생에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느꼈던 것일까. 책을 덮고 나서 이 책은 (국가를 알려야 할)일반시민을 위한 책이기도 하지만 (국가를 인식해야 할)유시민이라는 대한민국의 대표 진보정치인 자신을 다지는 일종의 자격 논문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정치인으로서 자기검열의 과정이라고 할까. 그런데 정치인으로서 솔직한 소망을 담았다고는 하나 외려 정치색이 느껴지지 않아 이 책은 그가 가진 (독자와의)인문학적 소통의 발판을 더욱 굳건히 해주는 밑거름이 될 듯하다. 정치인의 글을 많이 접해보지 않았지만 이 책에서 느낀 문학인 유시민은 논리(전개)의 속도감, 밀도의 일관성, 보편적 설득성이 뛰어나다고 느껴졌다. 자신도 배우면서 그것이 남에게 가르치는 것이 되고 끝내 상대를 설득하는 집요함도 가졌다. 한 권의 책을 독서했다기 보다 국가라는 과목을 이수한 느낌이다. 그러니까 그는 유려하고 화제성있는 ‘말빨’의 근본에 치밀하고 완성도 높은 ‘글빨’까지 소유한 정치인이었다.


1. 국가란 무엇인가

 
이 사람이 질문을 가지는 순서를 보자. 용산참사를 보면 절로 국가는 무엇을 하는 존재인가, 하는 의문을 갖게 된다. 이로 인해 곧 국가가 할 일을 했건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했건 훌륭한 국가가 할 일은 아니라는 결론을 얻게 된다. 우리는 당연히 훌륭한 국가에서 살고 싶다. 훌륭한 국가 없이는 훌륭한 시민도 없고, 그렇담 행복도 없을 것이니까. 그런데 훌륭한 국가에 대해 말하려면 결국 국가의 본질과 역할을 알아야 하지 않을까. 이것이 ‘국가란 무엇인가’라는 질문 탄생의 경위 및 배경이다. 이것이 아니다 말하고 싶다면 무엇이 이것인지 알아야 한다는 논리이다. 그래야 이것이 아닌지 당신도 끄덕일 수 있다는 뜻이다. 당신을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다 하니 당신이라는 사람이 질문하길 사랑이 무엇인지 알고나 하는 말이냐고 묻는 격이다. 그가 생각하는 훌륭한 국가란 ‘사람들 사이에 정의를 세우고 모든 종류의 위험에서 시민을 보호하며 누구에게도 치우치지 않게 행동하는 국가’이다. 물론, 현재 대한민국은 그가 바라는 바와는 거리가 한참 멀다.

  이 책의 처음은 친절하게도 국가를 말하는 이론을 국가주의 국가론, 자유주의 국가론, 마르크스주의 국가론, 목적론적 국가론으로 구분해 설명한다. 무소불위의 절대권력을 행사하는 전제 군주제를 이상으로 꼽았던 홉스와 그의 매뉴얼로 보이는 마키아벨리의 통치술은 분단이후 국가주의 국가론을 신봉해온 대한민국의 국가발전사의 배경이 되었다. 사회질서유지와 국가안전보장을 중요시하는 ‘이념형 보수’는 바로 국가주의 국가론을 토대로 한 것이며 한반도 분단체제가 계속되는 한 그들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세력이라는 것이 그의 견해이다.(슬프지만 맞는 말이라 생각한다) 여기서 한국전쟁이 대한민국의 새로운 국가탄생의 시작이었다는 그의 해석은 자명하면서도 뼈아픈 현실이었다.

  그는 평화주의자 러셀의 <왜 사람들은 싸우는가, 2010>의 한 구절을 인용하며 국가는 복종하지 않으면 안되는 무서운 존재로 군림했던 자신의 어린 시절을 회상한다.

“ 국가는 전쟁이 필요하다고 판단하면 언제라도 건강한 남자들에게 목숨 걸고 전투에 나서라고 명령하며, 국가의 의도와 견해에 어긋나는 의견을 내놓는 사람을 배신자로 몰아 박해한다. 자국민을 살해하는 사람과 다른 국민 살해하기를 거부하는 사람을 모두 처벌한다. 민주주의 국가에서조차 국가는 때로 국민에게 맹목적이고 무조건적인 순종을 강요한다. 국가는 때로 시민의 자유와 권리를 부당하게 억압하는 폭정을 성공시킴으로써 그것이 폭정임을 은폐한다. ” 33p

“ 어른들은 국가에 대해 이야기 할 때 목소리를 낮추었다. .... 국가와 권력자를 큰소리로 욕했다가 구속되고 재판을 받고 사형을 당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신문에서 읽었다. ....그러면서도 국가는 나더러 자기를 사랑한다는 고백을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하겠노라는 맹세를 아침저녁으로 외치게 했다. 대학에 들어간 후 대통령과 정부를 비판했더니 어딘지 알 수 없는 곳에 가두어 놓고 두 달 동안 매를 때렸다. 학적부에서 내 이름을 지우고 교도소로 보냈다. 나는 조국을 사랑했지만 대통령들은 나 같은 시민을 미워했다. 나도 대통령들을 증오했다. 때로는 권력자를 미워하는 것인지 국가 그 자체를 미워하는 것인지 나 자신도 확실하게 알지 못하는 상태가 되었다. 국가는 그런 것이었다. 그때 대한민국 대통령은 홉스의 전제군주와 같았다. ” 34 p


  이에 반해 존 로크, 애덤 스미스,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주의 국가론은 비슷하면서도 돌아서면 난해한 구석이 있었다. 국가는 ‘세속의 신’이 아니라 ‘공공재 공급자’에 불과하다는 주장과 선이 아니라 악을 저지르지 않는 일에 집중하기 위해 법치주의가 필요하다는 논리가 가장 인상깊었다. 내가 알고 있던 법치주의와 정반대였음을 이 책을 통해 깨우쳤달까. 법치주의는 법과 형벌로 국민(통치 받는 자)을 다스리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통치하는 자를 구속하기 위해 만들어진 개념이라는 것이다.

“ 일부 권력자들의 심각한 오용 때문에 대한민국에서 ‘법치주의’라는 개념이 많은 오해를 받고 있다. ...법률과 형벌로 국민을 다스리는 데는 어떤 주의도 필요하지 않다. 그것은 권력 그 자체의 속성이기 때문이다. 권력은 법을 만들 수 있는 힘을 필수요건으로 한다. 법을 만들지 못하는 권력은 권력이 아니다. 법치주의는 권력이 이러한 속성을 제멋대로 발현하지 못하도록, 권력자가 자의적으로 권력을 행사하지 못하도록 하기위해 만든 원칙이다. ” 50 p


  법을 넘어서는 군주의 권력행사를 막으려고(악을 저지르지 못하게 하려고) 만든 것인데 나는 그 법을 지키지 않는 자를 처단하려고 만든 것이 법치주의인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 역시 안전과 평화를 최우선으로 하는 국가주의론적 피해의식에서 발생한 자발적 복종효과였다.(는 생각이다) 이보다 좀 더 급진적인 자유국가론을 펼쳤던 루소는 ‘법치주의에서 이탈한 독재정권과 민주주의 질서를 파괴하는 쿠데타의 정치적 정당성을 모두 부정’하였는데 루소의 이론에 비추어 볼 때 우리의 4.19혁명, 5.18 광주민중항쟁, 6월 민주항쟁은 모두 법치주의를 위반하고 법위에 군림한 정부에 대한 정당한 행사라는 것이 그의 견해였다. 그 밖의 밀과 소로의 자유지상주의는 철학적으로 다가왔고 그런만큼 그 뿌리가 깊다고 느껴졌다. 톨스토이, 간디, 마틴 루터, 만델라가 그 길을 따라갔다는 대목에서 ‘어떤 이론의 정치적 성격은 그것을 둘러싼 사회적, 정치적 환경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이치를 다시금 확인할 수 있었다. 그땐 혁신적인 진보이론이었던 것이 지금은 외려 국가가 해야 할 책임을 줄여주고 개인의 능력에 힘을 실어주는 보수적 이론이 되지 않았는가. 고전적 자유주의는 물론이고 자유주의 좌파, 진보자유주의, 신자유주의 모두 생소하기만 하던 내 수준에서 이 책은 기초부터 흐름과 맥락을 짚어주는 친절함이 있었다.

  반면 한때 지구의 절반을 차지했던 마르크스주의는 이 책에서도 여전히 국가를 가장 매력적으로 설명하고 있었다. 그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국가의 소멸과 개인의 완전한 해방을 가져다 줄 것’이라는 마르크스의 전망을 ‘전제정치의 억압하에 살았던 청년 마르크스의 소망을 반영한 것’이라 부연했다. 마르크스주의 국가론의 심각학 부작용의 하나로 정치무용론과 정치적 냉소주의를 꼽기도 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무엇보다 근본적인 사회변화를 꿈꾸는데 이 사회혁명이 실패하고 좌절한 상처가 진보와 보수의 대결에 관조적인 자세를 유발한다고 말한다. 마르크스주의의 지적 향수가 가장 깊게 남아있는 곳은 언론, 출판, 학계이며 그들은 시민의 자유, 인권보장, 언론자유같은 문제에 ‘실질적 민주주의’를 주장하지만 정작 정치와는 거리를 두는 성향을 보인다고 그것은 좌절한 인류의 꿈이며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과 같다고 말한다. 유시민은 이렇듯 국가주의, 자유주의, 마르크스 주의를 살펴본 후 자신의 진보정치에 방향성을 제시하면서 새로운 국가론을 구축하기 위해 목적론적 국가론을 빌려온다. 이는 모든 국가론을 섭렵한 후 내려지는 꽤 합리적인 결론일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가는 길에 최우선 가치로 길잡이 역할을 해야 할 것이다. 이 일련의 과정을 보면서 나는 그동안 내가 배우고 익혔던 국가관이 어느 시기, 어느 지역에 위치해 있었는지 살펴볼 수 있었다. 나는 밥먹듯이 반공 포스터와 표어를 지어대던 그 시절, 1970년 후반과 1980년대 초반의 국기 게양대 앞에서 아직도 벗어나지 못한 처지였다. 나에게 국가는 곧 대통령, 각하는 아니었을까.


2. 누가, 어떤 사람이 국가를 운영해야 하는가 

 
그런가 하면 그는 도대체 시대에 따라 변하기만 하는 그 국가를 누가, 어떤 사람이 운영해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짐으로써 대답을 좇아가며 각자 질문에 숨은 함의에 도달하도록 논리를 펼쳤다. 플라톤과 맹자, 트라시마코스의 입을 빌려 왕의 자격을 전했지만 궁극에 말하고자 하는 것은 당연히 훌륭한 사람이 국가를 다스려야 한다는 답이 정답일 수밖에 없는 최초 질문의 효용성에 의문을 제기한다. 그 질문은 이미 최악의 인물이 통치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공허한 것이고 “사악하거나 무능한 지배자들이 너무 심한 해악을 끼치지 않도록 어떻게 정치제도를 조직할 수 있는가?” 즉, 어떤 제도를 만들어야 만에 하나 최악의 인물이 국가를 통치하더라도 악을 최소화 할 수 있는가와 같은 질문으로 명시화, 구체화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유시민은 이 해법으로 민주주의를 제시한 포퍼를 예로 들었고 법치주의에 대한 오해와 마찬가지로 민주주의에 대한 오해를 설파한다. 이 사람이 오해를 지적하는 방법은 대체로 겸손했다. 우리는 민주주의가 ‘국가를 잘 통치할 훌륭하고 유능한 사람과 정당을 국민이 선택하는 제도’일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것. 하지만 어쩌다 히틀러처럼 최악의 인물을 민주적으로 선출한 사례도 숱하게 많으며 누구나 공평하게 선거한다고 유능한 사람을 뽑으라는 법은 없다는 것이다. 민주적이었다고 꼭 옳거나 좋을 수는 없다는 말씀.

“ 민주주의 정치제도의 목적은 가장 훌륭한 사람을 권력자로 선출하여 많은 선을 행하도록 하는 것이 아니다. 사악하거나 거짓말을 잘 하거나 권력을 남용하거나 지극히 무능하거나 또는 그 모든 결점을 지닌 최악의 인물이 권력을 장악하더라도 나쁜 짓을 저지르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민주주의 정치제도의 목적이며 강점이다. ” 106p

  우리는 최악의 인물이 권력을 잡아 마음대로 악을 저지르지 못하게 하는 대가로 똑같이 역으로 훌륭하고 지혜로운 최선의 인물이 권력을 잡아도 선한 일을 많이 할 수 없다는 부작용을 감수해야 한다는 것이다. 민주주의가 최선의 인물을 지도자로 뽑아 최대의 선을 행하게 하는 장치라는 오해를 하지 말라는 저자의 충고는 내가 이 책에서 발견한 가장 의미심장한 실용적 메시지였다. 이 말은 어쩐지 최선의 인물이었지만 권력분산과 상호견제로 선한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故 노무현 전 대통령을 떠올리게 하는 느낌이었다. 또 비록 최악의 인물을 뽑아 악을 저지르고 있는 현 정부를 똑똑히 목격하고 있지만 중요한 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악하거나 무능한 지배자들이 너무 심한 해악을 끼치지 않도록 하기 위한 민주주의 정치제도’를 잘 발전시키는 것이지 누가 대통령이 되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는 어짜피 늘 위험성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로도 해석되었다. 곱씹을수록 의미심장한 그의 결론을 그대로 옮겨 적어 본다.

" 이렇게 생각하면, 뽑아 놓은 대통령과 국회의원들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민주주의가 좋지 않은 제도라고 불평할 필요가 없다. 그들이 일시적으로 악을 저지른다고 해도 위축될 이유가 없다. 민주주의 정치제도는 원래부터 그런 위험을 적절하게 관리하기 위해 만든 것이기 때문이다. 국민은 언제든, 임기가 정해져 있는 정부를 해고하고 새로운 정부를 세울 수 있다. 평화적이고 합법적으로 국민이 정부를 교체할 가능성이 열려 있는 한, 그 나라의 정부는 민주정부이다. 이 가능성을 말살하면 독재정부가 된다. " 108 p

  나는 이 문장을 읽고 (최악의 인물을 선택한)현 정부에 너무 실망말고 그럴수록 다음 선거를 포기하지 말고 주권을 행사해 어떡하든 정부를 교체해야 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최선의)노무현이 되나 (최악의)이명박이 되나 (대한민국의 분단체제에서는)대단한 사회혁명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니(앞으로도 그럴 것이니) 중요한건 지금까지 어렵게 구축해온 민주주의를 다 같이 발전시키고 더욱 성숙한 사회, 정의로운 국가에서 앞으로의 행복을 찾아보자, 뭐 이런. 그러니까 역으로 너무 한 인물에 목메고 다른 인물을 배타하는 우를 범하지 말자고 말이다. 나는 유시민의 이런 솔직함이 신선했다. 논리를 만들었다기 보다 찾은 것이라 할 수 있는데, 발명아닌 발견은 찰나의 직관이 아니라 고민의 시간과 비례하는 것이 아닐까 싶어서. 그러니까, 누가, 어떤 사람이 되는 것은 (그에게)운명이 아니다. 운명은 누가 되든지 포기하지 않고 민주주의를 지속, 발전시켜야 할 그의 사명인 것이었다.


3. 애국심은 고귀한 감정인가

 
국가를 공부할 때 빼놓을 수 없는 핵심가치가 애국심인데 저자는 애국심이 과연 선한 감정이고 장려할만한 가치인지 질문한다. 솔직히 내 세대는 애국심도 시험을 보는 마지막 세대였기에 애국하라는 말은 신물이 나는 선생님 잔소리 쯤으로 생각된다. 마치 지금 공부 열심히 하고 있는데 그러니까 더 공부하라는 부아치미는 말씀만 같아 영 곱게 들리지가 않는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학창시절 여름방학, 공포영화를 보러 가서도 영화 시작하기 전에 모두 기립해(행여 앉아 있기라도 하면 그 눈총을 견딜 자가 누구였던가) 가슴에 손을 얹고 애국가를 따라 부르던 기억은 코웃음이 절로 나올 지경이다. 우리는 모두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난 존재들이었다. 그랬기에 무슨 군가처럼 6.26 기념일 노래를 고무줄할 때도 힘차게 불러 제꼈다. 체육대회날 응원가마저도 ‘잘 살아보세’였다.

  저자는 이 강요된 애국심의 이면에 경쟁관계에 있는 다른 국가에 대한 증오심, 혐오감이 숨어있음을 꼬집는다. 애국심을 허위라 여겼던 톨스토이는 국가는 배타적인 공동체이기 때문에 애국심 역시 배타적, 파괴적이며 사악한 감정이라 말했다. ‘애국심은 어떤 대상을 위해, 즉 언어에 의해 규정되는 민족 집단을 위해 헌신하고 희생하려는 의지’라는 피히테의 견해는 국가주의자들이 선호하는 개념이라 말한다. 그는 ‘애국심은 어느 민족 또는 국가에 귀속되어 함께 어떤 가치를 실현하려는 자신의 의지에 대한 사랑’이라는 르낭의 견해를 선호했다.

“국가라는 하나의 공동체에 함께 귀속되어 훌륭한 삶을 영위하고 공동의 선을 실현하고자 하는 의지”  137p

  르낭의 애국심을 발전시켜 정리한 저자의 애국심이다. 진보측에서 애국심이라는 단어를 기피하면 결국 보수측에 그 독점사용권을 허용하는 일이므로 정치인인 자신은 이러한 애국심의 의지를 북돋아야 할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애국심을 정의하는 구절 속에 결국 국가와 삶이 사이좋게 섞여있음을 알 수 있다. 모든 핵심에 국가가 버티고 있고 그와 연결된 시민의 삶이 존재감을 드러낸다. 분명한 것은 타의적으로 희생하는 것이 애국심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사랑하는 감정이라는 것이다. 이는 곧 의지가 빈약해 국가를 사랑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뜻인데 유시민에 의하면 의지를 북돋는 것은 정치인의 역할이다. 그러므로 정치에 관심이 없다면서(의지를 북돋을 일이 없으므로) 애국심이 투철하다는 말은 틀린 말이 된다. 기본적으로 애국심에는 정치와 국가, 그리고 국가운영자의 존재가 스며들어 있다는 뜻이다. 애국심 하나로 뜻하지 않게 점진적으로 애국(정치관심 및 참여)을 유도하는 그의 정치전략이 나는 나쁘지 않았다. 결국 애국심은 고귀한 감정이라기 보다 고집스런 이성이 아닐까. 감성에 호소하는 이념이 아니라 논리로 설득해야 할 전략이 아닐까.


4. 혁명이냐, 개량이냐

 
국가의 질서를 바꾸는 방법으로 근본적인 사회혁명과 점진적인 개선에 대해 질문하는 장이다. 혁명의 길과 개량의 길, 혁명주의와 개량주의 어느 것이 효과적인가? 어느 것이 옳은 것인가? 저자가 영리하다 생각된 것은 바로 질문하는 방법이었다. 이 질문의 답은 둘 중하나를 택하는 것이 아니다. 질문이 틀렸음을 말하기 위한 질문이다. 두 가지를 비교한 끝에 그가 제시한 답은 지속적으로 개량하지 못하면 한 번에 혁명으로 간다, 이다. 그러니까 혁명하는 꼴 안보고 싶으면 천천히 개량이라도 하라는 것을 주장하려고 혁명과 개량중 무엇을 선택할래 하는 질문을 던진 것이다. 차선을 답하기 위한 최선을 질문하기. 이때 남겨진 차선은 궁극에 떠밀려 답하는 것이므로 여지가 없다.

  저자는, 인류역사상 자유롭고 평등하며 공정하다고 만인이 인정하는 사회는 단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다는 말을 기억하자고 했다. 이것이 혁명이 일어날 수 밖에 없는 인간한계적 배경이다. 그런데 혁명의 길과 개량의 길을 따지기 전에 혁명이 일어나는 시점은 언제나 사회가 근본적으로 잘못되어 민중이 그 사실을 분명하게 인지한 후 라는 것이다. 프랑스 대혁명, 러시아 사회주의 혁명, 중국혁명이 일어난 곳에선 모두 국가권력이 바닥으로 추락한 시점이었다. 하지만 국가조직이 붕괴한다고 국가가 소멸된 것은 아니고 사회혁명으로 탄생한 국가는 구체제보다 더 능동적인 힘을 발휘했다. 혁명의 순기능이다. 그렇더라도, 톨스토이는 혁명이 권력기관 자체를 없애지는 못한다고 생각했다. 만약 혁명이 필요할 수 밖에 없다면 ‘혁명으로 탄생한 더 강한 국가는 혁명이 삼켜버린 옛 국가보다 언제나 더 정의로운 국가였을까?’ 정의로와 지는 것도 아닌데 혁명을 해야 하는가하는 원론적 질문에 저자가 제시한 철학자는 카를 포퍼였다. 혁명이 초래한 처참한 결과는 대개 숫자로 대변된다. 이에 포퍼는 ‘점진적 공학’이라고 이름붙인 사회개량의 길도 혁명의 다른 방법이라 제시한 것이다. 사회 근본적인 혁명은 폭력과 악을 초래할 소지가 많으므로 더 안전하고 효과적인 개량의 길이 점진적 공학이라는 것이다. 포퍼의 논리가 맞지만 저자는 혁명과 개량의 길은 양자택일 할 수 없다는 논리로 포퍼의 허점을 지적한다. 누구나 처음부터 폭력혁명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고 점진적인 단계가 있다는 것이다. 사회는 점진적 공학으로 악을 해결할 수 없다고 판단될 때 비로소 혁명이 일어난나는 것이다. 즉, 개량의 길을 선택하지 않았기 때문에 혁명의 길로 가는 것이 아니고 개량의 길이 막혀 있음이 널리 인식되었기 때문에 사회혁명의 길이 열리는 것이라는 것.

  우리가 잘 아는 87년 6월 항쟁은 집회와 시위를 통해 국민의 요구가 드러난 상황에서도 변화의지가 없자 국민들은 폭력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다는 판단을 한 것이다. 거리로 쏟아져 나온 시민들을 공권력으로 통제할 수 없게 되자 집권세력은 민주화와 직선제 개선요구를 받아 들였다. 국민들은 평화적, 합법적으로 독재를 종식할 수 있는 길이 열리자 더 이상 거리로 나오지 않았고 급진적 사회혁명이 아닌 민주주의 정치혁명의 길을 갈 수 있었던 것이다. 이는 곧 마르크스가 유난히 혁명을 좋아해서 그것을 선택한 것이 아니고 당시 자본주의는 노동계급이 착취에서 벗어날 수 있는 점진적 개혁의 길을 보여주지 못했기 때문에 그 봉쇄된 막다른 길에서 사회혁명의 길이 열릴 수밖에 없다는 것이라는 논리의 방증이다. 그러므로 전체주의를 피하고 싶다면 혁명을 외면할 생각을 하지 말고 부지런히 점진적 개량을 시도하라는 말씀이다. 그것만이 사회혁명의 문을 잠그는 길이며 그 곳에서 마르크스의 길이 열릴 가능성은 없다는 것이다. 혁명을 외면하게 되면 혁명이 일어난다는 논리는 이 책에서 가장 아름다웠다.


5. 진보정치란 무엇인가

 
진보는 보수와 어떻게 다르며 진보정치란 국가를 어떻게 바꾸려고 하는 것인가? 지금부터가 저자가 진짜 말하고자 하는 방향이 담겨있는 질문이다. 나는 사실 진보와 보수, 좌파와 우파의 차이를 잘 모른다. 그저 운동권은 진보이고 여당은 보수이다, 수준에 지나지 않으며 교육과 환경에 의해 진보를 죄악시 해왔다고 볼 수 있다. 지난 시절 내 세대에서 노란 저금통을 들고 노무현을 지지하지 않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그때도 난 그에게 표를 던지지 않았다. 그가 대통령감이 아니라서가 아니라 그가 대통령이 되지 않았으면 했다. 이 책에서 말하는 좌절한 마르크스주의자들처럼 나는 정부가 바뀌어도 세상은 달라지지 않는다는 쪽이었다. 그리고 그가 대통령이 되고나서는 뉴스를 거의 보지 않았다. 그가 죽었을 때 나는 그를 대통령으로 뽑은 적이 없기 때문에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고 그를 대통령으로 뽑아준 사람들이 많이도 미웠다. 그래서인지 내가 느끼기에 이 책에서 말하는 진보는 내가 아는 진보보다는 보수적이었다. 이 책에 의하면 진보는 진화나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이성에 의한 합리적인 전략일 뿐이었다. 그런데 언제든지 진보를 말하기 위해서는 보수도 같이 말해야 한다는 것. 진보를 규정하면 자연 보수도 그 의미가 정해지는 꼴이었다. 사실 보수쪽 사람들은 굳이 보수의 의미를 애써 규정지으려 하지 않는다. 그것이 보수의 특징이다. 언제나 의미를 규정짓고 문제점을 찾아 새로운 전략을 모색하는 쪽은 진보였다. 보수는 뒷짐지고 변화하는 진보의 추이에 따라 대안을 마련할 뿐이다. 그런데 내가 인상깊게 느낀 건 이 책에서 진보를 규정하는 과정이다. 진보의 의미를 창출하는 과정이 꽤나 보수적이었다는 것, 어쩌면 현실적인 진보에 이르는 과정만큼은 보수보다 고전적이고 학문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물론, 진보를 추진하고 체현하는 과정과는 다른 이야기다) 유시민은 한때 역사교사로도 재직한 적이 있다고 들었다. 최근에 진보진영 인사들은 (진보와 보수의 갈림길에 놓인)내 세대에 먹히는 베스트셀러들을 내놓고 있다. 그들에게서 나는 우연히도 실패한 마르크스주의자의 초상을 나란히 발견한다. 유시민을 비롯한 진보인사들은 진보집권이 현실 민주주의를 발전시키는 대안이라 여기는 듯하다. 반가운건 이러한 책들이 학문적 각성과 함께 현실정치에의 실패를 교훈삼아 더 이상 계급혁명이나 운동권 세력이 아닌 대안적 집권세력으로서 (세대 구분없이)일반인에게 밀도높은 설득력을 제공한다는 사실이다. 유시민은 그런면에서 자신의 할 일을 지략적으로 수행하는 정치가이자 학자였다는 결론이다.

  먼저 진보는 당위적 요구나 지향이 아니라 ‘사회와 삶의 방식, 사유습성의 실제적이고 불가피한 진화’를 의미한다는 베블런에 의하면 인간은 모두 보수적이라는 말씀이다. 인간 삶에서 보수주의는 특정 계급의 독점적 특성이 아니라 인간의 보편적 속성, 즉 기본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날 때부터 보수기질을 가진 사람들이 어떤 환경에서 살아가느냐에 따라 계속 보수로 남는지 중간에 진보로 바뀌든지 하는 변화에너지 이동의 문제라는 것이다. 보수가 생물학적 본능이라는 베블런의 주장은 보수인 나로서는 고마운 개념이다. 진보는 ‘자본주의를 극복하는 것’이라는 김상봉의 주장에 저자는 그렇다면 김상봉의 진보는 ‘사회주의’라고 해석한다. 진보를 제도적 문제가 아닌 인간적 문제로 볼 경우 ‘인간이 행복을 위해 자유를 확대해가는 과정’이라는 이남곡의 견해는 그러한 주의가 정치와 결합해 나타나는 것이 진보정치라는 저자의 논리를 뒷받침한다. 저자가 가장 선호하는 정치에 관한 답변은 막스 베버(1864-1920)였다. 베버에 의하면 정치는 ‘국가를 운영하거나 국가운영에 영향을 미치는 활동’이므로 저자는 다음의 질문에 답을 하고 싶어 하는 것이다.

“ 그렇다면 진보주의자는 국가를 어떻게 운영하려 하는가? 국가를 직접 운영할 권한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경우, 국가운영에 어떤 영향을 어떻게 주려고 하는가? 그들은 국가가 무엇이며, 무슨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할까? ” 199p

  저자가 꼬집는 것은 한국의 진보주의자들이 국가주의 국가론은 거부하고 자유주의 국가론은 혐오하면서 마르크스주의 국가론에는 비현실성만 개탄하는 이른바 끝없이 방황하는 행보였다. 진보정치를 하고자 한다면 보다 진취적인 국가론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급기야 마이클 센델의 <정의란 무엇인가>의 마지막 문장, “도덕에 개입하는 정치는 회피하는 정치보다 시민의 사기진작에 더 도움이 되며 더 정의로운 사회건설에 더 희망찬 기반을 제공한다”는 주장에 공감한다는 독서대중을 향한 보편성에의 호소는 이 책에서 느낀 진솔함이었다. 정의를 언급하고 싶었던 저자의 목적은 바로 정의가 국가의 목적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적 국가관을 진보정치 국가관에 밑거름으로 삼고 싶었던 까닭이었다.

  훌륭한 국가, 선을 행하는 국가, 정의를 실현하는 국가, 자유주의 국가론에 목적론적 국가론을 결합해 저자는 진보주의 국가론을 ‘미덕국가’, ‘선행국가’로 이름하자 주장한다. 민주주의와 법치주의는 권력의 남용과 법의 악용을 막기 위한 제도이지만 이제는 국가가 선을 행하게 하자는 것이 진보정치의 목적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다음, ‘사회적 연대의 기능을 독점하는 기능국가’로서 복지국가를 실현하자는 것이다. 즉, 가능한 많은 서비스를 보편적으로 제공할 것을 요구하도록 앞장서는 것이 진보주의자라는 것이다. 이 책에서 말하는 진보의 궁극적 목적은 바로 제도와 정책의 문제인 복지국가의 실현이다. 복지는 진보와 보수의 밥그릇 싸움이 아니고 이념투쟁도 아니고 제도적 문제다. 이는 곧 환경과 제도의 변화를 원하는 진보의 본질이기도 하다. 저자는 보수적 인간에서 시작해 진보로 이동하는 사회과정을 충분히 설명하며 이렇듯 진보의 중요성을 복지사회추구와 동일선상에 놓고 결론지었다. 진보정치는 무엇인가? 진보정치는 국가를 어떻게 바꾸려 하는가? 이것의 답을 정리하면 진보정치는 선을 행하는 국가를 운영하는 정치이고 진보정치는 복지국가로 바꾸는 정치이다, 진보는 이상이고 꿈이었다.


6. 국가의 도덕적 이상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진보정치가 국가로 하여금 실현하게 하려는 선은 어떤 것인가? 진보주의자는 어떤 선을 실현하라고 국가에 요구하는가?

  내가 생각하기에 점점 마지막 결론을 향하는 이 장에서 느낀 점을 솔직하게 적어본다.

  (그동안 대한민국이라는)국가라는 집단은 (다양한 종류의)악마와 손을 잡았으므로 양심이 없고 악을 저지를 수 있는 집단이었다. (노무현)대통령은 아무리 선한 사람이라도 국가 정의를 위해 악을 저지를 수 있는 사람이다, (나같은)정치인도 그 영향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미국의 지배를 받고 있는 우리)시장은 정의를 실현하지 않고 소득과 분배는 여전히 불평등하다. 대한민국은 정의로운 국가가 아니다. 그러므로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진보정치가 필요하다. 나는 자유주의자이다. 모든 종류의 절대주의를 거부한다. (기존의)진보정치는 광신주의적 태도를 버리고 (내가 언급한)자유주의 기풍의 철학을 받아들여 더욱 발전해야 한다.


7. 정치인은 어떤 도덕법을 따라야 하는가

 
이 책의 마지막은 칸트와 막스 베버이다. 진보정치인의 자질과 윤리를 말하기 위해 그는 다음의 마지막 질문을 던진다. 최후의 자격검증에 해당하는 윤리 강령이다.

  국가권력이 선을 실현하는데 쓰이도록 하거나 적어도 악을 저지르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정치인이 지켜야 할 윤리에는 어떤 것이 있는가? 그들에게는 어떤 도덕법이 요구되는가?

  칸트가 말하는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도덕법은 ‘자율적 인간’을 모델로 한다. 여기서 ‘자율’은 욕망대로 흘러가는 자유가 아니라 스스로 정한 목적을 향해 부여한 규칙에 따라 행동하는 자율을 말한다. 이성적 인간은 곧 자율적 행동을 하는 존재를 말하고 자율적 행동은 도덕적 법칙에 의거한다. 칸트가 말하는 도덕은 옳은 행동이라 생각하는 의무감이요 동기이다. 행복해지고 싶은 마음 때문에 도덕을 지키면 행복할 자격이 없다는 논리다. 동기가 순수하고 도덕이지 않기 때문에. 칸트의 도덕법은 공동체의 선을 자발적으로 추구하려는 진보주의자들의 윤리의식과 겹쳐진다는 저자의 해석은 자연스럽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진보주의자들의 행동원칙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정언명령’에 해당된다고 느낀다. 칸트의 도덕법은 모든 인간에 해당되지만 특히 정치인, 그중에서도 진보주의자에게 필요하다는 것인데 어짜피 동기만 우선시 할 경우 그 동기 때문에 참극을 불러올 수 있다는 한계를 알면서도 굳이 칸트를 베버위에 놓고 도덕법의 체계를 마련하려는 모습이 약간은 작위적으로 느껴졌다. 이것은 현장이 아닌 데스크에서 주로 논문쓰는 연구원들이 잘 사용하는 수법인데 뒤에 나오는 베버의 논리를 더 부각하기 위해, 혹은 베버 하나만으로는 부족하게 느껴지기 때문에 불러오는 이론의 희생이다. 실은 베버와 비교하려고 가져왔으면서 기본이라고 하는 점이 마음에 안들었달까. 이 책에서 유일하게 글감을 위해 잘 배치된 칸트가 철학이 아닌 도구로 전락한 느낌이 들었던 부분이다.

  하지만 잘 희생된 칸트 덕에 베버는 이 책에서 가장 빛났다. 진보주의자는 대개 신념윤리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결과보다는 동기를 중요시 한다. 신념윤리만 중요시되고 베버의 책임윤리가 결여된 가장 극단적인 사건으로는 한국전쟁이었다 말한다. 저자는 신념윤리를 지키면서도 결과에 책임을 지는 정치를 이상으로 꼽았다. 베버가 말한 책임윤리는 행동의 예견할 수 있는 결과에 책임을 지는 태도이다. 칸트라는 이상에서 베버라는 현실을 인식하자는 뜻이었다. (미안하게도)나는 진보자유주의 연합정당과 같은 야권연합의 필요성이 바로 베버의 책임윤리를 따른 것이라는 생각은 해보지 못했다. 책임윤리를 따랐기 때문에 연합이 된다면 좋을 일이지만 우선에 연합이 먼저고 그 다음에 책임은 나누어 지자는 뜻으로 생각되었다. 그는 말한다. 연합정치가 설득력을 가지는 것은 정치인의 책임의식이라고. 내가 생각하기에 연합정치가 책임의식을 불러오는 것이 아니라 책임의식이 있어야 연합정치를 할 수 있다는 말로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 진보주의자들이 정치권내에서 입지가 강화되고 영향력이 커져야 소수 및 사회적 약자도 잘 살 수 있는 복지국가를 건설할 수 있다는 논리는 더 이상 진보적인 이야기는 아니다. 범야권이 연대하면 정권교체를 할 수 있다는 논리 역시 너무나 자명해 상투적이기까지 하다. 이명박 정부는 재임 중 보수세력의 영구집권을 위한 초석을 마련하기 위해 총력을 다했다. 그 결과 합리적 보수들은 정의와 복지를 내세운 진보정당을 언제라도 지지할 준비를 끝마쳤다. 하지만 그들이 걱정하는 것은 진보세력이 집권정부가 되더라도 또 노무현정부의 전철을 밟지 않을까 하는 우려이다. 한국의 진보정당은 언제나 노동운동의 전통기반이 없으며 지지기반이 취약하다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 정권교체후 진보의 추친 역량을 의심하는 것은 결코 보수측만의 기우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아직 절망적인 것은 아니다. 최근의 선거에서 젊은 층과 여성층의 투표율은 점점 증가하고 있고 급변하는 시국에 일 년이라는 시간은 (알 수 없는)많은 일이 일어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다. 나는 이 책을 진보진영의 선거청치의 프레임에 속한 책이라고는 보지 않았지만 책을 덮고선 스스로 질문을 던질 수 밖에 없음을 통감한다. 마치 그에 적절한 답이라는 듯 유시민은 책의 마지막에 자신의 의지를 사인했다.

“ 진보의 힘이 ‘순수’에서 나오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진보의 힘은 ‘섞임’에서 나온다. 진보를 추동하는 근본적인 힘은 인간의 보편적 이성이다. 사회의 진보는 인간 이성의 발전과 함께 이루어진다. 하나의 이념이 전일적으로 지배하는 사회에서 이성이 성장할 수 없는 것처럼, 하나의 이념이 전일적으로 지배하는 정치조직에서도 이성의 힘이 자라기는 어렵다고 믿는다. 다양성을 내포하지 않고서는 정당도 정치도 국가도 인간도 성장하지 못한다. 이념과 정치문화의 ‘섞임’을 통해 진보의 힘을 키우는 것이 연합정치이다. 연합정치가 지지를 받는 것은 국민들이 그 속에서 정치인의 책임의식을 보기 때문이다. 신념윤리에 투철한 정치인은 사랑의 대상이 될 수 있지만, 책임윤리에 투철한 정치인은 존경과 믿음의 대상이 된다. 자유주의자와 진보주의자가 대중의 존경과 믿음을 받는 길이 바로 연합정치에 있다. 연합정치를 통하지 않고서는 훌륭한 국가를 만들 수 없다. ” 283p



기본적 의무란 무엇인가

 
이 책을 집필한 후 저자는 국가에 대해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존중하게 되었다 말한 바 있다. 나는 처음부터 국가에 대해 아무 생각이 없었으니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을 알 수도 없었다. 진보가 무엇인지 깊숙이 알지 못했으니 보수가 무엇이다 말할 수 있는 사람도 아니었다. 이 책은 역으로 보자면 향후 진보주의 연합정치를 정당화하고 진보진영의 대표 정치인으로서 그것을 대국민에게 설득하기 위해 처음부터 국가와 국가 운영자 및 애국심, 혁명의 의미, 정치인의 도덕을 정의내리는 작업이었다.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은 (정치인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이론적이고 고전적이며 학구적이었다는 것이다. 처음엔 국가를 공부한다는 생각으로 책을 펼쳤고 읽어 가면서는 유려한 필체의 논문을 만나는 느낌이었고 나중엔 순수 지식을 배운다는 즐거움도 느끼게 되었다. 한국사회에서 정치는, 정의는, 전쟁, 그리고 대통령은 바로 국가와 동일한 문제라는 생각이다. 국가가 회복되어야 국민이 회복된다. 그래야 훌륭한 국가도 그 속에서 훌륭한 국민도 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에 살면서 국가가 무엇인지 성찰하는 일은 한국인으로서 피해선 안 될 의무에 가깝지 않을까. 비교적 쉬운 방법의 의무이행의 한 단계로서 이 책은 각자 의미있는 시간을 제공하리라 믿는다. 대선을 향한 그의 다음 행보가 퍽이나 궁금해진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아마도 나는 이 책의 모든 잣대로 그를 평가하게 될 것 같다. 하이에크 식으로 말하면 연합이라는 하나의 가치가 전일적으로 지배하는 사회는 정의나 평등이라는 단일가치가 지배하는 다른 전체주의 사회와 무엇이 다른지 의문이기 때문이다. 부디 연합이 그의 정치 이데올로기를 얽매는 유일한 덫이 되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이 책과 함께 읽으면 좋을 책으로 비타 악티바 시리즈 중 <복지 국가, 정원오(2010)>와 저자가 인용한 버트런드 러셀의 책 <왜 사람들은 싸우는가? Why Men Fight (2010)>을 추천한다. 악티바 시리즈는 작년에 읽었는데 얇으면서 정확하다. 러셀의 책은 아직 접하지 못했는데 꼭 읽고 싶다.


이 책에는 복지국가를 말하기 위해 원형국가, 발전국가, 민주국가의 국가 유형별 발전과정이 상세히 담겨있다.

이 책에서도 베버는 국가를 정의한 인물로 인용된다. 국가는 “독점적 강압력, 통일적 권위, 그리고 제반 법률적, 행정적 장치를 기초로 일정한 영토와 그 영토 내 주민을 배타적으로 지배하는 정치 조직 혹은 공동체”라는 것. 베버가 말하는 국가는 초기국가로서 원형국가가 가지는 최소한의 요건을 잘 설명해준다. 이 책의 끝에는 결국 우리도 미약하지만 복지국가라는 결론을 내린다. <국가란 무엇인가>의 제 7장에 비스마르크의 복지국가론과 함께 복지정책의 간략한 설명이 진부하고 부족하다면 이 책은 복지의 수준높은 대책이 되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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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셀의 <나는 무엇을 보았는가>에 보면 애국심 뒤에 숨은 배타적 증오심을 꼬집는 구절이 있다.

“ 좌절된 도덕성의 관점에서 볼 때 형법의 미덕은 도덕성으로 위장한 소심함 때문에 자연스러운 형태로 표출되지 못하는 공격적인 충동을 발산할 통로를 제공한다는 점이다. 전쟁 역시 똑같은 미덕을 가진다. 형법은 아무리 증오심이 끓어 올라도 이웃 사람을 죽이는 것을 금한다. 하지만 약간의 선전활동만으로도 이런 증오심을 다른 민족에게 돌릴 수 있다. 다른 민족에 대한 살해 충동은 애국적인 용맹성이 된다. ” - 변화하는 세계의 새로운 희망 77p

왜 사람들은 국가에 순종하는가? 하는 질문에 이 책은 해답을 제시할 듯하다. 러셀은 ‘국가의 폐해를 야기하는 주요한 원천은 국가가 권력을 주요한 목표로 삼는다는 데 있다’고 했다. 유시민은 ‘국가는 때로 시민의 자유와 권리를 부당하게 억압하는 폭정을 성공시킴으로써 그것이 폭정임을 은폐한다.’는 러셀의 문장을 두 번이나 인용했다.

“ 이처럼 국가의 과도한 권력은 주로 전쟁과 전쟁에 대한 공포심을 통해서, 부분적으로는 내부적인 억압을 통해서 형성된다. 국가의 과도한 권력은 현대 세계에 고통을 안겨주는 주요한 원인이자 사람들의 정신적 성숙을 저해하는 무력감을 낳는 주요한 원인 중 하나이다 ”  www.aladin.co.kr/shop/wproduct.as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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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오 2011-06-02 18: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유시민을‘말빨’ 좋은 (철 안든)정치인이었다라고 묘사한 부분에서 웃었습니다^^ 어쩌면 정확한 묘사일수도 있다는 생각예요~

가연 2011-06-04 0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괄호 안이 포인트군요ㅎㅎ 저도 비슷하게 느꼈었는데ㅎ 저자가 작정하고 썼는지 생각보다 너무 술술 읽혀서 깜짝 놀라기도 했고.. 그래도 저로서는 한편으로는 저자에 대한 선입견이 생각보다 많이 가셨던 책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글빨ㅋㅋ에 감탄하기도 하구요.. 보통 정치인이 이런 책을 내면 마이너스가 되기 쉬울 것 같고 플러스가 되기란 정말 쉽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뭘 써도 그의 정치적 행보를 생각 안 할 수가 없으니... 근데 적어도 저에게는 괜찮네, 하는 생각을 들게 만들더라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