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혼자 웃고 혼자 울기

 

 

스마트폰의 아침은 좋은 글귀의 향연이다.

 

언제부턴가 누군가 보내주는 명언과 책에서 인용된 글귀, 유명인사 및 멘토들의 충고, 부처님 말씀과 성경구절들이 주체할 수 없이 넘쳐나고 멈출 수 없이 전달되고 있다. 사십대 이상 카톡 사용자들이 부지런히 퍼다 나르기 때문인지 어떤 날은 거의 비슷한 시간대에 같은 내용의 좋은 말을 여러 사람에게서 받을 때가 있다. 이것이 동영상이 될 때도 있고 찌라시가 될 때도 있고 대자보가 되는 날도 있다. 광고 메일로 날라든 문구나 컨텐츠가 다음 카페나 네이버 블로그로 옮겨진 후 유투브나 밴드게시판에 확산되고 한명의 링크가 그의 지인들로 확산되면서 대충 이삼일이면 우리 모두 그 내용을 모르는 사람은 없는 것 같다. 지난 연말에 똑같은 크리스마스용 동영상과 좋은 말을 몇 개를 받았는지 모르겠다. 서로 전혀 모르는 두 사람한테서 같은 내용을 받는 기분이 신기하면서도 한편 씁쓸했달까.

 

그러니까 지금 우리는 얼추 같은 하늘 아래서 거의 동시간대에 같은 내용을 공유하면서 살아가고 있기는 하는 것 같다. 문제는 같은 것을 보고 들었다고 그 공감의 양과 질이 같지는 않다는 것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초부터 불특정 다수가 대상인 글과 그림들에 의지하게 된 과정이 새삼 쓸쓸하게 느껴진다. 나를 아는 누군가의 지적질과 충고는 불쾌하고 나를 모르는 누군가의 위로와 격려는 공허하다. 대신 꼭 나 들으라고 하는 소리인 것 같은 법륜스님의 희망편지는 혼자서 웃고 울을 수 있다. 안 그래도 마음이 안 좋아지려 할 무렵 날아든 이름 모를 시인의 넋두리는 조용한 명상이 된다. 나이 들면서 무조건 내 사연을 다 털어놓는다고 상대가 이해해주고 또 무언가 답해준다고 마냥 도움이 되는 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가기 때문일까.

 

어느덧 혼자 웃고 떠들고 우는 것이 더 익숙하고 편해지는 것 같다. 안보는 것 같아도 다 돌려보고 안 읽는 것 같아도 다 챙겨 읽는, 혹시 좋은 말 중독자…… 는 아닐까. 아는 사람의 말과 목소리보다는 세상 누구에든 다 해당되는 더 큰 소리와 더 넓은 마음에 끄덕이고 눈감아주는 요즘을 살고 있다.

 

 

#2. 세상이 얼마나 끔찍하고 잔인하든

 

 

혼자서 웃고 울기 좋은 소설이다. 김연수의 이야기는.

 

이번 소설집엔 2008년부터 2013년까지의 단편 11개의 작품이 실려 있다. 소설집치고 많은 분량이다. 이중에는 2009년 이상 문학상 수상작, <산책하는 이들의 다섯 가지 즐거움>을 비롯해 전에 읽었던 작품도 더러 있었다. 그들 중 표제작이 된 <사월의 미, 칠월의 솔>이 가장 감성적인 제목으로 읽혀서인지 행간에 흐르는 낭만성에 한참동안 마음이 흔들렸던 것 같다. 여전히 그는 누군가의 말마따나 제목을 참 잘 짓는 작가이다. (이 칭찬이 소설 내용보다는 제목이 더 그럴싸하다 쯤으로 받아들여지지 않기 위해 또 얼마나 제목에 고민을 할 것인가, 작가는.)

 

작가의 단편엔 유난히도 한 사람의 인생을 화자가 독자에게 전달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다보니 자연 어린 시절부터 보고 들어온 사람들이 - 친척, 부모님, 오랜 친구, 스승 - 그 주인공으로 선택된다. 한 사람의 인생을 기억하고 들려주면서 작가는 자신이 살았던 그 시절의 역사와 에피소드를 불러올 수밖에 없고 나같이 동시대를 살았던 독자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그때의 시간과 공간에서 얼마간 서성이게 되는 것이다. 내가 읽은 김연수는 갖가지 아픈 사연들이 많았던 어르신들을 가까이서 듣고 보고 살아온 시간과 공간들에 대한 그리움이 소설가로 살게 한 원천이 아니었을까 싶다. 적어도 작가의 동심은 순수와 순백에서 비롯된 게 아니라 당시 알수 없었던 곡절, 회한, 순정들에 대한 첫인상은 아니었을까.

 

 

맞아, 사랑의 줄행랑이었던 거지. 요즘 같으면 어디 파타고니아나 마케도니아 같은 곳으로 도망쳤을 텐데, 그때는 외국으로 나갈 수가 없었던 시절이니까 나름 갈수 있는 한 가장 먼 곳까지 간 셈이지. 그렇게 서귀포시 정방동 136-2번지에서 바다 보면서 3개월 남짓 살았어. 함석지붕 집이었는데, 빗소리가 얼마나 좋았는지 몰라. 우리가 살림을 차린 사월에는 미 정도였는데, 점점 높아지더니 칠월이 되니까 솔 정도까지 올라가더라. 그 사람 부인이 애 데리고 찾아오지만 않았어도 시 정도까지 올라가지 않았을까?        -81p, <사월의 미 칠월의 솔> 중에서

 

 

<사월의 미, 칠월의 솔>은 화자의 이모가 자신이 사랑했던 남자의 품안에서 들었던 빗소리이다. 이모는 병들어 남은 생을 자신과 함께해준 감독과 같이 들었던 빗소리를 평생 잊지 못했다. 작가는 ‘바로 어제 내린 비처럼 아직도 생생한, 하지만 이제는 영영 다시 들을 수 없는 그 빗소리’를 들려주기 위해 이모의 사연을 끌어들여 이루어질 수 없었던 사랑과 이별에의 보편적 낭만을 강렬하게 환기시킨다. 언제 어디서 누구와 얼마나 들었는지, 그리고 왜 아직도 잊지 못하는지 작가는 누구에게나 그런 소리 하나쯤 있을 것이라 확신하는 듯보였다.

 

어찌 보면 청승맞아 보이는 엄마의 사연을 우리가 늘 별 생각 없이 지나치는 고속도로 터널을 빠져나오면서 나누는 누나와의 대화로 통과시켜버린 이야기, <주쌩뚜디피니를 듣던 터널의 밤>은 내가 알고 있는 가장 쓸쓸한 샹송을 듣고 싶어지는 작품이었다.

 

그날, 차량이 거의 없던 일요일 새벽의 고속도로에서 큰누나가 끝내 내게 들려주지 못한 엄마의 말은 이런 것이었다. 인생을 한 번만 더 살 수 있다면, 자기도 그 언니처럼, 마치 하늘을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사람처럼, 불어 노래도 부르고, 대학교 공부도 하고, 여러 번 연애도 하고, 멀리 외국도 마음껏 여행하고 싶다는 말, 그 말.        

-151p, <주쌩뚜디피니를 듣던 터널의 밤> 중에서

 

 

'주쌩뚜디피니'는 ‘모든 게 끝났다는 걸 나는 안다’라는 노래 가사이다. 사랑은 떠나갔지만 한 번 더 사랑할 수 없을까 하는 진한 아쉬움의 독백인 것이다. 인생도 두 번은 살수가 없어 살고나면 그걸로 끝이다. 작가가 두 번 살지 못한 엄마를 노래할 때 우리 역시도 두 번 살지 못할 걸 알지만 그럼에도 우리보다 많은 것을 누리지 못한 세상 모든 엄마의 한번 뿐이었던 인생에 깊은 애도와 연민을 드리게 된다. 그러니까 모든게 끝난 것 같아도, 실은 끝나기 전까진 끝난 게 아닌 것이다. 설령 끝났다해도 이렇게 끝났음을 나누고 퍼뜨리는 한 우리네 인생은 끝날 수가 없는 것이다.

 

김연수의 소설은 예상한 만큼 우울하고 예외없이 속절없다. 주인공은 모두 사라졌지만 그걸 보고 들은 나는 변함없이 이 자리다. 조금 달라진 게 있다면 이야기를 따라갔다 돌아오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고 할까. 그 시절과 그 사람과 그 장소는 이제 지나긴 한 시대의 슬픔, 혹은 그리움으로만 간직된다. 어쩌면 공허하고 텅 빈 심장을 채워주는 것들이 결국은 더 슬프고 아련한 기억 속 그리움들은 아닐까. 실제 세상이 얼마나 끔찍하고 잔인하든 자신은 아름다운 소설을 써야겠다는 작가의 말이 다시금 울려 퍼지는 시간이었다.

 

 

#3. 뭔가 엄청난 것이 증발되었을 때

 

 

김연수의 감성에 이어 근래 대단히 인상 깊었던 소설을 하나 더 소개하려한다. <제 13회 황순원 문학상 수상 작품집>에 실린 권여선의 <봄밤>이다. 수상작은 하성란의 <카레 온 더 보더>인데 나는 최종후보작인 권여선의 작품이 잊혀지질 않는다. 김연수의 <사월의 미, 칠월의 솔>이 여름비처럼 청량했다면 권여선의 <봄밤>은 봄비처럼 처연하고 따스하다. 이 소설의 줄거리를 말하라 하면 신파나 통속의 범주에서 벗어날 여지가 하나도 없다. 각자 불치병에 걸린 남녀의 목숨보다 더 절절한 사랑과 이별 이야기라고 요약할 수밖에. 그런데 상투적인 신파와 진부한 통속을 뛰어넘은 세련된 문장과 예리한 시선, 삶의 이치를 통찰하는 작가의 넓은 포용력이(다른 근사한 말을 하고 싶지만 떠오르지 않음이 안타깝다) 그것들을 침묵하게 만들었다.

 

작가는 같은 병원에 있었던 사람들을 빌어 불치병 연인에 대한 평가를 다음과 같이 내리며 이야기를 끝맺었다.

 

 

몸이 어느 정도 회복된 후에도 영경은 여전히 수환의 존재를 기억해내지 못했다. 다만 자신의 인생에서 뭔가 엄청난 것이 증발되었다는 것만은 느끼고 있는 듯했다. 영경은 계속 뭔가를 찾아 두리번거렸고 다른 환자들의 병실 문을 함부로 열고 돌아다녔다. 요양원 사람들은 수환이 죽었을 때 자신들이 연락두절인 영경에게 품었던 단단한 적의가 푹 끓인 무처럼 물러져 깊은 동정과 연민으로 바뀐 것을 느꼈다. 영경의 온전치 못한 정신이 수환을 보낼 때까지 죽을힘을 다해 견뎠다는 것을, 그리고 수환이 떠난 후에야 비로소 안심하고 죽어버렸다는 것을, 늙은 그들은 본능적으로 알았다. -140p, 권여선의 <봄밤> 중에서

 

두 권의 소설집을 덮으며 소설가는 사람들의 인생에서 증발된 어떤 것들을 끈질기게 찾고 발견해 낸 후 그 씨앗을 악착같이 품고 꽃과 열매를 가꾸어 어떻게든 다시 되돌려주고자 하는 사람들임을 알게 되었다. 무언가 채우려 욕망할수록 채워지긴 커녕 비워지기만 한다는 것을 안다. 그런데 한편으론 끊임없이 무언가 사라지기 때문에 이야기는 붙들고 매달릴 수 있는 어엿한 기쁨이 될 수 있는 듯하다. 인간의 영혼에도 질량불변의 법칙이 적용된다면 소설은 삶에서 빠져버린 무언가가 똑같은 무게로 어딘가에 존재하는 영원불멸의 물질, 혹은 그 이상은 아닐까.

 

비워진 만큼 다시 채우고 싶어질 때, 본능에 가까운 아깝기만 한 이 이야기들을 아낌없이 추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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