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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양장)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40
파트릭 모디아노 지음, 김화영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5월
평점 :
절판
나는 어떤 한 사람이 자기 삶의 일정시기에 대한 기억을 통째로 잃어버렸음에도 계속 살아갈 수 있는 이유는 그 시기의 기억을 잃어버리는 것이 삶을 지속하는데 더 낫다고 판단한 그 사람의 본능적 의지라고 믿는 편이다. 즉, 한 사람의 生에 있어서 가장 잃어버리고 싶은 기억은 그 사람 본인이 가장 기억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 내 결론이다. 실제로도 나는 어떤 충격적인 사건을 겪은 사람이 이상하게도 사고 일체를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를 본 적 있다. 가족이 다 같이 둘러 모여앉아 같이 운명적인 한 순간을 공유했는데도 그 중 한사람은 자신이 그 순간에 무엇을 했고 무슨 말을 했는지, 심지어는 그 자리에 있었는지 조차도 기억이 안 난다는 경우도 있었다. 이러한 몇 가지 실례를 시작으로 그렇다면 치매에 걸리는 사람은 혹시 인생에 있어서 남들보다 잊고 싶은 것들이 많은 사람들이 궁극에 걸리는 병은 아닐까 하고 생각을 발전시켜 본 적도 있다. 여하간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그 기억을 찾아야 다시 살아갈 수 있다고 판단했다면 그건 이제는 그 기억을 되찾아도 살아갈 수 있는 근거가 마련되었기 때문은 아닌가 하고 말이다.
이 소설은 어떤 독자이건 자신의 삶에 있어서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대하는 자세를 돌아보게 만드는 힘이 있다. 소설을 읽는 동안 처음에 나라면 과거의 기억을 잃어버리고도 그것을 추적하지 않고 잘 살아갈 수 있을까, 과거에 대한 기억만이 나를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인가, 그렇다면 기억을 하지 못하는 나는 내가 아닌가 하는 소설의 텍스트적인 질문들에 예정대로 한껏 시달렸다. 그리고 이어지는 어느 상식 시험지의 정답같이 결정 되어 버린 답 - 십 년 전 갑자기 기억상실증에 걸려 망연자실하던 롤랑에게 신분증명서는 물론 일자리를 제공해주었던 위트가 은퇴를 하면서 니스로 떠나기 전 그에게 했던 말 - ‘지금부터는 뒤를 돌아보지 말고 현재와 미래만을 생각하’라는 뻔 한 문구를 연결 지으려 습관적으로 뇌가 작동함을 느끼곤 했다. 그럼에도 술 먹으면 절대로 운전을 하면 안 된다는 어느 캠페인 문구의 반복적 피로 유발성 멘트로 느끼지 않기 위해 나는 애쓰고 있었던 것이다. 한번쯤 롤랑의 미래분신으로 보였던 위트가 미래보단 과거가 중요하다는 말이 맞았다고는 했을지언정 그 정도는 그토록 과거를 찾아 헤매던 롤랑을 배려한 예의쯤으로 넘겨버렸다.
그러나 한 사람의 과거추적 여행이 그다지 흥미로와 보이지 않았음에도 책을 덮은 후엔 적잖이 밀려오는 아련함, 설레임 비슷한 진동들에 꽤 고개를 끄덕인 하루였다. 화자도 필요를 언급했듯이, 로마에 있다는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2번지, 명칭만으론 꼭 명품 패션의 거리를 연상시키는 부티크 옵스퀴르가, 그러니까 화자가 프랑스로 건너오기 전 기억을 잃어버리는 일이 막 시작되던 장소에 가보았자 더 분명해지는 건 잃어버린 것들에 대한 복원이 아니라 사라져 버리는 것들에 대한 완성일 뿐이라는 충고. 그건 다시는 돌아갈 수 없다는 아쉬움이 아니라 그때나 지금이 아니었어도 언젠가는 지워질 순간이었다는 것. 그리고 이제는 그것들이 너무 빨리 지워질 것을 안다는 슬픔인 것이다. 모든 사람과 그 사람과의 관계는 사람들 수만큼 똑같이 소멸될 것임을 알아버린다는 것. 작가는 이 거대한 슬픔의 크기를 위로하려 아이스크림 소녀와 어린 위트와 마지막 페이지를 장식한 우리 모두의 어린 아이를 내세우고 있다.
저녁 무렵 집 앞에서 친구들과 더 놀고 싶은 그 어린아이의 찰나적 슬픔을 오래 붙들고 있었던 나는 점점 분명해지는 막연한 소회의 실체를 어렵지 않게 건져낼 수 있었다. 그것은 한 시절 내가 잊고 싶은 과거에 대한 설명할 수 없는 반가움 이었고 결국 망각에 대한 갈망은 그 간절함만큼이나 언젠가 그리움으로 환원되는 것이구나 하는 깨달음이었다. 잊고 싶은 것들은 결국 그 전에 갖고 싶었던 것들이었고 단지 나중에 (기억을)잃어버렸다고 잃어버리기까지의 좋았던 모든 것이 잊혀지는 건 아니라는 사실. 그것들의 ‘잊을 수 없음’은 잃어버릴 수는 있었던 기억과는 별도로 내 몸속에 혹은 내 마음의 나머지 속에 잔존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것들과 그럼에도 그것들을 그리워하는 마음 사이엔 무슨 일이 벌어지는 것일까. 사람의 뇌는 고통을 기다리며 고통에의 반응을 쾌락과 똑같이 즐겨한다는 뇌과학의 연구를 떠올리지 않더라도 그것들은 단지 오래전에 지나갔기 때문은 아닐까 싶기도 하다. 나를 관통한 시간들에 대한 전관예우. 어쩌면 가장 기억하기 싫어하는 그 시간들이 바로 내가 가장 돌아보고 싶은 시간들이며 가장 나를 만들어온 재료들은 아닐까. 그렇기 때문에 오늘 다시 미래를 떠올리게 하는 가장 유력한 소재가 될 수 있는 건 아닐까. 작가도 실은 전후 어느 시기를 가장 고통스러워 했겠지만 사실상 그 시기가 가져다 준 가장 큰 행복을 잊을 순 없다고 뒤집어서 항변하는 것 같다. 그렇다면 그때 잃어버린 가족, 이제는 사라진 장소, 어쩔 수 없이 소멸된 관계들이지만 천천히 더듬어 거슬러 올라가보면서 당시를 회상하는 일이야 말로 고통과 상처를 더 확실히 마주하며 상처만큼이나 함몰되어 있던 자신을 치유하는 방법이 되지는 않았을까.
롤랑은 위트와 지낸 8년 동안은 자신의 기억상실을 문제 삼지 않고 흥신소 일에 잘 적응했던 것 같다. 위트와 나눈 편지들을 보면 롤랑과 위트가 서로 배려하며 신뢰하는 관계 속에서 호흡이 잘 맞았던 동료로 보인다. 허나 기억상실 이후 내 삶의 이정표를 제공한 동료가 은퇴를 하니 더 이상은 잃어버려서 잊고 있었던 과거를 묻어둘 수는 없었던 것이다. 또 시간이 흘러 이제는 흥신소 팔년간 길러진 추적의 근육으로 과거를 대할 수 있을 만큼의 자신감도 생긴 것이다. 나를 찾아나서는 주인공이 탐정이라는 타당하고도 기대되는 장치, 늘 누군가를 찾는 직업에서 내가 누구인지 찾도록 한 의도된 역설, 주인공에게 도서관과도 같은 전화번호부와 사교계 열람을 통해서 끊임없이 제공되는 단서들, 사색과 산책을 하면서 과거라는 낭만에 흠뻑 빠져들 수 있게 한 파리라는 배경, 이러한 조건들은 과연 프랑스 사람이 아닌 이 남자에게 그때 파리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유추하는 일에 조금이라도 동참하지 않을 수 없게 하였다.
결국 최종적으로 밝혀진 단서들은 전쟁 속에서의 ‘망명자’라는 신분과 ‘국적’이라는 안전 보호망, ‘국경’을 넘다가 벌어진 사고로 요약된다. 위조된 증명서로 파리 시내를 걷던 한 외국인 남자는 언제 어디서건 증명서를 보자고 검문당할 것 같은 공포감 때문에 프랑스를 떠나는 방법에 목숨을 건다. 그는 스위스를 통해서 포르투칼로 넘어가는 방법에 무리한 베팅을 하고 사랑하는 여인을 보호하지 못한 채 자신마저도 잃게 된다. 한 시절 그에게 있어 내가 누구라 말할 수 있는 떳떳함은 가족이나 사랑, 돈보다 중요한 가치였을까. 그에게 ‘망명’이 우연한 원인이라면 ‘국경’은 선택된 과정이고 ‘국적’은 보상같은 결과일 것이다. 이러한 개인의 사례는 피할 수 없는 전쟁이라는 환경과 조건이 집요하게 질문하는 정체성문제로 환원되고 독자는 전쟁과 국적과 상관없이 같은 질문을 하게 된다. 궁금했던 건 안전한 장소라 판단된 므제브의 남십자성 산장에 같이 간 게이와 프레디, 페드로는 외국인이었기에 이러한 여정이 이해가 갔지만 프랑스인이었던 드니즈는 왜 페드로와 함께 국경을 넘는 것에 쉽게도 응해야 했던 것일까. 당시 직업적으로는 꽤 자유분방한 삶을 살았던 게이와 드니즈지만 소설 속에서는 유독 존재감 없고 생각 없는 여성인물로 그려진 것 같다는 불만은 나만의 과잉반응일까. 그래서인지 화자는 드니즈가 실종되어 행방불명이라는 문서를 보고도 어떤 흔들림이나 슬픔 따윈 내비치지 않는다. 오로지 그 사실조차 화자의 과거를 찾기 위한 단서로 활용할 뿐 작가는 한때 사랑했던 여인의 소식에 애타하거나 그녀 자체를 인간적으로 그리워하게 만드는 법이 없었다. 그저 그때 그러했던 나를 지금은 기억할 수 없다는 나, 내가 나를 알 수 없는 답답한 현실에만 포커스를 맞추는 듯 했다.
그런데 사랑했었다는 사실을 기억할 수 없다는 슬픔이 사랑했었지만 지금은 헤어졌다는 사실보다 더 슬픈 일이 되어 가고 있음을, 사실 요즘에서야 더 실감하곤 한다. 나이를 들면서 점점 과거에 대한 기억이 소멸되어가고 있다는 두려움 비슷한 아련함, 문득 다가오는 당황스러움이 그것이다. 시간의 속도에 대한 감각도 둔해져 얼마 전이었던 것 같은데 찾아보면 삼 년 전이고 삼 년 전이라 생각했던 그때는 거의 7,8년 전이고 십년이라는 단위가 거칠고 무디게 잘라놓은 야채 한 토막처럼 덩그러니 간결하게 느껴질 때가 많다. 더불어 기억이라는 것도 정확하고 공평하게 기억하기 보다는 각자가 자기가 기억하고 싶은 대로 기억하고 싶은 것만 저장하고 살아간다는 사실도 깨닫곤 한다. 우리는 어쩌면 내가 생각했던 그 사람이 아닌 나와는 다른 기억을 가진 그들과 만나고 살고 나누었다 여기며 오늘도 그 기억 속에서 웃고 울며 떠들진 않았을까.
그곳에는 지난 오십년 동안의 각종 전화번호부들과 연감들이 가지런히 꽂혀 있었다. 그것들은 절대로 없어서는 안 될 필요 불가결한 작업도구라고 위트는 몇 번이나 내게 말하곤 했었다. 그 전화번호부들과 연감들은 우리가 가질 수 있는 가장 귀중하고 가장 감동적인 도서관을 구성한다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들 페이지마다에는 오직 그것들만이 증언할 수 있는 수많은 사람들과 사물들과 세계들이 분류되어 있기 때문이다.
전화번호부와 연감들을 가장 감동적인 도서관으로 표현한 부분이 인상 깊다. 이와 연계 해 기억에 남는 건 니스로 간 위트가 자신의 어린 시절을 상기하며 도서관 사서를 꿈꾸고 있다고 한 부분이다. 전화번호부와 연감을 뒤지며 한 평생 타인의 삶을 좇아온 그가 이제는 무수한 기록이 담긴 책들을 정리, 관리하는 사서로 살겠다고 하는 모습이 어쩐지 롤랑의 미래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건 왜일까. 자신이 과거를 추적한 방법 그대로 미래도 정리할 것 같다는 예감. 롤랑은 어렵게 찾아간 사람들이 남겨준 비밀상자들을 건네받고 이제는 사라진 상자 주인의 일생을 떠올린다. 누구라도 그래봤자 거기 담긴 건 사진 몇 장이나 아끼던 기념품, 편지나 사소한 기록들이 전부일 것이다. 문득 우리네 인생의 도서관은 무엇으로 이루어졌을까 싶어진다. 인간이 소멸되는 방법 중 죽어서 한줌의 흙으로 돌아가는 것 이외의 다른 공통된 모습을 떠올리기 힘든 내게 이 책은 삶이라는 도서관에 대해 어떤 구체적인 그림을 그리고 싶게 만들었다. 글쎄, 그건 아무래도 부티크 옵스퀴르가 2번지처럼 내 인생의 중요한 사건이 시작되는 바로, 그 거리의 빛나는 혹은 침침한 표정들이 아니겠는가. 한번쯤 다시 돌아갈 필요는 있지만 다행인건 소설속 주인공처럼 그것이 도서관을 짓기 위한 마지막 여정이 아님이 얼마나 다행인지 새삼 고마운 오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