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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리>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쓰리
나카무라 후미노리 지음, 양윤옥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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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생활 할 때 도쿄로 출장을 제일 많이 다녔다. 갈 때 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지하철로 연결된 거대도시는 그 끝을 알 수 없어 일본 내에선 어디든지 지하로 다닐 수 있을 것으로 여겨졌다. 종류線도 많고 그보다 역驛도 많고 마찬가지로 이용하는 사람들도 넘쳐난다. 보폭이 크지 않는 일본인들이 비즈니스 가방을 들고 잰걸음으로 역사를 빠져나가는 뒷모습이나 신주쿠 네거리에서 약속이나 한 듯 횡단보도를 일사불란하게 건너는 젊은이들을 보면 웬일인지 우리는 행복한 것 같다는 우월감을 느낀 적도 있었다. 일본은 우리보다 금연규제가 심해 흡연을 할 수 있는 장소가 아예 공공장소로 정해진 경우가 많은데, 중심지하철 역사를 빠져나오면 언제나 사람들이 모여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일제히 담배를 물고 한 방향을 응시하고 있는 것을 자주 접하게 된다. 거리에 꽁초가 하나라도 보이지 않는 덕에 우리 같은 외국인들은 깨끗한 일본을 느끼고 오는 것이겠지만 나는 어쩐지 역사주변 흡연 장소에서 서로 대화도 없이 담배 한개피만을 달랑 피우고 그것을 날렵해 보이는 휴지통에 넣고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 빠른 걸음으로 사라지던 젊은이들이 잠시 동안 생각한 것은 무엇이었는지, 바라본 곳은 어디였는지 생각하고 싶어졌다. 혹시 안개에 가려져 희미한 윤곽만 떠오르는 오래된 백일몽과 같은 '탑'은 아니었을까.

이런 종류의 소설을 읽어보지 않아서 그런지 내게는 참 새로웠다. 그리고 강렬했다. 누구누구가 뽑은 무슨 무슨 상이라는 의미 보다는 우리가 학교 다닐 때 지하철 역에서 자주 목격하곤 하던 그 '쓰리'의 현장이 반사적으로 떠올라 읽는 내내 호기심과 호감도를 유지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빠른 시간 내에 읽히는 흡입력 덕에 책을 덮고 나니 예상외로 허탈감은 컸다고 생각된다. 내 안의 숨겨진 무언가를 감쪽같이 '쓰리'당한 기분이라고 해야 하나...남의 물건을 훔쳐서는 안 된다는 것을 당연히 알고 있고 또 그럴 이유도 절대로 없는 우리들이지만 살다가 한번 쯤은 그저 생각만으로 내 것이 아닌 것을 탐해 본 적 있었던 비밀스럽고도 신나는, 그러니까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절대은밀의 욕망을 일부 빼앗긴 것은 아닌가 하고 말이다.

작품의 줄거리는 간단하다. 도쿄를 무대삼아 주로 명품 브랜드로 차려입은 사람들의 지갑을 소매치기 하는 주인공 니시무라는 몇 년전 공동의 임무를 수행하고 거짓말처럼 사라진 이시카와라는 친구를 잃었고, 사에코라는 애인의 자살을 겪기도 한 도시의 비정한 외톨이 신세지만 태어나면서부터 정해져있다고 믿은 자신의 생활을 바꿀만한 의지는 전무하다. 니시무라는 몇 년전 임무를 지시했던 기자키라는 악의 신을 운명처럼 다시 만나게 되고 기자키는 자신이 구성한 운명의 각본대로 니시무라의 인생을 조종하려 목숨을 건 몇 가지 임무를 내던진다. 니시무라는 무엇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걸어야 하는지 의미를 상실한 채 명령대로 임무를 수행해 나가지만 예정된 결말은 그와 우리 모두가 알고 있던 그것과 다를 바 없었다.

한편의 느와르 영화같은 빠른 전개와 도시적인 영상미를 상상할 수 있었지만 나는 작품에서 상징적인 메타포로 등장하는 '탑'과 '동전'에 대해 시선을 고정하고자 한다. 소설 첫머리에 주인공은 어린 시절 실수를 한 적이 있었고 그때는 저 멀리 떠오르는 탑을 본적이 있으나 지금, 실수를 하지 않은 어른이 되어서는 더 이상 탑은 보이지 않다는 회상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이것은 작가후기에서도 어린 시절 안개에 가려져 있어 결코 가닿을 수 없다고 환각처럼 느껴진 탑의 정경을 잊을 수 없었고 탑은 그저 나를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고, 하지만 나이가 들어가기 때문인지 그 탑은 사라져 버렸고 지금 어딘가에 있는지 모른다는 회상을 하는 부분과 일치한다. 작품 중간 중간에도 니시무라는 지하철이나 지하통로등을 지날 때 혹은 꿈속에서도 삶의 열기를 느끼는 순간에 높은 곳에서 자신을 무심하게 바라보는 탑의 시선을 느끼곤 한다.

니시무라가 본 '탑'은 높고, 멀고, 단단하고, 아름답고, 엄숙하고, 흔들림 없고, 끝이 보이지 않는 곳으로 언젠가 내게 뭔가 말할지도 모르지만 여전히 아무것도 말해주는 일은 없었다. 자신이 죽는 다고해서 누구하나 슬퍼해 줄 사람이 없었던 니시무라에게 희망이나 순수는 꼭 저 멀리 탑만큼 아득해 보이지 않았을까. 그것은 너무 가닿고 싶어 차마 가볼 수 없는 세상 저 너머의 자신과 상관없는 존재이기도 했지만 차갑고 비열한 도시 속에서 외롭고 누군가 그리울 때 몰래 숨어 기댈 수 있는 마음의 탑이기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탑'에 이르지 못함을 너무나 빨리 깨우친 니시무라는 남의 이물에 손을 대는 것으로 그 너머에 있을 그들의 세상에 잠시 닿고자 했다. 탑에서 벗어나고자 소매치기를 하면서 해방감을 느끼고 소매치기 기술이 향상되는 것과 비례하여 탑의 존재를 잊어간다.

하지만 나약한 니시무라에게 그것은 완전한 해방이 아니었고 현실세계에서도 이미 운명을 거스를 수 없는 탑같은 존재, 기자키와 맞닥뜨려지고 니시무라는 이상속의 탑에는 다다르지 못했지만 눈앞의 탑에서는 굴복하기 싫어 자신을 버림으로써 기자키라는 탑을 뛰어넘고자 한다. 기자키는 타인의 운명까지도 조작할 수 있다고 믿는 절대권력을 가진 신적인 존재이며 인간성이 상실된 거대 자본주의를 상징한다. 작품의 마지막에서 니시무라가 핏물에 젖은 '동전'을 던져 올린 것은 보다 의미심장하다. 아마도 잊었다고 생각되던 그 탑을 향해 던진 것은 아니었을까. 그것은 그토록 끄덕없이 무심한 탑을 향해 마지막으로 손짓하는 니시무라의 애처로운 인사일 것이다. 자신이 가끔은 남의 주머니에서 훔치기도 한 '동전'이지만 이제 그것은 더 이상 필요치 않아 남은 욕망을 송두리째 털어 버리고 맨 처음 순수로 돌아가고픈 한가닥 소망으로서 '동전'은 '탑'에게 헌사된다.

니시무라는 부모에게 버림받고 헐벗어 굶주린 어린 시절 자신의 모습과 너무나 흡사해 보이는 소년을 만나 비록 현재는 도무지 희망이라곤 찾아 볼 수 없을지라도 그렇게 살면 안 된다는(나처럼 살지 말라는)메세지를 꾸준히 전달하며 자신이 할 수 있는 방법으로 소년을 구원한다. 작품 속에서 엄마와 산책을 하는 소녀나 아빠와 공놀이를 하는 소년, 게임기나 장난감을 가지고 즐거워 하는 소년들이 자주 등장하는데 이는 어린 시절 행복한 가정을 누려보지 못한 니시무라의 상대적 박탈감을 자극하는 장치이자 할 수 없이 탑을 그리워 하게 되는 정당성을 부여하며 소년에게 대물림 하고 싶지 않은 이타적인 감정을 유발하는 계기가 된다. 그래서 우리는 소년을 바라보는 니시무라를 바라보며 자꾸 마음이 쓸쓸해진다.

물건이나 돈을 훔치는 것은 결국 '결핍'의 정신병의 하나로 보아야 할 것이다. 물건의 필요유무를 떠나 훔치는 사람에게 결핍했던 것이 무엇인지를 들여다 보아야 할 것이다. 일본이나 이곳이나 빈부격차가 점점 심해지는 오늘의 도시에 살고 있다. 니시무라는 어린시절 고가의 장남감을 가지고 노는 또래 아이를 보고 자신의 힘으로 얻었을 것 같지 않은 것에 자부하는 어린 마음에 최초 반감을 품게 된다. 각자 자신의 힘으로 얻지 않은 것일 지라도 그것을 훔치거나 빼앗을 수 있는 관용은 허용되지 않는 현실이다. 하지만 우리 사회를 들여다 보면 불로소득으로 세상을 다 가진 것 처럼 행세하는 자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일개 소시민인 우리는 그들을 향해 손가락질 할 수도 없고 하기도 싫다. 도덕이나 준법 같은 건 잠시 잊어 버리고 책을 읽는 동안은 남의 주머니를 슬쩍하여 마음껏 훔친 것으로 조금은 서운한 마음을 달래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그러한 생각이라면 얼마든지 쓰리 당해도 억울하지 않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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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 정육점>을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이슬람 정육점 문지 푸른 문학
손홍규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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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해였었다. 이슬람도 그렇고 정육점은 더욱 더 제목부터가 벌써 엽기나 그로테스크한 살인에 어울릴 법하여 갸우뚱 했었고, 혹시나 역설을 이용한 유머가 짜릿할 것인가 나름의 머리를 굴려보았지만 모두 다 설익은 편견에 불과했고 오해를 한만큼 고개를 숙이도록 하는 진중함을 선사한다.  

'내 몸에는 의붓아버지의 피가 흐른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해 '내 몸에는 여전히 의붓아버지의 피가 흐른다'는 문장으로 끝나는 소설 속에는 필연적인 '피'도 출현하고 흉측한 '흉터'도 등장한다. 하지만, 읽는 내내 불편한 소재로도 의문스러운 편안함을 제공하고 마는 작품의 미덕을 어디서 찾아야 할 지 나는 그것이 궁금했다. 작가의 문체와 시종일관 낮은 목소리로 들려오는 모노톤의 절제된 문장력도 있었겠지만, 소설의 서사와 서사를 이어주는 작가만의 논리가 참 마음에 들었다. 그렇다고 진부하거나 평범하게 다가오지는 않았다. 아마도 알고는 있지만 드러내 놓지 않고 살짝 건드려 주었으면 하는 그 부분을 찬찬히 긁어 주었기 때문은 아닐까. 이 소설에서 드러나는 '피'는 결국 보이지 않게 연결된 내면의 '핏줄'일 것이며 그 결과로 각인된 흉터는 과거의 상처가 아닌 '미래로의 충동'으로서 아리게 돋아나는 새살일 것이다. 언제나 느끼는 것이지만 작품 속 주인공의 상처와 흉터는 왜 끝내 우리들의 그것을 아물게 하는 힘을 가지는 것인지...그래도 많이 아프다. 그저 그러하고 말 것이 아니라 염치 없지만 이번에도 무언가 돋아나는 순간이길 바래본다.  

작품에 마치 산을 내려와 일선에서 은퇴한 느낌의 이름을 가진 '하산'아저씨라는 터키인이 등장한다. 우연의 일치인지 얼마 전에 모 방송에서 6.25특집으로 방영한 '터키군 장교와 한국소녀의 60년만의 재회'를 다룬 다큐프로를 시청했다. UN군의 일원으로 6.25에 참전한 터키군 장교가 피한방울 섞이지 않은 전쟁고아인 5살 한국소녀 ‘아일라’(터키어로 달그림자)와 찍은 빛바랜 사진 한 장을 가지고 60년 동안 그녀를 위해 기도한 사연이었다. 장교는 1년 반 동안 부대 막사에서 아일라를 키웠지만 귀국명령을 받고 그녀를 한국의 고아원에 맡겼다. 제작진은 어렵게 그녀를 찾게 되고 결국 장교와 백발이 된 할머니 아일라와 극적으로 재회하는 장면에선 가족 모두 눈물을 펑펑 쏟고 말았다. 한국전에 참전한 터키군은 미국 영국을 제외하고 가장 많이 파병되었기에 전사자 또한 많다라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소설을 읽은 후 터키 참전 용사들이 당시 전쟁고아들을 하나둘 모아 직접 고아원을 만들기도 했다는 사실은 처음 알게 되었다. 바로 그렇게 자신이 치른 전쟁으로 고아가 된 아이를 데려다 살붙이로 정을 붙이며 살았던 하산아저씨가 어쩌면 실제인물인 것으로 생각되기도 했고, 상투적으로 사용하던 '형제의 나라', '우리는 형제의 피를 나누었다'는 문구들이 새삼 온몸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흉터라는 비밀과 만나다

어쩌다보니 나는 제왕절개로 아이를 출산했는데, 또 어쩌다보니 그만 내 몸에는 십센티나 되는 거룩한 칼자국이 새겨지게 되었다. 그런데 신기한건 살면서 그다지 그 순간을 기억하거나 특별히 흉터라고 인식하지 않다가도 대중 사우나만 가면 나처럼 아랫배에 칼자국이 남아 있는 여자들을 잘도 골라낸다는 것이다. 어쩌면 같은 상처와 흉터를 가진 사람들은 애초부터 서로 자석처럼 이끌리게 되어있기라도 하는 걸까. 그런데 또 미안한건 그렇게 찾아낸 사람들이 반갑기는 커녕 될 수 있으면 저만치 떨어져 두번 다시는 마주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이미 새겨진 흉터가 새삼 창피하다기 보다는 고통을 알만한 사람들끼리 당시의 상처를 부러 회상할 것 까지는 없지 않느냐는 암묵적인 회피가 인지상정인 듯하다. 그러니까 세상 어딘가에 나와 같은 흉터를 가진 사람이 있다는 건 꽤나 위로받을 만한 일이지만 만나서 들쳐보며 반추하는 것은 보다 신중하고 싶다는 뜻이려니.

여기 그 끔찍한 흉터가 원인과 결과에 있어 같은 사람들이 있다. 총상에 의해 부모님과 헤어져 고아가 되었으리라 짐작되는 '나'와 한국전쟁에 참전한 터키인으로 전쟁이 끝난 후에도 조국에 돌아가지 않고 한국에 남아 모스크 근처 허름한 정육점을 운영하는 '하산아저씨'가 그 주인공이다. 이들은 피 한 방울 나누지 않은 다른 국적, 다른 환경의 이방인 관계지만 같은 전쟁에서 총상에 의한 흉터가 같다는 표면적인 이유는 혈연이상의 관계로 발전시키는 상호운명적인 비밀의 열쇠로 재탄생하게 된다.

이들의 주변에는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그리스인 야모스 아저씨와 한국 군인으로 참전했던 대머리 아저씨, 충남식당이라는 국밥집을 운영하는 안나 아주머니, 소설가가 꿈인 말더듬이 친구 '유정', 4차원으로 생각되는 '맹랑한 녀석'이 각자의 상처와 흉터를 간직한 채 한마을에 살고 있다. 소설의 배경이 되는 시기가 정확치는 않으나 전쟁직후와 비교적 가까운 시점에 이들이 껴안고 살아가야 하는 상처들은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우연 또는 필연적으로 살아남은 자들의 고통을 기본으로 하고 있기에 소설 속 인물들의 상처는 곧 그 사람 자체를 의미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상처가 삶 자체가 된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은 지독한 외상후유증과의 싸움일 것이다. 하산 아저씨는 전장터에서 폭격과 동시에 우연히 날아든 사람의 살점을 달콤하게 한입 먹어버린 충격으로 오히려 이슬람에서 금기시하는 돼지고기를 파는 것으로 자신을 용서하지 않으려 하고, 야모스 아저씨는 그리스 내전 당시 전투기를 몰다가 적병으로 오인한 사촌 일가를 죽인 죄책감 때문에 고향에도 돌아가지 못하고 한국에 숨어 속죄의 삶을 살아가려 하고, 대머리 아저씨는 참호에서 극적으로 구출된 후 전쟁 당시의 기억을 완전히 잃어버리고는 늘 군복을 입고 군가를 불러대며 모든 전투 상황을 공부하여 자신이 참전한 것처럼 행세를 하는 것으로 잃어버린 기억에 속죄를 구하려 한다. 이들은 전쟁의 결과로 가슴이나 어깨, 얼굴, 뇌에 치명적인 흉터가 남겨지게 되고 그것은 드러내 놓고 싶지 않은 비밀로 자리잡는다. 이들처럼 흉터의 기원을 알지 못하는 '나'는 이들 앞에서 알 수 없는 비밀에의 매력만 감지 할 뿐이지 구체적인 탐구나 분석같은 건 해볼 수 조차 없는 공허한 흉터를 가지고 있기에 '나'는 비밀이 된 그들의 흉터가 늘 그립고 반가웠던 것은 아닐까.

미래와 공유하는 비밀을 알다

두렵긴 해도 비밀에 접근하고 비밀을 알아가는 '나'의 논리는 말더듬이 친구 유정의 말만큼이나 힘겹기도 하지만 그래서 더 감격적이다. 기억의 돌팔매질을 뛰어넘지 못한 고아원 담장에 대한 원망이나 누군가를 그리워 할 때의 심정과 흡사한 기분이라는 석유 사르는 냄새가 비밀에 다가가는 첫 걸음이었다.

'나'는 스스로 비밀을 알게 되기까지 운명론에 깨우침이 남달랐는데, 운명은 면식범처럼 우리주위에 기거하면서 호시탐탐 우리를 수렁에 처 넣으려고 기를 쓰는 녀석이기에 안다고 믿어 방심하는 순간을 놓치지 않고 최초이면서 최후인 발길질로 끝장을 내버린다는 깨달음이 그것이다. 운명론에 운명처럼 따라다니는 그림자나, 흉터, 비밀, 고아를 따져보면 남루한 동네는 비밀마저 남루하다든가 죽기 위해서는 먼저 살고 싶다는 욕망을 가져야 한다든다, 그림자가 어둡고 검으며 잿빛이라는 데 동의하지 않는다는가 하는 피해의식이 낭자하지만 그 흉터가 폭력에 의한 것이든 실수에 의한 것이든 혹은 선천적인 것이든 모든 흉터는 언어처럼 서로 관계를 맺는 다는것, 고아는 오래전 부모에게 피를 물려 받기는 했지만, 그 피가 누구에게 물려 받은 것인지를 날마다 상기시키는 피붙이가 없기에, 그렇게 녹슬어 버리는 존재라는 것, 사람의 몸에서 일어나는 지진의 진원은 과거이며, 행복이나 고통도 실내를 채운 공기처럼 공유 할 수 있다는 것에 이르면 그의 운명론은 필시 절망만을 노래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여기서 앞선 흉터의 상징 3인방과 함께 치유를 상징하는 세 명을 다시 운명처럼 조우할 수 있다. 유머와 속담으로 인생을 낙관하는 안나 아주머니는 하산, 야모스, 대머리 아저씨를 해학적인 위로와 모성으로 감싸안는 인물이다. 남편의 부고를 듣고 트럭을 한 대 빌려 마을 사람들이 모두 교외로 나가는 소풍을 추진하게 되고 등장인물들 모두가 바람 속을 거닐며 소박하지만 자연과 서로에게 위로받는 치유의 장을 마련한다. 소설가가 꿈인 연탄장수의 아들 유정은 말더듬이지만 동물들과 의사소통의 매개체가 되어 사람들의 상상력을 풍부하게 해준다. 모든 일에 희망이 없어 보이는 맹랑한 녀석도 대머리 아저씨와 6․25 참전용사들의 모임에 다녀온 후 그의 상처와 잃어버린 명예를 되찾아주기 위해 그의 군복 등속을 태우는 것으로 의리를 선사한다. 이처럼 그들에게 중요한 건 이 세상에 머무는 기간이 아니라 머무는 동안 무얼 어떻게 사랑하느냐는 것이라 말해준다.

등잔 밑이 어두운

흉터를 가졌으나 그렇다고 치유만을 바라지는 않았던 '나'는 잡지나 신문에서 사람 얼굴을 오려 스크랩하는 취미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얼굴 스크랩을 하기 위해 신문을 뒤적이면 매번 같은 얼굴을 만나고 그 안에 인간이 지을 수 있는 표정은 다 있었다. 그렇게 스크랩된 사진들을 모자이크처럼 이어 붙여 하나의 세계지도를 만들었더니 결국 인종이나 국가, 종교 등으로 사람을 구분할 수는 없고 인간이 지을 수 있는 하나의 표정으로만 인식되어 모두가 연결되어 있음만 확인 할 뿐이었다. 나라와 성별, 생김새가 다른 얼굴만을 오려 스크랩하는 취미가 다소 작위적으로 느껴지기도 했고, 후반부 메시지를 직접적으로 전해 주는 친절함에 일말의 아쉬움은 있었지만 형제란 그런 것이니까...결국 인간은 서로를 공유하는 능력을 가지고 태어났음을 깨닫게 될 것이니까.

얼굴의 세계지도를 그려가며 그토록 만나보고 싶었던 인간의 표정이란 어떤 모습일까. 모든 사람들이 서로 깔고 앉았다 일어나면 생겨나는 하트모양의 엉덩이 자국, 바로 우리가 가장 수치스러워 하는 곳에 감춰진 비밀처럼 그 엉덩이 속에 있었던 것이라 말한다면 이쯤에서 우리는 하산아저씨가 물려준 의붓아버지의 피에 '사랑'이라는 색깔을 칠해도 무어라 반대하는 사람이 없을 것이라 믿고 싶다. 의자에 남겨진 흉터는 인간에겐 보이지 않는 끈이 되어 사랑으로 재생되고 있었던 것이리라. 작품에서 군대, 사회, 국가와 같은 것들에 맹렬한 증오를 내세우지 않으면서 물 흐르듯 작가의 논리에 순응한 결과 얻어지는 최고치의 비밀이자 진실이라 할 것이다. 비밀은 여기, 우리 사는 이곳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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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8-31 19: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 / 영한 대역본> 을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 - 영한대역 (영문판 + 한글판 + MP3 CD)
포리스트 카터 지음, 조경숙 옮김 / 아름드리미디어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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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의 마음을 울리다

책을 덮고 희미한 웃음처럼 시작된 눈물이 오랫동안 멈추지 않았다.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른 다고 지나오고 나니 흠뻑 젖어있는 옷자락을 이제서야 확인한 격이다. 나는 일단, 내 울음의 의미부터 찾아야 했고 시간이 좀 흐르곤 여운이 가시기전에 서둘러 꺼내고 싶은 것들을 잘 추슬러 다시모아 온전한 내 것으로 하고 싶은 욕심에 사로잡혔다. 분명 무엇이 빠져 나간 것 같았는데, 신기하게도 나를 채워주던 그 무엇. 그들이 말하는 영혼의 마음(spirit mind)이란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 

 
남도 바닷가 마을이 고향인 古이청준 작가는 어린 시절 시골 삶에 대한 그리움은 곧 '자기 삶의 근원과 순정성에로의 회귀욕구, 혹은 자아회복의 정서적 감응태(感應態)'라 하였으며 그러한 고향에서의 어린 시절은 훗날 실패나 영혼이 허물어졌을 때에도 그 삶을 다시 일으켜 세울 자정의 심정적 귀향지가 될 수 있다 하였다. 심정적 자기정화와 고향시절을 지니지 못한 세대로서 나는 늘 고향이 있는 사람들이 부럽고 돌아갈 곳이 있는 사람들의 그리움이 그리웠다. 짧게나마 서울로 이사오기 전의 내 유년시절을 애써 떠올려보아도 흙냄새나 꽃향기는 나지 않아 이곳 도시의 아스팔트와 큰 차이를 느끼지 못하는 바이다. 그런 고향이나 시골의 친구가 하나도 없는 내가 그 어떤 구슬픈 사연이 아니라 인디언 소년의 어린 시절과 그의 고향을 향해 눈물을 흘렸다는 사실은 이청준 작가가 언급한 순정성이나 자아회복의 근원적 이고도 보편적인 시원始原을 체로키족의 삶과 대지에서 찾은 것은 아니었나 하는 생각에 스스로도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그랬다. 이미 한구석인가 비어있던 그곳에 마법처럼 채워진 그것은 그들이 '작은 나무'를 통해 전해주는 바람의 선물이자 영혼의 마음이었던 것이다. 이 책의 제목이 원제인 'The Education of Little Three(작은 나무의 교육)'의 결과라 할 수 있는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 인 것은 그러한 맥락에서 기인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세상과 소통하는 '작은 나무'

이 작품은 주인공 '작은 나무'가 부모님이 모두 사망한 후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사랑스런 동식물들과 산에서 살면서 인디언이 살아가는 방식으로 추억을 만들고 삶의 지혜를 배웠던 유년시절을 스무여 개의 챕터 속에서 회고하는 방식으로 쓰여진 자서전 형식의 글이다. 각 장마다 크고 작은 에피소드를 중심으로 할아버지의 통찰력 넘치는 가치관과 할머니의 슬기로운 혜안을 엿볼 수 있고 살아 숨 쉬는 것들의 생명력과 그들과 소통, 교감하는 주인공의 감성을 싱싱하게 체험할 수 있다.

할아버지는 약간의 욱하는 성격을 가지셨지만 산과 동물, 사냥이나 날씨, 농작물 재배, 위스키 제조기술등에 대해서 소년에게 기술과 진리들을 전수하고, 할머니는 책과 음식, 예절, 바느질, 간호에 대해 해박하여 그런 할아버지를 감싸 안는 영혼의 버팀목이 되어 주신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을 몸과 마음으로 받아 들이는 소년의 나이는 불과 여섯, 일곱 살에 불과하다니 물론, 이야기를 자서전 형식으로 엮어낸 당시 저자의 시점으로 작품을 써내려갔다는 사실을 감안하더라도 도시에서 화초처럼 자라나는 우리 아이들에 비하면 너무나 성숙하고 대견한 성장과정이 아닐 수 없다. 할아버지, 할머니의 말씀을 회고한 뒤 꼭 '그것은 옳았다', '나도 맞다고 생각했다'고 덧붙이는 것으로 어른스럽게 당시의 기억을 더욱 분명하게 해주는 가하면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고 동심의 눈으로 자신의 생각을 확인하는 저자만의 방식은 직접적이면서도 유난히 순수하게 다가왔다. 아마도 할머니, 할아버지가 소년을 어린아이로만 취급하지 않고 어엿한 하나의 인격체로서 그의 정체성을 늘 확인시켜 주고 자신에 대한 소중함을 잃지 않도록 격려를 해주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소년이 추억하는 에피소드는 크게 산에서의 나무, 새, 동물과 같은 자연과의 소통에 관한 이야기와 정치가나 주변 이웃들과 같은 사람과의 소통에 관한 이야기로 나뉠 수 있다. 두가지 모두에서 소년은 체로키 족이 생각하고, 느끼는 방법을 자신의 모든 감각을 통해 배우게 된다. 인디언이 선물을 주는 방법(의미를 달지 않고 선사하고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면 고맙다는 말이 필요 없는)이나 인디언이 처음 만나 인사하는 방법(악수를 하지 않고 손바닥을 펴서 흔드는)은 형식이 진실을 만들기도 하는 요즘 세상에 새삼 신선하게 다가왔다. 체로키 족이 걷는 법에 가장 잘 어울리는 모카신(moccasins)이 등장 할 때엔 우리의 꼬까신과 어감이 비슷하기도 하고 어렸을 적 할머니가 시장에서 사주신 고무신이 생각나기도 했다. 목전에 혀를 날름 거리는 방울뱀과 소년의 얼굴 사이에 자신의 우직한 손바닥을 가로지르며 위험을 무릅쓰던 할아버지를 보고는 옛날 화장실에 빠진 손자를 구하려고 뛰어들어 희생된 우리네 어느 할머니의 이야기가 생각나기도 했다.

정부군이 강제로 인디언을 이주시키면서 발생한 행렬인 '눈물의 여로(Trail of Tears)'를 서술할 땐 저자도 가슴깊이 울고 있는 것 같이 느껴졌다. 일요일마다 교회에서 만나던 제로니모 윌로 존씨와 소년이 선물로 준 황소 개구리 이야기는 고요를 깨던 개구리 울음소리만큼이나 그 울림이 심상치 않았다. 유대인 보따리상 와인씨의 소품인 시계와 안경, 양초, 노란코트들이 마치 산타클로스의 커다란 꾸러미에 들어있는 소중한 선물들로 느껴지기도 했다.

가장 주체 할 수 없었던 장면은 윌로 존씨,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평온하게 숨을 거두는 모습도 인상적이었지만 무엇보다 고아원에서 돌아온 소년과 할아버지, 할머니, 산동물 들과의 격정적인 재회장면이 기쁘면서도 벅차고 벅찬만큼 가슴이 터질듯해 마치 재회현장에 같이 있는 것 처럼 얼마나 생생했는지 모르겠다. 물보라를 휘날리며 서로 부둥켜 안고 넘어지고 웃으며 우는 그 순간이 아마도 저자가 그들을 가장 가슴깊이 회상하는 장면이 아니었을까. 그들과의 시간을 얼마나 소중하게 여겨왔는지 그래서 또 얼마나 기뻤을지 그들과 한번도 헤어본적이 없는 나 역시도 오래오래 잊혀지지 않을 것 같았다.

이 책에는 바로 옆에 원문이 수록되어 있어 우리말과 비교해볼 수 있는 또 하나의 기회도 제공한다. 유난히도 자주 등장하는 동물과 식물의 이름을 사전처럼 바로 확인하는 재미도 쏠쏠하거니와 할머니가 자장가로 불러 주시는 노래나 할아버지가 산길을 내려올 때 흥얼거리는 노래, 이웃을 만나고 돌아갈 때 허전함을 달래던 노래를 원작으로 읽어보면 색다른 감동을 느낄 수 있다. 그들만의 은유적인 표현(여우의 침-hot trail / 고참 산사람-master woodsman/ 개코순사-low dogs)등을 직역,의역한 단어들도 가깝게 확인할 수 있다. 사용하는 단어들이 대부분 쉽고 친근한 단어들임에도 불구하고 매끄럽고 문학적인 번역으로 의역하여 표현을 더 풍성하게 하였다는 것도 독자입장에선 행운일 것이다.

그러고 보니 이 책을 딸아이에게 건네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시에서만 자란 아이가 누릴 수 있는 간접체험의 극대치를 얻을 것 같다는 엄마의 계산도 부인치 않겠지만 보다는 소년의 눈과 귀로 보고 들은 것들을 지금 소녀인 내 아이가 공감하고 가슴으로 느껴준다면 영혼이 몇배로 더 따스해질것만 같다. 잠시나마 촉촉한 마음을 대신해 선물해주고 싶다. 우린 분명 이렇게 말할 것이다.  

Do you kin me?  I kin ye !.  

작은 나무 처럼 얼마나 사랑스러울지 벌써 부터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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