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을 범하다 - 서늘하고 매혹적인 우리 고전 다시 읽기
이정원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0년 11월
평점 :
품절


 


고전을 범하다 (짓밟다)

    ‘범하다’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가 기억난다. 어렴풋하게 드라마를 보고 전개가 이해되지 않던 장면이었는데 어른들은 남자가 여자를 범했기 때문이라고 대화를 주고받았다. 남자가 여자를 범한다는 의미를 몰랐던 나는 막연히 여자 주인공이 피해자로 보여 남자측에서 속임수나 배신을 저질렀다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한참 뒤 성인이 되고나서야 정확한 뜻을 알게 된 나는 범한다는 단어에 늘 그 시절 영상이 겹쳐져 무의식중에 폭력을 행사하는 의미로 저장된 듯하다. 이 책의 제목을 접하고 처음 감지되던 기운도 전(傳)을 범하는 주체쪽이 아닌 누군가로부터 범해지는 전(傳)의 편에서 방어적인 자세였던 걸 보면. 사람은 어떤 단어를 어떠한 상황에서 처음 배우게 되었는지에 따라 그 단어와의 개인적 인연을 시작하게 된다. 내게 ‘범하다’는 분명 한쪽에 피해가 발생하는 공격적 의미였다. 그것은 한쪽이 이기고 다른 쪽이 질 수 밖에 없는 정복의 가치였다. 그래서인지 이 책은 제목에서부터 발산하는 에너지가 남달랐다고 할까.

    이 책이 흥미로왔던 건 낡아만 보이던 옛것에서 새로운 진실을 찾아내는 저자의 의지였다. 시종일관 매의 눈으로 탐구자의 태도를 유지하던 그 긴장감이었다. 이 책은 고전의 법칙에 당당히 침범해 고전의 질서를 발본, 사유하여 당시 사회구조를 밝혀내는 기특한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고전이라는 문학이 당시 지배담론을 반영한 문화였으며 오랜 세월 현대인의 필요에 따라 계획적으로 호출된 유용한 이데올로기였음을 알려준다. 무엇이든 기존의 질서를 전복하는 과정은 혁명의 기록이다. 역사적으로 텍스트를 해석하는 일은 정치적인 과업이었다. 이 책의 미덕은 바로 그 혁명성을 향해 멀리서 불구경하듯 재미만 제공하는 것이 아니고 같이 고민하고 문제가 있다면 더우기 같이 해결하고자 하는 참여의지를 드높이는 선동성이 아닐까. 정치인에게 나라를 잘 다스리는 행위가 정치라면 독서하는 입장에서의 정치는 드러난 진실로 마음을 수행하고 진리를 실천하는 일이 아닐까 싶다. 하여 고전 다시 읽기를 통해 지금의 우리 사회, 그곳에 위치한 나를 다시 되돌아보게 하는 거울효과를 누릴 수 있었다. 고전에 은폐된 진실을 캐내는 것은 곧 우리 뇌에 저장된 지식을 교정하는 일에 다름아니다. 그건 결코 쉽거나 작은 일이 아니다. 모르긴 해도 참다운 인문정신이란 이렇듯 예리하고도 불편한 목소리를 귀담아 듣고 가슴으로 수용하는 일일 것이고 그것은 기존의 부조리, 불합리를 범하는 사회기능을 담당해 왔을 터이다. 그러므로 이 책은 최근에 읽은 책 중에 가장 의미있는 정치성을 가장 지적으로 함의, 표현한 책이었다. 이 책을 덮은 지금 우리가 범하고 싶은 것이 과연 누가 지은, 무엇을 위한, 어떠한 이야기의 傳이었는지, 그것만이 우리 몫이 되었다.

    한때 고전 붐이 일어난 적이 있다. 알려졌듯이 노무현 정부에서 부각된 논술강화정책에 따라 고전을 읽는 것이 논술을 훈련하는 방법론으로 인식된 시절이 있었다. 이는 곧 고전부흥, 고전출판, 고전강의의 붐으로 이어지면서 일반대중의 고전 읽기 현상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논술학원이 증가하면서 입시학원의 주력사업으로 떠오르기도 했고 홈쇼핑에선 학부모들의 수요를 의식해 고전 시리즈를 새로운 트렌드로 주입하곤 했다. 물론 우리가 충동구매하듯 서둘러 서재에 꽂아둔 고전들은 시대가 지나도 변하지 않을 진리의 정수처럼 여전히 그 자리에 버티고 있다. 고전이 엘리트 국가주의를 심어준다는 회의적 시선도 있지만 그들은 문학의 법전처럼 우리 사회 불변하는 도덕교육의 판타지로 기능해 온 것이 사실이다. 일반대중이면서 학부모에 속하는 나는 여기서 고전을 누가 해석하고 어떤 방식으로 유통시키는지 궁금해오지 않은 쪽에 속한다. 아니 고전을 해석한다는 문제를 크게 신경쓰지 않으며 살아왔다. 고전은 전승되거나 보존, 습득하는 것이지 누군가의 통역이 필요한 분야라는 생각에 미치지 못했다. 해석이 필요하다면 그건 지금은 사장된 고어의 직역과 의역정도라 여겨왔다. 저자는 고전은 전승되는 것이 아니라 발견되고 발명되는 것이라 주장한다. 고전을 다시 읽고 거꾸로 읽는 것이 다른 역사관과 세계관을 깨우치는 기회라 말한다. 그리하여 우리가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미래전망까지 이끌어내야 하지 않느냐 반문한다. 생각해보면 우리 사회 진보주의자들은 인문고전을 대부분 관념론의 전통적 산물로 규정하며 과거 부르조아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적 표현물이라 간주하는 경향이 많았다. 서구에서도 고전작가들은 지배계급의 위치에 속하거나 그 후원을 받는 지식인, 예술인이 많았다고 하지 않는가. 다중지성가로 불리는 정치철학자 조정환은 최근 저서 <인지자본주의>를 통해 고전세계의 재발견, 새로운 고전상의 재발명이야 말로 ‘역사적 투쟁’이요 ‘새로운 인류의 발명’이라 정의한 바 있다.

   
 
20세기 사회주의가 고전에 대해 취했던 거부와 전복의 태도를 넘어서면서, 그리고 신보수주의적 방식의 고전 전유 작업을 무력화하면서 공통적 유산으로서의 고전을 새로운 세계, 새로운 인류를 구축할 새로운 공통되기의 잠재력으로 전환시키는 것, 이것이 오늘날 다중의 지적 인문적 실천이 달성해야 할 중요한 과제들의 하나임은 분명하다.    -411p

- 조정환 <인지자본주의>
 
   


    자본주의는 대중의 인지능력을 집중시켜서 사용하기 때문에 고전을 전복하는 것을 새로운 인류가 탄생할 가능성으로 보는 것이 그의 견해이다. 저자도 고전을 ‘저지른’ 잘못이 아니라 ‘발견된’ 잘못이라 말한다. 고전의 문제는 선천적이 아닌 후천적 본성을 지녔다는 뜻으로 이해했다. 혹시라도 고전상의 과거 발견이 작위적이고 허술했다면 그 허위의 과학적 발본을 통해 지금이라도 새로운 발견을 하자는 것이므로 과거의 잘못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과정은 필수불가결하다. 이 책에서 발본된 고전은 약 열 스무 편이다. 본문에 집중적으로 파헤쳐진 것은 열 세편. 그중에 내가 들었거나 알고 있는 이야기는 반에 불과했다. 그것도 누가 죽었고 그 결과 무엇을 얻어내었고 누가 나쁜 사람이고 누가 귀감이 되었는지 그야말로 영구 박제된 지식의 퍼즐 몇 조각에 다름없었다. 저자는 이렇듯 고전속에서  우리가 선명하게 기억하는 죽어간 사람, 살아남은 사람, 그들이 원하여 얻었던 것, 그럼에도 얻지 못한 것, 사람들이 지켜내고 버려온 것들을 관통하며 심층을 파고든다. 우리가 기억하는 심청이, 춘향이를 다시 똑바로 관찰하자 부추긴다. 우리에게 익숙하던 우리가 만들어온 심청이, 춘향이를 짓밟고 원래 그들과 가장 가까운 정체성을 찾아주자 설득한다.


죽음을 범하다 (침범하다)

    저자가 제일먼저 변론한 인물들은 죽음을 만들거나 죽음을 실행함으로써 자신의 정체를 규정지은 비극의 주인공들이었다. <장화홍련전>의 계모와 <심청전>의 효녀, <적벽가>의 병사들, 이들은 죽음의 시나리오에 적극적으로 동원된 침묵의 증언자였다. 누가 누구를 어떻게 죽였고 오늘날 우리는 그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에 대한 고찰이었다. 저자는 주로 추녀와 악녀로 개성강한 조연을 맡아왔던 고전 속 계모들에 주목한다. 공인된 씨받이와 평생 가족봉양이라는 짐을 메고 재취로 들어가 자신을 제대로 변호할 수 없는 약자로 위치한 계모를 사회적 편견의 대상으로 객체화한다. 자식의 불행을 방관하는 은폐된 공범자로서 아버지는 자신의 도덕적 면죄부를 위해 전처 자식 편을 들고 사건이 종결된 후 다시 재혼하면 되었던 시대적 배경을 고발한다. 귀신으로 부활한 장화, 홍련은 자신들의 사연을 공론화 할수 없었던 억압된 주체시민들의 대항담론이 형상화된 것이며 배후에서 음모를 꾸미는 계모는 당시 아녀자들에게 각인된 결핍과 불안에 저항하는 부정적 아바타라는 말씀이다. 계모를 희생양으로 삼아 드라마틱한 시나리오에 재미를 부여하던 것은 이미 현대식 미니시리즈에서도 진부한 공식에 해당된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오늘날의 계모는 추녀가 아니라 육감적인 미녀로 등장해 물질욕의 화신으로 상징한다. 이 오래된 공식은 스테레오 타입의 고전적 가치를 창출했고 이혼과 재혼이 만연화 된 오늘날에도 계모는 의붓아버지보다 사악하고 부도덕한 캐릭터로 자리매김하였다. 의붓아버지도 성폭력등의 가정폭력을 행사하는 경우가 많지만 외려 계모는 가정의 외피적인 평화를 위해 이마저 은폐하는 공범자가 되거나 살해자로 추락한다. 그리고 이 모든 계모와 의붓아버지의 고정화된 캐릭터에 우리는 전혀 싫증을 느끼지 않은 채로 뉴스를 청취하고 사연을 관람한다. 다시 말해 우리는 그들이 나쁜 사람인 것이 아주 편한 이웃들로 살아가고 있는 실정이다. 우리 사회 어디에서도 계모의 논리적 변론이 드러난 적은 없었고 설사 억울함을 호소하였다 해도 그 사실은 이슈화되지 못한다. 혹시 이 증상은 본질적으로 계모의 문제가 아니라 계모를 붙박이처럼 고정된 자리에 묶어 놓은 우리들의 문제는 아닐까.

    필히 훌륭하고 모범이 되는 계모의 본보기도 있을테지만 이들은 단지 예외의 인물일뿐 그 진정성을 주목받지는 못하는 경우에 속한다. 아니 오히려 드러나는 것이 타자에 의해 가식이나 위선으로 비쳐질 위험마저 있다. 어쩌면 본인 의지와 상관없이 박제된 캐릭터 때문에 새로운 역할을 하지 못하는 배우처럼 이 시대 계모들은 장화, 홍련이후 한번도 그 오해를 풀어본 적이 없다는 생각을 한다. 계모에 대한 오해가 풀리는 것을 가장 두려워 하는 사람은 누구일까. 혹시 그것은 계모에 올가미를 씌운 사람들은 아닐까. 나는 계모가 악녀이고 추녀이어야 아버지와 자식들은 가정의 평화를 위해 노력했다 변명할 수 있으며 자신들이야 말로 상처받은 피해자라 주장할 수 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새롭게 재편되는 가정의 질서를 위해 계모 하나 나쁜 사람이면 모든 것이 일사천리다. 이것은 요즘 시대 아내가, 엄마가 행복해야 가정이 행복하다는 논리와 맥을 같이 하는 역설이다. 계모는 가정에서 가장 불안한 지위에 놓여있지만 신구 가족 구성원간 가장 정신적 피로도가 높은 역할이므로 계모가 시기하고 욕심이 많다면 모두는 불행할 수 밖에 없다는 논리가 아닐까. 바꿔 말하면 아무리 남편이 야속하고 전처 소생이 밉고 이웃의 시선이 서운해도 계모하나 꾹꾹 참으면 만사가 문제없다는 것과 같다. 가정을 지킨다는 명목하에 이루어지는 완벽한 지배계급의 착취 이데올로기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우리는 그동안 얼마나 장화와 홍련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계모만을 모든 파탄의 원흉으로 미워했던가. 사뭇 그 에너지가 민망하다.

    아비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해 바다로 뛰어든 심청이는 공동체의 계략적, 필연적 공모에 의해 희생된 제의장치였다 말한다. 오늘 날 심청처럼 희생하는 여식은 찾아보기 힘들다. 자기 목숨을 바치면서까지 아버지의 광명을 찾아주겠다는 끔찍한 효심은 불효하지 않은 자식에게도 오래된 부채감으로 남아있다. 저자는 냉소한다. 심청이의 타의적 자살이 의미하는 것은 효를 앞세운 공동체의 연대보호였다고. 누구도 아버지를 위해 심청이가 죽어야 한다고 한 사람은 없지만 누군가 죽어야 한다면 그건 심청이어도 괜찮다는 말과 같다. 아니 무엇으로보나 심청인 게 모양새가 낫다는 공동체의 표현의지였다. 심청이의 살인사건에 무언으로 동조한 죄책감은 효라는 가치로 개인의식에 자동 내면화된다. 그렇다면 공동체가 믿은 것은 무엇일까. 이들 공동체가 특별히 잔인하거나 폭력적인 성향을 가져서인 걸까.

    예나 지금이나 심청의 인당수 투신과 같은 희생적 뉴스는 심청이나 아버지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런 미담을 듣고 그것이 우리사회를 아름답게 하는 진정한 가치라 믿는 나 자신을 위로하기 위한 소식이 아닐까. 심청이나 아버지는 극장에서 상영되는 극적인 드라마의 주인공일뿐 우리는 그들로부터 발생한 ‘선’이나 ‘효’, ‘충’ 같은 도덕적 가치들을 나누어 공유하면 되는 것이다. 영상이 스펙타클하고 자극적, 폭력적일수록 흥행의 가능성은 높아진다. 우리가 유영철이나 강호순같은 연쇄살인범을 맹렬히 비난하고 그 잔인성을 적극적으로 회자하는 심리와 유사하다고 여겨진다. 이는 천인공노할 희대의 살인마를 처단해야 한다는 사회적 공분이라기 보다는 이미 갖고 있던 살인의 추억에 부합하는 새로운 인물을 발견하여 이번기회에 한껏 오래된 사연을 확인하는 것이라는 문화비평과 비슷한 맥락이 아닐까.(이택광, <이것이 문화비평이다>, 자음과 모음) 그렇게 본다면 심청이가 인당수에 투신하는 장면은 피할수 없는 슬픔이 아니라 예정된 위로였다. 
 

                        공동체라는 확장된 자아의 생존을 위해 우리는 거듭 살해를 저질러왔다.  - 203p   

 

    심청의 죽음이 사회공동체가 공모한 살인사건이었다면 <적벽가>에서 죽어간 병사들은 한명의 거대 영웅을 위한 준비된 알레고리라 말한다. 출장입상이라는 유교적 가치를 구호삼아 우화스럽게 쓰러져간 군인들은 자기 몸을 냉소, 조롱하며 희극배우로 출연함으로써 당시 봉건가치에 저항했다는 것이 저자의 분석이다. 저자는 인간의 사물화에 기반을 둔 이러한 서사가 영웅의 등극을 정당화하는 장치라며 ‘람보’식의 영웅주의 영화를 같은 계보로 위치시켰다. 희생양으로 택해진 전처 소생, 봉사의 외동딸, 졸병의 집단들은 권력과 제도권에서 멀어 보인다. 이들의 죽음은 기득권층, 문화 향유층에게는 자신들의 권위체계를 유지하는 문학적 소재이자 합리적 장치였다. 오늘날의 문화비평적 시각에서 본다면 일반 서민들에겐 은폐된 진실을 시시때때로 공유하면서 죄책감과 책임의식을 적절히 배분하면서 현실에 순응하고자 하는 도덕적 판타지는 아니었을까.


욕망을 범하다 (위반하다)

    그런가하면 인정하기 싫지만 인간본성으로서의 욕망을 다양하게 분석한 고전들에선 엿보는 재미보다는 지적당하는 불쾌감이 더 많았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무능한 가장을 등장시킨 <장끼전>의 해석은 그러한 가장을 빈번하게 배출하던 당시 사회의 탓으로 돌리는 것 같아 마음이 좋지는 않았다. 어머니의 은밀한 욕망을 놓치지 않은 시선 역시 사생활의 주체로서 어머니를 이해한다는 평가가 기분 좋지는 않았다. (다분히 남성적인 시각이라고 느꼈기 때문에) 한번쯤 스쳐간 여인의 농담조는 개인의 욕망이 되버리고 빈번히 제기 되는 가장의 한탄은 사회적 책임으로 돌려지는 것 같았달까. ‘사회적 약자에 대한 강자의 희생요구를 ‘충’으로 포장하는‘ 복잡한 작품으로 규정한 <토끼전>은 어느덧 타인의 고통을 대의 명분으로 덮어 버리는 정치적 행위에 익숙해져 버린 나 자신에게 흠칫하던 기분이었다. 비천한 지귀가 선덕여왕을 사모하다 불귀신이 된 이야기 <지귀설화>는 우리 사회 이루어 질 수 없는 사랑을 다시 공동의 침묵으로 매장하는 대중적 습관을 깨달을 수 있었다. 우린 이루어 질 수 없는 것, 다가갈 수 없는 곳, 만날 수 없는 것들에 미학적 의미를 부여하며 예술로 승화시키려는 패배적 시간들을 부인하지 못한다. 하나같이 불편한 목소리는 ‘진실이 우리의 감성을 재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사회구조를 재생산’하기 때문에 중요한 것이라 주장했다. 나의 성공을 위해 목숨을 거래하고 내가 살기 위해 사랑을 버리고 나의 품위를 위해 위선과 타협하는 모든 인간사는 마치 고전을 충실하게 전승시켜온 학습결과로 느껴질 정도였다. 

    저자는 외려 춘향과 이도령의 사랑을 ‘욕정에 못이긴 사내와 물주를 만난 기생의 거래’로 보는 방자의 솔직한 시선에 한 표를 던지는 듯 보였다. 열녀 만들기에 대한 독자들의 열망이 반영된 결과 <춘향전>은 고전이 선사하는 진정한 사랑의 판타지로 인식되어왔다. 변학도에 항거하며 이도령에 대한 절개를 지키는 춘향으로부터 불순한 의도같은 건 상상할 수조차 없었다. 암행어사가 되어 변학도를 응징하던 이도령은 오랜 세월 백마타고 온 왕자로 군림하던 문학적 남성상이었다. 저자는 시대와 민중이 다같이 공들여 스스로의 염원과 연민을 춘향과 이도령에게 투사했다고 말한다. 춘향전의 로맨스를 통해 우리가 얻은 것은 지고지순한 사랑에 대한 가치가 아니라 우리 자신들의 위선에 대한 연민의 연대였다고. 그들의 비현실적이고 의심없는 사랑으로 채울 수 없는 자기 위로를 일삼은 것이라고. <전우치전> 역시 대단한 민중 영웅소설이 아니라 봉건적 지배에 대한 저항을 도술로서 조롱한 나르시시즘의 도착적 서사였다고. 전우치의 발랄함과 유치함은 바로 우리들 자신의 이기적인 페르소나와 다름없었다고. 은밀한 욕망을 위반하는 방법으로서 그들 모두는 욕망의 대리자, 가면쓴 주인공이었다고.


    아름답고 대단한 반전이었다. 이 책을 덮고 나니 글을 어떻게 쓸 것인가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읽을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알릴 것인가의 중요성도 새삼 깨닫게 된다. 그동안 우리가 고민한 것이 ‘고전이 할 수 있는 게 무엇일까’ 였다면 이 책은 ‘고전을 해석하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였다고 본다. 저자는 해석의 기만은 곧 정신적 폭력이라 말한다. 저자가 행한 전복적 기획이 인문학이 위기라는 작금의 시기에 신선한 활력제가 되었음 좋겠다. 이 책에는 비판을 위한 비판, 뒤집는 재미를 위한 반론이 아니라 실제 고전의 중요 부분을 감상할 수 있는 기회와 대중문화 같은 현실과 연계된 저자의 통찰, 그리고 미래의 문제제기까지 함께 구성되어있다. 고전의 영역을 해치고 침범하는 일은 고전이라는 문학을 통해 당시 사회구조를 밝혀내는 작업이었다. 전을 범하여 얻어진 결과를 통해 우리가 사유해야 할 것은 참다운 인문정신일 것이다. 국가나 기업, 혹은 특정 개인 어디에도 종속되지 않은 채로 존재하는 인문학의 독립일 것이다. 어쩌면 지금까지 배워왔고 편안하게 알고 있던 지식들을 누군가 틀렸다고 지적하며 이렇게 바꾸라고 설득하는 일이 인문학의 기본 자세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다. 바로 오래 저장된 내 생각을 바꾸어야 하는 순간, 새로와져야 겠다고 마음먹은 그 시간들이 어느 때보다 고독하다는 것을.

    이 책에서 해석된 <춘향전>, <홍길동전>, <양반전>, <전우치전>등은 청소년들의 인문고전 필독서이기도 하다. 저자의 해석에 따르면 우리는 그동안 고전을 통해 자기발전을 이룬 것이 아니라 자기최면이나 위로를 자행해온 것과 같다. 이 책은 뼈아픈 지적으로 솔직한 고통을 선사한다. 돌이켜보면 지난 시절 고전을 찾고 그것에 의지했던 이유는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기 위한 순간이었던 것 같다. 선인들의 고민과 해결과정을 엿봄으로써 비로소 세상사 범속한 내 고민이 별다르지 않았음을 깨우치는 성찰의 시간을 가졌던 것 같다. 고전을 그렇게 읽었다고 당장 내 고민이 해결되고 눈앞에 변화가 생기는 것은 아니지만 내 근심의 출처를 바로보고 같은 우를 범하지 않도록 자세를 다지게 하는 오래된 반가움으로 기능했다. 우리가 이 책으로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고전은 더이상 쓸모가 없으니 읽을 가치가 없다는 주장이다. 고전이 필요치 않다는 것이 아니고 고전을 일방적, 정치적, 획일적으로 해석당해온 세월을 잊지말자는 것이다. 그리곤 앞으로 올바른 해석을 통해 오늘을 반성하자는 것이다.  이 책은 기존 보수적 세계관과 치열하게 전戰하며 법전같던 진리를 과감하게 전복하는 과업을 달성했다. 전(傳)을 범하여 우리가 얻은 것이 전(典)같은 현실을 견디는 에너지(電)로서 전승되길 기원한다. 미래는 이렇듯 체제를 범하는 사람들이 곧 절망을 범하는 희망이 되기를 소원한다. 그것이 새로운 인류의 진실이 되는 날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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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1-08-09 0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읽었는데.. 그런데 <춘향전>이랑 <지귀설화><홍길동전>을 소개한 부분만 봤어요,
나머지 고전들은 아직 안 읽어본 것도 있고 처음 들어본 생소한 내용도 있어서
저자의 해석을 무조건 옳다고 할 수도 없었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