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공감의 형벌
굳이 이웃의 글을 읽을 때 이 사람이 여성인지 남성인지를 먼저 인식하며 글을 읽지는 않는다. 언제 읽어도 얼굴이나 목소리를 알 수 없기는 마찬가지지만 처음 글을 접할 땐 그저 글투나 자주 사용된 단어, 문장의 형식, 소재의 종류, 결론의 방향등으로 막연히 성별을 느낄 뿐이다. 가끔은 내가 처음에 예상했던 성별과 반대였던 사람도 있었고 나보다 어릴 것이라 생각했지만 나이가 많은 분도 있었다. 온라인에선 일단 보이는 조건들을 떠나서 오로지 글로만 만나기 때문에 오해는 내가 보고 느낀 만큼의 이해와 같은 말이다.
그런데 글을 읽다보면 아, 이 사람은 결국 한 가지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구나 싶을 때가 많다. 어떤 페이퍼를 올려도 어떤 책을 읽어도 결론이 지향하는 지점은 유사성을 지니기 때문이다. 이웃 서재의 글을 읽기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나는 어떤 글에 반응을 보이는지 최근에 알게 되었다. 주로 자신이 쓴 글에 한계를 느끼면서 문학적 재능이나 노력에 좌절하는 글, 인간이 가지는 한계점을 자신으로부터 발견하고는 아파하는 글, 자신의 실패나 실수, 혹은 인간관계에서 오는 갈등으로 자신을 돌아보는 글... 그러니까 일상에서 섬세하고 치밀하게 자신을 관찰하려는 노력에 감정의 동요를 일으키는 듯 하다. 나는 어쩌면 남들의 아픔에서 내 아픔을 발견하려고 이웃의 글을 읽는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어떤 글은 바로 이 분이 결혼을 했고 아이가 몇이고 현재 일상에서 어떤 힘겨움이 있는지 드러나는 글이 있다. 구체적으로 서술하진 않았지만 나는 연속극을 보듯 그의 글을 읽어왔기 때문에 아픔의 종류가 어떤 것인지 지금 어떤 심경일지 어느 정도 예상을 하게 된다. 그럴 땐 조용히 힘내시라 댓글을 남길까 하다가 아는 척이 실례가 될까봐 그냥 애꿎은 추천만 누른다. 그러곤 그가 나의 안 보이는 응원으로 미미하나마 힘을 낼 수 있겠지, 외려 내가 희망을 가지면서 뒤돌아선다. 돌아보면 내게 있어 추천은 응원이고 위로, 자신에 대한 격려였다.
글에도 그 사람만이 가진 숨소리와 억양, 체취, 온도가 있어 읽다 보면 이 사람은 이 글을 쓸 때 슬펐구나... 애써 화나는 마음을 억눌렀구나... 들뜬 마음이구나... 허탈하구나...하는 여러 마음의 정보가 읽혀진다. 그리고 왜 이 사람이 이런 페이퍼를 이 시간에 썼는지 이 글을 쓰기 전에 그리고 쓴 다음엔 어떤 마음이었을지 나도 모르게 감정이입이 되곤 한다. 글이라는 게 말과는 달라 일단 적혀진 것은 기록의 의미를 부여하고 확정의 태도를 가지게 된다. 그래서 나중에 생각이 달라져 지우고 수정해도 일단 한번 적혀진 (적 있었던)글은 인상이라는 흔적을 남기게 된다. 그래서일까. 알고 지낸 누군가 아픔을 호소한 글에 나는 필요이상으로 예민하다. 그 사람이 그 글을 쓰고 현실에선 괜찮아 졌다 해도 아니 글을 썼기 때문에 마음이 치유되었다 해도, 내가 받은 인상은 조금이라도 상채기로 발전할 가능성을 지니게 되는 것 같다. 그러다 보면 시간이 흘러 나도 모르게 그 사람의 상처를 내 기억의 방에 저장하게 되는 지도 모르겠다. 같은 일이라도 좋은 일은 나 말고도 같이 기뻐해 줄 사람이 많을 것 같다는 생각. 그래서 나쁜 일에 더 손을 내밀어야 한다는 믿음. 사람은 자기가 상대에게 받고 싶은 것을 행하게 된다는데 이 심리는 역으로 누가 나를 좀 알아봐주었으면 하는 은폐된 욕망의 투사는 아닐까.
가끔 나와 비슷한 성향을 가진 사람들을 종종 보게 된다. 그리고... 그들의 공통점도 발견하게 된다. 그들은 공교롭게도 결혼을 한 적이 있고 아이를 낳거나 기른 적이 있었다. 부모이거나 부모님을 여읜 적이 있었다. 내가 살아가는 방식과 유사하다 느껴지는 이웃들이 같은 책을 읽고 비슷한 감정을 느끼는 광경을 목격할 때 나는 그들이 어떨 때 무엇으로 우울해지는지 더 잘 공감하게 된다. 자세히 말하지 않아도 몇 마디 문장에서 전달되는 삶의 한숨, 아쉬움, 그리움 등이 나를 울리고 웃긴다. 아마 여성으로서 나약한 한 인간에 대한 공감지수가 높아지는 시기는 남편과 시댁이라는 타자의 세상을 견디거나 자신의 몸 안에서 자신과 다른 이물질로서의 생명체를 견딘 후가 아닐까... 특별히 잘나서, 인격이 높아서 혹은 더 인간적이어서가 아니라 생물학적으로 그렇게 생겨먹은 조건을 타고 났기 때문에 고통에의 공감이 수월한 듯하다. 요즘처럼 이러한 내가 원하지 않은 능력이 싫어진 적이 없다. 이것은 형벌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2. 보통의 결혼
알랭 드 보통은 외국인이고 남성이다. 결혼에 대해 글을 썼다면 그건 정이현이었어야 더 공감하지 않았을까, 처음엔 진부한 편견을 가졌다. 놀라웠다. 환경과 문화가 틀리며 아이를 낳아보지 않은 남자였지만 결혼에 대한 통찰은 만고진리처럼 보편적으로 다가왔다. 그러면서도 특별함을 잃지 않아 읽는 내내 전혀 지루하지가 않았다. 매번 느끼는 것이지만 보통은 늘 보통이상이다. 알랭 드 보통은 자신의 이름이 한국어로 특별하지 않고 흔히 볼 수 있어 평범하다는 뜻임을 알고 있을까. 희한하게도 그의 문체는 특별해보이지 않는 익숙함, 친근함을 가졌는데 그렇다고 평범해보이지는 않는다. 특별하면서도 편하게 느껴지는 이중성이 그의 매력이라면 매력일지 모르겠다. 정이현은 반대로 겉으로는 특별해 보이는데 은근히 보통 수준의 이해를 제공했다고 할까. 본의 아니게 자꾸 두 작가를 내 기준으로 비교하게 되는데 정이현이 결혼한 한 여자에 대한 글을 썼다면 어땠을까,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고 나는 이번 보통의 <사랑의 기초 - 한 남자>가 과연 소설인지 의아스럽다. 등장인물인 한 남자 벤의 시선으로 고민이 나열되며 끝에는 늘 작가로 느껴지는 시선이 강하게 결론처럼 배치되어 있다. 심리분야 에세이에서 많이 접하는 형식인데 앞에 환자의 사례를 설명하고 뒤에 저자인 의사가 원인과 해법을 통찰하면서 각장이 하나의 주제로 모아지는 글. 앞의 환자에 해당하는 벤이 소설의 주인공이라면 뒤의 의사 역할이 3인칭 화자 일 것이다. 그런데 결국 두 사람은 모두 보통의 분신으로 느껴졌고 결국 자기 이야기를 서술한 다음 다시 자신이 자신을 평가하는 듯이 보여 이 책은 소설이라기 보다는 자전적 에세이에 가깝다고 느껴진다. 책 끝머리에 정이현과 나눈 대담에서도 보통은 자전적인 의미가 많았다고 했는데 그래서였는지 작가가 생각하는 사랑과 결혼관에 대해 아주 자세한 인터뷰를 읽은 기분도 들었다.
그렇습니다. 이십대 남녀 사이에선 낭만적 사랑을 어떻게 정의하는가가 가장 큰 이슈겠지만, 결혼하고 커리어를 쌓고 아이를 낳아 길러야 하는 사십대가 되면 상황은 훨씬 더 복잡해지지요. 현대사회는 낭만적 사랑이 행복한 결혼생활을 위한 유일한 조건이라는 아이디어를 조장하지만, 원래 결혼은 그 기원에서부터 계급과 제도의 산물이었습니다. 물론 이러한 사실이 이미 널리 알려져 있긴 합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그저 ‘안다고 주장되는 것’일 뿐입니다.
결혼의 곤란한 점은, 해보지 않고서는 결코 알 수도 느낄 수도 경험할 수 없는 것들 투성이라는 겁니다. 결혼한 사람들만이 맛볼 수 있는 기쁘거나 행복한 순간도 가끔은 있지만, 많은 시간 그것은 짐작보다 훨씬 더 씁쓸하고 고달프고 무미건조하고 짐스럽습니다. 결혼은 노동과 마찬가지로 고난과 시련으로 가득하지만, 그 속에서 어떤 기쁨을 찾아내는 것은 각자의 몫이죠. 저는 이런 어려움을 무릅쓰고 결혼생활을 유지하는 부부들을 위한 책, 동지적 연대감을 나눌 수 있는 이야기를 써보고 싶었습니다.
-189p, 정이현 & 알랭 드 보통의 대담 중에서, <사랑의 기초 - 한 남자>
보통의 주장은 결혼생활을 유지하는 평범한 삶이 사실은 엄청나게 특별하며 대단한 일이라는데 있다. 그리하여 결혼생활을 계속 유지하며 그 안에서 행복을 발견하고 사는 것 자체가 용기이고 영웅답다 말한다. 이 결론을 부연하기 위해 보통은 보통 남자가 겪게 되는 결혼의 실상을 낱낱이 그러나 매우 담담하게 전해준다. 그 보통의 남자가 놀라운 것이 아니라 그 남자가 지극히 정상이라는 사실을 설득하는 보통의 시선이 놀랄 만큼 정확하고 깊다. 누구도 태어나 어디에서든 결혼해서 잘 사는 방법 같은 건 공들여 배우지도 않았으면서 너무나 쉽게 사랑만 믿고 결혼한다는 지적은 참 뼈아프다.
결혼을 결심하는 사람들은 대개 상대의 치명적인 단점이나 배우자 집안의 문제점, 혹은 살아가면서 부딪히게 될 여러 갈등들을 하나도 모르면서 결혼을 실행하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사랑으로 충분히 극복할 수 있다는 착각 때문에 만용을 부리는 것이다. 김어준은 연애를 해봐야 자신이 얼마나 찌질한 인간인지 알 수 있다고 했는데 결혼을 해 본 사람은 공통으로 느끼겠지만 결혼 후에라야 자신이 얼마나 자신을 과대평가했는지 비로소 절절히 깨닫게 된다. 배우자에게 실망하는 허탈감 보다는 그 실망을 너무나 자주 느끼는 자신에게 배신감을 느끼게 된다. 다시 보았더니 나는 내가 생각한 만큼 그리 대단한 인격의 소유자도 아니고 배운 대로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도 아닌 것이다. 사람을 미워할 줄 알게 되는 자신을 제대로 발견하는 일이란 언제나 고통스럽다. 자연 이렇게 내 바닥을 보게 만드는 사람으로 모든 화가 돌려지는 것은 어쩌면 자신을 지키기 위한 방어일지도 모른다. 나는 여전히 괜찮고 싶은 사람이며, 멋지고 능력 있는 아내이며, 사람에 대한 예의를 지닌 인간이고 싶기 때문이다.
#3. 서재의 활용
결혼을 실패한 경험이 있는 나로선 내 바닥을 처절하게 알려준 상대에 대해 상당한 부끄러움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사는 동안 그 바닥을 견뎌준 인내심에 고마움도 가지고 있다. 물론 헤어졌기 때문에 생기는 감정이지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과연 지금처럼 내 자신을 돌아볼 여유가 있었을지 의심스럽다. 결혼과 출산, 육아는 여성에 있어 - 남성도 마찬가지지만 -그 전보다 더 많이 자기 이외의 것을 견뎌야 하는 자기 버리기의 연속적 과정이다. 특히 여성은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본능적으로 자기를 버려야 자기가 포함된 가정의 행복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우리 사회에서 학교와 가정에서 결혼하기 전에 이러한 사실을 가르쳐주고 학습하게 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학교에선 공부만 잘하면 일등을 할 수 있고 사회에 나와선 정도의 차이는 존재하지만 능력에 따라 월급을 받는다. 가정에선 귀한 딸과 아들로 자라 희생의 가치를 배우지 못한다. 결혼은 기능과 역할의 장이지 결코 사랑과 낭만을 동시에 실현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아무도 아무에게 강요하지 않는다. ‘그래도’와 ‘그러나’를 가격표처럼 달아 결혼은 사랑하는 사람과 해야 하며 얼마든지 사랑을 유지하며 살수 있다며 자신도 잘 아는 거짓말을 서로들 주고받을 뿐인 것이다.
물론 그런 사람이 없는 건 아니다. 보통도 언급했듯이, 그리고 어떤 분야나 아주 이상적으로 꿈을 실현하는 사람들이 드물게 존재하듯 결혼에서도 두 마리, 세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고 살아가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백년해로하며 부부가 숨을 거둘 때에도 한 침대에서 손을 잡고 세상을 마쳤다는 기사도 있듯 초심을 잃지 않고 진정한 영웅의 모습을 보여주는 이들도 있는 것 같다. 아무리 확률이 희박해도 복권당첨자는 있듯이... 그렇다. 당첨이 되는 사람이 있는 한 복권을 사듯, 사람들은 이상향임을 알아도 결혼을 한다.
또 하나 이 책에서의 놀라운 통찰 중 하나는 예술가의 결혼이다. 그동안 나는 예술 하는 사람들은 굳이 결혼을 해서 가정을 꾸리는 것과 맞지 않다고 괜히 예술가가 아닌 상대 배우자에게 피해만 주는 것이라는 생각이 많았다. 내가 아는 지인들은 대부분 음악 하는 사람, 미술 하는 사람과 결혼해 행복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보통은 반대로 예술에 열정과 낭만을 쏟기 때문에 다른 관심이 없으므로 결혼생활을 더 잘하게 된다고 보았다. 결혼생활에다가 낭만을 쏟으려 하는 욕심을 버리지 못하는 점이 대개 화를 부른다는 것이다. 그렇다. 우리는 평범한 결혼생활이 사실은 이상향에 가깝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아온 것은 아닐까. 결혼생활은 원래 갈등과 파탄이 정상적인 것이고 아무 문제없는 것이 비정상인 것은 아닐까. 그래서인지 나는 요즘 결혼생활을 잘(?)하고 있는 친구들, 이웃들이 새삼 존경스럽다. 분명 결혼이라는 분야에 있어 능력자들이라는 깨달음을 얻는다.
하지만 나는 결혼에 실패한 사람이라고 모두 현명치 못한 삶, 지혜롭지 않은 사람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외려 자신의 한계를 그대로 인정하고 수용한 결과 재능과 가능성을 다른 삶으로 이동시킨 용기 있는 사람이라 믿는다. 사실 그렇게 믿지 않고서는 내 자신을 합리화할 방법은 없다. 다만 이혼한 사람들은 자신이 대단치 않기 때문에 헤어짐을 실행한 것인데 밖에서 보기엔 마치 자신의 대단함을 믿기에 이혼을 한다고 생각하는 점은 아쉽다. 얼마나 잘나서, 라는 편견은 결혼생활을 유지하고 있는 자신들이 사실은 얼마나 대단한지 깨닫지 못해서가 아닐까.
서재 정리를 하면서 약 150권의 책을 처분했다. 덕지덕지 군데군데 내 욕심만 쌓여지는 느낌이었다. 책이 별 쓸모가 없다는 생각, 글이 참 허망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신기한 건 책이 빠져나왔는데도 그다지 공간상의 여유는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처분 한 책들은 대부분 신간이면서 오래 곁에 두고 보려고 했던 책들이었다. 그러면서도 진짜 오래되어 스스로 바래버린 책 - 본격적으로 책을 읽기 시작하기 전의 -은 더 이상 읽지 않아도 그냥 꽂힌 대로 놔두고 싶은 마음... 이것도 궁극엔 무언가를 잃지 않으려는 욕심일 것이다. 어떤 사람은 몇 년간 전화 한통 안했지만 그냥 전화번호부에서 삭제하지 않는다. 삭제하는 순간 그 사람과의 인연이 소멸하는 것으로 생각해서 일까. 나이 들어가는 건 어쩌면 오래된 것을 삭제하지 않고 그냥 놔두는 것들이 많아진다는 의미일지 모른다. 내가 애쓰지 않아도 잊혀질 것들은 알아서 사라지는 것 같다. 아무리 소중한 것들도 시간이 지나면 그런 일이 있었나 없었나 싶기 마련인 것. 그래서 그 잊혀짐이 두려워 거기 그대로 방치하는 것인지 모른다.
가끔은 내 결혼생활을 돌아보는 것이 끔찍하고 창피하다. 달리 처분할 순 없어 서재 한 구석에 꽂아둔 실없이 두껍기만 한 고서와 다를 게 없다. 그 방치된 책을 보면서 다시는 비슷한 책을 사지도 읽지도 않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 책을 잊기 위해서 그냥 둔다. 사람은 혹 자신이 가장 잊고 싶은 것을 가장 기억하고 싶은 존재는 아닐지. 내게 있어 결혼이 딱 그렇다.
덧붙임)
혹시 이웃분 중에 어디 회원가입할 때
기혼에 체크하시고
자녀수에 체크 하시고
직업란에 주부라고 체크하시는 분...
살짜기 알려주시면
제가 읽은 <사랑의 기초: 연인들>과 <사랑의 기초: 한남자>
보내 드릴께요.
이번엔 줄도 안치고 깨끗하게 읽었거든요.
부담은 하나도 안가지셔도 되요.
처분 차원이니까요, 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