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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공감의 형벌

 

굳이 이웃의 글을 읽을 때 이 사람이 여성인지 남성인지를 먼저 인식하며 글을 읽지는 않는다. 언제 읽어도 얼굴이나 목소리를 알 수 없기는 마찬가지지만 처음 글을 접할 땐 그저 글투나 자주 사용된 단어, 문장의 형식, 소재의 종류, 결론의 방향등으로 막연히 성별을 느낄 뿐이다. 가끔은 내가 처음에 예상했던 성별과 반대였던 사람도 있었고 나보다 어릴 것이라 생각했지만 나이가 많은 분도 있었다. 온라인에선 일단 보이는 조건들을 떠나서 오로지 글로만 만나기 때문에 오해는 내가 보고 느낀 만큼의 이해와 같은 말이다.

 

그런데 글을 읽다보면 아, 이 사람은 결국 한 가지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구나 싶을 때가 많다. 어떤 페이퍼를 올려도 어떤 책을 읽어도 결론이 지향하는 지점은 유사성을 지니기 때문이다. 이웃 서재의 글을 읽기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나는 어떤 글에 반응을 보이는지 최근에 알게 되었다. 주로 자신이 쓴 글에 한계를 느끼면서 문학적 재능이나 노력에 좌절하는 글, 인간이 가지는 한계점을 자신으로부터 발견하고는 아파하는 글, 자신의 실패나 실수, 혹은 인간관계에서 오는 갈등으로 자신을 돌아보는 글... 그러니까 일상에서 섬세하고 치밀하게 자신을 관찰하려는 노력에 감정의 동요를 일으키는 듯 하다. 나는 어쩌면 남들의 아픔에서 내 아픔을 발견하려고 이웃의 글을 읽는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어떤 글은 바로 이 분이 결혼을 했고 아이가 몇이고 현재 일상에서 어떤 힘겨움이 있는지 드러나는 글이 있다. 구체적으로 서술하진 않았지만 나는 연속극을 보듯 그의 글을 읽어왔기 때문에 아픔의 종류가 어떤 것인지 지금 어떤 심경일지 어느 정도 예상을 하게 된다. 그럴 땐 조용히 힘내시라 댓글을 남길까 하다가 아는 척이 실례가 될까봐 그냥 애꿎은 추천만 누른다. 그러곤 그가 나의 안 보이는 응원으로 미미하나마 힘을 낼 수 있겠지, 외려 내가 희망을 가지면서 뒤돌아선다. 돌아보면 내게 있어 추천은 응원이고 위로, 자신에 대한 격려였다.

 

글에도 그 사람만이 가진 숨소리와 억양, 체취, 온도가 있어 읽다 보면 이 사람은 이 글을 쓸 때 슬펐구나... 애써 화나는 마음을 억눌렀구나... 들뜬 마음이구나... 허탈하구나...하는 여러 마음의 정보가 읽혀진다. 그리고 왜 이 사람이 이런 페이퍼를 이 시간에 썼는지 이 글을 쓰기 전에 그리고 쓴 다음엔 어떤 마음이었을지 나도 모르게 감정이입이 되곤 한다. 글이라는 게 말과는 달라 일단 적혀진 것은 기록의 의미를 부여하고 확정의 태도를 가지게 된다. 그래서 나중에 생각이 달라져 지우고 수정해도 일단 한번 적혀진 (적 있었던)글은 인상이라는 흔적을 남기게 된다. 그래서일까. 알고 지낸 누군가 아픔을 호소한 글에 나는 필요이상으로 예민하다. 그 사람이 그 글을 쓰고 현실에선 괜찮아 졌다 해도 아니 글을 썼기 때문에 마음이 치유되었다 해도, 내가 받은 인상은 조금이라도 상채기로 발전할 가능성을 지니게 되는 것 같다. 그러다 보면 시간이 흘러 나도 모르게 그 사람의 상처를 내 기억의 방에 저장하게 되는 지도 모르겠다. 같은 일이라도 좋은 일은 나 말고도 같이 기뻐해 줄 사람이 많을 것 같다는 생각. 그래서 나쁜 일에 더 손을 내밀어야 한다는 믿음. 사람은 자기가 상대에게 받고 싶은 것을 행하게 된다는데 이 심리는 역으로 누가 나를 좀 알아봐주었으면 하는 은폐된 욕망의 투사는 아닐까.

 

가끔 나와 비슷한 성향을 가진 사람들을 종종 보게 된다. 그리고... 그들의 공통점도 발견하게 된다. 그들은 공교롭게도 결혼을 한 적이 있고 아이를 낳거나 기른 적이 있었다. 부모이거나 부모님을 여읜 적이 있었다. 내가 살아가는 방식과 유사하다 느껴지는 이웃들이 같은 책을 읽고 비슷한 감정을 느끼는 광경을 목격할 때 나는 그들이 어떨 때 무엇으로 우울해지는지 더 잘 공감하게 된다. 자세히 말하지 않아도 몇 마디 문장에서 전달되는 삶의 한숨, 아쉬움, 그리움 등이 나를 울리고 웃긴다. 아마 여성으로서 나약한 한 인간에 대한 공감지수가 높아지는 시기는 남편과 시댁이라는 타자의 세상을 견디거나 자신의 몸 안에서 자신과 다른 이물질로서의 생명체를 견딘 후가 아닐까... 특별히 잘나서, 인격이 높아서 혹은 더 인간적이어서가 아니라 생물학적으로 그렇게 생겨먹은 조건을 타고 났기 때문에 고통에의 공감이 수월한 듯하다. 요즘처럼 이러한 내가 원하지 않은 능력이 싫어진 적이 없다. 이것은 형벌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2. 보통의 결혼

 

 

알랭 드 보통은 외국인이고 남성이다. 결혼에 대해 글을 썼다면 그건 정이현이었어야 더 공감하지 않았을까, 처음엔 진부한 편견을 가졌다. 놀라웠다. 환경과 문화가 틀리며 아이를 낳아보지 않은 남자였지만 결혼에 대한 통찰은 만고진리처럼 보편적으로 다가왔다. 그러면서도 특별함을 잃지 않아 읽는 내내 전혀 지루하지가 않았다. 매번 느끼는 것이지만 보통은 늘 보통이상이다. 알랭 드 보통은 자신의 이름이 한국어로 특별하지 않고 흔히 볼 수 있어 평범하다는 뜻임을 알고 있을까. 희한하게도 그의 문체는 특별해보이지 않는 익숙함, 친근함을 가졌는데 그렇다고 평범해보이지는 않는다. 특별하면서도 편하게 느껴지는 이중성이 그의 매력이라면 매력일지 모르겠다. 정이현은 반대로 겉으로는 특별해 보이는데 은근히 보통 수준의 이해를 제공했다고 할까. 본의 아니게 자꾸 두 작가를 내 기준으로 비교하게 되는데 정이현이 결혼한 한 여자에 대한 글을 썼다면 어땠을까,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고 나는 이번 보통의 <사랑의 기초 - 한 남자>가 과연 소설인지 의아스럽다. 등장인물인 한 남자 벤의 시선으로 고민이 나열되며 끝에는 늘 작가로 느껴지는 시선이 강하게 결론처럼 배치되어 있다. 심리분야 에세이에서 많이 접하는 형식인데 앞에 환자의 사례를 설명하고 뒤에 저자인 의사가 원인과 해법을 통찰하면서 각장이 하나의 주제로 모아지는 글. 앞의 환자에 해당하는 벤이 소설의 주인공이라면 뒤의 의사 역할이 3인칭 화자 일 것이다. 그런데 결국 두 사람은 모두 보통의 분신으로 느껴졌고 결국 자기 이야기를 서술한 다음 다시 자신이 자신을 평가하는 듯이 보여 이 책은 소설이라기 보다는 자전적 에세이에 가깝다고 느껴진다. 책 끝머리에 정이현과 나눈 대담에서도 보통은 자전적인 의미가 많았다고 했는데 그래서였는지 작가가 생각하는 사랑과 결혼관에 대해 아주 자세한 인터뷰를 읽은 기분도 들었다.

 

그렇습니다. 이십대 남녀 사이에선 낭만적 사랑을 어떻게 정의하는가가 가장 큰 이슈겠지만, 결혼하고 커리어를 쌓고 아이를 낳아 길러야 하는 사십대가 되면 상황은 훨씬 더 복잡해지지요. 현대사회는 낭만적 사랑이 행복한 결혼생활을 위한 유일한 조건이라는 아이디어를 조장하지만, 원래 결혼은 그 기원에서부터 계급과 제도의 산물이었습니다. 물론 이러한 사실이 이미 널리 알려져 있긴 합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그저 ‘안다고 주장되는 것’일 뿐입니다.

 

 

결혼의 곤란한 점은, 해보지 않고서는 결코 알 수도 느낄 수도 경험할 수 없는 것들 투성이라는 겁니다. 결혼한 사람들만이 맛볼 수 있는 기쁘거나 행복한 순간도 가끔은 있지만, 많은 시간 그것은 짐작보다 훨씬 더 씁쓸하고 고달프고 무미건조하고 짐스럽습니다. 결혼은 노동과 마찬가지로 고난과 시련으로 가득하지만, 그 속에서 어떤 기쁨을 찾아내는 것은 각자의 몫이죠. 저는 이런 어려움을 무릅쓰고 결혼생활을 유지하는 부부들을 위한 책, 동지적 연대감을 나눌 수 있는 이야기를 써보고 싶었습니다.

-189p, 정이현 & 알랭 드 보통의 대담 중에서, <사랑의 기초 - 한 남자>

 

보통의 주장은 결혼생활을 유지하는 평범한 삶이 사실은 엄청나게 특별하며 대단한 일이라는데 있다. 그리하여 결혼생활을 계속 유지하며 그 안에서 행복을 발견하고 사는 것 자체가 용기이고 영웅답다 말한다. 이 결론을 부연하기 위해 보통은 보통 남자가 겪게 되는 결혼의 실상을 낱낱이 그러나 매우 담담하게 전해준다. 그 보통의 남자가 놀라운 것이 아니라 그 남자가 지극히 정상이라는 사실을 설득하는 보통의 시선이 놀랄 만큼 정확하고 깊다. 누구도 태어나 어디에서든 결혼해서 잘 사는 방법 같은 건 공들여 배우지도 않았으면서 너무나 쉽게 사랑만 믿고 결혼한다는 지적은 참 뼈아프다.

 

결혼을 결심하는 사람들은 대개 상대의 치명적인 단점이나 배우자 집안의 문제점, 혹은 살아가면서 부딪히게 될 여러 갈등들을 하나도 모르면서 결혼을 실행하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사랑으로 충분히 극복할 수 있다는 착각 때문에 만용을 부리는 것이다. 김어준은 연애를 해봐야 자신이 얼마나 찌질한 인간인지 알 수 있다고 했는데 결혼을 해 본 사람은 공통으로 느끼겠지만 결혼 후에라야 자신이 얼마나 자신을 과대평가했는지 비로소 절절히 깨닫게 된다. 배우자에게 실망하는 허탈감 보다는 그 실망을 너무나 자주 느끼는 자신에게 배신감을 느끼게 된다. 다시 보았더니 나는 내가 생각한 만큼 그리 대단한 인격의 소유자도 아니고 배운 대로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도 아닌 것이다. 사람을 미워할 줄 알게 되는 자신을 제대로 발견하는 일이란 언제나 고통스럽다. 자연 이렇게 내 바닥을 보게 만드는 사람으로 모든 화가 돌려지는 것은 어쩌면 자신을 지키기 위한 방어일지도 모른다. 나는 여전히 괜찮고 싶은 사람이며, 멋지고 능력 있는 아내이며, 사람에 대한 예의를 지닌 인간이고 싶기 때문이다.


 

#3. 서재의 활용

 

결혼을 실패한 경험이 있는 나로선 내 바닥을 처절하게 알려준 상대에 대해 상당한 부끄러움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사는 동안 그 바닥을 견뎌준 인내심에 고마움도 가지고 있다. 물론 헤어졌기 때문에 생기는 감정이지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과연 지금처럼 내 자신을 돌아볼 여유가 있었을지 의심스럽다. 결혼과 출산, 육아는 여성에 있어 - 남성도 마찬가지지만 -그 전보다 더 많이 자기 이외의 것을 견뎌야 하는 자기 버리기의 연속적 과정이다. 특히 여성은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본능적으로 자기를 버려야 자기가 포함된 가정의 행복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우리 사회에서 학교와 가정에서 결혼하기 전에 이러한 사실을 가르쳐주고 학습하게 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학교에선 공부만 잘하면 일등을 할 수 있고 사회에 나와선 정도의 차이는 존재하지만 능력에 따라 월급을 받는다. 가정에선 귀한 딸과 아들로 자라 희생의 가치를 배우지 못한다. 결혼은 기능과 역할의 장이지 결코 사랑과 낭만을 동시에 실현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아무도 아무에게 강요하지 않는다. ‘그래도’와 ‘그러나’를 가격표처럼 달아 결혼은 사랑하는 사람과 해야 하며 얼마든지 사랑을 유지하며 살수 있다며 자신도 잘 아는 거짓말을 서로들 주고받을 뿐인 것이다.

 

물론 그런 사람이 없는 건 아니다. 보통도 언급했듯이, 그리고 어떤 분야나 아주 이상적으로 꿈을 실현하는 사람들이 드물게 존재하듯 결혼에서도 두 마리, 세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고 살아가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백년해로하며 부부가 숨을 거둘 때에도 한 침대에서 손을 잡고 세상을 마쳤다는 기사도 있듯 초심을 잃지 않고 진정한 영웅의 모습을 보여주는 이들도 있는 것 같다. 아무리 확률이 희박해도 복권당첨자는 있듯이... 그렇다. 당첨이 되는 사람이 있는 한 복권을 사듯, 사람들은 이상향임을 알아도 결혼을 한다.

 

또 하나 이 책에서의 놀라운 통찰 중 하나는 예술가의 결혼이다. 그동안 나는 예술 하는 사람들은 굳이 결혼을 해서 가정을 꾸리는 것과 맞지 않다고 괜히 예술가가 아닌 상대 배우자에게 피해만 주는 것이라는 생각이 많았다. 내가 아는 지인들은 대부분 음악 하는 사람, 미술 하는 사람과 결혼해 행복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보통은 반대로 예술에 열정과 낭만을 쏟기 때문에 다른 관심이 없으므로 결혼생활을 더 잘하게 된다고 보았다. 결혼생활에다가 낭만을 쏟으려 하는 욕심을 버리지 못하는 점이 대개 화를 부른다는 것이다. 그렇다. 우리는 평범한 결혼생활이 사실은 이상향에 가깝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아온 것은 아닐까. 결혼생활은 원래 갈등과 파탄이 정상적인 것이고 아무 문제없는 것이 비정상인 것은 아닐까. 그래서인지 나는 요즘 결혼생활을 잘(?)하고 있는 친구들, 이웃들이 새삼 존경스럽다. 분명 결혼이라는 분야에 있어 능력자들이라는 깨달음을 얻는다.

 

하지만 나는 결혼에 실패한 사람이라고 모두 현명치 못한 삶, 지혜롭지 않은 사람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외려 자신의 한계를 그대로 인정하고 수용한 결과 재능과 가능성을 다른 삶으로 이동시킨 용기 있는 사람이라 믿는다. 사실 그렇게 믿지 않고서는 내 자신을 합리화할 방법은 없다. 다만 이혼한 사람들은 자신이 대단치 않기 때문에 헤어짐을 실행한 것인데 밖에서 보기엔 마치 자신의 대단함을 믿기에 이혼을 한다고 생각하는 점은 아쉽다. 얼마나 잘나서, 라는 편견은 결혼생활을 유지하고 있는 자신들이 사실은 얼마나 대단한지 깨닫지 못해서가 아닐까.

 

서재 정리를 하면서 약 150권의 책을 처분했다. 덕지덕지 군데군데 내 욕심만 쌓여지는 느낌이었다. 책이 별 쓸모가 없다는 생각, 글이 참 허망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신기한 건 책이 빠져나왔는데도 그다지 공간상의 여유는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처분 한 책들은 대부분 신간이면서 오래 곁에 두고 보려고 했던 책들이었다. 그러면서도 진짜 오래되어 스스로 바래버린 책 - 본격적으로 책을 읽기 시작하기 전의 -은 더 이상 읽지 않아도 그냥 꽂힌 대로 놔두고 싶은 마음... 이것도 궁극엔 무언가를 잃지 않으려는 욕심일 것이다. 어떤 사람은 몇 년간 전화 한통 안했지만 그냥 전화번호부에서 삭제하지 않는다. 삭제하는 순간 그 사람과의 인연이 소멸하는 것으로 생각해서 일까. 나이 들어가는 건 어쩌면 오래된 것을 삭제하지 않고 그냥 놔두는 것들이 많아진다는 의미일지 모른다. 내가 애쓰지 않아도 잊혀질 것들은 알아서 사라지는 것 같다. 아무리 소중한 것들도 시간이 지나면 그런 일이 있었나 없었나 싶기 마련인 것. 그래서 그 잊혀짐이 두려워 거기 그대로 방치하는 것인지 모른다.

 

가끔은 내 결혼생활을 돌아보는 것이 끔찍하고 창피하다. 달리 처분할 순 없어 서재 한 구석에 꽂아둔 실없이 두껍기만 한 고서와 다를 게 없다. 그 방치된 책을 보면서 다시는 비슷한 책을 사지도 읽지도 않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 책을 잊기 위해서 그냥 둔다. 사람은 혹 자신이 가장 잊고 싶은 것을 가장 기억하고 싶은 존재는 아닐지. 내게 있어 결혼이 딱 그렇다.

 

 

 

덧붙임)

혹시 이웃분 중에 어디 회원가입할 때

기혼에 체크하시고

자녀수에 체크 하시고

직업란에 주부라고 체크하시는 분...

살짜기 알려주시면

제가 읽은 <사랑의 기초: 연인들>과 <사랑의 기초: 한남자>

보내 드릴께요.

이번엔 줄도 안치고 깨끗하게 읽었거든요.

부담은 하나도 안가지셔도 되요.

처분 차원이니까요,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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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2-06-12 1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늘 그렇게 해요 ㅋㅋㅋ
그래서 사람들이 늘 묻지요.
"아줌마시네요?" 하고.
그러면 저는 늘 대꾸해요.
"아저씨인데요?" 하고.

^^;;;;;

아저씨이지만 어찌 보면 아줌마처럼 살아가느라...-_-;;;;
저는 아저씨가 쓰는 글은 참 재미없다고 느끼고
아줌마가 쓰는 글만 재미있다고 느끼는...
그런 아저씨입니다 @.@

..

보통, 이라 하는 그분은 마음이 열렸기 때문에
그처럼 이야기할 수 있으리라 느껴요.

마음이 열리지 않으면 혼인도 삶도 예술도
옳게 바라보지 못하리라 생각해요.

아이리시스 2012-06-13 16: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는 기혼도 아니고 자녀도 없고 주부는 아니지만 방금 김치김밥 말았는데 책 못주십니까, 한사람님?(이거 농담)
있죠, 아..이건 비밀로!

2012-06-13 16: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책읽는나무 2012-06-14 17: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처음 인사드리네요.^^
글이 좋아 두 세 번 반복해서 읽었네요.

읽다보니 문득 책 욕심이 생겨서요.
혹시 신청자가 없다면 제가 받아도 될까요?
전 기혼자이고,애도 셋(다른 신청자가 있다면 아이들 수로 우열을 나눠 주세요.ㅋ)이고,주부에요.
모두 다 해당되기에 손을 들어봅니다.^^

2012-06-14 17: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6-14 13: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1. 허공

소설에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하는 내 가슴에 무슨 장애라도 생긴 것일까. 재미난 소설이 없어진 것인지 내가 재미를 느끼지 못하는 것인지 소설과 거리가 멀어지기 시작한 건 대략 일 년 정도 된 듯하다. 소설을 읽을 만큼 읽었다거나 소설보다 재미난 책을 발견해서 일어난 현상은 아닌데 어쩐지 다시 소설이 좋아지질 않는다. 내가 바라는 건 지금의 소설들 보다는 더 중량감 있는 예를 들면 텍스트에 대한 어느 정도의 무게감일지 모르겠다. 이상하게도 최근에 집어든 한국 소설(장편)들은 하나같이 읽고 나면 허공에 증발해버리는 느낌이다.

 

 

#2. 이동

정이현의 <사랑의 기초>는 마치 비행기 안에서 소설을 읽는 느낌이었다. 비행기 안에서 영화를 보면 다른 곳에서 본 것보다 기억이 덜 나곤 했다. 집중과 몰입에 관한 문제만은 아니고 내가 움직이면서 - 무언가에 의해 이동하고 있다는 걸 인식하면서 - 글이나 영상을 보고 있기에 아무래도 정보 수용에 있어 정지해 있는 상태와는 다른 것이 아닐까, 막연히 추정해 본다. 이 책은 가만히 앉아서 보는데도 그런 느낌이 들었다. 어디 들어는 보았지만 다시 갈 일은 없었던 의외의 장소, 그곳으로 이동 중인 상태에서 그 시간을 견디기 위해 펼쳐든 책. 책의 내용은 딱 내가 예상하는 그만큼이었고 내가 기대했던 건 감동이나 놀라움 같은 것도 아니었으면서 나는 굳이 기대한 만큼이 아니라는 말을 하고 싶었다. 그러니까 나는 기대를 하는 마음도 하지 않는 마음도 동시에 갖고 있었던 것인데 책을 덮고 나선 기대를 안했다고도 기대를 했다고도 말하고 싶지 않은 자신을 발견했다고 할까. 그저 다른 사람들은 기대한 만큼은 아니다, 하는 말을 더 이해하지 않을까 하여 그 말을 적는 것을 선택했던 것 같다.

 

 

#3. 거리

한 권의 책을 통해 작가의 생각을 엿보고 그에 비친 내 자신을 발견하기란 그다지 즐거운 일이 아닐 수 있다. 왜 기분이 좋지 않은지 새삼 내 상황을 돌아보는 계기가 될 수 있다. 내가 느낀 건 작가는 이 책을 쓸 때 그다지 기분이 좋지 않았다는 예감이다. 소설가가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지 남의 이야기를 하는지 독자는 알지 못한다. 그런데 이 소설은 확실히 남 이야기를 전해주는 것으로, 정말로 남들의 이야기로만 느껴졌다. 소설가가 서사의 텍스트와 일부러 거리감을 유지하려하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거리는 유지된 채로 시작을 했던 것은 아닐까 싶다. 자신은 다 지나온 생의 터널일수도 있고 원래 소설가가 말하는 방식이 그럴 수 있다. 하지만 좀 더 날카롭거나 좀 더 구체적일 순 없었을까.

 

 

#4. 두려움

또 내가 느낀 건 작가는 이런 이야기를 우리가 원하는 만큼 쓰고 싶어 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잘 하지 못하는 것과 별로 하고 싶지 않은 이야기를 잘 하는 것의 차이를 구별할 능력이 독자에겐 부족하다. 그야말로 작가와 같은 성별을 가진 동년배인 독자로서의 직관은 이 책에 대한 무감의 요인을 여러 상황으로 확산하도록 유도한다. 수요에 부응하는 공급방식으로서의 사랑 이야기. 얼마간 짜 맞추어진 인위적 설정으로서의 연애 이야기. 물론, (검증되지 않은 지극히 주관적인 판단으로서의)방식 때문에 이 책이 흥미롭지 않았던 것은 아닐 것이다. 가장 중요한 건 독자인 내가 사랑과 연애를 바라보는 시선이 상당부분 위치를 이동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마음 한 구석 아직도, 이제 더 이상 연애과정을 소재로 사랑을 이야기하는 소설이 나를 울리거나 웃기지 못함을 깨닫고 싶지는 않다. 어쩌면 그게 두려워 더욱 이런 소설을 멀리하는 것인지도 모르지만.

 

 

#5. 택시

가끔, 나의 사랑은 이제 끝난 것일까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있다. 다시 누군가를 만나 연애 비슷한 시기를 보낼 수 있을까, 억지로 자문해보면 대답은 언제나 원치 않는다 쪽이었다. 언젠가 리뷰에도 썼지만 현재로선 이성이 별로 필요치 않는 삶을 살고 있다. 아마 살면서 생각이 바뀌는 시기가 올 수는 있겠지만 나는 사실 남자가 없는 삶이 너무나 편하고 안온하다. 가만히 돌이켜 보면 나는 애초부터 한 남자와 가정을 꾸려 그 안에서 무언가 희생하며 행복을 만들어가는 현명한 주부의 인생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었던 성격이었던 듯 하다. 연애만 신나게 하고 절대 결혼 같은 건 하지 말았어야 했다. 정상적인 삶, 평범한 삶이라는 속세의 주류 가치에 당연히 나도 편입되어야 하는 줄, 그래야 남들처럼 행복해지는 줄 알았던 시기가 있었다. 대략 이십대 후반이었던 것 같다. 그때 양단간의 결정을 해야 하는 순간이 꼭 온다. 이 사람이 운명적 사랑이라는 착각은 제도권에 편입하려는 꽤 정당한 방식으로서 무리없이 행해진다. 마침 택시를 잡으려 했고 그때 지나가던 택시를 타게 되는 것이 결혼이라는 무책임한 이벤트임을 사람들은 결혼을 하고나서야 깨달을 수 있지만.

 

 

#6. 포물선 방정식

이 책은 그렇게 택시를 타고 가다가 목적지 까지 가지 못하고 내리게 된 사람들의 이야기였다. 작가는 그 순간을 허공에서 포물선이 겹쳐지는 기적 같은 일이라 말했다. 수학을 잘하셨을까. 포물선이 겹쳐지는 그림이 어느 우주에서 일어나는 사랑의 현상학적 그래프인지 나는 알 수 없었다. 차라리 주가 동향 실시간 그래프라면 와 닿았을까... 그러고 보니 고2때인가 포물선의 방정식으로 수학 경시대회 때 상을 탔던 기억은 난다.

 

 

다른 곳에서 발생해 잠시 겹쳐졌던 두 개의 포물선은 이제 다시 제각각의 완만한 곡선을 그려갈 것이다. 그렇다고, 허공에서 포개졌던 한순간이 기적이 아니었다고는 말할 수 없으리라.    -209p

 

 

#7. 불신

불행히도 이제 나는 사랑했던 사람을 한때나마 내가 누릴 수 있었던 기적이라 생각지 않는다. 나는 대부분 사랑지상주의와 사랑을 한 편인데 그들은 모두 사랑을 믿는다고 말하곤 했다. 나는 반대로 이 세상에서 사랑만큼 믿을 수 없는 것도 드물다 생각한다. 사랑도 결국 사람이 하는 일이고 사람은 믿을 수 없기 때문이다. 신은 선과 악을 택할 수 있는 인간을 만들었을 뿐이지 악인을 만든 것이 아니듯 사랑도 믿을 수 있는 사랑과 믿을 수 없는 사랑이 생겨날 뿐인 것이다. 선과 악 앞에서 그것을 택할 자유의지가 주어진 것이지 악인은 따로 있지 않다. 절대적 사랑이 따로 있지 않은 이치이다. 바꾸어 말하면 사랑은 무조건 대단한 힘을 가지고 있다고 여기지 않으며 다만 그것을 가능케 하는 사람들이 다양할 뿐인 것이다. 나는 나처럼 사랑에 대해 냉소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결코 사랑이 부족한 사람이라 생각하진 않는다. 사랑을 선호해야지만 사랑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더 정확하거나 옳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돌아보면 화끈 거리는 것. 그건 바로 사랑은 어떠 해야 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하고, 사랑한다면 이래야 한다는 통속과 억압이 실은 사랑을 바로보지 못하게 하는 우리 일상들은 아니었을까... 요즘은 그런 생각이 많다.

 

 

#8. 추억

그 와중에 그래도 이 책 덕분에 내가 잊고 있었던 감각은 운 좋게도 회상의 절차를 통해 어렵게 복원되었다. 처음 손을 잡았던 날이 기억나는 사람. 손을 처음으로 잡게 되었을 때 미세하게 그러나 점점 압도적으로 떨려오던 그 느낌. 그 순간이 추억으로 남은 사람은 두 사람이다. 한명은 가장 오래 사랑했던 남자, 다음은 가장 마지막에 사랑한 남자. 나머진 언제 어떻게 손을 잡았는지 하나도 기억이 나질 않았다. 그러니까 이 책이 나를 데려간 지점은 아마 남자와의 사랑이 시작되던 장소, 그 주변 쯤 되는 것 같다. 손을 잡은 곳은 모두 차 안이었다. 그러므로 내 사랑의 기초는 차안에서 쌓여진 것이다. 나는 왼손이었고 그들은 모두 오른 손이었다. 정확히 기억하는 이유는 내 위치가 모두 조수석이었기에...

 

 

준호가 가만히 민아의 손을 잡았다. 그들은 왼손과 오른손을 잡은 채 밤길을 걸었다. 누가 왼손이고 누가 오른손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별은 높이 반짝이고 봄꽃들이 뿜어내는 향내는 아스라했다. 귓가에 종소리가 잘랑거리는 밤, 저 우주 만물사이에 작동하는 오묘한 섭리 앞에 무릎 꿇고 고해성사를 바치고 싶어지는 밤, 봄밤이었다.   -111p

 

 

#9. 온도

그런데 이 책이 가지는 한계는 손을 잡았던 그 이전이나 그 이후로는 나를 데려가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긴 더 이상 바라지 않았기에 더 많은 것을 느끼지 못했을지 모르겠다. 손을 잡았다는 것은 앞으로 다른 것도 잡겠다는 의지의 표현일 것이다. 손을 잡을 때 불행히도 언제 손을 놓게 될지 아무도 모른다. 더 불행한건 아니 그나마 다행인건 도대체 언제부터 손을 잡지 않았는지 기억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마지막 전화가 언제였는지 점점 희미해져간다. 사람은 고통스러웠던 기억을 자동 정리해 가는 훌륭한 구석이 있다. 핸드폰 정리를 하면서 전화번호부를 정리했다. 사랑을 하지 않는 사람의 전화기는 뜨거워질 일이 없다. 전화기의 온도와 그 사람이 하고 있는 사랑의 온도는 비례하지 않을까... 서늘하기만 한 내 전화기의 온도를 측정해준 책. 이 책은 사랑의 기초체온을 측정해 준다.

 

 

#10. 소설 같은 사랑

뒤늦게 영화 <은교>를 보았다. 한마디로 소설의 반도 보여주지 못했다고 느꼈다. 소설에선 노시인 이적요가 열일곱의 소녀에게 새삼스런 동요를 느끼게 되는 과정과 설명이 더 복잡했다. 여성이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싱그러운 육체를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한 부러움, 그리고 그에 따르는 시인의 상대적 패배감이 그냥 작가 박범신 자체로 느껴질 정도였다. 캐릭터만 비교하자면 소설에선 이적요가 더 입체적이었고 영화에선 은교가 가장 빛나보였다. 영화에선 서지우도 악하고 나약한 구석만 보여준 것 같아 공감가지 않았다. 소설에서 나는 천재적 재능을 가지지 않은 작가로서의 좌절감에 상당부분 공감했었고 그 열등감을 건드리는 이적요의 시선이 가끔은 과하다고 그래서 서지우가 반감을 가질 만한 개연성이 충분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소설에선 이적요의 사후에 은교가 자신의 앞날을 암시하는 부분이 있다. 시인이 혼자 죽을 때 더없이 쓸쓸해지던 슬픔, 외로움, 무상함 같은 건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었다. 영화는 은교의 안녕이라는 인사가 마지막이다. 은교는 어디론가 가겠지만 시인은 누워서 마지막을 맞이한다는 의미였을까. 젊음은 살아야 하기에 도망가는 듯 했고 늙음은 죽어야 하기에 머물러 있는 듯 했다. 왜 화가 나는 것인지 그건 헤어짐도 시작도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만 들었다. 그렇지만 소설이나 영화 같은 사랑은 이럴 것이다에 꽤 잘 어울려 보였다.

 

 

 < 은교 - 2012 / 감독 정지우, 출연 박해일 김무열 김고은>

 

 

#11. 진실

사랑을 한다고 다 사랑하는 만큼 자신의 사랑을 실행하고 살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훗날에 사랑했었다고들 말한다. 아니 자신의 사랑은 대부분 확신에 찬 상태로 어떠한 사랑이었다 곧잘 단정하곤 한다. 사랑을 믿지 않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사랑은 먼 훗날에 얼마든지 의도대로 상황에 따라 자기 요구에 맞추어 각색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각색은 사랑의 의미를 부여하고자 할 때 일어나며 얼마든지 교정이 가능하다. 그리고 그 교정은 어떤 방향으로 이루어질지 교정이 있기 전까진 자신조차 알 수 없다. 인간은 자신이 실제 느끼고 체험했던 시간의 경험보다는 그것을 기억하고 훗날 평가한 결과 치에 더 비중과 의미를 두기 때문이다. 내 ‘경험자아’는 최고의 사랑이었지만 내 ‘기억자아’는 최악의 이별로 분류할 수 있다. 사랑을 한 사람도 한 시기도 한 기간도 달라지지 않았지만 내 사랑은 내 기억에 의해 다른 모습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후에 남는 한 사람이 있다면 그건 아마 내 경험자아가 이끄는 진실의 얼굴은 아닐까...

 

#12. 보통

아마 생의 시기상으로 알랭 드 보통이 이야기 하는 사랑에 더 가깝기 때문일까. 사실 정이현의 소설보다는 보통의 글이 더 와 닿기는 했다. 주제를 바꾸어서 쓰는 것도 나쁘지 않았을 터인데 왜 정이현은 연애를 왜 보통은 결혼 후를 사랑과 연결 지으려 했을까. 의도하진 않았지만 독자로서 어쩔 수 없이 두 소설을 비교하게 된다. 미안하지만 텍스트의 밀착도면에서 보통이 더 가깝게 느껴졌다. 헤어지게 되는 글, 헤어지는 순간, 그리고 그 이후의 이야기는 약간의 낭만과 적당한 청승이 숨어 있어도 괜찮지 않았을까 해서이다. ‘실연의 달콤함’이라는 수사가 있듯이 그것은 혼자서만 들쳐보고 몰래 느낄 수 있는 감정으로서 족할 것이다. 얼마 전 가수 김범수는 슬픈 발라드를 불러야 하는데 지금 애인과 행복한 상태라 도무지 슬픈 감정이 나오지 않아 가짜로 이별선언을 하고 강제로 이별의 상황을 유발한 시기에 녹음을 했다는 말을 들었다. 백지영도 한창 새로운 애인이 생겨 설레이던 중에 슬픈 발라드를 불렀더니 반응이 예전 같지 않았다고 했다. 소설도 그럴 수 있다면 작가는 아마 지나간 이별에의 고통 같은 건 충분히 덮을 수 있을 만큼 지금, 행복한 건 아닐까...

 

 

#13. 욕망

아니면 세대가 바뀌어서, 다시 말해 내가 한 세대를 지나와 지금의 젊은 세대와는 격차가 벌어졌기 때문에 민아-준호 커플의 심드렁한 연애를 더욱 심드렁하게 보는 것일까. 예를 들어 90년대 학번들의 평범한 이십대의 사랑을 구체화하여 보여준 김경욱의 소설 <동화처럼>이 떠오른다. 김경욱의 경우는 이야기 자체는 큰 재미가 없어도 공감하지 못할 거리감은 없었던 것 같다. 그래서 이 시대의 많은 아줌마들은 지극히 현실적인 소설에선 만족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김선아나 김하늘이 등장하는 로맨틱 코미디에 한 가닥 대리만족의 감흥을 기대는 것은 아닐까 싶다. 민아-준호가 너무 평범해서 지극히 비현실적으로 다가오는 이 아이러니를 어떻게 다른 것으로 채울까 싶었는데 다행히 TV에선 아직도 송승헌이나 소지섭, 심지어는 장동건까지 여전한 척 폼을 잡고 있지 않은가. 내가 사랑하는 건 어쩌면 그들이 제시하는 사랑의 방식을 철저히 비웃으면서도 한편으론 그 우스움을 발견하고 같이 웃어보려는 여인의 기초적인 욕망은 아닐지. 가령 '저 우주 만물사이에 작동하는 오묘한 섭리 앞에 무릎 꿇고 고해성사를 바치고 싶어지는' 어느 봄밤, 흐드러진 벚꽃나무 아래에서 그들이 손을 잡은 다음에 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하여 -  

 

 

 

 < 신사의 품격 - 5회 예고편 中 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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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2-06-10 08: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중노래는 '좋은 마음'으로 '좋은 사랑'이나 '좋은 삶'을 부르지 않기 일쑤예요. 다들 '슬프다는 헤어짐'만 노래로 부르곤 해요. 가수 스스로 그런 마음에 젖으려 하고, 또 이런 노래를 듣는 사람도 이런 느낌에 젖겠지요.

책도 영화도 대중노래도 모두... 오늘날 우리들을 어디로 이끌려 하나 궁금하곤 해요.

사랑이란 늘 내 마음속에서 좋은 씨앗으로 내가 깨우기를 기다릴 텐데, 거의 모든 사람들이 마음속 씨앗을 깨우려 하지 않고, 겉치레 입발림으로 '사랑'이란 낱말만 읊는데, 하나같이 '소유'나 '성관계'나 '자기위안'에 그치지 않느냐 싶어요.

마녀고양이 2012-06-10 16: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는 나처럼 사랑에 대해 냉소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결코 사랑이 부족한 사람이라 생각하진 않는다..

저는 이 구절이 참 좋아요, 네, 그런거 있잖아요,
어떤 사람은 타인이 우는 것을 못 보는 사람이요. 저도 좀 그렇거든요. 그런데 그게, 실은,
자신이 감정 표현이 서툴러서, 자신의 감정 표현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도 있네요.

저는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진짜 누군가를 그대로 사랑하고 받아들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것은..... 남자가 되든, 여자가 되든, 아이든, 노인이든, 더이상 대상은 문제시되지 않더군요.
 

 

 

 

슬프다.

지난 한주 동안 그래왔고 지금도 그렇다.

 

 

나는 잘하기도 했고 잘못하기도 했다.

때론 옳았지만 때때로 그르기도 했다.

가끔 논리적이었지만 자주 편파적이기도 했다.

문득 문을 열고 싶다가도 일어나면 닫아 버리고 싶기도 했다.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지만 무슨 말이든 해야 할 것 같았다.

이웃에 도움이 되고 싶었지만 나조차도 도우지 못했다.

 

 

나는 삼성 근로자의 사망에 분노하지 않은 무심한 시민이며,

임수경의 막말에도 흥분하지 않는 냉소적 유권자이며,

어느 유명한 작가의 타계 소식일랑 궁금하지도 않은 독자이다.

지난 한주 동안 내겐

그저 나와 이야기를 나누던 이웃을 동시에 연달아 잃어버린 슬픔만 중요했다.

 

그들이 오늘밤 혹시 나와 같이 슬프다면 나는 그들과 함께 울어 드리고 싶다.

 

그냥 아무 말 않고 마주앉아 슬며시 미소 지어드릴테다.

괜찮다고, 정말이지 괜찮다고 말해주겠지.

나는 괜찮지 않다고

당신들이 없으니

어쩐지 가슴에 구멍이라도 난 것 같다고

휘리리 그리로 무엇이 지나갔는지 당신들은 알고 계신지

눈껌뻑이며  고집스레 물어 볼테다.

 

 

 

뚝.

하고 떨어지는 우리들 이야기.

 

툭.

하고 끊어지는 작은 인연들.

 

슬픔까지 속이며 이깟 글을 쓰고 싶진 않았다.

 

 

 

 

 

 

덧붙임)

 

저를 이웃으로 삼아 주신 분에게만 넋두리 하는 글입니다.

이웃분들 중 십오프로 정도만 공개되있죠...

하지만 오늘은 85프로 이웃분들에게도 응석을 부리고 싶네요.

양해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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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2-06-09 06: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삼성 회사 일꾼 죽음'에는 딱히 눈길을 두지 않아요.
사람들이 자꾸 '삼성 대기업' 얘기만 들먹이는데,
죽는 사람은 삼성뿐 아니라 엘지도 에스케이도 똑같아요.
작은 공장 사람도 죽고, 시골 흙일꾼 할매 할배도 죽어요.
그런데 언론이든 책이든, 늘 '서울 이야기'만 다루는데다
'대기업 이야기'만 다뤄요.

삼성 일꾼이 안타깝지 않다는 소리가 아니라,
이분들 삶 또한 슬프며 안타까운데,
이분들 죽음을 다룬다는 사람들이
지나치게 '하나만 바라보고 하나를 뺀 모든 삶'은 아예 눈을 감으니
더없이 안타깝구나 싶어요.

'임수경' 님 이야기에 눈길을 두기보다는
임길택 님 동화책 <수경이>를 읽어야
우리 삶을 사랑스레 가다듬을 수 있으리라 믿어요.

하루는 지나가고
하루는 다시 열립니다.

카스피 2012-06-09 18: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사람님 기운내시고 좋은 주말 보내세용^^

가연 2012-06-09 19: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휴ㅠ 지금은 좀 괜찮으시려나요
 

 

#1. 섞여 버린 이야기

 

아이가 수학여행을 가는 바람에 이 기회를 놓치기 싫어 어젠 아침 댓바람부터 나가 놀았습니다. 아이가 온 후에도 밥하기 싫어서 다시 나갔네요. 여행은 아이가 다녀왔는데 그 후유증은 제게로 돌아오는 듯... 그나저나 날씨는 여름인데 수박은 왜 이리 비싼가요? 한 통에 이 삼천 원 하던 시절이 있었나 없었나 싶더군요.

 

저는 혼자 영화보고 서점가고 커피 마시고 하는 걸 좋아해서 영화를 이어서 두 편을 보았는데 하루에 두 편 보는 것이 썩 좋은 방법이 아닌 것 같네요. 작품당 여운이 없어요. 그러다 보니 어느 쪽도 감동을 제대로 받지 못한 것 같습니다. <돈의 맛>은 예상대로 쓸쓸한 맛이었고 <내 아내의 모든 것>은 아주 오래전 <마누라 죽이기>가 생각나더군요. 그때 최진실 참 귀엽고 예뻤었는데...

 

<돈의 맛>에서 소름끼쳤던 장면은 하녀이면서 윤회장(백윤식)의 정부인 에바의 관 속 미소였어요. 가끔 관속에 들어갈 때 어떤 기분일까(물론 암 것도 모르겠지만) 상상을 해봤는데 뭘 가져갈까 하는 생각은 해보지 않았거든요. 하지만 죽어서도 돈의 맛은 짜릿 했던가 봅니다. 천둥이 치는 순간 에바가 눈을 뜨던 장면에서 저도 모르게 입을 막았습니다. <내 아내의 모든 것>에서는 류승룡이 택시에서 임수정에게 안겨 오열하던 장면. 거절 당한 사람의 눈물이 우스꽝스럽기 보다는 다 큰 남자의 연민이 느껴져서요. 그러니까 하나는 웃는 얼굴이고 하나는 우는 얼굴이다 보니 두 영화가 한 개의 영화인 것처럼 마구 섞여 버린 느낌이네요. 돈에 웃고 사랑에 울고 ㅋ~

 

제 맘대로 연기 점수를 매기자면 백윤식과 윤여정 별 다섯. 김효진과 김강우 별 셋 반. 임수정과 이선균, 류승룡 별 넷. 이광수 별 셋(둘이 아닌 게 어딘가요. 정말 연기 늘었던 걸요, 하하) 이들 중에서 윤여정의 정사신에 박수를 보내고 싶고 류승룡의 변신에 즐거웠고 임수정의 귀여움이 같은 여자지만 무척 사랑스러웠고 이선균의 자연스러움에도 미소를 짓게 되네요. 기타 김효진의 홈드레스(라고 하기엔 너무나 화려한)는 나도 한번쯤 입어보고 싶었고 하나 부러운 게 있었다면 집에 있는 수영장보다는 영화관이 더. 어느 출판사 창고 같았던 서재(라고 하기엔 너무나 웅장한)에선 책이 너무 하찮아 보였습니다. 요즘 영화나 드라마 셋트는 신혼부부라도 오륙십평 되는 아파트나 고급주택이잖아요. 모두들 돈이 그렇게들 많을까요? 지금도 제일 후회되는 건 결혼하면서 장만한 오븐인데... 후라이팬 정리대까지 가기 싫어서 오븐 공간에 후라이팬 쌓아 놓는 분 저 말고도 많더라구요.

 

 

- 드레스 예뻐요. 다리가 정말 길더군요. <돈의 맛>-

 

 

#2. 난 모욕감을 느끼지 않아

 

영화 속에서 상징적인 단어로는 각각 ‘모욕’과 ‘외로움’을 들고 싶어요.

 

윤회장이 주장하는 모욕은 개인적으로 그다지 설득력 있다고 느껴지진 않았지만 어쨌든 영화전체를 관통하는 키워드이고 감독이 말하려 했던 메시지이니 접수는 했습니다. 공감하지 못했던 이유는 실컷 한 평생 돈의 맛을 다 보고 난 후에야 모욕이라고 결론을 내리는 것이 웃기다 싶어서요. 그런 식의 자기학대 정말 싫어하거든요. 자신이 탕진한 돈에 대한 예의가 아니죠... 돈 많은 사람들을 꽤 아는데 그들은 돈 떨어지면 그전에 하던 가락이 있어서 돈 없이는 아무것도 못해요. 그건 최고로 좋은 음식을 먹어봤기 때문에 그 수준에 미치지 못하면 죄다 맛없어지는 것과 같은데 돈 중독은 마약이나 도박보다 더 심하다고 봐요. 예전에 하던 걸 못하게 되는 상실감을 사랑이 채워줄 것이라 믿는, 돈 많은 사람은 없다고 봅니다. (간혹 말년에 진짜 사랑찾았다는 할아버지들 있지만요...) 자신이 자신을 모르고 착각을 했다는 걸 꼭 돈 없어지면 깨닫게 되지요.

 

저는 사실 돈보고 사랑하는 거 인정하는 쪽에 속하는 사람입니다. 사람들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부자일 때 돈 때문에 사랑하는 게 아니라 말해요. 본인 스스로도 그렇게 믿고요. 그래서 나를 그런 사람으로 본 것에 상처받았다는 식으로 말하죠. 하지만 돈 없이 그 사람이 현재 내가 좋아하는 사람으로 만들어 질수 있었을까요. 그 사람도 사랑하지만 그 사람이 가진 돈까지 사랑한다가 더 맞다고 봐요. 그리고 그것도 진실한 사랑일수는 있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돈 떨어지면 사랑도 떨어져 나가겠죠. 왜냐하면 돈이 없어지면 그 사람은 그 전처럼 살 수가 없고 그렇기 때문에 변하게 됩니다. 변한 상대는 그 전에 내가 사랑한 그 사람과는 많이 다르답니다. 사람들은 사람이 변했다고 말하지만 사실 그 사람은 돈이 없어졌을 뿐이지 다른 사람이 된 건 아닙니다.

 

돈이 있다가 없어졌거나 반대로 없다가 많아졌다면 사람은 반드시 변하게 되어 있어요. 변하지 않으려고 노력할 뿐이죠. 돈이 있건 없건 한결 같이 사랑하는 게 진실한 사랑이라 말하고 싶을 겁니다. 글쎄요... 한결같은 건 진짜 사랑이 아니고 우리가 바라는 사랑, 그러니까 이래야 하고 그러길 바라는 기대수준의 사랑은 아닐까요. 예, 전 사랑을 믿지 않는 사람이라서...

 

불행히도 사람도 믿지 않습니다. 그래야 한다고 믿는 것이며 그러고 싶을 뿐이고 또 그렇게 살고 있다고 믿는 것이지 실제로 한결같을 수는 없는 것이 사람입니다. 저는 어찌 보면 사람보다 돈을 더 믿는 사람인지 모르겠습니다. 배신은 사람이 하는 것이지 돈이 하는 게 아니더군요... 돈은 외려 배신한 사람을 돌려놓던걸요. 그러니 돈 때문에 사랑하는 게 아니라는 사람은 혹시 자기 자신을 기만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 돌아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답니다. 저는 사랑지상주의가 아니라서... 아마 이러한 생각이 불편한 분들도 있을 듯하네요. 그렇습니다. 돈 때문에 사람변하는 걸 너무 많이 봐와서 그래요. 그래서일까요... 윤여정의 파렴치함이 하나도 싫지 않았습니다. 돈이 만능인 사람은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해요. 돈이 많은 사람은 사람들이 돈 때문에 자신에게 굽실거리고 위선의 사랑과 존경을 보낸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더욱 돈으로 복수하려고 하는 겁니다. 그 구멍난 양심을 채우기 위해 또 돈을 쓸 수밖에 없죠. 모든 감정과 이성이 돈으로 채워진 사람은 필연적으로 고독에 취하게 됩니다.

 

윤여정은 극중에서 돈이 많아도 사랑과 행복은 없는 인생인데 그렇다고 불행하지만은 않다고 봐요. 인간은 다 자기가 가진 조건 안에서 최상의 행복을 느끼니까요. 그리고 자주 느끼는 행복에 동화되어 그 상황에 최적화되니까요. 가장 맘에 들었던 인물은 할아버지의 비서 있잖아요. 비열하게 웃으면서 다 같은 월급쟁이일 뿐이라는 그 분... 그 안에서 누가 누구를 손가락질 할 자격은 없다고 보았거든요. 무언가를 알았다고 해서 그 전과 달라지는 돈은 하나도 없지요. 그저 돈에 대한 내 생각만 달라졌을 뿐. 만약 임상수 감독이 관객에게 돈에 대한, 돈으로 인한, 돈 앞에 선 인간의 모욕감을 상기시켜주려 했다면 저라는 비순수 관객에겐 실패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은행금고처럼 돈 창고에 쌓여있던 박스식 돈다발은 조금 설레이긴 했습니다. 벽돌 같은 다발 속에서 한 다발만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 바보같이 오만원곱하기 몇 십, 몇 백을 하다가 말았다는 고백은 할께요. 흐흐흐...흑흑흑...

 

 

#3. 난 외롭지도 않아

 

 

- 저는 저런 헐렁한 가디건이 좋더군요. <내 아내의 모든 것> -

 

 

<내 아내의 모든 것>에서 ‘외로움’은 자주 나오던 단어는 아니였지만 영화 후반부에 이선균이 임수정에게 네가 그렇게 독설을 해댄 것이 외로워 그랬다는 걸 몰랐다고 할 때 비로소 각인된 메시지입니다. 영화 홍보 인사할 때 배우들이 하나같이 ‘소통’을 이야기 하더라구요. 초반부에 임수정이 아무리 투덜거려도 이선균은 얼토당토않다고 생각해 들어주지 않잖아요. 처녓적에 저도 임수정처럼 달려가서 또박또박 남의 잘못 지적질 해댄 적이 있어요. 횡단보도에서 신호가 막 바뀌던 순간이었는데 늦게 건너가려던 사람이 있어서 브레이크를 밟았죠. 그런데 당연히 제가 신호를 건너갈 줄 알고 달려오던 택시가 저 때문에 뒤에서 급브레이크를 밟았나봐요. 늦게 건너가던 사람이 건너가고도 저는 일부러 신호를 다 기다렸어요. 그런데 택시 운전사가 열을 받았는지 경적을 마구 울려대잖아요. 그때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차를 세우고 택시 운전사에게 걸어가서 정중히 인사하고 지금 알만하신 분이 저더러 신호를 어기라고 강요하시는 것이냐고 물었어요. 횡단보도 건너는 학생을 치여 죽게 하라는 말씀이냐고도 물었죠. 범법자, 살인자가 되라고 할 당신의 진짜 직업이 무엇이냐 물었고 혹시 내가 여성 운전자라서 그런 것이냐 부터 여기가 학교 앞인데 왜 시끄럽게 경적을 울려대냐 짜증이 난다고 자동차에 화풀이를 하면 하루 종일 길바닥에서 일하는 아저씨 일꾼이 얼마나 피곤하겠냐, 기계도 그런 식으로 스트레스를 주니까 가끔씩 급발진도 하는 것이다, 등등 쉬지 않고 말했더니 기가 막힌지 뒤에 탄 손님이 대신 미안하다 말한 적이 있어요.

 

90년대 중반, 당시엔- 뭐, 지금도 그렇긴 하지만 - 여성 운전자들이 신호를 제대로 지키고 앞에서 답답하게 길막고 있거나 주차하는데 시간 지체하는 걸 못 견디는 남성 운전자들이 많았어요. 93년에 면허를 땄는데 운전 2,3년 하다 보니까 무서운게 없어진 게죠... 보통 나이가 드신 분들은 말 막히면 너 몇 살이냐부터 나오잖아요. 그럴 땔 대비해서 저는 먼저 인사를 정중히 해요. 그리고 반드시 높임말로 같은 톤으로 말해요. 제가 나이가 적어서 실수한 것이 있으면 가르쳐 달라고 하죠. 그러면 아무 말 못해요. 지금 생각해보면 키득키득 웃음만 나오는데... 스물 대여섯살 때... 그랬네요.

 

감독은 임수정 독설의 배경을 외로움으로 대치 시켰는데 임수정은 그걸 잘 표현한 것 같아요. 물론 다른 여배우들이 했어도 무난하게 잘 했을 것 같은 배역이었죠. 독설은 예전에 저도 자주하던 전적이 있어서 그게... 결국 나에게로 돌아오는 부메랑 같은 성질이 있더군요. 하는 순간에 상대만을 향하는 것 같지만 시간이 지나면 저도 그 독설에 쓸려 있더라구요. 언젠가 부턴 제게도 상처가 되는 것 같아 누가 시키지 않아도 안하게 되었죠. 개인적으로 맘에 안 들었던 부분은 임수정을 외동딸로 정해놓고 처음에 지진이나 외부환경의 자극에 보통 사람 이상의 반응을 보이고 일단 내가 아니라 생각하는 건 누가 되었건 지적부터 하며 똑바로 살아라하는 식의 독설을 쏘아대는 캐릭터로 만들었다는 것이어요. 극 중에서 임수정도 외동딸에 대한 편견을 언급했지요. 실은 제가 외동딸이거든요, 하하(괜히 저 혼자 찔려서...)

 

똑같은 알코올 중독자의 아들이었지만 한 사람은 목사가 되고 한 사람은 조폭이 되는 경우가 있잖아요. 중요한 건 외동딸로 태어난 변할 수 없는 조건이 아니고 어떤 부모님 밑에서 어떻게 자랐는지가 더 중요하잖아요. 더 독립심이 강하고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꼭 저라고 주장하는 것 같네요 ㅋㅋㅋ) 하여간 이 영화에서는 그렇게 외로운 임수정에게 마치 그런 네 마음 다 알고 있다는 식의, 류승룡이 불러주는 노래 ‘매일 그대와’를 빼 놓을 수가 없습니다. 아비정전의 장국영 맘보춤을 따라할 때 나오는 샹송은 알아보니 창작이라 아직 OST가 나오지 않은 것 같아요.

 

그런데 꼭 이럴 때 우연인지 운명인지 돌아오는 차 안에서 들국화의 노래가 나오더군요. 며칠 전에 전국 투어 콘서트인가 컴백 소식을 듣고 클릭해 본 사진은 정말 충격이었거든요. (많이 늙어 있어서...저 나이 먹은 건 잊어버리고 말이죠...) 20년 전에 학교 앞 베이커리에서 전인권을 본 적이 있어요. 사람들이 모두 쉬쉬하며 주변을 피했지요...(행색이 너무 비범해서요 ㅠ) 그때 저는 전인권보다는 최성원을 더 좋아했습니다. ‘이별이란 없는 거야’, ‘색깔’, ‘제주도의 푸른 밤’이 ‘매일 그대와’와 함께 수록된 테잎(1집 말고 콜렉션)을 듣고 또 들었던 기억이... 아련하더군요... 들국화 멤버 중에 허성욱은 벌써 세상을 떴습니다. 고등학교 친구들이 들국화를 많이 좋아 했는데 그때도 전인권을 별로 안 좋아해서...

 

 

매일 그대와 아침 햇살 받으며

매일 그대와 눈을 뜨고파

매일 그대와 도란도란 둘이서

매일 그대와 얘기 하고파

새벽비 내리는 거리도 저녁놀 불타는 하늘도

우리를 둘러싼 모든 걸 같이 나누고파

매일 그대와 밤의 품에 안겨서

매일 그대와 잠이 들고파

 

작사, 작곡, 노래 - 최성원      

            


최성원 1집(1988), 최성원 콜렉션(1992) 

 

 

이 노래가 정말로 사랑하는 사람인데 이루어 질수 없는 상황이라면 그렇게 울컥할 수가 없답니다. (경험이냐구요??? ㅠㅠㅠ) 류승룡은 노래를 썩 잘하진 않았지만 최선을 다해 불렀던 것 같아요. 옛날에 노래방에서 회식을 하다가 어떤 분이 이 노래를 하다가 목이 메어서 그만두는 걸 본 적 있어요. 덕분에 영화의 꼬리를 물고 옛날 생각에 빠져 애꿎은 노래만 찾아서 몇 번이나 들었는지... 우리를 둘러싼 모든 걸 같이 나누고파~ 이 부분이 새삼 짠하네요... 나도 그런 간절한 마음이 들때가 있었지 싶어서요 ㅠㅠ

 

<잘가요 엄마>, <사랑의 기초>, <젊은 작가상 수상집>등등 소설을 사놓고 요즘 책이 허무해서 손에 대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영어학원 다음 학기 등록하라는 문자가 날아왔고 은희경 소설 예약판매 한다는 문자도 여기저기서 날아왔네요. 창비 계간지에서 몇 페이지 읽었는데 꽤 흥미로왔어요. 작년엔 <7년의 밤>같은 소설 베스트셀러가 있었는데 올해는 벌써 5월인데 소설 쪽은 아예 리스트에서 사라진 듯 합니다. 꼭 제가 소설에 등을 돌린 다음 더 그렇게 된 것 같아 괜스레 미안하고 그러네요. 연휴엔 소설을 좀 읽어 볼까 생각중인데 이런 말 하면 이 책 먼저 읽어주세요, 이러는 분 있어요, 하하.(그래서 먼저 읽었습니다 ㅋ)

 

대체로 한국영화 많이 재미있어 지고 수준도 높아진 것 같습니다. 내일이던가 칸느 영화제 본선 에서 좋은 소식이 들려오길 바랍니다. <돈의 맛>이 마지막날 전날 상영된다던데 보통 그런 경쟁작은 상을 타거나 관심을 받은 작품이라더군요... 김칫국부터 마시면 안 되겠지만 부디 선전하기실. 그리고 모두들 연휴에 마음의 평화와 편안한 휴식으로 다가오는 여름을 준비하셨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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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12-05-26 20: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 한사람님이 윤여정의 정사신에 박수를 치고 별 5개를 주셨다는 말에 뜬금없이 윤여정이 돈이 상당히 궁했나 보구나 하는 생각이 떠오르네요.왜 무릎팍도사에서 윤여정이 자신은 돈이 절박할떄에야 최선을 다해서 혼신의 연기를 펼친다고 했잖아요^^

아이리시스 2012-05-26 2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사람님 전에 말씀하신 거(그건 비밀글로) 이해갈 듯 하면서 안가기도 하고 그게 내가 어려서 세상 때가 덜 묻어서 그런가 이랬는데 이 페이퍼 보니까 알 것 같아요. 몰라도 좋을 것 같지만요 :)

김효진 좋아요. 신혼 어떠냐고 물으니까 아직도 밤새 얘기해요. 너무 행복해요. 하던데 완전 부러워요. 거기 어떤 사람이 나도 밤새 얘기해도 안 질리는 여자가 이상형인데.. 이래논 거예요ㅋㅋㅋ 같은 방향 보면서 취미에 대해 밤새 얘기해도 안 질리는 연인/부부가 드물긴 하죠. 저도 다리는 쫌 긴데..키가 안 커서..요즘 3센치 타령하면서 다녀요. 항상 큰 편에 속했으니까(보통인데!) 학교다닐 때는 중간에 앉아보는 게 소원이었고, 보통인 게 좋은 것 같았는데 요즘은 워낙 다 크니까요. 질 수 없다는 마음! 그리고 남자친구도 좀 키우고 그러고 싶어요!

2012-05-26 21: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맥거핀 2012-05-27 12: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저 사진 다리가 너무 긴 것 아닙니까? 어찌 인간의 다리가 저렇게 길 수가..포샵으로 늘린 것 아닐까..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말 그대로 '자'가 '본'이니까. 돈이 모든 것의 주가 되어 있는 이 상황이 뭐 그리 이상한 것은 아니겠죠. 돈이 가장 중요한 가치가 되고, 돈을 가장 많이 가진 사람이 가장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 되고, 존경받을 만한 인물이 되죠. 반대로 돈이 없는 사람들은 패배자가 되고, 파산을 한 사람들은 사회에서 거의 범법자와 비슷한 취급을 받지요. 그래서 돈들에 그렇게 집착하는 게 이상하지가 않아요. 어쩌면, 그것을 이상하지 않다고 여기는 제가 이상해져버린 게 아닌가 싶기도 하고요. 그래서 뭐 나름 용감한 영화고, 도발적인 영화라고 생각해요. 돈이 모욕이 된다는 것은 그것을 완전히 뒤집은 것이니까. 돈이 모욕일까요. 정말 잘 모르겠어요. 그렇게 자기최면을 걸어서야만 살 수 있는 사회라면 정말 힘들죠. 그렇다면 전작 <하녀>에서 윤여정이 '아더메치'라며 경멸로 버텨가는 것과 뭐가 틀릴까요.

2012-05-27 19: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5-27 20: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6-01 20: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stella.K 2012-06-01 2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돈의 맛 친구하고 봤는데 솔직히 윤여정씨 정사씬 어떻게 나오나 궁금해서 봤어요.
근데 예전이야 정사씬 어렵게 생각했지 지금은 오히려 더 당당하고 진정한 연기파 배우의 새로운 잣대가
되지 않았나 싶어요.
하지만 영화 자체는 전 별로였어요. 같은 날 집에 돌아와 방자전을 봤는데 안구정화용으로 그만이었어요.
정말 잘 만들었더라구요. 안 보셨으면 추천 드려요.^^
 

 

 

 

#1. 어느 쪽이 더 슬플까

 

 

요즘 아예 ‘놀토’가 없어졌다. 토요일은 그냥 모두 언제나 노는 날이 된 것이다. 우리 땐 토욜 4교시도 참 기다려지는 날이었는데 주 5일 문화는 이제 공교육에까지 확대되었다. 덕분에 아이와 같이 하는 시간이 더 많아졌고 아이들은 공부에서 해방되는 시간이 많아졌다. 그래서일까. 요즘 토요일에 영화관에 가보면 아침부터 아이들을 쉽게 볼 수 있다. 우린 사람들 붐비는 게 싫어 늘 조조영화를 보아왔는데 지난 토요일도 아침부터 만원이었다. <코리아>를 좀 뒤늦게 본 편인데 영화는 아이와 함께 보기 재미있었지만 약간 뻔 한 구석이 많아 감동의 수준은 ‘우생순’이나 ‘국가대표’ 급에 못 미친 것 같다. 하지만 배두나(리분희)의 절제와 몰입에 놀랐고 김응수(북한측 조감독)의 멱살 잡히는 장면, 한예리(유순복)의 실감나는 사투리 연기가 인상적이었다. 하지원 연기는 사투리고 스포츠고 워낙 익숙해서 이제 여간해선 감동을 받기가 힘이 드는데 그래도 마지막에 버스 떠나는 장면에서 울며 매달리는 특유의 우는 연기는 찡했다. 실제 상황이야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겠지만 우린 항상 버스타고 떠나는 북한사람들을 버스 밑에서 울면서 보내는데 익숙하다. 두 가지 다 해보았는데 확실히 떠나보내는 쪽이 더 안타깝고 눈물이 많이 흐르는 것 같다. 하지만 울음이 터져버렸기 때문에 또 뒤돌아서 잘 일상에 복귀하지 않았을까...

 

 

#2. 어느 쪽이 더 솔직한 걸까

 

 

나는 사람마다 울 때 내는 흐느낌의 소리는 변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정말로 슬픔에 복받쳐서 우는 소리는 연기로 조절하기 상당히 힘든 영역이 아닐까. 왜냐하면 극도로 슬퍼야지만 나오는 그 사람만이 가진 목소리가 따로 있기 때문이다. 웃어야지만 나오는 소리가 있고 아파야지만 나오는 신음소리가 있듯 울 때 나오는 목소리는 울어야지만 나오게 되어 있다. 그리고 그 목소리와 표정, 흐느낌의 패턴은 다른 사람이 따라할 수도 없고 스스로도 바꿀 수는 없는 듯 하다. 이것은 신체의 각 조직이 반응하며 일어나는 복합적 상호작용이기 때문에 사람마다 고유성의 영역에 속한다. 어떤 사람은 울 때 꼭 입을 막는 경우가 있고 어떤 사람은 꼭 이불을 뒤집어 쓰는 것도 연차적인 행동반응이다. 그런데 우는 건 웃는 것 보다 일반적으로 더 솔직하고 속일 수 없는 감정이다. 그래서 우는 연기가 다양하다면 연기의 고수가 확실하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우는 연기가 다양하려면 다양한 상황에서 울어봤어야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그래서 우는 연기의 달인이 되려면 어느 정도 인생의 경험이 풍부한 나이가 되어야 가능하다는 생각을 한다. 물론 웃는 것도 참 억지로 못할 일이지만...

 

 

#3. 많이 운다고 예술이 더 깊어질까

 

 

그런데 가수나 배우들을 보면 인생의 경험과 나이와는 상관없이 감동을 선사하는 사람들이 있다. 나이 들었다고 모두 연기의 달인이 되는 것이 아닌 것과 같은 이치일까. 어렸을 때부터 눈에 띄게 연기와 노래를 잘하는 사람은 아마 나이 들어서도 잘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연기력은 그대로인 중견배우들을 보면 예술이 꼭 인생의 경험과 비례하는 건 아닌 것 같다. 인생의 경험이 풍부할수록 예술이 탄탄해질 수는 있겠지만 예술가의 역량이 높다고 산전수전 다 겪은 건 아니라는 말씀. 그래서인지 나는 요즘 나이가 들어가는 것이 썩 반갑지가 않다. 계속 노력하다보면 무언가 되겠지... 하는 생각에 회의가 많이 든다. 한 살 더 먹었다고 더 마음이 너그러워지는 것도 아니고 누군가를 더 많이 이해하는 것도 아닌 것 같다. 더 실력이 느는 것 같지도 않다. 내가 가진 조그만 재능이 더 빛을 발하긴 커녕 한계만 확인하게 되는 것 같아 우울한 요즘이다.

 

 

 

#4. 얼굴이 예뻐야 주연을 하는 걸까

 

 

주말이 지났지만 자꾸 생각나는 배우가 있었다. 분명 어디서 본 배우였기에 우린 어렵지 않게 그녀가 출연한 영화들을 기억해냈다. 알고 보니 짧게 나왔지만 미친 존재감만은 강렬하게 기억된 배우였다. 아이와 나는 공교롭게도 그녀가 출연한 <하모니>와 <퀵>을 보았다. <퀵>에서는 폭주녀로 잠깜 나왔는데 이민기에 키스를 한 누나뻘 옛날 불량애인? 정도 되었던 것 같다. 사진을 못찾아서 아쉬웠다. <여인의 향기>에서도 재일교포로 나왔다고 하는데 애석하게도 그건 기억나지 않았다. 그녀의 이름이 김재화라는 것도 처음 알게 되었다. 한눈에도 개성 있는 조연을 하기에 적당한 외모를 가졌고 약간 올라간 눈꼬리와 광대뼈 덕분에 중국인 역할에 딱인 포스이다.

 

 

 

- 중국의 덩 샤핑(영화에서는 덩 야령)을 연기한 김재화. 내 기억으로 덩 샤핑은 아주 단단한 체구의 단신이었던 것 같은데...
하지만 중국인으로 보이는 강렬한 인상이 얼마나 중국인으로 보이고 싶어했을지를 떠올리게 했다.

 

 


-하모니에서 권달녀 역으로 출연한 김재화. 맨 오른쪽 뒤에서 입을 크게 벌리고 있는 사람. 교도소에서 짧게 나왔지만
존재감만은 최고였다. 완전 범죄포스에다가 욕설이나 행동도 재소자에 빙의된 모습... 노래는 어찌나 또 오버해서 하던지...

 

 


-여기저기 프로필 사진들을 찾아 봤더니 이 사진이 꼭 동남아시아 항공사(싱가폴이나 홍콩)
스튜어디스 같아 슬쩍 가져왔다.

 

 

 


- 전혀 다른 눈빛이 너무 강렬해 오래 매력을 기억해두고 싶었다.

 

 

 

그녀는 알고보니 중앙대 메릴스트립으로 불리던 한 연기 하던 연극배우였다. 80년생인 것에 비해서는 얼굴이 좀 노안이긴 하다. 송강호, 설경구, 최민식, 김윤석, 황정민의 공통점은 연극바닥에서 발성과 연기를 익힌 배우들. 그러니 그녀도 대성할 배우의 자격쯤은 갖춘 셈이다. 이제 여자 배우들도 저런 개성강한 얼굴이 당당히 주연으로 등극하는 세상이 왔으면 좋겠다. 오늘 신문에 보니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여배우는 '하지원'이고 가장 연기 잘한다 생각하는 배우는 '전도연'이었다. 하지만 남자로 가면 얼굴이 매우(?) 잘 생긴 배우는 이제 하향세로 돌아섰다. 감독이 남자라서 그런 것일까? 관객이 예쁜 배우를 보기 좋아해서 그런 것일까. 제작자가 그림이 좋은 것을 선호하기 때문일까. 기왕이면 다홍치마라고 나도 스크린에 예쁘고 섹시한 여배우가 연기까지 잘하면서 등장하면 보는 재미는 쏠쏠하다고 느낀다.

 

하지만 언젠가는 김재화라는 배우가 주연을 하게 될 거라는 예감이 든다. 아니 꼭 주인공이 되어 칸느에서 주연상도 타길 바란다. 본인이 칸느 카펫을 밟아 보는 것이 소원이라고 해서 하는 말이다. 실력이 능력이 되고 그것을 실력만큼 인정받길 바란다. 이상하게 그녀와 친분도 전혀 없는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우울하고 우울하다. 책이 재미가 없다. 글이 허무하기만 하다. 그러다 보니 이 생각 저 생각

잡 생각으로 하루를 보낸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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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12-05-22 0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하모니에 나왔던 배우군요! 이렇게 사진을 보고 나니 알아볼 수 있겠어요. 마지막 사진은 특히 강렬합니다. 저도 이 배우가 칸의 레드카펫을 당당히 밟는 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어요. 기대되는 배우입니다. ^^

한사람 2012-05-23 11:12   좋아요 0 | URL

그죠~~ 기대되는 배우 맞아요.
칸에 홍상수 감독 가 있던데 좋은 소식 들렸으면 좋겠네요~
마노아님은 바쁘시다면서 영화는 많이 보시더라구요, 하하
저는 하나도 안바쁜데 영화관 가는게 귀찮아요 ㅠㅠㅠㅠ

차트랑 2012-05-22 08: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극히 뜬 구름 잡는 소리이이며
말도 안되는 말씀입니다만
연기자 김재화의 년월일시의 주를 알면
언제뜰지^^ 예측이 가능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ㅠ.ㅠ

인생은 'timing의 예술'이라는 말은 참 많은 경우에 해당하는 것 같습니다.
누구에게나 반드시 그 timing은 온다^^
다만 그 시기를 알 수 없는 것이 문제입지요 ㅠ.ㅠ
물론 예측이 불가능한 것은 절대로 아니라는...

한사람 2012-05-23 11:13   좋아요 0 | URL

어떻게 아세요???
궁금해요!!

타이밍이라는게 미리 정해져 있는 걸까요?
사람은 정해진대로 살게 되 있는걸까요???

2012-05-24 02: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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