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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의 밤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11년 3월
평점 :
삶보다 욕망
이 소설을 비가 많았던 지난 여름에 읽었다. 서울이 침수되고 산이 무너지는 광경을 목격하면서 생명이 물에 잠긴다는 것의 의미를 한참 생각할 때였다. 그래서인지 책을 덮고 나서도 어떤 심연의 바다에 침수된 채 좀처럼 빠져 나오지 못했던 것 같다. 천천히 그리고 서늘하게 내 가슴속 물컹한 덩어리들이 그 바다와 하나가 되는 느낌이었다. 마치 침몰하는 배에 함께 탄 승객이라도 되는 듯 나는 비극에 동참할 수 밖에 없었다. 누군가 나를 시험하려 수문을 열어 엄청난 양의 물을 방류시킨 것이라면 그날 밤 나는 분명 고립된 채로였다. 호수 한가운데 나무에 묶여 목까지 물에 잠긴 채 몇 시간을 버텨낸 소년처럼 많이도 고독했다. 내가 내 자신을 구원하기 어려울 것 같은 두려움, 하지만 누구도 나를 도와줄 수 없다는 절망감,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살아 나가고픈 간절함, 그 모든 생생한 욕망이 나를 휘감았다. 이런 기분은 태어나 처음이었는데 누군가에게 설명할 수도 없고 한다 해도 이 책을 읽지 않은 사람이라면 조금이라도 공감하기는 어려울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소설은 읽는 내내 나를 끌어내리려 집요하게도 잡아당겼고 끝내 항복하라는 요구에 설득당했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이런 복잡한 감정,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슬픔, 오랜만에 책 한권으로 바닥까지 무너지는 내 자신을 발견하는 시간이었다. 내가 발견한 것은 괴물같은 소설속에서 건져 올린 내 안의 괴물은 아니었을까. 그 괴물들이 나를 고통이라는 우물 속에서 울게 했다. 막다른 순간 숨을 토하듯 터져 나오던 것, 나는 눈물이 자유와 해방을 의미한다는 걸 처음 알았다.
책을 덮고 나서 시간이 흐른 후에야 나는 과연 내 인생에서 ‘무엇’을 지키려 하는 걸까, 내가 목숨을 걸고 지켜내야 할 것은 ‘무엇’일까를 생각했다. 그것은 분명해 보이는 질문처럼 쉽게 답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우선 그렇다면 나는 내가 지키려 한 것이 있기는 했을까, 에서 시작해 혹 내가 지킨다고 생각해 온 건 결국 나를 지켜주던 욕망에 불과한 것들은 아니었을까, 하는 결론에 이르렀다. 나는 의심없이 내 자신을 의지대로 살아간다고 여기지만 실은 내 자신의 욕망에 기대어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내가 욕망하는 것들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나는 내가 이룬 것들을 지키려 살아온 것이 아니고 이루지 못한 것들을 좇으며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결국 내가 지켜온 것은 나를 말해주는 것들이 아니고 내가 닮고 싶은 나 아닌 것들은 아닐까. 그렇다면 내가 욕망하는 것은 나의 것인가. 인생은 내가 ‘무엇’을 지키는 것이 아니고 그 ‘무엇’이 나를 지켜주는 것이 아닐까. 목숨을 건다는 건 그 ‘무엇’과 내 삶을 바꾼다는 뜻인데 우리는 왜 내 자신의 목숨도 내 자신과 바꿀 수가 없는 것일까. 우리는 혹시 그 ‘무엇’이 온전한 나로부터 비롯된 내 것, 내가 바라는 나만의 가치라는 착각을 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 그렇기 때문에 목숨을 걸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욕망보다 죽음
작품속의 인물들은 하나같이 자기 생의 소중한 가치들을 생의 전사들처럼 굳건히 수호하고 있었다. 하지만 자기가 목숨 걸고 지켜야 할 가치가 마침 남이 목숨 걸고 빼앗으려 하는 가치라면 우린 어떻게 살아야 할까. 기꺼이 내 가치를 위해 타자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희생을 강요하지 않을까. 내 목숨을 건다는 것. 나는 그 신성함에 폭력을 연상한다. 우리가 육화된 존재인 한 ‘폭력은 우리의 운명’이라고 한 철학자 메를로 퐁띠의 주장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생명체로서 살아간다는 것은 누군가에게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폭력을 행사하는 일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래서 이 작품에 표출된 모든 폭력은 곧 그 사람의 운명으로 보이는 건지도 모르겠다. 작가는 특히 인물의 운명을 심층적으로 투시하는 시력이 탁월했다. 나는 이 소설을 한국사의 가부장적 남성들이 자기 운명을 의지대로 실현치 못하는 비극의 알레고리로 보았다. 자기 존재의 징표를 다시 자기복제의 욕망으로 환원하여 끝내 자기를 파멸하고 마는 불행의 서사로 보았다. 어떤 면에서 작가는 비극의 운명들을 날카롭게 선발해 폭발적으로 휘몰아 연주하는 지휘자로 느껴질 정도였다.
작품에서 대립하는 최현수와 오영제는 모두 아버지로부터 해방되지 못한 아들로 등장한다. 대지주 아버지와 교사 어머니 사이에서 세령 마을의 도련님으로 태어난 오영제는 부유한 환경에서도 폭력으로 권위를 행사하는 아버지, 매맞고 순종하는 어머니의 기억을 내재화하며 성인이 된다. 자신이 생각한 가치가 자신이 원하는 위치에 놓여있지 않은 삶과 존재의 불일치는 오영제라는 인간의 정체성이 된다. 통제력만이 그가 바라는 능력인 것이다. 이는 훗날 전자제품 수리공의 딸을 부인으로 맞이한 후 치과의사가 되어 주변 인물들을 하나씩 교정하는 삶을 지향하는 배경으로 보였다. 3대독자로서 오영제는 딸이 아닌 아들을 강렬히 욕망하는 부성이었는데 이는 내 아버지처럼 살지 않겠다는 그래서 내 아들에게 내 아버지처럼 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한 최현수의 욕망과 동일했다. 아버지로서의 욕망은 같았으나 한 명은 딸을, 한 명은 아들을 본 것이었다. 최현수 역시 월남 상이군인 출신으로 주정뱅이가 된 아버지와 함바집을 하는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스스로를 못견뎌 가정에 폭력을 휘두르던 아버지를 가장 증오하면서도 두려워하는 존재였다. 현수의 아들 서원이 자신의 어머니를 닮아 다행이라는 것은 소설속에서 마지막 생존자가 되기 위한 복선으로 느껴졌다. 각자 딸과 아들의 아버지가 된 오영제와 최현수는 자신들의 아버지를 치열하게 부정하며 자기안의 부성을 지독하게 극복하려한다. 하지만 아버지를 극복하는 것이 자신을 극복하는 일이 된 아들은 자기 아들에게 다른 아버지가 될 수 있을까? ‘아버지, 아버지...씹새끼, 너는 입이 열이라도 말 못해’하며 투항하던 이들도 결국 ‘새벽에 나가 꿈속에 돌아오던 아버지’와 정면에서 조우하며 스스로 아버지의 무덤속을 동행하게 된다. 자식을 아버지에 대한 복수기제로 기대한 이들에게 아버지를 이기는 것은 곧 자신들을 죽게 하는 것에 다름 아니었다.
이들 두 사람의 중간에서 목격자, 관찰자로 존재하던 승환도 직업잠수부의 아들로 태어나 열두 살 때부터 잠수를 배우게 된 인물이었다.(열두 살은 이 작품에서 부모의 영향으로 제 2의 인생을 시작(마감)하게 되는 중요한 시점이다) 하지만 한강에서 시체를 찾거나 목숨을 구해주던 아버지는 오영제, 최현수의 아버지와 달리 아들에게 비폭력성, 구원성을 전수하였기에 승환은 막다른 길, 벼랑 끝에 내몰린 서원을 조력하는 최고의 은인이 된다. 표면상으로 드러나지 않았던 오영제의 아내 문하영에 비해 자주 서사의 긴장을 유발하던 현수의 아내 강은주도 봉천동 달동네 출신으로 왕대폿집을 하는 싱글맘의 장녀였다. 이들 남녀는 빈부와 상관없이 모두 한 집안의 기대주였고 그러기 위해선 그들 부모를 극복해야하는 공통의 운명을 지니고 있었다. 나와 같은 세대로 등장하던 오영제, 최현수 내외는 지금 꼭 우리 사회 허리층이다. 부모보다 더 잘될 수 있었던 마지막 세대라는 말도 들려온다. 우리 부모님 세대는 일제시대, 한국전쟁, 군사독재의 파란만장한 한국 근현대사를 몸 뚱아리 하나로 헤쳐 나오면서 만신창이가 된 분들이다. 나 역시 부모님처럼 살지는 않을 거라고 내 자식한테 내 부모님처럼 하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을 밥먹듯이 하고 살아왔다. 그런데 서글프게도 나이들어 가면서 점점 어머니의 판박이가 되어간다는 생각에 놀랄 때가 많다. 내 부모님은 모두 돌아가셨지만 내 안에서 더욱 생생히 나를 조력하고 통제하는 역할을 하고 계신지도 모르겠다. 내가 어머니가 업그레이드된 인간형이었는지는 모르지만 우리는 분명 내 아이가 나보다 진보된 새로운 모델이길 기대한다. 별스럽지 않게 순리처럼 받아 들여온 이 사실이 이 책을 읽고 나서 얼마나 무섭게 느껴졌는지 모르겠다. 가족의 죽음을 껴안고 그 죽음에 기대어 내가 살아가는 것이라면 우리는 ‘죽음’을 지키기 위해 삶을 이어가는 존재는 아니었을까. 작가는 부모의 죽음도 내 삶의 완성을 이루는 한 요소임을 그리하여 나의 죽음도 내 아이의 삶을 결정지을 것이라는 예언을 해주는 사람같았다. 우린 어쩌면 삶이 아닌 죽음으로 더욱 서로에게 연결되어 살아가는 존재가 아닐까.
죽음보다 본성
이렇듯 이 작품은 무엇보다 인물의 캐릭터가 영화를 보듯 생생하고 장단점이 분명하다는 서사적 미덕을 지녔다. 인상깊었던 건 오영제, 최현수, 승환의 직업이 곧 자신들의 정체성을 또렷이 구분짓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남이 던지는 공을 받아내고 댐을 지켜야 하는 차단, 방어형의 현수와 남이 가진 무기(치아)를 갈고 뽑아내는 약탈, 공격형의 영제, 남의 이야기로 내 존재를 말하는 중재, 위로, 타협형의 승환이 자기직업에서 성공하는 것은 곧 자신의 열등감을 극복하는 것이고 그것은 상처받은 부성을 회복하는 과정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은 왜 그토록 증오하던 아버지보다 더 잘되지 않았을까. 아니 왜 아버지보다 못한 자식이 되어야 했을까.
이들은 아버지에 대한 원망만큼이나 아버지가 가졌던 한계도 고스란히 물려받은 자식이었다. 외부에 보여지는 선망의 대상으로서만 존재했던 오영제의 아버지는 가식적, 인공적인 가정의 가장이었다. 이는 따스한 가정을 운영하지 못하고 나뭇개비로 동화속 성채를 정교하게 축조하던 오영제의 무의식을 조종하던 한 마리의 나비와도 같았다. 수목원 나무에 폭력을 가해 그 결과로 축소화된 인공세계에서 평화와 행복을 느끼던 오영제는 자신이 만든 행복의 신세계에 (교정되지 않은)아내와 딸을 들여 놓을 수 없었다. 핏빛 수수벌판 속 오래된 우물에 빠진 현수의 아버지는 한쪽 팔을 잃은 불구였고 아버지의 장애는 현수에게 용팔이라는 증상으로 유전된다. 이들은 다시 나뭇가지 성채와 마비 및 제어불능에 갇히면서 자기 삶을 자기 존재와 일치시킬 수 없다는 두려움에 빠지게 된다. 그런데 가만 보면 우리들 모두는 좋든 싫든 우리가 그토록 혐오했던 부모의 장애를 필연적으로 타고나는 존재들이 아니던가. 하지만 부모의 장애가 늘 불운으로만 성장한다면 누구도 부모이상의 존재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그건 우리들 자식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되는 누구에게나 공평한 인생의 짐인 것이다. 나는 여기서 현수가 덩치 큰 타고난 ‘미숙아’라고 했던 작가의 평가가 의미심장하다는 생각이다.
현수는 거구의 운동선수로서 마스크에 공을 맞아도 눈을 깜박이면 안되는 포수였다. 어떤 공이라도 피해서는 안되며 전체 경기의 판세를 읽고 자기편 홈을 목숨걸고 사수해야 하는 수비수였다. 변화구 한방에 수비가 무너지지 않도록 공격을 오로지 손으로 붙잡아야(捕) 하는 운명인 것이다. 그러므로 신체부위중 손을 통제하지 못한다는 것은 이미 포수가 될 자격을 잃었음을 의미한다. 손의 신경증은 무능한 아버지와 아버지와의 갈등을 황급히 우물에 묻어버린 비겁함에서 비롯된 건 아니었을까. 결정적 순간에 나오는 수비실수는 아버지와 결정적인 순간을 대치한 적이 없었기 때문은 아닐까. 그렇다면 용팔이는 우물속에서 현수를 부르던 아버지의 부활은 아니었을까. 죽이려던 것이 아니고 단지 아이의 입을 막으려했던 현수의 왼손은 결정적인 순간에 마비가 풀리는 마법으로 세령의 ‘아빠’를 단숨에 덮어 버린다. 보통 자기 가정에 세령과 같은 또래의 자식을 둔 아버지라면 ‘아빠’라는 목소리를 듣고 자기자식이 생각나서라도 그냥 지나칠 수 없다고 보는 것이 상식이다. 현수는 왜 세령이 ‘아빠’라고 한 순간을 못 견딘 것일까. 무엇이 현수를 ‘아빠’로부터 멀어지게 한 것인가.
세령이 죽기직전 불러본 ‘아빠’는 이 작품에서 모든 아버지와 아들을 상징한다고 받아들였다. 세령의 한마디 유언은 아빠라는 딜레마를 상징한다. 세령은 열두 살이었고 현수는 열두 살에 아버지를 잃었고 서원은 열두 살에 생존자가 되었다. 우선 아버지가 된 현수에게 열두 살 현수의 목소리는 영원히 지우고 싶었던 기억이 아닐까. 그건 곧 우물속에 빠진 아버지가 자신을 부르던 ‘현수야’와 대치하는 목소리였다. 아버지의 구두와 랜턴을 쥐고 수수밭으로 걸어 들어가면서 애타게 외치던 ‘아빠’였다. 서로를 불렀지만 서로 대답을 하지 못한 불통의 시간. 그러나 현수는 세령의 검은 눈동자에서 (아버지를 찾았던)자신처럼 자신을 찾고 있는 서원의 간절함을 본다. 세령의 텅빈 눈은 아버지와 자신의 아들을 동시에 볼 수 있는 매개체로서의 거울이었다. 죽음을 이어 삶을 자각하는 무정한 현실이었다. 현수는 결정적일 때 매번 지고 마는 용팔이를 이기고 싶어(서원에게 보여주고 싶어) 피투성이가 된 세령이 ‘아빠’라고 부르던 목소리를 마비가 된 왼손으로 덮고 비틀어야 했다. 현수는 서원이 자신처럼 아버지를 원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자기안의 아버지는 물론 그 아버지가 부르던 자신마저 제거하고 싶었던 건 아닐까. 아버지를 이김으로써 아들에게 떳떳하고자 했던 현수는 결국 아버지로서의 자신을 잃게 되어 아버지로서 살아갈 수가 없었던 것이리라. 안타깝고도 슬픈, 너무나 이해하지만 이해하고 싶지 않은 운명의 장난이 아니던가. 현수가 그 순간 자기 가정의 조력자인 아내의 전화를 받지 않고 자기 본성의 조력자의 목소리만 들었던 건 인간은 절대 자기 내적인간과 동일하지 않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사람은 자신만이 자신을 통제할 수 있지만 인간은 자기 안의 본성을 매번 이길 수 없다는 점에서 우리 삶은 우리 존재와 절대 동일할 수 없다는 걸 깨닫게 한다.
내가 내 안의 자아와 같지 않고 나라는 존재도 내가 꾸려가는 삶과 반대일 수 있다는 사실은 교훈이라기 보다는 슬퍼하기엔 억울한 슬픔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안에 동물같이 포악한 본능이 존재하며 자신을 파멸시킬만한 위험도 보유하고 있다. 인간 안에 살고 있는 모든 요소가 인간적인 것은 아니며 삶이라고 모두 삶을 지향하진 않는다. 이 작품은 인간이 지닌 본성의 원심력이 막강했기 때문에 사실 본성으로 드러난 폭력이나 죽음의 현상보다는 그것을 작동케 하는 인간의 능력이 더 공포스러웠다고 할 수 있다. 에피소드가 많은 편이었고 화면모두 디테일했지만 더 치밀하게 보인 건 언제나 사람의 마음, 욕심의 방향, 행위의 의도에 있었다. 모두 사람이 투시할 수 있는 밑바닥까지 파고 들어가는 작가의 집요함이 놀랍고 소름끼쳤다. 작가가 소설을 전개하는 과정이 꼭 수심 몇 백 미터를 잠수하는 모습과도 비슷해 어쩌면 잠수부이면서 작가였던 승환이 작가의 대리인이라는 생각도 하게 만들었음이다.
본성보다 희망
그런가하면 이 작품의 배경이 되는 세령호와 세령마을은 어쩐지 영화속 배경처럼 실존하는 구체성을 가졌으면서도 안개 낀 신비의 공간, 무의식과 영적인 장소로 이해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오영제의 딸 세령의 이름이 곧 마을의 이름이요 세령의 의미가 영혼을 씻겨준다는 무당의 춤 세령(洗靈)무를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세령은 아버지가 영제(靈際)를 지내주는 사람이므로 (어짜피 죽음이 예견된 아이로서)더욱 이 세상의 존재로 느껴지지 않았달까. 수몰된 옛 세령마을에서 태어나 열두 살 되던 해 생일날에 죽은 세령은 혹 세령마을 이라는 사회공통의 희생양은 아니었을까. 꼭 마을이 수몰되고 십이 년 정도가 흘러야지만 상처는 회복될 수 있다는 말로도 들렸다. 아니 십이 년이 되면 수몰된 사람들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누군가를 영제의 제물로 바쳐야 했던 건 아닐까. 인간이 영악한 건 진정 수몰된 마을 사람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안온과 평화를 위한 이기심에서 희생양을 찾는다는데 있다. 희생양은 고대 때부터 실제 비난 받아야 할 잘못 때문이 아니라 희생물로서의 징후, 즉 집단의 위기와 관련된 혐의가 발견되어 선택된 약자일 뿐이다. 희생양은 대개 저항할 수 없는 존재들에 속해있다. 행여나 복수를 하면 안되기 때문이다. 세령이 현수의 차에 치였을 당시 엄마의 흰 블라우스를 입고 화장을 한 채로 긴 머리칼의 흰 얼굴과 가느다란 종아리, 맨발이었다는 것이 흥미로운데 이는 성스러워야 할 영혼에 더러운 욕망의 가면을 덫 씌워 죽음을 관람하는 사람들의 죄책감을 덜어주기 위함은 아니었을까. 평소 오영제에게 늘 억압받고 폭력에 희생되던 세령이었지만 그날만은 오영제의 알리바이를 보존키 위해 세령의 성인분장은 꼭 필요한 장치였을 것이다. 세령은 야밤에 성인분장을 하고 뛰쳐나가 고양이와 밀어를 나누었으며 이미 학교에서 왕따를 당하고 있었기에 희생양으로 충분한 조건을 지녔다. 한 집단은 위기의 책임을 그 희생양에 씌워 희생양을 처형함으로써 자신들을 정화하고 평화를 정당화한다. 세령은 사회공동의 금지된 욕망을 상징하므로 이를 수몰시킴으로써 결과적으로 자신들의 도덕성까지 회복할 수 있는 희생양이 된다.
작품 전반에서 세령의 죽음을 (성인으로서) 진심으로 슬퍼하는 사람은 없어보였다. 폭력의 진실을 알고 있었던 승환과 또래로서 연민을 느낀 서원 정도만 안타까와 했을뿐 세령은 가장 확실하고도 잔인한 피해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존재감이 없는 캐릭터로 보였다. 중요한 건 세령의 죽음이 아니고 세령의 죽음 이후, 세령의 죽음을 통해 달라진 마을의 풍경, 사람의 모습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건 세령은 희생양이었는데 왜 마을은 평화를 지키지 못하고 몰락의 길을 향했을까. 작가는 작품 전반부에 ‘물속 마을에 외지인이 침범하면 잠든 용신이 깨어나 재앙이 일어난’다는 힌트를 예언처럼 흘려놓았다. 세령이 희생양으로서 완벽한 조건을 갖춘 대상인 건 맞았으나 세령을 죽게 한 건 마을 사람이 아닌 외지인이면서 살해동기도 지극히 개인적, 우발적이었다는 사실이 마을신을 분노케 한 것은 아닐까. 현수는 댐을 지키는 보안팀장으로 은주는 사택 경비로 형식적으로는 댐과 마을을 지키는 역할이었지만 그들은 모두 마을을 위해 댐과 사택을 지키는 건 아니었다. 그들이 지킨 건 철저하게 자신들의 욕망이었고 욕망을 이루기 위해 욕망을 견디는 사람들이었다.
우리는 금지된 것을 더 많이 욕망하는 존재이고 금지의 대부분은 부모와 사회로부터 박탈당한 쾌락에 속한다. 그렇다면 현재 작동하는 인간의 욕망은 과거 금지의 흔적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오영제와 최현수의 욕망이 아버지로부터 금지된 흔적이라 본다면 그들이 세령을 견디지 못한 심정이 십분 이해가 된다. 세령을 통해 자신의 과거와 미래를 동시에 본 현수는 금지된 욕망과 충돌하였기 때문에 끝내 분열된 주체가 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세령은 마을에 존재하지만 실재하지는 않은 무의식의 거울, 자기 반영의 호수였던 것이다. 우리는 자신을 자세히 보고 싶어 거울을 바라보지만 막상 그 거울과 조우했을 때 감당하기 힘든 진실을 확인하고 싶지 않아 거울을 깨버리는 존재인 것이다. 희생양을 원했으면서 희생양과 정면 대결하지는 못하는 거울 반대편의 주인공들인 것이다.
이제야 인간은 자기 삶을 지키기 위해 자기 욕망을 사수하는 존재라는 것을 알겠다. 그런데 그 욕망이라는 것도 실은 내 삶에 개입된 아니 죽음으로 이어진 내 부모, 내 자식, 내 친구, 내 연인의 욕망일 수 있다는 것에 동의할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지킨 것이 실은 타자의 욕망이었고 그럼으로써 나를 지키지 못하는 삶이 된다면 우리 삶은 얼마나 비현실적인 것인가. 희생양으로부터 희생이 되는 어이없는 순간인 것이다. 애초부터 나는 나를 범하는 나와 운명적인 공범자임을 인정하자. 무엇이 악성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악성은 원래부터 존재하던 것이었다. 우리는 누구나 마음 깊숙한 곳에 자신만이 숨겨둔 우물이 있다. 그 우물을 박차고 나와 넓고 자유로운 바다를 온몸으로 만끽하고 싶은 욕망도 있다. 그러나 깊고 넓은 해저에 나 혼자 서 있다는 공포 때문에 더 이상 바다를 돌파하지 못하고 다시 익숙했던 우물 속에 갇힌 적도 있다.
다시, ‘7년의 밤’을 생각한다. ‘7년의 밤’은 현수가 사건 당일부터 수없이 그날을 생각하는 시간이었다. 오영제가 숨어서 유령인간으로 지낸 시간이었다. 문하영이 세령을 그리며 서원에 조력하는 시간이었다. 승환이 어렵게 이야기를 완성해가는 시간이었다. 서원이 아버지의 진실을 알게 되는 시간이었다. 이렇듯 ‘7년의 밤’은 모두 사건으로 헤어진 후 각자 자신을 성찰하는 시간에 해당하므로 소설적 진실성을 확보하는 기간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그 시간은 누구나 상처받은 후 각자의 입장에서 과거를 회상하며 다시 미래의 승부수를 계획하는 시간인 것이다. 그 시간은 세령호에 수몰된 마을처럼 묻어둔 진실이 진실을 기다리는 시간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에겐 기꺼이 ‘7년의 밤‘을 보낸 후라면 새로운 기회가 주어질 수 있다는 희망의 시간이기도 한 것이다.
한 편의 소설로 희망을 건져내기 힘겨운 세상을 살고 있다. 나는 이 책 한 권으로 인간 본성을 밑바닥까지 확인하였기에 처절한 패배감을 얻게 되었다. 하지만 그 서글픔 속에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왜 계속 살아가야 하는지, 아니 왜 벼랑 끝에서도 죽음이 아닌 삶을 택해야 하는지 조금은 알 것 같다. 운명은 희망을 놓지 않는 사람에게는 언제나 마지막 남은 공을 던져주기 때문이다. 공을 쳐내든지 잡아 내든지는 모두 공평한 우리 자신의 몫인 것이다. 내 인생의 마지막 공은 무엇일까. 내가 인생에서 지켜야 할 ‘무엇’을 생각한다. 그 ‘무엇’을 위해 죽어도 좋을 것 같은 나를 떠올려 본다. 내 속에 여전한 두려움, 시기심, 분노, 원망, 자만심, 패배감, 이 모든 것들이 ‘7년의 밤’ 동안 다시 조율되어 마지막 승부수를 띠울 그날을 기다린다. 마지막에 웃는 자는 그 직전까지 울었던 자임을 잊지 않으련다. 중요한 건 ‘7년의 밤’, 그 이전도 그 동안도 아닌 그 이후이다. 그 후로도 오랫동안 나를 살게 할 나만의 희망의 밤을 위해 나는 오늘도 7년 중인 밤을 기쁘게 맞이한다. 깊고 아득해도 벅찬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