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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들, 하시죠?

나의 책동무, 글친구 님들...

올 여름에도 어김없이 무더위와 장마가 오는군요.

빗소리를 오랜만에 들어봅니다. 촤르르 자동차 한대가 지나가면서 물소리를 뿌리고 가네요.

 

 

저는 요즘 좋은 문장에 대한 압박, 의미 있는 서평, 감동 주는 사연, 적절한 보상과 기쁨,

이런 것들과 아주 멀어진 채, 책과 글과 되도록 멀리 떨어져 살고 있습니다.

몸으로 하는 일에 익숙해진지 꽤 시간이 흐른 듯 합니다. 그래서 각 잡고 글을 쓰는 것도 오랜만이네요.

 

 

책이라는 집안에 박혀 나오고 싶지 않았던 세월이 있었는데

그때 알게 된 것들이 있다면 세상에는 내가 읽는 책을 읽었거나 읽는 중이거나 앞으로 읽겠다는 사람들이

참 많더라는 것입니다. 그땐 1년에 단 한권의 책을 사지도 읽지도 않는 사람들은 대체 무엇을 하고 살까 생각이 있는 사람들인가 그런 생각을 하곤 했었습니다. 바로 그때 한심하다 여긴 사람들 중 한사람이 되어 일 년에 거의 손 꼽을 정도의 책을 사서 그중 또 기억나지 않을 만큼의 책만 읽으며

책 같은 건 개나줘라면서 스스로 책과의 이별을 지속시키곤 했습니다.

(다음의 책에 의하면 바빠서 책을 읽지 못하는게 아니라, 책을 읽을 마음이 없기 때문에 바쁘다 말하는거죠)

 

 

그러던 중 사람의 마음은 영원할 수 없으므로

갑자기 다시 서점을 기웃거리고 알라딘을 접속하다가 나도 모르게 장바구니를 클릭하고

몇시간 만에 책을 덮고 나서 이 책이 좋다며 지인에게 전달하는 제 모습을 보았어요.

누가 그랬던가. 어떤 여자 집에 갔는데 서재에 책 한권 없는 여자와는 섹스를 하지 말라고 유명한 작가가 그랬다죠.

집안에 책이 너무 많아 이사할 때 알라딘 중고 서점에 한 트럭 갖다주고 엿바꿔 먹듯 룰루랄라 한 게 다시 후회되네요.

 

 

그렇게 전달해준 책이 바로

<미움받을 용기>예요.

 

전에 같으면 밑줄 그은 구절들을 열심히 적어가며

그 문장들을 나름대로 재해석하고 의미 부여를 하고

나만의 또 다른 결론을 내고 하겠지만

글쎄, 이젠 그러고 싶지가 않네요. 그렇게 하고 싶어도 현재 제 수중엔 책이 없습니다.

이 책을 건네 받은 사람과 아까 통화를 했는데

다행히도 읽을 만하다(일년에 책 한권 안보는 사람입니다)는 군요.

 

이 책에서 가장 와 닿았던 내용은 경험 때문이 아니라 그 경험에 부여한 자신만의 의미가 결국 지금의 행복과 연결되어 있다는 부분입니다. 이 부분에서 저는 자연스레 불교를 떠올렸어요.

 

 

우리가 인생을 심각하게 사는 이유는 바로 내 자신, 내 인생에 너무나 큰 의미를 부여하기 때문이잖아요.

토끼나 고양이처럼, 태어났으니까 사는 것에 불과한데 인간만이 생에 의미를 부여하고 왜 사나, 어떻게 사나, 죽을 때까지 고민하는 것. 일은 되도 하는 것이고 안 되면 다른 일을 하면 되는 것인데, 꼭 잘되어야 한다고 집착하는 것. 이미 지나가버린 과거에 집착하고 앞으로 오지도 않은 미래에 대한 망상으로 오늘을 망치는 일상. 그런 오늘의 반복으로 뭣 때문에 일을 하고 허겁지겁 사람을 만나고 돌아다니는지도 모르는 채 일주일, 한 달, 한 계절, 일 년을 보내고 다음해에 나이 먹었다 한탄하는 습식.

 

 

늘 지금, 여기를 살지 못하고 그때 거기나 다음 저기에 사는 우리들, 어쩌면 당신과 나를,

아주 아주 짜릿하게 돌아보게 하더군요.

저는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더불어 스님의 책도 한권 주문했습니다.

그건 오늘 아침에 문자로 전달되어 온 법문 한 구절 때문이었어요.

 

평온한가요?

지금 마음이 평온한가요?

불편한 마음은 어디서 올까요?

관계에서 불편한 마음이 온다면 내려놓으세요.

나로 말미암아 마음이 불편하다면 미안하다 말하세요.

한걸음 떨어져서 보면 편안해집니다.

넓은 바다를 생각하세요.

나는 강물에 불과합니다.   <마음꽃을 줍다> 중에서

 

 

 

흘러가는 강물과 같은 내 마음.

생겨났다 사라지는 그 어떠한 감정도 통과시켜버리면 그만인 것을.

 

 

공교롭게도 두 책이 인간관계를 말하고 있어요.

이 이야기는 역으로 우리가 인간이고 나 아닌 인간들과 관계를 맺고 있다면 우리는 죽는 날까지

그로인한 불편함과 싸우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뜻이기도 할테죠.

 

 

비오는 금요일, 주말을 앞두고 지금 내 마음이 불편한 이유는 무엇인가... 다시금 돌아보게 만드는 책들이네요.

 

 

어느 드라마에선 더 미안한 사람을 만나지 말라고 하던데

그건 잘못된 거 아닐까요. 미안하다면 미안하다고 말해야 하는거... 아닐까요.

 

 

미안해서 보지 않는 것보다는

미안하니까 얼굴보며 그 미안함 전하는거,

 

 

그 쪽이 더 마음 편한 일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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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5-07-24 17: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재에 책이 없어도 열심히 읽은 사람은 다 알죠.
그런데 뉘앙스가 묘해요. 그렇다면 서재에 책이 그득하면
그 방면에 탁월한 건가요? 나 같은 사람은 어쩌라고...ㅋㅋ
저도 더위만 가시면 한 박스 정도 추려서 중고샵에 팔아버리려고
벼르고 있습니다.

오랜만이네요. 그동안 잘 계셨습니까?^^

책읽는나무 2015-07-24 16: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사랑님!!
잘지내셨어요?^^
한 번씩 어찌 지내시나?궁금했었어요
책을 읽진 않았으되 그만큼 님의 마음을 빼앗는 즐거운일?이 많았으리라 생각합니다
전 님을 뵙게 되니 반갑네요
자주 뵈어요
무더위도 같이 이겨내자구요~~~♡
 
그 후에
기욤 뮈소 지음, 전미연 옮김 / 밝은세상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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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는 동행


벌써 오년 전인가...뉴욕 맨하튼에서 며칠 머무면서 높이 솟은 빌딩들 틈 사이로 칼바람이 날카롭던 초겨울, 마찬가지로 거대하던 센트럴 파크와 5번가의 쉬크한 매력에 짓눌려 타임스퀘어 광장에 빈번하던 우리나라 기업의 로고가 가슴 벅차게 반가웠던 기억. 이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누가 뭐래도 세계최고라는 자부심만은 사라지지 않을 듯 보였고 세계 수많은 도시 가운데 뉴욕에서 살고 그곳에 일자리가 있다는 것은 거리의 청소부라도 성공한 것으로 생각될 만큼 도시의 도시다움이 압도적으로 느껴졌다.

이 작품의 주인공인 네이선이 바로 뉴욕의 유명한 변호사로 등장하며 그의 아내는 보스턴의 보수적 백인가문의 딸로 등장한다. 물론, 네이선이 처음부터 뉴욕에 살면서 부모와 가정환경 모두 너그럽지는 않았다. 마치 우리의 7,80년대를 배경으로 한 미니시리즈 극본의 전형을 보는 것처럼 그의 어머니는 미래 그의 아내가 될 말로리의 집에 가정부로 일자리를 얻게 된 이탈리아계 빈민층이었기에 어린 시절부터 그의 야망은 남달랐을 것이며 오로지 투쟁적인 성공을 위해 불철주야 자신을 연마해온 꽤 똑똑한 매력남이었을 것이라는 것은 어쩌면 하나의 공식과도 같을지 모른다.

여기에 변호사로서의 성공과 장인으로부터의 인정이 자신이 말로리의 '한 남자'라는 가장 큰 필수적 정당요인이라 생각한 그는 일을 우선시한 우연의 실수로 몇 개월 되지 않은 아들을 잃게 되고 그 댓가로 인해 말로리와 이혼까지 하게 되며 이것은 네이선 인생의 위기의 출발점이 된다. 여기까지는 허리우드 식 로맨틱 코미디에 자주 등장하는 뉴욕에서 성공한 남자들의 외면적인 모습을 쉽게 상상할 수 있었다. 그 다음은 언제나 진정한 사랑을 되찾아야 할 것이고 그로인해 삶의 가치를 다시 인식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기윰 뮈소는 이야기의 방향을 결코 진부하게 전개시킬 작가는 아니었다. 지금까지 언급한 내용은 사실 이야기의 초반부도 차지 하지 않을 만큼의 상황적 배경에 지나지 않는다. 여덟살 때 이미 물에 빠져 익사한 자신을 치료한 적이 있는 굿리치 박사와의 만남과 그로부터 전해들은 사람들의 죽음과 그것을 어쩔 수 없이 눈앞에서 목도해야 하는 장면들까지도 우리는 자극적인 상황에 이끌려 이야기의 방향이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인지 자꾸 잃어버리기 일쑤고 나만 따라오면 된다고 하여 따라가 보면 여지없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의외의 장소에 도착하고 마는 길잃은 어른처럼 어리둥절해지기만 한다.

작품 중반이후 네이선이 딸과 휴가를 보내기 위해, 아내와 대화의 시간을 가지기 위해 모든 것을 뒤로 하고 성찰과 실천의 시간을 가지는 것에서 진정한 행복에 대해 같이 고민해보는 기회를 선사하기도 하고 장인과 서로간의 과거 인간적인 비밀이 밝혀지고 극적인 화해가 이루어지는 부분에서 소설 읽는 재미를 느끼기도 하지만 역시 이 작품은 후반부로 가면서 속도를 주체할 수 없게 만드는 엄청난 가속력의 호흡과 반전을 위해 그동안 달려온 만큼의 에너지가 엄청나다는 것, 막연히 예상했을지 모르지만 마지막에 와서 통렬한 깨달음으로 배신을 뛰어넘는 '믿음의 카타르시스'를 제공한다는 것일 것이다.

누군가의 죽음을 알고 그것을 알려주는 역할의 메신져는 어떻게든 죽음을 막아야 하는 운명이 아닌, 살아 있는 순간이라면 죽음의 문턱까지 기꺼이 동행해 주는 삶의 동반자였던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들의 죽음을 미리 알고 그것을 지켜보기만 하는 것은 어쩌면 따라서 죽는 일보다 더 힘겨울지 모른다. 이 작품은 사후세계나 임사체험, 혹은 죽음의 의미에 대한 소설이 아니라 '살아있는 동행'에 관한 이야기 인 것이다.

즉, 죽음을 맞이한 당사자 입장에서의 고뇌나 깨우침을 중심에 놓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알고 바라보는 상대(가족이나 연인, 친구)의 입장에서 그 사실을 어떻게 받아 들이고, 어떻게 현명하게 상대를 죽음의 길까지 인도할 것이며, 상대가 떠난 후엔 그렇다면 어떻게 生을 계속해야 하는지에 관해 아주 영리하게 반대상황 속에서 설명하고 있다. 독자들은 이 입장이 어느 순간 바뀌게 될 때 '내가 죽을 수도 있다'는 알고 있는 절망에서 '내가 죽는 걸 바라볼 수도 있다' 는 모르고 있던 절망에 맞닥뜨리면서 '죽지 않는다는 희망'보다 '바라보아야 하는 절망'이 더 클 수 있는 이율배반적이고도 이타적인 기쁨을 맛보게 되는 것이다.

결국, '우리가 나중에 다 가게 되는 곳'이라 함은 누가 먼저가 되었건 한번은 죽음의 당사자로서 또 한번은 죽음의 목격자로서 두 가지 역할을 모두 겪을 수 밖에 없는 우리들에게 마음의 평안을 제공하며 작가가 제시한 반전에 더 열렬한 타당성을 부여하게 되는 것이다.

책을 덮고는 배경이 어디가 되었건 인간이 벌이는 일들과 그 유형이 아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한 익숙한 장치들은 '죽음의 메신져'라는 지극히 소설적인 장치를 무리없이 받아들이게 하는 냉장고 속에 늘 있을법한 각종 야채들과도 같았고, 무당이나 예언자 같은 신과 접신한 사람들에게 흔히 볼 수 있을 것 같던 메신져라는 존재를 설득력있게 만들어준 조연이었다. 대중성과 통속성이 어디선가 본 듯한 장면들로 통속적인 서사를 전개해 나가는 것이라면 이 작품은 그 대중성을 이미 뛰어넘어 터무니 없는 소재들도 지극히 일상적인 것으로 느껴지도록 하는 超대중적인 일상적 환타지가 비로소 현실과 동일시 되는 작가만의 독창적인 일체화(Identification)로 깊은 울림을 주는 소설이었다. 원제가 되었던 <완전한 죽음>이란 그렇게 죽음으로 가는 길을 같이 동행해주는 '바라보는 자' 와 죽음을 '맞이한 자'서로간의 합체된 마음을 상징하는 것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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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찾아온 철학씨 - 문득 되돌아보고픈 인생
마리에타 맥카티 지음, 한상석 옮김 / 타임북스 / 2010년 6월
평점 :
절판



먼저 이 책을 처음 받아보고 예상대로 묵직한 종이감에 전공 이론서적의 개론서같은 느낌을 받은 것이 사실이다. 언급되는 철학자들도 절반정도만 들어보았을 뿐 일상에서 철학을 통해 행복해지는 것은 막연하고도 멀어보였다. 하지만 막상 뚜껑을 열자 저자도 권유했듯이 소개된 10개의 챕터에 제시된 이론과 방법만으로도 매 시간 주제를 가지고 다양한 방법의 토론을 전개할 수 있을 만큼 구체적이고 유용했다. 각 주제들마다 철학자들의 배경과 이론을 소개한 후 정답없는 질문들을 답 없이 쏟아 내고 마지막 철학도구들(듣고 흥얼거리기, 낭독하고 쓰기, 읽고 말하기, 보고 생각하기, 몸으로 철학하기)을 통해 생활 속에서 행복해 질수 있는 방안들을 정리해준다. 특히, '창밖을 내다보라', '손에 흙을 묻혀보라'와 같은 실천지침을 머리로 생각하는 철학에서 발전해 몸으로 옮기는 철학으로 하나의 체크리스트처럼 친절하게 권유하는 디테일은 이 책을 선택한 독자들의 수확이자 즐거움이 될 것임에 틀림없다. 
 

1. 단순함 SIMPLICITY - 에피쿠로스와 샬럿 조코 백
쾌락주의로 잘 알려진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나 몇 천년이 지난 후 불교의 가르침을 전달하려는 학자나 변하지 않도록 주장하는 것은 급하게 서두르지 말라는 것이었다. '단순함'의 반대개념은 복잡한 것도 포함하지만 무엇보다 속도의 수위조절을 언급하고 있다는 점에서 빨리빨리 증후군에 시달리는 우리들이 가장 우선순위로 새겨야 할 명제였다. 단순함은 '우리의 정신을 닦아주는 걸레'라는 정의 또한 정신이 깨끗해야 생활이 단순하다는 진리를 암시한다는 점에서 단순함은 '깨끗함'을 상징하며 이는 곧 '더러움'과도 반대되는 개념이라는 걸 새삼 알 수 있었다.
나는 지난 일 년 간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물건들은 과감하게 버리라는 어느 교수님의 조언이나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는 古박경리 작가의 유고시집을 떠올렸다. 만약, '단순함'을 주제로 토론을 했다면 나는 단연 무엇이든 자주 버리는 내 습관을 예로 들며 몸으로 철학하기를 주장 할 것이다. '한가함'을 참을 수 있는가에 대한 니체의 질문에 가만히 앉아 있으라는 지침으로 답하고자 한다.

2. 의사소통 COMMUNICATION - 칼 야스퍼스와 글로리아 안잘두아
대화를 통해 서로의 차이를 극복하고자하는 독일 학자 칼 야스퍼스의 의사소통과 정체성을 확인하는 수단으로서의 언어와 그를 통한 세상과의 소통에 중점을 둔 멕시코계 미국인 안잘두아 모두 궁극에는 '나'자신의 탄생과 연결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대화가 통한다는 기쁨은 아무리 최첨단 의사소통의 매체가 넘쳐나도 언제나 신제품의 탄생보다 설레인다. 그렇기에 소통이 단절되었을 경우 그 좌절감도 정비례할 것이며 그것은 결국 지극히 개인적인 문제로 귀결된다. 말이나 글 또는 침묵까지 그것을 소통시켜야 할 상대를 전제로 하는 것에 비해 소통의 부재에서 오는 결과들은 일방적일 경우가 많을 것이기 때문이다.
베토벤의 전원 교향곡을 듣고 베토벤에 맞추어 시를 한편 쓰라는 지침이나 어린 시절의 추억이 깃든 음식을 가져와 음악을 들으면서 시파티를 열어보라는 실천적 도구들이 더없이 반가웠다. 그전에 소통의 노력으로 인한 상처들까지 치유해주는 효과가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3. 시각 PERSECTIVE- 버트런드 러셀과 메리 울스턴크래프트
세상을 보는 관점을 시각이라 한다면 나는 어쩐지 망원경과 색안경이 제일 먼저 떠오른다.
더불어 나이가 들면 다양하게 쌓여진 경험으로 세상을 보는 능력치가 높아지고 더 깊이있는 시각을 형성할 것이라는 기대를 가져보지만 실제 나이를 먹으면서 실감 하는 것은 오히려 한번 굳어진 시각을 좀처럼 바꾸기는 힘들다는 생각이 지배적이다.
여기 소개된 한명의 철학자는 '현실적인 인간'에서 벗어나 망원경을 꺼내어 시야를 확보하고 우주적 동반자가 되어 작은 자아를 벗어나라는 이상적인 주장을 펼쳐 보이고, 한명의 여성학자는 여성의 독립적인 삶을 위한 창의적 가치관을 주장하고 있다.
가장 현실적으로 다가온 것은 익숙하지 않은 장르와 예술가를 통해 고정된 시각을 좌우로 움직여 보라는 메시지였다. 지구의를 돌리고, 망원경을 이용해 하늘을 보고, 세계지도를 거꾸로 보고, 다른 나라의 뉴스를 들어보고, 악보를 음으로 느껴보라는 철학도구들은 입체적인 해결방안으로 느껴졌다. 이렇게 해서 얻어진 우주적인 관점으로 세상과 소통할 수 있다면 참으로 행복하겠다는 생각도 새삼 들었던 항목이다.

4. 유연함 FLEXIBILITY-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앨런 와츠
바로 앞장에서 언급한 시각과 연관성이 깊은 항목으로 철학자들 모두 '변화'를 제시하고 있다. 사고를 자유롭게 하는 유연성을 이야기 할 때 소크라테스의 '질문'과 플라톤의 '동굴'을 상징적으로 강조하고 어두운 정신에 갇혀있지 않기 위해 와츠가 제시하는 삶은 한마디로 힘빼기로 요약할 수 있겠다. 파도가 오면 올라타서 자연스럽게 파도를 타는 것처럼 피하려는 고집에서 벗어나라는 가르침은 흡사 강한 정신력으로 경기에 나선 운동선수를 연상케 했다.
철학적 도구들은 어느 장보다도 더 구체적이었고 그리스 전통에 따라 디저트 시간과 그 후에 한 가지 철학적 주제를 논하는 방법과 여백의 미를 느껴보기 위해 중국과 일본의 풍경화를 감상하라는 팁은 놀랍고 인상적이었다. 이미 정신과 감정의 유연성을 확보하고 있는 입장인 우리로선 고맙고 뿌듯한 일일 것이다.

5. 공감 EMPATHY - 달라이 라마와 마턴 루터 킹 2세
타인의 감정을 내 것처럼 느끼는 공감은 '겸손'이나 '배려', '위로'와 같은 말로 해석되었다. 세계평화를 위한 딜라이 라마가 표적으로 삼은 인간의 무기는 이기심, 분노, 적개심이었고 킹 박사는 증오와 분노를 없애기 위해 배양해야 할 것이 공감과 사랑이라 하였다. 즉 배려가 전제된다면 공감이 형성되고 용서를 할 수 있다는 논리는 다분히 종교적으로도 보였으나 공감을 가장 범세계적으로 훌륭히 수행하고 있는 분들이 종교인이라 볼 수 있으니 이 장에서의 공감은 개인적인 감정수용의 단계에서 보다 발전된 타자나 세계로 확장되는 개념의 공감의 효과까지를 그 범주로 이해하는 것이 맞을 듯 하다.
철학적 도구에서는 공감의 출발이 될 수 있는 예술가들의 배경과 경력을 강조한다. 하나의 예술작품을 창작할 당시의 예술가의 처한 상황과 심경을 알고 작품을 감상하는 것과 같은 논리일 것이다. 가장 공감했던 항목은 어느 조용한 하루, 당신 자신을 용서 할 수 있는 한 가지를 골라 실제로 용서를 하라는 지침이었다. 다른 사람을 공감하기 위해 먼저 나를 용서 해보는 것, 공감의 출발 역시 '나'에 대한 이해로 받아들여졌다.

6. 개성 INDIVIDUALITY - 장 폴 사르트르와 엘리자베스 스펠먼
나를 상징하는 어떤 독특한 성격이라기 보다 나 자신을 이루고 나의 인격을 만드는 모든 것에 더 가까운 '정체성'의 다른 말로 이해되었다. 사르트르는 반대개념으로 자기를 부정하는 자기기만과 편견을 개성의 도피처라 규정지었고, 스펠먼은 성이나 직업을 체크하는 네모상자와 권력을 상징하는 문의 열리고 닫히는 순서를 비유로 개인의 고유성에 따른 분류와 그로인해 굳어지는 편견은 경계와 관용으로 치유해야 한다 주장한다. 가장 놀라왔던 것은 편견이나 자기기만의 사례를 초등학교 3학년부터 토론하고 대화하는 모습들이었고 인종, 출생지, 성, 직업, 결혼유무 등 수많은 개성만큼의 같은 비율의 편견을 해결하려는 노력들이었다.
모든 예술매체를 통해 자신을 충실히 묘사하라는 항목이 가장 현실적으로 와 닿았고 그렇게 표현된 자신과 실제 자신 사이의 괴리를 통해 어느 정도 내가 알고 있는 '나'를 만들어 객관적으로 '나'의 개성을 확인할 수 있을 것 같다.

7. 소속 BELONGING - 알베르 카뮈와 리타 메닝
소속이라하면 역할이나 책임 같은 집단적 부채감이 먼저 떠오르지만 이 장에서는 소속감을 높이기 위한 '공동체 의식'의 함양을 결론으로 전해준다. 카뮈의 문학작품을 통한 사회정의와 공동체, 형제애와 리타 매닝의 지구공동체 세계관은 익숙한 주장들이었다. 개인적으로 오히려 공동체를 이루는 소속에서 인간이 엮어내는 관계들로부터 기인하는 어려움에 대한 논의가 아쉬웠다. 도입부에서의 내가 누구인지 내가 맺고 있는 관계나 연결이 나를 정의한다는 주장이 결론부에 이르면 공동체 정신으로 귀결되는 것 같아 이 장에서의 철학도구들이 조금은 현실적으로 부담스러워 보였다. 아무래도 앞장들에서 이미 '나'에 관한 성찰들이 이루어졌다고 판단, 사회적 유대나 시민적 참여를 강조했다고 여겨진다.
아는 사람 중 외부인(outsider)으로서 고통받는 사람을 생각해내고 그 사람에게 조용하게 소속감을 느끼게 하라는 지침 정도가 '나'와 소속을 이룬 상대를 연결하는 상호보완적인 지침이 아니었을까 싶다.

8. 평온함 SERENITY - 에픽테토스와 노자
저자는 앞서 언급한 주제들인 단순함, 의사소통, 시각, 유연함, 공감, 개성, 소속감, 이 모든 것이 평온함의 무대를 마련해준다고 한다. 이성이 지배하는 우주를 강조한 고대철학자나 자연의 리듬에 맞추어 살아가라는 노자의 <도덕경> 모두 통제된 감정조절과 생활양식, 그로얻은 여유를 이야기 하고 있다. 우리로 말한다면 아마도 복잡한 세상에서 스트레스 없이 마음의 평정을 얻어 지속적으로 살아가는 일관된 삶의 태도라 할 수 있겠다.
물과 함께 지내는 시간을 가져보고 손에 흙을 묻혀보라는, 무엇이든 움켜진 자신의 손을 바라보고 손의 힘을 천천히 풀어보라는 충고들이 피부에 먼저 와 닿았다.

9. 가능성 POSSIBILITY - 존 스튜어트밀과 시몬 드 보부와르
무엇을 시도 하기 전의 잠재적인 가능성 보다는 오히려 무언가를 실패 한 후에도 다시 도전할 수 있는 용기나 장애물을 극복하려는 의지를 이야기 한다. 그런 면에서 밀의 교육적인 주장들보다는 여성성의 자유를 상징하는 보부와르의 '현실 뛰어넘기' 개념이 더 매력적이었다. 그녀 스스로의 한계를 뛰어넘기 위한 노력들과 미래를 향한 열정들은 철학을 이야기 할 때 가장 능동적이고 육체적인 행위요소로 느껴지기도 했다.
내 경우엔 가능성을 논의할 때, 흔히 등장하는 오른팔 피아니스트 폴 비트겐슈타인이나 두 다리 없는 운동선수의 경험담과 그 업적 보다는 언제나 가깝게 존재하는 사람들의 성공이나 재능에 더 관심이 간다. 아무리 손을 뻗어도 도저히 닿을 수 없는 곳에 위치한 듯 보이는 사람들 보다는 조금만 뻗으면 닿을 것 같은 현실감이 아쉬웠다.

10 기쁨 JOY- 스즈키 순류와 제인 애담스
저자도 밝혔듯이 기쁨이란 앞장의 주제들과 달리 정의면에서 그 경계와 모호성이 두드러지는 항목이다. 행복이나 쾌락과도 비슷한 기쁨을 감사로 인해 충만해진 순수한 마음이라 말하며 철학의 실천적 방법의 하나로 기쁨을 제시하고 있다. 제시된 스즈키의 심호흡은 종교적으로 보이지 않고 신선했으며, 제인 애담스의 생각을 실천에 옮긴 사회사업과 봉사활동은 이 책의 마지막 장에 제시된 방대한 주제의 결론과도 같이 느껴졌다. 자연스레 이어지는 감사의 생활은 결국 기쁨이 충만한 상태에서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귀결되고 그러한 행복한 삶이야말로 철학을 배우고 그것을 온몸으로 실천하는 일이라는 깨달음이 마치 천천히 걷고 나니 주변의 풍경이 보이기 시작한 경우라 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좋다!, 한번 더 살아보자!, 당신도 당신의 삶을 다시 살아 보고 싶은가?
니체의 기쁨의 찬가 <취해서 부르는 노래>의 한 구절이 아직은 제정신인 우리들을 기쁘게 할 것이다
그러고 보니 내가 찾아가 살폈다기 보다는 우연히 나를 찾아 온 것은 맞았다.  
'나를 찾아온 철학氏'는 어색한 손님이었지만 반가운 친구로 남을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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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비 2010-07-07 1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평 잘 보았습니다^^
 
환상의 빛
미야모토 테루 지음, 송태욱 옮김 / 서커스 / 2010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지나치게 슬프지 않으면서도 더 할 수 없이 쓸쓸하다.
혼자남아 못 견디게 외롭다기 보다 견딜 수는 있겠지만 그것을 삼켜내는 주인공의 마지막 독백은 오래 기억될 만한 장면이었다. 

5년 전 일본 최북단에 위치한 아오모리현을 어렵게 방문한 적이 있다. 도쿄나 오사카위주의 출장에 비하면 교통이나 숙박, 기후 모든 면에서 불편한 점이 많았다. 하지만 늦가을이었는데도 오후 네 시면 해가 지는 아쉬움을 달래주기라도 하듯 마을은 온통 해같은 노을로 불타올라 잊을 수 없는 풍광을 선사하곤 했다. 흡사 우리나라 남도의 농촌을 방문한 느낌도 들었고 버스를 타고 들어선 마을의 풍경은 그야말로 평화로와 보였으며 가끔씩 지나가는 사람들이나 낮고 아담한 가옥, 잔잔한 나무들은 한없이 여유롭고 따스해보였지만 어딘지 쓸쓸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두달 전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 참가한 일본감독의 <아제미치 댄스>라는 영화에서도 일본의 농촌풍광을 배경으로 논두렁(아제미치)을 점프하던 소녀들의 순수어린 모습을 기억한다. 바로 <환상의 빛>의 배경이 된 해안마을은 기존에 내가 그리고 있던 일본 시골마을의 모습과 일치했다. 

<환상의 빛>
<환상의 빛>은 유미코라는 서른 두 살 여인의 남편이 철로 위 전차에 치이는 방법으로 자살을 한 후 소소기라는 해변마을로 시집와 재혼한 남편과 전처의 자식, 그리고 사별한 남편과 사이에서 얻은 아들과 함께 살면서 늘 가까운 사람에게 일상을 건네듯 조근조근 자신의 심경을 편지글로 써내려간 작품이다. 배경이 어쩐지 낯설진 않았고 더구나 미야모토 테루라는 작가의 편지형식의 독백에 가까운 문체는 흡사 우리문단의 여성작가들을 연상케 할만큼 친숙하고 서정적이었다. 해안마을에 등장하는 풍어(豊漁), 해명(海鳴), 어항(漁港), 돌풍 등의 단어들은 지붕에 쌓인 눈이나 파도의 물보라와 잘 어울려지며 잔잔한 문체 속에서도 환상적인 시각성을 부여하였고 편지를 쓰고 있는 주인공의 심경변화를 훌륭하게 전달해주었다.

소설적 서사에 중요한 암시를 주는 할머니의 멀어져 가는 마지막 뒷모습이나 유미코의 초경, 강인한 모습의 재일한국인 아주머니, 같은 버스에서 내려 뒤쫓아간 남자의 아무리 손짓을 해도 절대 돌아보지 않을 것 같던 뒷모습, 풍랑에도 불사신처럼 다시 돌아온 도메노댁의 이야기들은 가끔씩 그녀의 편지를 잊게도 하였지만 결국 왜 아무말도 없이 내 곁을 떠났느냐는 간절한 질문들로 되돌아 오기 위한 장치였음을 알게 해주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아무런 준비 없이 어느날 갑자기 자신의 곁을 떠나버린 남편이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된 이유와 그러한 선택을 하기까지의 심경들을 오랜 세월 좇아가며 이해하기 위한 유미코의 눈처럼 부신 여정이 결국엔 더할 수 없는 아름다움으로 그녀의 슬픔을 전해주는 것 같아 읽는 내내 마음이 일렁거리었다.

소설 도입부에 '좀처럼 보기 드문 초록색으로 널찍하게 펼쳐진 바다에 한 덩어리가 되어 반짝반짝 빛나는 부분'은 마지막에 다시 '봄도 한창이어서 짙은 초록으로 변한, 거칠어지기도 하고 잔잔해 지기도 하는 소소기 바다의 모습'으로 재생된다. '바람과 해님이 섞이며 갑자기 저렇게 빛나는 바다 한쪽'으로 어쩌면 그날 밤 레일 저편에서 그가 보았을지 모를 빛으로, 바다가 아닌 세상의 것이 아닌 부드럽고 평온한 일각처럼 흔들흔들 다가가고 싶은 잔물결의 빛으로 환생한다. <환상의 빛>은 그녀에게 '죽음의 빛'이 아닌 다시 학교에서 돌아올 아들을 기다리는 '生의 빛'이 되었고 우리에겐 기분이 좋아졌지만 뜨겁고도 아픈 빛이 되어 삶과 죽음의 의미를 깨닫게 해주었다.

<밤벚꽃>
남편과 헤어진 지 이십년이 되었고, 외아들을 잃은 지 일 년이 되가는 쉰을 바라보는 아야코라는 중년여성이 바라본 벚꽃이 지는 순간의 삶의 아쉬움과 연민을 애절하게 그려낸 작품이었다. 바다와 벚꽃이 함께 보이는 낭만적인 자신의 집에 묵게 된 가난한 신혼부부의 첫날밤을 곁에서 같이 지새게 되면서 바로 그 순간 지금이라면 어떤 여자로도 될 수 있을 것 같은, 그러나 눈을 떼면 순식간에 사라져 버릴 것 같은 아련한 느낌에 너무나 공감한다. 흐드러지게 피었다가 눈꽃처럼 사라지던 벚꽃의 아스라함과 꽃이 지면 마치 봄날마저 사라질것 같던 그 봄밤의 향기를 누군들 잊을 수 있을까.
평범한 마을의 풍경과 늘 마주하던 계절이 그리는 그림으로 마음의 상태를 이야기 하는데공감을 하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박쥐>
이 작품에서 주인공의 청소년시절, 문제학생이었던 친구의 비행 장소에서 그 친구를 기다리며 어쩌면 친구의 비행을 방관하던 죄책감과 비겁한 동경등의 복잡한 심경을 암시하는 '박쥐'에 대한 소름끼침은 훗날 유부남이면서 미혼의 여성과 불륜을 지속하던 어느 가을날 검게 뒤섞이는 낙엽을 통해 비로소 비쳐지는 자신의 부도덕으로 부활하며 어쩔 수 없는 '박쥐'와 중첩된다.

-그것은 둔하고 까만 눈을 가진, 새라고도 짐승이라고도 할 수 없는 생물의 추악한 춤이며, 땀과 허무로 처발라진 관능의 무수한 비말飛沫이며, 기괴한 표정에 조종되는 그 영혼들의 어쩔 수 없는 술렁거림이었다. 134p

문제학생이었던 란도와 그다지 친하지 않았고, 우연히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것으로 더 심화될 수 있었던 자책감이 마지막 장면에서 떠올리는 박쥐로 어느 정도 해소되며 일말의 빚을 거두는 것으로 해석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그 술렁거림은 독자로 전해져 주인공이 갚아놓은 빚에 그다지 시원하지 못한 의문이나 약간의 배반감을 느끼게 되었는데 결국 누구나 자신의 이중적인 위선을 들키고 싶어 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궁색한 변명으로 남은 작품이었다.

<침대차>
이 작품은 주인공이 샐러리맨이고 출장으로 이동하는 침대차에서의 회상이 서사를 이루고 있어 소개된 네 편 중 가장 현실적으로 읽혀진 작품이었다. 우연히 맞은 편 좌석에 탑승한 말쑥한 노인의 상념에 빠진 듯한 시선과 밤새 들려오던 울음소리는 어린 시절 집에서 놀다가 익사할 뻔한 친구의 할아버지를 떠올리게 하고 결국 대학생이 되어서도 기차에서 떨어져 죽은 일이 생각나 비로소 장례식에서 뵌 친구 할아버지의 슬픔을 헤아리게 된다. 주인공은 고타니라는 껄끄러운 직속상사와 오랜 세월에 걸쳐 공을 들인 프로젝트의 계약을 목전에 앞두고 지나간 시간을 견딘 것에 대한 보람이나 스스로의 성취감에 젖어 있을 즈음이었다.

사람이 앞만 보고 달려갈 때는 보지 못하지만 막상 커다란 성취 후에는 보게 되는 것들이 있는 것일까. 살면서 내 머릿 속에 가슴 속에 피부 깊숙이 박혀왔던 삶의 파편들이 또다시 살아가면서 어느 순간에 문득문득 튀어 오를 때가 있어 당황하다가도 이내 상처에 대한 익숙함으로 현재의 고통을 잊게 될 때가 있다. 사람은 어쩌면 현재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보다 익숙한 상처를 습관적으로 불러와 자신과 마주하게 하는 것은 아닐까. 분명 이 작품을 접하고는 개개인의 비슷한 유형의 상처를 다시 상기하게 되는 낯설지 않은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막연한 회상에의 부질없음이 아닌 분명 지근 존재하는 외상에 쏟아 붓는 쓰라린 알코올과도 같을 것이다.

<환상의 빛>, <밤벚꽃>, <박쥐>, <침대차>이 네 편에서는 모두 인생에서 맺은 관계속의 사람들을 상실한 주인공들이 초록의 바다에 찬란한 빛이 떨어지거나, 화려했던 밤벚꽃이 지는 순간이거나, 가을에 어지러운 낙엽들이 뒹구는 순간 혹은 자신처럼 무언가를 잃은 듯한 타자의 스쳐지나가던 표정과 같은 찰나의 순간에 느껴지는 잡을 수 없지만 그래서 더 아련하고 절실한 것들을 깊고도 아름답게 그려낸다.

우리는 분명 이 아름다움으로 혹시나 아름답지 않았을지 모를 인생의 어느 순간들을 아무도 몰래 덮어주고 싶을 것이다. 어느새 상처에 새살이 돋듯 그렇게 시나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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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두드림 콘서트
유재원 지음 / 한국경제신문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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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의 이야기를 연주하다

인문학. 내가 아는 인문학은 철저하게 인문계냐 이공계냐, 인문계 고등학교냐 예체능계고등학교냐의 입시를 전제로 한 '인문'의 개념에 이분법적 분류에 따른 인문학이었음을 부끄럽게 밝히고자 한다.

인문학 : 인문학(人文學)은 인간의 조건에 관해 탐구하는 학문이다. 자연 과학과 사회 과학이 경험적인 접근을 주로 사용하는 것과는 달리, 분석적이고 비판적이며 사변적인 방법을 폭넓게 사용한다. 인문학의 분야로는 철학과 문학, 역사학, 고고학, 언어학, 종교학, 여성학, 미학, 예술, 음악 등이 있다.(위키백과 출처)

그 중에서도 인문학에 예술과 음악의 분야까지 포함되는 것을 확인하고 새삼 짧았던 상식에 헛웃음을 지으며 이 책을 열었다. 이 책은 비교적 '인문학'이라는 결코 가볍지 않은 상위범주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콘서트'라는 다분히 저자의 성향이 담겨진 결론과 '두드림(Do dream- 꿈을 이루다)'이라는 이 책이 지향하고자 하는 도달점을 잘 조화시켜 읽는 이로 하여금 부담을 주지 않고도 전달하고자 하는 바를 경쾌하게 암시하는 직설적이고도 분명한 매력을 지녔다.

어렵고 근엄해 보이는 법률가의 길을 가면서도 음악과 미술 등 다양한 예술을 통해 감성을 유지해온 그가 놀라왔고, 그러했기에 이 책의 마지막 부분에 그가 내린 결론은 더 뜻 깊게 다가왔다. 그가 제시하는 '박애'의 삶은 오랜 기간 자신이 읽고 떠올렸던 훌륭한 생각을 보다 많은 이들에게 전해주고자 하는 그의 '꿈'이자 그러한 인문학적 소양으로 법과 세상을 이롭게 하려는 궁극적인 '꿈'으로 느껴졌으며, 그는 자신이 제시한 삶대로 그것을 소신있게 실천하는 현재진행형의 사람으로 생각되었다.

이 책은 크게 사람(人)과 음악(樂), 미술(美), 문학(文), 그리고 마지막에 세상과 소통하는 마음과 저자가 지향하는 박애주의를 결론으로 제시하는 것으로 구성되어 있다. 서두에 사전적 의미로 제시된 인문학의 분야인 철학, 역사학, 고고학, 언어학, 종교학, 여성학, 미학, 예술등의 분야를 구체적으로 아우른다고 보기는 어렵고 또 그 선정된 기준 역시 개론적이지는 않지만 나같이 인문학의 범위에 예술분야가 포함되는 것도 간과한 독자들을 고려한다면 참 으로 친근한 카테고리가 아닐 수 없다. 특히, 구렁이 담넘어 가듯 술술 넘겨지는 책장들 사이로 한 챕터가 끝날 때마다 연보라색의 '인문학 숲의 단상'이라는 비하인드 스토리가 소개되는데 나는 이것이 마치 월드컵 뒷이야기를 읽는 것처럼 흥미롭고 즐거웠다. 사람들은 거창한 앞 이야기 보다는 어쩌면 시시콜콜 뒷이야기에 더 공감하고 고개를 끄덕이는지 모르겠다.

이 책은 결국 '사람들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겠다. 저자도 인문학이란 죽은 고전이 아니라 '사람에 관한 성현들의 이야기'를 머금고 오늘도 우리 곁에서 살아 숨쉬는 우리 삶의 일부라는 점을 발견했다고 밝혔듯이 등장하는 인물은 모두 음악가가 되었건 화가가 되었건 누구나 치열한 삶을 살면서 우리에게 뜨거운 메시지를 남겨준 사람들이었다.

먼저 칼라스와 오나시스, 재클린의 세기의 로맨스는 여기저기 떠돌던 이야기를 한데 모아 듣는 것처럼 도입부부터 강렬한 인상을 제공했다. 재클린은 더구나 뒤에 이어지는 케네디家의 신화에서는 조연이지만 숙명적인 대결구도에서는 행운의 승리자 였고 흥미진진한 드라마의 여주인공이었다. 마리아 칼라스나 재클린 케네디나 마지막은 그녀들의 화려함과는 너무나 대조적으로 쓸쓸했기에 세상은 알 수 없도록 불공평하다가도 또 누구에게나 삶은 공평하다는 생각을 하게 하는 일화가 아닐 수 없었다. 뒤이어 소개되는 케네디家의 신화 또한 여기저기서 한번 씩 지나쳤던 행운과 불운을 집대성하여 마치 한편의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 한 감동을 선사했다. 미국의 정치와 도전사를 상징한다는 케네디家의 끊임없는 열정과 집념들은 개천에서 용난다 격인 우리식 영웅 스토리를 생각케 하다가도 몇 대에 걸쳐 100년 넘게 이어져 온 살아있는 전설과도 같은 케네디家를 떠올리면 새삼 미국의 저력과 도전정신에 숙연해지기도 했다. 아널드 파마와 잭니클라우스의 골프계의 위대한 라이벌 이야기도 너무나 교훈적으로 다가왔다. 특히, 김연아와 아사다 마오라는 두 젊은 영웅의 라이벌 관계가 대비되며 아직 젊은 선수들에게 벌써 은퇴니 향후거처를 이야기 하는 현실이 안타깝게 여겨지기도 했다. 종목이 다른 스포츠의 특성과 국적이 엄연히 다른 한일 간 대결이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아널드 파마와 잭니클라우스의 서로를 존중하고 끊임없이 도전하는 열정, 은퇴후의 행보들은 어떤 스포츠 선수들에게도 훌륭한 교감이 될듯하다.

음악으로 넘어와서 저자는 고전음악으로 바하와 쇼팽을, 현대 대중음악에서는 아바를 이야기 하고 있다. 특히 고전음악에서는 오리지널 음악가와 그 음악을 가장 그 음악 답게 연주한 연주가의 생애를 중첩시키며 비슷한 성격, 환경을 가진 두 사람 간의 교감을 바라보고 느끼는 감회를 밀도있게 들려준다. 특히, 쇼팽의 즉흥환상곡을 들으며 화려한 파리 음악계의 가식적인 분위기에 맞추어 주는 듯 하지만 자신의 내면을 조심스레 내보이려 애쓰는 이방인 청년으로서의 쇼팽을 느끼고 그 외로움에 공감하였다는 저자의 감성은 녹턴을 비롯한 쇼팽의 연주곡을 다시 들어보고 싶게 만드는 부분이었다. 또 그러한 쇼팽의 기질을 쏙 빼닮은 피아니스트 상송 프랑소와 역시 비교적 젊은 나이에 갑자기 운명을 달리 하였다는 것과 두 사람의 시공간을 초월한 조우를 우연으로 보지 않는 저자의 공감대는 인상적이었다. 한곡의 곡으로도 그 음악을 작곡한 음악가의 일생과 고독, 그리고 이어지는 후대의 연주자, 그 두 사람을 모두 알고 감상하는 그의 모습에서 진정한 인문학을 바탕으로 한 미학적 감상의 최고치에 도달한 면모가 느껴졌다.

미술 분야에서는 <성모자화>를 그린 라파엘로와 모딜리아니의 삶과 예술을 이야기 하고 있다. 여기저기 스치면서 접한 기억이 있는 그림들이었지만 라파엘로가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와 비견되는 유일한 화가이며 37세에 요절한 화가인지는 처음 알았다. 성모와 그 품에 안기어 세상을 바라보는 아기예수의 그림이 언젠가 내게도 영혼의 휴식처가 될 순간이 오리라 믿는다. 모딜리아니는 워낙 유명한 화가인데다가 그의 여인이었던 잔느의 그림과 모딜리아니 사후 바로 연이어 자살한 잔느의 일화로 내게는 불행한 청춘이자 요절한 화가의 대명사쯤으로 인식되었던 화가이다. 하지만 그가 갈망했던 사람에 대한 그리움이나 이탈리아인으로서의 자부심과 정체성, 자신의 삶에 늘 만족했다는 일화들은 눈여겨 기억하지 못했던 이야기들이었다. 여인은 그를 따라 세상을 저버렸지만, 화가는 영원히 남을 그림으로 여인을 담아 내어 그림을 통해 여인을 느끼는 오늘, 그와 그녀는 아직까지도 혹은 앞으로도 영원히 행복할 것임에 틀림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

문학에서는 공자의 <논어>와 세익스피어의 4대 비극, 폰예링의 <권리를 위한 투쟁>, 이청준의 <당신들의 천국>을 이야기 한다. 고등학교 이후로 공자와 세익스피어를 잊었다. 그가 들려준 공자의 제자 안연과 자로의 죽음은 꽤나 낭만적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동양인으로서 공자의 사상을 자랑스럽게 기억해야 할 것이라는 그의 가르침이 어떤 교과서보다 진심으로 느껴졌다. 세익스피어의 비극을 이해하는 관점 역시 삶의 연극무대인 법정이라는 연극적 속성을 잘 파악한 연출가로서 평가하는 그의 시선이 같은 연장선상에서 정의롭게 느껴지기도 했다. 독일법학자라고는 하지만 법조계에는 문외한인 내가 처음 들어보는 폰예링의 <권리를 위한 투쟁>을 정의롭게 소개하는 것은 당연해 보였지만 많은 한국의 작가들 중 이청준의 <당신들의 천국>을 소개하는 것이 의아하게 느껴질 즈음 마지막 인문학 숲의 단상에 제시된 소록도와 관련한 사회적 문제와 여러 법적 투쟁에 관한 비하인드 스토리를 접하며 비로소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평소 이청준의 <병신과 머저리>를 워낙 인상깊게 읽은 터라 반갑기도 했지만 <당신들의 천국>도 진지하게 읽어봐야 겠다는 생각을 했다.

마지막에 제시하는 삶은 마더 데레사 수녀의 삶이다. 그녀는 세상을 떠난 지 십년도 더 지났지만 웬지 우리 곁에 늘 있는 사람으로 느껴진다. 그것은 아마도 김수환 추기경이나 법정스님 같은 종교적 삶을 몸소 실천하고 큰 가르침을 남겨준 성인들을 생각할 때 자연스럽게 여겨지는 존경심의 일환일 것이다. 나는 데레사 수녀의 일생과 '사랑의 선교회'를 전하려한 그녀의 끈질긴 시도들에 대해 너무나 무관심했다. 겉으로 보여 지는 베풀고 미소 짓는 모습만 바라보고 노벨평화상을 떠올리며 세상 한편엔 존재할 것 같지 않은 사람도 살고 있구나 까지만 생각했다. 저자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결국 박애주의라는 거창해 보이는 프랑스 혁명 당시의 3대개념 중 하나를 우리에게 끝내 제시하는 것으로 자신의 결론을 마무리 짓는다. 그런 의미에서 자신이 가진 것을 언젠가는 고마운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야 한다는 믿음과 그것을 실천하는 일의 하나로 보여 지는 이 책의 출간이 마지막엔 퍽이나 무겁게 다가왔다. 결국, 저자가 인문학을 통한 배움을 이렇게 나누어 주는 것으로 꿈을 실현해 나가는 현장에 마주한 것 같아 그 의지에 기꺼이 박수를 치면서 책을 덮어야 했다.

아름다운 사람이 되는 방법도 여러 가지 일 것이고, 꿈을 실천하는 방법도 저마다 다를 것이다. 책을 읽는 다는 것은 어쩌면 이 두 가지를 한 번에 동시에 이룰 순 없어도 천천히 한걸음 다가가는 가장 현명한 방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 시간들 이었다. 책을 많이 읽고 또 그만큼 더 많은 지식을 가진 사람들이 있겠지만 이 책의 저자처럼 자신의 전공과 상관없이 다양한 인문분야의 책을 섭렵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자신이 얻은 것들을 여러 사람들에게 즐겁게 나누어 주는 것으로 자신의 꿈을 실현시키는 신선한 '박애주의'는 기꺼이 닮아가고 싶은 자화상이자 따라가고 싶은 행보였다.

생생하고 잔잔한 콘서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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