댄싱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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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놀아본 언니에게

 

 

 

 

   아직도, 글로만 보면 내가 중년의 남성인줄로 아는 분들이 꽤 있다. 서재 타이틀이 일단 책방 아저씨이고 댓글도 최대한 점잖게 대응하고 리뷰에서도 제대로 정색을 하고 문체도 보수적이고... 암튼 내가 봐도 종합적 분위기는 무겁고 심각한 쪽이니까. 그런데 나는 얼굴보고 마주하면 이 분위기를 확 깨는 반전의 성향인지라 사실 일상과 글과는 영 일치하지 않는 사람이기도 하다. 그래서 일상에서의 지인이 온라인상의 나를 확인하는 것도 싫고(재수 없어 할 것이므로) 온라인에서 아는 사람을 일상에서 마주하는 것도(실망할 것이므로) 불편하다. 특히나 온라인에서 글로만 나를 아는 사람들은 근엄하게 앉아 책만 보고 도 닦듯이 글만 쓰는 줄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아 여간 부담스러운 게 아니다. 글의 내용도 기쁘고 밝은 이야기 보다는 주로 슬픔과 상처, 고독과 절망이 주를 이루므로 그만한 사연을 가지고 마지막(?) 한 가닥 희망을 놓지 않은 채(?) 꿋꿋이 살아가는 줄 아는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누구라도 온라인에서 알게 되어 실제로 만나게 되는 기회가 생기면 대부분 거절, 사양, 핑계, 포기로 일관한다. 여기서의 한사람과 눈앞에 있는 나를 일치시키기 힘들어 하는 모습을 확인하는 일은 나도 편한 일이 아니다. 온라인과 일상 모두를 알고 있는 사람은 그야말로 몇 안 되는데 이들도 원래부터 알았던 한쪽의 나머지 반쪽은 자세히 알지 못한다. 나는 나를 먼저 알게 된 그 한쪽대로 나를 대하는 상대를 배반하기 싫어 최대한 나머지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편이다. 보고 싶어 하는 대로 보여 준다. 왜 이렇게 이중적인 생활태도를 취하게 되었는지 돌이켜보면 처음부터 그랬던 것 같지는 않고 아마도 대학교 들어가고 나서부터 서서히 생겨난 것이 아닌가, 새삼 당시를 되돌아보게 된다.

 

 

 

   사실 나는 좀 놀아본 언니(?)에 속한다. 우리 나이에 왕년에 한번쯤 놀지 않았다고 하는 사람은 보지 못했지만 나는 대학생이 되어 이년 정도는 신나게 돈을 쓰며 놀았고 아버지가 쓰러지신 후엔 돈이 없어 방황하면서 놀았다. 죽도록 일도 했지만 궁금한 일은 대부분 몸으로 직접 체험하고 돌아다니면서 후회 없이 놀았던 것 같다. 결혼하기 전까지는. 이 영화는 바로 내 인생에서 가장 많이 놀았던 그 한 시절에 같이 놀았던 인물을 주인공으로 하는 영화이다. 엄정화가 (연대 사회체육학과) 91 학번 쯤으로, 황정민은 (고대 법학과) 71년생으로 나오므로 추정컨대 그들은 내가 뻔질나게 놀러 다닌 곳에 분명 함께 다녀간 적이 있을 것이다. 엄정화의 별명은 ‘신촌 마돈나’이고 대사 중에는 ‘독수리 다방’도 스쳐 지나가고 국회의원 사모님은 그녀더러 그 유명한 ‘X세대’가 아니냐 비아냥거리기도 한다. 엄정화가 나이트에서 무대 춤을 선보일 때 배경으로 흐르는 음악은 런던 보이스(London Boys)의 할렘 디자이어(harlem desire, 1987)이고 이 노래는 두 사람이 학교 앞에서 최루탄을 맞고 도망칠 때도 계속 멈추지 않는다. 꼭 써니에서 7공주가 피카디리극장인가 데모현장에서 전투경찰을 사이에 두고 불량서클과 육탄전을 벌일 때 흘러나오던 조이(Joy)의 터치 바이 터치(touch by touch)때와 비슷한 분위기라고 보면 된다.

 

 


  91학번 엄정화는 신촌가는 버스에서 마이마이를 듣고 있구나. 
  가죽팔찌, 찡팔찌, 야광팔찌... 특히 야광시계는 인정. 손목이 들어갈만한 왕귀걸이도 인정.
  그때 베네통 가디건과 아디다스 테니스 팔목보호대가 엄청 유행이었지, 하하하.

 

 

 

   사실 훗날 그 음악들이 이렇게 데모배경음악으로 훌륭하게 편집될지 누가 알았겠는가. 솔아 솔아 푸른 솔아 아니면 우리 같이 나아가리라 그런 노래만 듣고 우린, 눈물만 삼키지 않았던가.

 

 

 

   그러나, (영화속)엄정화가 나이트에서 날릴 때 한창 유행하던 음악은 할렘 디자이어는 아니었다. 런던보이스는 내 고딩 시절이었고, 내가 이틀에 세 번꼴로 나이트를 다닐 때 (89년에서 92년 사이)허구한 날 흘러나오던 음악은 바비 브라운(Bobby Brown)과 폴라 압둘(Paula Abdul)이 대세였다. 당시 Don’t Be Cruel과 Straight up은 강남역 월드 팝에서 분위기가 달아 오르기 전 시작을 알리던 오프닝 뮤직으로 많이 쓰였다. 우리는 강남역 뉴욕제과 앞에서 만나 다섯시 반부터 나이트를 입장하곤 했다. 그때 압구정동에 새로 생긴 카페에서 커피 한잔이 오륙천원 할 때인데 (나이트)기본이 만 오천원 이었다. 목화예식장 옆 ‘유니콘’이 거의 망해 갈 무렵 ‘월드 팝’은 당시 좀 노는 8학군 출신 대학생들의 거의 유일한 쉼터(?) 였었다. 싼 맛에 가끔 이대앞 ‘애프터’에서 과모임을 가지기도 했는데 물이 안 좋고 후져서 곧 망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강남역에서 역삼동 쪽으로 좀 내려오면 뉴월드라고 어중간 한 호텔 지하에 ‘당꼬’라는 나이트도 있었다. 거기 농구선수와 탤런트들이 왕왕 다녀가곤 했는데 이승철과 강문영, 허재도 본 기억이 있다. 반갑게도 엄정화는 정확하게 당시 유행하던 춤 두어 개를 추기도 했다. (그 부분에서 나는 딸아이에게 저거저거 그때 유행하던 춤이야, 이렇게 말하고 말았고 아이는 엄마 너무 크게 말한 거 알아? 흑, 이렇게 답했다...)아쉬웠던 건 중간에 브루스 타임이나 나이트 문 닫을 타임을 보여주지 않았다는 것인데 리얼리티는 살았겠지만 너무 진부해서 누락되었나 싶다. 언제 브루스를 신청 할 것인가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던 레오나드 코헨의 I'm your Man이나 끝나기가 아쉬워 여러 번 틀어대던 쿠와타 밴드의 Just man in love정도가 흘렀다면 그야 말로 시대의 완벽한 고증이자 깨알 같은 디테일 이었을 텐데 말이다.

 

 

 

 

#2. 지나온 언니에게

 

 

 

   아무튼 이 영화는 우리가 예상한 내용을 예상한 바대로, 가장 잘 어울리는 두 배우가 예상한 만큼 열연했다. 엄정화는 자기 옷을 입은 듯 배역과 동일인물 같았고 황정민은 소탈하고 진솔한 남편이었다. 사람들이 훌쩍 거리는 부분은 의외로 엄정화 씬이 아니고 황정민 씬이었는데 역시 연기파 배우답게 두어 번 찐한 감동을 선사하는 한방이 있었다. 시나리오 상으로 캐릭터들이 하나같이 너무나 전형적인 스테레오타입의 인물들이라 예외적인 인물이 없긴 하지만 그 전형성을 다행히 배우의 연기력과 유머, 감동으로 잘 메운 듯하다. 꿈은 이루어지고 사랑은 계속된다. 고로, 행복은 약속된다.

 

 

 

   한 가지 나만 그런 것인지 황정민을 보면서 생각나는 한사람이 있었는데... 투박한 부산 사투리와 돈 안 되는 인권 변호사... 자전거를 타고 출근하는 소탈한 모습... 그리고 마지막 아내의 꿈도 자신의 꿈 이상으로 소중하게 인식하며 사람들에게 심경을 설파하는 장면들이 꼭 그럼, 아내를 버리란 말이냐고 외쳤던 노 전 대통령을 떠올리게 했다. 그래서 그가 계란세례를 받을 때 눈물을 줄줄 흘리며 아내를 말할 때 정말로 울컥울컥 했다고 고백한다.

 

 

 

 

 

말은 안되지만 나는 이 장면 울컥했다...

 

 

 

   한마디로 이 영화는 80년대 후반 올림픽과 성장을 같이한 X세대가 한 분 단에 두 명 간다는 대학에 들어간 90년대 초반, 오렌지족과 같은 야타 시절을 불같이 보낸 나 같은 아줌마들을 위한 드림 환타지 영화였다. 날카로운 비평과 분석 등은 영화전문가에게 맡긴다. 아줌마는 많은 것을 원하지 않는다. 그냥 그 시절을 회상하며 그때 내가 버린 남자, 혹은 어이없이 내가 놓친 기회, 더불어 내가 잊었던 꿈들을 다시 한번 상기하기에 참 고마운 작품이다.

 

 

 

   우리가 지금 아무리 다이어트를 해도 다시 46kg으로 돌아가진 않을 것이다. 거짓말처럼 마흔 넘어 슈퍼스타 K에 도전해 인상 깊은 도전을 보여주었다 하더라도 기억나는 출연자 쯤으로 생방송에 한번 초대된다면 대박 행운 정도가 될 것이다. 내 남편은 절대로 시장 후보가 되는 일은 없을 것이며 갑자기 집값이 떨어지거나 반대로 주식이 대박 나거나 방학이 지났다고 아이 성적이 눈에 띄게 오르는 일도 없을 것이다. 내일이면 일 년에 두 번이라는 명절은 왜 이렇게 빨리 돌아오는 것인지 후라이팬 앞에서 하루 종일 기름 냄새를 맡아야 할 것이다. 식구들을 챙기고 며느리 역할을 다하기 위해 많은 꼴을 눈감고 안 듣고 그래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래서 더 고마운 오늘이 아닌가. 분명한 건 그래서 다시는 돌아갈 수 없다가 아닌,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여기까지 왔구나로 느껴지는 오늘이 얼마나 소중하고 기쁜 것인가. 나는 기억한다. 그때 강남역 거리마다 불법테이프를 팔고 있던 리어카에서 흘러나온 노래는 신승훈이었고 김현식이었고 김민우였고 이범학이었고 심신과 강수지였다. 우린 저마다 상대의 미소 속에 비친 내 사랑이 내 곁에서 오직 하나뿐이길 원했고 이별 아닌 이별을 했기에 흩어진 나날들을 보냈다. 돌아보니, 1991년도는 참 좋았다. 그때 아무리 아팠어도 분명 다가올 미래를 누구보다 기다렸고 사랑을 약속했다. 그 설레이던 시간은 당신과 나 사이에서 영원한 이야기로 남았다. 글쎄, 나는 그 시절을 다녀온 당신과 이렇게 추억을 이야기 할 수 있어서 참 기쁘다. 나이 먹는 다는 건 추억이 하나둘 사라지는 것이 아니고 하나 둘 누군가와 추억을 나눌 꺼리가 더 많아진다는 소식만 같다. 1991년도를 생생히 기억하는 당신, 한번쯤 놀아본 당신에게 이 영화를 건네 드린다. 그렇게 오늘도 해피 설날, 메리 행복, 댄싱퀸을 꿈꾸자고 말해 드리고 싶다.


 

 

   비록 1991년도의 꿈은 지금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그때 우리가 꾸었던 꿈은 이렇게 이야기 할 수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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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바이 2012-01-20 17: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찌나 즐겁게 읽었는지요 :)

제가 대학을 다니던 93년에는 그러니까 락까페라는 것이 막 생기기 시작해서 나이트를 가기에 주머니 사정이 열악한
청춘들을 구제(?)해 주었던 기억이 납니다요. 늘 무채색의 옷만 입던 저는 언니의 스테파넬 원피스를 훔쳐입고 락카페를 갔었습니다요. 물론 들켰죠. 죽다 살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때 저는 나이트클럽에 가는 것 보다 친구들과 검정 비닐 봉지를 가방에 넣고 이태원을 뒤졌습니다.
검정 비닐봉지에 진짜인지 가짜인지 주인만 아는 그런 유럽 브랜드의 옷을 사서 흐뭇하게 돌아오곤 했습니다.
물론 입을 수 있는 옷은 별로 없었습니다.
일명 리조트룩이라 불릴 수 있는 옷들이었으니까요. 아마 그거 입고 집 밖을 나섰으면 아버지에게 맞아서 죽었을 겁니다. 여튼 그렇게 한 2년을 검정 비닐봉지와 함께 즐거운 나날을 보냈습니다. 돌아오는 길에는 늘 밥 딜런의 음악을 들었는데 지금 생각해도 검정 비닐봉지와 너무 안어울리는 모양이었던 것 같아요.

그때 무슨 꿈을 꾸었을까요? 음....생각하니 그때 저는 세상을 구원하는 꿈도 꾸었던 것 같네요.
사회과학연구소,라는 말도 안되는 비밀조직을 만들어 엄청 빨간 책들을 공부하고 토론하고 혁명을 꿈꾸고...
그곳 친구들은 제가 검정 비닐봉지를 들고 다니는 이유를 몰랐었던 것 같아요.
철저한 이중생활이었죠^^
아득하네요~!

한사람 2012-01-22 11:32   좋아요 0 | URL

맞아요, 락카페 !!! 제가 대학을 졸업할 무렵 홍대앞에 생겼어요~
스테파넬 원피스도 생각나요. 약간 몸매되고 리조트룩이 어울릴만한 자신감, 리버럴이 있어야 입을수 있는, 히히(저는 딴에 럭셔리하게 오리지널리, 영우 이런 영국풍의 원피스를 입고 잘난척을 하고 돌아다녔다는 ㅋㅋㅋ)

검정비닐봉지에 유럽 브랜드 혹시 막스 마라, 이런거 아닐까용??
사회과학연구소에서 불온서적을 읽는 굿바이님이 어떤 모습일지, 음...그 이중 생활
조금은 짐작이 가면서도, 하하.
아메리칸 트래디셔널 아니고 버버리풍, 지중해풍.. 심하게 공감합니다^^
93년에 참 대전엑스포 이딴것도 했습니다 !
(그때 첫 직장에서요 ㅋ)


stella.K 2012-01-20 18: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린 어쩌면 강남역에서 스쳐지나가듯 만나었는지도 모르겠군요.ㅋ
진짜 엄정화와 황정민의 출신 학교가 그런가요? 첨 알았네요.
아, 과거는 늘 아련해요. 그죠? 이범학. 그 이름 잊고 있었는데.
이 영화 꽤 웃기다던데. 쿡 tv로 넘어 오면 한번 봐야겠어요.
아님 그 안에 기분 꿀꿀해지면 한번 보던가.^^

한사람 2012-01-22 11:35   좋아요 0 | URL

진짜 엄정화는 대학 나왔나요? (음...심한발언?)
황정민은 예대로 알고 있는데..(저와 동갑이거든요 ㅠ)
하지만 둘다 나이상으로 제 세대라..반갑고 짜릿하죠
이범학은 아직도 가끔 나오더라구요, 저는 이정석을 좋아 했습니다, 하하

영화는 대체로 써니보다는 웃긴 장면이 많고
즐겁게 볼만합니다~
(혼자보다는 친구들과 더 좋을 듯 해요)

얼마전 인사하고 또 하기 뭐하지만, 그래도
새해 복마니마니~ 늘 건강하게~
웃는 한 해 되시길요^^

stella.K 2012-01-22 13:50   좋아요 0 | URL
어제 <위험한 상견례> 보다 잤는데
80년대 배경으로한 영화들이 제법 많이 만들어졌더군요.
영화는 재밌었는데 넘 졸려서 눈 떠보니 내용이 많이 지나있더군요.
그래서 아예 자버렸습니다.
봄이 온 맹키로 나른하고 졸립네요.ㅋㅋ

고맙습니다. 한사람님도 명절 잘 지내구요,
그래요. 올핸 많이 웃고 살자구요.^^

책을사랑하는현맘 2012-01-20 22: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댓글을 안 달 수가 없는 페이퍼네요...ㅎㅎ 유니콘과 브루스타임, 독수리 다방, 압구정동, 강남역 뉴욕제과, 최루탄, 마이마이, 길거리테이프...모든것이 91년 그때를 추억하게 하네요^^ 개념없이 겁없이 놀고 마시고 웃던 시절...그러면서 한 날은 전경에 쫓겨 신발도 버려두고 도망갔던 기억도 나구요...그땐 모든게 뿌연 것 같았는데 지금은 참 좋았던 시절이네요.. 이 영화 꼭 봐야겠네요~

한사람 2012-01-22 11:41   좋아요 0 | URL

어머어머, 현맘님 유니콘 아시는군요? 히히
(그럼 이층 스피커 앞에서 춤추던 사람들도 아시겠네요 ㅋ)
길거리 구루마에서 진짜 심하게 '내사랑 내곁에' 만 흘렀어요. 92년도엔요...흑..
저는 학교 가다가 지하철역에서 맨날 검문 당했구요..
스크루바 먹다가 학교앞에 전경들이 들이 닥쳐서 빨간 하이힐 신고 엄청 도망가던 생각도 나네요 ㅠ
그걸 떨어뜨리지 않고 끝까지 먹겠다고 그 집념이 ㅋㅋ

최루탄은 정말 지독했어요. 특히 화장 좀 신경쓴 날 눈물에 마스카라 번지고 완전 너구리 되어서
(민주화를 위해 불사르는 단식 선배들 뒤로) 집에 간날이 몇날이었는지...

현맘님은 이 영화 보시고 어떻게 이야기 해주실지 궁금합니다!!

숲노래 2012-01-20 23: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991년에 저는, 학력고사에서 수능으로 대입시험이 바뀐다는 소식을 들으며 자율학습과 보충수업으로 밤 11시까지 학교에 갇히던 고등학교 1학년이었습니다 ㅋㅋ

할렘 어쩌구는 저로서는 중학생 때에 떠돌던 노래 같네요 @.@

한사람 2012-01-22 11:44   좋아요 0 | URL

앗, 된장님 후배님이셨군요..
요즘은 학력고사 이야기 하면 전설세대 취급 당해서요, 어디가서 잘 안하는데 히히
저도 학교에서 열시까지 야자하고 독서실 가서 한시까지 놀다가 두시까지 겨우 비비다가
봉고차에서 흐르는 푸른 하늘의 '겨울바다'를 들으며 집으로 가던 생각이 나네요.

그러게요, 할렘 어쩌구는 나이트에서 잘 안쳐주던 노래인데 ㅋㅋ

노이에자이트 2012-01-21 15: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사람 님 글은 딱 한 번만 훑어봐도 여자가 썼음을 알 수 있던데요.그러니 임꺽정 같은 남자일 거라고 짐작할 사람은 없을 겁니다.안심하시길...

한사람 2012-01-22 11:45   좋아요 0 | URL

헉, 노이에자이트님의 예리하시고 통찰력 있는 시각엔
그러했군요 ㅠ
저는 사실 글에서 여성의 냄새가 나는 걸 안하고 싶었거든요..
리뷰말고 페이퍼를 쓰면서 부터 여성적인 내용을 많이 쓰게 된 것 같아요.
그 전에는,
완전 공무원을 겨냥하는 글이었다구요 ㅋㅋ

마노아 2012-01-21 23: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아, 이 글 참 좋아요. 특히 마지막 문단이 찡하네요. 노래 제목을 엮은 것도 아주 반짝여요. 저도 이 영화보면서 노대통령이 어찌나 생각나던지요. 전 나이트를 못 가봐서 롤러장밖에 생각이 나지 않았지만, 그 시절에 클럽에서 엄청 틀어주었을 노래들을 이렇게 영화속에서 만난다면 청춘이 불같이 떠오르며 아주 화르르 타오를 것만 같아요. 한사람님, 새해 복 많이 받으셔요.^^

한사람 2012-01-22 11:53   좋아요 0 | URL

으앗, 알아주시는군요.(고마워요 ^^)
제가 이 글에서 가장 심혈을 기울인 문장이 바로, 그 노래를 엮은 것인데 ㅋㅋ
(한가지 김민우의 사랑일뿐이야를 빼먹었는데... 잘 안되가지고)
마노아님도 저와 생각이 같았군요.. 노대통령 맞죠?, 박원순 시장 아니구요, 그죠?
저는 롤러장은 못가봤어요(나름 범생이 였다는 ㅋ, 아니 머 마노아님도 그랬을거라고 믿어욧)

그나저나 프로필 사진이 아주 고혹적입니다^^
마노아님도 올해는 화이팅만입니다~~~



가연 2012-01-22 0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사실 저는 음.. 남성분인가? 아저씨?? 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글에서 몇 번 성별이 언급되어서 아, 그렇군요, 라고 고개를 끄덕거린 케이스라...ㅎㅎㅎ 어째 위에 덧글이랑 좀 상반되는 이야기같네요ㅠ 하지만 예전에 글만 보고 판단했다가 놀란 적이 있어서ㅎㅎㅎ 온라인에서 아는 분은 안만나는게 정석인것같아요..ㅎㅎ 이건 제생각이지만요. 물론 저도 이전부터 만나뵙던분들은 있지만..ㅎㅎ 그분들외에는 나이가 드니깐 더 못만나겠더라구요.

사실 제가 이런 댄싱퀸같은 복고적 영화?? 같은 거 별로 안좋아하는데 이 글을 읽고 와, 한 번 볼까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1991년을 놀던 날로 기억하기에는 좀 많이 어린 것 같네요, 풋.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한사람 2012-01-22 11:53   좋아요 0 | URL

아.. 저는 가연님이 여자분인줄 알았어요 ㅋㅋ 서로 반대군요, 하하하

저도 가연님 나이(?)에는 복고풍 영화같은걸 안좋아했습니다. 그땐 컬트나 프랑스 영화를 선호했어요 ㅋ
한국영화도 잘난척 한다고 무시하고, 그랬죠.

영화관에 보니 방학이라 학생들과 제 또래 아줌마들이 많더라구요.
음..가연님은 누구와 보게될지, 괜히 궁금하네요.

연휴가 많이 남았는데, 계속 편안함 맘으로..
(참 녹지대 다 읽었어요, 가만 있기 힘들어 연휴 짬짬이 리뷰나 써볼까해요!!! 느무 좋아서...)

마녀고양이 2012-01-25 13: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사람님 글이 편안해졌네요... 참 기분좋게 읽었습니다.
저는 늘어져서, 페이퍼 쓸 에너지가 몽땅 휘발성같이 날아갔네요.

1991년, 참 많은 시간이 지났군요. 방황을 위해 방황을 하던 시절이었는데.
요즘 신촌, 홍대, 모두.. 남의 나라 같습니다. 아하하.

한사람 2012-01-25 17:02   좋아요 0 | URL

연휴 잘 보내었나요?
이번엔 짧았지만 제대로 추웠죠 !!
저는 추운건 딱 질색이라 간절히 봄을 기다리는 사람입니다.

91년이 참..아득하네요.그런데 저는 기억만은 생생해요 ㅠㅠ
(신촌, 홍대, 강남 모두.. 외국 같다는 말 격하게 공감하구 말구요 ㅋ)


보물선 2012-01-26 13: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암튼 당신의 기억력은 정말 대단해.
이 깨알같은 디테일이라니^^

91학번. 내게는 새내기라는 풋풋한 단어와 김귀정(알아?)의 죽음이라는 아주 상반된 이미지의 조합이야.
아직도 기억하는 9106529. 참 아련하다~

난 어제 금쪽같은 휴가날, <부러진 화살>을 봤어. 요건 낭중에 나도 우리 꼬마랑^^

한사람 2012-01-27 09:08   좋아요 0 | URL

김귀정...강경대...
(그들이 살았으면 다 내 나이겠구먼)
나이트 이야기 하다가 민주열사로 바뀌니까 흠칫하다 흠칫해 ㅠ

나도 학번을 여기저기 비번으로 많이 활용하거든~

아이랑 보기가 그래서 <부러진 화살>을 못봤어, 써니보다 재밌다고 하더라, 하하
부러진..은 혼자 봐야 할듯^^


보물선 2012-01-27 15:36   좋아요 0 | URL
나는 학생운동과는 전혀 상관없이 살았는데도
내가 성균관대 나왔거든.
그래서 김귀정의 죽음을 너무나 가까이서 겪어서 확 떠오르는 거야.
나같은 1학년도 사수대 도시락 싸들고 백병원도 가고
장례식날 엉엉 울기도 하고 그랬어.

부러진 화살에 아이가 못 볼 장면은 딱 하나야.
하긴 모든 장면이 사법부에 대한 불신이니깐 아이에게 볼만한 건 아니겠네~ㅋ

2012-01-30 01: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1-30 10: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흑산 - 김훈 장편소설
김훈 지음 / 학고재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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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김훈과 나 사이

 

 

 

 

   나는 솔직히 이 소설이 전에 없이 지겹고 무겁고 갑갑했다. 읽는 내내 숨이 막혔다. 대가의 문장과 작품이야 언제나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지만 이번엔 좀 달랐다. 천하의 김건모도 꼴찌를 할 때가 있고 인순이도 탈락은 하는 것처럼 예술이라는 것이 매번 똑같은 밀도로 감동과 위대함을 창출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 한마디로 전작인 <내 젊은 날의 숲>만은 못했다고 느낀다. (물론 전작 역시 그 전작에 미치지 못했다고 하겠지만) 사람은 누구나 완벽함 가운데 트집을 잡고 실수를 발견하고 싶어 하는 심리가 있다. 리뷰 같은 경우 더더욱 유려한 논리로 신랄하게 작품을 비판하면 좋다고 칭찬하는 것보다 사람들이 세배 이상 똑똑한 사람이라 여긴다는 통계결과치도 있다. 나는 의무가 아닌 경우 책이 지겨웠다면 사실 리뷰를 안 쓴다. (안쓰고 만다) 될 수 있으면 이 책이 별로라는 글도 선호하진 않는다. 그런데 오늘은 내 지겨움의 깊이와 무게를 솔직하게 말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존경해 마지않는 김훈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지겨울 수도 있었다고 믿는다. 그리고 더 솔직히 다음의 계산도 해 볼 만큼 나는 그가 지겨웠다고 말하는 게 죄송스러울 지경이다.(그렇다고 거짓말 할수는 없지 않은가) 

 

 

   1. 나는 내 돈을 주고 예판을 구입했다 - 공짜로 생긴 책이 아니기 때문에 순수한 독서의지 반영.

   2. 리뷰작성의 의무가 없다 - 시간에 맞춰 적절한 선에서 타협하는 글을 방지할 수 있음.

   3. 지금 이 책에 관한 어떠한 리뷰대회도 없다(알라딘에서는) - 문장력을 자랑하거나 과시하기 위한 글 즉, 대회 참가를 위한
      작위적 구성이 필요치 않음.

   4. 나 또한 이 글로 어떠한 평가도 기대하지 않는 상황이다 - 평가항목 따위 신경 쓰지 않아도 됨.

   5. 이미 많은 독자들이 이 책의 리뷰를 정성스레 써 놓았다 - (초기가 아니므로) 내 비판이 구매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임.
     (읽어볼 만한 사람은 거의 읽어보았다고 판단)

 

 

 

   즉, 이 책의 장단점들은 이미 많이 노출된 상태이기에 나는 부담 없이 자유롭고 싶다. 모처럼 맞은 이 좋은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은 이유는 비판을 위한 구실만은 아니다. 정말로 내 지겨움의 근원을 찬찬히 따져 물어 정리해 보고 싶은 연유이다. 김훈의 반복적인 세계관도 좋고 끈질기게 설파하는 동어반복의 논리도 좋고 완벽한 문장에 갇혀버린 한계치의 절정도 좋다. 나는 이 리뷰에서 반드시, 김훈이 지겨운 이유를 말할 것이다.

 

 

 

   먼저, 다음은 내가 생각한 이 소설의 줄거리이다.

 

 

   길 위에는 늘 오는 사람과 가는 사람이 있고 먼 길을 달려 갈 때 몸과 길이 합쳐져서 앞으로 나아가듯 흐르는 강물은 언제나 흘러서 합쳐지고 물과 하늘은 시야의 끝에서 닿게 되며 저 바다에서는 말이 생겨나지 않기에 언어가 세상을 지배하지 아니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언은 누가 지어내는 것이 아니고 바람이 불듯이 저절로 일어나는 것이며 삶이 무상한 만큼 똑같이 죽음도 무상하지만 사는 동안 붙어서 번식하는 일은 ‘늘 그러한 일’이어서 그 누구든 피할 수가 없다.

 

 

 

   이제 김훈의 어법으로 말해보면, 김훈과 나 사이에 흘러가는 저 언어들은 내가 한번 읽고 이해했다고 내가 주워 담을 수 있는 말은 아니었다. 김훈의 언어를 찾아서 내 삶속으로 주워 담기에 나는 그의 생각을 온전하게 알 수 없었다. 김훈의 글과 내 마음이 같아서 그의 글이 내 맘으로 흘러와 그 마음으로 세상을 알아볼 수 있을 줄 알았지만 더 이상 세상은 새롭게 태어나지는 않았다. 어둠속에서, 나의 생각은 그에게 다가가지 못했고 그와 합쳐지지 않았기에 내 마음에 자리 잡지 못했다. (정말 멋진 말이지만 한마디로 나와는 맞지 않았다는 말이 아니고 무엇인지)

 

 

 

 

 

2. 김훈과 풍경 사이

 

 

 

 

   책을 덮고 가장 먼저 떠오른 이미지는 ‘가고 가고 또 가는’ 한 마리 생명체의 고요한 날개 짓은 아니었다. 새와 배와 물고기와 말의 형상이 하나의 생명체로 모아진 ‘가고가리’가 어쩔 수 없이 앞으로만 가야하는 지독한 운명 같은 것, 고달프고 서글프지만 끝까지 살아가야하는 지겨움의 기록에 가까웠다. 누구나 한번 주어진 삶을 단념하기 힘들기 때문에, 사람들은 살아있는 동안 살기 위해 그토록 사는 것에 의미를 부여할 수밖에 없는 것일까. 사는 것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살아간다 해도 사는 것에 의미가 없어지는 것은 아닐 터인데 왜 그들은 모두 살기 위해, 아니 죽기 위해 삶의 의미에 매달리는 것일까. 모르긴 해도 작가는 이 이야기를 꼭 써야 했을지는 몰라도 쓰고 싶어 쓰고만 소설은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틀림없이 작가는 이 소설을 재미있게 하려는 방법 따윈 자신의 일이 아니라 믿었을 것이다. 재미를 말하고자 함도 그것을 느끼게 함도 아닌 이것은 살고 싶지 않아도 살아야 하는 범박한 우리네 인간사 운명과도 같은데 그 이치를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는 것, 그것만이 작가의 깨달음이 아닐까 싶었다.

 

 

 

   왜냐하면 그는 이미 <밥벌이의 지겨움> 같은 산문에서 먹고 살아가는 것의 지겨움을 준엄하게 설파한 적이 있으며 <내 젊은 날의 숲>같은 소설에서 저절로 피어나 제 색을 이루며 완성되는 꽃의 아름다움에 감탄한 적이 여러 번 아니 늘, 있었다. 그는 언제나 바라보는 ‘풍경의 안쪽에서 말들이 돋아나기를’ 바라는 사람이었고 그 말하여진다고 다 알 수 없는 ‘본래 그러한 것’들을 전달하려 핍진하게 애를 쓰는 고집쟁이 글쟁이였다. <내 젊은 날의 숲>이 사람과 사람, 사람의 몸과 꽃과 나무와 숲, 자연이 서로 엉기어드는 풍경을 그려 보였다면 이 소설은 꽃이 물고기로 나무와 숲이 섬과 바다로 치환된 것일 뿐 ‘흑산’이라는 절망의 시공간 그 안쪽 풍경을 끈질기게 뒤집어 보고픈 지루한 여정의 반복에 불과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이 소설은 조선조 천주교 박해를 다루는 역사 소설이라기보다는 역사적 사건을 소재로 한 자기 내면의 고독한 성찰이 주를 이루는 산문이 더 어울려 보인다. 김훈은 어떠한 시대, 어느 사건, 어떤 인물을 소재로 삼아도 결국 그 전체 풍경의 내피를 투사하여 말로 이해시킬 수 없지만 말로 표현할 수밖에 없는 자신만의 언어로 자기 한계를 내보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김훈에겐 자기 한계의 최대치를 최선을 다해 최고로 표현하는 것만이 그가 소설이라는 언어로 세상과 소통하고자 함을 보여주는 증거일 뿐이다.

 

 

 

   그는 언젠가 초로의 봄날에 자전거를 타고 섬진강 물가를 달리다가 새싹이 돋아나는 산들이 물에 비치자 이렇게 말했다.

 

‘아, 이 견디기 어려운 세상 속에는 또 다른 세상이 있었구나! 이 별 볼일 없는 생애는 어찌 그리도 고단했던가. 땅위의 길과 하늘의 길이 결국은 닿아 있었구나.’      - <밥벌이의 지겨움>, 156p

 

 

   자전거가 되었건 무엇이 되었건 얼마나 고독하고 고단한 길인가. 그는 계속하여 다음의 풍경을 기다릴 뿐이다. 우리는 어떤 그림이든 그 풍경을 먼저 본 그의 기쁨과 슬픔을 나중에 느낄 수밖에 없다. 그가 먼저 깨달은 풍경이 비록 내 걸어감에 일치하지 않더라도 대책없이 걸어갈 수 밖에 없다. 나는 오늘 그 혼자 걸어감이 지겨웠노라 고백하는 것이다.


 

 

 

3. 김훈과 흑산 사이

 

 

 

 

   그가 우리에게 펼쳐 보이는 ‘또 다른 세상’은 어디인 것인가. 매번 참으로 멀고 깊어 가닿을 수 없어 보이지만 그는 말한다. 그것은 우리가 미처 가보지 않았거나 가닿을 수 있는 길도 있었음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그렇다면 ‘흑산’은 도대체 어디이고 언제인 것인가. ‘흑산’은 시간인가 공간인가 둘 다인가. ‘흑산’은 흑산도가 아니니 섬이 아니고 산인 것인가. ‘흑산’은 검은 바다를 의미한다는데 그렇다면 산이 아닌 바다인 것인가. 내가 생각하기에 이 소설이 말하는 ‘흑산’은 산도 섬도 바다도 아닌 육지와 섬 사이 끝없는 바다 밑에 숨겨진 캄캄한 길이라는 생각이다. 아무도 가보지 않았고 가 볼 수도 없었지만 영영 모르고 지나갈 길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 길은 아마 이 마을과 저 마을 사이의 길일 수도 있고 여기 사람과 저기 사람과의 보이지 않는 인연일수도 있을 것이다. 어쩌면 김훈과 작품사이의 길일수도 혹은 작품과 독자사이의 길일 수도 있을 것이다.


정약전이 흑산에 끌려와서 흑산에 머물고 흑산에 주저앉듯이, 갈 곳이 없고 갈 곳이 아니더라도 갈 수밖에 없는 길은 흔히 있을 것이었다. -p280

 

 

   흑산은 더 이상 ‘갈 곳이 없고 갈 곳이 아니더라도 갈 수밖에 없는 길’이다. 그 길은 희망이나 전망이 없이도 살아야 하는 우리네 삶의 길이요, 그래서 믿기 힘든 현실의 길이다. 김훈에게 있어 죽지 않고 산다는 것은 흥정과 타협의 산물을 뜻한다. 이는 곧 예술이 더럽고 폭력적이어도 하면서 견디고 견디면서 해 내는 것을 의미한다. 김훈에게 예술은, 김훈이 할 수 있는 예술은 누가 뭐래도 말이라는 칼을 자유자재로 부리는 것이다. 하지만 말은 절대로 칼이 될 수가 없고 칼이 되어서도 안 된다. 칼로서 기능해야 할 때만 제 역할을 하면 된다. 김훈은 ‘말이 칼이 되기 위해서는 말을 버려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 다시 말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김훈에게 말은 더없이 하찮고 언어는 점점 쓸 수 있는 것이 줄어들어 속수무책지만 말을 통하지 않고서는 칼이 될 수 없기에 그 비극을 견디고 계속 쓰면서 나아가는 것이다. 다시 말해 흑산은 김훈이 걸어온 길이면서 앞으로 지겹도록 가고 또 가야 할 길인 것이다. 그러니 그 길을 가보았다고 갈 수 있으니 가야한다고 말하는 일이 어찌 고통스럽지 아니할 것이며 어찌 편하게 바라볼 수 있는 일이란 말인가. 사람이란 무릇, 힘겨우면 더 빨리 지겨울수 있는 통속적 존재가 아니던가.

 

 

 

 

4. 김훈과 죄인 사이

 

 

 

 

   그래서인지 정약전은 시대와 사명과 업보를 바꾼 김훈의 대리인에 불과했다고, 감히 판단한다. 사학죄인 사형제 중 가장 현실적인 사람은 정약전이었다. 나는 정약전의 사고와 상념들 속에서 현실이라는 절망과 비극에 타협하며 세상을 긍정하는 이 시대의 보편적 작가상을 엿보았다. 정약전은 가장 맏형인 정약현과 함께 동생 정약종과 정약용에게 천주교를 설파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사학의 죄를 끌어안고 먼저 참수 당함으로써 정약전과 정약용을 구해준 것은 동생 정약종이었다. 정약종의 죽음에 기대어 목숨을 건진 건 정약전과 정약용이 마찬가지였지만 황사영을 고발함으로써 완전배교한 정약용에 비해 정약전은 그 행보를 분명히 하지 않은 어중간한 상황이라 할 수 있다. 종교를 택한 것도 형제를 택한 것도 그렇다고 자신만 택한 것도 아닌 지극히 수동적인 처세였다. 자신만 살려고 발버둥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당당히 순교를 택한 것도 아닌 정약전은 훗날 죄책감에 사로잡히지도 않는다. 그는 스스로 배교가 아니라 기교棄敎를 택한 현실에 긍정하며 자신을 흑산과 일체시키는 합리화의 길을 걸어간다. 이 모습은 바로 도저히 살 수 없을 것 같았지만 그렇다고 죽을 수도 없었던 (말할 수 없지만 쓸 수밖에 없는)작가의 비극적 현실을 대변하고 있다. 나는 그렇게 느꼈다. 작가들은 살거나 죽거나 외에 쓰거나가 하나 더 있다고 여긴다. 살수도 죽을 수도 없기 때문에 쓴다고 믿는다.

 

 

 

   정약전은 유배지 흑산에서 처음 바다를 바라볼 때 ‘인간이나 세상의 환란과는 사소한 관련도 없어 보인’ 바다라 생각했지만 서서히 ‘이 막막한 바다일지언정 여기서 끝나고 또 여기서 시작’이라 믿기 시작한다. 마침내 순매와 신접살림을 차리고 흑산에서 ‘집을 지을 수가’ 있다고 생각한다. 곧 떠날 것이라 믿었던 마을에 서당을 짓고 사람들에게 하늘의 법치과 인간의 본성을 글로써 가르친다. 형틀에 묶여 매를 맞으면서 ‘모든 말의 길과 생각의 길이 끊어지는’ 고통을 겪었지만 다시 살아보니 캄캄한 바닷길에서도 사람이 살아가는 방법만은 결코 캄캄하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이런 작가의 말과 글에 대한 의지는 정약전뿐만이 아니고 열여섯 나이에 급제한 조카사위 황사영에게서도 종종 발견된다. 황사영은 단지 김훈의 대리인으로서의 정약전의 한세대 어린 인물을 상징한다고 여겨졌다. 그래서 그의 죽음은 그다지 참혹하거나 슬프지 않았고 외려 한 세대가 끝이 난 것으로 생각할 수 있었다. 황사영이 죽었다고 말과 글이 끊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믿음, 그것은 곧 작가의 강력한 고집이자 마지막 자존심은 아니었을까.

 

 

 

   그들 주인공은 하나같이 단순하고 명료한 언어를 선호하며 모두 드러나 있되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것을 발견함에 기뻐한다. 세상의 원리는 ‘인간의 언어로 증명할 수 없는 것이었지만, 언어에 의한 증명이 필요 없이 사람의 생각으로 본래 스스로 그러함을 알 수 있는 것’이라고 깨닫는다. 정약전은 형제들과 ‘우주의 근본과 몸과 마음이 살고 또 죽는 이치를 말하며 놀라워 했었’다고 회상하기도 한다. 말과 글로 엮인 생각의 구조, 말의 형식으로 존재하는 개념들에 집착하고 그 이룰 수 없는 번민들이 언젠가는 저 흐르는 강물과 합쳐져 새로운 의미로 탄생하길 기대했다. 그것은 말과 글로 세상과 소통하고자 하는 죄인의 본심은 아니었을까. 말과 글을 버리고 세상의 이치를 깨달은 자는 다시 말과 글로써 그 세상을 보여줄 수밖에 없지 않을까.

 

 

 

   그러나 언어로 증명할 수 없지만 스스로 그러함을 알 수 있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본래 스스로 그러함을 설명할 수 없다면 우리는 스스로 갈 수 있고 저절로 알 수 있다는 삶의 이치를 어떻게 깨달을 수 있다는 말인가. 우리는 혹 죄인을 심판하기 보다 스스로 죄인이 되어야 삶의 무게를 가늠할 수 있는 존재들은 아닐까...

 

 

 

 

5. 김훈과 희망 사이

 

 

 

   정약전은 섬에 처음 들어왔을 때, 흑산의 ‘검을 흑黑 자가 단 한 개의 무서운 글자로 이 세상을 격절시키고 있었’다며 두려움을 토로했다. 이 무서움은 비단 섬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당대 전체에 대한 무서움과 같았다고 고백한다. 이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정약전은 그 무서움의 안쪽을 들여다 보았고 희미하게나마 ‘돌아가고 싶은 그리움의 흔적’을 발견한다. 정약전이 발견한 흔적은 ‘고향 마재 마을 개울의 게와 흑산 개울의 민물 게’의 모양새가 같다는 기억의 발견이었다. 그리고 그 기억을 증명하고 실현하기 위해 기억을 기록하기로 결심한다. 다시 글이다.

 

 

 

흑산에 대한 무서움 속에는 흑산 바다 물고기의 생김새와 사는 꼴을 글로 써야 한다는 소망이 자리 잡고 있었다. 물고기의 사는 꼴을 글로 써서 흑산의 두려움을 떨쳐낼 수도 없고 위로할 수도 없을 테지만, 물고기를 글로 써서 두려움이나 기다림이나 그리움이 전혀 생겨나지 않은, 본래 스스로 그러한 세상을 티끌만치나마 인간 쪽으로 끌어당겨볼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물고기의 사는 꼴을 적은 글은, 사장詞章이 아니라 다만 물고기이기를, 그리고 물고기들의 언어에 조금씩 다가가는 인간의 언어이기를 정약전은 바랐다.  -p337

 

 

 

   흑산이라는 캄캄한 바닷길은 바닷 속에 사는 물고기들의 언어에 다다르길 노력하자 흐리고 깊지만 이곳을 의미하는 ‘자산’으로 변모한다. 똑같이 검은 바다였지만 언어로서 ‘너와 내가 지금 여기에서 사는 섬’으로 기능하기 시작한다. 흑산이 자산이 된 이유는 검은 바다의 색깔이 변했기 때문이 아니라 검은 바닷 속에서 발견한 흐릿한 무엇 때문이다. 저 바다 너머 저 산 너머가 아닌 바로 이곳에서 감지되는 희망의 빛인 것이다. 희망은 언제나 저곳이 아닌 이곳이기에 그들이 아닌 우리들이기에 더욱 빛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흑산은 당신과 내가 지금 여기 사는 우리들의 섬인 것이다. 그것은 정약전이 흑산에서 지을 수 있었다는 ‘집’이기도 하며 흑산에서 우리가 발견한 김훈이 걸어간 길 위의 ‘집’이기도 할 것이다.

 

 

 

   정약전은 흑산이 아닌 자산 바다의 ‘물고기들의 종류와 생김새와 사는 꼴’을 글로 적었고 물고기가 글을 끌고 나가니 글이 물고기와 나란히 가는 풍경을 목격하게 된다. 물고기들이 푸른 등위에 제 몸으로 파도를 헤쳐 나간 무늬를 새기는 이치를 깨닫게 된다. 글을 쓰게 한 것은 물고기이고 사람을 이끄는 것은 글이었다. 사람인 우리는 흑산이라는 길에서 ‘사람이 사람에게로 간다는 것이 사람살이의 근본’이라는 것을 다시금 깨우친다. 김훈이 말하는 희망은 실은 사람이 사람에게 건네는 글이었던 것은 아닐까. 그는 결국 글로써 희망을 안을 수 밖에 없었지 않을까.


 

 

 

6. 김훈과 문장사이

 

 

 

 

   허나 이 책에서 가장 아쉬운 점은 ‘요망한 언동으로 국본을 부수는 삿된 미신의 무리’로 등장한 천주교 신도들에 있었다. 그들은 어쩐 일인지 변별력을 갖추지 못했고 개별적인 캐릭터로 기억되지 않았다. 작가는 정약전과 황사영 사이에 갖가지 기막힌 사연을 가진 노비와 천민의 이야기를 심어 놓았지만 그들 모두는 김훈식 문장의 지배구조 하에서 자유롭진 못했다.

 

 

 

   말(馬)의 형상을 가진 마부 마노리와 정약현의 노비에서 면천된 김개동, 황사영에게 딸려갔다가 면천된 육손이, 대궐 내시한테 천주교를 배운 길갈녀, 천주교인들의 거점지를 조성한 강사녀, 포도청의 염탐꾼 노릇을 한 박차돌, 남대문 옹기장수 최노인, 오동희, 아리...등등 인상 깊은 조연이 하나 없었던 것은 곧 서사의 빈약한 점으로 연결지어 졌다. 어린 시절부터 ‘바다와 배, 섬과 바람과 물고기가 삶의 바탕을 이루는 조건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순매 정도만 뇌리에 남았고 그들은 그저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천주교 교리 속에 등장하는 이웃의 무리로만 기억될 듯하다. 순환적 문체로 서사를 통제하는 소설이 가지는 치명적 단점이 아닐 수 없다.

 

 

 

   이에 김훈은 자신도 자기 문장의 단점을 알고 있으며 자신의 문장이 ‘내면에서 올라오는 필연성’이기 때문에 오류를 알고서도 잘 고쳐지지 않는다고 한 바 있다. 작년 연말에 막을 내린 드라마 <천일의 약속>의 김수현도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다. “천일의 약속을 보고 싶어도 말이 너무 거슬려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라는 어느 시청자의 목소리에 김수현은 ‘천일의 약속’을 ‘외면’하라고 응수하며 “나한테 말투 고치라는 건 가수한테 딴 목소리로 노래하란 겁니다. 그건 불가능해요. 내 대사가 바로 김수현이니까요” 라고 답했다. 신기하게도 김수현의 드라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김수현 한 사람이 속사포 같은 대사를 던지는 느낌이 드는데 김훈도 마찬가지다. 정약전이나 김개동이나 말하는 어투는 불행히도 같게 느껴진다. 흔히들 그의 문체를 ‘칼로 조각한 것 같다’는 표현을 하지만 이번엔 쳇바퀴 돌 듯 그 칼로 조각한 모양이 거기서 거기였다. 아무리 완벽하고 아름다워도 같은 모양의 그림은, 이렇게 지겨울 수가 있는 것이다.

 

 

 

   이번 소설에서 김훈의 어법은 유배죄인의 언어로서 관조와 고통의 문체를 완성했지만 그것은 이야기의 완성도와는 거리가 멀었고 자기 고민을 치열하게 펼치고 해결하는 시간으로서만 받아들여야 할 것 같다. 다만 바다와 바다 너머를 바라보는 자의 시선과 상념 대 그 바다가 일으키는 파도(매)를 온몸으로 때려 맞는 육신의 아픔을 대치시킨 화법은 정신과 육체를 대변하는 말과 글의 진수였다고 할 수 있다. 그 끈질긴 공력의 성과가 간과되어선 안 될 것이다.

 

 

 

 

돌아갈 수 없고 돌아갈 곳이 없었는데, 돌아가려는 마음이 여전히 남아서 복받쳤다. -130p

 

 

 

 

   김훈 어법의 한 유형인 문장을 또박또박 받아 적는다. 현재 유배생활 비슷하게 은둔을 자처하는 죄인 같은 나로선 이 말이 가장 복받치게 들려온다. 다시 돌아갈 수도 없고 간다하여 마땅히 갈 곳도 없고 그 마음만은 여전히 남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묵묵히 앞으로 나아가는 것만이 흑산이 가르쳐준 삶의 지독한 진리는 아닐까 싶은 것이다. 이곳 흑산에서도 능히 집을 지을 수 있다는 정약전은 아마 나처럼 웃으면서 울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김훈을 견디는 것은 유배지 흑산의 삶을 견디는 것이고 그것은 삶이라는 동일한 지겨움을 견디는 일이다. 지겨움에 면천되는 일은, 글쎄 살아있는 한 가능할 것 같진 않다. 김훈과 나 사이 이 캄캄한 흑산에 의하면.

 

 

 

 

 

 

 

 

 

덧붙임)

 

정말 짧게 쓰고 싶었고 어느 정도 짧게 썼는 줄 알았는데,
다 쓰고 나서 옮겨보니 또 길다...

다섯장 안으로 쓰는 걸 목표로 할까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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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2-01-18 2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별점 세 개! 왠지 반가운...(응?)
저는 재회의 작품인데도, 글에 공감이 가네요.

gimssim 2012-01-18 21: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아직 <흑산>을 읽어보지 않았는데, 그러고 보니 그전에 나온 책도 읽지 않았네요.
부지런히 찾아 읽던 시절이 있었는데, 마음이 좀 멀어진 이유가 님의 글을 읽다보니 잡히는 것 같습니다.
한겨레 신문에 연재하던 5매짜리 칼럼은 '칼'이었었는데...
아무래도 전 좀 더 묵혀두어야할까 봅니다.

gimssim 2012-01-19 21:53   좋아요 1 | URL
아니요, 제목이 '칼'이 아니고 시시칼럼이라 군더더기 없이 시작하고 내용이 대단히 압축적이었다는 뜻입니다.

cyrus 2012-01-18 22: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중학생 때 <칼의 노래>를 통해 김훈의 글을 처음 만났는데요, 그 때는 정신적으로 어려서 그랬는지
읽어나가는데 애먹었어요. 그 당시만 해도 이 책이 노 대통령 필독서라는 광고 문구에 혹해서
읽었는데 제가 생각했던 기대와는 달랐어요. 그리고 김훈이라는 작가의 이력을 모르고 있었는 것도
독서하는 데 어려움을 줬고요. 그러다가 <자전거 여행>을 읽었는데 에세이는 잘 읽혀지더군요.
여행 에세이라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풍경을 묘사한 문장들이 좋았어요. 군 입대 하기 전에
김훈의 <개>를 구입해서 한 번도 읽지 않은게 후회되네요.
휴가로 부대로 복귀하게 되면 꼭 책 한 권씩 가져오도록 규정이 있었는데 그 때는 책 한 권 사기가
돈이 아까워서 일부러 그 책 한 권을 부대에 기부하고 말았어요. ^^;;
한 번이라도 읽었으면 괜찮았는데 막상 사 놓고 안 읽은 책을 내놓은 것도 아깝다는 생각이 드네요 ㅎㅎ

2012-01-18 22: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숲노래 2012-01-19 03: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래한글 원고지쓰기로 해 보셔요 ^^;;;
그러면 그야말로 짧게 쓸 수 있으리라 믿어요~

stella.K 2012-01-19 12:02   좋아요 1 | URL
헉, 그런 기능이 어디 있나요?
난 못 찾겠던데...ㅠ

saint236 2012-01-19 10: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김훈의 책이라고 대대적인 선전을 했지만 선뜻 손이 가지 않습니다. 항상 고민만하다가 그냥 오곤 하지요.

stella.K 2012-01-19 11: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내 젊은 날의 숲은 저도 좀 실망했어요.
이작품 처음 나왔을 때 별로란 말있던데
어느새 별 네개 이상씩 단 리뷰들이 쏟아져서
역시 작가의 명성을 무시 못하겠나 보다 싶기도 하더라구요.
그것과 상관없이 그래도 숲 보단 낫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있는데...
저는 김훈이 순교를 어떻게 다뤄놨을지가 궁금해요.
이게 맨 정신 가지고 못할 짓인데 말입니다.
순교도 그렇고, 희생도 그렇고.
갈수록 개인주의자가 되어가고 있는 저는 이게 참 낮설면서도 신기할 지경입니다.ㅋ
 
농담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9
밀란 쿤데라 지음, 방미경 옮김 / 민음사 / 199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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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담은 안 해도 된다

 

 

 

   나는 농담 잘하는 사람은 부럽지만 농담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니다. 농담을 잘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농담의 대상이 된 상대, 혹은 사건 등이 기분 나쁘지 않게 같이 자리한 모두가 유쾌하도록 만드는 능력이 아닐까. 내가 싫어하는 류의 사람 중엔 뼈있는 농담을 꼭 하고야 마는 사람들이 속한다. 이미 상대가 기분 나빠할 줄 알기에 농담의 형식을 빌어 자기 하고 싶은 말을 숨기지 않는 경우. 혹은 자기도 모르게 한마디를 던져놓고 상대의 반응을 보고 비로소 농담으로 치부하며 얼버무리는 상황. 뼈 있는 말을 해 놓고 농담이니 신경 쓰지 말라고 한다거나 웃자고 한 이야기니 기분나빠하지 말라고 하는 사람...모두 진담의 위선으로 농담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아닐까 해서이다. 


   나는 이미 말하여 지는 순간 누군가가 기분이 상했거나 상처를 받았다면 그건 확실히 농담이 아니라고 믿는 사람에 가깝다. 농담은 먹히지 않을 경우 상대를 속 좁은 사람으로 만들기도 좋아 제공자에겐 어느 정도 본전인 방법이다. 농담이었다 말하면 그만인 것이다. 그러나 기분 나쁜 농담은 전달되지 않은 그 어떤 하찮은 진심만 못하다. 웃음이 사라지면 불쾌감만 기억되기 때문이다. 농담은 자연스럽게 발생하여 공유되는 것이지 미리 계획하거나 나중에 포장하기 위한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농담이 농담을 넘어서 진담 이상의 실력을 행사하게 되는 상황은 왜 발생할까. 문제는 늘 농담을 한 쪽 보다 농담을 들은 쪽의 해석의 문제인데 이 해석의 기준은 사람과 관계마다 다르기 때문에 똑같은 농담이라고 모두 웃을 수는 없다는 사실이다. 농담의 진정성은 곧 가려진 숨은 뜻의 해독에 있기 때문이다. 농담의 진의, 그러니까 모든 농담은 진짜 뜻이 있는 것이고 그러므로 모든 농담은 가짜일 수 있는 것이다. 칭찬도 비난도 자랑도 흉도 모두. 


   이쯤이면 이 정도일 것이라는 상호 신뢰가 없이 이루어지는 무차별 농담은 혹시 사후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가장 손쉬운 방편은 아닐까. 그런데 농담에의 공감이 상호신뢰가 바탕이 되어야 한다는 배경은 결국 농담의 내용이 뼈가 있는 것이 대부분이기 때문은 아닐까. 우리는 농담을 안 해도 되는 것은 농담을 안 하기 때문이다. 결국 농담은 어느 정도 기분나빠할 소지를 반쯤 내포한 성질을 지니고 드러나는 개인 및 사회의 기획물인 것이다. 그래서 나는 기분나빠해야 할 것이라면 굳이 농담을 하지 말고 그냥 진담으로 말하시오, 뭐 이런 방어 자세를 가진 사람인 듯하다. 이 진지함이 나도 지겨울 때가 있는데 그것은 무의식 중에 농담 많이 하는 사람이 진지하지 못하다는 편견을 가지고 있기 때문인 것 같기도 하다. 하여튼 나는 농담이 필요했다면 어쩌면 진담이 더 필요하지 않았을까를 먼저 생각하는 사람이다. 어떤 글의 행간을 읽듯이 농담에서의 숨은 뜻을 읽는 수고가 귀찮은 사람이다. (참 피곤한 사람 ㅠ)

 

 

 

그의 농담만 소설이다

 

 

 

   그래서 일까. 나는 이 소설의 제목이 농담이 아니고 진담이었으면 좋겠다, 고 생각한다. 이것은 마치 희극이라고 써놓고 비극이기 때문에 그렇다, 말하는 것만 같아 한없이 허탈하고 쓸쓸해 몸 둘 바를 모르겠다. 인간이 오늘까지 죽도록 일하다가 바로 내일, 아니 오늘 저녁이라도 죽을 수 있다는 비극은 사실 대단히 웃기는 일에 속한다. (나는 최진실이 자살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제일 먼저 농담 하지마, 이렇게 말했다) 작가는 우리가 늘 죽어왔고 서로서로 죽는 것을 알고 있는 인간이기 때문에 이 지독한 우리네 세상은 농담과도 같다고, 그 농담이라는 세상에 속한 우리네 인생은 모두 농담처럼 살아가고 있는 것이라 말하는 듯하다. 그러니 이토록 유쾌하지 않은 뼈 아픈 농담은 안 듣고 안 보느니 만 못한 슬픔이 된다. 소설의 ‘배경 전체를 하나로 통일 시키며 모든 곳에 스며 있는 한기’가 그 슬픔을 더욱 분명하게 만든다. 기분이 정말로 나빠지는 운명 같은 농담인 것이다. 어떤 진담도 견줄수 없는 이것이 왜 농담이어야 하는가. 왜, 농담은 우리를 울게 하는가.

 

 

   농담으로 포장된 진담의 알맹이를 가볍게 툭툭 건네 온 우리 소설가 성석제는 인간은 ‘농담’하는 존재이고 우리 삶은 ‘소풍’과 같은 것이며 사람 사는 이야기는 다 ‘소설’이라 말했다. 밀란 쿤데라는 젊음은 실수이고 분노는 지옥이며 시간은 화해이고 농담은 운명이라 말한다. 그것만이 진담이라 주장한다. 나는 이 책을 덮으며 뜻밖에도 내 지난날의 잘못과 실수에 대해 너그러워지는 시간을 가졌다. 이 소설이 왜 나를 빠져들게 했을까, 도대체 좋은 소설이란 어떤 조건을 만족시켜야 하는 것일까, 이 소설이 위대한 이유는 무엇 때문인 것일까, 밀란 쿤데라는 이 소설을 마치며 어떤 기분이 들었을까, 이런 소설을 쓰는 사람의 인생도 농담이라 말할 수 있는 것일까... 이런 생각의 꼬리 끝에 하나로 모아진 결론은 내 잘못을 인정하고 이제 그만 용서하자, 이런 현문우답이었다.

 

 

   그리고 나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만약 소설이 각자 주인공의 절실한 입장을 목격하면서 내 아픔과 실수를 간간히 엿볼 수 있는 무대라면 독자는 바로 자기 잘못과 그로인한 상처를 숨김없이 발견하는 동안 비로소 세상과 자신에 대한 용서의 기회를 얻을 수 있다는 사실. 세상의 위대한 소설은 이 소중한 기회를 제공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고 운 좋은 독자는 무대 앞에서 나처럼 작가의 설득에 기꺼이 머리를 조아릴 수 있다는 것이다. 누가한 농담이었든 간에 그것은 그때 그들의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내가 속한 세상으로 귀환하여 저마다 농담보다 지독한 인생을 살아가고 있었던 여기 사람들을 격렬하게 두드린다. 원래 모든 소설은 농담이었고 모든 인생은 농담이었는데 우리가 우리 이름표에 미인이나 추남이라 쓰지 않고 남과 다른 이름을 붙이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렇지 않으면 모두 같아지기 때문인 것이다. 단 하나의 이름이 아닌 동명의 장르로 살게 되기 때문이다. 소설 제목이 그냥 농담인 이유는 다른 종류의 농담 아닌 소설을 대적하는 처사인 것이다. 일반명사가 고유명사가 될 수 있다는 것은 개체의 절대성에서 기인한다. 이 소설은 농담이다, 고로 다른 소설은 농담이 될 수 없다. 아니 그의 농담만이 소설이다. 이는 다른 소설에 대한 실례이고 무례이지만 역으로 그렇기에 유일하게 이해 가능한 독법인 것이다.

 

 

 

가벼움은 견딜 수 없는 무거움이다

 

 

 

   소설을 관통하는 것은 농담으로 상징되는 가벼움에 대한 무게이다. 이 가벼움은 그 어떤 삶의 무게를 인지하는 사람도 깃털만큼 가벼워 질수 있는 無에 대한 가능성이다. 부재의 실존을 작가는 몹시도 견디기 어려웠던 것이 분명하다. 그는 자신이 부여잡고 있던 소설 속 빈번한 ‘가벼움’을 무어라 변명했을까. 소설가의 산문에 꽂혀 빌려온 밀란 쿤데라의 <소설의 기술>에 이런 힌트가 있다.

 

 

 

<농담> : “나는 이 먼지 날리는 포장도로를 걸으며 내 삶을 짓누르는 공허함의 묵직한 가벼움을 느꼈다.”

<생의 다른 곳에> : “야로밀은 간혹 무시무시한 꿈을 꾸곤 했다. 그는 찻잔이나 숟가락, 펜같은 아주 가벼운 물건을 들어 올려야만 하는데 들어 올리지 못하는 꿈을 꾸었다. 그러면 그 물건들이 가벼운 만큼 자신의 무력감은 더욱 커졌다. 그는 자신의 가벼움에 짓눌리는 것이었다.”

<이별의 왈츠> : “라스콜리니코프는 자신의 범죄로 인해 비극적으로 살았고 결국 자신의 행위의 무게에 눌리고 말았다. 야콥은 자신의 행위가 너무도 가벼워 그것이 자기를 짓누르지 않는다는 것, 그것이 무게가 없다는 것에 놀란다. 그래서 그는 이 가벼움이 그 러시아 주인공의 신경질적 감정과는 다른 방식으로 무서운 것이 아닌가를 자문해 본다.”

<웃음과 망각의 책> : “배 속의 이 텅 빈 주머니, 바로 이것이 참을 수 없는 무게의 결핍이다. 하나의 극기 언제라도 다른 극으로 바뀔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더할 나위 없는 가벼움은 가벼움의 무시무시한 무거움이 되었고 타미나는 이제 자기가 이 가벼움을 한순간도 더 지탱할 수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내 책의 번역본들을 다시 읽으면서 비로소 이러한 반복을 알아차리고 깜짝 놀랐다. 그러나 나는 소설가 들이 쓰는 것이 결국은 하나의 주제(최초의 소설)에 대한 변용에 지나지 않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자신을 위로했다.

 

- p176 <밀란 쿤데라 소설의 기술>, 2008, 민음사

 

 

 

   작가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라는 것을 이미 <농담>에서 발견했고 그 주제를 다음 작품에 계속하여 주장했다고 고백한다. 며칠 전 김훈의 <흑산>을 읽다가 그런 비슷한 생각을 했던 터였다. 어떤 역사, 어떤 혼란을 그리더라도 결국 자연과의 조화로 귀결되는 그 하나의 실마리, 즉 작가의 작가된 본성을 관통하는 질문의 뿌리는 매 한가지다, 라는 깨달음. 밀란 쿤데라에게 가장 두렵고 고통스러웠던 깨달음은 우리 ‘삶을 짓누르는 공허함의 묵직한 가벼움’ 이 아니었을까. 새털 같이 가벼운 물건 하나도 들어 올리지 못하는 무력감, 그 가벼움에 대한 막중한 절망감, 쉽게 지나쳐 버린 가벼운 행동에 대한 자기 두려움, 그것은 채워도 채워도 기실 텅텅 비어만 가는 인생 주머니 속에 존재하는 ‘참을 수 없는 무게의 결핍’이자 그 ‘가벼움의 무시무시한 무거움’이었던 것이다. 없어서 더욱 분명하고 가벼워서 사무치게 무거운 건 우리가 살기 때문에 죽어지는 삶의 근원적인 슬픔이다. 나는 <농담>이라는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삶의 무게가 똑같이 가벼워 사라질 만큼 희미했던 적이 모두 있었기 때문에 누가 더라 할 거 없이 공평하게 무거운 인생이었다고 이해한다. 우리는 작가가 수사한 이 다양한 삶의 무게들이 신기하게도 나와 똑같은 부피와 질량으로 되새겨지는 순간을 맞이한다. 그것은 마치 농담같이 짜릿하고 아슬아슬하다. 전율, 충격, 해방, 자유, 그렇게 머리에서 가슴으로 그 다음 무릎을 탁 치는 순간을 목격한다.

 

 

 

절대음감은 소설의 기술이다

 

 

 

   또 하나 이 소설을 읽어가는 재미는 은근히 감지되는 음악적 리듬감이다. 작가 스스로 스물 다섯 살까지만 하더라도 문학보다 음악에 더 끌렸고 악기를 다루며 음악적 창작활동에 매진했다고 말한다. 소설의 건축술이라 할 수 있는 분할구조와 서술유형이 다분 음악적 구성을 따르고 있고 인물의 비율이 수학적 구조를 따르고 있다.


이 소설은 루드비크, 야로슬라프, 코스트카, 헬레나, 이렇게 네 인물들을 통해 이야기 되죠. 루드비크의 독백은 책 전체의 3분의 2를 차지하고 다른 사람들의 독백들은 모두 합해야 전체의 3분의 1- 야로슬라프 6분의 1, 코스트카 9분의 1, 헬레나 18분의 1- 을 차지할 뿐입니다. 이러한 수학적 구성을 통해 , 제가 ‘인물의 조명’이라 부르는 것이 결정됩니다. 루드비크는 가장 밝은 곳에 있으면서 안으로부터(자신의 독백에 의해) 조명받기도 하고 밖으로부터(다른 사람의 독백은 모두 그의 모습을 추적하는 것이니까요) 조명받기도 하지요. 야로슬라프가 책 전체의 6분의 1을 차지하는 독백으로 그려 내는 자화상은 루드비크의 독백에 의해 바깥으로부터 수정됩니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예요. 각각의 인물은 각기 다른 밝기, 각기 다른 방식으로 조명됩니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예요.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한사람인 루치에는 자신의 독백을 갖지 못하고, 그래서 그녀는 루드비크와 코스트카의 독백을 통해 오직 외부로부터만 조명됩니다. 내적 조명이 없는 까닭에 그녀는 신비롭고 이해할 수 없는 성격을 부여받게 되는 겁니다. 말하자면 그녀는 유리창 저편에 있어서 사람들이 건드릴 수가 없는 거죠.   -p128

 

 

<농담>의 길이 순서는 아주 짧음, 아주 짧음, 김, 짧음, 김, 짧음, 김이죠... 한 번 더 소설과 음악을 비교해도 괜찮겠죠. 한 부는 박자예요. 각 장은 하나의 소절이고요. 이 소절들은 길기도 하고 짧기도 하고, 또는 아주 불규칙한 길이를 갖지요. 이것은 우리를 템포의 문제로 이끌어 갑니다. 제 소설들의 각 부분은 모데라토, 프레스토, 아다지오등과 같은 음악적 지시를 가질 수도 있을 겁니다.   -p129

 

 

- <밀란 쿤데라 소설의 기술>, 2008, 민음사

 

 

 

   하지만 이와 같은 수학적 구조는 작가가 미리 계산하여 구성한 것이 아니라 어느 체코의 한 비평가가 알려준 공식이라 말한다. (알고는 있었지만 그것을 체계화하고 정리하는 것은 늘 비평가의 몫이다) 템포의 변화는 곧 정서적 분위기의 변화를 의미한다고 말한다. 이 책의 6부에 다소 이질적인 인물인 코스트카라는 변형된 마디가 출현하는데 이는 새로운 주제를 위해 섬세하게 기술된 의도된 장치라는 것이다. 작가는 음악을 작곡하듯 악기를 연주하듯 각 악장을 자기만의 음표로 빼곡히 채우는 사람이었다. 각장의 분량과 문장이 밀고 가는 속도가 전체 악곡의 균형을 위해 연출되었기 때문에 이 소설은 단 한 번도 지루할 틈을 주지 않았던 것이다. 최근에 나는 여간해선 재미나면서도 그것이 재미로만 끝나지 않고 끝없는 사유를 유도하는 소설을 만나지 못했었는데 지난 주말동안 나는 온전히 이 소설에 빠져 있었고 다시 또 이런 소설을 만나고 싶은 욕구에 시달려야 했다.

 

   은희경 작가가 밀란 쿤데라의 <정체성>을 읽고는 소설이란 이렇게 쓰는 것이구나를 느꼈다고 했다. 나는 그 한마디 때문에 <정체성>을 집어 들었지만 작년 이맘때쯤인가 책을 덮으면서 큰 감명을 느끼지 못했었다. 어찌 된 것인지 잘된 소설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돌이켜 보면 당시 작가가 말하는 방식에 하나도 적응을 하지 못한 것이다. 이번에 밀란 쿤데라의 전집이 새롭게 출간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의 처녀작인 <농담>을 먼저 읽기로 한 생각은 기특하게도 적절했던 것 같다. 쿤데라를 배우고 깨닫기 위해선 <농담>부터 시작해야하는 것이었다. 덕분에 좋은 소설의 요건과 나지막한 비밀, 그리고 삶의 진리까지 더불어 기쁘기 그지 없는 것들을 한아름 수확해 간다. 내게 이런 고마운 소설이 의미하는 것들은 요즘의 나를 지탱해주는 유일한 위로이다. 나는 나를 견디고 나를 이기기 위해 소설을 읽으며 나를 가르치고 나를 지적하기 위해 소설을 덮는다. 소설은 내게 대답 없는 경쟁자이고 칭찬 없는 선생님이다. 이런 완벽한 소설은 편곡이 필요치 않으며 편곡을 할 수도 없다. 단 하나의 원곡으로서만 존재하는 절대음인 것이다.

 

 

나는 당신의 쓸만한 농담이고 싶다

 

 

 

   소설의 주인공인 루드비크는 ‘아무 의미 없는 말일 뿐이었고’ 그저 당시 기분 때문에 그랬던 것에 불과한 몇 마디의 농담으로 인해 당과 대학에서 축출되며 당시 체제의 불구대천의 연적으로 낙인 찍히게 된다. 바보같은 농담을 즐기는 성향이었지만 마을 악단의 클라리넷 연주자였고 어엿한 대학생 신분이었던 루드비크는 졸지에 군대생활, 수감생활, 탄광생활을 차례로 겪게 된다. 청춘을 증오와 분노로 보내고 난후 고향에 돌아오는 장면으로 시작되는 이야기는 며칠 후 고향을 떠나는 버스를 기다리면서 일어난 농담 같은 에피소드를 끝으로 막을 내린다. 고향에 돌아와 그 며칠을 보내면서 돌아본 과거에 의미없던 첫사랑과 친구들의 배신과 이루어지지 않은 사랑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치욕과 고통의 세월이 펼쳐진다. 이 소설은 누구에게나 청춘이 참혹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말하는 소설이기도 한 것이다.

 

 

   물론 작가는 시기적으로 체코의 공산화가 이루어진 1948년 혁명의 시기 이후 사람들이 보여준 ‘위대한 집단적 신념의 시대’를 종교인 코스트카를 빌어 냉철하게 비판한다. ‘종교가 주는 것과 아주 유사한 느낌들’에 사로잡혀 ‘보다 높은 것, 보다 초개인적인 어떤 것을 위하여 자신의 자아, 이익, 사적인 삶을 포기했던’ 사람들의 일상과 사고, 의식을 큰 문제는 아니라고 읊조린다. 복수와 증오, 분노에 사로잡힌 루드비크가 듣지 못하는 형식으로 그를 충고하고 위로한다. 그리고 루드비크는 마치 그 진심어린 작가의 충고에 화답하듯 자신을 처절하게 깨닫는다. 이 작품에서 전조나 분위기 이탈로 보여지는 코스트카의 대목은 분명 작가를 대리하는 역할로 보여진다. 종교인이라는 이념에 자유로와야 할 지식인을 앞세워 작가가 전달하고자 했던 가치는 무엇이었을까.

 

 


당신은 복수를 열망하지요. 당신은 예전에 당신을 해친 사람들과 오늘날 다른 사람들에게 해를 가하고 있는 사람들을 동일시하고, 그러고는 복수하는 거예요. 그래요, 당신은 복수하고 있어요. 당신은 사람들을 도와주고는 있어도 증오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는 그것이 느껴져요. 당신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서 느낄 수가 있어요. 하지만 증오는 또다시 증오를 낳고 복수의 복수를 계속 불러올 뿐 대체 무엇을 가져다 주나요? 루드빅, 당신은 지옥에서 살고 있어요, 다시 말하지만, 지옥이오, 그래서 나는 당신이 가엾습니다.  -334p

 

 

나 자신에 대한 분노의 파도가 나를 온통 집어삼켰었던 것이다. 그것은 당시의 내 나이에 대한 분노였고, 자기 밖에 놓은 수수께끼에 관심을 가지기에는 스스로에게 자신이 너무도 커다란 수수께께인 그런 나이, 또한 다른 사람들은(아무리 친한 사람이라 해도)자기 자신의 감정, 자신의 혼란, 자신의 가치 등을 놀랍게 비추어 주는 움직이는 거울에 불과한 그런 바도 같은 열정적 나이에 대한 분노였다.  -344p

 

 

 

   나는 코스트카의 충고와 루드빅의 독백을 몇 번이나 읽었다. 인간은 자기 등에 지워진 고통의 무게를 증오를 통해 상쇄한다는 그의 논리가 나를 집요하게 굴복시키려 들었다. 그 증오라는 것은 인류 전체가 아니라 결국 한 개인에게 집중시킬 수밖에 없는 인간의 초라함을 인정하기 싫었다. 세상에 대한 분노를 가라앉히고자 개인에 분노를 투사하는 것이 우리이고 나라는 사실에 분노했음이다. 작가는 누구라도 단 한번이지만 치명적으로 저질러진 인생의 실수가 ‘괴물처럼 증식해 가는 그 고약한 농담’을 말끔히 지워버리고 싶은 욕망을 이야기 한다. 하지만 그 누구도 실수는 절대 철회할 수가 없으며 ‘너무 흔하고 일반적인 것이어서 세상의 이치 속에서 예외나 잘못이 될 수 없고 오히려 그 순리를 구성’한다고 설파한다. 그리하여 그 농담 속에 포함된 자신과 그 불변의 농담자체는 어떻게든 다시 원점으로 무화시킬 수 없다는 깨달음을 전해준다. 다만 실수는 고쳐지는 것이 아니고 잊혀질 뿐이라는 통찰이 이리도 벅찬 이유는 무엇일까.

 

 

   마지막 부분에서 모두의 영혼의 치유가 되는 장치로 음악을 택한 것은 의미심장하다. 기계처럼 의미 없이 반복되어온 공산당을 선동, 선전하기 위한 정치음악이 아니라 그 옛날 친구들끼리 순수 음악이 주는 기쁨으로 충만했던 민속예술로서의 음악으로 귀향하고자 하는 작가의 의도는 다분히 목가적이다. 하지만 그것으로 오래된 친구와 화해했다고 믿는다면 아직 여정은 끝나지 않았다 말한다. 작가는 끝까지 농담으로 여정을 마무리 한다. 이것이야 말로 내가 연주하고 싶었던 음악이다 말하는 것 같았다. 음악으로의 귀결 직전에 펼쳐지는 후반부의 깨달음의 연속적 문장들은 이 소설의 백미이다. 어제 나는 이 소설이 주는 깨달음을 몇 줄 문장으로 요약해 수첩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사람은 시간의 물결을 결국 화해의 상징으로 인식한다.

기억은 취사선택되고 실수는 망각되기 때문이다.

그 누구도 한 번 저질러진 잘못을 고칠 수는 없다.

그러나 삶이 다행이기도 한 이유는 그 잘못과 결과가 동등하게 잊혀진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아주 가끔은 당연히 울어야 할 대목에서 웃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웃는다고 그것이 웃어야 할 일이라 마땅히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저 웃을 수 밖에 없었다고 믿는 사람도 있다는 것이다.

다만 그 웃음의 주인공은 당연히 울고 있을 뿐인 것이다.

 

 

   아! 정말 살면서 내가 저질러온 만행과도 같은 그 고약한 농담들을 모두 지워버릴 수만 있다면. 살아 있는 동안 그 누구에게 떠넘길 수 없고 내가 짊어지고 가야 하는 것. 내가 한 농담들은 곧 내가 걸어온 내 과거, 그리고 지금 숨 쉬고 있는 현재, 알 수 없는 미래의 모든 것이 될 터이다. 그것은 변할 수 없는 내 삶의 진실인 것이다. 이것은 결코 농담이 아니다. 다만 당신도 나와 같다는 것만이 내가 당신을 위로할 수 있는 유일한 이유이다. 변변치 않지만 쓸만한 농담이길 진심으로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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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시스 2012-01-10 0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어느 촬영장에서 김효진이 책을 즐겨읽는데 그날은 [정체성]을 읽고 있다고 해서 학생 때 도서관에서 빌렸는데 기억이 나질 않아요. 동갑이었거든요. 그래서 어릴 때 뭐 저런 책을 읽나.. 배우가.. 이랬다니까요. 어쨌든 빌려서 대충 읽다 반납한 것 같은데 그때부터 김효진이 좋았어요. 유지태도 라흐마니노프 음악을 알아보는 김효진한테 반했다고 한 것 같아요. 문화적 코드가 통했다면서^^;; 그래서 한사람님 페이퍼 보면서 [정체성] 얘기는 없나.. 하고 쭉 봤어요ㅋㅋㅋ 은희경이 그런 말을 했군요. 근데 이 책은 왜 새 판본이 안나올까요. 기다리는 1인, 바로 저.

새해되고 처음이에요^^

stella.K 2012-01-10 11: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또 길게 쓰셨구만요.
얼마의 양을 쓰느냐 보다 진지하게 썼느냐가 더 중요한 거죠.ㅋ
그니까요. 전집으로 읽으시지 않고. 예쁘게 잘 나왔더만.
젊었을 때 멋모르고 참을 수 없는...을 사 읽었다 뭐 이렇게 소설이 어렵나 해서
못 읽겠던데 지금쯤 읽으면 어떨지 모르겠어요.
그러고 보니 예전에 저의 꼰대(사부)가 밀란 쿤데라와 하루키를 좋아했었어요.
그후 한참만에 다시 만나니까 그 둘을 욕하더군요. 늙으니까 노쇄해져서 노망난 것 같다고.
요는 글이 별볼 일 없어졌다는 거죠. 작가가 오래되면 그런 것 같기도 해요.
반짝반짝 할 때가 따로 있는 것 같아요.ㅋ

보물선 2012-01-11 14: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빼꼼~~~^^ (슬며시 얼굴을 들이 밀어 봄)

정말 오래간만에 왔어.
지난 두달쯤 회사일이 너무 정신 없었거든.
마무리 딱 짓고, 3일간 제주를 다녀와 오늘 출근했다우~
그래서인지 오늘이 올해의 첫날 같은 느낌이 들기까지 하다니깐^^

다행이야. 설날이 곧 있어서.
새로운 한해를 다시 선물 받는 느낌을 가질 수 있어서.

내 새해 인사는 받았지?
그새 당신은 달인이 되셨드만! 축하축하!!!
근데 소설은 어디 갔어?
18회 이후 못 읽어서 아주 아쉬워.
개인 출판이라도 해라~ ^^*

cyrus 2012-01-11 2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최근에 쿤데라 전집이 출간되었더라고요. 쿤데라 소설은 안 읽어봤는데 표지가 멋지더라고요.
마그리트 그림이라서 구매욕이 들기도 하고요. 이번 기회에 집에 있는 민음사 전집 <농담>을 읽어봐야겠어요 ^^

꽃도둑 2012-01-12 09: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사람님 글은 일단 길어요. 할 말 다하겠다는 의지가 보이고, 성실해요
또한 짜임새 있는 아주 건강한 글이에요.
저 여간해서 혹~ 하지 않는데...일단 긴호흡이 경이롭네요.
아무래도 제가 폐활량이 적은가봐요...ㅎㅎㅎ 언젠가 날 잡아서 글을 아주 잡으리라 맘 먹고 있는데
잘 될지 어떨지 모르겠네요.

몇 해전인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읽긴 읽었는데 정말 제 스탈이 아니었어요.
그야말로 감성코드 에러였지요. 작가와 독자인 저와의 간극이 흑해 갈라지듯 그렇게 쩌~억 갈라졌었는데
지금 다시 읽으면 좀 좁혀지려나?...암튼 농담에 대한 진지한 견해 잘 읽고 갑니다.^^

가연 2012-01-14 2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이 좋았는데ㅎㅎ 물론 제가 읽은 밀란 쿤데라의 소설은 농담이랑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두 권 뿐이지만요. 이건 여담인데 저는 제가 좋아하는 사람(?)은 저한테 농담이나 장난을 안걸었으면 합니다. 그런 사람이 나에게 농담을 걸면 나는 그걸 진담으로 받아들일테니...

2012-02-20 10: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2-20 19: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달려라 정봉주 - 나는꼼수다 2라운드 쌩토크: 더 가벼운 정치로 공중부양
정봉주 지음 / 왕의서재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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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뜨겁다

 

 

   보통, 읽고 싶은 책은 늘 읽어야 할 책을 앞지른다. 그런데 읽고 싶은 책은 대개 읽지 않아도 될 책 일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읽어야 할 책은 읽고 싶지는 않았지만 필요에 의해 의무로 새겨보아야 할 책이고 읽고 싶은 책은 굳이 읽지 않아도 되었지만 욕망에 의해 넘길 수밖에 없는 책인 것이다. 전자가 머리로 이해하는 독서라면 후자는 가슴으로 느끼는 독서일 것이다. 독서의 아이러니는 이렇듯 언제나 읽어야 할 책이 쌓여 있을 때 불현듯 현실을 파고드는 우연의 사건에서 시작된다. 내겐 이 책 <달려라 정봉주>가 꼭 그랬다. 


   정봉주 전 의원의 대법원 판결을 하루 앞둔 일주일전, 내 트윗 타임라인엔 불효자식을 용서하라며 아버님 산소 앞에 바친 그의 책과 소주 사진이 올라왔다. 그날 글샘님은 그를 응원하기 위해 서재에서 ‘달려라, 정봉주’ 6행시 이벤트를 벌이셨고 나는 늘 그렇듯 지나가는 과객이었지만 그만 울컥한 심경에 급조한 몇 자를 남겨버렸다.(잘은 모르지만 분위기상으로 무죄같은 행운이 절대 따르지 않을 것 같았다. 괘씸죄로 형이 추가되면 되었지... 그리고 다음날 징역 1년형이 확정되었다) 그리고 주초에 이 책을 선물로 받았다. 이 책을 넘기면서 자꾸 가슴 한구석이 뜨거워지던 것이 끝내 미셀 투르니에는 내년으로 미루기로 스스로 합의를 보았다. 정봉주 리뷰를 내년으로 넘기기는 어쩐지 싫었다. ‘나꼼수’ 콘서트나 집회를 좇아갈 체력은 안 되는 형편이고 그저 내가 잘할 수 있는 것은 이런 책이, 이런 사람이 있다고 세상에 떠드는 일이므로 해가 가기 전에 운 좋게 가슴 뜨거워진 그 독서값만은 해야 할 것 같았다. 하여 김어준, 김용민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나는 글로써 인사를 대신하려한다. 


   정봉주 전 의원이 구속 수감되던 날, 그러니까 엊그제(26일) 지나가다 KBS 뉴스를 보았는데 삼사십 분을 북한뉴스로 도배하고 스포츠 소식으로 넘어가기 전에 아주 짧은 단신 처리하듯 그것도 인터뷰 목소리까지 묵음처리하며 뉴스를 재빨리 얼버무리는 장면을 보았다. 사건을 보도 했다기보다는 무슨 불법 비디오를 두 배로 재생하듯 후다닥 화면처리 하는 것을 보고 그럴 줄은 알았지만 대단히, 허탈했다. 이 모 씨(이제 MB도 너무 일반존칭이고 이명박 다 쓰는 것도 귀찮고 가카 같은 직함도 아깝다. 그나마 씨자도 붙여 주기 싫었으나 이모 *이라고 하면 농담하는 것처럼 보일까봐 할 수 없이 붙여준다. 그래도 공개로 올리는 글이므로 뒷조사 당하고 싶지 않아 한 글자 더 큰 인심 쓰는 것)는 운도 좋지 때마침 죽어준 김정일 덕에 근 열흘째 생일인 기분이 아닐까. 아주 천만다행인 연말을 보내고 있을 그와 이 나라 집권세력, 그리고 덤으로 운 빨까지 가만히 앉아서 빨아 드시는 여권의 대권 공주님까지... 북한은 제대로 따스한 연하장을 날려 보냈다. 보수신문은 연일 안철수의 지지율이 하락하고 있다고 호들갑이고 TV 정보란만 빼면 全 신문지면이 로농신문과 크게 다를 바 없지 싶은, 요즘이다. 김정일과 김정은은 선관위 디도스도 FTA 날치기 통과도 4대강 사업도 한나라당 분해설도 싸그리 덮어버리는 괴담이상의 괴력을 발휘하며 연말의 대미를 장식해주고 있지 않은가.



잘못은, 잘못만이 감싸 준다

 

   정봉주 전 의원의 구속을 보면서 대체 그는 얼마나 그들의 허물을 눈감아 주었을까를 생각했다. 왜, 그들은 집권자에 대한 충성심이 이리도 유별나게 절절한 것일까 싶었다. 무슨 일이 터지기만 하면 그들은 모두 입을 모아 그분은 절대 모르시는 일이고 자기 혼자 독단으로 그분 좋으라고 일을 저질렀다고 최면에라도 걸린 것처럼 정신 나간 발언을 해댄다. 김어준, 김용민 책에 보면 하나같이 권력자가 가장 무서울 땐 잡아다가 죄 몫으로 감옥 넣는 것이 아니라 비리를 알고서도 음흉하게 감싸줄 때라고 말한다. 가장 질 나쁜 권력자는 지금 살려주고 나중에 옥죄기 위해 혹은 내 비리가 밝혀질 때 비장의 카드로 써먹기 위해 서로서로 보험들 듯이 조커 패를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이다. 전형적인 보수 집권세력이 허구한 날 법과 질서가 중요하다고 대중에게 소리 높여 뻥치는 이유는 매일 술 퍼 마시는 작자가 건강이 가장 중요하다 말하는 이치와 똑같다. 그들이 가장 두려운 건 진실이 밝혀지는 것이고 가장 반가운건 진실이 덮여지는 것, 그리하여 혐의도 사라지는 것이다. 어찌 되었건 안 밝혀지기만 하면 그런 일을 한 적이 없다는 것과 같다는 말씀이다.(이 책을 보면 명백한 증거가 나와도 그건 사건의 본질과 관련이 없다며 떼를 쓰고 버티기만 하면 된다는 식이지만) 맹자(공자인가?)가 말하길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내가 알고 당신이 알면 그건 비밀이 아니라 했거늘, 그들은 그 한명의 당신만 없으면(있더라도 사라지게 하면) 완전한 비밀이라 여기는 것이다. 


   내 생각에 누가 되었건 그의 혐의를 묵인하고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혹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덮어주려는 작자들은 틀림없이 그래야만 할 어쩔 수 없는 이유가 있었다고 밖에 생각하기가 힘들다. 정봉주는 이 책에서 계보가 없기 때문에 여의도에서 대표적으로 보호받지 못한 왕따 국회의원이었다고 말하고 있는데 역으로 만약 계보가 있는 정치인이었다면 과연 구속까지 되었을까 그런 생각도 든다. 같은 주장을 한 것인데 박근혜가 한 말은 가치판단의 문제이고 정봉주가 내세운 것은 허위사실이 되는 정치현실은 박과 정의 주장이 (홍준표 전 대표가 말한 것처럼)다른 문제이어서가 아니라 박과 정이 본질적으로 다른 정치인이기 때문인 것이다. 이러한 현실은 비단 정치계에서만 발생하는 비극은 아니다. 우리 사회는 학연, 지연 등의 인맥과 상관없이 혼자서 잘나가는 인사들을 대체로 보호해주지 않는‘같이 살고 같이 죽기’의 사회이다. 오히려 도대체 어디까지 잘나가는 지 가만히 지켜보다가 기회가 생기면 두고보자하는 식이 팽배하다고 할 수 있다. 조직사회에서 똑똑하고 능력 있는 사람일수록 기회도 많아 보이지만 그만큼 위험의 순간도 많이 찾아온다. 나는 회사 다닐 때 한국의 디자인 산업계가 S대와 H대파로 나뉘어 팽팽한 대결을 벌이다가도 신선한 유학파만 나타나면 갑자기 똘똘 뭉쳐 그들을 배타적으로 왕따 시키는 현장을 무수히 목격했다. 업계에서도 누군가 실수를 하거나 큰 잘못을 저질렀을 때 같은 학교출신이기 때문에 정의의 편을 들지 않고 제 식구만 챙기고 감싸려 드는 행태를 지겹도록 보아왔다. 학교의 명예를 위해서라며 잘못을 덮어주고 회사의 이익을 위해 비리를 외면하고 우리가 꼭 유명한 정치인이 아니더라도 살아오면서 내가 속한 계파에 없는 타자들을 알게 모르게 나 몰라라 한 적은 생각보다 많지 않을까. 나이 사십 넘어서 아줌마들끼리 모여도 애들 피아노 가르치는데 선생이 어느 대학 나왔냐고 일단은 묻고 끄덕이는 세상에 살고 있다. 우리는 이 모든 꼴을 대단히 잘 학습해온 기성세대이기에 우리 아이들에게 그토록 일류대의 중요성을 강조하는지도 모르겠다. 


    결국 희생은 의원이 하고 당은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는다. 그렇게 당을 위해서 고생한 의원들은 아미도 기억하지 않
   고 구제할 생각도 하지 않는다. 그것이 정당의 모습이고 정치다.   
- p203


   그가 지적했듯이 저격수는 치밀하게 저격을 하는 임무도 있지만 저격에 실패하거나 노출이 되면 언제든지 죽을 수 있는 운명이다. 어떨 땐 조직을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 할 때도 있는 것이다. 나꼼수 33회에서 김어준은 아주 분통스런 어조로 자기들(민주당) 위해서 앞장서 싸운 당원을 이렇게 버릴 수 있느냐, 왜 하나도 보호해주는 이가 없는 것이냐면서 저격수된 정봉주 형 뒤에서 격조 높게 비난했다. 나이 들어 정봉주 같이 싸울 때 앞장섰다가 나중에 혼자서만 보복당하는 사람을 보면 대다수의 사람들이 두렵고 비겁하기 때문에 자기 살기 위해 결국 누군가를 희생양으로 만들기를 묵인하며 살아가는구나...그런 생각이 든다. 정봉주를 보면서 알면서도 침묵하고 눈감았을 이 시대의 많은 비겁자들 속에 내가 있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느꼈다. 그리고 외로왔다. 어쩌면 슬픈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는데 결국 모두 한 사람을 향한 울분의 다른 말이었을 듯하다.

 

 

우리는, 모르지 않았다

 

   MB가 BBK와 확실한 관련이 있으며 도곡동 땅의 실소유주는 이명박 대통령(일 것)이라는 것쯤은 김정일의 아들 이름이 김정은이라는 것만큼 이제 초등학생들도 다 아는 추정소설의 결말이다. 나꼼수와 <닥치고, 정치>를 통해 우리는 대부분 BBK 기업형 첩보소설의 주인공과 시나리오를 잘 이해하고 있다. 김어준이 사회학적으로 접근했다면 정봉주는 보다 형사적으로 근거와 자료를 제시하며 사건을 보도하는 듯했다. 두세 번 이들의 주장을 읽으며 느낀 것은 이 나라 정부와 검찰은 지난 4년 동안 BBK가 이명박의 소유가 아니라는 것을 억지 쓰고 잘 모르는 국민에게 세뇌시키기 위해 존재했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바이다. 우리가 이 모 씨를 대통령으로 뽑아 줄 당시로 돌아가서 잘 생각해보면 우리도 그가 그렇게 도덕적이고 인품이 높을 것이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다고 기억한다. 우린 그의 도덕성 결핍을 얼추 예상들 하고 있었지만 그냥 묵인하고 다른 능력을 더 중요시 한 사람들이었다. 정봉주는 한나라의 지도자를 선출하기 위해 도덕성 검증이 왜 필요하고 왜 그토록 중요한지 절절히 깨우쳐 준 정치인으로 기록될 것이다. 


   정치권이 아니더라도 돈을 여기저기서 끌어다 모을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들은 처음엔 배후 동업자 혹은 의사결정권자 식으로 앞으로 드러나지 않게 창업과 주주관련 사안에 관여를 하면서 회사가 성공하게 되면 슬슬 그 회사는 내가 창업했고 내 소유고 다 내가 기획했다 주장한다. 만에 하나 잘못되었다 치면 나는 그 회사와 일절 관련이 없는 사람이고 동업자는 썩 믿을 만한 사람이 아니라 판단해 일찌감치 손을 뗐다 하는 것이 사기꾼 형 자본가들의 전형적인 수법인 것이다. 그들은 이런 식으로 치고 빠지는 사기행각을 벌이는 것에 추호도 도덕적인 양심이 없다. 기업을 하다보면 살아남는 것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에 큰 돈을 모으고 굴리는 것도 능력이라 생각하며 살아가게 된다. 액수가 크면 클수록 대개 자신의 도덕성에 무감하다고 본다. 이는 사람을 많이 죽일수록 죄책감에서 멀어지는 것과 같다. 그런데 대통령을 한다하면 그 도덕성은 심각한 문제가 된다는 것이 정봉주가 주장하는 것이었다. 그렇다. BBK 전모를 다시 한번 학습하면서 깨닫게 되는 것은 이 모 씨는 전혀 자신의 잘못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으며(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에) 있다하여도 크게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할 것이며 느낀다 하여도 자기 인생에서 중요한 일이 아니라 생각할 것이라는 것. 나는 확신한다, 그의 뻔뻔함과 불감증을. 문제는 우리가 그의 성향을 몰랐던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우리들 각자의 욕망에 따라 그를 택하였다는 것이다. 유시민의 <국가란 무엇인가>에 보면 민주주의가 꼭 훌륭한 지도자를 뽑는 제도는 아니라는 투표의 오류를 지적하는 부분이 있다. 정봉주는 민주주의 국가에서 국민은 민주주의가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는 환상을 하기 쉽다고 꼬집는다. 유시민은 (다양한 국가론을 빌어) 민주주의가 ‘국가를 잘 통치할 훌륭하고 유능한 사람과 정당을 국민이 선택하는 제도’가 아니라 무능하거나 최악의 인물이 지도자로 선출되더라도 그 악을 최소화하기 위해 마련된 제도라 정리한 바 있다.  마찬가지로 법치주의 역시 법과 형벌로 국민(통치 받는 자)을 다스리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통치하는 자를 구속하기 위해 만들어진 개념이라는 것이다.


    “ 민주주의 정치제도의 목적은 가장 훌륭한 사람을 권력자로 선출하여 많은 선을 행하도록 하는 것이 아니다. 사악하거나 거짓말
     을 잘 하거나 권력을 남용하거나 지극히 무능하거나 또는 그 모든 결점을 지닌 최악의 인물이 권력을 장악하더라도 나쁜
    짓을 저지르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민주주의 정치제도의 목적이며 강점이다
. ” 

 

 

    “ 일부 권력자들의 심각한 오용 때문에 대한민국에서 ‘법치주의’라는 개념이 많은 오해를 받고 있다. ...법률과 형벌로 국민을 다스
     리는 데는 어떤 주의도 필요하지 않다. 그것은 권력 그 자체의 속성이기 때문이다. 권력은 법을 만들 수 있는 힘을 필수요건으로
     한다. 법을 만들지 못하는 권력은 권력이 아니다. 법치주의는 권력이 이러한 속성을 제멋대로 발현하지 못하도록, 권력자
    가 자의적으로 권력을 행사하지 못하도록 하기위해 만든 원칙이다
. ”    -50 p     유시민 <국가란 무엇인가>  中

 

   이렇듯 지도자의 일방적이고 잘못된 권력행사를 막기 위한 법치주의, 민주주의가 현 정권 들어 급격히 후퇴했다고 말한 사람은 누구였던가. 임종하기 한 달 전 마치 유언처럼 하소연한 김대중 전 대통령이었다. 지적하신 그대로 그때 이후로 무슨 정언명령처럼 더욱 우리나라의 법치주의, 민주주의는 완전 추락의 내리막길을 달려와 이제 진실을 덮고 거대한 흐름을 막아보고자 용기 있는 한 정치인을 황급히 감옥에 보내버린 지경에 이르렀다. 물론 민주주의라는 것이 원래부터 그런 위험을 적절하게 관리하기 위해 만든 것이므로 절망할 필요는 없지만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바로 국민은 임기가 정해져 있는 정부를 해고하고 새로운 정부를 세울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모 씨가 민주주의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새삼 일깨워 주었다면 정봉주는 민주주의의 유약하고도 위험적인 속성을 가르쳐 주었다.

 

 

 

다시, 일어나서 달려라

 

 

   드레스룸에서 감옥연습을 했다는 그는 얼마나 수감생활을 하게 될까. 3월 1일 사면을 바라는 국민들에게 자신은 떳떳이 형기를 다 채우고 나오겠다 답하던 모습이 기억난다. 나꼼수 녹음실에는 실물 정봉주 사진을 갖다 놓고 김용민은 편집할 때 정봉주 웃음소리를 적절히 삽입하겠다고 말했다. 공교롭게도 어제 김문수 경기도 도지사의 소방서 119 전화 건으로 정봉주의 웃음소리는 다시 한번 진가를 발휘했다.(우연의 일치인지 정봉주는 이 책에서 김문수와 미국에 동행했을 때 김문수가 미국을 꼭 위대한 미국, ‘Great America’라 말할 필요가 있는지 비판했다) 지난번 조선일보 기자가 전화했을 때 욕설로 되받아 쳤다고 한 그 부분을 절묘하게 편집하여 김문수 전화목소리와 이어 붙이니 도저히 듣고서 나자빠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때 사실 욕설 수위가 높아 걱정을 했는데 이렇게 기가 막히게 쓰여 질 줄 누가 알았겠는가) 역시 치명적인 매력의 소유자, 정봉주를 응원하는 사람들이 예상대로 많구나를 다시 한번 실감했다. 그는 자신을 지켜줄 사람도 조직도 아무도 없다고 했지만 세상은 아직...그렇진 않은 것 같다.

 

 

    나꼼수 에서나 대외적으로 농담처럼 말하고 있지만 속으로는 무척 두렵다. 일부라도 뒤집히지 않고 그대로 확정된다
    면 꼼짝없이 감옥행이다. 나를 지켜줄 사람도, 조직도 하나 없는 지금, 그야말로 하염없이 눈물만 쏟아 졌다
.  -256p

 

 

   책을 덮고 나서 든 생각인데 이 정권에서의 의혹은 모든 것이 처음부터 정해진 것이고 검찰수사나 발표 같은 것은 형식적인 요식행위에 불과하다는 생각이었다. 보수 신문에선 모두가 근거 없는 괴담이고 괴담이야 말로 우리 사회의 화합을 저해하는 병적인 요소라 지적들 하고 있지만 언제나 핵심정보를 증언할 만한 인물들은 늘 그렇듯 기획출국 아니면 기획입국된다. 그런 중요한 인물이 등장할 땐 꼭 서태지-이지아 건과 유사한 대형 스캔들이 동시에 살포된다. 그리고 서둘러 눈에 보이는 요직 몇 사람이 잘리거나 구속되는 것으로 수사는 종결된다. 이에 정봉주의 결론은 이렇다. 검찰은 정치권이 깨끗해지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정치권이 안밖으로 깨끗해지면 그 개혁의 칼날은 그대로 검찰개혁으로 향할 것이기 때문에 ‘비리의 정보를 주머니에 넣고 만지작거리며 정치권을 향해 적당히 하라는 시그널을 보내는 것’이 더 편한 방법이라는 주장이다. 나 역시 적극 동의한다.(자기들도 뒤로 구리기는 마찬가지니) 그런데 이 논리로 따지면 뒤를 봐주는 빽이 없고 정의롭게만 살아왔다면 그 사람은 보다 감옥에 갈 확률이 많아진다고 할 수 있다. 복잡한 뒷생각을 할 필요가 없고 그렇게 깨끗한 정치인이 많아 봤자 검찰만 피곤해질 것이 자명하기에. 이렇게된 사회에선 그 누가 저격수 역할을 하고 선봉장이 되어 비리를 밝히려 들 것인가.

 

 

   또 하나, 이 책의 말미에는 부산, 삼화 저축은행 비리사건에 대한 의혹도 제시 되어 있다. 핵심은 쓰러져 가는 은행에 삼성이나 포스텍 같은 대기업이 막대한 돈을 투자하게 된 배경이다. 투자 유치와 중간 돈 빼돌리기 과정에 로비스트에 해당하는 인물이 포착되는데 늘 그렇듯 대통력 친인척과 여권 수뇌부가 거미줄처럼 연결되어 있다. 시작은 대규모 비리수사에 착수할 것처럼 창대하지만 신기하게도 대통령의 형, 조카사위,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 등의 실명이 거론되는 기사가 나오기 시작하면 검찰은 약속이나 한 듯이 정치권과 연관이 없다며 수사를 종결한다. 어차피 고령의 상인과 서민들만 피땀 흘려 벌어 놓은 돈을 다 날리고 난 이후이다. 시장근처에서 자주 볼 수 있어 서민과 친한 줄 알았던 저축은행은 기실 금전적 이해관계로 얽혀진 검은 커넥션으로 운영되어온 그들만의 ‘욕망의 도가니’ 로 기능해 온것이다. 정봉주는 이 챞터의 소제목을 미리보는 청문회라 칭했다.

 

 

   그런가 하면 자신의 치적을 홍보하고 능력을 과시하기 위해 자원외교로 국민을 현혹하는 과정과 교육전공자답게 대학등록금의 문제도 거론하였다. 등록금 인상이 탐욕스런 사학비리와 필연적으로 연계되어 있다는 지적이었다. 공공성을 담보해야 할 교육부가 학생이 아닌 대학의 편을 드는 행태 역시 전관예우와 먹이사슬 관계로 엮어진 오래된 어둠의 커넥션이라 말했다. 가만 보면 대통령부터 이어지는 뿌리 깊은 서로 눈감아 주고 챙겨주기 관행이 아닐 수 없다. 공직의 최고위직이 지향하는 바가 바로 전 공무원이 좇아가는 악습이 되고 있는 것이다.

 

 

    문제가 있거나 부패한 대학이라고 해도 교육부는 그 대학들 편이다. 교육부 고급 공무원들이 은퇴하면 그 대학의 고
   위 직원이나 교수로 가는 관행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은퇴한 공무원은 그 대학을 위해 교육부에 감사 축소 로비
   를 하거나 혹은 예산 지원을 받기 위한 로비 창구로 쓰인다.
  -303p

 

 

   아직 주진우 기자의 글은 읽어보지 못했는데 나꼼수 4인방 중 김어준, 김용민과 비교해보면(책만으로) 그는 말하는 대로 글을 쓰는 사람인 듯하다. 김어준의 글은 말하는 방식과는 상반되는 쪽이었고 김용민은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글을 쓰는 듯 했다. 각자 자기만의 방식으로 대중과 소통하고 있지만 말하는 방향은 한 곳인 것 같다. 정의와 도덕. 참여와 용기. 기죽지 말고 일어나기.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 달려가기... 그는 누구보다 열심히 정치인생을 살아왔다 생각하지만 90프로는 인정받지 못한 과정 이었다 고백한다. 그저 묵묵히 앞만 보고 달려왔기에 자신을 포레스트 검프와 비유하기도 한다. 고통과 시련에 굴복하지 말고 달리라는 말이 어쩌면 우리가 아닌 자기 자신에게 하는 말로 들리기도 한다. 달리는 순간 고통은 잊고 정면을 응시하는 순간 이미 성공을 향해 나아가는 주인공이 되기 때문이라 말한다. 나 역시 삶이 시련의 연속이라는 것에 눈물이 마를 만큼 아니 목에 침을 삼키기 어려울 만큼 말라버린 목소리로 그렇다 답하고 싶다. 정봉주, 그가 수감되기 직전에 녹음실에서 자신의 아내에게 미안하다며, 고맙다며, 그리고 사랑한다며 말해놓곤 울어 버리는 장면을 떠올린다. 사람은 감옥에 가둘 수 있어도 진실은 가둘 수 없다는 젊은이들의 준엄한 외침도 잊지 않으련다. 세밑이 예전만큼 따스하진 않은 것 같다. 그래도 희망을 버릴 순 없다. 그곳이 어디든 외롭게 달리고 있을 사람들과 언제나 함께 달리고 있을 것이라는 그를 기억해야 한다. 이제 그에게 반대로 이곳에서 이렇게 손잡고 달리고 있을 우리를 기억하라 전하고 싶다. 아무것도 아닐 수 있고 어쩌면 아무 힘도 못 될 수 있지만 그래도 말해드리고 적어 놓고 싶다. 2012년엔 그렇게 견딘 모든 시련이 부디 우리가 염원하는 정의, 그리고 진실과 도덕이라는 아주 평범하고 당연한 상식으로 열매 맺길 기대한다. 새삼 '역사를 신앙으로 섬기고 정의를 믿었으며 진실이 역사가 되어야 한다'고 믿은 한 사람이 생각난다. 정봉주, 그 역시 이 추운 겨울동안에도 죽지 않는 인동(忍冬)의 세월을 이기고 당당히 세상에 나와 다시 정치의 꽃을 피우길 진심으로 기원한다. 그때까지는 국민이고 싶다. 아니 세월을 같이 기다린 후 그때부터 라면 더욱 국민이고 싶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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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1-12-30 1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적어도 이런 가슴으로 읽어주는 책 2,3권은 읽어줘야 하는데
올해 그런 책이 과연 있었나 싶기도 하네요.
저는 그 좋다던 <닥치고 정치>도 읽어주지 못하고 한해를 마무리하니 참...ㅜ
일껏 생각한 것이 올해 참 소설 안 읽었다 반성하고 있었습니다.
이러니 나라가 발전할게 무에 있었겠습니까?
알고 보면 우리나라 사람들 참 무서운 사람들입니다.
이러고도 대한민국이란 간판 걸고 사는 것을 보면...그냥 웃지요.^^

꽃도둑 2011-12-30 15: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꼼수에 반기를 드는 사람들 중에서 정치는 이성적이어야 하는데 너무 감성적으로 치우치게 했다고 우려하던데...
저는 솔직히 나꼼수 이전에 정치에 대해서 무관심 수준이었는데...덕분에 관심과 애정을 갖게 되었으니..
글쎄요,,이성과 감성 모두를 작동시키며 다가선 것 같은데..왜 그런 우려를 하시는지...뭔가 두려운게 있는 걸까요?
격을 너무 떨어뜨려서 우리모두 죄송하다고 해야 하는건가요?,,,ㅎㅎ

저는 이 격없음이 너무 좋은데요..시들시들한 정치라는 가지에 물 오르게 하고 새싹이 돋게 한 그들을 위해
나역시 체력이 딸리는 관계로다 그들이 낸 책을 싸그리 사는 걸로 고마움을 표시하긴 했는데 왠지 약에요(김어준투로 읽어주세요) 지금은 보수를 팝니다를 읽고 있는데 아ㅡ, 좋아요,

글샘 2011-12-30 18: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봉주 유죄의 근거가 그거잖아요.
이씨도 그렇고 딴날당도 그렇고, bbk가 지꺼 아니라는데 왜 자꾸 우기냐고,
그리고, 아마 정봉주는 아니라고 믿으면서 민주당땜에 우기는 거라고...

근데, 어떡하죠? 그 회사의 실소유주가 누군지, 이제 누구나 알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뜨거운 글, 잘 읽었습니다.

cyrus 2011-12-30 22: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올해에는 국민들이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망언과 공익에 위배되는 정치적 활동을 한 나쁜 정치인들이 많았지만,
그래도 정봉주 씨 같은 군력의 부당함에 맞설 줄 아는 좋은 정치인들이 있어서 다행인거 같아요.
그리고 연말에 김근태 씨가 세상을 떠난 것도 아쉽고요. 또 나꼼수의 인기도 대단했고요.
여당 박근혜 비대위에서 디도스 사건 검증을 위해서 김어준 씨를 영입하려고 했으니까요.
물론 김어준 씨가 비대위의 제안을 거절했지만요.

2012-01-01 09: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소설가로 산다는 것 - 우리 시대 작가 17인이 말하는 나의 삶 나의 글
김훈 외 지음 / 문학사상사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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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되지 못한다면

 

 

 

   올해 나는 거북이처럼 느리게 성장했다. 순수한 시간의 속도감은 사실 작년보다 올해가 더 빠르게 체감 되었지만 글쓰기로 내가 이룬 것들은 성과 면에서 본다면 지지부진, 그야말로 형편없었다고 볼 수 있다. 확실히 성과를 지향하지 않으니 가시적인 성과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면서 나는 무어라도 하나 챙겨 받는 사람들이 더욱 남들의 성과를 부러워하고 자연스레 욕심도 낼 수 있다는 이치를 깨달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사람은 아무것도 부럽지 않은 것. 이 증상이 꼭 좋다고 만은 할 수 없는데 그래도 괜한 열패감 때문에 서글퍼지거나 혹은 어줍잖은 위선이나 기만으로 서로 의무적인 축하의 당위성에 스스로 지배당하는 꼴보다는 낫다는 생각이다. 거창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천천히 걸어 오래 사는 거북이를 택했기에 올해 나는 글쓰기만을 위한 글쓰는 자유를 눈에 보이는 보상과 과감히 빅딜할 수 있었다고 본다.

 

 

   새삼, 지난 일 년 간 내 글쓰기 행보를 돌이켜보면 중간에 색다른 유혹도 있었고 뜻하지 않은 상채기들도 예상보다 많이 치루어 낸 듯하다. 모두 그전과는 다르게 쓰고 다른 걸 말하고 싶었기 때문이고 그러다보니 달라진 글 때문이라 생각한다. 허나 글쓰기라는 행위가 논리적으로 생각하고 다짐했다고 해서 쉽게 바뀌어지는 성질이 아니기 때문에 나는 내가 가진 역량을 평소 열정의 부피만큼 동일한 정도로 발전시키는데 퍽이나 힘겨운 세월을 보낸 것 같다. 무엇보다 나는, 그래야 하는 나를 견디기가 가장 힘들었다. 그리고, 아니 그랬기 때문에 얼마간은 견뎌내었고 결과적으로 달라질 수 있었다는 사실을 내가 이룬 가장 큰 성과로 삼고 싶다.

 

 

   냉정하게 말해 글쓰는 내 수준과 현재의 위치는 어디쯤일까. 안타깝지만 나는 지방 어느 중소도시 읍내 나이트 클럽의 무희 혹은 전속까지는 안 되고 이리저리 알바 뛰는 미사리 밤무대 가수 정도라 생각한다. 신인가수로 데뷔하기엔 나이가 너무 많고 오디션 같은 등용문을 통과하기엔 질곡한 세월의 때가 두껍게 쌓여 버린. 물론 나도 내 전공이 있고 내가 해온 일이 있으므로 그 바닥에선 전문가 소릴 들을 수 있(었)을 지언정, 노래로 치자면 그러니까 가수를 하겠다고 노래연습을 하고 있다고 보자면 앞날이 그리 밝은 편은 아니라는 것이다. 신춘문예에는 대부분 문창과 출신들의 공모용으로 잘 훈련된 글이 당선이 되고 출판사 문학상에는 다소 실험적인 작품들이 신인상의 영예를 차지하며 운 좋게 그러한 바늘구멍을 시원하게 뚫어버린 낙타가 되었다 하더라도 자기 생활이 달라지는 일은 없다는 것쯤은 말 안 해줘도 잘 알고 있다. 알고 있으면서도 까놓고 말해 무엇 하나 보장되지 않은 문학의 길에 당신의 남은 인생을 투자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묻는다면 딱히 근사하게 답해줄 말은 없다. 언제까지 생업으로 미사리 가수를 지속할지도 모르겠고(미사리 가수는 그래도 돈이라도 받지 ㅠ)이마저도 그만둔다면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확신은 없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직까지는 칼만 빼들은 상태인지라 포기하기는 이르다는 생각이 더 지배적이긴 하다만 올해 같은 시간이 몇 년 만 더 지나간다면 나는 아마 지나온 시간을 과감히 포기할 수도 있을지 모르겠다. 잘은 모르지만 지금 내가 이렇게 살지 몰랐듯이 그때 나 역시 그렇게 살게 될지 모를 것이 뻔하지 않은가.

 

 

   늘 그렇듯, 이처럼 아무것도 되지 못한 쓸쓸함보다는 아무것도 되지 못할 것 같은 불안감 때문에 적지 않은 글쓰기 책과 작법을 알려주는 책, 소설가의 소설 쓰는 이야기 책을 습관적으로 집어 드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사실 수많은 위대한 소설가들 중에 굳이 닮고 싶은 작가는 없다. 누구를 모델로 삼은 적도 없고 어떤 작품을 흠모해 본 적도 없다. 작가의 인생과 그가 견뎌낸 세월과 그로인해 탄생한 작품을 접하면 접할수록 그들은 나와는 점점 멀어져만 가는 느낌이었다. 나는 죽었다 깨어나도 그렇게까지는 못하겠다, 이것이 솔직한 심정인 것이다. 그러면서 반대로 그 작가의 단점을 찾아내 그 구멍으로 탈출구를 빚어 낼 줄은 알았다. 예를 들어 문체상으로는 이청준, 이문열, 김훈의 글들이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방식과 가장 비슷하다 여기지만 감성이 부족한 보수적 남성 이데올로기를 지향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고 하는 식이다. 중산층 비틀기로서의 박완서는 완벽하지만 과거로의 끝없는 회기와 동어 반복적 서사는 고루하기 짝이 없기에 결과적으로 소설적이지 않다, 뭐 이런 식으로 웃기지도 않게 나는 내 맘대로 내 잣대로 선을 그어 버린다.

 

 

   나는 내 글이 어느 정도 서사의 리듬감은 있지만 문장 속에서 유머나 위트가 현저히 부족해 무겁게만 느껴진 적이 많았다. 여기서 조금만 더 칼날을 휘두르면 엄청난 냉소가 느껴지고 조금만 청승을 떨면 여지없이 땅바닥에 주저 않아 울고 있는 형국이 되어 버린다. 누구나 자신의 글에 대해 객관적일수가 없겠지만 나에 대해 그리고 내 글에 대해 말하는 여러 의견들을 종합해보면 내 글은 지나치게 고집스럽다고,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좋게 말하면 자기만의 논리로 끝까지 밀고 나가는 힘이고, 나쁘게 꼬집으면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 있는 독단의 도가니. 나는 이 성향이 좋고 싫고를 떠나 형제 없이 혼자자라 늘 혼자 생각하고 혼자 판단해온 삶의 이력에서 상당부분 비롯된 방식이라 진단한다. 내가 살아온 방식이 내가 쓰는 방식을 결정지었다고 믿는다. 문제는 내 고집이 과연 어떠한 울림을 만들어 낼 수 있는가, 그것을 느끼는 누군가에게 감동을 제공할 수 있는 가인데 그 부분의 긍극적 질문에 이르면 내가 과연 왜 소설을 쓰려고 했던 가로 그만 다시 회기하고 만다는 것이다. 누구를 위해 소설은 쓰여 지는가. 무엇을 말하기 위해 소설은 택하여 지는가. 나는. 왜. 하필. 소설. 인 것인가.

 

 

   소설을 쓰고 있으면서도 왜 쓰고 있는지 집요하게 물어보고 하루마다 답을 한다. 며칠 전엔 나의 능력이 어디까지인지를 확인해보고자...하는 궁색한 답을 내놓고는 서둘러 질문을 폐기해버렸는데 고맙게도 그날, 이웃 한분이 당신은 미셀 투르니에 같은 글을 쓰게 될 것 같다는 덕담을 해주셨다. 미셀 투르니에의 작품을 하나 안 읽어 보았지만 바로 한권도 읽어보지 못한 내 자신이 부끄러워 갑자기 가슴이 홧홧해져 오는 것이 그대로 앉아 있을 수가 없어 바로 도서관으로 달려갔다. 하늘에서 내려오던 눈발은 흩날리자마자 길바닥에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어떤 날은 그렇게 쌓이지 않는 눈들이 빗물보다 눈물보다 더 부질 없어 보일수도 있는 것이다. 이웃님이 말해주기 전까지 전혀 내게 어떤 의미도 가지지 못한 책이었지만 그 사이 혹시 누군가 그의 책들을 다 빌려라도 갔을까봐 얼마나 불안했는지, 생이라는 게 참 눈이 그렇게 쏟아져도 아무것도 쌓이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에 나는 어쩔 줄 몰라 했다.

 

   나는 그의 작품을 두어 개 빌려왔고 대여를 하면서 누군가가 반납한 책이 눈에 들어와 그 책도 덤으로 가져왔다. <소설가로 산다는 것>. 두어 달 전 같은 책을 서점에서 들춘 기억이 났기 때문이다. 집으로 돌아와 미셀 투르니에 책은 신간 에세이도 한권 주문을 했고 빌려온 두 권도 설레이는 마음으로 읽어 내려갔다. 하지만 나는 굳이 안 빌려도 되었을, 아니 자칫하면 안 빌릴 수 있었던 <소설가로 산다는 것>이 자꾸 눈에 밟혀 결국 그 책을 먼저 읽고 말았다. 아마 올해가 가기 전에 한 개 정도의 페이퍼를 더 쓸지 모르겠는데 만약 쓰게 된다면 미셀 트루니에로 하자, 속으로 그렇게 다짐하면서(안해도 되는 다짐을 왜 했는지 ㅠ) 나는 지금도 본 책이 아닌 별책부록을 먼저 대접한 것에 겸연쩍어 하고 있다. 어쩌면 부록이 간절해 본 책을 구입하는 일도 있기 마련이니까. 때로는 부록이 본전이상을 뽑으며 톡톡히 효자노릇을 할 때도 있으니까.

 

 

 

 

비법을 말해 준다면

 

 

 

   제목은 우선 그럴싸한 페이크임이 분명하다. 그럴 줄은 이미 알고 있었다. 이 책에는 열일곱 명의 소설가가 자신만의 창작론을 저마다의 문체로 자아내고 있다. 모두들 될 수 있으면 편하게 써달라는 청탁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때가 되니 그것들을 모아놓고 ‘소설가로 산다는 것’이라 근사하게 이름 붙였을 뿐. 사실 적절한 주제는 ‘소설을 쓴다는 것’에 더 가깝다 할 것이다.(나는 늘 출판사의 제목마케팅에 불만이 많은 독자라...) 허나 누가 봐도 ‘쓴다’는 것보단 ‘산다’는 것이 더 철학적, 문학적이며 더 깊이 있고 더 팔릴만한 뉘앙스이렷다. 소설가로 산다는 건 소설을 쓴다는 것의 문제이기도 하므로 넘어가주기로 하고 내가 이 책을 덮으며 느꼈던 몇 가지 감상은 기록해두고 싶다.

 

 

   먼저 개인적으로 열일곱 명중에 소설가로 사는 모습이 정말로 궁금했던 작가는 전경린이었고 창작론이 궁금했던 작가는 김인숙, 하성란 정도였다. 나머지(라 칭하여 죄송하지만) 분들은 큰 기대가 없었다.(별로 비밀을 알려 줄 것 같지 않아서 ㅋ) 김경욱의 작자와 화자, 주인공에 대한 식견은 쉽게 해도 될 말을 현학적으로 치장한 것 같아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다. 김애란의 경우도 마치 단편 소설을 쓰듯 접근한 방식이, 문청시절을 아스라이 회상하는 언어들이 어쩐지 작위적으로 느껴졌다. 음악을 모티브로 작업을 한다는 김연수의 글도 흡사 논문숙제를 하는 느낌이 들어 진정성이 느껴지지 않았다. ‘북경, 세기 전 신채호가 살았던 집을 거닌다.’로 시작되는 김인숙의 글은 소설의 소재를 좇아 마치 마지막 퍼즐을 찾듯이 이야기를 만들어 가는 과정을 글 자체로 보여준 것 같아 그 울림이 색다르고 깊게 다가왔다. 직업 소설가 십 삼년 차라는 김종광의 글은 평소 생각을 꾸미지 않고 솔직한 심정을 전달한 것 같아 애틋하게 느껴졌달까. 김훈의 글은 언젠가 책을 뒤적이면서 가장 먼저 읽었던 기억이 생생한 내용인지라 익숙했다. 하지만 그가 쓴 창작론을 읽고도 실제 창작에 도움되는 힌트는 하나도 발견할 수가 없었다. 김훈은 언제나 내게 문장의 완벽함은 선사하지만 그 완벽함으로 가는 방향을 일러주지는 않는다. 어떤 면에서 박민규도 자기만의 비법 같은 건 절대 공개하지 않을 작가로 인식되는데(외려 비법이 없음에 대한 논리를 만들겠지만) 이번 글 역시 주제를 가지고 노는 것 같아 독자로서 심히 불쾌하기 까지 했다. 글이야 수록된 작품 중에 가장 실험적, 창의적이었고 심심하니까 자동기술법을 연마한다는 박민규식 오토매틱 논리에 수긍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지만 읽고 나서 큰 도움은 되지 못한다는 면에서 김훈과 매일반이었다고 할까. 차라리 부부 동반 자리에 초대를 받아 모임에서 있었던 일을 차분히 회상하며 소설가에 대한 질문들을 하나하나 톺아가는 서하진의 글이 훨씬 감동적이었다. 결혼하여 이십 오 년을 살았다는 지인을 보면서 대단하지 않은 일에 의미를 부여하며 살아가는 것이 우리네 인생이라고, 소설가가 아닐지라도 모든 사람들은 ‘이야기를 만들기 위해서 살아가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작가의 깨달음이 잔잔한 파도처럼 밀려왔다.

 

 

   전공과는 전혀 다른 선택을 했다는 심윤경의 글에선 자신의 낙선작에 대한 논평을 이해할 수 없었던 심경이 제일 공감갔다.(알레고리와 메타포가 도대체 무엇이냐고 묻던 말에 무조건 끄덕끄덕) 윤성희는 어떻게 글을 쓰냐는 질문에 스티븐 킹이 답했다는 “한 번에 한 단어씩 쓰죠.” 라는 대답의 의미를 좇아 글을 구성하는 구체적인 순간의 고민을 풀어 놓았다. 일개 독자지만 작가의 글에서 한결같은 성실함의 태도가 엿보였다고 한다면 건방지다 하실런가. 윤영수는 글이 잘 써지지 않아 선배의 집을 찾아가는 여정 속에서도 계속하여 글을 고민하고 있는 작가의 내면을 그렸다.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작가의 삶이라는 뜻으로 이해되었다. 나이는 고작 오십 줄이지만 의식이 통과했던 시간은 조선중엽까지의 시간을 포함하기에 추억의 깊이가 남다르게 느껴진 이순원은 어디선가 받아놓고 꽂아만 두었던 <은비령>을 쓴 작가였다. 어린 시절 별에 대해 꿈꾸어 온 것들이 다시 소설로 그려진 것이라는 그는 작가에게 공백의 시간은 없다고 위로했다.

 

살아가면서 작가가 되어 좋은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예를 들어 고시공부하시는 분들 중에 어떤 사람이 이 년 만에, 삼 년 만에 됐다고 하면, 오 년 만에 된 사람은 이 년 만에 된 사람에 비해서 삼 년이나 시간이 늦어지고, 그러면 그것은 좀 시간의 낭비적인 요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소설가한테는 자신의 어떤 시간도 다 소중해요.... 작가에게는 지난 어떤 시절도 그의 경험 안에 버릴 것이 하나도 없는 소중한 시간들인 것입니다. 부끄러웠던 기억들은 부끄러웠던 대로 제 마음속의 또 하나의 작품으로 나올 수 있는 것이구요.

- p187    이순원 - 삼백 년 전 소년이 그려낸 ‘은비령’


  

 

    그런가 하면 이혜경의 글처럼 분명 읽었는데 인상적인 구절하나 기억나지 않는 글도 있었다. 보편적이고 무난하고 재미날 것 없어 보이는 개인의 경험들은 확실히 책속에서도 묻히는 느낌이 없지 않았다. 굳이 뒤져보고 나서 발견한 대목은 작가의 인품을 말하는 구절이었는데 평소 글 잘 쓰는 사람이 꼭 인품이 훌륭한 것은 아니라는 것에 곧 잘 상처를 받는 편이라 밑줄을 그어대고 싶은 걸 그냥 참고 넘어갔구나 하는 정도만 겨우 기억해 냈다.

 

다행히, 전기나 평전들은 나에게 일러주었다. 글쓴이의 인품과 글이 주는 감동이 꼭 비례하는 것만은 아니라고. 사람들을 움직이는 글을 쓴 작가가 고매한 사람이 아니라고 해서 작품의 가치가 떨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인품은 뛰어나나 글로만 보면 얕게 느껴지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아니, 아예 글 같은 걸 쓸 줄도 모르는 사람도 있는 것처럼.

- p198    이혜경 - 가만히, 말을 걸어보다

 

 

   하성란은 어린 시절 아버지가 가져오신 <세계 어린이 명화>라는 책에서 본적 있는 유명화가들의 그림에서 시작해 작품이 거울 속에서 다시 살아나도록 배치한 다음 거울에 비친 풍경을 기다리고 말하는 일이 소설가인 자신을 발견하는 일과 같다고 증언한다.(한편의 잘 짜여진 소설과도 같은 글이라 역시 수준이 높다고 생각되었다) 한창훈은 서울에서 섬에 왔다가 다시 서울로 떠난 여인의 이야기를 하며 사나운 바람과 거친 파도가 그리워지는 이유에 대해 자기만의 성찰의 시간을 가지는 듯 보였다. 함정임은 광화문 시절의 문학사상사, 적선동 현대빌딩 팔층의 책상을 회상하며 소설이 시작된 곳을 추억하는 여정의 기록을 작성했다. 기억나는 건 소설이 미리 플롯을 정해놓지 않고 ‘누구도 끝을 알 수 없는, 한편의 미지의 소설을 향해 길을 떠나는, 떠나는 중에 하나의 흐름이 이루어지는 것’을 최고의 미덕으로 여긴다는 고백이었다.

 

 

 

 

계속 써야 한다면

 

 

 

   마지막으로 현재 내 위치에서 가장 구체적인 도움을 준 사람은 전경린이었다. 내가 만약 원고를 청탁한 쪽이었다면 전경린의 글이 가장 취지에 맞았다고 고개를 끄덕였을지 모른다. 저마다 개성적인 자기만의 문체로 자신만의 창작론을 언급했지만 대부분 뜬구름 잡는 이야기가 많았던 반면 전경린은 구체적인 디테일을 이야기 하면서도 큰 크림을 자신만의 언어로 축조하는데 능숙했다. 그녀는 지금 소설을 써보겠다고 결심한 내게 고맙게도 소설이 쓰이는 과정을 알려주었다. 소설에는 정답이 없다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답은 은유라 말했다. 말하자면 ‘내가 쓰는 전체를 한 단어로 은유할 수 있는가, 한 문장으로 표명할 수 있는가’의 문제라는 것이다.

 

어떻게 하든 소설을 시작하는 것은 소설쓰기에서 가장 힘든 과정이고, 용기를 내야만 하는 과정이다. 대부분 내 소설은 내가 잘 아는 것으로부터 모르는 것을 향해간다. ...머뭇거림이란 불길한 징조다... 흥미는 사라지고 채워야 할 당위만 남아 뻣뻣하게 굳은 과제로 변해버린다. 오히려 더 중요한 것은 생각을 끌고 가는 의문과 유혹과 몰입이다.   - p207 

 

 

소설이 삼분의 일 지점을 살짝 넘어설 때에야 대체로 전체의 윤곽이 드러난다. 그와 함께 쓰기의 원인도 잡히고 결말도 어렴풋이 느껴진다. 그러니 자기가 쓰는 것에 대해 잘 모를 때도 열망이 있다면 쓰기 시작해야 하고 계속 써야 한다. 누구나 그렇듯이 소설은 마지막까지 쓰기의 현재성에 내재해 있기 때문이다. 삶이 그렇듯 소설 역시 발밑의 심연을 두려워하며 한 발 한 발 나아가는 과정 자체의 아름다운 인 것이다. 실패할 수도 있고 중단할 수도 있고 완성하지 못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지금은 쓰는 것이다. 두려워하면서도 내 의도를 지나가, 잠재되어 있었던 가능성의 끝까지 가야 한다. 이렇게 해서 겨우 초고가 생겨난다.   - p209

 

- 전경린 - 울려와 은유 中

 

 

   책을 낸 작가보다 초고를 품고 있는 작가가 부럽다는 전경린은 결국 내가 듣고 싶었던 말을 해주었다. 내가 무어라고 감히 문단에서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작가들이 말하는 창작론을 이렇다 저렇다 할 수 있겠는가. 오로지 책을 읽었다는 독자된 특권으로 작가와 방법론을 비교하며 즐거운 평가를 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아울러 진부하지만 그들로부터 또 용기와 자신감을 얻어가려한다. 현재 능력은 안 되지만 끙끙대며 두 번째 소설(비슷한 작품)을 써대고 있는데 나는 이 이야기가 어떠한 성과가 없다 하더라도 절대 중단하지 않고 끝을 낼 작정이다. (나는 현재 서바이벌 형식의 연재소설 공모에 참여중이다) 연말에 내린 결심이라곤 이거 하나지만 나는 어디서 상 하나 타는 실적보다 우스운 결말이라도 하나의 작품을 마무리 짓는 것이 더 중요함을 막연히 깨쳤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예비 작가들이 다음 단계로 진출이 확정되지 못하면 스스로 연재를 중단한다는 다소 처연한 분위기의 고지를 올린다. 어떤 분은 2단계 심사가 통과되지 못하여 아내와 이불을 뒤집어쓰고 하루 종일 울었다고 쓰셨다. 그의 아내도 아니면서 그의 글을 읽어보지도 못했으면서 나는 콧잔등이 시큰해지는 것이었다. 나는 그들이 따로 소설의 마무리를 짓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언젠가는 거절당한 아픔을 뒤로하고 다시 완성을 하게 될 지 그냥 그것으로써 작품의 운명은 끝나게 되는 것인지도. 다른 작가들이 속속들이 다음 단계를 통과하며 고지를 향하고 있을 때 탈락한 작품을 붙들고 완결한답시고 연재를 지속하기가 얼마나 쪽팔리고 또 서글픈 일인지 나는 알지 못한다. 아마 나도 끝까지 갈 것 같지는 않고 대충 어느 단계에서 적절하고 타당한 이유로(그러나 이해할 수 없는 어려운 평가로) 탈락이 될지 모른다. 나 역시도 그때가 되더라도 그래도 끝은 내야겠다며 고집스럽게 글을 계속 쓸 수 있을지 확신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나는 내가 무엇이 틀렸는지 어디가 부족한지 집요하게 듣고 알아보기 위해 그리하여 그 어렵다는 객관의 평을 손에 붙들고 읽고 또 읽어보기 위해, 그분처럼 혼자 이불을 뒤집어쓰고 한번쯤 울어는 보기 위해 끝은 포기하지 않기로 했다. 끝내는 두려움을 계산하지 않기로 했다. (바람은 계산하는 것이 아니라 극복하는 것이기에 ㅋ) 아마도 잘은 모르지만 이미 쓰기 시작했고, 앞으로도 계속 써야 한다면 지금, 멈추지 말아야 할 것 같기 때문이다. 이쯤에서 꿈이 있는 거북이는 지치지 않는다는 김병만의 얼굴이 생각난다. 거북이의 매력은 어딘지 모르게 슬픈 구석이 있다는 것 아닐까. 그래서, 꿈을 이루는 일은 어쩌면 살면서 가장 기쁜 일이기에 누구에게나 슬픈 추억이 되는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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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1-12-28 1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니까, 일종의 `고시 합격생 수기`같은 것이로군요. 아무래도 그것이 결국 중요하게 다가오는 것은 일반 독자들보다는 앞으로 그 길로 나아가려는 사람들일 것이므로 뭔가 회상적이고 비틀어진 글보다는 스트레이트하고 직접적인 것이 더 나을 수 있겠죠. 예전에 누군가가 그랬는데 `소설가는 삶의 공백을 보는 사람`이라고..그렇다면 문제는 그 공백을 어떻게 볼 수 있는가의 문제겠지요. (저는 여기에 없지만 배수아 작가의 창작기, 창작론이 궁금하네요. 여기에 낄 급(?)은 아닌지 모르지만, 김중혁 작가라면 뭔가 아주 실질적인 이야기를 해줄 것 같기도 한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