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위로하는 글쓰기 - 몸과 마음을 치유하고 자기를 발견하는 글쓰기의 힘
셰퍼드 코미나스 지음, 임옥희 옮김 / 홍익 / 2018년 1월
평점 :
절판


<인생수정의 시작은 글쓰기로부터>

 

예나 지금이나 글을 쓴다고 하면 글을 쓰는 사람에게 던져지는 편견의 시선이 있다. 쓸데없는 생각이 많고, 뜬구름 잡는 소리나 하고, 매사 슬프거나 비판적이고, 그리고 결정적으로 실행력은 제로라는 편견이다. 글을 쓴다는 행위자체를 폄하하는 것은 물론이고, 어떤 행동을 가로막는 일로까지 치부하는 경향이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그래도 글쓰기. 돌아보면 내게 글쓰기는 무엇보다 내 자신을 정확하게 정리하는 친숙한 도구였던 듯하다. 마루바닥을 청소할 때 빗자루와 걸레가 필요하듯 복잡한 마음을 쓸어 담거나 어지러운 계획들을 정리할 때 어김없이 글을 써왔던 것 같다. 힘들 때 글을 써버리고 나면 마음의 무게를 덜 수 있었다. 친구와 다툼이 있었거나 직장에서 불쾌한 일을 겪었을 때, 누군가로부터 비판을 받았거나 사귀던 사람과 이별을 결심했을 때도 내 앞엔 늘 내가 적어온 글이 함께였다. 누가 가르쳐주지 않았지만 오랫동안 그렇게 해왔던 이유는 무엇일까. 이 책을 읽고 새삼 나의 글쓰기는 언제부터 시작되었고 나는 어떻게 글쓰기를 일상화하며 살게 되었는지 그 과정도 기억해 볼 수 있었다.

 

학교 숙제로 일기를 써온 것을 제외하고 성장기에 글을 집중으로 썼던 경험은 바로 친구들과 편지 주고 받기였다. 중학교 1학년 시절, 청소함 앞의 6명이 똘똘 뭉쳐 매일 어울려 다녔는데 그 친구들은 모두 글쓰기를 선호하는 성격이었다. 매일 편지 5통을 써서 친구들에게 주면 편지를 받은 5명은 그 다음날 내게 어김없이 답장을 주었다. 예쁜 편지지로 한번에 5통의 편지를 받는 기분은 아직도 생생히 기억난다. 매일 얼굴 보는 친구들인데도 어떻게 그렇게 매일 할 말이 생기는지 신기했다. 주제는 같을지라도 5명에게 똑같이 쓸 수 는 없었기에 조금은 다르게 각색을 하던 것이 아마 다양한 문장력으로 발전을 한 계기가 된 것은 아닐까. 이러한 매일 편지주고받기 의식은 특별한 우정을 지켜나가는 일종의 우리만의 의식이었던 것 같다. 이 행위는 중학교 졸업할 때까지 서로 다른 반이 되어도 지속되었다. 매일은 아니더라도 편지를 주고받기 위해 그 순간은 반드시 얼굴을 보아야 했다. 완전한 아나로그 시절이니 편지의 특장점을 완벽히 누린 청소년기었다. 주고받았던 편지에는 조용필의 노래가사, 유안진의 시, 유명한 속담들이 자유롭게 삽입되어 각자의 감정을 더 돋보이게 만들기도 했다. 그래서일까. 지금도 나는 내가 상대에게 느낀 감정을 충분하게 표현한 편지로 전달하는 방식을 선호한다.

 

<나를 위로하는 글쓰기>에서 가장 공감한 부분은 ‘나 자신과의 화해’이다. 나를 위로하기 위해서는 우선 몸과 마음, 영혼이 편안한 방법을 택해야 하는데 저자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 글쓰기라 주장한다. 즉, 마음깊이 흐르는 내 감정을 느끼고 그것들을 누가 본다는 염려 없이 가감하지 않고, 상상하려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적어나가는 것이다. 사실 우리가 인생에서 2,30대 중반까지 완벽한 성숙이 이루어지지 않은 채 하필 그 시기에 남은 인생을 결정짓는 사항들을 너무나 어이없게 선택해 버리는 경우가 많다. 전공은 둘째 치고 결혼, 취업 만해도 당시 선택했던 나의 기준을 돌아보면 너무나 짧은 견해였었고 그 후 그 결정과 선택 때문에 원치 않는 시간과 고통에 직면하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고 젊은 시절 순간의 결정이 향후 남은 몇 십 년의 향방을 결정해버리는 것에 얼마나들 후회하고 한탄을 하는 시기를 겪게 되는가. 심리상담가들은 결정을 바꾸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지금부터 조금씩 수정하는 것으로 남은 인생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말이 쉽지, 그 수정은 또 어떤 방법으로 얼마나 하는 것인지, 대체 누가 사람마다 일일이 솔루션을 처방해 줄 수 있을 것인가.

 

돌이킬 수 있는 결정은 아니지만 조금씩 지금부터라도 나의 인생을 수정할 수 있다면, 그런 일이 가능하다면 나는 적극적으로 글쓰기야 말로 인생수정의 시작이 아닌가 싶다.

 

“이 일은 과거의 그 일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가?”
이런 질문은 당신의 진정한 자아와 접촉하는데 큰 도움을 준다. 자신도 납득하지 못하는 과거의 아픈 경험은, 글쓰기를 통해 다른 관점에서 생각해보면 의외로 쉽게 실마리를 찾게 되는 경우도 있다. 이런 관점에서 지금 당신이 알고 있는 것을 과거 시점과 연결시키면, 이전에는 불가능했던 일도 쉽게 느껴질 것이다. -124p

 

만약 최근에 힘든 일이 있었고 그것을 계기로 글을 써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고 하자. 일어난 일과 당시 느꼈던 감정을 솔직하게 쓰다보면 언젠가 이와 비슷한 감정을 경험한 기억이 떠오를 것이다. 그리고 그때 나는 어떻게 대처하였고 상대방은 어떤 반응을 하였으며, 그 결과는 어떻게 발전했는지, 훗날 어떤 영향을 주게 되었는지 새삼스럽게 떠오를 것이다. 과거를 돌아보려 글을 쓴 것은 아니지만 쓰다보니 자연스레 나의 과거와 조우하게 되는 일. 그리하여 나의 그림자를 발견하고 내안의 어두움, 나의 본심을 깨우치게 되는 일. 이러한 과정은 가만히 앉아서 생각만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본다. 글을 쓰면서, 뻗어나가는 나의 문장을 느끼면서, 나 역시도 한걸음 성장하게 되는 순간, 그것은 글쓰기가 가진 치유의 힘이고 글쓰기로만 느낄 수 있는 진정한 매력인 것이다.

 

지난 겨울 <북테라피; 독서치유>라는 타이틀의 독서모임을 시작했다. 수많은 독서모임에 참석해봤지만 특히 내가 불편했던 점이 있다. 누군가는 꼭 지나치게 지식을 자랑하려 들거나, 유난히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이 생기게 되어 우리가 책을 읽는 목적이 과연 무엇인지 회의가 들때가 있었다. 그리고 누구나 다 동의하는 내용만 결론으로 마무리하고자 하는 경향들이 정작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막고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남 이야기, 다른 나라, 우리나라 이야기, 다른 세대 이야기, 다른 직업, 다른 성별, 결국 나 아닌 모든 것을 이야기 하면서 나는 별도의 심판자나 모든 것을 다 아는 절대자처럼 책 위에서 거리를 두는 모습. 그것은 책 뒤에 자신을 숨기는 일이라 여겨졌고 그런 모임이 반복되면서 사람들은 너나할 거 없이 부담이나 피곤함을 은밀하게 호소하곤 했다. 물론 다 모였을 땐 다시 책 위에서 책을 내려 보는 누군가가 되어 듣기 적당하고 반론할 수 없는 교과서식 결론으로 똑같이 합창하는 일이 반복되었다. 이런 시간이 왜 필요한가에 대한 질문은 시간의 차이지 결국 모두 직면하게 되며 모임은 흐지부지되는 것이 기존 독서모임의 한계였다.

 

사람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한다. 그리고 솔직한 남의 이야기도 듣고 싶어 한다. 나만의 스토리, 내가 가진 서사의 구조로는 이해되지 않는 남들의 사연, 언젠가 비슷하게 겪었을지 모르는 동세대의 에피소드, 같은 성별로서의 공감대, 비슷한 역할지기로서의 고충, 답을 알고 있지만 내 의견에 동조해주길 바라는 마음. 인간이기에 다른 인간이 가장 괴로운데 그래서 타인과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늘 책을 읽고 비슷한 답을 찾은 것 같아도 또 잊어 버리고 또 다른 책을 집어 드는 것이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책을 통해 얻고자 하는 위로를 모여서도 나누면 좋겠다는 취지로 시작한 것이 북테라피이다. 이 모임에서 진행자인 나는 무엇보다 글쓰기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글을 많이 읽다 보면 그처럼 그런 글을 쓰고 싶다는 욕망과 마주할 때가 있다. 나도 이런 소설을 쓰고 싶다, 나도 이런 에세이를, 나도 이런 시를, 나도 이런 평론을...... 책읽기는 글쓰기를 부르는 촉매제이기 때문이다.

 

북테라피 과정 중에는 나를 위한 치유의 글쓰기 과정이 포함되어 있다. 바로 자신의 생애를 돌아보며 상처를 받았다고 기억하는 시기의 그 상처를 정면으로 기록하는 것이다. 물론 지나간 기억은 모두에게 자기애 편향적이다. 중요한 건 사실이나 사건 자체 보다 내가 당시 느꼈던 감정을 소환하는 일이다. 어떤 이에게는 하찮은 일이지만 나에게는 상처가 된 이유가 있다. 상처란 절대적인 고정물이 아니고 상대적인 유기체 이다. 모두 기록을 하다 보면 과거에 마무리 하지 못한 일, 별거 아닌 일, 잘 극복한 일등이 한눈에 정리되는 신기한 경험을 하게 된다. 어쩌면 상처를 기록하면서 이미 그 동안의 상처는 치유가 되어 버렸는지도 모를 일이다. 왜냐하면 상처를 기록하면서 내가 겪었던 고통뿐만이 아니라 내 삶을 구축하기 위해 절실히 노력했던 것들을 다시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고통은 무디어 졌지만 내가 쏟은 열정은 다시 꿈틀거리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나를 위로하는 글쓰기>는 글쓰기의 구체적인 방법을 알려주며 친절하게 실천을 도와준다. 언젠가 글쓰기 관련 책만 사다 모아놓고, 정작 글을 쓰는 행위는 책 때문에 미루게 된다는 독자를 만난 적 있다. 그 책을 읽고 제대로 시작하고 싶다는 부질없는 욕망, 그것이 바로 글쓰기에 앞서 경계해야 할 요소이다. 사실 글쓰기 책이 없어도 그냥 글을 쓰면 된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과도한 욕심을 부리지 않고 어렵지 않게 어느 페이지를 펼쳐도 오늘부터 실천할 수 있는 아이디어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부담이 없다.

 

수많은 첨단 매체들이 자고나면 새로운 버전으로 출시되는 요즘이다. 그러나 전통적인 독서와 글쓰기는 그러한 수많은 매체를 접하면서 얻은 과도한 피로감을 단번에 줄여주는 기특한 처방이기도 하다. 마음이 혼란스러울 때 책을 집어 들고 20분만 앉아 있어도, 십 여분만 글을 써나가도 마음은 금새 안정되고 머리는 개운해지고 있음을 확실하게 깨달을 수 있다. 지친 하루를 정리하며, 힘든 하루를 시작하며 어떤 방법으로든 간단한 자기 명상의 글을 오늘이라도 시작해보면 어떨까. 나를 위로하는 일은 오늘부터 시작해야 하는 일이 맞을 것이다. 그래야 조금씩 수정해 나가는 수많은 오늘, 그것들이 모여 합쳐진 내일의 삶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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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적 마음 - 김응교 인문여행에세이, 2018 세종도서 교앙부분 타산지석S 시리즈
김응교 지음 / 책읽는고양이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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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적 마음, 그 안의 한국적 마음은>


2018년도 보름이 지났다. 이맘때가 되면 모두들 신년의 마케팅 트렌드들을 이미 꾀고 있어 올해 유행할 아이템들에 관한 기사가 쏟아진다. 그중에 많이 노출된 단어는 단연 ‘워라벨’이다. ‘워라벨(Work-life Balance)’이란 일에만 치중하지 않고, 일과 생활에서 균형을 잡는 것을 뜻한다. 요즘 젊은 세대들은 워라벨을 원한다고 한다. 아니 어느 세대나 워라벨을 원하지 않는 사람들은 없을 듯하다. 그런데 솔직히 이미 허구헌날 밤새고 야근을 밥먹다시피 한 청춘을 지나와서 그런지 이런 단어를 접하면 어쩐지 일안하겠다는 소리로 들리는 것도 사실이다.


인문책이야기 하면서 비즈니스 트렌드를 언급하는 이유는 이 책에서 가장 공감했던 부분이 바로 하루끼에 대한 저자의 평가, 그리고 일본 문학에 대한 견해였기 때문이다. 하루끼는 올해 빈번하게 트렌드로 회자되고 있는 ‘소확행’이라는 단어를 처음 쓴 인물이다. 작은 행복이 목표로 착각될 만큼 평범을 향한 열망, 보통으로서의 존재의식, 작은 만족에 대한 단상들이 유행처럼 쏟아지고 있다. ‘소확행’은 하루키의 수필 『랑겔한스섬의 오후』에서 처음 쓴 신조어로, 갓 구워낸 빵을 손으로 찢어 먹거나, 고양이와 함께 침대에 누워 빈둥거리는 것처럼 일상의 사소한 행복이 인생을 값지게 만든다는 의미다. 사실 부자나라 선진국 일본에서 지하철을 오가는 소시민과 참 어울리는 모습이다. 일본은 작지만 확실하고 일본인은 작아도 확실하다.


그동안 하루끼 소설은 내게 회피나 유행, 힐링이라기 보다는 하나의 책 읽는 재미였다. 저자는 하루끼 문학이 일본인들에게 치유와 힐링의 기능을 하고 있기 때문에 가장 일본적 문학이라 말한다. 저자는 일본문학에서의 자살적 자아, 벚꽃과 사무라이 정신, 공동체를 위한 개인의 희생 등을 언급하며 우리에게 호감을 주기 충분한 하루끼라는 문화예술인을 이들 정서의 정가운데 관통시키고 있다. 책을 덮고 나면 이상하게도 모든 면에서 크게 와닿지 않는 일본적 마음이 하루끼로 인해 이해가 갈 것도 같은 느낌이 든다.


그중 일본인에게 벚꽃은 ‘죽음’의 의미이지만 한국인에게는 ‘꿈’이라는 표현이 기억난다. 벚꽃은 어쩐지 핀다기 보다 지는 꽃이며 흐드러지게 만개한 순간에도 곧 물안개처럼 부서지고 말 신기루처럼 느껴진다. 일본은 죽음이고 한국은 꿈이니 반대의 의미일까? 죽음이나 꿈이나 사라지고 말 지금 이 순간에 대한 아쉬움이 내포되어 있긴 마찬가지 아닐까. 결국 인간이나 인간과의 사랑이나 언젠가는 사라지고 마는 유한한 것들이다. 특히, 하루끼의 <상실의 시대>는 과거와 자신과 주변인에 대한 상실, 그리고 나아가 그들과 나눈 꿈, 그리고 희망에 대한 상실을 의미한다 할 수 있다. 요즘 상영되고 있는 영화 <1987>을 보면서 새삼 우리가 왜 그토록 <상실의 시대>에 공감했는지 이해가 가기도 한다. 세월이 지나온 동안 우리가 잃어버린 모든 것들은 얻어온 것들만큼이나 많다. 신기한건 잃어버린 것들을 잊고 살면서 우리는 잃어버렸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살아간다는 것이다. 하지만 일본과 일본인은 그렇지 않은 듯하다. 그들은 쉽게 잊지 않는다.


이 책은 예술과 독서 사무라이와 야스쿠니를 소주제로 일본인의 정서를 정리하고 있지만 이들의 정서를 확인하면서 느끼는 건 일본은 우리처럼 쉽게 잊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할 것을 쉽게 잊고 잊어야 할 것들은 쓸데없이 잊지 못하는 건 아닐까. 매년 10월이 되면 노벨문학상 후보로 하루끼는 자연스럽게 거론이 되곤한다. 신간을 내면 이미 확보된 독자들로 인해 예약만 몇 십만인 작가이다. 이런 하루끼라는 문학현상은 일본인에 대한 반감이나 우리가 가져야 할 역사의식을 상쇄시키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문학을 통한 공감대 형성, 인간이라는 보편성을 주제로 한 그의 치유메세지가 잘못되었다거나 그것을 받아들이는 독자를 비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이미 우리는 그렇게 되었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일본을 향한 양가적 감정은 일본의 문화예술적 요소를 좋아하고 즐기고 지향하고 숭상하거나 모방하고 우대시 하는 문화지향성이 뒷면이라면 위안부나 독도, 야스쿠니 신사참배등과 같은 역사적인 무례함에 분노를 느끼는 민족적 거부감은 마치 동전의 앞면처럼 한 몸이 되어 버린 현상이라 할 수 있다. 이 책을 통해 일본을 알려하고 이해하고 살펴볼수록 돌아오는 자기이해는 한국인의 모순된 심리인 듯하다.


허나 <일본적 마음>은 저자 자신의 일본을 향한 감정의 연결없이, 보고 들은 대로 기록하려는 강한 의지를 엿볼 수 있었다. 호불호를 표하고 시비심을 표현하는 것이 꼭 나쁜 것인가. 좀 더 저자의 솔직한 평가, 견해, 개인적인 심정들이 더 드러나도 좋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왜 우리는 일본에 대해서는 호불호를 이야기하면 안되는 것인가. 왜 사실만 이야기 하고 편견을 남기면 안되는 것인가. 왜, 일본적 마음을 한국적으로 표현하면 안 되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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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1-18 18: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1-18 18:26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