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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사랑, 마지막 의식
이언 매큐언 지음, 박경희 엮음 / Media2.0(미디어 2.0) / 2008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저녁장을 보다가 선생의 선종(善終) 소식을 들었습니다. 우두망찰한 가운데 문득 마트를 채운 사람들의 활기가, 일용의 먹거리들이 담긴 장바구니가, 살아가기 위한 나날의 노역과 노력이 퍽 낯설게 보였습니다. 가던 길이 뚝 끊긴 것 같은 당혹스러움은, 오늘이 변함없이 내일로 이어지리라는 그 당연함이란 필히 배반당하게 되어 있다는 섬뜩한 자각이었을까요?
소설가 오정희님이 이제 고인이 된 최인호 작가에게 쓴 편지이다. 갑자기 오래된 작가의 이름이 검색어 1위로 올라섰을 때 나는 거의 부고임을 확신하며 바로 기사를 클릭하지 않는 버릇이 있다. 아니나 다를까 조금 있으면 같이 혹은 멀리 있던 누군가가 소식을 전해주며 세상에 그의 죽음을 모르는 사람이 없어지는 시간이 찾아온다. 세상에 이제는 누가 죽었다는 소식이 한 시간이면 누구도 속일 수 없이 세상을 뒤덮고 남는 시절이 왔다. 그러나 소식을 모두와 공유했다고 그 슬픔의 크기까지 나누어지지 않는다는 게 사람들을 더 슬프게 만드는 건 왜일까. 내가 아는 걸 너도 알지만 결국 내 슬픔은 내 몫이고 네 슬픔도 똑같다는 걸, 어쩌면 삶이나 죽음도 마찬가지일거라는 걸 끄덕일 수밖에 없는 순간. 세상 모든 부고는 그 사실을 자주 잊고 살아가는 우리에게 주기적으로 날아오는 삶의 경고장일지 모른다.
책도 잘 굴러가고 있던 일상에 우연처럼 나타나 때 되면 탁자위에 던져지는 월말 고지서처럼 서늘하고 불쾌할 때가 있다. 이언 매큐언의 책을 읽는 내내 썩 기분이 좋지가 않았는데 - 물론 기분 좋으라고 소설 읽는 건 아니지만 - 한편씩 이야기가 쌓여갈수록 좋지 않은 기분은 더 확실하고 분명해졌달까. 한 권 들면 웬만해선 다른 책을 기웃거리지 않는 편인데 이 책을 읽는 중간에 이 책보다 더 빨리 끝낸 책만 두 권이었다. 어쩌다 이 책이 한참을 내기 싫은 세금처럼 그렇게 하기 싫은 최후의 숙제로 느껴졌는지 이 불쾌감이 대체 어디서 비롯된 것인지 차분히 이야기를 떠올려 본다.
그건 아무래도 여러 차례 배신을 당했음에도 그것을 제공한 가해자가 원망스럽지 않고 외려 더 공감하게 된, 더 배반당한 마음 때문인 듯하다. 여덟 개의 작품이 대부분 아직 성인이 되지 못한 청소년이거나 성인이 되었어도 비정상적인 정신 소유자로서 미성숙한 인물을 주인공으로 내세우고 있다. 허나 이들의 강박과 폭력, 만행, 강간, 살인은 그들의 일상과 패턴 속에서 대단치 않게 스쳐지나가거나 독자에겐 그다지 큰일이 아닌 양 비추어진다. 작가가 흔한 일처럼 전달하기 때문이다. 사실상 폭행범이고 강간범이고 살인자에 아동 학대 및 성추행자이지만 어느새 그들에 동조되어 그럴 수도 있지, 뭐 잘못되었나? 충분히 가능한 일이지, 하는 내 자신과 언제나 마지막에 마주쳐야 한다는 것이다. 도무지 이런 결말을 향해 묵묵히 걸어가고 있었다는 사실을 나만 몰랐다고 생각되는 배신감을 미처 수습하기도 전에 이미 용서하고만 스스로를 속일 수 없으니 좀 더 지속되지 않는 이야기에 속절없이 당혹감만 느낄 수 밖에.
모든 작품에서 어른은 가난과 질병, 우울을 물려주는 원인제공자로 등장한다. 6,70년대 영국의 경제위기를 상징하듯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역할을 하지 못하며 그들은 비틀거리고 뒤틀린 모습이었다. 사춘기 화자인 내 눈에 비친 그들은 ‘매일 저녁 더 늙고 피곤하고 가난해져서 집에 가는 수많은 사람들’(『가정처방』)이었고 영국에서 시작된 크로스컨트리 경주에 참가한 사람들은 등수에서 밀려나 ‘아무 보답 없이 폐인이 되도록 달리는 패배자들의 정복욕’ 으로 그려진다.
- 한갓 의미 없는 자신의 왜소한 운명을 가늠하며 저린 발을 서서히 젖은 풀밭으로 내딛는 인간, 숨 막히는 거대도시의 하늘 아래, 인간의 도전욕과 유기체의 진화과정을 하나로 통합시키려는 의지를 시연하듯, 광장 저편에서 작은 아메바 덩어리 같은 것이 나타나 점차 사람의 옷을 입으며 도전욕과 결승점을 통과하려는 헛된 노력으로 무장한 채 비틀거리며 뛰어왔다. 그건 순간순간 새롭게 얼굴을 바꾸는 삶, 바로 우리 삶 자체였다. - 48p
인생이 가혹한 장거리 경주인 크로스컨트리라면 당시 영국 어른들은 뒤늦게 결승점을 향해 사력을 다해 달려오는 패배자의 얼굴이었다는 통찰에서 나는 이 모든 작품 속 결말에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다. 『입체기하학』에서 화자는 ‘45년 동안 잠자리에 들기 전 일기장을 써온 증조부’의 습관을 따라한다. 일기장에 집착하고 골몰할수록 아내와의 불화는 심화되어 가고 급기야 부부간의 폭력적인 상황으로 까지 치닫는다. 화자는 일기장에서 갑자기 M이 사라진 이유를 당시 입체기하학에 대한 지식과 실험에서 찾아낸다. 일기장에서 증조부와 M이 나눈 이야기를 보면 19세기 세계 패권을 장악한 영국 지식인으로서의 우월감이 가득하다. 화자인 나는 증조부에게서 상속받은 ‘방부 처리된 페니스’가 담긴 유리병을 ‘나와 증조부의 삶을 연결해주는 고리같던 물건’이라 칭하는데 이는 곧 고집스럽게 후대에 전수되는 영국의 우성 유전자로 보여졌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상징적인 유전물질을 깨트리는 주인공은 바로 그 유전자를 품고 길러야 할 화자의 아내였다. 여기서 작가는 과거 대영제국 시절을 그리워하며 현실에 머물러 있는 오늘의 성인 패배자 - 작품 속 청소년들의 부모 - 들을 불편하게 만들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일기장에서는 헌터라는 젊은 수학자가 세미나에서 발표한 ‘표면이 없는 평면’이론이 싸구려 속임수라 비난 받자 자신의 신체를 이용해 이론을 증명하고 자신은 사라졌다는 기록을 확인한다. 마치 M이 사라진 미스터리를 발견해낸 것이 대단한 일인양 스스로를 대견해 하는 화자가 진짜로 실행하고 싶었던 것은 아내(현실적 장애물)의 제거가 아니라 과거에 머물러 있지 말라고 쉬지 않고 충고하는 현실의 잔소리는 아니었을까. 그러나 아내에게 똑같은 실험을 해보지만 아내는 사라지는 듯 끝까지 사라지지는 않고 메아리처럼 목소리만 울려댄다. 어찌보면 우스운 이야기를 이토록 심각하게 전개하는 작가의 계략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작가는 시종일관 아무 일도 아닌 일을 대단하게 말하거나 아주 심각한 일은 또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능청스러움을 잃지 않았다. 결핍된 욕망이 자신의 자식에게 투사된 어머니상은 『벽장 속 남자와의 대화』,『가장무도회』등에서도 나타났다. 『벽장 속 남자와의 대화』는 작품들 중에 가장 문체의 온도가 높았는데 고백화자인 나의 심정을 가장 직접적으로 전달했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서도 언뜻 보면 작가가 벽장 속에 틀어박혀 자신의 과거를 고백하는 남자의 편에 선 것처럼 느껴진다. 내가 지금 이 꼴이 된 이유는 아버지 없이 나를 혼자 키우면서 집에 가두고 밤낮으로 지킨 엄마 때문이라 몰아붙이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화자 스스로도 ‘내 삶의 첫 두해를 언제까지나 반복해서 살아가며 불행하다는 생각없이’ 살고 싶다고 말한다. 오븐 속으로 청소하러 들어갔을 때 남몰래 문이 닫히기도 바랐고 교도소에서 농아인 데피와 차를 마셨던 석 달 동안이 가장 행복했다고도 기억한다. 이토록 자발적 자폐공간을 꿈꾸고 오래 유지하려는 화자에게 독자가 진심으로 연민을 표하려 할 즈음 작가는 슬며시 물음표를 던진다.
- 난 자유롭고 싶지 않아요. 그래서 길거리에서 마주치는 아기들이 부럽습니다. 이불에 싸인 채 엄마 품에 꼭 안겨 돌아다니는 모습이. 나도 그러고 싶어요. 난 왜 그럴 수 없죠? 왜 나는 왔다갔다 일하러 가고 식사 준비하고 살기 위해 수백 가지 일을 해야 합니까? 난 유모차에 타고 싶어요. 천치 같은 짓이죠. 180센티나 되는 내가. -140p
나는 왜 이 문장들이 언제까지 부모 탓을 하며 어릴 적 유모차나 그리워 할 것이냐는 따끔한 조롱으로 들리는 걸까. 설령 부모가 그렇게 키웠다 하더라도 ‘180센티나 되는 내가’ 유모차 타령을 하는 건 똑같은 전철을 밟겠다는 이야기밖에 더 되겠나 하는 자조섞인 질타만 같다. 『가장무도회』도 피해자로서의 조카 헨리의 상처보단 가해자로서의 이모 미나의 책임에 더 무거운 마음이 들었다. 은퇴한 연극배우 미나는 엄마를 잃은 열 살 조카 헨리에게 초현실적인 엄마로서 역할하며 매순간 자신들의 현실을 잊고 싶어 한다. 연극대사처럼 대화하고 무대의상을 입은 채 식사하고 늘 무대 위의 배우처럼 가장을 일상화하여 진짜 자신으로 돌아오기 싫어하는 것이다. 미나에게 가장 두려운 것은 과거도 미래도 아닌 바로 이 순간 자기를 둘러싼 환경과 조건, 그리고 그 변화에 적응해야 하는 자신이다. 헨리는 가장의식으로 무장한 이모(를 포함한 세상 모두가)를 통해 아직 성인이 되지 않은 미숙한 자신이 보기에 어디까지 책임에 대한 면죄부를 주어야 하는지에 대해 자문하고 있다.
- 누군가가 다른 사람처럼 입고, 다른 사람인양 행동한다면, 그 다른 사람이 하는 행동에 대한 비난을 감수해야 하는 것일까. 그 사람이 타인으로서 했던 짓에 대해……? -206p
즉, 예술가처럼 가면을 쓰고 자신이 창조해낸 ‘새로운 자기’가 벌인 행동은 과연 누가 책임 질 것인지 가면만 쓰면 잘못도 용서되고 따라서 벌도 받지 않는 것인지.
부모의 역할을 다정한 소꿉놀이로 시작해 서늘한 근친상간의 이벤트로 발전시킨 경우가『가정처방』이었다. 사실 이 작품은 ‘근친상간’이라는 심각성 보다 사춘기시절 남매끼리의 해프닝 정도로 이해했다. 나를 성인세계로 인도한 친구 레이몬드에 지지 않으려고 집에서 성행위 예습을 한 것이라 보았다. 왜냐하면 화자는 어설픈 성교에도 불구하고 처음을 치루고 성인으로 입장했다는 자부심만큼은 만족한 상태였다. 이 상황을 돌아보는 화자에겐 당시 일이 가정 ‘폭력’이 아닌 ‘처방’으로 기능하므로 사실 굉장히 남성중심의 시각이 배어 있다고 느껴져 내겐 불편한 이야기이기도 했다.
『여름의 마지막 날』과 『나비』는 한 번의 실수와 이어지는 우발적인 사고의 반전을 위해 그 전 장면 모두가 더욱 아름답고 외로워야 했던 이야기들이다. 마치 어디서 들은 이야기처럼 전혀 내 경험이 아닌 것처럼 남일 전달하듯이 담담하고 차분히 상황을 묘사하는 작가가 소름끼치도록 오싹해졌달까. 우리 집 다락방에 이사 온 너무 뚱뚱한 제니는 사회에서 왕따를 당하는 전형적 인물인데 제니는 그러한 자신을 극복하기 위해 부지런함과 섬세함, 인내심을 무기로 집안 엄마의 공백을 메우려한다. 그러나 제니의 자발적 엄마되기는 사람들의 몸을 편하게 만들었을진 몰라도 마음은 불편하게 만든다. 더 큰 문제는 이러한 제니와 제니에게 맡겨진 앨리스, 그리고 내가 만든 여름날의 추억이 누구도 의도하지 않았는데 얼마나 끔찍한 일이었는지에 대한 객관적 평가이다. 나는 정말로 제니와 앨리스가 보트가 뒤집혀 빠져 죽을지 몰랐었기에 읽으면서도 믿기지 않아 멈칫 했었다. 누군가에게는 잊지 못할 추억이 같이 겪은 다른 이에게는 잊어야 할 사고가 되는 일 이것이 인생이라는 입체기하학일까 싶기도 했다. 공교롭게도 여름날 강가의 보트에 탄 사람은 엄마를 사고로 잃은 나와 가족으로부터 버림받은 제니와 엄마가 내 팽겨쳐둔 앨리스였다. 세 명 모두 진짜 자신의 보호자가 부재한 무방비 위험 상황에서 가장 약자(여성과 아이)가 희생을 당하는 건 당연하다는 뜻으로도 읽혀 덮고 나서도 씁쓸했던 이야기다.
『나비』역시 끝까지 믿고 싶지 않았던 일을 끝내 확인해야 하는 잔인함이 이 소설의 가장 큰 미덕이었다. 무엇보다 이 소설의 반전은 - 목과 턱이 구별되지 않아 불신감을 주는 - 용의자로 지목될 만한 인상을 가진 내가 결국 소녀의 살인자였다는 게 맞다는 사실에 있다. 다만 인상적인 것은 아이를 죽인 원인과 그 배경에 있었다. 나는 아이를 성폭행해서 죽인 것이 아니고 내 욕망을 목격한 그 아이를 살려봤자 어차피 성폭행범으로 지목받을 것이라 믿었기에 살리지 않았을 뿐. 화자에게 살인 자체보다 중요한 사실은 그렇게 죽은 사람, 시체를 처음 보았다는 사실이다. 화자는 이전에도 차에 치인 개와 어머니의 시체를 보았지만 별다른 느낌이 없었다. ‘시체란 것은 삶과 죽음이 대조되어야 비로소 의미가 있’는 것인데 늘 죽음처럼 살다간 어머니의 죽음은 특별할 것이 없었기 때문에 그땐 시체를 본 것이 아니라 생각한다. 그러나 화자는 소설 맨 첫 문장에 ‘목요일에 나는 난생 처음 시체를 보았다’라며 자신에게 특별한 에너지를 주었던 제인의 죽음에 의미를 부여한다. 그러곤 제인과 뜻밖의 산책의 실마리가 된 나비에 대해 강렬한 싯구를 선사한다.
“조금만 더 가면 나비가 나와. 빨강나비, 노랑나비, 그리고 어떤 땐 초록나비도.”
그에게는 남들이 당연하게 누리는 모든 일상들이 ‘손을 내미는 순간 날아가는 나비만큼’ 가능성이 희박한 일이었던 것. 그러니 운하에 빠져 익사한 제인은 결국 나에게 한 마리 핑크빛 나비와도 같았던 것이다. 이 작품에서도 화자의 어머니는 화자에게 얼굴기형을 물려주며 삶에 무력한 모습으로 등장한다. 이상하게도 아이가 머리를 하천에 쳐 박은 광경이 영화 <시>에서 성폭행을 당한 후 자살을 한 여고생과 겹쳐졌다. 나는 이 작품이 소설집에서 가장 기억에 남았고 특히 아직 숨이 붙어 있는 소녀를 밀어버리는 장면과 마지막 돌을 주머니에 넣고 피해자 부모와의 약속을 기다리는 결말이 그래도 주인공이 자신의 삶을 잘 살아보고픈 의지로 다가와 응원을 하기까지 했다.
표제작이었던 『첫사랑, 마지막 의식』은 사실 그다지 인상 깊진 않았다. 그나마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 건 ‘우리가 그 놈을 아는 이상으로 그놈은 우리를 잘 알 터였다’고 언급한 쥐 한 마리였다. 두렵고 끔찍하지만 첫사랑에 빠진 자신들을 가장 괴롭혔다고 판단되는 쥐를 때려잡는다는 것의 의미가 더 이상 덜 익은 첫사랑은 의미가 없고 끝이 났다는 것으로 받아들였는데 이 부분은『입체기하학』에서 아내가 깨버린 유리병과도 같은 장치여서 충격적이진 않았다. 하지만 몇 년 전에 실제로 고양이만한 쥐와 대치한 순간이 있었고 그때 이 쥐를 잡지 못한다면 아무것도 하지 못할 것 같다는 절박함을 실감해 본 적이 있어서 쥐로 인한 공포감은 누구보다 생생하게 공감할 수 있었다. 이 작품에서도 여자 친구의 이혼한 아버지는 화자를 주점으로 불러내 경제적으로 화자를 이용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작품 전반에 미성년자들의 부모, 즉 기성세대로서의 장년층은 피곤하고 무력하며 무례하거나 무식하다. 이것이 작가가 의도한 설정인지는 모르겠으나 주인공들의 위험한 무의식의 세계는 어느날 갑자기 도래한 특별한 징후가 아니라는 뜻으로 읽혔다.
가장 짧았던 『극장의 코커씨』는 사람들의 관음증적인 욕망을 꼬집는 일종의 풍자극으로 이해했다. 연극연출가와 안무가, 음악담당의 스탭들이 자본을 향해 권위적으로 명령하는 갑이라면 울며 겨자 먹기로 연기하는 배우들은 드러워도 노동해야 하는 을로 비쳐졌다. 그들 중 스스로 코커를 자처한 한 배우가 당신들이 진짜로 보고 싶은 장면은 흉내가 아니라 실제가 아니냐고 항변하는 것으로. 인상적이었던 것은 가위질하듯 무대를 걸어가고 가위질하듯 사라지던 데일이라는 인물이었다. 예술작품에의 가위질(검열)을 상징하는 것인지 의아했고 다른 작품들과 지향하는 지점이 틀린 것 같아 정확하게 무엇을 말하려 한 것인지 진짜 속내는 잡히지 않는다.
그러나, 그래도 여덟 작품을 덮어온 내가 최종적으로 이해하고픈 작가의 공통된 주제의식은 지금보다 더 성숙한 인간이 되기 위한 통과의례로서의 고통스런 의식, 그 혼자만의 절차이다. 오랜 세월 계승되어온 과거라는 관습에서 벗어나고, 당당하게 성인 남자의 세계로 입장하고, 한 시절의 아픈 추억은 마감하고, 영원할 것만 같은 첫사랑도 고별하고, 자신을 버리거나 가둔 부모와도 화해하고, 거추장스런 가면을 벗어던져버리고 누구보다 자신을 만들어온 자신을 용서하는 시간들이 꼭 필요하다는 당부로 들려온다. 중요한 건 어느 시기, 어떠한 방식의 의식이건 의식이후의 삶일 것이다. 무의식의 통제는 결국 의식意識에서 가능하고 살아가면서 자신을 돌아보고 가다듬는 자기만의 의식儀式을 통해 인간은 무의식과 의식의 불균형으로부터 비로소 자유로와지는 게 아닐까. 그렇다면 인간은 육체만 성장한 ‘성인(成人)’이 아니라 무의식마저 의식화되어 그 경계가 없어진 ‘성인(聖人)’을 어른이라 부르고 싶은 건 아닐까. 다행히 누구도 완성된 인간으로 삶을 마감하진 않는다. 그래서 더욱 삶의 완성은 죽음인가 싶기도 하다.
누군가 죽었다는 소식이 언제부턴가 - 대략 어머니를 보내고 부터인 듯 - 남 일 같지 않게 느껴지고 그 며칠은 함께 상중인 경우가 많은 요즘이다. 안 그래도 가을의 시작과 함께 환절기를 잘 통과하자 굳게 마음먹었던 게 엊그제 인데 금새 비보하나로 일상의 축이 흔들리는 게 우리네 중생 삶인 듯 하다. 오정희 님의 말씀처럼 ‘오늘이 변함없이 내일로 이어지리라는 그 당연함이란 필히 배반당하게 되어 있다는 섬뜩한 자각’을 잊지 않는다면 바로 지금이 마지막 성인식을 위해 마음을 일으켜야 할 시간은 아닐까. 지난날의 무언가를 꼭 버리고 싶은 사람, 알면서도 되풀이 하지 말아야 할 잘못들에 자주 패배하는 사람, 그것들이 자꾸 앞으로 나가려는 내 발목을 잡고 있는 경우라면, 이 책이 꽤 훌륭한 수단이 되어드릴 것 같다. 우리는 모두 인간의 진행형이지 완성형은 아닌 존재들이니까. 성인이라고 다 성인은 되지 못한 바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