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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설 - 한국 사회의 위선을 향해 씹고, 뱉고, 쏘다!
한홍구.서해성.고경태 지음 / 한겨레출판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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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한 직설 '편'한 침묵


   나는 말로써 직설(直說)을 선호하는 스타일은 아니다. 직설은 문자 그대로 바른대로 있는 그대로 하는 말이다. 하지만 주체의 의도대로 바르게 전달되기가 힘든 것도 직설이다. 직설은 컨텐츠의 스탠스에 따라 양질의 충고 혹은 경고일 수도 유익한 비판이나 비탄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당하는 입장에선 대개 모질고 상처를 주는 독설이 될 경우가 많다. 세간에 성행하는 오디션 프로의 심사위원을 보더라도 돌려서 말하지 않고 대놓고 단점을 지적하는 경우 그들을 독설의 대가라고 칭하기도 한다. 상대를 향해 똑바로 날아오는 칼은 명중률이 높고 의도와는 별도로 상채기를 남기기 때문이다. 상처받은 입장에선 예고도 없이 공격에 노출된 상황에서 직설을 날린 주체에 동의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한 화법이 단점을 고치고 더 발전해야 하는 경우라면 고맙게 느껴질 수 있겠지만 그래도 상처 자체는 피할 수 없다. 그러므로 직설은 사후관리가 더 큰 몫을 차지한다. 말 못지 않게 글도 뼈아픈 상처가 될 때가 있는데 차라리 말은 얼굴 보며 털어버릴 기회라도 있지만 글로 새긴 상처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 깊숙한 곳에 저장되기만 한다.

   언젠가부터 나는 말보다 글이 더 편해졌다. 누군가와 싸울 때도 나는 글 쓰듯이 똑같이 말을 하는 편이라고 하는데 이 습관이 언제 어디서부터 생겼는지 모르지만 여간해선 잘 고쳐지질 않는다. 같은 에너지라면 말보다 글로 의사를 전달하는 것이 더 논리적이고 분명하다고 느낀다. 그런데 보시다시피 문장 자체도 단문을 선호하지 않고 일관된 만연체 스타일에 되도록 종합적인 결론을 지향하는 성향이므로 이 또한 직설적인 과에 속하진 않는 것 같다. 그래서 난 돌려 말하지 않고 바로 본론부터 시작하는 직설의 능력자들이 많이도 부러웠다. 길게 늘여서 말하라는 건 하겠는데 요약해서 핵심만 말하라 하면 멈칫거리게 된다. 그래서 난 언제나 소설쓰는 작가보다 시쓰는 시인이 부럽고 대단하다 여겨왔다.

   직설을 우리말로 바꾸면 아마도 바른 말을 하는데 거침이 없다는 뜻의 ‘입바르다’ 정도가 되지 않을까. 나는 입바른 소리도 에둘러 말하는 편에 속하는데 경험상 입바른 소리야 말로 직설로 접근해야 효과적이었다고 본다. 콕 집어 예를 들지 않으면 입바른 소리의 대상이 광범위해지기 때문에 엉뚱한 오해를 살 확률이 발생한다. 여기서 일부러 특정 사건과 인물을 지칭하지 않으려 두루뭉실하게 넘어가려는 건 전형적인 정치적 행보이다. 정치라는 것이 꼭 정치인이 행해야 의미를 가지는 것이 아니고 우리같은 일반 대중도 얼마든지 이곳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자기 이미지를 자기 뜻대로 다스려 운영하고들 있지 않은가. 언젠가부터 나는 입바른 소리에 해당하는 직설이 불편해지기 시작했는데 아마도 입바른 소리를 시도하는 귀찮음이 간혹 야기되는 오해를 설명하는 귀찮음과 동일시 되면서 자연 편하고 눈질끈 감는 쪽을 선호하게 되지 않았나 싶다. 나이 들어 깨닫게 되는 건 바로 입바른 소리는 그 의도만큼 썩 만족할만한 결과를 가져오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좋은 게 좋은 거다 식의 진부한 위선도 지향하고 싶은 마음이 없기는 마찬가지인데 위선과 직설 사이에서 방황하게 될 경우 대개 사람들은 그 사안에 대해 침묵을 택한다는 것이다. 사랑의 반대는 미움이 아니고 무관심이듯 직설의 반대는 돌려막는 곡설이 아니라 침묵인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이 책은 민감한 사안에 대해 침묵으로 자주 대항하는 나같은 대중들이 읽어야 할 책인 듯하다. 침묵을 미덕으로 활용하는 위선자들에게 훌륭한 자극제가 될 듯하다. 책의 부제도 ‘한국사회 위선을 향해 씹고, 뱉고, 쏘다’라 되어 있듯이 그동안 위선을 용인해오고 또 스스로 위선을 경쟁력으로 삼아온 사람들이 해가 넘어가기 전에 꼭 들쳐보아야 할 책이라 할 수도 있겠다. 최근에 이런 식의 직설화법은 ‘나꼼수’의 등장과 더불어 새로운 트렌드로까지 읽혀지고 있다. 이른바 개념구라, 구라작가, 구라MC의 테두리에 이 책의 문법도 어엿하게 한자리를 차지한 것으로 여겨진다. 최근 인터뷰에서 서해성 작가는 ‘직설이 문자로 나눈 꼼수였다면, 꼼수는 말로 하는 직설’이라 한 바 있다. 방법이 틀릴 뿐 이들이 말하는 방향은 한 곳이다. 나꼼수가 가카 헌정방송이라면 직설은 MB시대 헌정문학. 다른 게 있다면 나꼼수는 팩트를 모아 추정소설을 말로 연재하는 것이고 직설은 사람을 만나 그 사람 전공 분야를 가지고 MB를 향해 눈치 안보고 떠들어보는 기회를 마련한 것이다. 멍석 깔아주면 발목이 오그라 들 것이므로 한홍구와 서해성이 적당한 추임새로 용기를 부추기는 형국인 것이다. 무려 이 책에서 만나본 사람은 故 리영희 선생을 비롯해 사십 여명이 되는데 실컷 떠들었던 말들을 글로는 다 옮겨 적지 못한 점을 감안하면 그들이 성토한 직설들은 대단한 논픽션 소재로 흠잡을 데가 없다고 본다. 어딜 봐도 도통 불편했던 건 아무래도 MB 정권이라는 지극히 우울한 소재를 미션으로 하기 때문은 아니었을지.


‘놈현’과 ‘노무현’의 차이


   이 책은 무엇보다 생각처럼 쉽지도 편하지도 않은 책이다. 혹자들은 직설(直說)이라 하니 속이 시원하거나 그런대로 할 말은 했겠지 싶을 수도 있을 것이다. 모르긴 해도 이 책에 호기심을 가지는 독자들은 김어준에 준하는 직설화법을 기대하며 정곡을 찌르는 정치비평을 기대했으리라 생각한다. 이른바 MB 시대의 직설이라 함은 다른 누가 아닌 MB 들으라고 하는 소리인데 돌려서 말할 거면 차라리 말하지 않는 편이 낫다고 여기는 실정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책은 그 목적만큼 고속도로의 직선도로를 달리진 않으며 결론만 강조하는 단순한 문법을 취하진 않았다. A를 말하는데 있어 B,C,D를 찬찬히 둘러보며 A이전과 A이후를 다각도로 살펴보는 쪽이므로 대화전개 방식 역시 직렬보단 병렬이 더 가깝다. 인터뷰가 오가는 방식에서도 얼굴보고 직접 만나서 서로 증상을 진단하며 환부를 확인하다보니 다른 설명없이도 이 통한스런 현실을 더 강렬하게 공감하는 결과를 야기하며 직설보다 직감(直感)적이라 할 수 있다. ‘직설’에선 어쩐지 자극적이고 말초적인 뉘앙스를 부인할 수 없는데 이 책은 문법적으로도 비교나 은유의 탁월한 수사가 매력적인 색다른 비평집이다. 그러니 직구보단 변화구, 직접보단 간접, 직선보단 곡선, 직행보단 완행으로 이루어진 느낌이라 할 수 있다. 한마디로 <직설>은 직설적이긴 하나 결코 직설만은 아니다. 직설을 표방한 곡진한 해설이라 해야 맞다.

   책을 덮으면서 나는 이 책이 결국 누구를 향한 무엇을 향한 직설이었는지를 생각했다. 과연 삿대질하는 방향에 위치한 그들만을 향한 쓴소리인지 고민해 보았다.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이 책의 저자 중 한 사람인 서해성 작가는 2010년 6월 11일 『한겨례』에 게재된 「<한홍구-서해성의 직설> DJ 유훈정치와 ‘놈현’ 관 장사를 넘어라」기사에서 바로 ‘놈현’과 ‘관 장사’라는 표현의 강렬한 직설을 사용한 주인공이다. 노무현을 ‘놈현’이라 말하고 유산계승을 ‘관 장사’로 빗댄 그 기사 때문에 유시민은 23년간 구독해온 한겨례를 절독하겠다고 선언했고 한겨례는 며칠 뒤 신문 1면 아래 편집국장 명의로 절절한 사과문을 싣기도 했다. 당시 ‘관장사’ 직설은 시작한지 몇 회 되지 않는 초반 개념 정립단계였다. 시청률로선 대박을 쳤지만 솔직한 토론이라는 최초 신선한 목적은 노 전 대통령을 비하하는 표현이라는 국민적 비난을 넘지 못했다. 한겨례측은 신문에서 정리하고 편집할 때 노골적 표현을 거르지 못하고 독자들에게 불쾌감을 전달한 것을 자신들의 불찰로 인정했다.(하지만 서해성 작가도 그렇게 생각할까?) 유시민은 이 사과를 보고 트위터를 통해 절교선언을 취소하는 해프닝도 보여주었다. 확인해보니 이 책에선 당시 천정배 의원과의 인터뷰를 실으며 ‘놈현’이 표시된 문장을 ‘노무현’으로 정정해 옮겨 놓았다. 물론 나는 그 사실을 크게 인지하고 그 문장을 접한 것은 아니었지만 문맥상에서 ‘노무현’이 ‘놈현’으로 표시되어 있었어도 ‘놈현’을 ‘노무현’의 구어체식 단순 줄임말 정도로 밖에 인식하지 않았을 것이다.(물론 난 노빠가 아니기 때문에 ‘노무현’과 ‘놈현’의 차이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다) 구어체를 발음 그대로 실어야 직설이 된다는 원칙에 동감하는 수준이었을 터이다.


   
 
서해성 | 선거 기간 중 국참당 포함한 친노 인사들이 써 붙인 “노무현처럼 일하겠습니다”라는 플래카드를 보면서 쓴웃음이 나왔어요. 이명박이 가진 폭압성을 폭로하는데 ‘노무현’(기사에선 ‘놈현’)이 유효하겠지만, 이제 관 장사는 그만둬야 해요. 참여당 실패는 관 장사밖에 안 했기 때문이에요. 그걸 뛰어넘는 비전과 힘을 보여주지 못한 거예요.
-396p
 
   


   앞뒤 문맥상 여기서 중요한건 ‘놈현’이 아니고 ‘관 장사’하지 말라는 메시지인데 유시민은 틀림없이 ‘놈현’ 부분에서 목에 걸려 울컥한 것이렸다. ‘관 장사’만으로도 썩 기분 좋을 단어 선택은 아니었겠지만 이때 ‘놈현’이라는 구어체는 ‘관 장사’라는 풍유법을 더 굴욕적으로 몰고 가는 폭풍의 혀로 작용했다. 이렇듯 구어체로 표현된 직설의 한계는 어쩔수 없이 ‘노무현’과 ‘놈현’의 차이에서 싹트는 불쾌감을 내포하기 마련이다. 자칫 애티튜드만으로 메시지를 넘어설 수 있다는 근본적 한계를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논리로는 맞지만 기분은 드럽다는 것이 직설의 핸디캡이다. 그런 면에서 나는 애티튜드 또한 메시지의 일환이라 줄기차게 주장하는 김어준이 반사적으로 겹쳐질 수밖에 없었다. 김어준은 구걸하지도 않고 덕 볼 생각도 안 할 테니 변함없이 쫄지 말고 기죽지 말자는 충고를 한다. 무례함이나 상식, 보편적 정서 따위로 직설화법에 브레이크를 걸고 싶다면 내 이야길 듣지 말라고 일갈한다. 그리곤 말한다. 그쪽은 훨씬 가진 것도 많고 떠들 곳도 많으니 이 조그만 곳과 그곳에서 오가는 말장난을 막지만 말아달라고. 떠들고 킬킬거리는 그곳에선 사실 <직설>에서의 지적질의 몇 배에 해당하는 욕설이 오가지만 매체의 특성상 아무도(한사람만 제외하고 ㅋ) 방식을 문제 삼진 않는다. 그런데 김어준도 같은 내용을 책이라는 매체로 전환할 땐 확실히 문어체의 화법을 지향하며 꽤 지적인 수사를 연출했다. 이 책이 안타까웠던 건 바로 인터뷰로서는 아무 문제가 없는 형식의 매력이 지면으로 똑같이 옮겨졌을 때 그 열의가 반감되는 듯한 차감효과였다. 다른 무엇의 점잖은 대담이 아니라 직설로 오가던 불꽃같은 애드리브와 통쾌한 구라문학의 포스가 종이로 박제되면서 직설의 본성이 제대로 발휘되지 못한 것 같다는 생각. 각계 분투의 직설을 모두 모아 놓았더니 그만 핵심역량(?)이 떨어져 보인다는 느낌. 그래서 직통으로 환부를 관통했다는 짜릿함은 느낄 수 없다는 아쉬움. ‘놈현’과 ‘노무현’이 글자로 등장한다면 말로 했을 땐 있지도 않거나 중요치 않았던 새로운 역학이 증거로 발생한다는 왜곡의 염려. 그것이었다.


'펜대' 꼬나 잡고 '주둥이' 제대로


   하지만 이 책이 가지는 본질적인 한계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말이 아니기 때문에 MB 시대의 당당한 구라문학으로 흔치 않는 의미성을 획득하였다. 그 일등공신은 아이러니하게도 ‘놈현 관 장사 사태’를 ‘한겨례 사과사건’으로 몰고 간 서해성이었다. 이 책을 통해 가장 눈에 띄던 주연아닌 주연. 질문으로 답하는 의도적 인터뷰어. 서해성과 한홍구는 약 사십 여명의 게스트에게 민감한 질문을 던지며 게스트의 답과는 별도로 스스로도 해답을 찾아 현상과 사건을 정리하는 지적인 사회자들이었다. 이 책의 핵심은 바로 게스트의 답변이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힌트와 참조할 자료들을 기자식으로 시시각각 제공해주던 그들의 해박한 지식과 놀라운 통찰력이었다.(이 책을 덮고 서해성 작가의 다른 작품을 찾아 보았지만 그 흔한 소설집 하나 없다는 것이 참으로 아쉬웠다 ㅠ)  한명의 인터뷰가 끝나면 ‘잔설’이라는 해설과 논평이 이어지는 것이 이 책의 특징인데 나는 서해성의 ‘20년 만에 쓰는 부검입회보고서’를 읽고는 그만 다리가 풀려 버렸다. 서해성은 광주를 생각하면 아직도 ‘총을 든 사람들에게 미안하고 부끄러운 마음’이라 말한다. 그렇다고 지금 총을 들 순 없으니 ‘펜대 꼬나 잡고 주둥이 제대로 놀리는 것으로’ 내 할 일을 시작하자 다짐한다. 적어도 그때 총든 분들의 마음은 간직하자 호소한다. 감히 비슷한 심정이라 입에 올리기 조차 미안하지만 같은 시절 데모하다 경찰의 방망이에 맞아 죽은 나와 꼭 같은 나이의 꽃다운 청춘을 떠올리는 기분이었다고 고백 할까. 기껏해야 시국을 비판하고 MB 정권에 삿대질 하는 책이나 읽어야 그들을 향한 부채감을 간신히 기억해내는 기성세대가 되어 버린 지금 서해성이 적나라하게 칼질하는 그들 죽음의 부검 현장은 우리가 이 시대에 살아남은 이유가 무엇인지 한번쯤 자문하게 만들었다. 왜 그들은 죽었고 우리는 살았는지. 만약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무엇인지.  

   그래서인지 전쟁 때 또래들 절반이 사라진 통에 ‘자신의 실재는 다른 사람들의 부재에 의해 유지되고 있다’는 고은 시인의 넋두리가 가장 울림이 컸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고은 시인은 누적된 역사 속에서 시대가 자신에게 요구하는 건 바로 요절한 시인들의 결핍을 메우라는 명령이라 말했다. 사람은 누구나 살아가는 이유가 있다고 하는데 지금 우리 사회의 고등학생은 입시 때문에 죽고 대학생은 등록금 때문에 죽고 노동자는 해고당했다며 죽어버리는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 쌍용자동차 파업 후 2년 동안 열 일곱 명이나 되는 사람이 자살을 하였다고 하는데 나는 이러한 사회적 비극을 기껏해야 ‘나꼼수’를 통해서야 뒤늦게 알게 된 무심한 사람이었다. 이 책에는 인터뷰를 통해 홍대 청소노동자와 이주노동자의 직설도 확인할 수 있다. 지난 여름 강남 물난리때 침수된 대치동 은마아파트 지하실에서 감전사한 어느 아주머니가 떠올랐고 최근에 아주머니 유족에게 보상금을 지급할수 없다는 주민들의 기사도 겹쳐졌다. 우리는 과연 학원비 빠듯하다 앓는 소리 하는 같은 아파트 주민을 비난할 수 있을까. 그럴 자격이 있을까. 양길승 녹색병원 원장은 ‘비장애인은 장애인과 살아보지 못한 장애를 가진 사람’이라 말한다. 장애인과 같이 살아보지 못한 사람은 남을 배려하지 못하는 장애가 있다고 말한다. 뜨끔했다. 이명박을 분단 모순의 집적, 냉전의 찌꺼기로 규정한 백기완 선생은 죽어서도 억울하면 벌떡 일어날 수 있는 마지막 남은 저항심을 ‘안간’이라 말한다고 가르쳐 주셨다. 이 책에선 유난히도 어느 유명한 정치인이나 유명인보다 이렇게 그 질긴 세월을 모질게 겪고 나이 들어 이렇게 꾸지람 하는 것도 자신이 마지막이라는 분들의 말씀이 기억난다.

   정치인들은 의외로 돌려 말하거나 묻는 것만 말하거나 민감한 사안은 회피하는 것으로 느껴졌다. 성공한 대통령에 대한 집착을 버렸으면 좋겠다는 정두언 의원이나 역사는 회의론자가 아닌 확신범이 바꾸는 것이라는 정동영 의원, 아침마다 김대중 대통령을 떠올리며 그분이 남겨주신 ‘국민 생각이 뭔지 알아봐라. 원칙 버리지 마라. 역사가 어떻게 평가할지 생각해라’ 이 세 가지를 생각한다는 박지원 의원 정도가 인상깊었다. FTA를 통상의 문제뿐 아니라 외교 전략의 문제이자 민주주의문제, 공공성의 문제로 같이 인식해야 한다는 이해영 교수의 견해도 좋은 말씀이었다. 각자 다양한 분야에서 자신이 걸어온 세월을 평가하고 현재 고난의 시점에서 문제점을 직시하며 모두가 함께 잘되는 앞으로의 미래를 전망해보는 것은 저들만의 일은 아닐 것이다. 별 탈 없이 만인이 자연사하는 사회가 민주사회라는 서해성 작가의 자조적 독백은 다시금 우리가 같은 시대, 같은 나라를 살고 있는 같은 인간이라는 생각을 하게 한다. 우리도 인간인 이상 크게 다르지 않은 방식으로 죽음을 맞이할 것이라는 자각을 하게 한다. 그렇다면  남아있는 생동안 다른 사람의 죽음에 공감하지 못하는 장애를 가진 채 삶을 이어나가서는 안될 것이라는 뒤늦은 깨달음도 얻게 된다. 억울하고 원통하게 죽어간 우리 시대 모든 죽어진 삶에 우리는 어떤 빚을 갚아야 할까. 그들의 결핍을 메우는 것이 남은 사람들의 할 일이라면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

   시골의사 박경철이나 안철수 원장, 박원순 후보, 오세훈 친족이라는 나경원 후보까지도 하나같이 주장하는 것은 사회적 약자, 그 소외된 약자를 위한 최소한의 생존권을 언급한다. 중국집 배달부 아저씨도 그 궁색한 살림에 죽는 날까지 기부를 하다가 가셨다. 나는 다시한번 이 책은 누구를 향한 무엇을 위한 직설이었는지 생각한다. 삿대질 하는 방향의 손가락을 제외한 나머지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 그곳이 어디였는지 가만히 응시해 본다.

   새삼 한국에서 가장 소중한 것들은 다 한 글자라는 서해성의 유머가 따스하다.


   밥, 몸, 일, 집,


   그리고 .


   무엇보다 .


   그러나 우리 사회 밑바닥에서 부터의 안간힘을 다해 다시 희망을 찾고 싶은 우리 모두의 .


   그  으로 빚어질 공동체의 .


   그 으로 탄생할 새로운 .


   <직설>은 아주 작은 단위의 빛으로 조각조각 쪼개어진 우리 모두의 간절한 '끈' 이라면 좋겠다. 무엇보다 정치적 결단이 요구되는 이 중요한 시점에 그 끈 하나로 이어져 마음이 하나되는 기특한 '책' 이었음 좋겠다.

   부디 당신의 펜대와 주둥이를 믿는다. 당신도 나처럼 이면 정말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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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1-10-20 0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요즘 이 책을 붙잡고 있는데, 이상하게 진도가 잘 안나가요. 어쩌면 그런 것이 내용보다도, 이야기를 하는 방식에 있는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을 이 리뷰를 읽으면서 해봅니다. '나꼼수' 이야기를 하셨는데, 그 나꼼수 방송을 사실 제가 잘 못듣겠더라구요..(사실 한 번 시도해보았는데, 방송을 30분 듣다가 왠지 더 듣기가 싫어져서 그만두었습니다..가카님의 멋진 재테크, 인테크 기술들을 좀 더 배워야 하는데..하하;)

보물선 2011-11-09 14: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상에서 중요한 건 한글자라는. 콕 박힌다.

가연 2011-10-24 2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부검입회보고서를 보고 참 마음이... 그나저나 서해성 작가가 소설가로서 별다른 책이 없다는 것을 보고 사실 좀 놀라고 말았지요ㅎ 그런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누구였는지 정확히 기억은 안나지만 단 한 권의 책으로 여러 상들을 휩쓸고 난 후에 절필하고 사회운동에 뛰어든 소설가..같은 느낌을 주었달까ㅎㅎ 좀 과장된 점이 없지는 않지만...
 
[파인만]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파인만 Feynman
짐 오타비아니 지음, 이상국 옮김, 릴런드 마이릭 그림 / 서해문집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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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유명한 사람이 죽으면 왜 슬플까요. 지난주 스티브 잡스 사망 기사를 보고 근 일주일간 우울했습니다. 어떤 위대한 사람도 한번만 죽는 것이고, 아니 한번은 죽어야 하는 것이고 그 한 번의 죽음 앞에선 동일한 절망을 느끼리라 믿어요. 돌이켜보면 세상에 알려진 사람이 죽을 때 비로소 내 죽음도 실감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인지 죽음이 있기 때문에 무언가를 결단할 수 있다는 그의 말이 가장 기억에 남았습니다. 우리가 영원히 죽지 않는 존재라면 행복도 슬픔도 사랑도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었습니다. 지난 주 세계가 잡스의 죽음을 동시에 애도할 때 저는 한 사람의 과학자를 만났습니다. 숙연한 가운데 즐거웠습니다. 세상과 인류에 공헌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만난다는 건 새삼 큰 행운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파인만씨는 듣던 대로 농담도 잘하시는 분이더군요. 이 과학자와 동시대를 살았던 것이 18년이나 된다는 사실이 놀랍고 감동스러웠습니다. 세상의 모든 책이란 어쩌면 모든 사람의 죽음 이후를 위해 존재하는 낯선 인연은 아닐까요.


   하지만 먼저 고백할게 있어요. 이 책을 읽기 전엔 파인만이라는 과학자와 그래픽 노블이라는 장르도 몰랐답니다. 책 읽기 전엔 그저 만화로 된 위인전쯤으로 생각했죠. 만화도 좋아하지 않고 위인전은 더욱 좋아하지 않습니다. 이제 우린 어느덧 독자에게 무언가를 가르치려고 드는 책들이 부담스러울 나이가 되었네요. 그뿐인가요. 과학은 물론이고 그중에 물리는 특히나 완강하게 거부하던 과목이었습니다. 과학의 하위영역인 생물, 화학, 지구과학, 물리 중 물리가 가장 싫었더랬습니다. 그런데 세상은 참 알 수 없는 것이 저는 그 싫다는 물리를 공부한 사람과 결혼을 하기까지 했어요. 그래서 물리 좋아하는 사람들의 성향을 좀 알아요. 새로운 제품에 의심이 많고 남들 다 관심있는 대중적인 것에 관심이 없고 자기 혼자 궁금한 사실에 집요하고 어떠한 결과에 대체로 낙천적이죠. 심심하면 라디오나 컴퓨터를 잘 뜯어보고 다시 작동될 때까지 자리를 뜨지 않아요. 한마디로 시간에 둔감한 편입니다. 지각도 잘하죠. 그러다가 우연히 옷핀 같은 것으로 잠긴 문도 가끔은 열어준답니다. 계산은 잘하는데 계산적이진 않구요. 모르겠습니다. 제가 아는 물리 공부한 사람들은 크게 성공한 분들이 아니어서 그런지 다들 건전하고 착하다(?)는 쪽으로 평가를 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파인만씨는 크게 성공한 분인데도 아이같은 순수성을 잃지 않고 사신 분이더군요.


   저는 인문계였지만 수학을 잘했습니다. 계산이 딱딱 떨어질 때 마치 세상의 이치를 하나씩 깨달은 것 같은 느낌이나 누구도 못 푸는 문제를 끙끙대며 풀었을 때의 기분 같은 건 조금 알아요. 친구들이 제일 싫어하는 ‘증명’같은 단원을 가장 잘 했어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물리는 이해하기 힘들었어요. 가르치는 선생님복도 없었습니다. 나중에 아이아빠에게 물어보니 물리하는 사람들은 자기가 아는 것을 남에게 잘 가르치기가 힘들다고 하더라구요. 설명한다고 알아질 문제가 아니라는 말도 했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당연한 것을 모를 수 있느냐는 생각이 반 이상 이래요. 어떻게 이렇게 재미난 일에 관심이 없느냐고 말해요. 천재들 중에 물리 공부하는 사람들이 많잖아요. 그 천재들은 대개 스무살 이전에 판가름이 난다고 합니다. 천재가 되지 못한 물리학도들은 그들 천재에게 죽을 때까지 경외심을 지니고 살아간대요. 그런데 그들은 막상 그 위대한 연구들을 가르치는 데는 젬병이라고 해요. 자기 혼자 온 세상의 이치를 모두 파악했을 뿐일 경우가 많죠, 하하. 그런데 파인만은 예외인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물리공부하는 사람들은 필수적으로 파인만의 육성 강의를 찾아서 들어본다고 합니다. 물론, 무슨 뜻인지 전공자들도 다 못 알아 듣는다고 해요. 그런데 중요한 건 물리 역사상 그렇게 쉽게 자신만의 방법으로 자기만의 그림을 이용해 물리를 가르친 사람은 없다고 하네요. 천재중에서도 또 예외에 해당하는 선생님형 천재였던 거죠. 이 책의 후반부에 파인만이 자신이 개발한 다이어그램을 가지고 그 유명한 QED 강의를 하는 장면이 디테일하게 소개되어요. 학계에선 그걸 파인만 도표라고 합니다. 전공자도 아닌 저라고 그걸 이해했을 리 만무했지만 뭐랄까 비록 대가들의 이해할 수 없는 미술작품을 보았지만 가슴은 웅숭깊어지는 그런 기분이었달까요. 조금은 신비로운 자연의 이치에 쉽게 그리고 편안하게 한발짝 다가선 느낌은 확실히 들었답니다. 전혀 다른 세계의 언어지만 하나의 이미지로 다가왔습니다. 모두 이해할 순 없지만 암튼 그 모르는 것들이 아주 가까이서 우리를 움직이게 하고 있었구나. 그러한 자연의 이치를 발견하는 일은 눈물 날 만큼 아름다운 일이구나, 하는 감동을 받았습니다. 예, 이 책은 묘하게 물리 전개도를 보고도 따스한 체온과 훈훈한 공기가 느껴졌어요. 흔치 않은 책입니다.


   이 책에는 아인슈타인을 비롯해 닐스 보어 같은 유명한 과학자와 1965년 같이 노벨상을 수상한 슈윙거도 파인만의 인생을 스치는 사람들로 등장합니다. 많은 영향을 미친 첫 번째 아내와 여동생, 아버지, 친구들 정도가 기억나네요. 그 중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건 고등학교 때 만나 결혼에 골인한 여자 친구 알린 이었습니다. 알린은 파인만과는 달리 철학을 공부했어요. 제 생각에 파인만이 세상이 돌아가는 규칙을 발견하는 데 희열을 느끼고 그것에 평생을 바칠 수 있었던 건 알린의 사랑과 배려, 그리고 사고방식의 영향이 컸다고 봅니다. 파인만은 알린의 철학적 질문들로부터 상대적인 관점과 그로인한 통찰력을 넓혀 갔으니까요. 알린 역시 파인만의 논리에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어느 날인가 철학을 이해하지 못하는 파인만에게 알린은 각자 사람마다 다른 입장이 있다는 것을 주장하고 싶었나봐요. 그녀는 파인만에게 ‘종이에 양면이 있듯 모든 문제에도 양면이 있다.’는 말을 선생님이 했다고 하죠. 그러자 파인만은 눈앞에서 종이를 길게 잘라 양끝을 이어 붙이곤 뫼비우스의 띠를 만들어요. 이때 종이는 양면이 아니라 한 면으로 이어지는 것을 증명해 보입니다. 알린은 수업시간에 모든 문제에도 두 가지 측면이 있다는 선생님에게 파인만처럼 뫼비우스의 띠를 만들어 보이며 그 말씀도 두 가지 측면으로 생각해볼 수 있다고 의견을 발표해요. 이런 식으로 두 사람은 어느 한쪽도 옳거나 틀리지 않고 완벽하지 않다는 것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가슴아팠던 건 파인만의 소심한 성격까지 바꾸어준 알린이 그다지 오래 살지 못하고 병마로 세상을 먼저 떠난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어쩐지 그 이후에 파인만이 만나는 여자들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고 심지어는 노벨상 탈 때 옆에 있었던 두 번째 아내 이름도 기억나지 않더군요. 그 자리엔 알린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저도 모르게 했습니다. 그리고 저와 마찬가지로 파인만도 얼마나 알린이 생각났을까를 생각하니 그만 목이 메더라구요. 예, 저는 이 책에서만큼은 파인만 자신의 죽음보다 알린의 죽음이 많이도 슬펐습니다. 어떤 위대한 인물의 가슴속에만 살아있었을 사람이지만 이야기는 이렇듯 숨겨진 사연과 감동을 복원해 내는 것이겠지요.


   파인만과 알린을 보면서 어떤 문제를 고민할 때 결국 철학과 과학은 방법만 다를 뿐 지향하는 곳은 같은 곳이 아닐까 싶더군요. 라이프니츠 같은 사람은 철학자이면서 과학자이고 수학자였잖아요. 러셀도 수학자면서 철학자였고 비트겐슈타인도 기계공학을 전공한 후 철학자가 되었다죠. 스티브 잡스도 원래 철학을 전공했다고 들었어요. 과학자들은 하나같이 사물들이 복잡하게 움직이며 얽혀있는 이 세상이 돌아가는 ‘규칙’, 그 신비한 법칙을 발견하고 싶어 하죠. 그 ‘규칙’을 알게 되었을 때 비로소 세상을 ‘이해’했다고 말해요. 그런데 치밀한 논리를 바탕으로 과학적인 주장을 하는 철학도 결국 끊임없는 의문을 통해 이 세계를 이해하고자 하는 것은 마찬가지인 듯합니다. 저는 그러한 태도가 통찰력이라 생각하는데 제가 이 책을 덮으면서 가장 감탄한 것도 바로 파인만의 독특한 통찰력이라는 생각입니다. 고백하자면 아이 아빠와 아마 결혼까지 할 수 있었던 것도 서로 너무나 다른데 이상하게도 세상을 향한 질문은 얼추 비슷했다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예를 들어 사람은 왜 저마다 다르게 살았지만 공통의 아름다움에 대한 공감이 가능할까. 사랑이라는 것을 양과 질로 구분이 가능하다면 사랑에 빠진 사람들은 그 사랑을 어느 정도까지 측정할 수 있을까. 없다면 그 사랑 바깥에 있거나 그 사랑이 지나간 후는 가능한 것일까. 가능하지 않다면 무엇으로 자신의 사랑을 상대화 할 수 있을 것인가.....


   이 책에는 2차 세계대전 때 미국의 원자폭탄 계획인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한 일화도 소개되어 있어요. 말년에 나사에서 챌린저 우주 왕복선 폭발의 원인을 밝혀내는 과정도 있더군요. 파인만은 전쟁이 끝나고 훗날 자신이 만든 폭탄이 어떤 일을 저질렀는지를 생각하며 생각에 잠깁니다. 파인만은 ‘독일이 폭탄을 만들지도 몰랐기 때문에 폭탄을 만들었다’고 회상해요. 처음부터 대량 살상의 무기를 계획하기 위해 참여한 것은 아니었겠죠. 하지만 국가 기밀작업에 참여하면서 ‘왜 그 일을 시작하게 됐는지 끝까지 염두에 못 둔건 도덕적인 실수’라고 결론 내려요. ‘어떤 일을 할 때 끊임없이 그 일을 하게 된 이유’를 잊어버리면 안된다고 충고합니다. 그 이후로 파인만은 어떤 국가 프로젝트도 안하게 되죠. 저는 그러한 파인만의 대외적인 업적보다는 생활 속에서 그가 질문을 시도하는 과정들이 참 신기했습니다. 예를 들어 몇 백번의 시도 끝에 금고를 열수 있는 방법을 알아내는 과정이라든가 레스토랑에서 접시 돌리는 사람을 보고 왜 '접시의 그림이 도는 속도가 흔들리는 부분의 속도보다 느린지' 궁금해 하는 장면들이 떠오릅니다. 밥 먹으러 갔다가 재미삼아 접시의 회전운동을 분석해보는 식이죠. 궁금하니까요. 대부분 어떻게 접시를 떨어뜨리지 않고 저렇게 돌릴 수 있을까, 몇 개쯤 돌려야 접시가 깨어질까, 접시가 깨어지면 저 사람은 일당을 못 받을까, 뭐 그런 생각을 하잖아요.


   과학을 하려면 굉장한 상상력이 요구된다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파인만은 학생 때부터 그 많고 복잡하고 어려운 공식들을 보면 그것들이 통으로 색깔있는 무늬나 그림으로 인식되었다고 해요. 보는 방법이 다른 사람인 것이죠. 누구나 꽃을 관찰하며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데 꽃을 바라보는 방법이 보통 사람의 시야와 다르다고 할까요. 이건 예술하는 사람들이 가진 능력이자 특성이기도 한데 다른 방법으로 보는 사람은 결국 다른 걸 보게 됩니다. 그 다름을 발견하고 누군가는 그림을 그리며 파인만같은 과학자는 수식을 만들고 작가들은 글을 쓰는 것이 아닐까요. 그렇다면 파인만이 말하는 상상력은 우리 세상을 아름답게 하는 선물인 것이네요. 제가 무릎을 탁 치면서 파인만에게 한수 배운 상상력을 마지막으로 소개해 볼까 합니다.


   파인만은 이런 고민을 합니다. 우리가 볼 수 없는 것도 아름답다고 상상할 수 있을 지 말입니다. 상상력이라는 게 볼 수 있는 것에만 해당된다면 그건 진정한 의미의 상상력이 아니지 않을까 생각했던 게 아닐까요. 예를 들어 우리는 누구나 하늘에 뜬 무지개를 아름답다고 말하는데 파인만은 무지개를 슬며시 과학의 전개도에 오버랩 시킵니다.



   
 
“좋아, 그러면 이 그래프도 아름다워 보일까? 여긴 좀 더 상세한 내용이 담겨있어. 우리 눈으론 주파수 분포의 정확한 모양을 볼 순 없으니까. 하지만 눈에는 무지개 그 자체가 아름다운거야. 주파수 분포를 나타내는 곡선에서 무지개를 직접 볼 때 느끼는 것과 같은 아름다움을 볼 수 있을 정도의 상상력이 우리에게 있을까?”
 
   


    파인만은 위와 같은 주파수 분포도에서도 무지개를 감상할 때와 마찬가지의 아름다움을 발견한다면 우린 충분히 주파수 분포도를 보면서도 아름답다 말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지요. 기발하지 않나요? 앞서 말했듯이 수학과 과학의 모든 공식을 그림으로 인식했던 파인만이니 파인만에겐 과학을 설명하는 모든 난해한 그림들을 이 아름다움을 자극하는 상상력에서 시작하여 사람들에게 보여줄 수 있다고 믿었던 것 같아요. 파인만은 그 해답을 뜻밖에도 로마 바티칸 성당의 벽화에서 찾을 수 있었답니다. 성당의 천장에 웅장하게 그려진 그림들을 보고 느낀 아름다움에서 자신감을 얻었어요. 성당에는 미켈란젤로같은 대화가가 그린 그림도 있었지만 무명화가의 수준 떨어지는 작품도 있었던 것입니다. 파인만은 어떤 그림은 아름다운데 다른 그림은 그렇지 않다고 느낍니다. 그런데 왜 아름답고 그렇지 않은지 그 이유는 명확히 알 수 없었지만 바로 아름답거나 그렇지 않다는 걸 느낄 순 있었다는 사실에 주목합니다. 이유는 말할 수 없지만 느낄 수 있는 아름다움. 파인만은 현미경을 통해서도 혹은 현미경으로 보이지 않는 모든 단계에서도 아름다움을 찾을 수 있다고 자신감을 얻은 것입니다. 물론 파인만 자신이 아름다움을 느꼈다고 모든 사람이 똑같이 느낄 순 없겠지요. 그랬기에 더욱 파인만은 자신이 본 자연 현상의 과학적 아름다움을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고 설명하기 위해 평생을 노력하지 않았을까요. 

 



   파인만의 독특한 상상력을 저는 이렇게 생각해요. 문학으로 바꾸어 보자면 내가 느낀 아픔과 슬픔을 전달할 수 있는 상상력이 아닐까 하구요. 파인만의 아름다움에 공감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을까요. 마찬가지로 위대한 작가들은 마찬가지의 독자들을 자신의 상상력에 공감하도록 하는 사람일테죠. 저는 파인만이 그 상상력을 아름다움으로 받아들이고 모두가 그것을 느끼도록 자기 이론을 설파한 것이 갑자기 뭉클해지네요. 왜냐하면 위대한 사람은 자신이 이루지 못한 것들을 내적으로 승화시켜 외적으로 발산하게 되지 않나 싶어서요. 잡스만 해도 그의 상상력은 세상이 보다 더 소통될 수 있는 패러다임을 지향하는 것이었잖아요. 하지만 잡스 개인사로 볼 땐 그다지 소통에 원만한 성향의 인물은 아니었듯이 혹시 파인만에게도 젊은 날 다 이루지 못한 사랑에 대한 환타지 같은 게 그의 상상력을 무의식적으로 지배하지 않았을까, 뭐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소견이네요. 소설이나 빡빡한 텍스트의 자서전이 아닌 고급스런 그림들속에서 파인만은 평생 기계와 연구실, 논문과 발표, 공식과 강의에 묻혀 사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자신이 제일 재미를 느끼는 공부였고 또 그냥 재미있으라고 매번 연구를 시작하는 파인만이었지만 어쩐지 한 평생 고독하고 쓸쓸해보였다고 할까요. 유머도 좋고 솔직함도 좋았지만 저는 인간 파인만이 과학이라는 외로움을 이기는 방법으로 아름다움을 택했다고 생각합니다. 그건 아름다움 너머의 운명일지도 모르죠.


   이 책. 어떤 하이라이트나 뚜렷한 결말은 없지만 잔잔한 그림과 함께 아름답게 살아간다는 것.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을 자기만의 상상력으로 아름답게 남긴다는 것. 그리고 사람들에게 그 아름다움을 나누어 준다는 것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책입니다. 과학자에게서 뜻밖에도 아름다운 인생을 배운다는 것이 신기하고 흥미롭지 않나요? 예, 저는 파인만씨를 누구보다 아름다운 과학자로 오래오래 기억하려고 합니다. 파인만씨를 떠올리면 마음이 아름다워 지듯이 저 또한 누군가에게 그러한 사람이 되고 싶은 밤입니다. 그런게 아름다운 세상이겠고 이런게 아름다운 사람이라면 좋겠습니다. 아름다운 사람이라고 모두 아름다운 삶을 살아가는 것은 아닐거예요. 그렇기에 더욱 사람과 삶이 일치하는 삶을 살고 싶습니다. 한번쯤 모두와 약속이라도 하고 싶네요. 책 한권이 선사하는 삶의 아름다움. 한 사람의 인생이 건네는 사람의 아름다움. 파인만씨, 그것이 바로 당신이 남긴 진심이기에 당신이 죽었다는 게 이리도 슬픈 이유입니다. 아마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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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1-10-14 0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쉽고 머리에 쏙쏙 들어오는 글이네요. 잘 읽었습니다.

stella.K 2011-10-14 1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책이 그래픽노블이었군요.
중학교 때 물리를 가르쳤던 선생님이 서글서글한 예쁜 처녀 선생님이었어요.
그래도 난 물리는 도통 모르겠던데
같은 반 여자애 하나는 그 선생님을 너무 좋아한 나머지
물리를 깨치더군요.
아무리 선생님을 좋아해도 그렇게는 안되는 것 같던데
그 아인 좀 특별하다 싶었어요.
유익한 리뷰였습니다.
한사람님 부군되시는 분도 조금은 알게구.ㅋ^^

아이리시스 2011-10-14 15: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게도 과학고 나와서 열아홉살에 물리학과 진학한 사촌동생이 있는데, 어제 문득 그 아이 소식을 들으며(물리학이 공부를 오래 해야하고, 타인에게는 지극히 살아가는데 도움 안되는 학문으로도 비쳐서, 외삼촌이 걱정이 많으시지만! 그 아이는 여전히 20살 어린아이일 뿐이고) 저는 이과반이었는데도, 수학도 못하고, 과학에도 전혀 흥미가 없고, 물리보다는 화학이 좀 더 낫다는 부류였는데, 과학은 기초 도서도 못 읽어내는 게 못내 부끄러워지더군요. 아무도 안읽는 어려운 책만 본다고 외삼촌이 말씀하신 모양인데, 저는 그게 그냥 부러울 뿐이고. 제게 과학은 너무 멀고, 저도 파인만을 알게 된 지는 얼마 안돼요. 아무래도 시작을 잘해야 겠어요. 과학, 물리, 연구, 지적 호기심 따위가 내 안에 있을까요, 받아들일 공간이?ㅋㅋㅋ

가연 2011-10-19 2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잔잔한 글인데 내용은 깊네요. 음.. 천재들은 스무살 이전에 판가름난다는 이야기는 괜히 슬프네요ㅎㅎ 파인만은 고개를 저을 이야기 같다고 혼자서 생각해봅니다. 만약에 그가 그렇게 생각했다면 일반인들을 위한 강의를 굳이 하려고 들지는 않았을지도 모르고.. 그에게 중요하였던 것은 자연에 대한 아름다움은 누구나 느낄 수 있다, 라는 이야기였을테니깐. 그러고보면 파인만은 소위 천재의 기준처럼 쓰이는 아이큐에서 125를 기록했다고 하던데.. 물론 표준편차가 얼마냐에 따라서 좀 다를 수 있지만 그래도 다른 물리학자들에 비하면 낮은 아이큐라고들 하지요. 하지만.. 그는 그 아이큐라는 것이 얼마나 무의미한지 스스로 증명해내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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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르트르와 카뮈 - 우정과 투쟁
로널드 애런슨 지음, 변광배.김용석 옮김 / 연암서가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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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난 사람들

   이 책은 재미난 책은 아니지만 의외로 재미나게 읽었다. 이 책을 만나기 전에 내가 그들의 작품을 읽은 것이라곤 사르트르의 <지식인을 위한 변명>과 까뮈의 <이방인>정도에 불과했다. 이 단편적인 지식과 어디나 천편일률적인 인물 소개를 통해 내 머릿속에 저장된 그들은 그냥 위대한 프랑스 지성인중 두 사람 정도였달까.(한명이 철학자고 한명은 예술가라는 구분없이) 두 사람이 친구였고 서로의 사상 때문에 절교를 했는지 그들 사이에 보부아르라는 증인이 있었는지 그런 사실은 내게 중요하지 않았다. 그들이 프랑스 어느 시기 아니 세계사의 어떤 흐름속에서 어떤 개인적 의도로 작품을 집필했는지 해당 작품이 상대에게 어떠한 의미였는지 알지도 못한 채(알려고도 않은 채) 그동안 나는 그래도 그들의 작품을 읽어는 봤다는 알량한 독서의식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이 책을 덮고 나서 새삼 사르트르는 왜 그러한 변명을 하면서 지식인을 ‘정의’ 내리려 했는지 까뮈의 뫼르소는 왜 그러한 ‘살인’을 해야 했는지 다시 질문하며 여러 가능성을 떠올리게 되었다.

   이 책에 의하면 서로는 서로를 만난이후 평생 동안 아니 죽고 나서도 서로의 작품을 벗어나 본적은 없는 듯하다. 이것은 서로가 한 말과 글로부터 절대 자유롭지 못한 운명인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서로의 개별적인 작품들은 상대의 전체 중 부분에 해당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두 사람은 독자적으로 완성된 작가들이 아니었다고 본다. 이런 운명적인 관계가 또 있는지 모르겠지만 이 책은 두 사람의 치열했던 인생을 때론 현미경으로 관찰하고 때론 망원경으로 조망하며 독자들 앞에 흥미진진하게 펼쳐보였다. 번역도 자연스럽게 다가왔고 우리와 같은 시대를 살고 있는 저자의 사유가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기 위해 치열하고 정직하게 배치되는 느낌을 받았다. 또 미처 읽어보지 못한 두 사람의 작품도 골고루 소개하며 때론 집중적으로 반복, 인용하면서 독자와 눈높이를 맞추는 정성도 대단했다. 결국 숨은 에피소드, 두 사람의 지인, 당시 잡지와 기사, 언론과 대중의 반응, 정치 및 국제 변화등이 다양하게 증언의 역할을 하며 두 사람을 주인공으로 하는 영화한편을 기꺼이 만들어냈다.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은 바로 그 영화 한편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엿보는 듯한 추적과 추리, 추론의 재미가 아닐까. 사색과 사유를 좋아하는 분들에게 추천하고 싶다는 말이 절로 나오는 바이다.



1. ‘관찰자’로서 ‘개입자’ 되기

   이 책을 읽는 내내 가장 거슬렸던 건 사르트르도 까뮈도 아닌 보부아르였다. 보부아르는 두 사람 사이에서 가장 밀접하게 그들을 겪은 지인으로 등장한다. 때론 인터뷰로 혹은 자신의 문학으로 그녀는 그들을 회상하는데 누구보다 열정적이었다. 나는 보부아르가 여성이었고 사르트르와 연인관계였던 것이 궁극에 객관적이지 않을 수밖에 없는 조건임을 부연하고 싶지는 않다. 내가 그려본 상황은 같은 여성으로서 본능적으로 감지되는 세 사람간의 역학관계를 바탕으로 한다. 가장 측근에 오래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그녀도 유명한 작가였기 때문에 그녀의 견해는 긍정이든 부정이든 의미성을 지닐 수밖에 없다. 저자 역시 그때 같은 장소에 있었던 보부아르는, 하고 자주 증언의 기회를 부여, 삽입하곤 했다. 그런데 나는 이상하게도 그 부분에 이르러서는 모종의 불쾌감이 자주 들었고 보부아르는 단순한 관찰자가 아니라 저자의 말처럼 ‘제 3의 극’으로서 관계에 연루된 자로서 적어도 이번 영화에선 주조연이 확실했다.

   아주 오래전에 나는 몇 년 동안 두 명의 남성과 공동 작업을 한 적이 있다. 두 사람은 둘 다 각각 그 분야의 최고였다. 한명은 기획자로서 지적인 외모를 가졌고 한명은 디자이너로서 터프한 외모를 지녔다. 그리고 그 두 명은 나와 작업을 하기 이전에 이미 동료이기도 했다. 동창이거나 사는 동네, 전공때문이 아니라 업무상의 필요에 의해 친구가 된 경우였다. 나는 디자인을 공부한 기획자였다. 내 역할은 기획의 언어를 시각적으로 풀고 디자인의 의미를 다시 언어로 치환하는 것이었다. 두 사람은 내가 없어도 결과물을 낼 수 있었지만 프로젝트가 커지자 더 큰 성공을 위해 나는 계획적으로 투입된 사람이었다. 기획자는 중산층의 가정에서 한국의 일류대를 졸업했고 디자이너는 어렵게 유학을 다녀온 해외파였다. 둘 다 기혼자였기 때문에 나는 이성적(異性的)으로도 자유로왔고 한참 선배들이라 그들 양쪽으로부터 배우고자하는 의지가 충만한 시절이었다. 우리 팀은 바깥에서 보기에 완벽해보였다.

   궁극에 추구하는 작품 성향은 같았지만 세분화하여 나눠보면 어떨 땐 기획이 더 좋은 평판을 얻기도 하고 어떨 땐 디자인이 뛰어나 당선된 적도 있었다. 말하자면 두 사람간 자존심 문제였는데 세간의 평판에 따라 그들은 점점 어색한 사이가 되어갔다. 원래 사내에서 브리핑을 도맡아하던 냉철한 기획자는 처음엔 새로운 감성이 돋보이는 디자이너를 앞장서서 소개하고 각종 모임에 참여시켰다. 그리고 사람들은 남성적인 매력과 섹시한 외모를 지닌 새로운 디자이너에 열광하기 시작했다. 디자이너는 가끔 돌발적인 행동을 하거나 충동적인 감성으로 주위를 놀래켰지만 그러한 기질적 성향마저도 창의적인 태도의 일환으로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기획자는 좀처럼 일인자의 자리를 디자이너에게 내주는 법이 없었고 일의 성과를 자신의 공으로 돌리고자 무던히도 노력했다. 결국 인맥이 풍부했고 사회성이 뛰어났던 기획자는 업계에서 디자이너를 소외시키는데 성공했고 두 사람은 공모에서 적으로 자주 만나는 경쟁자가 되어버렸다. 기획자, 디자이너 모두 개인회사를 오픈하여 실력있는 업체로 인정받았지만 두 사람은 화해하지 못했고 특히 디자이너는 (업계와 타협하지 않는)독자적인 행보로 많은 비난을 받았다. 그는 한국의 주류 디자인 인맥에 들지 못했기 때문에 그의 실수나 오류를 감싸안는 디자이너들도 많지 않았다. 나는 솔직히 인간적으로는 낭만적으로 보인 디자이너에게 더 끌렸지만 업무이해 관계상 디자이너의 편을 들어주진 못했다. 나도 결국은 기획자였고 내가 디자인으로 밥벌어 먹고 살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그리고 디자이너의 곁에선 영원한 보조나 이인자가 될 것이라는 계산적인 생각이 많았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나도 그를 외면하는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개인적인 친분은 유지했기로 그 디자이너의 생각과 상황을 가장 많이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곤경에 처했을 때 가장 많이 도와줄 수 있는 위치였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비겁하게 침묵한 적이 많았다. 내 쪽의 판단을 정당화하기 위해 알게 모르게 은근히 그의 작품을 비난의 도구로 활용한 적도 있었다. 마찬가지로 당선이나 이해관계가 없는 사안에 대해서는 극찬을 아끼지 않았던 기억도 난다. 마음 한 켠에 이렇듯 오래된 부채감은 오래도록 나를 분열스럽게 만들었다. 우리들 기획자의 마음속에 그는 차별화된 능력과 타고난 재능으로 보기 드문 독창적인 작품세계를 만들어가던 최고의 디자이너였지만 이미 그가 화려하게 재기하기 힘들 시점에서야 그의 전설을 가십거리처럼 회자하곤 했다. 학벌과 지연중심의 한국사회에서 그는 일인자가 되기 힘들었고 그를 견제하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그의 비타협적인 독선, 다혈질적인 성격, 예술적 고집을 이유로 들며 그를 고립시켰다.

   내가 이 책을 재미나게 읽었던 이유는 아마도 이러한 내 개인적인 경험때문이 아닐까 싶다. 시대도 다르고 분야와 레벨도 다르지만 그리고 무엇보다 감히 회사시절 내 위치를 사르트르와 까뮈의 우정과 투쟁을 지켜본 보부아르의 위치와 견줄 순 없겠지만 나는 우리네 인간관계에서의 역학적 흐름을 바탕으로 몇몇 그녀의 인터뷰에서 위선을 감지할 수 있었다. 그녀는 필히 까뮈에게서 더 남성적인 매력을 강하게 느꼈다고 판단된다.(그 때문에 자존심이 상했으리라고 본다) 까뮈는 사르트르보다 보부아르에게 마음을 자주 털어 놓았고 보부아르 역시 (사르트르 부재시)그런 카뮈를 받아주었을 터이다. 사르트르는 작은 키, 사팔뜨기라는 핸디캡으로 외모상으로 카뮈보다는 경쟁력이 떨어지는 쪽이었다.(나는 이 사실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보부아르는 각종 모임에서 카뮈와 사르트르가 여자를 사이에 둔 감정적이고 성적인 긴장이 종종 있었다고도 언급했다. 사르트르와 카뮈가 위대한 사상가임에는 틀림없지만 그들도 결국은 그 이전에 여성에 어필하는 남성이었다. 그들은 사상과 작품, 정치뿐 아니라 남성성으로서도 내외적으로 경쟁하는 위치는 아니었을까. 경쟁구도 속에서 보부아르는 머리로는 사르트르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사르트르와 카뮈를 알고 있고 친하다는 것이 자신의 경쟁력이 되는 순간도 있었을 터이다. 때론 카뮈에 대한 죄책감으로 때론 사르트르에 대한 미안함으로 대외적 칭찬과 비난을 적절히 구사하기도 했을 것이다. 그녀는 사르트르의 대리인이 되어 글을 쓴 적도 있었고 카뮈의 상담자가 되어 위로를 한 적도 있었다. 저자가 언급했듯이 보부아르는 그들 사이의 단순관찰자가 아니라 ‘제 3의 극’으로서 그들 관계에 자발적, 타의적으로 개입했다. 나는 그래서 그녀의 모든 공표된 객관이 결코 그녀 개인의 모든 주관을 넘어설 수 없다는 생각을 하고 백프로 솔직하지 못했다고(할 수 없었다고) 여긴다. 내가 시나리오 작가라면 필히 보부아르를 그들 사이 중재가 아닌 긴장을 유발하는 주역으로 배치할 것이다. 그리고 항상 만약, 이 상황에서 보부아르가 없었다면 둘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의 경우의 수를 만들어 보았을 것이다. 남자들은 대부분 자신들의 우정에 이미 오래전부터 개입되있었던 여성의 존재와 역할을 인정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그녀는 사건 관찰자가 아닌 확실한 개입자 혹은 공모자, 방관자, 조정자로서 이 영화속 주조연이 확실하다고 본다. 이 책을 읽은 덕에 이렇듯 독자의 위치에서 그들 사이 인간관계를 추론해보고 또 내 맘대로 배치시켜보는 건 행운이었다.

   그녀의 많은 증언가운데 기억나는 한마디를 옮겨본다.


“ 나는 그(카뮈)에게서 그가 자신의 생과 쾌락에 몰두하는 열광적이고도 굶주린 태도를 좋아했다. ”     -114p


   나는 그녀마저 사르트르의 우월감의 테두리에 포함되려고 했던 심리가 거울을 보듯 당황스러워 슬픈 기분마저 들었다. 보부아르는 여튼 카뮈에 대해 호불호를 자주 언급했는데 나는 그녀가 말하는 방식이 기분좋지는 않았다. ‘열광적이고도 굶주린 태도’는 나로선 상당히 모멸감을 느끼는 표현이다. 보부아르는 왜 그 좋다는 태도로 인해 카뮈가 돌발행동을 하는 것은 이해하지 못하였을까. 그것은 자신들은 열광적이지도 그래서 굶주리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그들은 혹 카뮈에게서 인간적인 매력을 느끼기 충분했지만 진정으로 카뮈를 이해하려고는 하지 않았던 것이 아닐까.


2. ‘다른’ 방식으로 ‘함께’ 살아가기

   책을 덮고 두 사람으로부터 반사적으로 떠오른 감정은 확연했다. 사르트르의 우월감과 카뮈의 순수함. 적어도 사르트르는 카뮈가 자신에게 대응하는 것보다 몇 배 더 치밀했던 것으로 보인다. 사르트르는 카뮈를 처음만난 날부터 (자신이 가지지 못한)그의 재능에 이끌렸지만 항상 자신이 더 우월한 위치에서 그를 평가하고 재단했다. 이는 사르트르가 이미 유명인사로서 연장자였고 출신성분도 중산층 이상의 파리 고등사범학교 출신이었기에 알제리 출신 청소부의 아들이었던 카뮈를 자연스럽게 위에서 내려다보는 위치가 될 수 있었을 터이다. 카뮈역시 자존심 때문에 그의 위성으로서 무리에 속하길 원하지 않았고 사르트르 다음의 이인자가 되길 바라지 않았다. 외려 정치활동은 카뮈가 더 선배격이었고 레지스탕스 대원, 비중있는 일간지 편집장으로서 카뮈는 얼마든지 자신을 차별화시킬 자신이 있었던 것이다. 두 사람이 서로를 공격하는 양상을 들여다보면 사르트르가 카뮈에 더 적의를 품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되고 카뮈는 배신과 상처에 어쩔 줄 몰라하는 것으로 보였다. 나는 이것이 사르트르가 카뮈와 경쟁하는 위치에 서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까뮈는 자신이 서른 살이고 사르트르가 서른 여덟살 때 첫 만남에서 이미 비평적 명료함에선 한수 위인 사르트르가 자신보다 훨씬 지적이라 판단했지만 사르트르는 자신이 부족했던 본능적인 창조성, 독립심, 용기를 지닌 카뮈를 자신보다 뛰어난 능력자로 여기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서로가 상대를 평가하는 그 지점이 애초부터 영원한 친구로 이어지기 어려웠던 불씨라는 생각이다. (만약, 존경하는 선후배 사이로 남게 된다면 모를까) 우정은 사랑과 존경과 달라 아무리 분야가 다르고 나이차이가 나도 서로 동격임을 인정하는 배경이 튼실해야 한다. 그러나 사르트르는 지겹게도 자신이 평가한 지점으로만 카뮈를 위치시키고 싶어 했고 카뮈는 끈질기게 그 위치를 거부, 외면했다. 서로를 비난할 때도 카뮈는 사르트르를 포함한 실존주의자들의 성향을 지적하는 것에서 시작한 반면 사르트르는 카뮈 개인의 역량에 집중적인 공격을 한다. 카뮈가 언급했듯이 사르트르는 자신들의 유죄성을 무마하려 상대의 유죄를 발본하여 비난하는 위선적 기질이 다분했다.(그런데 이건 경지에 오른 지식인의 보편적 특성아닐까) 담론을 창출하고 자신의 견해를 표명하고 논쟁으로 승리를 이끄는 것은 전후 프랑스 사회에서 여론을 주도하는 지식층으로서 커다란 능력이었다. 나는 두 사람이 보여준 정치적 저널리즘의 양상들로부터 카뮈는 애초부터 사르트르 개인을 공격할 마음은 없었다고 보았다. 그러나 사르트르는 자신의 견해에 저항하는 카뮈 개인을 공격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두 사람은 당시 역사적 상황 때문에 묻지도 않은 질문에 상대가 답했기 때문에 할 수 없이 다시 한쪽에서 화답을 해야 했던 상호적 관계였다. 이 관계에서 카뮈는 다소 방어적으로 보였고 사르트르는 무릇 공격적으로 보였던 것 역시 두 사람이 서로를 평가하는 위치가 달랐던 것에서 기인했다고 본다. 이것은 대부분 아주 냉철한 문장 속에서도 ‘반공산주의자는 개다’같은 한마디로 급진적인 색깔을 감추지 않는 사르트르의 타고난 신분적 우월감때문이 아닐까.(누가 감히 사르트르에게 인간이 아닌 신분으로서의 '개'를 빗댈 수 있겠는가) 서로의 이름을 거명하지 않으면서도 서로의 작품에 화답하면서 상대 저서를 통해 논쟁하는 방식은 직접적으로 상처주지 않는 고품격의 매너가 아니라 같은 위치에 이름을 올려놓기 싫은 지식인 기득권층의 세련된 위선은 아니었을지.

   
 
불화,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서로가 다시 만나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함께’ 살아가는 방식이었습니다.                                                                                                        -사르트르 추도사 中에서
 
   

   카뮈는 불행하게도 교통사고로 생을 마감한다. 카뮈 사후 20여년 동안 사르트르는 카뮈에 대해 발언할 자의적, 타의적 기회가 부여된다. 만약 사르트르가 먼저 죽고 카뮈가 그의 추도사를 작성했다면 저렇게 말했을까? 내가 생각하기에 ‘함께’ 살아가는 ‘다른’ 방식은 서로가 동의하에 마련한 방식은 아닌 것 같다. 물론 어느 한쪽이 주도한 방식이라 하기도 난감하지만 분명한 건 두 사람이 주체가 되어 삶의 방식을 각자 인식하면서 서로와 같이 나간 것은 아닌 것 같다. 그저 결과적으로 그 방식은 받아들여진 상태에서 지금까지 이어져 왔다고 해야 할 듯하다. 사르트르의 추도사는 틀린 말은 아니나 사르트르가 해야 할 말로는 적당해보이지 않았고 그건 세상이 그들에게 해야 할 말로 보였다. 나는 그 위치가 곧 사르트르가 카뮈에게 상정한 관계상의 우월적 관점이라 생각한다.

   가끔 이곳 서재에서도 어떤 블로거가 글을 올리면 마치 그에 화답하듯 반대나 찬성의 글이 올라오고 어떤 블로거의 글에서 영감을 받아 자신의 사유를 확장, 정리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마찬가지로 어떤 책의 리뷰가 올라오면 마치 그 리뷰에 답하듯 전혀 다른 평의 리뷰가 올라오기도 한다. 때론 논쟁으로 발전하기도 하고 반대로 공감의 시너지가 확산되기도 한다. 그러니까 서재활동이라는 것이 혼자서 사고하고 오롯한 자기 생각만으로 글을 쓰고 있는 것 같지만 우리들 모두는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 또 영향을 받고 있는 관계에 속해 있는 것이다. 나는 이곳에서 ‘함께’ 살아가는 방식에도 분명 사르트르적, 카뮈적, 보부아르적인 ‘다른’ 태도가 공존한다고 느낀다. 위선에 강인한 사람, 위선에 상처받는 사람, 위선에 중립적인 사람... 이 책을 덮으며 나는 어느 지성인에 가까울까를 생각했다. 저자는 카뮈와 사르트르의 한계를 뛰어넘고 두 사람의 세계관을 복합시킨 새로운 유형의 인물을 기다린다 했지만 나는 어쩐지 사르트르적인 카뮈보다는 카뮈적인 사르트르에 더 끌린다. 그래서 우울하다. 하지만 사르트르는 진정한 지식인은 도덕주의자도 이상주의자도 아니라 말했다.(이말도 결국 카뮈를 겨냥한 듯 보였지만) 지식인의 임무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신의 모순속에 사는 것이며 자신을 만들어온 근원적 상황과 그 형성과정에 의해 부단히 형성되는 이데올로기와의 투쟁을 게을리 하면 안된다고 충고한다. 까뮈는 그런 지식인들이 결국 사람들을 비난하기 위해 자기비판을 하고 자기 위선을 감추기 위해 상대에게 죄를 덧씌우는 것이 모순이라 지적했다. 결국 두 사람의 충고를 종합하면 자기 발전을 위한 순수한 의도의 자기비판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인데 이 모습이 그래도 카뮈적인 사르트르에 가까운게 아닐까 생각해본다.


3. ‘반항’이냐 ‘혁명’이냐

   또 하나 보부아르와 함께 이 책의 조연으로 인상깊었던 인물은 메를로 퐁티였다. 메를로 퐁티는 사르트르와 함께 혁명을 위한 폭력의 사용에 우호적인 반면 카뮈는 공산주의를 무조건적인 살인자 집단으로 보고 폭력에 엄중한 반대 입장을 취했다. 메를로 퐁티는 ‘공산주의가 자행하는 폭력을 자본주의가 행사하는 폭력을 종결시킬 수 있는 하나의 유일한 수단’이라고 한 바 있다. 이에 동의한 사르트르는 폭력적, 억압적이지 않고서는 이미 폭력과 억압이 난무하는 사회를 변화시키기 불가능하다고 본 것이다. 메를로 퐁띠는 이미 우리가 육화된 존재인 한 ‘폭력은 우리의 운명’이라 설파한 철학자였다.(나는 리뷰에 이 문구를 몇 번이나 인용했던가) 우리가 생명체로서 살아간다는 것은 누군가에게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폭력을 행사하는 일임을 주장한 것이다. 사르트르는 왜 이 폭력 메카니즘에 적극적으로 동의하면서 실력행사를 한 것일까. 사르트르가 노동자계급에게 방향을 급선회한 것은 문학의 운명이 노동자계급과 연결되어 있다는 자기 철학의 근본적 주제와 맥을 같이한다. (사르트르는 자신이 부르주아 출신이면서 평생 그 계급에 저항하는 모순에 괴로워했다) 그는 자기철학인 실존주의를 마르크스주의에 통합하고자 폭력과 혁명을 결합시키면서 서구에 대항하고자 했다. 하여 부르주아의 폭력에 대응하는 노동자의 폭력은 정당하고 자연스러운 행위로 간주한 것이다. 이것이 새삼 대단해 보인 것은 태생적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 그리고 자기철학을 정치행동과 일치시키기 위해 나아가 자기이론을 역사에 실행시키기 위해 치열하게 자기 삶을 불살랐다는 것이다. 이는 단순히 사르트르 개인의 사상적 변화를 넘어 자유와 사회주의를 연결시키는 개념으로서 바로 미국과 소련의 냉전에 대응하는 당시 프랑스의 답변이기도 했다.

   하지만 카뮈는 마르크스주의를 살인과 동일시하여 살인의 정당화를 주장하는 사르트르를 이해하지 못했고 급기야 공산주의를 ‘문명의 질병’, ‘현대의 광기’로 규정짓게 된다. 카뮈는 미,소 두 진영사이의 제 3의 길을 제시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우파와 가까워지게 된 것이다. 솔직히 당시 프랑스에서 카뮈가 더 혁명적 인사가 될 줄 알았던 독자로선 의아한 행보이긴 했다. 여기서 나는 정치활동 이전의 카뮈의 예술적 기질을 떠올려 본다. 사르트르가 현실적, 실리적이었다면 카뮈는 이상적, 도덕적이었다. 프랑스 부르주아 출신의 사르트르와 알제리 프롤레타리아 출신의 카뮈는 각자 태생적인 자기모순을 극복하기 위해 한사람은 현실과의 타협을 한사람은 보다 근원적인 가치를 지향하게 된 것은 아니었을까. 카뮈는 사르트르가 있는 한 자신을 철학자가 아닌 예술가로 칭해지길 바랐는데 나는 이 차이가 곧 자신이 자신을 바라는 궁극의 모습이라 생각한다. 이는 곧 내게 있어 ‘혁명’과 ‘반항’의 차이를 이해하는 밑거름이 된 듯하다.

   사실 이 책에서 가장 궁금하던 책은 카뮈의 <반항적 인간>이었다. 그런데 또 다행히도 저자는 <반항적 인간>에 대해 많이도 친절했다. 카뮈가 말하는 ‘반항’은 원초적이고 존중과 연대성을 전제로 하면서 승리를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하지만 ‘혁명’은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살인같은 극단적인 방법도 주저하지 않는 건강하지 못한 태도라 말한다. 즉, ‘반항’에는 그 어떠한 폭력적 함의도 소거한 채로 인간적인 소박한 기원을 담고 있을 뿐 인 것이다. ‘반항’은 카뮈가 공산주의에 대한 하나의 대안으로 활용한 개념이며 사르트르가 ‘혁명가’라면 카뮈는 ‘반항인’이라 볼 수 있는 중요한 태도 변수이다. 카뮈가 말하는 ‘혁명가’는 추상적, 권위적, 종말론적이고 교양이 풍부한 서구적 인간을 상징하며 사르트르가 말하는 ‘반항인’은 자기기만과 부조리를 인정하지 않는 나약한 지식인이다. 프랑스와 친공산 좌파지식인은 <반항적 인간>에 반항했고 우파인 미, 영 언론은 대체로 옹호했다. 카뮈가 용감했던 것은 바로 우파로부터 응원을 좌파로부터 조롱을 받을 것을 알고 있었다는 것인데 저자는 사르트르가 천재성을 지녔음에도 정작 혼자서 정치폭풍을 감당해내는 이러한 배짱과 용기가 없었다고 꼬집는다. 내 생각에 카뮈의 반항은 ‘예술’이고 사르트르의 혁명은 ‘정치’였다고 본다.

   <반항적 인간>은 철학, 사상, 문학, 미학, 정치에 대해 사르트르에 화답한 저서이기 때문에 사르트르는 이 도전에 절대로 침묵하지 않았다. 사르트르는 자신보다 급 떨어지는 동료에게 <반항적 인간>의 서평을 쓰게 하여 카뮈를 언급하지 않으면서 <반항적 인간>을 통해 자신을 무시한 카뮈를 교묘하게 공격하기 시작했고 서로간 서평을 통한 논쟁은 일 년 이상 이어지게 된다. 이 과정에서 서슴없이 전개되는 사르트르의 카뮈를 향한 신랄한 비판들은 독자입장에서도 충분히 모욕적이었다. 사르트르는 지배계급의 사주를 받아 이데올로기를 옹호하는 사람들(우파적인)을 사이비 지식인이라 말했는데 그는 1930년대 프랑스 소설가 니장(Nizan) 의 ‘집 지키는 개’를 인용하며 그들을 한껏 비하한 적이 있다. 자기 모순을 벗어나지 못하는 지식인층을 ‘개’에 비유한 사르트르가 카뮈가 포함된 반공산주의자를 ‘개’의 집단으로 격하시킨 발언은 카뮈가 말하는 반항을 패배적인 노예기질로 판정하며 현실 부적격자로 위치시킨 것은 아닐까. 이 ‘개’같은 발언은 프랑스 출신이 아닌 식민지 알제리 출신인 카뮈에겐 씻을 수 없는 상처가 되지 않았을까. 사르트르의 공개모욕은 누가보아도 절교선언이 되었을 터이다. 이는 ‘당신은 역사의 방향으로 의자를 놓았군요’ 혹은 ‘자신들의 의자를 역사의 방향으로만 놓았던 비판자들’이라는 카뮈의 문학적 표현에 비하면 너무나 충격적이고 살인적이기까지 하다. 역사적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까뮈를 깎아 내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아예 그런 식으로 정치할거면 앞으로 영영 이 사회에 적응하지 말라는(예술이나 하라는) 사형선고에 다름없다는 생각이다.



...완벽한 사람들

   저자는 사르트르 연구자였지만 이 책은 다분 카뮈입장에서 충격, 불신, 배신감, 상처들에 더 공감하도록 유도한다. 나 역시 두 사람 중 카뮈에게 더 마음이 기울었다.(이 사실이 내게 알려준건, 그러므로 나는 사르트르에 가까운 인간이구나, 였다 ㅠ) 지방출신으로 출세한 카뮈가 특권지식인층에 비웃음을 사고 축출, 배반, 고립화, 은둔, 예술적 고갈로 이어지는 과정을 섬세하게 밝혀내었기에. 카뮈주변엔 무조건 충실한 친구들이 있었지만 사르트르 주변엔 카뮈 외에 친구가 없었다는 식으로 카뮈는 인간적으로 인간에 충실했고 사르트르는 비인간적으로 인간을 무시했다는 뉘앙스를 제공한다. 결과적으로 사르트르가 카뮈의 출세에 공헌은 했지만 역으로 그의 고립에 누구보다 기여했다며 가해자로서의 역할을 재확인 한다. 저자는 카뮈는 사르트르를 증오했고 사르트르는 자기 정당화에 일생을 바친 것이라 말한다. 카뮈는 작품의 성공과 인생의 완성이라는 의미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지만 사르트르는 자기 정치적 목소리를 높이기 위해 상을 거부했다고 평한다. (카뮈가 받았기 때문에 거절한 것은 아닐까, 그래야 카뮈와 다른 격으로 존재하니까)

   하지만 저자는 결국 그들 모두의 행동과 태도를 ‘반은 옳고 반은 그른 ’것으로 자기기만의 체계를 이룬 것이라 평가했다. 오늘날 승리자는 카뮈라고 손들어 준 채로. 비록 카뮈 살아생전엔 서평간 논쟁을 통해 사르트르가 판정승을 거두고 그 후에도 정치적 우세속에서 카뮈를 공격해왔지만 카뮈 사후 사르트르는 자신들이 비웃었던 카뮈의 ‘적십자적 도덕’에 굴복하였다고 지적한다. 이들은 상대를 비난함으로써 서로 자기들의 논리를 정당화하는데 전력을 소모했고 그럼으로써 각자 발전했다. 각자 문학과 철학적 관점을 자신들의 정치적 관점과 동일하게 전개하는 삶을 살았고 그래서 그들은 역사적 사실이자 역사인 채로 기록되었다.


“카뮈와 사르트르 각자는 상호적 토론속에서 자신들을 형성해 나갔으며, 바로 그렇기 때문에 세상이 그들에게서 인정하게 될 완벽한 정치적 지식인들로 탄생했던 것이다.”     -485p


   저자는 두 사람을 갈라놓은 것을 역사의 탓으로 돌리며 오늘날 이분법적인 해석을 통한 왜곡보다는 폭력과 전쟁이 여전한 세계적 상황에서 새로운 정치적 지식인을 기다린다며 펜을 놓았다. 두 사람의 능력과 세계관을 통합시키는 완벽한 사람을 기다린다고.

   
 
우리가 서로 알게 된 것은 우리가 서로 다르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1945.11.15
 
   

   이것은 카뮈가 사르트르를 만난 지 약 일년 후에 이루어진 인터뷰이다. 카뮈는 자신이 사르트르와 아무런 공통점이 없으며 내 저서는 실존주의에 반대하는 입장이라 처음부터 밝힌 것이다. 즉, 사르트르와 카뮈는 서로 달랐기 때문에 서로에 끌린 것이고 그것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결국은 헤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계속 우정을 이어가기 위해서 그 우정이 영원하길 바래서 만남을 지속한 것이 아니고 어쩌면 이미 예감된 이별을 확인하고 싶어 관계를 이어온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 어짜피 이별할 것을 알았지만 그것이 언제인지만이 중요했던 것이고 그 시점의 조율과 기획은 아마도 사르트르 쪽이 더 치밀하고 현실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두 사람을 보면서 그리고 이 두 사람을 조합한 완벽한 사람을 기다린다는 저자를 보면서 그 완벽함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에 어떤 희망을 얻게 된다. 이들은 각자 서로보다 완벽히 부족했기 때문에 서로를 자신보다 완벽하게 만들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가지지 못한 재능을 가진 상대, 그런데 그 재능으로 자신을 이기고 세상에 자신보다 월등히 빛나는 타자를 볼 때 부러움과 함께 패배감, 시기, 열등감을 내재화하게 된다. 그런데 상대의 재능이 내가 진출하고자 하는 분야와 상관이 없다면 모를까 내 희망과 정면에서 상충된다면 어떻게 해야할까. 아마도 그처럼 되려고 그를 한번이라도 이겨보려고 아니 그 근처에라도 가보려고 부단히도 노력하지 않을까. 때론 아무리 해도 안되는 자신에 실망하며 터무니 없는 성과에 절망도 하겠지만 이기고 지고와 상관없이 그동안의 시간들이 결국 자신을 발전시키는 건 아닐까. 만약 내가 완벽하다면 나는 아무런 노력도 희망도 필요치 않을 것이다. 내가 부족해야만 발전할 수 있다는 사실이 오늘 나를 미소짓게 한다. 다만, 과다한 자기비판이 또 다른 복종을 향한 퇴보가 되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시스템의 지배와 억압을 용인하면서 밖으론 자유를 떠벌리는 위선도 주의해야 할 것이다. 주변 인간관계를 잃으면서까지 내 자신의 명성만을 지키는 독선자도 되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나는 사르트르가 카뮈에게, 카뮈가 사르트르에게 자신은 있었지만 상대가 가지지 못한 약점을 비난하던 순간을 떠올린다. 우리 모두는 사르트르의 단점도 카뮈의 약점도 무수히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건 역으로 상대의 장점이 사무치게 부러워서 터져 나온 반응이기도 한 것이다. 그들이 서로를 만나지 않았다면 아마 자신들이 가장 위대하다 생각했을지도 모르는 일. 내 부족함이 상대의 능력에 반하고 상대의 부족함이 내 능력에 끌리는 것이 각자가 완벽한 세상보다는 더 뜨겁게 느껴진다. 그들은 서로 완벽하게 부족함으로써 각자 부족한 완벽자로 서로를 돋보이게 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완벽한 사람은 자신만이 완벽한 것이 아니라 상대를 완벽하게 만들어줄 수 있는 사람인 것이다. 그래서 그들의 투쟁은 지금 우리의 우정보다 영원하고, 그리하여 아름다운 건지 모르겠다. 그런 면에서 나는 누군가의 사르트르가 아니 내 미래 경쟁자의 카뮈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살면서 나의 카뮈가 당신의 사르트르가 이 세상에 같이 존재한다는 건 쉽지 않은 행운이다. 그 행운을 위해 가끔 등장하는 보부아르쯤은 참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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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1-09-16 12: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질투'라는 단어가 문득 떠오릅니다.
내게 가지고 있지 않은 재능(권력, 금전, 능력..)에 대한 질투, 저는 항상 이것에서 벗어나지 못 하거든요.
그리고 그것을 감추려고 필연적으로 '위선'을 하게 되어버려요.

저는 위선이 사회를 살아가는데 필요악이라 생각한답니다. 하지만 균형은 중요한거죠.
위선이 너무 없는 사람, 위선이 너무 많은 사람... 결국 제가 추구하는 것은 위선에 중립적인 사람인가요?

실존철학에 관심이 있어서, 사르트르 평전부터 몇권이나 사놓고는, 아직도 서재 그 자리에.. ㅠㅠ

좋은 페이퍼 잘 읽었습니다. 많은 생각이 듭니다. 한사람님, 즐거운 주말되세요. 중년의 늘어진 주말 말구요~ 헤헤.
(동갑내기가 맨날 중년의 주말을 쓰니까, 저두 함께 쳐진단 말예요! 항의 중~~~~~~~ ㅋㅋㅋㅋ)

보물선 2011-09-20 13:02   좋아요 0 | URL
저도 중년이라는 표현에 항의를 더합니다^^

아이리시스 2011-09-16 16: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니까 이건 제가 괜찮아요? 라고 물었던 그 책이네요.ㅎㅎ 반갑다..^^

카뮈와 사르트르도 미칠 것 같이 좋은데 보부아르가 중심에 있다니 이건 정말 호기심 동하는 어려운 책이에요. <카뮈 전집>을 손이 가장 잘 닿는 곳에 꽂아두고 생각날 때마다 펴보는 것. 그건 제 꿈이거든요. 좋아하는 작가들은 많지만 카뮈는 어쩐지 살아가는 데에도 답을 알려줄 것 같아서요. 하지만 그 반대이기도 해서 좋은가 봐요. 궁금하고.

중년의 주말 쓰지 말래요, 마고님이.ㅋㅋㅋㅋㅋㅋㅋㅋ

참!

2011-09-16 16: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9-16 18: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노이에자이트 2011-09-16 16: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카뮈와 사르트르의 대립은 나치부역자에게 관용을 베풀 것인가의 여부와 한국전쟁 당시 북한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를 둘러싼 논쟁에 초점을 두지요.저 역시 그런 분야를 자세히 파헤친 책을 읽었고요.하지만 한사람 님 처럼 두 남자 사이에 보부아르를 넣고 바라보니 또달리 선명해지는 느낌이네요.

이 책에선 나치부역자 처벌문제로 카뮈와 사르트르가 맞선 이야기엔 비중을 어느 정도 할애하고 있던가요?

cyrus 2011-09-16 19: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 책을 읽기 전에는 카뮈와 사르트르의 소설부터 먼저 읽어봐야 할거 같아요.
생각해보니 사르트르와 보부아르와의 관계에 대한 책은 예전에 꽤 나왔던데
사르트르와 카뮈의 관계에 대해서 상세하게 다루고 있는 책은 이 책이 처음인거 같습니다.

노이에자이트 2011-09-17 15: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치부역자 문제를 둘러싼 논쟁은 다른 책들에서 많이 다루었죠.

알제리 문제에서 카뮈가 좀 어정쩡한 태도를 취했기 때문에 지금도 욕을 많이 먹고 있죠.역시 제국주의 국가가 식민지를 지배한 달콤한 맛은 버리기가 힘든가 봐요.프랑스가 전후 동남아나 아프리카에서 독립운동을 탄압한 잔인함은 상상이상이죠.우리나라 사람들은 프랑스가 왠지 멋있는 나라라고만 생각하는 경향이 심해놔서...

사르코지 집권 이후 프랑스가 식민지 지배했던 시절을 못사는 나라에 근대문물을 전해주었다 운운 하며 합리화하는 내용을 교과서에 실었죠.이런 견강부회도 굉장히 뿌리가 깊더라고요.

한사람 님의 다정한 인사가 기분 좋습니다.

가연 2011-09-18 1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고민하다가 처음에 생각했던 것이 '거슬리는' 보부아르를 축으로 쓰려고 했던 거에요. 그런데 한사람님께서 먼저 이렇게 리뷰를 쓰셔서ㅎㅎ 괜스레 저도 그런 방식으로 했으면 완전 비교될 뻔 했네요, 풋.

2011-09-20 13: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강남좌파]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강남 좌파 - 민주화 이후의 엘리트주의 강남 좌파 1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11년 7월
평점 :
품절


 


강남좌파는 보수다

   솔직히 나는 이런 책에 별 흥미가 없다. 온라인 서점에서의 리뷰는 리뷰를 쓰는 사람들에게나 관심이 있듯 이 책 역시 대선주자에 관심있는 자들이나 집어들 책이라는 생각에서였다. 책을 덮고 나서도 할 말이 별로 없을 것 같았고 읽는 동안에도 종종 지루한 편에 속했다. 하지만 이 책은 늘 알고 있다고 생각해온 기존 한국의 정치판을 사회학적 시선으로 통찰하게 하는 기특한 미덕을 가졌다. 정리가 잘 되었고 문장이 예리하다. 서론을 끌지 않고 바로 본론, 결론으로 진입하는 방식은 객관적, 합리적으로 느껴지게까지 한다. 논점도 분명하고 결론도 설득력 있다. 다소 공격적인 문체를 예상했는데 튀거나 불편한 점도 없었다. 문제 제기의 범위가 넓지 않아 반복되는 단어가 많았고 지난시절 언론 기사를 복사, 편집해 상당분량을 채운 것 정도가 이 책의 품격을 떨어뜨리는 점은 있었지만 바로 그런 면이 일반대중의 눈높이와 흥미를 유발하기엔 무리없어 보였다. 한마디로 지금 시점에 잘 읽혀질 책이라는 것에 동의하고 발빠른 출판기획력에 박수를 보내드린다.

   하지만 ‘나’같은 사람에게 이런 식의 정치비평 책이 읽을 만하다 느껴지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나는 정치에 관심이 없는 쪽은 아니지만 일상에서 의견을 표명하는 쪽은 아니(었)다. 사람들과 대화가 오갈 땐 논쟁이 되는 사안에 대해선 침묵하는 편에 가까웠다. 지지하는 정당과 인물도 있지만 누가 물어봐서 꼭 답해야 할 경우가 아니라면 건너뛰고 보는, 은폐형 유권자에 해당한다. 이 책에 제시된 유형으로 보자면 좌파적 언어를 구사하는 강남우파에 가깝다.(그렇다고 오세훈을 지지한다는 건 아니다 ㅋ) 그렇다면 이 책은 더없이 보수적인 것이 아닐까. 책이라는 것이 그 어떠한 진보적 의제를 모아놓았다고 해도 원래 보수적으로 인식될 수 있는 장르이긴 하나 나는 요즘 거의 모든 비평장르는 결국 보수적인 결론을 지향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이 책의 보편성은 냉철하고 합리적인 비평을 기대하는 사람들이 원하는 특수성을 만족시키기는 어려워 보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자칫 책 덮고 난후 모아진 결론으로 최초 논점과 다른 결과를 양산할 위험이 있다. 예를 들어 이 책에서 가장 예리한 칼날을 들이댄 인물은 조국과 유시민, 문재인이고 평소의 칼날은 오세훈, 그보다 무딘 칼날을 사용한 인물은 손학규, 박근혜로 보이는데 나같이 정치에 둔감한 독자가 이를 느낄 정도라면 이 책은 결국 특수로 시작된 보수로 인식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책에서 말하는 강남좌파가 ‘배부른 진보’를 말한다면 결국 이 책의 제목이 바로 이 책의 정체성을 말해준다 할 것이다. 문체는 좌파적인데 문장은 강남적인 책이다. 한국에서 학벌에 대해 가장 시끄럽게 떠드는 동네가 강남이 아니었던가. 아니 어쩌면 강남은 침묵해왔지만 비강남이 강남을 향해 떠들어대는 소음인지 모르겠지만.

   그러니까 내 생각에 (이 책대로라면)강남좌파는 결국 보수다. 보수가 모두 강남좌파인 것은 아니나 좌파가 강남적이면 그건 보수일 수밖에 없다. 중요한건 좌파가 아니고 강남이기에. 이 책에서 말하는 강남성은 학벌성이고 학벌은 기득권의 세습을 상징한다. 한국사회에서 강남 출현이후 교육은 계급과 지위를 전복하는 기회가 아니라 그 격차를 확대 재생산하는 핵심통로가 되었고 강남은 그 지름길을 의미한다. 강남은 잘못한 게 없지만 강남사람들은 상대적인 죄의식을 가지고 있는데 이를 위로해주는 것이 좌파적 사고방식이다. 마음껏 누리되 약자를 배려하고 소수의 편을 들어주기. 환경을 보호하기 위해 삼십프로 더 비싼 유기농 식품을 구매하고 고급단가의 환경친화적인 인테리어로 자기 집을 꾸미는 사람들. 하와이 특급리조트로 여름휴가를 가서 진보 논객의 책을 펼쳐드는 것. 트윗을 하다보면 의사, 변호사, 교수의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주로 유시민적, 진중권적, 김진숙적 발언을 주도하는 것을 발견하곤 한다. 지난 몇 개월 트윗에서 투표하자는 사람은 거의 보지 못했다. 그건 알라딘도 비슷한데 알라딘 서재에는 주로 진보, 좌파성향의 글들이 자주 노출되고 토론을 활성화하는 경향이 짙다. 예를 들어 트윗에서 김진숙과 희망버스건의 RT율이 높아지면 알라딘은 그와 관련된 책을 이벤트 실시하고 재빠르게 그 책에 관한 페이퍼가 서재 메인 리스트에 등장한다. (프레시안의 뉴스가 네이버에 뜨는 것과 거의 동시적이다) 그러나 알라딘 서재를 운영하지 않거나 이용하지 않는 (구매위주의)일반 이용자들이 보게 되는 홈페이지 메인화면에는 정치와는 상관없는 단순 책에 관한 페이퍼들(신간위주의)이 노출된다.(이건 엄밀히 말하면 '알라디너의 선택'은 아니고 특정 책을 선택한 알라디너를 선정한 '알라딘의 선택'이다) 사고는 좌파적이지만 외모는 상업적, 라이프스타일은 문화적, 인문적인 정체성을 갖고 있다. 알라디너를 책 좀 읽고 글 좀 쓰는 지식인이라고 보았을 때 알라디너 역시 강남좌파의 영역에 속하지 않을까. 이 책대로라면 모든 정치인, 지식인은 강남좌파에 속한다 볼 수 있는데 물론, 내 생각은 좀 다르다.


강남우파는 강남좌파의 경력이다

   내 부모님은 경남출신의 YS 지지자였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오랜 세월 조선일보를 읽어 왔으며 70년대 후반부터 강남 아파트에서 거주했고 90년대 이후 분당으로 이주했지만 회사생활 십여 년을 강남에서 해왔다. 학벌 역시 8학군 출신에 SKY는 아니지만 서울에 있는 대학에서 대학원 공부를 마쳤다. 동창 역시 의사, 변호사 마누라, 중견기업 며느리, 아나운서, 기자, 방송인등 나빼고(?) 거의 잘된 편에 속한다. 외가와 친가에 대기업 임원, 고위 공무원, 기업 CEO의 친척들까지 두었으니 스펙상으로 나는 수구보수, 기득권층, 강남우파의 이력을 이미 오래전에 보유한 셈이다. 우리 집은 70년대 후반 남쪽에서 서울로 이주해 자수성가한 전형적인 중산층으로서 아버지는 사업을 하셨고 나는 그 사업가의 외동딸이었다. 이런 내가 지난 시절 김대중, 노무현이 대통령이 되는 것에 동의할 리는 없었다고 본다. 그리고 굳이 살면서 김영삼, 이회창, 이명박에 투표를 했노라 말할 필요도 없었다고 여긴다. 그래서인지 ‘강남’이라는 제목이 들어간 책들은 그다지 리뷰를 쓰고 싶은 마음이 생기질 않는다.(책의 반이 내 위선을 꼬집는 내용일텐데 뭐 좋을 일 있다고 그러고 싶을까) 미안하지만 강남성을 조금이라도 자신의 경쟁력으로 인식해온 사람들이라면 이런 책은 집어 들지 않는다고 이해하면 된다.(심지어는 문재인도 모른다)

   (편의상 이 책의 좌표대로) 나같은 강남우파들은 만나서 정치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는다. 만약 모임에서 정치관련 문제를 이야기하는 인물이 있다면 요즘말로 은따(왕따는 아니면서 은근히 따돌림당하는)가 될 확률이 많을 것이다. 그들 사이에선 정치를 화제로 하고 싶어하는 그 속성이야 말로 강남성을 저버리는 행위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 씨, 정치에 관심있는지 몰랐네요, 정도가 그들의 답일 것이다. 물론, 그들이 정치에 관심이 없어서 지지자가 없어서 정치 이야기를 외면하는 것은 아니다. 이들은 지난 주민투표에서도 보았듯이 선거에서 좀처럼 기권하지 않는다. 투표율로 대변되는 숫자 25.7은 굳건한 보수층, 홍수가 터지거나 폭설이 와도 생각이 잘 안변하는 골수 우파라고 보면 된다. 대략 삼십으로 여기지만 이번 투표에선 투표장에 가는 것이 자신의 성향을 드러내는 일이었기 때문에 삼십에서 좀 빠지는 수치가 (나같은)은폐된 유권자로 보면 될 듯하다. 서초구가 강남구보다 숫자가 높은 것은 강남구엔 교육 때문에 외부에서 유입한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서초구 부모님들은 강남구 부모님보다 강남을 지킨 횟수가 많으신 편인데 그들은 내 자식의 미래를 생각하며 그들이 빚지게 될 것이 마음아픈 충분한 여력을 가졌다. 하지만 서초구에 속하지 않은 타워팰리스가 자기네 아파트내에 독립적인 투표소를 설치해 압도적인 투표율을 보여준 것은 강남성에 대한 오리지널리티 경쟁을 의미한다. 아주 오래전부터 강남에선 자기네가 진짜 강남이라는 (외부에서 보기엔 민망한) 자존심싸움이 팽배했다. 고등학교 대학 진학률, 교수및 국회의원 분포도, 백화점 규모, 아파트 브랜드, 자가용 댓수등등. 나는 학교다닐 때부터 서울대, 연대, 고대식의 학교 순위처럼 강남전체 아파트 순위를 보고 듣고 자랐다. 그 순위는 곧 건설업체 도급순위와도 비슷했고 우리는 그런 식으로 일류와 이류, 삼류를 구분지어 사람을 계층화하는 일상에 아무런 거리낌이 없이 자라난 세대였다.

   (강남거주자로서)내 부모님 세대는 대부분 지방에서 올라와 자식의 교육에 목숨을 건 분들이었고 이들의 교육열은 (고향을 버리고 올라온)자신들의 성공을 향한 야망과 열정과 비례했기에 사실 다른 구에 비해 유별날 수 밖에 없었다. 지방에서 상경한 외지인에게 영동, 반포, 잠실은 주거장소로서 서울에서 가장 싼 지역이었다. 그땐 강남이 변두리였기 때문에 그들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들은 이미 새마을 정신으로 무장된 부지런함과 반공정신이 몸에 밴 우파인 채로 상경해 전두환, 노태우 정권에 큰 반감을 가지지 않았다. 서울의 성장은 강남의 성장이요, 그것은 자신들의 발전이었다. 이들의 자식들이 대학에 입학할 무렵 목동과 분당이 신도시로 등장하게 되는데 노후준비를 위해 이들은 대거 강남의 주택을 팔아 신도시로 이주하게 된다. 부동산 시세차익은 물론 그들의 자식이 수혜를 입게 되고 대학졸업과 동시에 김영삼 정권에서 비교적 쉽게 취직을 하게 된다. 그들의 자식세대가 결혼을 하고 완전독립을 이루지 못한 채 분당으로 따라가는 현상이 발생하는데 90년대 말에서 2천 년대 초에 분당에서 둥지를 튼 사람들이 나같은 강남학군, 분당엄마 세대이다. 분당에서 새살림을 시작한 초기 정착자들은 지금 사십대 이상이 되었다. 이들은 현재 강남에 살지는 않지만 강남에서 공부하고 자라난 이력 때문에 분당에서 출신성분에 대한 우월감을 가지고 살아간다. 이들이 인맥관계에서 가장 먼저 확인하는 절차는 대학이 아니라 출신 고등학교이다. 이들의 남편이 근무하는 곳은 주로 분당에 둥지를 튼 IT기업이고 실패한 마르크스 주의자를 선배로 둔 비운동권 출신이다.(80년대 말에서 90년대 초 학번) 이들이 지난 선거때 손학규를 찍은 것은 민주당이 좋아서가 아니라 한나라당에 대한 응징일 뿐이었다. 지금 이들의 최대 관심은 과연 문재인이 어디까지 치고 올라갈 것인가로 요약된다. 웃긴 건 모두 박근혜에 대해선 박근혜처럼 침묵하고 있다는 것이다. 박근혜는 아무 말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도 아무말 할 것이 없다는 것이다. 분당이 사실상 강남우파출신이면서 좌파적 언어로 여당을 헤깔리게 하는 것은 바로 자신들이 살아온 나날들과 앞으로 살아가야 할 날들 간의 괴리에서 비롯되는 현상이다. 이들은 박근혜와 문재인 사이에서 언제나 방황한다. 적어도 대선직전까지는.

   내가 이렇게 (내 위주지만) 강남성의 역사와 이동경로를 언급하는 것은 이 책이 강남성을 학벌성으로 결론내리면서 마치 그것이 지금 현재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가장 문제적 정체성으로 귀결하는 것에 대한 불쾌감 때문이다. 이 책은 좌파성이 아니라 강남성에 대한 접근에서 시작한 책이다. 내가 보다 잘 아는 것은 좌파성에 대한 정의가 아니고 강남성에 대한 시각인지라 이 책의 논제에서 보면 부수적인 것일 수 있으나 나로선 그냥 넘어가기가 힘들다. 나는 강남이 부자동네가 되기 전부터 살아왔기 때문에 강남성의 오리지널리티가 서울성이고 그것이 대한민국의 욕망의 정체성이 되는 것에 심한 모멸감을 느낀다. 강남성은 애초부터 지방성, 변두리성에 대한 열등감에서 시작되었다. 강남에 강북의 명문학교가 이주하면서 시작되었다. 그 시기는 박정희 정권이 막을 내릴 때였고 개발독재, 군사문화의 프레임에 익숙한 지방출신 촌사람들이 엘리트 열망을 극적으로 꽃피운 결과였다. 어찌 보면 강남성이야말로 박정희 시대의 가장 큰 유산이다. 작년이 경부고속도로 개통 사십 주년인데 그건 꼭 강남이 무럭무럭 성장해 대한민국의 학벌성을 상징하게 되는 시간들이었고 그건 꼭 내 나이와 같다. 다시 말해 강남이 성장한 만큼이 곧 우리(같은 강남우파의) 나이인 것이다. 그리고 세월은 흘러 우리는 완전한 우파도 아닌 그렇다고 분명한 좌파도 아닌 중간적인 상태의 그야말로 중간세대가 되었다. 그러니까 강남좌파는 강남우파의 성장, 노화, 세대교체의 다른 말인 것이다. 엄밀하게 말해 강남우파의 경력이 없으면 강남좌파가 아니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를 하면 무슨 고해성사하듯 내 이력을 커밍아웃하는 심정이 된다. 강남에 살아왔고 우파였지만 좌파가 된 것이 마치 대한민국의 정치를 방해하는 집단이 된 느낌이 든다는 것이다.


강남에 살지 않으면 강남좌파가 아니다

   저자는 강남좌파를 1)‘강남’의 성격, 2)주체의 위상, 3)좌파의 실천에 따라 각각 세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며 그 지형도를 제시했다. 먼저 강남의 성격에 따라 ‘경제적’ 강남좌파, ‘문화적’ 강남좌파, ‘연고적’ 강남좌파로 나누었다. 단순히 강남에 부동산을 보유하고 실제 거주하지 않더라도 돈이 많거나 라이프스타일이 강남적이거나 최상급의 학벌로 인해 인맥의 혜택을 누리는 경우를 모두 강남좌파의 영역에 위치시켰다. 주체의 위상에 따라 지도자, 정치인, 고위공직자등의 ‘공적’ 강남좌파와 언론인, 대학교수 등의 ‘중간적’ 강남좌파, 일반시민으로서의 ‘사적’ 강남좌파를 나누는 (직업군으로서)사회계층적 구분에 비하면 상당히 모호한 잣대라 할 수 있다. 좌파의 실천적 관점에서 이타적, 합리적, 기회주의적 강남좌파로 나누는 태도구분과 비교해서도 세밀하지 않다. 다른 건 모르겠는데(도식적, 논문적, 작위적이긴 하지만) 9가지로 세분화된 지형도에서 1)‘강남’의 성격은 동의할 수가 없다.

   이것은 보편화된 강남성에 대한 상징범위와 단순 해석 차이의 문제일 수도 있지만 무엇보다 지리적으로 장소성이 분명한 ‘강남’을 타이틀화 한다는 점에서 경제와 문화를 강남과 별개로 보아도 강남성에 포함시킨다는 광범위성이 나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 논리적으로도 맞지 않는다 생각한다. 왜냐하면 내가 아는 강남사람들은 아무리 적은 평수의 아파트에 살아도, 아무리 월세를 살아도 자신이 강남에 산다는 것을 가장 극명하게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아무리 주상복합 펜트 하우스에 살아도 아무리 집이 몇 채이어도 강남에 살지 않는 사람은 자신이 강남인이 아니라 생각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행정구역상 강남을 주소로 두지 않아도 ‘라이프 스타일이 강남사람과 같다면’ 강남좌파에 속한다고 하는 저자의 잣대는 섬마을에 살아도 도시적 외모와 세련된 매너를 갖추었다면 도시인이라 칭하는 논리와 같다. 저자는 강남사람을 단순히 경제적 부와 문화 및 취미생활을 마음껏 향유하는 자본주의 수혜자로 규정지었는데 내가 생각하기에 강남은 스타일로 규정지어질 외양적 문제가 아니라 자존심을 배경으로한 심리적 문제라 생각한다. 강남사람은 나머지를 버리고 강남을 선택한 이유가 있는 사람들이다. 아니 나머지를 택하지 않고 강남을 못 버리는 이유가 있는 사람들이다. 이는 강남사람들이 경제적으로 윤택하고 문화생활을 더 많이 즐기기 때문에 강남적이라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이다. 강남사람들은 전화번호가 지역을 말하는 시절에 ‘5’자로 시작하는 국번을 자랑스럽게 여기거나 서울 ‘55’로 시작하는 자동차 번호판에 자부심을 느끼곤 했다. 개인 사무실을 오픈할 때도 강남에 사무실을 낸 사업자는 명함에 ‘강남구’라고 적는 것에 우월감을 느낀다. 그들은 빌딩 임대료를 못 낼지언정 대부분 리스로라도 외제 승용차를 끌고 다니고 바세론 콘스탄틴의 시계를 차고 거래처를 방문하며 접대할 때 꼭 강남의 일식집을 고집한다. 다른 곳이 아닌 강남에 사무실이 있는 오너라는 인식은 갑과 을 모두에게 중요하다. 나는 이십대 때 영화와 CF, 삼십대에 인테리어와 디자인, 건축쪽에 종사했다. 모두 강남에 사무실이 집중되는 업종이었고 라이프 스타일이 철저하게 강남적이었지만 사는 곳이 강남이 아니면 절대로 강남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한국에서 고향이 어디 출신인지 중요한 것과 마찬가지로 현재 사는 주거지가 서울 어디인지는 같은 비중으로 중요하다. 장소의 구속성이 심리적 보상감을 제공하기 때문에 강남성을 말하는데 강남이라는 장소는 배제되어선 안 될 요인인 것이다. 이렇듯 강남성은 강남이라는 지역을 벗어나 본질을 설명하기 적절치 않은 특질을 가졌는데 저자는 처음부터 지나치게 강남을 일반화하는데 거리낌이 없다. 이는 강남에 사는 사람에게도 불쾌하고 강남에 살지 않는 사람에게도 못마땅한 구분이다. 강남의 일반화는 현상의 일반화, 결론의 보편화를 위해 필요한 과정으로 보여 심층적이지 않았다고 본다. 강남좌파를 강남성의 본질과 별개로 생활패턴에 따른 정치트렌드적 용어로만 제시하기엔 깊이가 없어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바로 그 강남성의 본질적 연구없이 이미 결론을 도출해 놓고서 하위영역을 세분화하는 것은 전형적인 탁상공론식, 연구성과식 비평은 아니었을까.


지식인은 지식을 남용하는 사람이다

   그렇기에 이 책은 강남(지역)이나 좌파(정치)에 대한 논의가 아니고 미래 엘리트(교육) 방향성 논의를 위한 인물비평인 것이다. 이 책은 새롭게 대두된 강남좌파라는 프레임을 통해 오늘날의 정치현상을 진단한 책이라기보다는 대선을 앞둔 시점에 이슈가 되고 있는 인물분석을 통한 한국사회의 강준만식 미래적 패러다임을 강남좌파라는 타이틀롤로 묶었을 뿐이다. 궁극에 강남성으로 치환되는 엘리트 생성구조에 대한 질문을 함의한다. 대통령 후보는 정치인이요, 정치인은 엘리트요 엘리트는 강남성을 지닐 수밖에 없는 한국사회 구조적 특수성과 대안으로서 세계적 보편성을 잘 버무려 편집한 책인 것이다. 이는 기존 학벌사회를 뒤집을 의지나 용기가 없다면 굳이 좌파 프레임을 제시하지 말라는 뜻도 된다. 자식에게 일류대 가야한다고 하면서 조직에서 비정규직 철폐하라는 말 닥치라는 뜻이다. 하지만 저자가 한국사회의 학벌을 타파하자는 목적으로 이 책을 출간하였을까, 하는 부분에선 고개를 갸우뚱거리게 된다.

   결국 그도 사람 이야기 하고 싶어서 대선주자들의 특성과 장단점을 분석, 비교한 것은 아닐까. 인물중심주의를 탈피하고 목적 중심주의로 가기 바란다는 결론이 마음에 들었을 리가 없는 이유이다. 나는 강준만도 잘 모르고 이 책에 소개된 대선주자 6인도 잘 모르지만 이 책을 읽고 나서는 어떤 사람이 대통령이 되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은 할 수 있었다. 이 책을 받아서 읽어 내는 동안은 ‘사실상’ 세간의 관심사에 대한 독자로서의 ‘선의’에 가까웠다고 할 수 있는데 우리가 겪었듯이 사실과 선의는 시작을 말할 뿐 절대 결과를 보장하진 않는다.

   저자가 말하길 지난 시절 문국현 현상은 ‘새것 신드롬’이었고 좌파 아이콘으로 부상한 조국은 철저한 폴리페서라 진단했다. 하지만 제 2의 김대중이 될 가능성이 있다는 말을 흘리기도 했다. 박근혜는 강남좌파의 거울현상이며 애국심, 품격, 강단, 책임감, 신뢰를 갖춘 언행일치 정치인으로서 (그 누구도 가지기 힘든)지도자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고 칭찬했다. 만약 박근혜가 대통령이 된다면 무엇보다 차후 용인술이 중요하다고 조심스레 충고했다. 좌우 진영을 옮겨 다니다 유력한 대선후보가 된 손학규도 경기고, 서울대, 옥스퍼드 박사라는 학력이 결국 그의 가장 큰 경쟁력이 아니냐 반문했다. 정치인과 지식인의 경계를 수시로 넘나들며 자신의 이득에 따라 자세를 취하는 편의주의 유시민은 노무현 유산계승 및 정신 구현이라는 ‘집착’과 ‘집중’이 그의 장점이자 치명적 단점이라 말하며 대세추종형의 철새정치인이라 비난했다. 유시민을 우리 현대사의 업보로 보고 지속적이고도 자기성찰 없는 행보를 강도높게 지적했다. 솔솔 불어오는 문재인 대망론에 대해선 막연한 책임의식, 불투명한 비전등을 지적하며 그 평가를 유보하는 듯 보였다. 오세훈은 이타적 강남좌파를 가장한 기회주의적 우파로 보고 자신의 브랜드 가치를 위해 정치를 기획하는 인물로 진단했다. 타협이 가능한 의제를 두고도 벼랑끝 전술을 지향하는 투쟁적 호전성을 박근혜와 차별화하기 위한 치밀한 전략으로 보았다. 그러면서 뜬금없이 핵심은 한국사회에서 엘리트의 정치적 행보와 그로 인한 승자독식주의라 보편화했다.

   노무현 정권 상층부의 위선을 말하기 위해 사용했다는 강남좌파는 한국에서 가장 치열한 계급투쟁으로서의 대학입시 전쟁을 상징하며 좌우를 능가하는 초강력 이데올로기로서의 학벌주의를 의미한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저자의 요구처럼 학벌에 유연해지기는 퍽이나 어려워 보인다. 차라리 학벌을 타파하라는 것보다는 진부하지만 학벌 가진 배운 자가 가져야 할 윤리나 대중이 현명해지는 길을 알려주는 것이 더 현실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예전엔 우리나라가 강대국이 되면 이 모든 문제가 사라질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약소국 시민으로서 열등감, 패배감, 피해의식이 많았던 탓이다. 그런데 이제 나라의 위상이 달라졌고 세계속에서 동등하게 경쟁하는 우리나라를 보면서 학벌에 유연해지라고 하는 것은 비현실적으로까지 느껴진다. 그렇다고 계속 학벌 중심 사회에 적응하자고 대놓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 그동안 학벌을 좇아온 우리들의 비애일 것이다. 학벌 이야기 하자고 하면 사회 전체적으로 거의 체념분위기에 가깝고 모순된 구조를 꼬집느니 잘 가르치는 학원을 알아보는 것이 더 현명할지 모른다. 조국 교수도 딸을 외국어 고교에 보내고 일류대를 보내기 위해 고민했다고 하는 판국에 아무것도 되지 못한 우리가 어찌 다른 고민을 할 수 있겠는가. 이 책을 쓴 저자 강준만도 성균관대, 조지아 대학, 위스콘신 대학을 나와 전북대 교수가 되었으니 이런 책도 쓰는 것이고 독자들도 관심을 가지는 것 아닌가.

   한마디로 이 책은 지식인이 저지르는 가장 지식적인 작업으로서의 최상층의 모순의 영역에 속하지 않을까.

   저자는 미국의 촘스키, 영국의 러셀, 프랑스의 사르트르도 상층 출신의 진보적 지식인이라고 언급했다. 이 책을 읽고 나니 퍼뜩 사르트르가 말했던(정확히는 변명했던) 지식인이 떠오른다. 사르트르는 60년대 말 <지식인을 위한 변명>에서 부르주아 출신의 지식인에 대해 그 모순성을 분명하게 피력한 바 있다. 사르트르 시절 프랑스에선 기존체제에 대한 비판자라는 의미로 지식인은 대게 좌파지식인을 뜻했다. 하지만 이들의 모순은 (강준만도 지적했듯이) 중간이상의 생활수준에서 태어나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를 학습해온 실용적 전문가로서 다시 중간이상의 계층에 놓이게 된다는 것에 있었다. 이들은 부르주아적 휴머니스트이지만 지식을 독점하고 계급을 재생산하므로 결과적으로는 휴머니스트의 평등주의를 위배하게 되어있다. 지식인은 필연적으로 사회에 노출된 모순들에 의하여 스스로의 모순을 자각하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식인의 직업적 활동은 사회구조의 모순을 드러내는 작업이 되고 그것은 곧 자신을 부정하는 일이 된다. 처음부터 자신의 정체성을 부정하려고 지식을 운용하는게 아니지만 자기가 가진 지식의 정점에선 그 모순속에 가장 분명하게 자신이 위치해 있음을 증명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분열된 사회속에서 만들어진 지식인은 그 사회의 분열을 내면화한 까닭에 바로 그 분열된 사회의 증인이며 따라서 그는 역사의 산물이다. 그러므로 어떠한 사회도 자체의 불이익을 감수하지 않고는 지식인을 비난할 수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지식인이란 결국 그 사회가 만들어낸 존재이기 때문이다.        

-장 폴 사르트르, <지식인을 위한 변명>


사르트르는 지식인이 피해야 할 위험으로 ‘지나치게 조급히 보편화하려는 태도’를 꼽았다. 결국 보편적 전문가를 자청해 대중을 위해 봉사하는 행위, 근본적인 목적(평화, 인권, 평등등)을 수호하는 행위를 하게 된다는 점에서 지식인은 근본적으로 영원히 좌파가 될 수 없는 운명일지 모른다. 하지만 지식인이라면 자신의 지적영역에서 오랫동안 쌓아 온 명성을 ‘남용’하여(서라도) 기존의 사회와 정치권력을 비판하는 것이 맞다고 보았다. 지식인의 본질은 보편성의 추구가 아니라 특수한 남용이라는 것. 남용의 정도와 수준, 남용의 목적과 결과, 남용의 과정과 오류, 이 모든 범위는 지식인의 몫이고 지식인의 능력에 따른다. 남용을 비난하고 지적하는 것은 독자와 대중의 몫이지만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지식인은 인간 각자의 모순과 사회전체의 모순을 내재할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책에 바라는게 있다면 학문적 모순의 영역속에서도 저자 나름의 남용이 추후 지혜를 발휘하는 긍정의 효과를 낳았으면 하는 것이다.

   앞으로 서울시장 보선과 총선 그리고 대선으로 이어지는 정치의 계절이 다가온다. 정치의 계절과 조우하는 국민은 좌파와 우파, 진보와 보수를 떠나 정치적이 될 수 밖에 없다. 그런데 신기한건 오프건 온라인이건 사람들과 대화를 해보면 처음엔 다들 정치엔 관심이 없다는 식의 중립적 의사를 내비친다는 것. 실제로 가치 중립적이어서가 아니라 자신의 성향을 드러내기 싫거나 아니면 잘 모르기 때문일 경우가 많아서라 생각한다. 정치에 대해 자신의 성향을 드러내놓고 활발하게 의사를 표현하는 쪽이 대개 진보, 좌파쪽이며 그렇기에 정치에 대해 잘 아는 쪽도 진보, 좌파라 보았을 때 바꿔 말하면 중립이라는 말, 무관심하다는 말은 보수라는 뜻에 다름 아닌 것이다.

   안타까운건 2011년 현재 좌파는 트렌드이고 스타일이고 생활패턴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진짜 강남 사람들은 조직에서 왕따 당하기 싫어 좌파인척 하지 말 것이며 비강남 사람들은 괜히 강남을 의식해 시기심, 적대감의 표현으로 좌파적 언어를 구사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좌파든 우파든 배운 사람들이라면 지식인으로서 스스로의 모순을 인정한 채로 자기 안에서 먼저 치열한 내재적 투쟁의 과정을 거친다면 어떨까. 이제 대중은 모두 지식인이고 독자는 모두 똑똑하다. 무엇이든 순응하지 않는 사람들이 그립다. 희망이라는 것이 전복의 가치를 일깨우는 것이라면 나는 지식인으로서 희망을 버리고 싶지 않다. <강남좌파>를 모두 뒤집어 생각해 본 것, 그것이 이번 독서의 유일한 희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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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1-09-01 12: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제 강준만도 한풀 꺾였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이런 책도 내는구나 싶기도 하고.
저도 제목이 좀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강남이 잘 사는 사람이 많은 건 사실이지만
서민으로 사는 사람도 많아요.
소위 나가요 사람들과 점쟁이들이 그렇게 많다는데
그렇다고 그들처럼 강남의 서민들이 살 사는 사람한테 기생하며 사는 것도 아니잖아요.
비강남이 다 착한 사람만 사는 것도 아니고.
전 강남에서만도 35년 넘게 살았지만 아직도 강남 사람의 수준을 못 따라 가고 있어요.
따라 가야한다는 생각도 못해보고.
그냥 어찌 어찌 하다보니 강남권에서 살고 있다는 것뿐.
동네 바뀌는 거나 지켜보고 사는 것뿐. 다른 거 있나요?ㅋ

cyrus 2011-09-01 12: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이 책이 많은 화제를 불러일으켜서 읽어보려고 해요. 강남 좌파는 정말로 많이 들어봤는데
정확히 이들을 분류하고 있는 의미는 잘 모르거든요. 한사람님이 소개하신 사르트르의 책은
지난 달에 헌책방에서 구입하고 난 뒤에는 읽어보지는 못했는데 그 책도 읽어봐야겠어요 ^^

oren 2011-09-01 17: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라딘에서는 좀처럼 접하기 어려운 '신선한' 글이네요.

저 역시 한사람님처럼 '정치에는 관심이 없다기 보다는 흥미가 없다'는 쪽이어서 그런지 몰라도 공감이 느껴지는 부분을 어느 정도 발견할 수 있었던 데다가, 한사람님의 정치적 감각 또한 남다른 것 같아 '고백'이 예사롭게 읽히지 않는 부분도 많은 것 같네요.

제 개인적으로는 '보수'니 '진보'니, '좌파'니 '우파'니 하는 '편가르기'를 통해 곧바로 '네 편과 내 편'으로 편입시키고 마는 '성급한 구분'을 특히 싫어하는 편인데, 그런 구분은 늘상 '정치적인 의도'에 끌려 들어가는 듯한 불쾌감부터 느껴 지고, 정치인들이나 정당이 표방하는 '이데올로기' 자체가 선거에서 표를 얻기 위한(궁극적으로는 권력과 지위를 얻기 위한) 허울좋은 '장식물'에 불과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경험들은 '민주화 운동을 통해 획득한 빛나는 훈장'들은 고작 '국회의원 뱃지'와 맞바꾸기 위한 수단이나 도구일 뿐이라는 사실을 '그들'이 우리에게 너무나 적나라하게 가르쳐준 덕분에 저절로 쉽게 터득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좌파 정권 10년 동안 겪었던 '무능과 위선'에 이르러 정치에 혐오감을 불러 일으킬 만큼 우리를 낙담시킨 덕분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80년대 초반 학번으로서 겪을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환경'때문에라도 잠시나마 '좌파' 이데올로기를 피해 가기는 어려웠던 것 같고('서울의 봄'이 도래했던 1980년 고3 시절조차 대학생 형들과 '동조'한답시고 '교련수업'을 집단으로 거부하고 '교련복'을 입은 채 학교 운동장을 돌며 '전두환 군사독재 타도' 데모를 하기도 했으니까요), 대학 1학년부터 시작된 숱한 교내외 데모는 마침내 군복무 후 복학 첫해인 1986년에 와서 '시민혁명'으로 완성되는 '감격'도 경험하게 되었지만, 학교 졸업후 '오랜 사회생활'을 하게 되면서 정치에 대한 관심 '따위'는 점차 식어 가거나 제 스스로 식혀갈 수 밖에 없더군요. (제 개인적으로는 '87년 대선부터 지난번 대선까지 5회 연속 '대통령 뽑기'에 실패할 정도로 '정치적 감각'이 한심한 수준이었던 것도 한 이유가 되었을지 모르겠습니다. '87년 대선 때는 YS를 지지했다가 노태우가 당선되었고, '92년 대선에서는 DJ를 지지했다가 YS가 당선되었고, 가장 최근인 2007년에는 '문국현'을 적극 지지했다가 MB가 당선되는 걸 봤고, 철저한 실패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지금에 이르러서는 '강남좌파'니 하는 주장과 책들 '따위'에는 도무지 관심이 없고, 강준만이니 조국이니 하는 인물들에도 그다지 관심이 별로 가지 않는데, 가만히 내 주위를 둘러 보면 나 스스로도 '참 많은 모순들'에 둘러싸여 살고 있구나 싶은 생각도 듭니다. 어떤 모임, 가령 '*** 민주 산악회'로 뭉친 친구들은 아직도 '희망버스'에 열심히 올라탈 것을 권유하고 있고, *** 민주열사 00주기 추도식에도 참석할 것을 권유하는 반면, 무슨 친목모임에 가면 '무상급식 투표장에 갔더니 사람들이 그렇게 적게 나올 줄 몰랐다'는 얘기를 너나 없이 이구동성으로 '자랑삼아' 내뱉는 이야기를 듣는 식입니다.

어찌 되었건 간에, '강남'에 살든 어디에 살든, '좌파'든 아니든, 2011년 현재 좌파가 트렌드이든 아니든, 제가 나름대로 생각해 낸 결론은 결국 '강남좌파'라는 구분 또한 각자 제 나름대로 '먹고 살기 위한' 독특한 표현 형식을 지닌 '무리들'을 달리 표현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정치인'이라는 직업에서는 생활수단의 유일한 원천이 '선거에서의 승리'에 달려있기 때문에, 정치인의 '입'은 늘 특별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 요즘입니다.

* * *

노력은 항상 그 필요성에 비례한다

어떤 직업에서도 그 직업을 수행하는 사람들 대부분의 노력은 그 노력을 해야 할 필요성에 항상 비례한다. 이 필요성이 가장 큰 것은 자기 직업에서 받는 보수가 그들이 획득하기를 기대하는 재산 또는 일반수입이나 생활수단의 유일한 원천인 사람들의 경우이다. (중략) 어떤 특정 직업에서의 성공으로 달성할 수 있는 위대한 목표는 물론 특별한 의지(spirit)와 야심(ambition)을 가진 소수 사람들로 하여금 열심히 노력하도록 분발시킬 수도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최대의 노력을 끌어내는 데 반드시 위대한 목표가 있어야 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비천한 직업에서도 경쟁과 대항의식이 남보다 성적이 뛰어나는 것을 야심의 목표로 하여 최대의 노력을 경주하도록 하는 경우가 흔히 있다. 이에 반해, 목적이 위대하긴 하나 노력해야 할 필요성이 별로 절실하지 않은 경우에는 크게 노력을 하지 않는 것이 보통이다.

- 아담 스미스, 『국부론』中에서

교고쿠도 2011-09-02 02: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음, 사실 저도 '강남좌파'라는 단어와 같은 일종의 내부적 분열을 겪은 적이 있습니다. 가난한 이들보다 더 좋은 것을 누려서는 안 된다고, 가장 작은 자들과 연대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실제의 생활은 너무나도 동떨어져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물론 제가 상대적으로 부유한 동네에 거주하거나, 가방끈이 길거나, 가진 것이 특별히 많은 것은 아니지만요...아직도 저는 너무 많은 것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직 제 스스로를 좌파라고 칭하기에는 너무 부족한 점이 많은 것 같습니다. 정말이지 저에게는 처절한 자기반성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교고쿠도 2011-09-02 23:23   좋아요 0 | URL
아직도 몸 상태는 그닥인듯 합니다. ㅜ.ㅜ그래도 아주 약간은 나아진 것 같기도 하고...

시몬느 베이유...가 저의 주보성인(?)이 된 듯 합니다. 시몬느 베이유가 간 길을 따라 걷고자 하는...생각을 합니다. ^^

가연 2011-09-03 1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글 좋네요ㅎㅎ 뭐라고 더 덧붙일 이야기가 없네요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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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렌트 읽기 - 전체주의의 탐험가, 삶의 정치학을 말하다 산책자 에쎄 시리즈 8
엘리자베스 영-브루엘 지음, 서유경 옮김 / 산책자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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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독서의 순간

   이 책의 원제는 『Why Arendt matters』, ‘왜 아렌트는 중요한가’ 이다. 즉, 그녀가 떠난 지 30여 년이 지난 지금의 시기에 아렌트를 다시 읽는 것이 왜 중요한지를 말하는 책이다. 바꿔 말하면 지금 아렌트를 읽어야 하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라는 뜻도 된다. 저자에게 아렌트는 지도교수였고 어찌 보면 아렌트 학파의 마지막 제자로서 스승의 업적을 계승, 완성할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저자는 아렌트 탄생 백주년(2005)을 기념해 이 책을 출간했는데 이 책은 스승인 아렌트를 말하는 책이기도 하지만 아렌트를 말함으로써 제자였던 자신의 의견과 판단을 사회적으로 전달하는 임무도 훌륭히 완수했다. 저자가 아렌트를 가이드하는 여행길은 곧 우리가 오늘을 반추하는 길이었던 것. 그러므로 (아렌트는 내가 잘 아는 바)아렌트를 이렇게 읽어야 한다고 주입하는 책으로서 무엇보다 ‘이렇게’의 논리를 세심하게 펼친 작품이라는 것이다. 저자의 성과는 바로 ‘이렇게’가 아렌트의 사상적 발전인 것으로 자가 안착시켰다는 것이다.

   나로선 아렌트의 책을 한 권도 안 읽고서 이 책 한권으로 아렌트는 물론이고 아렌트의 스승과 또 그녀를 스승으로 둔 현역 학자의 통찰까지 학습할 수 있었으므로 여간 반가운 게 아니었다. 특이했던 건, 사실 다분히 (정치를 말하는 것이므로)정치적인 논조를 예상하고 책을 펼쳤는데 저자가 철학, 정신분석학의 저서를 많이 출간했기 때문인지 이 책은 고스란히 철학과 정신분석학의 밀도높은 문체를 드러낸다는 것이었다. 외국의 어떤 철학자를 말하는 사람이 또 다른 철학자일 경우 독자는 필연적으로 이중철학의 고(苦)에 부딪힐 때가 있다. 몇 부분 이해가 안가는 문장들의 향연이 발견되기도 했는데 지난번 『데리다 평전』때도 겪은 일이지만 이것이 아렌트의 뜻인지 저자의 해석이 가미된 의견인지(아니면 한국의 번역자의 의역인지) 독자로선 주어진 문장만으로는 전혀 판단할 길이 없다는 것이다. 맥락에 묻어갈 수 밖에 없는 순간들이 사유의 기쁨을 선사할 수 있겠으나 공교롭게도 문장 내에서 빈번히 접하게 된 이중, 삼중의 부정형 그리고 수동태의 번역문은 이 원망이 누구를 향해야 할지 모를 일로 남겨져 ‘어렵고 짜증난다’는 식의 평가를 부를 확률이 있다. 하지만 이 책은 그러한 일괄적 평가로만은 부족하다. 이 책은 내용상 어려운 컨텐츠를 담고 있는 것은 아니고 번역상으로 저자, 그리고 옮긴이 만의 독특한 문체가 매우 강렬해 중독성이 있다.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그들 사유를 좇아가지 못하는 특성도 있다.(혹자들은 그런 게임식의 재미 때문에 철학을 좋아하는 것 아닐까) 페이지가 넘어갈수록 이 경향은 두드러져 결국 저자의 특기(?)인 듯 해 보이는 개념의 사유와 표현방식의 인문학적 체계에 항복당하는 순간이 오게 되는데 막상 책을 덮고 나니 그러한 저자의 내재적 에너지에 압도당한 느낌이 싫지 않았달까. 결론적으로 뻐근한 사유의 재미에 흠뻑 빠져들던 시간이었다. 한마디로 정치와 철학이라는 재료가 정신분석학의 레시피로 요리된 듯한 흔치않은 느낌으로 충만한 순간. 저자는 자주 ‘아렌트적 순간’이라는 역사적, 상징적 순간을 언급했는데 내게 이 책은 한 여름 치열하게 기억할만한 ‘독서적 순간’으로 남을 듯하다.


운명의 순간

   저자는 아렌트의 주요 저서 『전체주의의 기원』(1951), 『인간의 조건』(1958), 『정신의 삶』(1978)을 큰 축으로 구분해 놓고 그녀와 자신의 사유를 정리한다. 흡사 아렌트 대리인으로서 정당 대표의 대변인처럼 느껴지던 목소리는 깊고 심층적이면서도 생생하다. 마치 아렌트가 아직 살아있는 사람처럼 느껴지기도 하는데 저자는 아렌트를 75년 이후 계속 생존하도록 생명성을 유지시키는데 공헌을 한 것 같다. 저자는 아렌트 삼부작을 언급하면서 아렌트가 바란 것, 바라지 않은 것, 이룬 것, 이루지 못한 것을 피하지 않고 나열한다. 예를 들어 오늘날의 정치상황을 말할 땐 만약 ‘그녀가 아직 살아있다면 뭐라고 말했을까?’와 같은 자문으로 그녀와 나누는 대화를 연상토록 한다. 그리고 이미 죽은 아렌트의 대답을 당당하게 호출하여 우리 앞에 정렬하는 자신감은 곧 그만큼 아렌트를 많이 아는 증인으로 인식되게 한다. 아렌트를 (제대로)읽으려면 나를(나부터) 읽어라, 그것이 저자의 할 말로 보였다.

   아렌트 삼부작을 지나쳐온 뒤 떠오르는 질문은 ‘개인과 국가와의 관계’였다. (생각 ‘없는’)개인의 악이 국가의 악으로 발전할 수 있듯이 (생각 ‘깊은’)개인의 선 역시 국가의 선으로 확대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것이 희망적으로 느껴지지 않고 암울하게 와 닿았던 건 그렇기에 개인의 행복은 절대 개인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깨우침 때문이었다. 소개된 아렌트의 책을 연작으로 이어보면 결국 ‘인간으로서 인간적인 삶을 인간답게 살아가기’에 대한 평생의 고찰이라고 할 수 있다.

   아렌트는 공영역을 (사적 영역, 사회적 영역과 달리)정치영역으로 보았고 공영역의 역할과 비중이 현대인의 삶속에서 몹시 위축되어 있는 것을 지독히도 관찰했다. 사람들이 정치에 대해 만연적인 피로감을 호소하고 애정을 못느끼는 정치적 상황을 정치하지 않는 일반인과 뫼비우스의 띠처럼 하나인 몸으로 이해했다. 이에 아렌트는 무엇보다 정치적 기능을 회복하는 것이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기 위한 필수조건으로 보았다. 문장으로만은 당연해 보이는 이 결론이 철학으로 정치를 하는 정치철학자, 그렇기 때문에 정치 사상가로 알려진 학자의 주장으로 인식, 수용될 때 정치를 외면해온 나같은 독자에겐 상당히 충격적인 결론이라 할수 있다. 정치적이지 않으면 행복해질 수 없다, 로 들리기 때문이다. (물론 아렌트가 말하는 정치는 우리가 당하는 통치개념의 정치는 아니라 말하는 듯 하지만 나는 같은 개념이라고 본다) 그동안 더 행복해지기 위해 정치적이지 않으려 한 것이 아렌트가 비판했던 하이데거의 모범적이지 못한 위선으로 간주되는 것 같기 때문이다.

   아렌트는 칸트의 고장, 유복한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나 독일 철학의 심장부 하이데거, 후설, 야스퍼스에게서 교육받았다. 그러한 독일철학의 전통을 계승한 저자가 “해체할 것이 없을 때까지 해체하라”던 데리다의 주장 뒤에 남은 것이 무엇인지 정곡을 찌르듯 질문하던 것은 철학이 공허한 결론이 되지 않기 위한 자세로서 충분히 의미심장하다. 지난달 내가 『데리다 평전』을 읽었을 때 철학은 정치적이지 않을 때 인간을 설득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내가 리뷰를 정리하는 오늘의 시점에도 북한은 연평도에 포격을 하였고 일본의 잇따른 독도도발로 양국관계는 다시 냉기가 흐르고 있다. 내년 대선을 앞두고 입으로는 정치에 관심없다는 냉소를 지어보지만 사실 우리 모두는 정치에 관심이 없어서는 안 될 시점이고 또 외면하기도 힘든 상황에 국면해있다. 내 생각에 한반도에 아렌트가 소환된 이 시점은 어느때 보다도 중요한 시기인 듯하다. 우리는 식민지국가였고 전쟁국가였으며 지금은 분단국가이기도 하다. 그것은 아무리 김연아 선수가 금메달을 따고 G20 정상회의를 개최하고 유럽에 K-pop이 유행이라고 해도 변하지 않는 진실이다. 아렌트의 대표작 세권은 모두 유대인-나치-아이히만이라는 뼛속 공통분모를 함의한다. 전체주의로서의 반유대주의, 나치의 대리 수행인으로서의 만행, 악의 본질을 탐구케 한 인간의 본성, 이 세가지 연쇄사건은 결국 민족, 체제, 인간에 대한 탐구결과를 이룩했다. 다시 말해 한 인간이 어떠한 민족으로 태어나 어떠한 체제속에서 살아갔는지에 대한 시대적 회고성을 내재한다. 이 회고록을 그대로 한반도 남쪽에 살고 있는 남한의 독자인 내게로 비추어보면 결과적으로 아주 행복하지 못한 인간생활을 영위하고 있다는 판단을 할 수가 있다. 이것은 단순히 폭우로 물가가 오르고 잘못된 부동산 정책 때문에 전세가 동나고 비싼 등록금을 내고서 아무리 학위를 따도 취직할 곳이 없다는 실질적인 행복지수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한반도는 지리적 특수성과 국제관계의 역학적 구조상 긴장상태를 벗어날 확률이 거의 없는 나라에 속한다. 즉, 정치적으로 평안할 수 없는 운명을 타고났다. 아렌트의 결론은 우리에겐 피할 수 없는 운명으로 들린다. 어짜피 지구상에서 가장 정치적인 긴장을 안고 살아가는 구성원들이기에 우리에게 있어 행복은 곧 정치와 동일하다는 뜻에 다름 아닌 것이다. 가장 정치적인 인간이 가장 행복할 수 있다고 한다면 우리는 지금 상태론 절대 행복해질 수 없다는 말인 것이다. 그렇담 이제라도 행복해지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어떻게 살아야 할까. 이 책을 읽고 머리 맞대어 묘안을 짜내어야 할 질문이 바로 그것이 아닐까.


사유의 순간

   아렌트는 전체주의를 정치를 파괴하는 통치형태로 보았다. 전체주의 속에서 인륜에 반하는 범죄는 인간 공동체에 속할 권리를 공격하는 것으로 여겼다. 아렌트는 『전체주의의 기원』을 통해 1920년대 무솔리니가 처음 만든 신조어 '전체주의totalitarianism' 를 새롭게 규정했는데 인상깊었던 건 9.11 이후의 미국과 미국이 전쟁상대로 삼은 테러주의는 모두 전체주의를 기반으로 한다는 시각이었다. 전체주의가 ‘이데올로기와 테러에 기초한 신종 정치 형태’라는 아렌트의 분석에 따라 결국 미국과 오사마 빈 라덴은 전체주의식 싸움을 이어온 것이다. 역자는 미국이 80년대 소련에 저항하는 아프간 세력, 빈 라덴 네트워크에 조력한 것이 결국 9.11 테러로 되돌아왔다고 말한다. “전체주의를 물리치기 위해 전체주의적 방법”인 테러를 사용한 것에 대한 인과응보라는 것이다. 특히, 빈 라덴의 국가 행정부를 상정하지 않는 테러주의는 반정치적인 초국가 목적으로 한데 뭉친 네트워크이므로 그가 죽었다고 해서 전쟁이 종결되었다거나 테러가 사라진 것은 아니라는 확신은 아렌트의 목소리를 빌린 저자의 유럽식 경고로 느껴졌다.

 『인간의 조건』은 최근 일어난 노르웨이 테러를 떠올리게 했다. 아렌트가 말하는 인간의 조건은 정치행위를 공적으로 수행하는 시민으로서의 기본 조건을 뜻하는 것 같다. 정치를 개인 권력에의 투쟁으로 보지 않고 다수 행복을 향유하기 위한 소통의 과정으로 본 것이 그 핵심이다. 의견을 한데 묶어 약속하고 결합하는 비폭력적 언어로 권력을 유지하는 것이 공적인 행복을 도출한다고 보는 것이다. 여기서 새로운 개념으로 인식된 건 ‘용서’라는 조건이었다. 이것은 어떤 일을 저지른 자의 행위를 용서할 것인가, 그 행위를 저지른 사람을 용서할 것인가의 문제와도 같았다. 이는 필히 ‘용서할 만한 자’와 ‘용서할 수 없는 자’를 구분케 하고 법적인 처벌이 가능한지의 여부와 결부된다. 그리고 후차적으로 행위를 한 사람이 반성하였는가, 후회하고 있는가, 아무런 생각이 없는가를 검증하는 단계로부터 이어질 수 밖에 없다. 용서와 처벌, 반성이 만족할만한 성과를 도출했을 때 저자는 평화와 화해를 지향할 수 있다고 말한다. 아렌트의 논리에 배경이 된 아리스토텔레스의 시민적 우정이나 종교적 관용은 썩 신선한 재료는 아니었지만 용서의 일반화에 기여했다는 점에서 수긍할만 했고 악의 평범성, 인간의 무사유성이 인류의 질서를 파괴할 수 있다는 점에서 대칭적 수사를 이루는 논리라 생각되었다. 무엇보다 용서를 정치의 ‘필수조건’으로 보고 하나의 근본적인 ‘정치적 경험’으로 성찰하는 체계는 인상깊었다. 용서가 화해를 전제로 하며 가해자나 희생자 역할보다는 공동체를 건강하게 하는 패러다임으로 규정한 것이 노르웨이를 연상시켰다. 76명의 무고한 시민을 살해한 테러범을 대하는 노르웨이는 적어도 우리와는 달라 보였다. 주한 노르웨이 대사는 “브레이빅이 이번 테러보다 더 끔찍한 짓을 저지른다 해도 노르웨이는 지금까지 지켜온 가치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 말한 바 있다. 노르웨이가 주장하는 가치는 ‘관용과 사랑’이다. 테러범에 대한 극형이나 경찰의 늑장 대응을 질타하는 대신 극단주의자 한 명으로 무너지지는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방식으로 똘레랑스를 내세웠다. 이는 ‘범죄자의 처형이 그 범죄자나 희생자 모두에게 용서로부터 나오는 방면의 혜택을 볼 수 없게’ 한다는 저자의 논리와도 일치한다. 안타까운건 아직 ‘용서함과 약속함의 힘’이 불행히도 우리사회를 말해주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한국에서 정치는 정치인의 것이지 시민의 것은 아닌 것이다.

  『정신의 삶』은 제목 그대로 가장 철학적, 정신분석학적으로 다가왔다. 저자는 아렌트의 사유함과 의지함에 이어지는 판단함의 개념을 완성하기 위해 열정을 쏟는 것으로 보였다. 구성상 책의 마지막 단락인 이 부분은 아렌트가 하이데거, 야스퍼스와 대화하는 방식과 유사하게 스승과 대화를 진행하는 것으로도 보여 저자에겐 하이라이트라 할수 있었다. 아렌트가 강조하는 '판단'은 반성적 판단을 기초로 한 칸트의 (사적인 영역이 아닌)'공통감각'과 유사하다. 저자는 타인들과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판단이라는 능력은 ‘자신의 상상력을 사용해 타인의 관점에서 사물을 보는 것’이라 해석한다. 판단의 반대가 바로 무사유라는 점에서 칸트가 언급한 “어리석음에는 치료약도 없는 법”이라는 비유는 한 사람의 어리석은 판단이 실은 가장 무서운 흉기가 될 수 있음을 상징하는 유머였다. 아렌트는 아이히만처럼 생각이 없고 판단하지 않는 관료들, 사유하지 않고 계산만 하는 조직원, 이론에만 의존하고 거짓을 만들어 내는 전문가들의 무사유성은 자기 내부의 대화가 부재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대형사고가 터질 때마다 공무원의 안이한 대처가 늘 도마에 오르지만 그런 무사유의 습관은 관행처럼 반복된다. 이러한 무사유적인 공무원은 자신에 대한 폭군이자, 세계 내에서의 폭군이 된다고 말한다. 이는 판단함이 일종의 공적 행복의 형태라면 판단하지 못함이 공적 불행의 지름길이라는 뜻과 같다.  이 사유가 중요한 것은 대통령, 시장같은 지도자가 아닌 평범한 사람도 생각없는 판단을 하면 모두가 불행해질 수 있다는 논리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자기기만을 거부하는 정직한 인간’이 ‘좋은 판단자’라는 몽테뉴의 정의는 자기기만을 일삼는 위선적 인간이 곧 나쁜 정치인이라는 뜻이면서 그 정치인은 곧 한명의 시민일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행복의 순간

   저자에 의하면 『정신의 삶』은 우리 시대 정신적 딜레마와 마주치게 한다는 주장이다. 저자가 현대에 가능한 질문으로 치환한 것은 다음과 같다.


- 다양한 도덕 전통을 가진 사람들이 동의할 정도로 설득력을 지닌 어떤 도덕철학이 존재 하는가?
- 의지를 조화시키는 사랑은 어떻게 정치적으로 이해될 수 있는가?
- 우리가 어떻게 코즈모폴리탄 적 비판가와 관찰자로 이루어진 공영역을 상상할 수 있는가?          -268p


   저자가 해석해준 도덕철학은 예를 들어 내가 연쇄 강간살인범이라고 할 때 나는 연쇄살인을 한 나 자신과 앞으로도 함께 살아갈 수 있을까, 하는 질문과 연결된다. 악행을 예방하는 길은 이 질문에 자신을 제대로 판단하는 일인 것이다. 이 올바른 판단의 과정이 곧 무사유를 차단하는 순간인 것이다. 나는 아렌트의 자기검열에 해당하는 이 질문이 이 책에서 가장 내 자신을 멈칫하게 만들었다. 도덕이란 남들이 말하는 기준이 아니라 나와 같이 살아갈 나를 위해 가장 절실하다는 걸 새삼 깨우쳤기 때문에.


   
 
“나는 내가 그것들을 한다면 더 이상 나 자신과 함께 살 수 없다고 생각하는 특정의 것들을 할 수가 없다.” 도덕은 자신에게 그리고 자신을 위해서 진실했던 것에-잊지말고-충실하는 것이다.       - 270p
 
   


    노르웨이 테러범은 노르웨이로부터 얻을 것은 모두 취하면서 많은 독서를 해온 인물이었다. 특히 경영, 역사등의 인문학적 독서를 즐겨온 그가 다문화주의, 세계시민으로서 공통되기를 거부한 것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아이히만은 상명하복에 충실한 사람이었지만 누구보다 근면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들은 비정치적 사유로 가장 정치적인 인물로 남았다. 나는 이들을 보면서 인간은 원래 정치적 동물이었다는 오래된 명제를 떠올렸다. 서평가 故 최성일은 한나 아렌트를 두고 인간이 정치적 동물이었다는 점을 새삼 일깨운 정치철학자라 말했다. 아렌트 자신도 나치정권의 등장과 그에 조력한 하이데거로 인해 정통철학에서 정치철학에 눈을 뜨게 된 것처럼 인간은 정치를 분리시켜 그 본성을 관찰, 설명할 수는 없을 듯하다. 이제는 망각해버렸다고 생각되는 인간이라는 정치적 동물을 증명하는 시간, 아렌트의 시간은 우리에게 어떤 교훈적 순간을 제공하고 있는가. 이미 정치적 인간인 우리가 새삼 정치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 정치를 위한 길의 모두인 걸까.

    사실 아렌트가 말하는 ‘악의 평범성’과 ‘무사유‘, 그리고 그 대응기제로서 ’용서‘와 ’판단‘은 굉장히 먼 미래로 느껴진다. 아니 너무 오래된 과거로 느껴진다. 사유를 멈추는 것이 악으로 가는 지름길임을 아무리 각성한다고 해도 사유한다고 해결될 문제로는 보이지 않는 구석이 있다. 악을 저지르는 건 평범해 보이고 용서를 행하는 것은 특별해 보이는 단순 이분법의 느낌도 든다. ‘용서함’이 ‘상호방면’하는 행위로서 지속적인 인간연계망을 수립하고 ‘판단력’은 세계시민이 되도록 준비시키는 능력이라는 최후통첩과 같은 메시지는 도처에 약속을 어기고 진실을 은폐하는 정치인이 난무하는 작금의 시대에 무기력한 결론으로 박제될 진부함을 인정하자. 이 책은 전체주의 비극을 조장, 관망하는 사회구조 및 체제의 변혁을 간과하고 모든 것을 행위 주체의 본성으로 돌림으로써 전체주의를 막는 유일한 방법이 주체의 변화인 것으로 오인될 소지도 있다. 그러나 아렌트는 말한다. "조직되지 않고 구조화되지 않은 대중, 절망적이고 증오로 가득 찬 대중은 지도자들에게서 구원을 기대한다."고. 그녀는 전체주의 기원을 대중에서 찾았다. 이명박 반대는 더 강력한 이명박에 대한 열망이라는 분석을 접한 적 있다. 더 완벽해보이는 미래를 제시해달라는 간절한 요청은 어쩌면 집단 무의식, 집단 기만의 무사유에서 비롯되었는지 모를 일이다. 지구촌 시대와 다문화주의의 맥락에서 아렌트가 제시한 조건들은 정치가 자신이 속한 공동체 안에서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방식 이라고 보았을 때 가장 우선적인 가치로 자리하기 충분하지 않을까. 이 책은 인간의 본성에 대한 반성과 회고를 통해 우리 스스로 판단의 상황에 처하면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 사유하게 한다. 앞으로 우린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한 판단을 해야 할 순간과 집단적으로 조우하게 된다. 우리가 무엇을 용서하고 약속할 것이며 그로인해 어떤 판단을 하는 것이 사유하는 한 명의 인간으로서 정치적 행동을 실천하는 일인지 생각한다. 우린 적어도 우리 자신의 행복을 추구할 기회를 놓치지는 말아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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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사르 2011-08-11 2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오옷! 리뷰 쓰셨군요! 한사람님 리뷰 기다리고 있었어요~ 한사람님 리뷰는 일목요연하게 정리가 되어 있어서 좀 어려운 책 읽는데도 많은 도움이 되어요. ^^ 그러니까 리뷰 보고 퍼뜩 질렀다는 이야기 ^^

가연 2011-08-16 2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부족한건지 자꾸 턱턱 막혀서... 번역문제인가?? 한참 고심했더랬죠... 역자분께는 죄송하지만 별 네 개!ㅠ

비로그인 2011-09-06 15: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렌트는 늘 무심한 언어 속에 절대관념을 넣는 사람 같아요. 가장 평범한 언어로 가장 쉽게, 가장 날카로운 뜻을 전달한달까요. 나무에서 물방울이 똑, 하고 떨어져서 화들짝 놀라듯이, 6년 전에 읽었던 진주조개잡이 생각이 났더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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