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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 좌파 - 민주화 이후의 엘리트주의 ㅣ 강남 좌파 1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11년 7월
평점 :
강남좌파는 보수다
솔직히 나는 이런 책에 별 흥미가 없다. 온라인 서점에서의 리뷰는 리뷰를 쓰는 사람들에게나 관심이 있듯 이 책 역시 대선주자에 관심있는 자들이나 집어들 책이라는 생각에서였다. 책을 덮고 나서도 할 말이 별로 없을 것 같았고 읽는 동안에도 종종 지루한 편에 속했다. 하지만 이 책은 늘 알고 있다고 생각해온 기존 한국의 정치판을 사회학적 시선으로 통찰하게 하는 기특한 미덕을 가졌다. 정리가 잘 되었고 문장이 예리하다. 서론을 끌지 않고 바로 본론, 결론으로 진입하는 방식은 객관적, 합리적으로 느껴지게까지 한다. 논점도 분명하고 결론도 설득력 있다. 다소 공격적인 문체를 예상했는데 튀거나 불편한 점도 없었다. 문제 제기의 범위가 넓지 않아 반복되는 단어가 많았고 지난시절 언론 기사를 복사, 편집해 상당분량을 채운 것 정도가 이 책의 품격을 떨어뜨리는 점은 있었지만 바로 그런 면이 일반대중의 눈높이와 흥미를 유발하기엔 무리없어 보였다. 한마디로 지금 시점에 잘 읽혀질 책이라는 것에 동의하고 발빠른 출판기획력에 박수를 보내드린다.
하지만 ‘나’같은 사람에게 이런 식의 정치비평 책이 읽을 만하다 느껴지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나는 정치에 관심이 없는 쪽은 아니지만 일상에서 의견을 표명하는 쪽은 아니(었)다. 사람들과 대화가 오갈 땐 논쟁이 되는 사안에 대해선 침묵하는 편에 가까웠다. 지지하는 정당과 인물도 있지만 누가 물어봐서 꼭 답해야 할 경우가 아니라면 건너뛰고 보는, 은폐형 유권자에 해당한다. 이 책에 제시된 유형으로 보자면 좌파적 언어를 구사하는 강남우파에 가깝다.(그렇다고 오세훈을 지지한다는 건 아니다 ㅋ) 그렇다면 이 책은 더없이 보수적인 것이 아닐까. 책이라는 것이 그 어떠한 진보적 의제를 모아놓았다고 해도 원래 보수적으로 인식될 수 있는 장르이긴 하나 나는 요즘 거의 모든 비평장르는 결국 보수적인 결론을 지향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이 책의 보편성은 냉철하고 합리적인 비평을 기대하는 사람들이 원하는 특수성을 만족시키기는 어려워 보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자칫 책 덮고 난후 모아진 결론으로 최초 논점과 다른 결과를 양산할 위험이 있다. 예를 들어 이 책에서 가장 예리한 칼날을 들이댄 인물은 조국과 유시민, 문재인이고 평소의 칼날은 오세훈, 그보다 무딘 칼날을 사용한 인물은 손학규, 박근혜로 보이는데 나같이 정치에 둔감한 독자가 이를 느낄 정도라면 이 책은 결국 특수로 시작된 보수로 인식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책에서 말하는 강남좌파가 ‘배부른 진보’를 말한다면 결국 이 책의 제목이 바로 이 책의 정체성을 말해준다 할 것이다. 문체는 좌파적인데 문장은 강남적인 책이다. 한국에서 학벌에 대해 가장 시끄럽게 떠드는 동네가 강남이 아니었던가. 아니 어쩌면 강남은 침묵해왔지만 비강남이 강남을 향해 떠들어대는 소음인지 모르겠지만.
그러니까 내 생각에 (이 책대로라면)강남좌파는 결국 보수다. 보수가 모두 강남좌파인 것은 아니나 좌파가 강남적이면 그건 보수일 수밖에 없다. 중요한건 좌파가 아니고 강남이기에. 이 책에서 말하는 강남성은 학벌성이고 학벌은 기득권의 세습을 상징한다. 한국사회에서 강남 출현이후 교육은 계급과 지위를 전복하는 기회가 아니라 그 격차를 확대 재생산하는 핵심통로가 되었고 강남은 그 지름길을 의미한다. 강남은 잘못한 게 없지만 강남사람들은 상대적인 죄의식을 가지고 있는데 이를 위로해주는 것이 좌파적 사고방식이다. 마음껏 누리되 약자를 배려하고 소수의 편을 들어주기. 환경을 보호하기 위해 삼십프로 더 비싼 유기농 식품을 구매하고 고급단가의 환경친화적인 인테리어로 자기 집을 꾸미는 사람들. 하와이 특급리조트로 여름휴가를 가서 진보 논객의 책을 펼쳐드는 것. 트윗을 하다보면 의사, 변호사, 교수의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주로 유시민적, 진중권적, 김진숙적 발언을 주도하는 것을 발견하곤 한다. 지난 몇 개월 트윗에서 투표하자는 사람은 거의 보지 못했다. 그건 알라딘도 비슷한데 알라딘 서재에는 주로 진보, 좌파성향의 글들이 자주 노출되고 토론을 활성화하는 경향이 짙다. 예를 들어 트윗에서 김진숙과 희망버스건의 RT율이 높아지면 알라딘은 그와 관련된 책을 이벤트 실시하고 재빠르게 그 책에 관한 페이퍼가 서재 메인 리스트에 등장한다. (프레시안의 뉴스가 네이버에 뜨는 것과 거의 동시적이다) 그러나 알라딘 서재를 운영하지 않거나 이용하지 않는 (구매위주의)일반 이용자들이 보게 되는 홈페이지 메인화면에는 정치와는 상관없는 단순 책에 관한 페이퍼들(신간위주의)이 노출된다.(이건 엄밀히 말하면 '알라디너의 선택'은 아니고 특정 책을 선택한 알라디너를 선정한 '알라딘의 선택'이다) 사고는 좌파적이지만 외모는 상업적, 라이프스타일은 문화적, 인문적인 정체성을 갖고 있다. 알라디너를 책 좀 읽고 글 좀 쓰는 지식인이라고 보았을 때 알라디너 역시 강남좌파의 영역에 속하지 않을까. 이 책대로라면 모든 정치인, 지식인은 강남좌파에 속한다 볼 수 있는데 물론, 내 생각은 좀 다르다.
강남우파는 강남좌파의 경력이다
내 부모님은 경남출신의 YS 지지자였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오랜 세월 조선일보를 읽어 왔으며 70년대 후반부터 강남 아파트에서 거주했고 90년대 이후 분당으로 이주했지만 회사생활 십여 년을 강남에서 해왔다. 학벌 역시 8학군 출신에 SKY는 아니지만 서울에 있는 대학에서 대학원 공부를 마쳤다. 동창 역시 의사, 변호사 마누라, 중견기업 며느리, 아나운서, 기자, 방송인등 나빼고(?) 거의 잘된 편에 속한다. 외가와 친가에 대기업 임원, 고위 공무원, 기업 CEO의 친척들까지 두었으니 스펙상으로 나는 수구보수, 기득권층, 강남우파의 이력을 이미 오래전에 보유한 셈이다. 우리 집은 70년대 후반 남쪽에서 서울로 이주해 자수성가한 전형적인 중산층으로서 아버지는 사업을 하셨고 나는 그 사업가의 외동딸이었다. 이런 내가 지난 시절 김대중, 노무현이 대통령이 되는 것에 동의할 리는 없었다고 본다. 그리고 굳이 살면서 김영삼, 이회창, 이명박에 투표를 했노라 말할 필요도 없었다고 여긴다. 그래서인지 ‘강남’이라는 제목이 들어간 책들은 그다지 리뷰를 쓰고 싶은 마음이 생기질 않는다.(책의 반이 내 위선을 꼬집는 내용일텐데 뭐 좋을 일 있다고 그러고 싶을까) 미안하지만 강남성을 조금이라도 자신의 경쟁력으로 인식해온 사람들이라면 이런 책은 집어 들지 않는다고 이해하면 된다.(심지어는 문재인도 모른다)
(편의상 이 책의 좌표대로) 나같은 강남우파들은 만나서 정치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는다. 만약 모임에서 정치관련 문제를 이야기하는 인물이 있다면 요즘말로 은따(왕따는 아니면서 은근히 따돌림당하는)가 될 확률이 많을 것이다. 그들 사이에선 정치를 화제로 하고 싶어하는 그 속성이야 말로 강남성을 저버리는 행위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 씨, 정치에 관심있는지 몰랐네요, 정도가 그들의 답일 것이다. 물론, 그들이 정치에 관심이 없어서 지지자가 없어서 정치 이야기를 외면하는 것은 아니다. 이들은 지난 주민투표에서도 보았듯이 선거에서 좀처럼 기권하지 않는다. 투표율로 대변되는 숫자 25.7은 굳건한 보수층, 홍수가 터지거나 폭설이 와도 생각이 잘 안변하는 골수 우파라고 보면 된다. 대략 삼십으로 여기지만 이번 투표에선 투표장에 가는 것이 자신의 성향을 드러내는 일이었기 때문에 삼십에서 좀 빠지는 수치가 (나같은)은폐된 유권자로 보면 될 듯하다. 서초구가 강남구보다 숫자가 높은 것은 강남구엔 교육 때문에 외부에서 유입한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서초구 부모님들은 강남구 부모님보다 강남을 지킨 횟수가 많으신 편인데 그들은 내 자식의 미래를 생각하며 그들이 빚지게 될 것이 마음아픈 충분한 여력을 가졌다. 하지만 서초구에 속하지 않은 타워팰리스가 자기네 아파트내에 독립적인 투표소를 설치해 압도적인 투표율을 보여준 것은 강남성에 대한 오리지널리티 경쟁을 의미한다. 아주 오래전부터 강남에선 자기네가 진짜 강남이라는 (외부에서 보기엔 민망한) 자존심싸움이 팽배했다. 고등학교 대학 진학률, 교수및 국회의원 분포도, 백화점 규모, 아파트 브랜드, 자가용 댓수등등. 나는 학교다닐 때부터 서울대, 연대, 고대식의 학교 순위처럼 강남전체 아파트 순위를 보고 듣고 자랐다. 그 순위는 곧 건설업체 도급순위와도 비슷했고 우리는 그런 식으로 일류와 이류, 삼류를 구분지어 사람을 계층화하는 일상에 아무런 거리낌이 없이 자라난 세대였다.
(강남거주자로서)내 부모님 세대는 대부분 지방에서 올라와 자식의 교육에 목숨을 건 분들이었고 이들의 교육열은 (고향을 버리고 올라온)자신들의 성공을 향한 야망과 열정과 비례했기에 사실 다른 구에 비해 유별날 수 밖에 없었다. 지방에서 상경한 외지인에게 영동, 반포, 잠실은 주거장소로서 서울에서 가장 싼 지역이었다. 그땐 강남이 변두리였기 때문에 그들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들은 이미 새마을 정신으로 무장된 부지런함과 반공정신이 몸에 밴 우파인 채로 상경해 전두환, 노태우 정권에 큰 반감을 가지지 않았다. 서울의 성장은 강남의 성장이요, 그것은 자신들의 발전이었다. 이들의 자식들이 대학에 입학할 무렵 목동과 분당이 신도시로 등장하게 되는데 노후준비를 위해 이들은 대거 강남의 주택을 팔아 신도시로 이주하게 된다. 부동산 시세차익은 물론 그들의 자식이 수혜를 입게 되고 대학졸업과 동시에 김영삼 정권에서 비교적 쉽게 취직을 하게 된다. 그들의 자식세대가 결혼을 하고 완전독립을 이루지 못한 채 분당으로 따라가는 현상이 발생하는데 90년대 말에서 2천 년대 초에 분당에서 둥지를 튼 사람들이 나같은 강남학군, 분당엄마 세대이다. 분당에서 새살림을 시작한 초기 정착자들은 지금 사십대 이상이 되었다. 이들은 현재 강남에 살지는 않지만 강남에서 공부하고 자라난 이력 때문에 분당에서 출신성분에 대한 우월감을 가지고 살아간다. 이들이 인맥관계에서 가장 먼저 확인하는 절차는 대학이 아니라 출신 고등학교이다. 이들의 남편이 근무하는 곳은 주로 분당에 둥지를 튼 IT기업이고 실패한 마르크스 주의자를 선배로 둔 비운동권 출신이다.(80년대 말에서 90년대 초 학번) 이들이 지난 선거때 손학규를 찍은 것은 민주당이 좋아서가 아니라 한나라당에 대한 응징일 뿐이었다. 지금 이들의 최대 관심은 과연 문재인이 어디까지 치고 올라갈 것인가로 요약된다. 웃긴 건 모두 박근혜에 대해선 박근혜처럼 침묵하고 있다는 것이다. 박근혜는 아무 말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도 아무말 할 것이 없다는 것이다. 분당이 사실상 강남우파출신이면서 좌파적 언어로 여당을 헤깔리게 하는 것은 바로 자신들이 살아온 나날들과 앞으로 살아가야 할 날들 간의 괴리에서 비롯되는 현상이다. 이들은 박근혜와 문재인 사이에서 언제나 방황한다. 적어도 대선직전까지는.
내가 이렇게 (내 위주지만) 강남성의 역사와 이동경로를 언급하는 것은 이 책이 강남성을 학벌성으로 결론내리면서 마치 그것이 지금 현재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가장 문제적 정체성으로 귀결하는 것에 대한 불쾌감 때문이다. 이 책은 좌파성이 아니라 강남성에 대한 접근에서 시작한 책이다. 내가 보다 잘 아는 것은 좌파성에 대한 정의가 아니고 강남성에 대한 시각인지라 이 책의 논제에서 보면 부수적인 것일 수 있으나 나로선 그냥 넘어가기가 힘들다. 나는 강남이 부자동네가 되기 전부터 살아왔기 때문에 강남성의 오리지널리티가 서울성이고 그것이 대한민국의 욕망의 정체성이 되는 것에 심한 모멸감을 느낀다. 강남성은 애초부터 지방성, 변두리성에 대한 열등감에서 시작되었다. 강남에 강북의 명문학교가 이주하면서 시작되었다. 그 시기는 박정희 정권이 막을 내릴 때였고 개발독재, 군사문화의 프레임에 익숙한 지방출신 촌사람들이 엘리트 열망을 극적으로 꽃피운 결과였다. 어찌 보면 강남성이야말로 박정희 시대의 가장 큰 유산이다. 작년이 경부고속도로 개통 사십 주년인데 그건 꼭 강남이 무럭무럭 성장해 대한민국의 학벌성을 상징하게 되는 시간들이었고 그건 꼭 내 나이와 같다. 다시 말해 강남이 성장한 만큼이 곧 우리(같은 강남우파의) 나이인 것이다. 그리고 세월은 흘러 우리는 완전한 우파도 아닌 그렇다고 분명한 좌파도 아닌 중간적인 상태의 그야말로 중간세대가 되었다. 그러니까 강남좌파는 강남우파의 성장, 노화, 세대교체의 다른 말인 것이다. 엄밀하게 말해 강남우파의 경력이 없으면 강남좌파가 아니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를 하면 무슨 고해성사하듯 내 이력을 커밍아웃하는 심정이 된다. 강남에 살아왔고 우파였지만 좌파가 된 것이 마치 대한민국의 정치를 방해하는 집단이 된 느낌이 든다는 것이다.
강남에 살지 않으면 강남좌파가 아니다
저자는 강남좌파를 1)‘강남’의 성격, 2)주체의 위상, 3)좌파의 실천에 따라 각각 세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며 그 지형도를 제시했다. 먼저 강남의 성격에 따라 ‘경제적’ 강남좌파, ‘문화적’ 강남좌파, ‘연고적’ 강남좌파로 나누었다. 단순히 강남에 부동산을 보유하고 실제 거주하지 않더라도 돈이 많거나 라이프스타일이 강남적이거나 최상급의 학벌로 인해 인맥의 혜택을 누리는 경우를 모두 강남좌파의 영역에 위치시켰다. 주체의 위상에 따라 지도자, 정치인, 고위공직자등의 ‘공적’ 강남좌파와 언론인, 대학교수 등의 ‘중간적’ 강남좌파, 일반시민으로서의 ‘사적’ 강남좌파를 나누는 (직업군으로서)사회계층적 구분에 비하면 상당히 모호한 잣대라 할 수 있다. 좌파의 실천적 관점에서 이타적, 합리적, 기회주의적 강남좌파로 나누는 태도구분과 비교해서도 세밀하지 않다. 다른 건 모르겠는데(도식적, 논문적, 작위적이긴 하지만) 9가지로 세분화된 지형도에서 1)‘강남’의 성격은 동의할 수가 없다.
이것은 보편화된 강남성에 대한 상징범위와 단순 해석 차이의 문제일 수도 있지만 무엇보다 지리적으로 장소성이 분명한 ‘강남’을 타이틀화 한다는 점에서 경제와 문화를 강남과 별개로 보아도 강남성에 포함시킨다는 광범위성이 나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 논리적으로도 맞지 않는다 생각한다. 왜냐하면 내가 아는 강남사람들은 아무리 적은 평수의 아파트에 살아도, 아무리 월세를 살아도 자신이 강남에 산다는 것을 가장 극명하게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아무리 주상복합 펜트 하우스에 살아도 아무리 집이 몇 채이어도 강남에 살지 않는 사람은 자신이 강남인이 아니라 생각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행정구역상 강남을 주소로 두지 않아도 ‘라이프 스타일이 강남사람과 같다면’ 강남좌파에 속한다고 하는 저자의 잣대는 섬마을에 살아도 도시적 외모와 세련된 매너를 갖추었다면 도시인이라 칭하는 논리와 같다. 저자는 강남사람을 단순히 경제적 부와 문화 및 취미생활을 마음껏 향유하는 자본주의 수혜자로 규정지었는데 내가 생각하기에 강남은 스타일로 규정지어질 외양적 문제가 아니라 자존심을 배경으로한 심리적 문제라 생각한다. 강남사람은 나머지를 버리고 강남을 선택한 이유가 있는 사람들이다. 아니 나머지를 택하지 않고 강남을 못 버리는 이유가 있는 사람들이다. 이는 강남사람들이 경제적으로 윤택하고 문화생활을 더 많이 즐기기 때문에 강남적이라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이다. 강남사람들은 전화번호가 지역을 말하는 시절에 ‘5’자로 시작하는 국번을 자랑스럽게 여기거나 서울 ‘55’로 시작하는 자동차 번호판에 자부심을 느끼곤 했다. 개인 사무실을 오픈할 때도 강남에 사무실을 낸 사업자는 명함에 ‘강남구’라고 적는 것에 우월감을 느낀다. 그들은 빌딩 임대료를 못 낼지언정 대부분 리스로라도 외제 승용차를 끌고 다니고 바세론 콘스탄틴의 시계를 차고 거래처를 방문하며 접대할 때 꼭 강남의 일식집을 고집한다. 다른 곳이 아닌 강남에 사무실이 있는 오너라는 인식은 갑과 을 모두에게 중요하다. 나는 이십대 때 영화와 CF, 삼십대에 인테리어와 디자인, 건축쪽에 종사했다. 모두 강남에 사무실이 집중되는 업종이었고 라이프 스타일이 철저하게 강남적이었지만 사는 곳이 강남이 아니면 절대로 강남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한국에서 고향이 어디 출신인지 중요한 것과 마찬가지로 현재 사는 주거지가 서울 어디인지는 같은 비중으로 중요하다. 장소의 구속성이 심리적 보상감을 제공하기 때문에 강남성을 말하는데 강남이라는 장소는 배제되어선 안 될 요인인 것이다. 이렇듯 강남성은 강남이라는 지역을 벗어나 본질을 설명하기 적절치 않은 특질을 가졌는데 저자는 처음부터 지나치게 강남을 일반화하는데 거리낌이 없다. 이는 강남에 사는 사람에게도 불쾌하고 강남에 살지 않는 사람에게도 못마땅한 구분이다. 강남의 일반화는 현상의 일반화, 결론의 보편화를 위해 필요한 과정으로 보여 심층적이지 않았다고 본다. 강남좌파를 강남성의 본질과 별개로 생활패턴에 따른 정치트렌드적 용어로만 제시하기엔 깊이가 없어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바로 그 강남성의 본질적 연구없이 이미 결론을 도출해 놓고서 하위영역을 세분화하는 것은 전형적인 탁상공론식, 연구성과식 비평은 아니었을까.
지식인은 지식을 남용하는 사람이다
그렇기에 이 책은 강남(지역)이나 좌파(정치)에 대한 논의가 아니고 미래 엘리트(교육) 방향성 논의를 위한 인물비평인 것이다. 이 책은 새롭게 대두된 강남좌파라는 프레임을 통해 오늘날의 정치현상을 진단한 책이라기보다는 대선을 앞둔 시점에 이슈가 되고 있는 인물분석을 통한 한국사회의 강준만식 미래적 패러다임을 강남좌파라는 타이틀롤로 묶었을 뿐이다. 궁극에 강남성으로 치환되는 엘리트 생성구조에 대한 질문을 함의한다. 대통령 후보는 정치인이요, 정치인은 엘리트요 엘리트는 강남성을 지닐 수밖에 없는 한국사회 구조적 특수성과 대안으로서 세계적 보편성을 잘 버무려 편집한 책인 것이다. 이는 기존 학벌사회를 뒤집을 의지나 용기가 없다면 굳이 좌파 프레임을 제시하지 말라는 뜻도 된다. 자식에게 일류대 가야한다고 하면서 조직에서 비정규직 철폐하라는 말 닥치라는 뜻이다. 하지만 저자가 한국사회의 학벌을 타파하자는 목적으로 이 책을 출간하였을까, 하는 부분에선 고개를 갸우뚱거리게 된다.
결국 그도 사람 이야기 하고 싶어서 대선주자들의 특성과 장단점을 분석, 비교한 것은 아닐까. 인물중심주의를 탈피하고 목적 중심주의로 가기 바란다는 결론이 마음에 들었을 리가 없는 이유이다. 나는 강준만도 잘 모르고 이 책에 소개된 대선주자 6인도 잘 모르지만 이 책을 읽고 나서는 어떤 사람이 대통령이 되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은 할 수 있었다. 이 책을 받아서 읽어 내는 동안은 ‘사실상’ 세간의 관심사에 대한 독자로서의 ‘선의’에 가까웠다고 할 수 있는데 우리가 겪었듯이 사실과 선의는 시작을 말할 뿐 절대 결과를 보장하진 않는다.
저자가 말하길 지난 시절 문국현 현상은 ‘새것 신드롬’이었고 좌파 아이콘으로 부상한 조국은 철저한 폴리페서라 진단했다. 하지만 제 2의 김대중이 될 가능성이 있다는 말을 흘리기도 했다. 박근혜는 강남좌파의 거울현상이며 애국심, 품격, 강단, 책임감, 신뢰를 갖춘 언행일치 정치인으로서 (그 누구도 가지기 힘든)지도자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고 칭찬했다. 만약 박근혜가 대통령이 된다면 무엇보다 차후 용인술이 중요하다고 조심스레 충고했다. 좌우 진영을 옮겨 다니다 유력한 대선후보가 된 손학규도 경기고, 서울대, 옥스퍼드 박사라는 학력이 결국 그의 가장 큰 경쟁력이 아니냐 반문했다. 정치인과 지식인의 경계를 수시로 넘나들며 자신의 이득에 따라 자세를 취하는 편의주의 유시민은 노무현 유산계승 및 정신 구현이라는 ‘집착’과 ‘집중’이 그의 장점이자 치명적 단점이라 말하며 대세추종형의 철새정치인이라 비난했다. 유시민을 우리 현대사의 업보로 보고 지속적이고도 자기성찰 없는 행보를 강도높게 지적했다. 솔솔 불어오는 문재인 대망론에 대해선 막연한 책임의식, 불투명한 비전등을 지적하며 그 평가를 유보하는 듯 보였다. 오세훈은 이타적 강남좌파를 가장한 기회주의적 우파로 보고 자신의 브랜드 가치를 위해 정치를 기획하는 인물로 진단했다. 타협이 가능한 의제를 두고도 벼랑끝 전술을 지향하는 투쟁적 호전성을 박근혜와 차별화하기 위한 치밀한 전략으로 보았다. 그러면서 뜬금없이 핵심은 한국사회에서 엘리트의 정치적 행보와 그로 인한 승자독식주의라 보편화했다.
노무현 정권 상층부의 위선을 말하기 위해 사용했다는 강남좌파는 한국에서 가장 치열한 계급투쟁으로서의 대학입시 전쟁을 상징하며 좌우를 능가하는 초강력 이데올로기로서의 학벌주의를 의미한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저자의 요구처럼 학벌에 유연해지기는 퍽이나 어려워 보인다. 차라리 학벌을 타파하라는 것보다는 진부하지만 학벌 가진 배운 자가 가져야 할 윤리나 대중이 현명해지는 길을 알려주는 것이 더 현실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예전엔 우리나라가 강대국이 되면 이 모든 문제가 사라질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약소국 시민으로서 열등감, 패배감, 피해의식이 많았던 탓이다. 그런데 이제 나라의 위상이 달라졌고 세계속에서 동등하게 경쟁하는 우리나라를 보면서 학벌에 유연해지라고 하는 것은 비현실적으로까지 느껴진다. 그렇다고 계속 학벌 중심 사회에 적응하자고 대놓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 그동안 학벌을 좇아온 우리들의 비애일 것이다. 학벌 이야기 하자고 하면 사회 전체적으로 거의 체념분위기에 가깝고 모순된 구조를 꼬집느니 잘 가르치는 학원을 알아보는 것이 더 현명할지 모른다. 조국 교수도 딸을 외국어 고교에 보내고 일류대를 보내기 위해 고민했다고 하는 판국에 아무것도 되지 못한 우리가 어찌 다른 고민을 할 수 있겠는가. 이 책을 쓴 저자 강준만도 성균관대, 조지아 대학, 위스콘신 대학을 나와 전북대 교수가 되었으니 이런 책도 쓰는 것이고 독자들도 관심을 가지는 것 아닌가.
한마디로 이 책은 지식인이 저지르는 가장 지식적인 작업으로서의 최상층의 모순의 영역에 속하지 않을까.
저자는 미국의 촘스키, 영국의 러셀, 프랑스의 사르트르도 상층 출신의 진보적 지식인이라고 언급했다. 이 책을 읽고 나니 퍼뜩 사르트르가 말했던(정확히는 변명했던) 지식인이 떠오른다. 사르트르는 60년대 말 <지식인을 위한 변명>에서 부르주아 출신의 지식인에 대해 그 모순성을 분명하게 피력한 바 있다. 사르트르 시절 프랑스에선 기존체제에 대한 비판자라는 의미로 지식인은 대게 좌파지식인을 뜻했다. 하지만 이들의 모순은 (강준만도 지적했듯이) 중간이상의 생활수준에서 태어나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를 학습해온 실용적 전문가로서 다시 중간이상의 계층에 놓이게 된다는 것에 있었다. 이들은 부르주아적 휴머니스트이지만 지식을 독점하고 계급을 재생산하므로 결과적으로는 휴머니스트의 평등주의를 위배하게 되어있다. 지식인은 필연적으로 사회에 노출된 모순들에 의하여 스스로의 모순을 자각하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식인의 직업적 활동은 사회구조의 모순을 드러내는 작업이 되고 그것은 곧 자신을 부정하는 일이 된다. 처음부터 자신의 정체성을 부정하려고 지식을 운용하는게 아니지만 자기가 가진 지식의 정점에선 그 모순속에 가장 분명하게 자신이 위치해 있음을 증명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분열된 사회속에서 만들어진 지식인은 그 사회의 분열을 내면화한 까닭에 바로 그 분열된 사회의 증인이며 따라서 그는 역사의 산물이다. 그러므로 어떠한 사회도 자체의 불이익을 감수하지 않고는 지식인을 비난할 수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지식인이란 결국 그 사회가 만들어낸 존재이기 때문이다.
-장 폴 사르트르, <지식인을 위한 변명>
사르트르는 지식인이 피해야 할 위험으로 ‘지나치게 조급히 보편화하려는 태도’를 꼽았다. 결국 보편적 전문가를 자청해 대중을 위해 봉사하는 행위, 근본적인 목적(평화, 인권, 평등등)을 수호하는 행위를 하게 된다는 점에서 지식인은 근본적으로 영원히 좌파가 될 수 없는 운명일지 모른다. 하지만 지식인이라면 자신의 지적영역에서 오랫동안 쌓아 온 명성을 ‘남용’하여(서라도) 기존의 사회와 정치권력을 비판하는 것이 맞다고 보았다. 지식인의 본질은 보편성의 추구가 아니라 특수한 남용이라는 것. 남용의 정도와 수준, 남용의 목적과 결과, 남용의 과정과 오류, 이 모든 범위는 지식인의 몫이고 지식인의 능력에 따른다. 남용을 비난하고 지적하는 것은 독자와 대중의 몫이지만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지식인은 인간 각자의 모순과 사회전체의 모순을 내재할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책에 바라는게 있다면 학문적 모순의 영역속에서도 저자 나름의 남용이 추후 지혜를 발휘하는 긍정의 효과를 낳았으면 하는 것이다.
앞으로 서울시장 보선과 총선 그리고 대선으로 이어지는 정치의 계절이 다가온다. 정치의 계절과 조우하는 국민은 좌파와 우파, 진보와 보수를 떠나 정치적이 될 수 밖에 없다. 그런데 신기한건 오프건 온라인이건 사람들과 대화를 해보면 처음엔 다들 정치엔 관심이 없다는 식의 중립적 의사를 내비친다는 것. 실제로 가치 중립적이어서가 아니라 자신의 성향을 드러내기 싫거나 아니면 잘 모르기 때문일 경우가 많아서라 생각한다. 정치에 대해 자신의 성향을 드러내놓고 활발하게 의사를 표현하는 쪽이 대개 진보, 좌파쪽이며 그렇기에 정치에 대해 잘 아는 쪽도 진보, 좌파라 보았을 때 바꿔 말하면 중립이라는 말, 무관심하다는 말은 보수라는 뜻에 다름 아닌 것이다.
안타까운건 2011년 현재 좌파는 트렌드이고 스타일이고 생활패턴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진짜 강남 사람들은 조직에서 왕따 당하기 싫어 좌파인척 하지 말 것이며 비강남 사람들은 괜히 강남을 의식해 시기심, 적대감의 표현으로 좌파적 언어를 구사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좌파든 우파든 배운 사람들이라면 지식인으로서 스스로의 모순을 인정한 채로 자기 안에서 먼저 치열한 내재적 투쟁의 과정을 거친다면 어떨까. 이제 대중은 모두 지식인이고 독자는 모두 똑똑하다. 무엇이든 순응하지 않는 사람들이 그립다. 희망이라는 것이 전복의 가치를 일깨우는 것이라면 나는 지식인으로서 희망을 버리고 싶지 않다. <강남좌파>를 모두 뒤집어 생각해 본 것, 그것이 이번 독서의 유일한 희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