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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리다 평전 - 순수함을 열망한 한 유령의 이야기
제이슨 포웰 지음, 박현정 옮김 / 인간사랑 / 2011년 5월
평점 :
품절



 

1. 집약적 VS 해체적

   데리다가 심오한 철학자의 이름이라기 보다는 언뜻 매력적인 네이밍으로 다가오는 것은 아무래도 그가 주장한 ‘해체‘라는 단어의 탈철학성 탓이 아닐까. 자칫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는 마치 프랑스 미용제국의 창설자 자크 데상쥬(Jacques Déssange)의 이름처럼 패셔너블하거나 시크하기까지 하다. 데리다를 말할 때 ’해체‘와 더불어 언급되는 ’유령‘의 개념도 어쩐지 (우리로선)통속적인 뉘앙스로 다가온다. 그래서인지 그를 (제대로)모르고 단지 이 세 단어(데리다-해체-유령)의 조합만으로 데리다를 떠올린다는 건 니체-신, 하이데거-존재, 칸트-이성, 벤야민-아우라 식의 도식적인 연상작용과 절대 같을 수가 없는 것이다. 물론, 그래서 일반 독자인 나는 이 책이 어느 정도 그러한 무지에서 탈피할 운좋은 계기라고 생각했다. 그리곤 그 절반의 기회는 얻었다는 생각이다. 하지만 나머지 절반은 아직 책속에서 빠져 나오지 못한 듯하다. 그의 ’해체‘는 표면적이지 않았고 데리다로서의 ’유령‘은 더욱 분명하게 느껴졌다. 모든 개념이 반대로 다가오는 이 현상이야말로 데리다라는 철학자가 긍극에 의도한 순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그렇다면 내가 그를 잘못 이해한 것만은 아니라는 위안을 해본다. 하여, 이번엔 이 책의 서평을 쓴다기 보다는 그냥 어려운 개념을 내 나름의 내 식으로 정리한다는 의미가 클 것 같다. 사실 내게 철학자의 책은 그를 통해 내가 얻고 내릴 수 있는 감상과 결론보다는 언제나 그 이해도의 정도에 있었다. 무엇을 느꼈느냐 보다 얼마나 알아 들었느냐가 관건인 문제였다. 하지만 알아 들었다고 그것을 말하는 것과는 또 다른 문제 아닌가. 앎이 느낌이 되고 그것이 말할 수 있음이 되는 건 다른 문제였다. 아직 내 수준에서 그 단계적 논리를 강신주 교수같이 친절하게 해석해주는 선생님 없이는 혼자서 난해함을 극복하기엔 한계가 있다고 느껴진다. 나는 이 책을 꽤 오래 붙들고 있는 경우였는데 마치 마주하는 시간만이 나를 탈출시킬 유일한 대안이라는 생각으로 마지막 순간까지 그를 자의적으로 보내지는 못하였던 것이다. 그건 책 덮고 나서 그리 유쾌한 감정은 아니다. 나는 이 패배감을 극복하기 위해 서평을 쓰고자 하는 사람이 되었으니 말이다. 

   이 책은 우선 집약적, 그리고 해체적이다. 해체를 말하기 위해 많은 걸 모았고 데리다를 평하기 위해 그것들을 해체했다. 데리다가 평생토록 연구한 성과들을 좇아가며 시대와 사람을 연관 키워드로 배치, 재정리하는 식이다. 역자가 말했듯이 ‘사적인 기록을 담은 전기라기 보다는 공개화된 사상을 기술하는 개론서’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특히 후반부엔 데리다가 저술한 책을 위주로 첨예한 논점들을 정리하고 있어 어찌 보면 역자의 전문적인 서평을 모아놓았다는 생각도 든다. 어려웠던 것은 그것이 데리다의 논지를 대변하는 것인지 그를 통한 역자 자신의 목소리를 높이는 것인지 구분이 가지 않을 때가 많았다는 것인데 이는 독자로 하여금 원래의 데리다를 이해해야하는 과정과 데리다를 평가한 역자의 견해를 이해해야 하는 상황(왜냐하면 역자는 언제나 데리다를 동의한 것이 아니므로)이 동시에 병렬적으로 전개됨으로 해서 독서에 부담이 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즉, 제이슨 포웰이라는 저자의 데리다 ‘읽기’와 ‘전하기’를 간과해선 안 된다는 사실이었다. 무엇보다 이 책의 저자는 데리다가 아니면서 데리다를 말하고 데리다 철학을 평가하는 사람이었다. 그것은 데리다를 이 책의 저자처럼 말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는 뜻과 같다. 내가 행간에서 느낀 기류는 그러한 자신의 책무를 잊지 않으려는 듯 객관적이려고 애쓰는 모습이 역력했다는 것이고 그 태도를 기저로 데리다의 순수 지향성을 말하면서 외려 그다지 순수하지 않은 데리다를 증명해 보이려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판단은 독자 몫으로 남겨야 하겠지만 이 책은 이미 평가가 예정되어 있는 경우였다. 한마디로 데리다 판단 위에 덧칠된 그의 판단은 데리다 철학이 아니기 때문에 데리다 초보인 나로선 그 부분이 가장 힘겨웠다. (다른 평을 하기에 나는 수준이 되지 않으므로) 또 하나 1980년 대 이후 데리다의 저서가 더욱 많이 소개됨과 동시에 통시적, 공시적으로 등장한 전시대, 동시대의 철학자 들은 더 입체적인 지식과 주의적인 맥락을 요구하는 관계로 일반 독자 입장에선 전문성의 한계를 그대로 인식한 채 페이지를 넘길 수밖에 없었다. 결과적으로 데리다를 모르는 사람을 위한 책이 아닌 데리다를 잘 아는 사람을 위한 책이었다는 서운함을 느끼며 이 책을 덮었다. 학교다닐 때 참고서적 두서너 권을 같이 들고 다니며 이 책과 비교하듯 읽었어야 할 책이었다. 이 책에도 심층적으로 언급되는 <글쓰기와 차이>, <그라마톨로지>, <우편엽서>같은 책을 한 권도 독파하지 못한 채로 데리다를 말해야 하는 것이 부끄럽다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그런 힘겨움 덕분에 서양철학사에 등장하는 거물급 철학자들을 근접한 위치에서 훑어본 느낌은 우쭐할만큼 만족감을 선사하긴 했다. 아마 현대철학에 관심이 많은 독자들은 이런 수고가 당연히 반가운 실정이겠지만. 

 

2. 유령적 VS 순수적


   
 
데리다 철학은 유령의 존재론이다. 다시 말해 특히 자기 자신, 글 쓰는 이, 국가나 민족, 철학 그 자체를 포함하는 그 모든 것들의 비실체성을 주시하는 유령적 글쓰기이다. - 27P
 
   

   내가 이 책을 덮으면서 데리다를 느낀 것은 그가 자신이 주장하는 이론대로 유령처럼 살고자 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었다. 아니 어쩌면 이미 유령이라고 생각한 데리다는 유령인 자신을 말하고 그것에 존재감과 타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평생을 살았던 것은 아닐까. 데리다는 원래 자키(Jackie)라는 미국식 영화배우의 이름을 거부하고 프랑스적이고 예술적인 자크(Jacques)로 개명한다. 데리다 식으로 말하면 자키는 죽은 형에 대한 대리 보충물로서 상징되는 문자이고 자크는 프랑스의 흔적을 보충하는 문자인 것이다. 데리다에게 프랑스는 유령과 동일시되므로 자크라는 이름은 유령인 자아로서의 이름도 되는 것이다. 나는 무엇보다 이름을 스스로 바꾼 정황이 어떤 은밀한 욕망을 가지고 있었는지 알려주는 단서라 생각했다. 알제리 출신 유대인으로서 그가 겪은 청소년기의 반유대주의적 경험도 그의 사상에 밑바탕이 되었을 터이다. 데리다는 프랑스의 식민지 국가에서 태어나고 자란 환경 및 가족으로부터 자기 실존을 자각하는 사람은 아닌 것으로 보였다. 데리다의 물리적 고향은 촌구석 알제리였지만 심리적 고향은 유령이 지배하는 프랑스였고 미래의 고향은 원래 자신인 자키가 살아야 할 미국은 아니었을까. 데리다는 인생의 장년기부터 미국에서의 강연으로 명성을 얻게 되고 마치 영화배우처럼 자신을 연기하고 인정받는데 성공한다. 이는 이름을 개명할 때부터 계획된 사실처럼 각본화된다. 그것은 비난의 여지속에서도 자신에게 연기를 가르쳐준 하이데거나 푸코, 알튀세르보다 뛰어난 연기를 바탕으로 그들을 제치고 마침내 주인공이 되는 어느 배우의 일생을 떠올리게 한다. 그가 궁극에 원한 것이 기존 무대의 질서와 고정관념에 대응한 자기 연기의 (확인으로서)순수 정점이었다면 그는 자기관리를 아주 철저히 해온 배우라 할 수 있을 터이다. 그의 연기철학은 자기 존재를 해체함으로써 비로소 자기 자신으로 완성되는 삶이었고 그것은 곧 자기 삶의 방식대로 세상과 타자를 완성하는 논리로 발전한다.

    어떻든 순수라는 개념은 타락이나 오염의 상대적인 대치점을 상정하게 되어있다. 단독자로서 순수하다는 것은 무의미하다. 그렇다면 데리다에게 순수하지 않은 것은 무엇일까. 내가 생각하기에 데리다가 서구민족주의적인 사고방식을 해체하고 (그것으로 순수하고고)싶었던 것은 순수해지기 위해서라기 보다는 자신이 애초부터 순수하지 못하다는 자각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싶다. 처음부터 순수혈통의 프랑스인이었다면 더 이상 순수에의 집착은 필요치 않았을지 모를 일이다. 데리다에게 있어 순수하지 못한 태생적 요인과 환경은 사유와 언어에서 순수에 결여되는 현상을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거부하게 되는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데리다의 해체 욕망은 그들과 다른 방식으로 순수를 증명하고 싶었던 자아실현의 욕망이면서 순수열등감을 극복하기 위한 방어기제로서 출현한 개념은 아닐까. 그것은 그가 그토록 해체하고 싶었던 기존질서가 사실은 자신이 간절히 추구하던 욕망의 질서였을 수도 있다는 뜻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그것을 인정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기에(자신을 부정해야 하므로)  데리다는 해체의 운명을 자기 바깥으로 발전시킬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데리다는 독일과 존재를 동일시한 하이데거식의 순수에 자극받아 하이데거식으로 순수할 수 없는 데리다로서 하이데거 이상으로(혹은 하이데거만큼은) 순수하기 위해 자신과 조국, 타자를 공평한 유령의 입장으로 대응시킨 것은 아닐까. 본질적으로 모두 유령이고 그 나머지는 희미한 흔적일뿐인 이 세계야 말로 존재하지 않는 순수의 표상, 부재하는 자신의 근거가 아닐까. 존재하는 것은, 존재한다면 그들은 자신보다 순수할 것이 자명하기에.


3. 차이남 VS 연기됨

   데리다의 일생은 프랑스 철학의 심장부를 관통하는 시공간을 살았다 할 수 있는데 놀라왔던 것은 최상위층만 입학한다는 교사, 교수 양성기관인 고등사범학교가 바로 오늘날 현대철학의 산실로서 기능했다는 것이었다. 데리다를 비롯한 내로라하는 철학자들은 이곳의 학생이거나 선생이었다. 데리다를 중심으로 인물관계도를 그리면 그자체로서 현대철학의 계보가 프리젠테이션 되는 형국이었다. 프랑스가 왜 영국이나 미국 혹은 독일까지도 인정하지 않는 우월감을 갖게 되었는지 이해가 되는 대목이었다. 인상깊었던 인물은 푸코의 지도교사이면서 데리다의 스승이었던 같은 알제리 출신 알튀세르였다. 데리다가 치밀하고 중립적인 성향의 인물로 느껴졌던 건 알튀세르의 영향이 컸다고 생각된다. 같은 처지의 스승이 자기 분열로 가족을 파멸한 범례는 그에게 에피소드를 너머 트라우마가 되기 충분하지 않았을까. 이 책은 데리다의 서술이 아니기 때문에 사적으로 데리다가 그의 지인들과 어떤 감정적 관계를 이어나갔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가 풀어가는 이성적 사유는 다분히 문학적, 감성적으로 이해되었다. 데리다가 문학에 기초한 수사법을 사용해 철학계의 비난을 받았다는 사실만이 그의 감정을 대변한다고 이해되었다.

   
 
유령적 현실은 낱말들이 아니라 흔적에 의해, 의미가 아니라 차이에 의해, 그리고 자발적인 발화된 낱말들이 아니라 글쓰기에 의해 구성된다.  -123p
 
   


   데리다를 확인하다보면 해체와 유령다음으로 ‘흔적’과 ‘차연’이라는 개념이 빈번하게 등장함을 알 수 있다. 나는 이들이 굉장히 시적인 표현이라 생각하는데 눈을 감고 생각하면 이성보다 훨씬 가깝게 파악되는 개념이라는 생각이다. 이 개념들은 왜 이성적이지 않다고 비난받았을까. 로고스는 ‘이성’이라는 뜻 외에도 ‘목소리’라는 뜻도 있다. 서구에서 이성의 사유는 곧 목소리의 실현이었다. 그에 반해 ‘문자’는 로고스 바깥에 위치한 또 다른 이성(異聖)이다. 그리스 중심의 로고스, 즉 서구철학은 목소리를 문자언어에 우선시하며 문자를 부정적으로 인식한다. 이는 곧 알파벳 표음문자를 사용하는 서구 열강이 상형문자를 기본으로 하는 중국 등 아시아보다 우월하다는 서구민족주의의 일환에 불과하다. 데리다는 오랜 세월 서구의 지배적 담론이었던 로고스 중심주의, 구조주의 철학, 제국주의가 주장하는 자신들의 순수성을 정면에서 반박한다.(고들 전한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데리다는 자신을 키워낸 순수는 순수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순수를 지향하는 방법이 자신처럼 틀릴 수도 있다는 걸 주장했다고 본다. 이른바 (오랜동안) 당신들이 순수면 (지금부터)나도 순수다는 식의. 데리다 해체 사상의 핵심에는 바로  ‘문자’에 대한 재인식 및 위치선정, 그리고 지위부여가 가장 하층구조에 버티고 있다. 마치 언어학자처럼 문자와 문자 사이를 유영하며 그 사이 벌어진 사건을 해부한다. 이 책의 부제는 ‘순수함을 열망한 어느 유령의 이야기’이다. 삶이 애초부터 순수한 기원이 있(어 왔)다는 믿음을 향해 그러한 기원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문자라는 흔적에 의해서만 보충된다는 데리다였다. 그에겐 실종된 신, 부재하는 고향, 비현전하는 기원만이 의미있어 보였다. 존재라는 주제에 관한 구조와 체계는 결함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더 순수함을 밝히기 위해) 문자와 문자 사이에 벌어진 사건 즉 ‘흔적’과 ‘차연’의 의미를 주장한다.

   
 
차연이 철학을 위한 공간을 열어젖히는 방식으로 철학에 선행하여 철학을 산출한다. -185p
 
   

   그가 주장하는 ‘차연’은 기호나 개념, 혹은 실체적 존재가 아니라 두 장소 사이의 여백이며 양쪽 모두에 속하는 교집합이자 경계의 지위를 가진다. ‘현전은 비현전하는 흔적들로 이루어져 있고 차연에 의해 지배된다’는 흔적과 차연의 역학관계를 가만히 따져보면 우리가 인식하는 어떤 개념은 문자의 흔적들로 이루어지며 문자와 문자 사이의 시공간인 그곳으로부터 지배를 받는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것은 (공간화와 시간화가 동시에 이루어지는)거의 시적 작법의 발상이 아닌가. 또한 유령의 개념과 유사하지 않은가. 이는 곧 자신의 본질을 분해한 것과 같지 않은가. 차연이 ‘결코 어딘가 제한 될 수가 없고 삶과 죽음 사이의 중간자처럼 그러나 둘 다 아닌 채로 존재도 없고 존재자도 없고 상호간의 반발력으로 이루어진 일종의 현상일뿐’이라는 수사는 A(알제리)와 B(프랑스) 사이에서 삶의 시원을 찾은 자기 삶의 현상학적 분석과 무엇이 다른가.

   내가 이해한 차연은 데리다 수사법으로 완성된 문자언어의 승리였다. 차연différance은 차이différence의 중간철자 e를 a로 바꾸어 데리다가 만든 조어였다. 차이와 연기 양자를 한꺼번에 뜻하는 차연에서 A는 중요하다. 두 단어는 발음상 차이점이 없는데 이는 곧 말하여지는 소리로는 변별력을 가질 수 없음을 의미하며 서구철학이 중시하는 목소리에 의미심장한 질문을 던지는 결과였다. 데리다가 주장한 문자의 흔적에 지나지 않아보이는 A는 피라미드를 닮아 생생한 현전을 방해하는 문자의 무덤으로 상징된다. 즉 무덤같은 철자 하나가 문자사이에 배치되면서 그 흔적은 더 이상 흔적이 아니라 엄정한 실존이 되는 것이다. 데리다는 문자와의 게임을 즐긴 사람이었다. 유령이 될 문자를 찾아 개념을 해체시키고 그곳에서 발생한 에너지를 동력삼아 자기 삶을 보충하는 지적유희의 종결자는 아니었을지.

   이를 내 수준에서 풀이해보면 예를 들어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고 온 다음 날 아침을 생각해보자. 상대는 더 이상 내 곁에 없고 애증의 시간도 끝나야 하지만 우리는 상대를 보지 못하고 그의 ‘원본이 부재’한 상태에서 더 심한 애착을 느끼게 된다. 우리말로 그리움이 사무친다고 할까. 혹시라도 그가 자신을 의미하는 소품이라도 건네었다면 우리는 그것을 품에 안고 잠이든다. 이는 보이지 않는 미운 사람에게서 느끼는 증오도 마찬가지다. 상대라는 원본을 대리하고 보충하는 것은 그의 실재가 아닌 부재로 근거하는 상대의 흔적이다. 우리는 그를 대리하고 보충해주는 흔적을 통해서만 끊임없이 도래가 연기(지연)된 자로서 상대를 만난다. 여기서 상대가 지금 여기 현전하지 않고 연기 된다는 것은 무엇인가. 상대(원본)는 자신을 대리 보충하는 흔적(소품)과 일정한 차이를 지닌 것으로서만 도래한다는 것이다. 저곳에 있는 상대와 이곳에 놓인 소품은 항상 그와 나사이의 물리적 거리 즉 차이이면서 그와 다시 만나게 될 미래의 시간을 상징한다. 연기(différer-시간적)와 차이(différence-공간적) 이 둘의 의미 모두를 지니는 차연(差延-differance)이 데리다가 말하는 대리보충 논리의 핵심인 것이다. 루소는 데리다보다 먼저 자신의 연인인 바랑부인을 예로 들며 역설적이게도 이 차이와 연기만이 연인이 자신에게 도래하는 유일한 방식이라 말한다. <고백록 Les Confessions, 1769> 어찌보면 흔적은 사차원의 메타스페이스를 의미하는 듯하다. 데리다에 의하면 하나의 원본, 즉 기원은 도래를 연기하며 바로 그 연기되는 방식으로 다시 원본을 출현하게 한다고 말한다. 이는 사라지는 방식이 곧 드러나는 방법임을 역설하는 데리다식 수사법이다. 죽어가는 방식이 곧 살아가는 방법임을 암시하는 논리인 것이다.

   
 
사람들은 삶이기도 한 죽음을 꿈꿀 뿐이다. -212p
 
   

 

4. 고립감 VS 해방감

   또 하나 이 책에서 인상깊었던 것 중 하나는 데리다가 ‘여행’을 의미짓는 대목이었다. 데리다는 ‘개인은 항상 여행자’라고 단정했다. 정확히 보자면 출발하거나 도착하지 않은 중간 상태에서의 여정을 살고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이다. 그러므로 데리다가 말하는 여행자는 유령의 행동하는 인격인 것이다. 데리다에게 있어 여행을 말하는 일은 곧 철학을 밝히는 일이었고 그것은 유령인 자기삶의 근원을 찾는 것이었기에.

   데리다는 순수해지기 위해 고향과 공동체의 개념을 부정했다. 고향은 공간이고 관계이다. 공동체는 관계의 확장이다. 타자만이 내가 보지 못하는 나를 보는데 내가 나로서 죽기 위해선 먼저 내가 되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선 타자가 나를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타자가 나와 다른 타자이려면 나와 타협하지 않고 존재해야 하는데 이것은 우리가 타자와 공동체의 삶을 나눌 수 없다는 것을 방증하며 그러므로 고향이라는 공간이 가능할 수가 없다는 논리이다. 데리다에게 있어 고향은 애초부터 존재한 적도 없고 이후에 현전할 것도 아니기 때문에 중요한 건 끝까지 죽음을 향한 삶, 그 삶 죽음의 과정이었다. 데리다는 실제로 연속적인 여행을 경유하며 전 세계를 누비며 강연했고 방랑하는 동안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삶을 지속했다. 마치 여행하는 것만이 자신이 자신임을 증명하는 것처럼. 데리다에게 미국은 해체였고 그것은 꿈이었다. 그 꿈을 실현하기 위해 시간과 공간을 무수히 통과해 자신을 넘고 원천을 떠나는 것이 곧 자신을 해체하는 과정이었던 것이다. 세계 각국의 콘서트 무대에 선 가수처럼 라이브 무대를 선보이면서 자신을 타자들에게 노출하고 소진시키는 것은 분명 자기파멸적 행위였지만 낯선 곳에서 더욱 완전한 고립, 완성된 죽음을 향할 수 있으므로 그것은 유령이 (유령답게)존재화하는 최상의 기회이기도 한 것이다. 어찌보면 자신이 여행하는 동안 날것으로 자각한 삶의 순간을 이론화, 가공화 한 것이 데리다가 말한 환원 불가한 종말, 고립될 수 없는 존재의 죽음인 것이다. 이는 낯선 곳에서 발견하는 (자기 본연의)고향이라 할 수 있는데 저자는 그것을 ‘차연을 향해 열려있다는 느낌의 여행’, ‘경계에서 살기’라 말했다. 내가 느끼기에 데리다는 경계인이라기 보다는 양쪽 경계에서 물러나 오롯한 그 중간계에 위치한 단독자로 보였지만.

   
 


중요한 것은 삶 그 자체도 아니고 죽음 그 자체도, 좋은 삶도 좋은 죽음도 아닌 삶 죽음 또는 ‘경계에서 살기’이다.  - 210p

 
   

   언제나 데리다에게 희망을 선사하는 것은 이것과 저것과의 사이, 그것들 간의 차이였던 듯하다. 그 사이에서 여행하며 논리의 법칙을 이룩하고 텍스트의 완성을 꿈꾸어 왔던 것 같다. 자기 삶을 자기 이론과 같이 산 사람. 자기 이론을 자기 삶으로 승화시킨 사람. 자기 꿈을 자기 이론으로 확립한 사람. 그래서 자기 죽음이 자기 완성이 된 사람. 자기철학과 자신이 일치되는 삶이야 말로 인간이 추구하는 가장 순수한 삶이 아닐까. 이 책의 저자는 ‘해체가 학문의 순진한 가능성의 종말이라고 한 데리다는 순진한 철학자 였는’지 스스로와 우리에게 묻고 있다. 저자는 순수의 절대를 추구했다고 해서 그가 순진한 철학자로서 순수한 인간이었다고는 말하지 않는다. 데리다가 말하는 순수는 순수에의 각성이었다. 이는 마치 정의란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정의롭게 살아가려는 실천 노력일 뿐이라 말하는 논리와 같다. 어떤 실제의 텍스트는 ‘살아있는 죽어감’이며 어떤 실제의 사람은 ‘살아지는 죽음’을 사는 것이다. 데리다의 텍스트를 읽어 내는 것은 삶의 지혜를 구하는 인간적 행위일 수 있겠다.

   이 책에선 80년대 이후 철학외에도 일반문화에서 해체를 시도한 데리다의 노력이 정리되어있다. 후반부에 가장 문학적으로 느껴진 데리다는 자서전을 집필하던 시기의 데리다였다.(1990-1991) 그때 데리다는 공교롭게도 한쪽 눈이 마비되는 병을 앓고 있었는데 ‘눈이 먼다는 것’과 ‘자신을 본다는 것’이 자화상을 그리는 화가의 시점과 동일시되며 루브르 박물관의 전시 작업에서 눈멂을 주제로 한 자화상을 선택하게 된다. 데리다는 눈이 먼다는 것이 자신을 보고 안다는 것이 상실되는 축복의 병이라 설파했다. 눈멂이 축복의 병이며 신에 대한 감사와 환대의 의식이라는 부분에서(물론 저자를 통한 표현이긴 하지만)  나는 데리다를 시인이라 생각했고 이 책에서 발견한 가장 아름답고 문학적인 시의 정수라 받아들였다.

   본문에서 저자가 언급한 그림은 팬틴 라투르(Henri Fantin-Latour, 1836-1904)라는 프랑스 화가의 자화상이었다. 찾아보니 정물을 많이 그리는 화가지만 자화상은 강렬하고도 독창적이었다. 데리다는 말한다. 타자의 도래는 곧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물음이라고. (거의 모든 철학자는 타자를 화두로 삼으며 자신을 깨닫지 않던가) 데리다는 이 그림을 보고 어떻게 자신을 보게 되었을까. 아니 어떻게 타자라는 재앙에 마음을 열게 된 것일까.






 

 

 

 

 

 

 

 

 

 

 

 
 
<Henri Fantin-Latour, 자화상> 

   이 그림을 보면 눈 한쪽은 감은 듯 잘 보이지 않고 다른 쪽은 똑바로 관찰자로서의 타자(그림 그리는 사람, 자신)를 향하고 있다. 이것은 묘하게도 꼭 데리다 자신을 연상시키는 그림이 아닐 수 없다. 데리다는 눈이 먼다는 것은 자신을 보는 일이 중단되어 타자를 향해 나를 여는 일이라 말한다. 나를 향해 눈이 닫히므로 타자에게로 시선이 열려진다는 뜻으로 들린다. 눈은 보기 위한 것이 아니고 나 자신을 눈멀게 하는 눈물을 흘리기 위한 것이라 말한다. 우리가 눈물을 흘릴 때 보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눈물흘리는 걸 보는 타자도 그걸 흘리는 내 자신도 볼 수가 없다. 눈이 먼다는 것이 눈물을 흘린다는 것으로 은유한 철학자가 시인이 아니라 부인할 수 없었다. 자화상이 가능한 것은 결국 내가 어떻게 보이는지에 관한 성찰인데 그것은 자기 자신의 봄을 봄으로써 그림을 그리는 것이 아니고 기억을 향해 흔적지워진 성찰때문인 것이다. 자신을 설명할 수 없는 언어의 불능을 자화상이라는 논리로 구체화한 그가 미학적으로 보이기까지 했다.

   다른 철학자는 타자는 지옥이라 말했고 데리다 역시 타자는 재앙이라 말한다. 내 것이 될 수 없고 내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세계의 재앙앞에서 나를 해체하고 분열시켜 나를 열어젖히는 것은 삶의 자유를 위한 생의 전략은 아니었을까.

   데리다는 프라하 방문시(1981) 마약소지 혐의자로 체포, 감금되었을 당시의 경험을 ‘고치에서 벗어나는 누에벌레’같았다고 말한다. 그때만큼 완전한 고립감을 느낀 적이 없었다고 고백한다. 유년기에 데리다는 누에를 채집하는 예민한 소년이었다. 누에의 변태과정을 관찰한 데리다는 마지막 변태과정에서 ‘나방이 고치에서 벗어날 때 검붉은 빛깔이 터지듯 벌어지는 순간’에 세상의 실재를 느꼈다고 회상한다. 어쩐지 평생 변태과정을 거쳐 스스로 완전한 유령이 되는 데리다를 떠올리게 한다. 나방의 변태가 악의 부재로 환원되는 데리다의 기억은 그 실재에 맞서는 실제적인 노력으로 복원된다. 그는 ‘악이 없는 세계’를 자신이 추구해야 할 순수의 정점으로 보았고 그것은 해체라는 방식을 통해 완성된다. 마치 스스로 고치에서 벗어나 누구보다 고독한 그 순간에 완성된 순수를 자각하듯. 그 해방감은 자유이며 동시에 자기생의 책임이었다. 무의식을 책임회피의 기제로 사용하는 기존 분석학을 순수하지 못하다 생각한 그였기에 책임은 죽어서까지 유효한 의식이었다. 그는 머지 않아 언젠가는 자기 앞에 당도할 죽음에 대해 아주 치밀하고도 침착하게 준비를 해온 것은 아닐까. 스스로 죽음을 경험 할 순 없지만 자기 사후 죽은 데리다를 더욱 실랄하게 겪게 될 나같은 타자를 위해. 그렇담 그는 아직 누구보다 살아있는 유령은 아닐까. 그 사실을 이미 인지하고 의도한 그는 유령이라는 목적지를 향해 삶죽음 공간을 그토록 헤매었던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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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1-07-08 2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 인물의 평전이라면 그 사람의 일대기를 조명하기 마련인데,, 데리다라서 그런가요??
이 사람 평전도 쉽게 읽혀지지 않으셨을거 같아요. 올해 1학기 때 행정학 수업 때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해서 배운 적이 있었는데,, 배우고 있는 교제에 데리다에 대해서 언급하더군요.
재미있는건 교수님도 데리다의 사상이 어려운걸 아시는지(?) 수업시간 때 언급은 안 하시더라구요 ^^;;
평전을 먼저 읽어보고 데리다의 사상을 이해해보고 싶어서 학교 도서관에 이 책을 잠깐 훑어봤는데,,
제가 본 게 주석인지 잘 모르겠는데,, 평전에 주석이 따로 할애되는건 처음 봤어요 ㅎㅎ

 
마당을 나온 암탉 (양장)
황선미 지음, 김환영 그림 / 사계절 / 2000년 12월
평점 :
절판


 

  가끔 동화를 읽는다. 아이가 어렸을 땐 아이를 위해 동화책을 사주었지만 막상 아이가 크고 나니 이젠 내가 동화를 집어 들 때 가 있다. 모두 아이로부터 알게 된 책이지만 동화라 하기엔 그 울림이 예사롭지 않았다. 요즘 동화는 우리 때처럼 틀에 박힌 교훈을 주입하거나 뻔한 결론으로 마무리 하지 않았다. 가끔 잔혹하거나 현실의 우울을 적나라하게 반영한 작품들도 있었다. 세상은 발전했고 작가들은 성장했고 아이들도 수준이 높아진 것이다. 그래서인지『마당을 나온 암탉』과의 첫인상은 그다지 세련되진 않았다. 그냥 우리 어린 시절 시골 이야기겠지 하는, 이름만으로 이미 읽어 본 듯한 작품이었다. 아이의 책꽂이에 눈에 띄는 표지의 책들과 함께 꽂혀 있기로는 이미 몇 년 전 부터였고 나는 오며 가며 그림도 내용도 대충은 알고 있는 척을 했다. 그렇게 낯익은 이웃처럼 눈인사만 한 것이다. 그런데 우연히 도서관에서 ‘성인용’이 비치되어 있는 것을 보고 나는 내심 놀라웠다. 어른용이 어린이용으로 재구성되는 건 보았어도 어린이용이 어른용으로 변신하는 건 처음 보았기 때문이다. 내용상 달라지거나 더 어려워 진 것도 아니었다. 분명 같은 작가의 같은 책이었지만 이상하게도 나는 다른 책인 것처럼 끌렸다. 그 순간 비로소 정독하고 싶은 욕심이 불끈 생긴 건 무엇이었을까. 오래전부터 들추어보지 못한 미안함, 아쉬움, 혹은 부끄러움이었을까. 어쩌면 뒤늦게 어른 된 치기를 들켜버려 자존심이라도 회복하고 싶었는지 모르겠다. 아니면 본능적으로 이 책은 성인이 필수로 이수해야 할 최후의 동화라는 의식을 가지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바로 그와 똑같은 어른용을 구입했고 또 얼마간 책꽂이 한 켠에 보험처럼 모셔두었다. 마찬가지로 나는 소장만으로도 그 책을 이미 읽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리고 이제야 책을 덮었다. 우여곡절 끝에 마당을 나온 암탉이 그럭저럭 내 집으로 들어오기 까지 세월이 길었다. 감회가 새로웠는지 나는 바보처럼 이 책을 쉬이 넘기지 못했다. 어른들의 소설에 비해 짧은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마치 지금 내 곁을 떠나기라도 할 사람의 발목을 잡는 것 마냥 이 책을 손에서 놓지 못했던 것이다. 아니 이 책과 좀 천천히 이별하고 싶어 일부러 늑장을 부렸는지도 모른다. 두어 구절에선 나도 모르게 서러워진 마음에 눈물이 흘러 내렸다. 누구나 살아가는 이유가 한 가지씩 있다는, 돌아가신 어머니 생각이 제일 많이 났다. 앞으로 내 아이를 품에서 떠나보내야 할 어미된 내일도 미리 슬퍼할 수 있었다. 내 어머니, 내 아이, 그리고 지금의 나로 이어지는 生의 아릿한 모습들을 곳곳에서 예고없이 만나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정성을 다해 천천히 문장을 곱씹고 글자 하나하나 꾹꾹 눌러 내 마음에 새겨두고 싶었다. 이 책은 동심은 물론이고 아주 오래된 그리움, 향수의 정서를 자극하는 심성을 지녔기 때문이다. 문장들이 꼭 지금은 떠나온 옛 고향의 구석구석을 뒤돌아보게 하는 마력을 지녔달까. 마치 문장이 혼자서 시골길을 타박타박 걸어가 시냇물을 건너고 잠시 나무 그늘 아래서 숨을 고르듯. 새소리, 물소리 때로는 친구들과 함께 그 흙내 나는 사계절을 온몸으로 배워가듯. 문장은 자신만의 그리움의 시공간을 능숙하게 계획대로 여행하듯 자유롭고 자연스러워 보였다. 우스운 건 내가 전혀 시골에서 살아 본 적이 없는 회색빛 아스팔트의 유년시절을 지내었음에도 나는 이 책의 문장이 마치 내 고향처럼, 내 어머니처럼 포근하고 따스했다는 것이다. 이 책의 ‘잎싹’은 암탉이 아니라 그 시절 누군가의 어머니였고 ‘초록머리’는 청둥오리가 아니라 그 시절 키워낸 누군가의 자식처럼 느껴졌다.

  동물이 등장하는 동화에서 이토록 인간의 정서를 담뿍 느껴본 적은 실로 어린 시절 이후 오랜만 이었다. 개인적으로 개나 고양이를 키워본 적도 없었고 동물과의 교감을 느껴본 적도 없으며 외려 혐오감까지 지니고 있는 나로서는 의외였다. 처음엔 낯설기도 하고 조금은 부끄럽기까지 했다. 동화 속 등장인물들은 제각기 개성이 강하다기 보다는 하나같이 심성이 섬세하다는 느낌이어서 그랬을까. 닭이나 오리, 개나 족제비는 우리가 알고 있는 동물의 외양, 그 익숙한 시각적 이미지와 연결되지는 않았다. 동물로서의 서식 및 집단행위나 생존을 위한 먹이 채집 과정등이 자세하게 묘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책에 등장하는 모든 동물은 저마다 소중한 생명을 지닌 자연 속 아름다운 주인공들일 뿐이었다. 작가가 그들의 시공간에 인간이 사유하는 감성들을 잘 부여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주인공의 이름이 곧 캐릭터의 성격을 말하는 서사이기 때문이 아닐까 싶었다. 작가는 동물에 부여하는 실명으로는 드물게 서정적인 이름, ‘잎싹’이라는, 어찌 보면 암탉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주인공의 네이밍을 하셨다. 그런 ‘잎싹’이 품어낸 청둥오리는 상큼하고 생생한 ‘초록머리’로, ‘잎싹’의 친구이자 은인인 청둥오리는 ‘나그네’로 분하도록 하여 자연스럽게 목가적인 분위기를 연출하셨다. 그 중에서도 알을 얻기 위한 품종으로 길러진 난종용 암탉을 잎사귀의 생태적 운명과 연결시켜 ‘잎싹’이라 호명한 건 이 작품에서 가장 기억하고 싶은, 가장 불러보고 싶은 이름으로 남는데 충분했음이다. 알 낳는 암탉의 이름이 꽃피우는 ‘잎싹’인 것이야 말로 이 책이 이루어낸 거의 모든 성취가 아닐까. 아카시아 나무 잎사귀가 부러워 스스로 ‘잎싹’이 된 암탉은 청둥오리라는 ‘꽃’의 어머니가 되었고 족제비라는 모진 ‘비바람’을 견디고 소망이라는 ‘햇빛’을 간직하였기에 스스로 눈부시게 하얀 눈발 속으로 흩어지며 우리에게 감사와 사랑의 향기를 전해주었다. 정말로 ‘잎싹’을 나지막히 불러보니 아카시아처럼 ‘꽃’이 되어 우리들 가슴에 흩뿌려진 것이다. 잎사귀가 아니면 살 수 없는 나무처럼, 사람들은 사랑없이 계절은 꽃도 없이 아름답기는 힘든 법이 아닐까. 그렇다면 ‘초록머리’는 조건없는 사랑을 베푼 ‘잎싹’이 자신의 뜨거운 가슴만으로 품고 싹틔워낸 초록색 봉우리, 즉 내일의 희망을 상징하는 꽃이 분명했다. 이 작품은 이렇듯 자연의 생태적 운명을 인간미 넘치는 동화로 승화시키며 아이와 부모 모두에게 웅숭깊은 사랑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었다. 그들 모두가 동물이었음에도 나는 아카시아 꽃 향기에 흠뻑 취했던 것이다.

  우리네 인간사와 다를 바 없는 동화 속 이야기는 잔잔한 파도처럼 여러 번 반전을 겪으며 더욱 탄탄해지는 느낌이었다. 이야기가 흥미로와진 것은 잎싹이 더 이상 알을 낳을 수 없게 되자 폐계 처분되어 죽음의 구덩이에 버려진 순간부터였다. 그 순간 갑자기 나타나 목숨을 구해주고 잎싹이 그토록 원하던 마당으로 이끌고 가던 청둥오리는 우리에게 아직 절망할 때는 아니라 말해주는 수호천사인 듯했다. 알을 낳기만 해야 하는 운명적 역할, 기계처럼 정해진 규칙, 날갯짓을 가로막는 갑갑한 철망을 뚫고 잎싹은 마당에 살기를 소원했다. 보통의 암탉처럼 수탉의 보호를 받으며 둥우리에서 알을 품고 오리들과 산책하고 싶어 했다. 나같은 여성으로 치자면 평범한 가정을 이루고 자식과 이웃을 가지고 싶다는 소박한 꿈, 그런데 그 평범함이 간절한 꿈이 되는 애틋한 사연에 다름 아니다. 주어진 역할, 주인의 법칙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꿈을 찾아 박차고 나오던 잎싹은 어쩐지 강요된 교육현장, 억압적인 조직에서 자기 이상을 찾아 처절한 야생의 현장으로 뛰어든 청년의 모습을 연상시키기도 했다. 그래서 평소 잎싹이 외부의 압력에 의해 기계적으로 ‘알’을 생산하는 것에서 발전해 자의적으로 그 ‘알’을 끝까지 품고 길러내는 것이 소망이라는 것은 많은 의미를 담고 있다고 느껴졌다. 이 작품에서 잎싹은 결국 ‘알’을 품고 어렵게 키워내 온갖 위험에도 그 ‘알’을 지켜내는 희생적인 모성의 이상향을 상징하고 있다. 잎싹은 ‘알’에서 깨어난 자신의 생명과도 같은 아기를 자신의 목숨과 맞바꾸며 아기가 홀로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는데 기어이 성공한다. 또 ‘알’을 품고 싶어 했던 잎싹의 마음을 배려한 외톨이 친구, 나그네 청둥오리는 가족의 무사 안전을 지키려는 묵묵한 아버지를 표상한다고 느껴졌다. 나그네는 그들을 지키려다 족제비에 대신 희생됨으로써 숭고한 가족애를 실천한 가슴아픈 주인공이었다. 잎싹과 나그네가 그들의 ‘알’을 지켜내는 것은 감동적인 노스탤지어로 기억될 듯하다.

  이렇듯 모성으로서의 ‘잎싹’과 부성으로서의 ‘나그네’는 서로의 공통분모인 초록머리에게 각자 유언과도 같은 생의 가치를 직접, 간접적으로 전달해준다. 나그네는 자신은 ‘날지 못하는 야생오리이고 잎싹은 보기 드문 암탉으로 서로 다르게 생겨 속속들이 이해할 수는 없지만 사랑할 수는 있다’고 말한다. 똑 같을 순 없지만 다르기 때문에 사랑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은 집단이기주의에 물든 조직 사회, 계층 간에 만연된 배타심,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 획일주의 등을 꼬집는 따스한 경고로 받아들였다. 나그네가 잎싹에게 남긴 마지막 유언의 성격을 가지는 이 말은 꼭 자기 자식에게도 당부하고 싶었던 말은 아니었을까. 마찬가지로 잎싹이 어미로서 자식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은 ‘같은 족속이라고 모두 사랑하는 건 아니며 중요한 건 서로를 이해하는 것이며 그것이 바로 사랑’이라는 타이름이었다. 마당식구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한 초록머리에게 잎싹은 ‘달라도 사랑할 수 있다’는 의미의 다른 버전, ‘같아도 사랑하지 않을 수 있다’는 역설적 세상 이치를 가르쳐준 것이다. 중요한 건 같으냐 다르냐가 아니라 누가 되었건 상대를 진정으로 이해하려는 마음이라는 것. 둘 다 보여지는 겉모습보다 안 보이는 속 알맹이를 들여다보라는 말로 생각되었다. 많은 말을 하지 않고 의미심장하게 두어 마디로만 깊은 속마음을 전해준 잎싹과 나그네는 아이들에겐 보이지 않는 선생님이었다. 작가는 아이들에게 자신과 다르며 많은 사람들과 다르다고 친구를 인정하지 않거나 심지어 무시, 외면할 수 있는 마음을 잘 이해해 주면서도 그 마음을 돌리기 위해 공감어린 설득을 한 것이다. 표면적으로 가족의 의미와 사랑을 되돌아보게 하면서 이웃과 타인에 대한 배려, 그리고 이해심을 물흐르듯 스며들게 하는 작가의 환유는 어른인 내게도 친근하고 다정하게 다가왔다. 이 책은 가족처럼 편안하면서도 친구처럼 익숙한 구석이 있었다.

  그런가하면 그런 나의 사랑이 누군가에게는 폭력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우쳐주기도 했다. 이 책에서 유일하게 악역을 맡은 족제비는 가족의 잠자리를 지키던 나그네를 사정없이 짓밟으며 자기 배를 채우는데 급급한 이기적인 동물로 출연했다. 아기를 지키려는 잎싹의 필사적인 대응에 한쪽 눈을 잃은 후 그는 끈질기게도 초록머리의 신변을 위협하는 존재가 된 것이다. 하지만 잔인할 것만 같던 족제비에게도 누구보다 끔찍한 자기 새끼들이 있었고 새끼를 살리려면 한겨울에도 사냥을 멈출 수는 없었던 것이다. 잎싹이 족제비 새끼를 위협하며 초록머리를 지키려 할 땐 족제비도 어미된 모성으로 고개를 숙일 수 밖에 없었다. 각자의 모성을 발휘하던 그 순간 누가 피해자고 누가 가해자인 것은 의미가 없었다. 족제비나 암탉이나 청둥오리 모두 다 같이 현실의 생태계에선 생존하려 발버둥 치는 공평하게 고달픈 존재들에 불과했던 것이다. 작가는 말한다. 자고나면 누군가는 죽고 누군가는 태어나는 삶의 진리가 그렇다고 슬픈 것만은 아니라고, 아니 슬퍼만 해서는 안 된다고. 그것은 이 작품이 말하는 우리네 인간들이 짊어진 공통된 삶의 무게와 다르지 않았고 나는 그것을 전하는 작가의 진한 연민에 가슴깊이 공감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잎싹은 어떻게 슬픔을 헤쳐 나갔을까. 잎싹은 철망에 갇힌 삶이 싫어 뛰쳐 나왔지만 그토록 바라던 마당에서도 갈대밭의 보금자리에서도 편하게 살 수 가 없었다. 하지만 철망속에서 시간이 되면 알을 낳기만 하는 삶을 반복하는 것은 행복했을까. 生을 대하는 잎싹의 번뇌와 선택, 그리고 그 행보는 팍팍한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한다. 이 작품에서 잎싹이 자신의 꿈을 좇아가는 과정은 여느 드라마처럼 기적적이진 않았다. 간절히 원하면 이루어진다는 피그말리온 조각가처럼 잎싹은 알을 품게 되지만 그 알맹이의 모습은 자신이 원하던 바와는 달랐다. 그래도 소중한 생명을 보호하고 어미된 모성을 발휘해 청둥오리를 키워내는가 싶었는데 이번엔 나그네가 봉변을 당한다. 슬퍼만 하고 있을 수 없었던 잎싹의 눈앞에선 초록머리가 날개를 펴고 하늘을 날게 된 것이다. 이 처럼 세상살이는 영원한 행복과 영원한 슬픔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성취와 좌절이, 이별과 만남이 이어지는 그 반복된 과정일 뿐인 것이다. 내가 이 책에서 새삼스럽게 깨달은 건 이처럼 당연한 우리네 삶의 과정, 일상의 편린들이었다. 꿈을 이루려 자기가 속한 현실(마당)을 뚫고 다른 세상(저수지)에 나왔지만 그 세상도 여전히 현실 속에 위치한 가시밭길인 것은 누구에게나 공평한 것이 아닐까. 중요한 건 마당이냐 저수지이냐가 아니라 포기하지 않고 계속 걸어가는 것이 아닐까. 그것만이 서로에게 위안이 되는 것이 아닐까.

  세상은 잎싹에게 연속적인 기적만을 선사하진 않았다. 나그네 덕에 기적적으로 생명을 부지하고 초록머리의 재롱도 느꼈지만 족제비의 위협은 변함없었고 초록머리도 품안에 끼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잎싹처럼 초록머리도 ‘꿈’이 있었던 것이다. 잎싹이 아기를 지키기 위해 자신보다 강한 자에게도 굴복하지 않은 것처럼 초록머리도 자신을 외면하는 무리로부터의 시련을 견뎌야 했다. 바다를 건너고 하늘을 향해 날아간다는 건 어쩌면 고난과 역경을 헤치고 자신을 뛰어넘어 날아오른다는 의미는 아니었을까. 초록머리는 같은 무리에게로 떠나라고 말하는 잎싹에게 떠나기 싫다고 말하지만 잎싹은 말한다. 네가 하고 싶은 걸 해야 하고, 그것이 무엇인지 네 자신에게 물어보아야 한다고. 초록머리가 엄마를 부르면서 비로소 날개를 펴고 먼 하늘을 날아갈 때 나는 그 모습을 오래 지켜보던 잎싹의 마음과 함께 조용히 울고 있었다. 아주 오래전 엄마의 품을 떠나 세상 속으로 뛰어드는 나를 향해 손 흔들던 엄마의 미소를 떠올리며, 먼 훗날 내 품을 떠나게 될 내 아이와 아이를 배웅하는 내 모습을 떠올리면서.

  하지만 나는 그리 오래 울고 싶진 않았다. 이 작품을 다 알고 있다는 어른들 시각처럼 쓸쓸하게만 받아들이긴 싫었다. 한번은 아이입장이 아닌 순연한 내 입장이 되어 보고도 싶었다. 마당을 나온 후 온갖 시련을 헤쳐 가며 꿋꿋하게 자기 길을 걸어가던 잎싹, 그 길의 끝에서 마지막 꿈이 실현되던 잎싹의 최후는 비장하고도 숭엄했다. 하지만 더 이상 슬퍼해선 안 되었다. 신기하게도 이미 알을 품은 적이 있고 알을 키우고 알에서 깨어난 아이의 성장을 한창 도우고 있는 나였지만 그 순간 아름다운 모성보다는 솔직한 내 본성이 더 절실했다. 그것은 잎싹이 계속하여 멈추지 않은 꿈에 더 반응하는 결과였다.


이건 내 알이야, 내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아기, 나만의 알 !


  나는 잎싹이 외친 ‘내 알’이 이 동화를 읽는 모든 어른의 가슴에 못다 이룬 꿈처럼 알알이 박히는 절박한 그리움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꿈처럼 드는 것이다. 그 ‘알’에서 깨어나 친모를 잃은 청둥오리가 자신만의 이야기를 만들어 가는 인생 행로는 꼭 우리 꿈을 발견하고 그것을 찾아 떠나는 과정처럼 다시 보인다. 그 ‘알’을 품고 병아리의 탄생을 보는 것이 소망이라던 잎싹은 꿈이 실현되었지만 새로운 꿈을 꾸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초록머리를 멀고 먼 북쪽 겨울나라로 떠나보낸 뒤 잎싹은 말한다. 오늘까지 산 것은 오늘까지의 소망이며 이제부터는 날고 싶다는 새로운 소망을 가지겠다고. 초록머리가 떠났다고 모두 끝난 것이 아니라 다시 새로운 자기만의 꿈을 떠올리고 그것을 이루려 끝까지 희망을 잃지 않는 것. 작가가 말하는 내밀한 희망의 기쁨이란 혹 절망앞에서도 다시 꿈을 꿀 수 있는 용기, 죽는 순간까지도 꿈을 잃어버리지 않는 의지를 말하는 것은 아니었을까.

  그래, 인생이란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다음날에도 아기가 아장아장 걸어 나오며 첫걸음을 떼는 벅찬 행복을 안겨줄 수 있는 것이다. 어제 누군가와 쓰라린 이별을 했지만 오늘 더 귀한 인연을 만날 수 있는 것이다. 동화책 한권이 이렇게도 인생에 묵직한 용기를 줄 수 있는 것일까. 그것도 이미 어른이 되어버린 나에게. 이 책을 찬찬히 읽어 내는 동안, 내가 알을 품고 알을 낳은 적이 있었다는 것을 그것을 키워낸 사람이라는 사실도 잊어버렸다는 것을 알게 된다. 다시는 그 꿈같은 ‘알’일랑 더 이상 간직하고자 생각조차 않았던 구멍난 내 가슴에 오랜만에 충만한 격려와 위로를 채워가는 느낌이다. 어른과 아이 모두에게 알차고 따스한 이야기로 깊고도 풍부한 生의 성찰적 시간을 제공했다는 점에서 이 책은 보기드문 성취를 이루어 내었다. 사랑한다는 것은 서로 다름을 인정하는 것이고, 소망한다는 것은 내가 살아가야할 이유인 것이다. 꿈을 찾는 다는 건 내가 원하는 이야기를 만드는 것이다. 이 소중한 책에서 사랑과 소망과 꿈의 목소리가 시냇물처럼 흘러 내린다. 이 책을 덮고 나는 다시 꿈을 꾸고 싶어지는 나를 발견한다. 나만이 간직한 이야기, 나만이 만들 수 있는 이야기, 나만이 행복할 그 알토란 같은 이야기를 자아내는 것이야말로 나의 소망이 아니었나. 그것이 내가 살아가야 할 이유가 아니었나. 오늘부터 나는 내 이야기라는 꿈의 ‘알’을 다시 품어 소망의 여행을 찾아 떠나볼 터이다. 나도 이제부터는 훨훨 날아보고 싶은 까닭이다. 자유롭게 날기 위해 내 이야기를 만들고 싶기 때문이다.

  내게 있어 동화는 동심(童心)을 위한 책이 아니었다. 이미 오래전 동심을 잃어버린 내게 꼭 필요한, 꿈을 다시 꾸고 그것을 찾아가는, 굳게 닫혀 진 마음을 움직이는 동심(動心), 그것에 한껏 동화(同化)되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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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사르 2011-07-05 19: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친구가 최근에 소개해준 책이네요. 성인용 버전이 나왔다길래 도대체 무슨 말인가 했더니..아예 책을 새로 성인용으로 만든 거로군요. 와..좀 신기하기도 하고, 좀 대단하다 싶기도 하고 그래요.
주인공 이름이 잎싹이네요. 네이밍이 여러 의미가 있는 듯하네요. 뭔가가 삐걱거리고 잘 안되어 의기소침한 그런 날에, 읽으면 참 좋을듯해요.

cyrus 2011-07-07 1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책보다는 요즘에 개봉된 애니메이션으로 보고 싶더라구요, 물론 책이 애니매이션의 원작이니까
책이 훨씬 낫겠죠..? ^^
 
환영
김이설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6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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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어제의 비현실


  소설은 짧았고 희망은 보이지 않았다.

  한 번의 호흡으로 넘어가던 손놀림이 멈추었을 때 나는 잠시 엎드린 채 고개를 파묻고 더 이상 일상을 시작하고 싶지 않았다. 우선 나 자신을 달래고 난 뒤라야 일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 왜 이런 소설이 나와야 하는지 누군가에게 따져 묻고 싶었다. 왜 이런 여자가 소설 속에서 열심히 살아가야 하는지 길을 막고 물어보고 싶었다. 당신도 이렇게 살 수 있는지. 아니 당신이라면 이렇게 까지 하면서 살아갈 것인지. 작가도 여자이고 주인공도 여자, 나도 여자이니 꼭 여자들에게 물어야 했다.

  그러나 바보처럼 작가에게 묻고 싶진 않았다. 아니 바보처럼 보일까 봐가 정확하겠다. 서로 묻다가 답이 없으면 그냥 투덜대는 우리끼리 떠들고 소리치고 세상은 그런 거지, 인생은 그런 거야 그렇게 알은 체를 하곤 술잔이라도 부딪치고 싶었다. 한 잔이 두 잔이 되고 두 잔이 한 병이 되고 그 병이 몇 개로 보이면 어느 쪽은 고꾸라질 것이고 그럼 다른 쪽은 그를 부축해 별 수 없다는 듯 내일의 열차에 그를 실어 보내면 될 것이었다. 한번쯤 고꾸라진 그를 위해 끊어준 티켓일랑 다음번의 누가 될지 모를 아량으로 충분히 이해하고 넘어 갈 일이었다. 세상은 우리끼리 아무리 슬퍼해도 그런 건 상관없이 돌아가는 꿋꿋한 경향이 있지 않은가. 그런 무심한 세상과 잘 어우러지기 위해선 같이 무정해지는 것이 가장 현명한 방법일지 몰랐다. 소설은 소설이고 나는 현실이고 당신은 세상이니까. 그래서 폭음과 폭정을 부르는 소설. 울화통이 터진 다는 말은 이럴 때 하는 말이겠지. 오랜만에 가슴속 쌓인 울혈들이 한데 모여 심장을 쾅쾅 두드리는 소설을 만났다. 시원하게 욕하고 소리쳐 울고 나면 그래도 용케 살아는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소설. 살아간다는 것은 매일 아침 그래도 다시 시작한다는 질긴 마음 그 뿐이라는 걸 깨우쳐 주는 소설. 그래서 헛헛하고 쉽사리 잊을 수 없을 것 같은 이야기.

  솔직히 말해 이 책의 문장들을 하나도 기억하기 싫었다. 그건 예를 들면 침대 매트리스에 들러붙어 있는 몇 백만 마리의 진드기를 현미경으로 확인하는 절차만 같아 그냥 포기하고 이불을 덮는 심정이랄까. 이 소설의 주인공 이름은 두어 번 ‘윤영’이라는 입에 붙지 않는 호칭으로 낯설게 등장한다. 화자가 ‘나’이기 때문에 내가 내 이름 부를 일은 살면서 많지 않기 때문에. 그래서 시종일관 익명의 여자인 것처럼 등장하다가 그녀의 어머니쯤 되는 사람이 ‘윤영’이라 불렀을 때 나는 그녀의 단어가 순간 ‘운명’으로 보였다. ‘윤영’은 과연 ‘운명’인가, 싶어서.

  엄마 살아계실 때 사주를 보면 나는 꼭 징기츠칸의 운명을 타고난 사람이라는 말을 들었다. 난관을 극복하면 또 시련이 기다리고 어떻게든 그것을 뚫고 나면 또 다른 문제에 봉착하는 이른바 시련극복의 인생. 그렇게 극복하다보면 정말 자신도 타인도 세상을 극복하고 무언가 이룰 수 있는지는 모르겠다. 그런 운명을 타고났다는 것이니 극복할 것인지 말 것인지는 속세의 내 문제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나는 그 말을 들은 후 부터는 이상하게도 내 앞에 닥친 걱정거리가 대수롭지 않게 보이기는 했다. 극복해봐야 또 다음 과제가 기다리고 있을 터이니 서두를 것도 없고 안 된다고 발구를 필요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회사생활 할 때도 나는 조직의 문제를 부러 해결하지 않고 일단 갖고 있는 쪽에 속했고 꼭 제거해야 할 상황이라면 넌지시 다음 문제가 대두될 시점에 임박해 현존하는 문제를 타결하곤 공백없이 다음 문제를 그 자리에 위치시키곤 했다. 늘 스스로 문제가 있다는 생각은 외려 살면서 나를 가장 안전하게 하는 역할을 했던 것 같다. 그래서 지금도 외적으로 큰 문제가 없어보이는(?) 사람들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고 할까. 이런 내 성향은 (중이 제 머리는 못 깎지만)남들의 인생사 골치아픈 문제 거리에 곧잘 해결사 역할을 자주 수행하곤 했다. 거기엔 문제를 심각하게 바라보지 않는 것이 핵심인데 나는 얄궂은 ‘운명’에 의해 훈련된 이차 운명을 잘 실행해 보려는 의도가 다분했다고 여겨진다.

  이런 운명개척자(?) 인 내가 보아도 이 소설은 홧병을 부르기 충분했다. 최적의 숙면을 위해선 잠들기 한 시간 전에는 책을 들지도 생각을 하지도 말라는 어느 의사의 권고를 받아들이기 힘들었음이다. 잠들기 직전까지 나를 괴롭히던 문장은 바로 작가가 다음의 마지막 문장 때문에 이 소설을 시작하게 되었다고 기록했기 때문인데 나는 작가의 시작에 흔쾌히 동의하기 힘들었다.


   
 


나는 누구보다 참는 건 잘했다.  누구보다도 질길 수 있었다.  다시 시작이었다. - 193p

 
   


  여기서 ‘시작’이란 말이 내가 아는 희망으로 보이지 않고 분명 반복이나 착취, 소모, 탕진, 타락, 악습, 퇴행 등의 전혀 반대의 의미로 느껴졌기 때문에. 나는 잘 참는 사람이고 질긴 사람이니까 이를 악물고 다시 시작한다는 자기 암시가 꼭 자신을 버리는 말로 들렸기 때문에. 현실을 박차고 나올 수 없기에 다시 그 현실 속에서 희뿌연 아침을 맞이하는 자의 시작은 어제 고통의 연장이지 어디 새로운 시작이란 말인가. 무언가를 끝내고서야, 끝이 있어야 시작도 의미있는 것이지 끝도 없이 시간에 끌려 현실을 좇는 것이 어찌 시작이란 말인가. 그 여자, 윤영이 자신을 시작하지 말고 그냥 무언가를 확실히 끝내기를 바라면서 나는 잠이 들었다. 
 

#2. 오늘의 현실


  주말을 앞두고 나는 우울한 마음이 들었다. 냉정하게 현실을 생각해보면 글로 그려진 소설은 사실 아무것도 아니었다. 어젯밤 꿈에 하필 살면서 되도록이면 마주하기 싫은 사람이 등장했다. 소설의 영향탓인지 꿈자리도 퍽이나 뒤숭숭했는데 그녀는 사채를 쓰는 바람에 패가망신 당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결혼을 두 번했고 첫 번째 남편이 폭력을 휘두르는 남자였기에 사회보호시설인 여성의 집 같은 곳에 피신했다. 그녀는 남편에게 맞아 고막이 터지고 이빨이 몇 개 남아있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에게도 사랑은 찾아와 총각인 남자와 재혼을 했고 그들 사이 어여쁜 딸 하나를 둘 수 있었다. 그녀에게 다시 찾아온 행복을 시샘하는 것들은 많았다. 전 남편의 아들은 오토바이 사고로 반신불수가 되었고 교도소에 가 있는 전 남편은 아들을 돌볼 수 없었다. 그녀는 급한 김에 사채를 쓰면서 병원비를 대기 시작했고 새로 재가한 시집과 남편의 돈을 빼돌리기 시작했다. 그 후 눈덩이처럼 불어난 빚 때문에 그녀는 결국 쫓겨나 숙소가 달린 식당에서 일을 하게 된다. 그녀는 결국 자기 뱃속으로 낳은 두 명의 자식 모두를 버릴 수 밖에 없었고 식당에서 만난 남자와 살림을 차렸다고 들었으나 그 후로 소식이 끊겼다. 그녀의 마지막 목소리는 무척 의연했는데 그녀 역시 ‘다시 시작해’야죠 하며 서로 어색하고도 구태의연한 인사를 나누었기 때문이다. 구구절절히 그녀의 불행을 서술한다면 소설속의 윤영못지 않은 캐릭터로 탄생될 만한 인물이었다. 현실은 소설보다 가까이 있었고 그것은 더 잔인한 얼굴, 더 끔찍한 상처로 전시된 상태였다.

  내가 이 소설을 덮으면서 깨달은 건 바로 글은 언제나 현실보다 못하거나 겨우 현실만하다는 것이다. 에이, 소설이니까 그럴 수 있지가 아니라 과연 이 소설이 소설일 뿐일까를 생각하자. 혹시 현실은 이 보다 더 하지 않을까를 상기하자. 누구든 글로 이어붙이지 않아서 그렇지 우리 사는 이곳엔 더 얼마든지 참혹한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무수히 많다는 것. 그것을 글로 적고나면 더 무섭고 고통스러워 보이는 것. 그것이 우리가 숨쉬는 현실이라는 운명이라는 것이다. 눈으로 확인하는 다큐 영상이나 그 상상을 가공하는 영화, 스틸 컷, 포스터, 실사사진들은 외려 덜 잔인할 수 있다. 똑바로 낱낱이 확인할 수 있으니까. 시각은 바로 확인이라는 절차 후에 반드시 있는 그대로의 인지적 수용을 거치게 되어있다. 그것이 충격이거나 고통이더라도 잔상은 기억속에서 사실화될 수 있다. 그러나 실체를 보지 못하는 글의 연속은 얼마나 광대하고 비현실적인가. 거기엔 물흐르듯 작가의 생각이 들어있고 문장의 의도가 촘촘히 박혀있다. 때문에 행간의 여백에서 느끼는 우리의 고통은 실제보다 배가되어 하나의 두려움으로 각인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글쓰는 사람들을 믿지 않는다. 사실 소설은 거짓말로 된 사기극이지만 사회에서 합법화된 문서로 기능한다. 소설가는 주어진 법을 잘 이용해 최상의 거짓말을 하면 되는 것이다. 우린 거짓말을 알고서도 잘 울고 웃어주는 적법화된 위선자들이다. 이 사회에서 적극 용인된 합법과 적법의 동종 커넥션이 정작 그것의 대상이 되는 사회에 경종을 울리려면 이런 소설은 더 나와야 하고 우린 그걸 더 읽어야 하는 것이다. 불편함의 승리야 말로 이 시대 작가가 바라는 최상의 소원이 아닐까.

  이 소설은 막연한 공통의 미래를 기대하기 보다는 지금 우리 주변의 현실을 좀 더 섬세하게 자각하자는 뜻으로 들린다. 이 소설의 희생자가 여성인 것은 같은 여성으로 목이 메이는 설정이지만 분명 이 사회에 윤영같은 운명을 가진 여성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할 것이라는 확신이 든다. 이 소설에서 윤영에게 고통을 선사하는 인간은 남녀를 따 질수 없다. 누구보다 인물분석을 해온 나이지만 여기 등장하는 윤영의 가족은 뚜렷한 표상을 가진 소설 속 캐릭터가 아닌 어쩌면 늘 우리 곁에 머무는 엄마, 동생, 남편, 이웃의 속된 얼굴들을 하고 있다. 이 소설이 불편한 이유는 그야말로 그런 우리의 현실을 사진찍듯 그대로 적었기 때문인 것이다. 현실은 원래 적어놓고 나면 누구도 심각하지 않은 현실이 없다.

  다시, 이 소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를 생각한다. 나는 작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여성도 있으니 우린 희망을 가지고 삽시다, 하는 것으로 생각하지는 않는다. 남편은 평생 공무원 시험 준비 중이시고, 아버진 그 와중에 암투병으로 세상을 하직하셨고, 엄마는 폭력적인 남자에게만 얻어 맞는 팔자이시고, 여동생은 제 잘난 맛에 가족 무시하다가 봉변을 당한 꼴이고, 남동생은 자기 재산을 빼돌려 담보로 잡히게 하고, 설상가상으로 아이는 평생 앉은뱅이로 살아갈듯 하다면, 이 모든 짐을 벗을 수 없는 나는 아이 때문이라도 몸을 팔아야 하는, 그런 뭣 같은 세상이라도 지금껏 잘 참아왔기에 여전히 참으면서 매일 아침을 똑같이 시작하겠다는 긍정적인 해석으로 받아들이긴 힘들다. 참고 살라는 뜻으로 곡해할 수 있으며 무조건 견디라는 오해로 보일수 있기 때문이다.

  이쯤해서 이 소설의 제목인 <환영>의 의미를 다시 새겨보고 싶다. 시와 도의 경계를 지나쳐 만나는 ‘안녕히 가십시오’ 혹은 ‘어서 오세요’라는 인사말의 의미를 곱씹어 본다.

  그깟 이정표 하나로 선을 그어 놓고 여기 부터가 현실이라고 하는 그 당돌함과 무례함을 똑바로 쳐다본다. 오는 사람을 기쁜 마음으로 반갑게 맞이하는 것은 어디의 누구란 말인가. 누가 누구의 현실을 맞이하고 또 보낼 수 있단 말인가. 환영歡迎의 인사는 어쩌면 우리가 현실이라 오해하는 표지판의 환영幻影이 아닐까. 현실은 우리를 반기지도 그렇다고 떠밀지도 않는 냉정한 무감각의 세계는 아닐까. 이 땅의 모든 것들이 흔적이고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유령이며 모든 전통은 유령의 역사라고 말했던 데리다를 굳이 떠올리지 않더라도 이미 현실은 가장 비현실적인 무책임의 가능성을 가장 성실히 완벽하게 수행하는 세상이 아닌가 말이다. 현실은 안녕의 인사를 지속하는 친철한 세계가 아니다. 현실적인 표식 역시 우리 스스로 만들어 놓은 위선 일뿐이며 그것을 인사로 여기는 이유는 우리가 희망적일 수 밖에 없는 존재이기 때문인 것이다. 그러므로 김이설의 <환영>은 우리가 인지하는 <환영: welcome>의 인사라는 현실을 그것으로 견뎌내려는 인간들의 <환영: illusion>이라는 것을 담담히 방증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그렇지 않고서야 다람쥐 쳇바퀴 돌듯 바뀌지 않은 현실의 탈출구는 발견할 수 없어 보였기에. 중요한건 환영歡迎이 환영幻影이냐 아니냐가 아니고 환영歡迎을 환영幻影으로 환영歡迎하면서 자신의 현실을 묵묵히 걸어 나가는 우리 사회 무수히 많은 윤영(倫影)의 오늘인 것이다. (그러고 보니 여자 이름은 왜 윤영, 민영, 아영인 것인가? 비칠 映인가 그림자인 影인가) 누구나 각자 처한 현실은 기막히고 슬프지만 오늘도 변함없이 다시 시작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내일 끝날지 아니면 언제 끝날지 아무도 모르지만 당신과 나 우리는 모두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공평한 입장이 우리의 준엄한 현실이니 그것을 깨달은 우리는 현실이 그리 두렵지는 않겠다 싶은 것이다. 그렇다면 이 소설. 얼마나 환영받을 만한 현실적 소설인가.

  김이설의 현실로 당신을 무조건 환영歡迎하는 바이다.
  나는 당신과 나, 우리 모두가 이 소설의 비현실에서 각자의 현실을 긍정하는 참으로 벅찬 환영幻影을 떠올린다.

  소설이라는 현실을 극복하는 것. 썩 괜찮은 현실처방이 아닌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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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선 2011-07-02 2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널 나와 같은 우울에 빠뜨리는게 좀 미안했지만
너라면 환영의 두가지 한자의미를 해석해 줄거라는 생각이 들었어~
역시~!!

그러고 보니 우리딸도 영이네~ 榮쓴다^^


한사람 2011-07-01 16:36   좋아요 0 | URL

소설 너무 지독했어 ㅠ.ㅠ
어떻게든 좋게 해석하지 않으면 내가 몸살이 날 것 같아서
억지를 쓰고라도 리뷰를 써내었네..

안그러면 소설이 공중에서 마구 울고 있을 거 같아서...

2011-07-01 19: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7-02 10: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네오 2012-03-13 19: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니깐 여성으로 살아가는 것이 힘들다는 말씀인가요? 이러한 상황이 누구에게나 맞딱트리는 현실은 아니지 않나요??

한사람 2012-03-14 08:52   좋아요 0 | URL

모르겠어요.
저런 글을 썼나 싶기도 한데 ㅋㅋㅋ
그땐 이 소설을 극복하자 !!! 이런 생각이 많았어요 ~
 
두근두근 내 인생
김애란 지음 / 창비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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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에 만난 사람

  이 책을 하필 여름이 시작되려는 찰나에 만난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 책 덮고 나니 새삼 지금이 가을이나 겨울이 아닌 것이 참 좋았다. 내 생각이지만 아마 작가도 여름을 좋아하지 싶은데 나는 오래전부터 내가 여름을 좋아하는 사람이란 걸 자각하고 있는 사람이었기에 더욱 설레는 마음이었던 것 같다. 언젠가 도올 김용옥 선생이 사상의학을 설명하면서 사람도 체질에 따라 자신과 맞는 계절이 있고 반대인 계절이 있다고 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봄만 오면 (남들 다 병든 닭처럼 졸고 있어도)천금을 얻은 것처럼 팔팔한데 다른 사람은 의욕도 나지 않고 기운도 없이 알려진 병든 닭 마냥 매번 같은 패턴을 산다는 것이다. 사람마다 잘 견디는 계절이 있고 맥도 못추는 계절이 있다는 건 얼추 사람마다 체질이 틀려서 그렇다는 말씀이었다. 내 경우 정신이 번쩍 들고 생기가 돌아 그래도 일의 의욕이 느껴지던 계절은 단연 여름이었다.(반대로 봄은 사망의 계절) 나는 여름에 땀도 잘 안 흘리고 불면증도 없는 편이다.(에너지 고효율 효과) 운 좋게도 에어컨, 선풍기 없이도 크게 더위를 잘 못 느낀다. (여름에도 늘 뜨거운 커피를 고집) 학교, 직장다닐 땐 우연인지 꼭 여름에 의미있는 성과를 올리곤 했다.(취직이나 대학원 졸업도 여름) 한 해중 여름을 삼, 사 개월로 보았을 때 그 시기에 그해의 성과를 몰아서 이루는 경향이 많았다. 내 기억에 덥다고 생각해 입 밖으로 ‘덥다’라고 투정을 하는 시기는 딱 한 여름 사나흘이었다. 그러니 내가 덥다고 한 날은 정말로 최악의 더운 날인 것이다. 뿐만 아니라 돌이켜보면 사랑도 매번 여름에 했다. 정확히는 사랑의 시작을 여름과 함께 출발했다. 새로운 사람(?)을 늘 여름이 오면 만나게 되는 경향이 있었다. 오월의 청명한 하늘을 너머 장마가 지고 폭염과 폭우가 교차되는 변화무쌍한 날씨는 꼭 천둥과 번개가 치는 청춘의 가슴과 잘 어우러졌던 듯하다. 누구나 여름에 비교적 추억을 다작할 수 있어서 그런 걸까 갸우뚱해 보았지만 별스런 추억없이도 내 사랑은 모두 여름의 품안에서 싹트고 키워가고 성장, 발전했던 것이다. 대체로 여름에 이별을 겪었던 기억은 전무하고 그들 모두는 여름과 함께 아직도 뜨거운 채로 인 듯하다. 그래서 나는 여름만 오면 혹시 무슨 일이 생기지 않을까 生의 관용된 습관에 의해서 두근두근 거리는 인생을 살아왔다.(고 고백하는 것이다)


여름은 색(色)이 많아 좋은 계절이었다. 여름은 통(通)하라고 있는 계절이었다.    -336p
여름은 색이 발(發)해 힘센 계절이었다.    -342p


  바야흐로 내 인생의 색(色), 통(通), 발(發)의 시간이 바로 지금의 계절이었다. 이 책은 여름과 내 인생의 역학관계를 깔끔하게 정리해 주었달까. 그러나 굳이 이런 내 체질과 성향을 말하지 않아도 이 책은 처음부터 초여름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 구석이 많았다. 이미 단편으로 많은 문학상을 수상한 문단의 기대주, 김애란의 첫 장편이라는 건 소설좋아하는 독자에게 충분히 두근두근할 만한 뉴스였다. 요즘 주변을 둘러봐도 한국소설을 읽는 독자들이 드문 편이다. 전반적인 분위기가 한국소설, 특히 순수문학은 어렵고 지루하고 우울하기까지 하다는 게 총평이다. 그중에서도 젊은 작가들의 소설에선 염세적인 분위기에 해체적 기운까지 느껴져 페이지 넘기기가 무섭다는 말도 들린다. 시도 마찬가지이다. 무슨 말인지, (이런 말하면 돌 맞겠지만)이것이 시라는 것인지 도통 모르기만 하라는 요즘 시집들을 (자발적으로)집어 들기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서점가면 (시집으로선)왜 이해인 님의 시집이 늘 십년 째 베스트 셀러인가. 보편타당한 감성으로 위로해주시니 이해하기 쉽기 때문이다. 시인의 한줄 눈물이 우리가 다 헤아릴 수는 없어도 이해하기 어려워도 그 느낌만은 공감하고 싶어야 하는데 우리 세대 대부분은 요즘 작가들에게서 그런 기운을 느끼지 못하는 바이다. 그런 와중에 ‘그나마’ 김애란은 꽤 재미나면서 가볍지 않은 소설을 쓰는 (젊은)작가로 자리매김한 보기 드문 인물이었다. 김애란 단편의 짜릿함, 만족감은 마치 가창력 좋은 어느 아이돌 가수에게 거는 대중의 기대처럼 그 공감의 폭이 넓어진 것이다.

  그런 김애란이 ‘초록 한가운데서’라는 싸인과 함께 나를 찾아온 것이다. 유월의 장마가 시작되는 어느날 오후, 반짝반짝 경고음만 같던 총총 빗소리와 함께. (이런 말 어떻게 들릴까. 사인본에 쓴 글씨가 확실히 젊었다. 세월의 피로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이 소설을 나는 작년 여름 <창비> 계간지를 통해 처음 만났다. 물론 그땐 나중에 단행본으로 출간되면 한 번에 읽을 생각으로 대충대충 페이지를 넘겨갔다. 그런데 총 4번의 계절을 통해 연재된 소설의 맨 처음, 그러니까 <두근두근 내 인생>의 첫 회는 제대로 읽은 기억이 난다. 첫 회에 아름이는 벌써 어머니와 아버지의 이야기를 쓰고 있었고 2/3 이상 완성한 상태였다. 부모님 이야기는 첫 회 이후 세 계절에 걸쳐 중간에 삽입되는 식이었다. 그때 내가 느낀 건 아름이가 그 소설을 다 완성하지 못하고 죽겠구나...하는 불길한 예감이었다. 그런데 출간 된 책에는 아름이의 소설은 맨 뒤로 위치가 이동한 상태였고 어엿하게 소설속의 또 하나의 완성된 이야기로 탄생되어 있었다.(연재 때는 아름이가 죽으면서 끝이 난다) 완성도면에서 후자가 더 아름다워 보인 건 사실이다. 다만 연재할 때와 수정할 때 그 사이 변한 작가의 마음이 궁금했다. 아름이가 고민하던 시간과 작업과정을 중간에 나누어 배치하다가 돌연 그 완성된 결과를 마지막에 선물처럼 안겨준 것에.(소설 구조상의 큰 변화가 아닐까?) 책을 덮고 곰곰이 생각해보았는데 어떻든 아름이가 죽는 이유보다는 태어난 이유에 더 힘을 실으려 했던 게 아닐까 싶다. 우리 모두 어짜피 죽는 존재지만 그건 태어났기 때문에 발생하는 차후의 문제라는 듯. 중요한 건 우리가 태어났다는 걸, 누구나 한번은 축복 속에서 태어난 적이 있었다는 걸 잊지 말자는.... 아름이가 이 세상에 태어나 십 칠년 동안 살았던 이유는 십 칠년간 자신이 느낀 세상 경험으로 부모의 이야기를 만들어 놓고 가기 위해서였기 때문에. 그건 결국 자신이 세상에 탄생한 과정을 말하는 일인데 아름인 자신이 태어난 이유를 누구보다 소중하고 아름답게 함으로써 스스로 죽음을 가치있게 만들 수 있었던 것이기에.

  그렇게 이 소설은 자식이 쓰는 자신의 자전 소설에서 자식이 쓰는 부모의 연애소설로 다시 태어난 것이었다. 그리고 작가는 우리들 존재의 뿌리를 여름처럼 일깨워 주려 이렇게 여름앞에 나타난 것이었다. 늘 여름이 좋아 죽겠는 나 같은 독자앞에.


여름을 만드는 사람

  열일곱의 나이에 부모가 된 사람들과 그들의 자식으로서 열일곱의 나이에 죽어야 했던 사람의 이야기는 소설로선 그리 충격적인 설정은 아니었다. 어찌 보면 드라마 미니시리즈에 등장할 법한 상투적, 작위적인 배경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훌륭한 감독은 불륜도 독창적인 예술로 승화시키지 않는가. 가장 흥미로왔던 건 자식이 죽어야 하는 병이 ‘조로증’이었다는 것인데 어느 순간 자식이 부모의 노화를 앞지르고 마침내 부모같은 자식이 된 채로 막을 내리는 서사구조가 모든 비극과 희극의 원천이었다. 여기서 사람의 마음이 몸의 성장을 따라가지 못하는 것, 즉 신체의 노화에 발맞추어 마음이 같이 늙어가지 않는다는 것이 이 소설의 핵심이라 생각했다. 마음은 계속하여 성장하고 발전하여 성숙하는 것이지 한번 늙어졌다고 성장을 멈추고 병약해지는 건 아니었다. 반대로 얼굴이 아무리 늙어도 소년은 소년의 마음을 잃지 않는 것이었다. 그건 우리 몸이 아무리 남들보다 빠른 시간을 살아도 마음은 자신이 겪은 철(계절) 만큼만 철이 든다는 말이기도 했다. 사람은 자신이 체험한 계절의 횟수만큼 그 계절을 잘 알게 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니까. 계절의 나이테만큼 어른이 되는 것이니까. 그래서인지 이 소설은 여지껏 작가 김애란이 알고 배워온 여름이라는 계절이 모두 녹아있는 글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무엇보다 나이와 탄생, 죽음을 말하는 이 소설에 있어 중요한 사실이었다. 김애란은 꼭 나보다 십년이 젊은 소설가였다. 나보다 어리고 혹은 나이든 작가보다 경험이 적다고 덜 성장했다는 것이 아니라 (원래 조로하는 직업인 작가로서) 꼭 그 나이의 정점에서 가장 완성된 감성을 완벽하게 토해내었다는 것을 주장하고 싶다. 어느 예능 프로그램에서 김범수라는 가수가 지금 막 신인이 된 백청강이라는 청년의 노래를 듣고는 저 목소리는 딱 저 나이 때 밖에 나오지 않는 맑고 귀한 소리라고 말한 것을 기억한다. 그건 노래 실력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나이의 그만이 낼 수 있는 유일성, 희소성, 순수성을 말한 것이었다. 김애란은 더 나이 들어서 혹은 더 어려서는 볼 수 없는, 느낄 수 없는 만큼의 모든 여름을 자기 소설로 노래했다. 그건 젊음을 한숨 넘긴 내가 오랜만에 체감하는 더없이 순수한 여름이었고 그래서 더 시리고 아픈 여름이었다. 어떻게 그런 여름일 수 있는가. 어떻게 여름을 그렇게 말할 수 있는가. 내게도 그런 여름은 있었는데. 그녀가 다른 무엇이 아니고 작가인 것이 얼마나 고마운 여름인가 말이다.

  속된 말로 아름인 하마타면 이 세상에 나오지 못할 존재였다. 나란히 열일곱 살인 태권도 특기생 한대수와 노래가 꿈이었던 최미라가 저지른 하룻밤 불장난으로 아름인 그들 인생의 최대 실수이거나 치명적인 추억이 될 뻔 했다. 모든 생명은 그렇게 모두 사라질뻔 한 사건속에서 극적으로 피어나는 존재가 아닐까. 자꾸 혼란스러웠던 건 아름이의 이름이 여자같았다는 것이었는데 공교롭게도 내 사촌 여동생 중에 꼭 ‘한아름’ 이라는 녀석이 있다. 80년대 초에 한글 이름 짓기가 유행처럼 번지면서 여자 이름 짓기 참 좋은 韓氏(한혜숙, 한고은, 한예슬, 한은정, 한가인, 한지혜, 한채영, 한지민, 한효주, 한혜진을 보라) 성에 무수히 많은 아름이가 탄생되던 시절이 있었다. 그래서 더더욱 그들의 아들을 남성으로 생각하기 정말 어려웠다. 작가가 굳이 여자이름의 뉘앙스를 가졌으면서도 아름이를 남자로 한 이유를 이해하고 싶었다. 본 서사에서도 글쓰는 사람으로서 자주 작가 자신의 대리인처럼 느껴지던 아름이를 왜 남자로 운명지었는지. 아니 왜 여자로 하지 않았는지. 솔직히 남자로 할 거면 이름만이라도 한대수의 확실한 아들처럼 지었으면 바랐다. 이름의 표면적 의미만으로는 병을 ‘앓고’ 있는 ‘아름’, 혹은 세상을 일찍 ‘알아’버린 ‘아름’, 삶과 죽음 모두를 두 팔 벌려 안고 있는 ‘아름’이로 상징할 수 있었지만 줄거리상 아름이가 남자이어야 하는 개연성은 작품 전체로 보았을 때 드러나는 이유로 보이진 않았다. 어떤 작가의 오래되고 내밀한 바람같은 것이었을까. 작가의 전작들에서 아버지는 아이를 버리고 집을 나가는 대개 철부지 아버지로서 좀 대책없고 우스운 인물들일 경우가 많았다. 이른바 아버지 노릇을 제대로 하는 부성은 아니었다. 이번 작품에서도 한대수는 태권도를 잘하는 학생이었지만 아름이를 보고 난 후로는 뭣 하나 제대로 이겨본 적이 없는 이 시대의 전형적인 패배자의 모습을 하고 있다. 하지만 한대수가 사회적으로는 성공하지 못한 인물일 수 있지만 가정적으로는 누구보다 자신이 뿌린 생명을 소중하게 책임지는 진솔하고 따스한 인간성을 보여주었다. 아름이는 다시 태어난다면 그런 아버지로 태어나 자신을 낳은 뒤 아버지의 마음을 알고 싶다고 말한다. 아름이 입장에선, (남자로서)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자신도 누군가를 태어나게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는 걸 증명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엄마이고 여성인 내 입장에서도 감동적인 말이 아닐 수 없었다. 순간, 왜 이 노래가 생각났을까.


낙엽이 우수수 떨어질 때 겨울에 기나긴 밤 어머님하고 둘이 앉아
옛 이야기 들어라 나는 어쩌면 생겨나와 이 이야기 듣는가
묻지도 말아라 내일 날은 내가 부모되어서 알아보리라 -  <부모> 가사 中


  내가 어떻게 생겨났는지 궁금하다면 그건 내가 부모가 되어 나같은 생명을 만들어 보는 수 밖에 없다는 노랫말. 내가 생겨난 이유, 생물학적 나의 시초를 따져 묻고 그 답을 알아보기엔 어쩐지 생겨난 후 나를 낳은 어머니 보다는 생기기 전 아버지가 제격이라는 생각이다. 내가 태어난 이유야 말로 아버지가 잘 알고 있을 것 같은데 그 이유를 공감하기엔 같은 남자인 것이 더 낫겠다 싶어진다. 그래야 좀 더 아버지를 이해할 수 있고 그럼으로써 자신이 ‘겪지 못한 과거’와 앞으로 ‘오지 않은 미래’를 모두 체험해 볼 수 있으니까. 가만 생각해보니 그것은 참 스마트한 발상으로서 완전히 자신이 되어보지 못한 아름이가 마지막으로 가질 수 있는 최고의 소망은 아니었을까 싶다.


아버지는 사내가 되고 싶은 사내, 여름이 되고 싶은 여름      -329p
어머니는 자기가 되고 싶은 자기, 여름을 간섭하는 여름      -330p


  아름이의 유언과도 같은 <두근두근 내 여름>엔 아버지와 어머니를 이렇게 표현한다. 자신의 여름을 여름처럼 창조하고 싶은 아버지는 사내로서 뿌리가 되고자 했고 그 여름 속에 들어가 주인공이 되고 싶은 어머니는 열매가 되고 싶어 한 것이다. 모두 여름을 자신처럼 자신을 여름처럼 만들고 싶은 청춘들이 아닌가. 또 아름인 구십의 치매 아버지를 둔 육십대 동네 장씨 할아버지와도 농담 따먹기를 하는 친구사이로 지내게 되는데 장씨 할아버지 역시 아버지가 늙어서 이루게 될 철없는 할아버지의 표상으로 보였기에 이번 이야기는 각 세대를 상징-손자(아름)-아들(한대수)-아버지(장씨)-할아버지(장씨 아버지)-하는 남자 인물들이 여름안에서 소박한 인연을 이어나가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싶기도 했다. 오랫동안 여름을 만들어온 사람들이라고나 할까. 그러니까 누구보다도 생명의 시작, 인간의 성장, 죽음의 마지막을 성찰하기 위해 아름이는 남자가 되어야 했던 것이다. 아름이는 아버지와 장씨 할아버지를 보고 ‘사람들은 왜 아이를 낳을까’하는 질문에서부터 ‘부모는 왜 아무리 어려도 부모의 얼굴을 가질까’, 혹은 ‘자식은 왜 아무리 늙어도 자식의 얼굴을 가질까’하는 질문들을 같은 남자 소년의 시각에서 제기하고 싶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다면 아름이는 세상에서 가장 빨리 늙는 슬픔(恨)을 가졌기로 가장 크게(한) ‘아름’다운 ‘한아름’이 합당해 보인다. 아름이야 말로 한여름의 아름다움을 만들었기 때문에.



여름을 시작하는 사람

  또 인상깊었던 사실 중 아름이는 죽음을 앞두고 글을 쓰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잊을 수 없다. 이 작품에서 아름이는 부모님의 연애담을 완성하기 위해 자주 글쓰기의 어려움을 토로한다. 그 과정에서 자연 작가로서 고충어린 목소리가 겹쳐지는 기분이 들었고 어쩐지 작가의 실제 고민이 그대로 노출된 듯한 생각에 친근함을 많이 느꼈던 이유이다. 아름이는 말한다. ‘글쓰기는 매 순간이 결정과 선택의 연속’이라고. 기부 프로그램에 출연한 후 게시판에 올라온 글들을 보고 ‘어쩌자고 인간은 이렇게 이해를 바라는 존재로 태어나버리게 된 걸까?’ 자문한다. 그리고 왜 자신처럼 사람들은 ‘그토록 자기가 느낀 무언가를 전하려 애쓰는 걸까?’ 알고 싶어 한다. 이는 그대로 작가 김애란을 움직이는 실시간 화두라는 생각을 했다. 어쩌면 인간은 타자에게 이해를 바라기 때문에 자신이 느낀 것을 무던히도 전하려 한다는 뜻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아름이는 병들어 부모님에게 우등생도 학사모도 드릴 수 없으므로 그들의 추억을 잘 다듬어 선물해 드리는 일로 글쓰기를 택한 것이었다. 이것은 몸이 빨리 늙어 감에 따라 그 성장속도를 따라가기 위해 마음을 책으로 채운다는 아름이의 생존전략으로 생겨난 고유의 능력이었다. 결국 아름이는 죽어가는 와중에도 의미있게 살기 위해 글을 썼다는 것과 같은데 이는 꼭 조로한 정신이 자기도 모르게 경쟁력이 된 이 시대의 모든 작가들의 항변만 같았다. 자꾸 이 시간에도 골방 어느 구석에 앉아 밤을 새며 홀로 글과 싸우고 있을 수많은 청춘들을 생각나게 했다. 작가를 꿈으로 가진 나보다도 더 절실할지 모를 그들 젊음이 안타까워 보였던 건 아름이에게 가공의 편지를 보낸 시나리오 작가 이서하의 공도 컸음이다. 이 책 후반부에 아름이와 이서하가 주고 받은 서신은 감수성의 극치라 할만큼 이 작품의 백미로 기능했다. 아름이는 이서하의 편지를 보고 ‘한 줄의 문장으로 하루를 버틸 수 있고, 한 번의 호흡으로도 가슴이 벅차오르는 하루’라며 그 행복을 어쩔 줄 몰라하지 않았던가. 꿈이 무엇이냐는 아름이의 질문에 ‘사실 나는 작가가 되고 싶어서’라는 이서하의 답신은 내가 이 책에서 가장 오래 머무른 구절이기도 했다. 그 구절이 왜 그렇게 울컥하며 눈물이 나던지 나조차도 의아했다. 어쩐지 나는 아름이가 불치병에 걸린 소년 소녀의 시나리오 때문에 거짓 편지를 보낸 또 다른 젊은 작가를 십분 이해할 것 같았고 가공이라도 자신의 심장을 설레게 해준 그에게 고마워 할 것 같았다. 그건 지난날 우리가 거짓사랑에 눈물 짓다가도 먼 훗날 사랑의 기억으로 감사해하던 용서의 느낌과도 비슷했다. 무엇보다 아름인 이서하로부터 첫사랑의 ‘큰’ 실망을 얻었지만 그가 보낸 글 때문에 ‘잘’ 실망할 수 있었을지 모르지 않는가. 


어른이 되는 시간이라는 게 결국 실망에 익숙해지는 과정을 말하는 것이겠지만 글이란 게 그걸 꼭 안아주는 것은 아닐지라도 보다 ‘잘’ 실망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무엇인지도 모르겠어. 언젠가 나도 네 글을 보고 싶어. -260p


  상처를 준 상대에게 그래도 진정한 ‘네 글’을 보고 싶다고 말하는 아름이는 어쩐지 조로한 작가 김애란이 아직 철 안든 내게 말해주는 격려처럼 느껴졌다. 아주 오래전에 꼭 부모님의 연애이야기를 한번 소설로 써볼까도 싶었던 나였기에 그녀와 한아름은 내 여름의 심장을 노크하는 반가운 손님이 되고도 남았다. 여름 내내 ‘언젠가 나도 네 글을 보고 싶어’ 이 말이 귓가에 울리는 시간이 될 듯하다.

  마지막으로 이 책이 물리적으로도 심장을 두근거리게 하는 매력에 대해 말하고 싶다. 아름이는 태어나 ‘엄마 가슴에 안겨 처음으로 엄마의 심장소리를 듣는 순간 내가 아는 소리라는 안도감’에 세상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졌다고 말한다. 죽기 직전 아버지가 자신을 안아줄 때 아버지의 심장과 자신의 심장이 포개어지며 같은 소리를 듣게 되어 그 파동안에서 사랑의 힘을 오롯이 체험한다. 사람의 심장이 하나 뿐인 것은 그 심장으로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단 한명이라는 생각을 해왔다. 이번 책을 읽으면서 나는 심장의 소리가 같은 사람은 누구나 사랑할 수 있다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다. 심장의 소리를 포갤 수 있다면 그들은 심장보다 더 뜨거운 추억들을 공유한 사람들 일테니까. 아름이가 언젠가 병원을 다녀오며 아버지와 둘이서 찾아갔던 놀이공간, 둘이서 하늘높이 점프하며 심장을 뛰게 하던 그 축복된 순간을 이렇게 말한다. 같은 심장이 뛰는 사람들이 서로의 심장 때문에 행복해 하는 그 순간, 가슴이 터질 것 같아도 멈추고 싶지 않은 그 순간을.   


만일 인생의 가장 환한 장면이란 게 따로 있다면, 바로 그런 순간이지 않을까? 시원하고 개운한 바람. 펄떡이는 심장. 발밑의 탄력. 넘어지며 웃고, 웃으면서 자빠지던 우리의 활력. -145p

 

  나이들면서 내 심장이 뛰는 순간을 자각하기란 쉽지가 않다. 그건 일상이 아니라 생각하고 일상이 아닌 것은 대개 일탈이라 치부하고 싶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특별한 걸 원하는 것 같아도 실은 매일 매일 보통의 순간을 살고자 심장을 움직이고 싶지 않은 것이다. 애써 가라앉혀 놓고 뛰지 않는다 불평하는 사람들이 우리들인 것이다. 허나 내가 생각하기에 ‘보통의 삶을 살다 보통의 나이에 죽는 것’은 살아보니 점점 기적이 맞다는 생각을 한다. 보통의 삶이라는 건 남들이 하나씩 가지고 있는 평범함 여러 개를 모두 모아 이루어진 아주 특별한 인생이 아닐까 싶어서다. 끊임없이 우발적인 만남으로 사랑과 이별이 반복되는 인생에 있어서 보통이 되기는 여간 보통일이 아닌 것이다. 그래서 나는 우리 모두는 각자가 특별할 수 밖에 없고 그 특별함이 결국 자신의 매력이 될 수 밖에 없고 그것은 자신의 심장은 물론 상대의 심장도 뛰게 할 수 밖에 없는 소중한 본성이라 생각한다. 우리 모두는 자신의 심장을 뛰게 하는 특별한 재주를 가졌고 재주가 많을수록 상대도 특별하게 하는 능력을 가진 게 틀림없다고 믿게된다. 

  바로 김애란은 고통과 슬픔, 기쁨과 환희에 대한 감수성을 보다 정확하고 풍부하게 전달하는 육감적 능력을 가졌다. 남의 심장을 두드리고 끝내 벅차올라 터지도록 하는 특별한 재주말이다. 그녀의 육감은 다섯 가지 이외의 감각이 아니고 다섯 가지를 모두 합한 것 이상의 감각일 터이다. 나는 육감이 탁월하게 발달된 작가의 작품으로 이 여름을 반갑게 맞이하고 싶다는 충동을 느낀다. 이 여름의 色을 나의 色으로 하고 싶고 이 여름을 통과한 것들과 제대로 소通하고 싶고 이 여름으로부터 發한 것들을 모두 놓치지 않고 싶다. 또 다시 내가 도망치려 했던 ‘시작’이 다시 내 앞에 놓여 있다는 사실에 설렘과 두려움을 느꼈다는 아름이에게서 내 모습을 부끄럽게 확인한다. 내가 두려웠던 건 사실 여름이 무섭게 닥쳐 온다는 사실이었는데 그것은 여름에 시작을 하고(해야 하는) 싶은 마음일 것이었고, 그 시작은 언제나 고통일 것이 자명했기 때문에. 여름을 사랑하는 건 고통을 사랑하는 것이라는 걸 다시금 깨닫는다. 그건 내 심장이 아직은 뛰고 있다는 증거이고 그러므로 내가 살아가야 할 이유, 내가 여름이고 싶은 이유일 것이다. 이로써 여름의 이야기를 만드는 것으로 여름을 시작하는 사람이고 싶다.

두근두근 내 인생, 그건 이 설레는 여름과 함께, 지금부터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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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선 2011-07-02 2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 여름이 있었구나.
난 여름체질이 아니어서 그랬는지 여름을 거의 눈여겨보지 못했던 것 같아.
콕찝어주니 끄덕거려진다~

이책이 좋았던건, 가독성이 훌륭해서 내게 간만에 한쾌에 끝내는 기쁨을 줬었던 것과
죽음이 전제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도 우울하지 않았다는 점이 아닌가 싶어.

저 말 딱 맞다. 백청강의 노래를 듣고 평한 김범수의 말.
적절한 비유를 콕찝어내는 것도 너의 탁월한 능력이야. 문단의 아이유라니^^

2011-07-03 00: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7-03 00: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7-03 11: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 제2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김애란 외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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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떻든, 젊다는 것은 에너지에 관한 문제이다. 젊은 작가 - ‘누가 누구를 누구 마음대로 젊고 늙은 작가로 규정할 수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젊음의 기준을 생산의 힘으로 본다면 수긍할 만하다’는 성석제 작가의 말처럼-의 소설은 비극이든 희극이든 인상적인 에너지를 생산한다. 작년에 ‘제 1회 젊은 작가상 수상 작품집’을 덮고는 분명 일상에서 강렬하고도 자극적인 생의 투사적 기운을 얻었던 기억이 있다. 인간의 상상력이 미치는 스펙트럼이 무한대로 확장되었다는 놀라움과 우리가 공감하는 고민의 종류가 그토록 다양하다는 것에 박수를 보내었다. 젊다는 것은, 젊은 소설, 젊은 작가라는 것은 그 상상력의 에너지가 들끓는 젊음처럼 폭발적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그것은 대개 문학외의 장르에서도 마찬가지인 젊음의 보편적 기대가치일 것이다. 그런데 올해는 같은 작가들의 주체할 수 없는 에너지가 공중에서 한차례 폭발을 일으킨 후 제각각 예기치 못한 임의의 장소에 떨어져 입체적인 파편으로 흩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것들을 한데 모아 그러잡기엔 어쩐지 두려웠다. 대기는 무참히 침몰했고 계절은 희미하게 사라졌고 공간은 사방에서 분열했고 시간은 예고없이 소멸했으며, 그 속에 위치한 나와 타자들은 모두 불구인 상태로 존재했다. 페이지를 넘기면 넘길수록 이상한 일이 벌어지는 그날은 참으로 신기한 날이었다.

  이 책을 덮은 지도 꽤 시간이 흘렀지만 이번에 나는 막연한 슬픔에 잠긴 채 함부로 젊음을 입에 담기는 어려웠다. 그건 젊은 사람이 암에 걸리면 더 빨리 죽는 이치와도 비슷했는데 나는 최대한 슬픔의 세포가 진행, 확산되는 시간을 늦추고 싶었다. 그러곤 왜 내가 하필 암에 걸렸을까, 하는 심정으로 왜 이들은 이럴 수 밖에 없었을까를 여러 번 질문했다. 단편이라는 것이 어느 계간지, 어느 소설집에 같이 엮이느냐에 따라 사뭇 분위기가 많이 달라진다고 알고 있다. 그런데 이번 수상집은 꼭 이 시대 젊음의 대재앙 특집으로 부러 모아 구성한 단행본마냥 뚜렷한 색깔과 동일한 방향성을 드러내고 있었다. 젊음은 어디로 튈지 모르고 일정한 방향성이 없다는 것이 그 매력이자 특징일 것인데 이번엔 달랐다. 그런데 나는 그 이유도 알 수 있을 것 같아 어쩐지 그들의 젊음과 나의 젊음, 그리고 이 땅의 모든 젊음이 많이도 눈물겨웠다. 젊음의 양이 곧 슬픔의 양은 아니었을까.

  그래서, 이번엔 젊음이 슬픔으로 귀결되던 시간들이 결국 슬퍼지는 독서였다. 나는 그 이유를 찬찬히 따져 묻고 싶었다. 슬픔 끝에 괴로운 심정에 대한 보상이라도 바라듯 이 슬픔을 꼭 치유의 에너지로 바꿔놓기라도 하겠다는 듯. 다행히 기쁨과 슬픔이란 감정을 기초로 인간의 내면을 성찰한 철학자가 있었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치욕과 복수심, 두려움과 유사희망, 공황과 불안 등의 모든 감정들은 슬픔의 감정들이라 말한다. (『에티카』, 2007, 서광사) 감정을 예민하게 구분짓고 싶은 내게 그것은 모두 슬픔의 종류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이상하게도 나는 이번 독서에서 각자의 소설 끝에 희미하게 감지된 어렴풋한 희망의 끈마저도 하나같이 슬픔으로 다가왔다. 외려 모두 불타버리고 아무것도 남지 않으면 다시 태어나 새롭게 시작할 수라도 있을 것 같아 이 슬픈 감정을 무르고 잊어버리고 싶을 정도였다. 그들을 모두 몰랐던 것으로 하고 더 알아야 할 필요가 없는 사람들로 덮어버리고 싶었다. 그것은 오지에서 탈출해 힘겹게 목숨을 건진 생존자가 느끼는 두려움만은 아니었다. 무너질 것을 알면서도 벽돌을 쌓는 일꾼의 심정도 아니었다. 사라질 것을 알면서도 허기를 느끼는 비루함이나 사라진 것을 보고 과거를 그리워하는 부질없음도 아니었다. 내가 느낀 슬픔은 아직은 살아있기로 그럴 수밖에 없는 일종의 ‘가능성’이었다. ‘가능성’은 아직 희망이라 말하기엔 불안한 생 날것이었고 긍정일 수도 부정일 수도 있었다. 이렇게 기다리면 누군가는 올 지 모르고, 다시 꽃은 필지도 모르고, 언젠가 글은 써질지 모르고, 마음은 서서히 누그러질 지 모른다는, 비록 지금은 하늘이 무너져 내릴 것 같은 지옥과도 같은 세상이지만 이것을 통과하고 나면 지금보다는 나을지 모른다는 아니 적어도 지금처럼은 아닐 것이라는 일말의 희박한 ‘가능성’이었다. 왜. 우리는 이렇게 젊고 어쩌면 세상은 우리 때문에 아름다울지 모르니까. 아니 우리 때문에 아름다워야 하니까. 아니 우리 때문에 아름다웠으면 싶으니까. 사실 젊다는 것은 얼마든지 시작할 수 있는 용기와 도전을 의미하고 이것 말고 다른 것을 선택할 수 있다는 기회를 상징한다. 미래는 그 가능성의 결과이며 그것의 실현이기 때문에. 그러므로 아무런 가능성이 없으면 사실 슬플 일도 없는 것이다. 가능성이 풍부하기 때문에 욕망도 소망도 많아지는 것이고 그것이 좌절될지 모를 확률도 커지는 것이다. 완전무결한 절망은 차라리 안전하다. 그래서 비겁한 사람들은 보다 쉽게 포기를 하는 것 아닐까. 그러니까 가능성은 얼마든지 무한대로 슬픔을 제공할 수 있으며 그것은 곧 젊음의 속성과도 꼭 일치 하는 것이었다. 이번 수상집에 수록된 작품들은 저마다 최악의 고통 속에서도 아직 절망할 수 없는 젊음이라는 가능성을 최후의 카드로 숨겨놓은 증거들의 집합이었다. 나는 그들의 카드를 확인하는 고통을 슬픔이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스피노자는 말한다. ‘두려움은, 자신이 두려워하는 큰 악을 더 작은 악으로 피하려는 욕망을 갖도록 자극되는 슬픔이다. 유사희망은, 자신이 그 결과에 대하여 의심하는 미래 또는 과거의 사물의 관념에서 생기는 기쁨을 가장함으로써 현재의 슬픔을 위안하는 것이다. 그리고 불안은, 자신의 욕망이 침해당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정할 때 비롯되는 슬픔이다. 공황은, 작은 악을 통해 큰 악을 피하려고 하는 욕망조차 방해당하는 일반화되고 대규모화된 두려움이다.’ 그렇다면 가장 많은 양의 감정을 외부로 표출하는 시기가 젊음의 시간이라고 보았을 때 그들은 젊기 때문에 가장 많이 슬펐을 것이 틀림없다. 더 많이 젊은 작가가 더 많이 슬펐을 것이고 그것은 곧 더 많은 가능성에 다름 아닌 것이었다. 처음으로 많은 가능성이 사라진 지금의 내가 위안이 되었다고 말하면 바보같은 것일까. 우리는 아플 것을 알면서도 사랑을 멈추지 않는 인간이라는 존재이기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많은 가능성을 바라고 원하였던 젊음을 원한다. 젊어지고 싶다는 건 미처 정해지지 않은 나의 미래, 지금보다 더 많았던 그 가능성이 그립다는 뜻일 터이다. 나는 그들의 슬픔을 보며 그 슬픔에 동참하는 것으로 젊음에 참여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슬픔도 전염되는 성질을 가졌다는데 혹 이 소설을 집어든 독자들은 나처럼 젊음의 슬픔에 빠져들곤 도리어 이율배반적인 회복의 에너지를 건질 수도 있겠다. 그럴 수도 있겠다. 일곱 가지 애끓는 에너지들은 흡사 무지개처럼 다채로운 빛깔의 슬픈 애상곡(哀傷曲)으로 들릴 수도 있겠다. 누가 더 슬프고 그리하여 나를 슬프게 하였던가. 나는 그 애닯은 일곱 곡조에 몸과 마음을 맡겨본다.


#1. 나뭇잎 배, 그 구원의 가능성.............................................................................물속 골리앗 / 김애란

  이 소설을 덮는 다는 건 참 어려웠다. 공교롭게도 이 소설의 마지막은 지난 3.11 일본 대지진 참사시 바다로 흘러간 지붕 위에서 홀로 버티며 3주 후에 구조된 강아지를 떠올리게 했다. 참았던 눈물이 베어 나오던 건 이미 아버지가 실족사 하였고 어머니가 급류에 휩쓸려 사라졌기 때문이 아니다. 비로소 깨닫게 된 완전한 고립감보다 그래서 생겨난 인간의 본능이 더 목메였다. 어떻게든 물 밖으로 나와 떨리는 파란 입술로 “누군가 올 거”라고 중얼거리는 소년의 목소리가 먹먹해진다. 나는 소설의 끝무렵에 가서야 화자가 소년인지 알았고 그래서 더 소름이 끼쳤던 것 같다. 열네 살 소년이었기에, 설령 아무도 오지 않을 가능성보다 터무니없게 낮을지 모르지만 누군가 올지 모른다는 기대감이 더 온당하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말하는 소년을 가만히 안아주고 싶었다.

  이 작품은 점점 싱거워지는 여름날 수박처럼 ‘세계가 점점 싱거워 지던 날’의 이야기라 하기엔 속절없이 야속하다. 그건 세상을 잘 모르고 속단한 젊음의 오해가 아니었을까. 상중인 이들 모자에게 닥친 어둠은 물리적, 정신적, 영적인 어둠으로서 마치 눈을 감고 독서를 하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언제 그칠지 도무지 알 수 없는 빗소리와 바람에 흔들려 물이 우는 소리, ‘내장 깊숙한 곳에서 흐느끼는 바람을 타고 새벽 내내 들려‘오는 개가 죽어가는 신음소리는 점진적으로 인간 내면의 공포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고 종반부에 이를수록 작가가 연출한 배경음이 장중한 진혼곡의 멜로디로 들려오는 듯했다. 그러나, 지금 작가가 슬퍼하는 것은 무엇일까. 이 작품에서 소년과 어머니는 풍수해라는 재난을 맞아 힘겹게 사투를 벌인 끝에 어머니는 실종되고 소년만 살아남는다. 그 소년의 앞날도 불투명하다. 그곳은 어디인가. 내가 아는 김애란은 도시의 변두리 밀폐된 고시원 방에서 자기 자리를 찾아가는 20대 여성들의 현실을 당당하게 노래하는 작가였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그녀의 밀폐된 공간도 균열이 시작된 듯하다. 바깥에 시선을 돌려보니 이 세계는 여전히 공사중인 것이다. 도시는 끊임없이 리모델링되고 ’마치 지구상에 살아남은 유일한 생물처럼‘ 거리엔 타워크레인이 점령한다. 거대 자본주의의 초대형 공장인 메트로폴리스에서 주거, 교통, 환경, 교육, 예술, 이 모든 분야는 중산층 이상의 삶에 적합하도록 설계되며 타워크레인의 기계적 작업에 의해 소수자는 도시를 떠받치는 희생자로 전락한다. 재개발지대에 살고 있던 사람들은 어디론가 떠나야 하고 그들이 물러선 자리엔 고층의 첨단빌딩과 그에 걸맞는 사람들이 들어 설 터이다. 서울의 한 재개발지대에 사는 신혼부부에게도 A구역은 철거중 이었다.(『벌레들』, 2010)


장미빌라 앞 건물 철거가 시작된 건, 산달이 가까워졌을 즈음에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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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레들』, 김애란, 2010 ‘작가’가 선정한 오늘의 소설 , 92p

  출산을 앞둔 이들에게 ‘굴삭기는 다음 차례인 집을 향해 천천히 전진’했으며 ‘동이 트면 굴삭기가 저 아래를 다시 뒤집어엎고 갈고 망가뜨려 놓을’ 까봐 고민에 빠진다. 이들에게 철거가 예정된 자신의 주거지, ‘A 구역은 세상만사를 삼킨 심연처럼 시커먼 아가리를 벌린 채 시치미를 떼고 있’을 뿐이었다. 이 모습은 치명적인 홍수로 마을이 사라져 자신이 살던 주거지의 형상을 기억하지 못하는 소년의 시선과 겹쳐진다. ‘기역자 모양의 4층 건물로 총 열여섯 가구가 들어갈 수 있었’던 강산아파트 역시 재개발 아파트에 떠밀려 붕괴를 앞두고 있었기 때문에. 평생 용접기술로 생계를 꾸려온 아버지가 이십년 동안 아파트 대출금을 다 갚았을 무렵 철거명령이 떨어졌고 공교롭게도 아버지는 신도시 아파트 건설현장 타워크레인에서 실족사한 상태이다. 이번 작품이 더 잔인하고 치명적인 것은 안그래도 철거명령을 받은 터에 아버지 사망과 장마라는 설상가상의 악재가 이중, 삼중으로 겹쳤다는 것이었다. 이 작품은 처음부터 화자가 애어른 같은 열네 살 소년으로서 자연재해와 가족상실, 사회문제까지 떠안은 우리 사회 최약자 층의 비루한 생존현장을, 필사의 탈출모습을 취재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화자는 빗소리 때문인지 ‘잠을 청할 즈음엔 자꾸만 집이 흔들리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때 나는 비로소 전 국토가 공사중이었음을 깨달았다. - 34p

  소년이 붕괴된 침몰현장에서 기를 쓰고 이어붙인 ‘나무문짝 배’는 곧 자기살 같은 자기 집의 파편들로 주형한 최후의 생존도구였을 것이다. 아버지의 유일한 취미생활이었던 베드민턴 채를 노삼아 급류를 헤쳐 가는 길목엔 무수한 ‘골리앗 크레인‘이 버티고 있고 그때 떠오르는 아버지의 얼굴은 ’물대포‘를 한방 맞은 축축한 사체였다면. 혹 ’물대포‘는 우리 사회 공권력을 암시하며 ’골리앗 크레인‘은 재개발로 상징되는 폭력을 말하는 것은 아닐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가온 ’장마‘는 왜 만성질병인 어머니, 아버지 상중임에도 불구하고 무방비상태로 노출된 빈민가정만 찾아가는 것인가. 최소한의 사회 안전장치가 배제된 그들에게 ’장마‘는 우리사회가 방치하고 공동 외면한 예정된 폭력에 다름 아니었다. 분명 약속된 타워크레인으로 밀어버리고 예기치 않은 홍수로 쓸어버리는 그곳에 누군가 있었다. 이 작품은 가진 거 하나 없이 오로지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기술력(용접), 유산(베드민턴채), 추억(수영)등의 무형의 가치로만 타워 크레인으로 무장된 골리앗 도시에서 살아남은 소년 다윗이 이제 어디로 가야할지 어디서 살아야 할지 우리에게 묻고 있다.

정말 조금만 더 가면 마을이 나타날지 몰랐다. - 39p

  가만 생각해본다. 소년이 기다리던 마을은 어떤 곳이었을까. 나는 이 작품의 마지막을 덮으며 문득 어린 시절 엄마의 무릎에 누워 낮잠이 든 어느 꿈속같은 오후가 떠올랐다. 엄마는 내 기억에 자주 이런 노래를 나즈막히 읊어주셨다. ‘낮에 놀다 두고 온 나뭇잎 배는 엄마 곁에 누워도 생각이 나요. 둥근 달과 흰 구름 둥실 떠가는 연못에서 살살 떠다니겠지’ .... 나는 소년의 ‘나무문짝 배’가 어느 평화롭고 따사로운 봄 날 연못에 놀다 두고 온 초록빛 ‘나뭇잎 배’가 아닐까 착각이 들었다. 그렇게 착각하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혼자된 소년을 위해, 그 소년의 ‘나뭇잎 배’를 위해 그가 그랬던 것처럼 조금만 더 가면 다른 마을이 나타날지 모르는 가능성에 조용히 박수를 보낸다. 그건 이 작품을 마지막으로 선정하고 떠나신 故 박완서 작가의 마음도 헤아려 보고 싶은 내 눈물이기도 하다. 조금만 더 살면 더 나은 세상을 보겠지, 하는 그 애절한 가능성을.


#2. 체리 빛 소나타, 그 감각의 가능성...............................................................................여름 / 김유진

  시종일관 이 소설을 긴장하며 읽었다. ‘바닥에 온전히 맨발을 내려놓는 법이 없는’ Y처럼 마음을 내려놓을 수가 없었다. 꼭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았지만 끝내 대단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소설은 페이지 속으로 자취를 감추어 버린 듯했다. 소설이 끝까지 밀고 가던 것은 독자와의 거리감에 대한 작가의 의지가 아니었을까. 마치 어느 미술 전시장에 걸린 화가의 작품처럼 일정한 관람거리를 확보한 후 그 너머에서만 그림을 구경하라는 듯. 실로 회화적 표현을 한다는 작가의 이름답게 이 작품은 글로 쓰여진 그림의 느낌이 충분했다. 소설은 동거 커플로 보이는 Y와 B의 관계를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고 그들을 온전히 대결시키지도 서로 공감하게도 만들지 않았다. 심지어는 왜 같은 공간에 있는지 조차 의문이 가도록 했다. 그렇다고 완전히 단절된 과거, 앞을 내다볼 수 없는 막막함만을 질료로 하지는 않았다. 그저 몇 개의 주어진 지금 상황과 회상의 파편, 주변 서술로 관계를 예측하고 갈등을 감지할 뿐이었다. 너는 너이고 나는 나, 이유같은 건 묻지 않는다, 는 식이었달까. 마치 자신의 이야기를 남 이야기 하듯 담담히 읊조리는 그들의 이야기. 이 작가의 고백하는 방식이 건조했기 때문인지 소설은 사막같이 쓸쓸했음이다. 김유진의 다른 작품을 만나본 적이 없었기에 그 첫인상이 더 조심스러웠다.

  특이했던 건 이 소설에서 어떤 의미있는 족적을 남긴 듯한 ‘먼지’와 ‘벌레’였다. ‘먼지’는 희미한 안개처럼 이들 일상을 뒤덮고 있었으며 ‘벌레’는 이들과 같이 숨쉬고 서식하는 것으로 느껴졌다. 벌레와 먼지는 서로 상관은 없어 보였지만 그림같은 이 작품을 생물처럼 살아움직이게 하는 유기적인 배경으로 존재했다. Y는 인터뷰의 녹취록을 정리하는 사람이고 B는 무언가를 깍아 내고 부수는 사람이었다. 이들은 헐값에 산 곰팡내 나는 집에서 하루 종일 먼지를 통과하면서 각자의 작업에 몰두한다. B가 Y에게 말하는 집이 아름다워질 ‘가능성’이란 곧 이들의 소박한 꿈과 행복을 암시하는 듯 했다. 그런데 그 가능성이 견고하게 축조되지 못하고 서서히 무너져 가는 것처럼 보인 것은 무엇 때문인가. 중요한건 김유진을 거쳐간 이들 작업 공간의 서사적 분위기였는데 그곳에 바로 ‘먼지’와 ‘벌레’가 지속적으로 이들을 물리적, 심리적으로 지배하고 있더라는 것이었다.

  여성으로 보이는 Y는 ‘생략된 말을 찾아 문맥에 맞게 끼워 넣는’ 것이 주된 작업이었고 ‘문장과 문장 사이의 공간, 대화와 대화 사이의 간극, 언어로 표현하기 전에 눈빛이나 손짓으로 대체하는 대화들’을 잘 손질해야 하는 일이었다. 즉, 주어진 문장을 말이 되도록 재정립하고 틀린 것은 법칙에 의해 교정하는 것이 자신의 업무였던 것. 이에 반해 남성으로 보인 B는 남이 버린 재료라도 자신의 필요에 맞게 조립, 가공하여 일상의 물건(작품)을 만들어 내는 것이 기술인 사람이었다. Y와 B는 처음부터 완벽하지 않은 미완성인 현실, 심지어는 타자가 훼손한 현실까지도 자기 생각과 몸으로 재완성해 나가는 우리 사회 재활용꾼, 리메이크 전문가들이다. 이들이 표상하는 것은 사회공동의 필요에 의해 그 나머지의 시간과 공간을 담당하는 보조적 일꾼으로서의 사회구성원, 예를 들면 배달원, 운전수, 청소부는 아니었을까. Y와 B는 어쩐지 배울 만큼 배우고 능력도 있었지만 신체적, 지적으로 가장 활력적인 청춘의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비정규직이나 단순노동, 사무보조 등의 노동에 내몰린 젊은이로 생각되었다. 이들에게 닥친 재난은 자신이 가진 능력을 마음껏 발휘하지 못하는 기회상실의 현실은 아니었을까. 그래서인지 ‘개수구 안에 버티고 있는 벌레’나 ‘온 집안에 살아있는 듯 태어나고 이동, 번식하는 먼지’는 익히 알고는 있지만 서로 무어라 말할 수 없는 말해봤자 소용없는 이들 사이 자조적 현실로 여겨졌다. 이 소설의 제목이 불같은 청춘을 상징하는 ‘여름’이지만 그 여름의 바닷가에 이들보다 더 생생한 풍경으로 자리매김한 바다벌레는 Y와 B의 여름을 옥죄는 무시무시한 현실-병, 가난, 일자리, 아이, 집-로서 심볼화 되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나는 이 작가의 슬픔에 거리두기 작법이 외려 서늘하고 시리게 느껴진다. 남의 슬픔을 멀찌감치 떨어져 구경하게 하는 작가의 계획된 고집이 마음에 든다. 가령 체리주를 담그고 다음해 겨울에 먹고 싶다는, 아니 명절음식도 먹고 싶다는 남자가 여자의 테이프에서 흘러나온 남의 목소리를 배경으로 피칠갑을 두른 연극을 하게 하고 남자가 쌓은 체리나무 그늘아래 작은 봉분위로 화관처럼 체리가 떨어지게는 물론이요 마침 여자는 겨울을 기다릴 수 없다는 듯 봉분을 밟은 채로 체리나무 가지를 꺾게 하다니. 이들의 여름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녹색의 잎사귀 위로 떨어지는 검붉은 체리같이 낭만적이고 강렬하다. 꽃이란 무엇인가. 세상의 수많은 먼지와 벌레의 공격에 맞서 싸워 이긴후 마침내 터뜨려지는 꽃망울이 아니던가. 꽃이 되지 못한 청춘은 얼마나 슬픈 것인가. 꽃이 피는 것을 보지 못하는 계절은 얼마나 아픈 것인가. 그러나 이들은 말한다. 계절이 한바퀴를 돌아 설령 다시 꽃이 피는 것을 보지 못한다 해도 그때 꽃잎의 색깔만은 누구보다 화려하게 그릴 수 있다고. 그건 자신들과 같은 색이기에 분분히 기억할 수 있다고.  젊음은 바로 그런 감각에 대한 자신감이며 그것을 잃지 않는 것이야말로 집이 아름다워질 ‘가능성’이라고.
  

#3. 악몽의 축배, 그 탈출의 가능성..........................................................이반 멘슈코프의 춤추는 방/이장욱 

   이장욱은 이번 수상에서 김성중과 함께 두 번째 젊은 작가의 대열에 이름을 올렸다. 내가 느낀 이 작가의 소설은 무엇보다 재미있게 읽힌다는 장점이 있었다. 이장욱은 독자에게 질문하고 은밀하게 힌트를 제시하는데 있어 독자의 선험적 지식이나 경험, 정보를 교묘하게 이용하는 치밀한 구석이 있었다. <고백의 제왕>에서는 학창시절 누구에게나 있을 법한 그 시절 친구를 직접적으로 떠올리게 하고 <변희봉>에서는 소설 이전에 우리가 알고 있던 배우 ‘변희봉’을 서사적 미끼로 활용한다는 것이다. 스토리는 더욱 속도감이 붙게 되고 그 결말이 궁금해 흥미는 배가 되는 식이었다. <고백의 제왕>, <변희봉>으로 이어지는 서사적 모티브엔 언제나 진실과 거짓, 현실과 환상이라는 대립장치가 있었고 작가는 그 속에서 치열하게 진실을 파헤치는 역할을 담당했다. 그래서인지 이번 작품에서 러시아 작가로 등장하는 ‘이반 니콜라예비치 멘슈코프’ 역시 실존인물이 아닌지 의심스러웠고 ‘만기’가 ‘변희봉’에 집착했듯이 작품 속 ‘나’는 ‘이반 멘슈코프’를 파헤치는 것이 소설의 핵심일 것이라 생각하였다. ‘변희봉’이 우리네 인생의 진실에 물음을 던지는 기표였듯이 그도 그러할 것이라 여겼던 것이다.

  하지만 러시아 작가는 실존인물은 아니었고 외려 러시아 문학도인 ‘나’는 실존인물 이장욱인 것으로 보였다. 학생시절 러시아에서 몇 개월 기거한 경험과 그곳에서 신학 전공의 룸메이트를 만나 긴 여행이라는 추억을 공유한 이장욱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공동주택에서 19세기 여행자인 자신과 재회한다. 20여 일 동안 그 도시에 머물며 기록한 작가노트에서 알 수 있듯이 소설은 불면의 밤과 악몽의 기록으로 탄생한 결과물이었다. 내가 생각하기에 작가는 사회주의 체제가 붕괴한 직후에 경험한 소비에트 연방과 십삼 년이 흘러 작가 된 후 다시 찾아간 도시 사이에서 무언가 고통스런 작가로서의 균열감을 생생하게 체험하고 온 듯하다. 그 괴로움이 이반 멘슈코프의 방을 그토록 춤추게 만든 것이 아닐까. 그의 방을 마치 자기 몸처럼 치열하게 춤추게 함으로써 그 공간을 탈출하고 싶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탈출하지 않아도 좋으니 자기만의 묘법과 작가적 구상으로 탈출구를 만들어 보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그러므로 여행의 목적은 흔들리는 작가적 자아의 원인을 찾고 그 자아를 미치도록 깨부순 후 또 얼마간 흔들리지 않을 튼실한 자아를 구축하고 돌아오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익숙하고도 낯선 도시에서 반복되는 불면과 악몽 속에서 작가가 발견한 탈출구는 무엇이었을까.

  19세기로 표상되는 도시는 작가의 꿈을 키우고 의지를 다지게 된 희망의 원형지, 꿈의 생산지로 이해되었다. 하지만 사회주의가 몰락한 도시의 원형은 이제 자본주의의 불안을 생산하며 자신이 탈출해온 그곳과 닮아가고 있었다. 이 작품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 바실리섬. 스례드니 15번가 98번지. 5층 7호’에 살았다는 룸메이트 안드레이의 친구, 러시아 작가 이반 멘슈코프는 작가 이장욱이 재회한 자신의 이상향, 즉 또 다른 자아로서 기능했다. 그는 소비에트의 몰락 이전에 전위적인 반체제 작가였고 자본주의 물결 이후엔 공포소설로 전향해 베스트 셀러 작가가 된다. 그는 ‘잠을 잘 때마다 다른 사람들의 꿈속에 들어가게 되는 소녀’의 이야기로 소설가가 독자들의 ‘꿈’속에 들어가 그들을 ‘꿈’꿀 수 있게 하는 특별한 존재임을 역설한 작가였다. 그의 작품인 <꿈>이 공포소설이었다는 것이 인상깊었는데 공포는 작가 이장욱이 19세기의 방에 머물며 체험한 특별하고도 지배적인 정서였다. 또한 룸메이트였던 안드레이가 러시아 작가의 친구로서 그를 살해한 용의자일수 있다는 것, 안드레이도 그를 따라 공포소설을 쓰게 되었다는 서사구조를 뒷받침하는 코드이기도 했다.

  그런데 가만 보면 러시아 작가의 방이 춤을 춘 것은 결국 밤이면서 동시에 낮인 백야에 꾸는 악몽, 환각과 같은 비현실이며 안드레이는 그런 공포스런 현실에 가장 잘 적응한 친구에 불과했다. 즉, ‘자신이 살해한 작가의 방에 앉아서 아무도 읽지 않는 공포소설을 쓰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는 독백은 악몽과 환각에서 깨어난 작가 자신이 바라본 꿈속의 자아는 아니었을지. 작가는 ‘이 악몽이 과연 누구의 것인지’, ‘무엇의 악몽이었는지’에 대해 영원히 끝나지 않는 장편소설을 써야 할 것임을 친구의 목소리를 빌어 대답했다. 그리고 그 악몽의 결과를 이렇듯 소설로 완성했다. 작품을 썼다는 것은 이반 멘슈코프의 방에서 의미있는 탈출구를 발견했다는 뜻이 아닐까. 작가라는 존재는 그 어떤 현실에서도 글로써 탈출할 가능성을 찾아내는 가장 고통스러우면서도 또 가장 축복스런 능력을 타고난 사람들이 아닐까. 그런 작가의 젊음은 바로 탈출이라는 가능성의 여부에 달려있는 건 아닐지. 그렇다면 까만 밤을 하얗게 지샌다는 말은, 꼭 이 작품에 어울릴 관용어가 아닐까.  


#4. 자기정복, 그 치유의 가능성......................................................................................................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일이 벌어지는 오늘은 참으로 신기한 날이다 / 김사과


   분노의 리듬으로 작품 전체의 서사를 장악하는 능력이 무척 인상깊었다. 작년에 이 작가의 단편 중 <매장埋葬>이라는 작품을 읽은 적이 있다. 그때 어떤 평론가는 김사과의 세기말적 환유를 보고 ‘2010년 식의 분신자살’이라는 자극적인 표현(『현장비평가가 뽑은 2010 올해의 좋은 소설』, 2010)을 했다. 김사과는 괴물들이 모여 사는 도시, 이곳 서울에 사는 인간은 영혼이 없다고 말한다. 맥도날드나 커피 전문점, 대형 쇼핑몰의 매장(賣場)은 김사과의 글을 통해 매장(埋葬)되는 신세로 전락한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 소설은 이번 소설의 원인이 되는 배경으로서 느껴진다. ‘도대체 이 모든 분노는 어디에서 오는 걸까’ 하는 화자의 질문에 그 분노의 출처는 바로 이곳이오, 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난번에도 실패했듯이 이번에도 또 실패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파괴를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분명한 사실은 우리들이 가난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더욱 확실한 것은 우리가 계속해서 돈이 없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따라서 우리들 누구도 결혼을 하고 자식을 낳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상황은 점점 더 나빠 질 것이고 우리는 자식에게 부랑자라는 직업을 선사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아마도 우리는 우리의 자식들을 사랑할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런 이유로 우리는 결국 우리의 자식들을 증오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결국 정신적/물질적 빈곤을 벗어날 방법을 찾아내지 못했다. 결국 세계를 바꿀 수 없으므로(그리고 앞으로도 계속해서)우리는 이제 그만 세계를 끝내려 한다. 그 방법은 더 이상의 번식을 중단하고 집단학살과 자살을 병행하여 인류 전체가 멸종에 이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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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장埋葬』, 김사과, 현장비평가가 뽑은 2010 올해의 좋은 소설,  83p

  스물다섯 살의 화자가 자신은 영혼이 없기 때문에 아무것도 이해하지 않아도 된다는 이 종말론적 선언은 그대로 오늘의 청춘을 대변하는 현장의 목소리만 같다. 도무지 바뀌어 질 것 같지 않은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이 다음 세대를 위한 역할을 포기하겠다는 것이니 얼마나 섬뜻한 외침인가. 이번 수상작을 읽고 다시 <매장埋葬>을 들쳐보았을 때 <매장埋葬>은 이 작품의 전야제 격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 처절한 외침이 세상과 길거리와 회사와 가정을 뚫고 나와 마침내 자신마저 뚫고 나온 상태로 통제불능의 상황이 전개된 것이 이번 소설이었다.

  이 작품에서 평범한 직장인으로 보이는 화자는 회사를 나와 평소 자주 들르는 국밥집 아주머니를 우발적으로 살해 한 후 연이어 그곳을 방문한 중학생을 살해하고 집에 돌아와 사소한 시비 끝에 아버지와 어머니마저 살해한다. 마지막 장면은 무심해보였던 누나와 대치하는 설정이었다. 윗 세대와 다음 세대를 제거하고 자신처럼 희망이 전무한 같은 세대, 누나에게만 분노를 표출하지 않은 것이다. 이른바 묻지마 범죄의 단적인 케이스였지만 누나는 동세대로서 작가가 그녀 스스로 세계를 끝낼 기회를 주고 싶었던 모양이다. 이 모든 끔찍한 일을 자행하는 화자는 특별히 범죄에 노출될 환경에 살아오지 않았고 피해자 또한 살해당할 만한 개연성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내가 슬프고 가슴아팠던 것은 바로 분노의 주인공이 정상적인 교육을 받고 열심히 살아왔으며 ‘해롭고, 더럽고, 불길한 정적으로부터’ 철저히 보호받으며 살아왔다는 것이었다. 자신의 의지대로 살아본 적이 없는 별 문제시 할 것이 없어 보이는 젊은이였다는 것이다. 작가 김사과의 나이를 보니 내가 중학생일 때 태어났다. 그녀가 주장하는 스물다섯의 세상에서 나는 불혹의 기성세대였다. 그녀와 나 사이의 십오년은 정상적인 사람들이 비정상으로 병드는 시간이었을까. 그(화자)가 왜 은폐된 분노를 세대 간 단절이라는 극단적인 폭력으로 표출하였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실은 화자가 자타공인 이미 미래가 없는 불안한 청춘세대임을 전제로 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소설가 김사과로부터 설득되는 에너지 전환에의 가능성 때문일 터이다. 김사과의 세상 종말을 위한 세대적 소설혁명은 계속 될 것이고 그것은 여전히 미래가능성으로 치환될 확률이 많다. 분노한다는 것은 젊다는 것이다. 프랑스 레지스탕스 운동가 출신의 93세 스테판 에셀은 분노하고 저항하는 것이야 말로 가장 창조적인 행위라 말하였다. 문제는 에너지의 향방이다. 격분하여 희망을 놓쳐버리는 것은 역사를 퇴보시키는 만행일지 모른다. 분노로 한평생을 살아온 스테판 에셀은 답한다. 비폭력이란 ‘우선 자기 자신을 정복하는 일이고 그 다음에 타인의 폭력성향을 정복하는 일’이라고. 김사과의 분노의 에너지가 창조적인 저항(문학)을 통해 반드시 자기 자신과 타인은 물론, 우리 사는 이 어지러운 세상까지도 감싸안을 치유의 에너지로 발전될 그날을 기다린다.


#5. 황금빛 야화, 그 성장의 가능성........................................................................허공의 아이들 / 김성중

  작년 수상작 <개그맨>을 생각하면 이 작품은 장르의 전환에 이어 주제마저 심화, 확장된 느낌이 들었다. 공통으로 떠오른 키워드는 여전히 ‘상실’에 대한 기억, ‘소멸’에 대한 연민이었달까. <개그맨>이 스무살의 첫사랑이 어떻게 상실되는지 그 과정을 아련하게 포착한 비극적 희극이었다면 <허공의 아이들>은 아직 여물지 않은 소년, 소녀가 다가올 자신의 성장과 미래를 어떻게 예감하는지를 그려보는 동화 환타지였다. 이번엔 상실되고 소멸되는 것이 시간과 기억뿐 아니라 공간과 육체에까지 확대되었다. 그 대상도 성인이 아닌 성장하는 미성년으로서 그것은 잔인한 설정이었다. 과거의 상실보다 미래의 소멸이 더 뼈아픈 상처가 아닐까. 아직도 기억나는 것은 이 작가가 작가노트에서 자신은 여전히 ‘꿈의 바다를 헤매는 보트피플’이며 구조가 아닌 조난자로서 계속하여 표류를 원한다는 말이었다. 그가 바다위에 서 표류하며 깨달은 것이 소설의 결과라면 이번 조난은 작가에게 어떤 고통을 선물하였을까.

  야구 후보 선수인 소년과 피아노 건반을 치는 소녀. 다세대 주택과 타운하우스로 대변되는 이들에게 닥친 재앙은 집이 허공에 떠오르고 사람은 투명해져서 결국 사라지는 세상이었다. 앞선 수상작과 비교해보면 재난의 종류 면에서 <물속 골리앗>과 같은 계보에 속하며 서사의 표현 면에서 <여름>과 유사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바람이 불고 땅이 무너지고 불이 나고 길이 없어지는 것은 어느 재난과 다르지 않았지만 그 결과로 집이 허공에 떠오른다는 설정은 무엇보다 흥미로왔다. 상상만으로도 내 존재가 이곳 세상과 멀어지는 느낌이었고 이들이 소멸되어도 천사가 되어 하늘로 승천할지 모른다는 생각을 꿈처럼 연장하고 싶었다. 소녀는 자신의 아래에 위치한 타운하우스를 ‘허공의 금빛 무덤들’이라고 불렀는데 작가노트에 보니 태국에서 세에라자드의 꿈을 꾸고 이야기에 대한 환상을 품고 돌아온 것으로 보아 이 작품은 천일야화의 연장선상에서 피어난 슬픈 동화가 아니었을까 싶었다. 하지만 그저 재미난 하룻밤 이야기가 아니라 보다 냉혹한 시선으로서 작가는 ‘사라지는 세계에서 성장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지 우리에게 묻고 있다. 즉, 부모가 사라졌고 곧 이 세상도 붕괴될 것이 뻔한 상황에서 계속하여 키가 자라고 마음도 성숙해 지는 것에 어떤 의미를 부여할 것인지.

  작가는 재난의 동반자였던 소녀가 사라진 후 세상이 무너지는 소리 속에서도 단연 반짝이던 ‘뼈가 자라는 소리’를 소년 자신과 우리에게 들려준다. 그것은 이제 곧 내 차례가 되었지만 계속하여 성장하고 있는 자신을 자각할 수 밖에 없는 생존자의 유일한 기쁨인가, 잔인한 슬픔인가. 어쩌면 이 소년의 유일한 생존방식은 성장이 아니었을까. 성장하지 않는다면 더 이상 생존도 불가능 한 것은 아니었을까. 인간은 어짜피 모든 성장을 다 하고서도 죽음을 맞이한다. 이는 바꿔 말하면 결국 소멸하려고 성장한 것에 다름 아닌 것이다. 다만 성장하는 동안은 소멸이 목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생존할 수 있었던 것이다. 나는 이 작품의 소년이 자신의 성장을 인식하는 그 순간이야말로 바로 내일 소멸할지라도 오늘을 죽도록 열심히 살게 하는 동력이라는 깨달음을 얻었다. 그것은 성장이 가져올 새로운 시작의 가능성인 것이다.


#6. 가질 수 없는 것들, 그 소유의 가능성 .....................................................................너의 변신 / 김이환


  이 작품은 이 책에서 가장 자극적, 충격적이었다. 처음에 말이 안 된다고 웃다가 나중에 울게 되는 이야기였다. 작가가 제시한 상황이 가장 미래적이었지만 전달하는 주제는 어느 작품보다 고전적이었달까. SF적 서사의 구조가 흡사 박민규 작가의 『더블』에 수록된 <깊>, <크로만, 운>, <굿모닝 존웨인>등의 작품을 떠올리게 했는데 절로 이 작가의 다른 작품이 궁금해지기도 했다. 이 작품은 형식면에서도 단문으로 종합적인 구성을 시도하는 실험성이 돋보였다. 기억되기 쉬운 단어들이 산만해 보일 수 있는 텍스트의 요약처럼 강조되어 보였다. 소재면에서도 동성애 코드와 신체성형이라는 충분히 있을 법한 미래지향적 소재를 잘 믹스하여 인간존재의 근원적인 성찰과 사랑이라는 오래된 명제에 신선한 질문을 남겼다. 전개되는 양상은 세기말적이었지만 스토리의 신선함 때문에 가장 젊다고 느껴진 소설이었다. 그래서인지 가공된 소설의 마지막은 다른 작품들 보다 슬픔의 정도면에서 강렬하지는 않았다. 외려 기발한 아픔, 상상하는 고통, 보류된 슬픔, 불쾌한 고독과 같은 감정들이 복합되어 걱정스런 맘이 더 많아졌다고 할까. 이 작품에 등장하는 두 남자는 연인이고 한 명은 의학적 기술을 이용해 자신을 완벽하게 변신시키고자 한다. 시대적 배경은 ‘새로 개발된 이식뉴스’나 동물에 의해 ‘만들어낸 신체’, 혹은 개인의 기호대로 버려지는 신체, ‘얼굴을 바꿔 이식한 배우’등으로 이슈화 될 수 있으며 대중화된 신체 개조수술로 인간은 자신을 원하는 대로 완벽하게 설계, 건축할 수가 있게 된 것이다. 목적이 의료이든 미용이든 결과는 환타스틱했다.

  이 소설에서 변신을 하는 남자는 결국 더 잘보이기 위한 상대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지독히도 사랑한 사람이 아닐까 싶었다.

사랑(Amor)은 외부 원인의 관념을 동반하는 기쁨이다. 사랑하는 자는 필연적으로 사랑하는 대상을 계속 소유하고 유지하고자 한다. -에티카

  슬픔에 일가견이 있었던 스피노자는 나의 기쁨을 유지하기 위해 ‘사랑하는 자는 사랑하는 대상을 계속 소유하고 유지하고자 한다’고 말한다. 스피노자가 말하는 기쁨이 슬픔이 되는 이유는 바로 변신을 꿈꾼 남자가 사랑한 대상이 자신이었기 때문이 아닐까. 남자는 완벽한 자기 자신이 되기 위해 우리가 인간이라고 생각하는 형체를 포기하기에 이른다. 하나의 인격체로 기능하긴 하지만 살과 뼈와 피가 없이 오로지 오르가슴만 느끼는 인간의 새로운 버전. 그것이 전류가 흐르는 단백질 덩어리인지는 알 수 없으나 남자는 자신의 기쁨만을 유지하기 위해 사랑하는 자신을 소유하기 위해 그렇게 한 것이다. 그의 변신은 긍정적인 변화인가 절망적인 변질인가. 이 작품은 물질만능, 외모중심의 한국사회가 성형천국이 되어버린 현실을 씁쓸히도 조롱하며 경고하는 준엄한 텍스트였다. 성형의 끝간데를 미련없이 보여주며 문학으로 미래도를 제시한 점은 이 작품의 가장 큰 성취이며 우리에게도 서늘한 교훈을 주기에 충분했음이다. 이 작품이 전하는 치명적인 가능성, 그것은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한 욕심, 가지지 말아야 할 것에 대한 쾌락, 바로 인간이 소유하는 인간에 대한 슬픔은 아니었을까.


#7. 놀이공원의 추억, 그 소통의 가능성.......................................................................정용준 / 떠떠떠, 떠


  이야기니까, 슬프고 아름다울 수 있었다. 만약 현실이라면 기구하고도 구슬픈 사연이 아닐 수 없는 소설이었다. 나는 이 책의 마지막 수록작인 <떠떠떠, 떠>가 약간의 신파성을 지닌 사랑을 지향한 것이 좋았다. 물론 에버랜드 같은 놀이공원이 그 배경인 것도 좋았다. 비록 주인공은 간질과 말더듬이라는 치명적인 장애를 가진 남녀였지만 사자와 곰의 탈을 쓴 캐릭터로서 분했던 것도 드라마틱하게 느껴졌다. 그들이 주고받던 사랑의 방식이 어쩐지 향수를 자극하는 매력을 지녔기 때문일까. 이들은 어린 시절 학교에서 각자 자신의 장애로 인해 이미 결정적인 수모와 모욕을 당한 공통의 경험을 지니고 있었고 같은 현장에 서로의 증인으로서 자리하기 까지한 운명적 인물들이었다. 장애와 상처의 공유는 이들이 이미 불완전한 공감에서 완전한 소통으로 발전될 필요조건을 함의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이들 남녀의 공통점은 ‘할 수 있는 일이 이것 밖에 없었다’는데 있었다. 동물의 탈을 쓰고 잠시 인간이길 유보하는 것. 그런데 이들이 서로 사랑을 하면서 할 수 있는 일은 그 이전보다 많아진다. 작가는 사랑하는 사람들끼리 사랑을 소통할 수 있는 상징적 장치로 서로의 ‘혀’를 주장했고 이들은 열심히 자신의 ‘혀’를 사용해 상대의 상처를 위로했다. 정확히 의사를 표현할 수 없고(말할 수 없는 입) 언제 어디서 거품을 물고 발작을 일으킬지(불치병에 걸린 입) 모르지만 이들의 ‘혀’는 각자의 한계를 뛰어 넘어 그 이상의 소통을 이루는 메신져로서 제 2의 아름다운 입이 된다. 그래서 제목으로 기재된 <떠떠떠, 떠>는 말을 더듬기 시작할 때 소리나는 표음인 ‘떠’의 분절음에서 시작해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는 순간의 행복한 기분, 마치 비행기를 타듯 붕 ‘떠’ 있는 상태의 순간을 포착한 언어이면서 앞으로 지금보다 ‘더’ 많은 것을 소통하고자 하는 소망의 언어 모두를 담고 있는 복수의 타이틀이라는 생각을 한다. 그것은 마치 벙어리와 장님이 소통하듯 세계를 놀라게 하는 사랑의 힘에 다름 아닐 것이다. 그 놀라운 힘은 결국 말더듬이의 입을 열게 하고 우리를 울게한다.

  그건 당사자는 행복해도 바라보는 자는 가슴아픈 명장면이다. 그들의 소통이 슬픈 건 아마도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모든 것의 노력이 담겨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그들을 보며 우리가 슬픈 건 혹 우리 자신의 소통방식때문은 아닐까. 예를 들면 곰의 탈을 쓴 여자가 발작을 일으켜 바닥에 누워 있을 때 사자의 탈을 쓴 남자는 사람들의 관심을 돌려보려 열심히 춤을 추는 그 애절한 마음, 그것처럼. 우린 그들의 방식이 눈물겨운 것이고 그렇지 못한 우리의 소통이 슬픈 것이리. 곰이나 사자의 탈을 쓰지 않고도, 그들보다 멀쩡한 인간이지만 곰이나 사자만큼의 노력도 아니 아무 노력도 하지 않는 더 초라한 사람들 이기에.


  이제, 슬픈 노래들은 끝이 났다. 일곱 편의 이야기는 마치 애상곡의 모음집처럼 그렇게 절실하게 연주된 것이었다. 때론 진혼곡이 되어 누군가를 애도했고, 때론 소나타가 되어 계절을 연주했다. 때론 한밤의 야상곡으로 고독한 랩소디로, 보랏빛 환상곡 혹은 오렌지빛 세레나데로 그 슬픔을 처연히 축복했다. 마지막엔 무반주로 싱그러운 아카펠라음이 들려오듯 청명한 사람의 목소리도 기억에 남았다. 이들 모두가 한마음으로 노래한 건 슬프지만 그걸 알고서도 계속해서 살아갈 것이라는 누구보다 명징한 지속적 가능성이었다. 시련과 상처, 고통과 분노, 상실과 소멸을 안고서도 치유와 사랑, 성장과 소통의 가능성을 잃지 않는 것. 그것은 젊음이 가진 특권이자 가장 소중한 의무일 것이다. 산다는 건 젊음으로 성장하고 그 젊음을 유지하기 위해 그 어떤 가능성도 버리지 않는 눈물겨운 여정은 아닐까. 그렇다면 젊음의 완성이 곧 인생의 완성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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