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경계기획자_한희>



5년 만에 알라딘 서재로 돌아왔습니다. 

그동안 생업에 몰두하며 정신없이 살았습니다. 

직업이라 하지 않고 생업이라 한 이유는 먹고 사느라 바빠

직업적 삶을 살고 있다는 인식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죠. 


몸과 마음이 여유로와 진건 코로나 팬데믹 이후 부터였는데 

이 시기 책을 두권 집필했습니다. 


첫번째 책은 제가 해온 일, 전시기획을 바탕으로 

기획자의 하루를 서술한 것입니다. 


-------------------------------------------------------


저는 제 자신을 무경계기획자라 여기고 살아갑니다.


91년도 대학교 2학년 겨울방학 때 아르바이트로 참여한 93 대전 엑스포 전시시나리오 작업이 

전시기획을 직업으로 삼게 된 계기였지요.

 

대전 엑스포 이후 90년 대 중후반은 우리나라의 다양한 분야에서 국공립 박물관이 설립될 시기였습니다

이 시기 혹독한 이십 대를 보낸 저는 박물관, 과학관, 엑스포 등의 

전시공간 및 콘텐츠를 기획, 디자인, 설계, 연출하는 

전시전문가로서 성장했습니다. 

 

제 경우는 전시문화산업이 급격하게 발전하는 과정 속에서 

광고, 영화, 특수영상, 이벤트 등의 문화예술 인접분야의 기획에도 경력이 추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총망라한 분야가 바로 전시이고 

교육, 문화, 첨단기술, 예술, 마케팅이 융합된 고도의 기획력이 요구되는 사람이 

전시기획자라 생각합니다


최근 들어서는 복합문화 전시공간에 

인공지능, 가상현실, 미디어 아트, 메타버스, 실감콘텐츠 등 

첨단분야의 콘텐츠 기획까지 수행하고 있으므로 

그 경계의 끝이 없다는 의미로 무경계기획자가 되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이 책은 특히 제가 여성이기에 경계없는 기획자의 삶을 살아오면서 느끼고 깨달은 개인적인 경험들을 

편안하고 공감가는 문체로 풀어놓았습니다.

 

막상 기획에 도움되는 책을 사려고 서점에 가서 훑어보면 

체계적이긴 하나 너무 어렵고 지루하거나

내가 하고 있는 기획과는 거리가 멀어 찾고 있는 간절함에 비해 

선뜻 손에 잡히지 않는 책들만 가득했던 경험들이 많았습니다

또 고르고 골라서 한 권 사오면 여간해선 끝까지 읽기도 힘들고 

읽었다고 해서 큰 도움도 되지 않았기에 

무엇보다 읽기 쉽고 실질적인 도움이 되고 싶었어요.

 

<무경계기획자>는 기획의 영역에 몸 담고 있는 직장인들이 

가볍게 들쳐 보고 또 꼼꼼히 읽지 않더라도 기획자라는 치열한 하루 속에서 

커피 한잔과도 같은 조그만 도움이 되고자 합니다.

 

아침에 일어나 출근을 하고 바쁜 오전 시간을 보내고 

점심을 먹고 오후에 일을 마무리 하고 저녁이 되어 퇴근을 한 후 

집으로 돌아와 몸을 쉬는 평범한 하루의 시간순으로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그리하여 독자가 책을 펼친 시간이 아침이라면 아침의 내용을 훑고 

저녁이라면 기획자의 저녁을 엿보고 하는 식입니다.

 

후반부에는 기획자라면 써먹을 만한 알찬 팁들이 

제가 직접 기획했던 사례와 함께 친절하게 제시됩니다

브런치 스토리에서도 가장 검색과 조횟수가 많았던 목차들입니다.

 

기획이라는 분야가 사실 기획자의 역량에 따라 그 결과치가 하늘과 땅만큼입니다

기획업무에 도전하고자 하는 취준생이나 이미 기획자로 살아가고 있는 직장인

혹은 그중에서도 여성이라면 더욱 추천드리고 싶습니다.



--------------------------------------------------------


<이별보관소_한희>



직업적인 경험에서 정리한 글 외에 

우리 일상 생활에서 일어난 크고 작은 이별들을 모아 정리한

공감에세이도 출간했습니다. 


물리적으로는 해외출장가는 비행기 안에서 

정서적으로는 누군가와의 이별을 정리하고자 할 때 

적극 추천드립니다. 





기획자는 희생을 밥 먹듯이 하며 모두를 환생시키는데 기여하는 사람이다. 그는 무수히 많은 종류의 새벽이 오는 소리를 들어본 적 있는 사람이다. 그중에 하이라이트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고, 어떤 소리도 내지 않았지만 마침내 아침을 완성하는 무음의 시간일 것이다. - P134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24-01-19 20: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4-01-20 04: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여성 CEO를 위한 <북테라피;독서치유>모임이 4월 10일부터 시작되네요.

2시와 7시 선택할수 있어서 좋습니다.

이번 봄은 꽃이 져도 쓸쓸한 마음이 덜할것 같습니다^&^

#북테라피 #여성CEO_북테라피

 

 

높은 지위에 오른 여성은 같은 지위의 남성보다 더 자주 우울 증세를 보인다는 연구 결과가 있습니다. 전통적으로 여성이 리더가 되는 현상은 비정상으로 간주되어 저항에 직면하기 때문입니다. 적극적인 여성은 여자답지 못하다고 비난받고, 전통적인 여성상을 따르면 카리스마가 없어서 일을 맡길 수 없다고 평가 받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여성이 결혼을 하면 직장에서 물러나야 하는 근거가 되며 결혼을 하지 않으면 워커홀릭의 독종으로 평가 받기 쉽습니다. 출산이라는 과정은 직장경력의 3년 이상을 단절시키는 장애요소로 작용합니다. 육아 역시 또 다른 여성의 희생이 있어야 일의 전문성을 유지할 수 있는 구조입니다. 창업의 경우도 여성지원은 남성 지원 금액의 60% 미만에 해당합니다. 지원 산업특성도 도소매위주의 생계형 창업에 국한되는 경향이 많습니다.

 

이 모든 걸 극복하고도 당당한 여성 CEO로 살아가려면 무엇보다 강철 같은 내면과 높은 자존감, 그리고 일과 사랑에 대한 균형감이 필수입니다. 아무도 여성 CEO로 무사히 살아가는 방법을 가르쳐 주지 않았고 같이 이야기 나눌 곳 또한 없었습니다. <북테라피; 독서치유>모임을 통해 함께 해법을 찾고자 합니다. 총 5회에 걸쳐 책을 읽고 모여서 낭독하고, 말하고, 들으며, 서로의 위로가 되는 시간입니다. 내 안의 그림자를 발견하고 잘 다스리기 위한 과정입니다.

 

여성을 위한 북테라피 알아보고 신청하기

------☞ https://onoffmix.com/event/131578

...

여성 ceo를 위한 북테라피 알아보고 신청하기

-------☞ https://onoffmix.com/event/13158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책을 통해 함께

읽고, 말하고, 듣고, 쓰기를 나누고 싶었습니다.

지식자랑하는 한명의 빅마우스는 사양합니다

지구평화나 경제발전같은 거창한 대의도 부담스럽습니다.

 

독서를 통해 내안의 그림자를 발견하고

함께 이야기 나누며 서로 성장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가족, 배우자, 타인, 공동체로 인한 상처가

함께하는 동안 치유의 시간으로 전환되길 바랍니다.

 

총 5주에 걸쳐 5회의 알찬 구성으로

메인 도서는 정여울의 <늘 괜찮다 말하는 당신에게>와

보조 도서 스캇펙의 <아직도 가야 할길>

선정했습니다.

 

 

 

북테라피 홈페이지를 통해 티켓을 구매하시면

20% 할인된 금액으로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1회 티켓도 구매 가능합니다)

한분당 많은 시간이 돌아가도록 인원을 제한하고 있습니다.

 

===구매하기 바로가기====

https://booktheraphy.modoo.at/?link=br2lk4po

 

 

 

- 고정 패널외에 6명 이하로 인원을 제한하고 있습니다.
(결제순으로 마감합니다)
- 1회를 나오신 경우 환불이 되지 않습니다.

 단 모임 일주일 전까지는 취소하실 수 있습니다.
- 참석하신 분들과 서로 공유하며 치유와 성장을 목적으로 하는 모임입니다.

가급적 5 회 모두 참석 가능하신 분만 신청해주세요
-한권당 4~5회를 과정으로 하고 있습니다.

한권의 책이 끝나면 다른 책으로 연속해서 이어지는 클래스 입니다.
-매회 심리상담전문가, 동화작가, 코칭전문가 등의 패널이 참여하실수 있습니다.

 

 

 

<선정도서 자세히 보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뜨거운 피
김언수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신기하게도 이 소설을 덮었을 때, 여름은 끝나 있었다.

어느 여름이 덥지 않았을까마는 이번 여름은 특히, 최고, 최악이라 할 만 했다. 이상하게도 인간은 고통이 극심할 때는 어떻게든 그 상황을 견디다가 조금 나아질 때야 아파하기 시작한다. 여름을 잘 견뎌놓고 이제 더위가 물러간다하니 내 몸과 마음 구석구석 왜 이렇게 아우성일까. 지긋지긋하면서도 그 치열했던 모든 것들을 보내기가 쉽지 않다. 소설도 마찬가지. 책을 덮으면 좀 시원하고 후련할 줄 알았는데 여름 내내 그 북적거렸던 바닷가에 거짓말처럼 손님들이 다 빠져나간 느낌이랄까. 문득 독자도 이렇게 빠져나오기 힘든데 그 출렁거리던 바달 써댄 작가는 어떨까 싶어 새삼 뭉클하기도 했다.

희수의 예언대로 ‘뜨거운 여름이 끝나면 바다로 몰려온 그 많은 사람들은 떠날 것’이고 ‘1993년 봄과 여름, 구암의 날들’도 언제 그랬냐는 듯 서서히 잊혀질 것이고 희수를 포함한 우리 모두에겐 ‘어느새 춥고 외롭고 쓸쓸한 겨울 바다’가 펼쳐질 것이 틀림없다.

이 소설은 ‘봄’과 ‘여름’의 두 챕터로 작가의 말 포함 595페이지 인 채 끝이 난다. 분량의 압박이 만만치 않다. 하지만 쉽게 멈출 수 없는 가독성이 하루키도 따라올 수 없는 경지이며 내용자체가 다음이 궁금해 미칠 지경이라 맘 만 먹으면 빨리 덮을 수도 있는 경우였다. 그런데 쉽게 쉽게 페이지를 넘기지는 못했다. 쉽게 어이없게 죽어나가는 건달이라고 그 인생은 쉬웠을까 싶어 후반부로 갈수록 괴롭고 슬프고 답답하고 힘들었다. 이 소설에서 건달의 죽음은 빈번하고도 일상적이다. 건달이 죽는 이유는 죽어야 할 이유가 있기 때문인데 모든 건달은 자기 이외의 건달을 죽임으로써 자기 삶을 유지한다. 즉 누구도 건달이라면 내 목숨 하나가 다른 건달의 죽음 하나인 법칙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점에서 지금 살아있다는 건 곧 나중에 죽는다는 뜻과도 같다.

사실 배경이 조폭의 세계라고는 하지만 이 법칙은 요즘 같은 경쟁사회에서 세상 어디에도 적용되는 보이지 않는 룰이 된지 오래다. 내가 대학을 합격하는 건 다른 누군가의 불합격을 의미하고 승진이나 승패, 성과를 내는 모든 일이 그러하다. 누군가를 배려하고 경쟁자에게 호의를 베풀며 살기에 우리네 인생은 팍팍하고 벅찬 것이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인 것이다.

또 하나 피 튀기는 전쟁에서 살아남는 과정 자체는 무척이나 구질구질하고 신파스럽다. 소설 속에서 작가는 주인공 희수의 시선으로 독자에게 늘 사업도 인생도 구질구질한 것이며, 사람도 다 거기서 거기며, 깨끗하기만 한 놈도 더럽기만 한 년도 없다고 부르짖는다. 누군가에겐 잔인한 가해자였을지라도 오늘 내게 꼭 필요한 조력자가 될 수 있다. 저 사람이 내게 나쁜 지만이 중요하지 원래 나쁜 사람이었다는 건 하나도 중요하지가 않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우린 누군가에게 가해자가 되어도 예전처럼 죄책감을 느끼지 않고 살아간다. 한마디로 구질구질해 보이기 싫어서다. 그러니까 삶은, 한 계단 올라가는 그 과정은 원래부터 구질구질한 것이었다는 걸 우리 모두는 안다.

“이 바다가 뭣이 좋습니까. 소매치기에, 사기꾼에, 포주에, 창녀에, 양아치들이며, 만날 싸우고 지지고 볶고, 기껏 화해시키려고 자리마련하면 이야기 쪼매하다가 결국 욕하고, 술판 뒤집고, 소주병 날아다니고, 대가리 깨지고, 울고, 그래놓고도 또 술 처마시면 서로 껴안으면서 사랑한다, 우리가 남이가 이 지랄이나 하고 자빠지고, 영감님 저는 마 요즘엔 신파가 딱 싫습니다.”   -414p

 

한때는 아버지나 엄마, 다른 누구처럼 절대 살지 않을 거라고, 절대 질척거리지 않고 깔끔하고 쿨 하게 살 거라고 다짐한 적이 있다. 살면서 아니 살수록 어쩌면 살아 있기에 막장따위, 눈물바람의 신파 따위 피할 방법은 없다는 걸 그땐 알지 못했다. 안타깝게도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지 않고 사랑을 건넬 방법’이나 나 또한 ‘상처를 받지 않고 사랑을 받을 방법’따위 하나도 없다는 걸 이토록 많은 상처를 주고 받은 후에야 깨달았다.

 

소설은 우리 모두 각자 자기 인생의 구질구질함을 펼쳐 보이는 구암과도 같은 바다를 벗어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때론 파도가 때론 태풍이, 그러다가 가끔 평화도 찾아드는 저 질척한 바다를 절대 떠날 수는 없을 것이라 예언한다. 쿨한 듯 보이는 저 바다 앞에서 심장이 뛰고 있는 한 이토록 뜨거운 피를 작동시키지 않을 방법 또한 알 수는 없다고 몰아친다.

 

인생에는 정답이 없다는 정답을 깨닫고 살아가는 당신 역시 좋은 사람으로만 살수는 없다는 걸 어쩌면 처음부터 좋은 사람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는 걸 슬며시 알려준다. 누군가에게 적당히 좋다가도 가끔은 나쁘고, 욕심 없는 척해 봤지만 돌아와 가질 수 없는 것들에 얼마나 좌절을 했었는지 저 바다는 이미 알고 있다고 끄덕인다. 당신의 편의와 행복을 위해 사라져야 할 무엇들을 위해 얼마나 기도했는지 실은 누구보다 눈물짓고 연연해하며 원망으로 보낸 세월이 많았는지 모두모두 이해한다고 토닥인다.

 

이 모든 적나라한 신파를 뒤로한 채 이제야 어른이 된 듯 수줍게 고개를 들고 나온 사람은 누구인가. 희수는 어른이 되어도 여전히 쿨 하지 못할 작가의 분신이면서 우리의 자화상이기도 하다. 이 소설에서 등장인물들은 대부분 이름이 없고 희수, 인숙, 아미 정도만 실명이 언급된다.(그의 소설에선 여간해서 사람의 이름이 등장하지 않는다) 영감이나 노인, 소녀 같은 연령대를 호칭하는 경운 양반이다. 주로 인물의 외모와 성격, 매력, 하는 일, 그로인한 종합적 평가를 통합하여 아주 심플한 한단어로 표기할 뿐이다.(꿈이  벤츠 옆자리에  가스나 태우고 멋지게 해변을 달리는 거라는 마나는 뭐든 하나마나해서 '마나'다) 그래서 등장인물이 많아도 이미 부여된 캐릭터를 따라 장수를 넘기는 일은 무척 신이 난다. 그러면서 독자인 나 역시 (이름없는)그들의 삶에 더욱 가까워질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실명으로 등장하는 인물은 존재감이 무겁고 상대적으로 친근감이 덜하기 때문에 아이러니 하게도 객관적인 거리가 생긴다. 현실이 아닌 소설 속 인물로서만 공감을 하고 싶다는 바램이 생기게 된다.

 

그러나 그 바램은 책을 덮으면서 여지없이 무너지고 결국 희수는 ‘뜨거운 피’를 지혜롭게 운영하는 방법을 알지 못해 힘겨운 삶을 살아가는, 그리하여 아무리 차가운 어른으로 살아가려 발버둥쳐도 신파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고만고만한 우리네 삶을 대표하는 존재로 각인된다.

 

삶은 절대 멋있거나 근사한 것이 아니고, 뜨거움을 모두 놓아버리고서 작동하는 삶은 없으며, 지금 여름의 바다를 건너 왔을지라도 다시 춥고 외로운 겨울 바다는 돌아올 것이 분명하다고. 이 모든 걸 함께 할 수는 없을지라도 다행히 누구나 이렇게 살 수 밖에 없다는 깨달음은 지금 함께 느낄 수 있다는 점에서 소설은 완성도에 다다른다. 하얀등대와 빨간등대에 가보진 못했지만 둘다 가본 듯한 만족을 준다.

 

어쩌면 이토록 구질구질한 삶일지라도 이순간 함께 살아있다는 것이 喜壽, 우리들 기쁨의 목숨, 그 목숨들의 이야기는 아닐런지 작가에게 조용히 고개 들어 여쭙고 싶다. 삶이 구질구질할 지라도 이토록 구구절절 이야기를 펼쳐낸 당신의 '뜨거운 피' 만큼은 누구보다 멋지고 아름다웠다고.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6-09-05 14: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9-06 13: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어느 인문학 강연에서

왜 사는지를 묻는 것 보다는 왜 죽지 않는지를 물어 보는 게 빠르다는 얘기를 들은 적 있다.

나는 이 거꾸로 방식이 답하기 간단치 않은 거의 모든 류의 질문에 유효하다는 생각이다.


왜 같이 사느냐 보다 왜 헤어지지 않느냐에 딩동~

왜 결혼을 하느냐 보다 왜 결혼을 하지 않느냐에 딩동~

왜 애를 낳느냐보다 왜 애를 낳지 않느냐

왜 다니느냐보다 왜 그만두지 않냐...

 

생각보다 무언가를 하지 않는 이유는 의외로 간단하고 사소하다.

아주 작은 부정은 아무리 큰 긍정도 품을 수 없을 때가 있기 때문이다.

 

친구 어머니는 내가 죽으면 이 놈의 집구석 청소할 사람이 없어서 죽을 수 없다고 하셨다. 우리 시대 엄니들이 대개 그러하듯 자신의 희생과 역할에 대한 필요성이 곧 그들의 삶이자 목숨과 같은 것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이 부분에서 늘 숨이 막혀오는 답답함을 감지하곤 한다. 그렇다면 아버지는? 아버지는 왜 사셨을까... 아니 왜 죽지 않으셨을까... 어쩌면 죽네 안죽네 사네 못사네 따위 입 밖으로 낼 필요도 그럴 여유도 없었기 때문은 아닐까...

 

연휴동안 책 몇 권을 들척거렸다. 집중해서 각 잡고 정독한 것이 아니므로 그야말로 성의없이 책장을 넘기다 말았다가 정확할 것이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리모컨보다 책장에 더 신경이 쓰여 꽤 무거운 시간들을 보내었다. 안 그래도 늘 이맘때면-연초부터 꽃피기 전까지-심리적 상중이라-내 아버지는 1월에 어머니는 3월에 돌아가셨다. 그래서 2월에 굳이 웃으며 룰루 거리기 귀찮아 어차피 오지 않은 봄, 춘삼월까지 꽃피기 기다렸다가 꽃잎이 떨어지려할 무렵부터 마음을 바꾼다.-경건하고 엄숙한 멘탈을 유지하고 있기는 하다. 그런데 근 십년 이상 아버지에 대해 깊고도 넓은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이 결론은 아버지 살아생전에도 나는 아버지에 대해 무언가 알려고 한 적이 없었다는 기억으로 마무리 되었다. 보다 확실한 증거로 나는 아버지에 대해 한 줄도 정확히 쓸 수 있는 정보가 몇 개 없었다. 창피하게도 호적등본이나 주민등록 초본에 적혀있는 열 몇 줄 객관적 사실만큼도 모르는 자식이었다. 그에 대해 알고 있는 어린 시절 에피소드나 극적인 스토리도 들었는지 버렸는지 결코 문장으로 엮을 만큼이 되지 않았다.

 

2016년 이상문학상 수상작 김경욱의 ‘천국의 문’을 읽으면서 급작스레 소환된 아버지의 죽음이 너무나 새삼스러웠고 김훈의 ‘라면을 끓이며’를 읽으며 나도 살면서 한번은 아버지에 대해 글을 쓰고 싶다는 꽤 낯설은 욕심을 보았을 뿐, 나는 아버지에 대해 단 한글자도 글을 쓸 수가 없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고 내가 돌봐야 할 사람이 있다는 건 왜 사는지, 즉 왜 죽지 않는지에 대한 답이라 할 수 있다. 사랑하는지 하지 않는지의 차이는 그 대상을 알고 싶어 하는지 아무것도 궁금하지 않은지의 차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좀 더 상대를 알려고 하는 목적은 그 사람의 기쁨과 즐거움, 그러니까 그의 행복에 기여하고 싶은 내 욕심을 의미할 것이다. 알려고 하지 않는다는 건 더 이상 사랑하지 않겠다는 의지인 것이다.

 

아버지를 알려고 하지 않았다.

아버지를 알고 싶지 않았다.

어쩌면 미미하게나마 알고 있는 사실조차도 잊어버리고 싶어 했다.

 

 

여자가 대학생 때였고 현대시의 이해인지 감상인지 하는 제목의 교양수업시간이었다. 낮게 깔리는 부드러운 목소리가 매력적이던 젊은 강사가 여자에게 어떤 영시를 낭독하게 했다. 가스오븐에 머리를 들이밀어 자살했다는 한 여자 시인의 작품이었다. ......(중략)

 

“걱정 말아요, 아버님께는 비밀로 할 테니.” (중략)

 

여자가 끝내 내뱉지 못한 구절은 이랬다.

“아빠, 아빠, 이 개자식.” (중략)

 

그리고 문제의 시는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진짜 마지막 행은 이랬다.

“아빠, 아빠, 이 개자식, 나는 다 끝났어.”

-37p

 

 

돌아보면 아버지가 남은 생을 강렬히 열망했을 시절, 나는 그가 어서 생을 마감해주길 바랬다. 그의 삶이 끝나야 비로소 내 인생이 새롭게 시작될 것처럼.

 

1910년에 태어나 울분과 절망의 세월 동안 소설가로 살다 가셨다는 김훈의 아버지. 1948년생으로서 내 아버지뻘 되는 김훈 작가의 아버지가 새삼 가여워져서 나는 어쩔 줄 몰라했다. 김훈의 ‘라면을 끓이며’에는 예전에 읽었던 글들도 있었고, 어떤 내용일지 모르지 않았기에 그야말로 아무생각없이 책장을 넘겼다 할 것이다.

 

 

 

아, 젊은 내 아버지는 망해버린 조국에 대한 그리움에 흐느끼면서도 조국이라는 사슬에 얽매여 칭칭 감기는 운명을 저주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남긴 이 문장을 읽으면서, 나는 가엾은 내 아들과 같은 젊은 아버지를 안아주고 싶었다. -36p

 

내 아버지는 공회전과 원점회귀를 거듭하는 한국 현대사의 황무지에 맨몸을 갈았다. 그는 비명을 지르고 좌충우돌하면서 그 황무지를 건너갔다. 건너가지 못하고, 그 돌밭에 몸을 갈면서 세상을 떠났다. -37p

 

아버지의 관이 떠내려 갈 때 나는 내 아버지와 같은 삶을 살지 않기로 작심했다. 내 아버지가 조국이라는 운명을 저주했듯이 나는 내 아버지의 시대로부터 벗어나야 한다고 다짐했다. 그러나 그것이 가능한 일이었을까? 너무나 슬퍼서 조국을 버리고 싶었다던 내 아버지의 젊은 날의 글을 읽으면 지금도 나는 목맨다. -46p

 

 

김훈은 자신의 ‘아버지와 그의 시대를 긴 글로 써보려는 계획을 가지고’있다 했다. 그러나 그의 ‘시도는 여러 번 실패하였고 지금은 파지만 쌓여’ 있다고 했다. 그가 실패를 거듭하는 까닭은 ‘아버지의 삶의 파탄과 광기, 그의 꿈과 울분과 절망의 하중을’ 스스로 감당하지 못하기 때문이라 했다.

 

나는 내 아버지가 어떤 시대 어느 정권 아래에서 정확히 어떤 일로 밥을 먹고 살았는지 알지 못한다. 그의 꿈이 무엇이었으며 무슨 일로 좌절과 절망을 겪었는지도 아는 바가 없다. 그의 국적과 나의 국적이 같고 심지어는 적어도 삼십년 정도 같은 집에서 살았다고 서류상으로도 확인되고 있건만, 사실이 그렇다.

 

우리라는 ‘보편적’ 국민과 ‘개별적’ 개인의 삶에서 우리는 과연 아버지라는 '불가학적' 역사를 부정하고 망각해도 되는 일일까. 아니 그러고도 아무렇지 않게 아버지보다 더 아니 최소한 아버지 만큼은 아니게 살아낼 수 있을 거라 믿는 걸까. 우리는 어쩌면 우리 시대 아버지의 많고도 다양한 울분과 절망을 잊어버리고 지워버림으로써 그들을 감당하려 했던 건 아닐까.

 

연휴 내내 책장을 들추고 이책 저책 집었다 놓았다를 하면서 우리의 아버지들을 그려보았다. 언젠가는 반드시 그려내야 하는 순간이 도래할지 모르고 그저 스쳐 지나가기만 했던 내 무지와 무심함에 눈을 질끈 감는다.

 

아버지가 잘 기억나지 않는 분들에게 추천한다.


댓글(3)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6-02-11 18: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CREBBP 2016-02-11 18: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글 잘 읽었습니다.저도 김훈님의 아버지를 향한 저 표현 `온 몸을 갈았다`가 잊혀지지 않아요. 우리의 아들들이 아버지가 될 어떤 미래가 이제는 우리의 아버지들이 맨몸으로 갈았던 그 시대보다 나아질 지..

[그장소] 2016-02-11 19: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좋은 글 ㅡ잘 읽고 갑니다.